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한길그레이트북스 7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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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결국 인간학이며,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걸 주장했었다. 하지만 너무 기독교에 대한 얘기만 나누다 보니 솔직히 배경지식 없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기보다는 저자인 포이어바흐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기독교 포함한 다른 종교들)'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기독교만이 종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기독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종교의 본질을 다룬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를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 종교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다 읽어 본 결과, <기독교의 본질>보다 이 책을 먼저 읽을 걸 하는 아쉬움과 함께 종교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파격적인 주장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는 <기독교의 본질(1841)> 이후에 작성된 후기 포이어바흐 작품이다. 확실히 후기 작품이다 보니 이전작보다 완숙함이 느껴졌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꽤 쉬웠다. 사실 본 책은 포이어바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민주적 학생회 위원들의 초청으로 1848년 12월 1일부터 1849년 3월 2일까지 주 3회(수, 금, 토요일 저녁)에 걸쳐 시청 강당에서 진행된 강연회 때 했던 만들을 후에 편집에서 엮은 책이다. 이때 강연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교양회'에 속했던 노동자들이 참석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1850년쯤에 강연회에서 했던 연설을 비롯해 자신의 의견을 좀 더 첨부해<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래서일까, 앞서 내가 말했듯이 다른 작품들보다 완숙함이 느껴지고 이해하기 비교적 쉬웠다. 아마도 청강생들과 일반인들을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탄생하면서 종교를 가지게 된 원인과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진다. 그가 생각하길,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은 '종속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종속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인간은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워했으며 자신들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이런 거대한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외심을 품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종교의 첫 시작은 사실상 자연종교이며, 기독교 또한 이런 자연 종교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포이어바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종교의 대상이 자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범신론처럼 신이 곧 자연이라는 동급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인간화'를 시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 자체고 보기보다는 자연은 '인간화'시켜 그것을 이해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을 보면 얼굴은 동물인데 몸은 사람이라든지, 바다의 신이니, 천둥의 신이니 해도 그 모습은 인간인 경우가 많다(심지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사랑이나 질투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도 따로 신을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화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왜곡에 불과하다.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자연종교라는 최초의 입장에서 자연이 인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적인 자연이 아니라 도야되지 않고 미숙한 이성, 환상, 심정이 나타나는 바와 같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에 따라 보려는 걸까? 포이어바흐는 그 이유로 '인간의 한계'를 꼽는다. 아무리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똑똑하고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본질(생물학적 유(류)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인간은 추측만 가능하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과학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선 '내가 이러니까 저것도 아마 나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종교는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두려운 자연이라는 존재를 동시에 인간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고대 종교들을 보면 양이나 소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것 역시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이었던 양과 소를 '신들도 역시 좋아할 것이다'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는 자연이라는 신을 고대 사람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먹고 마실 줄 아는 존재로 여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든다. 정말 자연과 신을 인간화시켰다면 인간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왜 이들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연이 인간에게 공포심을 줬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강해도 자연재해 한 방이면 바로 골로 간다. 거기서 공포를 느낀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인간화시켜 이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사실 자연이 '분노'할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거기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자연의 모습이 인간들에게 더더욱 공포심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연의 배후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신'을 만들어 세웠고, 인간 역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믿고 싶었기에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신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종에 갇혀 답답해하던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신학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신은 인간 자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이어바흐는 위와 같은 고대 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대해서도 폭로한다. 기독교도들은 이런 자연 종교적인 고대 종교와 자신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고대 종교보다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변해갔다고 주장한다. 고대 종교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또 이것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인들은 솔직한 편이지만, 기독교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인간을 '자연'에서 떼놓으려고 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자연 초월적인 존재'을 추구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와 같은 전능자와, 그가 펼치는 '구원'이라는 공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천국이라는, 인간이 기존에 종속되어 있던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질병도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 슬픔, 죽음도 없다. 오직 영생뿐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이게 가능할까? 위와 같은 것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보존 욕구와 자연적 한계에서 벗어나 언제까지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구원이라는 방식을 통해 현세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두고 현실을 내세의 행복을 위한 조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반자연적인 성격은 사제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사제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극단적인 종파의 사제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후손을 만드는 생식능력과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거부한 채 오직 정신만 쫓는 행위인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자연을 초월하고픈 인간의 욕망, 즉, 자연에서 벗어나 자기보존을 하고픈 인간의 이기적인 소망을 대변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성경에서도 보면 '인간이 타락했다'라는 이유로 야훼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죽이는 홍수를 일으킨다. 인간 때문에 자연물 전체가 죽은 것이다. 고대 종교가 자연물인 신을 숭배했다면 기독교는 이런 자연물적인 신을 배척하고 오직 인간이라는 종만을 소중히 여기는 신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예수의 경우 이전의 야훼보다 더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무엇보다 '어떤 죄를 지었든 자기를 용서'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살고픈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이라는 현실에서 유리된 어떠한 존재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기독교적 신을 믿음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싶을 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에 대해 치를 떠는 것도 이런 자연에 종속된,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고 오직 인간만이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습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자연을 도외시하고 인간적인 감성만 따지다 보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본인의 종교적 원칙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등의 현실을 왜곡하는 모습이 당시 교조적 관념론자들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사람들이 이런 종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에 종속된 삶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본 책을 썼다. 기독교의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니체보다 무려 3, 40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끈질긴 연구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비록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많지만 이런 쓴소리라도 있어야지 종교에서 발생하는 비이성적인 잘못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이 믿는 종교가 오직 인간 초월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 역시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포이어바흐의 주장들은 뒤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비판받았음에도 이들 역시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니 이쪽으로도 관심이 있다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포이어바흐에 대한 책이 좀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이번 리뷰를 마치겠다.

자연과 직접적인 교제 속에서만 인간은 치유되며 모든 터무니없고 초자연적이거나 반자연적인 이념과 상상을 벗어던질 수 있다. - P47

신학에서는 성스러운 것만이 진리이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만이 성스럽다. - P55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다. - P63

기독교는 바로 태양, 달, 별, 불, 흙, 공기가 아니라 자연과 구분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주는 힘인 의지, 오성, 의식을 신성한 힘과 본질로서 경배한다. - P66

여러분! 당신들이 말이 완전히 맞소. 나는 나를 비난하는 자들과 조소하는 자들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나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상상된 인간의 본질이란 하나의 난센스이며 관념론적 괴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과 똑같이 또는 여러분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인간의 전제가 되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관계하며 그것 없이는 인간의 실존이나 본질을 생각할 수 없는 본질은 여러분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불과하오!‘ - P66

나의 이론이나 이념은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전제가 되는 본질, 인간의 원인과 근거가 되고 인간의 발생과 존속을 좌우하는 본질은 나에게 신이 아니고, 또 신으로 불리지 않으며 명백하고, 감성적이고, 이중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말과 본질인 자연이다. - P68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리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P69

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게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학과 종교의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본질을 거부할 뿐이다. - P70

‘종속감‘이 종교의 근거이고 이러한 종속감의 근원적 대상이 자연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종교의 제1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공포가 처음으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정신적으로 발달한 민족에게도 최고의 신성은 소나기, 번개, 천둥과 같은 최고도의 공포를 인간에게 일으키는 자연현상이 인격화된 것이다. - P72

유신론이나 신학은 바로 인간을 세계와의 결합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켜 자연을 넘어서는 오만한 자아나 본질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벗어나 있고 초자연적인 본질을 참되고 신성한 본질로 믿는 것과 일치된다. 그러나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자연이나 세게와 결합되고 일치된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 P84

기독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바로 그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소원을 등한시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면서 현세를 망가뜨렸고 신의 도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다. 또한 천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망가뜨렸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부여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진리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부여하지 못했다. - P395

신이란 추상화되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화된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그러므로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단순한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위해 희생한다. 무신론은 이에 반해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위해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희생한다. 무신론은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자연과 인류에게서 박탈해간 의미와 존엄성을 자연과 인류에게 되돌려준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최상의 힘을 흡수해가버린 자연과 인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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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타인을 바꿀 수 없다 -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닌 ‘내 편’으로 만드는 법
코르넬리아 슈바르츠.슈테판 슈바르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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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아닌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방의 모습과 말투, 행동들을 미러링하며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책이다. 너무 상대의 말에 공감해주는 듯한 뉘앙스가 있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옹고집인 내게 있어 유익한 책이었다. 때로는 상대방도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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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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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뭘까?

나는 니체 하면 제일 먼저 그의 대표작이라 일컫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른다. 니체 전문가들 대부분은 초심자가 이 책을 읽는 걸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니체의 작품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큰맘 먹고 읽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문학과 인문학, 특히 철학에 관심이 많은 요즘, 이 두 가지 요소 모두 가지고 있는 책이 어디 없나 찾던 중이라 철학책이면서 동시에 문학 같다는 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로 결심했다.


다 읽어 본 결과 이렇게 재미있는 책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앞서 말한 철학과 문학적 요소를 모두 충족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품은 30살이 된 주인공 '차라투스트라'가 높은 산의 동굴에서 나와 자신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내려감(몰락)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는 첫 장면은 뭔가 예수의 고난과 그 이후 신이 되어 부르심(올라감)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대치되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광대는 물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느낀 고뇌와 생각들을 독백 형식(암시)으로 외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난해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특유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 때문이었는데, 비유하듯이 말하는 짧고 강렬한 문장은 그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쾌감을 준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말이다.


때문에 작중 차라투스트라의 대사들을 읽다 보면 마치 하나의 '생명을 향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가 내내 강조하는 '뜨거운 정오'와 일명 '초인'이라 불리는 '위버멘 (Übermensch)'의 말들 역시 기존의 문학 작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뜨거운 태양의 겉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만져 본 느낌이랄까.


이는 니체가 살았을 당시 상황을 생각해 봐도 파격적이었다.

니체가 살았던 19, 20세기 유럽에서는 일명 '데카당스'라 불리는 사조가 한 번 유행한 적이 있었다. 데카당스는 처음엔 인간의 예술적 심미안을 중시하고 기존에 있던 윤리와 도덕을 타파하는 식의 방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퇴폐주의'라고 불릴 만큼 현실을 도외시한 채 오직 예술만을 탐닉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데카당스를 자신만의 철학으로 철저히 비판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디오니소스적', '아폴론적'인 분류가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역시 이런 니체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거의 절반은 이렇게 현실(육체)을 도외시한 채 오직 예술(정신)만 탐닉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데카당스적 인간 외에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기독교적 도덕 역시 비판한다. 그들 역시 육체를 도외시한 채 오직 정신과 저편의 세계를 중시하니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을 향한 외침'이라고 느낀 것도 위와 같은 니체 특유의 비판 때문이었다. 그는 위버멘쉬라는 이상향적 인간을 내세우며 진정한 사람은 대지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다. 즉,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세상 모든 것에 싫증이 나 저편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거다. 또한 위버멘쉬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정의하는 사람이다. 기존의 도덕을 보면 대체로 신이나 절대적 선이라는 애매모호한 것들을 기준 삼아 거기에 사람들이 따르는 방식인 반면, 니체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정의하고 창조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심지어 선과 악의 도덕적 개념도!).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만약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걸 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것이 곧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위버멘쉬는 개념을 창조해 나가는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다. 한 마디로 위버멘쉬는 고통을 기꺼이, 아니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계속해서 단련해 나간다. 그렇다고 기독교처럼 순순히 고통을 참으라는 건 아니다. 위버멘쉬는 고통을 참는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사처럼 적들을 베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또한 명예를 중시해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게 아닌, 자신은 물론 남의 기준 역시 존중한다. 즉, 내가 이렇고 네가 그렇다면 그래, 인정한다. 만약 내 기준에 불만이 있다면 우리 정정당당하게 대결해서 담판을 내보자, 내가 지면 인정하겠다, 와 같이 말이다. 때문에 책에서도 보면 동지나 이웃이 아닌 적들에게도 친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중 차라투스트라는 내내 '인간은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며,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은 왜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은가?'라며 질책하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도들에 의해 추앙받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역시 '하나의 넘어가야 할 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지를 찬양하고 스스로를 극복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물론, 당시 데카당스적 허무주의로 인해 사람들로 인해 '죽어있다'라고 여겨졌던 세상을 다시 '활기찬 생명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구원의 희망이라기보다는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 세상살이에 절망한 사람, 또는 아직 세상이 두려운 사회 초년생들에게 딱 맞는 책이라고 본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비유적이고 암시적인 내용이 많아 철학이나 문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 매우 어려운 책일지도 모른다. 또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고 해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높은 책이다(솔직히 이 글을 쓰는 나도 혹시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섭다...ㅋㅋㅋ)(나중에 니체에 대해 배우고 이 글을 다시 읽으면 내 스스로도 이마를 '탁'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철학의 흐름과 철학책을 많이 읽어 본 경험이 있다면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다. 

보라! 이 잔은 다시 텅 비려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내려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P54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 P56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러 왔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 그대들 내면에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간청한다. 대지에 충실하라! - P57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을 연결해 주는 밧줄, 심연 위에 걸린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 P60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아직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P63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는, 강하고 참을성 있는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것과 가장 무거운 것을 갈망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내가 짊어짐으로써 나의 강함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 P75

더 이상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지의 머리를 자유롭게 쳐들라! 병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몸과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 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꾸며낸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달콤하고 음산한 독조차도 대지와 몸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별은 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나의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이것이야말로 보다 솔직하고 순수한 음성이다. - P85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가 그것들을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 P91

지혜는 우리에게 개의치 말고 조롱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 즉 지혜는 여인이라서 언제나 용사만을 사랑한다.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아침에는 자부심을 지녔다가, 저녁에는 체념하고 마는가? 삶이란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렇게 나약하게 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짐을 지고 가는 귀여운 나귀들이 아닌가? - P97

가볍고 어리석으며 우아하고 활동적인 조그만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유혹되어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춤출 줄 아는 하나의 신만 믿을 것이다. - P97

내가 보기에 아직 그대는 자유를 꿈꾸는 포로다. 그대의 사랑과 희망을 내버리지 마라! 고귀한 자가 모든 사람에게 방해됨을 잊지 마라! 고귀한 자는 선한 자들에게도 방해된다. 그래서 그들이 그를 선한 자라고 부를지라도, 그러면서 그를 옆에 제쳐놓으려고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반면에 선한 자는 낡은 것을 원하고, 낡은 것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고귀한 자가 선한 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고귀한 자가 뻔뻔스러운 자, 조롱하는 자, 파괴하는 자가 되는 것이 위험하다. - P101

"정신도 쾌락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신의 날개를 잃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정신은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이것저것 갉아먹으며 몸을 더럽힌다. 한때 그들은 영웅이 될 생각이었지만, 이젠 탕아가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영웅은 원망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 P101

선한 자나 악한 자가 모두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런 자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자살을 하면서, ‘삶‘이라고 부르는 곳을 국가라고 부른다. - P109

그대는 새로운 힘이자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제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귀인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지배하는 사상이지, 그대가 멍에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멍에로부터 벗어나도 되는 그런 자인가? 세상에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마지막 가치마저 던져버리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 P127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율법처럼 머리 위에 내걸 수 있는가? 그대 자신이 그대 율법의 재판관이자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 P128

인간은 하나의 시도였다. 아, 많고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 몸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아직 우연이라는 거인과 투쟁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불합리와 무의미가 전 인류를 지배해 온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대지의의미에 충실하도록 하라. 모든 사물의 가치를 그대들이 새로이 정립하도록 하라! 그 때문에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그대들은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P147

그대들은 나를 떠나고, 차라투스트라에게 저항하라! 인식의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왜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를 버리고 그대들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 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 P148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길 한복판에 있을 때이고, 저녁에 이르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하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때 아래로 내려가는 자는 자신이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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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9-0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네긴님.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없다고 느끼셨다니@_@;; 넹?@_@;;;; 싶으면서도 존경합니다. 뱅글뱅글 @_@;;;; 앞부분 좀 읽다가 눈에 안 띄는 곳에 감춰뒀는데-_-;;; 다시 꺼내봐야겠습니다. 오네긴님 덕분에 용기를 내 봅니다. (저는 민음사 버전입니당;;)
 
세기말 풋사과 보습학원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 - 나를 알아가는 시간 365 Q&A
순끼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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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벅으로 이미 구매했지만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내용이나 구성도 좋으니 팬이라면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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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혈맥 2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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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도 읽었다. 어째 회차가 거듭될수록 술술 읽힌다. 특히 주인공 아즈미가 러일전쟁 발발 중에 각종 유명 반전론자와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며 사상적으로 고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중간에 일본 고대사에 대한 얘기가 어려웠지만 이런 고대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부분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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