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봉했을 때 대깍 보시지 그랬냐넌디, 이, 아, 그려셨구나. (다시 전화에 대고) 그때는 개인 사정으루다가 큰 핵교에 댕기셔서 못 보셨다는디유, 십 년을 댕기셨다니께 개뭐. (옆 손님에게 확인하며) 이이, 십이 년을 계시다 지끔 나오시구 이제사 급하게 시청을 원하신대유. 인상은 뭐 말가도 할 것 없이 엄청 좋으셔유. - P9
평면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오려 내는 영혼의 가위질처럼, 진흙 덩어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신의 숨결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라 장독대 안을 푹 익히는 유산균처럼 손열매는 자기 안의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그간 한 번도 경험 못한 고도의 집중력이라 코끝까지 시큰해졌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듯했다. - P11
유년과 십대 시절, 대학 생활, 한 교육방송국 성우 공채로 입사해 이 년을 마친 뒤 프리랜서 생활을 해온 지금까지, 답하면 답할수록 열매는마치 영화처럼 자기 삶이 재생되는 듯했다. 손열매는 부유하는 무언가들을 공중에서 조용히 받아 드는 기분이었다. 눈처럼 희끗하고 가볍고 불행감으로 폴폴 날리는 어떤 순간들을. - P13
사람들에게 부모란 때론 온화한 태양 같기도 어느 날은 상당한 심술을 품은 태풍 같기도 한, 자식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자기 주도성을 갖기 어려운, 날씨나 계절 같은 존재인데 수미는 늘 건조하고 덤덤했다. - P32
시멘트공의 손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명절 때도 모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거푸집과 철근으로 빌딩을 세우는 시멘트공의 피가 흐르지 않는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 P33
열매는 이곳에서 자랐을 수미에 대해 생각했다. 끊임없이 의식을 끊고 들어오는 죽음이라는 세계의 간섭을 어린 수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혹시 그게 집으로부터 수미를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닐지를. - P45
광활한 나무 바다 속에, 열매는 있는 느낌이었다. 어려서 바다를 둥둥 떠다닐 때처럼 편안했고 가만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어느샌가 산안개가 흰 새 떼처럼 몰려와열매 주변이 온통 새하얘졌다. 그 속에서는 전나무도 전나무만은 아니고 꽃도 꽃만은 아니었다. 존재의 형태와 이름을 동일하게 지운 상태에서는 열매조차 그 백색 공기의 부분인 듯했다. - P51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매도 태풍으로 집 벽이 날아가 버린 동화 속 돼지 삼 형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동안 요양 병원에서 지내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과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은 너무달랐다. 항상 허전했다. - P57
장만옥은 말하기 전 늘 어떤 감정을 미리 물고 있었다.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억척스러움을 물고 있었고 비 오는 야시장에서 해적판 카세트테이프를 팔 때는 밤의 불빛처럼 아련한 희망을 품었고 오래된 브라운관에서 죽은 등려군의 얼굴을 볼 때는 인생에 대한 의문을 얼굴과 입모양으로 담고 있었다. 장만옥은 슬픔 앞에 무너져 내린 사람의 비관과 그럼에도 변치 않는 말갛고 천진한 낙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 P75
전진하는 새해가 되기를. 번영하고 부자가 되기를. 순풍 받은 배처럼 순조롭기를. 네 몸이 건강하기를.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되기를. 늘 당당하고 용기 있기를. 좋은 마음이 좋은 일을 부르기를. 큰 복을 받고 큰 선물이 찾아들기를. 모든 일이 순탄하기를. 우정 만세. - P75
난 학교에서도 포기한 문제아고. 나도 낙제점 받은 사회 부적응자야. 자자자자자자, 이제 그만하시고 심호흡, 심호흡을 합시다. 후....... 그리고 내가 니가 그렇게 강조하는 어른으로서 충고하는데 상처 받았다고 남한테 막 상처줄수 있는 그런 특권 있는 거 아니야. 나 아프다고 면죄부 받는거 아니라고. - P86
호흡을 더 고르자 드디어 생각마저 날아갔다. 버글거리던 것들이 사라지고 서 있다는 느낌만 남았다. 옆에는 과잉 흑담즙으로 고생하는 우울한 어저귀와 슬픔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맹렬히 저항하는 문제 학생이 서 있고 봄은 그냥 봄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감싸며 마치 눈보라처럼 수양버들 씨앗이 날았다. 집집마다 쓰는 솜베개가 한 번에 터진 것처럼 동네 물가에서 출발한 희고 부드러운 씨앗들이 열매의 머리와 양미의 어깨와 어저귀의 손등을 덮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셋은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 P88
커피 팔고 산도 가고 복식 호흡 하고 술 훔쳐가는 애 잡으러 뛰어다니고 때 되면 밥 먹고 그렇게 지냈죠 뭐.
음, 식사는 잘하셨어요? 식욕 부진이었는데.
네, 두릅도 먹고 삼채 나물도 먹고 메기도 먹고 이름 모를 버섯들도 먹고 동네에서 기른 토종닭도 먹고. - P89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십 년 넘게 본 인간들이 마치한 번도 경험 못 한 외계 생명체 대하듯 하네. 열매는 그들이 함께 어울렸던 그 모든 시간들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이렇게 망해 버린 추억들이 아까워서 엉엉 울고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돼 버릴 줄 알았다면 그 많은 밤들을서로의 유년의 슬픔이나 실패한 연애담이나 정신 나간상사 이야기를 들어 주는 데 쓰지 않았을 것이다. - P97
동창 1. 잠깐만 잠깐만, 근데 열매 니 말대로라면 거기개발되면 보상금 생겨서 우리가 좀 받아 낼 수있는거 아니야? 동창 2. 자식 빚은 갚을 의무 없어. 선배. 수미가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죽은 자식 빚은 부모 유산처럼 대물림되거든. 동창 2. 그럼 고수미가 죽었기를 바래야 하는 거야? 어떡해?
그때 얼음이 달그락하고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잔을 타고 삼 밀리미터쯤 이동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 낙하는 안전줄 없이 뛰어내린 번지 점프처럼 열매에게 걷잡을 수 없는 하강감을 주었다.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테이블에 앉은 인간들 모두 다함께, 각자가 받아야 할 사백오십만 원과 천이백만 원과삼천사백만 원과 육백만 원 그 밖의 소액들이 악다구니치며, 손열매는 말없이 일어섰다. - P95
어디서 왔냐고 하면 그쪽은 답할 수 있어요? 본인도 중간 부분만 기억하잖아요. 최초의 시점에 관한 기억은 없고 들은 말뿐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최종 순간도 남이 기억해 주는 거잖아요 - P101
마냥 세월을 흘려보낼 수는 없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금전적 욕구는 열매 내면의 자기 주도성을 지녔지만 후자는 일종의 불수의근처럼 제어가 안 됐다. 어저귀와 마주치기만 해도 혈당 스파이크가 오듯 마음과 신체에 충격이 일었다. 수정, 수분, 짝짓기 다 끝나고 성가신 번식욕에서 벗어나 동식물 모두 자기 생장을 위해먹고 빛을 흡수하는 때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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