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하하하 글쎄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일등이 아니라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자꾸 세뇌를 받아서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걸 비교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꾸 비교하면서 살면 결국 종착역도 안식도 평화도 없는 끝없이 피곤한 여행이 될 뿐이거든요. 산다는 게. 그래도 외계인 친구가 자꾸 외계의 힘을 써서 불공평한 승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한번 진지하게 말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밑져야 본전인데 요런 대화를 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친구야 잘 지켜지지는 않지만 인간들에게는 인간의 룰이 있단다. 경쟁은 공정하게. - P116

그리고 고수미는 여러 번 연습한 대로 "나는 정의를 원해"라고 말했다. 니가 뭐든 인간 이상의 힘은 자기 앞에서 쓰지 말라고. 열매는 그 부분에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산삼을 달라고 했어야지, 그리고 그 돈으로 강남에 땅을 샀으면 지금 재벌이 됐을 텐데. 일생일대의 기회를 그토록 허무한 정의 타령이나 해 날려 버린 걸 보면인생의 고난을 자초한 셈이었다.
열매는 일기장을 다시 나이키 박스에 넣었다. 산삼아니면 자연산 송이 위치라도 알려 달라고 했어야 자기가이 시골에 처박히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기는 그랬다면 수미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러면 열매 인생이 더 불행했을지, 덜 불행했을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애매했다. - P120

(키보드 두드리며) 할아부지 이 밤은 기냥 여럿 날중에 수두룩 빽빽인 그런 밤이 아니여. 보령 손씨 19대손인 손열매가 가문을 일으키게 되는 밤이여. - P121

유리창에 붙어 있는 다 바랜 영화 포스터들, (종잇장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웃고 사랑하고 키스하고헐벗고 총을 들고 날고 살인하고 비를 피하고 쫓기고 함정에 빠뜨리고 진실을 밝히고 연대하고 충돌하고 전쟁하는 인간들의 얼굴이 인쇄된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들을지나 할아버지는 사라졌다. - P124

좋네요.
(씹는 소리 내며) 뭐가 좋은데요?
누군가가 방문해 밥 같이 먹는 거요.
얼마 만인데요?
이것도 한 사백 년 만인가?
그럼 대체 그쪽은 나이를 얼마나 먹었어요? 적어도 사백 살은 넘었다는 얘기니까 반송장이네, 반송장. 진실이 뭔지 알아야 대화를 하지.
진실은 누가 판단내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역시 흑담즙 철학자답네. 그럼요?
그냥 그 순간 경험하는 거지. - P151

열매는 하루에도 수백 번 마주치는 타인들 모두가 궁금했다. 운동화를 왜 그렇게 구겨 신었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가면환영받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휴대전화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혹시 ㅎㅎㅎ이나 ㅋㅋㅋ만 찍혀 있지 않는지.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은 열매의 외로움과 관련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런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음을.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가 절대 유기되지 않겠다는 자기 보호로 이끌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나서는 아주 깊은 외로움이 종일 열매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마음이나 육체, 때론 삶 자체를 소모하고 말아야 끝날 듯한, 익명의 손들에 대책 없이 쥐어지는 거리의 전단지처럼 남발되는 외로움. - P152

열매 씨는 딱 도시에서 온 반건조 오징어 인간들 같아요. 불안과 공포와 의심과 적대와 적의가 압착된 냄새가 나거든요. - P154

모호한 말이었지만 열매는 어디론가 숨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일할 때 영상 속 인물들에게 자기 목소리를내주었던 것처럼. 열매가 연기한 무엇도 현실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환상이 아니었다. 열매의 호흡과 목소리를 전달받았으니까. - P156

굳이 설명한다면 친교적 조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고싶어 하는 마음. - P157

어저귀는 숲의 모든 것들은 친교 속에 존재한다고 했다. 나무만 해도 뿌리와 뿌리가 맞닿고 흙 속의 곰팡이가 연결선을 만들면서 안부를 전하고 서로 위급한 신호를 보내고 영양분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어린 묘목을 돌보며 오래된 지혜를 나누어 주는데 숲의 동물들도 그런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들이 우주 속에서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지만 인간은 오래전 이탈해 자기들만의 방식을 선택했고 지금이 그 결과라고 했다. 다만 몇몇 인간들은 그런 관계를 시초에 가깝게 유지한 채 존재하는데 어저귀도 그중 하나였다.

어저귀 시초에 가깝다는 게 뭔지 저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절 키워 주신 감불 아재가 해 주신 말씀이에요. 제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누가 아닌지를 물으라고 질문을 바꾸어 돌려주셨죠. - P157

마치 정지 화면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동안 양미네 집 풍경은 불행하게 멈췄다. 이윽고 율리야와 파드마가 들어와 시디와 가사집과 포스터 들을 줍기 시작했다. 양미는 자전거 옆에서 있었고 표정은 그림자처럼 텅 비어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스위치를 꺼버리는 건 상처받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쳐내 버린 감정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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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들춰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어리석은 핑계처럼 들린다. 게다가 스물다섯의 다커버린 나이에는 수치스러운 변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검토를 끝내고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검토할 수도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삶의 뿌리를 더듬기 위해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두 사람이 부모도 구별 못할 만큼 닮아서 키우는 동안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외할머니한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얼굴도 같았고, 성격도 같았고, 하다못해 학교 성적까지도 무엇이든 두 사람은 똑같았다. 같은 집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하며 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은마치 둘로 나누어진 한 사람인 양 보였다고 했다. 도저히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와 이모는 결혼과 동시에 비로소 두 사람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으로 나뉘자마자 이들의 삶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나머지한 사람은 대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소유하는 것으로 신에게 약속이나 받았듯이 그렇게 달라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머니와 이모가 그토록이나 혼란스러웠다.
빗물새는 단칸방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다가 이모 집을 가서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의 이모가 비단 잠옷을 입고 침실침실에서 나오는 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었다. - P19

울고 있던 어머니가 무대 뒤로 뛰어가 금방 비단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행복한 또 다른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일인이역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 수 있을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삶의 고단함이 어머니의 얼굴을 많이 할퀴어놓지 않아서 이모와 어머니를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고백하자면 비단 잠옷 쪽이 어머니가 아닌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혼란스러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이모의 딸이었다면, 그랬다 해도 가난하고 억센 이모와 부자이면서 부드러운 어머니를 혼동하곤 했었을까. 실제로 나와 동갑인 이모의 딸은 쌍둥이이모에 대해서 한 번도 혼란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곤 했었다. 그 애는 새침한 표정으로 늘 이렇게 말했다. 저기 니네 어머니 있다......
니네 어머니, 아니 우리 어머니와 이모를 놓고 비교하는 일을 멈춘 때는 내가 사람들 표현대로 ‘심심하면‘ 가출을 하기 시작한 무렵과 거의 같았다.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이런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니의 경험이 나에게서 멋진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동기 유발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 P20

이모가 죽고도 세월은 흘렀다.
이모를 죽인 겨울이 지나고 봄은 무르익어서 사방에 꽃향기가난만했다. 겨울이 있어 봄도 있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 P291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96

진진아
지난 며칠간 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했는지, 정작 지금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너무 지쳐서 준비했던 그 많은 말들을 떠올릴 힘이 나지 않는다.
이 편지를 너한테 보내야 한다는 결심은 아주 쉽게 했었어.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었어. 너라면내가 다하지 못하고 가는 내 삶에 대한 변명을 마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지. 너라면 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어.
나,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 안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 P283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는 상상도 적잖이 해보았지.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튼튼한 성곽에갇혀있었고, 성곽을 부수자니 마음을 다칠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나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 때문에 그러는 것, 나는 정말 못견디겠더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묵묵히 사는 길도 있는데, 난 그것도 안 돼. 정말 안 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진진아.
나, 여기서 그만이 생을 끝내기로 했다.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
진진아.
사고 뒤처리를 너한테 맡기고 가는 이모를 제발 용서해주길.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시각이면 나는 아마 떠났을 거야. 그때 나한테 와줘. 와서 나를 수습해줘. 이모부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그 이후일 거야. 숫자에 약한 내가 거듭거듭 시간을 계산하고 우체국에 가서도 물어보고 했으니 설마 틀리지 않겠지. 진실로, 이 마지막 일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다.
주리와 주혁이한테도 네가 나를 변명해주길 바래. 그 애들은 공부가 끝나도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단다. 내가없으면 훨씬 홀가분하게 이 땅을 잊을 수 있겠지. 그 애들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 애들처럼 살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지………….
진진아.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늦게도 내게 오지마.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줘.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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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했을 때 대깍 보시지 그랬냐넌디, 이, 아, 그려셨구나. (다시 전화에 대고) 그때는 개인 사정으루다가 큰 핵교에 댕기셔서 못 보셨다는디유, 십 년을 댕기셨다니께 개뭐. (옆 손님에게 확인하며) 이이, 십이 년을 계시다 지끔 나오시구 이제사 급하게 시청을 원하신대유. 인상은 뭐 말가도 할 것 없이 엄청 좋으셔유. - P9

평면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오려 내는 영혼의 가위질처럼, 진흙 덩어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신의 숨결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라 장독대 안을 푹 익히는 유산균처럼 손열매는 자기 안의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그간 한 번도 경험 못한 고도의 집중력이라 코끝까지 시큰해졌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듯했다. - P11

유년과 십대 시절, 대학 생활, 한 교육방송국 성우 공채로 입사해 이 년을 마친 뒤 프리랜서 생활을 해온 지금까지, 답하면 답할수록 열매는마치 영화처럼 자기 삶이 재생되는 듯했다. 손열매는 부유하는 무언가들을 공중에서 조용히 받아 드는 기분이었다. 눈처럼 희끗하고 가볍고 불행감으로 폴폴 날리는 어떤 순간들을. - P13

사람들에게 부모란 때론 온화한 태양 같기도 어느 날은 상당한 심술을 품은 태풍 같기도 한, 자식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자기 주도성을 갖기 어려운, 날씨나 계절 같은 존재인데 수미는 늘 건조하고 덤덤했다. - P32

시멘트공의 손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명절 때도 모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거푸집과 철근으로 빌딩을 세우는 시멘트공의 피가 흐르지 않는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 P33

열매는 이곳에서 자랐을 수미에 대해 생각했다. 끊임없이 의식을 끊고 들어오는 죽음이라는 세계의 간섭을 어린 수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혹시 그게 집으로부터 수미를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닐지를. - P45

광활한 나무 바다 속에, 열매는 있는 느낌이었다. 어려서 바다를 둥둥 떠다닐 때처럼 편안했고 가만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어느샌가 산안개가 흰 새 떼처럼 몰려와열매 주변이 온통 새하얘졌다. 그 속에서는 전나무도 전나무만은 아니고 꽃도 꽃만은 아니었다. 존재의 형태와 이름을 동일하게 지운 상태에서는 열매조차 그 백색 공기의 부분인 듯했다. - P51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매도 태풍으로 집 벽이 날아가 버린 동화 속 돼지 삼 형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동안 요양 병원에서 지내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과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은 너무달랐다. 항상 허전했다. - P57

장만옥은 말하기 전 늘 어떤 감정을 미리 물고 있었다.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억척스러움을 물고 있었고 비 오는 야시장에서 해적판 카세트테이프를 팔 때는 밤의 불빛처럼 아련한 희망을 품었고 오래된 브라운관에서 죽은 등려군의 얼굴을 볼 때는 인생에 대한 의문을 얼굴과 입모양으로 담고 있었다. 장만옥은 슬픔 앞에 무너져 내린 사람의 비관과 그럼에도 변치 않는 말갛고 천진한 낙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 P75

전진하는 새해가 되기를.
번영하고 부자가 되기를.
순풍 받은 배처럼 순조롭기를.
네 몸이 건강하기를.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되기를.
늘 당당하고 용기 있기를.
좋은 마음이 좋은 일을 부르기를.
큰 복을 받고 큰 선물이 찾아들기를.
모든 일이 순탄하기를.
우정 만세. - P75

난 학교에서도 포기한 문제아고.
나도 낙제점 받은 사회 부적응자야.
자자자자자자, 이제 그만하시고 심호흡, 심호흡을 합시다. 후.......
그리고 내가 니가 그렇게 강조하는 어른으로서 충고하는데 상처 받았다고 남한테 막 상처줄수 있는 그런 특권 있는 거 아니야. 나 아프다고 면죄부 받는거 아니라고. - P86

호흡을 더 고르자 드디어 생각마저 날아갔다. 버글거리던 것들이 사라지고 서 있다는 느낌만 남았다. 옆에는 과잉 흑담즙으로 고생하는 우울한 어저귀와 슬픔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맹렬히 저항하는 문제 학생이 서 있고 봄은 그냥 봄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감싸며 마치 눈보라처럼 수양버들 씨앗이 날았다. 집집마다 쓰는 솜베개가 한 번에 터진 것처럼 동네 물가에서 출발한 희고 부드러운 씨앗들이 열매의 머리와 양미의 어깨와 어저귀의 손등을 덮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셋은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 P88

커피 팔고 산도 가고 복식 호흡 하고 술 훔쳐가는 애 잡으러 뛰어다니고 때 되면 밥 먹고 그렇게 지냈죠 뭐.

음, 식사는 잘하셨어요? 식욕 부진이었는데.

네, 두릅도 먹고 삼채 나물도 먹고 메기도 먹고 이름 모를 버섯들도 먹고 동네에서 기른 토종닭도 먹고. - P89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십 년 넘게 본 인간들이 마치한 번도 경험 못 한 외계 생명체 대하듯 하네. 열매는 그들이 함께 어울렸던 그 모든 시간들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이렇게 망해 버린 추억들이 아까워서 엉엉 울고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돼 버릴 줄 알았다면 그 많은 밤들을서로의 유년의 슬픔이나 실패한 연애담이나 정신 나간상사 이야기를 들어 주는 데 쓰지 않았을 것이다. - P97

동창 1. 잠깐만 잠깐만, 근데 열매 니 말대로라면 거기개발되면 보상금 생겨서 우리가 좀 받아 낼 수있는거 아니야?
동창 2. 자식 빚은 갚을 의무 없어.
선배. 수미가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죽은 자식 빚은 부모 유산처럼 대물림되거든.
동창 2. 그럼 고수미가 죽었기를 바래야 하는 거야? 어떡해?

그때 얼음이 달그락하고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잔을 타고 삼 밀리미터쯤 이동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 낙하는 안전줄 없이 뛰어내린 번지 점프처럼 열매에게 걷잡을 수 없는 하강감을 주었다.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테이블에 앉은 인간들 모두 다함께, 각자가 받아야 할 사백오십만 원과 천이백만 원과삼천사백만 원과 육백만 원 그 밖의 소액들이 악다구니치며, 손열매는 말없이 일어섰다. - P95

어디서 왔냐고 하면 그쪽은 답할 수 있어요? 본인도 중간 부분만 기억하잖아요. 최초의 시점에 관한 기억은 없고 들은 말뿐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최종 순간도 남이 기억해 주는 거잖아요 - P101

마냥 세월을 흘려보낼 수는 없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금전적 욕구는 열매 내면의 자기 주도성을 지녔지만 후자는 일종의 불수의근처럼 제어가 안 됐다. 어저귀와 마주치기만 해도 혈당 스파이크가 오듯 마음과 신체에 충격이 일었다. 수정, 수분, 짝짓기 다 끝나고 성가신 번식욕에서 벗어나 동식물 모두 자기 생장을 위해먹고 빛을 흡수하는 때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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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기자들의 책임이 있다. 기자들은 현실과 가능한 한 일치하고, 진실과 가능한 한 가까운 이미지를 창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임과 임무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기자들은 인간이며, 본디 인간은 범주와 고정관념이라는 틀로 생각한다. 진화는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렸다. - P90

기자들은 보도하기 전에 취재하는 게 기자의 직업이라고 배운다. 기자들은 전문적인 편견 제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취재는 접촉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게 말하면, 기자는 보도하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누구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 독자와 시청자를 대표하여 기자는 스스로의 편견을 파괴해야 한다. - P92

기자들에게 ‘모든 모순‘과 ‘다른 의견‘은 ‘하나의 진보‘이다. 모든 역설, 양보, 대립은 또 다른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한다. 자신의 세계관을 이렇게 재조정하는 일, 이 일이야말로 내가 보기에 우리 직업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보도 대상에 노출할 때에만 이런 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 - P93

이 상황은 개별 신문사나 개별 기자의 문제가 아니다. 다지털 세계의 법칙은 하루에 기초한 저널리즘을 분 단위에 기초한 저널리즘으로 가속화했다. 치열한 경쟁, 더 빨리 되려는 욕심, 첫 번째 푸시 알림이 되기 위한 경주는 종종 최소한의 취재만을 허락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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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회적 삶은 인종주의 편견에 기초한다. 즈벤이 갑자기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하면, 그는 계속해서 그 주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의 이웃과 친구, 동료는 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없어? 이전에는 편안한 일치가 지배했던 곳이 싸움터가 될 것이다.
이처럼 편견을 거부하는 일은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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