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에디토리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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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은 존재가 하나의 형식으로 결정(結晶)화 되는 의미를 획득하는

극소수의 부류들 가운데 하나 이다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한정되지 않으며

[...] 유기체처럼 살아있다."  -176쪽



책은 20세기 문학의 여정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거장이 새천년(21세기)에 나아가길 기대하는 문학의 길에 대한 탐색으로, 1985~86학년도 하버드대학교 <찰스 엘리엇 노턴(Charles Eliot Norton) 시학 강의> 다가오는 새 천년기의 문학이란 주제의 한 학기 강의 내용이다. 총 여섯 번의 강의로 준비되었으나 마지막 여섯 번째 강의를 앞두고 이탈로 칼비노는 뇌출혈로 85918일 숨을 거두었다. 강연되지 못하고 준비되었던 이 마지막 원고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있다.

 

21세기 문학의 기능을 이탈로 칼비노는 여섯 가지로 압축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그리고 시작과 끝>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문학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문학작품을 왜 읽는가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이 두 물음은 그리 다른 질문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의 다양성이란 사실 좁아터진 것이고, 그 좁은 터전에서의 사유란 것도 볼품없는 것이긴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세계의 표현되지 않거나 표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예술이 탐색한 표현 가능성은 아무리 치워버리려 해도 눌러 붙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거나 해소할 세계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통의 고전적 과학의 시대는 저물고, 양자이론의 부상(浮上)과 함께 지금까지 무질서와 혼돈의 복잡성으로 이해되던 사물과 현상들에서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며, 마침내 두 모순되는 우주의 질서를 종합하는 최종이론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21세기 오늘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복잡성,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듯 인식되는 세계 속에서 특정한 개별적 현상들이나, 어떤 형식화된 질서나 법칙, 이러한 것들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개체들의 형상에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나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칼비노 또한 21세기 문학의 여섯 요소 중 <다양성>의 장에서 모든 인생은 백과사전이고, 도서관이고, 사물들의 목록이고, 양식들의 견본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학 작품이란 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계속 뒤섞이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재정리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즉 문학 작품은 우주의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으로부터 무질서에 자리잡은 인간과 세계의 양태로부터 알지 못했던 어떤 특정한 작용이나 질서, 현상의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다. 이처럼 나는 이 문학강의를 삶의 또 다른 발견을 기대하는 독자의 태도로 읽었다.

 

첫 번째 문학의 요소로 그는 <가벼움>을 말하고 있다. 아마 모든 작가들의 정언명령이랄 수 있는 시대 표현에 대한 의무에서 발생하는 무거움과 세계에 대한 불명료함의 발견이 글쓰기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예민하고 민첩한 삶의 발견에 간극을 일으키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칼비노는 이 상황을 벗어나 이런 형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지성의 생동감과 우연성이라는 가벼움, 가볍게 이동, 도약할 수 있는 정확함과 결단력으로서의 가벼움이었다고.

 

그래서 삶의 무게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가벼움에 대한 탐색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함이나 발견의 포기가 아니라 세상의 견고함을 용해하는 지식, 다른 시각과 논리, 인식으로 날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동적이고 가벼운 것을 지각하게 만드는 최초의 위대한 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모든 것(The Nature of things)을 예시하며, 물질의 진실한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되어있음을, 즉 가벼움에 내재된 진실을 비유한다. 또한 형태에서 형태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추적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도 가벼움의 도약에 내재한 형식의 변화, 새로운 세계의 구현 가능성이었음을 역설한다. 문학이란 존재를 얽어매는 촘촘한 강제성의 그물, 그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드러내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사려깊은 가벼움의 모색이어야 한다는 것일 테다.

 


두 번째는 이야기의 경제성을 말하는 <신속성>이다. 사실 소설문학은 페이지터너와 같이 이야기의 리듬과 전개되어나가는 본질적 논리가 일치함으로써 재미라는 기쁨을 준다. 만일 지지부진하게 같은 말이나 맥락의 반복, 리듬의 어긋남 등은 읽는 이를 지치게 하고, 주제를 혼탁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한 기사가 귀족 부인에게 즐거운 얘기를 한다고 했으나, 버벅거리고 좀체 지루해 터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참을 수 없게 된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때 부인은 재치있는 말로 기사를 넌지시 비난한다.

 

기사님, 당신 말은 너무 힘겹게 총총거리는군요, 걸어갈 수 있게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이야기는 말()이며, 말하는 속도는 정신의 속도라는 것이다. 서투른 이야기는 말의 리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속성과 간결함에서 발생할 수많은 생각들의 고양을 차단해버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속도는 그것 자체로 기쁨이고, 문학의 중대한 가치라는 것이다. 더하여 신속성은 시간 절약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느긋하게 벌어주며, 이것은 다양한 리듬, 통사적 전개, 의외의 놀라운 형용사를 수반하여 언어의 독창성과 함께 문학에 차이를 더해준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는 언어와 문장 사용에 있어 <정확성>이다. 대충, 우발적, 경솔한 사용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준다면서 사전처럼 그리고 생각과 이미지의 풍부한 명암처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말한다. 칼비노는 이처럼 모호하고 흐리멍텅한 언어의 사용을 언어 페스트라고 언어의 질병, 즉 구체적이고 명료하며 간결한 표현을 개괄적이고 추상적 문구로 평준화해버려 의미를 희석시키고 불꽃을 모두 꺼버리는 폐단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 나 또한 이러한 언어와 문장에 민감하지 못하곤 하는데,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 관료주의적 획일성과 매스미디어의 천편일률성을 말할 때 진부한 언어들을 대충 사용하는 함정에 빠져,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퇴색시켜버리기 일쑤이다.

 

정확성과 엄밀성의 사례로서 폴 발레리가 창조한 테스트 씨(Monsieur Teste)는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조화와 집중으로 이어지는 정확성의 재미있는 읽기를 제공한다. 발레리는 테스트씨를 고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기하학적 추상 개념을 연습시키고 마침내 물리적 고통을 물리치게 하여 정확성을 증명해 보인다. 사물들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보고할 수 있도록 언어적 노력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즐거운 참조가 된다.

 

네 번째 요소는 세계정신(世界精神)과의 의사소통 또는 우주의 진리가 보관 된 것으로서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말하는 <가시성>이다. 아마 이미지 홍수에 치여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상상해내거나 어떤 논증적 사고를 길어 올리지 못하는 소설가와 현대 독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사실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내적 삶에 투영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언어 표현에 이르는 필수의 경로이다. 이미지들의 자발적 생성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전개 방식은 칼비노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상실하기 십상인 능력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새로움, 독창성, 창의력을 추구하는 시대에 모순되게도 상상력이 쇠퇴하는 세태는 정말 아이러니하다.

 

<다양성>은 그야말로 문학에서 기대하는, 아니 문학이 갖춰야 할 절대 요소처럼 내겐 여겨진다. 무엇보다 세계를 체계들의 체계로 인식하게 되는, 즉 세계의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질서나 법칙을 만들어내는 그침없는 상호작용의 세계인 오늘에는 백과사전적으로, 인식의 방법으로, 무엇보다 사건들, 사람들, 세계의 사물들의 관계를 무한히 내포하는 것은 문학의 의무라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고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처럼 전 세계의 도서관 책들을 필사하는 일에 삶을 바치는 두 독학자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망라는 아닐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재능이 결여된 존재들이다. 책으로부터 끌어내고 싶어 하는 무상의 기쁨에 적용하는 능력이 없는, 즉 기본 개념을 자신들이 원하는 실천에 이용하는 능력과 재능이 결핍된 인간들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필사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물론 정신의 질서와 엄밀성에 대한 취향으로서는 비할 데 없지만, 그 방법의 결여는 가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독학자를 쓰기위해서 플로베르는 현실에서 농업, 원예, 화학, 해부학, 의학, 지질학, 교육학, 종교학1500권이라는 거대한 독서 모험을 강행했다고 하니, 지식의 허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으로서는 과연? 하고 머리를 젓게 된다. 실제에 있어 많은 문학작품들은 의미가 풍부한 상징 요소들을 통해 이 다양성을 이미 훌륭히 사용하고 있다.

 

새천년을 향한 문학 거장의 소설이 담아내야 할 가치를 말하는 이 저술은 단지 문학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의 이해를 위한 심층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관찰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칼비노의 개별 작품들에 의도나 경향성에 대한 참고적 이해의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나서 문학에 대한 막연함, 그 피상성에 환한 빚이 드리워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로부터 호손과 콘래드, 무질의 작품을 거론하며 소설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진정한 독창성과 기억에 남을 만한 서두와 결말에 대한 강론은 가히 절창인데, 호기심 많은 독자들의 읽기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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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 한 복잡계 물리학자의 이야기
조르조 파리시 지음, 김현주 옮김, 김범준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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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gio Parisi, 2021년 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이 저술은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이탈리아 사피엔차 대학교 양자이론 교수이며, 2021<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르조 파리시Gorgio Parisi)'의 학회 발표논문과 과학 에세이 일곱 편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글은 대중의 이해를 향해 있어 가장 쉬운 문체로 쓰여 있으며, 고차적 수식의 사용이나 물리학과 양자이론의 특정 개념어들조차 일상어로 풀어놓아 입자 물리학, 통계물리학, 복잡계의 물리학, 양자역학이 오늘날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이 여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입자물리학가 양자역학 등 과학도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탐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실하고 겸허한 목소리에서 과학적 사유의 길을 경청할 수 있다.

 

그의 물리학적 업적인 스핀(spin) 유리 이론과 이의 배경지식인 상전이(相轉移)’에 대한 연구내용, 유럽 찌르레기의 집단행동 연구를 통한 상호작용의 물리학적 규명으로부터 상호작용의 세기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발견처럼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물리학적 연구 업적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시는 이들 연구의 여정에서 자신이 마주했던 장애와 자신의 사유 오류와 실수, 그리고 동료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참조,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모형 구축이라는 재현실험 모델을 만드는 이유, 가설의 수립이나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논문이나 책에 기술되기 위해 정제되기 이전의 과학자로서의 발상과 사유의 방법론, 과학자로서 피해야만 하는 수사학적 추론인 은유의 배제와 그 엄격한 구별의 노력, 나아가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성과 과학의 인류사적 의미에 이르는 진지하고 진실한 목소리는 아마 이 책의 진짜 미덕이라 하고 싶다.

 

과학의 의미라는 장()이 있다. 오늘 한국 정치 공간에서는 국가 R&D예산을 가혹하게 축소하여 기초과학을 질식시켜 국가경쟁력을 퇴보시키는 정책에 대한 논쟁으로 소란스럽다. 마침 파리시는 과학이 인간 사회와 이 세계에서 무엇인지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마이클 패러데이와 영국 장관의 대화를 간략하게 옮겨본다.

 

영국 장관: 전자기학 실험이 무엇에 필요합니까?

마이클 패러데이: 현재로서는 모르지만, 나중에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겠지요.

 

이 대화에는 과학을 현실 경제의 유용성으로 과학의 쓸모를 말하는 자와 과학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 탐구라는 인류의 문화적 요구로 이해하는 자의 갈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기초과학 연구의 성취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때마다 이전에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을 새롭게 형식화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알지 못했던 인류 삶의 사각지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리처드 파인만의 익살스러운 과학의 필요에 대한 답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리학은 섹스와 비슷합니다. 우린 결과물 때문에 그걸 하는 게 아니죠!” 어쩌면 자본주의적 사고에 한 걸음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임을 주장하는 기발한 주장이기도 하다. 효용과 인류의 앎의 의지와의 투쟁, 궁극에는 그 과실의 경제적 향유에 대한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의 줄다리기일 것이다.

 

그대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모닥불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비로운 장소도 더 넓어진다. 원자의 세계에서 무수한 은하로 뒤덮인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 많이 탐험할수록 우리는 인류 미래의 삶에 유익한 무엇인가를 획득할 것이라 믿는다. 과연 도래할 그 궁극은 무엇일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아마도 내 시선을 강력하게 끌었던 장은 과학과 은유라 할 수 있겠는데, 진리를 찾고자하는 성실한 과학자에게는 수사학적 비유의 통제없는 남용으로 과학이 정치적 오용이나, 학문적 오류로 인한 연구낭비와 학문적 퇴보, 사회적 일탈의 초래로 인한 무분별한 갈등 초래 등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또한 모형 사용이란 은유의 특징으로 시작되는 물리학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자기 경계는 은유와 비유의 추론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촉구한다. 자의적 추론이나 가식적 논증에 사용되거나, 엔간히 훈련된 과학자가 아니고서는 그 감춰진 수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물리학은 결정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양자역학에 의해 다분히 수사적인 확률에 의한 은유적 수사성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강렬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산실인 코펜하겐학파의 대표 격인 닐스보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신이 뭘 하든 당신이 뭐라 하지 마세요.” , 오늘 닐스보어가 한 말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도 한다는 사실이다. 크크.., 과학은 파리시의 말처럼 재미있는 분야다. 아마 오늘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은유에 대한 저항과 해체로 논쟁중인 모양이다.

 

물리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업적이 파리시의 소산이지만 입자물리학과 양자이론, 통계물리학 등 비교적 쉽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상호작용은 미시적 세계인 원자나 분자 활동에 대한 이해로부터 거시적 세계인 인간사회나, 우주 체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기초 지식이다. 이것은 총 4장에 걸쳐, 상전이, 찌르레기의 비행. 로마의 물리학, 그리고 스핀유리, 무질서의 도입으로 설명되고 있다. 일반 독자를 향한 저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글들인데, 로마의 물리학은 입자 물리학의 50년에 걸친 발전의 여정을 통해 맵시 쿼크와 중간자, 중입자(重粒子,baryon)의 친절한 개념 설명을 기번으로 입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 최종이론을 향한 물리학의 길에 대해서.

 


아마 여기서 독자는 한 성실한 물리학자의 사유 방법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저 당연하게 넘어가는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물이 끓거나 어는 것이 이상한 사건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왜 온도가 조금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물질의 형태가 갑자기 변하는가? 이런 변화는 대체 왜 일어나는가?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어떤 물질이 특정 임계점에서 다른 형태의 물질로 변화하는 것을 상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물(액체)이 수증기(기체), 물이 얼음(고체)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전이는 다시 1차 상전이와 2차 상전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잠열, 즉 분자의 결합을 끊는데 필요한 열량의 존재 유무에 대한 구별로서 특정한 열량 공급이 없어도 다른 상태로 전이되는 자석과 같은 상전이가 2차 상전이의 예이다.

 

이것은 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저자의 업적인 스핀 유리 이론의 개발에 대한 설명의 토대로서 기술된 것인데, 스핀 유리의 미세 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하나의 질서를 규명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무질서하기만한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물리학자가 이에 접근하기 위해 복잡다변한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합성 모형의 구축과 이의 검증을 위한 계산과 결과의 불일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물리적 현상에 대한 특징의 무지로 인한 오류의 발생, 상전이를 설명하는 질서 맺음 변수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함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하는 여정의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아마도 카오스 이론 방정식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러한 오류와 무지에 막혀 시름하다 정말 우연히 마주치는 무의식적 추론과 수학적, 물리학적 직관의 중요성을 일화를 통해 보여준다. 아마 과학도들은 이를 통해 하나의 물리학적 진실의 규명에 이르는 수 십 년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며, 혹여 간과하고 지나쳤거나, 아주 조금만 더 생각을 이끌었으면 도달했을 생각을 떠올리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유형의 논리적 과정을 거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만들어지는지, 동료 연구자와의 대화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했던 무엇이 건드려져 느닷없이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 그 멋진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책을 시작하는 유럽 찌르레기의 비행 연구가 복잡한 집단행동에서 다수의 행위자가 상호작용하는 계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나, 스핀유리의 입자 상호작용 연구가 대체 어떤 것을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인가의 이해로 연결된다. 찌르레기의 3차원 움직임을 정량화하여 공간과 시간 속에서 표본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상호작용이 세기를 정의할 때 거리가 끼치는 영향이 당연히 크다고 생각하는 고전 물리학이 여지없이 붕괴하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집단의 상호작용은 구성요소들의 간격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요소 사이의 연결성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와 무관해 보이는 이러한 입자들이나 새떼의 집단행동에서 입자물리학은 인간 사회의 상호 행동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이해를 제공하고, 나아가 인간 세계의 미래 구성에 대한 바른 지혜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러한 한 성실한 학자의 연구 과정의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정제된 논문이나 책에서는 좀처럼 보여 지지 않는 연구 과정에서의 노고와 의혹, 망설임의 흔적과 같은 귀중한 시행착오의 구체적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오류를 찾는데 좀 더 매진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계를 탐험해왔던 인생에서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70세 거장의 목소리는 정말 커다란 울림을 준다. 생에 전반의 소명으로 복잡계 해석 연구에 바친 한 인간의 열정에 매혹되는 읽기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복잡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책은 입자 물리학과 복잡계 이론, 양자역학의 이론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절로 겸손해지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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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젤라스트와 돈키호테(Agelast and Donquixote)

- 신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우리는....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Mann Tracht, Un Gott Lacht.)” - 유대 격언

 

 

이 유대격언에서 신(God)은 왜 웃고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일까? 한 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인간들, 제깟 것들이 생각해봐야 진리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결코 듣지 못할 웃음소리다. 신의 웃음이란 이렇게 초라하고 왜소하며 편벽한 인간의 생각에 대한 반응이다. 진리란 명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하는 멍청이, 획일화되고 고착된 통상적 생각에 매몰된 공허의 인간은 웃을 줄 모른다. 유머감각이란 쥐뿔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짐짓 진지함을 과시하려든다. 우리들은 그때 웃는다. 그 맹목의 무지가 드러나니까 말이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아젤라스트(agelast)’라 부른다고 한다. 아젤라스트들은 자기 믿음이 명확한 진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일치된 동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사와 인간 개체란 것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던가? 사람들을 향해 팔을 쳐들고 삿대질을 하며 굴종을 강요하는 괴성을 질러대는 아젤라스트틀이 모든 다양성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의 획일화된 가치와 질서를 진리라고 종용하는 형국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그 잘난 입으로 방종의 헛소리를 일삼으며 전문가랍네 하던 인간들이 자취를 감추고, 아젤라스틀이 설쳐대는 현실에 찍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니 내지 못하는 것일 테다. 은폐되었던 더러움이 압수수색이란 폭력적 수단에 의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이 남은 보루다. 아젤라스틀은 예술을, 특히 희극과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웃지 못하는 존재들인 까닭이다. 마침 페러디 문학의 결정판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으니 이처럼 맞춤의 대상이 어디 있을까싶다.

 

스페인 문학 연구자인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에 관한 해설서에서 돈키호테가 출현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각과 노동이 죽음의 덫인 나라,

이런 모순투성이의 스페인 현실에 대다수 지식인들은 눈감고 잘나가던 자신들의

펜을 꺾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현실을 미학으로 투영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 돈키호테를 읽다, 75P, 열린책들, 2023.2 초판 3쇄에서

 

400년 전, ‘순수 기독교인의 피라는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순수 피에 의한 인간 구별의 획일화된 잣대가 모든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던, 정치와 종교 권력이 자기 검열을 강요하던 지옥 같은 시기에 출현한 희극적 소설이 역사의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금 그 상식을 뒤엎은 웃음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단 하나 권력의 목소리만을 들으라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상은 결국 사회구성원 개인들의 존재 정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개인을 부정하는 지경으로 치달을 태세다.

 

때문인지 온라인 연결망의 각종 채널들에는 패러디와 유머의 말과 영상들이 증가한 듯하다. 또한 SF, 환상,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문학작품들이 늘고 있다. 현실을 모방하는 리얼리즘의 체험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작품은 아젤라스틀의 쉬운 표적이 되어 블랙리스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을 아는 이유일 것이다. 돈키호테가 활약해야할 비극의 시간이 된 것이다.

 

정교하게 구성된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전혀 그럴듯하지 않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꿈과 현실이 통합된 초현실의 세계가 자꾸 열려야 하는 당위의 시대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다보면 그 유치함과 서투름으로 주인공의 고양된 야망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장면들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표면적 이야기에서는 패배적이지만 웃을 줄 아는 독자는 이것이 패러디임을 안다. 그 잘난 질서 수호자들인 기사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아, 기존 가치와 체계를 전복시키는 최고의 수단인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식(Common sense)이라 따르라는 그것을 뒤엎는 이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역설에서 희극성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희극성, 유희적 세계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이라 했지만, 오늘날에는 훤히 유리창처럼 내부가 보이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권력이기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기가 더 수월해졌다. 신의 웃음은 반박이며, 저항이요, 가소로움에 대한 혐오의 조소이다. , 쿤데라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러니는 비록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그것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주어 확실성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래, 미술, 소설, 시 등 예술은 그 이름값을 하는 한 아무리 명쾌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 웃음과 아이러니, 환상의 세계는 아마 지금 절대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사회집단의 상호 소통이나 영향의 주고받음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존재 사이로부터 시작해 급격한 속도로 파급되어 전체 구성원이 동기화된다고 한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을 포함한 우리 인간은 상호 연결된 진동자처럼 동기화되어 거대한 웃음소리로 아젤라스틀을 질식시킬 수 있다. 돈키호테가 땡기고, *상전이(相轉移)가 유혹하는 시절이어서인지 객쩍은 상념을 적어봤다. 우리들은 찌르레기들의 가을 하늘 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중군무의 변화처럼 순식간에 동기화되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 돈키호테처럼 행동하자. 모두 함께 크게 웃으면서... 

 

) 상전이(phase transition,相轉移)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온도와 압력 등 외부변수에 의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액체인 물이 0도에서 고체인 얼음으로 변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상전이는 모든 물질을 비롯한 인간사회와 같은 복잡한 구조도 얼마든지 다양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창조적인 혼돈상태임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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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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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상처 난 마음을 어르고 달래서 평점심을 되찾게 하는 것을 위로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임시변통의 수완으로서 위무는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수한 고통의 형태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순간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에서이다. 그 다양한 형상을 하고 다가오는 고통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깨우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다시 마주하게 될 고통에 대해서 조금은 나은 관점을, 너그러운 포용의 여유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어떤 획기적이고 단순 명쾌한 위로의 방법을 제시하는 따위의 장밋빛 미사여구가 아니다. 다친 마음을 토닥이며 친절한 연민을 보내며 쓰다듬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가 마주하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인류 사상의 축을 이루는 철학자들의 삶과 글을 통해 근원적 위로로써 건네준다. 그것은 우리를 비난하고 소외시키는 것들이며, 원인을 미처 알지 못해 성취되지 않는 욕망 충동의 실체이고, 현실과 희망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이며, 평범성에 부착된 세상의 부적절함의 낙인이고, 삶의 본질에서 오는 낙심과 슬픔이며, 수없이 다가오는 번민과 절망과 비탄이라는 삶의 곤혹스러운 감정들의 의미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에피쿠로스와 몽테뉴를 거쳐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철학자는 인간 존재가 부딪치는 이러한 고통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그것이 삶에 있어 대체 어떤 무엇일까를 알랭 드 보통은 그 익숙한 사상가들의 친숙한 글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려하게 엮어내어, 고작 지식의 창고에 축적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삶의 현장에 불러낼 줄 몰랐던 멍청함에서 깨어나게 돕는다. 여섯 명 철인(哲人)의 주저(主著)를 중심으로 인기와 가난과 좌절, 부적절성, 상심, 어려움의 여섯 고통의 실체를 풀어, 애면글면하는 우리네 삶을 한 차원 승화시킬 수 있는 단계로 이끈다. 곰팡내 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 지혜로서의 앎의 지대로, 철학이 생의 현장으로 나와 인간 존재의 삶 그 자체를 위로한다.

 


첫 번 재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시선에 붙들려 그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노심초사함으로써 외면당하거나 무시되거나 부정되었을 때 다가오는 고통이다. 아마 이러한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했던 이로서 소크라테스를 호명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회적 기틀을 깨뜨렸으며, 젊은이들을 아버지에게 대들게 만든 괴상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 고발당하여 독배를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끝까지 이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을 지녔던 철학자가 사유없는 직관에 의존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의 질투와 염세적 비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라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아마 극심한 분노와 부정의(不正義)한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고통스러워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간 세계에 산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와 다른 사람의 평가와의 간극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혹한 적들은 힘있는 자리에 올라 무고한 철학자에게 불공평한 혐오를 쏟아 붓기 일쑤다. 정의(正義)는 수시로 왜곡되어 그럴듯하게 위장되고 뒤틀려 대중을 편견과 충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최근 수년 간 벌어진 한국의 정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의를 실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간들의 손아귀에 한 무고한 철학자가 쓰러져야 했다. 다수의 미움을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다수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오류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 고대의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넓게 믿어지거나 매도당하느냐는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견과 질투가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부당함에서 비롯된 고통은 기다려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그를 고발한 3(시인 멜레토스, 정치인 아니토스, 웅변가 리콘), 멜레토스는 사형에 나머지 둘은 유형에 처해졌으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중심에 동상이 세워졌다. 고차적 정의(定義)를 즉각 구분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게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적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숙고의 과정을 요하는 일이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관행이나 관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무기력한 성향이 아니라, 이에 맞서는 이성적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지혜임을 한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으로부터 배운다. 책의 이 첫 장은 지적 회의(懷疑)에 대한 빛나는 초대장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이처럼 비난에 처했을 때 흔히 보이는 병적 흥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확신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임무는 인간 존재에게 수시로 침몰하는 우울과 욕망의 충동에 대한 해석이었으며, 행복추구에 대한 돌봄이었다. 고통을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욕망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는 이를 쾌락이라 보았다. 그는 이 쾌락을 인간의 일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혜로서 우정과 자유와 사색, 세 가지를 꼽았다. 정치적 권력도 아니고, 사회적 명예나 경제적 부()도 아니었다. 소박한 희열, 친구와의 대화, 오후의 햇살, 깨끗한 집, 갓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는 행위에 정성을 쏟는 삶이었다. 오늘 우리네 세상에는 사치스러운 생산품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생활환경을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이미지가 넘쳐흐르며, 성숙한 자기인식과 소박함에 대한 존중은 사라져버렸다. 불필요한 욕망으로 얼마나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과연 꼭 필요한 물질적 욕구인지, 그것으로 만족되는 내면의 충동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실천했던 소박함을 믿는다면 아마 많은 불행들이 사라질 것이다.

 

책의 세 번째인 좌절한 존재를 위한 위로의 철학자는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다. 나는 세네카의 숙명론을 지지하는 알랭 드 보통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주의자들의 질서 순응적 도덕관과 타자 외면의 논리에 혐오를 느낀다. 책의 저자는 멍에에 저항할 때보다 순응 할 때 더 다치는 멍에란 없으며, 숙명과 자신의 느슨한 관계를 적절히 확보함으로써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제한된 자유라도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세네카에 동조한다. 변화 불가능한 현실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외부 환경에 굴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네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차와 마차에 쇠줄로 매여 있는 개의 비유를 든다. 마차가 진행하는 방향과 일치하면 개는 쇠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마차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쇠줄에 목이 당겨 개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질서가,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면 쇠줄만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주어진 숙명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쇠줄만큼의 자유? 목줄이 매여 있는 자유? 대체 이러한 순응성과 굴종의 자유를 누가 자유라 부른단 말인가?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숙명에 복종하라는 위로는 내겐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분노를 야기할 뿐이다. 로마의 거부이자 네로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던 자의 기회주의적 숙명론은 시대착오적 인용이라 봐야 할 것 같다. 그 무엇으로 수식해도, 설혹 운명의 여신은 절대로 도덕적 재판관이 아니라는 말로도 굴복할 수 없다. 비판으로 지면을 낭비하는 수고는 여기서 멈춰야겠다.

 

출처책 354쪽 부분 발췌


이 책의 견해에서 내 마음에 반향을 준 것은 몽테뉴와 니체를 통한 존재의 위무였다. 반은 지혜롭고 반은 멍청이 같은 삶의 방식으로도 여전히 적절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는 몽테뉴와, 인간의 삶에서 긍정적인 요소들과 부정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완성과 어려움의 상호 의존성을 이끌어낸 니체의 해설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고통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수정해준다. 물론 사랑으로 인한 슬픔의 치유에 있어 철학자들 중에 단연 최고라는 쇼펜하우어의 생에 대한 의지(Wille zum Leben, will-to-life)’,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고, 번식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라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쇼펜하우어 해설을 곁들인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은 이 염세적 철학자의 비통함을 쾌활함의 역설로 안내하기도 한다.

 

내가 몽테뉴에 제대로 빠져든 것은 아마도 인간 참모습의 대부분을 배제해버린 초상화를 대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관심을 집중했던, 소탈한 자기 공개의 내재된 긴장의 해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속된 자아와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는 말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적 관념들, 약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얼마간의 가벼움의 철학에 대한 각성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그가 보이는 순수한 지적 겸손은 그 어떤 고매한 사상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영혼에 혹여 잔존하고 있을 지적 오만을 쓸어낼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수상록(Esse)을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으니, 삶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인간 조건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은 동시에 한 참 뒤 그 뿌리에서 

자라날 식물 줄기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질식 시켜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가 이해한 고통, 즉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다시 말해 삶의 완성을 위한 절대 요소로서 고통을 설명하는 알랭 드 보통의 스위스 남동부 엥가딘 지역 작은 마을, 해발 1800미터 질스-마리아에서의 니체의 삶이 의미했던 것과 교통하며 빚어내는 그의 철학 정신의 비범한 옹호는 그야말로 절창이다. 질스-마리아의 집에서 가까운 코바치 봉을 올라 그 엄청난 높이가 호흡을 멎게 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 정신과 내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순진무구한 웃음은 고통이란 부정성이 삶의 긍정적 요소와 어떻게 상호의존을 맺고 있는지 열 문장의 사변보다 깊은 감응과 이해를 가져다준다.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범접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도는 고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그 지고한 정신, 세상의 지붕까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충만함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진 느낌을 갖게 된다. 지식으로서의 철학, 고매하고 오만한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동행 지혜로서 철학을 읽게 된다. 삶의 위안이란 아마 이런 것이어야 할 테다. 순간의 자기연민과 위무가 아니라 마주하게 된 좌절과 번민과 분노의 고통이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임을. 모처럼 마음이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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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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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가 자신의 다른 소설들보다 더 즐겁고 흥겹게 썼다는 이 통속희극을 읽으며 인간의 일생이란 하나의 아이러니란 생각을 떠올렸는데, 사전적 정의인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가 바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리라는 별스런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설과 역설이 뒤섞이는 이중적 혼돈, 밀란 쿤데라가 일관되게 말하려는 가벼움의 무거움, 혹은 무거움의 그 가벼움이라는 상호 전복시키는 감응의 변주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 정신의 한 진실일 것이라는 동의였을 것이다.

 

작가는 프랑스 문학평론가 살몽(Christian Salmon)과의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에서 우리의 드라마를 끔찍한 무의미를 통해 드러내 보여려 했다며, 기대하지 않은 과장된 일치라는 장치를 엄청나게 부각하는 형식으로 이 작품 이별의 왈츠(La valse aux adieux)를 통속적 희극으로 썼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은 동질적 이야기들이 일탈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어, 기꺼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읽기가 되어준다. 소설은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과 사건이라곤 루제나라는 간호사의 임신과 낙태라는 자못 구태스러운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질투의 속성, 인간 존재의 의미, 도덕적 오만, 삶의 진실적 국면이 발생하는 인생 밖의 지대 등 실로 무수한 인간 운명의 진실들이 빼곡하다. 감상은 이러한 인간 속성들에 대한 단상이 되는 것이 왠지 마땅해보인다.

 


1.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에 대해서

 

내가 언제나 가슴 깊이 역겹다고 생각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 그리고 어리석음이 어떻게 서정적인 가면으로 가려지는지 보는 겁니다.” -164

 

이 문장은 온천장의 불임치료 의사인 슈크레타의 친구인 국가 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소외된 지식인으로 조국을 떠나기 전 친구와 피후견인 올가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찾아 온 야쿠프의 목소리다. 온천장에 돌아다니는 개들을 질서란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포획하는 일종의 자경단의 행위가 발산하는 폭력의 역겨움에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증오 욕구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는 이들 자경단이 지닌 질서의 속성에서 개인을 말살하는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증오 욕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구경꾼으로 무대에 등장한 간호사 루제나가 돌아다니는 개를 구제하려는 야쿠프의 행동을 막아서며, 특권층에 속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인 듯 끔찍한 처형에 가세하는 형국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다.

 

유명 트럼펫 주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자들만 우글대는 이 소도시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간호사 루제나의 이성 초월적 계시같은 망상의 믿음 또한 그 천박함과 동일시의 몽매성도 잔인성과 멀지 않은데, 자기가 멸시하는 남자가 원인일 수 없는 임신이라며 논리적 추론을 외면하고 의도적인 왜곡으로 유부남인 유명 연주자를 아이의 아버지로 스스로 납득시키는 것이다.

 

2. 인간 경멸에 숨은 오만한 자의식

 

루제나의 배속 씨앗의 아버지인 연하의 배관공 프란티셰크에 대한 경멸이나, 야쿠프의 도덕적 오만이 뿜어내는 인간 정신에 대한 혐오는 사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 야쿠프가 친구 슈크레타 의사에게 맡겨 보호하는 올가에 대한 후견의 행위가 스스로 관대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더러운 자기 과시에 불과한 것이고, 흉내 낼 수 없는 올가의 젊은 개체성을 비웃고 격분하는 온천탕 속의 상스러운 흥겨움에 가세하여 모욕하고 우롱하는 루제나의 잔인한 의식의 동일시 장면은 쿤데라가 증명하려는 인간 의식의 더러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특히 야쿠프의 이 인간 정신에 대한 경멸은 루제나에게 투사되어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이웃들에 대한 그 무심하고 잔인하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내리는 얼굴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란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인간에 대한 경멸이 루제나라는 혐오스러운 인간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처벌의 준비가 소극적으로 실행되었음을 지각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타인의 생명을 희생할 권리가 없다는 강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위에 의탁해 한 인간의 죽음을 방조한다.

 

야쿠프는 죄의식을 느끼려고 간호사가 진짜 죽었다고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감미롭고 기분 좋은 경치를 가로질러 차분하고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차를국경으로 몰아간다. 그는 자신과 고리대 노파를 살해했던 라스콜니코프가 느꼈던 살해 후의 내적 공포와 회한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조금도 무게가 나가지 않음에, 너무도 가벼움에 놀라며, 러시아 주인공의 히스테릭한 감정보다 더 끔찍한 게 아닌가 자문한다. 그는 그토록 오랜 삶의 믿음이었던 도덕적이고 정치적 자만심을 상실하고 만다. 자신도 정적을 살해하는 국가 폭력자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이라는 이해, 살인자들의 형제임을 자각하는 것인데, 자기 정신만은 타인과 다르게 고매함과 섬세함을 지녔다는 오만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인간이란 결코 잘 못 창조된 신의 오류라는 것일까? 신의 사랑만이 귀결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러한 결론은 왠지 형이상학에 손쉽게 의존하는 편리함만 같아서 불편하다.

 


3. 눈 먼 질투심과 감춰진 운명 밖 보기

 

질투는 정열을 쏟는 지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정신을 사로잡는다그때 정신은 단 일 초의 휴식도 없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권태를 모른다.“  -283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굵은 하나의 나무에서 뻗은 수많은 가지들의 울창함 때문이다. 트럼펫 연주자의 아내인 카밀라는 기독교 신자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기 남편의 부정을 믿는 것인데, 때문에 남편의 연주회가 진실임을 믿지 않아 확인을 위해 온천장 연주회를 찾는다. 한편 루제나의 젊은 연인 프란티셰크는 루제나의 유명인 클리마와의 밀착된 만남을 24시간 감시하며 사랑의 집착이 키워낸 질투심에 의해 원격조정 되듯 이야기에 투입된다.

 

질투라는 인간 정신의 불모성을 위의 문장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다. 확인하려는 진실은 확인하려는 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질투로 인한 믿음은 혼란을 맞이한다. 세상사란 것에 작동하는 요인이란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든가? 아주 사소한 요인도 정말 우연히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작동하여 별난 사건으로 치닫는 것이 삶의 실상이다. 야쿠프가 마지막 이별 인사를 마치고 온천장을 떠나기 전 우연히 카밀라와 마주하게 되자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자신이 알아 온 인생이란 것 밖에 감춰진 운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듯, 카밀라 또한 야쿠프가 건넨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과 동시에 마주하게 된 발견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내부를 얽애맨 질투의 본질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의 탈주가 시작된다.

 

4. 한 편의 코미디적 상상,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의 몽상

 

의사 슈크레타는 아기를 갖길 위해 찾아오는 여성들에게 아기를 선사한다.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이 온천장을 찾는 것도 슈크레타의 치료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친구 야쿠프에게 진실을 털어 놓는데, 이 구제불능의 몽상가는 자신의 번식력이 왕성한 액체를 주입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에게 아기들을 잉태케 한다. 세상은 작은 슈크레타들로 확산된다. 슈크레타의 우생학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세계를 자신의 정신을 계승한 인간들로 채우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적 몽상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욕망을 조롱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가벼움에 일말의 진지한 의도가 있는 것인가? 작가가 진정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나로서는 해독해내지 못했다.

 

사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진정한 인생의 승자는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는데, 야쿠프의 피후견인으로 온천장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올가를 주시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간 시절의 고통으로 자신의 박물관을 지은 야쿠프의 관대한 이타주의적 태도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그의 박물관에 자신이 살아있는 핵심 오브제임을 제대로 통찰해내고 있다. 올가는 뭇 여인네들과 달리 그 어떤 희생제물의 역할도 당당히 거부하며, 그러한 인간들의 잔인한 의식을 거부한다. 또한 야쿠프가 보이는 자신에게 내보이지 않는 육체와 영혼을 기꺼이 자신에게 내어줄 것을 몸으로 밀어부처 야쿠프의 육체를 허물어뜨리기도 하며, 자기 주체를 적극적으로 회복한다. 그녀는 세계 내 질서, 인간들이 말하는 정의 밖에서 살고자 한다. 혐오스러운 인간들과 결단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하면서.

 

아무튼 이 소설은 통속 희극이라는 가벼운 이야기에 정말 진지함이 무한하게 채워져 있는 인간에 대한 놀라울 만한 관찰기다. 다른 지면에서 작가가 이 작품을 말했듯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시키려 했던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밀란 쿤데라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국역되어 이 특출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음은 축복이다. 그의 말처럼 소설은 인간이 삶에 부대끼며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위대한 작품의 하나이다.

 

극단까지 몰고 간 가벼움은 무시무시한 가벼움의 무거움이 되었고...”

-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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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의 왈츠네요...예전에 작은 사이즈 하드커버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얇지만 임팩트가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무는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필리아 2023-11-20 11:03   좋아요 0 | URL
소설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아우르고 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원무를 추듯 돌고 돌아 이별, 스스로 억죄고 있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길을 떠나네요. 멋진 이야기를 쿤데라가 동시대인들을 향해 선사한 선물같습니다. Yamoo님, 댓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