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공적 감정 앳(at) 시리즈 5
앤 츠베트코비치 지음, 박미선.오수원 옮김 / 마티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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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오랫동안 개인의 생화학적 문제로 여겨져 왔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뇌 속 화학물질의 불균형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치료 역시 개인 내부의 생물학적 이상을 바로잡는 데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만약 우울이 단지 개인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집단학살, 노예제도, 제도적 차별과 같은 집단적 역사 속에서 탄생한 감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를 살펴보면, 원주민, 흑인, 라틴계 공동체는 오랜 시간 동안 식민 지배, 노예제도, 문화 말살 정책, 제도적 인종차별에 시달려 왔다. 그 역사적 억압은 현재까지도 사회 구조와 법, 제도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들은 여전히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관련 치료나 연구조차 부실한 실태를 지적한다. 이들이 겪는 우울은 단지 뇌의 기능 이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억압의 흔적이자 사회적 폭력에 대한 정서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작년 말 비상계엄령 선포를 기점으로, 내란 및 외환 혐의가 헌정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헌법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탄핵을 인용하였다. 이 사태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국민 전체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최근에는 강력한 외환 관련 증거까지 제시되면서 국민적 분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노는 단순한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허탈감, 무력감, 냉소, 심리적 피로를 공유했고, 이는 일명 내란성 질환으로 불릴 만큼 집단적인 정서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고, 이는 정서적으로 깊은 우울로 이어졌다.

 

이처럼 우울은 단지 개인의 병적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가 겪는 상실과 붕괴의 감정이며,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정서적 감각일 수 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폭력, 잊힌 역사, 반복되는 억압은 결국 개인의 내면에 스며들고, 그 감정은 우울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가 대물림된 트라우마를 겪는 방식이나, 한국 사회가 탄핵 정국 속에서 경험한 정서적 혼란은 모두 우울의 사회적 뿌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현상과 궤를 같이하며, 저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정서로서 우울을 바라볼 때 단순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직접 기록한 30쪽가량의 '우울 일지'로 시작하는데, 학자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여러 감정들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외로움과 절망감을 경험했고, 그러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얼핏 보면 우울증이라는 개인적 문제와 치료 경험을 담은 자서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연결된다. 또한 페미니즘 연구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퀴어나 페미니즘 연구에서 감정과 느낌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저자 역시 같은 입장으로, 우울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신적, 정서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이러한 감정을 억지로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로 변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우울이라는 감정 그대로에서 학문적이고 예술적인 잠재력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울이 단순히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연대를 이루고 정치적인 공간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우울감을 단순한 증상으로 보지 말고, 더욱 복잡한 사회적이고 공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볼 것을 권한다. 이런 시각은 특히 우울증을 주로 의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최근의 페미니즘 감정 연구의 흐름과 잘 맞물린다고 설명하며 설득력을 더한다.

 

이전에 발표한 책 감정의 아카이브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저자는 다양한 분야와 자료를 통해 우울의 개념을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낯선 자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일상적인 우울감 속에서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저자의 창의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연결지으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식민지의 역사적 흔적, 사회 계급 문제, 인종 문제, 그리고 퀴어 이론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단지 개인의 내적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과 연결된 공적 감정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 코넬 웨스트의 글과 슬픔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폭력이나 인종주의, 정신적인 충격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특히 '일상적인 인종주의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통해 우울을 인종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우울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주로 백인 중산층의 시각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저자는 또한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욕망과 함께,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우울 모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우울을 단순히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단정 짓지 않으면서도, 슬픔과 회복,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인 생각들에 의문을 던진다. 대학 교수답게 개인의 일기와 학술적 분석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설득력이 높고 매력적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퀴어와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진행하는 공예나 예술 활동을 통해 '습관과 치유'를 논의하면서, 우울을 단지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습관들이 가진 긍정적인 힘을 강조하며 우울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울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적이고 사적인 삶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질문과 감정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예상하지 못했던 희망을 전달한다.

 

이 책은 단순히 우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해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왜 우리는 늘 지쳐 있는가, 왜 회복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우울을 덜어낼 실천적 방법으로 함께 모여 수공예품을 만들고, 글을 쓰고, 집회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감정 뒤에 가려진 사회 구조를 드러내며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소비해왔는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내란성 질환으로 무기력하고 지친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은 가장 강력한 위로일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위로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무언의 연대를 제안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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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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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역자는 이 책의 원전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이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치와 종교, 사회와 철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가득한 원전의 내용을 일반 독자가 읽기 쉽도록 순한 맛으로 다듬어 내놓았다고 설명한다. 니체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 원전은 말 그대로 결정적인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 예술과 음악의 무대 뒤에서 무겁고 조심스러운 비평을 쓰던 니체는 이 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철학의 정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대의 거물이었던 바그너와 절연하고 정신적 방황을 겪던 시기에 이 책을 썼기 때문에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다. 역설적으로 위기의 순간이 한 인간을 진정한 철학자로 밀어 올린 셈이다. 이후의 작품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크리스트도 모두 이 책을 씨앗 삼아 자라난 철학적 열매들이다.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삶이 고단하다고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고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길을 찾는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당신이 약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정말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p49. 정말 쉬운 길이 있을까?)

 

이 책은 형식부터 범상치 않다. 아포리즘, 즉 짧은 격언이나 단상으로 구성된 문장들이 마치 철학적 스냅사진처럼 나열된다. 때로는 상반되거나 모순적인 말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건 단순히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형식이지만, 니체는 그 틀 안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공격적인 사유를 쏟아낸다. 말하자면 아포리즘은 니체 철학을 담기엔 조금 작지만 그만큼 응축된 진심이 느껴지는 그릇이다.

 

이 책은 자기 극복과 성장, 인간관계와 감정 조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113가지 조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엮었는데, 영역별로 세분하자면 철학, 심리학, 예술, 정치, 종교, 가족, 문화까지 안 건드리는 데가 없다. 한마디로 전방위 조언 종합세트. 표현만 부드럽다 뿐이지 읽다 보면 어느새 정면으로 호되게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인데, 문제는 그게 굳이 부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니체의 날카로운 조언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기존 가치들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새로운 토대를 세우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신박하다. 예를 들면, 니체는 종교를 인간의 나약함이 낳은 허상이라고 본다. 신이 사랑이라 말할 때 그는 냉소한다. 기독교 도덕은 자연의 이치와 충돌하며 인간을 병들게 하는 체계라고 일갈한다. 플라톤이나 쇼펜하우어마저도 형이상학적 환상에 빠진 인물로 평가절하한다. 음악과 예술조차 그의 비판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그 틈에 형이상학적 믿음을 슬쩍 끼워 넣는다고 지적한다. 꽤 무례한 비평 같지만 곱씹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남을 깍아내리지 않고도 충분히 빛나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자시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남의 그림자를 지우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의 빛을 더 밝히는 데 집중하라. 결국 그 빛이 당신을 진정으로 높여줄 것이다.(p145. 타인의 성공을 비웃지 마라)

 

니체의 자유에 대한 시선도 흥미롭다. 그는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가깝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권력 의지라는 본능적 추동력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단지 지배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내적 에너지에 가깝다. 그 말인즉슨,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려는 존재이며 그 본성 속에서 진짜 윤리를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사유는 이후 푸코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권력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을 제외하면 의외로 낭만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초인(Übermensch)’이다. 초인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이 책 이후에 나온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많은 사람이 초인을 어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쯤으로 오해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울퉁불퉁한 근육질과 삼각팬티에 망토 입고 하늘을 날며 악당들을 혼내주는 그런 마블 캐릭터가 아니다. 초인은 기존의 도덕과 관습을 넘어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적인 인간이다. 그는 외부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면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다. 니체는 이 초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당대의 상투적인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수려 했다. 이 개념은 영원회귀사상과도 맞물린다. 지금의 이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며, 그런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바로 초인이다. 영원회귀는 단순한 순환론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을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에 가깝다. 초인은 그 명령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이런 초인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정보, 가치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실은 더 혼란스럽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니체는 그런 시대일수록 더더욱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답게 살아라.”라는 말이 철학의 이름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들린 적이 있을까? 하긴, 나답게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에 고민하지도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자기 삶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까 하는 질문 대신, 이렇게 바꿔보자.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만큼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아마 답은 거의 아닐 것이다.(p224. 악은 여유로운 자의 사치다)

 

물론 초인은 자주 오해받는다. 일부는 이를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상으로 해석하지만, 니체가 말한 초인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타인과의 조화를 무시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초인의 본질이다. 그러니 초인은 영웅이기 전에 참 인간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점에서 최근에 바뀐 대통령이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초인의 모형 아닌가 싶다. 자기 말을 실천으로 보여주던 그의 과거 행정 실적, 사법 탄압으로도 어쩌지 못한 그의 진실성, 국가의 미래 희망을 건설하기 위한 국민적 권력 위임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듣고 판단한 결과이다.

 

또한, 니체의 철학은 개념 놀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삶의 태도를 묻는다. “그래서 너는 대체 어떻게 살 건데?”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니체의 문장을 계속 곱씹게 된다. 초인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책임지는 삶을 통해 다가가는 목표이자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인 나는 니체가 종교를 해부하는 방식에 깊이 공감한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야릇한 쾌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예술가와 작가의 정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그 날카로운 분석에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작고 얇아 손에 쥐기 편하지만 의외로 내용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어 오히려 읽는 내내 긴장과 집중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니체가 철학자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순간을 담아낸 작품이다. 고전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서 오늘의 우리를 마주하게 되고 익숙한 것들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니체가 단지 19세기의 철학자가 아닌 지금, 여기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인생수업 #니체 #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 #위버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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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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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답게 살기가 그렇게 쉬었으면 진작에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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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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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이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다의 반인반어 신 또는 요괴로,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암초에 부딪쳐 죽게 만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사이렌은 오랫동안 파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오디세우스는 이 유혹을 피하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은 채 노래를 듣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배를 무사히 지켜냈다. 아마 호기심에서라도 사이렌의 노래는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의 로고도 바로 이 사이렌에서 따온 것으로, ‘이 커피의 향과 맛이 당신을 유혹할 만큼 강렬하다는 의미를 은근히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자는 사이렌을 우리의 주의력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 비유하고 있다.

 

이 책의 초입에서 헤이즈는 유발 하라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언급한다. 두 책 모두 우리가 집중하기 어려워진 이유를 다루지만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헤이즈는 우리의 주의력이 어떻게 광고나 통신 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에 따라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뉴스나 소셜미디어 같은 미디어 환경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까지 조종하려 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하라리는 좀 더 넓은 역사적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디지털 기술과 정보 과잉이 개인의 집중력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판단력과 민주주의까지 위협한다고 본다. 결국 헤이즈는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문제들에 주목하고, 하라리는 더 큰 틀에서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대 사회는 주의력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터다. 스마트폰, SNS, 각종 뉴스와 알림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한다. 이 책은 우리의 소중한 주의력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진보적 성향의 TV 쇼 진행자로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자기 경험을 통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가 소개하는 심리학 연구와 일상의 경험담은 우리가 매일 느끼는 혼란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책 한 권을 집중해서 읽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일조차 어려워진 현실이 안타깝다.

 

헤이즈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집중력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 우리의 주의력에 대한 소유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산업화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우리의 주의력을 상품으로 바꿨다. 그런데 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주의력은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무엇에 집중할지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기업의 광고나 기술이 대신 정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헤이즈는 주의력을 단순히 무언가에 관심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의식 그 자체라고 본다. 우리가 가진 정신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지금은 수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경쟁 중이다. 그는 주의력을 상품처럼 설명하며, 기술 기업, 언론, 정치인들이 어떻게 우리의 짧은 관심을 붙잡아 돈으로 바꾸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슬롯머신 모델에 대한 분석은 인상 깊다. 소셜미디어는 단순히 주의를 빼앗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사마귀에 기생하는 연가시처럼 아예 사람의 뇌를 조종하듯 설계됐다고 말한다. 짧은 자극, 새로운 정보, 긴장과 해소, 반복되는 패턴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구조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뇌를 어떻게 반응하게 만드는가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흥미롭다. 그는 트럼프를 주의력 시대의 상징이라 부른다. 트럼프는 부정적인 관심도 긍정적인 관심만큼 효과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분노와 논란을 만들어 끊임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런 방식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 더 잘 맞는다. 그래서 사회의 대화는 점점 시끄럽고 산만해진다. 헤이즈는 이런 현상을 주의력 군벌주의라고 표현한다.

검색 엔진이나 SNS 같은 기술 플랫폼은 처음엔 유용했지만, 점점 광고와 의미 없는 정보로 가득 찬 혼란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된 괜찮은 이성 찾기조차 상업적인 광고로 도배된 페이스북이 그 대표적인 예다. 결국, 이렇게 상업화된 관심 경쟁에서는 자극적인 이슈나 화제를 만드는 사람들만 주목받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인물들이 능력보다 주의를 끄는 능력으로 성공하는 모습은 사회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헤이즈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주의력 위기를 과거의 역사적 변화와 연결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는 오늘날 주의력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19세기 신문의 변화 같은 과거 사례와 비교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링컨과 더글러스의 90분 토론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었던 시대를 보여준다. 반면 오늘날 대선 토론은 짧은 시간 안에 상대방의 험담만 쏟아내기 바쁘다. 이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집중력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헤이즈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동이 상품이 되며 인간이 소외됐던 것처럼 주의력의 상품화도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인공지능(AI)이 만든 콘텐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AI가 자동으로 만든 콘텐츠는 깊은 성찰이나 창의적 사고 없이 그저 표면적이고 기계적인 결과물일 뿐이며 이런 콘텐츠는 우리의 사고를 더 얕고 산만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AI를 사용할 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호들갑을 떨고, 경쟁적으로 열리는 chatGPT 사용법 강연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가 처한 이 정보 과잉 시대의 혼돈은 매우 심각하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스스로 주의력을 관리하고 깊은 사고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개인의 실천 없이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주의력을 되찾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작은 실천을 권하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헤이즈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다소 미약하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대신 단순한 전화기를 쓰자는 조언이나 규제가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으로서는 부족하다. 또 일부 내용은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점들이 책의 전체적인 가치를 크게 해치는 것 같지는 않다.

 

헤이즈는 단순히 산만한 주의력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금의 정보 시스템이 우리의 사고방식, 소통 방식, 그리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의력을 지키는 일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의식을 흔드는 큰 힘들과도 맞서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 요즘처럼 집중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 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무엇을 잃게 될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관심비즈니스 #주의력자본주의 #집중력 #사이렌스콜 #크리스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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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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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주의력‘에 이어 새롭게 살펴보는 주의력 자본주의 시대의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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