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史記 100문 100답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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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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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史記 100문 100답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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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기전체를 창안하면서 다섯 황제의 원칙이나 법칙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다. 본기를 예로 들면 거기에 '제왕만 들어가야 한다' 이런 원칙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정사인 《한서》 를 편찬한 반고 이후 정사를 편찬한 보수적 관변 학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원칙 아닌 원칙을 만들어버렸다. 본기에는 제왕만이, 세가에는 제후, 왕만이 들어간다. (-31-)

그렇다. 자공은 국제적으로 이름난 거상이었다. 자공이 한 나라를 방문하면 그 나라 군주가 나와 자공을 맞이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외교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공은 자신의 부를 활용하여 스승을 잘 모셨다. 사마천은 <확식열전>에서 공자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자공의 앞뒤에서 스승을 모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썼다. (-69-)

항복한 장수 이릉의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견디기 힘들었다. 궁형은 개인적 치욕이자 조사의 명서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망가진 몸은 불효의 표지였다.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의 유전자를 품고 있었던 사마천에게 이런 치욕은 견딜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전통과 개인적 심리면에서 보아도 복수는 필연이었다. 요컨대 궁형의 치욕은 강렬한 복수심리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하를 일통한 절대군주에게 종법복수나 사림복수, 어느 것 하나 실행할 수 없었다.

피의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천의 제3의 복수 방식을 찾아냈다. 대의를 행하되 유형을 피하고 인새의 경지를 승화시키는 복수의 형식, 이것이 저술함으로써 울분을 발산한다는 '발분저술'의 문화복수였다. (-91-)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굴원이 죽은 것,즉 자결한 것은 사실이다. 그 다음의 사실(史實) 은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굴원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문제는,이 두 가지 사실과 진실과의 차이에 있다. 굴원이 '이렇게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경우 진실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경우 부분적 사실과 진실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럿 있을 수 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진실은 하나일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해석과 추정이 다르면 진실(이라고 추정되는 것)에 도달하는 결론도 달라질수밖에 없다. (-138-)

삼분천하 (三分天下)

'천하를 셋으로 쪼개라' 라며 책사 괴통이 한신에게 충고하는 장면이다. 괴통은 초한쟁패에서 한신이 세운 공이 실제로 유방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품었다. 그래서 한신에게 '공이 주인을 떨게 할'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공신은 최후가 좋지 않다며 독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신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역시 한신의 말로를 암시한다. (-195-)

<조선열전>은 기본적으로 고조선 멸망에 관한 기록이다. 기록의 출발은 진나라 말기인 기원전 209년 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위만에서 시작된다.사마천 당시 한나라의 강력한 상대는 흉노였다. 그런데 흉노와 가까운 조선의 행보, 즉 조선의 대외 전략이 어떻게 짜여지느냐가 하나라에게는 중요했다. 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고 한나라를 상대할 겨우 대단히 벅찰 수 밖에 없게 된다.따라서 한나라로서는 조선과의 관계를 설정해야만 했다.

개국 후 유방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크게 혼이 난 경험 때문에 한은 흉노에 화친 기조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무제 때 이 기조가 바뀌었다. 야심찬 무제는 강경 노선을 표방했다.이럴 경우 흉노와 조선이 손을 잡고 대항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무제는 조선을 먼저 공략했다. 기원전 109년이었다. "흉노의 왼팔을 자른다"고 했다.왼팔이란 동쪽을 말한다.조선이 흉노의 동쪽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08년, 조선은 내분으로 망했다. (-201-)

그가 또 하나 나쁜 선레를 남암겼으니 바로 처세술이었다. 그는 욕을 먹지 않으면서 호의호식했다. 선물 보내고 ,때만 되면 인사하는 겉치레 처세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이렇게 해서 관료들끼리 서로를 봐주고 이용하는 비리와 부패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었다.

황제는 이런 그를 굉장히 총애하여 행정, 경제, 재정 등 조정의 거의 모든 문제를 장탕과 의논했다, 법과 시스템으로 다스리지 않고 '인치'에 의존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혹리의 큰 문제는 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할 그들이 법을 악용,왜곡함으로써 '인치'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했다. 장탕 이후의 혹리들은더 저질이 되어 온갖 추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249-)

궁형은 동서양 모두에 존재했던 반인륜적인 악형이다. 특히 중국의 궁형은 더 잔혹해서 고환을 포함한 성기 전체를 잘라내는 극형이다. 통계는 없지만 대부분 형벌을 받다가 사망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형벌을 자청했다. 그런데 사마천의 궁형 자청에는 더 치욕스러운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궁형 자체가 치욕스러웠다. 오죽했으면 사형보다 더 치욕스럽다고 했겠나. 또 하나는 궁형을 자청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더욱이 이것을 황제가 받아주어야 그나마 가능하다는 것도 치욕이었다. 한마디로 치욕 덩어리였다. (-297-)

한국사마천확회 저자 김영수의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에는 사마천 사기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었으며,사마천 사기가 한국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해가 된다. 먼저 사마천은 한나라 사람으로서,그는 궁형에 처해진다. 항복한 이릉의 '변호' 사건 때문에 황제의 분노를 샀으며, 죽음이 아닌 궁형을 선택했고,그는 역사서 사기를 씀으로서,그의 복수는 후대에 이루어졌다.

이 채을 읽으면, 몇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개혁의 본질은 무엇이며,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다루는 처세에 대해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읽을 수 있다. 물론 그가 왜 사마천의 사기를 썼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나가려 했으며, 동시에 복수도 염두에 두었다. 제왕에 버금가는 권력은 없으니,그를 죽일 수 없었다. 역사를 써서,그가 죽은 이후 후대에 역사로 남겨지는 것이 사마천이 생각한 강력한 복수였다. 책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모티브가 되었던 사마천 사기의 저술방식이 소개되고 있었으며, 한만도의 식민사관 역사가들이 말하지 않는 고조선의 멸망이 소개되고 있다.한나라와 흉노가 대치하고 있었던 그 당시 사마천이 살았던 때였고, 고조선의 멸망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역사는 현재의 사실을 다룬다. 여기서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어야 한다. 사마천은 어떻게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전환하는지 보여준다. 눈앞에 보여지는 모든 사실들이 역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즉 역사에 대해 정통하여야 하며, 그 역사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 살펴 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역사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가지 가치들을 반복해서 이해하고, 살펴보아야 한다.두꺼운 벽돌책 , 본기, 세가, 표,서,열전으로 구성된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에는 중국인에 대해서, 복수,원한, 은혜와 보은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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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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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 빵 대백과
타쓰미출판 편집부 지음, 수키 옮김 / 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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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시대가 되자 일본 전국 각지에 빵집이 속속 등장했고, 각 지역의 제빵사들이 새로운 빵을 고앙하여 판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 전국에서 그 지역에 뿌리내린, 남녀노소 모두에게 '소울푸드' 로 사랑받는 갖가지 '현지 빵'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2-)

나가노현과 나가타현 조에쓰 지방의 빵집을 중심으로 판매되는 신슈 지역 먹거리에 하나, 두툼한 빵 사이에 휘핑크림을 채운 것이 기본 형태로, 점포에 다라 맛과 모양에 특색이 있다. 기원은 1950년대, 당시 나가노현 빵 조합이 '지역활성화로 이어지길 바라며' 우유빵 제조법을 강습회에서 공개함으로써 확산했다고 알려진다. (-10-)

예로부터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의 로컬음식으로 유명한 감자칩빵. 나카이빵집의 선대 점주가 고안하여 ,마침내 요코스카에서 널리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가게에 따라 감자칩이나 끼워넣는 재료. 소스의 맛 등에 차이가 있다. 가나가와현 미우라반도에서 재배된 신선한 양배추를 속 재료로 사용하는 곳도 많아, 비교하며 먹는 재미도 있다. (-24-)

니시카와현을 중심으로 수많은 빵 제조사와 빵집에서 제조 판매하고 있는 '두뇌 빵', 일본 빵 역사상 , 처음으로 이 이름의 빵이 등장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시작은 같은 해, 대뇌생리학자이자 작가인 하야시 다카식다 저서 『머리가 좋아지는 책:대뇌생리학적 관리법』에서 제창한 내용에 있다. (-38-)

책 『일본 현지 빵 대백과』의 앞부분에는 일본 연호가 나온다. 메이지 시대는 1868년~1912년, 다이쇼 시대는 1912~1926, 쇼와는 1926~1989년, 헤이세이는 1989년~23019년, 레이와 시대는 2019~현재,까지 해당된다. 일봉에 도입된 제과제빵 사업은 에도시대 에 일본 항구가 전면 개항하면서, 1869년 메이지 시대에 서양식 빵이 오픈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기 직전 , 일본은 일찌기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제일 우선 한 것이 서양의 먹거리를 일본에 전면 도입하게 된 것이다. 150년의 제과제빵방 산업의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를 거치면서, 빵 산업은 전쟁에서 군인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함으로서, 커져가기 시작한다.

책에는, 일본의 빵의 역사 뿐만 아니라 만들어지게 된 게기까지 소개되고 있었다. 한국에는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한 감자칩 빵에 대해,일본은 5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카스테라 빵, 모자 빵,우유 방,카레빵, 어떡 것이든 한국에 비해 일본에서 생산된 방들은 원조가게로 손꼽히고 있었다. 대를 이어서 ,빵가게를 시작하는 한국과 달리,어느 덧 100년의 역사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의 특산물, 빵 노포 빵가게가 일본에 있었다.

일본 여행을 가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책에 소개되고 있는 몇가지 빵을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서 팔면 사업으로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대한민국의 3대 제과제빵 가게로,이성당, 성심당, 맘모스 제과가 있는데,이 빵가게는 지역의 경제를 살리는 일등공신이 되고 있어서, 일본의 빵산업을 한국에도 적극 도입되는 바램과 함께, 한국의 교육열 만큼 일본도 상당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두뇌에 좋은 빵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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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 빵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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