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리나가 무섭다고 했던거 기억나?"
"그럼."
"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어."
"그럼 뭐였는데?"
"이질감과 친숙함. 리나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동시에 멀게느껴지기도 하는 사람이었어."
"무슨 뜻이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어. 너와 나는 바로 친구가 됐지.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리나를 좋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느꼈어. 어딘가 무시무시한 면이 있어서 리나 앞에 서면 무릎을 꿇고 은밀한 속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았어."
나는 짓궂게 말했다.
"멋지다. 종교적인 체험처럼 들려."
알폰소는 여전히 진지했다. - P289

릴라는 붉은 여단의 지도자 쿠르치오와 프란체스키니처럼 체포될 것이다. 아니면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릴라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용감무쌍하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릴라는 거사를 치른 후에 찬란한 승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가 되면 릴라는 내게 말할 것이다.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
밤이 되면 수많은 상상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릴라가 걱정됐다. 혼란에 빠진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릴라가 쫓기고 있는 모습이나 부상을 당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런 릴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릴라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릴라가 놀라운 일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굳은 믿음이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나폴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했다. 릴라에게서 멀어진 것을 후회했다. 다시 릴라 곁으로 돌아가야할 것만 같았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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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얼굴을 한 군중 속에서 분노에 찬 얼굴 하나를 우리는 즉시 인식한다. 반면, 분노하는 대중의 얼굴들 속에서 기뻐하는 얼굴은 쉽게 찾지 못한다. - P108

우리는 ‘전쟁‘과 ‘범죄‘ 같은 부정적 단어를 ‘사랑‘과 ‘평화‘와 같은 긍정적 단어보다 더 빠르게 인지한다. 이 부정의 레이더 덕분에 선사 시대 우리 조상들은 배고픈 사자와 독 오른 뱀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었다. 이 작동구조는 우리 종의 생존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현대 대중 미디어 세계에서 이 작동 구조는 점점 더 충격적인 보도를 요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최근에 있었던 테러 공격에 대한 특별 방송을 본다. 부정적 헤드라인을 단 신문들이 긍정적 제목을 단 신문들보다 더 많이 팔린다. 이 요구(그리고 자신들의 본능)를 만족시키라는 이 압박에 기자들이 더 많이 굴복할수록, 그들은 우리 사회의 편도체에 더 강한 불을 지피게 되며,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히스테리에 빠지게 된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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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줄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우린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아이처럼 그랬어요? 왜 영원히 아이인 채로 멈춘 거예요? 조금만더 기다리지 그랬어.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그럼 이번에는 내가 누나를 안아줄 수 있었을 텐데.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다 괜찮다고 했을 텐데. 이제 이렇게 편지를 썼으니 누나는 알아줄까? 아니요. 누나는 영원히 모를 거예요. 편지라는 건 상대를향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신에게 쓰는 글이니까. 누나는 이 사실을 언제 알았어요? 그 남자를 향해 남긴 편지를, 몇 개쯤 쓰다 깨달았어요? 나는 이 글을 시작하자마자 알았는데, 누나에게, 라고 적는 순간 바로 알았는데. - P67

"나루세 군은 착한 아이야.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까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어야 해. 이번엔 끝까지, 후회 없이 살아야 해." - P71

그러니까 ‘나‘는 다 들키는 거고, 다 들키려고 소설을 쓰는 중이다. - P76

여러 가지 후회도 되고, 반성도 되어서 앞으로 로맨스를 많이 쓰기로 했다. 많이 쓰면 그걸 다 읽는 사람은 없을 테고, 그럼 후진 건 저절로 탈락하여 잊힐 것이다. 나중엔 아주 잘 쓴 한두 작품만 기억되어 그 작가의 소설 좋지, 이렇게 생각 될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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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다 괜찮아. 겁을 먹어 웅크린 탓에 과일처럼 둥글어진 내 등뼈를 누나는 조용히 쓸어주었습니다. 두 팔의 뜨거움. 자다 깬 누나의 달큼한 입김. 땀에 젖은 누나의 머리카락이 내 뺨에 붙어 방으로 따라 들어오면 그제야 나는 그걸 밧줄처럼 잡고 겨우 무서운 꿈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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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고 한층 가벼워진 여름바람이 부니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그간의 불안과 긴장을 말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비를 맞으며 쑥쑥 자란 논가의 풀을 벴고 무너진논둑은 손으로 일일이 다져 올렸다. 손길이 닿을 때마 다유실된 것이 복구되고 불만과 한탄 속에서도 일상은 되돌아왔다. 여름을 통과하며 열매에게 자연은 때론 친교적 선의를 가지고 손을 내밀지만 때론 환경적 조건의 반응 외에는 어떤 기제도 없는, 생명과는 무관한 존재들처럼도 느껴졌다. - P171

자신을 가로막는 불행과 겨루어 보겠다는 그 날카로운 응시는 여름의 빛과 가장 닮아 있었다. - P186

(독백) 어저귀 너는 뭐였어. 아니, 너는 뭐가 아니었어? 외계인도 아니고 냄새 분자로만 밥을 먹으니 지구인도 아니고 하늘을 나는 대신 택시를 이용한다고 하니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인류애를 잃었다니 천사도 아니고, 대체 뭐였어? 난 누굴 사랑했어? - P206

창세기에 나오는 보시니 좋았다는 말도 모르냐 이놈들아, 세상 만물 모두가 예쁘다 하시는데 유식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애써 만든 영화는 또얼마나 좋아하시겄냐. - P207

열매도 할아버지의 부득이한 사정이 ‘창조‘한 그 많은 마스크들을 보니 좋았다. - P207

사랑? 이, 사랑은 잃는 게 아니여. 내가 내 맘속에 지어 놓은 걸 어떻게 잃어?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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