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연달아 같은 작가의 책을 읽었다. 러셀 뱅크스. 거 참. 괜찮은 미국 소설가다. 러셀 뱅크스가 이번엔 1993년에 시작해 1년 동안 미국 북동부 뉴욕 주 애디론댁 산맥 근처, 전작 <달콤한 내세>의 공간이었던 샘덴트 마을에서 멀지 않은 오세이블 지역에 사는 열네 살 사춘기 청소년 채피(채플린) 도싯의 방황과 성장을 활극적 요소를 담아 재미있게 써놓았다. 내가 말하는 ‘활극적 요소’ 때문에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북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도 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 그리고 이 아이와 어울려 온갖 장난을 해대는 톰 소여, 이 아이들, 정말 악당 아니던가? 어린이의 탈을 쓰고 조금이라도 측은지심이 있는 어른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험한 일을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치우고나선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젖히는 소년들. 허클베리와 톰에 비하면 <거리의 법칙>에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채피는 진짜 착한 아이다.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비록 마리화나가 주는 몽롱함과 환각과 착란을 너무 사랑해서, 공부 못하고, 말도 안 듣고, 도둑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말이 열네 살이지,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열다섯, 소위 중2다. 북한에서 이 아이들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 15년 전, 엄마는 그때까지는 돈 좀 있는 집안의 외아들이자, 키도 크고 생기기도 멋들어져 마치 JFK가 다시 환생했다는 소리까지 들은 바 있는 폴 도싯 청년과 눈이 맞아, 오빠를 믿고 피 끓는 청춘끼리 가슴만 맞대고 자자, 했다가 덜컥 채피가 들어서는 바람에 혼인을 했다고 주장을 한다. 이때도 외할머니는 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크면 뭐하느냐, 저 청년이 젊은 나이에 벌써 마약쟁이로 떨어져 조만간 가산 탕진하고 신세도 망칠 것이 뻔한 것을, 하며 극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그럼 어떻게 하나, 배 속에선 채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걸. 그래도 초장엔 사이좋게 잘 살았단다. 한 5년. 그러다가 아빠 폴이 코카인과 알코올을 과도하게 탐닉하여 돈도 다 떨어지고 이젠 제법 크고 안락한 집만 하나 남았을 때, 외할머니가 부득부득 강권을 해서 집과 매달 백 달러의 양육비는 엄마가 갖고, 아빠는 대신 언제든지 아이를 접견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는데, 코카인과 알코올로 젖은 세월에 어떻게 양육비를 줄 수 있겠는가 말이지. 외할머니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송을 진행시킬 무렵, 아빠는 자메이카로 날라버리고 은행계좌에 남은 돈을 몽땅 자메이카로 옮긴 채 이제 작은 섬나라에서 아프리카의 피가 반이 섞인 아이들을 생산해가며 살고 있단다.
  근데 그건 몰랐지? 외할머니가 이제 나이 들어 여태 살던, 우리나라 식으로 설명하자면 다 쓰러져가는 원룸에서 좀 편하게 딸네 집에 붙어 살고 싶어서 딸을 그리 윽박질러 이혼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디 되면 그게 세상살이인가. 엄마는 옆 동네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건설관련 기술자로 있는 켄이라는 남자한테 퐁당 빠져 곧바로 동거를 거쳐 결혼에 이르러 외할머니는, 괜히 딸만 이혼시켜버리고, 여전히 좁은 원룸에서 사는 팔자였다.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외손자가 하여튼 쫓겨나든지 가출을 하고, 부부가 오지게 싸움을 벌여 서로 사랑은 하지만 잠깐 별거상태로 들어가자 난데없이 딸이 베개 하나 들고 좁아터진 원룸으로 잘 곳을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여튼 새로 결혼해 이제 호적상 나, ‘채피’의 양아버지가 된 켄이 채피에겐 결정적인 쥐약이었다. 그래 켄에서 뿜어 나오는 겉으로 보면 보통의 아버지 이상의 덕성과 자애와 정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채피에게 잘 된 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채피 입장에선 얼굴은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은 벌레같이 보이는지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 년 삼 년이 지나 켄을 향한 반발심으로 학교 공부는 아예 작파를 하고 모호크 스타일의 머리모양에 코와 귀에 피어싱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얘기했듯이 채피의 일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해피스모크, 마리화나에 맛을 들여 늘 돈이 필요한 처지로 떨어져 그저 일상이 집에 있는 돈 좀 나가는 물건이면서 내다 팔아도 엄마와 양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할 것이 더 있나 온갖 구석을 뒤지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채피는 드디어 엄마와 켄의 방까지 진입하여 깜깜해 보이지 않는 옷장 바닥을 깊숙이 손을 넣어보니 뭔가가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보니까, 낡은 검은 가죽 가방이 두 개가 나왔다. 하나를 열자 세 부분으로 분해되어 있는 22구경 소총과 소총에 탈착할 수 있는 망원경. 우와. 다른 하나를 열어보니 검은 비닐봉지가 삼사십 개 있는데 전부 옛날 동전, 즉 골동품 수준은 아니지만 희귀성으로 돈 좀 되는 동전 또는 은화 같은 것이 꽉 차 있던 거였다. 그래 이중에서 동전을 몇 개,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가지고 나가 전당포에 디밀어봤더니, 무려 80달러를 쳐주겠다는 거 아닌가. 아오! 채피의 짧은 생애 동안 무려 80달러어치의 마리화나를 사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친구(인 것으로 착각하는) 러스가 사는 비디오가게 위층의 아지트로 가서 함께 이것을 다 피우려고 했다가, 방을 함께 쓰는 거친 폭주족들도 가세하는 바람에 별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다 없애버린다.
  그럼에도 이제 액면가가 몇 센트에 불과한 동전들이 높은 거래가를 형성하는 것을 알고 그것이 거의 다 없어질 때까지 마리화나로 바꾸어 연기로 만들어 날려버렸을 때, 드디어 엄마와 양아버지에게 발각이 나고, 몇 대 쥐어터지고 집에서 쫓겨나 러스의 아지트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천국의 희열을 맛보고 계신 정여사께서 젊어서 청소년 카운슬링을 겸했던 적이 있다. 그때 옆에서 어깨 너머로 갖가지 사례를 보기도 했고,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문제아 시절을 한 두 해 정도 지낸 아이’를 키웠던 입장에서 유심히 보기도 한 결과, 문제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은 문제의 시발점은, 아 씨, 나도 양심의 가책이 좀 되는데, 거의 전부, 99퍼센트, 부모한테 있다. 채피가 왜 이리 골통 문제아가 됐을까? 이건 책의 중간부분에 나와서 여기다가 확 써놓아도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셔야 한다는 신념으로 소개를 하지 않겠으니, 독후감을 읽어주시는 제위께서는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다시 채피로 돌아와, 채피가 허클베리, 톰하고 다른 점을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비록 쫓겨나 이제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당했어도 양아버지는 몰라도 엄마한테는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 거다. 이미 일탈 청소년이 된 채피 입장에서 선물을 손에 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얻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이 아이는 크리스마스를 한 열흘 앞에 두고 ‘빅토리아 시크릿’이란 고급 여성 속옷 파는 상점에 들어가 초록색 실크 나이트가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뿔싸, 가끔 자기가 조금씩 마리화나를 팔고 했던 흑인 청원 경찰 바트에게 현장에서 들키고 만다. 그래 사무실에 붙잡혀 기어이 엄마와 양아버지가 상점에 호출되어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빈 연후에나, 다시 학교에 들어가 8학년까지는 마치고, 집에서 생활하겠다는 전제 하에 경찰서에 넘기지 않고 돌아가게 된다. 물론 양아버지는 경찰서에 이어 소년원으로 보내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오히려 더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상점 밖으로 나온 일가족 중에서 외아들 채피는 엄마한테 급하게 쓸 돈 20달러가 필요하다고 하며 곧바로 집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그길로 다시 내빼 20달러어치 마리화나를 사서 다시 러스의 아지트로 향한다. 바야흐로 진정한 청소년 일탈의 길을 걷기 시작.
  이후? 범죄가 있고, 사고가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안전여부를 확인하고 안전하지 않다면 구해줄 선의의 행동으로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고, 뜻밖에 선의와 지혜가 넘치는 자메이카 사람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채피 자신의 올바른 자존을 되찾는다는, 다분히 미국식 결말. 참 재미있는 소설이긴 한데, <달콤한 내세>에 쓴 것과 같은 얘기로 결말을 맺어야 하는 것이 아쉽다. 꼭 이런 결론을 내야 했을까, 하는 것. 요새 미국 소설을 제법 읽는다. 이들의 공통점, 아니면 적어도 어떤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 같아서 찜찜하다. 소설의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하여 작가-(출판)편집자 라인이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 마치 찍어내는 것 같은 작품’들. 미국 소설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하여간 느낌이 좀 그렇다.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냥 맛보기니까 스포일러라 생각하실 필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섞여 있는지 아시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민음사한테 아쉬운 것이 뭐 한두 개 인가마는, 내 경우엔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접은 것도 중요한 한 가지다. ‘모던 클래식’ 1, 2호를 장식한 <내 이름은 빨강>은 민음사와 이문열이 오랜 계약을 끝냄으로 인해 세계문학 시리즈 51, 52번이었던 <황제를 위하여>를 절판시킨 자리를 채우는 고임돌로 쓰임으로 해서 ‘모던 클래식’의 장례를 만방에 고하였다. 러셀 뱅크스, 라는 처음 들어보는 미국 작가의 책 두 권이 ‘모던 클래식’으로 나온 적이 있었으니 하나가 <거리의 법칙>이요 나머지가  다음 주 월요일 포스트를 올릴 <달콤한 내세>이지만 두 권 나 나란히 절판. 뱅크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엔 ‘모던 클래식’으로는 절대로 중쇄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데 만 원 건다.
  책의 앞날개에 은발에 흰 수염을 기른 러셀 뱅크스의 사진이 나오고 그의 약력이 씌어 있다. 1940년 매사추세츠의 가난한 노동자 집구석에서 장남으로, 1940년에 태어난 러셀은 뉴햄프셔에서 자라 집안에서 배출한 첫 번째 대학생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공부를 무지 잘했을 거 같다. 그러니까 없는 집에서 대학까지 보내지 않았겠나. 그러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작가가 되려 했지만 그게 쉽게 되는 게 아니라 그 동안에 유수의 직장에 취직하는 대신 배관공, 신발 판매원, 창유리 절단공 등의 경력을 쌓았고, 이게 나중에 작품 곳곳에서 경험자 특유의 생동감 있는 묘사로 빛을 발한다 하니 젊어서 고생은 뭐? 사서도 한다고? 염병이다. 안 해도 되는 고생이라면 안 하는 게 훨씬 낫지. 미쳤냐? 그것도 사서 하게. 이이도 미국의 60년대에 대기업에 들어가 정글의 경쟁 속에 편입되었다면 돈은 벌었을지언정 작가의 꿈은 영영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작품 <달콤한 내세>는 미국 북동부 지방의 애디론댁 산맥 근처, 일찍이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에서 봤듯이 좀 야만스러운(아마 스칸디나비아에서 왔을) 인종들이 살던 뉴펀들랜드하고 가까운 미국-캐나다 국경지역이어서 그랬는지 근친혼을 감행했던 인종들이 조금 섞여 있는, 도시에서 멀고 먼 산악지역 샘덴트 마을에서 1991년 1월 27일 아침에 있었던 불행한 교통사고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한 ‘도시에서 멀고 먼’은 지리적 거리로 말하면 뉴욕까지 승용차로 불과 여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8월 말에 벌써 짙은 가을의 냄새가 나며 겨울 내내 2미터 높이로 눈이 쌓인 숲 속이라는 자연 생태적 거리에 더 중점이 맞춰질 것인데 여기도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생긴다.
  먼저 소개해야 하는 등장인물이 이젠 거의 쓰이지 않는 전형적인 할머니 이름의 돌로레스 드리스콜 여사. 다 큰 두 아들의 어머니이고 1984년에 뇌졸중이 덮쳐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는 남편 에벗을 정성을 다해 돌보며 진심으로 사랑할뿐더러 그의 지혜로운 사고를 존경하는 신체 건강하고 마음 따뜻하고, 동네에서 두루 높이 추앙받는 인격의 소유자로 1968년부터 샘덴트 마을에서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운전기사다. 그러니까 같은 노선의 스쿨버스를 23년째 하고 있으니 노선 인근에 자리한 모든 집안의 내력을 빠삭하게 알고 있으며, 가족들의 성격과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외모의 특징, 몇 주의 간격으로 부부싸움을 하는지 까지, 아울러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른 도로의 특성과 피해야 할 장애물의 생성과 소멸, 최적의 회전 반경과 속도 같은 것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이이를 제외하고는 스쿨버스의 운전기사를 생각해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야기의 시작이 1991년 1월 27일. 아침 온도 영하 8도. 눈 예보가 있으나 날씨가 추워 습기를 품지 않은 싸라기눈이 내릴 것 같다고 짐작하는 돌로레스에게 총명한 남편 에벗은, 북극에도 눈이 내린다고 한 마디 했는데, 처음엔 흐리기만 하더니 조금씩, 조금씩 눈이 내리다가, 수차례 산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드디어 끝내고, 이제 스쿨버스 안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것 같은 주정뱅이 램스턴의 세 아이들과,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일반적인 참전용사와는 다르게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 지역의 모범이 되는 홀아비 빌리 안셀의 쌍둥이 남매와, 미스 아메리카는 모르겠고 미스 뉴욕 정도는 가볍게 차지할 거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니콜 버넬과 두 남동생, 경매로 사들인 바이더와일 모텔이 장사가 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리사와 웬델의 자폐증세가 있는 아들 션과, 비트족 출신임이 거의 틀림없지만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사는 목각 공예가 완다와 하틀리 오토 부부가 입양한 인디언 족 아들 베어와, 근친혼이 피해야 할 풍습이 아닌 지역에서 온 가족의 아이들 등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아이들을 싣고 드디어 산길을 내려와 약간의 내리막 직선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속도를 올리고, 내리막이라 점점 가속되는 것도 충분히, 수천 번 경험했던 돌로레스의 눈앞에 개, 아니면 개 비슷한 형체, 그것도 아니라면 환영 같은, 그러나 분명 뭔가가 갑자기 휙 지나가는 순간, 돌로레스의 머릿속에서는 저 물체가 어떤 것이든지 50인승 버스로 그냥 치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가슴으로는 차마 살아 있는, 솔직히 말하자면 생물체인지 환영인지, 아니면 때마침 버스 앞 유리창에 와이퍼를 작동시켜야할 만큼 내리는 눈들이 바람에 날리며 만들어낸 형체인지 하여간 그것을 버스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어 핸들을 오른쪽으로 휙 꺾음과 동시에, 눈 내리는 아스팔트길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콱 밟으니 당연히 대형버스는 그 자리에서 휙, 차체가 한 바퀴 휙 돌면서 내리막을 확실하게 시속 85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미끄러져 길 가에 허술히 걸쳐놓은 가드레일을 부수고 백 여 미터에 달하는 언덕으로 쏟아져 내려가며, 마침 여름 내내 모래를 파내고 생긴 웅덩이에 버스 뒷부분이 풍덩 빠져 많은 어린 아이들이 현장에서 즉사를 해버리고, 적은 수의 앞에 앉은 아이들은 극적으로 경상만 입은 채 빠져나왔으며 극소수는 목숨을 건지는 대신 척추가 부러져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근육을 쓰지 않으면 몸이 뻣뻣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남은 생애가 다 할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씩 도시 레이크플레시드로 나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를 당한다.
  작품은 운전기사 돌로레스 드리스콜, 베트남 참전용사이자 자동차 정비공장 사장 빌리 안셀, 멀리 뉴욕에서 와 피해주민들에게 사고에 대한 소송을 종용하고 진행하는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 마비가 된 니콜 버넬, 이렇게 네 명의 일인칭 시점으로 구성된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이한 개인사가 등장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재미를 배가하는데, 다시 돌로레스 드리스콜이 화자가 되는 마지막 장章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 소설이 전형적인 미국식 결말로 귀결되며 당신은 약간 실망할지도 모른다. 미국식 결말이 뭐냐고? 그건 직접 읽어보시면 아시지. 아, 근데 이 책이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극곰 2020-07-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주신 내용 보면 엄청 흥미로운데 말여요, 절판인가요?
민은사 모던 클래식에서 새로운 작가도 알게 되고, 표지도 나름 이뻐서 좋아햇는데 그리 되었나요?

Falstaff 2020-07-03 11:51   좋아요 0 | URL
민음사 모던 클래식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은 이후 그의 책을 무더기로 찍어냈습니다.
이후 품절된 책 몇 권은 다시 중쇄를 냈는데, ‘절판‘된 건 이제 내지 않는 거 같습니다. 시리즈의 1, 2번이 다른 시리즈로 옮긴 자체가 더 이상 이 시리즈를 계속하지 않겠다는 굳은, 변하지 않는, 초지일관한 의지로 읽힙니다.
 
리브라 - 돈 드릴로 장편소설
돈 드릴로 지음, 정회성 옮김 / 창비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이트 노이즈>와 <마오 II>를 재미있게 읽어 서슴없이 <리브라>를 골라 읽었다가 혼쭐났다.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대단히 많은 등장인물들이 본명과 가명을 섞어 사용하며, 여전히 음모론에 휩싸여 혼돈을 자아내고 있는 JFK, 존 핏제럴드 케네디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노트에 메모를 해가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좀 지나고부터 메모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작은 글씨로 무려 아홉 페이지를 노트했다. 당연히 읽는 시간도 보통의 작품보다 배는 더 들었을 듯.
  마거리트 클래버리 오즈월드라는 여인이 있었다. 에드워드와 결혼을 해 살다가 아들 존을 낳자마자 이제 영원무궁하도록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에드워드는 공포에 질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두 번째 만나 결혼한 로버트 E. 리 오즈월드 씨는 보험 모집원으로 둘째 아들 로버트를 낳고, 셋째이자 막내인 리가 태중에 있던 여름날, 불타는 더위 속에서 잔디를 깎다가 피식 쓰러져 발발발 팔 다리를 떨더니 그만 숨이 넘어갔다. 세 번째 남자 에크달 씨로 말하자면 나이가 지긋한 엔지니어로 한 달에 천 달러 이상을 벌어오는 괜찮은 남자였지만 마거리트의 눈을 속이고 바람을 피운 게 걸리는 바람에 이혼을 해버리고 만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피우라고 해도 바람 같은 거 못 피울 터인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해버려,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비록 구만리는 아니지만 구천리 정도 남은 인생을 어렵게 꾸려나가기에 이른다. 거 옛 말에도 있는데 말이지. 바람피우는 남편은 참아도 돈 못 벌어오는 남편은 못 참는다고. (시대가 1940년대였으니까 말이지만.)
  첫 남편의 아들이자 맏이이며 착한 존은 결혼해서 엄마와 배다른 동생 리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외톨이 기운이 있던 리가 하루는 형수한테 주머니칼을 들이밀고 다투는 바람에 엄마하고 리는 존에게서 떨어져 나와 둘만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근데 미국이나 유럽의 저 피부색 허연 것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번 찢어지면 그길로 영원히 안녕이라 맏이 존은 이걸로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로버트는 이꼴저꼴 보지 않으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잘 적응하며 복무하고 있다가 책의 저 뒤편 결말 부분에 등장해 눈물바람을 한 번 하는 역할을 맡는다. 리는 집에 있던 해병 교범을 보면서 자신도 해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열여섯 살 때부터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려 시도를 하지만 사실 좀 어려보이는 외모라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결손가정에서 자랄 운명이었던 리는 거기다가 가난, 잦은 이사 등으로 점점 내성적 외톨이, 요새 말로 외로운 늑대의 심정을 차근차근 갖추게 된다. 무단결석이 넘치고 넘쳐 거리를 배회하다가 경찰에 의하여 청소년의 집으로 넘겨지기도 하고, 청소년 상담사와 심리 테스트로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뉴욕 지하철역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살립시다.”라는 유인물을 구경한 적이 있는 리는 엄마와 뉴올리언스로 이사를 하고 마침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지적 영역을 확장하니,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을 독파,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임은 선언한다. 근데 사실 이건 학교나 동네에서 리가 자신들과 달리 북부, 뉴욕 말씨를 쓴다고 아이들이 집단 따돌림, 속어로 ‘다구리’를 가하는데 반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런 경위를 거치면서 리 오즈월드는 자기가 앞으로 할 일로 부두 근처에 있는 미국 공산당의 세포조직에 가담하는 것하고,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리가 마르크스주의와 해병 교범을 읽기 전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목요일마다 방영해주는 범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교범을 읽으며 살인의 요령을 외우게 된다. 사람이란 것이 하나를 알게 되면 그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라, 데이비드 페리라는 이름의 주요 등장인물로부터 고장난 22구경 권총을 15달러에 사서, 결국은 고치지 못해 형 로버트 오즈월드에게 10달러를 받고 넘기기도 한다.
  드디어 리가 열여덟 살이 되기 한 달 전, 174cm, 62kg의 몸으로 해병대에 입대, 훈련을 받고는 미닫이문과 눈이 가늘게 찢어진 매춘부의 나라 일본, 그중에서 아쯔기에 있는 레이더 기지의 레이더실에서 근무한다. 아쯔기의 레이더 기지에는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정찰기 U-2기가 상공 24km까지 올라가 주로 소련과 중공을 촬영하고는 했으며 이게 상당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일본에서 리는 미쯔꼬라는 이름의 서른네 살 먹은 매춘부와 그녀의 관리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코노라는 남자와 유대를 갖는다. 그래 머리를 굴려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군사비밀을 소련에 넘기면 소련에서 자신을 환대해줄 거 같은 거였다. 일본 생활에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해 코노에게 선물로 받은 작은 데린저 식 은도금 권총으로 자신의 왼쪽 팔을 쏘아 의병제대를 시도하지만, 팔뚝은 작은 수술로 탄알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고, 자신은 허락받지 않은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군법재판에 넘겨져 28일 동안 영창에서 별 짓을 다 당한다. 1957년엔 미국 영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근데 텍사스로 거처를 옮긴 엄마가 때마침 작은 사고를 당해 얼굴에 부상을 당한 것을 기회로 의가사 제대를 해 포트워스로 간 리는 일본에서부터 뜻을 세워 조금씩 러시아어를 공부하더니 스위스 쿠르발덴에 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 합격한다. 원서에 학기가 끝난 후 핀란드 투르쿠 대학의 하계 세미나에 참석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백하게 밝히고. 그러더니 정말로 스위스, 핀란드를 거쳐 하루 만에 소련 비자를 받더니 모스크바로 망명해버리는 거다. 소련 땅에만 가면 술이고 음식이고 집이고 자동차고 다 해줄 줄 알았겠지. 그러나 천만의 말씀. 현재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있는 공장의 노동자로 보내버린다. 소련. 엄청난 대지와 풍광과 사람들의 스케일, 그리고 추위. 여기서 리는 미숙련 금속 노동자로 지내다가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 없어 ‘마리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결혼해 딸을 하나 낳고, 다시 미국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귀국길에 오르는데, 소련은 알고도 못 본 척한다. 골치 아픈 인간 하나가 제 발로 땅에서 나가겠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던 거다.
  그리하여 이제 텍사스 댈러스 근방에 자리 잡은 리 오즈월드 부부. 리는 이곳의 교과서 창고 6층에서 1963년 11월 22일 링컨 컨티넨털 무개차에 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아내 재클린과 코넬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와 함께 타고 신나게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JFK에게 세 방의 총알을 발사하게 된다. 첫발은 케네디의 어깨와 목 부근에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라고 판단해, 두 번째 총알을 날리는데 그건 엉뚱하게 코넬리 주지사를 정통으로 맞혀버리고, 세 번째 총알은 완전히 빗나간다. 그럼 한 순간 대통령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가 싶다가 뭔가가 퍽 물결치며 흩날리게 하는 총알은 누가 쐈을까? 이리하여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둔 음모론은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 숱한 작가, 역사가들이 픽션 또는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돈 드릴로도 <리브라>를 통해 음모론의 하나를 만들어낸 것. ‘리브라Libra'는 천칭자리라는 뜻으로 리 하비 오즈월드라는 이름의 인간, 바로 천칭자리, 암살자를 상징한다.
  무엇이 리 오즈월드로 하여금 대통령을 암살하게 만들었을까. 이게 이 책이 재미있는 핵심인데 내가 맨입으로 가르쳐드릴 수야 없지.... 않겠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로몬의 노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5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니 모리슨의 세 번째 작품이며 앞으로 상복이 터질 그녀에게 처음으로 큰 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안겨준 장편소설. 토니 모리슨은 1993년에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라서 이이의 일생에 대해서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읽어본 모리슨 가운데 특히 <재즈>와 <러브> 같은 비교적 후기 작품의 경우에, 그저 흑인이나 젠더, 아니면 합해서 흑인 젠더 문제를 다룬 것이겠거니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혼쭐이 난 적이 있어서 <솔로몬의 노래>도 혹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약간 조심스럽기는 했다. 읽어보니 초기작이라 그런지 읽는 대로 진도가 잘 나갔다. 후속 작인 <빌러비드Beloved>와 비슷한 정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이야기는 1931년 2월 18일 수요일 오후 세 시에 시작한다. 주로 흑인들을 위한 보험회사인 노스캐롤라이나 상호생명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의회가 있는 메인스 애비뉴의 북쪽 끝에 자리한 머시종합병원의 돔 지붕 꼭대기에 모습을 나타내 대중의 눈을 끈다. 사람들 속에는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이이의 언니 커린디언스(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할 때의 ‘고린도’의 영어식 발음)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려 이들이 하는 유일한 작업/노동인 붉은 벨벳으로 만든 인조 장미꽃잎이 사방에 날렸고, 파일러트Pilate(사도신경에 “본시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할 때 ‘빌라도’의 영어 발음) 라는 이름의 다부진 체격을 한 여인은 흑인 특유의 깊은 공명이 담긴 콘트랄토 목소리로 “오 슈거맨 날아가 버렸네 / 슈거맨 사라져버렸네 / 슈거맨 하늘을 가로질러 / 슈거맨 고향으로 돌아갔네.”라고 노래했으며, ‘기타’라는 꼬마가 스미스 씨를 가리키며 저 남자가 누구냐고 묻자 두 주에 한 번씩 보험금을 걷어가는 바보천치 중에서도 바보천치라고 답변을 했는데, 드디어 로버트 스미스 씨는 커다랗고 푸른 날개처럼 생긴 옷을 입은 채 돔 지붕에서 하늘을 향해 크게 날아올랐으나, 그건 스미스 씨의 몇 초 안 되는 상상 속에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스미스 씨의 영혼은 모르겠고, 육신은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의 시멘트 바닥으로 거꾸로 처박혀, 철퍼덕, 그러나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채 생명이 있는 인체라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자세로 엎어져 있었던 거였다.
  바로 이 순간,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커린디언스의 엄마이며 십 수 년 만에 산기가 있던 루스 데드 여사, 이 거리 최초의 니그로 의사 포스터 박사의 딸이 갑자기 진통을 시작해 머시종합병원에 입원을 했고, 흑인 여자로는 최초로 병원의 계단이 아니라 병동에서의 출산이 허용되었으니, 다음날 이 기념비적인 출산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자 우리의 주인공인 메이컨 포스터 데드 3세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외할아버지 포스터 박사, 니그로 출신 최초의 의사를 기념하고자 처음엔 흑인들이, 나중에 대충 많은 시민들이 박사의 병원이 있는 거리를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고, 이를 고깝게 여긴 시의회는 ‘메인스 애비뉴’라는 호칭을 의사봉 3회를 두드림으로써 확정하는데, 다시 이를 고깝게 여긴 유색인들이 ‘닥터 스트리트’라고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낫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작 박사를 알고 보면 같은 흑인이라도 피부색이 얼마나 덜 까만색인지를 환자의 등급을 정하는데 가장 유효한 척도로 삼았으며, 자신의 과도한 노동을 달래기 위해 프로로폴이 아닌 에테르에 거의 중독된, 일반적 기준으로 그냥 속물이었던 거다. 주인공의 외가 이야기는 이 정도면 넘친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의 엄마 루스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가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벗고도 아이와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벌써 유치가 다 난 커다란 아이에게 이젠 더 이상 영양소도 없고 들척지근하고 밍밍하기만 한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저택의 하숙인 겸 일꾼이며 수위이기도 한 수다꾼 프레디 씨가 창문 너머로 보고는 온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는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니 뭐라 하지는 못했음은 물론이고 루스는 몇 달간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창피해 했으며, 우리의 주인공 아이에게는 뭔가 깨끗하지 못한 이름, 더럽고, 내밀하고, 뜨겁고, 어쩐지 혐오감이 드는 “밀크맨”이란 별명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불리게 된다. 며칠 전에 애너 번스가 쓴 <밀크맨>을 읽어서인지 이 호칭이 나올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좀 헛갈리는 기분을 느낀 건 뭐 개인적인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밀크맨과 바로 위의 누나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의 나이차이가 열두 살. 어찌하여 이런 터울이 났느냐 하면, 아버지 메이컨 데드 2세가 장인인 포스터 박사가 죽은 다음부터, 그때 아내 루스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음에도 그 후로 한 번도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따로 특별하게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다. 물론 이 커플이 왜 섹스리스가 됐는지는 안 알려드린다.
  메이컨에게도 슬픈 과거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 메이컨 1세와 인디언 출신 어머니 싱이 버지니아 주의 깡촌 샬리마(어쩐지 발음이 ‘솔로몬’하고 비슷하지?)에서 해방노예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미주리 주에 정착해 힘든 노동을 한 끝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싱은 메이컨이 어려서 아이를 낳다가 산고를 이기지 못해 아기를 배속에 넣은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태중의 아이가 자기 혼자 힘으로 산도를 헤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저 위에서 깊은 공명의 콘트랄토 음성으로 노래하던 파일러트다. 태어나면서부터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하느님은 파일러트에게 포유류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배꼽을 선물하지 않아 이것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바’라는 사생아 딸과, 딸이 낳은 또 다른 사생아 딸 ‘헤이가’를 키우며, 약초, 밀주제조 및 판매를 생업으로 삼는다.
  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파일러트가 한 열두 살 정도 됐을까 할 때, 약 15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며 이 가운데 50에이커는 훌륭한 경작지, 80에이커는 사슴과 야생 칠면조가 많이 사는 아름드리가 숲, 기타 양돈장 등의 빼어난 농장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시의 가장 부유한 백인 가문의 대농장 한 가운데 탁 박혀 있고, 거기까지는 좀 봐주겠다 하더라도 흑인, 검둥이가 소유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땅이라 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백인들에 맞서 무려 닷새를 울타리에 앉아 망을 보며 밤을 새우던 아버지가 하필이면 아이들이 보고 있던 어느 날 새벽에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뒤통수를 맞아 울타리 5피트 위로 날아가더니, 영혼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을지언정 육신은 그냥 땅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백인들이 이제 실소유권이 넘어간 남매를 죽일지도 몰라 그길로 숲을 향해 달려가 일단 몸을 숨기고, 아들 메이컨이 밤을 이용해 아버지의 시신을 시냇가로 끌고 가 묻어준 후, 여기저기를 전전한 끝에 서로 헤어진다. 이런 과거가 있어서 그랬는지 메이컨은 도시에서 여러 집을 소유하고 이를 가난한 흑인에게 세를 주어 악착같이 돈을 벌어 나름대로 성공한, 백인처럼 사는 흑인이 된다.
  이런 환경과 부모 하에서 성장한 밀크맨. 공부를 더 시켜 의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뜻과 달리 아빠 메이컨은 대학을 가느니 어려서부터 자기 밑에서 돈 버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대주택의 임대료 수금부터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게 이르는데, 나면서부터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우리의 밀크맨은 아버지처럼 배타적 이익추구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폭넓은 인간관계, 특히 저 앞에서 소개한 ‘기타’라는 인물과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성장한다.
  밀크맨의 나이 열두 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 많아 고등학교에 다니는 기타를 만난다. 기타의 손에 이끌려 밀주를 만들어 동네에 싼 값으로 알코올을 공급하는 집에 들어선 밀크맨. 여기서 당연히 고모 파일러트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첫 방문에서 만난 고모의 손녀, 밀크맨보다 역시 다섯 살을 더 먹은 헤이가를 본 순간 자신이 여태까지 본 여자들 가운데 가장 예쁜 여자라고 단정을 하고, 여태까지의 삶 속에서 온전히 행복감을 느낀 적은 이 때가 처음인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건가? 파일러트가 고모니까 고모의 딸 리바와는 사촌. 그러면 다섯 살 위의 헤이가는 오촌조카. 그러나 이건 우리나라, 소위 동방예의지국의 족보일 뿐, 미국에선 혼인도 가능한 사촌보다 더 먼 친척일 뿐. 그렇지? 맞다. 결국 둘의 교통사고는 피할 수 없다. 첫 만남이 이렇게 인상적인데 어찌 젊은 피를 참을 수 있을까. 근데 그건 하여튼 나중 일이다.
  내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여기에 흑백 갈등, 주로 백인에 의한 처벌받지 않는 흑인에 대한 범죄가 나오고, 흑인에 의한 상호 호혜의 원칙에 의하여 폭력을 행사했지만 법원에 의하여 처벌받지 않는 백인의 범죄에 동가同價를 이룰 ‘아무나 백인’을 향한 폭력 결사 ‘7일’, 밀크맨의 아버지와 고모가 도피생활을 할 때의 범죄와 당시 발견했던 황금을 둘러싸고 시작했다가 결국 밀크맨의 부계 족보에 대한 길고 긴 탐색과정과 작품의 시작에서 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연했던 하늘로 솟구침, 혹은 고향으로 향하는 비상의 은유 또는 상징 같은 것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에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토니 모리슨의 필력을 보여주고, 여기에 상상 가능한 것을 독자 제각각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을 펼칠 기회까지 마련해주니 어찌 일독을 권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 읽어보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부터 6월까지, 언제나 그렇듯이 좀 읽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좋았던 책 열 권을 소개합니다. 딱 열 권 만 고르는 일이 특히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기간보다 읽은 권 수는 적었지만 좋은 책들은 더 많았습니다. 아쉽게 여기에 끼지 못한 것들로 이기영 <고향>, 안젤라 카터 <매직 토이숍>, 서보 머그더 <도어>, 다니엘 켈만 <명예>, 조이스 캐롤 오츠 <카시지>,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애나 번스 <밀크맨>, 박태원 <천변풍경>, 보후밀 흐라발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등이 있습니다. 이 대단한 작품들의 목록을 보더라도 오늘 소개하는 ‘괜찮은 책 열 권’이 얼마나 제 주관적인 감상에 의하여 결정을 한 것인지 금방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아마추어 독자의 취향임을 감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순서는 책을 읽는 날짜순이며, 장편소설은 <  >, 소설집은 《  》으로 표시했습니다.



1. 미셸 트루니에, <마왕>

 

  북부 독일의 두터운 이탄층 속에서 몇 백 년의 동면을 끝내고 이제 음산한 모습을 드러낸 마왕. 그는 구름 같이 커다랗고 까만 말을 탄 채 프로이센 지방을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모집한다. 아이들은 국가의 군사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소년병으로 키워져 앞으로 고국의 땅을 무단으로 침범할 군대와 자신의 생명을 교환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들을 품에 안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왕은 또한 모든 인간들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죽을힘을 다해 어린 예수를 강 건너까지 건네주는 생크리스토프의 모습까지 태생에 가지고 있으니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을까. 거대한 말을 타고 척박한 프로이센 지방을 음울하게 돌아다니는 죽음의 신 마왕, 아벨 티포주는 또한 알고 보면 포로로 잡힌, 급성 근시와 성기 왜소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군인. 그가 겪는 실로 다양한 에피소드와 스토리는 이 작품을 명작의 대열에 올려놓지 않을까 싶다. 적극 추천.



2.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사람 사는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독자들에게 공감을 준다. 모두 열 편의 단편소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크게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대표적인 연작 소설. 이야기는 엄한 아버지와 주인공 로즈가 절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계모 플로, 이렇게 흔하게 들은 삼각관계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 속에서 시간은 흐른다. 로즈라는 어린 소녀가 청소년을 거쳐 청년이 되어 핸리티라는 작은 도시에서 벗어나 토론토로 떠나며, 이어서 결혼적령기의 여성, 권태기 주부,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이혼녀를 거쳐 옛 사랑의 사연을 전해 듣는 폐경기의 장년 여성이 될 때까지, 점점 깊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계모 플로와의 관계에 빠져들게 될 것임을 보장한다. 이런 것들이 기교가 별로 섞이지 않은 무심한 듯한 문장으로 툭툭 던져질 때 오히려 더 공감의 폭이 커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되리라.



3. 마거릿 드래블, <찬란한 길>

 

  마거릿 드래블의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결론을 맺지 않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으면 복잡하게 얽힌 ‘1980년대 초반 영국의 지역과 계급에 대한 상투적이고 사실적인 대작’ 한 편에 만족할 것임을 보장한다. 1950년대 초반에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세 친구들, 리즈, 알릭스 보웬, 에스터 브로이어. 이렇게 세 명이 주인공인데 삼부작 가운데 첫 작품이라 이 가운데 리즈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1979년 12월 31일, 이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는 송년 및 영신 파티를 열고, 파티 장소에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여섯 명의 남자 가운데 다섯이 참석한 것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잘 나가는 부자 정신과 의사 리즈. 그러나 리즈에게도 보다 리얼한 삶, 가족이 있으며, 자정이 지난 새해의 첫 시각에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이 있는 것이 또한 현실. 리즈와 남편으로 대표하는 부르주아 속물들로 이제 새로이 전 세계에서 대두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가운데 저절로 후속작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는 수작.



4. 돈 드릴로, <마오 II>

 

  1992년에 펜/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 제목이 분명히 중국의 지도자 마오저뚱을 일컫는 <마오 II>이며, 표지에도 마오의 사진이 올라 있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관심을 받는데 성공하지 못한 듯한데, 진짜로 읽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제목은 한 때 매릴린 먼로의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앤디 워홀이 그린 회화 작품으로 마오의 얼굴을 그려놓은 (복제)그림의 제목이다. 주인공은 은둔형 소설가 빌 그레이.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아 존재조차 의심받기도 하는 작가들, 토머스 핀천이나 제롬 데이비스 셀린저 같은 이들의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러나 어느 날 결심으로 하고 작가들의 사진만 전문적으로 찍는 이색적인 사진작가 브리타 닐슨을 자기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여러 가지가 의심스러운 조수 스콧을 보내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첫 장면은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주재하는 6,500 쌍의 합동결혼식부터 시작한다. 드딜로답게 매우 다양한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마치 10년 후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 폭파를 예견하는 듯한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어 더 주목되기도 하는 책.



5.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아, 이이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은 것이 벌써 언제 적이냐. 그 후 《남해 금산》을 거쳐 이 시집까지 어떻게 이리 한결 같을 수 있으랴. 아직도 시어가 만들어내는 공감각 또는 그냥 공감에 독자는 그만 사스락, 작은 모습으로 기겁을 하고 만다. 그렇다고 시인이 독자의 감성에만 호소하는 감각의 시어를 남발하지 않는다. 이이의 본질은 모더니스트. 시를 다 읽기 전에 무슨 뜻인지 모를 사투리를 절묘하게, 여러 작품 속에서 같은 단어를 섞어 씀으로 해서 하나의 에스프리로 몇 몇 시를 작은 한 단위로 합치는 배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직 이성복의 변하지 않은 시구를 탐색하고 시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궁리하는 일은, 그것이 비록 옳든 틀리든 간에 시를 읽는 독자의 자잘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리라.



6.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오버스토리. 열대 우림이나 온대 밀림 지역에 빽빽하게 들어찬 높이 60미터 위에서 펼쳐지는 초록의 스카이라인. 이것을 ‘오버스토리overstory'라고 한다. 유럽인이 들어오기 전에, 들어와서도 백 년 동안은 거의 온전히 보존되어 오던 완벽한 숲에, 엔진으로 가동되는 강철 회전 톱이 등장함으로써 식민지 시대를 포함한 미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예수의 탄생보다 오래된 나무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는데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스무 명의 사람이 올라가, 네 명의 추는 춤이 뭐더라, 아하, 카드리유를 추어도 괜찮은 그런 거목들의 숲이 한창 때에 대비해 99%가 사라진 현재, 각기 다른 탄생과 성장과 운명과 학식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몇 명이 잃어버린 나무와 숲, 일찍이 신이 창조한 가장 거룩한 생명을 유지하고자 생명을 걸고, 삶을 걸고, 자기 재산을 걸고 걸신들린 천민자본주의와 한 판 승부, 패배가 확실하게 보장된 승부를 거는데 망설임이 없는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를 세상의 모든 비문맹자들에게 권한다.



7.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상상하지 못할 것은 없다. 벨 에포크 시대를 맞이한 프랑스에서 책의 주인공 데 제쌩트 공작은 육지거북의 등껍질을 순금박으로 입히고 그 위에 갖은 보석으로 치장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즐기지만 안타깝게도 거북은 죽고 만다. 인류가 만든 라틴어라는 언어와 문자가 누린 온갖 화려함과 영화와 쇠락과 몰락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의 스펙트럼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위스망스는 세기말을 맞이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지적 퇴폐와 향락과 부도덕을 특유의 부패의 향기로 세상을 덮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새로운 백년이 과학의 세기였던 19세기에서 비롯한 인조물의 유토피아, 지적 유희의 미로가 되기를. 그러나 조심하시라. 숱한 독자들이 이 책을 기대 이하, 읽을 만하지 못한 책으로 선정했다는 점을 참고하면 좋겠다.



8. 채만식, <탁류>

 

  이리 재미있는 우리의 근대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딱 한 마디로 해서 만시지탄이다. 중학교와 고교시절에 <탁류>에 관하여 하도 많이 들었고, 내용마저도 훤할 정도로 익숙해서 오히려 일독에 이리도 세월이 많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우리나라 소설문학을 우습게 아는 건방짐까지 더하여. 만일 아직 <탁류>를 읽지 않으셨으면 우선 읽어보시라. 정말 재미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작가라서 그렇겠지만 졸라보다 더 재미있다. 읽는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으며, 제주도를 뺀 각 지방의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독자들 역시 그게 어떤 의미인줄 아는 모국어의 힘. 아, 유럽인들은 이런 즐거움을 언제나 알고 있었을 테지. 한국식 자연주의의 최고봉. 작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다 쓰러져가는 양반 댁의 맏딸을 돈 많다고 거짓말하는 가망 없는 사기꾼한테 결혼시키면서 이 대책 없이 재미있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비극, 그러나 곳곳에 웃음과 해학과 골계와 풍자의 시한폭탄이 숨어있는 우리의 근대소설은 시작한다.



9. 존 스타인벡, 《붉은 망아지 · 불만의 겨울》

 

  네 편의 옴니버스 식 짧은 이야기로 되어 있는 중편소설 <붉은 망아지>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인 <불만의 겨울>을 한 권에 실은 착한 책. <붉은 망아지>도 참 괜찮은 초기 중편이지만 <불만의 겨울> 역시 마지막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스타인벡의 작품으로는 매우 예외적으로 미국 동북부, 뉴욕과 알바니, 몬타우크를 포함한 동북부 지방을 배경으로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사략선, 쉬운 얘기로 해적단을 거쳐 세계최대의 포경선단을 합작 운영했지만 이제 완벽하게 몰락한 홀리 가문. 홀리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이선은 하버드 출신으로 선량하고 정직하고, 부정행위를 단호하게 물리치는 청렴이라는 무기로 1960년대, 부정과 부패와 뇌물과 차별로 얼룩진 미국 사회에서, 한 번 망하면 다시는 복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사실 또 그랬던 정글, 자본주의의 뒷골목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분명 정직하고 청렴해서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하여튼 교묘하고,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교활한 선량함으로.



10. 토니 모리슨, <솔로몬의 노래>

 

  토니 모리슨에게 처음으로 큰 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안긴 작품.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하고 조금 다른 아프리카 식 마술적 은유를 가미시키는 건 후속 작품 <빌러비드>와 비슷하지만 결코 작가의 후기작품들처럼 읽기 어렵지 않으니 도전해봄직 하다. 혼자 걷고 뛰며, 유치가 모두 나서 이제 다 컸다고 누구나 인정할 나이가 돼서도 엄마젖을 먹다가 동네 수다꾼 아저씨에게 들켜 졸지에 ‘밀크맨’이란 별명을 책이 끝날 때까지 들어야 되는 운명의 메이컨 데드 3세. 크게 말하자면 밀크맨이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미국 대륙을 뒤져 알아내는 내용이지만 그렇게만 말하면 재미없다. 초장, 1931년에 흑인들만 가입하는 보험회사의 모집원이 전혀 자비롭지mercy 않은 머시 종합병원의 돔 지붕 위에서 푸른색의 날개 비슷한 옷을 입고 하늘로 솟구치며 이야기는 시작하는데, 사실은 이게 수미쌍관법이라, 밀크맨의 흑인 조상과 원주민 조상들 역시 솟구치며 한 방에 아프리카와 옛 시절의 아메리카라는 고향, 자유가 무한히 보장되던 곳으로 순간이동하려는 꿈이 있었나보다. 어머나, 이를 어째, 엉겁결에 결론을 말해버렸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6-30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왕>은 폴스타프님께 땡스투 하고 사놨는데, 하반기에 읽을 것 같습니다.
<오버스토리>도 꼭 읽을게요. 돌아오신 것 환영합니다.

Falstaff 2020-06-30 15:1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