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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민윤숙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4년 3월
평점 :
지난 오월 , 참으로 오랜만에 명주 고모가 살았던 산청에 다녀왔다. 우뚝한 이 층 한옥은 지금도 건재했다.지방문화재로 등록된 대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집의 유래와 가치가 잘 설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살았었는지는 한 마디도 없었다. (-5-)
제사상 뒤의 병풍에 영휘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명주는 처음으로 남편과 마주 보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문구멍 틈으로, 어둠 속에서, 아니면 눈을 내리깔고 본 적 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함께 했던 며칠은 핏기를 잃고 핼쑥해져 도저히 그의 얼굴이라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41-)
어느 날 , 민겸호가 명주를 사랑으로 불렀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사사로운 말씀이 없는 분이라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아가, 네가 우리 집으로 시집온 지도 벌써 햇수로 육년째로구나.네 나이 이제 스물이 되어간다. 앞길이 창창한 나이 아니냐?그런데 내가 욕심으로 너를 잡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개운치가 않구나.이제라도 친정으로 돌아가 네 길을 갔으면 한다.네 생각은 어떠냐?"
명주는 속마음을 모두 들킨 것 같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80-)
직각댁의 아들은 학병으로 끌려가 남지나로 갔다는데 소식이 없었고, 점순이 남편 석이는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 어딘가에 있는 탄광에 있다고 들었다.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갔다. 부모들은 딸이 정신대로 끌려갈까 봐 혼기도 안 찬 처녀들을 결혼시켰다. 이런 압박과 설움에서 드디어 해방된 것이다. (-114-)
일행들은 먼저 민겸호의 무덤으로 갔다.
민겸호의 무덤 앞 상석 위에 주과포를 차려놓고, 평소에 그가 즐겨 마시던 국화주 한잔을 올리고 모두 절을 했다. 가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소슬했다. 영택은 아버지 묘 앞에 엎드려 오열했다. (-165-)
윤식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쑥개떡을 쪄 식구가 하루 동안 먹을 음식을 마련해놓은 뒤 집을 나섰다.
윤식 엄마와 윤식은 서울에서 오십리 길인 의정부로 향했다. 윤식은 엄마를 뒤에 태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인 양 뒤뚱거리며 길을 달렸다 간신히 뒤에 매달려 조마조마한 마음을 견딜수가 없던 윤식 엄마가 말햇다.
"윤식아, 엄마 걸어갈게." (-216-)
오빠의 덕택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말주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자신에게 사상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이었는지. 투철한 이념을 가지고 연설을 했다면 모를까,자신은 세상이 사회주의면 어떻고 민주주의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을 가기고 산 사람이었다. 네 것 너 먹고, 내 것 나 먹으면 됐지, 무엇 때문에 나눠 먹자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던 자신이 무엇에 홀려 연설을 하고 다녔는지 알수가 없었다.그것도 신명나게 말이다. 밖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257-)
십 년 전 희식의 결혼식장에서 영익은 도도하고 당당했었다. 그대가 영익을 보는 마지막이었다.오히려 예리한 눈빛으로 냉정하게, 도도하게 자신의 앞에 군림했다면 이다지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을. 명주는 민씨 가문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환영을 보는 듯 해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래도 뭔가 있으면서도 아이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랬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을, 정말 이제는 다 망하고, 거지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희식은 어쩌면 좋은가. 돈이 없으니 우리 희식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315-)
작가 민윤숙 작가는 1936년 생이며, 88세 미수(米壽)에 쓰여진 첫번재 소설이다. 소설 『산청』은 그녀의 첫 번째 소설이자,마지막 소설이 될 거라고 스스로 독백하듯 말하고 있었으며, 『산청』의 주인공은 정명주였다. 작가에게 명주는 명주고모로 통하고 있으며, 실존인물이다.
소설 『산청』의 시대적 배겨은 조선 말엽, 민씨 집안이 ,왕의 외척이 조선을 지배하였던 19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소설 속 실존인물이자, 명주의 시아버지인 조선 말 무위도제조 민겸호(1838~1882)의 그 때 당시 벼슬은 규장각 소속 관직 직각(直閣)이며, 소설 『산청』의 배경이 되는 경남 산청군에는 민겸호 송덕비와 민씨 잡안과 명주 고모가 살았던 한옥 집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었다.
소설 『산청』은 기울어가는 민씨 집안의 맏며느리이자 민영휘의 아내였던 명주는 열네살에 전쟁 혼란기에 ,일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혼기가 차지 않은 그 당시를 가리키고 잇었다. 명주는 열네살 어린 나이에, 갑자기 민씨 집안과 혼례를 치루고, 49일 만에 남편을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던 명주는 남편 민영휘의 바로 밑 시동생, 민영익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으며,민씨 집안의 대가 끊어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명주의 운명를 바꿔 놓았다,. 자신의 운명이 불행한 삶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서글픈 인생의 서사가 이 소설에 고스란히 채워지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명주의 인생은 조선 말엽을 지나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미군정까지, 을사늑약과 일재강점기, 한국 전쟁과 1.4 후퇴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며, 자가 민윤숙은 같은 여자로서, 명주 고모의 인생을 어루만지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단순히 단편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졌을 소설 『명주』가 10년이 지나 장편소설 『명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소설 『범도』 를 쓴 방현석 작가의 적극적인 응원과 지지, 추천에 있다. 21세기 분단된 대한민국, 70 여년 동안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정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현대인이 나라 잃은 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명주와 명주와 함께 했던 점순이, 그들의 인생 서사를 작가 민윤숙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명주 고모의 삶을 소설로 역어 내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나 인생사는 한 사람의 인생을 깊숙히 통과하는 시간의 편린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