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권력관계의 본성과 정치 동역학에 관한 적합한 인식의 구축을 위한 저술로써,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상을 조금은 더 밀도있게, 또한 여러 범주의 국지적 사회현상들로까지 생각을 넓혀나갈 수 있도록 그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하의 글은 책의 리뷰가 아니다. 다만 헤게모니 관계라는 언어의 정의에 멈춰 서서, 순간 내게 스친 느낌을 기억의 방편으로 기록해두고자 함이다.

 

헤게모니는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에 관한 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란 여러 실체적 세력 사이의 관계, 근본적으로는 저마다의 특수한 담론을 지닌 세력들이 집합을 이룰 때, 공동체 총체성의 대표를 자임하는 어떤 헤게모니적 보편성과의 접합적 관계이다. 이를테면 이익과 추구하는 목표 또는 목적이 다른 여러 집단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떤 뚜렷한 하나의 적대, 즉 그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적대화 할 이유가 있는 세력에 대항하여 뭉치기로 했다고 하자. 그것 -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내건 집단내() 보편성을 획득한 담론 - 이 천박하건, 저열하건, 매국적이건 비민주적이건 반()법치주의건 아무튼 그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내란 옹호라고 하자. 이것을 이들 공동체가 하나의 보편적인 대표 담론이라고 설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세력들 간에는 자신들 고유의 특수성이 있다.

 

극우의 헤게모니 관계, 그 한계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기초한 종일(從日)세력,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하는 기업과 자본 등 경제세력, 중국,북한 등을 적대화 함으로써 안보를 인질로 하여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세력,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일군의 엘리트 집단화한 사법, 검찰 등 법검 카르텔, 종교를 표면에 걸고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사이비종교 세력들은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표 담론화한 헤게모니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헤게모니는 사실 매우 불안정한 것이고, 각 세력의 특수성에 비해 비항구적이며 비 결정적이다. 이질적 군집이 보편적이라고 내건 내란 옹호의 기치는 언제든 폐기 될 수 있으며, 붕괴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왕 예를 들었으니 이 예를 사용해 이어가보기로 하자. 이 기이한 공동체를, 이 사회는 극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극우의 통상 개념과는 전혀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바로 극우로 퉁 친 이 집단이 오합지졸의 잡동사니가 모인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수성이 모두 다르고, 그 다름에서 터무니없는, 즉 극우가 하는 행위와는 동떨어진 행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을 조금 고상하게 정리하면 결절점(주인 기표)은 일정한 담론 영역 내에서 보편적 구조화 기능을 떠맡는 특수한 요소에 대한 통념을, 그와 같은 기능을 사전에 결정하는 요소 그 자체의 특수성 없이 수반한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사실 지금 극우로 불리는 이합집산은 애초에 내란 옹호라는 주인 기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에는 각 잡다한 세력들의 특수이익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들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담론으로 헤게모니를 취득한 것이다. 모든 세력들은 이 헤게모니와 접점을 이루며 어느 순간만큼 행동한다. 즉 내란 옹호에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그 범주의 중심성을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의 특수성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내뱉는 언어의 중심성 없는 기괴한 담론들 자체가 스스로 입증한다.

 

영토주권을 부정하는가 하면, 헌법전문의 정신과 기본권 조항조차도 부인하고, 국민주권마저도 부정한다. 특권과 권위의식을 내세우고. 기득권의 공고화와 사적 이익의 극대화 및 영속화를 위해서는 국가를 팔아먹고, 국민을 노예화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집단외() 국민 성원 일반을 적대화하고 협박과 폭력도 당연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은 그것들이 주장하는 우파 또는 보수적 가치와는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극우나 극보수라는 표현은 결코 타당한 명칭이 아니다. 그저 내란 획책 세력일 뿐이다. 상업언론, 일컬어 종편(채널A, TV조선, YTN, 매경TV )채널로 불리는 미디어들과 조중동을 비롯 종교를 배후로 한 언론(국민일보, 세계일보, CBS ), 대기업자본가를 배후로 한 언론(한국경제 etc.)등 현재의 한국 언론세력은 그것들의 성분이 애초에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에 사적 이익추구가 우선인 일종의 마케팅 또는 광고 선전 도구일 뿐이기에 내란 옹호세력이란 딱지를 붙이기보다는 우호적, 중립적인 극우를 자신들의 언어로 대표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내란 옹호가 헤게모니 중심이 된 것은 바로 헤게모니의 조건인 구조적 결정 불가능성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이를 상세히 들여다 볼 이유가 있다. ‘내란 옹호라는 헤게모니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특수성, 영구집권 획책이라는 특수성, 경제적 이익추구라는 특수성, 종교의 영역확장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처럼 이 특수성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보충적이다. 어제까지 사회적 적대자로써 저마다의 내적 경계를 예리하게 하던 것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등가관계를 수립하는데 내란 옹호에 헤게모니를 잠정적으로 내어 준 것이다. 이익이 합치된 것이다.

 


하지만 이 등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관계 속에도 전선(적대의 경계)은 잠복하고 있기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 이것을 결코 놓을 수 없다. 수구를 표방하던 정당이 극단적 우경화로 선회하여 내란 옹호를 외치는 것은 이러한 권력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철회할 경우 헤게모니를 잃을 뿐 아니라, 오합지졸 군집의 분열과 해체가 너무도 분명히 보이는 까닭이다. 하나의 집단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서로의 변절주의적 특수성을 넘어 사슬(chain)의 총체성을 대표할 하나의 무엇인 주인기표를 내란옹호, 계엄옹호, 대북, 대중 적대화 선전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기호로 인해 자신들 본체의 특수성을 변형시킨 세력들도 있을 것이다. 내란 옹호의 기치아래 결집한 이 세력들의 특수성은 서로 이질적이며, 아주 다르다. 상호 통약 불가능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뭉쳐있다. 이것이 헤게모니-관계의 투명한 본질적 모습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내세운 보편성을 오염된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보편성이 애초에 오염된 것이니 관계들 간에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존속한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관계의 기능은 항시 불안정하고, 저마다의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가역적이다.

 

여기서 그것들의 필연적 분리와 해체는 오염된 보편성의 내용을 처단하는 것임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내란 획책의 법 절차적 처벌선언, 외란 즉 대북자극을 통한 전쟁 획책 규명,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의 사슬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후퇴하면서까지 연결하게 자극된 요소, 즉 사적 재화, 권력의 자리, 국부(國富,정책의 자의적 변경을 통한)의 접근이 주요한 헤게모니 접점일 것이다. 이것의 신속한 처리의 책임이 바로 특검이다. 만일 이조차 오염되어있다면, 극우는 당분간 더욱 극성을 떨어댈 것이다. 그러나 헤게모니 관계의 본질상 취약하고, 붕괴되기 쉽다.

 

진보, 좌파 진영의 책임 - 민주주의는 적대의 명료화에 기초한다!

 

그런데 오늘, 수구 정치집단이 극단적으로 우경화되고 기형적 색깔을 띠게 된 것은 좌파 진보진영의 안일함이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 그 안일함이란 신자유주의의 승리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이 휘발된 것인데, 소련의 소멸, 지구화과정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전환과 정보사회의 출현을 적대들이 사라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민주화 승리의 도취가 정체성 상실을 가속화 했다. 그래서 상생의 정치니, 중도(온건)좌파니 하며 자신들을 재정의하면서 좌파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이러함으로써 놓친 것이 수구기득권 집단, 즉 신자유주의 소비자본주의 집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오랜 시간을 경과하게 된 것이다. 진보, 좌파 정당이 수구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잘못된 신념(적대가 사라졌다는) 때문에 합의가 신성시 되고, 좌우경계가 흐릿해짐으로써 수구의 극단적 우경화를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의 선명한 예가 오늘의 담론 속에서 반()자본주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현 경제 질서만이 유일하게 신봉해야 할 절대불가침인 것처럼 간주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에 어떤 비판을 가하려고만 하면 경색된 머리들은 무슨 엄청난 혁명을 획책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고, 빨갱이 놀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수구의 프레임에 안주했던 좌파는 따라서 시장 논리에 대한 그 어떤 대안 마련의 노력이 없었기에, 사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그리고 90년대 이후에 성장한 20,30대의 청년들이 우경화된 것은 이러한 좌파의 안일한 이해에서 자란 것이다. 이제 지구화된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지구촌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공격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동일한 이유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이데올로기 지형을 장악하면서 그에 순응하는 것만이 마치 당연한 순리이자 숙명인 듯 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안일함이 가져온 극명한 귀결이 지금 한국 사회에 나타난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맹목과 무지의 발호이다.

 

죄종적인 화해, 일종의 합리적 합의,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합리적 논쟁이 이루어지는 배타적이지 않은 공적 영역이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이 중요한 것은 현재 이재명 정권이 내건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출현한 토대인 까닭이다. 그는 말한다.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인 경제 정책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직 좋은 정책과 나쁜 정책만 있다고. 이 말의 표면은 갈등으로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마치 분열을 봉합하고 모두에게 편익이 두루 미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말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껍질을 한 겹 벗기고 들여다보자,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토대 하에 소비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에 어떤 수정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신자유주의 대안에 대한 아무런 강구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현 정세가 자연스럽고 가능한 유일한 사회질서라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일정한 배치를 변화 없이 이어나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결국 수구집단이, 유지해 온 프레임의 변경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우려스러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체와 소멸되어야 할 집단이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그 어떤 개혁도 변화도 없을 것이다. 아마 국지적인 현안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함으로써 유능한 행정수완가라는 이미지는 부각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대를 부인하는 한 언제든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토대라는 것은 거대한 사슬로 연결된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이러한 실용성의 부상으로만 선의로 저절로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말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신자유주의를 좀 더 인간적 방식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잠자고 있는 (우파의) 적대가 사라지겠는가? 이는 적대(敵對)의 제거가 불가능한 것대적자(對敵者)의 경계를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발생한 신념으로 보인다. 대적자가 선명하게 설정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문제 해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갈등과 분할이 없다면 다원적인 민주주의 정치도 불가능할 것이다.

조화는 애초에 달성 될 수 없는 것이다.”

 

적대의 제거는 인간과 인간사회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내란 옹호를 내걸고 뭉쳐있는 일군의 무리들 그것들조차도 서로 적대하는 전선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금의 여당 또한 서로의 전선을 지닌 파당이 존재한다. 하물며 내란 옹호 세력을 우리라는 모두를 포괄하는 일종의 합리적 합의나 최종적 화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애초의 몰지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대는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이지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재의 정체 역시 적대가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임을 전제하기에 운용되는 제도인 것이다. 만일 적대가 없다면 민주주의 또한 의미를 잃는다. 민주주의란 바로 우리를 부정하고, ‘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를 강요할 경우 바로 윤씨와 같은 계엄과 내란획책을 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것이다. 모두 우리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가짜 모습이며,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상이한 목소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투쟁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정체 제도이다. 이를 부정할 때 독재무리들, 매판, 파쇼 세력들이 발호하고 설쳐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권력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통찰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이의 작동 상황을 눈여겨 볼 지혜만 있다면 이 혼란한 사회의 탈출구를 찾는데 중대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정치를 작동케 하는 그 역학적 관계와 권력관계의 본성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등가 사슬을 이루는 그 어떤 세력과의 동행 또는 투쟁이건 반드시 적대의 경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 선명성의 경계로부터 대체 무슨 나라, 무슨 사회를 건설할지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따라서 바로 지금 한국 정치사회에서 긴급하고도 중대한 이해의 기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 가브리엘 르페브르의 그림과 함께 읽는 시
자크 프레베르 지음, 가브리엘 르페브르 그림, 오생근 옮김 / 문학판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성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전복과 위반의 시인으로서, ‘아니요를 말하는 또 다른 유형의 작가에 닿았다. 필경사 바틀비들의 목록을 따라가는 중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이며, 시나리오 극작가였던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1900-1977)’의 이름은 낯설다. 그런데 이미 이 시인의 시()인 가사의 노래를 적어도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알려진 샹송들, 영화 주제가의 시적 가사들이 그의 작품들이었으니 사실 친근하게 우리들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1946년 작 영화 밤의 문 Les portes de la nuit의 주제가로 무명의 배우 이브 몽땅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줬던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이 소설 매디슨 카운티좁은 부엌 라디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올 때, 사랑하는 연인을 헤어지게 하는 인생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엽은 말한다. ‘헤어지게 만든 인생보다 그들이 만나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인생에 감사하다. 이 시인의 시들이 기존의 질서와 규범들에 반기를 들고 거부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과 생동하는 목소리들이자 감동의 소리이고, 절박한 간절함의 소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세상을 향해 아니요라고 강하게 부정을 외치는 것은 진정한 삶으로의 복귀이며, 생의 환희와 감사의 목소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시의 작가로 불리듯, 그의 시 작품들은 전통적인 관념적 시에 반기를 든, 평범한 우리네들이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로 씌어 있다. 따라서 시들은 권위에 토대를 둔 모든 고정된 가치들에 반기를 들고 의식의 변화와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이 되려고 노력한 적도, 시인이나 작가 행세를 한 적도 없는 작가로 알려졌듯, 그의 시들은 꿈과 상상과 마음 속 깊이 원하는 것들을 표현할 따름이다. 때문에 모든 시들에 흐르는 정서는 친근하고, 더욱 공감의 깊이를 더하게 해준다. 아마 그의 시작들이 대중들의 노래인 샹송의 가사가 된 것은 이러한 요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선집을 엮을 때 번역자는 시에 표현하고자 한 시인의 마음을 읽기를 원했던 것 같다. 처음 대면하는 시가 마음의 소리이다. 생동하는 목소리, 마음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절대적 소명같은 절실한 소리를 느낄 수 있는 노래하는 건 내 목소리만이 아니지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시의 정의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우리를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 소리로서 일반적 언어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표현이 시임을 노래한다. 시의 세 번째 연을 옮기면 이렇다. 울적한 마음과 더불어 그 마음에 그 어떤 연대감이 아릿하게 저미듯 밀려들어온다.

 

저 새는 나와 함께 노래하지

언제나 언제나 살아 있는

저 불쌍한 소리는 나를 보고 떨고 있지

저 새가 노래하는 모든 것

내가 본 모든 것 내가 아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말한다면

그건 수다스런 말이거나 불충분한 말이 되겠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지 -마음의 소리3연에서, P24

 

그러나 이런 아픔 또는 슬픔의 정서 속에서도 어떤 밝은 전망, 기쁨의 가능성 같은 것이 함께 느껴지는데, 한 배관공 노동자의 어느 월요일 아침의 전경을 그린 그리고 축제는 계속된다는 딱 이런 느낌이다. 월요일 아침 10시인데 배관공은 정장 차림으로 카페 카운터 앞에서 비틀거리며 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는 술값 계산도 하지 않고 햇빛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나라면 슬픈 축제의 하루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은 작품이다.

 

나는 작가의 성장기인 어린 시절에 대한 지식이 없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음을 그저 유추해본다. 그는 어린 아이에 대한 보호와 사랑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그러한 따뜻한 관심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불우한 아이들에 대한 이해의 산물일까? 어린 시절이라는 시에는 어린 시절의 시간에 지구는 돌지 않고/ 새들은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고/ 태양은 빛나지 않으며/ 모든 풍경은 얼어붙은 슬픈 시간들뿐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가하면 깨어진 겨울에서 청춘의 키 작은 남자의 구두끈도 끊어지고, 축제의 모든 가건물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닫히는 그 어느 시점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는 순진하고 비통한 목소리가 / 멀리서 나를 부르며 다가왔네 /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네 / 가슴에는 별이 반짝이는 그대의 웃음이/ 일곱조각으로 깨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네라고 그 시절의 영원히 깨져 돌아오지 못할 시간과 이별했던 기억을 회상한다. 내 어린 시절은 언제, 어떤 장소에서 끝났을까? 그 순수한 생명의 시간이 그저 아득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사랑의 노래가 부쩍 많아 보이는데, 실연의 절망에서부터, 만남의 인연의 소중함, 사랑은 소유가 아닌 자유여야 함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자의 노래가 그렇고, 나를 만든 건 사랑이지 , 그 사랑에 이르는 시들에서 사랑은 이 세계의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을 의인화한 시 그 사랑에서 노래한다.

 

우리는 너를 잊었어도

너는 우리를 잊지 말라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다고

부디 우리가 냉정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아주 먼 곳에서도

그 어느 곳일지라도

....... 中略 ......

기억의 큰 숲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 그 사랑, 마지막 연, P210

 

, 색다른 문장을 보았는데, 사랑의 달콤하고 위험한 얼굴이라는 시에서 사랑의 상처는/ 뜨겁다는 것 너무나 뜨겁다는 것이지요라고 하는 것이다. 역자는 고통마저 뜨겁다고 하는 것은 기쁨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상처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해서 인식의 과도함이 불러일으킨 화끈거림으로 느껴졌다. 사랑의 상처가 깊을 때 그것은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아닐까?

 

조금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몇 작품이 있는데,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답게 그의 시들에는 영상적 묘사처럼 보이는 시각적 작품들이 제법 눈에 띈다. 꽃집에서에는 한 남자가 꽃집에 들어와 쓰러지고 꽃들과 그가 치르려던 돈이 동시에 구르는 정지된 화면같은 순간이 그려진다.

 

그가 쓰러지자 동시에

돈은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쓰러진다

돈이 굴러가고

꽃들이 망가지고

남자가 죽어가는 데

꽃집 아가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 꽃집에서, 2, P299

 

남자와 꽃과 돈, 꽃집 아가씨, 모든 사물과 인간이 정지된 듯한 동시적 어떤 순간에도 굴러가는 멈추지 않는 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부조리함의 극치, 돈으로 상징되는 자본위력의 불쾌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인의 예리한 순간 포착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유사한 감정을 야기한 작품으로 혼전에 임신한 딸의 배를 밟는 한 부르주아 가족의 모습을 그린 빨래라는 시는, 피 얼룩을 지우기 위해 오직 빨래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을 보게 한다. 생명을 죽인다는 죄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물질자본주의가 가져온 문명적 질병인, 체하는 것, 비교하고 경쟁의 대상인 타인에게는 은폐된 내부의 거짓, 위선을 거침없이 발가벗겨 드러낸다.

 

오오 죽은 고기의 끔찍하고 놀라운 냄새여

여름이지만 정원의 나뭇잎들은

가을인 것처럼 떨어져 죽어가네

저 냄새는 에드몽씨가 사는

빌라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는 가장이고

국장이라네

그날은 빨래하는 날

그건 그 집에서 나오는 냄새라네

국장이고 가장인 그는

........ 中略 ......

그가 좋아하는 속담을 수없이 되풀이한다네

집안의 수치를 밖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온 가족이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시시덕거리고 -빨래, P365

 

쫓기듯 살아가는 인생을 마치 자유로운 여행의 여정인 듯 말하는 세상에 대한 항변인 통제관, 거대한 피웅덩이를 지니고 결코 돌기를 멈추지 않는 지구의 은유를 통해 비인간적 폭력의 세계를 고발한 피 속의 노래등 반폭력, 반전의 목소리에서부터, 세계에 범람하는 권위적 목소리들에 대한 냉정한 비난의 목소리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 목소리들을 격렬하게 부르짖지 않으며, 자신의 담담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술한다. 자신에 대한 비뚤어진 공격에도 그저 헛되다고 말하며, 문단, 정치, 세계의 모든 곳은 그것에 애정을 지닌 모든 이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어떤 악착같은 말보다 울림이 크다. 물론 들으려 하는 자에게만 그렇겠지만.

 

그는 세계의 모든 속박, 억압에 저항했던 것 같다. 학교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열등생이라는 시는 학교의 부정적 형상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프랑스 초등학교에서 교사들에 의해 이 시가 읽히도록 권장되고 있다고 한다. 깊이있는 사유에 대한 교육의 방편일 것이다. 시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선생님에게 아이는 쏟아지는 질문에 폭소를 터뜨리며, 불행의 검은 색 칠판 위에 온갖 색깔의 분필로 행복의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 생각의 다양성,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 무수한 답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이것은 바로 아니요를 외칠 수 있는 인간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사회일 것이다.

 

자크 프레베르는 초현실주의 그룹 일원이기도 했으나, 브루통과의 갈등으로 이탈하였으며

피카소와의 깊은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던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회화 작품, <나비>


사랑도 돈의 지배 앞에서 길을 잃고, 아이들에 대한 보호와 관심도 학원의 기능적 시험훈련이 대체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 또한 소유와 지배라는 억압의 권력이 차지한 세계이고 보니 시인의 모든 시들이 새삼스레 오늘의 우리들이 잃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 시인은 화가 피카소와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던 모양이다. 그들의 교우는 아마도 그 어떤 속물적 가치 세계의 것들과는 다른 참된 우정이었을 것만 같다. 시집을 읽고 나면 시인의 말처럼 인생에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된다. 그의 사랑의 언어들에 물든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어느 맑은 날 장례식에 가기 위해 가을 저녁에 출발한 두 마리의 달팽이가 슬프게 도착했을 때, 이미 봄이 되었다고 노래하는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처럼, 음울한 겨울을 눈치채지 못하고 통과해, 죽었던 나뭇잎들도 모두 부활한 생명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나만의 아니오의 목록에 이 작품을 기입하면서 그의 시 외출 허가증으로 맺음을 갈음하련다.  자크 프레베르 귀하를 바틀비 연합체의 일원으로 임명합니다! 그가 과연 수긍할지 모르겠다.

 

새장 속에 군모를 넣어두었네 그리고

머리 위에 새를 올려놓고 외출했네

그러자

지휘관이 왜

경례를 하지 않는가 물었네

안 합니다

경례를 하지 않습니다

새가 대답했네

아 그런가

..... 後略 ..... - 외출 허가증,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뤼드 쏜살 문고
앙드레 지드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잎사귀들마저 갈색 고인 물에 잠긴 채 아직도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

- 대안, 121

 

책의 헌사에 친구 외젠 루아를 위해, 이 풍자문을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의미 그대로, 빗대어 비웃고 폭로함으로써 무엇에 대해 공격하기 위한 글로 받아들여도 곡해는 아닐 것이다. 그 무엇은 소설을 쓴다는 것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를 말하려 한다는 것이기도 하며, 당대 문학과 철학 등 지성의 기술(記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작가 자신을 포함한 삶과 글쓰기와 당대 문예조류에 대한 부정과 모순에 대한 냉소적 비판일 것이다.

 

이렇게 작품에 진입하기도 전에 한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경솔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신중치 못한 가벼움에 기대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어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종의 서문 또는 경고의 글에서 한 권의 책은 언제나 공동 작업이다.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집어넣었을 무언가를 독자대중이 밝혀내리라고 말하듯, 그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은 소설 속 팔뤼드를 쓰는 화자이기도 하며, 팔뤼드속 주인공인 티튀루스가 바라보는 늪의 전경일 것이다. 한편 그 늪이라는 상징적 장소,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 바로 팔뤼드라는 이 의미가 모호한 책이 이미 담지(擔持)하고 있는, 결코 써 낼 수 없는 총합으로서의 삶 자체일 것이다. 소설 팔뤼드는 이 제목의 책을 쓰는 화자의 6일 간의 지독하게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고, 그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내용은 소설 속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의 맥락 없어 보이는 부분적 내용들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얽혀 이들을 포괄하는 바로 이 책 팔뤼드를 구성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텍스트, ‘둘러싸고 있는 글과 그 안에 있는 글이 서로 반영(反映)하며 영향을 미치는 형식을 미장-아빔(mise-enabyme)’이라 지칭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미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데, 이 일종의 상호 반영 기법으로 모호성과 복잡성을 통해 본래의 텍스트를 뛰어넘는 예상 외(), 즉 신의 몫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책은 해석이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책이다. 이러한 점(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할 수 있다는)에서 작가의 야심찬 욕망의 산물임을 엿보게 된다. 이로써 지드는 자신만의 독자적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여겼을 법 하다. 어쨌든 소설의 전체적 성격에 대한 소감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게 연출되고 있는데, 그것은 뭐야 작업하는 거야?”라는 물음과 함께 팔뤼드를 쓰고 있어...”라는 답으로 시작하고, 뭐야 작업하는 거야?”매립지를 쓰고 있어...”라고 종료된다. 이 동일 형식에서 삶이라는 것이 지극히 변화없는 동일유사성의 반복임을, 지리멸렬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만 같다. 사실 팔뤼드(paludes;)’나 매립지나 그것이 그리 전혀 다른 것이 아니듯 변화무쌍하다고 말하는 삶이라고들 말하지만 삶이란 게 사용 단어가 지닌 미묘한 의미의 차이, 혹은 사람마다 다른 이해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지?’라는 친구의 물음에 팔뤼드를 설명하는 최초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떠날 수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야. (...) 나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밭에 만족하며 사는 티튀루스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야라고 답한다. 나는 이 설명을 팔뤼드에 대한 서론 격으로 읽었는데, 존재의 변화를 도모하는 어떤 행위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저항 없는 그 삶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늪으로 싸인 망루에 사는 독신자 티튀루스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으며, 늪을 바라보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늪을 떠난 삶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의 감수(感受)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화자가 팔뤼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순응적 삶, 권태와 무료함의 삶을 이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래서 화자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이미 팔뤼드는 거기에 무엇인가 더 써야 될 것, 또는 무언가를 끼워 넣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팔뤼드는 그저 계속 작업되고 있는 것일 뿐일 게다.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도무지 진척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시적 산문이 한 문장 흐르는데, 이렇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물 위의 가느다란 풀들은 벌레가 내려앉은 까닭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물이 조금 흘러나와 식물의 뿌리를 적셨다.....시상(詩想)을 더 붙들고만 있을 수 없었으므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티튀루스가 웃는다.”

 

티튀루스의 조용한 웃음은 마치 만물의 조화를 깨달은 자의 미소 같다. 거기에 이미 모두 있는 것을, 아마 그래서 화자는 팔뤼드가 대체 무얼 얘기하는 거냐는 물음에 한 권의 책은 알처럼 닫혀있고, 가득 차 있고, 매끈한 거야. (...) 알은 채워지는 게 아니야. 가득 찬 채로 나오는 거지. (...) 게다가 그 얘기는 이미 팔뤼드안에 있어. 더 나은 것 따위, 나는 바라지도 않았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위 글을 쓴다는 이들, 아마 1895년 당대의 문학, 철학자들과 그네들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일 것 같은데,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시키는 향연이라는 소제목을 한 어느 목요일의 여사친 앙젤의 집에 모인 문인과 철학자들이 화자의 팔뤼드에 관해 각자의 이해에 기초한 물음과 판단, 이의 등이 어우러지는 대화는 어쩌면 이 한 마디로 포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팔뤼드라고? 그게 대체 뭔가요? 설명했는데, 모두 어정쩡한 투였다.”


사실 화자가 설명하는 팔뤼드는 늪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이야기이고. 특징 없는 땅의 이야기이며, 오로지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매일 똑같이 형편없는 일만을 하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어느 한 부분의 이야기만을 들은 이들이 전체를 말하는 데는 당연히 역부족이고, 몰이해이기 십상이다. 다들 제대로 보지 않고 밖에 있다고 믿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은 마치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가소로운 것이다. 끝날 수 없는 이야기, 한 마디의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팔뤼드에는 이미 그 모든 것이 있는 데.

 

화자의 얘기를 듣다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결국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처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래서 혁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법도 하다. 이봐요, 당신은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 “제가 원하는 것은요,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팔뤼드를 마저 쓰는 겁니다.” 과연 이미 거기 있는 것, 스스로 가득한 것을 마저 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그저 살아 갈 뿐인 것을, 마치 삶의 여백, 또는 가능성이라는 것에 무얼 채워 넣으려는 가당치 않은 생각, 이미 존재하는 삶 자체에 대체 무얼 더 기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화자는 어떤 결실도 볼 수 없음에도, 난 언제나 팔뤼드를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아요라고 단지 떨치기 힘든 느낌을 말한다. 달리 보면 팔뤼드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원죄(?)이거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짐 덩어리인, 삶과 뗄 수 없는 삶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편히 쉬기 위해 쌓아올린 지붕처럼, 비를 피하게 해주지만 태양을 감추기도 하는, 그럼에도 떨쳐낼 수 없는 지붕을, 그것을 만들겠다고 자재를 모으며 싣고 돌아다니느라 구부러진 어깨를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때문에 화자가 쓴다는 팔뤼드의 주인공 티튀루스의 지루함과 권태로 이루어진 삶보다 우리네 삶이 장담하건대 훨씬 음울하고 시시해요.”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화자가 여사친 앙젤에게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하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늪 망루의 독신자의 삶을 허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고.

 

사실 작중 화자가 쓰는 팔뤼드는 결코 끝을 맺을 수 없을 게다. 실제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했으니까. (...) 게다가 내가 고수하는 미학적 원칙은 소설의 구상과도 대립한다.”. 삶의 총체, 그 자체를 어찌 글로 옮겨 한 권의 책으로 써낼 수 있겠는가? 또는 한 권의 책으로 감히 진실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팔뤼드에 이어 쓰일 작품의 제목이 매립지인 것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리멸렬해 보이는 나날의 일상적 모음, 아무런 변화도 없는, 때론 괴어 썩은 늪지의 물표면 같은 그런 삶에 찬란한 광채가 펼쳐지는 순간이 있듯, 늪이여! 대체 그대의 매력을 말하는 자 누구인가! 티튀루스!”와 같이, 삶이라는 늪, 자신의 영혼에 맞추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주 타당하게 여겨지는 감수(甘受)의 덕목이 또한 팔뤼드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의 해석은 이미 언급했 듯 무궁무진할 것이다. 주관주의적 정신주의라 할 수 있는 당대 상징주의 사조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향연에서 문인과 철학자들이 팔뤼드를 저마다의 이해로 단정 짓거나, 모호해하는 말들은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에 대한 사실의 진술일 것이다. 바로 그 진술들이 사실인 만큼, 상징주의는 틀렸다는 주장을 비꼬아 풍자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는 작품의 하나의 소주제일 뿐이고, 이들을 모두 싸 안는 것은 바로 삶의 총체적 진술의 불가능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 무모한 글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애초에 삶이 지닌 불편과 불쾌를 탈주하기 위한 몸부림으로써 작업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차례 더 반복하여 읽게 되면 또 다른 해석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경이롭다기보다는 기이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는 미묘하다는 여운을 주는 소설이다.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쓰기의 부정에 얽힌 한 인용글이 여기에 이르게 했듯, 또 어떤 인연이 닿아 읽게 될 때, 새로운 이해를 내게 던질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 작품은 그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화자의 여사친 앙젤이 그에게 던지는 말이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을지도.

 

불행한 친구여, 왜 당신은 팔뤼드를 시작했나요?

그토록 많은 다른 주제들이, 더 시적인 것들이 있을 텐데.” - 일요일, 11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08-3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라는 문구처럼 이 소설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흥미롭습니다.

비의식 2025-08-31 11:54   좋아요 0 | URL
굳이 미장-아빔의 형식을 띠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작품, 또는 써진 글은 단어들, 무수한 의미를 담고 있어 독자들 고유의 이해에 따라 각양의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팔뤼드라는 단어 또한 늪에서부터 질병 등등 그 함유하는 여러 의미 탓에 모호하기 그지없는 제목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쓰일 수 없는 것을 쓰려는 작가들의 고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의 작가와 작품의 목록에 추가될 소설이라 말하고 싶네요. 잉크냄새님, 댓글 감사합니다. 유쾌한 주말시간 되시기를~~

젤소민아 2025-09-03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표지도 엄청 멋지네요! 이 책, 몰랐는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필리아님

비의식 2025-09-03 08:04   좋아요 0 | URL
표지 그림의 색감이 시선을 끌지요. 스물여섯의 지드가 쓴 야심찬 작품이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젤소민아님 ^^
 
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일 이탈리아로 이르는 길목을 통과하던 격변의 시대, 자유주의를 부르짖던 부르주아 등 신흥 계급으로 계급의 권위가 이전되던 1860년대 시칠리아 왕국의 대 귀족인 영주 돈 파브리초를 중심으로 자신의 계급이 추락하는 시대를 묵묵히, 아니 주의 깊은 시선으로 천천히 품위있게 관조하는 삶을 연민 그득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한 인간에 던져진 모순 가득한 세계의 질서변환이라는 파문이 번지며 그것으로 유발되는 긴장 속에서 몰락해가는 귀족가문의 쇠퇴를 선명하고 예리하게 지펴낸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아마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이렇듯 소멸을 향해 나아가야했던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마지막 인물이었기에,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에 진실과 자연스러움이 더욱 묻어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화려하거나 호사스러움을 과시하지 않으며, 그것들로 인한 자극의 격랑이 격렬하게 출렁이지 않음에도 세련미와 귀족적 우아함이 문장 도처에서 품격을 느끼게 한다. 통속적 대중성과 현학적 지성의 경계를 오가지만 결코 저속하거나 현란한 사변으로 흐르지 않는 적절한 균형의 언어로 써내려간 서사이기에 이탈리아 국민소설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시칠리아 왕국 살리나의 영주 돈 파브리초는 통일 이탈리아를 내걸고 혁명의 불길에 모여드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염려스럽게 바라보지만, 시대 변화의 물결을 충분하고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체제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계급이 침몰하는 시절임을 직시하고 있지만, 자네들은 우리를, ‘아버지들을 파멸시킬 생각은 없어. 그저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지.”라는 말처럼, 단지 한 계급에서 그에 상응하는 달리 불려 질 계급으로 이전되는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경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많은 일이 있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이라고 정의한다.

 

돈 파브리초의 인식은 그릇되지 않은 것 같다. 귀족 계급의 옹호나 계급의 변호가 아니라, 민주정을 펼친다는 오늘의 세계에 제복을 바꿔 입은자들이 귀족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돈 파브리초로 대변되는 귀족들의 다름은 그들 개인의 인간성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그들의 계급이 구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귀족이라는 계급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진정 민초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가? 자유, 평등, 기회, 참여,...,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세계의 문제들이다. 인간은 어쩌면 형식 외에는 변할 수 없는 인지도 모르겠다.

 

주여, 제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제 마음과 몸을 혐오감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seigneur, donnez-moi la force et le courage de regarder

mon coeur et mon corps sans dégout!)”

 

소설의 중요 배경의 한곳인 돈 파브리초의 영지인 돈나푸가타는 시절의 변화, 살리나 가문의 쇠락의 시작을 선명하게 알리는 장소인데, 다리 부러진 표범은 가문의 영화가 급속하게 침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된다. 이미 영락(零落)한 누이의 아들인 고아가 된 조카의 총명함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아낀 영주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욱 사랑을 가지고 후견자 역할을 한다. 한편 변화하는 세계는 자유주의에 편승한 영악한 자들이 이미 놀라운 속도로 막대한 재산을 쌓아 올린다. 사회의 혼란과 기근을 틈타 사악한 이익을 남기며 돈과 함께 상승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돈나푸가타의 시장인 돈 칼로제로가 그러한 부류인데, 보잘 것 없는 농부의 자손이 자유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엄청난 재산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의 조카 탄크레디는 그의 부모가 남긴 재산이 없다. 다만 대귀족의 신분, 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현실적 동기를 만들어낼 만큼 영리한 인물이다. 영주는 조카의 이러한 성향이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가문의 미래를 그나마 책임질 수 있는 통찰임을 이해한다. 탄크레디에게는 이러한 배경을 현실화할 돈이 필요하다. 돈 파브리초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에 관심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수혈을 위해 한미(寒微)하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와의 결혼 중매에 나선다.

 

어쩌면 이 소설의 영화화를 촉진한 한 요소이기도 할 압도적인 관능적 매력으로 표현되는 안젤리카의 등장과 탄크레디와의 결합, 소외된 콘체타의 상실은 시대변화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안젤리카가 자신의 육체를 공략하지 않는 탄크레디에게 요염하게 던지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수련 수녀예요.” 이 선명한 유혹의 언어는 소설의 통속성, 대중을 이 작품으로 유인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 같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1963년 영화화한 The Leopard;표범포스터


안젤리카가 영주 가문의 사람들 앞에 최초로 등장할 때 묘사는 그 흥미로운 관능적 표현들로 시선을 끌었는데, 몇 문장 인용해 본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바라볼 정도의 눈부신 아름다움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당당한 분위기이며, 교양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흔적들의 불쾌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자태라고 하는 것이다. 영주는 자신의 결정을 이렇게 칭찬한다. 오래된 가문에 새 피를 수혈하고 계급 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장려할 만하다.”. 새로운 변화 속에서 가문의 영속을 지키면서, 그 변화 거부의 계급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막아내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혼란을 개인적 이득 챙기기에 불길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장사꾼들의 세계, 그러한 자들이 흥성하는 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 파브리초는 새로이 수립된 정부의 사절이 제안하는 상원의원과 주요 정치적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누천 년 간 새겨진 시칠리아인의 정신과 한 계급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깊은 진실의 마음으로 전해진다.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온 이질적 문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지가 2,500이라고, 시칠리아인 자신들로부터 싹트지 않았고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문명을 안고 살아온 고통에 이제 지쳤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시칠리아인은 새로운 것들이 죽었다고 느낄 때 만, 삶의 흐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만 매료된다고. 섬이라는 대륙과 외따로 떨어진 시칠리안의 보수적 기질이 이보다 명료하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구체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마지막 귀족의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혐오를 무릅썼지만, 공적 대상으로서 신체제에 적극적으로 행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이 소설에서 결코 소홀히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돈 파브리초와 돈 칼로제로의 양가 결합의 계약 이후 갖게 된 빈번한 만남이 귀족계급과 신흥부르주아 계급의 상호 변화를 만들어내는 장면들이다. 영주는 시민대중에 대한 이해를 쌓는 시간이자 새로운 계급의 관점이며, 세다라인 돈 칼로제로는 귀족의 성품, 그들의 품위를 구성하는 소소한 몸치장과 예절, 무용해 보이는 심미안 등에 대한 필요와 가치에 눈이 뜨이는 것이다. 결국 작가 람페두사는 돈 파브리초의 입을 통해 처음부터 예견했듯, 신흥계급이란 기존의 귀족계급을 모방한 자리 탈취, 계급 자리의 교체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이러한 양상의 한 면모로써 돈 파브리초가 가문의 새로운 피, 즉 돈 칼로제로와 안젤리카를 귀족 상층계급의 일원에 알리기 위해 귀족사회에 모멸적인 부탁을 통해 그들을 무도회에 초청케 하여 부르주아계급이 상류사회에 편입되는 상징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흥 계급은 귀족의 품위를 모방하고 새로운 상류 계급으로 전환된다. 이때 돈 파브리초가 조카며느리가 될 안젤리카의 제안으로 왈츠를 추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알파치노가 젊은 여성 도나와 탱고를 추는 영화 여인의 향기, 1993를 떠오르게 하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 순간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어께에서 세월이 1년씩 떨어져 나갔고, 이윽고 그는 바로 이 방에서 스텔라(아내)와 춤을 추던 스무 살의 자신을 발견했다. 실망도 지루함도 남은 시간도 아직 모르던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그의 눈에 다시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한다.

 

아무튼 소설 속 이 무도회의 장면은 이 작품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쇠락하는 한 귀족이 격변기에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과 사회적 의미들이 흐른다. , 그리고 그의 운명의 시간이 닥친 일흔세 살의 어느 날의 묘사는 한 시대가 저무는, 또는 시대의 거인이 사라짐에 대한 애틋함, 아니 동류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연민이자, 한 가문에 대한 송사(頌辭)일 것이다. 이미 쇠락한 귀족인 작가 람페두사가 자신의 증조부와 시칠리아에 대한 애도인 것만 같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꼴이 아주 엉망이 된 표범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 가면을 쓴다. (...) 제 모습을 잃도록 변장을 강요하는 이 불합리한 규칙을 힘닿는 데까지 어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힘을 낼 수 없음을 느꼈다.” 존재하려는 힘, 인생 자체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느낌, 시간의 입자들은 이렇게 우리네 삶에서 벗어나 영원으로의 길을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다양한 감성과 지성을 즐겁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아름다움과 쇠락, 관능과 지성, 삶과 죽음, 전통과 변화, 계급질서가 교차하는 모습 등 풍요로운 서사가 시칠리아의 매력적 이미지로 그득한 지면으로 유혹한다. 한 귀족의 비애가 면면히 흐름에도 온통 아름다운 자연을 거닌 듯한 매혹적 소설이다. 내겐 더위에 지친 정신을 위무하고 돌파하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잊혀 진 삶을 살기위해 매진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에 공감하듯 사로잡힌 읽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아니요를 발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바틀비 증후군의 연합체들, 절필의 작가들인 글쓰기를 멈춘 사람들에 이르렀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은둔의 인물이 문학적 도피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지만, 나는 전혀 예견치 못했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행태가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동행하는 것은 일견 상통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정적 충동, ()에 대한 이끌림이 문학적 고뇌와 다르지 않음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창작의 요구 앞에 무기력해진 작가들과 작품들의 파편들을 모아놓은 특이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 이르게 된 것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으며. 찾아 헤매던 주베르는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살기에 아주 좋은 장소 하나를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모색했던 것은 바로 모든 글쓰기의 원칙,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비춰줄 빛이었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 마따스, 소담출판사, 2011.11 초판, P89

 

평생 책 한 권을 쓸 준비를 하며, 그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아 헤매던 조셉 주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는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장소)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지금에도 꿈꾸는 그 이상적 장소와 같이 글쓰기는 바로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때문에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다는 절필은 이처럼 부정성속에 치열한 생의 긍정, 열정을 내포하고 있음이다.

 

아니요를 과격하게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들,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아니요작가들의 선조는 단연 허먼 멜빌일 것이다. 글쓰기를 어느 날 홀연히 멈추거나, 그네들의 작품 속에 아니요, 혹은 중단과 끝을 맺지 않는 세계인 그 부정의 충동 속에서 삶을 거닐고, 퇴장하는 삶의 그 어떤 진실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뇌들을 본다. 문학을 그만두거나 글쓰기를 중단하는 이유는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물며, 생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방편이야 그 수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떤 단일한 생과 사의 진실을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좇음의 여정은 실패가 뻔한 예정된 불가능함일 것이다. 미련하게도 나는 아주 좋은 자리를 발견하는 것과 우주적 진실을 찾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 게다. 마치 지금까지 쓰인 책을 제거해버리는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참으로 신선한 아먕처럼 말이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리스 블랑쇼의 과도한 훈계라는 비아냥과는 다른 그 어떤 말도, 어떤 책도 세계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련다.

 

사실 우리네 삶에 그 어떤 중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내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노선도 없다.”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절필했던 스페인 작가 페핀 베요(pepin bello)의 작품 없는 대표적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와 삶의 의미는 도저히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아니요의 작가를 말하면서 로베르트 발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이에게 무례가 될 것 같다. 나는 낮은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듯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가장 평온한 상태일 수 있는 기억의 총체인 자신의 승인, 혹은 확인의 물음이 새삼 필요치 않는 그런 영역으로서 산책(遊牧)하는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재봉틀공장 노동자, 서점 직원, 은행원, 성의 집사, 실직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밤이면 바틀비가 되어 낡은 걸상에 앉아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서 필경사일을 하는 발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타인들로부터 잊히는 것 외에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힘으로써 문학을 포기한 작가, 나는 야망과는 무관한 미세하고 덧없는 것을 과시하는 그의 허영에 매료된다. 그는 정신병원(요양원)에 스스로 찾아 들어가 28년을 보내다 눈 쌓인 산책길에서 죽었다. 그는 삶이란 것, 글쓰기란 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길 잃음에서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것들과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길 잃음의 예술, 광기의 예술이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내 생각! 내 생각이 살게 될 집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도다.”

 

사무엘 베케트도, 발저도 스스로 찾아들어간 정신요양원. 자신의 살집을 마련했기에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횔덜린의 36년간의 칩거생활도, 휘페리온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살 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광기였지 않았을까? ‘아니요라고 선포한, 혹은 그저 절필하고 세상으로부터 도주했던 작가들과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카프카는 아마도 바틀비의 적통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에 조차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해 금식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는 인물과 닮았다. 글쓰기의 불가능성 또는 가능성은 고독과 닮아있는 듯하다. 세상이 발하는 신호들에 반항하는 그 목소리들, 고독은, 삶은 그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절단은 현대 작가들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추구는 언어의 표현 한계가 내재한 불가능성으로 침묵으로 추락과 위기의식을 강제한다. 호프만 스탈의 잘 알려진 단편 찬도스 경의 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표현이 언어에 의해 지칭 될 수도 통제당할 수도 없음으로 인한 존재적 조난에 대한 공포 섞인 선포였을 것이다. 이 문학적 표현의 위기는 삶의 자리에 대한 불안의 다른 형상인 것만 같다. 카프카가 주정꾼과의 대화에서 말()이 더 이상 사물을 제대로 지칭하지 않음으로 은유하듯, 우리는 삶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도 처한 것만 같다. 삶은 비밀스럽고 도피적이며, 그것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삶이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내 삶인 것처럼, 절필, 글쓰기의 마비상태인 침묵은 가장 치열한 혈투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가장 도덕적인 비()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애쓰는 작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존재를 발견케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마치 고독한 산책자가 찾아 헤매는 최후의 안식처, 그 평온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인다. 이 말이 맞춤으로 떠오른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것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다.”, 하나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시인처럼 절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구차해 보이는 이유가 감동적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지천인가. 삶을 숙고하려는 반성적 인간이 날로 줄어가는 느낌이다. 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찾으려는 문학의 이 치열한 모습(문학적 도피를 포함해서 말이다)들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절필, 무기력과 체념은 그저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게을러서, 성취할 야망이 보이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른 저항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결코 체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나 다양하게, 혹은 기만적으로 시간에, 자연의 흐름에 반항하는가. 글쓰기는 그 균형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요를 추구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 이야기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작가는 모든 소설을 온전히 끝내지 않은,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미완성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삶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질식당하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을 만들어 냈다는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요라는 이 저항의 한 마디는 발명, 창조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글쓰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책꽂이를 창밖으로 내던진 테스트 씨는 그 덕분에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쓸수록 생각은 적게 할 수밖에 없음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비움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덕지덕지 눌러 붙은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충만해질 여유와 자유가 생긴다.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바틀비의 이 부정의 아니요는 순리에 대한 긍정이고, 곧 채움의 가능성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멋진 무()존재들의 선조인 바틀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을 대차게 실행한다. 바틀비는 멜빌이 1843년 자신이 실패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때,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그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을 때, 그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바틀비가 자신을 거부했던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한 명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세계를 마주한 무기력의 반항이었다. 나는 발저가 선택한 은둔의 삶, 절필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체념과 반항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언젠가는 결국 체념에 굴복하겠지만.

 

세상에 내놓고 아니요를 외친 작가로 오스카 와일드는 또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지적인 것이다.”라며, 생애 마지막 2년을 실제로 자신을 폐기시키듯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열망을 실현했다. 근면성은 모든 허위의 씨앗이라고까지 독설을 뱉어낸 그에게 완전한 무위(無爲)는 가장 고상한 형태였다. 그가 죽자 파리의 신문은 그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나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글을 썼다.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금은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가 알았다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부재로서의 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그것일 뿐 아닌가? 종이가 희미하게 구기적거리는 소리를 상기시키는 웃음이었다고 카프카와 대담을 나누었던 구스타프 야누흐의 증언처럼, 그 영원한 침묵을 선고 받은 존재가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글쓰기처럼 삶이란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나 삶이나 그 어떤 의미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증거가 없다. 그 누군가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듯, 삶의 의미란 것도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문학이론 교수이자 소설가인 다니엘레 델 주디체(Daniele Del Giudice)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말하며, 글로 쓰인 작품은 위에 세워진 것이고, 하나의 텍스트는 만약, 그 텍스트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학적 도피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마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는 것 이상은 다루지 않으려고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찌 그 언어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설 윔블던 스타디움이 신화적인 실서증(失書症) 환자인 옛 친구들을 탐문한 것, 즉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글쓰기의 도덕성에 대한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뇌한 것이리라,

 

또 하나 글쓰기의 마비상태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켜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 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여있던 지신에 대한 고별사를 썼던 앙드레 지드로 맺어야겠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팔뤼드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정작 팔뤼드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문학적 도피 또는 마비나 절필의 상태는 침체이거나 엉성한 침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이나 도약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작가의 이상을 찬양했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문학(한국문학)에도 과작(寡作)의 작가들, 또는 절필인가 했을 때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문학의 소재와 언어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곧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부정적 충동에는 체념과 저항의 균형에 대한 내재적 본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일 게다.

 

모든 텍스트의 본질은 바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것을 피하고, 텍스트 자체를 확정하거나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단언을 피하는 데 있다.” 는 말처럼 삶에 그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우리는 단언, 확정할 수 없다. 세계에, 우주 자연에 대해 아니요를 말함으로써 엄청나게 견고한 장벽과 마주하여 주춤거리고 당혹감에 혼란스러울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글쓰기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글쓰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했던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삶의 내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