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저택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5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 소설이 시작할 때는 아, 또 그렇고 그런 뤼팽의 모험담 중 하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흘러가는 이야기도 다소 김이 빠지는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 트릭이 공개되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불가사의한 저택이라는 을씨년스런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서는 1년간의 모터보트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센 뤼팽이 장 데느리스 자작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첫 장부터 글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꼬리를 무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 전개는 후반부에 들어서 해결의 실마리가 한꺼번에 풀리기 직전까지 독자의 의식을 완벽한 미궁으로 몰아간다. 까마득한 과거사 속에서 스토리의 발단을 구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장기가 여전하며, 전작(前作)에 이어 베슈 형사와 뤼팽 간의 유머 섞인 재치 만점 대결도 그대로이다. 뤼팽 시리즈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 대담무쌍한 발상을 이야기 저변에 깔되, 특히 이 작품은 과도한 비약보다는 치밀하게 점진적인 구성을 견지함으로써, 모처럼 퍼즐 맞추기식()의 지적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부터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작품론을 다루기로 하며, 그 첫걸음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대한 같은 추리작가들의 촌평을 발췌 소개해본다.

 

아르센 뤼팽의 미출간 회고록에서 발췌함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로 눈을 돌려볼 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나 소냐 크리슈노프,

돌로레스 케셀바흐 혹은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등과 대면했던 남자는

아르센 뤼팽이 아니었으며 각각 라울 당드레지, 샤르므라스 공작, 폴 세르닌

그리고 리메지 남작이었다.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그 어느

하나도 나와 똑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그들이 겪은 다채로운 사랑을

나 자신은 겪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재미나거나

짜증스럽고, 때로는 지그시 미소를 짓거나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마치 이름 모를 형제들처럼 나와 비슷하게 닮았던 그 모든 풍운아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를 꼽으라면 아마도 마도로스 신사이자

탐정신사인 데느리스 자작일 것이다. 그는 파리의 어여쁜 모델이자 지고지순한

아를레트의 마음을 얻고자 저 불가사의한 저택을 둘러싼

험난한 싸움에 기꺼이 뛰어들었던 것이니......

 

1. 여배우 레진

그 매혹적인 발상은 그러지 않아도 자선행사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즐기는 너그러운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발레의 막간을 이용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재단한 옷을 연예계 혹은 사교계의 아리따운 여인 스무 명에게 입혀서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투표를 통해서 그 날 선보인 가장 아름다우 의상 세 벌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고 그를 제작한 작업실에 입장 수익 전액을 골고루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그 결과 파리 양장점의 들뜬 아가씨들 상당수가 저 유명한 리비에라 휴양지로 보름간의 휴가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된다.

 

2. 모델 아를레트

"하긴 꽤나 엉뚱한 얘기지...... 애들 생각처럼 유치해...... 난 딱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대규모 양장점의 중역이나 사장이 되고 싶어. 직원 복지에 큰 비중을 두도록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갖춘 회사 말이야...... 그리고 또 여자 노동자들한테 지참금을 듬뿍듬뿍 나눠주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자기 맘에 맞는 곳으로 얼마든지 시집을 갈 수 있도록 말이지......"

제 입으로 엉뚱한 꿈이라면서 해맑게 웃는 아를레트...... 하지만 듣는 동료 아가씨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3. 탐정신사 데느리스

데느리스는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두르고서 여자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잘 생각해봐요, 아를레트. 그냥 겉으로 부닥쳐서 뻔히 드러난 외적인 사건들을 기억해내라는 얘기가 아니야. 당신 마음 먹기에 따라 기억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일 따위는 말고...... 의식을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어서 그만 잊어버리고 만 일들을 생각해내보라는 거야.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특별한 점 말이지......"

 

4. 형사 베슈

멜라마르 백작은 이 모든 광경을 일견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왠지 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떨어져나간 가슴받이를 예심판사가 불쑥 내밀며 추궁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입술을 씰룩거려 볼썽 사나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댔다.

"내 누이동생, 어디 갔나요?"

늙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마담은 침실로 건너가신 것 같은데요."

"그 애한테 나 대신 작별인사나 전해주구려. 아울러 내 뒤를 따르라고 해주오."

백작이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를 겨눈 뒤 방아쇠를 당기는 것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유독 그의 행동을 주의해 관찰하고 있던 데느리스가 부리나케 몸을 날려 팔꿈치를 쳐냈기 때문에, 총알은 살짝 비쪄나가 유리창을 박살내고 말았다. 동시에 형사들이 우르르 멜라마르 씨를 덮쳤다.

 

5. 그는 적()인가?

때는 1840, 현 백작의 증조부 되는 쥘 드 멜라마르는 멜라마르 가문의 가장 출중한 인물로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다가 왕정복고 시절에는 대사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어인 일인지 그만 살인절도죄로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급기야 그는 감방 안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에 문제를 좀더 치밀하게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오래 된 자료들을 있는 대로 파헤친 결과, 일부 묻혀 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문서 하나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1868년 바로 그 멜라마르의 아들이자 아드리앵 드 멜라마르 백작의 조부가 되는 알퐁스 드 멜라마르가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전속부관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살인과 절도죄를 범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뒤르페가()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자결을 했고 황제는 모든 사건을 불문에 부쳐버렸다.

이상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세간에 대단한 소란을 몰고 왔다. 졸지에 어떤 단어 하나가 현재의 사태를 환하게 규명해주는 듯했고, 일거에 상황을 요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는 말...... 비록 백작가문의 두 남매가 대단한 재산가는 아니라고 해도, 파리에 대저택을 소유한 데다 투렌에는 성채도 하나 지니고 있는 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으며 오히려 여러 자선사업에 투자를 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페라 극장의 사건과 다이아몬드 절도 건에 대해 무슨 물욕(物慾)이 있어서라고 설명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결국 격세유전에 의한 범행인 것, 멜라마르 가문은 일종의 도벽(盜癖)을 본능적으로 지닌 집안이다. 멜라마르 남매도 분명 조상으로부터 그러한 형질을 물려받았을 게 뻔하다. 그들이 이번에 도둑질을 한 것은, 물론 자기들 재력을 상회하는 생활수준을 넘보기 위한 면도 없지는 않겠으나, 그보다는 좀더 강력한 유혹, 즉 격세유전적 필연성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조부인 알퐁스 드 멜라마르처럼 아드리앵 백작도 자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보라! 그 역시 격세유전의 증거인 셈이다.

 

6. 멜라마르 가문(家門)의 비밀

"그럼요! 물론이고말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또 당했을 겁니다. 이 저택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바로 이곳에 멜라마르가(家)의 악령이 있어서 우리를 포위하고, 급기야는 망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남매가 지금 숙명의 섭리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그 악령의 저주를 거슬렀기 때문이랍니다. 어느새 과거를 깡그리 잊고 그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택에 입성하는 것만 즐거워하면서 시골을 떠나와 이곳 뒤르페가(街)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우리 남매는 음산한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답니다. 특히 오빠가 더 그랬어요. 나야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몸이니 행복도 불행도 골고루 겪은 셈이지만, 아드리앵의 경우는 다짜고짜 침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지요. 워낙 저주에 대한 확신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강하게 자리잡은지라, 그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멜라마르 가문의 혈통에 그런 식으로라도 종지부를 찍는다면 운명도 피할 수 있고 계속되는 불운도 중단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멜라마르가(街)의 최후의 생존자가 되고자 한 것이죠. 정말 무서워했어요!"

 

7. 구원자 파즈로

별다른 겉치레 없게 단순히 내뱉은 말 같았지만, 분명 아를레트를 향한 의미 있는 시선이 동반된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방 안에 자리잡은 사람들 위치상, 그 순간 어느 누구의 얼굴도 데느리스의 시야에 포착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이 말이 질베르트 드 멜라마르에게 건네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면 지극히 짧은 순간뿐이었고 그것은 베슈의 두 견갑골 중안 부위에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어김없이 찍어 꽂는 것이었다. 반장 입장에서는, 과연 인간의 손가락이 마치 고문용 집게와도 같은, 이런 괴력을 발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데느리스는 그곳을 벗어나면서도 앙투안 파즈로에 대해, 그리고 아를레트에 대해 당최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규방을 빠져나와 현관 바닥을 밟으면서도 오히려 발소리가 들켰으면, 그래서 지금의 이 더러운 기분을 왈칵 쏟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오기까지 들었다.

 

8. 방화범 마르탱 가문(家門)

데느리스는  급기야 파즈로를 향해 노골적으로 물었따.

"당신 저 여자를 사랑합니까?"

"한없이 사랑하오."

열정 어린 대답이었다.

"아를레트도 당신을 사랑하오?"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파즈로는 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가 최고의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요?"

"우린 약혼한 사이죠."

"뭐? 당신들이 서로 약혼을 했어?"

 

9. 아를레트의 약혼

아무래도 앙투안 파즈로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장의 허를 찌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도 되는 듯했다. 아를레트와의 관계하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약혼설, 그들 커플한테 향하는 멜라마르 백작 남매의 적극적인 호의, 상상도 못할 저택 구입 소식 등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마치 일상적인 삶의 극히 평범한 일들처럼 이 자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10. 주먹질

"멜라마르가(家)의 비밀이라! 그동안 얼마나 고심해왔던가! 처음, 레진과 아를레트가 납치 당했을 때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어. 지금 우리는 머나먼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가 제대로 해명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거라고...... 따지고 보면 그런 종류의 문제들일수록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빼앗겨왔는지! 해결한 것도 숱하게 많지! 아무튼 이번 경우에도 딱 한 가지 요점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걸로 떠오르더구만. 즉 멜라마르 남매는 결코 범인일 수가 없다는 사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남매의 저택을, 모종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는 무대로 활용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그것이 실은 앙투안 파즈로의 논조였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믿고 사법당국도 그쪽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함으로써 파즈로에게 엉뚱한 실익이 돌아가더라 이거야. 또 하나 의문인 건 과연 아를레트와 레진이 멜라마르 남매와 프랑수아 부부의 주의를 끌지 않고도 응접실까지 이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느냐는 문제였지......"

 

11.애첩(愛妾) 발네리

불가사의한 기적이었다!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을 벗어난 지 10여 분 만에 또다시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에 와 있는 것이다! 분명 센 강을 건넜고, 그것도 딱 한 차례 건넜다! 그렇다고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무슨 원을 그린 것도 아니다. 뒤르페가(街)를 벗어나서 무려 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훌쩍 지나왔는데도 불구하고(3킬로미터라면 옛날 파리 시가지로 볼 때 앵발리드에서 레 보즈 광장에 이르는 거리이다), 지금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사물들끼리 일치한다는 것, 즉 두 안뜰 저만치 세워진 건물의 두 전면(前面) 생김새와 색깔, 윤곽 등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월의 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 근처 강물로부터 실려온 습한 공기를 머금은 채 제한된 장방형 벽체들 사이를 감도는 뭔가 모를 기운마저 서로 똑같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이었다.

분명 똑같은 채석장에서 똑같은 크기로 깎아 대령한 건축용 석재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아스라이 묻어난 세월의 때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발소리까지 똑같네."

현관을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리는 백작의 목소리마저도, 자기 집을 걸어 들어갈 때 실내 가득 울려퍼졌던 그 목소리와 똑같은 울림을 내고 있었다.

 

12. 아르센 뤼팽

"자네의 그 호각은 아마 말을 듣지 않을걸."

순간, 데느리스가 내뱉듯 말했다.

베슈는 있는 힘껏 호각을 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구멍 틈새로 빠져 달아나는 바람 소리가 고작이었다.

 

에필로그 : 아를레트와 장

"아무 걱정 마세요. 그냥 인생에 자신을 내맡겨봐요. 당신의 은둔처를 가르쳐준 것도 레진 자신이랍니다. 이 배하고 밀짚 모자와 푸른 작업복 모두 내가 돈 주고 정정당당하게 산 것이고요. 모든 게 잘될 겁니다. 휴가를 원한다면서 무엇 하러 지체한단 말입니까?"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1

-추리소설가들이 본 아르센 뤼팽 시리즈

 

★ 아르센 뤼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그가 칼리오스트로의 비밀을 밝혀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매혹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발렌티노로부터 제임스 딘에 이르기까지,1) 몇몇 인간-우상들이 자칫 그대로 신이 될 뻔한 적은 있었지만, 진정한 신격화란, 우리의 내밀한 꿈에다 살아 숨쉬는 얼굴과 육체를 부여하려고 나타난, 이른바 상상 속의 존재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자고로 상상력이란 여성과도 같다. 그것은 오로지 강한 영웅한테만 감동하고 열광한다. 우리 각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떠받들고 있는 저 영원한 올림포스 산정에는 베토벤이라든지 나폴레옹, 니체 등 위대한 신들께서 더없이 준엄한 표정으로 잠들어 계신다. 그러나 그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약간은 가볍고도 경쾌하며 다정다감한, 날개 달린 중개자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하여 신화는 웅변과 상업 그리고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를 따로 창조해내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폭력과 향수에 반반씩 젖어 있던 금세기(20세기)의 벽두에 한 작가가 똑같은 의도로 헤르메스 같은 존재를 창조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르센 뤼팽이다.

부알로-나르스작2)

 

★ 「노란 방의 수수께끼」의 저자 이름은 가스통 르루이다. 그런데 나는 혹시 이 이름이 괴도신사 아르센 륖애의 모험담을 풀어내고 있는 모리스 르블랑이라는 작가의 또다른 '필명'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가끔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 이름을 통해서 완벽하게 대칭적으로 역전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즉 '붉은 신사'는 언제나 탐정 이야기를 집필하는가 하면, '하얀 신사'는 항상 범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식으로 말이다.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적(赤)-백(白)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 이상일 거라고 추정할 만한 무슨 진지한 이유가 내게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이야기는 사실 무척이나 상이한 종류에 각각 속하고 있다. 가스통 르루의 작품들로 말하자면, 줄거리의 중ㅅ미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수수께끼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좀더 엄격한 추리소설인 반면,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들은 쉴새없이 제기되는 난제(難題)들의 연속을 즉각즉각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차라리 숨가쁜 모험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 작중 주인공이 처한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다. 탐정은 늘 사건의 '밖'에 위치하는 반면, 범죄자는 언제나 사건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경찰은 항상 집 밖에 있는데 도둑은 늘 집 안에 들어가 있다라고도 할 수 있다.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4)

 

★ 내가 그를 발견한 지 너무 오래인 데다, 그때는 아주 어린 나이였기에, 그 시절로 뒷걸음질을 치다보면 문득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는 이른바 대중문학, 다시 말해서 '진짜 사실' 속의 위대한 주인공이다. 그를 좋아하는 데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설사 작품의 스타일은 유행에 뒤떨어질지라도 위대한 주인공 자체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나의 아버지가 아르센 뤼팽을 읽었고, 내가 그를 읽었으며, 나의 아들도 그를 읽었고, 내 손자들도 그를 읽을 것이다.

프레데릭 다르5)

 

★ 바캉스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객실 승객들한테 나를 잠시 맡길 때면 으레 이런 말을 하시곤 했다. '두고 보면 아시겠지만, 이 아이는 책만 손에 쥐면, 입도 뻥끗하지 않는답니다!' 보통은 그 책이라는 게 「서커스 개, 미셸」이라든가 「황금의 덫」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미끈한 얼굴에 외알 안경을 낀, 근사한 차림의 사내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에 온통 넋이 빼앗겨 있었다.

제목이 「수정마개」였는데, 그때 나는 도대체 수정 병마개가 어떻게 유리 의안(義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혼자 의아해하며 책을 구입했다. 솔직히 나의 그런 호기심이 시원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종착역에 도착할 즈음 이미 나는 여지껏 읽어온 책들과는 너무도 색다른, 게다가 상상한 내용과는 너무도 판이하고 고리타분한 삽화들 때문에 오히려 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정복당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숙모 한 분이 나더르 「르 주르날」지를 사오라고 시킨 뒤, 자기는 요즘 「바리바」라는 연재소설에 푹 빠져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원에 모여 앉은 나머지 가족을 상대로 '아르센 뤼팽이 말입니다......'하며, 그 아리송한 제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인물이 오로지 나처럼 철부지 중학생의 세계에만 속하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1929년과 1930년에 걸친 그 여름, 그렇게 나는 '위대한 인물들'이 출몰하는 문학 책에 홀딱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떄만 해도 내 인생 자체가 추리문학과 더불어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아직도 "리브르 드 포슈" 판 책들에 자극을 받아 다시금 「기암성」이라든가 「불가사의한 저택」등을 정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멋진 뤼팽!'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일쑤다. 넓게 보면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둘 중 여전히 보다 젊은 사람은 내가 아닌 바로 그인 것이다!

모리스-베르나르 앙드레브6)

 

★ 프랑스의 모든 추리소설 작가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뤼팽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의 문화를 지탱하던 기둥 세 개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기암성」, 「무슈 리키키의 기상천외한 여행」그리고 「초록 암말」7)이 된다.

사실 이 세 작품들은 보기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다. 셋 모두 일종의 시적 리얼리즘이 독특한 미학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르블랑과 카미, 에메 모두 더없이 엄격한 논리적 요소들과 불가능한 가정들로부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것 또한 서로 비슷한 점이다.

그중에서도 뤼팽이라는 르블랑의 주인공은 일반적인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완벽 이상의 존재로서, 매혹시키는 주인공과 매혹 당하는 독자 사이의 동일시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캐릭터이며, 일단 책을 덮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험담으로 태어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뤼팽'을 만들어볼 욕심 한번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뤼팽은 우리 추리소설 작가에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듬뿍 불어넣어준다.

미셸 르브룅8)

 

★ 미셸 르브룅(M. L.) : ......그럼,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누구인가?

레오 말레(L. M.) : 그야 당연히 아르센 뤼팽이지...... 그는 내가 읽은 첫 추리 소설들의 주인공이었다네...... 르블랑을 추리소설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

M. L. : 그러고 보면 돈키호테에서 우리가 그리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야.

L. M. : 맞아. 그것도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이지. 항상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으니까...... 게다가 나도 그렇지만 항상 패턴이 비슷해. 르블랑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보물을 찾아 헤매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이든 다른 개인의 보물이든 말이야...... 나로 말하자면, 진주나 보석 혹은 숨겨둔 막대한 현금이 관건이 되지. 그다지 독창적이랄 것도 없어...... 내가 보기에 모리스 르블랑의 최고 작품들만 꼽는다면, 제일 먼저 「기암성」을 들겠어...... 아주 감동적이고 정말 아름답거든...... 특히 마지막에 죽은 여인을 향한 사랑 말이야......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눈물 없이 그 대목을 읽은 적이 없다네...... 자네도 알지, 레이몽드가 죽고 나서 뤼팽이 여자를 들쳐업고 하는 말......

 

그 다음에는 단연 「수정마개」를 꼽을 거야. 일종의 추적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정말 대단하단 말일세! 나는 아직 「수정마개」가 단 한번도 영화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할 정도라니까. 멍텅구리 같은 TV용 드라마말고, 진짜 영화 말이네! 「수정마개」는 시나리오를 써서 각색하기 위해 굳이 몸통을 절단하거나 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대로 카메라만 움직이면 된다구......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로즈 루즈' 사(社)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배우인 장 루죄에게 이런 모든 이야기를 했었지. 한데 그 친구 얘기가, 르블랑 영감이 글쎄 미국인들한테 완전히 당해서 이젠 불가능하다는 거야. 즉 미국에서 아르센 뤼팽의 영화 판권을 사들이고도 형편없는 졸작을 만들거나 아예 묵혀두는 바람에 거기에 묶인 나머지 프랑스에서는 그만 아르센 뤼팽으로 아무 영화도 못 만든다는 것이지...... 아무튼 참 대단한 영화가 될 터인데 말이야. 미국인들조차 그걸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 게다가 부패한 의원이라든가 파나마 스캔들에 대한 암시 같은 내용이, 시의적(時宜的)으로 적절한 부분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들에선 약간 시들해진 면도 없진 않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나는 「황금삼각형」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도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어. 뭐랄까, 나이를 잊고 싶어하는 일종의 향수(鄕愁)라고나 할까?...... 그걸 읽고 있으면 처음 그걸 읽었던 1920년대가 떠오르거든. 그때가 열한 살이었는데, 지나치게 애국주의적 대목에선 열광보다는 왠지 반감이 일기도 했지...... 당시에 나는 국가가 뭔지 별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방면엔 완전 숙맥이나 다름없었지......

그런가 하면 「서른 개의 관」은 그 분위기와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네...... 심지어 1936년, 그 섬의 실제 모델로 여겨진던 브레아 섬에 가보았는데 완전 실망이더구만. 원래 문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모든 걸 부풀리지. 어쨌든 1914년의 전쟁 이전의 아르센 뤼팽과 그 이후의 아르센 뤼팽은 많이 다르다는 건 사실이라네. 완전히 애국투사가 되었지.....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면이 없진 않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해!...... 더 이상 괴도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잖아...... 도둑질을 해도 과부와 고아를 돕기 위해서 하는 거야......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과부의 얼굴이 얼마나 반반하냐지...... 혈기와 활력은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단 말씀이야......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그렇게 된 건 다 나이 때문이거든. 작가의 나이 말일세......

미셀 르브룅과 레오 말레의 대담9)

 

1) 둘 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요절함으로써 더더욱 우상화된 할리우드 스타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2) 부알로-나르스작은 원래 피에르 부알로(Pierre Boileau, 1906-1988)와 토마 나르스작(Thomas Narcejac, 1908-1998)이라는 두 사람의 공동 필명이다. 원래 아르센 뤼팽의 열렬한 팬이자 추리소설가였던 부알로와, 낭트 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여흥 삼아 추리소설을 써오던 나르스작은 서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냥 한번 써본 공동 작품이 소위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이후 본격적인 추리문학 작품들을 써낸다. 대개는 부알로가 전체 줄거리를 구상하고 나르스작이 집필을 하는 식이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모작들로도 유명한 이들의 작품세계는, 특히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Les Diaboliques)"이라든가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 같은 영화들이 그들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을 만큼 대중적인 호소력과 아이디어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3) 여기에서 '붉은 신사(monsieur roux)'는 가스통 르루를, '하얀 신사(monsieur blanc)'는 모리스 르블랑을 지칭한다. 이유는 공교롭게도 전자의 성(姓)인 르루(Leroux)에 '붉은색'을 뜻하는 'roux'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후자의 성인 르블랑(Leblanc)에는 '하얀색'을 의미하는 'blanc'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 이야기를 '붉은색'이, 범죄 이야기를 '하얀색'이 담당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범죄가 '붉은' 피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깨끗이('하얀') 해결하는 일을 탐정이 담당한다는 점에서, 역전된 무엇인가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은 영국 태생의 신문기자이자 시인이며 작가로, 브라운 신부라는 추리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탐정 캐릭터 중 하나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5) 프레데릭 다르(Frederic Dard, 1921-2000)는 프랑스의 추리소설가로 산 안토니오(San Antonio)라는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100여 편의 작품들을 집필했다. 특히 장난스런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많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6)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

7) 마르셀 에메(Marcel Ayme, 1902-1967) 작품

8) 미셸 르브룅(Michel Lebrun, 1930-1996)의 본명은 미셸 카드, 80여 편의 추리소설 작품이 있으며, 특히 추리문학에 관한 백과사전식 박학다식으로 '추리문학계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9) 레오 말레(Leo Malet, 1909-1996)는 프랑스의 정통 누아르 소설의 원조 작가로서 네스토르 뷔르마라는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10여 편의 추리소설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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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모리스 르블랑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도 그렇고, 「813의 비밀」도 그렇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여러 면에서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닮아 있다. 하나의 주인공, 그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중심 인물, 여덟 개의 단편들, 각각 분리된 에피소드이지만 크게 보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나아가는 구성...... 처음 연재시 뤼팽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뤼팽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뤼팽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뤼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모리스 르블랑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가니마르의 제자 격인 테오도르 베슈 형사와 아르센 뤼팽의 또다른 얼굴인 짐 바르네트라는 수상쩍은 사설탐정이 재치 만점으로 엮어가는 총 여덟 개의 단편들의 옴니버스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될 당시만 해도 짐 바르네트는 아르센 뤼팽과는 별도의 주인공으로 창조된 캐릭터였으며, 추후에 아르센 뤼팽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가미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이은 로제 브로데의 삽화는 현대적 감각이 더욱 두드러져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 특히 「기암성」,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더불어 모리스 르블랑 스스로 아르센 뤼팽 3대 걸작으로 손꼽았을 정도로 작가 자신의 정성과 애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보다 유머와 기발한 착상들이 다수 포진한 이 작품의 참신성은 발표 때부터 평론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로서는 처음 대하는 추리적 장치와 혹할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듬뿍 담긴 걸작으로 후대까지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아오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이 여인들과 맺는 관계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그 깊은 의미를 해석해보기로 한다.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다음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워낙 지리멸렬하게 중구난방 떠도는 소문만 횡행했던지라

일반 대중이 무척 흥분된 반응을 보인 바 있었다.

더없이 황당무계한 모험들 속을 신나게 휘젓고 다녔던

짐 바르네트라는 이름의 기이한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오로지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고객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만

주문을 받아들였던 듯한 바르네트 사(社)라는 저 비밀스런 사설 탐정사무소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제 문제를 속속들이 까발리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는 서둘러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돌리고

짐 바르네트의 비행(非行) 역시 그것을 범한 자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즉 도저히 교화 불가능한 아르센 뤼팽의 몫으로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더 나빠질 일도 없을 테니까......

 

1. 진주알들의 행방

"만약 당신이 목걸이를 선택한다면,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봐 다시 말하건대, 지금 이 목걸이가 이 방을 벗어난다면, 당연히 내일이면 공증인이 이 두번째 유언장을 접수할 것이고, 그럼 당신은 유산 상속에서 영영 멀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야 아무도 모르고 있는 두번째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이 유산 전액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죠. 무려 1000만 프랑이 고스란히 당신 품안으로 돌아온다 이겁니다, 바로 이 짐 바르네트의 덕택으로 말이죠......"

분명 빈정대는 목소리였다. 그에 따라 발레리는 목이 바짝바짝 조여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 악마적인 인간의 손아귀에 붙들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가 만약 목걸이를 사내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문제의 유언장은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이 정도 교활하고 지독한 상대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2. 조지 왕의 연애편지

"당신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요. 그야말로 아르센 뤼팽에게나 어울릴 역량이오......"

"뭐라구요?"

바르네트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편지를 꿀꺽한 것 말이오......"

"아, 그럼 눈치챈 거요?"

"세상에!"

"그럼 어쩌겠소. 나는 워낙 영국 왕실의 친필 문서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놔서......"

그로부터 석 달 뒤, 런던에 거주하는 엘리자베스 러븐데일에게 한 근사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조지 왕의 연애편지를 확보해줄 수 있노라며 접근해왔다. 그러면서 대신에 '푼돈' 10만 프랑을 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타협은 매우 더디고 힘겹게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런던 제일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오빠들과  의논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발끈하며 거부하던 그들은 얼마 후 제안을 수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품위가 넘치는 신사는 그렇게 해서 10만 프랑을 손에 넣었고 거기에 더해 화물차 한 대 분량의 그 가게 고가(高價) 식료품을 교묘하게 빼돌리기까지 했다. 물론 물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말이다......


3. 바카라 게임

"우하하하...... 도둑놈들 같으니라구......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놈들이 막심의 얼굴에다 내팽기친 지폐들이 가짜 돈이라 이거지? 거, 맹랑한 놈들일세! 기껏 돈 다발을 지참하고 출두하라고 하니까 위조지폐를 들고 나타나다니!"

이제 베슈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그 돈은 희생자의 상속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이래? 폴 에른슈타인이 엄연히 번 돈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돌려줄 의무가 있는 거란 말이다!"

하지만 바르네트의 쾌활한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크하하하하...... 거 참 큰일났구만그래! 그럼 이번엔 그들이 도둑맞은 거야? 두번째일세! 도둑놈들이 된통 벌을 받았어!"

"시침떼지 마!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하지 말라구! 바꿔치기한 건 자네잖아!...... 자네가 돈을 몽땅 챙겼잖아!...... 이 사기꾼...... 불한당 같으니......"


4. 금이빨을 한 사나이

무슨 큰일이 얼마나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감이 왔다. 차고에 바짝 붙은 창고 문이 강제로 열려진 채였고 그 안에 쟁여놓았던 고가구와 멋진 추시계, 태피스트리 등 남작의 마지막 재산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언제 이걸 다 털어 간 거야?"

남작이 비틀거리며 더듬대자 하인 한 명이 말했다.

"간밤에...... 한 열한 시쯤 되었을 때 개들이 유난히 짖어대더라고요......"

"무슨 수로 이래 놓은 거냐구?"

"남작님 자동차로 빼낸 모양입니다."

"내 자동차라! 그럼 차도 도둑맞았단 말인가?"

남작은 그만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신부의 품에 안겼다. 신부는 제법 아버지 같은 자세로 부드럽게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벌이 빨리도 찾아온 게로군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받아들이십시오......"


5. 베슈의 아프리카 탄광 주식(株式)

"천만에!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일세.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고객들에게 변상을 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잘 생각해보라고, 그가 이 사건 초두에 정식 신고를 꺼렸던 이유는 사법당국이 자기 사업에 대해 뭔가 냄새를 맡지 않길 바라서였네. 그러니 이제라도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에게 으름장이라도 놔보게.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 들 테니까. 돈? 자네 친구 니콜라 가시르는 백만장자일세. 그러니 그 자가 잘못한 일은 나한테가 아니라, 바로 그 자 본인한테 수습을 요구해야 맞는 말이지!"

"그럼 결국 자네가 대신 가로채겠다는 얘기......?"

"뭘? 증권 다발? 천만의 말씀! 그것들은 이미 매각해버린 상태일세."

"그랬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조성한 돈은?......"

바르네트는 갑작스레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무슨 소리! 단 한순간, 단 한 푼도 나는 손대지 않아!"

"그럼 그 돈을 다 무엇에 쓸 생각인가?"

"나눠줄 생각이네."

"누구한테?"

"돈에 궁핍을 겪는 친구들이라든지, 내가 후원 중인 몇몇 흥미로운 작업들에 건넬 생각이야. 허어, 걱정 접어두게나, 베슈...... 니콜라 가시르의 돈은 지극히 적절하게 쓰여질 테니까!"

베슈는 '역시나!'하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또 사건은 바르네트가 한 몫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진 것이다. 바르네트는 죄인들을 벌하고 결백한 사람들을 구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배를 채우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자선이라든지 바람직한 투자 등. 그가 말하는 '적절한' 돈의 용도는 우선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베슈 형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에서 그냥 넘어가는 것은 곧 공범이 되기를 받아들이는 거와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주머니 속에 너무도 소중한 아프리카 탄광 주식 열두 주가 두둑이 느껴지는 지금 이 마당에 만약 저 바르네트가 아니었던들 모든 것을 깡그리 날렸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다. 과연 지금 이 순간 화를 버럭 내고 몸싸움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것일까?


6. 우연이 기적을 만들다

바르네트가 성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형사의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을까? 베슈 자신이 주장하고 나서려던 얘기를 저 빌어먹을 바르네트가 미리 걸고넘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가 들자, 베슈 형사의 태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화했고, 조르주 카제봉의 손을 덥석 붙들기까지 하며 말했다.

(중략)

그리고는 바르네트가 사용했던 표현을 공교롭게도 똑같이 되풀이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 의해 유포된 장신을 향한 음해성 소문에는 일말의 신빙성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자 바르네트가 환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좋았어, 아까 이 몸이 무슈 카제봉에게 얘기한 것과 일치하는구만. 친구이자 상관(上官)이나 다름없는 베슈의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발휘되고 있어! 하지만 여보게, 무슈 카제봉은 자신을 겨냥한 중상모략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입장으로 응할 마음 자세가 갖춰진 형편이라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그녀의 조상들 영지를 되돌려주시기로 했단 말일세."

베슈는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뭐?......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바르네트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가 있고말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무슈 카제봉은 이 지방에 대해 다소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라네. 그래서 지금은 게레의 공장들과 좀 더 가까운 거리의 또다른 성채를 점찍어둔 입장이야. 뿐만 아니라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무슈 카제봉은 마침 부동산 증여서 초암을 작성하려던 참이었어. 거기다 10만 프랑짜리 지참인불 수표를 첨부하겠다는 의사까지 표하셨지. 물론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배상금조로 지불될 금액이지. 어떄요, 우리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합의가 된 셈이죠, 무슈 카제봉?"

(중략)

달레스카르 양은 증여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자신의 공증인더러 조르주 카제봉의 공증인을 만나 일을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수표만큼은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한 불쾌감을 표하며 수표를 짝짝 찢어버리더라는 것.

(중략)

"자, 먼저 주문해놓게. 난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휑하니 나간 바르네트는 얼마 안 있어 식당으로 돌아왔다. 둘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게 먹어댔다. 이윽고 커피 잔을 들며 베슈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슈 카제봉에게 찢어진 수표조각이라도 돌려보내야겠어."

"그런 수고는 할 필요 없네, 베슈."

"왜?"

"그 수표는 원래 아무 값어치가 없었던 것이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일세.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가 거절할 걸 미리 내다보고 내가 봉투에 증여서를 집어넣으면서 시한이 지난 낡은 수표를 대신 밀어넣었거든."

베슈는 신음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아......그러면 원래 수표는? 무슈 카제봉이 서명한 것 말이네!"

"방금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꿔왔지."

바르네트는 저고리를 살짝 젖히고 두둑한 현금 다발을 보여주었다.

순간, 베슈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뿐,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략)

베슈는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여지껏 그토록 한 사람을 미워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 값을 테이블에 던지고는 이렇게 웅얼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따금 저 인간이 진짜 악마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그것을 또 얼추 새어 듣고는 바르네트도 활짝 웃으며 이랬다.

"하긴 나 역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7. 흰 장갑... 하얀 각반...

솔직히 말해봐, 나 참 근사했지? 사건 해결을 빌미로 단 한 푼 챙기지 않았다구! 자네가 그토록 치를 떨던 그 '돈 떼먹는 짓'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하지만 어떤 점에선 자네의 칭찬을 듣는다는 게 또 얼마나 뜻깊은 보상이겠는가!......

 

그 날 오후, 베슈는 이참에 바르네트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릴 결심으로 라보르드가(街)의 탐정사무소로 향했다.

그런데 문은 닫힌 채 이런 팻말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연애사업 때문에 잠시 휴업 중

밀월여행이 끝나면 다시 개업함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베슈는 은근한 불안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곧장 올가의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역시 문이 잠겨 있었다. 폴리-베르제르도 가보았다. 거기 얘기가,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께서 위약금조로 막대한 금액을 지불한 뒤 훌러덩 여행을 떠나버리셨다는 거였다.

베슈는 거리로 나오자마자 그르렁댔다.

"이런 우라질!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돈을 떼먹는 대신, 이번엔 의기양양한 승리를 내세워 감히 누굴 유혹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의혹이 들었다. 이보다 더 참담한 지경이 있으랴!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 아니, 차라리 어떻게 해야, 이 세상 가장 비참한 확신에 이르는 걸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 지나갈 수가 있을까?

아뿔싸! 바르네트는 결코 먹잇감을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베슈에게는 다음과 같이 열락(悅樂)에 겨운 코멘트가 첨부된 화려한 그림 엽서들이 당도했다.

 

아, 베슈! 로마의 달 밝은 밤일세! 이보게 베슈, 자네만 좋다면 당장 시칠리아로 달려오게나......

 

베슈는 악다문 잇새로 이렇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죽일 놈! 다른 건 다 봐줬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 돼. 두고 봐라, 이 놈......"


8. 베슈, 짐 바르네트를 체포하다
"이보게, 베슈, 아까 네번째 편지를 힐끔거리던 중, 나는 크리스티안 베랄디가 실은 처음부터 자기 남편에게 과거 모든 사연을 있는 그대로 고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네. 즉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의 옛날 관계와 아이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건이 나자 입을 다물어서 사법당국을 속였다는 얘기야. 물론 장 데스로크에게 앙심을 품고, 가능하면 교수대로 몰아붙이려는 목적에서 그런 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셈이네. 자, 사정이 그러할진대 이제 와 그처럼 불명예스런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갑부 베랄디께서 과연 그걸 사들이고 싶어하지 않을까? 새로운 추문이 이는 걸 싫어하는 어느 점잖은 작자가 은근히 나서서 제안한다면 베랄디가 굳이 돈을 아낄 것 같으냔 말이야...... 그래서, 기회를 틈타 아까 그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슬쩍 해놨지 뭐."

(중략)

그로부터 며칠 후 베슈는 바르네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기뻐하게나, 친구! 자네가 이 바르네트라는 망나니를 감옥에 처넣지 않고 사진도 가로채지 않아서, 결국 상관한테 약속도 못 지키고,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꼴이 되었지만, 내가 그동안 자네 일을 열심히 탄원하고, 이번 사건에서 자네의 주도적인 역할을 적절히 홍보한 끝에, 마침내 반장직급으로의 승진을 따놓았다네.

 

베슈는 홱 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바르네트의 빚을 진다는 게 과연 가당(可當)한 얘기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 사회가 그 가장 유능한 봉사자의 진가(眞價)를 알아보고 보상을 해준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베슈의 눈높이로는 베슈 자신의 진가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는 편지는 박박 찢어발기되, 진급만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9

-아르센 뤼팽의 여인들

우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을 뤼팽이 용감하게 나서서 구원해주는 관계 유형이다. 처음 예닐곱 살 소년의 몸으로 도둑질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관계에서 비롯된 만큼, 대부분의 여성이 이 관계 유형의 한 항()으로서 등장한다. 이 경우 특징은, 굳이 이렇다 할 애정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유대식 램프”, “결혼반지”,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 설사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고 해도 서로의 인생을 공유할 정도로 발전하기보다는 아스라한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수정마개). 이런 경우 여성 이미지는 전혀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뤼팽의 모험에서 하나의 소재처럼 기능한다. 이때 여성은 뤼팽이라는 위력적인 인간상에 완전히 매몰되어 그의 정의감에 불을 지피는 역할에 만족할 뿐 자기 나름의 개성이나 줄거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 뤼팽 모험담에서 정말 중요한 여인상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약간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이며 때로는 위험천만한 캐릭터를 취한다든지 무척 강인하고 활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등장한다. 그저 뤼팽이 와서 구원해주기만을 고대하는 사회적 약자와는 너무도 다른 이와 같은 여성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뤼팽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뤼팽의 명실상부한 배우자가 되어 결혼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있고, 둘째,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나누는 관계가 있다.

이제는 다 알려진 대로, 뤼팽은 결혼을 네 차례 했다. 제일 처음 1894년 스무 살의 나이에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으로 클라리스 데티그와 하고, 두 번째로 1904년에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으로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과 한다. 이어서 세 번째 결혼은 그로부터 5년 뒤 루이 드 발메라스라는 이름으로 레이몽드 드 생-베랑과 하며 마지막 결혼은 한참 후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40대 나이의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플로랑스 르바셰르와 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선 먼저 눈에 띄는 여인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귀족 출신(앞의 세 명의 성[]에 귀족 출신을 뜻하는 전치사 ‘de’가 붙는다) 내지는 엄청난 재력을 지닌 존재(플로랑스는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판명난다)라는 점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모두가 뤼팽이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 존재이기 이전에 오히려 뤼팽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정신적으로 돕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클라리스 데티그는 어려운 상황에 단신으로 파고들어와 뤼팽의 생명을 구해준다(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pp.284-287).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결혼 상대자였던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두 차례나 뤼팽에게 도움을 준다(“아르센 뤼팽의 결혼”, pp. 254-258). 세번째 배우자인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애당초 뤼팽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자 앙브뤼메지 수도원의 폐허 더미 속에서 부상당한 그를 숨겨주고 상처를 치유해 준 구원자이다. 아울러 하나같이 뤼팽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 그 시선 앞에서 이와 같은 가책을 느끼는 심리는 애초에 넬리 언더다운 양에게서 확인한 바 있는 거울로서의 여인의 이미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한다. 뤼팽의 자의식에 강한 자극을 주어서 정체성의 일대변혁을 유도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양심의 시선 말이다.

 

단 한 가지 예외는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경우인데 이는 뤼팽의 나이가 이미 불혹(不惑)을 훌쩍 넘긴 때라 여인의 시선 앞에서 정체성의 변화를 겪을 시기가 자연스레 지났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뤼팽이 배우자로 맞이한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현상은 일부 연구가에 의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뤼팽의 모성(母性)을 향한 원초적 갈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들 여성 거의 다가 귀족 출신이라는 점도 뤼팽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당드레지와 닮았다. 서민 출신인 아버지 테오프라스트 뤼팽으로부터 물려받은 뤼팽이라는 성()의 정체성과 비교해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태도는 여인들의 시선 앞에서 범죄자로 살아온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정직하게산다는 것이야말로 이처럼 어머니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가치이며, 괴도신사 뤼팽이 배우자가 될 만한 여성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이상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나 레이몽드 드 생-베랑 모두 뤼팽에게 정직한 삶으로서의 개과천선(改過遷善), 즉 정체성의 변혁을 요구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이렇게 정체성의 대전환을 이루면서 시작한 결혼생활이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결혼 6년 만에 사망했고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신혼의 단꿈을 미처 꿔보기도 전에 잘못 겨누어진 총탄에 비명횡사한다.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수녀가 됨으로써 속세에서의 상징적 죽음으로 결혼을 무효화한다. 플로랑스 르바셰르는 이 점에서도 예외인데 결혼한 이후 그 어디에도(다른 여타 작품)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결혼 이전까지만 의미가 있었던 존재에 불과하다. 이처럼 뤼팽이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설정은 언뜻 물리적인 상황 탓으로 설명될 것도 같으나 그보다는 뤼팽 자신의 이중적인 운명에서 원인을 찾아야 보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는 뭔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성향은 배우자가 죽음을 맞기 이전부터 그의 결혼생활을 사실상 예정된 파국으로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과 악() 모두가 나를 잡아끈다는분열된 자의식, ‘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17)인 라울 당드레지와 아르센 뤼팽이 존재한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엄존하는 한 우리의 주인공은 결코 그 어떤 여인과도 안정된 행복을 꿈꿀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맺어지는 관계말고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사르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는 관계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여인의 운명 또한 이와 같은 뤼팽의 운명을 빼다 박았다는 사실이다.

 

신비스러운 변신술과 더불어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의 정체는 극과 극을 종잡을 수 없이 넘나든다. 물론 또다른 사랑의 형태인 질투가 화근이지만 이런 불안정한 성향의 여인이 남자를 향해 손 내미는 열정은 오히려 파괴적일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어머니 이미지가 오버랩된 다른 여인들이 뤼팽을 정직한 삶으로 이끈 데에 반해서 조제핀 발사모가 라울을 진짜 괴도의 길로 이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애정은 아무리 뜨겁게 불붙었다 해도 결국에는 증오와 환멸만을 남긴다.

   

돌로레스 케셀바흐 역시 극단적으로 분열된 이미지를 타고난 것은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연약하고 곱기만 한 미망인의 정체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뤼팽의 가장 강력했던 적수와 동일인물임을 밝혀질 정도로 돌로레스 케셀바흐의 이중성은 처절하다. 더구나 그것이 순수한 광기, 즉 정신착란의 결과라는 점에서 조제핀 발사모보다 비극적 색채가 짙다. 이 여인 역시 뤼팽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애정에 괴로워한다.

 

요컨대 남녀 둘 다 똑같이 분열된 운명을 타고난 처지이기에 서로 미친 듯이 불붙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시적이나마 받아들이고 유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관계이다. 마치 부싯돌끼리 부딪치며 불꽃을 발하듯 강렬한 열정을 경험할 수는 있으되 상대방의 불안정한 모습을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고 비쳐줄 조용한 거울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이 그런 조용한 거울 같은 여자와 더불어 백년해로(百年偕老)하지 못한 점은 어찌 보면 무척 다행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정체성의 혼란을 끝없는 모험 속의 자기 변신을 통해서 극복해나아가는 데에 있으며 어머니 같은 한 여인을 만나 정직한 사람으로 안주하는 것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17)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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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 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녹색의 표지에 끌렸다.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이 소설은 뤼팽의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의 여동생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푸른 눈동자의 영국 여자와 초록 눈동자의 프랑스 여자의 모습이 머리에 환히 그려지며 1920년대 낭만이 느껴지는 듯했다.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는 다분히 시적(詩的)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처음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우연과 숙명의 연결 고리가 중첩되면서, 아득한 과거와 전설 속의 비밀로 수렴되어가는 스토리 전개방식이 모리스 르블랑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비밀의 소재가 밝혀지는 종반의 하이라이트도 감탄할 만하지만, 여성에 대한 완벽한 신사적(紳士的) 이미지와 소위 “불 좀 빌립시다!”라는 명언(名言)으로 대표되는 신출귀몰 뤼팽의 카리스마가 압권이다.「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는 이번에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보석 같은 단편작품으로, 거장(巨匠)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찬미와 존경의 표시로 집필된 것이다. 추리문학에 관한 한 세계 최초의 학술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레지 메삭의 「탐정소설과 과학정신의 영향」(1929)은 바로 이 작품을 두고 “에드거 앨런 포의 집중(concentration)과 점층(gradation)의 법칙을 대단히 훌륭하게 적용”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에 대한 마지막 분석으로 천재 소년탐정 이지도르 보트를레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푸른 눈동자의 영국 여자

가만히 보면 인생이 그처럼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다. 일단 그는 젊다. 그리고 손쉽게 휘어잡은 은행권 지폐 다발이 지금 지갑 속을 두둑이 채우고 있다. 머리 속은 확실하게 처리할 일들과 풍부한 수입에 대한 계획들로 늘 가득하다. 더군다나 내일 아침이면, 잠에서 부스스 깨어 일어날 아리따운 아가씨의 가슴 벅차고 열에 들뜰 멋진 모습을 눈앞에 대하게 될 것이다.


2. 초동 수사

'내가 실수한 거야. 계속해서 영국 여자 곁에 머물면서 마지막 부탁을 진지하게 이행했어야 하는 건데, 공연히 그 복면 쓴 여자 때문에 허둥대느라 아까운 시간만 버렸으니...... 하지만 내 머잖아 슬그머니 우회해서 뺀질이 네놈의 뒷덜미를 낚아채고야 말 테니 두고 봐! 그리고 네놈이 무슨 수로 제때에 이 열차를 탈 수 있었는지, 이전에 마주친 미녀들 둘이 활개를 친 이 사건을 어떻게 도맡게 된 건지 내 속속들이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그때를 기약하며 까짓 지금은 얌전히 물러나주지......'

3. 어둠 속의 입맞춤

라울은 여자에게 좀더 몸을 기울여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꺼풀을 다소곳이 내리깐 상태로 여자는 완전히 남자의 보호에 자신을 맡기고 있엇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위험은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라울은 갑자기 고개를 한껏 숙여 여자의 입술을 훔쳤다.

일순 미약하게나마 거부의 몸짓을 해 보이던 여자는, 그저 한숨을 길게 내쉬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느끼기에 분명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고개를 약간 빼긴 했지만 그윽한 키스의 맛에 입술을 여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몇 초...... 별안간 펄쩍 뛰듯이 몸을 사리면서 여자는 있는 힘껏 팔을 뻗쳐 몸을 떼더니, 이렇게 신음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아! 끔찍해라!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나를 놔줘요! 놔달란 말이에요!...... 어쩜 이렇게 비열한 짓을......"

난데없이 기분이 상한 남자는 순간 매몰차게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러는 사이 여자는 후닥닥 떨치고 일어나 캄캄한 어둠 속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라울은 어쩔 줄 모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4. 별장을 털다

"내가 항상 철저하게 준수하는 원칙은 말일세......"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르센 뤼팽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적절한 때가 되기 전에는 서둘러 어떤 문제 해결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일련의 수수께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연에 의해서든 자신의 솜씨에 의해서든, 먼저 제반 사실들이 충분히 집적(集積)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우선이야. 아무리 진실을 향한 길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사태의 진전에 발맞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가야만 하는 거라네."

하물며 서로 어떤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이 지리멸렬한 요소들이 제멋대로 얽혀 있는 사안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타당한 원칙이라 하겠다. 어떤 통일성도 찾아보기 어렵고, 일관된 추론조차 불가능한 경우...... 그저 모든 사항들이 제각각 따로 노는 듯한 분위기......정말이지 라울은 이런 류의 모험일수록 조급함을 삼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추리와 직관, 분석과 시험 등, 섣불리 발길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함정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는 느낌이었다.


5. 충견

지방 출신이건, 파리 출신이건, 보아하니 더없이 능란한 배우 기질과 담백하면서도 감동적이고, 다정다감하면서 또 쾌활한 매력과 순수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가창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배우로서의 모든 재능과 미모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 매우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실제 무대경험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점 또한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문득 오스망 대로에서의 첫인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어딘가 앳되어 보이면서도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 얼굴로 두 개의 판이한 운명을 살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6. 재회

'......예쁘장한 그대는 이제부터 이 손 안에 있는 거나 같아. 살인자이자 절도 사기군의 절친한 공범이자, 그대 자신도 매정한 살인마인 데다, 화류계의 아가씨이자 오페레타 가수이며, 수녀원 식구이기도 하다 이거지...... 좋아, 그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절대로 못 빠져나갈걸. 소위 신뢰라는 것은 한번 마음 속에 둥지를 틀면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법! 지금 그대가 입술을 한번 빼앗긴 걸로 제아무리 내게 앙심을 품었다 해도, 마음 깊숙한 속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구해주고, 항상 위험 직전에 짠하고 나타나주는 이 듬직한 사나이에게 신뢰감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어쩌다 물렸기로서니 충견(忠犬)을 내치는 경우란 없으니까 말이야...... 오, 세상 모든 귀찮은 것들을 피해 수녀원에 피신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여!...... 새로운 상황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대는 내게 살인범도 무지막지한 여걸(女傑)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려한 오페레타 가수도 아니라오. 나는 그대를 결코 레오니드 발리로는 부르지 않을 테야. 대신 오렐리라고 부르도록 하지. 왠지 난 그 이름이 맘에 들거든. 고풍스럽고도 단정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자매이니까 말이야(오렐리[Aurelie], 즉 아우렐리아는 성녀의 이름이기도 하다/역주)...... 아,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여, 그대가 옛 패거리들과의 별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소. 그들은 아마 당신에게서 그 소중한 비밀을 앗아가려고 했겠지. 물론 당신은 고집스레 그것을 지켜왔을 테고. 하지만 이제 그 비밀은 조만간 내 손 안에 들어올 거요. 왜냐하면 비밀하면 곧 나거든! 현재 당신이 숨어 있는 어둠의 베일을 걷어내는 날, 그 비밀 역시 낱낱이 밝혀낼 것이오, 신비스럽고도 열정적인 오렐리여!......'

이런 생각 속에 기분이 좋아진 라울은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로 비롯된 골치 아픈 수수께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눈을 붙였다.


7. 지옥의 아가리

"이런 망할 놈이 있나! 그럼 내가 멍청하게 떠들어대는 동안 그 말을 안 하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 자가 그런 흑심을 품고 있다구? 아, 지저분한 놈...... 이거야 원, 그 아가씨는 어째 안 좋아하는 인간이 없구만그래! 같잖은 놈들이 너무도 많아! 어떻게 그 놈들은 거울도 안 보며 사나? 그중에서도 특히 너 말이야, 너! 포마드 바른 뺀질한 상판대기하며......"


8. 전투 준비

저만치 한 300여 미터 전방에 조도가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등짐 속에는 처음에는 브레작의 호텔 지하를, 그 다음에는 루보 형제의 별장 지하실을 제멋대로 넘나든 공범이 얌전히 숨죽이고 있을 터!

그런가 하면 그 뒤 한 100미터쯤 뒤에 쳐져서 브레작이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따라붙고 있었다.

언뜻 눈을 돌려 센 강 쪽을 살펴보니 거기에는 또 줄 낚시를 즐기는 남자 하나가 같은 방향으로 제방을 따라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마레스칼이었다.

결국 조도는 브레작이 쫓고 있고, 브레작과 조도 모두는 마레스칼한테 미행당하고 있는 셈. 물론 그 셋 모두는 라울일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이 쫓고 쫓기는 게임에서 내걸린 판돈은 유리병 하나!


9. 간절한 기다림

"바로 이것이네, 친구. 어때, 이만하면 알아보겠지? 바로 자네가 그 조도 선생한테서 뺴앗은 것을 내가 다시 가로챘고, 그걸 또다른 녀석이 낚아챘었지. '또다른 녀석'이 누구냐고?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리메지 남작님이시지! 놈의 숙소에서 좀 전에 되찾아 온 거라네. 이걸 다시 손에 넣었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신났는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이 병이야말로 진짜 보물 중에 보물이 아니겠나! 잘 보라구, 브레작, 상표하고 성분 표시까지 그대로야...... 자, 보라니까! 여기 이 병마개하고 붉은 밀랍 봉인은 리메지의 작품이라네. 이 안을 잘 들여다봐...... 가느다란종이 두루말이가 보일 거야. 아마도 조도에게서 자네가 빼앗으려 했던 게 바로 이거일 거야. 필경 뭔가 중요한 고백을 적어 넣은 거겠지...... 자네 손으로 직접 쓴 결정적인 증거물 말이야...... 허허, 브레작 자네 참 딱하게 생겼어!......"

압도적인 승리엿다. 밀랍 봉인을 뜯어내고 병마개도 벗겨내면서 그는 저혼자 기분이 들떠 별의별 탄성을 제멋대로 내지르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마레스칼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야!...... 특급열차 살인범들도 일망타진했지!......브레작의 어두운 과거도 가차없이 파헤쳤어!......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서 얼마나 다들 놀랄까!...... 이봐, 소비누, 여기 이 어여쁜 아가씨를 위해 수갑은 가져왔겠지? 라봉스하고 토니도 불러들이게......아, 이겼어......완벽한 승리라구......"

병을 뒤집자, 안에서 종이 두루말이가 흘러나왔다. 지체 없이 종이를 펼친 마레스칼을 마치 결승선을 초과해 달려드는 달리기 선수라도 되듯 한껏 도취된 기분으로, 무슨 말인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밟히는 대로 소리쳐 읽어버렸다. 이렇게......

 

마레스칼은 얼간이래요.


10. 화려한 등장

"어이, 안녕하신가, 친구? 그나저나 자넨 감쪽같이 날 못 알아보더구만 그래! 아마 지금도 내가 어떻게 소비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엇는지 의아한 모양이야? 엄청 믿었던 부하였을 텐데 말이지! 오, 하느님 맙소사! 소위 이 바닥 거물급에 속한다는 인사가 한낱 소비누라는 인물을 철석같이 믿고 지내오다니! 이보게, 로돌프 군(君), 소지누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일세. 한낱 허깨비였을 뿐이야! "


11. 결정타

"고집부리지 말라니까, 마레스칼. 보다시피, 난 지금 놀리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아니야. 자네의 실수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라구."

"나의 실수?"

"그래, 여자가 살인한 게 아닐뿐더러, 오히려 이번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이거지."


12. 불어나는 물

하지만 라울은 분명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입술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요, 방금 말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했다. 라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기질적으로 그는 그러한 나약함과는 상극(相剋)이었다. 그러나 오렐리는 맥을 풀리게 하고 허약한 생각을 품게 만드는 말들을 여전히 애원조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13. 암흑 속에서

조도는 그만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다. 라울의 대범한 태도, 아직도 오렐리가 위험 중에 신음하고 있다는 스스럼 없는 고백은 그의 정신을 일순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한 적이었던 이 인간의 마력적인 위력이 점점 더 크게만 바라보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단 한순간도 이 상황을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반전시킬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가 쏜 두 발의 총성은 그대로 암벽과 바위들을 타고 널리 울려 퍼졌다. 조도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대장이오. 더는 주저할 이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한테 복종하는 수밖에...... 여기 공책들하고 후작의 유언장이 있습니다."


14. 청춘의 샘

그제서야 라울은 여자의 말을 이해했다. 자고로 예술가의 독립적인 삶이란 이런저런 일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마련이다. 지금 오렐리는 그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사실 마레스칼은 그외에도 여러 다른 얼굴들 너머 그의 존재를 알아보았는데, 언제나 빈정대는 말투와 윙크하는 눈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주었다. 아울러 매번 빠짐 없이 자기 면전에다 대고 그 지긋지긋하고 신랄하면서도 얄밉고 갑작스런 말 한마디를 뱉어내는 것을 꼼짝 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바로 이 말......

"실례지만, 불 좀 빌립시다!"

라울은 결국 쥐뱅의 영지를 사들였다. 하지만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그는 결코 그 곳에 깃든 엄청난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쥐뱅의 호수와 청춘의 샘은 프랑스가 아르센 뤼팽으로부터 상속받게 되는 여러 보물들과 신비의 목록에 당당히 오르게 된 것이다.

 

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이보게, 뤼팽...... 이번 사건에 자네가 개입해서 논증해준 내용 말일세...... 솔직히 나는 그 편지에 그리 놀라진 않았었네."

"아하, 그런가? 이유는?"

그는 차분하게 반문했다.

"이유아 그와 유사한 사건이 70~80년 전에 이미 일어났었기 때문이지. 그걸 가지고 에드거 앨런 포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한 편의 주제를 삼았지 않았던가(1841년 발표된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을 암시한다. '모르그'라는 거리명과 앞서 나온 모르그 숲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에서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역주)! 사정이 그러하니 이번 수수계끼의 해답이 쉬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8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 이지도르 보트를레

 

(이지도르 보트를레)의 말투는 한없이 점잖으면서도 깍듯한 예의가 담겨 있었다. 보아하니 상당히 젊은 친구였는데, 매우 큰 키에다 무척 야윈 체격이었으며, 키에 비해 다소 짧은 바지와 몸에 꼭 끼는 모닝코트로, 전혀 겉멋을 부리지 않은 차림새였다. 얼굴은 마치 여자애처럼 살짝 홍조를 띠었고, 시원스런 이마 위로는 짧게 깎은 머리, 그리고 턱 주위로 제대로 다듬지 않은 황금빛 수염이 듬성듬성했다. 소년은 그렇게 총명한 눈빛을 연신 반짝이면서, 전혀 어색한 기색 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곳에는 뤼팽 같은 건 없습니다. 도둑이나 탐정에 얽힌 이야기들도 없어요. 반면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역주)라고 하는 엄연한 현실이 버티고 있답니다. 지금이 벌써 5월이고 앞으로 두 달여밖에 안 남았다구요! 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듯 시험 때문에 고민하고 아버지의 꾸중을 걱정할 정도로, 여느 청소년과 다를 바 없이 앳되고 순진한 고등학생 보트를레...... 그러나 그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면서도 인상 깊은 뤼팽의 맞수로 뤼피니앵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등장하는 무대는 기암성단 한 편이면서도 이 풋내기 소년이 그처럼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보트를레와 뤼팽의 대결구도가 단순히 법의 수호자와 범법자(犯法者)간의 쫓고 쫓기는 차원이 아니라, 두 적수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치열하면서 정정당당한 경쟁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이 또래에 어느 한 대상에 대해서 이 정도의 열렬한 관심과 탐구열을 보인다는 것은 그 대상을 향한 일종의 존경심 내지는 존경심을 바탕에 깐 경쟁의식이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뤼팽에게는 위와 같은 보트를레의 순수한 입장이 적당히 내칠 필요가 있으면서도, 왠지 가다듬고, 심지어 키워주고픈 선의의 경쟁자로 비쳐졌을 법도 한 것이다.

 

뤼팽 시리즈를 통틀어 기암성만큼 뤼팽의 적수(가니마르, 홈스, 보트를레)가 동시에 많이 등장하는 작품도 없을뿐더러, 쟁쟁한 싸움꾼들을 죄다 제치고 가장 나이 어린 보트를레가 마침내 에기유 크뢰즈의 비밀을 거머쥐고야 만다는 발상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속이 빈 바늘’...... 글자 그대로 에기유(aiguille)’의 속이 텅 비어 있다(creuse)’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쉽게 풀릴 것을, 똑똑하다는 천재 소년조차 에기유라는 성()크뢰즈라는 지명을 찾아다닐 정도로 수수께끼는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 문제는 순수한 눈을 가지는 것!

 

보트를레가 가니마르나 셜록 홈스를 제치고 기암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같이 순수한 마음의 눈, 좀더 자유로이 살아 숨쉬는 상상력을 가진 소년이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천신만고 끝에 기암성에 입성한 보트를레를 이미 초대된 손님을 맞이하듯 환영하는 뤼팽의 태도는 마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한 후임자, 입문의례의 고난을 극복한 자랑스런 후계자를 맞이하는 태도에 비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아름다운 모험담 내내 맞수이자 길 안내자로서 소년의 운명을 이끌어온 뤼팽이 마지막에 남긴 작별인사는, 더 이상 천재소년 보트를레가 아니라, 뤼팽의 고뇌와 슬픔, 즉 자신과 동류인 한 인간의 운명을 가슴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어떤 성숙한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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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스무 살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도의 젊은 시절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이제 전집의 절반을 읽어온 나에게 늘 궁금한 부분이었다. 아마 모리스 르블랑 조차도 생각지도 않았을 부분이었겠지만, 시리즈가 오래 오래 사랑받는 덕분에 뤼팽의 과거 이야기가 한 편의 책으로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히어로물의 프리퀄시리즈의 원조라고 할까? 배트맨 비긴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를 애정하는 나로서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프리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분하며 보았다.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는 방법에는 영웅의 시작부터 그려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현재 활약하고 있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후, 이 영웅의 과거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현재 영웅의 모습을 보여 준 후 과거에 대해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 프리퀄을 짜짠하고 보여주는 쪽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시선을 끄는 방식일 것이다. 재미도 2배인 만큼,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도 2배일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시리즈 말미에 다다르면 「백작부인의 복수」를 통해 한번더 백작부인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니 벌써 기대가 되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 중 최고 수준의 걸작에 속한다. 당시 유명한 샹송 가수이자 인기절정의 배우였던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 1888-1972)를 모델로 한 삽화 속 젊은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 속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들어가는 구도가 「기암성」에 필적하는 심각한 분위기이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른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겪는 진지한 모험담인 만큼 여러 모로 괴도로서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즉 이 모험을 계기로 우리의 주인공은 부하를 거느릴 필요성이라든지 싸움에 임해서 적을 판단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 행동에 뛰어드는 과단성과 냉철한 정신력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풋내기 청년 라울에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으로의 입문의례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해설은 전편의 가니마르 분석에 이어서 아르센 뤼팽의 최대 맞수로 일컬어지는 셜록 홈스에 관한 고찰로서 그가 뤼팽 시리즈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집중 조명한다.

 

이것은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경험한 모험담으로서,

그 자신이 수차례에 걸쳐서 단호하게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무엇보다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되었을 이야기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은 아닐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나 사이에는 미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어. 그러니 좀더 두고 보자구.”

사실 이 모험담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결판이 나기까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스무 살 난 풋내기 청년과 저 칼리오스트로

가문(家門)의 여식을 휘어잡았던 끔찍한 사랑의 결투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게 되었다.

 

1. 스무 살의 아르센 뤼팽

클라리스 데티그는 그보다 약간 손아래의 처녀였다. 방년(芳年) 18!......육감적인 입술에다 꿈을 꾸는 듯한 눈망울......장밋빛과 황금빛으로 아스라이 빛나는 화사하고도 상큼한 안색......그리고 이곳 코 지방의 시골길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소녀들처럼 파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머리빛깔과 우아한 분위기, 매력 넘치는 저 자태!......

 

사실 라울은 여자를 밝히는 사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능과 욕망의 과도한 에너지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나, 거기에 탐닉하기에는 절제와 우아함을 지향하는 심성이 워낙 단단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유혹에 저항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 법. 배짱과 정욕, 애정과 정복하려는 욕망이 펄펄 피가 끓는 젊은이를 이내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라울은 더 이상 공연한 망설임으로 지체하지 않고, 후닥닥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두 남녀는 석 달 전 클라리스가 남프랑스 지방의 기숙사 친구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처음 만났고, 그때부터 줄곧 서로를 사랑해왔다.

두 사람은 즉각적으로 서로 맺어져 있음을 느꼈는데, 남자에게는 그것이 세상 더없는 감미로운 기분이었고, 여자에게는 상대에게 구속을 당하면서도 갈수록 그것이 점점 더 소중해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라울은 그녀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신비스런 남자였다. 더군다나 다소 경박스러운 태도와 짓궂은 장난기, 그리고 이따금 어두워 보이는 성질을 불쑥불쑥 드러내서 여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지! 얼마나 호쾌한지! 약동하는 젊음의 열정과 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모든 단점들은 그만 어떤 성향이 도가 지나쳐 불거져나온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악덕(惡德)마저도 그가 가지고 있는 미덕(美德)이 아직은 설익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뒤, 성격이 음울하고 맹신적이며 돈과 명성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소작인들한테도 경원(敬遠)의 대상인 편부(偏父) 슬하에서 자라느라 클라리스는 그리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처 소개도 되지 않은 라울이 덥석 딸을 달라고 나서자, 남작은 이 배경도 없고 이렇다 할 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풋내기 청년에게 어찌나 화를 버럭 내던지, 젊은이가 야수를 길들이는 사람처럼 의연한 눈빛으로 똑바로 쏘아보지만 않았던들,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말끔한 얼굴에다 그냥 채찍질을 가할 뻔했었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상큼한 바람이 평야지대를 스치고 다가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면, 담으로 에워싸인 광대한 과수원 너머, 햇살을 받아 눈부신 유채(油菜)의 평야를 휘 둘러보던 눈길은 우측 방향으로 페캉까지 이어진 백색(白色)의 깎아지른 절벽지대에 가 닿았고, 좌측으로는 거대한 기암괴석과 포르트 다발을 아우르는 (기암성p.267 참조/역주) 에트르타 만()과 마주쳤다.


2. 1788년생, 조제핀 발사모

이처럼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인생 역전과 그와 관련한 충격적인 폭로전은 기껏해야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누구도 따로 나서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근사한 웅변이라도 시도해 기발한 주장 하나 제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더도 덜도 아닌 사실들만이 차근차근 공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제각각 가공할 파괴력을 갖춘 증거들이었으며, 저토록 젊디젊은 여자에게서 100년도 넘는 과거의 기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기절초풍할 만한 진술들이었다!


3. 마녀 재판

그제서야 보마냥의 음험한 계략을 눈치챈 라울은 생각했다.

결국 죽이겠다는 거야......영국 선박이라는 건 있지도 않아. 그냥 두 개의 보트만 있을 뿐이지. 그중 하나에는 구멍이 나 있을 테고, 결국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가라앉게 되어 있는 거야.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감쪽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라구......’

 

역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사형을 언도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처리한 것에 분명 흐뭇해하는 분위기였다. 뭐 하나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다. 사소한 일들이나 서로 의논하던 소규모 친목 모임을 피하고 나서는 태도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인근 역에서 부랴부랴 저녁 열차를 잡아타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뒤, 남은 사람은 보마냥과 두 사촌뿐이었다.

결국 상황은, 라울이 보기에, 무척 황당한 양상으로 귀결된 셈이었다. 한 여인의 목숨이 그토록 임의적으로 저울질 당한 데다, 기어이 끔찍한 계략에 의해서 접수되고 만 이 극적(劇的)인 회동은, 마치 제 시간도 안 되어 끝이 난 연극 한 편이나 한창 심리가 진행 중에 덥석 판결이 떨어진 엉터리 소송처럼, 갑작스럽고 싱겁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이처럼 얼버무리기 식의 속임수 한마당을 통해서 라울 당드레지는 배배 꼬이고 엉큼하기 그지없는 보마냥이라는 자의 성격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광적인 데다 요지부동의 고집, 빗나간 애증과 병든 자만심에 삭을 대로 삭은 사내는 처음부터 죽음을 마음에 둔 상태였다. 하지만 내면에는 또한 비굴함과 위선, 소심함과 불안이 꿈틀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양심과 정의 앞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바로 가증스런 속임수를 동원해 백지 위임장이나 다름없는 음험한 해결을 모색한다는 안()이다.


4. 보트가 가라앉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활달함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세 번째로 쉬었을 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 위에 여자를 눕혔는데, 언뜻 내려다보니, 지금까지 대차게 내질러온 농담과 지칠 줄 모르는 활기에 여자의 얼굴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는 아예 그 매력적인 몸뚱어리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유연한 몸매를 손길에 느껴가면서 남은 등반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보마냥이 언급했고, 세밀화에도 있다는 검은 반점에 대한 생각이 문득 머리 속에 떠올랐다. 방금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구해준 이 여인의 가슴 위에 정녕 그와 같은 표식이 있는 것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과연 떨쳐낼 수 있을 것인가?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옷섶을 벌려보았다. 바로 오른쪽, 옛날 바람둥이 여인네들이 일부러 붙이고 다녔다는 애교점과 흡사한 까만 점 하나가 백옥 같은 피부 위에 앙증맞게 자리를 잡고 앉아 아련한 숨결 따라서 춤을 추고 있었다.


5. 일곱 개의 가지 중 하나

자고로 라울만한 나이의 젊은이에게 이 같은 마음의 변덕과 불성실함이란 저저로 손쉽게 자체 소화가 되는 법이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별개의 두 존재로 분리되어, 하나가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랑을 덤덤하게 유지해나가면서도, 다른 하나는 전혀 낯선 열정에 온통 달아올라 광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조차 가능하기 마련이다. 클라리스의 이미지가 이따금 작은 성당의 흔들리는 촛불 사이에서 기도를 올릴 때 어렴풋하고 고통스럽게 떠오르는 신상(神像)과도 같다면,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모습은 모든 이의 칭송을 요구하면서 그 누구도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먹는 것을 결코 용서치 않는 혹독하고 질투심 많은 유일신 그 자체였다.

라울 당드레지-장래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빛내줄 이 친구를 당분간은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는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또래의 젊은이에 비해 시간부터가 좀 모자라는 편이었다. 비록 야망에 불타는 젊은이였지만, 아직은 어느 분야, 어떤 수단을 통해서 부와 권력과 명예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캄캄한 상황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를 운명의 부름에 즉각 화답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만 할 뿐이었다. 지성, 기지(機智), 의지력, 육체적 유연성과 근력, 민첩성, 지구력 등 모든 분야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극단까지 추구했고, 노력을 더함에 따라서 그 한계가 차츰차츰 커진다는 사실에 자못 놀라워했다.

그와 더불어, 또한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고아로 자란 데다, 친구도, 친척도, 직업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연명해왔다. 어떻게? 그 점에 관해서는 자기 스스로도 시원찮은 해명을 할 뿐이며, 굳이 구체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누구나 제 능력대로 알아서 사는 법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필요화 취향을 충족시켜가면 그뿐......

행운은 나의 편이다! , 전진하는 거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 왠지 그게 대단할 거라는 느낌인걸!’

이를테면 그러한 생각으로 인생 행로를 걸어나아가던 중, 덜컥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 즉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축적해온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6. 경찰과 군경

여자는 거울을 빼들고 오랫동안 자신의 지치고 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가느다란 호리병에서 액체 몇 방울을 거울 표면에 떨군 다음, 비단 천으로 쓱싹 닦아내고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답답한 적막 속에 모든 사고와 의지가 총동원된 듯 한 여자의 눈빛만이 10분에서 15분가량 강렬하고도 힘겨운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난데없는 미소가 마치 겨울 햇살처럼 수줍은 듯 주저주저 피어났다. 잠시 후, 그 미소는 좀 더 대범해졌고, 라울이 놀란 눈으로 줄곧 지켜보는 가운데, 세세한 변화들을 얼굴 가득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우선 웃고 있는 입술 끄트머리가 훨씬 더 치켜 올라갔다. 피부에 홍조도 아스라이 감돌았고 살결 자체에 탱탱한 탄력이 붙는 듯했다. 양 볼과 턱은 예전만한 순수한 선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한마디로 조제핀 발사모의 아름답고 다정다감한 얼굴 전체가 화사한 매력으로 한결 밝아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기적이 완성된 것!

 

내가 도둑이죠? 그게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거죠? 나더러 도둑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소.”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뭐죠?”

갑자기 거칠게 외면하려는 남자를 백작부인은 어깻죽지를 덥석 붙들었고, 위압적인 반말투로 냅다 내질렀다.

젊은이, 자넨 뭐냐고 물었어! 도대체 자넨 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도 패를 몽땅 펴 보아야 하는 거야. 자네 누구야?”

내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요......”

헛소리! 자넨 아르센 뤼팽이야. 자네 아버지는 테오프라스트 뤼팽이지. 복싱 및 사바트(19세기 중반 창시된 프랑스 고유의 상류계층 무술. 현란한 발차기가 주무기이다/역주) 교사직(敎師職)과 더불어 그보다는 좀더 벌이가 되는 사기꾼이라는 직업도 겸임하다가, 끝내는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저 세상으로 떠났었지. 그런가 하면 자네 어머니는 도로 처녀 때 이름을 달고, 머나먼 사촌뻘인 드뢰-수비즈 공작 댁에서 가난한 친척으로 얹혀 살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공작부인께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보물 하나가 분실된 걸 발견했지. 다름 아닌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저 유명한 목걸이 말이야. 온갖 수사를 시도했지만, 결국 그 엄청난 대담성과 악마 같은 재주를 발휘해 일궈낸 도둑질의 주인공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누구 짓인지 잘 알고 있어. 바로 자네였단 말이거든.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지.”

라울은 노기(怒氣)로 창백해진 얼굴에 턱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듣고만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어머니는 모욕받고 불행했었소. 난 그걸 뛰어넘고 싶었고......”

도둑질을 통해서 말인가?”

그때 나이 고작 여섯 살이었소.”

오늘날에는 스무 살이지. 자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이야. 자넨 이제 건장하고 지적이며,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이야.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나는 일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남의 호주머니 속에서 하는 일?”


7. 카푸아의 환락

한편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봉했다. 딱 한번, 그런 주제로 약간의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있긴 있었다. 여자의 젊고 아리따운 외모를 두고, 라울이 불멸의 기적이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을 때, 여자는 냉정하게 이런 대꾸를 했다.

기적이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보죠. 우린 하루에 200리를 주파한 바 있어요......당신은 그게 무슨 기적이라도 되듯 호들갑을 떨었고요.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았다면, 그 엄청난 거리를 달린 건 말 두 필이 아니라 네 필이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을 겁니다. 레오나르가 두드빌의 농가 안마당에서 미리 대기 중인 다른 말 두 필로 원래의 말들을 갈아치웠거든요.” 

 

8. 반전

내 말 잘 들어요, 조진. 나는 지금 엄청난 사건의 한복판에 제일 꼴찌로 뛰어든 입장입니다. 게다가 이미 당신과 보마냥이 거느리는 두 조직이 떡 버티고 있는데 말이죠. 둘 다 당연히 제3의 도둑으로 참여하게 된 나를 달가워할 리 없겠죠......따라서 나로서도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그대로 얼뜨기 취급이나 당하고 있게 될 게 뻔해요. 그러니 내 나름대로 우리 공동의 적인 보마냥을 요리할 수 있게 내버려두시구려. 방금 전에 내 연인 조제핀 발사모를 보기 좋게 요리했듯이 말이오. 내 처신이 그리 서툰 편은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부인하진 못할 것이오......내게도 어느 정도 수완과 대책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오......안 그렇소?”

 

은근히 여자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또다시 슬쩍 건드리는 투였다. 여자는 얼른 팔을 놓았고,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 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라울의 저 깊은 내면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정열적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이 우아한 얼굴의 여인을 적어도 가장 냉혹한 적()으로는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곰곰이 드는 것이었다.

 

9. 추락

버들가지로 엮은 안락의자에 조진이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에 대해서 가졌던 극렬한 원망과 거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온몸을 뒤흔드는 욕정과 사랑하는 마음만이 샘처럼 솟구쳤다. 아니, 과연 일말의 원망이나 거부감이 들기는 들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그녀를 품안 가득 안고 싶다는 가없는 욕망 속으로 순식간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적이라고? 도둑년? 혹시나 흉악한 살인자? 천만의 말씀! 단지 한 여자, 그 무엇이기 이전에 단순한 하나의 여성일 뿐이다. 게다가 보통 아름다운 여인인가!

 

라울이 손을 내밀려는 찰나, 여자도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일순 얼굴에 홍조를 띠었고, 눈꺼풀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긴 갈색 속눈썹 사이로 차마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눈빛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엇다. 아마 멋모르는 어린 소녀라 한들, 지금 이 여인만큼이나 푹푹하고도 순박하게 소심해하는 태도, 교태나 허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10. 뭉개진 손

라울은 짤막하게 잘라 말했다.

아듀, 조진.”

여자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아듀라뇨? ‘또 봅시다그래야죠!”

아니, ‘아듀가 맞아......”

 

거짓말. 당신은 분명 여자의 비명 소시를 듣고 있었어. 몰레브리에 숲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행동에 옮긴 것은 레오나르이지만, 애초에 폭력을 행사하려는 악의(惡意)는 조진 당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지. 몽마르트르의 작은 집으로 부하를 쳐들어가게 한 것도, 또 저항할 시 브리지트 루슬랭을 살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린 것도 바로 당신이었어. 그러고 보니 옛날에 보마냥이 먹을 약에다 독을 탄 것도 당신이었고 말이야. 그 이전에 보마냥의 친구인 드니 생테비르와 조르주 디노발을 살해한 것도 물론 당신이겠지.”

 

여자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밀짚 모자로 만들어진 그늘은 여인의 그윽한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사납게 할퀴어대는 애인의 독설에도 전혀 긁힌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사람의 눈길을 호렸다.

라울은 전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육감적으로 보이는 이 여자......과연 이 여자를 오늘 훌훌 떠나고도 바로 내일부터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을지가 의문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름다운 건 거짓이 아니에요, 라울. 당신은 아마 다시 내게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아름다운 건 다 당신을 위해서이니까요.”

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아뇨. 당신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농샬랑트호()는 늘 가까운 곳에 머물 거예요. 내일 거기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다시는 거기 안 돌아갈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또다시 무릎이라도 꿇을 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죠? 왜 안색이 그토록 창백해요?”

라울은 무사히 이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상태로 줄행랑을 쳐버리는 것 말이다.

마침내 붙잡는 조진의 손을 밀쳐내고 라울을 황급히 자리를 떴다......

 


11. 낡은 등대

사랑하는 클라리스, 나를 용서해주오. 나는 당신한테 정말 몹쓸 인간처럼 행동했소. 우리 함께 좀더 나은 미래를 희망해봅시다. 그리고 당신의 넓은 아량으로 나를 바라봐주오. 클라리스, 다시 용서를 비오, 용서를......

라울

또 다른 여자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자존심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 같은 이 편지를 여자는 마지막까지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안타깝게 휘청거리면서 눈으로는 라울의 시선을 더듬어 찾았다. 순간 라울은 클라리스가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부터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조제핀 발사모에 대한 증오심밖에는 가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실감했다.

 


12. 광녀와 천재

훗날 아르센 뤼팽이 조제핀 발사모와 더불어 체험한 엄청난 모험 중 이 일화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는 연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푸하하하하......당시에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웃을 수밖에 없다네! 내 기억으로는 즉석에서 고 앙증맞은 앙트르샤를 선보인 게 그 대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 이후로는 아주 힘겨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마다 종종 써먹은 동작이지만 말이야(수정 마개p.233, 서른 개의 관p. 272, p.317, p.349 등에서 볼 수 있다/역주)...... 사실 그때 그 싸움도 꽤나 어렵게 승리한 거거든......진짜로 난 기분이 날아갈 듯했었지. 클라리스는 무사히 빠져나갔고, 모든 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지. 그리고 우리 사이의 계약을 상기시키려는 듯,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나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조제핀 발사모의 면상에다가 그만 조신하니 못하게 담배 연기를 후~욱하고 내뿜어버렸다네! 여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더구만, ‘불한당 같으니라구!’......거기다 대고 내가 마치 총알처럼 응수한 말발은 글자 그대로 상스런 욕지거리였다네. , 미안하지만 더는 묻지 말게......보통 거친 욕이 아니라 아주 장난기를 듬뿍 처발라서 해대줬다니까! 에 또, 그리고......그리고 나선 말일세......근데 그 여자가 나한테 불어넣는 극단적이고 모순된 감정들을 일일이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런 문제로 심리학 공부까지 해서 그녀한테 깔끔한 신사처럼 처신했다고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일세. 아무튼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주 혹독하게 증오한 것만은 사실이야. 한데, 그녀가 클라리스를 해치려고 한 다음부터는 내 혐오감이 한도 끝도없이 증폭되질 않겠나! 심지어 그 고혹적인 미모의 가면도 더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그 너머에 도사리고있을 진짜 얼굴만 자꾸 부대끼더라니까! 내가 그 자리에서 발뒤꿈치로 핑그르르 돌며 냅다 욕지거리를 쏴댄 건 바로 그렇게 갑자기 눈에 들어온 육식 짐승 같은 몰골을 향해서였단 말일세!......”

 


13. 수도사의 금고

남작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라울의 대답은 이랬다.

조제핀 발사모의 복수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죽었는데......”

설사 죽었다 해도 그녀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것이구요.”

 

 


14. 악마 같은 존재

한데 말이야......그저 약간의 감정이 일었다고나 할까?......겨우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그게 당신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어......자신의 지시에 의해서 한 처녀가 목숨을 잃었다는 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이야! 남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 따위는 당신에게 별일도 아니지. 그 여자는 이제 겨우 스무 살, 앞길이 창창한 상태였지......미모와 싱싱한 젊음......그 모든 것을 당신은 마치 개암열매를 으스러뜨리듯 몽땅 압살해버렸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더구만. , 물론 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인 건 아니니까......사실상 당신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 보마냥이 당신을 두고 악마 같은 존재라고 부르던 게 생각나더군. 그때는 다분히 귀에 거슬리는 호칭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듯해. 당신 안에는 어딘지 지옥 같은 부분이 있거든. ”

 

그는 가위의 뾰족한 끝을 앞으로 향한 채 그대로 어중간히 쥐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일랑 아예 못 쓰게 만드는 것, 그 살점을 가차 없이 베어서, 사악한 요정이 더 이상 만행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 한복판을 가로질러 깊숙한 십자형 상처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퉁퉁하게 부은 피부를 통해서 언제나 드러나 있다면, 본인한테는 그야말로 더없이 공정한 형벌인 데다, 타인에게는 유용한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며, 숱한 범죄행각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렇게 할 권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한때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던가......

라울은 한동안 꼼짝 않고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없는 슬픔이 물밀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싸움이라면 지쳤다. 씁쓸한 기분과 역겨운 느낌만이 온몸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경험해보았던 엄청난 사랑이었는데......그토록 푸근한 추억과 신선한 감흥에 젖어들게 해주던 사랑의 감정이 앞으로는 원한과 증오만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제 입가에는 환별의 냉소적인 주름을, 영혼 속에는 쇠락(衰落)의 암울한 낙인만으로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야 하리라!



에필로그

라울은 클라리스에게 한 약속들 가운데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켜주었는데, 여자가 몹시도 행복해했던 것이다.

다만 또다른 약속 하나는 그만 지키지를 못했다. 정직한 사람은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것만큼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게다가 소위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조직에 몸담는 동안, 보란 듯이 터득했던 비범한 자질들이야말로 그를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기린아(麒麟兒)로 만들어준 터였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클라리스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일들을 만들어 갔고, 일련의 활극들을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가운데, 자신의 권위는 물론, 실제로 초인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온갖 재능들을 확대시켜나갔다(칼리오스트로의 4대 수수께끼 중 하나인, ‘기암성의 아지트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며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기암성의 스토리이다/역주).

 

그렇게 부부의 행복은 5년간 아무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6년째 되던 해, 클라리스가 그만 분만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남겨진 아들의 이름은 장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다음날 그 아들이 또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라울이 보기에, 누가 감히 오퇴유가()의 아담한 가옥을 침입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랬는지 가늠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일에서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엇다. 이미 두 사촌지간의 익사사건부터 칼리오스트로라는 성()을 떠올렸으며, 그 이후로도 도미니크가 독살을 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바 있는 라울로서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납치작전을 주도했음을 기정사실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을 도둑맞은 비탄의 심경이 사람을 확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의지할 아내도 아들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자신을 빨아들이는 위험천만한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즉 순식간에 아르센 뤼팽이 되어버린 것! 이제 더는 점잔을 떨 이유도, 조심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천만에! 스치고 가는 곳곳마다 떠들썩한 소동이요, 도발이요, 대범무쌍(大汎無雙), 화려무비(華麗無比), 호탕하기 그지없는 활약상이 판을 치는 가운데, 벽이면 벽마다 휘갈긴 이름과 텅 빈 금고 안에 어김없이 남겨진 명함 한 장 등등......과연 아르센 뤼팽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 이름으로 움직이든, 여타 즐겨 차용하는 다른 많은 이름들, 예컨대 베르나르 당드레지 백작이라든가(외국에서 사망한 친척 중 한 명의 신분 증명 서류를 잽싸게 빼돌렸다), 오라스 벨몽, 스파르미엔토 대령 혹은 샤르므라스 공작이나 세르닌 공작, 아니면 돈 루이스 페레나에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명들로 활동을 하든, 모든 변신과 가면 속에서 그의 열에 들뜬 두 눈동자는 언제 어디서나 칼리오스트로가()의 여인츨 추적했고, 아들 장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들도 못 찾았고 조제핀 발사모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황당무계한 활극과 초인적인 시련들, 미증유(未曾有)의 승리와 가공할 열정, 그리고 엄청난 야심으로 점철된 아르센 뤼팽의 일생은, 이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위와 같은 곤혹스러운 의문점들이 저절로 답을 얻기 이전까지, 처절하고도 화려하게 전개된다.

요컨대, 지금까지 살펴본 최초의 모험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오늘날 자신의 마지막 활약상이라고 기꺼이 내세우는 최후의 모험(1935년작 백작부인의 복수를 암시한다/역주)으로까지 이어질 운명이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7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 셜록 홈스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원래 모리스 르블랑이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 배경에는 저 영국의 셜록 홈스를 겨냥한 피에르 라피트라는 출판인의 절묘한 기획의도가 밑받침하고 있었다.1)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추리 소설이라는 대중 장르보다는 정통 심리주의 작가로서 성공하기를 원했던 르블랑은 첫 작품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의 폭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작에는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피에르 라피트는 프랑스의 코난 도일(le Conan Doyle francais)’이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닉네임을 아예 공식해가면서, 거의 매일 모르시 르블랑을 찾아와 뤼팽을 탈출시키라!’며 들볶았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 심리주의 문학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는 코난 도일이나 H. G. 웰스 같은 스타일의 황당하고 살벌한 이야기가 유행을 탈 거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결국 그렇게 해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셜록 홈스, 한 발 늦다라는 단편을 통해서 아직 한창 활동 중인 남의 영웅을 직접 모셔와 대결을 벌이기에까지 이른다. 바꿔 말해, 당대의 두 영웅이 격돌하게 된 배경에는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개인적 의도보다는, 흥행을 염두에 ens 한 출판인의 집요한 설득과 그를 가능케 한 당대 프랑스의 대중적 욕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 무섭도록 날카롭고 싸늘한 눈빛, 대상을 그대로 꿰뚫어버릴 듯한 그 눈초리만큼은 전혀 범상치가 않았다!

그렇다. 셜록 홈스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경이로운 직관력과 관찰력, 명징함과 기발한 발상이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기적 같은 현상이 지금 바로 코앞에 구체화되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에드거 포의 뒤팽이랄지, 가보리오(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소설가. 서류 113, 무슈 르콕등의 작품이 있다/역주)의 르콕과 같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독특한 탐정 유형들을 자연의 장난기 어린 섭리가 한데 모아 버무려서 보다 더 기발하고 비현실적인 또다른 유형의 탐정을 만들어내놓은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전 세계를 통해서 그를 유명인사 반열에 올려놓은 숱한 무용담들을 검토해보노라면, 이 셜록 홈스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기보다는, 혹시 어느 대단한 소설가, 이를테면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 즉 전설로만 떠도는 영웅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름 바꾸기를 하기 전에 쓰여진 이 대목에서3), 르블랑은 시침 뚝 뗀 채,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에다 셜록 홈스를 빗댐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현실성을 지닌 인물로 살려놓는다.

 

뤼팽에게는 늘 그러하듯, 여기에서 자존심이란 단순한 에고이즘 같은 것이 아니다. ‘뤼팽의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주제로 했던 아르센 뤼팽의 고백해설부터 시작해서 도둑으로의 정체성복합적인 퍼스낼리티그리고 아이러니 분석야심의 매커니즘에 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강조해온 바, 존재의 한계성에 대한 부단한 도전과 극복의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뤼팽의 자존심인 것이다. ‘흥분되고 즐거운’, 그래서 자존심이 사는 기분이란 곧 덧없는 그림자 같은 개체적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힘차게 약동하는 존재의식을 의미한다. 이때 셜록 홈스라는 상대는 뤼팽 자신의 닮은꼴’, 즉 완벽한 맞수로서 적극적으로 기능한다. 위의 대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대를 누르고 이기는 데에서 기분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와 대결을 벌인다는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기분’, 즉 존재의식이 한껏 고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깊이와 규모에 필적하는 상태, 서로의 능력이 너무도 막상막하(莫上莫下)여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동질감(同質感)까지 느끼고야 마는 맞수끼리의 대결이란,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엄청난 의의를 가지는 법이다.

 

이보시오, 무슈 뤼팽, 이 세상에는 뭘 어찌 한다 한들 내가 절대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딱 둘 있소. 우선 나 자신과 바로 당신이오.”

치열한 대결을 무승부로 끝낸 후 도버 해협을 건너는 선상(船上)에서 서로 악수하며 홈스가 뤼팽에게 건넨 이 말4)은 두 영웅들이 서로에게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동질감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 상대끼리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무의미하며, 대결 그 자체가 서로의 존재를 극대화시켜줄 뿐이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고.

2) 모리스 르블랑 전기(Maurice Leblanc, Arsene Lupin malgre ha)Jacques Derouard, Sequier. 1989. p. 139.

3) “금발의 귀부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pp. 92~93

4) 같은 책, p.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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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단편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아가사 크리스티도 단편을 읽다 보면 마치 가장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골라먹는 느낌이 들었다. 모리스 르블랑도 마찬가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고명이 두툼한 카나페를 맛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덟 개의 단편 모음집, 제목에도 들어가는 숫자 8,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빛의 표지. 그야말로 쾌남 뤼팽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장편 소설에서 뤼팽은 감정에 허우적거려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하고,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며, 특유의 능글맞음과 여유만만한 모습이 무너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상화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유머까지. 원래 연작 소설을 좋아하는 내 취향 저격 작품집이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라는 매우 독특하고도 감각적인 작품을 통해서 또다시 예전의 경쾌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여덟 편의 단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되기 여드레 전부터 수수께끼 같은 괘종시계의 그림을 게재함으로써 사전에 독자들의 지대한 호기심을 유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813의 비밀」 이후 지독스러운 악몽처럼 전개되던 전시상황 속의 아르센 뤼팽 모험담은 이제 그 처절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일신해서,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추리소설의 본령으로 돌아온 듯하다. '8'이라는 숫자가 하나의 절묘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가운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결합된 이 작품은 특히 아르센 뤼팽과 여성의 미묘한 줄다리기식 감정 게임이 참신한 감상거리이며, 추리소설 작가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심리주의 작가로서의 모리스 르블랑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秀作)이 아닐 수 없다. 이 번을 포함하여 두 차례 걸친 해설은 아르센 뤼팽의 적수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뤼팽 모험담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결구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이제부터 제시될 여덟 가지 사건들은 옛날에 아르센 뤼팽이 자기 친구인 레닌 공작이 겪은 일이라며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거지, 단골 수법 등, 그 무엇을 따져봐도 친구 사이라는 두 인물을 서로 혼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긴 아르센 뤼팽이라는 사람은 워낙 엉뚱한 데가 있어서 실제로 자기가 나서지 않은 일을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떠벌릴 뿐만 아니라, 정작 자기가 저지른 일도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가 있는 위인이다. 아무튼 그 점은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1. 망루 꼭대기에서(석 달 후 12월 5일->9월 5일)

 

"저런, 가끔은 그래도 생각이 변하는 것 같은데요......다른 곳에 있어야 하면서도 지금 바로 이곳에 와 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문득 당혹한 기색이었다. 기세 등등하던 역심(逆心)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마치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사람, 기상천외한 행동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보다 관대하며 사심이 없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놀란 눈길로 레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남자가 별 계산도, 흑심도 없이 행동하고 있으며, 자기 말마따나 길을 잘못 든 여인을 향한 그저 친절한 신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스물여섯 살이고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당신은 대글로슈 백작의 의붓조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데 그 조카라는 사람이 약간 제정신이 아닌 자라 감금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당신은 이혼도 못하게 된 데에다, 지참금을 남편이 죄다 써버려서 삼촌인 백작에게 얹혀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백작 부부가 워낙 사이가 안 좋아, 환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입니다. 사실 백작에겐 전처가 있었는데, 그만 지금 부인의 첫 남편과 눈이 맞아 달아나버리고 말았지요. 결국 둘 다 버림 받은 남녀가 홧김에 서로 합치게 되었지만, 그런 억지 결합 속에서는 원한과 환멸밖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여파에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열두 달에서 열한 달가랴은 외롭고 갑갑하며 따분하기만 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한테 홀딱 빠진 무슈 로시니가 나타납니다. 그는 당신에게 도피할 것을 제안했지요. 물론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권태의 연속인 삶, 젊은 날은 하루 하루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뭔가 새롭고 신나는 일에 대한 열망이 당신을 슬슬 부추깁니다......결국 당신은 구애자를 따돌리는 건 나중 일로 미루더라도 일단 그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니다. 또한 이 정도까지 소동을 부리고 나면 삼촌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마땅한 계산을 치르고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도 한몫을 했지요.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자,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슈 로시니의 품에 안길 것이냐, 아니면 나를 믿을 것이냐......"

 

마침내 남자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보니 의심이 드는 모양이로군요? '도대체 이 모험 애호가가 날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걸까? 보아하니 내가 마음에 들긴 드는 모양인데, 조만간 수상쩍은 사례(謝禮)라도 하라고 안 할지 몰라' 뭐 이런 생각을 굴리는 것 아닙니까? 하긴 무리도 아니지요......좋습니다! 우리 사이에 정확한 계약을 선행하는 게 좋겠어요."

 

"첫 모험을 한 오늘 알랭그르의 괘종시계가 여덟 번 종소리를 울렸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나의 판결이라고 보고, 예컨대 앞으로 한 석 달 동안 일곱 차례를 더 멋진 모험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여덟번째 모험에 이르게 되면 그때 가서 당신이 내게 허락하기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뭘 말인가요?"

하지만 남자는 은근슬쩍 요점을 피해갔다.

"중요한 건 말입니다, 만약 도중에 내가 당신을 재미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 경우 언제든 당신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경우 그러니까 모두 여덟 차례의 모험을 내가 당신과 더불어 완수하게 되는 석 달 후 12월 5일 그 괘종시계가 여덟 번의 종소리를 울리는 바로 그 순간-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 낡은 구리 진자는 이제 멈추지 않을 겁니다-당신은 내게 허락하는 겁니다......"

"대체 뭘 말이에요?"

여자는 궁금해 안달이 난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대가로 요구하려는 그 앙증맞은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지금쯤 여자도 그 정도 속내쯤이야 눈치챘으리라는 것을 남자는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노골적인 말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바라보는 즐거움 하나만 허락하는 걸로 충분합니다......그러니 제안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자, 어서 말해보시죠. 당신이 요구하는 건 무엇입니까?"

남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음을 간파한 오르탕스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블라우스 깃을 여미는 버클 하나를 찾아주는 일이에요. 금세공 틀 속에 박힌 홍옥수(紅玉髓)로 된 골동품인데, 어머니가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걸 다시 저한테 물려주신 거지요. 그것으로 인해 두 분 다 행복하셨고, 나 역시 행복했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랍니다 한데 그게 그만 보관함에서 없어지고 나서는 불행하게 되었어요. 그걸 좀 찾아주세요, 수호천사님......"

"그 버클이 언제 없어진 겁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그러니까 그게......한 7년인가......아니, 8년......9년인가......잘 모르겠네요......어디서 잊어버렸는지도......어떻게 없어졌는지도......아무래도 도통 모르겠어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행복할 것입니다."


2. 물병(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9월 9일)

 

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 오르탕스 다니엘은 불로뉴 숲에서 레닌 공작과 만날 약속을 했다. 눈부신 아침, 두 사람은 앵페리알 레스토랑 테라스의 약간 동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는 매력이 넘쳐났고 쾌활하기 그지없었으며, 그저 사는 즐거움에 온통 들떠 있었다.

 

"자넨 배가 볼록한 물병을 창가에 슬쩍 얹어놓았지. 결국 그 크리스털제(製) 물병이 렌즈 역할을 했고, 창문으로 비쳐드는 태양광선을 모아다가 적절하게 준비해둔 상자와 박엽지 더미로 쏘아보내준 거지. 한 10분 있으니까 불이 화르륵 붙은 거고. 정말 기발한 발상 아니겠어? 세상 내로라 하는 발명품들이 거의 그렇듯, 사소한 우연 속에서 탄생한 걸작 아니냐구! 그야말로 뉴턴의 사과라고나 할까?......언젠가 물이 가득한 물병을 통과한 햇살이 이끼 언저리라든가 성냥의 유황 덩어리에 맞아떨어져 불꽃이 이는 걸 목격했겠지. 바로 좀 전에도 문득 햇살이 무척 따사로운 걸 느끼자마자 자네는 속으로 '옳다구나!' 한 거야. 그 즉시 물병을 적당한 장소에 갖다놓은 거고. 정말이지 놀라운 재치였네, 가스통!"

 

"당신은 안 가세요?"

오르탕스가 물었다.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아주 급한 약속들이지요......"

"그래도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일도 크나큰 즐거움일 텐데......"

"그래봤자 곧장 지겨워질 즐거움일 뿐이오.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건 늘 끝없이 도전하는 가운데 쟁취되는 것이죠. 반면 한 번 쟁취하고 나면 어떤 즐거움도 시시해지기 마련이지......"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기막힌 선행(善行)을 그저 스포츠처럼, 그것도 기발한 재주로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이 묘한 사내를 향해 그녀는 찬탄의 말을 아끼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모든 사건들이 한없이 놀라울 뿐. 치밀어 올라오는 강렬한 감정이 목을 메이게 하고, 눈에는 눈물만 그렁그렁 고이게 할 따름이었다.

그런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조용히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이미 그걸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소......"


3. 테레즈와 제르맨(10월 2일)

 

10월 2일 아침, 워낙 그윽한 늦가을 날시로 인해서 에트르타의 별장에 늦게까지 처진 몇몇 가족들은 어슬렁거리며 해변으로 내려왔다. 이 지역 풍광(風光)에 아주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는 창공의 부드럽고 창백한 빛깔과 대기 중에 떠도는 아스라한 기운만 아니라면, 수평선에 드리워진 구름들과 에트르타의 절벽들에 에워싸인 저 고요한 바다를 바위들의 병풍을 둘러친 하나의 잔잔한 산정호수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창공의 푸른빛은 좀더 짙어졌고, 바다는 보다 평온해졋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한참만에 레닌이 조용히 물었다.

"만약 내가 어떤 음모에 휘말려 곤욕을 치를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당신을 믿고 의지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를 끝내 구해줄 거라는 데엔 눈곱만큼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 어떤 어려운 장애가 있어도 말이죠. 당신의 의지력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레닌은 나지막이 이렇게 화답했다.

"당신을 즐겁게 해주려는 나의 욕망에 끝이 없는 것이라오......"


4. 영화 속의 단서(9월 18일->3주->10월 9일 경)

 

로즈-앙드레는 유연한 연기력에 호감 어린 마스크를 갖춘 미녀 배우였는데, 어쩐 일인지 연극무대에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로 스크린에 대뷔한 처지였다(이 여배우는 여러 모로, 모리스 르블랑의 누이동생이자 배우였던 조르제트를 모델로 했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모리스 르블랑 연보' 참조/역주). 바로 데뷔하던 날 저녁, 자체만으로는 별로인 영화 "행복한 공주"를, 그녀는 활기 넘치는 연기와 강렬한 미모로 무척이나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자의 이름은 달브레크(역시 당시 르블랑의 여동생 조르제트의 연인이었던 로제 카를이 모델이다/역주). 항상 동료 배우들로부터 동떨어져 지내는 과묵하고 내성적인 괴짜라고 하더군요. 그 자가 당신 동생에게 특별히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더군요. 한데 아까 본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그의 연기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 다음 새 영화에도 기용했다고 합니다. 최근까지 파리 근교에서 영화 촬영에 전념했다고 하네요. 한데, 비교적 그의 연기에 다들 만족하고 있던 차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돌발했다고 합니다. 9월 18일 금요일 아침, 소시에테 사(社)의 창고문을 억지로 뜯어 연 그는 으리으리한 리무진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는데, 그 전에 이미 2만 5000프랑의 공금을 깨끗이 털었다지 뭡니까! 회사측은 즉시 고발을 단행했고, 도난 당한 리무진은 드뢰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월요일 아침, 뱃사공은 자기 배 한 척이 사라진 것을 꺠달았다는 것이다. 그 배는 한 5리 정도 더 내려가서 기슭의 개흙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여름 영화 촬영이 있었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로군요?"

"그런 셈이죠."

 

순간 오르탕스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온몸은 쩌릿한 전율로 부르르 떨렸다. 방금 넌지시 흘린 말이야말로, 초기에는 비교적 허술했지만, 함께 불안과 열정 속에 여러 일을 겪는 가운데 차츰 둘 사이에서 돈독하게 맺어지고 있는 애정의 끈에 관해서 처음으로 노골적인 언급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모든 사건들을 제 마음대로 통제하고, 적이든 동지이든 상대의 운명을 항상 가지고 노는 듯한 이 비범한 사내 곁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요컨대, 이 남자는 사람을 매혹을 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품게 만들엇다. 그녀의 정신 속에서 세르주 레닌은 일종의 주인(主人)처럼 여겨졌고, 그 앞에서 스스로 방어해야만 할 적(敵)임과 동시에, 보다 자주 골칫덩이면서도 지극히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친구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5. 장-루이 사건

 

워낙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라 오르탕스는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은 그저 한가로이 거닐면서 센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 여인의 실루엣이 다리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허공 중에 몸을 날렸던 것이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이는 가운데 오르탕스는 레닌의 팔뚝을 와락 부여잡고 말했다.

"설마 뛰어들려는 건 아니죠?......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눈 깜짝할 새였다. 남자의 윗도리가 여자 손에 붙들린 채 훌러덩 벗겨지는가 싶더니, 레닌의 몸뚱어리가 단번에 도약을 했고 그 다음...... 그 다음에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로부터 3분 뒤, 오르탕스는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휩쓸린 채 강기슭까지 내려가 있었다. 곧이어 창백한 얼굴에 흠뻑 젖은 검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웬 여인을 안고 제방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레닌의 모습이 보였다.

 

"어휴! 난데없이 멱을 감다니! 이런 경우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튼 누가 물에 뛰어드는 걸 보면 덮어놓고 나 역시 뛰어들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아마 우리 조상 중에 사람 구하려다 물귀신 된 구조요원이라도 있었나봐요......"

 

그러지 않아도 난데없는 불청객에 어안이 벙벙하던 장-루이는 주느비에브의 이름을 듣자 완전히 평정을 잃는 눈치였다. 자신이 뭐라고 내뱉는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레닌의 깍듯한 말투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 그 역시 주섬주섬 소개를 한다는 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흘리는 것이었다.

"여기는 제 어머니 되시는 마담 도르미발이고......이쪽은 마담 보부아, 제 어머니이시고......"

순간 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레닌은 산뜻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오르탕스는 마담 도르미발과 마담 보부아 둘 중 누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자로고 운명이 그처럼 교묘하게 뒤틀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연과 우연이 그런 식으로까지 노골적으로 겹치는 경우란 드문 법이에요! 하필 의사와 하인, 하녀 모두가 집을 비운 날 밤, 두 여성이 거의 동시에 진통을 느끼고, 또한 사내아이를 같은 시간대에 분만한다는 것부터가 가능성이 희박한 우연입니다. 굳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고를 덧붙일 필요도 없어요! 공교롭게도 그 순간 램프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가 잦아들었다는 얘기는 아예 관두는 게 낫단 말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산파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무를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 처리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아무리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당황한다 해도, 직업상의 본능적 감각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최소한 두 아기를 놓아둘 때 서로 구분이 될 만한 위치와 자리를 염두에 두기 마련인 겁니다. 설사 별도의 표식 없이 나란히 눕혀두었다 해도, 최소한 좌우측의 구별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서로 엇비슷한 배내옷으로 둘둘 말았다 해도, 미세한 차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굳이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만한 기억속의 뭔가가 있었을 거예요. 신생아를 혼동한다구요? 난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판별이 불가능했다구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소설 속이라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온갖 황당무계한 일들을 상상할 수 있고, 별의별 모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하지만 현실의 한복판에서는 항상 일정한 고정점이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스스로 일정한 논리적 법칙에 의거해 자연스레 일어나고 또 저무는 법이랍니다. 따라서 나는 부시뇰 간호사가 결코 두 신생아를 혼동할 리가 없었노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도 장-루이가 정녕 누구의 자식인지는......"

레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막았다.

"맙소사, 아직도 그 케케묵은 이야기로군요! 이젠 다 끝난 얘기올시다! 그만, 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려, 어미가 둘인 사내의 이야기는 이제 소인(小人)도 별 흥미가 없나이다!"

상대가 어찌나 장난스레 시침을 떼며 익살맞은 말투로 말하는지, 오르탕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훨씬 좋군요! 그래요, 그렇게 실컷 웃는 겁니다!......"

레닌도 지그시 웃으며 덧붙였다.

"......인간이란 눈물을 통해서보다는 웃음 속에서 세상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활짝 웃어야만 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데요?"

"어여쁜 치아를 가졌거든......"

 

6. 도끼를 든 귀부인(10월 18일)

 

이처럼 난감한 문제를 둘러싼 떠들썩한 논란은 논리적으로 따져 새로운 참극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10월 18일 직전까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레닌 공작과 오르탕스가 저녁에 만날 약속을 정하느라 전화통화를 하던 당일 아침에도, 자연스레 최근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을 거론하게 되었다.

"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길을 걷다가 도끼를 든 귀부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작정 맞은편 보도로 피하세요."

반(半)농담조로 호들갑을 떠는 레닌에게 오르탕스도 장난스레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그 아리따운 귀부인께서 끝내 나를 납치해버리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 길가에다 흰색 조약돌이라도 뿌려놓으세요. 그리고 최후의 도끼날이 번뜩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이렇게 중얼거리세요.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가 나를 구해줄 테니까......'오, 물론 여기서 '그'는 바로 나이죠. 아무튼 행운을 빕니다. 이따 저녁 때 봐요, 아가씨."

 

레닌은 몹시 괴로웠다.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력한 감정이 그와 오르탕스 사이를 맺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호기심과 욕망, 단순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호하고 즐겁게 해주면서 삶의 여유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은, 이제 글자 그대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두 사람은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제3자의 문제를 둘러싼 모험의 시간들만을 함께 해왔기에, 둘 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자, 레닌은 오르탕스가 삶에서 차지한 자리를 새삼 실감했으며, 그녀가 어딘가에 갖혀서 고통받고 있는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H 자(字)로 시작하면서 모두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의 소유자를 희생 제물로 고른 겁니다! 어때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름의 글자수가 모두 여덟인 데다, 첫 글자 역시 알파벳의 여덟번째 글자인 H자이고, 나아가 그 '8'이라는 문제의 숫자 또한 H로 시작하는 단어라 이겁니다!(프랑스어에서 8은 huit[위트]로 읽는다/역주) 결국 항상 H자가 문제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더군다나 흉기로 사용된 것 역시 도끼(프랑스어로 hache[아쉬]이다/역주)가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오르탕스는 무사했다.

부랴부랴 결박한 끈부터 풀었고 답답한 재갈을 빼주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늙은 유모로부터 레닌은 얼른 등불을 받아들고 오르탕스를 비춰보았다.

순간 레닌은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해쓱해진 얼굴에 신열로 이글거리는 퀭한 눈망울을 하고서도 오르탕스 다니엘은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단 한 시도 좌절하지 않고서 말이에요......당신을 믿었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여자는 금세 정신을 잃었다.

 

"끔찍한 사건이라니, 그게 뭔데요?"

여자는 해맑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레닌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일견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오르탕스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했었고, 아직까지고 자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경에 빠졌었는지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소위 도끼를 든 귀부인과 스스로 방금 겪은 모험을 서로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레닌은 언젠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줄 날이 오겠지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르탕스 다니엘은 당분간 조용히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프랑스 한복판에 위치한 바시쿠르라는 마을 근방 친척 집으로 떠나게 되었다.


7. 눈 위의 발자국(11월 14일)

 

바시쿠르 경유, 라 롱시에르발(發)

11월 14일

파리 시, 오스망 대로, 레닌 공작 귀하

 

소중한 친구에게

 

아마 지금쯤 당신은 나를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곳에 당도한 지 벌써 3주가 다 되어가는데 편지 한 장 없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적어보내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얼마나 끔찍한 죽음의 위협에서 끄집어내주었는지, 그 무시무시한 사건의 비밀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깨닫고 있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절대로 조용하게 홀로 지낼 필요가 있다는 걸요......만약 파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래서 당신과 더불어 계속 치열한 모험에 뛰어들었다면 어떘을까요? 오, 큰일날 소리지요! 이젠 지긋지긋하답니다! 타인이 치르는 모험은 무척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자신이 직접 겪어서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라면......아, 정말이지 끔찍해요! 난 아마 최근에 겪은 그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좋았어, 썩 잘된 거야. 우리의 요지경 모험을 더 이상 진행하기가 싫어졌다는 거잖아. 이번만 해도 일곱번째인 데다, 바로 그 다음이 계약상 특별한 의미를 띠는 여덟번째 모험이니 더 나아가기가 싫은 게 당연하지. 사실 내심은 무지하게 바라면서도......꺼려지는 거야......"

그는 손바닥을 비벼대면서 생각했다. 이 편지는 여자가 서서히 레닌의 영향력에 사로잡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중한 증거인 셈이다. 그녀가 이 남자에 대해 찬탄과 믿음, 불안과 두려움,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런 애정이 가미된,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상태에 빠져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일종의 동지애(同志愛)로써 모험의 동반자 노릇을 해왔기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신의 감정에 대해 불안한 기분이 들었고, 약간의 새침기가 섞인 수줍음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것일 터.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레닌은 들판으로 걸어나와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새하얗게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에는 눈길 하나 던지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다시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주변을 에워싸고 사건 얘기로 떠들썩한 주막의 손님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2층 자기 숙소로 올라가 꽤 오랜 시간 잠을 청했고, 문득 노크 소리에 깨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다......당신이......"

어리둥절 중얼거리는 레닌 앞에는 오르탕스가 조용히 서 있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지그시 맞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어떤 생각도 말도 이 재회의 기쁨에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닌이었다.

"내가 잘 온 거죠?"

여자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그래요......실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마티아스 드 고른은 잘못한 게 없는 걸요. 그저 우물 주위로 발을 구르며 다녔고, 자기 것이 아닌 권총을 허공에다 세 발 쏜 다음 멀치감치 내던지고 나서 자기 아버지 집으로 뒷걸음질쳐서 얌전히 걸어간 것뿐이에요. 딱히 법적으로 나무랄 일을 저지른 건 아니랍니다. 그를 잡아서 무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6만 프랑이요? 글쎄요, 내 생각에는 무슈 비냘도 그럴 마음이 없을 것 같은데요......별달리 고발할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무슈 비냘?"

 

잠시 후 오르탕스를 데리러 저택 안으로 돌아왔을 떄, 레닌은 여자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장 그녀의 사촌인 에르믈랭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오르탕스는,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를 했으며,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만 싶다는 말을 대신 전하도록 아예 사촌 언니에게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레닌은 돌아 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았어!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군......그녀는 분명 나를 피하기 시작한 거야......그럼 결국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서서히 결말이 가까워오는구만......'


8. 메르쿠리우스 신상(11월 30일)

마담 다니엘 귀하

라 롱시에르, 바시쿠르 경유

11월 30일

 

너무도 소중한 벗에게

 

또다시 2주가 지나도록 편지가 없군요. 이제는 우리의 협조관계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저 12월 5일 이전에 편지를 받으리라는 기대를 더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래요. 그래야 이미 당신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이 계약에거 당신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나로서는 지난 일곱 차례의 전투 모두, 우리가 함께 일궈낸 찬란한 승전행진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기쁨과 열광의 뜻깊은 경험이었노라고 자평(自評)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나는 인생을 좀더 활기차고 살맛 당기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즐겁게 바라보며 살 수 있었소.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너무도 강렬해서 차마 당신에게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저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싶다는 것말고는 진정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이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하는 걸 원하지 않게 되었어요. 나로 말하자면 '언제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아! 당신 참 그동안 짖궂게도 굴더군요! 아예 문을 닫아거는가 하면......편지 한 장 주지도 않고......정말이지 매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워한 줄 아십니까? 결국 나로서는 뭔가 대단한 수단을 모색해야만 했고, 엄청난 미끼로 당신을 유인해내야만 했답니다. 솔직히 내가 보낸 멋진 편지, 썩 괜찮았죠? 청색 드레스에, 세 갈래 골폴 가지라......그런 걸 어찌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다 더해 내가 직접 꾸며낸 몇 가지 수수께끼들도 살짝 첨가했죠. 일흔다섯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라든가, 은제 묵주를 돌리는 노파 등등 말입니다......어쨌든 당신을 보고 싶었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라 이겁니다!"

 

모든 모험은 이제 끝이 났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거라면, 그저 기대감만으로도 다른 모든 험난한 모험의 기억을 꺠끗이 지울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모험, 이 세상 모험 중에서도 가장 가슴 떨리고 감미로운, 가장 상찬(賞讚)할 만한 모험 말이다. 여자는 운명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온 마음을 열고 기꺼워하는 자세로......이유는 그녀 마음 속에도 어느덧 사랑의 기운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홍옥수 버클을 손에 쥐어주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잃었던 환희가 자신의 삶 속에 다시금 찾아 돌아온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6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上): 가니마르

 

추리문학의 기본 공식이 법(혹은 질서)의 수호자와 그것을 유린하는 범법자 사이의 대결 속에 존재한다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특징은 대개의 경우 그 대결의 주도권이 범법자 쪽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1905년 당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가 처음 이 세상에 나오면서 대중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엇던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1)

 

쥐스탱 가니마르(Justin Ganimard)는 1853년 생으로, 1874년 생인 아르센 뤼팽보다 무려 스물한 살이나 연배가 위인 인물이다. 그러나 '올리브 색깔의 프록코트 차림에 우산을 든' '키 작고 늙은 남자'라는 식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묘사를 동반하는 가니마르2)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형사'로서 아르센 뤼팽과 '파란만장한 사생결단'을 무수히 치러온 법질서의 대표자인 것만은 틀림없다.3) 뤼팽 시리즈 중 첫 작품인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와 비록 미완이지만 가장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모두, 뉴욕에 입항하는 선상(船上)에서 가니마르가 아르센 뤼팽을 붙잡는다는 테마로 장식되는 것을 볼 때, 가니마르라는 인물의 중요성은 아마 시리즈 전체에서 뤼팽 본인을 제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가니마르 형사반장은, 물론 불멸의 적수(敵手)이면서도, 실은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조연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다.

 

문제는 가니마르가 단순한 개체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기존 질서, 즉 그 '틀'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자칫 주인공의 무차별적 활약상만을 내세우는 낭만적인 3류 활극에 머물 수도 있었을 '뤼팽 대 가니마르'의 대결구도는 이로써 '개인 대 사회'의 갈등양상,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읽힐 수 있게 된다. 요컨대 19세기 말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에서 개인이 전체에 적극 귀속되던 양상을 과감히 탈피해, 개인의 자유와 의지, 그 변덕이 사회의 '틀'을 박차고 스스로를 주장하던 20세기 초의 상황이 그대로 구현되는 셈이다. '기상천외한 천재성'은 없지만 '관찰력이라든가 총명함, 꾸준한 면모' 등의 실증주의적 장점으로 무장된 가니마르의 완강한 손아귀를,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현대적 자유분방함의 화신인 뤼팽이 매번 따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설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조.

2) 같은 책, p.20 참조.

3) 같은 책, p.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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