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 2판) -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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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아톰(atom)의 세계에서 비트(bit)의 세계인 디지털 세계로의 급속한 이전이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따라 엄청난 초연결과 초융합의 세계가 열리면서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수히 복잡한 세계 그물망의 상호작용에 의한 창발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나, 이것이 인간 삶의 행복 증진과는 괴리된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과학의 급격하고 가공할만한 진전이 인간 개체의 삶에 소용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를 자문해보게 된다.

 

2001년에 초판이 출간 되고, 10년마다 개정증보를 하여 2020년까지 두 차례 증보(增補)가 이루어진 이 대중 과학 저술을 읽게 된 동기일 것이다. 특히 20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르조 파리시의 복잡계 상호작용에 대한 저술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2020년 추가된 글에서 과학자 정재승은 복잡계 과학이 최근 10년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과학 분야라 말하고 있다. 무작위적이고 우연에 의해 촉발된 현상으로 이해되던, 무수한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떤 법칙이나 질서를 알 수 없었던 대상으로부터 고유한 물리적 특성을 발견 규명하는 연구를 복잡계 물리학이라 거칠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삶의 현실로 돌아와서,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대체할 정도의 인공지능 구현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는 변수들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자신들이 손쉽게 정량화할 수 있는 것만을 과대평가하고, 정작 사회구성원인 인간 개체에게 소중한 가치들인 쾌적한 환경, 창의적 교육, 국민건강, 민주주의와 같은 요소는 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는 지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복잡계 과학의 연구는 이제까지 보여진 국민행복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성장만을 주도하는 GDP(국민총생산)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표의 수립을 위해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물질적인 공공성격의 투자(후원)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말이다. 복잡계는 이미 자연 대상물과 교통망, 통신망, 주가 예측, 심장 박동의 질서 등에서 질서가 있는 카오스 운동을, 무질서해 보이는 미세 개체들의 상호작용에서 불완전한 질서를 발견, 입증해왔다. 그리고 이들을 표현하는 비선형 함수를 포함하는 카오스 방정식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의 물리적 해석을 해내기도 했다.

 

인간 세상에 대한 불합리성과 혼잡성에 관심을 가지고 입자물리학, 통계 물리학자들이 복잡계 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격변과 혼란으로 가득 차있는 복잡계로부터 정확한 예측을 기대하는 것이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계 물리학은 인간 행동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질서를 발견하고 입증하는 데 나름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네 사람만 연결되면 전 지구의 인간이 연결될 수 있다는 케빈 베이커 게임( Six Degrees of Kevin Bacon)이론작은 세상 네트워크를 입증하면서,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이 국소적 무리로 이루어진 폐쇄사회를 전체에 열린사회로 만들 수 있음을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알려주었다. 잘 짜인 네트워크에서 이탈한 엉뚱한 단 몇 가닥이 거대한 조직이 모두 연결되도록 만든다는 물리학적 연구가 우리 포유류 인간 뇌의 신경 세포 작동 이해에 단서를 제공하였듯, 도로 설계와 통신망 설치에 유용한 상상적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 표현추상주의 회화를 이끌었던 잭슨 폴록의 물감을 질질 흘려 놓은 것 같은 그림이 모든 자연 현상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특징인 카오스와 프랙털이 반영된 작품임을 물리학이 규명해냈듯, 무작위 시스템에 내재한 불안정하지만 규칙의 존재를 입증해내지 않았던가? 아무리 작은 스케일에서 들여다보더라도 미세에서의 구조가 전체 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되풀이하는 자기유사성, 프랙털을 발견했듯,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서도 물리학은 분명 결정론적 시스템과 무작위 시스템 사이에 놓여있는 카오스 시스템을 규명해내리라 생각된다. 이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균형한가? 언제까지 측정할 수 없는 것이라 무시하고 측정 가능한 것들로만 이 세계를 왜곡하는 짓을 방관할 텐가? 과학이 지배질서인 주류에 편승하며 자기 이익에만 골몰한다면 아마 과학은 지금까지 학문으로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출처본문 107잭슨폴록과 카오스 부분 발췌


인간의 심장 박동의 주기적 규칙성에 대한 신봉을 무너뜨리는 심장박동 간격의 불규칙성이 건강한 환자의 신호라는 과학적 발견처럼, 한동안 박동이 증가하다 반대로 줄어드는 요동을 반복하는 카오스 운동의 역동적 유연성이 이 세계의 자연 법칙에 숨은 질서임을 배운다. 질서와 균형을 통한 정적 평형상태의 항상성은 결코 생명 현상이 아님을, 오히려 정적 평형상태를 깨고 끊임없이 요동치고 변화하는 그것으로서의 항상성임을 알게 되었다. 나사(NASA)의 로켓 과학자들이 월스트리트에 금융공학자가 되어 입성하고, 경제주체들의 상호작용의 원리를 연구 규명하듯, 인간 삶의 균등한 성장과 생활터전의 건강성을 밝혀주는 지표를 왜 개발할 수 없겠는가? 국가의 공공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기득권을 차지한 정치권력과 관료집단은 분명 이러한 실질적 삶의 반영에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 대중이 권력에 요구해야 한다. 과학이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연구에 나서도록 말이다.

 

자연의 가장 창조적 혼돈상태, 어떤 계의 물리적 형상이 변하는 것을 상전이(相轉移)라 부른다. 물이 끓어올라 수증기로 변화할 때 물이라는 계의 큰 요동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즉 요동이 크다는 것은 그 계가 어떤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순간이라 해석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혼돈으로 요동치고 있다. 나는 이 혼돈을 무엇인가를 창발하려는 인간사회의 새로운 상태로의 전환을 알려주는 신호로 여기고 싶어진다. 연주회 관객의 박수소리가 동기화되는 박수의 물리학, 노이즈가 필수인 인간 정상 뇌에 대한 연구, 흐르는 모래 알갱이의 자기조직화와 임계성이라는 현상의 발견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과 자극을 얻었다. 한편으론 현재 과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 인간 지식의 한계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비로소 직면하기도 했다.

 

세상의 많은 복잡계가 임의 연결망이 아니라 정교하게 연결된 독특한 특성을 지닌 구조체임도 아울러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의 대두와 함께 과학의 겸허함도 아울러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세상 탐구에 나선 물리학, 나아가 과학의 동태보고서라 해도 될 것 같다. 아무튼 삶을 행복하지도 지속가능하게도 하지 못하는 GDP 성장 중심의 성장 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지표의 개발을 위한 물리학자들의 전방위적 도전을 기대해 본다.

 

월스트리트에서 자기 이익에 투신하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이익을 위한 과학자들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연구되거나 진행 중인 물리학 연구의 진술들을 통해 새로운 발상의 촉발을 경험하고 또 다른 가능성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다가오는 새 십년에는 과학이 어떤 성취를 이뤄낼지, 2030년의 증보판을 기대해 본다. 2001년 이 책을 처음 쓰던 젊은 과학자가 이제 중년의 경험 많은 과학자가 되었을 터이다. 그의 연구에 인류 유익의 연구 성과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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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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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본디 크나큰 이야기인 셈 아닌가요? 그 이야기가 덧없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잠들지 못한답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질까 불안하여 밤을 지키는 초병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 나는 거지로소이다, 81쪽에서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순간을 되돌려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상황을 전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괜한 짓거리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역사의 주변부로 처리되어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이 겪어내야 했던 삶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결실을 맺어주고, 실패한 사건을 성취시키며, 사건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주인공이 되어 봄으로써 역사와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혹독함, 안타까움, 무력함에 들러붙었던 것들, 혹은 유무형의 높이 세워진 인위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선한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현실과 괴리된 망상으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한문학 교수인 윤채근은 실록과 여타 역사기록물들, 조선조 소설과 민담 등을 상호연결해보고,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시대의 관념으로 상상력을 지펴내어 생생하고 흥미 넘치는 28편의 매혹적 이야기를 탄생시켜 놓았다.

 

책은 커다란 주제의식을 기반으로 전쟁과 혁명, 현장의 미스터리, 시간을 초월한 사랑,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국가의 창업과 흥망의 현장으로, 사건의 현장에서 번뇌하는 인간 존재의 일촉즉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시공을 초월한 이동 속에서 정서적 충격과 공감을 오가며 새로운 상상의 길을 펼쳐놓는다. 하나의 가공된 이야기마다 그 이야기의 근거가 된 사료와 기록들을 제시하며, 허구화되거나 재해석된 부분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작가적 상상의 구성 속에서 독자는 진실을 추정해보고 그러해야 할 세계의 당위를 생각해 보도록 돕는 역사와 문헌에 대한 간결한 안내 글은 새로운 독서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개인 원찰 혼()묘지 보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이순신의 서명과 낙관까지 갖춘 육필 칠언시에서 비롯된 왜장(倭壯) 와키자카의 목소리를 통해 구술되는 적장에 대한 경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전쟁과 혁명의 이야기들은 북방의 드넓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과 그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되어 살육의 덫에 갇힌 전쟁의 수레바퀴를 생각게 하기도 한다. 그리곤 1456년 찬탈한 왕위의 부도덕함을 시정하려는 숨 가쁜 반정(反政)모의 사건이 실패하는 시간 속에 내려놓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거사를 미뤄선 안 됩니다. 미루려는 자가 배신자이니 그 자를 먼저 베십시오.(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33) 단종의 유모이자 반정모의의 숨은 역할자인 봉보부인 이씨가 단종의 이모부인 형조정랑 윤영손에게 거사 전에 당부하는 말이다.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갑자기 운검이 폐지되고 거사가 중지되었다. 성삼문인가? 신숙주인가? 누가 배신자인가? 거사는 중지되고 이튿날 성균관 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성승, 유응부, 권자신, 윤영손 등은 척살되었다. 정의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들은 누구일까? 왜 역사의 이 순간을 육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은 복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실록(實錄)과 남효온의 六臣傳에 근거하여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이 날의 이야기에서 발견되어야 할 진실이란 무엇일까? 를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도적? 누가 도적이냐? 백성들의 주린 배도 못 채워주는 임금이 진짜 도적 아니냐? 이 나라를 누가 세웠더냐? [...] 임금은 백성이 필요한 때 만드는 거다.” 

-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 51쪽에서 


동인은 동쪽 문으로, 서인은 서쪽 문으로, 관복의 복색조차 달리하며 입조하던 양반무리들의 당파 싸움은 당대 정치가 백성의 삶과는 완전히 유리된 것이었음을, 한 내금위 무관의 시선으로 1589, 천 명에 가까운 서인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기축옥사의 한 시공 속에 데려다 놓는다.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여립을 빌미로 동인과 전라도 쪽 동인의 씨를 말린 당대의 수구세력은 이렇게 정치적 학살을 자행했다. 가짜 왕이 득실대는 대궐, 백성의 고혈을 빨기위해 공맹(孔孟)을 만사의 법리로 강요하던 서인집단은 임진왜란을 자초했다. 자유로운 광대집단을 부르던 건달바가 백성이 실제 나라의 주인임을 외치던 대동계, 혁명 세력의 이름이 되어야 했던 시대의 언어에 기시감으로 전율하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시공을 마구 널뛰는데, 세상의 마지막 단군에서는 고구려의 창업 신화를 카르하미르(흑룡)강 연원에서 살던 쥬신 종족과 부여 종족의 피를 이어받은 코리족, 코코리 이야기가 환상적으로 전개되며, 아침 햇살 앗이 비추는 그 희망이 시작되던 세계를 거닐게 한다. 당골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탕구르, 아침 햇살 드는 곳 아사달, 우리의 기원은 어디일까? 우리 운명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나라와 종족의 근원에서 그 부침의 여정과 미래를 상상케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도 된다.

 

이 소설집에서 특히 매료된 이야기의 하나는, 기근과 절망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의 출몰로 공권력조차 무력화된 임란 이후, 병자호란 사이의 세태를 배경으로 한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이다. 식인귀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데 이골이 난 이충백이란 인물은 한양에 이르러 너무도 많은 식인귀들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친다. 모두 척살하여야 함에 신이 날 지경이지만, 그의 패두는 그에게 말한다.

 

누가 모르나?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기라. 들어봐라, 나라님이 식인귀라믄 믿겠나? 창덕궁에 드나드는 양반들 태반이 식인귀라믄 니는 믿겠나?” 

-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128쪽에서

 

이충백의 힘과 패기를 신뢰했던 평안관찰사 박엽, 국경을 강화하고 적의 침략을 대비하여 엄격한 군사대비에 철저했던 이는 간신 김자점에 척살되고, 1627년부터 시작된 여진족의 침입과 병자호란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 우리 역사의 어느 순간에 도착해도 힘없는 민초들은 불의하고 사특한 인간무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 허구의 이야기들은 민초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승리가 감돌지만, 어디 가상의 이야기에 머물며 환상 속을 헤매는 것이 해결책이 되기나 할 텐가?

 

시적 흥취에 빠져들게 한 이야기도 있는데, 고려말 문장가인 이규보의 창작의 고통에 내재된 기이한 시인의 삶이 세상 너머까지 보아야하는 다른 눈을 주는 시마(詩魔)와 민족적 기원에 까지 연결되며, 짧지만 웅장한 한 편의 거대 서사의 물결에 휩쓸리게 하는 시마의 계약이라는 작품이다.

 

시는 머무는 자들의 것이 아니야. 바람을 봐. 우주를 감미롭게 찬미하지만 형체없이 떠돌고 있지. 땅에 집착하는 자에겐 시가 없어. 가질 수 없는 걸 사랑해야 시가 찾아와.” -시마의 계약, 153쪽에서

 

작가는 이처럼 국가라는 물질적 토대의 경계를 여러 작품에서 넘나드는데, 17세기 변경의 삶을 이해한 자이자 전란(戰亂) 속 고독을 노래한 시인 가수재(賈秀才)란 인물의 실종을 소재로 하여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왜인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거나(가수재의 실종),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화가 최북(崔北)과 유녀 하나오기와의 사랑으로 에도 최고 풍속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로 이어지는 화풍의 관계 등 역사적 상상력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인의 그것으로 마음껏 나래를 편다.(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

 

조선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모리스 쿠랑을 주인공으로 한 모리스 쿠랑 이야기두 편은 19세기 외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근거지로 당대 세책방과 책쾌들을 배경으로 삼아 정치적 분열과 외세 의존의 지배계급 몰락의 양상을 지켜보게 한다. 백성이 외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계속 피살됨에도 국가는 아무런 것도 행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눈을 통해 쇠멸해가는 조선의 정세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교활하게 정치적 영역을 넓혀가던 일본, 러시아, 프랑스의 시점이 흥미롭게 그려진 소설이다.

 

그런가하면 보물 635호로 지정되어있는 신라 황금 보검에 얽힌 페르시아와 신라의 빈번한 교역의 이야기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불과 모래의 기억)로 변주되어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페르시아 서사시 모음집인 쿠쉬나메의 한 페이지로 시간여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과 신라 공주 프라랑의 사랑 이야기>, 실재하는 이야기다. 발견된 신라 황금보검은 페르시아 역사학자들로부터 페르시아 왕실 의장용 보검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작가 윤채근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사실에 입각하되, 사실과 사실 사이에 벌어진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며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

 

어쩌면 사실과 환상을 얽어 가공한 이 팩션 세계로부터 새롭게 어떤 무엇을 발견하고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감행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읽어나가며 나 또한 이야기마다에 소개된 관련 문헌들, 특히 한문소설들과 이 세계의 역사들을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풍화되고 변형된 이야기들 속에 일말의 진실들이 숨겨져 누군가로부터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새로운 숨결을 입혀 재탄생한 이 이야기들에 빠져드는 것도 역사의 진실을 향한 한 걸음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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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에디토리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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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은 존재가 하나의 형식으로 결정(結晶)화 되는 의미를 획득하는

극소수의 부류들 가운데 하나 이다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한정되지 않으며

[...] 유기체처럼 살아있다."  -176쪽



책은 20세기 문학의 여정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거장이 새천년(21세기)에 나아가길 기대하는 문학의 길에 대한 탐색으로, 1985~86학년도 하버드대학교 <찰스 엘리엇 노턴(Charles Eliot Norton) 시학 강의> 다가오는 새 천년기의 문학이란 주제의 한 학기 강의 내용이다. 총 여섯 번의 강의로 준비되었으나 마지막 여섯 번째 강의를 앞두고 이탈로 칼비노는 뇌출혈로 85918일 숨을 거두었다. 강연되지 못하고 준비되었던 이 마지막 원고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있다.

 

21세기 문학의 기능을 이탈로 칼비노는 여섯 가지로 압축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그리고 시작과 끝>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문학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문학작품을 왜 읽는가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이 두 물음은 그리 다른 질문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의 다양성이란 사실 좁아터진 것이고, 그 좁은 터전에서의 사유란 것도 볼품없는 것이긴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세계의 표현되지 않거나 표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예술이 탐색한 표현 가능성은 아무리 치워버리려 해도 눌러 붙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거나 해소할 세계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통의 고전적 과학의 시대는 저물고, 양자이론의 부상(浮上)과 함께 지금까지 무질서와 혼돈의 복잡성으로 이해되던 사물과 현상들에서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며, 마침내 두 모순되는 우주의 질서를 종합하는 최종이론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21세기 오늘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복잡성,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듯 인식되는 세계 속에서 특정한 개별적 현상들이나, 어떤 형식화된 질서나 법칙, 이러한 것들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개체들의 형상에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나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칼비노 또한 21세기 문학의 여섯 요소 중 <다양성>의 장에서 모든 인생은 백과사전이고, 도서관이고, 사물들의 목록이고, 양식들의 견본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학 작품이란 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계속 뒤섞이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재정리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즉 문학 작품은 우주의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으로부터 무질서에 자리잡은 인간과 세계의 양태로부터 알지 못했던 어떤 특정한 작용이나 질서, 현상의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다. 이처럼 나는 이 문학강의를 삶의 또 다른 발견을 기대하는 독자의 태도로 읽었다.

 

첫 번째 문학의 요소로 그는 <가벼움>을 말하고 있다. 아마 모든 작가들의 정언명령이랄 수 있는 시대 표현에 대한 의무에서 발생하는 무거움과 세계에 대한 불명료함의 발견이 글쓰기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예민하고 민첩한 삶의 발견에 간극을 일으키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칼비노는 이 상황을 벗어나 이런 형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지성의 생동감과 우연성이라는 가벼움, 가볍게 이동, 도약할 수 있는 정확함과 결단력으로서의 가벼움이었다고.

 

그래서 삶의 무게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가벼움에 대한 탐색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함이나 발견의 포기가 아니라 세상의 견고함을 용해하는 지식, 다른 시각과 논리, 인식으로 날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동적이고 가벼운 것을 지각하게 만드는 최초의 위대한 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모든 것(The Nature of things)을 예시하며, 물질의 진실한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되어있음을, 즉 가벼움에 내재된 진실을 비유한다. 또한 형태에서 형태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추적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도 가벼움의 도약에 내재한 형식의 변화, 새로운 세계의 구현 가능성이었음을 역설한다. 문학이란 존재를 얽어매는 촘촘한 강제성의 그물, 그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드러내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사려깊은 가벼움의 모색이어야 한다는 것일 테다.

 


두 번째는 이야기의 경제성을 말하는 <신속성>이다. 사실 소설문학은 페이지터너와 같이 이야기의 리듬과 전개되어나가는 본질적 논리가 일치함으로써 재미라는 기쁨을 준다. 만일 지지부진하게 같은 말이나 맥락의 반복, 리듬의 어긋남 등은 읽는 이를 지치게 하고, 주제를 혼탁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한 기사가 귀족 부인에게 즐거운 얘기를 한다고 했으나, 버벅거리고 좀체 지루해 터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참을 수 없게 된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때 부인은 재치있는 말로 기사를 넌지시 비난한다.

 

기사님, 당신 말은 너무 힘겹게 총총거리는군요, 걸어갈 수 있게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이야기는 말()이며, 말하는 속도는 정신의 속도라는 것이다. 서투른 이야기는 말의 리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속성과 간결함에서 발생할 수많은 생각들의 고양을 차단해버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속도는 그것 자체로 기쁨이고, 문학의 중대한 가치라는 것이다. 더하여 신속성은 시간 절약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느긋하게 벌어주며, 이것은 다양한 리듬, 통사적 전개, 의외의 놀라운 형용사를 수반하여 언어의 독창성과 함께 문학에 차이를 더해준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는 언어와 문장 사용에 있어 <정확성>이다. 대충, 우발적, 경솔한 사용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준다면서 사전처럼 그리고 생각과 이미지의 풍부한 명암처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말한다. 칼비노는 이처럼 모호하고 흐리멍텅한 언어의 사용을 언어 페스트라고 언어의 질병, 즉 구체적이고 명료하며 간결한 표현을 개괄적이고 추상적 문구로 평준화해버려 의미를 희석시키고 불꽃을 모두 꺼버리는 폐단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 나 또한 이러한 언어와 문장에 민감하지 못하곤 하는데,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 관료주의적 획일성과 매스미디어의 천편일률성을 말할 때 진부한 언어들을 대충 사용하는 함정에 빠져,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퇴색시켜버리기 일쑤이다.

 

정확성과 엄밀성의 사례로서 폴 발레리가 창조한 테스트 씨(Monsieur Teste)는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조화와 집중으로 이어지는 정확성의 재미있는 읽기를 제공한다. 발레리는 테스트씨를 고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기하학적 추상 개념을 연습시키고 마침내 물리적 고통을 물리치게 하여 정확성을 증명해 보인다. 사물들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보고할 수 있도록 언어적 노력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즐거운 참조가 된다.

 

네 번째 요소는 세계정신(世界精神)과의 의사소통 또는 우주의 진리가 보관 된 것으로서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말하는 <가시성>이다. 아마 이미지 홍수에 치여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상상해내거나 어떤 논증적 사고를 길어 올리지 못하는 소설가와 현대 독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사실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내적 삶에 투영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언어 표현에 이르는 필수의 경로이다. 이미지들의 자발적 생성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전개 방식은 칼비노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상실하기 십상인 능력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새로움, 독창성, 창의력을 추구하는 시대에 모순되게도 상상력이 쇠퇴하는 세태는 정말 아이러니하다.

 

<다양성>은 그야말로 문학에서 기대하는, 아니 문학이 갖춰야 할 절대 요소처럼 내겐 여겨진다. 무엇보다 세계를 체계들의 체계로 인식하게 되는, 즉 세계의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질서나 법칙을 만들어내는 그침없는 상호작용의 세계인 오늘에는 백과사전적으로, 인식의 방법으로, 무엇보다 사건들, 사람들, 세계의 사물들의 관계를 무한히 내포하는 것은 문학의 의무라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고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처럼 전 세계의 도서관 책들을 필사하는 일에 삶을 바치는 두 독학자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망라는 아닐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재능이 결여된 존재들이다. 책으로부터 끌어내고 싶어 하는 무상의 기쁨에 적용하는 능력이 없는, 즉 기본 개념을 자신들이 원하는 실천에 이용하는 능력과 재능이 결핍된 인간들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필사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물론 정신의 질서와 엄밀성에 대한 취향으로서는 비할 데 없지만, 그 방법의 결여는 가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독학자를 쓰기위해서 플로베르는 현실에서 농업, 원예, 화학, 해부학, 의학, 지질학, 교육학, 종교학1500권이라는 거대한 독서 모험을 강행했다고 하니, 지식의 허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으로서는 과연? 하고 머리를 젓게 된다. 실제에 있어 많은 문학작품들은 의미가 풍부한 상징 요소들을 통해 이 다양성을 이미 훌륭히 사용하고 있다.

 

새천년을 향한 문학 거장의 소설이 담아내야 할 가치를 말하는 이 저술은 단지 문학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의 이해를 위한 심층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관찰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칼비노의 개별 작품들에 의도나 경향성에 대한 참고적 이해의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나서 문학에 대한 막연함, 그 피상성에 환한 빚이 드리워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로부터 호손과 콘래드, 무질의 작품을 거론하며 소설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진정한 독창성과 기억에 남을 만한 서두와 결말에 대한 강론은 가히 절창인데, 호기심 많은 독자들의 읽기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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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 한 복잡계 물리학자의 이야기
조르조 파리시 지음, 김현주 옮김, 김범준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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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gio Parisi, 2021년 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이 저술은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이탈리아 사피엔차 대학교 양자이론 교수이며, 2021<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르조 파리시Gorgio Parisi)'의 학회 발표논문과 과학 에세이 일곱 편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글은 대중의 이해를 향해 있어 가장 쉬운 문체로 쓰여 있으며, 고차적 수식의 사용이나 물리학과 양자이론의 특정 개념어들조차 일상어로 풀어놓아 입자 물리학, 통계물리학, 복잡계의 물리학, 양자역학이 오늘날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이 여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입자물리학가 양자역학 등 과학도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탐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실하고 겸허한 목소리에서 과학적 사유의 길을 경청할 수 있다.

 

그의 물리학적 업적인 스핀(spin) 유리 이론과 이의 배경지식인 상전이(相轉移)’에 대한 연구내용, 유럽 찌르레기의 집단행동 연구를 통한 상호작용의 물리학적 규명으로부터 상호작용의 세기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발견처럼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물리학적 연구 업적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시는 이들 연구의 여정에서 자신이 마주했던 장애와 자신의 사유 오류와 실수, 그리고 동료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참조,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모형 구축이라는 재현실험 모델을 만드는 이유, 가설의 수립이나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논문이나 책에 기술되기 위해 정제되기 이전의 과학자로서의 발상과 사유의 방법론, 과학자로서 피해야만 하는 수사학적 추론인 은유의 배제와 그 엄격한 구별의 노력, 나아가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성과 과학의 인류사적 의미에 이르는 진지하고 진실한 목소리는 아마 이 책의 진짜 미덕이라 하고 싶다.

 

과학의 의미라는 장()이 있다. 오늘 한국 정치 공간에서는 국가 R&D예산을 가혹하게 축소하여 기초과학을 질식시켜 국가경쟁력을 퇴보시키는 정책에 대한 논쟁으로 소란스럽다. 마침 파리시는 과학이 인간 사회와 이 세계에서 무엇인지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마이클 패러데이와 영국 장관의 대화를 간략하게 옮겨본다.

 

영국 장관: 전자기학 실험이 무엇에 필요합니까?

마이클 패러데이: 현재로서는 모르지만, 나중에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겠지요.

 

이 대화에는 과학을 현실 경제의 유용성으로 과학의 쓸모를 말하는 자와 과학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 탐구라는 인류의 문화적 요구로 이해하는 자의 갈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기초과학 연구의 성취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때마다 이전에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을 새롭게 형식화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알지 못했던 인류 삶의 사각지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리처드 파인만의 익살스러운 과학의 필요에 대한 답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리학은 섹스와 비슷합니다. 우린 결과물 때문에 그걸 하는 게 아니죠!” 어쩌면 자본주의적 사고에 한 걸음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임을 주장하는 기발한 주장이기도 하다. 효용과 인류의 앎의 의지와의 투쟁, 궁극에는 그 과실의 경제적 향유에 대한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의 줄다리기일 것이다.

 

그대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모닥불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비로운 장소도 더 넓어진다. 원자의 세계에서 무수한 은하로 뒤덮인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 많이 탐험할수록 우리는 인류 미래의 삶에 유익한 무엇인가를 획득할 것이라 믿는다. 과연 도래할 그 궁극은 무엇일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아마도 내 시선을 강력하게 끌었던 장은 과학과 은유라 할 수 있겠는데, 진리를 찾고자하는 성실한 과학자에게는 수사학적 비유의 통제없는 남용으로 과학이 정치적 오용이나, 학문적 오류로 인한 연구낭비와 학문적 퇴보, 사회적 일탈의 초래로 인한 무분별한 갈등 초래 등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또한 모형 사용이란 은유의 특징으로 시작되는 물리학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자기 경계는 은유와 비유의 추론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촉구한다. 자의적 추론이나 가식적 논증에 사용되거나, 엔간히 훈련된 과학자가 아니고서는 그 감춰진 수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물리학은 결정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양자역학에 의해 다분히 수사적인 확률에 의한 은유적 수사성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강렬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산실인 코펜하겐학파의 대표 격인 닐스보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신이 뭘 하든 당신이 뭐라 하지 마세요.” , 오늘 닐스보어가 한 말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도 한다는 사실이다. 크크.., 과학은 파리시의 말처럼 재미있는 분야다. 아마 오늘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은유에 대한 저항과 해체로 논쟁중인 모양이다.

 

물리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업적이 파리시의 소산이지만 입자물리학과 양자이론, 통계물리학 등 비교적 쉽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상호작용은 미시적 세계인 원자나 분자 활동에 대한 이해로부터 거시적 세계인 인간사회나, 우주 체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기초 지식이다. 이것은 총 4장에 걸쳐, 상전이, 찌르레기의 비행. 로마의 물리학, 그리고 스핀유리, 무질서의 도입으로 설명되고 있다. 일반 독자를 향한 저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글들인데, 로마의 물리학은 입자 물리학의 50년에 걸친 발전의 여정을 통해 맵시 쿼크와 중간자, 중입자(重粒子,baryon)의 친절한 개념 설명을 기번으로 입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 최종이론을 향한 물리학의 길에 대해서.

 


아마 여기서 독자는 한 성실한 물리학자의 사유 방법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저 당연하게 넘어가는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물이 끓거나 어는 것이 이상한 사건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왜 온도가 조금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물질의 형태가 갑자기 변하는가? 이런 변화는 대체 왜 일어나는가?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어떤 물질이 특정 임계점에서 다른 형태의 물질로 변화하는 것을 상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물(액체)이 수증기(기체), 물이 얼음(고체)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전이는 다시 1차 상전이와 2차 상전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잠열, 즉 분자의 결합을 끊는데 필요한 열량의 존재 유무에 대한 구별로서 특정한 열량 공급이 없어도 다른 상태로 전이되는 자석과 같은 상전이가 2차 상전이의 예이다.

 

이것은 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저자의 업적인 스핀 유리 이론의 개발에 대한 설명의 토대로서 기술된 것인데, 스핀 유리의 미세 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하나의 질서를 규명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무질서하기만한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물리학자가 이에 접근하기 위해 복잡다변한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합성 모형의 구축과 이의 검증을 위한 계산과 결과의 불일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물리적 현상에 대한 특징의 무지로 인한 오류의 발생, 상전이를 설명하는 질서 맺음 변수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함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하는 여정의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아마도 카오스 이론 방정식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러한 오류와 무지에 막혀 시름하다 정말 우연히 마주치는 무의식적 추론과 수학적, 물리학적 직관의 중요성을 일화를 통해 보여준다. 아마 과학도들은 이를 통해 하나의 물리학적 진실의 규명에 이르는 수 십 년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며, 혹여 간과하고 지나쳤거나, 아주 조금만 더 생각을 이끌었으면 도달했을 생각을 떠올리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유형의 논리적 과정을 거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만들어지는지, 동료 연구자와의 대화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했던 무엇이 건드려져 느닷없이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 그 멋진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책을 시작하는 유럽 찌르레기의 비행 연구가 복잡한 집단행동에서 다수의 행위자가 상호작용하는 계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나, 스핀유리의 입자 상호작용 연구가 대체 어떤 것을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인가의 이해로 연결된다. 찌르레기의 3차원 움직임을 정량화하여 공간과 시간 속에서 표본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상호작용이 세기를 정의할 때 거리가 끼치는 영향이 당연히 크다고 생각하는 고전 물리학이 여지없이 붕괴하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집단의 상호작용은 구성요소들의 간격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요소 사이의 연결성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와 무관해 보이는 이러한 입자들이나 새떼의 집단행동에서 입자물리학은 인간 사회의 상호 행동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이해를 제공하고, 나아가 인간 세계의 미래 구성에 대한 바른 지혜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러한 한 성실한 학자의 연구 과정의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정제된 논문이나 책에서는 좀처럼 보여 지지 않는 연구 과정에서의 노고와 의혹, 망설임의 흔적과 같은 귀중한 시행착오의 구체적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오류를 찾는데 좀 더 매진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계를 탐험해왔던 인생에서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70세 거장의 목소리는 정말 커다란 울림을 준다. 생에 전반의 소명으로 복잡계 해석 연구에 바친 한 인간의 열정에 매혹되는 읽기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복잡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책은 입자 물리학과 복잡계 이론, 양자역학의 이론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절로 겸손해지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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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젤라스트와 돈키호테(Agelast and Donquixote)

- 신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우리는....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Mann Tracht, Un Gott Lacht.)” - 유대 격언

 

 

이 유대격언에서 신(God)은 왜 웃고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일까? 한 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인간들, 제깟 것들이 생각해봐야 진리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결코 듣지 못할 웃음소리다. 신의 웃음이란 이렇게 초라하고 왜소하며 편벽한 인간의 생각에 대한 반응이다. 진리란 명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하는 멍청이, 획일화되고 고착된 통상적 생각에 매몰된 공허의 인간은 웃을 줄 모른다. 유머감각이란 쥐뿔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짐짓 진지함을 과시하려든다. 우리들은 그때 웃는다. 그 맹목의 무지가 드러나니까 말이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아젤라스트(agelast)’라 부른다고 한다. 아젤라스트들은 자기 믿음이 명확한 진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일치된 동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사와 인간 개체란 것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던가? 사람들을 향해 팔을 쳐들고 삿대질을 하며 굴종을 강요하는 괴성을 질러대는 아젤라스트틀이 모든 다양성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의 획일화된 가치와 질서를 진리라고 종용하는 형국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그 잘난 입으로 방종의 헛소리를 일삼으며 전문가랍네 하던 인간들이 자취를 감추고, 아젤라스틀이 설쳐대는 현실에 찍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니 내지 못하는 것일 테다. 은폐되었던 더러움이 압수수색이란 폭력적 수단에 의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이 남은 보루다. 아젤라스틀은 예술을, 특히 희극과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웃지 못하는 존재들인 까닭이다. 마침 페러디 문학의 결정판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으니 이처럼 맞춤의 대상이 어디 있을까싶다.

 

스페인 문학 연구자인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에 관한 해설서에서 돈키호테가 출현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각과 노동이 죽음의 덫인 나라,

이런 모순투성이의 스페인 현실에 대다수 지식인들은 눈감고 잘나가던 자신들의

펜을 꺾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현실을 미학으로 투영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 돈키호테를 읽다, 75P, 열린책들, 2023.2 초판 3쇄에서

 

400년 전, ‘순수 기독교인의 피라는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순수 피에 의한 인간 구별의 획일화된 잣대가 모든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던, 정치와 종교 권력이 자기 검열을 강요하던 지옥 같은 시기에 출현한 희극적 소설이 역사의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금 그 상식을 뒤엎은 웃음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단 하나 권력의 목소리만을 들으라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상은 결국 사회구성원 개인들의 존재 정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개인을 부정하는 지경으로 치달을 태세다.

 

때문인지 온라인 연결망의 각종 채널들에는 패러디와 유머의 말과 영상들이 증가한 듯하다. 또한 SF, 환상,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문학작품들이 늘고 있다. 현실을 모방하는 리얼리즘의 체험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작품은 아젤라스틀의 쉬운 표적이 되어 블랙리스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을 아는 이유일 것이다. 돈키호테가 활약해야할 비극의 시간이 된 것이다.

 

정교하게 구성된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전혀 그럴듯하지 않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꿈과 현실이 통합된 초현실의 세계가 자꾸 열려야 하는 당위의 시대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다보면 그 유치함과 서투름으로 주인공의 고양된 야망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장면들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표면적 이야기에서는 패배적이지만 웃을 줄 아는 독자는 이것이 패러디임을 안다. 그 잘난 질서 수호자들인 기사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아, 기존 가치와 체계를 전복시키는 최고의 수단인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식(Common sense)이라 따르라는 그것을 뒤엎는 이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역설에서 희극성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희극성, 유희적 세계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이라 했지만, 오늘날에는 훤히 유리창처럼 내부가 보이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권력이기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기가 더 수월해졌다. 신의 웃음은 반박이며, 저항이요, 가소로움에 대한 혐오의 조소이다. , 쿤데라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러니는 비록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그것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주어 확실성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래, 미술, 소설, 시 등 예술은 그 이름값을 하는 한 아무리 명쾌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 웃음과 아이러니, 환상의 세계는 아마 지금 절대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사회집단의 상호 소통이나 영향의 주고받음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존재 사이로부터 시작해 급격한 속도로 파급되어 전체 구성원이 동기화된다고 한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을 포함한 우리 인간은 상호 연결된 진동자처럼 동기화되어 거대한 웃음소리로 아젤라스틀을 질식시킬 수 있다. 돈키호테가 땡기고, *상전이(相轉移)가 유혹하는 시절이어서인지 객쩍은 상념을 적어봤다. 우리들은 찌르레기들의 가을 하늘 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중군무의 변화처럼 순식간에 동기화되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 돈키호테처럼 행동하자. 모두 함께 크게 웃으면서... 

 

) 상전이(phase transition,相轉移)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온도와 압력 등 외부변수에 의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액체인 물이 0도에서 고체인 얼음으로 변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상전이는 모든 물질을 비롯한 인간사회와 같은 복잡한 구조도 얼마든지 다양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창조적인 혼돈상태임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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