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노 부차티라고 하는 작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부차티를 실존주의니 마술적 사실주의니 한다고 하는데, 그런 거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누구나 살면서 끊임없이 달고 살아야 했던 존재의 상실감에 대하여 이보다 더 애절한 공감을 쓸쓸하게 그린 작가가 있었을까.

 

  디노 부차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북쪽으로 백 킬로미터 떨어진 벨루노의 주도 산 펠레그리노에서 수의사 어머니와 국제법 교수를 역임한 아버지 사이에서 1906년에 네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이이도 밀라노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밀라노의 매체에 취직해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일을 하면서 1933년부터 다수의 단편소설과 장편을 발표했으며 <타타르인의 사막>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산 펠레그리노. 흔히들 이탈리아라면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만 생각하는데, 이곳은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북위 46도 지역. 9월에 벌써 눈이 오고 3월까지 녹지 않는 지역. 그리하여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북쪽에 광활한 스텝이 펼쳐지는 산악지역을 그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겠지.

 

  이제 막 고생스러운 생도시절과 함께 풋풋한 청년기까지 끝내버린 초급장교 중위 조반니 드로고. 9월의 어느 아침, 홀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최초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출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요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친구 프란체스코 베스코비와 함께 요새로 통하는 골짜기 입구에 도착해 이별을 고한 다음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부차티의 소설을 마술적 사실주의 운운할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산그늘이 지고 자줏빛 어둠이 골짜기에 들어찼을 때 거대한 규모의 군사시설과 맞닥뜨린다. 오래되고 황량한 건물, 성벽과 주변 풍경 등 모든 게 음산하고 냉랭한 분위기. 입구를 찾을 수도 없고 불이 켜진 창문도 하나 없는 거대하지만 황량한 곳. 이때 부랑자나 거지로 보이는 남자가 자루를 하나 들고 지나가서 드로고는 요새에 관해 물어본다.
  “이제 이곳에는 요새가 없습니다. 전부 폐쇄되었지요. 인적 끊긴지 족히 십 년은 될 겁니다.”
  드로고가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니 저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기하학적 구조물이 선을 긋듯 한 윤곽이 보인다. 사람이 닿을 수 없으리만치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한 성.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곳. 그곳이 바스티아니 요새다.
  산길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이 되어 다시 말에 오르니 골짜기 저편 길에 말을 탄 대위가 가고 있다. 모자를 벗어 아는 척을 해봤으나 본 것 같지 않아, 무례한 짓인 줄은 알지만 크게 고함을 질러본다. 대위는 말을 멈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일단 마음이 놓이는 드로고. 30분 쯤 지나 두 길이 서로 합쳐져 만난 대위는 마흔 살 정도로 이름을 오르티츠라고 한다. 대위는 18년 동안 바스티아니 요새에 근무했으며, 드로고와 같은 왕립 사관학교 출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고, 여전히 눈앞에 나타나는 점점 더 높은 길을 걸어 정오 무렵에 드디어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하는 조반니 드로고.
  그곳은 오래되고 낡은 2급 요새. 죽은 국경선. 산맥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광막한 스텝지역은 백 년 전과 똑같은 상태로 놓여 있고 저 북쪽 가는 푸른 선처럼 보이는 숲 너머에는 타타르인이라 칭하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 그러나 최근 백여 년 동안 그들을 본 사람이 없는 비어버린 국경, 그리고 요새. 30 킬로미터 떨어진 가장 가까운 산로코 마을 말고는 아무런 즐길 것이 없는 극도로 외진 장소. 큰 꿈을 갖고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한 드로고는 곧바로 도시 근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그러나 노란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오르티츠 대위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성벽 너머로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 근거 없는 환상과 비슷하게 다가오는 석양 또는 황혼의 빛을 받아 위엄을 더하는 암벽이 다가온다. 그것을 바라보는 오르티츠 대위의 얼굴에 기쁨과 슬픔이 섞인 엷은 미소가 서서히 번져가는 모습. 드로고 중위는 북쪽에 있다는 타타르인의 사막이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진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장소, 황량한 스텝이나 사막을 향한 로망이 있다. 그리하여 내 소원은 몽골의 초원이나 모래 속에 석굴이 잠긴 비단길을 따라가야 하는 서역지방,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가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리는 듯 감정이 뭉클하다. 연이은 거대 암벽에 석양이나 아침놀이 비쳐 붉은 색깔이 칠해지는 반대편으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지평선 너머 또 다른 지평선.
  이 소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런 광경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명예로운 죽음과 성취를 소망하는 군인들이 외딴 요새에서 벌어질 전투와 용맹의 시범을 가망 없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다 사라지는 상실.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만 하다 평생을 보내버리는 요새의 파수병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절절한 절창.
  책을 읽고 이번만큼 독후감 쓰기 어려운 적도 별로 없었다. 아름답지만 황량한 산악지역과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돌과 먼지와 바람의 사막지역을 배경으로 얼마나 독자의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지. 무대가 군대라서 그렇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실패자 의식. 당신도 이 감정의 조금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을 더 아리고 아리게 읽을 수 있을 터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작품과의 합이 조금쯤 필요할 듯.

 

  소설 속 초원을 넘어 이쪽 요새를 향해 진군하는 북국의 군사들이 나올 때, 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츠>를 떠올렸다. 저 끝도 없는 벌판에 오밀조밀한 까만 점들이 점점 다가오면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나 했다가 드디어 높은 음정의 군호와 함께 둥근 칼을 흔들면서 질주해 쳐들어오는 타타르 병사들. 거대한 스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요새 도시 키테츠는 갑자기 타타르 군대의 눈에서 사라져버리는 반면, 바스티아니 요새엔 한 대의 안락하고 화려한 사륜마차가 도착한다. 저 먼 먼 날 조반니 드로고가 왔던 길을 따라서.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5-14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별 다섯! 레삭매냐님도 별 다섯 주셨던 것으로 기억... 기대합니닷.
폴스타프 님 사막 좋아해서 <둔황>도 좋아하셨군요! ㅋㅋ

Falstaff 2021-05-14 09:47   좋아요 1 | URL
넵넵넵! ㅋㅋㅋㅋㅋㅋ
<둔황> 칭하기를, ˝나만의 명작˝ ㅋㅋㅋㅋ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요!!!

유부만두 2021-05-14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워 보이는데요, 오늘 전 만화만 볼겁니다. 일단. 보관..(주섬주섬)

잠자냥 2021-05-14 10: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유부만두 님 서재 ‘보관함의 달인‘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14 10:4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보관함의 달인...

유부만두님, 이거 어렵지 않아요. 읽으면 직빵으로 접수됩니다!!!
마음 여린 사람은 울지도 몰라요. ㅎㅎㅎ

새파랑 2021-05-14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라니. 왠지 제 취향에 딱 맞을거 같아요 ㅋ 아리게 읽을 수 있다니~!!

Falstaff 2021-05-14 12:09   좋아요 3 | URL
아, 진짜 좋습니다.
저처럼 사막이나 스텝에 대한 로망이 없어도 이 책은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초란공 2021-05-14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흠답다 하셔서 저도 슬그머니 장바구니로~^^

Falstaff 2021-05-14 13:58   좋아요 1 | URL
옙. 좋은 선택입니다! ^^

바람돌이 2021-05-1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이 가기전에 읽을 책으로 줄 세워놓았어요. ^^

Falstaff 2021-05-14 15:4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만족하실 겁니다!

붕붕툐툐 2021-05-14 2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리뷰를 쓰기 힘든 책도 존재한단 말입니까? 왠지 황량할 거 같은 제목인데 실제로도 아리게 읽을 수 있다니, 기대가 됩니다!!

Falstaff 2021-05-15 11:00   좋아요 1 | URL
그럼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랬다가는 책의 결론에 너무 가깝게 가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책이 딱 그렇답니다. 그래서 결국엔 별 내용 없이 소설 주변에서만 왔다리갔다리,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독후감이 돼버리는 거예요. ㅠㅠ

또 시집 읽고 쓰는 독후감은 언제나 어려워요. 지금도 시집 읽은 독후감 쓰려 랩탑 열고나서 한 줄도 못쓰고 그냥 앉아 있는 거랍니다. ㅋㅋㅋㅋㅋㅋ
 
한눈팔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열면 원서의 제목이 <길가의 풀 道草>이다. 어떤 내력으로 이게 <한눈팔기>가 됐을까? 엉뚱한 제목은 아니지만 원래의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터인데. 내가 아는 분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가장 좋아하는 잠자냥 님의 컬렉션을 보면 출판사 이레에서 나온 책은 제목을 <길 위의 생>이라 뽑았다. 그럴 듯하다. 풀을 한 살이라고 바꾸었을 뿐이니.
  나쓰메 소세키는 나한테 찰스 디킨스 비슷한 인물이다. 두 양반의 작품 성격은 판이하지만, 판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저울의 양 끝에서 팔짱을 낀 채 서로를 꼬나보며 서 있다고 하고 싶은데, 내겐 뭐가 비슷한가 하면, 막상 읽어보면 확 다가오는 친숙감도 별로 없고, 큰 재미도 없어서 에이 이 양반들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음에도, 인터넷 서핑 중에 안 읽어본 이들의 책이 눈에 띄면 어느 새 보관함에 들어 있고, 또 어느새 장바구니를 거쳐 아파트 현관 앞의 택배 박스에 들어 있게 된다는 거. 근데 이게 내가 앓고 있는 질환은 아니다. 병은커녕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언급을 했듯, 이게 소세키 파워 아니겠느냐, 주장을 해야겠다. ‘소세키 파워’라고 발음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한눈팔기>는 일본산 찌질이, ‘겐조’라고 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자기 몸에서 버리고 온 먼 나라의 냄새가 배어있는 사람. 이 냄새, 이게 설마 정말로 체취 비슷하게 비강 깊숙한 곳에 있는 후각중추를 자극하는, 피부 분자의 브라운 운동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읽자마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 먼 나라가 영국이고 겐조가 소세키 본인의 분신 또는 일부라는 것도. 겐조 스스로가 이런 냄새, 즉 이국적 분위기를 싫어하지만 그러면서도 냄새 속에 스민 긍지와 만족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면서 은근히 풍기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떠난 것이 1900년, 노베첸토.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개화된 나라 일본이라고 해도 유럽의 중심으로 유학을 갔다 온 것이 어찌 어깨에 힘을 줄 이유가 되지 못할 수 있었을까.
  소세키 본인이 아버지의 두 번째 정실 아내가 낳은 막내로, 늦둥이의 탄생이 남부끄러워했던 부모에 의하여 유·소년기 때 동네 고물상(또는 배추장수)을 거쳐 어느 부부에게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소세키를 입양한 부부는 자신들이 늙은 다음에 노후 부양을 위해 소세키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하는데, 이 장면이 책 속에서 겐조를 입양한 시마다 부부의 모습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마다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입양한 겐조를 다시 생부모 집으로 복적復籍시키는 과정에 친부모가 그간 겐조를 부양하는데 들어간 시마다 부부의 비용 등을 정산하고,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을 것임을 문서로 작성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나. 이렇게 겐조 가족과 시마다 가족은 금전적 결산을 통해 완벽하게 절교 상태로 돌입하여, 이후 겐조가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취직을 하고, 당시만 해도 잘 나가던 공직자의 딸과 혼인을 하고, 맏딸을 낳고, 영국유학을 다녀오고, 둘째딸을 낳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낸다. 소세키도 혹시 이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설은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니 짐작만 하고 넘어가자.
  어느 비 오는 날, 겐조는 비옷도 없고 장화도 없이 그냥 우산만 쓴 채 외출을 하게 된다. 길을 가다 인력거 집 바로 앞에서 어느 노인을 마주친다. 아무리 적어도 육십오륙 세.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성하지만 비 오는 날 모자도 없이 외출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노인은 겐조가 지나갈 때까지 유심히 바라보고 이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난다. 며칠 후, 또다시 외출을 한 겐조 앞에 다시 등장한 모자를 쓰지 않은 노인. 겐조가 살아가면서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중류 이하로 살고 있는 외모를 한 것을 본 겐조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부유하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이가 한 시절 자신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남자, 시마다 씨. 일찍이 교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인물로, 겐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극도로 인색하고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인심을 잃었었다고 저 먼 기억들이 조금씩 새롭게 떠오른다.
  글쎄, 이게 어떤 기분일까. 7~8년 엄마, 아빠로 알고 살다가 파양을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는 느낌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한눈팔기>는 시작한다.
  영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겐조. 그동안 부유하던 처갓집은 공직에서 쫓겨나고 주식에 실패, 금광에 투자한 것도 실패를 해 거의 거덜이 났고, 이복누나에게 매달 조금씩 용돈을 부쳐주었는데 용돈을 조금 올려주기를 부탁한다. 동복형은 장례식에 입고 갈 하카마(일본 전통의상 중 남성 정장 바지)를 겐조에게 빌려 입어야 하는 신세. 자기 월급 130엔 가지고 인색한 아내가 아무리 수건 짜듯 해도 결국엔 결혼할 때 입고 온 기모노를 전당포에 맡겨야 하는 살림. 여기다 겐조는 경제 개념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소학교만 나온 아내보다 더 완고한 의식으로 무장해 자기밖에 모르는 천생 샌님. 앞뒤 아래위 왼쪽 오른쪽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 비빌 언덕이 없는 신세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자 안 쓰는 노인이자 옛적의 아버지 시미다. 처가에선 장인이 은행 차입을 위한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은행 보증 서주는 게 지옥을 향한 하이웨이인 줄은 들어서 아는 겐조는 보증 대신 친구의 친구에게 4백 엔을 빌려 장인에게 넘겨주고, 이제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한 시절의 아버지가 자기 집에 들를 때마다 돈을 뜯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지독한 우연인지 역시 한 시절의 어머니도 등장해 한 번 올 때마다 5엔씩 교통비 조로 받아간다. 대학교수 월급이 130엔이니까 5엔이면 얼마나 될까? 여기서 끝나나, 어딜. 아내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 올라 작품 후반에 가면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셋째 딸을 겐조의 손에 낳아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생활전선으로 몰린다고 할 수 있을 것.
  솔직히 얘기하자. 겐조. 정말 지질한 남자다. 딱 한 가지, 남보다 공부하는 머리 좋아 영국 유학을 한 덕분에 사회적 가치가 오른 대학교수일 뿐,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내와 비교해도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천생 꼰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책이 끝날 때까지 하나도 개선되지 않는 속물. 아내에 대한 변하지 않는 우월감에 전 전근대적 가부장. 근데 이렇게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귀엽다. 왜 그럴까? 이건 나쓰메 소세키가 한 ‘인간’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의 어느 소설 주인공이 <한눈팔기>의 겐조처럼 할 것, 해줄 것 다 하고, 다 해주고 칭찬은커녕 오히려 욕(아니면 적어도 쪼잔한 비난)을 먹겠는가 말이지.

 

  그런데, 소세키를 읽는 덴 이런 스토리도 자잘한 재미가 있지만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일본인들 특유의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압권이다. 이건 일본인이 아니면 습관 속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흉내 내기 어려운 세밀화라고나 할까, 하여튼 사소설적 하이퍼 레알리즘 비슷하다 해야 할까 싶은 감각과 특색 있는 의식의 충돌이랄 수 있을 것. 초두에 디킨스와 소세키가 저울의 양 극단에서 서로 꼬나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디킨스는 죽어도 소세키처럼 쓰지 못했을 것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지만, 도무지 두 양반 다 읽지 않고 그냥 넘기긴 지극히 섭섭하다는 공통점. 그리하여 어감은 좀 그렇지만 독후감의 마지막을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소세키 파워!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5-13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도, 별 다섯은 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독자들이 줘서 말입니다, 별 네 개에서 멈췄습니다.
내돈내산은 별 네 개가 만점?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4 | URL
ㅋㅋㅋ 그래서 전 제 돈 주고 산 책 별 다섯 개 줄 때 아주 쾌감을 느낍니다. ㅋㅋㅋ 이게 진짜 진솔한 별 다섯이다!!!! 막 이러면서 ㅋㅋㅋㅋㅋ

tobewhat 2021-05-13 10: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어 道草가 길 가의 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길 가는 도중 딴짓을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자는 내용도 고려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0:13   좋아요 2 | URL
아, 그렇습니까. 그래 모르면 병이라니까요.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5-13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소세키 파워 ㅋㅋㅋㅋ 폴스타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 처음 소세키 읽었을 땐 이게 뭐야... 되게 심심하네 했는데, 그 심심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소세키 작품은 다 읽었는데, 그걸 또 읽고 있더랍니다(제가 한 번 읽은 책 또 읽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넘나 많아서리...). 디킨스는 재미나서 계속 읽는다면 소세키는 심심한 맛에 자꾸 읽는 것 같아요. 암튼 그것이 소세키 파워 같습니다.

Falstaff 2021-05-13 10:27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디킨스하고 소세키는 정말 저울의 완전 반대쪽이예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겐조=소세키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세키 정말 한 인간으로는 좋아하기 어려운 남자 같아요. 영국 유학 시절 부인한테 보낸 편지 보면 정말.... 이빨 닦았냐는 둥 머리는 어떻게 손질하라는 둥, 잔소리 장난 아님... 그래도 제자들은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으니 ㅋㅋㅋㅋ 사회적으로 명성 있는 남자들이 집안에서도 좋은 남편이기 어렵다는 걸 보여준 사례1. ㅋㅋㅋㅋ

Falstaff 2021-05-13 10:30   좋아요 3 | URL
악. 그 정도예요? ㅋㅋㅋ 저런 잔소리 하는 건 아내가 무척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건데 하긴 당시에 눈 맞아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근데, 그러면 더 잔소리 안 하게 되는 거 아닌가....가 아닌가요? ㅋㅋㅋㅋ

제자가 소세키 칭찬하는 게, 윌리엄스가 스토너 쓰는 거하고 뭐가 달라요. 인간적인 면은 다 꼬부쳐놓고 눈에 좋게 보이는 것만 열라 나열하면 말입니다.
전 스토너를 계기로 모스크바의 로스토프 백작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니까요! ㅋㅋ

잠자냥 2021-05-13 10:40   좋아요 4 | URL
나쓰메 소세키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잠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하도 웃기고 어처구니 없어서, 제가 메모해둔 내용입니다. 이빨 닦았냐는 건 제 기억 오류고 틀니 하란 잔소리였네요-

-------------------------------------------

틀니는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머리는 둥글게 묶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자주 감으시오. (8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산 후 경과가 좋아 건강해지면 틀니를 하시구려. 돈이 없으면 장인께 빌려서라도 하시오. 돌아가서 갚아 드리겠소. 머리는 묶지 않는 편이 머리카락을 위해서도 뇌를 위해서도 좋소. 오드키닌이라는 물이 있소. 비듬이 생기지 않는 약이오. 써 보시구려. 탈모가 멈출지 모르오. (9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무엇보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내가 아내에게만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내니 기특하지 않나. 그런 다각형 얼굴이라도 돌아가면 좀 잘해 줄 생각일세. (96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편지의 분위기를 보아 밤에는 12시를 넘기고 아침에는 9시, 10시경까지 자는 듯하구려. 밤은 그렇다 치고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도록 하시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병이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 그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9시나 10시까지 자는 여자는 첩이나 창부, 하급 사회의 여자들뿐이라 생각하오. 적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그렇게 단정치 못한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소. 야라이초 3번지를 한번 살펴보오. 당신을 제외하고 그런 부인들은 하나도 없소. 이건 유학 전에도 항상 하던 말 같은데 당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려. 나쓰메의 부인은 아침 9시, 10시까지 잔다고 수군거리면 좀 창피하지 않겠소.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당연히 신병은 특별한 일이지만 요전의 편지에 의하면 아주 건강해졌다고 하니, 몸에 이상 없는 한 일찍 일어나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오. 게다가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소. 후데가 성인이 되어 시집을 가서 당신처럼 9시나 10시까지 잔다면 나는 미래의 사위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일 게요. 당신 부모님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노력해서 자신의 결점을 없애는 것이 인간 제일의 의무일 게요. (124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처: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Falstaff 2021-05-13 10:49   좋아요 5 | URL
와와와...... 이건 정말, 너무 하네요. ㅋㅋㅋㅋ

저도 (19세기 말 태생이신)외조부가 외조모에게 쓰신 편지 읽어본 적 있는데, 아내를 사랑하는 (아니면 적어도 척하는) 남편이었던지 ‘무뚝뚝한 사랑‘이 은근히 깔려 있어서,
소세키의 편지는 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버리는 데요! 세상에나!!
거 참. (근데 웃음나는 건 참을 수가 없군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3 21:12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하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ㅋㅋ

mini74 2021-05-13 1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주인놈이나 다이스케나 너무 쪼잔하다고 일본남자 아웃 이라던 친구가 생각나네요. 일본남자도 괄괄한 내 친구를 아웃할 거 같지만 ㅎㅎㅎ

Falstaff 2021-05-13 11:3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근데 아무리 찌질하고 쪼잔해도 그걸 구태여 찾아 읽잖아요.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5-13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찌질한데 나긋한 문장과 이야기를 어느새 읽고 있는 나;;;라는 이상한 상황에 어이없지만 그런게 또 매력인가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2:15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상하지 않습니다. ㅋㅋㅋ
소세키 파워라니까요!!!

새파랑 2021-05-13 1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겐조는 향수 아닌가요? ㅎㅎ 몇 작품 안읽어봤지만 소세키 책의 주인공은 전부 경제관념이 없는것 같더라구요 ㅋ 알라딘 우주점 구경가면 항상 소세키 작품 검색해봅니다~

Falstaff 2021-05-13 12: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소세키 주인공이 경제 개념 없는 건, 소세키가 없어서 그래요.ㅋㅋㅋㅋ
 

흠. 뭐 많이 사지는 않았다. 워낙 많이들 사서 읽는 곳이라 함부로 책 샀다고 자랑하면 쪽팔리기만 하다는 걸 잘 아는 나는, 이런 방식으로 자랑해야겠다!

 

오늘 현재 보관함에 남아 있는 책 리스트!

 

보관함 (거의)다 비웠다.

아, 깔끔하니 좋다.

 

 


댓글(39)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21-05-12 1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다섯권이라니! 성공한 삶 살고 계시네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2:45   좋아요 3 | URL
그쵸? 저도 그게 너무나 놀라웠음.... 와 정말 대박.......
다락방 님은 몇 권? 아니 몇 백 권? ㅋㅋㅋㅋ

Falstaff 2021-05-12 12: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고맙습니다.
저는 책을 살 때 거의 예외 없이 꼭 보관함에 있는 것들만 삽니다. 그래서 낚시하신 분들에게 땡투를 못하게 만드는군요. ㅜㅜ
오늘부터 몇 권 또 보관해야겠어요.

다락방 2021-05-12 13:01   좋아요 5 | URL
저 잠자냥 님 735 보고 이 분 너무 심하시네, 하고 제 보관함 갔다가1,967 이라는 숫자를 보았답니다. 인생..

잠자냥 2021-05-12 13:12   좋아요 1 | URL
다 부장님이 나를 능가할 줄 알았지만 천 권이 넘을 줄이야.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2: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많이 사는 것보다 많이 읽는 게 중요하죠... 전 너무 많이 사기만......-_-
그나저나 보관함에 다섯 권밖에 없었다는 게 더 놀라워요!!!! 저도 모르게 ‘대박‘하고 중얼거림.
제 보관함에는 현재 총 73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프다. -_-;

coolcat329 2021-05-12 12:47   좋아요 3 | URL
헉! 정말이십니까?!
와~~~저는 완전 걷지못하는 베이비네요.

잠자냥 2021-05-12 12:49   좋아요 5 | URL
;;;; ㅋㅋㅋㅋ 꼭 사겠다는 것은 아니고... 음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겠다 싶은 것도 일단 담아둡니다...;;;;;; 시간이 지나면 가끔 보관함에서 삭제하기도 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5-12 12:56   좋아요 5 | URL
전 1,113권요;;; 그나마 장바구니는 얼마전에 비워서 102권 밖에 없어요.

Falstaff 2021-05-12 12:59   좋아요 3 | URL
우와.... 735권, 해서 까무러칠 준비를 했더니 유부만두 님은 1,113권에다가 장바구니엔 102권!! 졸도가 아니라 완전 사망 수준입니다!!

유부만두 2021-05-12 14:05   좋아요 3 | URL
책에 깔리는 게 포스터 오마주라며;;;

미미 2021-05-12 12: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신선한 충격입니다!! ㅡ장바구니 들어감 자꾸 경고문구 뜨고(˝예전꺼 지운다? 좀 지워 응?˝뭐 이런느낌), 보관함에 2873권 있는 사람ㅠㅇㅠ

coolcat329 2021-05-12 13:00   좋아요 5 | URL
허걱! 세상에 보관함에 그렇게 많이 들어가나요? 와...저는 몇 십권 있는데, 보관함을 좀 채워줘야겠습니다. 이런것도 따라해야 맘이 놓이는 이상한 알라딘...

Falstaff 2021-05-12 13:01   좋아요 3 | URL
아이고.....위 댓글 쓰자마자... 1,113권에 사망인데 미미 님께선 또 2,873권이라시네요. 와....
서재 동무님들 보관함들 모으면 책방 하나 차릴 수준이군요!
커밍 아웃 수준입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2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기분이 쬐금 좋습니다. 저 보트하우스 있거든요...😅😅

Falstaff 2021-05-12 13:02   좋아요 2 | URL
ㅋㅋㅋ 그거 재미나요? 어째 보관중이긴 합니다만 선뜻 장바구니로 보내지지가 않아서 차일피일 품목이거든요.

coolcat329 2021-05-12 13:03   좋아요 4 | URL
아직 안 읽었습니다.ㅠ 읽고서 말씀드릴 수 있다면 정말 너무너무 기뻤을텐데요. 근데 올해 읽을 계획입니다!

Falstaff 2021-05-12 13:0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입지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3:15   좋아요 3 | URL
욘 포세 재미...없;;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2 13:19   좋아요 2 | URL
😨🥺😭
그렇지만 기대를 안하고 처음부터 재미는 기대말자! 라고 맘먹고 읽다보면...ㅠㅠ아흑

Falstaff 2021-05-12 13:21   좋아요 3 | URL
보트하우스가 보관함에 가장 오래 있는 책입니다 ;;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3:22   좋아요 3 | URL
보관함에 오래 담았다가 결국 삭제한 책이 욘 포세 책입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2 13:39   좋아요 2 | URL
ㅋ저 보트가 그렇게도 그런가요? 아니면 다른 작품때문에 그러신건가요? 저 지금 두분께 또 낚이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5-12 13:46   좋아요 3 | URL
전 다른 작품 읽고 욘 포세는 음 내겐 두 로베르트 (발저, 무질)과구나 했습니다. 두 로베르트처럼 난해하지는 않은데 지루함은 비슷 ㅋ 보트하우스는 좀 재미나 보이지만 안 읽을 거예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12 13:52   좋아요 3 | URL
아, 로베르트네 동네군요. ㅎㅎㅎ 고마운 정보입니다!

coolcat329 2021-05-12 13:54   좋아요 3 | URL
아이고, 로베르트 ㅋㅋㅋ
그래도 작은 빛이 보이네요. 다른 작품이었다니
...휴

mini74 2021-05-12 13: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5권은 해탈아닙니까 ㅎㅎ

Falstaff 2021-05-12 13:44   좋아요 3 | URL
앗, 그렇습니까? ㅋㅋㅋㅋ

새파랑 2021-05-12 14: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256권 인데 다른분들에 비하면 소박하네요 ㅋ 와 5권 존경입니다~!!

Falstaff 2021-05-12 14:22   좋아요 3 | URL
저도 오늘 경악입니다.
여태 가장 많았던 때가 50권도 안 됐거든요. 와우 근데, 우와, 몇 천 권씩, 크.

syo 2021-05-12 14: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syo기자입니다. 오늘은 장바구니의 장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장을 급습했는데요......

Falstaff 2021-05-12 14:23   좋아요 3 | URL
에이, 장터화, 아닙니다. 뭘 팔아야 장터화지요. ㅋㅋㅋㅋㅋ
오늘은 보관함 커밍 아웃. 사이오님은 몇 권이나 있으세요? ㅋㅋㅋㅋㅋ

syo 2021-05-12 14:24   좋아요 3 | URL
저는 보관함에 2권, 장바구니에 9권 들었는데요. 심지어 장바구니 책 중 8권은 이번에 적립금 타서 친구들한테 뿌리는 선물이고.....

제가 이상한 걸까요? ㅋㅋㅋㅋㅋㅋ 😆

Falstaff 2021-05-12 14:26   좋아요 3 | URL
아이고 반가운 초사이언 사이오님!
분명 우리가 정상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5-12 14:27   좋아요 4 | URL
그쵸? ㅋㅋㅋㅋㅋㅋ
저 사람들 다 무서워..... 장바구니라는 건 어쨌든 물건 넣고 들고 다닐 수 있을만큼 담는 거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5-12 15: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장바구니에 56권 들어
있습니다.

물론 다 살 책들은 아닙니다.

Falstaff 2021-05-12 16:07   좋아요 4 | URL
ㅎㅎㅎ 다 사셔도 좋지요!

하이드 2021-05-12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바구니도 1000권 넘어서 맨날 비우라고 안내 떠요;;; 보관함은 얼마나 있나보니, 3797권 있네요 ^^

Falstaff 2021-05-12 20:24   좋아요 1 | URL
우와.... 장바구니 천 권 이상은, 제 경험상, 아마존, 타워레코드, 일본 거 어디냐, 하여간 전세계 모종의 장소를 통틀어서 처음 들어보는 숫자입니다. @@
아이고.... 넙죽, 일단 큰절 한 번 올리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 시인선 280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은의 세 번째 시집. 물론 처음 읽는 조은이다. 이름이 참 재미있다. 조은. 검색해보면 조은 DA, 조은 주택, 조은 푸드 육가공, 조은 성모 안과의원, 조은 타이 마사지 등이 나오고 이어서 시인 조은의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1960년 안동 생. 1988년에 데뷔하고 몇 권의 시집을 낸 이력밖에는 정보를 구할 수 없다. 특히 바이오그래피는. 하긴 그런 거 알면 뭐 하나. 시인이 시만 좋으면 그만이지.  조은의 시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시집을 샀고, 읽었다. 이 시인 역시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 이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이 쓴 또 한 권의 나와 맞지 않는 시집을 읽었다. 왜 시인들은 이리도 무거울까. 뭐 진짜로 만나면 내가 번쩍 들 정도의 체중밖엔 나가지 않겠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이젠 궁금증을 넘어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 중국에서 열린 시인대회에 참석해 중국의 유명 여류 시인한테 다른 건 몰라도 오줌발 하나는 지기 싫어 중국식 개방형 화장실에서 힘을 줘 오줌을 눴다는 시를 쓴 김민정이 그리울 지경이다. 하긴 지금은 만 61세지만 조은이 이 시집을 낼 당시의 나이가 43세.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직도 그렇다면 좀 문제지만.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부터 누군가가 죽는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
  동네 개는 모두 짖어대고
  불을 켜려 허둥거리며 나는
  재빨리 모르는 한 죽음에다
  나의 죽음을 겹쳐본다

 

  누군가 죽었다
  누군가 죽었다

 

  어둠의 노른자위에 있는
  나의 손 닿는 어딘가가 썰렁하다
  이곳 어딘가는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 있었다
  가쁜 소리를 내던 문도 숨을 멎었다

 

  한때 숨쉬던 흙덩이는
  오열 속에 해체되고 있으리라

 

  이웃들도 불을 켠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  (전문)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죽음의 사발통문.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시인이 들은 것은 울음소리다. 누구의 울음일까. 둘째 연에서 보듯 동네 개가 한 마리 짖으니 모든 동네의 개들이 이를 따라 짖는 걸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어서 이것을 들은 동네의 암캐 수캐들이 따라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짖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사람 또는 개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 허둥지둥 불을 켜기 위해 손짓을 하는 시인은, 자신의 방에서 ‘고통을 깨우며’ 누군가가 죽었다고 지레짐작을 하며 거기다 자신의 죽음을 겹쳐버린다. 이 시에서 자신이 잠자고 있던 방은 이 시집 전체에 중요한 기재로 등장한다. 시인은 이미 죽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곳 어딘가, 시인이 몸을 뉜 방 어딘가 세상을 버린 자, 죽은 자와 닿아 있다. 문도 숨을 멎었으니 이젠 다시는 열리지 못할 것. 이 문은 다른 시 <문고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삼 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하략)

 

  숨을 멈춘 문은 문고리가 떨어져 이제 열고 닫히는 기능이 없어지면서, 소통의 장소인 문이 단절의 대명사인 벽으로 바뀐 것. 사람을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은 죽음 또는 묘혈로써의 문이 숨을 멎은 방이다. 이번에 시집 좀 읽으려고 여덟 권이나 사 놓았는데, 죽음이라, 다른 시집들도 이러려나.
  두 번째로 실린 시에는 새로운 시적 상징이 등장한다.

 


  한 번쯤은 죽음을

 


  열어놓은 창으로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히 방으로 들어왔다
  창틀에서 말라가는 새똥을
  치운 적은 있어도
  방에서 새가 눈에 띈 건 처음이다
  나는 해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새들은 먼지를 달구며
  불덩이처럼 방 안을 날아다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숨죽이고 서서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비상의 순간을 보고 싶을 뿐이다
  새들은 이 벽 저 벽 가서 박으며
  존재를 돋보이게 하던 날개를
  함부로 꺾으며 퍼덕거린다
  마치 내가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는 것처럼!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한다면……  (전문)

 


  첫 번째 시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에서 죽음 또는 묘혈의 상징이 된 방에 그만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하게 들어왔다니까 두 마리인 듯하다. 방의 주인 ‘나’는 새들을 방관한다. 해치지도 않고 방해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둔다. 새가 정말로 방 안으로 들어온 경험이 있으신가? 투명한 창문이 아니라면 벽에 부딪히지 않는다. 좁은 방이라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사무실에선 그렇다. 대신 투명한 유리벽에 온몸을 쿵쿵 박아 죽음에까지 이른다. 시인은 이 모양을 자신이 마치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 하는 것처럼 보고 있다. 새들이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결코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갈 수 없단다. 한 번쯤 죽음도 생각해보면 혹시 모르겠다면서. 그럼 새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허락도 없이 방에 무단침입을 해서 쿵쿵 머리를 박고 있을까.

 


  새

 


  새가 내 머리 위를 불덩이처럼 맴돈다. 언제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애써 침잠시킨 어두운 한 세계가 역행하고, 숨골이 활짝 열리는 열기. 어떻게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웅크린 내 몸이 깔고 있는 지렛대 같은 어둠을 극도로 부풀리며 새는 활기차게 난다. 내 몸에서 번쩍 눈을 뜨는 먼지들, 전신을 뒤집으며 소용돌이치고, 휘청거리며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깜깜한 길 하나. (전문)

 


  ....란다.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있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깜깜한 길? 맞아? 그럴 리가 있나. 물론 조은의 시가 전부 이런 건 아니다. 이 시집에서도 더 눈에 띄는 건 탄생과 죽음이란 사이클의 연속, 죽음이 있는 곳에 탄생이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인 장면이긴 하다.
  조은의 시가 좋은 시라고들 한다. 하여튼 조은의 시가 시를 감상하는 재주가 없는 내게 와서 고생을 좀 한 건 확실하게 맞는 거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5-11 1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석을 해주신 부분들이 흥미진진한걸요? 맞지않았다고 하셔도 궁금해질만큼요ㅋㅋ시인은 아마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침잠했었나 봐요.

Falstaff 2021-05-11 10:3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잘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전 시도 잘 몰라요. 요즘 시집을 대강 이런 식으로 읽더라고요. 그래 저도 모르게 시를 ‘감상‘하는 대신 따져본 거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쉽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창비세계문학 84
로베르트 무질 지음, 정현규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베르트 무질은 무려 열 권에 달하는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를 2권까지 읽었는데, 스스로 무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출판사 북인더갭의 안병률 사장의 번역이었으며, 반드시 완역이 나와야 할 책이라는 주장에 굳이 반대할 의견은 없으나, 직접 읽어본 독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안병률 사장에게 가장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게 딱 두 권만 번역하고 스톱 했다는 것이었다는 점 역시 밝혀두고 싶다. 왜냐하면, <특성 없는 남자>를 읽는 내내 소년 퇴를레스가 칸트를 읽을 때 느낀 것하고 비슷하게, “뼈밖에 없는 노인의 손이 머리에서 나사를 돌리듯 뇌를 빼내는 것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역시 작가가 로베르트 무질이었으므로 만일 이 책이 4백 쪽을 넘어가는 분량이었다면, 언젠가는 읽었겠지만 틀림없이 지금처럼 신간 안내가 뜨자마자 사서 읽는 일은 없었을 듯하다. 이 정도면 얼마나 덴 줄 아실 듯.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이 무질의 첫 작품인지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적어도 무질의 청춘 시대에 쓴 소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880년에 남부 오스트리아에서 엔지니어 집안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무질은 열네 살에 매리쉬-바이스키르헨 군사고등실업학교에 입학한다. 여기가 모르긴 해도 기숙학교일 것 같다. 무질은 군사고등실업학교에서 삼 년 만에 중퇴하게 되는데 이 학교에서 경험했던 것을 몇 명의 작가에게 작품으로 써보라고 제공했지만 아무도 시도를 하지 않아 자신이 직접 소설로 썼다고, 책 뒤편의 작품해설에 쓰여 있다. 왜 초기작품일 것이라 짐작했는가 하면, 열네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두뇌활동이 왕성한 사춘기 소년의 사변적 방황을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시절을 끝마치고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운 시간 안에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해서다. 이 작품이 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각광 받고 있는 기념비적 작품이라고들 하면, 독자의 감상은 별개로 하더라도, 뛰어나다는 뜻이라 당연히 작가의 젊은 시절에 썼을 것으로 추정했다. 존경하는 황순원도 <소나기>를 환갑이 넘은 나이에 쓸 수는 없었을 테니.

 

  첫 구절 “러시아를 향해 뻗은 선로 옆 작은 기차역”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당연히 이미 상당히 오래 연착한 기차는 아직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플랫폼에는 비교적 나이가 있는 부부와 한 무리의 명랑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젊은이들은 쾌활한 웃음으로 떠들썩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끈질긴 저항을 하는 듯하다.
  부부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동부에 인적이 드문 척박한 농경지의 작은 도시에서 궁중 고문관으로 있는 퇴를레스 씨와 부인으로 아들의 휴일에 맞춰 W. 기숙학교에서 아들의 면회를 끝내고 귀가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W. 기숙학교는 퇴를레스 씨에게는 먼 도시의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유명 기숙학교로 가계에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나라 최상류층 가문의 자제들이 졸업 후 대학진학, 군인,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으며 상류사회 교제를 위해서라도 이 학교 출신이란 추천 요건이 매우 중요한데다가, 어린 아이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이 입학시켜달라고 야심차게 졸라대는 바람에, 비록 나중에 많은 눈물을 피할 수 없었지만 허락하게 된 것이다.
  궁중 고문관. 말이 좋아 궁중 고문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궁중 고문관이었던 사람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궁중 고문관으로 열심히 일하고 극작을 쓰고, 소설도 쓰고 해서 인정을 받아 바이마르의 재상으로까지 출세한 인물. 궁중 고문관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감당하기가 좀 벅찬 학교였으니 혹시 퇴를레스 군이 외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랫폼의 명랑한 젊은이들은 소년 퇴를레스와 네 명의 친구.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모테, 호프마이어. 이 가운데 모테와 호프마이어는 잠깐 나왔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엑스트라 역할이고 젊은 남작들인 폰 바이네베르크와 폰 라이팅은 두고두고 퇴를레스 군과 갈등을 빚는다. 이들은 퇴를레스보다 두 살이 많은 동급생. 십대 중반에 두 살의 나이면 지력과 완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여 처음엔 두 친구를 존경하는 입장이었다가 서서히 동등해진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남자 기숙학교. 한국의 군대처럼 계급과 짬밥에 따라 명확한 서열이 있으면 차라리 덜하겠지만 다수의 동등한 어린 수컷들을 한 우리에 모아놓았으니 이건 애초에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 상태였을 것이다. 소년 퇴를레스 역시 입학과 동시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밤마다 베개를 적셨고 매일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난 소년은 부모를 향한 갑작스럽고도 애틋한 애정이 넘치는 단계를 거치고 이어서 향수라고 부르는 낯설고 새로운 상태에 이르다가, 향수가 사라진 영혼에 이번엔 일종의 공허함이랄까 허무 같은 것이 밀려온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것, 뭔가 긍정적인 것으로 어떤 영혼의 힘이며 내면에서 고통을 빙자해 시든 무엇. 마치 꽃을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첫 겨울을 보내는 어린나무처럼 빈곤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상태에 이른다.
  어떤 상태에 이르렀다고? “뭔가” 긍정적인 것. “어떤” 영혼의 힘. 고통을 빙자해 시든 “무엇.” 빈곤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상태”라니. 애매모호한 추상명사들의 나열. 이런 것들이 독자를 혼란의 소낙비를 맞게 만드는 요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무엇’, ‘뭔가’가 계속 나온다. 이것들이 뭘까.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을 혼란 속에서 끝마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드리는 힌트를 기억하시라. 이 추상명사로 요약할 수 있는 책 속의 무수한 사춘기 소년의 번뇌는 오성悟性,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자적對自的 인식을 말한다. 로베르트 무질은, <특성 없는 남자>에서도 숱하게 그러했는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지만 인식 밖에서 가능할 수 있는 현상에 집착한다.
  이 책에선 퇴를레스가 숙고하다 기어이 수학교사를 찾아 질문하게 되는 허수 √-1을 오성 밖의 인식으로 등장시킨다. 제곱하면 –1이 되는 가상의 수.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수의 제곱은 양수plus number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number가 있어 제곱을 하면 –1이 되는데, 이것을 ‘i’라고 한다. 이른바 허수다. 우리가 아는 평행선도 저 멀고 먼 무한대까지 확장하면, 다른 것도 아니고 평행선이, 만난다. 서울시장 오세훈의 빙모 사공정숙 선생이 평행선이 언젠가는 만난다는 것을 증명한 적이 있다.
  퇴를레스와 악당 친구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앞에 등장하는 동급생이 바지니. 바지니는 힘도 약하고 씀씀이가 좀 헤픈 아이인데 과자점 주인에게 외상을 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갚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돌려막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점점 더 큰 돈을, 더 많은 친구로부터 빌려야 했고, 급기야 아이들 수준으로는 제법 큰 돈을 바이네베르크의 잡낭haversack에서 훔쳐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장면을 발견한 것이 가학적 취미가 있는 라이팅. 라이팅은 곧바로 이 사실을 바이네베르크와 퇴를레스에게 전하고 곱상한 외모와 체격의 바지니를 그들의 공동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바지니를 불러 옷을 모두 벗기고 구타를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학대를 하고 모욕을 퍼붓는다.
  퇴를레스가 사춘기를 본격적으로 맞이하면서 줄곧 숙고의 대상으로 삼았던 오성 밖의 인식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영혼으로 전환되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이 심사숙고가 어떤 때는 열대여섯 살의 미성숙한 소년의 것이었다가, 어떤 때에는 이 작품을 쓸 당시의 무질, 즉 스물다섯 살의 성년의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 독자를 미궁으로 빠뜨려버린다. 애초부터 무질을 읽으면서 편하고 쉬운 작품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친애하는 이웃의 독자들이여, 이 분량, 250쪽 정도라면 다 읽을 때까지 집중할 수 있을 수준이니 한 번쯤 눈에 힘을 줘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선택한 후의 결과는 전적으로 당신 소관이긴 하지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5-10 09: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 바이네베르크가 동급생 바지니에게 바늘로 찌르는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읽으며 무려 39년 전의 군대 고참이 생각났다. 약간 검은 얼굴에 잘 생기고 (공부는 잘 하지 못한 것 같아도) 머리 좋고, 합리적 이유로 후임들 갈궈서 뭐라 할 말 없게 하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사람 취미가 나같은 졸병 차려 자세 시켜놓고 허벅지에 스테이플을 박아 넣는 거였다. 그새낀 지금 뭐하고 살까? 잘 살 거야, 잘 살 거야, 잘 살아라.
알고는 당할 수 없어서 항의하거나 몸을 피하면 고참들한테 참 괴롭힘을 당했는데, 내가 그랬다. 괴롭힘을 당할 때 당할지언정 그건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저열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항의를 했고, 오랜 시간 꽤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아, 난 군대에 극적으로 맞지 않는 인간이었다. 탈영 안 하고 만기제대한 것만 가지고도 기특하다, 기특해!

페넬로페 2021-05-10 09:56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은 제가 모르는 작가의 책을 어찌 이리 잘 알려주시는지^^과외비 안내고 과외받는 기분입니다.감사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예전에 군대 갔다 온 저의 남편에게 군대얘기 들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폭력적인 얘기가 많았어요 ㅠㅠ
그래서 생각보다 영창을 많이 간다고도 하더라고요^^

Falstaff 2021-05-10 10:01   좋아요 4 | URL
ㅎㅎㅎ 뭘요. 그저 조금 앞서서 읽어본 것 뿐입니다.
군대 얘기는 여기서 그만 하겠습니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서 말입죠. ^^;;;

잠자냥 2021-05-10 1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독일어권 작가들과 멀어지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로베르트 무질. ㅋㅋㅋ <벤야멘타 하인학교> 읽었을 때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100배는 더한 당혹감을 느끼게 해 준 로베르트 무질. 근데 참 재미난 게 이 로베르트(무질)가 저 로베르트(발저) 작품을 읽고 칭찬했대요. 로베르트끼리는 뭔가 통하는가 봅니다.

암튼 북인더갭에서 <특성 없는 남자> 2권까지만 번역하고 더 번역하지 않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ㅋㅋㅋㅋ 애초에 더 고마운 일은 무질이 이걸 미완으로 남겼다는 게 아닐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10 12:50   좋아요 3 | URL
아, 로베르트들이 또 한 건을 이미 했었군요! ㅋㅋㅋㅋ
19세기 ‘소설의 시대‘ 헤게모니를 프랑스와 영국에 뺐긴 분풀이로 20세기 들자마자 독일어 쓰는 애들이 일치단결한 건 맞는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