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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마개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5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적 비리 사건에 연루된 명단이 숨겨진 수정마개, 그것이 공개될 경우에 예상되는 파장, 그리고 거기에 얽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축을 형성하고,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빗나간 복수를 하려는 악당과 뤼팽이 사모하는 여자와의 드라마가 또 한 축을 형성한다.

사실 수정마개의 반전은 이미 그 이후의 수많은 탐정물에서 써먹어 버린 것이라 짐작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대 최고(라고 생각되는 악당), 부하마저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에 실패하고만 뤼팽, 그리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에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들... 추리 소설로서는 약간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오로지 소설의 재미만 놓고 보면 이만한 소설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마개」의 말미에서 아르센 뤼팽은 작가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사건들도 이번의 이 지독한 모험에서처럼 날 고생시키고, 힘들게 한 경우가 없었다네. 글쎄 뭐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번 사건을 나는 ‘수정마개 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네.” 이처럼 「수정마개」에 등장하는 뤼팽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고난을 연거푸 겪으면서도 끝끝내 특유의 배짱과 용기를 잃지 않는 불굴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를 엄청난 혼돈으로 몰아간 파나마 운하 스캔들이 모델이 된 이 소설 역시 현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으며, 추리소설적 얼개 또한 보다 집중적이며 집약적인 묘미를 느끼게 한다. 역자로서는, 특히 어떤 난관에 봉착해서도 절대로 운명에 굴하지 않는 뤼팽의 그로테스크한 카리스마를 감상 포인트로 추천하고 싶다.

 

1. 체포

그렇게 속삭이는 뤼팽의 침착한 얼굴과 신중한 태도는, 마치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든 각도에서 충분한 여유를 두고 심사숙고하겠다는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보아하니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흔히들 인생에서의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삶의 진가(眞價)가 극대화되어 발휘될 수 있을 그런 순간인 듯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아무리 위험한 가운데에서도 속으로 천천히 수를 세면서 일단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안정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

그리고 나서야 그는 차분히 사고를 진행시켜갔는데, 어찌나 날카롭고도 깊은 직관력을 발휘하는지, 가능한 모든 경우를 빈틈없이 가늠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주어진 상황과 관련한 일체의 판단자료들이 그의 눈앞에 환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다봤고, 전부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완벽한 확신과 논리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2. 9-8=1

비록 뤼팽과 나 사이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고, 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상당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나로서는 속속들이 파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닌 그가 어떻게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왔느냐 하는 점이다.

분명 한패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선보인 어떤 모험들의 경우, 든든한 공모관계와 막강한 다수의 힘이 어느 한 강력한 의지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그 의지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행사해온 것일까? 어떤 중개를 통해서, 어떤 지시체계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을 당최 모르겠다. 그에 대해서만큼은 뤼팽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뤼팽이 비밀로 하려는 일은, 이를테면 그 자체로 불가해(不可解)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딱 하나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가설은 이런 것이다. 아마도 극히 제한되면서 막강한 위력을 갖춘 정예 그룹의 활동은, 베일에 가려진 상부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수많은 일시적 동맹자들이나 개별적인 단체들의 전 국가적, 전 세계적인 활동을 통해서 보완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주인 사이에는 소위 입문식을 거친 측근들, 심복들이 포진하고 있어, 뤼팽의 직접 지시를 제때제때 하달하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하고 말이다.

 

퉁퉁한 체격에다 목이 짧고, 얼굴을 빙 둘러가며 회색빛 턱수염을 길렀는가 하면, 머리숱은 거의 없고 안경 위에다 항상 검은색 코안경을 덧걸친 모습이었다. 눈이 쉬 피로해지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뤼팽은 특히 그의 강인해 보이는 얼굴과 각진 턱 선, 돌출한 골격을 유심히 관찰했다. 털투성이의 큼직한 주먹과 완강하게 굽은 안짱다리, 약간 굽은 듯한 등 때문에, 그는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무게 중심을 두면서 한발한발 걸을 때마다, 영락없는 유인원(類人猿)의 몰골을 연상시켰다. 그런가 하면 울퉁불퉁하고 주름이 깊게 팬 널찍한 이마는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얼굴 전체가 다소 역겨운, 야생동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뤼팽은 문득 내각(內閣) 안에서도 도브레크를 사람들이 오랑우탄(숲의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동료 의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로 혼자 다니는 타입이라서뿐만 아니라, 그 야만적인 골격과 용모, 걸음걸이 떄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책상 앞에 앉더니 호주머니에서 해포석(海泡石)으로 만든 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단지 안에서 건조된 몇 가지 담뱃갑 중 메릴랜드(미국에서 수입된 담배 상표/역주)를 골라 파이프를 채운 다음, 불을 붙인 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편지 쓰기를 멈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책상의 어느 한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3. 알렉시스 도브레크의 사생활

 

4. 적의 우두머리

 

5. 27인의 명단

 

6. 사형선고

 

7. 나폴레옹의 반면상(半面像)

 

8. 두 연인의 탑

 

9.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10. 엑스트라-드라이?

 

11. 로렌의 십자가

 

12. 단두대

 

13. 마지막 싸움

순간, 나는 그가 내심 안고 있는 상처가, 저렇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쓰라릴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여자를 사랑했었구만?......”

내가 넌지시 묻자 그는 농담조로 대꾸했다.

심지어 나로선 결혼해달라고 청한 거나 다름없었지.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아들도 구해주었겠다......한데......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말일세......갑자기 확 깨더구만! 문득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거야......그 이후로는......”

그 이후론 잊었나?”

, 그야 당연하지.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 그래서 생각다 못해 둘 사이에 아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운다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버렸지.”

아니 뭐라구? 그럼 뤼팽 자네가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합법적이고 명실상부한 결혼을 했지. 그것도 프랑스 제일가는 명문가이자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와 말이네......아니, 자넨 그럼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아마 들어볼 만한 얘기일걸!”

뤼팽은 신이 나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부르봉-콩데가()(부르봉 왕가에서 파생된 명문가문/역주)의 여식이자 현재는 마리-오퀴스트라는 이름으로 도미니크 수녀원의 종신 수녀로 있는,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과 결혼하게 된 경위를 말이다(“아르센 뤼팽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1912년에 「주 세 루」 에 연재된 단편. 훗날 「아르센 뤼팽의 고백」에 수록되었다/역주)......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이력(履歷)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나타난 뤼팽의 인생역정은 태어나면서 시작해 대략 그의 나이 55살까지 이어진다.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가운데, 우리는 뤼팽의 모험 충만한 인생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주요 단계들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뤼팽의 연령은 정확히 명시된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내용상 대략적으로 추정된 것이다.

 

*유년기에서 25세까지

대부분의 청소년기가 그렇듯이 이때 뤼팽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꾸준히 개발하고 인생의 수련과정을 열심히 쌓아간다. 어린 시절 수모를 당하는 어머니의 그늘 안에서 사회와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성장함에 따라서 라틴 및 그리스 고전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닦는다. 최소한 열여섯 살 나이에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를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의학과 법학, 무술, 마술(魔術) 등에 걸쳐서 다양한 경험과 연구를 섭렵했으며, 이 모든 것은 훗날 신출귀몰한 변장술과 10여 명의 경찰관을 일거에 해치우는 격투능력, 시의 적절한 라틴어 명구를 자유자재로 암송할 만큼의 고상한 취향과 베르티용 인체측정 시스템을 농락할 정도의 해박한 법 지식으로 화려하게 발휘된다. 스무 살 때까지 암흑가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였고, ‘마담 엥베르의 금고 사건, 처음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수중의 돈도 명성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그는, “머지않아 스스로 거장으로 불릴 바로 그 방면에서조차 한낱 초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있다.

 

*25세에서 37세까지

몇 차례의 큼직큼직한 절도행각을 통쾌하게 성공시킴으로써 일거에 사교계의 화두로 등극하는가 하면, 수차례 눈에 보이지 않는 선행도 쌓아가면서 격렬하면서 다양한 활동력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 시절은 가장 힘들고 충격적인 시련과 실제로 호되게 단련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는 가운데 아르센 뤼팽 특유의 강단(剛斷)과 지혜가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며, 이때부터 세상 어디에서도 동시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세상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신출귀몰한 괴도로서의 명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아간다. 그의 그와 같은 능력은 여전히 범죄행각을 일삼으면서 그와 동시에 파리 경찰청 치안국장으로 활약함으로써 최고조에 이르는 셈이다. 또한 독일의 황제와 담판을 벌일 정도의 배짱과 역사적 혜안도 보여준다. 유명 미술품과 골동품, 역사적 유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모험의 스케일도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확대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기암성813의 비밀, 수정마개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고백초록 눈동자의 아가씨가 있다.

 

*38세에서 43세까지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해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적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외인부대에 지원해, 모로코에서 2년 동안 레종 도뇌르를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을 횝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방위적 활약은 유럽 대륙을 벗어나 터키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이어진다. 단번에 부하 60여 명을 소집하는 대범한 작전을 펴기도 하며, 북아프리카의 1만여 명에 이르는 베르베르족을 이끄는가 하면, 서아프리카의 모리타니 왕국을 점령해 술탄으로 등극하기도 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813의 비밀호랑이 이빨, 황금삼각형그리고 서른 개의 관이 있다.

 

*44세에서 48세까지

이전에도 몇 차례 그랬지만, 이번에야말로 결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다가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여러 사건을 동시에 요리하는 수완을 보인다. 치안국 부국장 베베르에게 체포되었다가, 총리인 발랑글레에게 24시간의 가석방을 조건으로 프랑스에 모리타니 왕국을 이양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처려비행을 하며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네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한다. 와즈 강가의 한 마을에 정착하여 은퇴하기로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파리로 돌아와 짐 바르네트라는 가명으로 탐정사무소를 차리고 활약하기도 하며, 혈혈단신 모터보트를 타고 무려 1년간의 세계일주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호랑이 이빨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불가사의한 저택이 있다.

 

*49세에서 55세까지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여전히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대도로서도 화려한 편력을 계속하는 가운데, 심지어는 강() 하나를 훔치는 비기(祕技)를 선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납치당한 아들 장을 찾는 부정(父情)의 드라마가 펼쳐지며, 마지막으로 코트 다쥐르 지방의 아스페르몽으로 은퇴하여 엄청난 규모의 화원을 조성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바리바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강력한 형사 빅토르, 백작부인의 복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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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의 비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전집 중에서 (물론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가장 사람들이 첫 손 에 꼽는 책이 이 책과 기암성이라고 알고 있다.

이 책보다 앞서 읽은 기암성은 그야말로, 이 것이 뤼팽이다, 라는 느낌을 주는데 충분했다. 한번 손에 책을 들고나서 숨쉴 틈없이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책의 재미는 뛰어난 소년 탐정의 재치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책은 시기상으로도 기암성의 바로 뒤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다시 또 여인과의 사랑에 빠져서 중요한 순간에 판단력을 상실하는 뤼팽의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에서는 약간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철저하게 성적인 부분이나 로맨스를 배제했던 홈스에 비하면, 완벽해보이던 뤼팽이 여자 때문에 스스로 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야 마는 장면에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숨이 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예전에 고전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박씨부인전이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봤던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지고야 만 병자호란이지만, 해당 부분의 역사적 사실의 큰 훼손 없이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줌으로서 당시 민중을 위로하고 자존심을 회복한 일종의 정신승리라는 해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당시 복잡한 유럽 정세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설령 알거나 모르거나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813의 비밀」은 이미 인기작가가 된 모리스 르블랑의 경력에서도 아주 새로운 획을 긋는 작품이다. 191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호응이 쏟아졌는데, 이에 힘입어 작가는 1917년과 1932년에 각각 가필, 수정하여 다시 출간했을 정도로 이 작품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미스터리적 기법이 전작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했고, 주인공 아르센 뤼팽의 전방위적 활약 또한 눈부실 정도이다. 더구나 20세기 초, 영­불­독 3국간의 식민지 정책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 독일 왕가와 그에 관련한 3대에 걸친 귀족가문 및 여타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작가의 방대하고 세밀한 고증학적 지식에 의해서 소설의 스케일과 깊이를 상상을 초월하는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독일 황제에 맞서는 뤼팽의 엄청난 야망과 처음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로서의 뤼팽의 애틋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쉴새없는 음모와 반전의 연속은 오늘날의 독자들의 손에도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제 1부

 

연쇄살인

느닷없이 튀어나온 거물 협객(俠客)의 이름 앞에서 케셀바흐 씨는 다소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뤼팽은 곧장 그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아하, 숨 좀 돌리시겠다 이건가? 아르센 뤼팽은 점잖은 도둑이며, 피는 질색이고, 그저 남의 재산을 좀 실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범죄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범죄라고 할 것도 없다 이건가? 그러니 불필요한 살인 행각이나 일삼는 위인은 결코 아닐 것이라 생각하겠지? 글쎄,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게 불필요한 건지 아닌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지금 난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알아두시구려, 친구.”

 

르노르망 씨, 작전을 개시하다

! 아르센 뤼팽......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기상천외한 에기유 크뤼즈의 엄청난 모험 이후 누구든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셜록 홈스와 이지도르 보트를레의 눈앞에서,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를 들쳐없고 늙은 유모 빅투아르를 대동한 채, 저 어두컴컴한 적막 속으로 사라져간 바로 그 날 이후로 말이다......

그 날 이후, 일반적인 사람들 생각은 그가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간 세상 어디에서도 뤼팽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경찰이 편의상 내린 결론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가 목숨만은 부지한 상태이며,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채, 아담한 정원이나 가꾸며 평화로운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따. 그런가 하면, 세상의 덧없음과 시련으로 점철된 인생에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트라지스트 교단(17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수도회/역주)의 수도원에라도 칩거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긴 있었다.

한데 이렇게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렇게 또다시 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결전을 벌이다니! 아르센 뤼팽이 본래의 아르센 뤼팽으로 돌아왔다고나 할까? 기상천외하고 신출귀몰하며 대담무쌍, 호쾌무비한, 저 아르센 뤼팽의 모습으로 말이다!

 

세르닌 공작의 활약

 

르노르망 씨의 활약

531일 아침, 모든 신문은 르노르망 씨 앞으로 된 편지에서 뤼팽이 바로 당일 날짜로 경비원 제롬의 탈옥을 예고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그중에서도 한 신문은 작금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썩 잘 요약하고 있었다.

 

팔라스 호텔의 그 끔찍한 살육은 어언 4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경찰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무엇을 밝혀냈나? 아무것도 없다.

단서는 다음 세 가지. 담뱃갑하고 LM이라는 글자, 호텔 관리실에 누군가 흘리고 간 옷 꾸러미. 하지만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냈는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경찰에서는 당시 2층에 투숙하고 있다가 미심쩍게 자취를 감춘 일부 여행객들을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들의 종적은 그 후로 어떻게 된 것인가? 신상 파악이라도 제대로 해놓았는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결국, 처음보다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 상황이고, 수수께끼만 더더욱 완강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리 시 경찰청장과 그 하급자인 르노르망 씨 사이에 불화가 싹트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총리로부터도 그리 시원찮은 대접을 받은 후자께선 현재 잠정적으로 사직서까지 제출해놓은 마당이란다. 따라서 케셀바흐 사건은 현재, 르노르망 씨와는 앙숙관계에 있는 치안국 부국장 베베르 씨에 의해서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후문이다.

요컨대, 엉망진창, 오리무중 그 자체라고나 할까?

하물며 상대는 일관된 정신력과 괴려, 눈부신 수완의 대명사인 뤼팽이다.

그럼 우리의 결론은 무엇일까? 그야 간단하다. 뤼팽은 기필코 531일 바로 오늘, 스스로 예고한 대로, 자신의 공범을 유유히 빼내갈 것이 틀림없다.

 

르노르망 씨, 침몰하다

 

파버리-리베이라-알텐하임

일단 보기에도 황홀할 지경이오. 보기에도 좋은 게 맛도 좋다더니...... 이봐, 시리우스, 너도 좋아할 것 같구나! 로쿠스타(로마시대 유명한 여자 독살[毒殺] 전문가. 네로 황제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도 모두 그녀의 힘을 빌려서 독살을 자행했다/역주)도 이보다는 더 잘 못 만들걸!”

그리고는 얼른 과자 하나를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덥석 집어먹은 시리우스가 잠시 꼼짝 않고 있더니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면서 즉사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세르닌은 하인들 중 하나가 급습할 것에 대비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면서 대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우하하하하-이보게 남작, 앞으로 누구든 독살하고 싶을 때는, 먼저 자네 그 목소리부터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떠는 손부터 바로잡게나......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의심부터 사지 않는가 말이야......그나저나, 아까 살인은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렌하임은,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꾸했다.

칼로 하는 거야 싫어하지. 하지만 독살은 늘 내 구미를 당기거든...... 심지어 죽어가는 희생자가 무슨 맛을 느낄까 궁금하기도 하지......”

빌어먹을! 러시아 귀족 나리를 실험대상으로 삼았으니 식성 한전 까다롭다고 해야겠구만!”

 

올리브색 프록코트

생각해보라, 아르센 뤼팽이 지난 4년간 치안국장으로 버젓이 행세를 해왔다니!!!

무려 4년이라는 세월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법적으로 그 직책에 부여되는 온갖 권리와 의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여러 상관들로부터의 신망과 정부차원의 신임, 모든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오면서 말이다!

지난 4년간 서민들의 안녕과 재산의 안전은 전적으로 아르센 뤼팽의 손에 맡겨진 셈. 그는 항상 법질서 구현을 대변해왔고, 선량한 다수를 보호해왔으며, 숱한 범죄자를 척결해왔다.

그가 그동안 일궈낸 업적이 어디 한둘인가! 공공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고, 범죄사건은 그보다 더 신속하고 확실하게 해결되어본 적이 없었다!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드니주 사건이라든가, 크레디리요네 도난사건, 오를레앙 특급열차 습격사건, 도르프 남작 살해사건 등......예상을 초월하는 사건해결과 대범한 활약상들은 세상 그 어느 유명한 형사들의 업적과 비교해도 하나 손상이 없는 공권력의 개가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루브르 박물관 방화사건과 그에 연루된 범인 체포에 즈음하여 행한 연설에서, 총리인 발랑글레마저 르노르망 씨의 다소 임의적인 행동거지를 옹호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 명석함으로 보나, 넘치는 활력으로 보나, 단호한 결단력과 일 처리 능력, 상상을 초월하는 수사방식과 무궁무진한 수완 등을 미루어볼 때,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에게 단 한 사람, 그가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딱 한 사람 비견될 만한 인물로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 사회에 헌신하기로 개과천선한 아르센 뤼팽 같은 인물이라고......”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 르노르망 씨가 진짜 아르센 뤼팽이었던 것이다!

 

 

제2부

 

상떼-팔라스

 

현대사에 얽힌 수수께끼

 

뤼팽의 거창한 계략

 

담판

 

황제의 편지

 

7인의 도적

방금 들어온 한 남자가 옷걸이에다 펠트 천으로 된 검은 중절모를 건 다음, 작은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가르송이 메뉴를 가져오자 주문을 한 뒤, 그는 냅킨 위로 팔짱을 끼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 않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뤼팽은 그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염 한 줌 없는 매끈하고 야윈 얼굴에 깊숙이 틀어박힌 안구에서 강철같은 느낌을 발하는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피부 자체가 마치 뼈와 뼈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양피지라도 되는 듯, 하도 뻣뻣하고 질겨서 어떤 털도 뚫고 자라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맥없이 음울하기만 했고, 어떤 표정도 꽃피울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상아와도 같은 느낌의 이마는 그 안에 어떤 생각도 깃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속눈썹조차 거의 없는 눈꺼풀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마치 조각상의 눈처럼 고착된 시선을 내쏘고 있을 뿐이었다.

뤼팽은 가르송 중 한 명을 불러 물었다.

저 신사 분은 누구시오?”

저기 점심 드시는 분 말입니까?”

그렇소.”

손님인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르는 분입니다.”

이름을 혹시 아오?”

그럼요......레옹 마시에입니다.”

 

그는 문제의 사내를 열심히 관찰했다. 실제로 사내의 인상은 저 끔찍한 존재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도 일치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불꽃과 활력을 기대했던 눈빛만큼은 전혀 다르게, 완전히 맥이 빠져버린 죽은 눈빛이었다...... 저주받은 자의 고통과 혼란, 강인한 인상을 기대했던 곳에서 돌덩이 같은 무감각함밖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뤼팽은 다시 가르송에게 말했다.

저 분이 하는 일을 혹시 알고 있소?”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요......한마디로 좀 괴짜라고 할 수 있어요......늘 혼자 다니고요......말도 전혀 없지요. 심지어 여기서 그의 목소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주문도 메뉴에서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하니까요...... 식사도 20분 만에 후딱 해치우죠......그리고는 돈을 지불하고, 나가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또 온단 말이죠?”

“4-5일에 꼭 한 번씩은 들르는 편이에요. 반드시 규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바로 그 자가 틀림없어! 그 자일 수밖에 없다구......말레이히 그 자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거야......저기 저 손으로 바로 사람을 죽인 거라구......저 머리 속에는 아직도 피 냄새에 취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괴물 같은 자식! 흡혈귀 같은 놈!......’

뤼팽은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과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워낙에 상대를 해괴망측한 존재로만 상상하던 뤼팽에게는, 이렇게 왔다갔다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며 살아 숨쉬는 모습이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살을 뜯어먹고 펄펄 끓는 생피를 빨아마시는 흉악한 짐승쯤으로 생각했던 존재가 저렇게 정상적으로 빵과 고기를 잘라먹고,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망타진

순간, 아르센 뤼팽은 뭐가 뭔지 그 전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놀랄 만큼 기발한 착상으로 마련된 함정에 자신이 여지없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되고, 조작된 것이다. 부하들과 격리된 것하며, 하인들이 배신하거나 또는 이유 없이 사라진 것, 그리고 하필 이때 자신이 마담 케셀바흐의 집에 뛰어든 것 모두가 말이다......

분명 모든 상황들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짜 전화통신문이 이곳의 부하들을 집에서 빠져나가게 만들기 전이라도 뤼팽이 집에 도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전쟁은 뤼팽의 부하들과 알텐하임의 패거리들과의 한판 승부가 되었을 일이다. 한데, 지금까지 말레이히의 행동양식이나, 알텐하임을 살해한 일, 펠덴츠의 소녀를 독살한 일을 돌이켜보건대, 애초부터 함정은 뤼팽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었으며, 말레이히는 대규모 패싸움이랄지, 성가신 패거리들을 몽땅 쓸어버리는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뤼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단 마담 케셀바흐가 당장 위해를 당한 것은 아니라며,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또 울화통이 치미는지, 후닥닥 문을 박차고 옆방으로 건너가 상처를 입고 버둥대는 도적들에게 하나하나 발길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돈 다발들을 일일이 빼앗아 챙긴 다음, 각각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커튼 줄이든 이불이든, 옷감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서 손발을 묶은 뒤, 일곱 명 모두를 양탄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아 마치 소포 꾸러미들처럼 한데 엮어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는 있는 대로 야유와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꼬치구이가 따로 없구만! 기름이 좔좔 흐르는 요리가 따로 없어! 집단으로 천치들만 모아놓은 꼴이로군! 시체공시장(屍體公示場)에 널려 있는 익사체들 같지 않은가!......그런데도 네 놈들이 감히 뤼팽을 넘봐? 과부와 고아의 수호자이신 이 뤼팽을?......, 이제 와서 떨리나?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들......뤼팽은 공연히 사람을 해치진 않아......다만 뤼팽은 악당을 싫어하고, 자신의 의무를 잘 아는 정직 고결한 사람일 뿐이야. 생각해봐, 도대체 네 놈들 같은 깡패들하고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겠나? 뭐가 어째?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안 여긴다구? 남의 재물은 죄다 네 놈들 걸로 보여? 법도 없고, 사회도 없고, 양심도 없다구?......맙소사, 주여......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구요?......”

 

유럽 지도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구? 지난 수개월간에 걸쳐서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면서, 나는 내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한 숱한 인물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각자의 줄을 움직여 조정해 왔었지. 하지만 그동안 그들을 제대로 고개 숙여 들여다보고, 그 머리와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피려고는 전혀 하지 않앗어...... 그러다보니 나는 지금 피에르 르윅이나, 주느비에프나, 돌로레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거야......그저 모두 내 꼭두각시인 줄만 알았는데, 펄펄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단 말이야......세상에, 이제 와서 이런 난관에 부닥칠 줄이야!......”

 

살인마의 정체

순간, 그에게는 한 가지 이해의 단초가 떠올랐다. 바로 광기! 그렇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텐하임의 동생이자, 이질다의 언니, 말레이히 가문의 여식으로서 정신병자 어머니와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엾은 운명......그녀 역시 정상적인 정신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면서 미쳤으니 참으로 괴이하기도 하지만, 분명 불균형한 정신적 질환으로 시달리는 정신병자인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게 확실해지는 듯했다. 모든 게 정신착란에 의한 범죄였던 것이다! 마치 자동인형처럼 어느 한 고착된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다보니,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 피비린내 나는 행위를 까마득히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녀가 무언가를 원해서 사람을 죽였고,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또 사람을 죽였으며, 죽였다는 것을 감추르나로 또다시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광증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저 죽이기 위해서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녀 안에 잠재하는 살인마가 갑작스럽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욕구를 그 순간 충족시켜준 것이다. 그녀 삶의 어느 순간들, 어떤 상황들 속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대상이 느닷없는 적으로 돌변해, 그만 영문 모를 희생제물이 되었다고나 할까?

사람을 공격할 때 그녀는 격렬한 광증과 분노에 잔뜩 취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행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기이한 광기! 순전한 맹목성 속에서도 늘 명철하고, 엄청난 혼돈 속에서도 항상 논리적이며, 부조리한 가운데 더없이 지적인 정신병자! 지극히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찬탄을 자아낼 만한 그 모든 계략과 집요함과 수완의 장본인!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자리잡은 뤼팽의 머리 속에는, 그간의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사건들과 더불어, 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걸어왔을 수수께끼 같은 인생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제일 먼저 남편의 계획에 포섭되고 완전히 사로잡힌 아내, 아마도 그 일부밖엔 이해하지 못했을 계획에 정신이 고착되어버린 돌로레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추적하고 있는 피에르 르뒥이라는 사람을 함께 찾아 헤매는 아내, 더 나아가 그와 결혼해서, 부모가 수치스럽게 쫓겨난 펠덴츠라는 자그마한 왕국으로 여왕처럼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는 돌로레스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다음으로, 모두가 몬테카를로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팔라스 호텔, 자기 오빠인 알텐하임의 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돌로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을 감시하면서, 미로처럼 얽힌 벽을 따라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늘에서 그늘로 서성이는 검은 복장의 돌로레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밤, 꽁꽁 묶인 케셀바흐를 발견하고는, 찔렀다.

다음날 아침, 호텔 사환에 의해서 발각될 처지에 놓이자, 또 찔렀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이번엔 채프먼에 의해서 들통날 것 같자, 그를 오빠의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역시 찔렀다.

이 모든 것이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지극히 잔인하고 맵시 있게 이루어졌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멍청하게도, 그녀가 만들어놓은 두 창고 사이의 통로를 고발했고,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증거들을 좋다고 제시했으며, 그녀가 위조해놓은 서류들을 토대로, 레옹 마시에가 남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원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이 드 말레이히라고 버젓이 주장을 하고만 거야......결국 루이 드 말레이히는 죽음을 선고받았지! 반면 돌로레스 드 말레이히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말이야. 범인이 붙잡혔으니, 모든 의혹이 단번에 가신 거 아니겠어? 게다가 남편과, 오빠, 동생, 두 하녀와 슈타인벡이 모조리 죽었고, 성가시게 된 부하들은 내가 대신 나서서 베베르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니, 이제 그녀의 범죄와 야욕으로 얼룩진 과거는 깨끗이 청소가 된 셈 아니겠느냐구! 이제 자기를 대신해 내세운 결백한 사람이 나 때문에 교수대에 오르기만 하면, 바야흐로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결정적으로 자유롭게 벗어나서, 앞으로는 피에르 르뒥의 사랑을 받는 백만장자, 당당한 돌로레스 여왕만이 존재하는 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뤼팽은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 그 자가 절대로 죽어선 안 돼! 내 목숨을 걸고 맹세컨대,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구!”

 

에필로그: 자살

 

해설: 「813의 비밀」의 역사적 배경  

500여 쪽을 뛰어넘는 이 파노라마를 거쳐오면서 머리가 뻐근해지셨을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그 사실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를 다시 한 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는 것도 독후(讀後) 감상을 구체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실적, 즉 다큐멘터리적 요소.

-(츠바이브뤼켄)은 대대로 영주가 군주로서 군림하다시피 하는 대공령(혹은 대공국)이다. 나폴레옹 시절에 잠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19세기 초부터는 다시 헤르만 1세 대공의 영지로 귀속되는데, 불행히도 그 방탕한 아들 헤르만 2세에 와서 독립된 공국(公國)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 즉 독일제국의 일개 변방지역으로 편입된 것. 당시 독일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는 이 헤르만 2세를 자기 휘하에 두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치를 정도로 애지중지한다. 헤르만 2세 역시 전장에서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인 헤르만 3세를 수상에게 맡겼고,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스마르크의 외교밀사로 눈부신 활약을 벌인다. 수상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도 정계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고, 수상이 죽은 뒤 2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뜬다. 모리스 르블랑은, 슈타인벡 영감의 입을 빌려서, 여기까지가 모든 독일인에게 두루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암시한다.

이제 저자는 이 대공 가문의 비운의 역사와 잊혀진 땅 되--펠덴츠 대공령을 거점으로 해서 기상천외한 허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 허구의 실마리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보물지도처럼 대접받는 황제의 편지이다. 비스마르크 수상이 재직할 당시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는 이 편지는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벌인 일종의 외교적 밀약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자고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란, 때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으로, 때로는 끼리끼리 나눠먹기식의 밀약으로 세계 여러 지역을 난도질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국가간의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줄다리기가 빈번했을 테고, 그 와중에, 하긴 이와 같은 비밀편지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특히 당시까지도 예민한 사안이었던 알자스-로렌 문제와 관련한 극비(極祕)검은 거래가 내용이라고 상정함으로써, 그 편지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카이저 황제와 아르센 뤼팽, 그리고 또 하나 허구의 축()인 말레이히 가문이 서로 노리는 그야말로 보물지도가 된다. 카이저 황제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안정적 확보와 선왕의 명예를 위해서, 아르센 뤼팽은 딸의 행복과 세계 경영의 야망을 위해서, 그리고 말레이히 가문은 3대에 걸친 한을 풀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역시 되--펠덴츠 대공령! 광인 집안으로 낙인찍혀 그곳에서 쫓겨났던 말레이히 가문에게는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복수의 터전이며, 뤼팽에게는 딸의 보금자리이자 세계경영의 거점이 바로 그 잊혀진 땅인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원주인이었던 되-퐁가()의 마지막 후손 헤르만 4(피에르 르뒥)를 꼭두각시로 전면에 내세워 현재 독일의 한 지방이 되어 있는 그 땅을 엄연한 공국(公國)으로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의 카이저 황제가 꼼짝 못할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자스-로렌 관련 밀약이 담긴 황제의 편지인 셈이다. 결국 모든 야망와 복수극은 좌절되고 편지는 카이저 황제의 수중으로 돌아가게끔 결론지음으로써, 모리스 르블랑은 허구를 허구의 테두리 안으로 되돌리고 역사적 실재는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창작의 묘를 발휘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떠나지 않았던 아르센 뤼팽 시리즈......이처럼 분명한 역사적 실재와 황당무계한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하되, 그 각각의 한계를 존중했다는 것도, 수많은 당시 대중의 호응과 사랑을 받았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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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아르센 뤼팽의 수많은 활약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내용이다. 다만 그 이유가 뤼팽보다는 소년탐정의 매력에 상당히 빚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작가는 희노애락의 끝을 경험하는 뤼팽이 어떤 감정적 동요를 겪는지 보여주면서 대도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명의 독자인 나로서는 그 감정의 과잉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기암성은 여러 면에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이나 뤼팽 대 홈스의 대결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단 스토리의 다층적인 전개와 복선들이 보다 정교화되고, 주제와 소재 및 시공간적 스케일이 놀랄 만큼 확대되었다. 역시 홈스가 뤼팽의 호적수로 등장하며, 새로운 영웅인 소년탐정도 선을 보인다. 원래 심리소설 작가였던 저자의 섬세한 시각이 더욱 돋보이며, 주변 풍광에 대한 인물의 감정이입도 대단한 수준이다. 뤼팽의 전인적(全人的) 면모가 약여하는 작품이며 그의 페이소스를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수작이다.

 

1. 한 밤의 침입자

 

2. 수사학급 학생 이지도르 보트를레

 

3. 시체

 

4. 정면대결

맹세하지. 내 친구들이 자네 부친과 함께 자동차로 지금 시골 어느 마을에 가 있네. 내일 아침 일곱 시에 그랑 주르날에 내가 주문한 대로 기사가 실린 걸 확인하는 즉시, 전화를 해서 아버지를 풀어드리라고 하겠네.”

좋습니다! 조건에 따르겠습니다.”

보트를레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마당에 더는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모자를 쓰고 내게, 그리고 뤼팽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뤼팽은 그가 나간 뒤, 밖의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딱한 녀석......”

 

다음날 아침 여덟 시, 나는 하인을 시켜 그랑 주르날지를 사오게 했다. 20분 만에야 돌아온 하인 이야기로는 가판대마다 신문이 동이 나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신문을 들춰댔다. 아니나 다를까 보트를레가 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었다. 다음에 그대로 옮겨놓은 기사 내용은 곧 전 세계 소식통들에 퍼져나갔다.

 

앙브뤼메지의 참극

 

이 글의 목적은, 앙브뤼메지의 참극, 아니 이중의 참극이라고 해야 할 일대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 그간의 수사 및 추론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기에 분석, 연역, 귀납 등에 의한 모든 추론작업은 극히 상대적이면서도 진부한 흥밋거리밖에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수사과정을 이끈 두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며, 그것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해 보이는 가운데, 이 희대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그 추이를 짚어가며 이야기하려고 할 따름이다

아마도 혹자는 사건의 여러 부분들이 미처 증명되지 않았고, 대부분 나의 가설에 의존하고 있음을 간파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가설이 엄청난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따라서 그것을 토대로 상정한 사건들 역시, 비록 하나하나 증명된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신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물은 계속해서 흐르되 그 속에 담기는 푸른 하늘의 이미지는 늘 같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선 내 관심을 자극한 첫 번째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어떻게 치명상을 입은 뤼팽이, 어두컴컴한 구멍 속에서 음식도, 약도, 이렇다 할 보살핌도 없이, 최소한 40일을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 돌아보자. 때는 423일 목요일, 오전 4, 아르센 뤼팽은 엄청난 절도행각을 한창 벌이다가 들키는 바람에 폐허를 따라 난 길로 도망쳤으나, 그만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또 쓰러지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악착같이 예배당 쪽으로 가기 위해서 거의 기다시피 한다. 거기에는 그가 우연히 발견한 지하 납골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숨어들기만 하면 일단 위기는 모면한 셈. 죽을 힘을 다해 다가간 끝에 불과 몇 미터를 남겨둔 상황에서, 문득 발소리가 들린다. 기진맥진,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끝내는 놓치고 그는 기절하고 만다. 이때 도착한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드모아젤 레이몽드 드 생-베랑. 바로 여기까지가 참극의 제1, 즉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추후에 발생한 사건들이 남긴 단서들을 보건대, 그것을 추론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아가씨의 발치에, 상처입고 신음 중인, 그래서 조만간 비참하게 붙들리고 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바로 자신이 쏜 총에 맞은 남자 말이다. 이제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니 경찰에 넘겨야 할까?

만약 그가 장 다발의 살해범이었다면 그녀는 의당 그가 치러야 할 운명을 부여했으리라.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삼촌인 제스브르 백작이 정당방위로 저지른 살인행위의 전모를 다급하게 이야기해준다. 그녀는 웬일인지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빅토르는 쪽문 쪽을 감시하고 있으며, 알베르는 살롱의 창가에 있다. 결국 둘 다 여기까지 시선이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 과연 그녀는 자기 때문에 상처입은 남자를 경찰에 넘겼어야 할까?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짐작한 거부할 수 없는 동정심이 여기서 한몫을 한다. 뤼팽의 주문대로, 그녀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동여맴으로써 우선 핏자국이 남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는 역시 남자가 건넨 열쇠로 예배당 문을 연 다음, 남자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여보낸다. 즉시 문을 닫고 여자가 되도록 멀리 떨어진 다음에야 알베르가 헐레벌떡 나타난다.

만약에 그 순간, 혹은 그로부터 수분 이내에 누군가 예배당에 들어섰다면, 기력을 미처 회복하지 못해 바닥 포석을 들어올려 지하 납골당 안으로 피신하지 못했을 뤼팽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을 것이다......하지만 정작 예배당에 대한 조사는 그로부터 여섯 시간이나 지난 뒤에, 그나마 건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뤼팽은 안전하게 피신했고,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을 죽일 뻔한 여자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후로 마드보아젤 드 생-베랑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뤼팽의 공범이 된 셈이다. 이제는 그를 경찰에 넘길 입장도 아닐뿐더러,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는 아예 그를 보살피기로 한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은신처 안에서 남자는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그려가 계속 공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로서의 모성적 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종의 사명감마저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기꺼이 그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워낙에 총명하고 섬세한 여자이다. 그래서 예심판사에게 아르센 뤼팽의 인상착의를 거짓으로 지어낸다(두 사촌자매가 서로 다른 진술을 한 사실을 상기해보라). 아울러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모르는 단서들을 통해, 변장한 마차꾼이 아르센 뤼팽과 한패라는 것을 이미 알아보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가짜 마차꾼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준다. 두목의 상태는 물론 한시 바삐 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그녀가 알려준 것이다. 마차꾼의 챙모자를 슬쩍 바꿔치기 한 것도 물론 그녀이다. 또한 그녀 자신을 목표로 지목한 협박 쪽지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그녀를 의심하겠는가?

그녀는, 내가 예심판사에게 소견을 밝히려고 하자, 느닷없이 끼어들어 전날 나를 숲속에서 보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엉뚱한 낭설을 퍼뜨린다. 물론 예심판사 피욜 씨로 하여금 나를 의심케 해서 입을 막으려는 처사였다. 그녀의 그런 행위는 나로 하여금 그녀에 대한 의심의 불씨를 지피게 했으므로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일단 내 입을 막고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는 무려 40일 동안이나 뤼팽을 먹이고 보살피게 되며(우빌의 약사를 조사해본 결과,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 이름으로 된 여러 약품 주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환자를 낫게 한다.

이상이 겉으로 드러난 앙브뤼메지의 참극이자, 우리가 해결한 두 가지 문제 중 첫 번째이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이 은신하고 희생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수호자는 다름 아닌 성채 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아르센 뤼팽은 살아 있다. 따라서 바로 두 번째 문제이자 앙브뤼메지 참극의 제2막이 전개된다. 즉 다시 무리의 두목으로 돌아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막강한 세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그가, 끊임없이 나와 부딪치면서까지 끝끝내 자신이 죽은 것으로 세상이 알고 있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상기해야 할 점은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종된 다음 여러 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 사진들은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극히 일부만을 불완전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자연히 두 남녀 사이에는 의당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40일 동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오면서 뤼팽은 어느덧 없으면 그리워하게 되고, 간호를 하러 몸을 숙여올 때도 그녀의 향긋한 숨결에 먼저 매혹되어버리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전형적으로 환자가 간호사에게 반하는 케이스라고 할까? 감사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해가고, 찬탄의 시선이 정염의 불꽃으로 화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추이이다. 그에게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구원이자 즐거움이고, 꿈이자 희망이며, 빛이자 삶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제 뤼팽은 그녀의 헌신을 마냥 이용하기가 꺼려질 만큼 그녀를 존중하게 되었고, 그녀를 공범으로 개입시키는 것을 더 이상은 스스로에게 용인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미 사랑의 포로가 된 뤼팽은 자신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처럼 도발적인 사랑에 쉽게 혹할 리가 없는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환자가 치유된에 따라 방문 횟수를 줄여갔고, 급기야는 완쾌된 날을 기회로 지하 납골당 출입을 끊는다.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애끓는 연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뤼팽은 마침내 엄청난 결심을 하고만다. 66일 토요일, 그는 드디어 은신처를 나와 수하들이 돕는 가누데, 아가씨를 강제로 납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납치가 일어난 경위가 알려지면 안 된다. 모든 수사의 길목을 차단해야 하고, 모든 추리와 추리의 희망까지도 그 싹부터 잘라내야만 한다. 그 일환으로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낫다. 살인이 연출되고, 증거들이 조작된다. 이렇게 해서 누가 보아도 확실한 범행이 기정사실화된다. 어느 정도는 미리 예견되고, 뤼팽의 패거리들에 의해서 예고까지 되었으며, 결국 두목의 죽음을 되갚기 위해서 무자비한 범죄행위가 발생하는데-,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조작되었는가!-그로 인해서 바로 그 두목의 죽음 역시 보다 확고한 사실로 정착한다.

아니, 단순한 믿음을 부추기는 것만을도 모자라다. 아주 확실한 사실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쯤 뤼팽은 내가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본다. 내가 언젠가는 예배당의 비밀을 눈치채고 그 지하의 납골당을 파헤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서도 만약 납골당이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면 그간의 모든 조작과 속임수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따라서 납골당은 비어 있으면 안 된다!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죽음 역시 파도가 시신을 해변으로 몰아오지 않았다면 애매모호한 추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신 역시 조수에 떠밀려와야만 한다!

이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커다란 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뤼팽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는 어려운 숙제였겠지만, 뤼팽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결국 뤼팽이 내다본 것처럼, 나는 예배당의 비밀을 파악하고 지하 납골당을 발굴해서, 뤼팽이 그동안 숨어 있던 은신처로 내려가본다. 그리고 거기에 나뒹굴어 있는 그의 시신을 확인한다!

뤼팽의 죽음을 점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와 같은 광경에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그가 죽었을 개연성엔 무게를 두지 않았다(우선은 직관적으로, 그리고 추론에 의거해서). 때문에 모든 기만술과 조작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게 된다. 나는 즉시 이런 생각을 한다. 곡괭이질로 떨어진 돌멩이가 하필 그 자리에, 그것도 톡 건드리기만 하면 떨어질 정도로 가볍게 얹혀 있는 데다,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아래의 시체 얼굴 부위를 정확히 가격하도록 되어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중에 시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가짜 아르센 뤼팽의 머리를 실수 없이 으깨놓도록 말이다.

그밖에도 또 하나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반시간 후, 나는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시신이 조수에 떠밀려와 디에프의 해변 바위틈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팔에 평소 차고 다니던 것과 같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그녀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어느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시체가 워낙에 알아볼 수 없게 상해 있어서 신원을 암시하는 단서는 오직 그것뿐이었고 말이다.

사실 위의 사체들에 관해서는 나 또한 기억 속에 뭔가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라 비치 드 디에프지에서 나는 앙베르뫼에 체류하던 어느 젊은 미국인 부부가 음독자살을 했는데, 당일 밤 그 시체 두 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즉시 알베르뫼로 달려갔다. 알고 보니 사체가 사라진 경위만 빼고 모두 진실이었다. 즉 그냥 무턱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 부부의 인척이 일정한 확인절차를 거친 다음, 사체를 인수해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인척이라는 사람들은 아르센 뤼팽과 그 패거리들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그런 식으로 명실상부한 죽음의 증거가 확보된 셈이다. 우리는 아르센 뤼팽이 왜 여자를 살해한 것처럼 꾸미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사랑에 빠졌고,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말았으면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의향이 있었고, 심지어 남의 시체를 도둑질해다가 자기 자신과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역할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래야 우선 그 자신이 조용히 지낼 수 있으니까. 누구도 더는 그를 추적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진실에 의혹을 던지지 않을 테니까.

글쎄......과연 아무도 그럴 뜻이 없을까? 적어도 세 사람만큼은 뭔가 의심을 포기하지 않을 일이다. 우선 오기로 되어 있던 가니마르가 있고, 셜록 홈스 역시 영불해협을 건널 예정이었으며, 현장에는 또 내가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삼중의 위협이 아직도 엄존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이 삼총사의 처단에 즉각 나서는데, 가니마르와 셜록 홈스는 납치를 하고, 나는 브래두를 시켜 습격을 하고 만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한 가지 남는 의문점이 있다. 도대체 뤼팽은 왜 그 에기유 크뢰즈의 문서에 그토록 집착을 했던 걸까? 내게서 그것을 탈취해가면서도 굳이 내 기억 속에서까지 그 쪽지에 적힌 다섯 줄의 암호문을 지워 없애려고는 하지 않은 이유는 또 뭘까? 혹시 종이 자체의 질이라든가 그밖의 다른 단서가 내게 뭔가 특별한 정보를 제공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이상이 앙브뤼메지 사건의 진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수사에서는 물론, 지금까지 해명한 과정에서도 어디까지나 가설(假說)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지 않고 만약 뤼팽에 대항해서 어떤 확실한 증거나 공고한 사실을 기대한다면, 필경 한도 끝도 없는 기대 속에 시간낭비만 하든지, 뤼팽이 조작한 대로 이끌려가다가 애당초 겨냥한 바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귀착하고야 말 것이다.

물론 나는 여하한 사실도 있는 그대로만 온전히 밝혀진다면 나의 가설이 모든 면에서 적중했다는 것이 증명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아버지가 납치되었기 때문에 아르센 뤼팽에게 한순간 무릎을 꿇었던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급기야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보였다. 그가 확신하는 사건의 진실이 워낙에 근사하고 흥미로웠기에, 그것을 증명하는 자신의 논리가 너무도 완벽했기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사장(死藏)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온 세상이 그만 믿고, 진실이 밝혀지기를 학수고대하는지라, 결국 입을 열고 만 것이다.

한편, 기사가 나간 바로 그 날 저녁,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무슈 보트를레 영감의 납치소식을 보도했다. 오후 세 시쯤 되어서 셰르부르로부터 날아온 전보를 통해서 보트를레가 이미 그 사실을 접한 뒤였다.

 

5. 발자취를 따라서

 

6. 역사 속에 숨겨진 비밀

 

7. 에기유 논고

좋습니다. 어차피 이제 책은 불완전한 상태요! 두 장이 찢겨나갔으니......하지만 당신은 그 누락된 부분까지 읽었다고 했소. 그렇죠, 마담?”

.”

그럼 내용도 알고 있겠죠?”

, 알아요.”

그걸 우리 앞에 공개해줄 수 있겠죠?”

물론이죠! 워낙에 호기심을 품고 정독을 한 책이라......게다가 그 두 장의 내용이 저로선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 그럼 어서 말해보십시오. 어서요, 마담! 지금부터 공개하는 내용은 정말로 중요한 겁니다. 자 자, 어서 시간 낭비 그만 하고, 속 시원히 털어놓아보세요! 에기유 크뢰즈가......”

, 그거 간단해요! 에기유 크뢰즈는 말이죠......”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하인이 들어서더니 이러는 거였다.

마담에게 편지입니다.”

 

입 닥치시오......

여차하면 당신 아들은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이오......

 

제발 부탁입니다, 마담, 진정하십시오......우리가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전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입을 열까? 적어도 보르를레는 그렇게 믿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의 잇새로 뭔가가 나올 듯했다. 그러나 또다시 문이 활짝 열리며, 이번엔 하녀가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하녀는 완전히 혼비백산한 표정이엇다.

마담! 무슈 조르주가......무슈 조르주가, 그만......”

 

그때였다. 보트를레는 슬그머니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더니 권총 손잡이를 움켜쥐고 손가락은 방아를 손에 단단히 건채, 잔뜩 긴장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어느 한순간 후닥닥 권총을 꺼내서 마시방을 향해서 다짜고짜 발사하는 것이었다!

 

좋아, 이제 꼼짝 마......기껏 방금 전에야 눈치챈 모양이로군......그렇게도 날 못 알아보겠던가? 그러고 보니, 내가 마시방의 얼굴을 너무 잘 흉내낸 모양이지?”

아닌게 아니라, 마시방, 아니 아르센 뤼팽은 좀 전의 꾸부정한 학자와는 전혀 달리 두 다리를 떡 버티고 꼿꼿이 선 채, 세 명의 겁에 질린 하인들과 혼비백산한 표정의 남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지도르, 자네 또 실수한 거야! 그렇게 내가 뤼팽이라고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저들이 내게 부담 없이 달려들었을 게 아닌가! 저들을 좀 보게......저런 덩치들 앞에서 내가 어찌 되었겠는가? 맙소사, 14라니......”

 

날 용서하시겠습니까, 마담? 워낙에 험한 삶을 살다보니, 때로는 누구보다 나 자신부터 얼굴을 붉힐 흉악한 짓을 종종 저지르게 되는구려......하지만 아드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자그마한 주사를 한 대 놓았을 뿐이거든요. 아주 작은 거 한 대......아까 어른들이 애 하나 놓고 호들갑을 떨 때 팔에다가 살짝 놔주었죠. 앞으로 길어야 한 시간 후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어쨌든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입조심만큼은 해주셔야 하겠는걸요......”

그는 다시 한번 깊숙이 인사를 하며 무슈 드 벨린의 호의와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지팡이를 집어들고 궐련에 불을 붙인 뒤, 남작에게도 한 대 권한 다음, 뤼팽은 모자챙을 멋지게 한번 쓰다듬으면서 보트를레를 향해 잔뜩 어른스런 어조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잘 있게, 애송이!”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하인들 얼굴 위로 훅 뿜으면서 느긋하게 자리를 떴다......

보트를레는 그 상태대로 잠시 기다렸다. 아까보다 많이 안정된 마담 드 빌몽은 아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호소해볼 요량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동안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보트를레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성으로 가득 찬 그녀의 머리 속에서 에기유 크뢰즈의 비밀일랑은, 저 아득한 과거의 암흑 속에 빠져버린 가느다란 바늘보다 더욱 찾아내기 힘든 무엇으로 영원히 묻혀버린 셈이었다.

 

어때, 잘 맞아떨어졌지? 자네의 늙은 친구가 그만하면 줄타기 묘기를 제대로 한 것 아닌가? 이제는 정말 단념하겠지? 아 참, 지금쯤은 그 비명 문학 아카데미 회원인가 뭔가 하는 마시방이라는 작자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겠구만......그야 당연히 실존 인물이지! 말만 잘 들으면 직접 대면케 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네의 권총을 돌려줘야겠지......, 장전이 되어 있냐구?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모두 다섯 발이 남았어......물론 나를 골로 가게 만들기엔 단 한 발로도 충분하겠지......어라, 그대로 호주머니 속에 넣는구만......그래 잘 생각했어......그때처럼 허튼 짓 하느니, 지금이 훨씬 낫군그래......정말 한심한 짓이었다구! 하기야 아직 나이도 한참 어린 데다, 덮어놓고 후딱 이런 생각부터 들었을 테지......저 영험하신 뤼팽한테 또 당했구나! 한데 그가 코앞에 보란 듯이 서 있어......에라 모르겠다, 당기고 보자......안 그런가? 그래 좋아......그 정도쯤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지! 그래서 말이네만 내 100마력짜리 막강한 자동차에 탑승해보지 않겠나?”

그리고는 갑자기 입술에 손을 대고 휘파람을 냅다 부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늙은 마시방의 근엄한 외모와 뤼팽의 짐짓 과장하는 장난기 섞인 허세가 한데 뒤섞여 그렇게 코믹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보트를레는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실소를 내뱉었다.

 

8. 케사르에서 뤼팽까지

 

9. 열려라, 비밀의 문이여!

 

10. 제왕(諸王)의 보물

그래, 그녀는 잊어줄 거야!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한 마당에 그녀는 기꺼이 잊어주고야 말 거라구! 저 난공불락의 기암성도, 그 눈부신 보물도, 모든 권력도, 자존심도 모두모두 희생한 나를......그래, 정녕 나는 모든 걸 버렸다네......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되고 싶지가 않아......오로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밖에는......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정직한 남자 말이네......, 대체 정직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얼까? 최소한 그 무엇보다도 수치스럽지 않게 사는 걸 거야......”

 

, 보트를레......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맛보았던 온갖 강렬한 즐거움들도 그녀가 나를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세......! 마음이 자꾸만 약해지는 것 같아......울고 싶은 기분마저 드는걸......”

정말로 우는 걸까? 아닌게 아니라, 그의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트를레는 느꼈다. 천하의 아르센 뤼팽의 눈에 눈물이라니! 사랑의 눈물이라니......

 

레이몽드!......레이몽드!”

뤼팽은 쓰러진 여인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품 안에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죽지 마......”

잠시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정말이지 처절한 광경이었다! 레이몽드를 향한 뤼팽의 극진한 사랑을, 그 여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피워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보트를레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밤은 어느새 다가와 이 처참한 전쟁터를 어둠의 수의로 덮어주고 있었다. 꽁꽁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진 세 명의 영국인은 키 큰 잡초더미 속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아련한 노래 소리가 초원의 광막한 침묵 한 켠을 어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곳 뇌빌레트의 주민들이었다.

뤼팽은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잠시 가만히 서서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단조로운 가락은, 레이몽드와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했던 이 마을 농가의 분위기를 더없이 가슴 아프게 와닿게 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죽어간 가엾은 연인, 이제는 저 영원한 잠 속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만 레이몽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 주민들이 방책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뤼팽은 그 강한 팔로 이 세상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시신을 번쩍 들어 안아 어깨에 들쳐업었다.

가요, 빅투아르......”

그래......그만 가자꾸나, 얘야......”

잘 있게, 보트를레......”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너무도 소중하면서, 또한 끔찍한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말없이 황망하게 뒤를 따르는 노파를 동반한 채, 그렇게 그는 해안 쪽으로 걸어가, 곧장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해설 : 저자의 '추리소설론'

*기암성을 발표한 해인 190971일자 피가로지에 모리스 르블랑 자신이 추리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의 입장을 짤막하게 소개한 내용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의 코난 도일과 자신의 작품세계의 차이점-추리와 논리성에 치중한 영국 소설과 다양한 감성과 상상력의 변덕을 한껏 받아들인 자신의 작품들의 다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 자리를 빌려서 독자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약 내가 붉은 쪽지를 네 개가 아닌 여덟 개로 상상을 해서 네 차례의 범행을 더 꾸며댔다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까지 위의 이야기를 따라올 때와 같은 호기심과 흥미를, 그 터무니없는 결말에까지 고스란히 가져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뭔가 애매모호해서 여운을 남기는 악당들의 활극이 그토록 우리의 열정을 끌어당기는 것이고,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사건들이 우리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는 것이리라.

이를 두고 과연 건전하지 못한 호기심이라고 타박을 줘야 할까? 물론 일상의 나날에 진짜로 일어나는 범죄행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라면 얼마든지 안전하고 바람직한 관심과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거칠고 끔찍한 사건을 다룬 이야기를 기꺼이 현실처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정교한 추리의 유희에 흠뻑 빠져듦으로써 현실의 지난한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하고자 하는 내면 깊숙한 욕구 때문이다 예컨대 추리소설의 첫 장을 열면서부터 독자는 저자의 공범이 되어야만 하고, 또 사실이 그렇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독자를 아주, 아주 꼬불꼬불한 길을 통해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의 결말로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 천재적인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충(黃金蟲)이라든지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을 한번 떠올려보시라. 아니면 위대한 발자크의 보트랭(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인물/역주)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범죄의 달인이자, 나폴레옹처럼 무지막지한 인물을 말이다. 분명 거장의 솜씨가 틀림없는 그 책들에 사용된 작가의 기법은 그러나 가보리오나 코난 도일과 같은 대중작가가 사용한 기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다른 것은 재능의 정도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에 대해서 대중은 대단히 너그러운 편이다.

작가에게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쓰는 일은 대단히 고차원적인 오락이자, 자신의 어떤 능력들을 직접 실험해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들 사람들이 좋아하는 추리와 분석 능력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유행하는 일부 탐정의 거의 수학적인 추론이라든가 아주 정교하게 도출된 추리의 엄격한 방법들은 소위 논점선취의 오류(논증해야 할 것을 도리어 전제로 삼는 오류/역주)’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진정 현실적인 요인들은 애써 외면한 채 조작되고 취사선택된 몇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추리작가로서의 진정한 오락과 재능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렉상드르 뒤마와 조르주 상드의 놀랄 만한 작품들 이후, 너무도 푸대접을 받아온 상상력의 아무 거리낌없고 자유분방한 활용에 있는 것이다(19세기 말까지 프랑스 소설의 주류는 철저한 실증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였다. 르블랑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그와 같은 흐름과 다시금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눈을 돌리는 풍토를 말하고 있다/역주). 이제 그 고삐 풀린 상상력은 화려한 재기의 용트림을 하고 있으며, 오늘날 수많은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 매력에 적극 호소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각해보라, 상상을 한다는 것의 기막힌 즐거움을! 상상력의 변덕스런 흥취에 마음껏 젖어들고, 애매한 꿈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가는 유령들과 맘껏 노니는 즐거움을 말이다!......

다만, 그냥 상상력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의 작품, 즉 문학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려면 단순히 꿈구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독특한 에피소드들을 골라 적절한 형태를 부여하고, 전체적인 구조에 신경을 쓰는 등 넘어야 할 관문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가능한 한 약간의 경쾌함을 가미해야 한다는 점이다. 될수록 기발한 이야깃거리를 풍부히 하고, 줄거리의 복잡한 미로 가운데에도 가끔씩 긴장을 완화하고 기분을 풀어줄 아이러니의 숨결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줌으로써 작가이든 독자이든 어디까지나 즐기면서 은근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기암성은 물론 지금까지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을 써오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혹자는 이와 같은 소설들이 부도덕한 문학이라고 몰아 붙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말씀이다. 세상에 재미나는 도둑 이야기를 읽었다고 해서 실제로 도둑질을 시도할 바보는 없으며, 끔찍한 사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정신병자는 없다. 오히려 추리 소설의 영웅들은 악행을 부추기기보다는, 활달한 모험심과 박력을 향한 취향, 대범한 기상과 냉철한 지성을 우리에게 심어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 위대한 괴도의 영혼을 좀더 심도 있게 파고들어서, 그가 가진 감정들, 행동의 동기들, 온갖 열망과 고뇌들, 그리고 격렬한 취향과 위대한 꿈들을 낱낱이 독자 여러분에게 풀어 보여줄 예정이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소견을 아르센 뤼팽, 박력교수(迫力敎授)라는 제목쯤으로 엮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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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팽 대 홈스의 대결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든 생각은...

모리스 르블랑은 셜록 홈즈 없이는 아르센 뤼팽의 활약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셜록 홈즈에게는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모리아티라는 숙적이 있다. 왜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에 필적할만한 매력있는 캐릭터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일까?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 그리고 자국 문화에 대한 불편할 정도의 자신감을 생각해보면 하필이면 프랑스 작가가 남의 나라 영웅을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 소설에서 멋대로 차용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뭐, 프랑스 국민들 입장에서는 훈장까지 줄 정도로 정신 승리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살아 숨쉬며 끊임없이 소비되는 홈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프랑스 밖에서의 뤼팽의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가 우리 사회의 법적 테두리내에서 규정된 범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이 「아르센 뤼팽」을 구상하게 된 배경에는 바다 건너 셜록 홈스의 성공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은 이미 세계적인 명탐정의 반열에 오른 셜록 홈스에게 던지는 아르센 뤼팽의 본격적인 도전장이다. 프랑스인 특유의 자존심을 고취시켜 작가의 폭발적인 인기상승에도 큰 공헌을 한 작품이지만, 내용을 파고들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공평한 균형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코난 도일은 자신의 창조물인 셜록 홈스를 제멋대로 요리하는 걸 못마땅히 여겨 즉각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대해 살짝 이름 철자를 바꿔 '헐록 쇼메스'로 개작 출간했으나, 원래 작가의 기도를 살리는 의미에서 한국어본에서는 모두 셜록 홈스로 고쳤음을 밝혀둔다. 당대의 두 영웅이 벌이는 두뇌 싸움 및 개성대결이 볼 만하다.

 

 

첫번째 에피소드 : 금발의 귀부인

1. 23조 514번 복권
2. 푸른 다이아몬드
3. 셜록 홈스, 전투를 개시하다

"홈스 말인가? 솔직히 그는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 하지만 바로 그 자 때문에 아까부터 내 기분이 이렇게 흥분되고 즐거운 것 또한 사실이야. 우선은 자존심이 사는 기분이지. 나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되는 명사가 나서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라면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나 정도 되는 협객이라면 당연히 셜록 홈스와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생각에 짜릿한 기분이 들 것일세. 어쨌든 이제부터 당분간은 좀 바빠지겠어...... 나는 그 자를 잘 알거든. 절대로 물러설 친구가 아니지......"

"하긴 그는 생각보다 강할 걸세."

"무척 강하지......탐정으로서 그에 필적할 만한 맞수는 옛날에도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내가 그보다 유리한 점이라면, 그는 공세를 취하지만 나는 방어를 한다는 것뿐일세. 즉 내 역할이 조금 더 쉽다는 것이지......게다가......"

그는 눈에 띌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난 그가 싸우는 방식을 잘 알고 있는 데에 반해서 그는 내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거야......두고 보게, 내가 예비해둔 몇 가지 함정들 앞에서 그는 꽤 골머리를 앓아야 할 걸!"

마침내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두 차례 두드리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아! 아르센 뤼팽 대 셜록 홈스라...... 프랑스와 영국의 격돌이라니...... 좋아, 트라팔가르(1805년 넬슨의 영국함대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에스파냐 남서쪽 끝의 트라팔가르에서 격파한 해전/역주)의 빚을 멋지게 갚아주겠어! 아, 딱한 친구...... 그 자는 내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야......"

 
4. 어둠 속의 희미한 빛

그들은 그렇게 무척 많이도 걸었다. 앙리-마르탱가의 저택을 에워싼 두 채의 건물을 일일이 방문했고, 그 다음 클라페이롱가까지 곧장 걸어가 25번지 건물의 전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홈스는 연신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집들 사이에 분명 비밀통로가 있어......한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왓슨은 난생 처음으로 가슴 깊이 이 동업자의 전지전능한 천재성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대체 왜 저리도 말만 많고, 행동하는 건 하나 없단 말인가?


5. 납치
6. 아르센 뤼팽, 두번째 체포되다
셜록 홈스라니! 아르센 뤼팽은 무슨 처절한 광경을 보느라 눈이 거북한 사람처럼, 두 눈을 꿈벅이며 홈스를 바라보았따. 셜록 홈스가 이 곳 파리에 나타나다니! 바로 전날, 무슨 위험한 화물처럼 영국 땅으로 돌려보냈던 셜록 홈스가 지금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저렇게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니! 아, 아르센 뤼팽의 의도와 정반대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건 필경, 순간적이나마 자연의 법칙이 삐끗했고, 온갖 비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기운이 이 세상에 만연했기 때문이리라! 셜록 홈스가 지금 눈앞에 멀쩡히 돌아와 서 있는 것이다!

 

잠시 깊은 생각이 오가는 듯 침묵을 지키던 뤼팽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지금 선생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나와 함께 옛 추억이나 떠올리자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물론 그보단 훨씬 더 중요한 동기가 있지요......"

당신이 내 선장과 선원 친구들을 용케 따돌린 것만으로는 우리의 싸움에서 그리 중요한 사건을 치렀다고 할 순 없소이다...... 혹시 충분한 복수의 준비를 갖추지 않은 채, 이렇게 감히 아르센 뤼팽 앞에 홀몸으로 나타나신 건 아니겠죠?

"여부가 있겠소!"

"이 건물은 접수한 거요?"

"그야 물론이오."

"이웃하는 두 건물도?"

"물어 무엇하겠소......"

"이 위층 집들도?"

"뒤브뢰이 씨가 소유한 6층의 세 아파트들 역시 우리 수중에 떨어졌소."

"그렇다면......"

"결국 당신은 붙잡힌 꼴이지요, 무슈 뤼팽......옴짝달싹 못하게 붙잡힌 꼴 말이오!"

일전에 납치 중인 자동차 안에서 홈스가 느꼈던 황당하고 분한 감정을 지금은 아르센 뤼팽이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운명의 섭리에 순응하는 듯한 기분 또한 함께 밀려왔다. 둘 다 똑같이 강한 인간으로서 정정당당한 패배 역시 깨끗하게 수긍할 땐 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둘이 비긴 셈이로군요......"

뤼팽은 간단히 던지듯 내뱉었다.

 

"잘 가시오, 선생! 우리 사이에 맺어진 우정어린 관계를 내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왓슨 씨에게도 안부나 전해주시구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뤼팽은 혼자서 냉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나미 없는 거 보면 역시 영국 놈이야......하긴 섬나라 샌님에게 우리의 예의 바른 우아함을 기대하는 게 무리겠지......한번 생각해보시오, 가니마르, 프랑스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저런 식으로밖에 퇴장을 못하겠소? 모르긴 몰라도 세련되기 그지없는 겸허한 태도로 넘치는 승리감을 살짝 가릴걸!"

 

"왓슨, 좀 어떻게 해보게......자네 정말 한도 끝도 엉ㅄ구만......힘 좀 내봐 이 사람아!"

"힘이 모자란 게 아닐세......"

"그럼 뭔가?"

"팔이 하나가 이 모양이니 원......"

"저런, 저런...... 저 엄살 좀 보라구...... 누가 보면, 이 세상에 자네 하나만 그런 처지라고 생각하겠구만! 팔 하나가 아예 없는 사람들은 어떻겠나? 자네 정도면 지극히 준수한 편이지......"

 

"아무튼 이렇게 정식으로 배웅을 하게 되어서 다행이오...... 물건들 더 필요한 건 없소? 담배며 성냥이며......그렇지! 석간신문은 있겠죠? 거기에 당신의 최근 무용담이자 나의 체포에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을 것이오......자 이만 나는 작별인사를 해야겠소이다. 서로 좀더 깊이 사귀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었소......앞으로도 나를 만나고 싶어하신다면 무한한 행복으로 여기리다......"

그리고는 훌쩍 플랫폼으로 뛰어내린 뒤 문을 닫았다.

아르센 뤼팽은 넋을 잃고 창문을 내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밖에서도 여전히 손수건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두번째 에피소드 : 유대식 램프
1.
2.

홈스는 부부를 한동안 멀뚱하니 앉혀놓고는 방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한데 그의 옷차람이 하도 괴상해서 부부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어야만 했다. 생각해보라, 꺽다리 영국신사가 광대 같은 옷차림을 한 채,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소는 창문에서 문까지, 다시 문에서 창문까지, 마치 자동인형처럼 똑같은 걸음걸이와 똑같은 걸음수를 유지하며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이보시오, 무슈 뤼팽, 이 세상에는 뭘 어찌 한다 한들 내가 절대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딱 둘 있소. 우선 나 자신과 바로 당신이오."

이 정도면 일종의 평화협정이 정착된 걸까?

비록 아르센 뤼팽을 잡아 넘기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어도, 그리항 여전히 붙잡을 수 없는, 늘 우세를 인정해주어야 한느 특별한 적으로 그를 생각해야 하면서도, 영국인은 그래도 끈질긴 인내력을 발휘한 끝에 푸른 다이아몬드를 되찾은 것처럼 유대식 램프를 원상복귀시킨 것만을 사실이다. 하긴 일반 대중들의 눈에는 이번 사건이 푸른 다이아몬드 사건보다 덜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을 거이다. 왜냐하면 유대식 램프를 되찾게 된 경위는 물론,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인간대 인간, 뤼팽 대 홈스, 그리고 경찰 대 도둑 그 어느 쪽도 승자나 패자가 아닌 평등한 상태로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묘미가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모두가 이긴 싸움이었다고나 할까?


모리스 르블랑 전기

1864년 루앙에서 출생. 유복한 도매상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주로 읽은 책으로는 월터 스콧, 발자크, 위고, 뒤마와 쥘 베른의 책들이 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잠시 동안 제사(製絲) 공장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880년 노르망디 전역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이때 섭렵한 에트르타 절벽이라든가 쥐미에주 수도원, 센 강 어귀의 여러 지역들, 생트-방드리유의 폐허들은 그의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고향이 루앙인 플로베르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한 수많은 쟁쟁한 작가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자신 또한 노르망디 출신의 유명 작가가 되기로 결심, 모파상을 열렬히 숭배하게 된다.

1888년 루앙을 떠나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쌓으려고 파리에 정착한다. 당시 상징주의자들과 데카당파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몽마르트르의 카페 샤 누아르(검은 고양이)”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거기에서 알퐁스 알레와 모레아스, 르통트 드 릴르 등과 교우한다.

1889년 에른스틴 랄란과 결혼. 딸 마리-루이즈 탄생.

심리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콩트집 부부들(Des couples)을 처음 발표하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1892년 둘째 여동생 조르제트가 루앙은 답답하고 편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싫다며 집을 나과 가수 겸 여배우의 삶을 시작한다. 소설가 마르셀 프레보가 문단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신문 질 블라스에 그를 소개한다. 거기에서 그는 일정한 호응을 얻는 콩트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1893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Une vie)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첫 소설 어떤 여자(Une femme)질 블라스지에 연재한다. 쥘 르나르와 레옹 블루아, 알퐁스 도데 등이 극찬한다.

1894, 어려서부터 자전거광이자 예찬론자인 그는 그녀(Elle: 자전거를 의미한다)”라는 제목으로 자전거 예찬론을 발표한다. “언젠가 우리 모두의 사유재산이 한 대의 자전거로 집약될 때가 오리라! 모든 기쁨과 건강, 열정, 젊음의 원천인 자전거......이 영원한 인간의 친구에게로 말이다!”

1895년 첫 아내와 이혼한다. 당시 메테를링크와 동거 중인 여동생 조르제트가 연 살롱에는 말라르메를 위시해서 르뷔 블랑슈의 고정 필자들, 콜레트 등 대다수 파리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모리스 르블랑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견문이 넓은 세련된 댄디로 통했다. 그즈음 문학보다는 시사문제에 개방적인 에코 드 파리에 기고를 한다.

1896년 단편 모음집 신비의 시간들(Les heures de mysere)에는 꿈이나 신경증 같은 묘한 심리상태에 대한 남다른 취향이 드러나 있다.

1897아르벨과 클로드(Armelle et Claude)라는 소설과 자전거를 예찬하는 소설 날개를 펴다(Voici des ailes)를 발표한다.

1898년 드레퓌스 반대파에 가담했으나, 같은 진영 내에서도 자주 반론을 제기한다.

1899, 1838년 발자크 주도로 결성된 일종의 문인협회(la Societe des Gens de Lettres)”에 입회한다. 소설 열광(Enthousiasme)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1902년 자신에게 아들 클로드를 낳아준 마르그리트 보름제와의 결혼이 여의치 않은 데다, 건강 및 심리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진다. 이때부터 좀더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줄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1905, 막 창간된 주 세 투(Je sais tout)의 편집장 피에르 라피트가 영국에서 대단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셜록 홈스 시리즈풍의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한다. 그에 따라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L`Arrestation d`Arsene Lupin)가 조르주 르루의 삽화를 곁들여서 19057월에 처음 연재된다. 그 당시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을 몰랐었다. 그 직후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Arsene Lupin en prison)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전대미문의 신나는 모험담을 계속적으로 선보일 것을 약속한다. 당시 광고문안은 프랑스의 코난 도일이라는 닉네임으로 그를 칭했다.

1906아르센 뤼팽 탈출하다(L`Evasion d`Arsene Lupin)가 점잖은 경찰을 지나치게 희화화했다는 지적을 경찰당국으로부터 받는다. 오랜 연애 끝에 드디어 마르그리트 보름제와 결혼을 한다. 또다시 뤼팽 시리즈에 손을 대지만 자신을 통속작가로 치부하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코난 도일로부터 셜록 홈스를 멋대로 소설에 차용한 것에 대한 비난의 편지를 받는다.

1907문인협회위원으로 선출된다. 작가들의 권익 옹호에 적극 나선다. 그때까지의 아르센 뤼팽에 관한 단편들을 모아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Arsene Lupin gentleman-cambrioleur)을 출간한다. 그 해 여름 최대의 성공을 거둔다.

1908년 가스통 르루의 노란 방의 수수께끼(Le Mystere de la chambre jaune)가 출간된다. 아르센 뤼팽을 소재로 한 8밀리 영화 괴도신사(The Gentleman Burglar)”가 에드윈 S. 포터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작된다. 기암성(L`Aiguille creuse)주 세 투에 연재되기 시작한다.

1909르 주르날(Le journal)지에 813의 비밀(813)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한 줄당 2프랑까지 고료를 받으며 이후 20여 년간을 이 신문에 글을 쓰게 된다. 반면 가스통 르루는 르 마탱(Le Matin)지에 기고한다.

1910뤼팽 대 홈스의 대결(Arsene Lupin contre herlock Sholmes)이 연극으로 각색되어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된다.

1912수정마개(Le Bouchon de cristal)르 주르날지에 연재하고, 모파상의 영향이 묻어나는 콩트집을 발표한다. 자신이 아르센 뤼팽의 창조자로만 유명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다.

1915년 너무 나이가 많아 전쟁에 참여할 수 없자, 르 주르날지에 애국적인 내용의 콩트와 같은 발상의 포탄 파편(L`Eclat d`obus)을 발표한다(이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발표된다).

1916년 피에르 라피트로부터 뤼팽 시리즈의 판권을 사들인 아셰트(Hachette) 사가 그간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대량으로 출간하기 시작한다.

1920발타자르의 기상천외한 인생(La Vie extraordinaire de Balthazar)으로 새로운 히어로를 창조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1921년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프랑스인의 애국심과 자존심을 크게 고취시킨 공로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에트르타에 전원 별장지를 구입해서 뤼팽 별장(Le Clos Lupin)”으로 이름짓는다. 이곳은 이후에도 기암성과 더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 코스가 된다.

1924년 전 세계적으로 아르센 뤼팽의 번역 판권과 시나리오 판권으로 막대한 수입을 얻는다.

여동생 조르제트를 염두에 둔 소설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La Demoiselle aux yeux verts)를 단행본으로 출간.

1927년 늘 그와 비교되던 가스통 르루 사망.

1930년 영국의 코난 도일 사망. 바리바(La barre-y-va)르 주르날지에 연재.

1934년 아르센 뤼팽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이 개봉되었으나 모리스 르블랑은 그 어디에도 뤼팽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며 혹평을 한다.

1935백작부인의 복수(La Cagliostro se venge)를 발표. 여기에서 뤼팽은 코트 다쥐르 연안으로 은퇴한다.

1936년 뤼팽 시리즈가 라디오 연속극으로 편집된다.

1941년 모리스 르블랑 사망.

이후에도 뤼팽 시리즈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다.

1970년에는 TV 시리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1989년 세기에 출판사에서 첫 본격적 전기(轉記)가 출간되었으며, 로베르 라퐁 사에서 부켕 총서로 처음 전집 출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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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2015년 3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황금가지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완독하였다. 그리고 나서 한 달 동안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다가 결국 현대문학의 주석달린 셜록 홈즈 시리즈를 2015년 7월 한달동안 읽었다. 남은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 이 방대한 전집에 내가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생각보다는 빨리 그런 날이 왔다. 1년 만이다.

역시 여름은 추리 소설의 계절이다. 정신없이 달려와 지쳐서 겨우겨우 일하고 있고, 휴가는 다가오지만 아직 멀리만 느껴지는 이 때, 더위와 무기력함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이름. 아르센 뤼팽, 그리고 모리스 르블랑!

예전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과 셜록 홈즈 전집을 읽으면서 아르센 뤼팽 전집에 대한 정보도 찾아본 적이 있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나온 전집 들 중 열혈 블로거들의 추천은 까치의 성귀수씨 번역본이었다. 황금가지를 택한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 한 작품도 빠지지 않은 유일한 출판사였고, 현대문학을 택한 것은 셜록 홈즈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홈즈와 작가에 대한 내용들이 꽉꽉 눌러담긴 본문량을 훌쩍 뛰어넘는 주석 때문이었다. 까치의 전집은 모리스 르블랑이 세상에 내어놓은 바로 그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고, 한 명의 번역자가 번역하여 통일성이 있으며, 모든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의 해설 및 연보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안에 있는 삽화는 출판 당시의 오리지날 삽화라고 하며, 나란히 일렬로 세워놓았을 때 색색깔의 표지는 또 얼마나 선명하고 예뻤는지! 더구나 표지 그림은 역자가 직접 그린 뤼팽의 얼굴이라고 하니 출판사도, 역자도 얼마나 이 전집에 공을 들이고 애정을 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 이제 즐거움과 괴로움, 아쉬움과 황홀함이 공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전집 독파 여정을 시작해볼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의 탄생을 알리는 첫 작품이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의 체포로 문을 여는 이 작품에는 "절대로 붙잡히지 않는 괴도"의 신화를 이끌어갈 모든 요소가 농축되어 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 대표적인 수법, 숙적관계 등이 그것이다. 처음 연속되는 삼부작(체포-수감-탈출)은 따로 한 권의 작품으로 묶이기도 했다가 나중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확장된 것이다. "뤼팽 시리즈"의 인큐베이터와도 같은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1.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운전기사에서 테너 가수로, 마권업자에서 양가집 도련님으로, 청년에서 노인으로, 마르세유의 떠돌이에서 러시아인 의사로, 다시 에스파냐의 투우사로 종횡무진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바로 그 남자, 아르센 뤼팽!


2.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아하, 선생...... 설마하니 내가 이런 축축한 짚단 위에서 빈둥대며 썩을 인물 같아 뵈오? 그렇다면 실망인 걸! 아르센 뤼팽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감옥에 머물 뿐이오. 더도 덜도 말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말이오......"
노형사도 지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셔? 그럼 아예 감옥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하, 빈정대시는구만! 나를 체포했다는 자부심에 아직까지 취해 계신거요? 이것 보십시오. 존경하올 형사양반, 그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 관심이 훨씬 더 중요한 일에 쏠리지 않았다면, 당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내게 손을 대지는 못했을 거요."
"그거 참 의외로군."
"한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소, 가니마르. 난 그녀를 사랑했지.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알고 있소? 다른 건 내게 하등 중요치 않았소. 맹세하오. 그래서 지금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거요."


3.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피고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소. 요즘 같은 현대 세상에 피고처럼 과거의 족적이 불분명한 경우도 무척 드문 일이오. 피고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며, 어릴 때는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소. 피고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 자신이 아르센 뤼팽이라고 주장했소. 지성과 광기와 패륜과 수완이 묘하게 뭉뚱그려진 괴물로서 말이오. 그 이전까지 피고에 관해서 알려진 모든 것은 그저 상상과 짐작의 소산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오. 예컨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마법사 딕슨 곁에서 일을 함께 했다는 로스타라는 작자도 아르센 뤼팽의 다른 분신일 뿐이며, 6년 전 생 루이 병원의 알티에 박사 연구실을 자주 드나들며 세균학에 관한 기발한 가설들과 피부병에 대한 과감한 실험으로 종종 스승을 놀라게 했던 러시아인 학생 역시 아르센 뤼팽의 또다른 분신이었을 것이오. 주주츠(주주츠:한자로는 유술. 유도의 전신에 해당하는 일본무술/역주)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기 훨씬 전에 파리에 이미 터를 잡았던 일본 무술 선생, 만국박람회 때 자전거 선수로 출전해 단번에 그랑프리와 더불어 상금 1만 프랑을 낚아챈 뒤, 영영 종적을 감춰버린 남자도 아르센 뤼팽일 것이오. 뿐만 아니라 1897년 5월, 121명의 목숨을 구해냄과 동시에 그들의 물건을 갈취한 장본인 또한 아마도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의 인물이었을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재판장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듯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피고가 이 사회에 대적해 벌여온 싸움에 대해서, 피고 스스로 자신의 힘과 기지를 총동원한 그 주도면밀했던 인생체험들에 대해서 극히 보잘것없는 대비책만을 가져왔던 것 같소. 피고는 이런 모든 사실들을 인정합니까?"

 

"일단은 푹 쉴 생각이오! 영양보충도 해서 차츰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겠지요. 보드뤼든 다른 누구든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개성을 마치 셔츠를 갈아입듯 바꾸고, 외모와 목소리, 눈빛, 필체 따위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문득 그 모습들 가운데서 진짜 자기 자신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그땐 몹시 서글퍼진답니다......지금도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이제라도 나 자신을 되찾아야겠죠......"

 

4. 수상한 여행객

나 하나를 처치하는 동작을 보니, 이 방면에 도가 튼 작자임이 분명했다. 단 한마디 말도 없고 눈곱만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냉혈한의 기질과 무지막지한 강심장이 단박에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마치 미라처럼 꽁꽁 묶인 채, 의자에 맥없이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이다. 나, 아르센 뤼팽이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보통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상황 자체는 심각했지만,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이 가지고 있는 어이없는 아이러니와 코믹함을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아르센 뤼팽이 한낱 풋내기처럼 당하다니! 마치 애송이를 다루듯 웬 강도가 내 지갑과 소지품을 탈탈 털고 있지 않은가! 이번엔 아르센 뤼팽이 혼쭐날 차례라도 되었다는 말인가......내 참 어이가 없어서!


5. 왕비의 목걸이

이제 드뢰ㅡ수비즈 부부와 손님들의 심기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잔뜩 짓눌려 있었다. 과연 플로리아니 경의 어조와 말하는 방식 속에는 단순한 신념말고도, 처음부터 백작의 마음을 예리하게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랄까, 어떤 아이러니 같은 것, 어딘지 적의가 느껴지는 빈정거림이 분명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작은 억지로 웃는 시늉을 했다.
"그야말로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상상력이에요!"
하지만 플로리아니 경은 더더욱 엄정한 어투로 외치는 것이었다.
"천만에요! 그게 아니죠! 상상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필연적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에요!"
"대체 그 일에 대해서 당신이 진짜로 알고 있는 게 뭔데......"
"백작님 스스로 내게 직접 얘기해준 그대로지요. 난 단지 그 아이와 엄마의 삶, 그 외진 벽촌에서, 몸져 누운 엄마와 보석을 팔아치우기 위해서 골몰하는 아이의 절박한 심정, 자기 엄마를 낫게 하거나 최소한 편안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게 애쓰는 그 아이의 마음을 머리 속에 그려본 것뿐이올시다. 하지만 결국엔 불행이 덮쳤죠. 엄마는 죽었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겠죠. 그리고ㅡ여기서부터는 내 상상이 과하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만ㅡ바로 그 어른이 문득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로 돌아갈 필요를 느꼈다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막상 와서 보니, 자기 엄마를 의심하고, 핍 박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히죽대고 있더란 말입니다......어때요, 그 파란만장한 사건의 전모가 펼쳐졌던 옛 무대를 돌아보았을때 그가 느꼈을 법한 가슴 저리는 감회가 상상이 되시나요?"


6. 세븐 하트

"이 놈아, 당장 나하고 밖에 바람이나 쐬러 나가는 게 어때?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걸! 저 공터로 나가서 보여줄 게 있다구......저 구석에 돌무더기 있지? 그 아래 뭐가 있을까?......"
"아니오! 사실이 아니오!"
"천만에,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엄연한 사실이지......이 구멍 뚫린 철판도 바로 그 밑에서 나왔거든! 제 주인인 루이 라콩브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거야, 왜 자네도 잘 알지? 자네와 자네 동생이 그의 시체를 파묻을 때 거기 함께 묻어버렸지 않은가? 아마 경찰이 그곳을 파보면 자네에게 상당히 불리한 증거가 꽤 많이 나올걸!"
바랭은 한동안 두 주먹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내뱉듯이 이렇게 말했다.
"좋소, 내가 졌소이다......더 이상 없던 걸로 하죠......단, 하나만 짚고 넘어갑시다. 딱 하나만......"
"뭔가?"
"저 금고 안에 말이오......보다 큰 금고 안에 보석상자가 하나 있었을 텐데......"
"있었지."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 그러니까 6월 22일 밤에서 23일 사이, 거기에 상자가 있었소?"
"있었다니까."
"그 안에......"
"바랭 형제가 여기저기서 긁어모아둔 온갖 금은보석들이 가득 들어있더군......"
"그것도 당신이 차지한 거요?"
"자네가 내 처지였다면 안 그랬겠나?"
"그렇다면......보석상자가 사라진 걸 알고는 내 동생이 자살을......?"
"가능한 일이지......아마도 폰 리펜 장군과 자네의 서신만 사라졌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보석상자까지 없어졌으니 충격이 대단했겠지......자, 그럼 이제 궁금증이 풀렸는가?"
"또 하나 있소이다. 당신의 이름이 뭐요?"
"아하, 왜, 나중에 복수라도 하려고?"
"누가 아오? 운수란 돌고 도는 법이니까......오늘은 당신이 승자이지만, 내일은......"
"그야 자네가 승자가 될 수도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자, 어서 이름이나 밝히시지!"
"아르센 뤼팽이라 하네."
"뭐! 아르센 뤼팽!"


7. 마담 엥베르의 금고

"그래 가짜! 철도라든가 파리 시청, 수에즈 운하, 북부 지역 광산 등 모든 공채들이 그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단 말일세! 단 한푼도, 한푼도 그 다발들에서 건질 수가 없었어! 그런데 날더러 뉘우치라구? 저들은 나를 흔해빠진 머저리 취급을 했던 거야! 세상 둘도 없는 호구로 가지고 놀았던 거지!"

상처받은 자존심과 원한으로 그는 정말이지 엄청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던 거야. 제일 처음 마주쳤을 그 순간부터 말이네. 이 사건에서 내가 진짜로 담당한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긴 그들이 계산적으로 내게 위임한 역할이지만 말이야...... 그건 다름 아닌 앙드레 브로포드, 바로 그 역할이었어! 그래,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구! 나중에, 신문을 보고, 이런저런 사항들을 꼼꼼히 따져보고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네. 내가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사람인 척, 위험을 무릎쓰고 위기에 처한 피해자를 구출해줄 때, 그는 나를 브로포드 가문의 일원인 것처럼 둔갑을 시켰었단 말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나? 자기 집 3층에 살고 있는 그 괴팍한 인물, 무식하고 거친 인물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브로포드 가문이고, 바로 그 브로포드는 다름 아닌 나였던 거야! 당연히 내 덕에, 그러니까 브로포드가 한 집에 저리도 사이좋게 살고 있다고 하니, 은행가들은 돈을 빌려주려고 줄을 섰을 테고, 공증인들도 고객들의 돈을 마구마구 끌어다댔을 것 아니겠는가! 아...... 정말이지 내가, 이 아르센 뤼팽이 그때 그 부부에게 톡톡히 한 수 배운 셈이었다구!"

거기까지 정신 없이 내뱉던 그는 문득 내 팔을 부여잡더니, 일부러 잔뜩 목에 힘을 주며 이렇게 기막힌 농담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제르베즈 앵베르가 내게 1,500프랑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도저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러는 거였다.

"그래, 더도 덜도 말고 딱 1.500프랑일세! 그때까지의 급료 중 단 한 푼도 만져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여편네가 글쎄 나한테 1,500프랑이나 꿔갔었던 거야! 당시 별볼일 없는 젊은이의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말일세! 게다가 무슨 핑계를 대고 꿨는지 아나? 하긴 알 턱이 없지...... 바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더구만! 그래 그렇게 말했어! 소위 빈민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남편 몰래 위로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말이야! 정말 포복절도할 얘기 아닌가? 아르센 뤼팽이 한낱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한테 1,500프랑을 사기당했다 이 말일세! 수백만 프랑어치의 위조 증권을 챙기는 대신 1,500프랑을 날치기당했단 말이야...... 게다가 그런 '멋들어진' 성과를 얻으려고 쏟아부은 시간하며 골머리 앓고 낑낑댄 걸 생각하면......하여간 내 인생에서 그때 딱 한 번 완벽하게 엿을 먹었던 셈이네! 젠장할! 그래 엿을 먹어도 아주 제대로 먹었지, 아주 엄청난 수업료를 내고 말이야......"


8. 흑진주

그는 어느 금요일, 해가 저물 무렵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6개월에 걸친 감방생활로 꽤 여위고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예심과 영어생활, 지루한 법정 공방, 그리고 판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그를 이처럼 병색이 완연하게 만든 것이다. 밤마다 그는 온갖 약물과 환상에 시달려야만 했고, 신열과 공포심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곤 했다.
그는 아나톨 뒤푸르라는 가명으로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방 한 칸을 빌렸는데, 거기에서 잡일로 연명하며 비틀비틀 살아가고 있었다.
가련한 삶이 아닌가! 이후로도 세 명의 새로운 주인에게 고용이 되었었지만, 곧바로 신분이 들통났고 그 즉시 해고되었으니 말이다.
종종 그는 어떤 사람들ㅡ아마도 경찰임이 분명한데ㅡ에게 미행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또다시 자신을 옭아매려고 드는 치들이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미리부터 어떤 가혹한 손이 자신의 멱살을 휘어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느낌에 대책 없이 시달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동네 음식점에서 저녁을 들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앞에 슬며시 앉았다. 한 40대쯤 되어 보이고,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이 이상할 정도로 말끔한 신사였다.


9. 셜록 홈스, 한 발 늦다

예심판사도 검사도 아무 성과 없이 떠나고 난 자리에서 사람들은 셜록 홈즈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를 대하자, 내심 의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명성에 걸맞게 무척 괴이하고 신비스런 외모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저 깔끔한 부르주아의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셜록 홈즈하면 떠오르는 소설 속 영웅 같은 카리스마는 솔직히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인은 소포를 싸고 있는 끈을 풀고 포장지를 조심스레 열었다. 시계였다.
"이런 제기랄!"
순간, 부아가 치미는 듯, 셜록 홈즈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건 시계 아닙니까......"
드반은 시계와 영국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세상에...... 그건 당신 시계로군요! 아르센 뤼팽이 당신 시계를 되돌려준 겁니다! 그렇다면 그걸 그 친구가 슬쩍? 감히 천하의 명탐정 셜록 홈스 님의 시계를 이처럼 제멋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정말 웃기는 노릇이로군...... 아참,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뜻밖의 일이라......”
마침내 드반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대차게 웃어버렸다. 실컷 웃고 나서야,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선생 말이 정녕 맞군요...... 그 친구, 정말이지 대단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영국인은 이후로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디에프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마지도 내뱉지 않은 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지평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그런 침묵은 버럭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고, 격렬하며, 의미를 가늠키 어려웠다. 플랫폼에 당도해 악수를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는데, 그 어조 속에 이 특별한 인물의 모든 열정과 의지가 무서울 정도로 농축되어 있다는 것을 드반은 느낄 수 있었다.
“맞소이다. 그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오...... 이제 그 대단한 인물의 어깨 위애, 지금 내가 당신에게 내미는 이 손을 얹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오. 드반 선생, 왠지 이 셜록 홈스와 아르센 뤼팽이 조만간 다시 맞붙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려...... 하긴 이 세상은 우리 같은 두 인물이 서로 마주치지 않기에는 너무 좁지 않겠소?”

해설: 괴도신사의 재림을 기원하며

역자가 잘 아는 50대 후반의 어느 한 점잖은 신사가 술잔을 나누는 사석에서 무심코 이런 이야기를 흘린 적이 있다. “자네가 번역을 하니까 말이네만......아르센 루팡-, 사오십대가 넘은 독자들에게 사실 뤼팽보다 루팡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더 친근한가!-책이 좀 나왔으면 좋겠어......제대로 잘만 나온다면 지금이라도 서점에 가서 얼른 사다 읽을 텐데 말이야......” 내로라 하는 기업체의 중역으로, 자식 셋을 모두 성공적으로 키웠고 이젠 떡두꺼비 같은 손자까지 본 그 분의 푸념 비슷한 그 말씀은 일종의 계시처럼 내 이마를 때렸다.

 

깔끔한 실크해트와 외눈안경,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단단한 지팡이와 근사한 망토차림의 멋쟁이 신사로 뭇 여성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면서도 늘 사지(死地)를 넘나드는 위험한 인생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고야마는 타고난 협객(俠客)......누구보다도 차가운 머리를 지녔지만 항상 뜨거운 가슴을 보다 더 우선시하는 로맨티스트......늘 대중의 편견을 비웃으면서 불가능을 훔쳐내서 보여주는, 그리하여 도둑질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현대판 로빈 후드......뤼팽만한 카리스마와 매력이라면, 더 이상 놀랄 가슴도 신기해할 머리고 없어 재미가 없는 이 시대의 지친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빠르고 너무 편해서 멋이 없어진 이 사회에 진정한 멋과 통쾌함이 무엇인지, 이 전설적인 범죄자한테서 한 수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아르센 뤼팽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한 시대를 화려무쌍하게 주름잡을 영웅의 탄생치고는 의외일 정도로 사소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1905년 파리의 프티 브루주아층을 대상으로 심심찮게 재미를 보고 있던 주 세 투(Je sais tout)(“나는 다 안다라는 의미)라는 대중잡지의 발행인 피에르 라피트는 십수년 전 셜록 홈스라는 탐정의 이야기를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스트랜드 매거진(Strand Magazine)이라는 잡지의 성공사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매사 영국과는 경쟁관계에 있는 프랑스로서는 아무래도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아직 실력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문에 꽤 많은 글을 기고해오던 작가 모리스 르블랑에게 이 영국인 탐정에게 대적할 만한 프랑스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집필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057월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 바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라는 제목의 짤막한 단편이었고, 그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새로운 스타일의 추리소설은 당시 대중에게 세 가지 점에서 무척이나 참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첫째, 현학적이고 꼬장꼬장한 형사 나리의 빈틈없는 추리로부터 시원하게 벗어나서 엉뚱하게도 기상천외한 재주를 부리는 호쾌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둘째, 그 범죄자에게 남녀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과 저항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한껏 부여했다는 점, 셋째, 이야기의 시작을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이 붙잡히는 것으로 열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리스 르블랑의 일방적인 조작으로 성립된 라이벌 관계이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탐정과 도둑이라는 숙적관계를 떠나서도, 서로 대조적인 인간의 면모로 보이는 뤼팽 대 홈스라는 긴장된 구도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차갑고 냉철한 두뇌형 인간이 홈스라면, 뤼팽은 삶과 인간을 사랑하는 타고난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에 대한 태도를 볼 때, 극심한 여성 혐오주의자인 홈스와는 정반대로 뤼팽은 결혼을 네 번까지 할 정도로 여성에게 인기가 있음은 물론이고 여성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안다. 천하를 제 것인 양 주무르는 대도(大盜)이면서도 의중의 여성 앞에서는 도둑질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여린 심성 또한 갖추고 있다. 공권력을 옆 집 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철저한 범법자이면서도 살인은 절대 금물이고, 심지어는 경찰을 도와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주기도 하며, 조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분연히 나서는 애국자이기도 하다.

 

아르센 뤼팽에게 도둑질이란 하나의 예술이자, 고도의 정신적 유희이다. 그는 도둑질을 할 대상에게 미리 시기와 방법까지 예고를 하고서 멋지게 성공해내는 대담무쌍함을 곧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면서 도난 피해자의 재산목록 중 진품이 아닌 물건들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알려주는 친절함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드시 부유층만을 털며, 가난한 사람들과 전리품을 나누는 의적임은 물론이다. 법학과 의학을 상당 수준 공부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에 통달한 그는 예술품에 관한 한 전문가나 다름없는 감식안과 역사적 지식을 갖추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놀라운 재주는 이와 같은 점잖은 차원에만 머물지 않으며 웬만한 마법사 뺨치는 마법 실력과 더불어 무술 또한 수준급이어서, 경찰 십수 명 쯤은 혼자서도 너끈히 상대할 만한 완력의 소유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뤼팽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재주는 변장술인데, 그 자신조차 자기 얼굴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로 신기(神技)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 수십여 가지의 이름과 얼굴, 그 나름의 경력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살짝살짝만 자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그의 자취를 이리저리 따라가며 넘겨짚는 재미야말로 뤼팽 독자들만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에나 가능할 이와 같은 슈퍼히어로의 모습에 열광하는 것은, 아마도 체제와 조직을 필요로 하되 그것을 탈피하고 싶은 그래서 우리 안의 경직된 준법성을 통쾌하게 따돌리고 어디 한번 멋진 일탈을 감행해보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욕망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반복될 현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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