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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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부의 참맛과 깨달음의 기쁨을 가르쳐 준 책!
 
난 공부를 몰라서 못했다. 태어난 줄도 모르고 어느 순간부터 있어 왔음을 알았고, 학교를 들어가라고 해서 또래의 아이들이 그득한 맛에 학교를 다녔다. 등교시간은 남들보다 좀 이른 시간에 했는데, 어제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 책상자리의 서랍은 교과서로, 책가방엔 전과목 노트와 아이들과 놀 꺼리들로 가득했다. 내 방의 책상엔 앉은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할 말이 없다. 수업시간에 교실에 앉아있고,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는 글자들을 옮기면 그게 공부인 줄 알았다. 우연한 기회에 '공부'란 걸 알게 되고 늦게나마 부랴부랴 공부해서 남들처럼 학교를 다녔고, 무사히 대학까지 마쳤다. 그리고 이젠 나이가 훌쩍 넘은 아저씨로 살고 있다. 아저씨가 된 지금도 공부를 모르고 있는 듯하다. 
 
 공부工夫. 학문이나 기술을 익히는 뜻을 지닌 이 말이 화두가 된 것은 사회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상사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월급날을 위해, 그리고 얼마 안남은 휴가를 위해 하루 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생활이 지긋지긋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화두로 고민하던 때에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은 '내가 갈 길을 알고, 그것을 위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보내는 하루하루는  자신의 길을 향해 '공부'하는 삶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정말 늦은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랴부랴(중학생 때의 부랴부랴와는 차원이 다른)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 쫓아다녔다. 숨이 턱에 찰 때가 되서야 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다.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갈 길모르고, 갈 방법몰라 아직도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러다 만난 책이 [공부도둑]이다.
 
 고희를 둔 학자의 자기이야기를 만나기는 쉽지 않고, 게다가 솔직한 자기고백의 글을 만나기는 '선거철을 앞둔 정치인(그들이 정말 솔직히 고백했는지는 당신들만 알겠지만)'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다. 그것도 명망있는 선생님이 지금꺼 배우는 사람으로써 느꼈던 '앎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는 데야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하는 내가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문과출신 인데다 이공계학문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인 내게 저자가 펼치는 물리학과 온생명이론은 실로 어렵기 짝이 없는 '딴세상 이야기'여서 읽기가 여간 곤혹스러운게 아니었다. 하지만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의 구수한 이야기같아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들어도 모르는 물리학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학문에 대한 애정과 열의, 그리고 조금씩 알아가는 공부꾼의 희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70의 나이에도 자신의 어릴 적 시절부터 학창시절의 공부이야기를 이렇게 상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더듬을 수 있을 정도로 알차게 살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반면 절반치기 나이의 내가 추억하는 나의 어린시절은 알콜중독자가 느끼는 어제의 기억정도인데 말이다.
 
다소 지루할 듯 하지만 이야기 속에 숨은 가르침들은 의외로 많았다. 책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 당연히 책에는 좋은 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책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현재 나에게 맞는 책이냐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가 현재 알고 있는 수준에 맞추어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술한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간혹 내게 맞는 책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학문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책 냄새'를 잘 맡을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라고 말하며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서술된 책이 나에게 맞는 책이라고 알려주었다. 좋은 책에 대한 깔끔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깨달음의 속도에 따른 두 가지 정의'에 대해서는 " 지금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수많은 정보나 의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해의 틀 속에서 어느 순간 확연히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될 때 이를 '돈오頓悟(갑자기 깨달음)'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중간 중간에 비교적 소폭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이해의 폭을 점차 넓혀 나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 이를 '점오悟(점점 깊이 깨달음)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해의 틀이 연속적인 변화를 허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또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필요하다면서 "도대체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 바른 해답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 해답의 내용은 무엇인지 하는 것은 어쩌면 '깨달음'에 이른 후에야 알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다면 아예 깨달음에 들어설 가능성조차 없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밖에도 자신이 공부하는 장소 세군데를 알려주는가 하면, 가르치는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진정한 앎에 이르기 어렵다고도 충고한다. 가장 가슴 속에 와닿는 말은 책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그래도 행하는 것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스승의  손가락만 보는 경우'라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의 경우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도 마찬가지인데, 직접 확인하고 고민해서 나름의 깨달음이 생길 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70 평생을 '공부꾼'이 되어 살아온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배움과 앎, 그리고 깨달음의 차이를 이제야 알게 되었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도 '물리학자'가 될 것이며, 시인이 된다면 물리학자가 되고 난 이후에 할 것'이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신념을 갖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의 신념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행복한 마음으로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게 살았고, 행복하게 산 것이 아닐까? 이 책은 그의 '70년 공부꾼'으로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기록이다. 나도 이런 책 하나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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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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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느리게 읽기'가 최고의 독서법이라고 말하는건 지나친거 아냐? 
 
대학을 입학하기까지 운동과 놀이를 워낙 좋아하던 탓에 나는 '독서의 즐거움과 이로움'을 알지 못했다. 고교시절까지 내가 들여다 본 책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사전이 전부였다. 교과서 속에 들어있는 문학과 인문, 역사 그리고 예술등 그 많은 활자들을 쫓아가기도 바빴던 나에게 교과목 이외의 책을 읽은 것은 열 손가락 안에 들었을 정도였음을 고백한다. 소위 말하는 '지성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을 들어가면서는 '책을 읽지 않은 자신'이 대학에 들어갔다는 자기적 모순에 빠져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당면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은 박식해 보이는 선배의 손에 항상 들려 있던 F. 엥겔스의 '자본론 보론'을 쫓아서 산 것이 첫 번째 도서구입경험인데, 우리말로 쓰여진 문장임에도 활자를 쫓아 읽어갈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달랑 두 페이지를 읽고는 덮어버렸다.
 
무엇이든 읽기는 해야겠는데 무엇을 읽어야 할 지 몰라 강박으로까지 다가온 나의 '독서의 충동'이 답을 찾기 시작한 건 전공기초 과목이었던 '국어'교수께 상담하게 되면서부터다. 그 분은 책을 처음 접하는 내게 '칼 구스타프 융'의 '잠재의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수준과 종류를 따지지 말고 닥치는대로 읽기를 권했다. 책을 읽은 후 무엇을 읽었는가 되돌리려 하지 말고, 그저 다음 책에 몰두하며 수많은 카테고리가 담겨져 있는 두뇌라는 하드에 양적으로 저장하기를 권했다. 독서결과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하셨다. 두뇌는 그릇과 같아서 내가 배운 지식들이 하나 하나 채워져 가고, 그것들이 숙성이 되면서 느끼게 되고, 쌓이고 느끼는 과정이 반복되면 발효되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으로 다가온다고 말해주셨다. 그래서 그 작은 깨달음들이 그릇을 차고 넘치게 되는 순간, 나의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그동안 읽고 배운 것들이 내가 의식하지도 않았음에도 현실에 적용되고 활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경험은 무척 놀라운데, 그 맛을 느끼는 순간 '독서의 즐거움'이 시작될 거라고, 그 전까지는 조금은 수고로운 과정일 거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독서생활도 인간의 경험이라 누가 알려주기 보다는 스스로 익혀야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어서 처음 책읽기를 시작했으면 추천을 바라지 말고 나의 판단으로 무조건 다독하기를 권했다.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읽고 무조건 수용하라고 말씀하셨다. 읽고 난 정보와 지식이 나의 일상생활과 결합되면서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분석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나에게 좋은 책과 나쁜 책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책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 분이 처음 권해주신 책은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었다. 미국 드라마의 미니시리즈나 영화의 원작이 될정도로 재미가 넘쳤던 책들인데, 국내에 나온 그의 소설을 전부 읽으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을 배웠던 것 같다.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그 때부터 책에 흥미를 붙이면서 지금까지 책은 둘도 없는 '친구'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고, 시드니 셀던의 소설에서 다른 작가들로, 다른 장르로 범위는 넓어졌고, 책을 읽는 양과 속도도 향상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가 대학새내기 시절보다는 지적으로 더 성숙해 진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좀 더 효울적이고, 알차게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갈망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 지 알만한 지금이 예전에 '당장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 모르는 초짜'때보다 더욱 더 큰 강박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도 서점을 가서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은 지식의 보고인 서점을 보물섬이라고 비유한다면 평생을 보고도 다 못볼 만큼의 쌓여있는 책들과 매일 쏟아지는 싱싱한 신간들을 목격하노라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책 [보물섬]에서 파란곡절 끝에 누런 황금이 가득한 보물들이 가득한 곳을 찾아가 눈앞에 둔 보물들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소년 짐 호킨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아니다. 이 책 <책을 읽는 방법>을 읽고자 함도 바로 그 두려움과 설렘을 진정시키기 위한 순수한 이유에서였다.
 
 책을 읽는 방법: 슬로 리딩의 실천本の讀み方 : スロ-リディングの實踐 라는 원제목을 가진 이 책은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체로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고 파격적인 평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가 쓴 책으로, 속독速讀에 대한 철저한 반대입장을 밝히며 슬로 리딩Slow-reading를 권하는 책이다. 그는 독서를 즐기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속독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슬로 리딩이야말로 '차이를 낳는 독서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슬로 리딩은 야마무라 오사무의 반反속독의 의미인 지독遲讀(더디게 읽다)의 발상을 따라했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그는 독서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하면 즐거워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슬로 리딩은 숙독熟讀과 정독精讀의 개념을 포함하며 이것은 득을 보는 독서이자, 손해보지 않기 위한 독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보의 항상적 과잉공급 사회에서 진정한 독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망라형 독서에서 선택적 독서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1부에서는 슬로리딩 기초편이라하여 슬로 리딩의 개념과 그 소용을 설명하고, 제 2부에서는 슬로 리딩의 테크닉편이라하여 오독력誤讀力을 설명하면서 지독遲讀은 독자의 오독誤讀으로 인해 지독知讀으로 거듭나는데, 그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이고 이로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제3부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카프카의 [다리],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 미쉘 푸코의 [성의 역사1 - 앎의 의지]등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저자가 직접 분석하여 솔로 리딩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이 책이야말로 내게 너무 많은 의혹을 던져줘서 본의아니게 슬로 리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이제부터 밝힐까 한다.
 
우선 저자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 책의 수량과 매일 쏟아지는 신간들의 수를 들으면서 어짜피 속독으로도 그것을 모두 읽을 수 없다고 말하며,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전환하여 모든 독서법을 슬로리딩으로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책이 귀했던 옛날의 지식인 즉 칸트와 헤겔이 평생 독파한 책의 권수와 지금의 우리가 책을 읽는 숫자를 비교하며 그들보다 지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저자는 옛날 사람들은 모두 슬로리더였다고 말하며 슬로리딩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워낙 책이 귀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중세 지식인들의 독서량과 지금을 비교해서 '지적인 생활'을 운운한다는 것은 억지가 있는 부연이 아닌가 싶다. 
 
또 그는 슬로 리딩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일/시험/면접등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슬로 리딩 기술은 업무에도 응용할 수 있는데, 슬로 리딩 기술은 속독이 필요한 경우라도 어떤 점을 주의해서 읽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오독을 줄이고 뜻하지 않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저자는 문학장르에 대해 언급을 하고 실용서류의 장르에는 그 범위를 넓히지 말아야 했다. 저자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자신의 업무와 시험, 면접등의 중요사안에 대해 속독으로 해결하려고는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 펼쳐진 문자군의 전체를 보며 사진을 찍듯 영상화시켜 무의식에 전달하는 속독법을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컨트롤 할 수 없는 무의식을 나중에 마음대로 다시 의식해서 내용을 논리적으로 짜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경우에만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책을 읽는 독자 모두가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속독으로 접수한 내용이나 지식을 그대로 내뱉어서 저작활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읽은 정보가 누적된 상태에서 생활에 일어나는 상황들에 걸맞게 나의 생각과 표현으로 재창조하고조 준비하는 것이 일반인의 독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초반에 '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기 위한 방법이 슬로 리딩이라고 밝혔는데, 중반부에 들어서는 애초부터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의도'야말로 '옳은 해석'이라고 하며 다른 해석을 모두 '틀렸다'고 말할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부당하게 작품의 가능성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창조적 독서행위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비평도 유행했었다며 창조적인 오독력誤讀力은 슬로 리딩을 통한 심사숙고한 끝에 '작자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풍요로운 오독誤讀'이라고 말을 바꾼다.
 
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의 범위는 어디인가?
과연 슬로  리딩의 궁극적인 맛을 내는 오독력을 '일/입시/면접'등의 실용서를 위한 내용을 분석함에도 찾아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일반 독자가 만나는 책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이상의 자유로운 오독을 즐겨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독서의 참맛인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히 읽어야 하는 최신의 인터넷관련도서와 첨단과학도서 그리고 새로운 마케팅도서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오독誤讀해가면서 슬로 리딩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독서에 있어 '독자로서 홀로서기'를 고백한 부분이다. 그가 독서에 빠지게 된 계기는 열네 살 때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그 책을 읽고 '대체 이게 뭐람'하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는데, 그것이 더욱 흥미를 갖게 했다고 말한다. '쇼크'라고 까지 말한 [금각사]를 섭렵하게 되고 팬이 되어버린 그는 [금각사]의 소설에서 언급한 작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 추적해서 읽기 시작했고, 미시마가 영향을 받은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은 후 다시 한번 [금각사]를 읽은 후 그 내용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는 동안 [금각사]를 통해 알게된 작가들에 빠져 자신의 독서취향이 한쪽으로 쏠린 사실을 알고,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책을 고르도록 주의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작품에 대해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평을 받았다는 점과, 제3부에서 슬로 리딩의 실천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던 지문들이 학생때는 알 수 없었던 교과목의 지문들을 제외하곤 '거의 미시마류'의 것들이었음을 보면 그의 편협된 '오타쿠적 독서 접근법'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극우주의적인 동시에 심미주의적 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가 일곱 번을 태어나 천황을 위해 일곱 번을 죽어도 천황의 은혜는 갚을 수 없다는 의미의 글을 머리띠에 두르고 자위대의 주둔지에 찾아가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외쳤지만, 수용되지 않자 할복자살을 했던 것처럼 책의 지문에 수록된 피와 죽음의 나열들이 제 2의 미시마 유키오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하게 했다. 물론 이 방법은 일종의 '덩굴 더듬기 독서' 즉 '네트워크 독서'라고 볼 수 있는데, 그가 말하는 깊이있는 독서가 극단적으로 이것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저자는 소설가는 책을 느리게 읽는데, 그 이유는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기 때문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행위야말로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로 인한 지독遲讀은 자신의 오독誤讀으로 인해 지독知讀이 되는데, 이것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독서인 속독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소설가인 그가 슬로 리딩으로 책을 읽는 것은 모방을 통한 새로운 창작에 참여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작가의 의도를 찾고, 음미하고 깨달아가며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도 옳다. 하지만 슬로 리딩이야말로 최고의 독서법이고, 모든 장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 일본의 지성이자 다독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가 [읽기의 힘, 듣기의 힘]에서 그는 즐기려고 책을 읽을 생각이 없으며 따라서 엔터테인먼트류의 책은 기본적으로 읽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얼만 남지 않은 인생을 그런데 쓰기가 아깝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자신의 속독생활은 '소설을 포함한 엔터네인먼트류'를 제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독가이자 속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이며,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인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음' 때문에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네트워크 독서가의 입장에서 일부의 장르에 대해 작가와 대화하고, 즐기려는 이유로 슬로리딩이 좋은 독서법이라고 말했어야 그의 주장에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를 생각한 것일까? 저자는 마지막에 "감히 솔직히 말하자면, 책이라는 것은 원래 무엇을 어떻게 읽든 상관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왕 읽는 것이라면 즐겁고 빈틈없는 독서가 좋지 않은가. 나는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독자였다. 그리고 그 동안 나 나름대로 고민을 하며 생각해내어, 경험상 이것은 유효했다고 생각되는 독서법만을 이 책에서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다시 돌려서 말을 한다. 앞에서 단언하고 주장했던 것과는 또 다른 표현들이다. 
 
자신의 독서법이 모든 장르의 책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며, 어짜피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텐데 정말 좋은 책들을 깊이 있게 읽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에는 젊은 작가의 치기어린 주장으로 여겨질 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경제 경영서등의 '실용도서'를 즐겨있는 나의 독서취향에 비추어서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공유하기 위한 컨템퍼러리 의식Sense of Contemporary을 갖추고자 독서생활을 하는 평범한 일반인 일 뿐 '작가의 의도를 깨우치고, 오히려 그의 의도를 넘어 오독誤讀을 즐기는 수준의 비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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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 2008-04-22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교수님을 통해 책을 접하고 사랑하게 된 동기, 서점을 <보물섬>에 비유한 님의 에세이 같은 글을 읽으며 쿵쾅쿵쾅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부족한것 많은 저의 모습이지만, 꾸준히 책과 님의 리뷰를 함께 읽다보면
님처럼 좋은글을 쓸수 있을 날이 올거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읽기의 힘, 듣기의 힘
다치바나 다카시.가와이 하야오.다니카와 순타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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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달인, 듣기의 달인, 언어의 달인이 뭉쳤다!
일본 최고의 지성 세 명의 지식향연.
 
경청하기를 권하는 사회인 요즘, 경청의 수단인 읽기와 듣기의 중요성은 그 어느때보다 강조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말하기와 쓰기 못지않게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말하기, 쓰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읽기와 듣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다양하며 우리 인생에 풍요와 깊이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알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인 읽기와 듣기에 대해 언어를 최고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일본의 세 석학, 논픽션 작가이자 다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 임상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 시인이 다니카와 순타로가 모여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읽기와 듣기에 대해 토론한 강연과 심포지엄의 내용을 적은 책이 오늘 읽은 이 책, <읽기의 힘, 듣기의 힘>이다.
 
자신이 읽은 책을 모아두기 위해 빌딩까지 마련할 만큼 다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을 하고 싶기 때문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음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런 그이기에 이미 읽은 책주에서 좋은 책을 골라 두 세 번을 읽어야 한다지만 그는 늘 새로운 책만을 읽고,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즐기기 위한 엔터테인먼트류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100여 권의 책을 자료로 삼아 읽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관계자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데, 그마저도 직접 메모로 그 내용을 적어낸다는 그의 편집광적인 집요함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바로 이사람, 다치바나 다카시가 공저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읽기란 무엇인가?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는 듣기는 '뇌가 듣는다'는 프랑스어의 앙탕드르entendre의 과거분사 앙탕듀entendu로 소리의 파동이 전기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되었을 때 비로소 이해한다는 의미의 '듣기'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읽기는 우리 뇌의 시각야에 활자의 영상이 맺히고, 뇌에서 이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읽었다'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듣고 본다'는 것은 '앙탕듀'의 세계로 진입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고 말한다.
 
한편 심리학자이자 카운셀러인 가와이 하야오씨는 '읽다'라는 말에는 시를 읽거나 글의 뜻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듣다'라는 말은 질문을 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읽기와 듣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행위이며, 나아가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카운셀러이기도 한 그에게 있어서 '듣기'는 일반인과 다르다고 한다. 즉 보통은 사람이 다른이의 이야기를 듣는 듯 하지만, 진심으로 끝까지 듣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를 듣는 동안 통합하여 판단하게 되므로 이야기의 도중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를 듣기를 접어버리는데, 카운셀러인 그는 사람이 하는 말을 신경을 세워 듣고 나의 머리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말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멍청하리만큼 묵묵히 듣기만 하는데, 이 태도는 상담하러 온 사람의 현재 생각과는 전혀 다른 측면을 발견하고 주목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여러 수를 염두해 두고 진검승부를 펼치는 장기의 승부사와 같은 이치인데, 책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으면서 여러 정보를 듣는 셈인데, 무엇인가를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저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며 '행간을 읽어내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는 또 다른 견해의 책읽기론을 읽어낼 수 있는데, 이 또한 서로 다른 인격과 직업의 차이는 아닐까 생각되었다.
 
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는 언어가 생기기 전 우리는 사물의 움직임이나 행태를 읽었고, 언어가 생긴 이후로도 사랑의 표정이나 시의 여백, 경기의 흐름을 읽는다라고 표현하므로 우리의 읽기는 언어적인 것 뿐 아니라 비언어적인 것도 포함한다고 말했다. '듣기'또한 마찬가지 인데, 인간의 의식에 호소하는 내용을 자신에게 투영하는 움직임 모두를 우리는 '듣다'고 표현하므로 이 범위 또한 넓다는 것이다.
 
세 석학의 입에서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서 연신 고개를 주억대며 공감하기도 했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진리에 공감해서 책 속에서 말하는 '겨드랑이에 땀이 나오는 듯' 온몸으로 책을 읽는 듯 했다. 읽는 내내 한 곳으로 집중된 조명아래 모인 세 사람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나는 몇 발 물러서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이었다. 읽기의 달인 다치바나 다카시, 듣기의 달인 가와이 하야오, 언어의 달인 다니카와 순타로 이 세 명이 이야기하는 읽기, 듣기, 그리고 무수한 정보가 쏟아지는 인터넷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식인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해 준 책이다.
 
보다 나은 책읽기, 보다 깊이 있는 생각하기를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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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무엇인가'하는 인간의 화두에 대해
                 답하는 푸른 눈의 지성인들의 깨달음, 그리고 공부.  
 
삶을 더해갈수록 느껴지는 '부족함'은 아마도 '남은 시간의 부족함을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살아온 날의 무상함을 후회하기 보다는 앞으로 맞이할 살아갈 날을 충실히 살고픈 '갈증'때문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부족함''시간의 유한함'과 더해져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박'으로 다가왔고, 그 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우선의 방법을 찾은 것은 단 하나. '독서'였다.
 
'독서'를 여행이라고 한다면, 독서의 참맛은 단순히 문자를 따라 읽어내려가는 읽기의 여정이 아니라  나의 삶을 대비하는 비교의 여정이요, 행간의 숨은 뜻을 알아내는 탐구의 여정일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활자로 옮겨지고, 그것이 나무들의 시신에 새겨져 모아둔 지식의 총합. 바로 책을 읽고, 고민하고, 답을 찾아내는 시간이야말로 유한한 시간을 무한하게 만들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길에 가로등을 하나씩 켜가는 것이다. 독서는 바로 온전히 생각하고, 온전히 살고픈 사람들의 공부이기도 하다.
 
다소 충격적이 제목으로 내게 다가온 이 책, <공부하다 죽어라>는 대전 자광사에서 준비한 법회에서 국내외에 거주하는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영어로 설법을 했는데, 그 설법들을 우리말로 모아놓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접하면서 던졌던 의문은  합리주의를 추구하고, 과학적시각을 우선하는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 동양의 종교 불교에 귀의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 그리고 설법을 한 수행자들은 이른 바 세계 유수의 대학교를 마친 지성인이었기에 그들에게 펼쳐지 밝은 미래를 내던지고, 출가한 까닭은 무엇인지였다. 그리고 '서당개 삼년의 풍월'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나의 불교관이 갖은 의문은 과연 '공부하다 죽을 만큼' 배울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모두 열 한 분의 수행자들이 영어로 설법한 것을 번역하여 그들이 설법은 물론 그들이 설법을 하면서 행동한 것들도 지문으로 적어놓았고, 어려운 불교용어 또한 자세히 해설해 놓아  마치 동시통역자를 옆에 두고 설법을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자연스럽게 써내려갔는데,  2003년 여름의 설법이 지금 출간된 것 이유를 알 듯 했다.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가지>의 책으로 유명한 현각 스님을 필두로 하여 미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영국, 스위스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오신 수행자들의 설법을 들으면서 불교가 인간에게 던지는 '화두' 즉,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었다. 그리고 올바른 삶이란 어떻게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매 순간 완전하고 온전하게 사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양인의 시선답게 사물을 그리고 진리를 비교분석하며 합리적인 시각으로 설법해 나가는데, 이해하기가 쉽다고 느껴지는 것은 서구학문에 익숙한 탓일까? 아니면 외국인 수행자의 내공이 이정도라니 하는 충격에 따른 질투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놀라움과 감탄이 계속되는 경험을 하였다. 
 
설법에 앞서 수행자들의 이력을 적어두었는데 승승장구하던 그들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현실의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던 차에 그들 또한 설법을 듣고 출가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그랬던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음에도 찾을 수 없었기에 고독하고 두려웠던 그들의 인생에 한 분 스님의 설법은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출가'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산스크리트 어로 인간人間은 '둘라밤'이라고 한다. 그 뜻은 '매우 얻기 힘든 드문 기회' 다시 말해, 우주의 생물체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 좀처럼 되기 힘든 축복된 생물체라는 말이다.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은 '매우 얻기 힘든 드문 기회'인 자신들을 오로지 '진리 추구의 길'에 몰두하기로 정한 사람들인 것이다. 둘라밤으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목숨부지의 생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추구했던 어떤 것을 위해 정진하고 공부하다 죽어야 최소한의 제 이름값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작은 깨달음이 나를 깨웠다.  
 
'나는 무엇인가?'를 찾는 수행이란 사실 돌아옴의 문제, 즉 이미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지,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현각스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덮고난 느낌은 템플스테이temple stay하듯 잠시 여름끝의 산사에서 수양을 하고 온 기분이었다. 독서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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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도서관 - 세계 오지에 3천 개의 도서관, 백만 권의 희망을 전한 한 사나이 이야기
존 우드 지음, 이명혜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히말라야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책을 읽어오면서 소름이 끼치는 감동은 종종 받았지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좀처럼 없는듯 하다. 아니 없다고 해야겠다. 책을 펼치면서부터 모두 읽고 덮을 때까지 꼼짝하지 못하고 읽고, 게다가 울컥하기를 수차례 결국 눈물까지 짓게 만든 책은 이 책뿐인 듯 하다. 
 
한 청년이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 바로 소개하는 이 책. <희말라야 도서관>이다.
 
승승장구하며 세계를 누리며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서 활약하던 청년, 존우드는 휴가차 들린 네팔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숙소에서 만난 네팔의 교육가를 통해 아이들의 교육실태을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고 돌아온다. 치열한 경쟁과 암투가 계속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잊지 못하는 저자는 부모님과 함께 네팔에 보낼 책과 성금을 모금하게 되면서 그의 룸투리드 Room to Read사업은 시작된다.
 
"우리가 물질적인 부자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젊은 나이에 성공했다. 어떤 경우는 운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내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졌다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그걸로 무엇을 하는가이다...."
 
최고의 직장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그가 자신을 아껴온 상사의 믿음을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반대와 부모님의 염려를 뒤로 한 채 부모수의 사회사업을 시작하게된 것은 네팔의 적당한 도서관조차 없는 500명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과거부터 맹세해 온 '더욱 많이 베풀면서 살 것'을 더이상 핑계대며 살지 않겠다는 결심때문이었다.
 
네팔과 베트남 그리고 Room toRead의 도서관과 책을 받게 된 아이들의 기쁜 모습과 그들이 보낸 편지들, 그리고 '세상은 교육받은 아이들에게서 시작한다'는 신념 하나로 활동하는 저자 존 우드를 성원하는 세상사람들의 응원과 후원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내 눈에 읽혀지고 끝내 눈물로 답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는 제아무리 각박하고 혼란스러운 사회라 할지라도 함께 하려는 나누는 마음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결국 10년이 채 되지 않아 개발도상국가에 150만 권의 책을 기증했고, 3,000개의 도서관을 건립했으며, 200개의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천만 명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는 그날까지 오늘도 그 숫자는 아직 진행형이라고 한다.
 
자선을 또 다른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확장한 가장 좋은 사례라고 평가받고  이 책을 사서 읽는 독자는 어느 개발도상국의 도서관 건립에 벽돌을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Room to Read를 통해서 사회사업은 결코 부자만의 점유물이 아니며, 세상의 작은 손길들이 모일 때 그 효과는 배가가 되고, 세상의 온도를 1℃ 더 높인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 뜨겁게 만드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같은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읽어야 할 책이고, 직간접적으로 NGO등 사회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사례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 외에도 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적은 책이 또 있다고 한다.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듯 하다.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지 어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좋은 일은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가 보내는 이메일 서명 파일은 이렇게 쓰여 있다.
 
 

존J.우드/룸투리드 설립자 겸 CEO
세상은 교육받은 어린이들에게서 시작한다.
www.roomtoread.org
 

 
우리는 현재까지 200개의 학교를 지었고, 2,500곳이 넘는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1백만 2천 권의 도서를 기증했고, 1,800명이 넘는 소녀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세계적인 교육을 위해 당신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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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말라야 도서관 - 룸투리드에 기부금 보내는 법.
    from 히말라야도서관 2008-10-04 00:28 
    룸투리드에 후원하고 싶으시나 언어문제로 못하시는 분을 위해 번역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출처 : https://www.roomtoread.org/involvement/donate/other.php#credit 우리 개개인이 할수 있는건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함께 모이면 엄청난 일을 해낼수 있습니다. - 헬렌 켈러 룸투리드의 목표는 천만명의 어린이가 평생의 선물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서포트로 인해 이 프로젝트는 성공에 다가갑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