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는 전에 없던 짜릿함을 느꼈다. 작가와의 공명, 그리고 그로 인해 얻어진 나의 과거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내가 정말 책 한 권을 모조리 베껴 버리고 싶도록 부추겼다. <데미안>이 어린 시절 성장과 함께 수반된 불안을 묘사한다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어른들에 의해 짓밟힌 어린 영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간다. 반쯤의 사회인으로 성장한 ‘한스 기벤라트‘의 짧은 사회생활을 끝으로 이 소설은 막을 내린다. 자본 질서에 편입되기까지 ‘한스‘가 바라는 것은 오직 과거로의 회귀다. 유년 시절은 이미 끝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한스‘는 그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고, 매 순간마다 괴로워했다. 이쯤에서 나는 영화 <작은 아씨들>을 떠올렸다. 영화 속에서 ‘조 마치‘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이대로 끝났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울며 말한다. 당시에는 해당 대사를 마음속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는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말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한동안은 ‘유년 시절의 종말‘을 곱씹었다. 과거가 분명히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다시 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유년 시절이 끝났고, 그로 인해 슬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아직도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온 고착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기, 삶의 수레바퀴 아래에 짓눌린 달팽이 ‘한스 기벤라트‘가 있다. 나는 소설의 앞부분부터 그가 위태롭다고 느꼈다. ‘한스‘ 스스로 위기를 감지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자신의 성과에 기쁨을 느꼈다. ‘한스‘에게 불안을 감지한 건 나를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이 경험한 정신적 박탈감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짓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달려나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놀라울 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한스‘가 이내 곧 괴로움을 호소하고 세상과의 불화를 견디다 못해 연약해지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직감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을 통해 얻어낸 통찰에 가깝다.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263쪽)˝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를 통해 작가 본인이 어린 시절에 대해 얼마만큼의 분노와 억울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런 그가 어린 시절의 아픔이 ‘죽음‘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지워준 짐의 무게를 그들에게 똑똑히 알려야 하고, 삶의 항로가 본인의 흥미에 따라 수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물론 부모가 욕심을 버리기란 쉬워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침묵이 강요될 수 없고, 더 이상의 ‘한스‘가 부모의 손에 의해서 생겨나서는 안된다. 이제까지 종종 부모의 관심으로 간주되었던 행동들이 사실은 아이를 홀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음을 <수레바퀴 아래서>는 일러주고 있다. 수많은 ‘한스‘가 윗세대의 ‘기벤라트‘와 불필요한 소모적인 싸움을 그만두게 되기를, 기성 사회가 ‘엠마‘와의 관계만큼 상호 의존적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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