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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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

이게 무슨 뜻일까? 제목만 들어서는 거리의 아이들과 같은 느낌인데?

 

부제: 천재들의 식탁.

동서고금의 천재들이 먹었던 음식이란 말인가?

 

책 표지의 설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속에는 먹을 것들이 풍성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대식가로, 그들은 종종 향연을 벌이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요리들을 앞에 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음식을 탐하는 먹보들이었다. 그건 단순히 식욕의 차원을 넘어 그들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누구는 훌륭한 레시피집을 남겼고 또 누구는 후세의 전기를 통하여 그 왕성한 식욕 상이 전해졌다. 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라블레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 책은 과거에 쓰여진 책을 읽는 것과 미지의 요리가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인생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한 평론가에 의해 쓰여진 실험보고서이다.

 

 

여기까지 보면 이 책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수아 라블레라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먹는 것에 대한 다양한 묘사로 요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천재들은 직접적으로 라블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 혹은 숭배나 찬탄으로 한 가지 이상의 일화가 있는 사람들로 그런 면에서 과연 라블레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평론가로, 음식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하는 사람이며, 실험보고서라는 것은 이 책의 예술가들이 그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방식으로 저자 스스로 맛을 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한 책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대가인 사람들이라면 특정 부분에 대한 자기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방법론이 있기 마련이며, 요리에도 예외는 없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본인만의 취향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다케미쓰 도루의 버섯 파스타 정도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정도일 것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서 저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다. 아마도 전문 요리사의 솜씨와 전문 사진 작가의 기술과 전문 편집자의 능력, 삼박자가 모두 맞았다고 생각되는데, 반면에 글은 또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은 몇 번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어떤 장은 한 번을 읽기에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책이<예술신초>라는 곳에 1년 정도 연재된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각 글마다 농밀함의 편차가 들쑥날쑥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저자가 책 뒤편에서 밝혔듯이 전적으로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개인의 취향이 크게 작용하여 연재된 음식 중 상당수가 돼지고기 요리였으며, 이 책만 하더라도 절반 정도의 예술가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라서, 일본 국민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 많다는 것. 즉, 상당히 편향되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다행이게도, 이 책을 읽은 바로 직후에 일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이라는 것과, 제한된 예산이라는 두 가지 제한 조건 속에서 효과적으로 메뉴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 덕분이었다는 사실. 물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겠지만, 쉽게 오기 힘든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미리 읽었던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음식들 덕에 먹고 싶은 요리를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만족했다는 것.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아오야마 뇌병원의 원장인 모키치는 환자를 봐야 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니 자연히 식사는 배달시켜 먹는 일이 많았고 음식은 당연히 '장어요리'였다. 심한 경우엔 내리 나흘을 장어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업무에서 해방되어 외식을 할 대도 역시 장어를 먹는다. 하지만 고급 요정은 아들의 상견례 자리 말고는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모키치는 병원 근방에 있는 미야마스자카를 내려가 도겐자카를 오르는 그 중간에 있는 하나비시라는 아주 소박한 장어 집을 즐겨 찾았는데 이 점포는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중략) 이윽고, 일본이 영미 열강과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면 느긋하게 장어집에서 가바야키(장어 꼬치구이)를 먹기는 힘들 테고 장어가 없으면 시를 지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가인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모키치가 즉흥적으로 대량의 통조림을 구입한 이유가 그런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학자다운 예방 차원에서 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일기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신중한 모키치는 시내에서 아직 장어를 사다 먹을 수 있는 동안에는 통조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중략) 모키치는 2년 후에 도쿄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때에도 대량의 통조림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장어 통조림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중략) 전자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니 찬밥과 통조림 속의 장어를 덥히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오차즈케처럼 뭔가 따뜻한 국물을 끼얹는 것이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아마도 차갑게 식은 밥에 장어 통조림만으로 밥을 먹는 건 너무도 비참해 역시 우유를 부어서 먹었나보다. 당연히 이 때의 우유는 따뜻하게 데운 것이어야만 한다. (중략)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늦게까지 진찰실에 틀어박혀 있던 모키치에게는 이 방법은 너무도 간편하면서도 장어를 먹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삽화를 통해 판단해 본 결과 모키치는 결코 미식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장어는 어느 강에서 나는 천연 장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양식 장어가 나돌 무렵에는 그걸로라도 만족하며 소박하게 기뻐하고 통조림이라고 해서 업신여긴 적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장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그것들을 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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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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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둘 다 김연수 작가의 책이고, 원래 나왔던 책의 10년 후, '+'를 붙여서 다시 나온 책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나중에 나온 책만 읽었더랬다.

 

처음 나왔던 책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 10년을 다룬 책이 다시 나왔다는 것은 많은 청춘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는 뜻이 아닐까? 당시 청춘들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닌 나이가 되었을 테고, 나도 몇 년 뒤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닐 테지만, 어쨌든 청춘의 끝무렵에 부지런히 두 책을, 출간된 순서를 바꾸어 읽었다. 순서대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김연수라는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을 테고, 또 나중에 나온 책이 먼저 나온 책의 일부를 소개한 뒤, 그에 대한 뒷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소감은, 기대에는 좀 못 미친다는 생각? 내가 이미 청춘의 한 복판을 지나 청춘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10년 후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서인지, 전체적인 책이 색깔로 비유하자면 채도가 낮다는 느낌이다. 10년 후에 나온 청춘의 문장들이 마치 청록색의 느낌이라면, 이 책은 회갈색 같다는 느낌? 뚜렷하게 남는 문장도, 무릎을 탁 치고 싶은 구절도 없다. 힘들었던 시간이었겠지만, 그 시간에 대한 서술은 희미하여 당시에 분위기나 저자의 심정이 솔직히 잘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청춘의 문장들'에서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도, '청춘'과 아귀가 딱 맞지 않고 약간 헐거운 문짝 같다는 느낌이다. 비슷한 책으로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이 있는데, 작가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편지의 내용과 소개되는 작품들이 잘 맞물려 공지영이 소개하는 그 책들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거나, 읽지 않아도 공지영이 인용한 몇 몇 문장들은 강하게 내 마음에 살아 있다. 좀 더 강렬한 책을 원했던 나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책이었다. 굳이 작가의 '청춘'을 이야기하면서 '문장'을 인용할 때는, 그 문장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점도가 있어야 하며, 당시 작가의 삶과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할 텐데, '청춘'과 '문장'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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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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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안에 시를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가르쳐 드리죠. 먼저 주제를 정하세요. 사랑도 좋고, 눈물도 좋고, 이별도 좋아요. 고등어도 좋고 햄버거도 좋고 샐비어도 좋아요. 우린 어떤 것이든 시로 쓸 수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쓰세요. 고등어를 먹는 저녁은 행복하다고 쓰세요. 그런 것도 시라는 걸 말씀드립니다(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다음 줄에는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방금 쓴 문장 말고 다르게 고등어에 대해서 써보세요. 그게 무엇이든 썼다면 그 밑에 다시 이렇게 쓰세요. "그게 아니라면" 다르게 계속 고등어에 대해서 쓰는 일, 그게 바로 시랍니다.

 

어린 시절, 고향의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줄지어 서 있던 가로수들이 생각납니다. 김천역에서 옛 시청이 있던 자리까지는 은행나무를, 그 너머로 아랫장터까지는 히말라야시다를 심어놓았죠. 그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죠. 오르막을 다 오르면 학교가 나왔습니다. 학교 앞에 서면 마치 국경에 선 것처럼 히말라야시다들이 서 있는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 히말라야시다들 위로 사람의 얼굴을 닮은 금오산이 멀리 보였는데, 그래서 그건 마치 큰바위얼굴을 연상시켰는데, 어린 내게 어떤 포부가 있었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생겼을 겁니다.

 

매년 시월이 되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는 <기적의 주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 축제는 식민지 시절 앙골라에서 끌려온 한 노예가 리마 근처 파차카밀리아 대농장의 오두막 벽에 그린 그리스도 그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리마에 가서 행렬의 맨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행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검은 그리스도거든요.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노예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경우든 흑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기자가 "닌텐도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코다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청춘의 가장 큰 고민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춘에 대한 무관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누구 하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으며, 젊을 때는 젊음을 모른다더니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랄 떄가 있어요. 언젠가 필리핀의 마닐라 뒷골목을 지나가는데 제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여름밤, 우리 동네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포르투갈의 리스본 거리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제과점 속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 집 뉴욕제과점과 거의 비슷했어요. 언젠가 연해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올려다본 밤하늘은 일곱 살 떄의 밤하늘 그대로였구요. 그런 식으로 이 지구 어딘가에, 아니 어쩌면 이 우주 어딘가에 제가 살아온 삶이 그대로 저장된 것은 아닐까요? 별이 뜨는 것을 볼 떄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가뭇없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구란 이토록 크고, 우주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게 아닐까요? 인류의 기억 전부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책에 실린 시들은 2009년 11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13개월 동안 내가 읽은 것들이다. <한국일보>에서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때는 고사할 생각이었다.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시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엇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무모한 자신감은 전적으로 그저 좋아서 매 순간 시를 노트에 적던 이십대 초반의 서너 해 덕분이었다. 그 시간들은 잘해봐야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을 뿐,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전적으로 무용한 시간으로 느껴졌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이지만 어쩌면 그로부터 십몇 년이 지나서 13개월 동안 시를 읽기 위해서 보낸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좋아서 읽는 그 모든 책들은 무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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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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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만큼은 이런 저런 서평을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책.

 

눈으로는 즐겁고 마음으로는 편안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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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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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스무 살 시절에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네요. 원하는 학과에도 진학하지 못했고, 연애는 대부분 지지부진, 미친 듯이 시를 썼지만 읽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 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어'와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아져'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그 사이에는 우연과 운 같은 게 숨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쓰는 일 뿐이에요. 그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만 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에요.

 

예를 들어 정신과 환자의 불안이 있어요. 앞에 의사가 있잖아요? 상담하면 이 의사가 뭘 물어보겠죠? 대답해야만 하는데, 환자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정신병이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의사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실 의사는 원하는 게 업을 수도 잇어요. 그렇지만 환자 쪽에서는 먼저 그가 원하는 걸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당할 때 제대로 대답하는 게 맞는지 불안해지죠.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이에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 여기서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이죠. 연애 초기에는 누구나 이런 신경증 환자죠. 하지만 신경증 환자들만이 현대문학을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음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1988년에 교보문고에 처음 갔는데, 그떄는 교보문고에 있는 책을 다 읽을 것 같았어요. 고 3이었거든요.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면 거기 꽂힌 음악도 모두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땐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탐닉했죠. 심지어는 빈둥거림까지도 탐닉했어요. 중년이 되면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러다보면 점점 고전 쪽으로 관심이 기울게 돼 있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해요. 말하자면 아는 대로 행동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해야만 하죠.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그건 의도하지 않는 변화죠.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쓴 소설이 그렇게 작용해서 누군가를 바꿀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의 의도도, 독자의 의도도 전혀 아닐 거예요. 불가항력적인 우연한 사건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글로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만, 제 글은 누군가를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개 우리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요.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었다는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실들이 갑자기 의미심장해지는 순간이 찾아오죠. 낙화시절이라는 말이 시어가 되는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되고요. 하지만 그것 역시 순간의 깨달음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아요. 이 봄에 제가 진짜 배우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일순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게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뭘 아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잊어버린다는 것, 언제라도 잊지 않는 것들만이 내가 아는 것이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애쓰는 봄이랄까요. 언제 어떤 순간에도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실을 잘 몰라요. 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매 순간 까먹거든요. 대개의 경우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잊지 않기 위해서, 예컨대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글은 쓰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사실을 늘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작가의 딜레마입니다. 글 쓰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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