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일본탐정기
박덕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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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를 역사소설의 대상으로 한 것만큼 이 작품은 낯설다. 인구에 회자되기는 하였지만 세속의 인물이 아닌 불가(佛家) 즉, 성(聖)에 속한 인물이라는 선입견 탓에 그리 본격적인 관심을 갖지 못한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속인도 아닌 스님이 이웃나라를 탐정(探偵)한다니 호기심을 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품에 진입하자마자 우울함이 몰려온다. 시대적으로 임진년 및 정유년의 조일전쟁을 전후하고 있으니 무능함을 넘어 무책임하기까지 한 당시의 국왕은 물론 사대부들의 몰염치와 파렴치까지 더해져 그 비열함이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이 짜증을 피할 도리가 없는 연유이다.

작품은 허균, 이달과의 친교로부터 시작해 억불숭유책을 쓰던 조선사회에서 유학자들과도 폭넓은 교류와 주자학에도 조예가 깊어 유교와 불교, 소위 오늘말로 하면 통섭에 가까운 폭넓은 학문적 식견을 소유한 유정의 인물됨과 전쟁 중 승군(僧軍)으로 스승 휴정대사를 이어 구국의 역량을 발휘한 호국승려로서 조명한다. 사실 조선의 왕과 사대부 중심인 주류의 역사는 수치스러움과 오명(汚名)의 기록이다. 전쟁 후 대마도주를 비롯한 도쿠가와 막부의 조선과의 강화제안은 피해의식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공포와 죽음, 위협으로만 느껴졌을 터이다. 결국은 천민으로 치부하던 승려인 유정에게 위험이 내재한 외교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조선 지배층의 야비함을 드러내는 대표적 예라 하겠다.

이 소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사실 너무도 단순명료해서 그 의도를 그냥 외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외형적이다. 어쩜 소설의 이야기에 내면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서걱거림같은 것이라 할까. 그 첫째는 부산의 다대포항을 출발해 대마도에 도착한 사명대사 일행이 전쟁을 도발한 침략국으로서 일본이란 나라와 그 구성원인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하려하지 않는다는 점의 표면화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를 통해 20세기 제국주의 야만성에 유린당한 아시아 나라들과 국제사회를 향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 오늘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식과 경계의 의미에서 일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승려가 왕과 사대부들을 대신하여 성취한 외교적 업적을 통해 유정이란 인물의 역사적 재조명의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의 의도를 배제하면 이 소설은 사실 허망하고 허름하다 할 수 있기조차 하다. 간간히 뱉어내는 역사의 단편적 일화들, 이도다완이나 도쿠가와 막부와 덴노(天皇)의 관계, 일본의 소소한 사적(史蹟), 일본의 주자학 전래, 조선옹주 등 피로들 이야기, 이후 조선통신사의 시효가 되었다는 사적 의의등 문학적 해석이나 향취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역사관광 가이드 같은 기록만 남는 것이다.

물론 대마도의 한반도와 일본본토와의 지리적 거리처럼 일본보다는 우리의 문화적, 경제적 배려에 의존했던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심층적 고찰과 같은 문제의 제기도 엿 볼 수 있으며, 당시대의 일본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조명으로 일본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의 기반제공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문학이지, 역사에세이나 인물평전이 아니기에 주제와 이야기가 서로 분명하게 결절되어 존재하는 것은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요인임에 확실하다.

마치 소재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 하나씩 짜깁기하다보니 누더기임이 선명하게 인식되는 것 같은 남루함마저 느껴진다. 유정이란 인물의 삶의 본질적 탐색이나 역사적 진정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승려의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외교사의 한 토막이야기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양호한 대중용 역사 참고문헌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문학적 향취가 무척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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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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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평생을 함께해 온 반려자가 나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래서 그 주검이 문득 나의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막 끓인 커피향이 감돌고 따뜻한 체온이 머무는 침대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이 주는 안정감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 때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남편을, 바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식하는 순간, 이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살아있는 자의 당혹스러움, 그 혼란의 시간을 우린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소파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온기를 잃어가는 남편‘쥘’의 주검을 두고 ‘알리스’는 쥘과의 이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되뇐다. 오십 여년을 함께 해온 동반자를 선뜻 자식들에게, 친지에게, 장의사에게, 목사에게 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쥘의 죽음이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들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죽은 게 아니다.”아마 오랜 세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들이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저장 될 수 있는 그런 시간, 그녀에게 남편이 온통 흘러들어올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은 차마 남편의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못하고 차갑게 굳어가는 남편의 주검을 두고 자신만의 이별의 시간을 보내는 하루의 이야기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묻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고 용서하는 화해의 시간이 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과 증오, 그러나 그때만큼 사랑했던 적이 없노라고 고백하며, 살아있는 당신보다 죽은 당신을 떼어버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쉽다고 말하는 알리스의 떠나보냄의 수긍은 시큰거림과 슬며시 흐르는 눈물을 동반케 한다.
익숙한 체취,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고 삶에 대한 충동이자 현실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쥘과 함께 얼음이 되어버렸으면. 그와 함께 빛을 꺼버렸으면.”하는 상실의 아픔으로 갈등하는 여인의 사무침이 내내 가슴에 울린다.

한편 남편과 규칙적으로 체스를 두던 아파트 아래층의 자폐증 소년‘다비드’의 극도로 제어된 언어와 행동이 알리스의 혼란과 망설임의 시간에 개입하여, 그 어떤 죽음에 대한 위로의 수다보다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되어준다.
“쥘 할아버지 껍데기”라고 죽음을 이해하는 소년의 표정, 두 명의 산 자와 하나의 주검이 마치“ 세 명의 성좌가 확정되어 있는 삶과 죽음 사이의 지대”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괜스레 목이 메어지기도 한다.

날이 기웃기웃 저물어가는 눈 내리는 밤이 오고, 정말 이별을 위한 완벽함이 도달한 시간,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뜻해요”하는 소년의 무심한 듯한 한 마디는 삶과 죽음과 대비되어 산 자가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평온함이 되고, 그래서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라며 쥘의 자리에 누워 잠에 빠져드는 소년을 바라보는 알리스의 표정에서 삶의 안식을 본다.

죽음이란 삶의 가장 큰 상실을 극복하는데 요구되는 다독거림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부부의 연을 맺고 세월을 같이하는 동반자의 증오와 사랑의 실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동적 작품이다. 단숨에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짤막한 소설이지만 그 감동의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고 오랫동안 가슴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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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마지막 날들
조제 렌지니 지음, 문소영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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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소리 없이 엄습하고 피는 조용히 흐른다.”  - 오델로 中에서

‘카뮈’하면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담배 한 대를 들고 있는 비스듬한 시선”의 익숙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애정과 무관심이 동시에 깃들어 있는 시선”,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시선에 깃든 무관심의 정체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1960년 1월4일 파리근교‘프티-빌블르뱅’에서 자동차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그 시간에 이르는 이틀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카뮈의 작품들과 작품 속 인물들, 그리고 그의 친지와 친구, 동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카뮈에 대한 그 어떤 글들보다 이해와 애정이 깊게 담겨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친구이자 출판업자인‘미 셸 갈리마르’가족과의 파리를 향한 이틀간의 자동차 여정 속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의 추억과 흡사한“기억과 재구성된 기억의 침묵사이에 고해”하듯이 과거의 시간을 풀어놓는다. 열병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어머니의 침묵’은 이 작품의 가운데 놓여 카뮈의 인생을 지배했던 삶의 지향점을 풀어놓는다. 아마 작품 도입부의 표현처럼 “어머니와 함께 보낸 기나긴 무언의 시간에서 비롯된”‘선천적인 불구’에 대한 해명이라 하여야 할까?

카뮈에게‘침묵’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소리를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언어를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침묵,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헛된 연민 뒤에 갇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 말을 하고 싶을 때조차 결국 체념의 벽을 넘지 못하던 어머니의 고통에서 말과 침묵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카뮈를 발견하게 된다.
문득 이 작품을 침묵의 해석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알제리의 분리독립과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서로 다른 민족의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갈등하던 알제리의 프랑스인인‘카뮈’의 고뇌, 여기에 더해‘샤르트르’를 비롯한 파리 사교계의 비난과 조롱은 그의 침묵을 더욱 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그의 작품『이방인』의‘뫼르소’가 재판관의 노여움을 증대시킬까봐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것과, 양로원에서의 어머니 장례식 날의 자신의 모습과 행위처럼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는 진실함을 내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카뮈의 주요 작품들인 『전락』『페스트』『이방인』『안과 밖(表裏)』등의 인물들에서 카뮈의 전형을 찾아내고, 카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절대로 혀가 할 수없는 그 이상의 의미로서의 침묵에서부터 삶의 역경을 잠재우는 행복한 침묵, 내 뱉어지지 않은 수많은 말을 담고 있는 고통스럽고 귀중한 침묵을 통해 “소리나 감정의 부재가 아닌 가득 들어차 있는 상태”라는 것을.

지나가는 풍경과 상황,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상상의 공간과 마주하며 눈앞에 현실이 펼쳐지듯 이 작품이 그려내는 그 날의 카뮈를 보는 것은 감동이지만 그의 죽음을 알고있는 독자로서의 애잔함이 내내 콧등을 시큰거리게 하고 왠지 어떤 시원적인 고독함이 내내 가슴에 엉겨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다닌다. 그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우리네들에게‘부조리의 시간’과‘반항의 시간’으로서만 그의 작품을 기억하게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그에게 시작되고 있었음을『최초의 인간』이라는 완성되지 못한 그의 작품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이 소설에서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하는 그의 야심작으로 준비되던 작품을 우린 접할 길이 없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대변되는 알제리의 사랑, 그리고 그 속의 서민들의 침묵으로부터 도출해야 했던 회고로서 그가 펼쳐냈던 그간의 기억의 편린들을 완결하는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예기치 않은 운명을 진정 애석하게 한다.
어린시절의 가난과 그 가난한“빈민가의 서민들이 침묵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최초의 메아리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표시인 존재, 밀봉된 상자...”는 벙어리인 어머니이자 고향 알제의 벨쿠르 언덕과 아르카드 숲,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있는 알제리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최연소 프랑스인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는 침묵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감정적 비약을 담은 기사에서부터 시기와 질투로 졸렬한 비난의 앞장을 섰던 엘리트주의자들의 대표인 샤르트르같은 좀스런 사상가까지 “암담한 자기도취와 상처받기 쉬운 나약함이 한데 뒤섞여 있어서...省略..”라고 카뮈라는 개인에 대한 공격을 해대었으니, 그 극단적 야비함에 대해 카뮈는 정말 아무런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외롭고 감각적인 삶의 변두리에서 자신이 살고 떠들고 소외되는 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사람, 또한 침묵의 의미를 알았던 20세기 실존주의의 커다란 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의 마지막 날들의 소묘는 가난한 프랑스인 아들에 관한 아름다운 서사로 가슴 깊이 새겨진다. 어쩌면 이 작품이 바로 “어머니의 존경할 만한 침묵에 내재해 있는 사랑이나 정의를 되찾으려는 한 남자의 노력을 작품의 중심에 놓으리라는 구상”이었던‘카뮈’가 미처 완성치 못한 『최초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마치 자전소설 같은, 그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고 작품 속 주인공들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진정 유효한 완성도 높은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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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진트리 2010-05-1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뵙네요. 저희 서재에도 가끔 들러주세요~

2010-05-18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뮤진트리 2010-05-14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 오늘 카뮈 좌담회 갔다왔어요. 소식 올리려고 하는데 만감이 교차하네요
'카뮈의 마지막 날들' 에 모든 이야기들이 다 들어있더군요. 그들이 말하는.
..자주 뵈어요.

필리아 2010-05-14 19:48   좋아요 0 | URL
자주 들러 좋은 소식 참고하겠습니다.^*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원석영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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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의 실효성은 인간 삶에 대한 믿음의 근원을 휘저어 그것의 유무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과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懷疑)조차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떠한 외부의 조건이나 억압으로부터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 최후의 가치이자 존엄성에 대한 방호막이라 여겼던 나에게는 황당하기조차 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고나 행동을 하는 것이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결정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이고 본원적인 불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오늘 그녀(그)와 데이트 약속을 하기위해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이 나의 주체적인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는 말인가? 바로 이 저술은‘아니다!’라고, 단지 자신을 보호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마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환상이 진화에 의해 선택된 인간 종(種)의 형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오류, 인간의 뇌에 정신과 영혼이라는 별개의 장치가 육신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발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으로 근본주의적 종교관을 지닌 사람들 이외에는 오늘의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는 지식이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뇌의 화학적, 물리적 반응의 결과와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일례로 만일“우리가 심장, 간, 소변을 의식적으로 조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몇 분 안에 죽고 말 것이다.”라는 지적처럼 우리의 기관들이 자율적으로, 즉 우리가 의식 및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종은 아마 오래전에 자연선택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환상을 진화의 과정에서 키워나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단지 뇌의  반응 결과에 불과한 것을 자기의지의 결과로 인식하는 것처럼, 인간이 도저히 통찰 할 수 없는‘설명의 곤경’에서 출현한 신(神)과 종교라든가, 인간에게 미리 허락된 수명이 한정된 것이라면‘이 세계’가 아니라‘저 세계’에서 계속 살수 있다는 환상은 인간 생존에 있어 전적으로 유용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저술의 핵심 논지는 인격체로서의 인간과 그의 인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여부는 “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우리의 자의식, 욕망, 기대, 기쁨, 두려움, 공포, 꿈은 결국 진화에서 인류를 오늘날의 인류이게끔 만들어준 기관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신경생물학적 지식의 배경에서 정신현상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로 뇌의 표현 혹은 뇌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의지의 이념은 우리 뇌가 만든 것이며,‘자유의지’가 독립적 실재라고 가정할 만한 어떤 불가피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저술의 주장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인용되고 등장하는 철학과 과학을 종횡 누비며 증거하는 이야기들은 지적 재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책에 붉은색 밑줄을 긋다보면 전체가 붉은색으로 변할 정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재미있는 인간 사고의 모순 례를 하나 소개하면, “‘나’의 다리가 아프다”라거나 “‘나는’ 두통이 있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는 생각하는 나와 다리 또는 두통을 느끼는 두뇌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표현이다. 어떻게 나와 다리가 다를 수 있을까? 즉 “다른 모든 기관이 복종하는 사고와 느낌과 의지의 중심지인 상위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사고의 예인데, 인간은 이처럼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 프로세스를 진화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뇌의 특정한 물리적, 화학적, 생리학적 과정에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책임이란 도덕적 의무의 논리를 들이댈 수 있는가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살인자가 단지 뇌의 속박에 의해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음을 주장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대다수의 인류사회가 수호하는 형법은 물론 사회의 기간시스템을 유지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일례로“소녀를 강간하고 죽인 살인자가 자신은 어떤 자유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은 유전자와 뉴런과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 것일 뿐”이라 항변한다. 그럼 살해당한 소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를 똑 같은 이유로 살해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할 것이고 이는 살인의 연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소위 ‘피의 복수’가 계속 될 것인데, 우린 무슨 근거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자유의지 없음을 그것은 단지 진화적 유익론에 의한 환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의 도덕관과 법제도를 지탱하는 논리가 설 수 있는 토대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살인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그들로부터 살해당하지를 원치도 않는다. 그래서“우리는 제재를 통해 그 자신이 요구하지 않을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인간사회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도덕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역시 인간이 야기하고자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인간의 무기력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여전히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유의지라는 실용적인 환상의 그늘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자유의지는 단순히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온갖 종류의 트릭을 적용해 의미없는 우주에서 우리 존재의 무의미성을 잊게끔 해준 것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는 저자의 자유와 존엄성의 저편을 그리는 긍정의 희망을 지니기도 한다. 이 저작은 사람의 이해와 관계에서 빚어지는 현상들, 사회제도와 도덕적 규범, 나아가 정치와 문화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각적인 모습을 성찰케 해주고, 보다 겸허하게 우리, 아니 나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사회와 제도의 방향을 새로이 궁구(窮究)케 하는 계기와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며, 진화론의 계통발생사적 인간 본성에 대한 지적 탐구도 가능케 하는 진화론적 과학철학의 진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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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님의 글을 쭈욱 읽다보니 문득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에 나오는 '심리학'에 관해 언급한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 * *
먼 미래에는 ······ 여러 가지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개개의 정신적인 힘이나 가능성의, 점차적인 변화에 의한 필연적 획득이라는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광명이 던져질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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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혹은 집단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선 아웃사이더나 勢에 쫓겨 변두리로 물러난 주변인”이건 작자는 이를 바깥으로 정의하고 안과 밖이 섞이고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세상을 말하지만 그 경계란 것이 임의적이고 무어라 딱히 선을 그어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안이면서 밖인 것이거나 밖이면서 안인 것이 사실 사람이고 사회이며 세상인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과 대상을 집단이 생각할 수 있도록 떠올리려는 기획으로서 역사의 場에서 공론화하는 작업은 정신의 균형과 상실된 가치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쳇말로‘1 등만 아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자조 섞인 대중의 표현을 뒤집어 1등이 아니어서 관심을 잃어버리고 무시된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이 모순어법이 더욱 진실된 언어로 다가올 수 있게 되고, 사람들과 사물 등 26꼭지의 관심으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들의 삶과 사회를 지탱하는 귀중한 가치와 정신을 일깨워준다.
“꽃향기가 벽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듯 정갈하고 높은 정신은 어떻게든 세상에 영향을 주죠”라는 수도원 수사의 말처럼 이 저작에 소개된 삶들이 품고 있는 가치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오늘의 왜곡된 시선을 시정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격렬하거나 자극적인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평범하고 수려하며 친근한, 아니 서정적이기까지 한 문장으로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만 있다. 읽는 내내 평온한 마음으로 작자의 글을 따라 시선을 옮기기만 하였다. 비판적 의식도 잠시 잠재우고 겸허하게 나의 이웃들, 내가 알지 못하는 삶들의 진실됨을 보며.
극장으로서는 국내 유일의‘사회적 기업’이라는‘허리우드 클래식’의 젊은 여사장의 노인을 위한 문화의 공간에 대한 의지와 노력에서부터‘생활윤리’로서의 유교를 말하는 성균관장까지 분명 우리들의 일상과 관습, 문화적 배경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무심했던 세계가 여기에는 있다.

연극배우만의 벌이로는 생계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 문화계의 속성을 일깨운다. 소비와 수요의 등식으로만 형성되는 스타지향의 문화상품화의 논리 이면에는 주연급 연극배우가 월50만원도 되지 않는 소득으로 살아가야하는 어둠이 있다. 역시 박태환이란 걸출한 수영선수 덕에 만년 2인자인 국가대표 수영선수에게는 박태환의 훈련 파트너라는 무지한 대중과 언론의 편협한 시각이 따라 붙고, 프리마나 솔로에게 묻혀 코리페, 즉 군무(群舞)의 리더인 20년 경력의 발레리나가“하늘거리는 튀튀(발레리나의 치마)를 처음 입으며 품었던 바래지 않은 화사한 꿈”과 가슴 속에 남은 서러움을 읽기도 한다.

우리들은 미디어와 산업 지배권력이 휘두르는 차별화에 무감각하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조달해대는 스타와 명품의 세계 뒤에는 바로 우리들, 세상에서 주목 받지 못하는 우리와 이웃의 삶이 기반하고 있다.
8000미터급 14좌를 국내 세 번째로 완등한 이는 세 번째여서 전혀 조망 받지 못한다. 8000미터 고봉에 이르렀을 때 “초월적 자연의 미학적 숭고함”,“자아나 인간 존재와의 철학적 대면”이라는 소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꿈과 희망이 어디 있어요? 아무 생각 없어요. 무사히 내려갈 일만 생각 할뿐”이라는 진솔한 소감처럼 포장되고 각색된 허위의 수사만 난무하는 드라마를 기대하는 우리의 무식한 욕망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한편 ‘천하대신 할머니’를 통해 우리의 무속신앙을 근대화에 희생된 민속전통문화로서 조명하기도 하고, 버젓한 향악기의 하나로 풀피리(草笛) 무형문화재를 소개하기도 한다.
역사의 바깥세계로 들어가면 사실 우리의 진실한 세계와 직면하게 된다. 스타의 세계, 1등의 세계, 주류와 지배권력자의 세계에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류가 만들어내는 기획의 바깥에 우리가 있다. 한국에 몇 안 되는 미얀마(버마)의 난민이 말하는 한국민의 참여의식에 대한 지적은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기도 한다. 안의 무지와 탐욕과 오류와 폭력에 저항하고 시정을 위한 밖의 노력은 여기에 수록된 사람들, 바로 우리들의 삶이 지속되듯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작자가 희망하듯이 안과 밖이 없는 세상, 다수자들이 잊고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진 것들, 국민적 기억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 집단적 가치의 이성이 무능력을 나타내는 지대에 갇혀있는 것들을 불러내어 다수와 역사, 즉 역사의 무대에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성하려는 정신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작자의 부드럽고 친근한 글 맛 이상의 진정함이 그득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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