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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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342쪽)

작가 '이민진'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유산이 매우 힘겨운 투쟁의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반드시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의 삶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어떤 '고통'에 관하여 쓰겠다는 작가 '이민진'의 결연한 의지만큼이나 소설 『파친코』는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나보다 이전 세대의 일이고, 주 배경 또한 한국이 아닌 일본이지만, '영자'에서 '선자', 그리고 '노아'와 '모자수'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독자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들이 우리와 '고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고향'은 "마법사가 외우는,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보다 더 강력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와 강력하게 엮인 '선자'의 가족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선제 조건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느닷없는 위기가 번번이 찾아오고, 전쟁과 가난은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을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비스킷 부스러기' 같은 하잘것없는 일상을 우리는 권태로움으로 인해 종종 무너뜨리고 싶어 했지만, 그 사람들은 고개를 처박고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사소한 일상을 아주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순진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성실한 노동자들을 떠올리면 전쟁과 제국주의는 교과서적인 이론보다도 훨씬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파친코』에서 놀라웠던 것은 작가 '이민진'이 한 민족의 고통과 서러움을 서술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각각의 심리를 생생하고 상세하게 서술하되, 되도록이면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선자'는 영도에서 거주하던 시절에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선자'의 믿음은 안타까울 만큼 순진무구하고 어리석었다. 애달프게 '한수'를 기다리던 '선자'를 생각하면, '선자'를 '현지처'로 만들려던 '한수'의 계획에 우리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장 어디에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감정만이 오롯이 남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한수'에게 화가 나서 씩씩대고 있는데 여기에 맞장구를 쳐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발짝 물러나 『파친코』의 세계관 전체를 조망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나는 너무 많은 감정 소모를 하지는 않은 채로 책을 읽어 나가면서 캐릭터 하나하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물론 이해나 용서는 별개의 일이지만 말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11쪽)

과거의 고통에 대하여 작가 '이민진'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자'와 '경희', '요셉', 그리고 '선자'의 아이들은 자기 연민에 몰두하지 않았다. 즉 역사가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뭉개버렸는지를 셈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감정에 침잠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리는 대신에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자신에게 몇 푼이 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불평은 잠시 접어두고, 좀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들은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 쪽에서는 추상적인 이념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지만, '선자'와 가족들에게는 살아남는 일이 급선무였다. 어째서 그들은 조국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일과 거리를 두는지 의문스러울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죄로 끌려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이삭'과 교회 사람들을 떠올리면, 일단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요셉'의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잃을 만한 것이 많은 나이가 될수록 이전 세대의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주변의 사상을 내 머릿속에 그대로 옮겨 심고, 필요한 때가 되면 그저 따라서 외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적진을 파고들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실제적인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때가 오면 이제껏 해오던 상상과는 달리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얌체 같던 어른들의 얼굴을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내가 이전 세대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막아선다.

경희는 선자가 막 오사카에 도착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그때 선자는 너무도 무력해 보였고 혹시 길을 잃기라도 할까 봐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선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든든한 사람으로 보였다.(214쪽)

소설 『파친코』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도' 밖을 벗어나 본 일이 없는 '선자'는 '오사카'라는 대도시로 와서 '요셉'의 아내인 '경희'를 만났다. 그녀들은 꾸준하고 착실하게 돌봄 노동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시절에는 밖으로 나가 사회에서 일 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냈다. '경희'와 '선자' 이외에 '선자'의 어머니인 '양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하숙을 치면서 남편 '훈'의 빈자리를 거뜬히 메우며 '선자'를 올바르게 키웠다. 『파친코』 속 여성들은 전쟁을 버텨낸 까닭에 강인하고 독립적이었으며, 하나의 팀으로 일하면서 강력한 시너지를 내었다.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또 꿋꿋하게 밀고 나아가는 '경희', '선자', 그리고 '양진' 등의 여성들은 『파친코』의 세계관을 이루는 주축이다. 이제껏 1권만을 읽었을 뿐이고, 나는 그녀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외유내강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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