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픽션 : 런던 시티 픽션
버지니아 울프.캐서린 맨스필드.헨리 제임스 지음, 김영희 외 옮김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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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통한 세계문학 여행이라는 시티픽션 시리즈로 파리 편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이 런던 편은 네 편의 영국 작가의 단편으로 엮인 작은 소설선집이다. 헨리 제임스는 사망 즈음에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인이니 조금 애매한 분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 활동기 대부분이 런던에서의 삶이었으니 그리 부적당하다고만은 할 수 도 없을 게다. 선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큐 가든으로 시작된다. 런던 근교 왕립식물원인 큐가든을 지나는 군상들의 행동과 대화를 세밀한 시선에 담아내고 있는 단편이다. 이 선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헨리 제임스의 진품을 읽으면서 어떤 공통된 시선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 감정 또는 심리의 섬세한 관찰 시선의 강렬함 같은 것이었다. 물론 관찰이 소설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 시선 자체가 작품 표면에 보란 듯 드러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헨리 제임스 (Henry James)

 

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이렇게 기지 넘치는 재미를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보르헤스가 편집한 바벨의 도서관시리즈로 간행된 친구 중의 친구, 1890년대인 그의 중기(中期) 작품으로 분류되는 나사의 회전과 같은 유령소설로 제한된 내 독서가 선입견을 가지게 했던 듯하다. 수록작인 진품(The real thing)은 초상화를 지향하지만 벌이를 위해 소설 삽화 그리는 일을 병행하는 화가의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두 남녀를 맞이하면서 그들의 인물을 품평하는데, 콧수염이나 외투를 직업적 관점에서 눈여겨본 내게 그는 유명인사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 유명인사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멋진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라며, 역설적 모습을 한 인물을 나름의 경험으로 축적된 실감의 구절처럼, 화가인 작중 화자는 타인의 작은 표정과 몸동작, 어조에 이르기까지 면밀한 관찰을 통해 자기감정과 마음을 교류하며 반응한다.

 

화자는 이러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두 사람이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삽화의 모델을 통해 돈벌이를 하려온 이들임을 바로 간파한다. 회화적 관점에서 나는 즉각 그들을 간파해버렸다.”는 그의 진술처럼 그들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하고, 이미 어떻게 다룰지 결정해버린다. 화가는 두 사람이 퇴역한 모나크 소령과 그의 아내임을 설명받지만, 삽화의 모델로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겸허한 소개와, 적극적이지만 완곡하게 자신들의 장점을 말할 때, 화가는 변화하는 관찰 결과를 통해 자기 작업과의 연결성을 검토한다. 귀족적 분위기를 갖춘 맵씨있는 사람들이지만 그에게는 이미 미스 첨이라는 타고난 위트와 변덕스러운 감수성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다채로운 인상의 모델로 변신할 줄 아는 고용인이 있다.

 

모나크 부인은 미스 첨의 낮은 신분이 귀부인역의 모델이라는 것에 당혹해하며, 자신은 귀부인에 더 적합한 모델임을 강조한다. 진품 말입니다. 진짜 숙녀나 신사 말이죠.”, 그들은 생계를 위한 벌이가 필요한 궁핍의 한계에 몰린 이들이었다. 화가는 그들의 절실함에 그 귀족적 형체의 소용을 고려하여 삽화 모델로 당분간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화가는 이러한 분위기가 작업의 실용적 국면과 어울리지 않는 예술적 효과가 발생할까 걱정한다.

 

모나크 부부와 화가, 그리고 조연격인 신분이 낮은 남녀 모델이 등장하면서, 모나크 부부는 삽화모델로 부적절한, 나아가 화가의 회화능력을 훼손시키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화가는 모나크 부부가 아닌 모델들에게 더욱 적합한 삽화모델로서의 능력에 매혹되고, 모나크 부부를 멀리하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은 화가의 작업장을 맴돌며 떠나지 못한다. 그들, 자신들을 진품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점차 가짜인 비천한 이들과 모델로서의 신분의 역전을 체감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끌고 있는 주도면밀한 관찰에 따른 화가의 심리적 움직임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아주 그만 끝내주는 소설이다. 진짜와 가짜, 결코 절대적 가치기준이 아닌 이 개념어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이 작품은 그가 사회적 소설을 쓰며 작가로서의 명성이 주춤하자 전환을 위해 희곡작품에 매진할 때에 사이사이 남긴 몇몇 소설 작품의 하나이다. 때문에 연극적 요소가 반영되어 그 실감성이 여타 작품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이 특색인 듯하다. 신분의 격이 삶의 수단을 저해하는 그 모순으로 혼란의 격변을 겪는 시대의 한 초상일 것이다. 제법 기억에 남는 작품 일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유품(The Legacy)또한 소설의 진행에 따라, 고위 정치관료인 길버트 클랜던이 차도에 내리다 사망한 아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의혹과 의심에서, 배신, 그 파국의 감정으로 치닫는 가히 통속적 재미를 성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아내가 주기를 바랐던 물품들을 모두 전달하고 마지막 유품인 브로치를 아내의 비서였던 시시밀러에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길버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득안고 추억에 잠겨 일기를 읽는다. 남편인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배려의 마음들이 가득 쓰여져 있는 일기를 읽으며,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위로를 느낀다.

 

그러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이니셜로만 지칭된 인물이 등장하다 그 빈도가 급작스레 늘어난 것을 느끼며, 알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시기와 의혹이 증폭된다. 이윽고 이니셜은 사라지고 라는 호칭으로 바뀐 인물이 동일 인물임으로 굳어지고, 그와 아내의 만남과 남자의 격렬한 동행의 요구가 있었음과 마침내 이를 거절하는 아내의 분열적 마음을 읽는다. 남자가 자살했음을 발견하고, 아내의 죽음은 바로 이 죽음의 동반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감정의 급진적 전환을 일으키는 일기의 내용과 병행하여 이야기의 진행 속도 또한 급격히 빨라지는 데, 이러한 속도에 휘말려드는 독자의 감성또한 아찔할 정도이다.

 

울프의 또 하나의 단편인 큐 가든(Kew Gardens)은 작가를 모르고 읽어도 버지니아 울프가 절로 떠오를 듯한 작품이다. 큐 가든을 스치듯 지나가는 군상들의 발걸음과 꽃나무에 기어오르는 달팽이의 이동이 대비되며, 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경이 우울한 인상에 젖어들어 들려온다. 허무와 부질없음이 팽배한 그 어떤 의식들만이.

 

캐서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The Garden Party)는 어떤 세계문학 단편선집에든 감초처럼 수록되어있는 작품이다. 부유한 중산층 가족의 가든파티 준비와 파티의 즐거움과 대비되어 이들의 저택과 멀지 않는 골목길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빈곤층 거주 구역에서의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이 내용을 채우고 있다. 셰리든 집안의 딸 중 한 명인 로라는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 일꾼들의 설치를 지시하기 위해 정원에 나선다. 그녀는 일꾼들은 저다지도 멋질까.”라 생각하며, 매번 춤 상대가 되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이 아니라 이들 일꾼들과 친구가 되면 왜 안 되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계급적 구분의 터무니없음을, 자신만큼은 어떤 차이도 느낀 바 없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꼭 일꾼 처녀가 된 기분으로 우쭐한 기분으로 즐겁다.

 

그런데 그날 동네 어귀의 청년이 마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집 안의 어느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해 어떤 연민도 지니지 않는 듯하다. 로라는 대문 밖에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파티를 열어요.”라며 파티가 이웃의 죽음에 대한 무례함으로 느껴져 당일의 파티 행사 취소를 요구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언니들은 작고 초라한 저 빈곤의 거처들이 이곳에 들어 설 권리가 없었다는 듯, 감상적으로 굴어봐야 막노동꾼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니.”라며, 파티의 취소를 용납하지 않는다. 파티는 예정대로 열리고 가족들과 초대자들은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아마 로라에게 선물된 우아한 검정색 모자는 중산층의 이러한 이기적 즐거움과 빈곤층의 불행을 대비하는 수치와 과시의 경계에 놓여, 그녀의 곤혹스러운 감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문상아닌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그녀가 처한 상황을 대신 표현한다. 계급의식에 대한 비난과 인생이란 것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가 낮게 흐르며 작품의 커튼은 내려진다.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시종 잃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그 어처구니없음의 실체, 가진 자의 생각없는 무례한 동정 등이 당대 영국인들의 인식을 넌지시 고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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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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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몸과 마음이 이 세계에 젖어들 때면 강신주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며 체제내의 질서에 빠져있는 나를 건져 올린다. 그의 글에서 어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기 위해 장자(莊子) 수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나의 상태를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강신주의 글을 통해 매양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다.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재발견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장자당대 제자백가들의 체제 정당화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긍정하는 강력한 인문 지성이라고 규정한다. 오늘 우리네는 삶을 잠식하고 있는 불의한 지배 권력이 야기하는 수많은 갈등의 상황들로 질식할 지경이다. 장자의 인공호흡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책은 내편, 외편, 잡편, 33편으로 전해져오는 장자의 구성을 오늘의 현실과 독자인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총 48편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내편의 시작인 소요유(逍遙遊)가 아니라 잡편 외물황천 이야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쓸모있음을 강요하는 오늘의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는 유용(有用)의 개념에 도사린 그 오만성과 탐욕, 폭력성의 이해가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용(所用) 또는 유용(有用)이라는 쓸모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장자전편(全篇), 즉 내,,잡편을 망라하여 빈번히 반복 등장한다. 인간을 유용성으로 구분하여 무용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는 이 폭력적 언어가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며, 지배질서가 악착스레 유지, 보존하려는 개념이기에 더욱 그 의미는 중차대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외편<천도>의 수레를 만들고 수선하는 윤편(輪扁)이야기내편<양생주>의 푸주한인 포정(庖丁)이야기처럼, 육체노동자인 당대의 소인(小人)이라 폄훼되던 인물들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던 일종의 정신노동자인 대인(大人)의 삶의 실천능력을 능가하는, 나아가 어떤 위대한 성인(聖人)보다 더 심오한 삶의 지혜를 지닌 진정한 대인임을 밝혀내기도 한다. 소인들의 조용한 자기혁명!, 대인/소인, 지배/피지배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혁명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가축화는 소위 문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야만의 시작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같은 동류의 종을 가축화하는, 다시말해 길들여 지배하기 시작한 그 변곡점 이래 인간의 세계는 그야말로 원초적 폭력을 동력원으로 삼는 기이한 사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편」 〈제물론사생 이야기를 비롯한 성심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가축화, 즉 생계와 자유의 박탈이라는 원초적 폭력인 채찍을 휘두름으로써 복종과 반항에 따른 상벌의 질서가 수립되고, 당근을 내밀어 빼앗은 것을 마치 자신들이 내어준다는 듯 내밀어 의존을 습관화, 관행화 시켜왔다. 자유와 풀을 빼앗고는 주인에게 의존하게 하는 이 서글픈 풍경이 인간들의 세계이다. 장자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인간,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들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적 눈을 치밀하게 맞추어 관찰한, 몽상적이거나 혹은 초월적 형이상학과 같은 실제를 이탈한 세계의 공허나, 개체의 질적 차이와 언어의 추상성에 사장(死藏)시켜버리는 모든(all-ism)주의의 지배지향성과 전체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듯싶다. 아무튼 강신주 박사의 장자수업은 장자의 문자적 해독이나 단순한 해석집이 아니다. 바로 지금을 사는 한국 사회의 우리 인간 개체들의 삶의 진짜 방편을 바람의 철학자이자 마주침의 존재론을 말하는 장자를 통해, 스스로를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사람다운 삶인가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질서라는 것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 은폐된 것들의 면목을 이해함으로써 그토록 당연시되었던 굴종과 모욕이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사회,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이지 무수하게 다채로운 지혜의 이야기들로 수() 놓아져 있다. 나는 외편(外篇)<산목>빈 배 이야기에서 그 문학성은 물론 예리한 통찰력을 발견하곤 새삼 매혹되었는데, 예전에 미쳐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는 사람의 배에 빈 배가 와서 부딪히면 그 사람은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누군가 사람이 타고 있어 부딪힌다면 불같은 화를 낸다. 왜 빈 배와 달리 사람이 탄 배에는 동일한 상황인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빈 배는 내 것을 빼앗을 잠재적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고, 사람이 탄 배는 내 것인 것에 도전할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답변이 가능하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人能處己以遊世 其孰能害之!)”

- <산목> 빈 배 이야기 에서

 

그런데 재야의 고수인 철학자 강신주는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는 사람에 주목하라고 한다. 배를 붙여 거친 물살의 황하를 흔들림 없이 평평한 상태 위에서 건널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냐는 것이다. 군주거나 지위가 높은 지배계급의 누구이거나 거부(巨富)일 것이라고 한다. 즉 강물 위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 하는 자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이, 소유욕과 자의식이 함께하는 이 해묵은 편견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위를 흔드는 인간은 그 위엄에 도전했으니 폭력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배를 붙여(方舟) 타는 이의 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이다. 즉 황하는 빨리 건너야 하는, 단지 지상에서의 목적을 위해 지나가야 하는 시간일 뿐이기에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 우리들을 장악하고 있는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때문에 황하를 건너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지상의 목적에 이를 때에야 행복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네 삶이 이런 것이다 보니 항상 행복은 합목적성에 의해 미뤄진다. 이야기는 이것에 지배되지 않는 행동, 즉 무위(無爲)에 대한 이야기다. 빈 배처럼 노닐면 그 누가 해칠소냐! 울림이 큰 말이다.

 

莊子하면 이를 시작하는 내편(內篇)<소요유(逍遙遊)>()과 붕()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변해서 새가 되었다(化而爲鳥)”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이 큰 물고기 곤이니 자신이 사는 너무 좁은 북쪽바다에서의 자신의 불행함이 얼마나 컸겠는가. 곤은 용기를 내어 물 밖의 바람이 거칠게 부는 낯선 세계, 타자의 세계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또한 거대한 새, ()이 된다. 이 거대한 새가 날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야 날아 오를 수 있다. 마침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는 거리가 구만리(搏扶搖而上者九萬里)” 나 되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데 성공, 대붕(大鵬)이 되어 거침없는 자유로움의 비행을 한다.

 

자신의 지금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어떤 존재든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두렵고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낯섦과 과감하게 마주해야만 비로소 타고 오를 바람도 맞을 수 있다. 물론 그 바람이 미약해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전을 피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의 불행만을 쓰다듬으며 자기 연민으로 훌쩍이고 있을 따름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씬 스틸러(scene stealer)’가 등장하는 것이다. 메추라기 새가 자신의 비행(飛行)도 완전한 날기 라고, 또한 자신도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장면이다.

 

협소한 세계에 적응 한 것이고, 그 협소함에 순응하여 살며 으스대는 것인데, 아마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불면 메추라기는 어디 숨어버려야 하거나, 바람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음을 외면한 이 정신승리법이 얼마나 비참한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한다. 협소함을 돌파할 것인지, 아니면 체제 내에 순응 할 것인지는 자신들만의 몫일 것이다. 가슴이 원대해지는, 괜스레 마음이 활짝 열린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해주는 이야기다. 찬바람 불면 나가지 말라가 아니라, 그깟 감기나 몸살쯤이야, 라며 강건해지리라 하면서 바람에 뛰어드는 긍정의 강렬함이 있는 가히 명문장이다.

 


너무 아름답고 지혜로운 글들로 가득 차 있어 모두 옮겨 적어 많은 이들과 같이 그 감응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지만 외편<천도>윤편(輪扁) 이야기 내편<제물론> ‘논변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아마 지엄한 상하 신분질서가 엄중한 시대에 가장 비천한 수레바퀴 노동자인 윤편의 도발이자 도전의 이야기가 너무 유쾌했던 이유이기에 적어두고 싶었다. 주인공은 춘추시대 다섯 제후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패자였던 환공과의 이야기다. 회당 높은 곳에서 환공은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마당 바닥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윤편이 느닷없이 성큼성큼 환공이 있는 당상(堂上)에 다가가서는 환공에게 묻는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읽고 있습니까?” (정말 맹랑하다!)

성인의 말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그는 죽었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 아닙니까?”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무례한 모욕의 언어다. 당연히 환공은 네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면 너는 죽을 것이라고 위엄의 명령을 내린다. 윤편은 살아남았겠는가? 그는 뭐라 답변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른 사람에게 말로 옮길 수 없는 그 체득의 도를 얘기한다. 몸과 마음이 목재에 따라 변주되어 일체가 되는 그 체득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으며, 그것을 글로 타인에게 남긴들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스승이 살아있다면 가서 물어보며 체득의 도움을 구할 수나 있지만 죽었다면 그 글이란 술찌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답변이다.

 

오늘날 서점에는 무수한 자기 계발서들이 불티나게 팔리듯 가장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청년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책을 쓴 작자들의 경험 이야기다. 그 경험이 독자에게 체득되지 않고서는 결코 배움이 되지 못하는 한낱 찌꺼기에 불과한 것일 테다. 사랑하는 법, 수영하는 법, 사회 생활하는 법은 직접 부딪히며 경험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글로 반복하여 읽는다고 될 일인가? 윤편의 눈에 환공의 믿음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게다.

 

내편<제물론> ‘논변 이야기내편<제물론> ‘동시(同是)이야기와 함께 인식론의 문제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후자는 동시((同是)’, 즉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의 이야기이고, 전자는 진리의 논쟁은 허영의 논쟁이 되기 일쑤임을, 즉 확증 불가능한 논쟁을 가지고 우열을 다투는 그 비열함과 몽매함에 대한 환기라 할 수 있다. 책은 어떤 나무토막이 되었든, 종이가 되었든 계속해서 반으로 잘라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를 예시하고 있는데, 논리적 이성으로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두께가 있는 것은 아무리 잘라도 두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단지 가위나 칼의 문제일 뿐, 자를 수 있다거나, 두께가 없어지는 원자에 이르면 자를 수 없다고 주장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이를 실증할 수 있나? 경험으로 확인 또는 검증이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네 세계에는 즐비하다. 이를테면 통계수치가 의미하는 추정의 언어 또한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확증할 수 없다. 더구나 자유의지나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이나 종교의 문제로 나아가면 그 논쟁은 감정싸움, 위신싸움, 지적 헤게모니 싸움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논변들은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해프닝이고 비극이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확증 불가능한 논쟁을 수적 우위나 권력이라는 반지성적 행동으로 옮음이라 주장하는 작금의 양태는 파렴치와 몽매에 터 잡은 악의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야기하는 세력이 누구인가는 곧 그들의 추한 저의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가 될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지경까지 되었다. 어떤 말을 더 할까?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는가! (行賢而法自賢之心 安往而不愛哉!)”

- 외편<산목> ‘미인 이야기에서

 

허영의 문제가 나왔으니 외편<산목> ‘미인(美人) 이야기로 이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다. 현실을 냉혹할 정도로 응시하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기보다 허영의 존재다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남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해서 행동하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듯, 그 숨겨진 허영의 논리를 간파하는 것은 그에게 수월한 관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보다 비교우위에 서려는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비교의식이 왜 생겼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는 불평등구조가 인간을 허영의 존재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8)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평온한 굴종의 메커니즘을 유지 존속하려는 위계의 사회, 그 지배적 권력의 보존 욕구에서 출현한 것임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사회구조에서는 실제로 지위, 재산, 체력, 미모, 장기 등을 갖추든지, 갖춘 척 하든지 해야만 이익 추구에 장애가 없다는 것을 모든 인간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인데, 그러하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허영이라는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 책략은 오랜 인간의 지배적 질서에 순응한 결과라 하겠다.

 

객사의 아름다운 여인과 못생긴 두 부인에 대한 객사 직원들의 전복적인 태도가 나타내는 이야기인데, 객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허영의 감옥임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허영의 감옥을 피해간 인물이 없음이 드러나는 것인데, 비교우위를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곳, 자기 필요를 증명할 억압체제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을 생각게 한다. 왜 자유의 지대로 나가는데 주저하는 것일까? 백인백색의 그 찬란한 개성이란! 장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잘도 그러겠다!”

 

짧은 감상이 되길 바랐지만 긴 글이 되고 말았다. 48 (각권 24 수업)의 수업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을 좇다보면, 분명 우리네 마음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힘과 새로운 삶을 모색케 하는 힘으로 향하는 언어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 당근 경쟁과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는 삶의 그 실체를 보게 되고, 경쟁 실패에 좌절한 인간의 낯선 세계로의 비상의 몸짓도 읽을 수 있으며, 소용보다 무용의 즐거움, 그 참됨에 다가갈 수도 있고, 외부성과 타자성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던 자신의 인지상태를 파악할 수 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의 본질이라 규정한 질서란 것은 진정 무엇인가? 이 책은 장자의 지적 영민함 못지않게 저자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의 지고함이 느껴지는, 더구나 삶의 이 실질적 현상에 생생한 방향등이 되어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지혜로 가득 채워진 내용들 모두를 적어내지 못함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나치게 장황해진 듯하여 그 유명한 바람과 구멍이 어울리는 마주침의 존재론을 말하지 못하고, 이제 장자 수업 2로 시선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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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심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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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 나무의 귀신들과 더불어 세월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자기의 여로와, 견문과, 사해(四海)를 얘기했다. [....] 사스락 사스락, 조락(凋落)의 한숨이 나무의 마을에서 멎을 날이 없었다.” - 227~228, 나무의 마을중에서

  

그래, 凋落의 한숨이 멎을 날이 없는 것이 인간세(人間世)라 해서 뭐 다를까. 아흔이 훌쩍 넘은 아버님과 어머님을 뵙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여름의 열기 먹은 입술이 애무했던 잎들엔 무서리가 내리고, 해도 점점 짧아지고, 빛의 두께와 무게도 점점 엷어지고 가벼워져 가는, 하늘 또한 나날이 한 치씩은 높아가는 이 가을과 더욱 닮아있음을 생각했다.

 

박상륭은 육체라는 몸을 입은 정신, 이 인간 유정(有情)의 삶의 현상과 대상 모두는 대력()이 추는 창조의 춤의 결과이자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라며, 이 환()의 세계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解脫)의 욕망에 불과하다 말하지만, 어디 이 실체적으로 느껴지는 오관을 지닌 존재가 한바탕 모진 꿈이라고만 돌려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생생한 체험의 현실적 실()다움을 우주적 마음이라는 공()의 견성(見性)으로, 즉 아픈 것도 없으며 아프지 않는 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기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연작 세 편을 포함하여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1999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니 햇수로 24년 된 작품집이지만 실제 문예지들에 게재된 년도는 1968년부터 다채롭다. 사실 박상륭의 소설은 이 햇수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그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 할 것이다. 극히 긴 영겁(永劫)이란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촌각과 다름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 모두는 어느 때 읽혀도 무관한, 시간의 퇴색 영향 밖에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은 ()을 실어 나르는 수레,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한 편의 훌륭한 소설 쓰기가 아니라, 경륜(經綸)을 굴리는데 있다고 하였다. 즉 비유와 상징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활용한 경전 쓰기라 해도 곡해는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전통적 소설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말로 표현한다면 구차한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은글쓰기이며, 잡설(雜說)이라 이른다.

 

사설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이 소설집의 맨 끝에 수록된 월간문학196812월호에 게재되었던 비교적 초기작인 상대적으로 읽어내기 수월했던 나무의 마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서정적이고 시적 분위기가 너무도 앓음(앓다+아름답다)다웠던 작품이다. 주인공은 이년생 산배나무의 아직은 어린 귀신(나무의 영혼)의 생과 죽음에 대한 그 윤회의 깨달음이라는 성장의 얘기이다. 나는 왜 나무이어야만 하는가? 나는 왜 새이었다가 다람쥐이었다가 뱀이 될 수 없는가?” 이동의 자유가 불가능한 존재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대상들을 바라보며 갖게 된 궁극의 물음부터 시작해서, 우발이 필연화되고, 그 필연이 최악 혹은 최선으로 이어지는 곤혹스러운 세계, 게다가 병과 노쇠와 수없이 부딪게 될 생의 우연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이 발랄한 산배나무는 이웃하는 늙은 참나무의 경륜을 통해, 또한 죽기로 한 어느 겨울을 지내고 벼락처럼 스치운 백년도 수유(須臾)일 뿐이라는 깨우침의 여정, 으름덩굴이 손을 놓아버려 떨어진 씨앗들의 소리에 놀라 깨었던 시절의 사랑과 관능의 시간들이 우리네 인생과 더불어 사무치게 마음을 파고든다. 어쩌면 박상륭의 소설을 초지일관 관통하는 주제인 몸과 말(육신과 정신)의 존재인 인간의 현실 세계가 고해라는 피치 못할 저주이지만, 한편 이 육신을 근본으로 한 유정에게는 바로 이 몸뚱아리의 입음이 곧 삶이란 것의 모든 희망이자 복음이며 은총임을 아는 것, 그것일 테다.

 

이 소설집 평심뿐이겠는가마는 박상륭의 모든 작품은 예외없이 종교적 즉, 형이상학적인 구도(求道)의 길, 우주적 마음이라는 그의 인간 진화론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말 아닌 말이라는 불가능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캐나단가 미국인가에서의 생활시기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로이가 산 한 삶, 왈튼 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 미스 앤더슨이 날려보낸 한 날음세 편 또한 예외없이 현생의 삶과 죽음의 쳇바퀴, 그 끊을 수 없는 윤회의 저주, 이를 끊어내는 영원한 자유를 꿈꾸는 구원에 대한 사색일 것이다. 그래서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로이가 산 한 삶의 주인공격인 살이 축축 늘어질 정도로 거구인 로이를 지켜봐왔던 책 방 주인의 이 무용한 인간에 대한 생과 사의 의미해석은 TV화면에 0.5초 동안 비쳐졌던 것에 그토록 자부심 가득 환희 웃던 모습과 겹쳐지며, 무위(無爲) 그 자체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 이 작품은 내겐 여러 비판적 믿음을 내포하고 있어, 그의 일관된 우주적 마음으로 향한 진화론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그의 진화론이란 ->->마음이라는 ’(++마음의 합성어)이론이란 것으로 마음의 우주를 똥닦이 해버린 뒤 몸의 우주에 전락을 면치 못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니와, 이를 인간의 생의 소용이라는 가치 측면에서 무용을 지적하는 것인데, 이를 토대로 인간 복지사회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 프라브리티라는 상극(相剋)의 투쟁, 고해(苦海)라는 이생은 작가에게는 고착된 철칙이기에 이 철칙을 위배하는 인간세계의 이러한 배려는 우주법칙의 무지한 왜곡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명 몸과 말의 우주라는 인간세는 그 관점에서 보아야하지 이를 마음의 우주, 즉 공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허무의 공에 빠지고 만다고, 소위 하향식 관점을 자신의 믿음이라 얘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세 편의 연작(총 일곱 편의 연작 중 세편이 평심에 실려 있음)두 집 사이의 첫 편인 제일의 늙은 아해(兒孩) 얘기의 늙은네가 저승길에 꼭 가져갈 소중한 것, 그것은 사랑일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과연 이 사랑의 정체란 무엇일까? 물론 작가가 말하는 해골동산에 깊숙이 박혀 세워진 십자가, 그 음양의 합일, 상승에로 향한 해탈의 토대이겠지만, 이것은 우주적 마음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 아닌가?

 

이 살아있음의 실체감으로 매양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몸을 지닌 인간에게 그 몸의 우주를 버리라 말하는 것은 황망한 몽상가의 변이 아니겠는가? 어찌 우주적 마음이라는 공의 관점으로 자아(自我)를 완전하게 깨어 부수라거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니 그저 통과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가능하겠는가? , 그래서 말인데, 박상륭의 잡설은 그 가능성의 세계로, 혹은 궁극에 이르러야 할 경지, 견성(見性)의 지점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겐 글()의 협소한 의미의 경계로부터 풀려나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문학적 향취에 젖어 읽기로 선회한다.

 

표제작인 단편 평심동화(童話) 한 자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이라는 하나의 어리숙한 은유일 것이다. 불두덩이며 코밑에도, 먼지 털 좀 쇤 것들 몇 오라기가 삐죽삐죽 돋아 오르는 왕자는 어느 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에게 자기가 용타고 돌아 올 때까지 살아계시라 말하고는 표표히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어디론가 떠난다.

 

“‘젊은네여, 뭣이 그리도 살맛나는 일 있어

번들거리는 눈을 해각고시나어디로 가는다?’

, 나는 말이지요, 마음이라는 것을 찾아, 길 떠나고 있거든요.‘“ -95쪽에서

 

마음을 찾는다? 이것은 마음을 길들이거나 자기 뜻대로 어거할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마음 자체를 찾는 여정이다. 정말이지 그 탐색은 어렵고도 어렵겠는다.“ 이렇게 스승네를 거치며 마음을 찾는 그 방법적 토대에서부터 마음의 모양새(), 그리곤 마음의 체와 용()이 다르지 않음을, 중단 없이 변용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체와 동시에 용이며, 용이 또한 체 자체임을, 나아가 마음의 원상(原相)을 찾아 헤맨다. 왕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길을 막은 바다, 바다는 물 알갱이 하나, 거품들, 한 주름의 물살, 모든 개심(個心)의 집단적 마음, 즉 전심이자 평심이란 이 모든 것들의 고요이자 평온이지만 그렇다고 무위(無爲)이기만 한 것은 아닌 그것, 우주적 마음이라는 도를 깨우친다는 동화다.

 

이 작품은 그 스토리인 구도의 여정에서 나누는 대화와 압축적 시간의 묘사도 재미를 한 몫 하지만, 문체의 토속적 위트를 만끽하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쾌락이다.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작품들의 중추적 사유 배경인 프라브리티와 니브리티의 설명과 같은 말 뼈다귀(言骨)를 주울 수 있으며, 소위 또 하나의 근간인 체용론(體用論)을 이해하는 중요한 소설이기도 하다, 더불어 박상륭의 문체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어 줄 법륜 굴리기의 대표작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아마 이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작가로서의 위업이라 할, 죽음의 한 연구칠조 어론에 등장하는 그 독특한 칠조(七組)‘~입지라는 종결어미의 밉살스런 어투에 매혹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가장 빛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연작 두 집 사이의 늙은 아해(兒孩)들의 얘기는 잠과 꿈이라는 마음의 우주, 해탈에 이르는 길의 말 아닌 말을 통해 잠(껍데기, )을 남기지 않고 모두 깨워내는 한 바탕의 꿈 이야기다. ‘제일의 늙은 兒孩 얘기는 아파트단지 내 산수유 꽃빛의 담요로 포근히 감싸주는 공원 벤치에 쇠잔해가는 노구의 무거움으로 쭈그려 앉아 조금씩 졸음 속으로 내려가며 꾸는 늙은네의 몽상이다. 산수유 꽃빛의 볕의 바다에 잠겨, 그 바다를 왼통 뻐금여들이는, 한 마리의 작은 물고기, 한 바다가 왼통 한 마리의 물고기이다.” 물속에 휩싸인 물고기, 물과 물고기의 경계가 사라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전체에의 체험, 전체가 개아(個我)이고, 개아 없는 전체인 무()에의 긍정적 체험의 이야기다. 아니 이에 이르는 삶과 시간의 모순, 뒈져 눕기도 한사코 싫으며, 살아 시간을 견뎌내기도 권태로운 살아있음의 투덜댐이다.

 

제이의 늙은 아해는 산을 타며(오르고 내린다는 이 관능적 언어)’ 한 바탕 낮의 잠에서 노구(老狗;늙은 개)를 만나 윤회의 영겁, 끊어내지 못한 자아(自我)로 인한 바르도의 세계를 나누며, 축생(畜生)도와 자연(自然)도의 모든 유정이란 인간 유정의 그것임을, 우주 만물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고, 제삼의 늙은 아해는 드디어 한 여인의 죽음을, 그 주검의 우주적 의미를, 육신이라는 그 껍데기의 벗어남과 다시금 복귀해야만 하는 윤회의 저주에 대한 제의적 형상을 그려낸다.

 

주검의 신분이, 그 껍질이며, 머리털까지 깨끗하게 벗기워지는장례의 그로테스크한 정경은 그래, 앓음답다. 작가는 육신으로 하늘 하늘 걸어올라가는 영혼을 하느랋음답다고 말한다. ‘하늘하늘(부사)+하늘(명사)+앓음+아름다움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쉽사리 개념이 열리지 않는 이 언어는 아마도 상승의 열정과 고통과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가섭의 미소를 나는 결코 짓지 못할 것이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내 육친의 죽음, 그 몸의 소멸에 어찌 미소로, 그 승화를 기릴 수 있겠는가? 내 꽉 막힌 이생에 고착된 말과 마음은 어쩌면 늙은네가 지껄이는 또 한자리 씨부(詩賦)랄 소리요, 개좆글 읊어내기의 풍류 이상임을 듣지 못한다.

 

내 마음을 맴도는 글은 여전히 몸의 우주를 떠나지 못하는 변명에 멈추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소설의 무늬를 한 경전은 몸이야말로 유정의 해탈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하지 않았던가? 육신이 겪는 고통이야말로 진화의 원동력이며, 도약대라 했으니, 이 몸의 우주에 집착하는 나야말로 가능성의 한 단계는 이룩한 것이라며 위안 삼는다. 더욱이 공()을 색화(色化)하는 원동력이 곧 사랑이기도 하기에(色卽是空!), 어쩌면 우리 인간 유정들 앞에는 저 우주적 마음이라는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 해탈의 천로(天路)를 오르리란 가능성만을 향유하련다. 마음의 우주의 적멸(寂滅), 자아 분쇄라는 체()의 무화에서 드러나는 해탈은 이번 생에서 아무래도 내겐 오르지 않을 사다리일 것이다. 혹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죽음은 다음 단계의 삶을 위한 하나의 계기, 침몰해 버린 소멸이 아니라 부활에의 희원(希願)임을 발견하고(그 껍데기가 인간이라는 보장은 없는다! 쿨 쿨 )는 그 모짐을 지속할지도 모를 일이겠는다.(박상륭 문체를 나도 한 번 써봤다.)

 

이 작품집을 읽다보면 아마도 생의 앓음다움을 강설하는 인물들의 낮 잠 속 몽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각 작품이 발설하는 숨가쁘고 치열한 사유의 격전장을 헤매다보면 법열(法悅)과 같은(감히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어렴풋한 깨달음에 매혹되는 시간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이번 가을은 수십여 차례 반복되었던 여느 가을과 확연히 달리 느껴진다. 박상륭이 원인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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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0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박상륭의 평심....박상륭 소설은 거의 소장했다고 싶었는데, 이 작품이 빠졌네요..헐~~
필리아 님 때문에 얼른 구하러 갑니다..^^

필리아 2023-10-20 09:27   좋아요 0 | URL
박상륭의 작품을 色界와 空界로 구분할 때, 아마 이 작품은 色界(프라브리티)의 총정리본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
 
시티 픽션 : 파리 시티 픽션
기 드 모파상.드니 디드로 지음, 이규현 옮김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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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전을 통한 세계여행이라는 주제 아래 런던을 비롯 파리, 뉴욕 등 다섯 도시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한 두 편씩을 수록하여 구성된 콤팩트(compact)한 작품집이며, 그 중 파리 편이다. 단편소설의 대가인 19세기 사실주의 소설가 기 드 모파상과 백과전서파의 대표자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드니 디드로의 한 작품씩으로 구성된 시티픽션; 파리(Paris)는 지나칠 만큼 부담없이 얇은 책이기에 집어 들었다. 보다 실질적 이유는 디드로의 실험정신의 한 면모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디드로를 말하기 전에 모파상의 단편 ; 악몽 (La nuit)의 간략한 감상으로 먼저 시작해야겠다.


; 악몽 (La nuit)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 애인을 사랑하듯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 ; 악몽 (La nuit)의 시작 문장에서

 

모파상의 이 단편은 그가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한 후기 작품 중의 한 편인 것 같다. 애드거 앨런 포 류()의 공포와 지옥의 심연에 빠져드는 자기 영혼에 탐닉하는 인물을 본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이런 소설의 아주 전형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아마 지옥을 개발해 나가려는 부정적 상상력, 점진적으로 흉가(凶家)화 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닉하는데 즐거움을 찾는 독자에게는 인상적일 작품이다.

 

밤의 정적과 어둠, 캄캄한 무한한 공간에 도취되며 낮의 떠들썩함, 아침이 밝아오는 빛의 힘겨움과 불편함을 혐오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는 해가 기울면 막연한 기쁨이 몸 전체에 밀려들어온다고 짐짓 어둠을 찬양한다. 그런데 곧이어 밤에 대한 그의 사랑의 밀어가 모순당착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빛나는 밤, 휘황하게 번쩍이는 카페들의 어둠속에 빛나는 빛이 어우러진 밤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 어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님이 드러난다. 어쨌든 화자인 는 늦은 파리 밤거리, 블로뉴 숲 속을 거닐며 기이한 전율, 강렬한 감동과 격앙된 사유의 엄습을 즐긴다.

 

그는 오랫동안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다. 이윽고 도시는 아무도 없었고, 불 밝힌 카페조차도 없음을 발견하며, 파리가 이처럼 생기없고 황량한 곳인 줄은 정말 몰랐다.”고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바스티유까지 걸어가며 그토록 어두운 밤은 한 번도 본적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칠흑 같은 어둠, 무한한 공간처럼 넓고 짙은 구름의 궁륭이 펼쳐진 듯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소름끼치는 파리에, 그 출구없는 어둠 속에서 울부짖기에 이른다. 살려주세요!”

 

천공(天空)보다 캄캄한, 도시보다 더 깊은 어둠 [....] 고요하고 버려져 있고 죽은 것 같은, 격렬한 공포가 엄습해 온다. 그리고는 차디찬 냉기가 올라오는 센 강변, 강물에 팔을 집어넣고 [....] 얼어붙는다.” 지옥을 파 들어가며, 그 어둠을 사랑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은 곧 자기파멸,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세계에 이르렀음에 좌절하는 인간의 원시적 두려움이다. 나는 모파상, 앨런 포를 위시하여 그들의 아손(兒孫)격 작품의 하강하는 영혼들의 탐닉에 공감하지 못한다. 삶이란 것이 환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에서 깨어나는 것, 그 궁극의 희원(希願)은 상승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conte)

 

소설 이야기 속에다 독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집어넣겠다.”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conte)도입 문장 중에서

 

디드로는 어쩌면 기성의 소설 형식에 반기를 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소설적 화자가 전개하는 이야기에 공감 또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변변치 않은 식견으로 비평 또는 해석을 해대며 떠들어대는 터무니없는 비평가나 독자들의 허영심, 그것을 소설에 대한 장애물 혹은 필요물로 여겼던 듯하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소설 속 언어이지 소설 밖의 독자에게까지 소설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화자의 이야기에 시시콜콜 반응을 해대는 독자(청자)로 이해되는 방해인물에 의해 실재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어쨌거나 두 인물 모두 소설 속 존재에 불과하니 허구냐 사실이냐는 의미없는 물음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내용이란 것은 화자가 자신이 전개할 이야기에 대해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이야기며, 아주 시시하기조차 한, 저녁 한 때를 보내기에 충분할 듯하다고 말하듯 그런 내용이다. 두 이야기인데, 순수하고 헌신적인 남자와 이런 남자의 경제적 지원만 갈취하며 뭇 남자들과 쾌락을 지새우는 극단적 교활성을 보이는 여자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자신의 재기와 상상력, 지식은 비평 및 문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도 남을 정도의 지성을 가진 여자가 별 볼일 없는 남자를 물심양면 도우며 사랑을 보내지만 10여년이 지난 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자를 내차 버리는 남자라는 앞 선 이야기의 반대로 짝을 이루는 이야기다. 결국 이 사랑의 엇나감,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연정에 대한 뻔한 견해의 논쟁이다. 여자를 버리고 부당한 명성을 누린 남자, 남자의 노동을 끊임없이 갈취하여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현실에 대해 세상사란 본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소.” 라든가, 사기꾼과 부정한 사람의 옹호자라며 비판하는 식의 정말 시시한 주제의 논의이다.

 

, 이러한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해결해야 일이 독자에게 과제로 던져진 것 같다. 이 소설 읽기를 줄거리에 천착하게 되면 그야말로 싱겁기 그지없어진다. 디드로는 이 소설을 통해 전통적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실험을 하고자 했던 듯싶다. 화자와 화자의 전개에 수시로 끼어드는 독자로 간주되는 방해꾼으로 인해 줄 곧 이야기의 방향이 변경되거나 고수되는 장면을 통해 소설에 대한 반응의 즉시적 수용이란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혹은 동의하는 장면을 주목하며 읽는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관점에서 다소 퇴색한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잠 안 오는 밤에 침대에 누워 가볍게 읽을 수 있기에는 그만이다. 한 번 펼쳐들면 아마 마지막 쪽을 어느 새 넘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쏟아지는 잠으로 숙면에 빠져들 것이다.

 

책의 편집 구성상 하나만 지적하고 맺어야겠다. 이 시티 픽션 시리즈는 작가별 한 편 내지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즉 다분히 맛보기를 통한 문학 인구의 유입을 위한 방편의 성격도 있을 것인데, 지나치게 당해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가이드가 없다. 책날개에 대여섯 줄 짧은, 그야말로 압축된 설명글은 불친절하다. ‘시티픽션이라는 이 기획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반쪽 분량정도씩이라도 할애하여 해당 작품들의 해설을 곁들였으면 보다 알찬 작품집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성의 독서가들 누가 이 책을 찾겠는가? 대상은 입문자들, 가벼운 독서를 찾는 이들, 어린 학생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대상 독자를 위해 조금은 더 친절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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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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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더럽고 비굴한 욕망을 까발린 이 책은 서른세 살 이른 나이에 요절한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열여덟 청년시절에 쓴 인간 존엄과 자유의 회복을 위한 언설(言說)이다. 그의 죽음 원인이 전염성 복통이라 알려져 있는데, 일종의 독살로 추정될 수 있는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스물네 살인 1554, 보르도의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만큼 출중했던 이 젊은 지성은 1548년 전제군주가 벌인 시민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목도하며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매서운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유언으로 친구 몽테뉴(Esse를 쓴 미셸 드 몽테뉴다)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맡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원고는 그의 사후 11년이 되기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몽테뉴는 이 원고를 위험하다고 여겼기에 간직하고만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절대왕정에 반대하던 모나르코마크란 인물에 의해 비로소 1574년 세상에 그 사유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전하려는 의미가 인간 세상에 폭넓게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지난 프랑스혁명(1789) 즈음해서였던 것 같다. 이후 그 이름만 들어도 의지가 전해지는 시몬베유, 빌헬름 라이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으로 계승되며, 드 라 보에시가 제기한 문제는 21세기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그 의미를 역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사실 500년 남짓 전에 써진 이 책이 거듭 소환되어야 하는 사회만큼 암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매양 역사의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금 이 젊은 저항의 에너지, 이성의 열정을 여타의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대신 나만이라도 상기(想起)하려는 뜻에서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읽기를 반복하였다. 대체 굴종의 몸짓과 스스로 기어들어가 복종하는 인간들이 망령처럼 살아나 부쩍 증가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들이 온몸으로 과시하는 저 추하고 천박한 행태의 의미를 확인키 위함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 분노를 다스리고자하는 무의식적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이 쓰여 질 때에는 거의 모든 민중이 절대 권력을 의심하지 않는 시대였을 것이다. 2023년 1012일 지방 보궐선거 결과에서 드러나듯 여론 조사에서 항시 36~7%를 맴도는 그것으로 감소하였으니 민중의 의식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의미는 상당부분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비율이 한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어떻게 갉아대는지는 너무도 중대하다. 바로 그것에 권력을 위임하는 자신들의 자유를 맡겼으니 말이다.

 


책의 번역자 한 명인 목수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생뚱맞게 유신을 추억하고 반공을 맹세하는 노예집단들이 간판을 내걸고 설쳐대고 있다. 가장 변태스러운 권력의 꼬붕이 되어, 이 혐오그룹의 선봉에 서려는 일베들이 그 추한 낯짝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급기야 국가각료에 임명되는 황당한 일이 거듭되고 있다.”. 이들 양아치 집단에 맞서면 존재하지 않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언론공작으로 공개처형을 가하고는, 압수와 수색, 그리고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기소로 인간 존엄을 구렁텅이에 쑤셔 박으려 온갖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다.

 

또 한 역자인 심영길은 드 라 보에시를 읽으며 카뮈의 글을 떠올렸음을 쓰고 있다. 8년 전에 쓴 글이 바로 지금에도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적용될 수 있음에 수치를 느끼게 된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굴종에 길든 관료와 수구 언론의 습성이 자신들과 다른 사고의 사람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구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개 짖는 소리를 내고 있다.” 말이다. 1948년 카뮈는 파리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원 초청 연설에서 스페인 정치범 처형장에서 사형집행에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주교의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주교도 아니며, 기독교도도 아니고 인간조차도 아니라고, .... 그는 사형집행을 벌이는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개자식일 뿐이라고신랄하게 비난한다. 종교를 빙자한 독재권력은 가장 가증스러운 독재 형상이라고 말이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

모든 권력은 자발적 복종을 바친 인간들이 건네준 권력이다.

...복종을 멈춰라!-30쪽에서

 

 

드 라 보에시의 글을 옮길 의사는 조금도 없다. 16세기 절대왕정의 시대와 달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뼛속에는 자유와 노예에 대한 의식이 그나마 상당부분 증식되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느 상태가 생존에 더 적절한지 알지 못하는, 즉 예속과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1990년대 이전의 비민주적 독재행태가 횡행하던 한국사회를 겪어보지 못했던 세대는 예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시절 기회주의적으로 비겁함과 굴종의 몸짓에 능숙했던 이들에게도 예속은 그리 와 닿지 않는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언어를 빌어 권위주의적 전근대적 시간을 향수하는 지역과 사람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21세기 지금도 노예근성을 천성으로 아는 촌부들과 이들에게 해라라고 명령하는 권세가들이 살고 있다. 사실 이들 촌부들만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조선 유교의 엄격하고 냉혹한 계급의 분별과 일제와 오랜 군사독재 시절에 걸친 수백 년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주입된, 처음에는 강요되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그 강요된 세상을 모르는 세대로 이어지며 굴종이 습관이 되어온 까닭이기에 많은 수의 인간들은 종속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이제 종속이 일상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성장한 오늘의 상당수 한국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선출된 한 인간 나부랭이, 대체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휘둘리며, 그 포악함을 견디고, 함부로 부리는 횡포에 어떠한 투쟁의 열의도 결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바로 그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런 갈망도 끓어오르지 않는다. 노예의 삶을 받아들였는데 그 무엇이 절실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서쪽 한 지역에서 범죄사실로 유죄 처벌을 받은 인간을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사면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여 범죄의 악취가 코를 쥐게 하는데도 후보로 내세워 다시금 치러진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 투표 결과인 39.37%가 이 오물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이 철저한 권력에 대한 자발적 충성, 이 몽매성에 도사린 맹목적 굴종의식을 보는 안타까움이었다. 역자 목수정의 지적처럼 누가 힘이 센가, 강자의 편이라야 안심이 되는 투표를 하는 작태일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그 납작 엎드린 자발적 굴종의 몸짓들, 정신적 노예화가 육체까지 번져 변형된 이 기형성이 한국사회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당기고 있다.

 

책은 이렇듯 복종에 익숙해진 인간들을 일깨우는 비수같은 언설을 쏟아내고 있다. 민중이 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권력은 스스로 무너진다. 드 라보에시는 바로 이렇듯 자유를 거부하고 복종의 달콤한 고통으로부터 안락을 취하는 인간의 선천적 욕망에 도사린 재앙적이고 비극적 사건에 경종을 울려댄다. 인간은 어째서 복종이 자유라도 되는 양 굴종을 하기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절대 권력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매몰되어 권력자가 손에 쥔 권력이 자신이 헌납한 것임을 망각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비굴모드를 취하고 자기 존엄과 자존을 함께 내다버린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한다. 자발적 복종의 그 게으른 편의라는 보상이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완강한 종속에 대한 지향성이 오래전부터 의식의 내면에 뿌리를 내려 마치 자유가 인간 본성이 아닌 것처럼 여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 하에서는 인간들은 쉽사리 비겁해지고 나약해진다. 마치 관습처럼 굴종이 거부감 없이 삼키게 되는 *미트라다테스의 소량의 점진적 독약 복용처럼 습관이 되어 구별능력을 상실한 무감각의 인간이 되어버린다. 이미 시민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한 작금의 미디어매체들이 쏟아내는 영상들에서 보여지듯 굴종하는 비겁한 인간들이 권력의 똘마니가 되어 나대는 꼴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장면들이야말로 권력은 어떻게 대중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것이다.

 

본문 94쪽에서


드 라 보에시는 항시 역사의 경험에는 독재 권력을 떠받들고 있는 대여섯 명의 인간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들, 독재 권력의 귀 노릇, 잔악한 짓을 공모하기 위해 모인 자들, 독재자의 쾌락을 위한 동반자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뚜쟁이며, 재산 축적을 위해 국가와 시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공범이라고 말한다. 독재자 본연의 악랄함을 넘어서 자신들의 악함까지 모두 삼키게 하려고 독재자를 제대로 길들이는 인간들이다. 이들은 수하에 조력자를 거느리고 그 조력자들은 다시 수하에 똘마니들을 두어 자신들의 엄청난 물욕과 잔인한 행각으로 나라 전체를 장악한다.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권력의 비호 아래 법의 심판과 징벌로부터 놓여나고 다시 그 아래 단계로 처진 대규모의 그물망으로 탈취를 자행한다. 다분히 사기행각의 성향을 띤 다단계 파라미드 영업망을 닮은 이러한 구조가 민중과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 정말 코미디같지 않은가? 이 희극같은 비극이 공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 사회이다.

 

연신 굽신거리며 그지없는 복종의 모습을 취하는 나라의 모든 쓰레기들, 그 천박한 것들이 독재자 주변으로 모여든다. 변변찮게 어슬렁거렸던 좀도둑들이 들끓는 야욕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전리품 배분에 끼어들고자 독재자 주변에 모여들어 떠받들며 난리를 처댄다. 장물의 핵심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떡고물이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보라. 이것들이 모인 사회에는 동료는 없고 음모만 생겨난다. 서로 의심하고 겁낸다. 서로 친구가 아니고 공범인 까닭이다. 또한 독재자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언제든 떨려날 수 있기에 독재자의 사소한 눈짓과 표정의 변화에도 유의하며 독재자의 생각을 미리 읽고 준비해서 환심을 사야한다.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인간, 타인에게 자신의 평안과 자유, 몸과 삶까지 온전히 맡긴 이 비굴한 것들보다 더 천박한 것이 있을까? 왜 복종할까? 오직 단 한 가지 이유라고 드 라 보에시는 지적한다. 재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독재자 주변을 얼쩡거리며 야비함과 단순함을 간교하게 악용해가며 쉽사리 출세가도에 오르고, 부를 축적했기에 이 자들은 언제 처단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에 더욱 악랄하게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극악한 폭력을 자행한다. 그토록 사회적 문제가 되어 시정을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갑질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수인의 하수인, 그 하수인의 하수인으로 이어지는 그물망의 한 단계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굴종으로 인한 모욕을 감당할 대상을 저보다 약해 보이는 인간에게 배출해 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사회는 대표적인 굴종 사회라는 증거이다.

 

더구나 이 굴종이 일상화된 사회는 의심과 배반의 사회이기도 하다. 환심을 위해 밤낮없이 그 텅 빈 대가리를 조아려야하고 동시에 섬기는 자를 세상 누구보다 더 의심해야 그나마 자리를 지킬 수 있기에 이 인간들의 눈깔은 연신 사방을 휘저어대기 바쁘고, 발걸음은 서성댄다. 함정은 어디에 있는지, 공격은 어디서 날아올지, 경쟁자의 안색은 어떤지, 배신이 혹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짜 미소를 지으며 두려워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극심한 분열로 치닫고, 통합과 연대는 불가능한 지경으로 나라는 더욱 퇴락으로 가라앉는다. 굴종은 결코 인간의 관습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굴종이라는 비열한 몸짓은 인간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패, 부정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종은 거의 대부분이 자발적 복종으로 인한 것이다.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삶은 곧 자유와 평등의 포기, 인간 존엄의 품격을 내던지는 것이다.

 

툭하면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더러워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흔해빠진 변명을 대곤 한다. 과연 주인이 던져주는 돈을 챙기려고 발길질을 견디고 모욕을 당연시하며 자신의 영혼을 팔고, 나라를 팔고, 몸을 팔며, 그 까짓 존엄이란 개나 줘 버려!라고 하는 말이 등식이 성립하려나? 그 납작 엎드린 굴종의 몸짓, 그것은 비열함과 배신의 은폐요, 폭력과 권위주의의 선전이며, 시민 대중에 대한 예속을 요구하는 독재자의 음흉한 위선이다. 드라 보에시는 치졸한 영혼을 가진 자들, 무지한 자들만이 독재 권력에 복종한다. 이것이 지배 원동력이다.”라고 한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도 단순하고 쉽다. 시민대중의 권리와 자유를 압류했다고 착각하는 권력에게 굴종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이라도 그 비굴한 몸짓을 철회하면 권력은 그 순간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제발 스스로 복종하지 말자. 굴종을 비추는 미디어를 규탄하라. 그리고 그 장면의 등장인물들을 잊지 마라. 반드시 정의가 처단할 쓰레기들이니까. 대중의 자유와 존엄을 짓 밞아 대는 썩은 내 진동하는 이것들에게 이 사회의 훼손된 건강성의 댓가를 따져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복종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며 시민대중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네들에 경의를 보내며, 다소간의 분노를 이 책을 통해 가라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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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2~63,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소아시아의 대왕으로 면역력을 얻고자 평소에 독약을 조금씩 복용했던 습관; 즉 지속적인 독의 소량 주입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는 것으로서, 복종 또한 습관처럼 내성이 된 노예근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됨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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