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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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관계를 어떤 단어로 압축해서 부를 수 있을까. ‘애증‘이라고 부르자니 너무 단순하게 느껴진다. 다른 시대로부터 비롯되어 같은 성별을 공유하는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너무 들러붙어 있다. 그들은 각자의 과거와 미래에게 자신의 꿈을 강요한다. 상대를 자신의 삶인 것처럼 감각하고야 만다. 이렇게 가까운 사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소설은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모녀 관계를 규정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에 시달린다.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그녀가 바라는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세우면서도 나는 완전히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엄마에 관한 글을 읽는다. 자신의 결핍을 내게서 채우고자 하는 그녀의 욕심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홀로 짊어지려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자꾸만 책장을 넘긴다. 하지만 20년이 넘도록 불가해한 어미로서의 삶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엄마에 대하여‘ 밝혀내려고 했으나 가보지 못한 시간은 내가 그녀를 헤아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딸 ‘그린‘의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채로 정상적인 궤도로의 수정을 울부짖는 그녀에게 나는 자주 분노하고, 도대체 어떤 것을 ‘정상성‘과 ‘평범함‘으로 부를 수 있는 거냐고, 그것들의 기준은 누구에 의해서 정해지느냐고 묻는다. 그녀에게 명확한 답이 없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녀의 무지를 비웃고 싶은 욕구를 내리누를 수 없다.

엄마는 늘 내게 ‘독특하다‘라는 말을 했다. 침묵과 순종의 태도를 배우고 자란 그녀와 나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벌어져 갔다. 나는 ‘인권‘이라던가 ‘자유‘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싸움에 적극적으로 휘말려서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나를 엄마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나의 자발적인 참여는 못마땅해 했다. 그러니까 딸 ‘그린‘과 ‘엄마‘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세대나 성별을 뛰어넘어 세대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 우리 모두에 관한 작품이다. 사실 우리들 사이의 다름은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곳저곳에서 지적되었다. 절대 극복되지 못할 어떤 것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서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조금 비켜서서 두각을 드러낸다. 엄마와 딸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면서도, 엄마는 딸의 서사에 의해 조금씩 변동이 일어난다. 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까지 지켜내려던 ‘세상일‘을 엄마도 더 이상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131면)˝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시시한 비난과 조롱을 피하자고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162면)˝으로부터 멀어질 결심을 세운다. 딸애가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얻게 될 ‘수치심‘과 ‘자괴감‘을 가장 못 견뎌하던 엄마로서는 꽤 극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책을 다 읽고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딸에 대하여>에 나온 사람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의 이름이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에서 엄마의 이름이 거론되었던가? 아, 어떡하지. 모르겠다. 그런 나한테 화가 나면서도 꼭 그게 ‘엄마‘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유의 이름보다도 하나의 공통된 호칭과 업적으로만 기록되는 여자들. 그녀들에게는 이전의 삶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집스럽게도 ‘엄마‘로서의 인생만 살아남는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은 하나의 단어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은 채 묵묵히 이어진다. 나와 함께 싸워주지 않는 엄마를 종일 미워하다가 또 그녀와 비슷한 엄마가 될 내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쓴다. 엄마, 엄마, 하고 달려온 딸애에게 자꾸만 안 된다고, 말하게 될 나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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