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눈빛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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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히틀러가 독일 연립내각의 총리로 선출됨으로써 극우집단인 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 일명 Nazi)’에 의한 파시스트 국가가 된 시기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의 사진과 결합된 브레히트의 4 행시로 구성된 사진시집(寫眞詩集)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포토에피그램(Fotoepigramm)’이라 불렀다.

 

1931년 브레히트는 노동자-화보신문창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쓴 글에서 눈부신 사진기술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기는커녕 진실에 역행하는 공포를 만드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사진매체가 실제로는 사실 은폐에만 기여해왔다고 당시 각광받던 이미지매체로서의 사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시말해 이 책은 이러한 사진의 오용과 기만을 바로잡아 진실을 말하는 도구로 돌려놓기 위해 이 매체를 예술적 재생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 그 해독을 위한 학습의 장으로 기획된 것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들은 책과 잡지,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각종의 디지털 이미지 매체에 편집되어 대중에게 보여지기위해 시사에 이용되는 이미지(사진 등)를 별다른 의심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또한 해당 사진에 설명을 통해 그 사진과 기사를 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독하고 만다. 이렇게 유도된 해독은 특정한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공익을 위해서거나 불편부당이라는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더구나 사실을 은폐하거나 어떤 숨겨진 저의(底意)를 위해 사용되기 일쑤며, 편파적 견해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대중은 사진을 해독할 줄 모르거나, 그 이미지의 사용을 의심할 줄 모른다. 브레히트는 바로 이러한 우매한 민중에게 스스로 대상에 대한 인식을 획득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한 것이며, 또한 그의 문학 실험장이기도 하다. 4행시라는 문학(특히 )을 사진과 결합함으로써 사진매체를 새로운 측면에서 해독할 수 있는 관점을 촉발하고, 독자 스스로 대립되는 관점으로 논쟁할 수 있는 비판 의식을 지닐 수 있도록 주체화한다. 역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고도의 미학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과 문학이 결합된 예술 작품집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총 69컷의 사진 시 중에서 ‘61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하고 러시아에 남겨진 독일군들이다. 다친 눈을 붕대로 싸맨 사람부터 모든 의지와 자부심을 상실한 얼빠진 얼굴들과 추위로 잔뜩 움추린 모습들이다.  러시아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을수록 이들은 추위에 떨며 죽어갔다.”는 사진설명이 붙어있으며,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은 4행시로 사진의 진실을 생각게 한다.

 

보시오 우리 아들들을, 온몸이 마비되고 피범벅 되어

얼어붙은 탱크로부터 이 곳에 내던져졌소

사나운 늑대조차도 숨을 구멍이 필요한 법이라오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시오. 그들은 춥소.

 

전쟁을 누가 일으켰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군인은 누구의 자식들이고 아비 혹은 형제인가? 이들은 왜 러시아 추운 벌판으로 나왔는가? 시는 사진에 구체성을 부여하며 모순된 현실을 드러낸다. 바로 이 모순을 발견하고 해결함으로써 현실은 시정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추구한 것은 이렇게 사진과 문자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해결책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재생산 수단인 이 에피그램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이 포토에피그램에서 오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나치당에 손을 들어줌으로 민중 자신들의 적대계급인 극우 파시스트인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인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이다. 민주정이었던 바이마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파상적인 매체 선전에 현혹된 독일 민중의 잘못된 선택이 무엇을 초래했는지를 직시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이 사진시집의 1번 시와 2번 시는 그 우매한 선택으로 전쟁준비에 동원되어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중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그 어리석고 모순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은 그 자체로 진실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매체이다.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 모든 대중은 매체 해석 능력을 지녀야 한다. 의심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56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이 사진에는 모스크바 야전병원에 누워있는 실명한 독일군 병사라는 설명이 있다. 이 독일인은 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건가? 누구의 책임인가? 히틀러와 나치당의 책임인가? 독일인은 히틀러와 나치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 선택의 주체인 이 독일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브레히트는 이 사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붙이고 있다.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이 한심한 사람아, 자넨 시력을 헌납했구나

오 눈먼 인간이여, 이제는 알겠는가.

사이비 지도자가 모스크바를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을

그가 손에 넣었더라도 자넨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네.

 

2차 대전은 제국주의적 탐욕의 열망이 만들어낸, 소위 제국주의적 사업계획 실행의 충돌이다. 계속하고자 했던 장물아비 짓의 거대한 실패이다.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배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야합하기로 함으로써 독일인은 그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 쓴 것이다. 민중의 어리석음은 곧 민중의 고통으로 필연적으로 돌아온다. 바로 매체를 잘 못 읽고 그릇된 해석을 함으로써.  브레히트는 그의 희곡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전쟁은 또 다른 형태의 장사일 뿐 , 그저 치즈 대신 탄약을 쓰지요.”라고 했다. 이 냉철한 지적처럼 군산복합체는 민중을 전쟁으로 몰아냄으로써 거두는 지배권력의 잔인하고 혹독한 탐욕이다. 전쟁은 권력과 결합한 산업의 욕망 실현 그 이상이 아니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69번 시는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그 어리석은 고통이 시작된 1번 시와 수미상관(首尾雙關)을 이루어 제 3제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사이비 지도자 히틀러로 마무리된다. 브레히트는 이 마지막 4행시에서  저기 저것이 하마터면 세상을 온통 지배할 뻔 했지....축배는 아직 안 들면 좋겠어/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이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거든이라고 썼다. 자기 욕심 우선의 사이비 지도자의 손을 들어준 우민들아 각성해라, 라는 얘기다.

 

더구나 그것이 죽었다고 파시즘의 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말한다. 이것은 깨어나지 않는 우민이기도 하며,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파집단의 이기심이고, 추악한 작물아비의 근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가 실명한 군인에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그에게 냉혹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비인간적인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다른 시에서 그는 코 꿰인 노예들이 되기엔 너희들이 너무 선량하다는 그 생각은과 같이 비인간적 일을 행하도록 요구된 사람들에게 동정과 우애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매함의 껍질을 벗어난 인간에만 보내는 엄격한 사랑이다.

 

전쟁의 불사를 무책임하게 발설하는 권력자의 행위란 민중의 희생에 아무런 관심없음 이라는 의미를 품은 것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자기 부 축적의 수단이지 그 외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본질은 오직 장사 속 그 외의 것이었던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전쟁 교본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은 매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대중 교습서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레히트는 사진 매체와 시(문학)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진실에 이를 수 있는 시야(視野), 그 해독 능력을 열어준다. 또한 문학을 진실을 말하는 예술적 재생산도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늦은 독서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시의적이라 할 책이라 해도 그릇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배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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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의 역사 읽기 - 동굴벽화에서 가상현실까지 현대의 지성 173
안드레아스 뵌.안드레아스 자이들러 지음, 이상훈.황승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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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대중매체를 통해 아는 것이다.” -  니콜라스 루만, 대중매체의 현실P 9에서

 

 

사람들의 삶의 언어와 행동의 동기는 자신을 자극하는 무수한 매체들이 쏟아놓는 말과 글을 비롯한 각종의 시각이미지들을 무시하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매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해 보다 성숙한 인식능력을 갖추기 위한 원초적 앎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 루만의 지적처럼 우리 개인들이 지니게 되는 세계상은 이들 대중매체가 전파하는 것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그 세계상에 익숙해져 인식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렇게 인식된 세계상은 편협하거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체화, 강화시키고 또한 재생산한다.

 

이 책은 이러한 매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 의사소통 이론과 기호이론을 토대로하여 매체란 무엇인지, 매체가 우리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매체윤리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매체의 발생과 발전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정신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매체 역사에 관한 입문서이다. 특히 책은 마셜 맥루언이 포괄적으로 정의한 매체(media)처럼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혀주는 인간확장의 도구로서 도로, 전기, 철도와 같은 대상 영역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규정하는 매체를 지양하고 의사소통적이고 기호(문자, 이미지 등)를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의 연관관계로 제한한 기호학적 매체개념으로 국한하고 있다.

 

기호를 통해 어떤 내용을 전달하거나 답하는 메시지의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가 오늘날에는 인간의 역사 내내 축적된 것들이 모여 어쩌면 잠정적 최종산물들이 함께하는 시대라 할 것이다. 회화에서 책과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기반의 각종 사회적 연결망(SNS)에 이르기까지 각 매체의 차별화된 특성이 발신하는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들 매체의 발명과 발전의 역사와 이에따른 사회적, 정신적 영향에서부터 각 매체의 특성이나 매체 그 자체의 이론적 기술은 물론 중요한 배움이지만 나는 매체의 속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매체가 지닌 문제성에 초점을 맞춘 읽기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도적인 편협성은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요청되는 읽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매체의 간략한 역사

 

매체와 관련해서 작금의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서 거의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매체를 장악하려하거나 점거한 매체에 압도적인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한 전쟁이 한창이다. 한정된 인간의 두뇌 기억에 의존하던 구술문화시대를 밀어낸 문자의 발명은 공간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했으며, 밀도 높은 정보 생산과 그의 전파와 보존으로 지식의 복잡화와 전문화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시공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문자의 소통은 명료성 상실이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해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동일 내용에 대한 갈등이라는 내재적 문제를 지니게 되었다.(문자언어는 이렇게 모호성으로 욕망 갈등을 내재한다)

 

15세기 인쇄술의 발명으로 동일 내용의 대량 복제 생산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문자 읽기에 대한 욕구의 생성은 물론 의사소통 공동체가 달성되었으며, 지식의 보편적 접근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정신 변화로서 시민의 정치적 의식화가 이루어지는 근대 사회 성립의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구술이라는 동시성의 언어 매체에서 문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매체로의 진전만 보아도 인간 삶의 행동 양식 변화가 매체 의존적임을 확인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

 


일례로 책 생산의 증가로 인해 인쇄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선택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곧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정신적, 감정적 기반 변화에 직접적 영향임을 보여준다. 책이 생산되고도 신문이라 불리는 주기적 간행의 시사적 대중 매체가 출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나의 발신자로부터 불특정 다수의 수신자에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중매체로서 신문의 탄생은 실로 엄청난 문명 전환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대중매체인 신문 시간과 장소의 거리로 인해 접할 수 없었던 정부(政府)의 행위나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의사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이다. 소수가 점유하던 정보가 열림으로써 시민의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함과 동시에 시민계급의 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될 기회도 창출했다. 초기의 신문 매체들은 이처럼 시민의 자유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신문매체, 즉 고전적 언론의 자유는 거저 성취된 것이 아니다. 소위 기득권을 지닌 지배계급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견해가 유포되어 그 영향력이 커지자 또한 최초의 대중매체 검열판매금지(販禁)’라는 권력의 대항 조치가 나왔으며 언론자유는 인간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저항의 피로 얼룩진 역사는 생략한다.)

 

사실 언론자유는 보호할 다른 가치 있는 권리들과 경합한다. 대중을 자극 선동하는데 주력하는 소위 조중동 삼류 황색신문을 비롯한 신문매체가 저지르는 개인의 인격침해부터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부인 등 매체의 윤리적 탈선은 매체의 자체적 윤리 능력에 의심을 보내게 된다. 이제 사진,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연속적으로 출현함으로써 인간의 시공을 초월하려는 소망과 결합하여 안방에서 동시적으로 먼 거리의 정보를 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과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매체의 특성들은 서로 경합하거나 상호 혼종되면서 정보에 대한 독특한 재현방식으로 수신자의 관점에 개입했다.

 

이제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플랫폼은 인터넷만 접속되어 있으면 장소의 구속성에 제약됨 없이 동시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모든 문자와 이미지를 디지털로 구현하면서 실재의 사실이나 객관적 정보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누구나 원본을 조작 가공할 수 있으며, 개인 방송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본을 알 수 없는 시대, 그러하니 가짜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는 것은 자명한 결과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매체가 총집결되어 경쟁하는 시대다. 이렇게 증대된 정보의 양은 마치 공론장의 외형이 커진 듯 보이지만 부분 집단으로 파편화되어 국가와 같은 단일 논의의 수렴이 요구될 때 그것의 총화는 불가능한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 간략한 매체 역사를 시간 순으로 거닐다 보면 무수히 분열된 매체들의 욕구를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필터링하고 관리해 나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자연 발생한다.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원본이란 말인가? 어떤 정보를 채택하고 버릴 것인가의 문제다.

 

2. 대중매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대중매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정보의 송출이라는 정의처럼 수용자 측의 관심이나 수용자의 조건을 예측해야 한다. 이 예측이 중요한 것은 매체의 경제적 생존과 직결하기 때문인데, 수용자가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야 수용자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이치로 인해서 매체는 특정 이데올로기나 경향성을 강화하여 수용자를 만족하게 하거나 자극하는 전선에 나선다. 이것은 결국 매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극단화 시켜야 하는 것이며, 모든 행위는 여기에 집중케 된다.

 

대중매체인 신문은 이러한 편향성과 갈등을 초래하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기심 충족과 자신들과 다른 모든 존재를 적대화하면서 뒤틀리고 왜곡된 여론을 조성한다. 이는 자기 매체의 수용자들을 붙들어두기 위한 매체의 본래적 성격 때문이다. 여기에 또 매체 본연의 위계를 전도시키는 요소가 매체의 가치를 압박하는데 언제나 신문사업의 핵심역할을 하는 광고의 영향이다. 매체의 1차적 기능은 수용자와의 의사소통이다. 그리고 광고의 지위는 2차적이지만 실제에서는 이 위계질서가 역전된다. 광고주의 영향이 곧 신문매체의 가치이며 이 가치와 일치하는 수용자를 형성하는 것이 지금 한국사회 신문매체의 역할이다. 신문매체의 광고주 구성을 보면 곧 그것이 그 매체의 가치라고 해도 어떠한 오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언론의 공익성, 그리고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매체 윤리다. 이를 기초로 해서만 언론의 자유는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특정 기업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집단에 의해 매체의 가치가 결정되면 결코 파당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사익성이지 공익과는 요원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한 공공담론의 장소가 부재하게 된다. 소위 실재하는 사실성, 진실한 정보를 읽게 되리라는 수용자의 기대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 원초적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신문 매체는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텔레비전 방송매체들과 더불어 공적 담론 생성매체의 기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에게 과연 언론의 자유라는 표현의 자유권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첨예하고 중대한 문제를 낳는다.

 

물론 매체는 의사소통을 위해 특정 주체에 대한 허용 여부의 권한을 지닌다. 즉 그들은 자기가치에 입각한 공론장을 조성할 수 있다. 그런데 태생적 문제가 있다. 어떤 정보를 전달할지 전달하지 말지를 선택하는 문지기 기능(Gate-keeping)’은 은폐와 노출, 특정 시점에 주제화하는 등 선택의 자의성이라는 속성의 문제이다. 때문에 조중동을 위시한 황색 매체들은 검찰권력에 대한 어떠한 현안도 기사화하지 않음으로써 시민적 물음을 외면한다. 이 기사 선택의 자의성은 소위 언론매체의 출생적 흠결이다. 여기에 선택된 기사의 서열화인 안건 설정((Agenda-setting)’은 이 자의성을 심화시킨다. 매체의 가치에 반하는 인물이나 상황의 긍정적 요소는 지면의 배치와 기사의 규모를 축소 차별하고, 자기 생존에 유익한 권력은 1면에 대량 할당 게재하여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다. 지면배치, 기사 분량, 노출빈도를 매체의 유불리에 따라 기사화하는 것이다.

 

[상호 매체성의 일례: 중립적이라 생각되는 사진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이 저널리즘의 

맥락에서 의심쩍게 되고 동시에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인식된다. - 책 282쪽에서]



신문 매체의 이러한 자의성은 이처럼 태생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매체의 혼종성이라는 일종의 취급방식의 문제인데, 사진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호 매체성을 이용하여 왜곡, 조롱, 기만을 공적 담론장이라는 신문매체의 외면적 권위에 올라타 자행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들과 지향하는 가치가 다른 국회의원이 사망하자 그 기사 옆에 파안대소하는 스포츠인의 사진을 게재하여 공공연히 조롱하는 것이다. 전혀 관련 없는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가 결합할 것을 편집자가 의도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텔레비전 매체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각이미지와 신속성 측면에서 텔레비전은 신문을 능가한다. 소위 종편채널이라 해서 이명박 정권이 탄생시킨 무수한 방송채널들(채널A, TV조선, YTN etc.)들은 그야말로 상업적 이익을 지향하는 공익성을 담보하지 않는 매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편향된 가치는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그대로 발휘한다. 수구적 수용자들은 항상 이 상업채널들의 시사프로그램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강화한다. 이 강화는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극우화한다. 현 정권의 극우화는 이들 집단에 기초해서 탄생했기에 매체의 흐름과 같이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여기에 장소의 구속성마저 완전히 벗어난 인터넷 기반의 소셜 미디어는 물론 인터넷 포털들은 그야말로 그 어떤 매체도 지니지 못한 모든 매체가 지닌 특성을 통합하여 갖추고 있다. 문자 정보의 동시성, 시공의 초월성, 하이퍼 텍스트성, 구술대화의 즉시성, 책과 잡지 등 매체의 전문성, 정보의 양적 거대성과 검색의 용이성까지 총합적 최종 매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원본 위조와 조작 능력까지 지녔으며, 그 파급범위는 전() 지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매체는 개별 주관에 의한 매체를 기반으로 한다는 객관적 담보의 불확실성은 물론 조작과 위조의 개연성까지 더해진 정보들이 난무한다. 바로 이것들이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에 올라타 세계 인식을 왜곡하고 위험한 세계상을 전파한다. 바로 모든 매체 본연의 속성인 광범위하게 전파될수록 무의식화되어 판별, 비평의식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민대중의 인식은 모르는 사이에 왜곡되어 판별력을 상실한다.

 

3. 맺는 말

 

다음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책의 소회를 마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에 갇혀있다. 관점은 인간이 무엇을 어떤 시각에서 인식하는 지를 규정한다. 개별 인간의 세계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세계의 일부분에 제한되어 있다.(297)”  즉 세계는 인간 행위를 배경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지평이며, 그것은 곧 매체의 영향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매체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지 중심이 설 것이다. 오늘의 매체는 거의 대부분 진실과는 한 참 떨어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 현혹되어 자기의 이성을 넘길지 말지는 각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결국 앎에 대한 게으름은 곧 개인은 물론 사회적 파국으로 직결되는 곤경에 우리들을 처하게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프로이트의 말처럼 결핍을 초래하는 욕망에 기초한 우리들의 문명은 이 결핍들을 메우기 위한 끝없는 대체물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매체가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리고 이 사회공동체 개인인 우리들 또한 쾌락원칙 너머, 새로운 이상을 향한 전환을 시작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이러한 읽기와 인식을 순환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 인식은 언제나 사회적 개념, 즉 의사소통으로 중개된 개념에 따라 각인되어 왔다. 정말 똑똑해져야 건강해지는 세상이다. 어리석은 한 번의 투표가 오늘 우리들의 세계를 얼마나 퇴행시키고 있는가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체의 역사 읽기라는 이 매체사 입문서는 매체 일반에 대해 우리들의 앎을 조금은 증진 시켜준다.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여 권력의 선전도구로 삼으려는 권력, 도서 출판과 영상물 제작에 금지어를 명령하는 기만적 사전 검열을 획책하는 파렴치한 권력이 이 땅의 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파괴하고 있기에 이 매체사는 현실을 걱정하고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유익한 지식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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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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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의 저주로부터 행복을 빼내라!”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치, 예술, 역사, 문화 등 제 분야의 시선을 기저로 한 아홉 편의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들로 구성된 가히 빛나는 지성들의 향연집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꽤나 많은 유토피아의 기획이 있었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또한 이를 현실의 사회공동체로 실현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도 알고 있다. 이러한 기획들과 현실화 추구가 실패한 것은 왜일까? 왜 이러한 시도들이 그 기획된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일까? 현실의 인간들과 인간사회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기획은 캘리포니아줄리엣 플라우어 맥케넬교수의 지적처럼 미성숙하거나 위험할 정도로 순진하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떤 실질적 헌신에서 벗어난쾌락원칙에 따르는 충동의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기적 생각 때문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유토피아를 놓지 못하고 매료당하는 것일까? 과연 도달 가능한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문명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의 발로이기만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 불가능성의 순회하는 환상을 좇는 것으로부터 우연히 어떤 새로운 정신적 창조물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려는 낙관적 의도인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렇듯 그치지 않고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는 지성의 열망에 내재된 정신을 탐사하는 작업들이다. 그것은 어떤 돌파구의 발견이거나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을 향한 모색이기도 하며,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토대로부터 역설적인 자기 이해에 터 잡은 인류의 주류 혹은 지배적 담론의 파기이고, 사유 가능한 지대를 향한 인간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남의 기도(企圖)이기도 하다.

 

아홉 명의 필진은 철학자 에티엔느 발리바르로부터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다니엘 버저론등 그 화려한 명성만큼 빛나는 사유들을 펼쳐내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이 관심을 갖는 주체에 대한 탐색을 기초로 한 인식체계의 대전환적 검토이며, 인간과 인간 역사의 들여다보기이다. 이상(理想)사회 혹은 이상국가의 담론에서 토머스 모어유토피아(Utopia)를 배제하고는 만족의 과잉된 풍요를 자유롭게 즐기도록 가공된 장소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기초로 한 국가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역사학자 클로드 마조릭이 정의한 유토피아의 세 기능(106쪽 참조)처럼 모어는 그 사유의 출발로 타당할 것이다.

 

이 책의 발제 논문격인 투셰(tuche)와 유토피아에서 라이언 앤소니 해치사회정치적 목적론의 최종지점이자, 공공의 안녕과 인간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모순들을 궁극적으로 해소하는유토피아의 기획은 최종적 성취를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며 기성의 유토피아 기획의 한계를 논의한다. 아마 괴테의 말처럼 화창한 날이 계속되는 것 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뻔한 비천한 인간성의 한계 때문이다. 모어의 책 내용을 소환해보자. 모어가 묘사한 이상국가는 주체를 희생시켜서라도 평등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정치적 급선무가 실현되는 국가다. 즉 개별 주체의 향유에 대한 단속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라는 점이다. 결국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 개별 구성원의 쾌락이 봉쇄되어야 진정성이 유지되는 체제의 본래적 취약성을 지닌 기획이라는 점이다. 이 내재된 긴장 때문에 유토피아는 균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투셰는 바로 이처럼 주체가 우연적 실재와 조우하게 되는 것으로서 제아무리 완벽하게 방어벽을 두른 폐쇄된 공동체도 무언가의 돌출, 길들여지지 않는 무엇으로 인해 붕괴된다. ‘줄리엣 플라우어 맥케넬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관하여는 이 발제논문의 심화편으로 읽히는데, 문명에 고유한 불만을 치유한다는 완벽함을 목표로 한 공동체의 기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루소의 입장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장소를 상상해 낼 상상력이 없음을 주장한다.

 

또한 영원한 에덴의 약속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려는 변화하거나 변형되지 못하는 죽음 충동으로서, 무시간적 존재의 상태로서의 순간이기에 어디에도 없는, 즉 모든 곳에 있다는 무시간성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균열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설혹 성공한 유토피아일지언정 중대한 희생을 반드시 요구하게 됨으로써 언제나 일정하게 특정한 요소에 대한 총체적 금지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결국 현실 원칙에 결합되는 쾌락원칙에 이끌린 충동에 의한 것을 피하기위해서는 새로운 만족과 다른 형태의 향유를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현 인류가 물질적 풍요와 자유, 만족과 같은 물질적 구성이라는 인간성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줄리엣은 이 영구적 불행을 새로운 주이상스의 경험으로 바꾸는 일을 예술이 감당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결국 논문의 필자는 경험의 변형을 감당하고 목격하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에 유토피아의 환상을 전가하는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에서 유토피아로 구축된 사회구조의 이면을 보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성이 되는 차원을 회복시키는 움직임으로서 잠재성을 강조한다. 즉 그는 기억에 출몰해서 재상연되기를 요구하는 역사적 유령으로서 인간을 구원하는 단순한 환상을 넘어선 공상의 장소로서 유토피아를 피력한다. 이를 상상할 수 있기 위해서 'G.K.체스터톤' '뒤로 사유하기, 즉 육체로부터 이탈되어 순수하게 응시로만 남아서 자신이 부재한 세상을 관찰하는 응시, 인간적 함수가 풀려나오기 이전의 지각을 훈련하는 방법을 동기화 할수 있는 상상의 방식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이해를 돕기위해 사례로 든 무역센터에 충돌하기 수분 전 승객들을 찍은 화면이야말로 물자체로 사물을 보는 비인간적 눈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응시다. 나는 이 사후적 사태로부터 상상하는 어떤 순간의 명료한 직시가 유토피아의 잠재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죽음에 임박한 경직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면 유토피아는 줄리엣의 지적처럼 단지 죽음충동,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지 못한 게으른 현실의 원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이 쓴 혁명과 반복은 정치적 시의성 때문에 비교적 흥미롭게 읽게 된 글이다. 그는 역사의 반복은 있다고 믿는다. ... 반복되는 것은 확실히 사건이 아니라 그 반복적 구조이다.”라며,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첫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는 첫 문장을 언급하며 과거와 현재의 구조적 유사성이 있을 때 반복되는 역사의 내재적 구조를 거듭 강조한다. 이 역사적 구조의 반복성이라는 통찰을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세계 역사적 단계를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주의-자유주의-제국주의-후기자본주의-신제국주의로 이어지는 국가와 자본의 구조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반복성의 발견이다. 이 단계는 두 계열의 구조로 양분할 수 있는데, 자원과 시장을 향한 투쟁이 또 다른 세계 전쟁이나 저항운동으로 이어지는 A계열과 다중봉기의 혁명을 통한 복지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채택되는 시민적 긍정의 세계가 열리는 B계열의 단계이다. 그의 분석이 가리키는 오늘의 반복계열이 속해있는 구조적 반복을 읽으면서 이 직면한 부정적 사태를 어떻게 순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피할 길은 정말 없는 것인가? 우리들은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쾌락의 원칙 너머를 상상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인 것일까?

 

어쩌면 정신분석가인 캐나다 라발다니엘 버저론교수의 유토피아와 정신병: 초월로의 탐험은 이 불가능한 것, 인간 경험 너머의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을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가능성으로의 초대일 것 같다. 개인의 요구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차원을 넘어서고 나르시즘적 야망과 육체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상을 인간에게 투사해줄 초월에 대한 관념적 이상의 사용을 말하는 신경증적 전략은 새로운 인간성을 가능하게 해줄 어떤 고안을 상상할 수 있게 돕는다.

 

인간의 기능과 사회적 연결망의 구조 사이의 모순을 거부하는 정신병자의 믿음에서 말이다. 도덕적, 문화적 가이드라인을 결정해서 사회적 수용 가능한 명령과 관념적 이상을 강요하는 주인의 담론에 대항하는 기획인 모어의 이상사회로부터 다니엘 교수는 유토피아를 댓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가를 읽는다. 그것은 욕망을 쾌락원칙의 지배 하에서의 관능으로 제한하는 것, 사회의 금지 구조 내에서 사회적 연결망이 가능하게 해주는 만족을 준수하는 것으로서, 바로 자기 욕망의 거부라는 값이라고 지적한다. 즉 유토피아란 주관적 욕망과 초월적 대상을 향한 모색을 억눌러야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는 자명한 논리다. 정신병자의 해결책은 결여의 억압이다.”라는 선언처럼 문명의 건설은 강력한 충동의 비-만족을 상상한 규모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이에대한 역사적 사례로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수학자 존 내쉬<게임 이론>이야말로 인간성을 재난에 빠트릴만한 혈투를 없앰으로서 지구상에 균형을 재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 이론으로서, 그야말로 유토피아 실현의 가능성을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들을 제약하는 사회적 담론 안에서 우리의 행위를 방해하는 검열된 주이상스를 묶어둘 정박지를 세우지 못하지만 내쉬나 루소, 콩트, 니체 등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사유를 공동체의 사회적 연결망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사회적 연결망으로부터 배제되고 거부된 주이상스(享有)의 대상을 가시화하고 번역할 공간을 추구함으로써 이상적 장소에 도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다면성을 존중하는 의식이라는 무엇일까? 내 주이상스와 이를 거부하는 사회와 연결되는 인간적 문제를 절합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머리로 이해된다고 실천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에티엔느 발바르정의와 평등; 정치적 딜레마? 파스칼,플라톤,마르크스는 어쩌면 우리들이 직면한 무수한 사회적 흠결로서 유토피아를 상상케하는 부정적 동력인 전형적인 사회적 갈등으로서의 개념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사회적 평등의 문제는 정의를 둘러싼 대립을 낳는다. 이 두 대립하는 개념으로부터 힘의 지배, 정의의 주체를 생산하는 법적 세계와 이 법이 추구하는 법의 이상에 대한 논의가 시민의 정치적 사유를 성찰로 이끈다. 한편 철학자 애드리언 존스턴교수의 미래로부터 오다에서는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외없이 불가능한 일관된 통일성을 욕망함으로써 지속되는 잘못 인식되고 파행적인 꿈으로 환원되는 것인가?”라는 물음 하에 과거의 모든 정치적 보상적 논리로부터 추출된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 상황은 진정으로 비-경험주의적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라캉의 반-유토피아주의를 빌어 낡은 욕구를 재상산하는 메커니즘의 폐지를 주장한다. 이 순환적인 메커니즘을 폐지하려면 이것을 폐지할 욕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조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른다.

 

아마 내 안의 익숙한 쾌락의 원칙, 주이상스를 떨쳐내는 것에 감히 나설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혹 내가 이 원칙 너머의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갈지언정 그 누가, 이 사회와 인류 모두가 과연 나서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에드리언 교수의 말마따나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귀싸대기를 한 대 맞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들이 잠겨있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일지도.

 

결국 아홉 명의 필진 모두는 그 논리와 이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욕망 너머의 다른 어떤 것을 향하는 욕망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부터 거칠고 긴장된 공격을 제공하는 특수한 사건들의 놀라움 사이의 우발적 충동을 통해서 해로움의 신선함을 위한 상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쾌락 원칙의 경향에 연결된 제반 사항들과 연결을 끊는 윤리와 정치를 어떻게 착안 할 것인지가, 그에 대한 인류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지 여부에 진정한 미래, -장소의 유토피아가 아닌 진짜 이상 사회가 성취될 것인지도. 그의 표현처럼 우리들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이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오랜 소망과 몽상에 가해져야 가능한 것일 게다. 인간, 인류가 꽁꽁 얽매여 있는 꿈의 종말이 시작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 일 것이다.

 

이것은 행복해진다는 익숙한 쾌락원칙이 부과하는 기획으로서 유토피아가 아니다. 결코 인간은 자신들의 본질인 주이상스를 정복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유토피아의 기획이 불모인 것은 아니다. 쾌락원칙에 따르는 유토피아는 그 본질 때문에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이 다채로운 사유들은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문명적 불안을 낳는 궁극적 원천에 대한 숙고로 이끈다. 어쩌면 이 책은 현재의 인류인 우리들의 향유를 새로운 경험의 주이상스로 바꾸는 사고의 실험이며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곳, 다른 가치를 생각하는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바로 오늘, 인간 사회의 불안과 갈등, 불협화음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욕망의 저주를 고찰하는 빛나는 유토피아의 모색들과 함께하는 영예를 누린 것에 감사하게 되는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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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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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말았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경험은 내겐 최초의 사건이다. 물론 읽기위해 샀던 책이니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이 나라 정치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해방된 후 미군정 치하의 황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노의 피로감이 반복되는 것을 조금은 피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가의 산문집 환승 인간을 읽게 됨으로써 기억의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살아났다. 아마 산문집에 피력된 의도들 - 들끓는 어떤 것들, 어쩌지 못하는 슬픔들에서 비롯되는 복수심 등 - 이 작가의 소설 속에 숨겨져 보관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 문장을 썼을까? 이 글은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에 대한 조금 더 다가선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소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라는 문장이 몇 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글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Let the Right One in 의 한 대사이다. 작가 한정현에게 의외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던 중 지진을 느꼈을 때 오직 자신만이 영화관에 홀로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이어지는 기억의 연쇄들, 어렴풋 그 상황 속에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일한 느낌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은 혐오와 불의, 역겨움을 상징하는 한 인간을 처음부터 살해하고 시작한다. (물론 추리의 형식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썼더라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일제치하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덕분으로 미군정에 달라붙어 대학 강단 권력을 행세하며,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 제자 등 그들의 능력과 성()을 갈취하는 파렴치한이다. 제자의 글을 마치 관행인 듯 자신의 글로 도용하면서 능력을 착취하고, 한 때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여성의 과거를 빌미삼아 성노리개 취급하며, 미군정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에 방해되면 좌익몰이 놀이로 타인의 파괴를 일삼는 인간이다.

 

피살된 교수 윤박은 미군으로부터 살해되었음이 당사자의 자백으로 이미 밝혀져있으나, 친미의 탈을 쓴 일제부역자들인 우익 기생권력은 이러한 분께서 동료인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괴소문이 서울 휩쓸 것이라며 좌익세력에 뒤집어씌울 기회로 삼는다. 살해 용의자로 윤박과 관련된 세 여인을 지목하고 일본 경찰의 개였던 말단 형사출신이었으나 종로경찰서 수사팀 실권자가 된 주구(走狗)가 범죄 조작을 지휘한다. 범인인 미군은 일찌감치 본국인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좌익세력의 붕괴를 위한 공작에 착수하는 것이다. 조국 문학의 근대화를 위해 돌아온 명망있는 학자를 살해한 마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데, 살해용의자로 지목된 세 여성의 삶과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억압받는 당대 여인들의 모습이 흐르고, 한편으로는 이 과정을 수사하는 검시의인 가성과 기자 운서의 서로 함께 빛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믿음, 사랑의 이야기가 한정현표 낙관,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에 기초한 진짜 삶의 실천을 현시한다. 아마 이 두 축이 교호하는 중심 소재인 피살된 윤박의 제자 현초의가 쓴 어린 마녀들, 마고의 이야기인 소설 <마고>와 한정현의 소설 마고가 결합하여 억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들,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이 빼앗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낙관을 말한다. 그것은 비록 이겨내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 것일지언정 기억하고 말하고 있음, 바로 가희가 가성으로, 가성이 다시 운서로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무조건 살아있음의 의지일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밤중에 한낮 같은 빛이 생긴 거리를 보며 가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여성,퀴어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하지만 언어가 비껴간 자리에서 사라지는, 혹은 오해되고 숨겨지는 이야기들인 미군정기의 폭력의 이야기이며, 불의한 권력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고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여성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은 무기력한 애수가 아닐 것이다. 아마 더욱 단단해진 복수를 향한 슬픔이 아닐까?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빛, 미군의 초토화 작전 하에 비오듯 퍼붓는 폭탄의 눈부신 섬광이 사라지면 나는 너에게로 가리라.”는 가성의 눈에 가득 들어 온 어디선가 떠오른 낮달, 그 기억이 살아 세대를 그침 없이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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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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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악취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소설,

-열악한 뇌세포의 강제 노역을 통해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가히 영묘한 작품이다!


 

소설은 도입부에서 배경이자 제재(題材)이며 상징적 주제어이기도 한 황니가(黃泥街)’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황니가는 아주 더럽고 지저분했다....하늘에서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1년 사계절 내내 시시각각 떨어져 내렸다.“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되듯 소설은 시종 악취와 더러움, 징그러움과 혐오를 맴돈다.

 

거리는 너도나도 마구 갖다버린 쓰레기로 넘쳐나고, 황니가의 인간들이 내지른 똥과 오줌이 넘쳐흘러 고인 똥물이 찌는듯한 더위로 끓어올라 악취가 진동하며, 구더기와 초록머리 파리, 모기떼가 득시글댄다. 아마 이렇게 황니가의 환경을 옮기기 시작하면 역겨움으로 구토가 일어나고 없던 질병도 전염될 정도이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 죽음을 타인에 대한 음모와 질시, 그릇된 확신, 그리곤 자연물에 깃든 미신적 허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거주민 자신들의 방기를 결코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고양이, 개들의 사체가 방치되어 썩어가며 내는 완강하고도 침투력 강한 냄새가 지면을 넘어 풍겨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머리를 뒤흔들게 된다. 집들에는 쥐가 들끓고, 검은 독버섯이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리며, 천장에서는 바퀴벌레가 우수수 떨어지고, 곳곳에 구더기가 들끓는다. 그런데 황니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렇다 할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외부 요인에 어떤 문제나 해결책이 있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모여 하는 말은 터무니없이 뜬금없다. 동지들 이 문제의 성질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 황니가의 실상은 정말 너무 심각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는 원인의 추정은 완전 동문서답에 가깝다. 도시의 커다란 종이 밤새 미친 듯이 울려 댔어요.”, 종이 울린 것과 황니가에 닥친 역병과 주검들, 온갖 해충과 질병원들의 창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소설은 왕쯔광 사건과 왕쓰마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서사를 이끄는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자는 황니가의 실상을 조사하려 왔던 인물로 추정되는 존재가 남긴 황니가의 회생불가능한 더러움에 대한 지적이 야기한 불안이었다면, 후자는 한 존재의 죽음 또는 실종에 대한 실존과 부존의 설왕설래이다. 왕쯔광 사건이 인심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는 황니가 사람의 말은 마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엉뚱한 진단으로 치닫는다. 노선문제는 중대하게 시비를 가려야 할 문제입니다.”라며,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이 황니가의 오염된 환경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정파적 노선 문제가 되어버린다.

 

한편 왕쓰마를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 부재했던 가상의 인물로 처리함으로써 그 죽음 또는 실종의 규명이라는 본질의 차원은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이 두 소재로부터 공허한 정치적 논리를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질을 엉뚱하게도 정쟁으로 돌리거나 사실성, 실재성을 부인하며 가짜, 환상으로 몰아가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부패한 정치의 일상적 난맥상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명백한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에서부터 똥 냄새, 역병, , 박쥐, 파리 구더기, 바퀴벌레, , 거미, 고양이, ,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기괴한 질병과 죽음, 세상 모든 것을 쩍쩍 갈라지게 할 만큼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그치지 않고 사납게 부는 바람, 그리고 기괴한 상황들이 파편처럼 깔려 독자의 인식망에 잡히지 않는 의미들을 음험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상징적 소재들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해독하려다가는 아마 이 소설 읽는 것을 얼마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풀가동한 뇌신경세포들이 녹작지근해져 더 이상은 작동하려 들지 않는 상태임을 느낄 정도로 심취했으니 말이다.

 

찬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결코 논리적 이성에 의해 덤벼들지 말라.’라고 했다든가? 그러니 감정적 직관, 있는 그대로의 전달되는 느낌에 의해서 읽으면 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민감하게 분석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버리면 아마 이 소설은 그의 말처럼 어떤 인식을 가져다준다. 인간 사회, 혹은 특정한 사회(중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것이며, 1960년대의 씻기 어려운 깊은 인민의 상처를 만들어낸 문화대혁명의 폭력적 광기와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 혼돈의 시대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집 창문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았다면 그 집은 독사를 기르는 집으로 지목되고, 파리를 먹기 위해 등을 켠다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밤에 등이 켜진 집 문밖을 어슬렁거리며 돌멩이를 던지면, 후일 그 돌멩이를 던진 행위는 일종의 음모가 되어 조사 대상으로 변질된다. 보잘 것 없으며,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는 것들이 역병과 죽음의 원인과 결합되어 음모와 조사 대상의 사건으로 확장되고 쓸데없는 행정과 사법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돌멩이를 던진 일이 일종의 음모라고 생각해. 나는 이미 결심이 섰어. 이 일을 조사해서, 물이 마르면 바위가 드러나듯이 진상을 밝히고 말겠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계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희화된 정파적 생각과 행위는 그야말로 우습고 교활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우리네 정치의 실상과 다르지 않음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왕쓰마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나?”라는 구청장의 물음에 황니가의 한 인물은 물론이지요. 황니가처럼 복잡한 동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동네입니다. 예컨대 아직도 바퀴벌레를 먹으면서 생활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오는 식이다. 답변에는 황니가의 실상이라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지만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도 답변된 것은 없다.

 

어쩌면 답변아닌 답변을 통해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부적당해 보이는 것의 실체에 뛰어듦으로써 비로소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작가의 요청이라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정말 영묘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점이 구역질나고 추함에도 이 소설을 우아하고 품격있는 작품으로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무수한 사유의 함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하고 절망의 양상들로 채워진 소설은 기꺼이 열악한 뇌세포에 고된 노역을 강요하며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우리네가 처한 작금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이란 바로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황당무계, 기상천외한 맹랑함이라 할 것인지도. 이 작품을 읽다가 시선을 돌린다면 그건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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