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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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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시간이자, 필요한 무엇이든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모아 가까이에 두면 마음이 놓였는데, 온기와 생각 그리고 중요하고 가치 있고 심지어 친숙하기까지 한 나만의 것을 깊은 구덩이 안에 묻어 놓고 내 손으로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몰려들어도 문제없었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혔고 빈틈없는 이가 온기와 고독 속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으니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벽을 더듬으며 입구를 찾아 헤매더라도 찾을 수가 없을 터였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머무르는 이와 떠나는 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누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포기할 방법은 없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배를 좋아하는 이들한테는 어떤 연대감이 들어. 무민파파만 해도 그래. 어느 좋은 날 배를 몰고 훌쩍 떠나 버리잖아. 완전히 자유롭게 말이야. 가끔, 그러니까 아주 가끔은 나랑 무민파파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아주 조금이지만, 아무튼."

 

스너프킨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불현듯 무민 가족이 그리워졌다.

'무민 가족도 성가시게 굴었어.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했지. 어디에서나 함께 있었고. 하지만 무민 가족과는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느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스너프킨은 놀랍고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긴 여름을 같이 지내 왔으면서도 무민 가족이 내가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지?'

 

이 책의 본문 시작 전에는 어머니께, 라고 씌어 있었다.

이 책과 쌍을 이루는 무민파파와 바다, 바로 앞 권의 본문 시작 전에는 아버지께, 라고 씌어 있다.

위험한 여름, 무민의 겨울처럼 짝을 이루는 책이다.

앞 권인 무민파파와 바다가 무민 골짜기를 떠난 무민 가족들의 이야기라면, 뒷 권인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무민 골짜기에 남아 있는 무민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책의 소개를 읽어보면 이 무렵 작가는 부모와 관련하여 상실의 일이 있었던 것 같고, 그로 인해 무민 연작 소설의 마무리를 이런 형식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런 배경 지식 없이도 이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늦가을에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읽고 있자니, 지나치게 몰입되어서인지 마음이 쓸쓸하고 호젓하다. 어쩌면 지금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몰입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무민 연작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9월이었다. 지금은 11월. 3개월 동안 8권을 천천히 읽은 셈이다. 올 가을의 독서는 또 이렇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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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파파와 바다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7
토베 얀손 지음, 허서윤.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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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겠지만, 계속 소풍을 가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는 끝나야죠. 그러다 갑자기 월요일 같아지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이 진짜라고 믿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나요......"

 

맞다. 즐거운 시간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 지나고 나면 정말 그 시간이 존재했을까, 아련하고 그리워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무민 연작 소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마치 아껴 놓은 과자를 하나하나 까먹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제 과자는 다 먹어 간다.

 

처음 무민을 읽기 시작했을 떄만하더라도 꽤 더웠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날이 추워지고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 한 해도 이렇게 가는구나, 그렇지만 그저 시간이 흐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민 가족이 성숙해졌듯이, 나도 일 년 동안 조금은 더 여물어졌겠지. 그리고 나에게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내가 만들어 갈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즐거움을 증폭시키는 것도 아쉬움을 소거하는 것도 돌이켜보면 새로운 책을 접하고 맛보고 음미하는 때와 늘 연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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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아이 - 아홉가지 무민 골짜기 이야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6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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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는 패터슨, 두 번째 이야기는 그것,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는 떠오르는 작품들이 너무 많았고, 여섯 번쨰 이야기는 독창적,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이야기는 친숙한 이야기를 살짝 비틀었고, 아홉 번째 이야기는 존재감이 부족했다.

 

첫 번째 이야기 봄노래

 

 '노래 짓기 좋은 저녁이군. 첫 소절에는 마음속 기대를, 두 번째 소절에는 봄의 우수를 그리고 나머지 소절에는 홀로 걸으며 느끼는 만족감과 끝없는 즐거움이 담길 새 노래를.'

 

 '내 노래에 시냇물이 들어가야겠어. 후렴 같은 자리에.'

바로 그 순간 폭포 낭떠러지에 있던 돌이 하나 빠졌고, 시냇물의 노랫가락이 한 옥타브 바뀌었다.

 

 그 순간, 스너프킨은 노랫가락이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작은 녀석의 간절하고 수줍은 목소리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디 아픈 게 틀림없어.'

 

 스너프킨은 늘 빌던 소원을 빌 뻔했다. 새로운 노래를 짓고 싶다고, 아니면 언제 한번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싶다고.

 하지만 스너프킨은 재빨리 마음을 바꾸어 말했다.

 "티-티-우우를 찾게 되기를."

 


두 번째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갑자기 배 속에서부터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마차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훔퍼가 마차 생각을 하자마자 유령 마차가 나타났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내달리려고 어두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유령 마차가.

 홈퍼가 말했다.

 "내 생각엔, 그러니까 나는 지금 십 년째 집을 찾아다니는 훔퍼 같아. 이제 집 가까이까지 왔고."

 


세 번째 이야기 재앙을 믿었던 필리용크

 

 "필리용크 여사님? 여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끔찍한 일 말인데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나요?"

 필리용크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끔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필리용크가 말했다.

 "사실 한 번도 없었어요.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죠."

 

 필리용크의 환상이 천천히 폭풍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필리용크의 집을 뒤흔든 폭풍보다도 훨씬 더 컴컴하고 사나웠다. 밀려드는 파도는 거대한 백룡이 되었고, 으르렁거리는 토네이도가 수평선에서 새까만 물기둥을 휘감듯 세웠으며, 그 번들거리는 새까만 물기둥은 필리용크를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필리용크의 마음속 폭풍은 언제나 가장 끔찍했고, 늘 그렇게 상상해 왔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철저히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재앙이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필리용크는 생각했다.

 '개프지 여사는 머저리야. 과자랑 베갯잇 말고는 생각도 못 하는 바보 같은 여편네라니까. 꽃을 보는 안목도 없지. 나를 눈곱만큼도 모르고. 지금쯤 집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아무것도 겪어 본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날마다 지구가 끝장나는 경험을 하면서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옷을 차려입었다가 갈아입고, 식사하고 설거지하고 손님까지 맞는데 말이야!'

 

 필리용크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집 안 무언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하지만 필리용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웅크린 채 눈을 크게 뜨고 밤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더는 춥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갑자기 무척 안전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필리용크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하지만 필리용크가 더 걱정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침내 재앙이 닥쳐왔는데.

 

 예전 필리용크는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필리용크는 자신이 예전 모습을 되찾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리용크가 갖고 있던 장식품들은 다 어떻게 될까?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칠하고 또 고치지 못하면 마음 아파하고 금이 간 흔적은 영영 없어지지 않을 테고 예전이 훨씬 아름다웠다고 생각하고....... 맙소사! 그 뒤로도 계속 똑같이 음울한 방에서 똑같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을 아늑하게 만들 궁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싫어, 안 돼! 예전이랑 똑같이 하려고 들면 나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다시 두려움에 떨고....... 뻔해. 그럼 사이클론이 내 뒤를 슬금슬금 쫓아오고, 태풍이며 폭풍도......."

 

'아, 너무 좋아! 작고 가엾은 필리용크가 거대한 자연의 힘에 맞서서 뭘 하겠어? 이제 고칠 게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 말끔하게 깡그리 치워져 버렸어!'

 

 '이제 두 번 다시 두려워할 일 없어. 이제 자유야. 이제 뭐든 할 수 있어.'

 필리용크는 새끼 고양이 인형을 바위에 내려놓았다. 모형의 한쪽 귀가 밤사이 날아가 버렸고, 코에는 폐유가 묻어 있었다. 새로워진 얼굴을 한 새끼 고양이는 조금은 짓궂고 건방져 보였다.

 


네 번째 이야기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

 

"내가 널 돌봐 주고 사랑해 줄게. 밤에 내 배게에서 자도 돼. 네가 더 커서 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랑 바다에서 헤엄칠 수도 있어."

 


다섯 번째 이야기 침묵을 사랑한 헤물렌

 

 그러자 친척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헤물렌이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평생 해 왔다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친척들이 비웃는 바람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방이 있는 인형의 집을 만들겠다는 헤물렌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친척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헤물렌에게 의미 있는 일을 망쳐 버렸다고 누가 친척들에게 말해 주었더라면, 친척들은 진심으로 미안해했을 터였다. 그리고 깊이 숨겨 두어야 할 남모를 꿈을 너무 일찍 말하고 다니면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섯 번째 이야기 보이지 않는 아이

 

 "다들 알겠지만 너무 자주 겁먹으면 잘 보이지 않게 되잖아요."

 

 "음, 네가 끈적이는 버섯을 밟고 넘어져서 다듬어 놓은 버석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고 상상해봐. 엄마라면 당연히 화를 내겠지.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아. 대신 쌀쌀맞게 빈정대며 말하지. "네가 그렇게 춤추고 싶어 한다면 어쩔 수 없다만, 음식에 대호 그러지 않으면 고맙겠다." 하는 식으로."

 무민이 말했다.

 "어휴, 진짜 기분 나쁘네."

 투티키가 맞장구쳤다.

 "맞아. 왜 아니겠어. 그 아주머니가 딱 그랬다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빈정거리기만 하니까 결국 아이가 점점 옅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기 시작했어. 지난 금요일에는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아주머니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친척은 돌볼 수가 없다면서 나한테 닌니를 맡겼어."

 

 닌니는 하루 내내 무민 가족을 따라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가족들 모두 자기 위를 졸졸 따라다니는 방울 소리에 익숙해졌고, 닌니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더는 하지 않았다.

 

 "네가 말을 시작하다니 잘됐어. 너한테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말이지만. 할 줄 아는 괜찮은 놀이라도 있어?"

 닌니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지만."

 무민은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아는 놀이를 닌니에게 모조리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조그마한 들창코에 빨간 앞머리가 나 있는 화난 얼굴로 닌니가 부잔교에 서 있었다. 닌니는 무민파파에게 고양이처럼 카악 소리를 내며 고함쳤다.

 "아저씨가 저 크고 무서운 바다에 감히 아주머니를 빠뜨리려고 했어요!"

 무민이 소리쳤다.

 "닌니가 보여요. 보인다고요! 귀여워요!"

 

 닌니가 소리쳤다.

 "와! 진짜 재미있네! 아니, 진짜 신기해!"

 그리고 부잔교가 흔들릴 만큼 깔깔대며 웃기 시작해싿.

 깜짝 놀란 투티키가 말했다.

 "닌니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어요. 무민 가족이 쟤를 미이보다 더 고약하게 바꿔 놓았네요. 닌니가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요."

 

일곱 번째 이야기 해티패티들의 비밀

 

 오래 전, 무민파파가 아무 설명도 없이 그리고 왜 떠나야 하는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홀연히 집을 떠나 버렸을 때였다.

 

 하지만 무민파파가 듣기로 해티패티들은 다투는 법이 없고, 과묵하기 그지없으며, 다른 아무것도 흥미가 없고 멀리 가고 싶어하는 마음뿐이라고 했다.

 

 이제 무민파파는 해티패티처럼 과묵하고 심오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다들 말수 적은 이를 존경하게 마련이었다. 과묵한 이들은 모르는 것 없고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해티패티들을 보자 무민파파는 갑자기 전기가 들어오듯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크고 막강한 폭풍우만이 해티패티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다. 해티패티들은 강력하게 충전되어 있었지만, 꼼짝 없이 막혀 있었다.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채로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전기가 흐르면 온 힘을 다해 그리고 격렬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났다.

 

 '기뻐할 수도, 실망할 수도 없다니.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고, 용서조차 할 수 없고 말이야. 잠들 수도 없고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실수할 수도 없고 배가 아팠다가 나을 수도 없고, 생일 축하도 할 수가 없고, 맥주를 마시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없다니....... 아무것도 못 한다니. 정말 끔찍하군.'

 행복에 젖어든 무민파파는 악천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무민파파와 가족들은 집에 전깃불을 켜지 않고, 여느 때처럼 호롱불을 켜 두었을 터였다. 

 


여덟 번째 이야기 세드릭

 

 세드릭은 살아 움직이지 않는 소장품이었지만 얼마나 근사한 녀석이었는지 모른다! 세드릭을 처음 보면 작은 플러시 천으로된 강아지 인형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황옥으로 만든 눈이 박혀 있고 목걸리 걸쇠 바로 위에는 자그마한 진짜 월장석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바보 같은 꼬맹아. 할머니가 가진 걸 탈탈 털어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을 만들었잖아. 건강을 되찾은 할머니는 연회를 열었어. 홀로 된 아이들을 위한 집도 지었고. 심해 잠수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지만, 불 뿜는 산은 볼 수 있었어. 그런 다음에는 아마존강으로 떠났지. 우리가 들었던 할머니 소식은 여기까지야."

 


아홉 번째 이야기 전나무

 

 "크리스마스가 너무 허기졌으면 어쩌죠?"

 무민파파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나보다 더 허기지진 않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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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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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 권인 위험한 여름과 짝을 이루는 것 같은 책이다.

무민의 고향인 핀란드는 북극에 닿아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도 낮이 제일 긴 하지와 밤이 제일 긴 동지가 있어서 하지로 갈수록 날이 길어졌다가 하지를 지나면서 낮이 점점 짧아지다가 동지를 지나면 다시 낮이 길어지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길어야 3시간 정도일 것이다. 보통 한여름에는 오전 6시 전에 해가 떠서 오후 8시 넘어서 질 때가 있고, 한겨울에는 오전 7시쯤 해가 뜨고 오후 7시에는 해가 지는 때가 있었지만 오전 8시까지 해가 뜨지 않거나 오후 6시에 해가 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땅의 3분의 1이 북극권에 해당되는 핀란드는 그 차가 엄청나게 큰데, 북극권은 하지 때 해가 지지 않는 백야, 동지 때는 해가 뜨지 않는 흑야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북극권의 유명한 관광지인 로바니에미 근처로 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은 채 몇 달씩 지난다고 하며, 중남부지방으로 내려와도 약간 나아질 뿐 크게 달라진게 없을 정도인데, 예를 들어 중남부 지역인 탐페레만 해도 12월엔 해가 10시에 떠서 2시에 진다고 한다. 대신 여름에는 이 로바니에미와 같은 북극권 지역에서 정반대로 몇 달씩 해가 지지 않으며 남부 지역 또한 새벽 2시 반에 떠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진다고. 몇 년 전 한여름에 핀란드를 짧게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가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마치 대낮같아 놀랬던 기억이 난다. 기념하기 위해 사진도 찍었으나 나중에 확인한 사진은... 마치 대낮 10시 경에 찍은 사진 같아 사진만으로 그때의 충격을 전달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고... 보통 아름다운 곳을 여행할 때면 이 계절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이 지역을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겨울의 핀란드는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이게 된다. 흑야도,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잠길 것 처럼 내리는 풍경도, 오로라도, 산타 마을도 전부 궁금하기는 하지만 왠지 겨울의 핀란드는 생존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시 가이드 분으로부터도 북유럽은 겨울에 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 지역은 정부 차원에서 겨울철에 입장을 하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을 정도라서 여행 상품 운영이 어렵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이 책은 겨울잠을 자던 가족 중 유일하게 일찍 깨어버린 무민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한겨울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어릴 때 겨울잠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어떻게 안 일어나고 계속 자지? 하는 생각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나오는 정도의 추위라면 생존을 위해 생물이 겨울잠을 자도록 진화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무민이 추위를 극복하는 모습에서는 영화 겨울왕국이 생각나기도 했다. 눈의 나라의 모습을 읽으면서 마치 눈 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읽고 또 읽었다. 역시 무민은 겨울이로구나, 지금껏 읽은 무민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어하며 읽었다.

 

덜컥 겁이 난 무민은 달빛이 닿지 않는 따뜻한 어둠 속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민이 무민마마의 이불을 당기며 소리쳤다.

"엄마! 일어나 보세요! 온 세상이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무민마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 꿈을 꾸던 무민마마는 잠시 불안해졌고 걱정이 밀려왔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민은 무민마마의 침대 옆에 깔린 카펫에 몸을 웅크렸고, 기나긴 겨울밤은 계속되었다.

 

'자명종을 모조리 맞춰 놓아야지. 그러면 봄이 더 빨리 올지도 몰라. 뭔가 커다란 걸 때려 부수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누구 하나 일어나 보지 않으려나.'

하지만 무민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무민의 발자국을 가로지르며 작은 발자국이 새로 나 있었다. 무민은 우뚝 서서 한동안 그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30분쯤 전에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 숲을 지나갔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골짜기 쪽으로 갔고, 무민보다 몸집이 작아 보였다. 발자국이 눈 속에 거의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민은 꼬리털부터 귀 끝까지 온몸이 후끈해졌다.

"기다려! 떠나 버리지 마!"

이렇게 소리치며 눈 위를 비틀비틀 걸어가던 무민은 갑자기 어둠과 외로움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이 두려움은 잠든 집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내내 무민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만, 이제껏 맞닥뜨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민은 이제 더는 소리치지 않았는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민은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발자국에서 눈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비슬비슬 걷고 또 걸으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불빛이 보였다.

그저 작은 불빛일 뿐이었지만, 붉은빛이 온 숲을 따스하게 채워 주고 있었다.

그제야 무민은 마음이 놓였다. 발자국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계속 천천히 걸어갔다. 불빛 가까이에 도착해 보니 흔하지흔한 양초가 눈에 꽂혀 있었다. 양초는 동글동글한 눈 뭉치를 쌓아 만든 작고 멋진 집 안에 있었다. 투명하고 조금 불그스름해 보이는 눈 뭉치들이 꼭 집에 있는 침실 등의 전등갓 같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추위가 심해졌고 달빛은 붉고 푸른 유리창에서 빛났다.

무민이 아빠의 빛바랜 정원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눈 이야기를 들려줘. 눈은 이해가 잘 안 돼."

투티키가 말했다.

"나도 잘은 몰라. 눈은 차디찬데, 눈으로 만든 집 안은 따뜻하지. 하얗지만 불그스름하게 보일 때도 있고, 파랗게 보일 때도 있어. 세상 무엇보다 부드러울 수도 있고, 돌보다 단단할 수도 있어. 뭐라 딱 잘라 설명할 수가 없어."

 

"네 눈썹은 보기 드물게 덥수룩하구나."

그러자 눈썹이 덥수룩한 동물이 대답했다.

"스나다프 우무흐."

무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작은 동물이 벌컥 화내며 말했다.

"라담사."

투티키가 설명했다.

"녀석한테는 자기만의 언어가 있는데, 네가 무례한 말을 했다고 생각해."

무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그러더니 사과하듯 덧붙였다.

"라담사, 라담사."

그러자 눈썹이 덥수룩한 동물은 정신이 나간 듯 벌떡 일어나더니 사라져 버렸다.

무민이 말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녀석은 내가 뭔가 다정한 말을 건네려고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일 년 내내 싱크대 밑에 틀어박혀 있을 텐데!"

투티키가 말했다.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새해가 된 다음 처음으로 내리는 눈이었고, 난생처음 눈 내리는 모습을 본 무민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눈송이가 자꾸만 무민의 따뜻한 얼굴에 내려앉았다가 녹아내렸다. 무민은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아 잠시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쳐다보았는데, 눈송이는 점점 더 많아졌고 솜털보다도 부드럽고 가벼웠다.

무민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이 이렇게 오는구나. 땅에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

날이 포근해졌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주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민은 여름에 바닷물을 헤치며 걸을 때마다 느꼈던 황홀한 기분이 떠올랐다. 무민은 목욕 가운을 벗어던지고 눈 더미에 풀썩 드러누었다.

무민은 생각했다.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

 

시간도 온 세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세상 모든 것이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리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춤추는 마법에 걸린 소용돌이밖에 남지 않았다.

상식이 있는 누군가라면 이제 기나긴 봄이 시작된다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필 그때 바닷가에는 그런 말을 해 줄 만한 이가 없었고, 엉뚱한 쪽으로 가려고 바람에 맞서 기어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민 뿐이었다.

무민이 기어가면 갈수록 거센 눈이 무민의 눈을 가리며 얼굴에 쌓여갔다.

무민은 생각했다.

'내가 겨울을 이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고 무릎 꿇리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게 틀림없어.'

겨울은 먼저 부드럽게 떠다니는 눈송이로 아름다운 커튼을 만들어 무민을 속인 다음, 아름다운 눈송이를 눈보라로 바꾸어 얼굴에 마구 내던진다. 그것도 무민이 막 겨울을 좋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무민은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난 무민은 눈보라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무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로 눈을 걷어차며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러고 나자 무민은 기운이 빠졌다.

무민은 눈보라엣 등을 돌려 싸움을 끝냈다.

바로 그때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은 무민을 눈보라 한가운데로 가볍게 이끌고 갔고, 무민은 허공을 나는 듯했다.

무민이 온몸의 힘을 빼고 생각했다.

'나는 공기고, 바람이야. 나는 눈보라와 하나야. 지난여름에도 딱 이런 느낌이었어. 그때도 처음에는 파도에 맞서서 씨름하다가 몸을 돌렸더니 밀려드는 파도에 어우러져서 무지갯빛 물거품 속에서 코르크 마개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조금 겁먹을 때쯤 바닷가 모래바닥에 딱 도착했지.'

무민은 두 팔을 벌리고 날았다.

신이 난 무민이 생각했다.

'어지 한 번 마음껏 겁을 줘 봐. 이제 널 제대로 알게 됐으니까. 어한테 익숙해지기만 하면 돼. 너는 이제 날 못 속여.'

겨울은 무민이 눈 덮인 부잔교에 털썩 고꾸라져 탈의실 창문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을 바라보게 될 떄까지 바닷가를 따라 멀리멀리 한참 동안이나 무민과 함께 어우러져 춤추며 나아갔다.

무민이 깜짝 놀라 혼잣말했다.

"어휴, 살았네. 신나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이 가시고 재미가 붙을라치면 끝나 버린다니까."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오후가 되면 남쪽 창문 아래쪽 땅이 따뜻해졌다. 작은 움직임은 흙속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갈라진 갈색 양파에서 가느다란 뿌리가 가닥가닥 뻗어 나와 눈 녹은 물을 열심히 빨아들였다.

어느 바람 부는 날, 어스름이 내리기 바로 전에 바다 쪽에서 거대하고도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티키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자, 이제 봄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어."

빙판이 천천히 들썩거리자 또 다른 으르렁 소리가 바닷가를 덮쳤다.

무민은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낯선 소리를 들으려고 탈의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투티키가 무민의 뒤에서 말했다.

"저기 좀 봐. 바다가 다가오고 있어."

먼 바다에서부터 쉬익거리며 가장자리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파도들은 허기지고 화가 나서 겨울 얼음을 한 조각씩 베어 물고 있었다.

이제 까맣게 갈라지기 시작한 실금이 빙판을 따라 내달렸고, 이리저리 굽이치며 나아가다 제풀에 지쳐 사라져 버렸다. 바다가 또다시 들썩거렸다. 그러자 실금이 더 늘었다. 심지어 넓게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떄 갑자기 바다가 섬처럼 산산이 부서진 얼음 조각으로 가득 차더니 정신없이 서로 밀치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둥둥 뜬 얼음 조각 위헤 미이가 서 있었는ㄷ, 물이 점점 더 넓어지는 주위 모습을 바라보며 겁먹지도 않고 가만히 생각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무민은 미이를 구하러 나섰다. 잠시 지켜보던 투티키는 탈의실로 걸음을 옮겨 화로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투티키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뭐, 그렇지. 모험담은 늘 이런 식이지. 구하고 구해지고. 그 뒤에서 영웅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려고 애쓰는 이들 이야기도 누가 한 번쯤 써 주면 좋겠어."

한참 내달리던 무민은 옆에서 빙판을 따라 함께 내달리는 실금을 발견했다. 무민과 똑같은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발밑으로 빙판이 너울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조각조각 나서는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미이는 얼음 조각 위에 가만히 서서 풀쩍풀쩍 뛰며 다가오는 무민을 지켜보았다. 무민은 통통 튀는 고무공 같아 보였고, 바짝 긴장해서 용을 쓰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민이 미이의 얼음 조각 옆에 도착하자 미이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엄마도 겨울에 어땠는지 봤어야 했는데! 눈 더미가 온 집을 뒤덮었어요! 머리끝까지 파묻힐 정도였다니까요! 눈 내리는 모습은 꼭 하늘에서 작디작은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고, 저 위 어둠 속에 파랗고 푸른 커튼도 매달려서 펄럭거렸어요."

무민마마가 말했다.

"무척 아름다웠겠구나."

 

무민마마는 눈을 조금 집어 눈 뭉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엄마들이 늘 그렇듯 엉성하게 던졌고, 눈 뭉치는 조금 날아가다 툭 떨어져 버렸다.

무민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멀리 못 갔네. 수르쿠도 엄마보다는 잘 던졌겠구나."

무민이 말했다.

"엄마, 엄마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무민과 무민마마는 다리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갔지만, 아직 우편물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저무는 태양이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온 세상이 평화롭고 경이로울 만큼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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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여름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4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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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lig midsommar

 

이 작품의 원제다.

미드소마? 그러고 보니 최근에 개봉한 공포 영화 제목이 미드소마였던 것 같다.

찾아보니 ‘미드소마’는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이어지는 한여름 미드소마 축제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공포영화라고 한다. 환한 대낮에 일어나는 공포를 그린 영화라고 한다.

 

미드소마는 이 책에도 나와 있는데 하짓날이라는 뜻으로, 백야가 있는 북유럽에서는 하지가 크고 중요한 명절이라고 한다. '위험한 여름'은 한여름으로 갈수록 낮이 길고 밤이 짧은 백야 현상이 일어나고, 한겨울로 갈수록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극도로 짧아지는 북유럽 특유의 날씨, 그 중에서도 여름 날씨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북유럽의 겨울 날씨에 대해서는 이 다음 권인 무민의 겨울에 잘 나와 있다.)

 

한편으로는 한여름밤의 꿈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바탕 꿈 속 일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다.

 

"석고에 색칠한 거네."

그러고는 사과를 집어 한 입 베어 물더니 말했다.

"이건 나무를 깎은 거야."

미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훔퍼는 걱정이 밀려왔다.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이 진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본뜬 물건이었고 예쁜 색깔로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으며, 손에 닿는 모든 게 종이나 나무나 석고로 만들어져 있었다. 황금 왕관은 가뿐하게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고, 꽃은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고, 바이올린에는 현이 없었고, 상자에는 바닥이 없었으며, 책은 펼쳐지지도 않았다.

순수한 마음을 다친 훔퍼는 이 모든 상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훔퍼는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몇 주만이라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밈블의 딸이 말했다.

"나는 여기가 좋아. 모든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

미이가 물었다.

"거기엔 무슨 의미가 있는데?"

밈블의 딸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없어. 그런 바보 같은 건 물어보지 마."

 

"그 코바늘 뜨개질 조언은 정말 고마워요. 실내화는 완성되면 바로 보낼게요. 주소가 어떻게 되죠?"

무민파파가 말했다.

"무민 골짜기면 충분해."

 

무민 가족은 잠시 계단에 멈추어 서서 안도와 안심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가만히 서서 다시 집에 있는 느낌을 맛보았다. 모든 게 예전과 다름없었다.

베란다에 실톱으로 무늬를 새긴 예쁜 난간은 부서지지 않았다. 해바라기도 남아 있었다. 물통도 남아 있었다. 해먹은 홍수 때문에 물이 빠져서 색깔이 더 예뻐졌다. 하늘이 비치는 작은 물웅덩이도 하나 생겼는데, 미이에게 맞춤한 수영장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위헌한 일도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원에 난 길은 조개껍질로 가득했고 계단은 빨간 해초 화관을 두르고 있었다.

 

"이제 더 필요한 건 없지?"

스너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응."

무민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새로운 담배를 피우나 봐? 산딸기 같은데, 그거 좋아?"

스너프킨이 말했다.

"응. 하지만 이건 일요일에만 피워."

무민이 깜작 놀라 말했다.

"그렇구나. 오늘이 일요일이었구나. 음. 그럼 안녕. 나는 자러 갈게!"

"안녕, 잘 자!"

무민은 해먹이 달린 나무 뒤에 있는 갈색 연못으로 갔다. 무민은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 장신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무민은 풀밭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무껍질 배를 찾아냈다. 배는 나뭇잎에 걸려 있었지만 멀쩡했다. 짐칸 위에 있는 작은 출입구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무민은 정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은 서늘하고 부드러웠고, 젖은 꽃들은 그 어느 떄보다 더 강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무민마마가 계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무민마마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고, 아주 행복해 보였다.

무민마마가 말했다.

"이게 뭔지 맞춰 볼래?"

"작은 배요!"

무민이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특별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너무나도 행복했기 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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