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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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은 1980년대에 머물렀다. 탑처럼 쌓아 올려진 억울한 시체들을 보고 울지 않기 위해 입을 앙 다물었다. 중요한 순간에 싸움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해야 할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주저 않지 않으려고, 이 작품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마주하려 애썼다. 울부 짖으며 감성에 호소하기보다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나라'와 맞서고 싶었다.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되도록 현장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던 어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 거대하고도 모호한 관념과 대립각을 세우려고 했다. '동호'는 '나라'가 무엇이느냐고 물었다. 글쎄,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스무 해를 넘게 그 공간 속에서 존재했는데, 나는 '국가'라는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곳은 나의 존재를 입증해 줄 부모와도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윗세대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소년 '동호'에게 이것이 무어라고 가르쳐주면 좋을까.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어떤 부분을 공략하라고 귀띔을 해주어야 할까. '동호'보다도 한참을 어른인데도 내가 그를 구해낼 수 없어서, '나라'에 대한 생각을 곱씹을수록 두려움이 밀려와서 몹시 슬퍼졌다.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막강한 상대와의 대적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도청'에 남았다. '희생자'로 불리지 않기 위해 쏘지도 못할 총을 들고, 누군가를 지켜내려던 젊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정의, 인권, 민주주의... 그런 추상적인 개념들에 자기 나름의 소신을 덧붙이고 있었을 어린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짓밟혔다. 이게 정녕 내가 지금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진상이던가, 믿을 수 없어 책을 읽는 내내 벌벌 떨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일이 어떻게 거리낌 없이 행해질 수 있었는가. 광주에 새겨진 슬픔은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같은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우리는 광주, 제주도, 관동과 난징, 보스니아, 모든 신대륙의 눈물 자국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날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작가 한강의 표현대로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잔인성은 극복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일까. 그것이 내 피 속에 들끓고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생명에, 내가 사는 세상에 잔혹하게 굴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행동으로 세상의 온갖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의 따스함으로 녹아내린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평생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또 다른 봄, 여름, 가을을 살아간다. 하지만 저기에 그날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눈 더미에 파묻힌 내 발이 있다. 그들이 물어온 인권과 자유 덕분으로 내가 온전하게 여기 서있을 수 있다. 세상은 전처럼 어두워지진 않을 것이고, 나는 또 밥을 먹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온전한 잠자리에서 잠이 들 것이다. 수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모나미 볼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절반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관념을 위해 떵떵거리며 소리치고, 피를 흘리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내가 순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내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은 딸만큼은 자신이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대학에 가보기를 바라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고,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자신을 불태운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며, 대통령의 독단적 행위를 눈 감아 주지 않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이나 칼 이외에 각자만의 도구들로 세상의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모든 이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대신한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은 채로 나름의 무기를 갈고닦으며 나아가고 싶다. 허망하게 죽으리란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더 약자인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들과 같은 순수한 열의를 가진 어른으로 영영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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