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비와 세레나데 11 삼양출판사 SC컬렉션
카와치 하루카 지음, 심이슬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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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눈물비와 세레나데> 11권이다. 타카아키와 히나 간의 만남과 애정은 보지 못했지만 스토리를 관통하는 사건과 떡밥들이 가득했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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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1 - S코믹스, JAPAN EXPO 최우수작화상, 최우수장정상 수상 S코믹스
코테리 지음, 정우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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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발이라니 ㅠㅠㅠㅜ 너무 좋네요 ㅠ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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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레스토랑 가자. 上
와야마 야마 지음, 현승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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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정발본이 나왔네요 ㅠㅠㅜ 감사합니다 ㅠㅠㅠㅜㅜ 게다가 카테고리에 '그 남자들의 사랑'이라니...! 진짜 심장 터질 것 같습니다...(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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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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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책을 읽던 때가 시기가 마침 작품의 제목처럼 '춘분(양력으로 3월 21일, 윤년: 3월 20일)'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을 읽을까 항상 고민하던 내게 딱 안성맞춤이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읽게 되어 기뻤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자인 나쓰메 소세키 역시 이 책의 제목, 그러니까 <춘분 지나고까지>라는 이름을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의미 없이 지었다는 거다. 나쓰메 소세키 왈, 작품을 탈고했을 시기가 때마침 춘분이 지난 즈음이라서 그렇다고 지었다고 ㅎㅎ..... 대부분의 작가들의 자신의 작품 제목을 짓는 데 심열을 기울이는 걸 생각하면 소세키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튼, 이 <춘분이 지나고까지>에는 시시한 제목 이외에도 또 다른 사연이 몇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이 작품이 소세키의 꽤 오랜 공백기를 지나 탄생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소세키는 1910년 8월의 어느 날, 병환 차 온천에 방문했다가 그만 각혈을 하며 쓰러진다. 이를 당시 소세키가 묵었던 온천 여관의 이름의 따서 '슈젠지 사건(修善寺の大患)'이라고 한다. 당시 소세키는 새로운 작품을 신문에 개재하기로 했었는데, 그만 슈젠지 사건이 터지면서 미뤄지고 말았다. 이후로도 좀 더 요양한 후에 기존의 생각하고 있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 다룬 <춘분 지나고까지>이다. 이 작품에 담겨있는 두 번째 사연은 소세키의 딸, '히나코'의 일이다. 히나코는 소세키의 다섯째 딸로, 소세키가 정말 귀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나코는 태어난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즈음에 급사하고 만다. 이때 소세키는 정신적으로도 금이 갔다며 괴로워했고, 이는 <춘분 지나고까지>에도 드러난다. 실제로 히나코의 생일이 3월 초순이었고, 히나코가 사망하고 난 뒤 백일제에 소세키가 <춘분 지나고까지>를 완성했으니, 어찌 보면 이 작품은 히나코에게 바치는 진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은 딸인 히나코의 죽음에 슬퍼하는 내용의 소설인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딸의 죽음에 대한 얘기는 중간에 잠깐 나올 뿐, 이 소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일단 <춘분 지나고까지>는 통속 소설의 탈을 쓴 거대한 자아 분투기다. 여기서 '통속 소설'이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것보다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수준의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소설을 뜻한다. 즉, 본 작품에서는 이전의 소세키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단순 호기심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도 그랬지만 초반부에는 조금 당황스럽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게이타로'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이마에 점이 달린 남자의 뒤를 밟는 일종의 '탐정' 역할을 하는 과정이 작품 초반부에 걸쳐 아주 장황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치 '탐정 소설' 같았달까. 소세키 작품 특유의 '자아(에고)'에 대한 섬세한 필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솔직히 소세키를 좋아하는 나도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탐정 소설을 좋아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깊이가 없으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읽어보니, 세상에... 뒤에가 '찐'이었다. 초반부가 게이타로의 뻘짓을 다룬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게이타로의 친구인 '스나가 이치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부터 소세키 특유의 섬세한 정신 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스나가는 사뭇 태평스러운 게이타로와 달리 아주 예민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딱히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기에 별다른 직업 없이 집에만 있다. 하지만 스나가에게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친척의 딸이자 자신과 모종의 혼담이 있는 '지요코'라는 여자와의 관계였다. 사촌 지간이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친하게 지내왔던 둘이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스나가는 부모님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지요코와의 혼담에 내심 불안해한다. 남매처럼 지냈기 때문에 지요코가 도저히 여자같이 안 느껴진다는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스나가는 자신과 지요코의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부부로서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스나가도 지요코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 그러나 소심하며 고집스럽고, 예민한 성격인 자신이 도저히 지요코를 아내로서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한다.


스나가의 이런 불안은 단순 사양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두려움' 수준으로 나타난다. 그는 지요코의 강렬한 성격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것 같다고 여긴다. 도저히 다가갈 용기조차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스나가는 일부러 지요코를 피하기 시작하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렇듯 지요코와의 관계를 통해 점차 스나가의 정신 세계가 드러나는데, 과도한 에고(ego)로 인해 괴로워하는 스나가의 모습은 마치 <행인> 속 '이치로'가 떠오른다. 본인도 이 자아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절규가 인상적이다. 앞의 게이타로의 탐정 얘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달까. 아마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춘분 지나고까지>는 통속적인 소설의 탈을 쓴 소세키식 자아 분투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속세 사람들과 정신적인 사람 간의 차이와 갈등, 그리고 그 안에서 고뇌하는 에고이즘적 인물의 눈물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비록 초반부의 탐정 소설 같은 이야기와 뭔가 뚝뚝 끊기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다소 낯설게 보여도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 보면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스나가가 약간 '회피형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피형 인간은 부모의 무관심과 제대로 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자꾸만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을 말한다. 애정결핍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반면, 회피형 인간은 상처받는 것에 민감해 아예 처음부터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미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트라우마가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버려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런 회피형 인간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서도 회피한다. 승진이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도 고집을 피우며 잘 하지 않고, 되려 '나는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없어'라는 마인드로 도망친 채 그저 공중에 둥 떠다니는, 그럭저럭한 삶을 살아간다. 사회에서도, 자기 스스로에게도 도망친 회피형 인간은 일명 '모라토리엄 인간(사회적 자아(identity)를 확립하고 사회적 책무가 따르는 성인이 되기를 유예(Moratorium) 하는 사람)'이 되어버려 홀로 고립된다.

작중 스나가도 이와 비슷하다. 일단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남들보다 본인의 자아를 심하게 챙기는 편이며, 성인이 되었음에도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직장과 미래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그저 앉아만 있다는 점 등등은 제대로 된 회피형 인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이보다 답답하고 쪼잔한 인물을 없겠지만 한편으론 가엾고 비극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작품을 읽어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마 문단 뒷골목도 들여다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대자연의 공기를 진솔하게 호흡하며 평온하게 살아갈 뿐이리라. 나는 교육을 받았으며 또 평범하기도 한 교양인들 앞에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믿고 있다.

내가 만약 지요코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내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향기 좋은 청주 한 통을 받아도 그것을 마음껏 맛볼 자격을 갖지 못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세상의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내가 보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시인의 특색이고 두려워하는 것인 철인(철학자)의 운명이다. 내가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결과를 생각하고 쓸데없는 근심을 하기 때문이다. 지요코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한 감정이 가슴에서 한꺼번에 솟아나기 때문이다. 지요코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나를 경멸하는 것이다. 나는 또 감정이라는 자신의 무게로 인해 넘어질 것 같은 지요코를, 운명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인이라며 깊이 동정한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지요코 때문에 전율한다.

이치조(스나가)는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안으로 몸을 사리는 성격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이 차례로 침전하여 점점 깊고 촘촘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어디까지 파고들어도 한계를 모르는 똑같은 작용이 연속되어 그를 괴롭힌다. 끝내는 어떻게든 그 내면의 활동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만큼 괴로워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저주처럼 끌려간다. 그리고 언젠가 그 노력 때문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혼자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을 안게 된다. 그리하여 미치광이처럼 지켜간다. 이것이 이치조에게는 생명의 근간에 가로놓인 일대 불행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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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방법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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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서 염세주의(厭世主義)란 인생은 물론 세계 전체를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바라보며, 이에 따른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이자 사상이다. 다른 말로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도 하는데, 거칠게 표현하자면 세상은 곧 거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척 부정적인 주의로 보이는데, 실제로도 염세주의 철학에 대해 너무 비관적이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염세주의 철학의 대표 주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서도 그러한 비난을 가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어 본 나로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비관적인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 철학 자체가 비판자들이 말한 것처럼 마냥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철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삶에 대해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다른 철학에 비해 솔직한 편이랄까. 내가 생각하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는 그의 염세철학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거나 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고통받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철학이라고 본다.

이 책은 총 세 종류의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저서는(<인생을 생각하다> / <삶의 예지>) 쇼펜하우어의 인생철학이 들어간 책이고, 마지막 세 번째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담겨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이다. 나는 아직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하기엔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인생철학이 담긴 두 권의 저서만 읽기로 했다. <인생을 생각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으로 자주 거론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곧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그건 우리 인간에게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을 할 것이다!'라고 다짐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의지는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요구하는 정신으로, 끊임없는 욕망과도 비슷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끔찍한 것으로 바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겐 끝없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항상 외부의 것과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이란 자고로 자기 바로 옆에 있는 건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면서 막상 그것이 사라지면 슬퍼하듯이, 인간은 행복이 아닌 고통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이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바깥 것들에 대해 대부분 실망하기 마련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삶이 괴로운 이유가 의지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의지라는 이름의 욕망의 반복임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행복과 사상들 역시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에 의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괴로움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표정과 행위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권태로도 나타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여러 활동들, 예를 들어 여행이라든지 사교모임, 그 밖의 온갖 여가 행위들도 겉으로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그러한 행위를 하는 동기는 결국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권태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들에겐 지성보다 의지가 더 강하므로, 즉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어쩌다 찾아오는 휴식기, 그러니까 권태가 찾아오면 의지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의지라는 목적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의지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살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어차피 이렇게 주어진 삶에 대해 마냥 불평하기보다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의지의 노예이고, 불행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 특유의 '동정심'이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이야말로 참된 가치라 봤다. 우리가 큰 불행에 처한 타인을 볼 때 동정심이 드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불쌍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왠지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절망했을 때가 있었지...'라고 말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자이지만 그럼에도 마냥 삶을 부정한 철학자가 아니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에게 있어 용기 있는 자, 진정한 천재는 이 고통스러운 삶을 제 손으로 끝내버리거나 끊임없이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그러움과 끈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하고 의지의 거침없는 욕망을 절제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흔히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고들 말한다. 분명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어둡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이 없었다면 반대로 밝은 철학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진정한 철학이란 저 높이 있는 관념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철학이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며 운동과 수면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훗날 그가 니체를 비롯해 '생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쇼펜하우어에게도 한계는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과 너무 자기 고독적, 자기 고립적인 부분이 그렇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앞서 말했듯이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또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 기꺼이 심연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침없는 말빨과 따끔한 조언을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드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직접적인 목적은 괴로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삶에 따르는 괴로움과 세상에 가득한 걱정과 근심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삶의 목적 자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한 개별적인 불행은 예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 P80

인간이나 동물의 세계에서 의지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삶을 의식하지 못하고 생명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냥 흘러갈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주목하고 또 의식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어떤 장애를 받아 충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지를 방해하는 것, 의지를 가로막거나 대적하는 것, 다시 말해 싫증을 일으키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바로 느낀다. 다시 말해, 평안과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괴로움은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 P80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모든 것을 자기와 결부시켜 생각한다.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국가의 파멸까지도 자기와의 이해관계에서 계산해 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만이 참된 존재이고 남들은 단지 그림이나 초상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개인과 그 모습, 그 일생은 오직 자연의 무수한 영혼과 집요하고 완고히 살려는 의지가 갖는 개별적인 허망한 꿈이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한한 백지 위에 의지가 그려놓고 희롱하는 한때의 그림이다. 그것은 눈이 아플 만큼 짧은 순간에 사라져버리며 그 뒤에 다시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 P94

살아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 인척이 되고, 사물의 본질, 끊임없는 유전, 헛된 노력, 마음의 불안,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을 통찰한다. 어디를 둘러보나 괴로움에 가득 찬 인간과 괴로워하는 동물, 끊임없이 열망하고 사라지는 삼라만상을 목격하고, 이기주의자가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을 세계의 고뇌에 밀착시킨다. - P197

동정은 신비롭고 놀라운 것으로, 이성적인 눈으로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엄연히 경계가 있으나 동정의 눈으로 보면 이 경계선이 허물어져 나 아닌 남이 참된 의미의 ‘나‘로 간주되며 자발적인 정의와 순수한 자선은 이 동정을 유일하고 진실한 토대로 삼고 있다. 선망은 자기와 타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높이고 견고히 할 뿐이지만, 동정은 그 장벽을 한층 낮게 만들고 투명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자타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진다. - P195

인생 자체는 결코 비겁해지거나 두려워해질 정도로 고약하지는 않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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