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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꿈 그리고 존재
에반 톰슨 지음, 이성동.이은영 옮김 / 씨아이알(CIR) / 2017년 12월
평점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나인가
나는 책장을 펼쳤다. 나는 책을 읽었다. 긴 독서였다. 그리고 나는 책장을 덮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노트북을 열었고 다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모든 행위의 배후에 내가 있다. 곰곰이 회상해보건대 분명히 내가 했던 행위들이 맞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일들이 '나'의 행위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난 며칠간의 '나'는 모두 동일한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예컨대 그저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김치볶음밥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참치오므라이스를 더 좋아한다. 음식에 대한 서수적 선호도가 역전된 나는 진정 그 전과 '동일'한가? '선호도'를 넘어 종교, 신념, 삶에 대한 철학, 정의관, '자아에 관한 관념'까지 달라졌다면, '나'는 여전히 '나'인가?
자아탐구를 향한 인류의 여정
'나', 즉 '자아'에 관한 의문은 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치열하게 탐구되어 왔다. 그 탐구의 열망은 종교, 철학, 학문 등 직군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비로소 현대과학이 돋보기를 들고 나타났다. 정교한 관측기술을 바탕으로 실시간으로 두뇌의 활동을 관찰하며 '자아'와 '뇌'의 긴밀한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나'와 '의식'은 두뇌의 생물학적 작용에 따른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극단적 환원주의자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뇌'의 상태에 따라 구조적으로 특정지어지는 결과물에 불과한 것일까? 치열한 수행과 명상을 통해 깊은 의식의 세계를 직접 체험한 명상가들의 지혜는 뜬구름에 불과한 것일까? 탁월한 이성적 탐구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온 철학자들의 지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까?
명상과 과학의 만남
이 책 '각성, 꿈, 그리고 존재'는 여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로 '명상'과 '과학'의 만남이다. 고대의 지혜와 현대 과학의 통섭이다. 저자인 '에반 톰슨' 교수는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며, 주로 철학, 인지과학, 불교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나'라는 궁극의 키워드를 향하여 명상과 과학으로, 현상과 물질로, 상상과 실증으로 거침없이 탐구해 나간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한 탐구는 별개로 하더라도, 하나의 키워드를 향해 '이렇게 다양한 관점과 해석으로 접근할 수 있구나' 라는 '관점의 확장이 주는 가능성과 흥미'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얻었다.
명상의 효과에 대한 현대적 재발견
86 초점 주의 명상을 반복해서 수행하게 되면 많은 주의력 기술이 향상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종의 깨어있음 또는 각성인데, 이것은 산만해진 생각과 느낌에서도 주의하여 초점을 맞추는 것을 잃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산만한 것에 소라집히지 않고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능력이다. 세 번째는 주의력을 선택된 초점에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들을 발달시키게 되면 유연한 주의력을 획득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예민한 능력을 키울 수 있다.
(...)
열린 자각 명상은 자각의 자각, 또는 심리학자들이 메타 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훈련한다. 열린 자각 명상에서는 메타자각이 사고, 감정, 감각을 목격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그 사고, 감정, 감각들은 순간순간 일어나는데, 그 성질들을 관찰한다. 이런 수행 스타일은 경험의 묵시적 측면, 즉 순간순간 자각의 생생함 정도라든가 일시적인 생각과 감정이 전형적으로 주의를 사로잡고 여러 생각과 습관적인 감정 반응을 자극하는 방식을 아주 예리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는 감각, 사고, 감정, 기억을 동일시하는 습관이 어떻게 자아감을 형성하게 되는지를 배우게 된다.
흔하게 알려진 대표적 불교 명상 방법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있다. 이는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 '초점 주의 명상'과 '열린 자각 명상'으로 재해석되었다. 전자의 경우 하나의 대상에 또렷한 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주의력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주의의 '닻'으로 '호흡'이나 '만트라'가 활용된다. 후자의 경우는 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 '감정', '감각'들을 알아차리고 비판단적으로 응시하며 흘려보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고의 패턴이 이러한 요소들에 '이끌려'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또한 주의의 '훈련'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녁무렵 드라마를 보던 중, 주인공이 족발을 시켜먹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의 마음에도 '족발에 대한 생각'과 '족발을 먹고싶다는 감정'과 '과거 먹었던 족발의 달콤한 추억'이 떠오르며 어느새 다어이트중임을 잊은 채 배달어플을 실행시키게 되는 것은 일반적인 패턴이다. 하지만 '족발생각'과 '족발감정'을 일시적으로 떠오르며 사라지는 '상념'으로 알아차린다면 상황을 다르게 흘러가도록 만들 수 있다. 조금 전까지 '족발을 먹고싶은 나'로서 '나'와 '족발'이 하나였다면, 대상을 알아차리고 비판단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족발생각'이 적어도 '나'가 아닌 다룰 수 있는 '대상'임을 자각할 수 있다. 또한 TV라는 조건에 따라 나타났으며 또 다른 조건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지혜'를 통해 삶의 주도권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이 나에게 선물한 내면의 힘
나의 경우 '인터넷 서핑'으로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지식을 넓히며 배움을 얻으며 가치있게 활용할 때도 있지만, 굳이 필요가 없거나 시급하지 않은 신변잡기식 정보에 이끌려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잠깐'만 접속하고 돌아온다는 것이 어느새 훌쩍 시간을 흐르게 하며 '해야 할'일과 '하고싶은 일'의 기회를 빼앗아가기 일쑤였다. 어러한 문제를 개선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앞서의 '열린 자각 명상', 다른 이름으로 '마음챙김'과 '위빠사나'라고 불리는 명상이다. 나는 시급하지 않은 뉴스를 읽는것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시간을 빼앗겼을까? 평온한 마음으로 '알아차림'한 결과 그것이 '스트레스'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도피하고자 '단기적 자극'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패턴'화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도피-자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각 구간에 한결 기민하게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트레스'라는 단서를 알아차림으로써 '스트레스를 받은 나'가 아닌, '스트레스'를 알아차리는 '나'로서, 삶의 주도권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122 초점 주의 명상과 열린 자각 명상은 뇌의 주의처리 과정을 증진시키고, 주의 요구 지각 과제의 수행력을 향상시킨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명상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해준다.
이 책에는 명상이 주는 인지적 효능에 관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또한 그 원리와 과정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과학적 탐구도 부연한다. 나아가 '자아와 의식은 뇌가 창조한 환상일 뿐'이라는 '극단적 환원론'에 맞서 '명상을 통한 체험'이라는 '뇌현상학적 탐구'를 강조한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명상도, '지혜의 넓이'와 '체험의 깊이'가 더욱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종교적 지혜에 대한 과학적 재해석
540 내가 언급한 생물학적 관점은 고대 불교의 개념인 오온(색, 수, 상, 행, 식)에 새로운 이해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온은 다섯 종류의 기본 정신물리적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감수능력이 있는 존재 또는 개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런 네 가지 온(색, 수, 상, 행)에 속하는 모든 정신물리적 활동들은 내외수용 감각 또는 성찰이나 기억과 같은 심적 자각을 통해서 파악된 어떤 것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조건 짓기도 하고 그런 자각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자각이 다섯번째 온인 식온에 해당한다.
긴 독서의 압권은 불교의 '오온'을 생물학적으로 재해석한 파트였다. 오온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기본적 구성 요소로서 형태, 느낌, 지각, 성형, 의식으로 열거된다. 이는 근대 과학의 도움이 전혀 없이, 오로지 내적 성찰에 의해서 정립된 지혜다. 그런데 이를 현대의 과학적 지식들을 바탕으로, 특히 생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이 '오온'을 해석하며 지지한다. 이에 앞서 '아비달마'에서 제시된 '마음의 한 순간'으로서의 '찰나'인 1/65초를 실험심리학적으로 측정해봤던 실험과 함께, 현상학적 지혜를 과학적 탐구로 재해석했던 많은 부분들이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평가절하하며 살았는가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
521 자아는 하나의 존재이거나 개체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발제하여 발생한 것이다.
(...)
내가 자아를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자아가 '나-됨'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저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를 부정한다. 또한 자아가 고정불변의 실체라는 견해 또한 지지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자아는 '과정'이다. '나-됨'의 과정이다. '나'는 그 모든 순간속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와 '아비달마'와 '철학'과 '명상'과 '뇌과학'을 넘나드는 긴 여정은 그의 견해에 대한 충분한 지지의 믿음을 제공했다. 그래서 나는 열린 마음으로 저자의 탁월한 견해를 수용했다. 다만 그것을 확신하지는 않는다. 더 열린 마음으로, 자아의 물질적 기반을 잃게되는 날까지 자아탐구의 여정을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저자도 그러한 태도를 지지하리라 믿는다.
존재를 넘어 창조의 놀이를 향하여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41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니체가 말했던 세계를 상실한 '자'와 세계를 획득한 '자'는 과연 동일한 '자'였을까?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서의 '자아'와 '위버멘쉬'로서의 '자아'는 과연 동일한 '자아'였을까? 그가 말했던 '순진무구의 망각'은 '자아에 대한 망각'이요,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자아'로서의 삶이요, '놀이'는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신선한 긍정의 운동이 아니었을까?
나는 책장을 펼쳤다. 나는 책장을 덮었다. 책이라는 교량을 건너온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야? 소리가 들려온다. 비로소 '놀이'의 시간이다.
[인용]
44 붓다는 유명한 비유에서 명색과 의식이 서로 의지한다는 것을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를 지탱하는 것에 비유한다. "벗이여, 그렇다면 비유를 들겠다. ... 예를 들어 두 갈대 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난다."
118 더 놀라운 점은 티베트 승려의 감마 진동수 패턴이 특히 강하고 잘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마 뇌파의 크기(진동의 진폭)는 이전에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이런 빠른 진동수의 위상은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다.
176 자각몽을 꾼다는 것은 더 심오한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나의' 자각에 대해 말할 때, 정확하게 누가 이 자아인가? 내가 "나는 꿈꾸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라고 말할 때, 누가 '나'인가? 내가 '나의' 부분적 꿈 조절을 서술할 때, 누가 행위자 또는 조절자인가?
518 단일한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것으로부터 사람, 행위자, 주체가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허무주의자 또는 단멸론자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오늘날의 뇌과학자와 뇌철학자에게서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