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그 단어를 정의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릴 적 매일 쓰던 일기처럼 친숙했던 ‘에세이‘는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자기 확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이고, 더 나아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에세이‘라는 장르는 한때의 유행 같은 얄팍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타인의 사적인 일상 속에서 나는 익숙한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었고, 삶은 끝끝내 견딜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누군가는 ‘에세이‘를 쉬운 장르로 가볍게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지만, 나는 늘 ‘에세이‘가 어려웠다. 특히 ‘에세이‘ 식의 글을 써야 할 때가 그랬다. 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때도 일기 쓰는 일이 제일 곤란하게 느껴졌다. 집과 학원 사이를 오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흥미로운 포인트를 잡아내라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달리 친구들은 글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아도 막상 써낸 글들을 읽어보면 하루하루를 서로 다른 즐거움으로 기록하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최후에 선택한 방법은 되지도 않는 상상을 현실인 것처럼 지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진짜라고 믿으면서 손이 저리도록 연필을 꽉 쥐어가며 썼다. 예를 들면, 좁아터진 동네에서 스무 명의 친구들과 단체 줄넘기를 하였습니다, 같은 일상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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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은모든‘과 ‘조진주‘의 글 속에서는 스스로의 잘못도 아닌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기를 종용 받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피해를 입은 쪽이 사과를 하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는 편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을 거라고 우리는 늘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역시 ˝사과를 주고받을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 뻣뻣하게 구는 ‘현지‘의 태도가 좋았다. 미숙한 어른들을 다그치지 않고, 더 어른스럽게 모든 일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내보여서 마음이 저릿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우리는 굽히지 않고 빳빳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의 핍진함으로부터 짓눌렸던 마음이 「501호의 좀비」에서 해소되는 것도 같았다. 한편으로 가해자의 죽음이 완전한 대안은 아니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세랑 작가의 글처럼 어떤 죽음은 가해다. 죽음으로 501호 좀비의 위치성이 피해자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인) 죽음을 (육체적인) 죽음으로 대갚음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스친다. 그렇게 찝찝한 세상을 여태 살아가고 있는 건 「둥둥」에서처럼 무결한 사랑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이유리의 작품에서도 결국 우리는 주체적인 입장을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붙들고 싶은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할 때도 있다.

‘소설‘의 느낌은 ‘리뷰‘까지 이어진다. 여성과 흑인, 퀴어로서의 삶은(작가 최지은, 김병운은 각각 ‘임신 중지‘와 ‘성별, 인종, 성 정체성‘에 관한 작품을 읽고 보고 썼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종종 곁으로 내몰린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 김병운은 드라마 포스터의 문장을 인용한다: ˝What if you could rewrite the story?˝. 하나의 문장을 통해 ˝내가 보고 싶고 쓰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건 바로 이런 거라는 확신˝에 나 또한 고양되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이곳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야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른다. 비로소 그때 우리가 온갖 이유로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현실과 그것을 뒤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분명한 확신을 기록하기 위해서 ‘에세이‘만큼 좋은 장르가 또 있을까. 정말이지 완벽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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