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평점 :

까맣게 잊고 있었던 당근을 마주하자 기억 속에 묻혔던 시간이 되살아났다. 정물 스케치를 하는 할머니 곁에서 보낸 오후 시간, 우리가 함께 좋아한 화가 조르주 쇠라, 삶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나날들, 주방 식탁에 몇 시간이고 앉아 당근들이 살랑 살랑 몸을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수용소의 미술 수업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할머니는 그때 가르친 학생들이 보낸 편지를 뿌듯한 목소리로 읽어 주셨다. (-15-)
내가 몇 년에 걸쳐 해낸 일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간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났고,'순수'한 예술이 어디까지 지저분해질 수 있는지 목격했다. 붓에 미친 너드들, 색깔 광인들,'안목'을 보유한 자들, 머리통들, 예술가의 광팬들에게 달라붙어 그들이 밤을 새는 이유를 알아냈다. 캔버스 위에서 피를 흘렸고 , 조각 품에 피부가 벗겨졌으며, 거의 발가벗은 낯모르는 사람을 예술의 이름으로 내 얼굴 위에 앉게 했다. (-27-)
그는 한 작품에 여러 종류의 물감을 혼용하는 때가 많았고, 그래서 각각의 결점이나 특이점과 끊임없이 씨름했다. 가령 파란 하늘을 칠하는데 선택한 유화 물감은 명암(-121-)
아름다움이 늘 예술의 원수였던 건 아니다. 서구에서는 수백년 동안 아름다움과 예술이 사실상 동의어였고, 심지어 아름답지 않은 예술은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20세기 들어 아름다움과 예술의 지극히 소란스러운 결별이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돌아온 이들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198-)
그것은 나에게 예술이란? 나는 이 생각에 흥미를 느꼈고 스스로도 놀라웠다. 불과 1년 전의 나에게 누군가 킴 카다시안이 퍼포먼스 예술가라고 주장했다면 눈이 아플 정도로 크게 떴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후 나는 사람을 얼굴에 앉혔고, 무엇보다도 예술의 더 광범위한 정의를 찾고 있었다. (-247-)
'난 이것을 좋아한다'는 단어는 '이것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비하면 너무도 막다른 길과 같다. 줄리의 대답에는 취향에 대한 은밀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사실 취향은 그때그때 쉽게 만들어지고 ,또 언제나 변화한다. 취향에 관한 한, 자신이 단 하나의 정답을 이미 찾아냈다고 믿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부단히 질문을 던지는 쪽이 더 성실한 태도다. (-315-)
수많은 관리자들 중 한 사람이 우리를 이끌고 미술관을 구석구석 돌면서 여기서 잘못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지고 빠지는 모든 경우 및 화재, 폭탄, 접촉, 절도, 불룩한 배낭이 발견되는 모든 경우가 다 우리의 소관이었다. 누가 미술계 아닐까 봐 관리자는 '비상사태' 를 더 세련된 용어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전으로 화재를 보고할 때는 '발연상황'이라 불러야 했다. (-379-)
그러나 로브는 곧 아이시 게이즈의 컬렉션 이야기로 돌아왔다.내가 모두의 잔에 물을 다시 채우는 동안 로브는 화가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우리가 이 컬렉션으로 하려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지평을 넓히는 작가를 데려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당신이 게이 남자가 아니라면, 이런 경험을 못 해봤을 거고, 당신이 여자가 아니라면 이런 경험을 못 해봤겠지만, 이게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여기를 보라. 당신은 우리의 작품을 통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라고요."
나는 로브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424-)
2025년 올해 대구 미술관을 간 적 있었다. 처음 가본 미술관은 내가 생각했던 미술관에 대한 통념을 깨뜨렸다. 미술관은 전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지역마다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인지했다. 미술관은 예술이 집약된 곳이며, 때로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추함에 대해서, 인간의 의식을 흔들어 놓는다. 세상에 대한 미적 감각의 전환점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비앙카 보스커가 쓴 책이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논픽션 <코르크 도크>,<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의 저자이자, <애틀랜틱> 의 기고 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녀가 뉴욕의 미술관, 갤러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친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다. 예술보다 저널리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 저널리스트로서, 새로운 모험과 도전, 미술을 선택했고, 문학과 논픽션 작가가 된 이유다.
특히 은밀한 공간이자 직업에 대해서, 뉴욕의 미술계에 대해서, 대중들의 시선과 생각을 바꾸기 위해, 생소한 직업을 가진 이유다. 스스로 뉴욕의 미술관 스파이가 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책에는 미술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예술에 대한 집착은, 화가와 그림, 전시에 대해서, 색에 대한 광기가 숨어있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특정 색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소의 오줌을 말려서, 어떤 색을 짜내는 광기 어린 정성도 그런 이유다. 같은 예술이라 하더라도,그 예술이 보편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모순과 위선이 존재한다. 전시와 큐레이터, 도슨트, 미술관 경비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예술의 가치를 보호하고, 이해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예술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독특한 무대 장치였다. 즉 그는 ㅣ런 추악한 진실을 말하고 싶었고,그대로 노출하려 했다.
책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을 읽으면, 대중들이 예술이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예술 작품이 자신의 예술적 코드와 맥락에 맞는다면 살 것이고, 미디어와 전시, 도슨트와 큐레이터를 통해서,큐레이터와 갤러리 관계자들은 에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맥락과 의미를 추구한다. 어떤 예술적 작품이 가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 예술 작품의 맥락과 가치,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달려있다.대중들은 스스로 고품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술을 향유하고, 소유하고, 자신의 집에 걸고자 한다. 때로는 그 예술 작품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시간의 힘을 이용한다. 이 책은 흥미롭고, 신선하였고 생각과 관저을 바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