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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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군의 품에서는 무군의 냄새가 났다. 이게 무군의 냄새구나. 나는 그에게 안겨 그의 냄새를 한참 맡았다. 내일이면 정말 괜찮아질까?무군과 같이 떠나는 것이 즐거워지고?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어린 연인의 품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p21-22)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에덴에 남겨진 단 한명의 남자와 단 한명의 여자 같은 경우,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고 절대적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유일하게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낯익은 상대와 함께함으로 그에게서 느끼는 안정감과 친밀감, 의지하고 싶은 감정......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p32)

-나는 무군과의 관계를 허락받기까지 겪었던 가슴앓이가 서러웠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머니마저 반대를 멈췄다는 것이, 그렇게 약혼이라는 고리타분한 카드에 무군과 엮이게 된 스스로의 운명이 야속하고 슬펐다.(p70)

-아니야, 난 즐겁지 않아. 이건 그냥 행위일 뿐이고, 무군이랑 같이한 다른 것들 모두 사실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왜?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 바보 같은 생각은 교활하고도 나쁜 군주처럼 내 마음을 오래도록 주물럭댔다. (후략)(p107-108)

-(...)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 잡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걸으면 그 시선도 따라왔고, 내가 멈춰 돌아보면 시선은 숨어버렸다. (...) 그저 조용히 은밀한 곳에서 나와 함께 걷고 싶어할 뿐인 것 같았다. 그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친절함과 따듯함이었다. (...) 누군가의 심장이 툭툭 뛰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것은 끝난 사랑에 예의를 표하는 진실한 고백이었다.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안다. 무군, 그만큼 사랑을 잘하는 사람은 사실 흔치 않다는 것을.(p191)


책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을 읽어보면 참, 상아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일지 깊이 느껴진다. <천진 시절>은 뭐라 불러야 할까? 단순히 여성서사나, 탈향서사라던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그렇게 어느 한가지로 묶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이야기여서, 그러니까 정말 인생의 한 부분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첫 장을 다시 읽어볼 때의 마음도 그렇다. 젊은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정숙과 연이 다시 닿았을 때, 상아가 느꼈을 것은 마냥 반가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게 이제야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발췌한 부분은 희한하게도 모두 무군과 관련된 것이다. <천진 시절>을 정리하려 하면 사랑, 사회 진출의 욕망, 탈향, 타자같은 단어들이 생각나는데 그 중에 나는 사랑에 대한 문장들에 많이 공감이 되었다. 정말로 그 시대에, 남성을 매개로 해서 탈향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었던 시대에 무군과 나누었던 감정은 사랑이 맞았을까? 사랑으로 착각하고 마는 것은 그 시대 여성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쯤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딱 잘라 냉정하게 말하기에는, 상아와 무군의 젊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롭고 흥분되는 감정들에 온 몸을 맡기는, 어쩌면 젊음의 치기 덕이었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이겠지만 그 감정의 아름다움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주인공들이 조선족이었다는 것이 정말 새로웠다. 서울과 중국을 넘나드는 이 소설의 배경에, 대체 상아라는 처자는 어느 나라의 처자인 것인가... 하고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그러던 와중에도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 존재를 지우고 있었던 것 같아 머리가 띵했고 조선족이 주인공인 소설은 이렇게나 새로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관한 설화(특히 상아)는 처음에는 너무 낯설어서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냥 똑같은 인간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난 어쩌면 지금 '천진 시절'을 지나가는 중이다. 중국의 천진이 아니라 상아가 천진에 살던 그 어린 시기 말이다. 수없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기회들을 잡거나 놓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천진 시절>의 상아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너무 많은 기회가 열려있는 시기이므로 많은 것을 놓치겠지만, 그리고 실수도 많이 하겠지만 그 때의 내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아가 마지막에는 결국 평범한 주부가 되었지만서도, 천진에서 보냈던 젊은 날들은 열정과 치기로 가득했고 아름다웠듯, 젊은 날들에 한 결정과 도전들은 어떤 결과를 낳던간에 빛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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