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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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는 1977년과 201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어 '김유경'과 '김희진'이 공유한 경험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조망한다. 두 개의 소설로 1977년의 사건은 좀 더 촘촘하게 엮어지고,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은희경 작가의 이번 작품에는 공감 가는 문장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위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자꾸만 곱씹게 되는 묘사들이었다. 1970년대를 살았던 독자라면, 또한 여성이라면 한 번씩은 마주쳤을 법한 캐릭터들과 감정들에 관한 서술은 더없이 훌륭했다. 이래서 다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읽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책을 그리 자주 읽지 않는 독자에게도 이 책만큼은 권할 수 있다. 1977년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2010년대에 대학에 다닌 여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갖가지 매력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나는 친숙함을 느꼈다. 특히 주 배경이 되는 기숙사에 대한 묘사 또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했으며, 공감을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했다. 소설 속 화자인 '김유경'이 살고 있던 기숙사에서는 온갖 루머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퇴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소문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은 기숙사는 "'다름'과 '섞임'의 세계"이고, 이곳에서 "다수에 끼지 않는 것이 열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모아놓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테다. 이는 내가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경험해본 바 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의 표정과 농담으로 던진 말들 속에서 나는 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각종 루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타인에게서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에서 197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보여줄 때 정말 뜨악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들이라면 교과서로만 접해왔는데,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 개인들의 경험으로 여기게 되다 보니까, 더욱더 마음에 와닿았다. '김유경'은 늘 회피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정말로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리 속에 끼어들어 남들과 비슷해 보이는 것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피도 선택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치는 악이 될 수 있다"라는 소설 속 말도 맞다. 독재자의 지배 아래에서 누군가는 회피하지 않고 맞서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만큼의 민주적인 세상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들이 끝끝내 눈앞에 닥친 시련을 외면하려고만 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수감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단지 내가 사회를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김유경'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을 욕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상황이 현재와는 다르지만 그 속에서 여성들이 받던 차별은 시대를 뛰어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지성이든 열정이든 최성옥이 가진 것은 죄다 자신의 사유재산으로서 자기를 보필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성옥'의 고시생 남자친구와 팔려가듯 하는 결혼,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들. 대학교에 둘이 입학할 경우 남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자퇴해야만 했던 여성들. "못 가진 사람과 여자들에게 불리한 세상에서 그 둘 다에 해당되는 처지인 만큼 늘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당부"는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불공평한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여성이 아니듯이 '남성'이라는 단어 아래에 모든 남성들을 보편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성들이 존재하고, 못 가진 여성들이 어떤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은희경 작가가 이를 다시 꺼내준 것이 고마웠다. 현 여성들은 팔려가듯 결혼하는 일이 적고, 대학교에 가는 일을 남자형제에게 양보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를 세상이 나아졌다고 기뻐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133p, <아메리카나>)"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빛의 과거> 속 1977년도에 갓 신입생이었던 이들의 청춘이라는 '빛'은 이젠 과거가 되었다. 서로 다른 곡선을 그리던 인생은 이제 비슷해졌고, 같은 내리막을 향해 걷는 처지가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나은지 뽐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나는 지금 '빛'으로서 궤도를 그리고 있지만, 끝내는 앞서가던 선배들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그 빛을 잃었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놓쳐버린 빛이 자꾸만 아쉬워서 오늘도 친구들과 "그때가 참 좋았지", "다시 돌아가면 아주 방탕하게 살아야지"와 같은 회한의 한숨을 내쉰다. 이미 내 뒤에 새겨진 '빛의 과거'를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나에게 그날은 그런 것들로 기억된다.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으로.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 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판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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