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 P240

두벌자식이 더 곱다더니 옛말이 맞다며 시부는 아이를 품에서 떼놓지 않았다. - P252

서진이 일곱살 때였나. 아이가 떡을 먹고 탈이 나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응급 환자가 많아 한시간 넘게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아이를 품에 안고 언제 진료를 볼 수 있냐 채근하다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내게 부끄러우니 그만하라던 남편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고 기도만 하던 시모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홀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데 저 멀리서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악을 지르며 응급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야! 누가 내 새끼를 기다리게 해!
의사 나오라며 포악을 부리는 시부 옆에서 나 역시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애 죽을지도 모른다고! 빨리 들여보내줘! - P288

학을 떼고 기겁하던 남편도, 슬며시 자리를 피하던 시모도, 웅성대는 구경꾼들도 그 순간엔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시부도 나처럼 바닥에 주저앉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내 새끼 다 죽어간다, 니들 때문에 내 새끼죽는다. 미친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런 일도 있었지. 또 이런 일도 있었는데, 그리고 또...... 몽롱한 의식을 부여잡으며 시부와 내가 한편이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기억이라는 건 쉽게 미화되고 변질되며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여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믿고 다가갔다간 금세 후회한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시부는 몇마디 말에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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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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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아니더라도 후일에는 제자에게 오욕을 뒤집어씌운 스승이라 낙인찍힐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재화는 대장에 구보승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이 끔찍한 공간에 자신의 의도가 담기지 않았다고 여재화는 믿고 싶었다. 대장에 구보승의 이름을 새긴 건 그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야만이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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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한점 없이 다린 장삼, 흰 고깔, 밤새 숫돌로 날카롭게 벼린 신칼과 쌍작두. - P149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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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치마 위에 장삼을 걸치고 머리엔 흰 고깔을 쓴 신애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애 옆에서 금빛 모두리를 입은 두 명의 무당과 판수, 삼현과 육각의 갖가지 악기를 든 악사들이 굿을 돕고 있다.
굿판은 일정한 기승전결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다. 막이 걷히면 긴 장정이 시작되고, 하나의 장이 끝나면 곧 다 음장이 이어진다. 지금 마당에선 불사거리가 한창이다. 신애기는 부채와 방울을 든 채 공수를 받고 있고 황보와 그의 가족은 그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비나이다 비나이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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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야심까지 크면 사람들도 그걸 알아채고 달아나. 좋은 운도 다 황이 되는 법이다.
늙어갈수록 본심을 숨겨야 약이 된다. 그래야 추하지 않다, 조언하며 할멈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내가 문화재 시켜줄게. 너는 내 말만 잘 따르면 된다. 그러면 분명 노난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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