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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공적 감정 ㅣ 앳(at) 시리즈 5
앤 츠베트코비치 지음, 박미선.오수원 옮김 / 마티 / 2025년 3월
평점 :
우울증은 오랫동안 개인의 생화학적 문제로 여겨져 왔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뇌 속 화학물질의 불균형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치료 역시 개인 내부의 생물학적 이상을 바로잡는 데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만약 우울이 단지 개인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집단학살, 노예제도, 제도적 차별과 같은 집단적 역사 속에서 탄생한 감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를 살펴보면, 원주민, 흑인, 라틴계 공동체는 오랜 시간 동안 식민 지배, 노예제도, 문화 말살 정책, 제도적 인종차별에 시달려 왔다. 그 역사적 억압은 현재까지도 사회 구조와 법, 제도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들은 여전히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관련 치료나 연구조차 부실한 실태를 지적한다. 이들이 겪는 우울은 단지 뇌의 기능 이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억압의 흔적이자 사회적 폭력에 대한 정서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작년 말 비상계엄령 선포를 기점으로, 내란 및 외환 혐의가 헌정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헌법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탄핵을 인용하였다. 이 사태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국민 전체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최근에는 강력한 외환 관련 증거까지 제시되면서 국민적 분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노는 단순한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허탈감, 무력감, 냉소, 심리적 피로를 공유했고, 이는 일명 ‘내란성 질환’으로 불릴 만큼 집단적인 정서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고, 이는 정서적으로 깊은 우울로 이어졌다.
이처럼 우울은 단지 개인의 병적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가 겪는 상실과 붕괴의 감정이며,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정서적 감각일 수 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폭력, 잊힌 역사, 반복되는 억압은 결국 개인의 내면에 스며들고, 그 감정은 ‘우울’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가 대물림된 트라우마를 겪는 방식이나, 한국 사회가 탄핵 정국 속에서 경험한 정서적 혼란은 모두 우울의 사회적 뿌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현상과 궤를 같이하며, 저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정서로서 우울을 바라볼 때 단순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직접 기록한 30쪽가량의 '우울 일지'로 시작하는데, 학자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여러 감정들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외로움과 절망감을 경험했고, 그러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얼핏 보면 우울증이라는 개인적 문제와 치료 경험을 담은 자서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연결된다. 또한 페미니즘 연구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퀴어나 페미니즘 연구에서 감정과 느낌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저자 역시 같은 입장으로, 우울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신적, 정서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이러한 감정을 억지로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로 변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우울이라는 감정 그대로에서 학문적이고 예술적인 잠재력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울이 단순히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연대를 이루고 정치적인 공간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우울감을 단순한 증상으로 보지 말고, 더욱 복잡한 사회적이고 공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볼 것을 권한다. 이런 시각은 특히 우울증을 주로 의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최근의 페미니즘 감정 연구의 흐름과 잘 맞물린다고 설명하며 설득력을 더한다.
이전에 발표한 책 『감정의 아카이브』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저자는 다양한 분야와 자료를 통해 우울의 개념을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낯선 자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일상적인 우울감 속에서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저자의 창의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연결지으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식민지의 역사적 흔적, 사회 계급 문제, 인종 문제, 그리고 퀴어 이론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단지 개인의 내적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과 연결된 공적 감정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 코넬 웨스트의 글과 슬픔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폭력이나 인종주의, 정신적인 충격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특히 '일상적인 인종주의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통해 우울을 인종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우울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주로 백인 중산층의 시각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저자는 또한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욕망과 함께,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우울 모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우울을 단순히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단정 짓지 않으면서도, 슬픔과 회복,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인 생각들에 의문을 던진다. 대학 교수답게 개인의 일기와 학술적 분석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설득력이 높고 매력적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퀴어와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진행하는 공예나 예술 활동을 통해 '습관과 치유'를 논의하면서, 우울을 단지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습관들이 가진 긍정적인 힘을 강조하며 우울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울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적이고 사적인 삶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질문과 감정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예상하지 못했던 희망을 전달한다.
이 책은 단순히 우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해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왜 우리는 늘 지쳐 있는가, 왜 회복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우울을 덜어낼 실천적 방법으로 함께 모여 수공예품을 만들고, 글을 쓰고, 집회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감정 뒤에 가려진 사회 구조를 드러내며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소비해왔는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내란성 질환으로 무기력하고 지친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은 가장 강력한 위로일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위로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무언의 연대를 제안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