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필리아 (비의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31 Oct 2026 18:57:01 +0900</lastBuildDate><image><title>비의식</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903410318852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비의식</description></image><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000년된 인간학 지도 - [사람을 읽는 힘, 사기열전 - 2천 년 전 고전에서 배우는 70가지 인생 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604867</link><pubDate>Sat, 31 Oct 2026 18: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60486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32131586&TPaperId=176048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5/40/coveroff/k0321315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32131586&TPaperId=1760486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람을 읽는 힘, 사기열전 - 2천 년 전 고전에서 배우는 70가지 인생 수업</a><br/>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리텍콘텐츠 / 2026년 10월<br/></td></tr></table><br/>“인간의 삶, 즉 인생이란 시대와 인연이 짜놓은 판 위에서 펼쳐지는 운명의 합작품이다!”  &nbsp;&lt;열전(列傳)&gt;은 《사기(史記)》 130편 중 70편을 구성하는 역사의 진정한 동력인 개인들- 장수, 상인, 학자, 자객, 등등 - 에 대한 생생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왕과 제후들을 다루는 &lt;본기(本紀)&gt;나 &lt;세가(世家)&gt;와 달리 사람 냄새가 가득해서 그들의 행적은 더욱 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밀착된 교훈들로 다가온다. 특히 사마천의 현실주의에 기반한 관점은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실체적 양태들이어서 도덕적 이상과 같은 괴리감을 덜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이 책에서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인식과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도 되는데, 유방을 도와 한나라의 제국통일 공신들인 명장 한신이나 책사 범저가 시기심으로 탁월한 재능의 인재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장면들처럼 인간의 다면성을 새삼스레 발견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지기도 한다. 아마 오늘의 언어로 해석한 이 책을 읽게 되면 “사람을 읽는 힘”이란 것에 대한 통찰력을 조금은 더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nbsp;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란 무엇일까에 대한 사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보며 비극적 인간드라마들에서 펼쳐지는 세상의 이치에 대한 해독의 순간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감춰진 이해관계와 악의를 꿰뚫는 것의 한계를 직시하며 인간의 가변성마저 계산하는 종합적 지혜란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재능이 넘치고 가치 있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지라도 주변의 인간들과 세상은 그것에 온전한 보상을 하기는커녕 온갖 질투와 음모, 나아가 죽음으로 몰아가기가 일쑤인 실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 세상이기에 이러한 물음들로 가득한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타인과의 관계, 이 세상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하는 삶의 가치를 정립해보는 시간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nbsp;  이 책은 인문학자 김태현 박사가 옛 지식으로 박제되어버릴 수 있는 2000년 전의 고전 《사기 열전》에 오늘이라는 현재의 숨을 불어넣어 생동하는 실천적 지식으로서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여 쓴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총 70편의 열전을 야망과 처세에서부터 인생과 허무에 이르는 7장으로 범주화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과 마주케 함으로써 삶의 가치와 사유의 시선을 생각토록 이끈다. 그것은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어떻게 그 성취로 쥐어진 권력과 재화를 절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의해 발휘되는 힘의 행사를 멈추어야 할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인 범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상의 이치란 “해가 중천에 뜨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이 당연함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의 목소리일 것이다.   &nbsp;  한편 희대의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회자되곤 하는 훗날 진시황이 되는 정의 친아비인 여불위의 얘기는 범저가 멈출 때를 알았음에 반해 여불위는 권력의 욕망에 눈이 멀어 그만 멈추지를 못한다. 복중에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애첩을 진나라 왕에게 들임으로써 나라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했던 야망은 바로 그 야심이 자신의 운명까지 파멸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칠 줄 모른다. 세상을 온통 기회와 거래 관계라는 잣대로 들이댔을 때 자신조차 그 관계로 치환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아무튼 인간은 그 한계를 인식하는 데 서툴기 그지없는 존재이기에, 더욱 인간관계와 세상의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보려는 지혜가 필요한 것일 게다.  &nbsp;  “天下凞凞 皆爲利來 ; 天下壤壤 皆爲利往 (천하희희 개위리래 ; 천하양양 개위리왕)&nbsp;천하가 떠들썩한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하여 오고, 천하가 북적대는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하여 간다."&nbsp;- &lt;화식열전(貨殖列傳)&gt;, p47  &nbsp;  이 문장은 오늘과 같이 부가 신뢰와 능력을 대신하는 시대를 긍정하는 하나의 목소리일 수 있겠다. 이는 부를 일군 거상들을 그저 칭송하거나 이익에 몰두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시대를 읽는 지혜와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력의 결합을 통한 자유의 쟁취와 존엄한 삶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면목을 긍정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로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그 부유함이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시대의 동력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자연의 섭리, 순응을 긍정하는 얘기도 있지만, 열전에는 온통 시기와 질투, 권력의 비정함처럼 ‘나’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타자를 비롯한 시간의 거대한 흐름, 보이지 않는 적들에 의해 참담한 운명에 직면한 인간의 이야기들로 수두룩하다.  &nbsp;  <br>비범한 능력을 지니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배제되거나, 혁혁한 전쟁의 승리를 안긴 장수를 기다리는 것은 열광적 환영이나 귀중한 보상이 아니라 간신들의 시기와 음모로 죽음이 기다리기도 한다. 또한 오국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제나라 정벌에 나섰던 기원전 284년의 연나라 상장군 악의(樂毅)가 70여성을 함락하고 나머지 두 성의 함락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를 악의가 일부러 정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제왕이 되기 위해 그곳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한다는 반역의 행위로 몰아 국가의 운명을 위태로움에 빠지게 하는 간신배들로 득시글대기도 한다. 전쟁터에서 해임된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하고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다시 함락시켰던 70여 성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만다.    &nbsp;  "차가운 권력의 속성은 타인을 포용하는 도덕적 관념보다 상대를 짓밟는 치밀한 계산에 먼저 반응한다."&nbsp; -&nbsp;&lt;위기 무안후 열전&gt;, p119  &nbsp;  나는 &lt;악의 열전(樂毅列傳)&gt;, 이 이야기에서 지금의 한국 정치현실을 본다. 그 어느 때보다 국제정세가 우리에게 이로운 시기가 아니다. 진정한 리더가 없을 때 그토록 비난하던 간신들은 국가가 위난에 닥치면 그저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 빌붙어 자기 배를 채우려 국가배신을 일삼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우리 역사는 이러한 무리들로 인해 오랜 시간 열등국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자 김태현은 “상황 변화에 따라 튀어나올 본능적인 방어기제와 질투를 미리 계산”할 줄 알아야 하며, “성취가 가져올 타인의 시기심과 리더의 불안을 세밀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의 교훈을 말하지만, 타인의 불안과 질투까지 미리 가늠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실천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진단은 인간의 저열한 본성을 인정한다면, 그것마저 가늠하는 예지를 지녀야한다는 말일 테지만, 지금까지 보여 온 인간행태를 볼 때 과연 인간 능력의 한계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nbsp;  대조적인 두 열전이 있는데, &lt;순리 열전(循吏列傳)&gt;과 &lt;혹리열전(酷吏列傳)&gt;이다. 요즘 한국의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에 매몰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한다는 의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이는 법을 다루는 공직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법을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들일 것이다. 사마천은 &lt;순리 열전(循吏列傳)&gt;에 이치에 맞는 다스림, 즉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공직자로서 법이란 어두운 밤길을 걷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주는 길잡이로 인식”하고 있으며, &lt;혹리열전(酷吏列傳)&gt;의 인물들은 “법이란 정치적 상대의 목을 치는 날카로운 칼”로서, “법전을 무기로 삼아 국가의 고위관리부터 국민까지 가차 없이 베어 넘기는 자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법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적 이익을 위해 법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리들은 법의 이치를 잃어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그 칼을 쥔 자 역시 필연적으로 그 칼날에 베이고 만다는 준엄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 판사들은 순리인가, 혹리인가. 그들만이 자신을 알 것이다. 휘두른 그 법은 그대로 자신을 겨눌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자성(自省)의 지혜가 미칠까 모르겠다.  &nbsp;  &lt;노자한비열전(老子韓非列傳)&gt;은 노자와 한비자를 대비하여 이들 명쾌한 사상과 재능이 권력의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본성의 양면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엄격한 법(法), 통치기술(術), 절대적 권위인 세(勢)를 주장함으로써 쇠락하는 조국 한나라의 부국강병을 호소했던 한비(韓非)가 쓴 “다섯 좀 벌레를 비판한 &lt;오두(五蠹)〉”는 그대로 오늘 한국사회의 오적을 떠올리게 한다.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이 사회를 더럽히는 신오적(新五賊)은 법치의 진정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늘의 우리현실을 반성토록 한다. 물론 사마천은 한비를 통해 높은 재능과 사상, 실천력이 권력자들의 경계심을 초래, 화를 부른다는 경고로서 서술되고 있지만, 한비가 동문수학한 재상 이사의 간사한 음모와 계략에 의해 독배로 사살되는 것은 또 다른 경고로 다가온다. 한 탁월한 인물이 얄팍한 투기에 의해 파멸 당할 때 제국 진나라 또한 패망의 길로 들어섰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 끈질긴 기득권 패거리들이 항시 저들보다 재능 있는 인물을 어떻게 세상에서 몰아냈는지를 안다면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세태에 대한 이해를 한층 진지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교훈으로 새기고 싶어진다. <br>“臣恐大王之投杼也(신공대왕지투저야; 신은 대왕께서 끝내 베틀의 북을 내던지실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굳은 믿음도 같은 의심과 모함이 반복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nbsp;- &lt;저리자 감무 열전&gt;, p289  &nbsp;  열전을 이렇게 읽다보면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이를 시기하거나 자기 권력의 유지에 불안을 느낀 집단이나 군주에 의해 척살되거나 자결이 강요되고, 죽음에 내몰린 역사가 인간들의 그치지 않는 행태 바로 그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간질과 변덕, 의심과 곡해, 배신과 시기에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권력과 부 앞에 형제도, 부모도, 오랜 우정을 나눈 벗도 모두 잔악함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하물며 인간의 신체 질병을 진단치료 하는 신의(神醫)로 불리는 편작(扁鵲)조차 열등감에 이를 시기하던 어의 이혜라는 인물에 의해 길가에서 주살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도사린 그 수치스러운 잔악성이 얼마나 깊게 인간 세계에 깃든 것인지에 진저리 치게 한다.   &nbsp;  사마천은 이것이 인간이기에 이조차 삶의 관계에서 종합적으로 헤아리는 지혜를 지녀야 할 것이라 말하는 듯해서 산다는 것, 이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의 지독한 염오(厭惡)를 느끼게 된다. 하물며 노자(老子)가 “아름답고 좋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그릇이다.(不祥之器)”라 말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재앙의 씨앗임을 말하는 것처럼, 타인의 변변치 못한 용렬(庸劣)한 시기심까지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란 것은 왜진 역겹기조차 하다. 아무튼 2000년이란 시간을 건너온 지혜의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선택과 두려움, 성공과 몰락이라는 오늘의 우리와 닮은 형상의 삶들로부터 인간을 다시 묻게 된다.   &nbsp;  아마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거나 마주하게 될 중요한 삶의 문제들을 수두룩하게 접할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예측 할 수 없는 변화와 경쟁, 인간관계의 갈등과 집단 안의 이해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판단을 조금은 겸손하게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 주리라 생각된다. 아무쪼록 “인생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하나의 인간학 지도”라 해도 될 것 같다. &lt;사기열전&gt;을 원(原)저술로 읽을 때의 지루함을 떨쳐내고 오늘 우리들의 실천적 언어로 다시 읽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과 삶의 본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분명 인생의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리라 믿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5/40/cover150/k0321315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154016</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존재하지 않는 기억, 곧 상상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 사랑 아닐까? -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96231</link><pubDate>Tue, 27 Oct 2026 17: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962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4934&TPaperId=175962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4/34/coveroff/89544749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4934&TPaperId=175962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a><br/>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09월<br/></td></tr></table><br/>어쩌면 우리들의 삶이란 상기하고 기억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며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속 세 편 단편들의 주인공인 지윤, 도희, 민영의 이야기들은 분명 현실 속 삶의 양상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마음속에 지각되는 느낌과 생각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말과 행위란 이러한 것들의 외형적 표현양태일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말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nbsp;  하지만 진술되지 못한 것들은 그 말들과 말들의 사이, 말의 이면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해독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들 존재하는 것들의 기억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는, 어쩌면 무의식이거나 전의식에 해방의 통로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공감과 배려의 언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nbsp;  이 소설집의 각 단편작품들은 두 번 읽게 된다. 소설집에 실려 있는 에세이 「내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에 서술된 내용들은 각 작품들의 보충이거나 장면의 사실들, 삭제된 장면들의 기록이다. 소설의 이미지에 가닿는 하나의 짧은 단서일수도 있고, 배경과 대사의 배후적, 아니면 무의식의 연결지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 한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각 작품에 대한 처음의 독해가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더 깊게 문장들에 다가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nbsp;  “드넓은 대합실이 펼쳐진다. 지윤은 겁부터 난다. 이렇게 드넓은 장소에서 지윤은 늘 호흡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 「금빛 베드 러너」, p17  &nbsp;  「금빛 베드 러너」의 화자인 지윤은 타자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지각함으로써 모든 관계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했던 삶의 장면들을 반추한다. 그러한 장면을 더듬으며 엄마에게 봉투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곤 엄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검사 결과를 받은 지윤은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저 멀리 밀쳐놓고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고 말한다.  &nbsp;  엄마에게 받았던 재사용된 듯한 흰 봉투에 쓰여있던 “힘 내세요.”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와 봉투 속 7년 전 사랑했던 연인에게 부치지 않았던 편지의 사연이 흐르고,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서울 호캉스를 함께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nbsp;  지윤은 서울 나들이에서 엄마와 그림 전시도 둘러보며, 엄마도 좋아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엄마는 기침과 고열 증세를 보이고, 감기약을 찾아 약국을 찾지만 엄마가 말했던  ‘화이투벤’ 상표의 약이 없다. 지윤은 당혹스러움에 “두 주먹을 꼭 쥔다. 평정을 잃을 때 지윤이 조건반사처럼 하는 동작”이다. 지윤은 다시 약국을 찾아 다른 이름의 감기약을 사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에게 이러한 판단은 자신을 이겨내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nbsp;  지윤이 타인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결핍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힘겨운 노력이다. 그녀의 표정에 웃음밖에 없다는 자폐스펙트럼 진단검사자의 말처럼 무감각하고 무표정해 보이는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관계에 긍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적으로 오랜 동안 훈련한 표정이다. 지윤은 이윽고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신에게 자폐스펙트럼과 관련한 증상이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잘 알고 돌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낀다.   &nbsp;  애정을 구걸하는 지윤의 연애편지 속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네 마음을 모르겠다고. 사랑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적혀 있었”던 구질구질한 말들이 마치 자신이 쓴 것 같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은 지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마음으로 지윤에게 닿는다. 엄마는 지윤에게 이제 “안 그럴 거지?”라고 다짐하듯 묻는다. 아마 지윤은 세상의 잣대가 들이대는 것에 더는 자신을 맞추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직접 볼 리 없는 곳들을 함께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nbsp;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상담하는 지윤에게 자폐스펙트럼이 아니라며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걔’들이라고 마치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된 존재들로 치부하듯 말하는 상담사의 위장된 배려, 기만의 언어에 묻어있는  “자신의 무지에서 묻어나는 미량의 악의”를 느끼는 것처럼, 우리들은 은연중에 사람을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화하여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시선에 노출된 사람은 그 범상치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피로감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작동하게 된다. 지윤의 엄마가 딸 지윤에게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말은 이해의 말이고 사랑의 언어이며 화해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지윤에게 평온이 깃들었을까?   &nbsp;  “엄마가 왜 하필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갈 수 있는 곳이 그만큼 없었던 거겠지. 도희도 갈 곳을 더는 알지 못했다. 도희는 돌아갔다.”-「도희의 시간」, p61  &nbsp;  「도희의 한 시간」은 어린 시절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던 기억으로 시작된다. 등산 바지, 바람막이 점퍼, 기능성 옷을 입고 나선 엄마를 따라가는 낯선 여행은 아이에게 불안감을 드리운 무엇이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왔을까.”  그래서 덮쳐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아이는 꾸준히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이 타인을 해독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장면이 겹치는 듯하다.  일출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되뇌다가, 오색 파라솔을 대여해 준 엄마의 행위에 낯설어한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어린 도희의 마음에 깃들었던 그 감정을 우리들은 안다.  &nbsp;  <br>정동진에서 엄마와 함께했던 날의 기억의 장면들은 온통 엄마 표정의 변화를 흘깃거리며 두려움과 무서움,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이 열차여행의 장면은 몇 몇 수녀들이 교사를 하는 고등학교 시절, 막 개통했던 KTX를 타고 수업을 거른 채 한 시간 남짓의 여정에 외로움과 죽음이 어우러진 사연과 순간의 생각들의 장면들, 그리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던 시절 애인이 이별 통보를 하면 무작정 열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고, 빈 백팩을 매고 마중 나오던 애인과의 반복된 여정의 시큼한 나날들, 그리곤 옆 좌석에 앉게 된 노수녀와의 짧은 대화들, 진주와 포항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열차 칸이 분리되어 갈아타야 했을 때 칸을 바꿔 타야 하는 노수녀가 어느 순간 도희를 발견하고는  “왜 또 여기냐고” 묻는 장면은 마치 생이란 반복되는 어긋남, 두려움과 곤혹으로 이루어졌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론가 전청림이 해설에서 “불가사의한 바깥의 역량”, 그것의 미덕에 대한 깨달음의 장면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nbsp;  도희의 ‘한 시간’의 파노라마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의 장면들처럼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묻혀있던 생의 엄청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길어내 현실 속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의식의 표면에 해방되어 새롭게 해석되도록 하는 것만 같다. 인간의 이러한 역동적 정신의 작용을 나는 거의 마주하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일 테다. 조금 느린 일반 열차를 이정표 없이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을 떠올리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좀처럼 저 심연에 켜켜이 쌓여있는 의식하지 않았던 장면들과 이제는 마주해야 할 것만 같다. 그 시간은 아마 너그러운 화해와 이해, 사랑이라는 공감의 장면들로 이뤄질 것이다.  &nbsp;  “살아 본적도 없는 집을 이토록 아늑하게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다. 민영은 없는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 「쉴 곳」, p80  &nbsp;  「쉴 곳」은 세 작품 중에서 내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민영은 자신의 성장기를 보듬어주었던 열여덟 살 터울의 오빠 민기와 그의 아내 정화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촌스럽지만 층고가 높아 옹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 집(펜션)에 늦은 밤 도착한다. “정화와 민기의 집은 환했다.”, 민영을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의 불빛처럼, 그래서 민영은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정화와 민기는 극히 대조적 성향의 사람들이고, 이제 쉰 줄에 들어선 그들 내외의 관계는 서걱거린다.   &nbsp;  오빠의 얼굴이 낯설다. 코 성형수술을 한 탓에 얼굴의 전체적 이미지가 변한 것이다. 민영은 그런 민기를 걱정한다. 민영은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면 자해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어린 시절 보았던 “거울 조각들에 묻어 있던 핏자국”의 기억부터 학습지를 다 하지 않아 정화의 매보다 훨씬 약한 손바닥 매를 맞았을 때 마침 집에 들어 선 정화가 불같이 “당신이 뭔데 우리 애를 때려?”라고 대거리를 하던 정화를 떠올린다.   &nbsp;  그렇게 정원 밭의 두더지 굴을 마구 밟아대던 민기의 폭력성의 기억, 사람들과 무던하게 지내고 싶어 나서거나 끼어들지 않는 정화의 성향, 그것을 정화가 의견이 없는 무심과 타자에 대한 배격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무시와 배제로 행동함으로써 소외된 삶이된 신산한 사연이 이어진다. 정화가 민영을 지칭하던 “우리 애”처럼, 정화는 민영의 코가 자신을 닮았음을 말하듯 민영은 그들에겐 자식과 같은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아마 민영도 이러한 표현과 감성들을 모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nbsp;  민영의 성향은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퇴사했다.”는 민영의 표현처럼, 책임 떠넘기기, 상대 모욕하기, 적반하장의 대거리처럼 세상의 태도는 정말 불가항력일 때가 많다. 민영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세상에 반응하려 하지 않지만 손 떨림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억압된 감정, 숨기고 참아내려는 마음의 지옥은 신체의 증상으로 드러나 고통을 알린다. 민영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손을 감추고, 떨려오는 턱을 제어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기도 전에 긴장이 몰려온다. 그녀는 아예 말을 삼가게 되고, 혼자의 삶을 선택한다.  &nbsp;  그럴 때면 민영은 정화와 민기가 억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시끄러움 속에 졸음이 오는 그런 평온을 찾아 그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민영과 정화가 차를 몰고 나갈 때 민영과 정화의 대화는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도의 삶을 밀고나가는 것으로서 세계와의 주도적 대면의 시도가 지닌 아름다운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민영은 액셀을 밟기 시작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번화가를 지나치고는 이내 멀리 갈 거라고 민영은 말한다. “좋네 멀리 가보자”,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멀리 간다는 것. 아마 두려움에 대한 적응, 그것의 돌파는 사실 누구나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본다. 이내 정화가 말한다. “민영아 천천히 가자, 언니 멀미나.” 이때 민영이 말한다.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그래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으로 일체가 되면 울렁거림, 두려움과 긴장이 멀리 떠나버릴 수 있다.  &nbsp;  “안 한 지 오래됐는데.”“그냥 해 봐, *달걀 꺼내듯이.”  &nbsp;  긴장한 정화는 웅덩이가 나타나자 크게 휘청거리고 급브레이크 밟는다. 그녀의 손이 떨고 있다. 민영은 오빠 민기에게 배웠던 말, “걱정 마. 아무렇지 않아.”라고 말한다. ‘쉴 곳’은 이처럼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일 테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아웅다웅하지만 그래서 그 고통과 욕망과 결점과 변화를 서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음의 응원을 해주는 이들이 있는 곳, 그런 이들이 있는 곳은 언제든 졸음에 겨워 누울 수 있는 곳일 터이다. 민영과 정화, 민기가 있는 곳, 밤고구마를 좋아하지만 민영을 위해 물컹한 호박고구마를 따로 준비해 내놓아주는 곳, 환영하고 가끔 둥지를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동행해 줄 이가 있는 곳 말이다. “현실에 없었던 장면, 오래오래 보고 싶어지는 장면”이어서였을까? 그래 “섬세하게 작은 세계를 가꾸어나가는 듯한 정원사의 태도”가 더없이 나의 내면을 어떤 휴식의 평온함으로 채워준 소설로 남을 것 같다. 없는 기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공감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 아마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집은 그런 언어로 가득채워진 작품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nbsp;<br>  * 달걀 꺼내듯이: 이 문장은 정화가 닭장에서 달걀을 민영에게 꺼내보라 했을 때, 암탉이 노려보는 데 부담을 느낀 민영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정화가 민영에게 건넸던 말이다.“얘가 날 쳐다보는데.  그냥 꺼내면 돼.  그냥 어떻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p10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4/34/cover150/89544749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74347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인류학자가 AI가 전대미문이 아니라고한다 - [동물, AI, 신 - 인류학으로 모험하는 도덕적 상상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88914</link><pubDate>Fri, 23 Oct 2026 19: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889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1917&TPaperId=175889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473/78/coveroff/k6221319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1917&TPaperId=175889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동물, AI, 신 - 인류학으로 모험하는 도덕적 상상력</a><br/>웹 킨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0월<br/></td></tr></table><br/>문화적 상대주의와 AI 윤리의 회피— 웹 킨의 『동물, AI, 신』에 대한 비판적 독해  &nbsp;  “기술 발전이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포스트휴먼, 유토피아가 올까? 아니면 묵시록적 특이점이 올까? 아마도 한 발 물러나자. 언뜻 보기와 달리 이것이 전대미문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 인간과 비인간이 유의미한 도덕 관계를 맺어온 역사는 꽤 길다. 인간과 사이보그 같은 기술은 물론, 인간에 가까운 동물들, 인간에 준하는 귀신들, 인간을 뛰어넘는 신과 언제나 함께해왔다.” -〈서문&gt; 9쪽  &nbsp;  웹 킨의 『동물, AI, 신』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탐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인간이 동물과 신, 귀신, 각종 기계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설정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공포와 열광 역시 전대미문의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닮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존재를 상상해 왔고, 그 존재에 권능과 의지, 심지어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nbsp;  1. 역사적, 문화인류학적 선례가 AI의 윤리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가  &nbsp;  이러한 접근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인간이 기계에 마음을 투사하고, 동물에게 인간과 유사한 감정과 의도를 읽어내며, 자신이 만든 인공물에 자율적인 행위주체성을 부여하는 현상을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순전히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낯선 기술에 대한 두려움에도 오랜 문화적 기억과 상징적 관습이 개입한다. 그러므로 AI를 둘러싼 논쟁에서 인간 자신의 인식과 감정, 사회적 관계를 살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nbsp;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과거에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AI를 둘러싼 윤리적 우려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과거에 인간이 신의 권능을 믿었고, 동물과 도덕적 관계를 맺었으며,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해 살아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윤리적 지위를 판단하는 데 어떤 직접적인 답을 제공하는가? 역사적으로 참고할 선례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현재의 기술이 과거의 사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인간이 오래전부터 비인간 존재와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AI 윤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그 윤리적 검토를 생략할 근거는 될 수 없다.  &nbsp;  저자는 AI를 둘러싼 도덕적 패닉과 유토피아적 열광을 모두 경계하는 듯 발언한다.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전대미문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AI에 대한 우려를 단순히 낯선 존재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반응, 이를테면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도덕적 혼동’이나 ‘요란한 호들갑’”(126쪽)으로 설명한다면,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가려질 수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AI가 단지 인간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를 구사하고 지식을 종합하며 복잡한 판단과 행동을 수행하는 시스템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역량이 사회의 핵심적인 의사결정과 권력의 배분에 개입할 가능성이 우려의 대상이다.  &nbsp;  여기서 중요한 것은 AI가 실제로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초월이 언제, 어느 정도로 실현될지 불확실하더라도, 그 가능성과 현재 확인되는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관리할 것인지가 문제다. 불확실성은 윤리적 검토를 유보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검토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nbsp;  저자가 AI를 연극배우나 접신 무당, 점쟁이와 비교하며 인간의 말투와 사회적 행동에 내재된 패턴을 이용하는 존재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견된다. 이러한 비교는 AI가 인간에게 영험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 AI의 능력과 위험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영험하다고 믿는 것과 그 대상이 실제로 복잡한 정보처리 능력과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nbsp;  AI가 인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초능력이나 독립적인 의식의 증거는 아니다. 그렇지만 작동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시스템의 영향까지 심리적 투사, 투사와 내면화의 위험이라는 상호작용의 관계만으로 돌릴 수도 없다. 인간이 AI에 의인화된 이미지를 투사하는 문제와 AI가 실제로 인간의 판단, 행동,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별도로 검토되어야 한다.  &nbsp;  따라서 역사적 선례를 통해 오늘날의 기술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필요하지만, 선례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이미 해명한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기술이 그 관계를 어떤 규모와 속도, 권력 구조 속에서 변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신과 동물, 생명유지 장치는 현대의 범용 인공지능과 동일한 조건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유사성은 비교의 근거이지, 동일성의 증명이 아니다. 저자 웹킨은 AI 윤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하나의 존재 사실로서 소개하지만 그 규범적 근거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다. 그 결과 윤리적 우려를 단순히 기술에 대한 낯섦이나 문화적 투사의 문제로 환원해 이해할 위험을 야기한다.  &nbsp;  2. 사회적 관계의 윤리와 보편적 판단의 기준  &nbsp;  웹 킨의 논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도덕성이 추상적인 원칙이나 고립된 행위자의 판단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간이 실제로 누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가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루나족이 개를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는 존재로 대하거나, 크리족이 곰을 존중해야 할 근(近)인간으로 이해하는 사례는 이러한 관점을 보여준다.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며, 상대방의 반응을 해석하는 행위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도덕적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의 방식이 달라지면 의무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  &nbsp;  이러한 관찰은 도덕성을 추상적 규칙의 집합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에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 실제의 윤리적 판단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에게 책임을 느끼는가는 문화와 역사, 경제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트롤리 딜레마와 같은 사고실험을 비판하며 실제 인간의 관계와 대화, 사정의 청취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의 도덕적 갈등은 고립된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nbsp;  그러나 도덕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과 도덕적 정당성이 관계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은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애착과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가 언제나 도덕적 판단의 정당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차별, 부당한 희생의 강요 역시 사회적으로 익숙한 관계와 관습을 통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관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관계의 얽힘으로서 일인칭 관점이라 부르며, 도덕성은 이 일인칭의 관점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삼인칭은 냉엄한 객관주의적 관점이라 지칭한다.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의 친밀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편화할 수 있는 도덕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칸트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준칙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nbsp;  저자는 도덕적 삶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시스템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가 실제 삶에서 구현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관습, 사회적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특정한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관습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시스템이 도덕적 삶의 조건이라는 주장으로부터, 그 시스템이 승인하는 모든 가치가 정당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nbsp;  가령 특정 사회에서 동물에 대한 잔혹한 대우가 관습적으로 허용된다고 해서 그 관습을 해당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 역시 오랜 역사와 사회적 승인을 근거로 면책될 수 없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일과 그 차이를 도덕적으로 승인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와 모든 판단을 맥락 속에 상대화하는 윤리는 동일하지 않다.  &nbsp;  이 지점에서 웹 킨의 논의는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저자가 실제로 모든 보편적 도덕 원칙을 부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다양한 삶의 방식과 도덕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목적은 특정 문화의 기준을 인류 전체의 기준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경계하려는 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편적 판단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제한하는지, 그리고 상이한 관습 사이의 충돌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웹 킨은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  &nbsp;  보편적 윤리는 모든 사회가 동일한 관습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공존하더라도 타인의 생명과 존엄성, 자유와 안전을 어떤 방식으로 보호할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원칙은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추상적 명령이어서는 안 되지만, 구체적 상황을 이유로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임시적 규칙에 그쳐서도 안 된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면서도 그 차이가 정당화할 수 없는 피해와 지배를 비판할 기준이 필요하다.  &nbsp;  AI 윤리에서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AI 시스템은 특정 개인과 관계를 맺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정 사용자에게 친절하고 유용한 AI가 다른 사람에게는 차별적이거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용자가 AI와 친밀감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경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개별적 관계의 성공과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은 구별되어야 한다.  &nbsp;  AI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필요한 것은 관계의 맥락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가 누구에게 어떤 이익과 피해를 가져오는지 폭넓게 검토하는 일이다.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그 시스템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제삼자, 취약한 집단, 미래 세대까지 고려해야 한다. 관계의 윤리를 강조하려면 오히려 관계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형성된 신뢰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가려서는 안 된다.   &nbsp;  <br>3. AI의 도덕적 지위와 책임 귀속 문제  &nbsp;  『동물, AI, 신』에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은 인간과 비인간의 도덕적 경계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뇌사자의 장기기증은 어떤 조건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이러한 사례는 기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때 기존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를 보여준다.  &nbsp;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례는 행위와 책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자동차는 프로그램된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했을 뿐이라는 설명은 사고의 인과관계를 일부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과 책임을 귀속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동차의 작동이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그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학습시키며 배포하고 감독한 사람과 조직의 책임을 검토해야 한다. 기술적 과정이 복잡해질수록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구조를 더 정교하게 규명해야 한다. 웹 킨은 이 자율주행 자동차의 도덕적 책임 소재의 유무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검토를 하지 않고, 다만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책임의식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nbsp;  이 문제는 AI의 도덕적 지위를 논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가 도덕적 판단처럼 보이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 행위주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AI가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의식이나 감정을 지녔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AI의 모든 행위를 윤리적 검토에서 제외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적어도 세 가지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AI가 도덕적 고려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가(AI 시스템의 윤리적 평가), AI가 도덕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는가(AI의 도덕적 행위 주체성; 의식소유 여부), 그리고 AI의 행위에 대한 책임(AI의 개발 운영 주체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nbsp;  이 세 질문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하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곧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주체라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시스템이 인간에게 중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시스템에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 시스템의 설계와 운용을 엄격하게 규율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nbsp;  따라서 AI 윤리는 AI를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재의 AI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개입하는지, 어떤 위험을 발생시키는지, 그리고 그 위험을 예방하고 통제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AI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 해결될 때까지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검토를 미룰 이유는 없다.   &nbsp;  저자는 로봇과 AI의 도덕적 지위가 경험론적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사회적 기술과 지식에 어떻게 의존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AI에 행위주체성을 투사하고, 그 결과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잊을 위험을 지적한다. 이러한 통찰은 AI와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자기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지만, 동시에 그 기술에 판단을 위임하면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약화할 수도 있다.  &nbsp;  그러나 상호작용의 질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가 편향된 자료를 학습하고 차별적 결과를 산출하거나, 사용자의 의존성을 유도하고, 인간의 판단을 부당하게 조종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문제를 사용자가 AI와 맺는 관계의 질로만 설명한다면, 기술을 설계하고 공급한 주체의 책임이 흐려질 수 있다. 사용자가 위험한 시스템과 관계를 맺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요구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생산자와 운영자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nbsp;  AI 시스템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AI의 기술적 특성을 무시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기술 체계에서 책임이 분산되고 불분명해지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이다. 개발자, 기업, 배포자, 운영자, 사용자에게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책임의 범위는 각자의 권한과 예측 가능성, 통제 능력에 따라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AI가 독립적인 판단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누가 그 판단의 조건을 만들었고 누가 그 결과로 이익을 얻으며 누가 피해를 감당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nbsp;  여기서 윤리적 검증은 기술 발전의 장애물이 아니라 기술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위한 조건이다.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유로 검증의 시간과 비용을 불필요한 부담으로 취급한다면, 기술의 편익은 사유화되고 위험과 피해는 사회 전체에 전가될 수 있다.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과 그 기술이 인류 전체에 정당한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은 동일한 목표가 아니다. AI 윤리는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발전시킬 것인가 만이 아니라, 그 발전의 방향과 권한을 누가 결정하며 그 결과에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문제다.  &nbsp;  4. 맺음 말 : 역사,문화적 인간 비인간 관계의 다양성의 윤리가&nbsp;AI의&nbsp;윤리적 정당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문화인류학적 윤리 판단의 한계)  &nbsp;  결국 웹 킨의 인류학적 접근은 AI를 둘러싼 인간의 반응과 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설명이 AI의 실제 역량과 위험에 대한 평가, 보편적 윤리 원칙의 정립, 책임의 귀속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 관계를 맺어온 역사는 AI 윤리를 이해하기 위한 비교의 자원이지만, 그 자체가 윤리적 정당성을 보증하는 규범은 아니다.  &nbsp;  우리가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인간이 과거에 무엇을 신성하게 여겼으며 어떤 존재를 도덕적 관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 만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 어떤 권능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 권능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역사적 경험을 참조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위험을 과거의 익숙함으로 덮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nbsp;  AI가 인간을 닮았다는 사실은 윤리적 검토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인간이 AI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투사한다는 사실 역시 AI의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투사와 기술의 실제 역량을 구별하고, 기술을 둘러싼 권력과 책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면서도 그 기술 자체의 위험과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날 AI 윤리의 과제이며, 웹 킨의 논의가 더 깊이 답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nbsp;  웹 킨은 관계 중심적 접근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AI의&nbsp;도덕적 지위를 인간화라는 지극히 성급하고 편의적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편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 원칙의 구체적 적용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정당화 할 수 있는 보편적 원칙의 공유 문제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문화인류학적 관계성이라는 상호작용과 도덕성 정당화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학적 설명이 제아무리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AI시스템이 정당한지, 어떤 위험을 허용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는 결정되지 않는다.   &nbsp;  문화인류학적 설명이 우리들이 윤리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분명 풍부한 시야를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AI가 초래하는 문제의 정당성이나 책임의 소재까지 결정해 주지 않는다. 결국 웹 킨의 글은 다양한 상황(민족, 지역, 동양과 서양 등의 차이)에 적합한 윤리적 감수성을 저마다 갖추고 있기에 AI나 지능 로봇을 수용하는 도덕적 감각도 다르다는 낙관적 견해를 보인다. 아마 그렇기에 웹 킨은 “인간 반응은 언제나 기존 관습, 제도, 역사적 기억을 원용하기 마련이기에 오늘날 신기술을 두고 벌어지는 ‘호들갑’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p146) 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nbsp;  AI에 대한 우려의 윤리적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페티시즘의 논리에 의한 자아감의 투사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지나치게 심리적 관점에 매몰되어 AI라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거시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 같다. 웹 킨의 인식은 AI를 단지 “말뭉치로부터 통계적 패턴을 발견하여 짜깁기하는 확률적 앵무새”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AI는 이미 자율 학습을 통한 인간에게 낯선 자기 생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웹 킨의 글의 마지막 쪽에서 “몇몇 소수가 신의 대리자, 혹은 알고리즘 독점자로 행세하는 것을 모두 묵인한다면 모를까, 인류 전체가 그 따위를 믿으리라 기대하지 마시라.” 라며 득의에 차 자신의 지성만으로 AI 따위가 도덕적 일탈을 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는 작금의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의 급진적으로 추진되는 AI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nbsp;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역사적 선례를 강조함으로써 AI의 새로운 기술적 역량과 실존적 위험을 과거의 경험 속에 흡수해버리고, 도덕성을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맥락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윤리 원칙과 책임의 기준을 약화시켜 버리고 있으며, AI를 둘러싼 인간의 투사와 의인화를 비판하면서 정작 AI를 설계하고 운용하는 주체들의 책임, 그리고 AI 시스템 자체의 행위와 위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아마 설득력 있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한계 일 것이다.<br>*보론(補論)&nbsp;: 웹 킨의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지니는 한계&nbsp;<br>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AI가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골짜기로 가라앉듯 떨어지며 혐오감"을 보이는 것을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 불렀다. 즉 인간과의 유사성 정도에 따른 호감과 혐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br>아마 웹 킨이 인류학적, 역사학적 관점으로 오늘의 AI 도덕성의 문제를 검토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의 출발점이라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근(近)인간으로서의 인간 친화적 동물이나, 준(準)인간으로서 생명유지장치, 심장박동기 등 인간에 이식되어 하이브리드를 형성하는 기계들, 그리고 귀신이나 종교적 신 등 초(超)인간이라는 인류가 경험해 온 존재들의 선례를 통해 AI의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인간과 닮음, 인간적 인 것들에 대한 경험적 논리를 그대로 AI문제에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AI는 이들과 다르다. 오늘날 AI에 대한 윤리적 경각심은 인간과 닮았다고 해서 야기되는 것만이 아니다. 즉 AI에 대한 윤리적 문제는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제기되는 우려이다. &nbsp;  그것은 AI 시스템 자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nbsp;&nbsp;AI의 의식 소유 여부라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주체성에 따라 야기되는 문제, 그리고 AI의 행위에 대한 책임 주체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웹 킨은 ‘인간과 닮은’이라는 ‘도덕적 행위 주체성’의&nbsp;측면에 매몰됨으로써 AI 윤리에 대한 나머지 문제점들을 간과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이 저술의 주요한 논증의 한계일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473/78/cover150/k6221319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473780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질이 좋다‘는 객관적 진리 표현일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77122</link><pubDate>Sat, 17 Oct 2026 15: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7712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500&TPaperId=1757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48/52/coveroff/893746450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7744&TPaperId=1757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9/35/coveroff/k28213774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0108&TPaperId=1757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09/86/coveroff/893202010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400077605&TPaperId=1757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7/39/coveroff/140007760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141189371&TPaperId=1757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59/coveroff/0141189371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사유와 진술에서 질(質)이란 무엇인가?  &nbsp;  우리는 무심코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을 투사하고는 마치 그 대상의 본질자체를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양 말하고는 한다. 때문에 ‘이 사람은 질이 좋다.’라든가, ‘이 천은 질이 나쁘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그 말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  ‘질(質)’이라는 것이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리되어 독립된 정의를 지니는 자의적 판단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만일 질이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판단가치에 따른 구분이라면 그 말은 단지 말하는 자의 내면 투사에 불과할 뿐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질을 주관적 표현이라고 보편성의 가치를 그저 폄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nbsp;  1. 사회적 가치 판단으로서 질(質)이란 대체 무엇인가?  &nbsp;  왜냐하면 이 문제는 몇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어떤 대상이 지닌 특성이나 성질이라는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서의 질’이 있고, 그 대상이 어떤 기준에서 더 낫거나 우수하다는 판단인 ‘평가로서의 질’이 있으며, 그 대상이 추구할 만한 가치나 목적 적합성 여부에 관한 판단인 ‘가치로서의 질’로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두 개의 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튼튼하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다. 어느 의자가 질이 좋은가? 내구성 기준으로는 전자가, 예술적 감상이나 실내공간의 미적 조화 측면에서는 후자가 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즉 내구성이나 미적 속성이 곧바로 종합적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을 판정하려면 대상의 속성뿐 아니라 그 속성을 평가하는 목적과 기준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질을 단순히 대상 안에 들어 있는 독립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대상의 속성, 평가 목적, 판단 기준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야 비로소 어느 만큼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에서 이러한 살핌을 등한시하고는 대상을 마구 재단하고 판단하곤 한다.  &nbsp;  <br>질이 대상 자체에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만 발견하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말 할 것이다. 이와 달리 질은 대상과 분리된 외부의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의적인,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서 세 가지 층위를 언급했듯 실제로 질은 이처럼 무 자르듯 단순한 관계가 아닌 복잡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질’이라고 말할 때 질은 내구성, 정확도, 안전성, 처리 속도와 같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무엇을 위해 이용(사용)하는 가에 따라 중요성을 달리하는 ‘목적과 맥락’의 측면에서 말하기도 하며, 효율성, 공정성, 아름다움, 지속 가능성 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와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른 평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빠른 자동차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의자가 항상 가치 우선을 갖는 것도 아니듯 말이다.  &nbsp;  결국 측정의 객관성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대상의 모든 특성을 종합하여 좋은 질을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의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칼은 잘 자르는 칼이고, 좋은 연주자는 연주라는 활동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질은 대상을 목적과 기능에 대한 적합성으로만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삶처럼 목적 자체가 논쟁적인 대상에게는 대체 무엇이 탁월성인지를 다시 물어야하는 극히 지엽적인 설명에 머물고 만다. 칸트는 판단을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나 규칙을 제시하기 어렵다며, 보편적 동의를 요구하는 판단일지언정 객관적 측정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라며 미적 판단의 보편성 문제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라 해서 이보다 나은 설명을 한 것은 아닌데, 대상을 오직 성능(능력)과 유용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모든 대상을 어떤 공통된 척도로 비교하려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 제기한 질문, 대상과 분리된 질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을 때가 되었다.  &nbsp;  질이 대상과 분리된 독립된 실체라면 우리는 그 질이 무엇인지 대상과 무관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음, 우수함, 탁월함과 같은 말은 대개 무엇이 좋은지, 어떤 점에서 우수한지, 무엇을 위해 탁월한지 물을 때에만 비로소 구체적 의미를 얻는데 불과하다. 그럼 질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일까? 질은 개별적 속성을 넘어 여러 속성을 종합하고, 그것을 목적이나 가치에 비추어 평가하는 개념이라 이해 할 수 있다. 일례로, ‘좋은 소설’이라는 판단은 문장의 아름다움, 서사의 완결성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는 힘,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정도 등 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차원이 관여하는 것이다. 이들을 정리하면 질을 이렇게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질이란 대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우수성의 실체라기보다, 대상이 지닌 여러 특성이 특정한 목적과 가치의 지평에서 평가되고 서로 비교되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이다.  &nbsp;  2. 질 판단 기준이 대상의 전체 특성이 되는 기이한 역설  &nbsp;  이제 본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의 질은 흔히 점수, 순위(서열), 지표, 인증, 생산성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단은 복잡한 대상을 비교하기 쉽게 해주지만 동시에 매우 큰 위험을 갖는다. 측정 할 수 있는 특성이 질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질을 취업률과 논문 수로, 노동의 질을 생산량으로, 예술의 질을 관객 수와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이 지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지표가 평가의 일부로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전체로 규정하며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질은 더 이상 대상에 관해 질문하는 개념이 아니라, 대상을 특정한 질서에 편입시키는 규범으로 작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는 그의 자전적 저술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몬태나주립대학 영문과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과장이 그에게 “선생께서 학생들에게 질을 교육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그 요구이다.  &nbsp;  우리는 대상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곧 질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기준에 포착되지 않는 대상의 특성을 질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문학 학과장은 피어시그에게 질을 교육하라고, 규범, 즉 정해진 속성이 곧 본질이니 그것을 엄수하고 그 외의 것은 배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측정하고 관리 가능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이 측정, 관리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표준화가 부당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나 안전처럼 공통 기준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적에 유용한 기준을 모든 대상과 가치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질인가를 묻기 전에 왜 그것에 질이라는 판단을 갖다 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nbsp;  어떤 기준이 대상의 특성을 잘 측정하는가와 그 기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는 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질을 판단하는 권한과 기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질을 정의하는 작업은 나음(우수성)의 속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특성, 평가의 목적, 가치의 위계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때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질을 ‘더 나은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나음은 질과 별도로 정의 될 수 있는가? 만일 나음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질적 기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끝도 없이 정의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시그는 질에 대한 이 물음의 상자에 갇혀 끝없이 맴돈다. 여기 그 문장을 인용해 둔다.  &nbsp;  "질을 함유하고 있는 대상과 분리해서 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만다,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모든 실용적 용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실용적 용도를 위해 그것은 정말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달리 무엇에 근거하여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분명히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보다 낫다....하지만 낫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5장, p332  &nbsp;  이 인용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이미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그리고 질을 가치판단으로 설명하려면 그 가치판단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하므로 질(質)의 본질은 끝없이 유예된다. 가 될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질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독립적 본질을 지시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러한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능하는 언어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그렇다면 질은 대상을 기술(記述)하는 말인가, 대상을 평가하는 말인가?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lt;이 천은 부드럽다 → 이 천은 내구성이 높다 → 이 천은 질이 좋다&gt; 촉각 특성에서 시험 비교할 수 있는 특성으로,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선 특징들을 종합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가치를 포함할 수도 있는 특정 가치의 관점에서 종합하고 승인하는 표현이다.   &nbsp;  여기서 질은 기술적 개념에서 평가적 개념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질이 좋다’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 반드시 그 평가의 근거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 이상의 의미를 주장하는 듯하다. 마치 대상 자체에 좋은 질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곳을 짚는다. 질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질에 관한 판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적 역전 현상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상에서 질을 발견했다고 말 할 때 실제로는 이미 어떤 기준에 따라 대상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고, 그 평가의 결과를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놓는 순간 평가의 기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nbsp;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사회가 노동의 질을 성실성, 생산성, 효율성으로 평가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노동의 질이란 본래 그러한 속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왜 성실성과 생산성이 좋은 노동의 기준이 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노동을 조직하는 경제체제의 필요가 그러한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이 노동의 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일 수 있다. 문제는 이 특정한 가치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지워버리고 그 가치를 대상의 자연적 본질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질이 좋다는 표현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특정한 가치 체계를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언어가 된다.  &nbsp;  여기서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질이 대상에 내재한 본질이라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모순이다. 반대로 질이 평가 기준에 의해 구성된다면 왜 그 기준을 대상 자체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질의 본질이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을 찾는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lt;‘좋은 소설’, ‘좋은 칼’, ‘좋은 교사’, ‘좋은 사회’&gt;, 이 네 가지에서 ‘좋음’은 동일한 속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좋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런데 각각의 맥락에서 적절성, 목적의 성취, 가치 있는 결과들을 판단한다는 유사성이 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적 실천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nbsp;  피어시그는 질의 본질을 사유하는 가운데 오리무중에 빠져 끝없이 순환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피어시그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그가 애초에 서로 다른 평가의 맥락을 관통하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고 질을 가정한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질을 정의하기 위해 더 근본적인 질을 찾아가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수행하는지 살펴보지 못했던 까닭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질은 “본질을 가치 대상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판단을 조직하는 언어적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질을 단지 언어의 사용이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nbsp;  3. 질은 객관주의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주의 언어인가?  &nbsp;  우리는 어떤 대상의 질을 평가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가치나 취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당 대상의 물리적, 생물학적 조건과 인간의 경우 생명이라는 가치가 판단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에 관해 판단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상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라는 대상의 실제 특성, 그리고 어떤 성질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평가의 기준, 마지막으로 왜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판단의 정당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적용하면 질의 문제를 전적으로 객관주의나 상대주의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종합하면 질은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실체도 아니고 순전히 주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질에 대한 판단은 대상의 특성과 평가 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nbsp;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앞서 제기한 문제를 재구성해보자. 우리는 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상에 가치판단을 부여하곤 한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을 정당화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정당화하려면 다시 그 기준이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정당화하려면 또 다른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순환 논리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질은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지 못하는 개념처럼 보인다. 만일 이 말이 진실이라면 질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독립적인 본질을 가리키지 않으며, 평가와 정당화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질을 계속 찾아가는 작업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nbsp;  질의 본질을 찾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어떤 가치를 승인하고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지, 그 기준은 누구에게 유리하며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으로 물음의 본질을 바꿔놓는다. 질의 정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애초의 물음인 ‘질이 좋다’고 말 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포함될 수 있음을 간과했던 실수도 있다. 대상에는 실제로 더 우수하게 만드는 어떤 성질(능력)이 있다는 ‘존재론적 주장’과 특정한 목적과 가치에 비추어 그 대상을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려는 ‘규범적 주장’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혼란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이 둘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다보니 전혀 다른 주장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다. 규범적 판단을 마치 존재론적 사실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거나 감추고 있는지를 은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혼용 때문이거나, 이에대한 식별 불능의 무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nbsp;  피어시그는 질이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에 저항한다. 그는 가치판단의 정당성을 얻는 조건 자체로서 질을 묻는 것인데, 가치 우선순위가 들어있는 질이 좋다는 판단에서 가치 선택과정이 생략되었을 경우, 부여한 우수성이 마치 대상 안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객관적 속성인 듯 보이는 그 판단 전체에 의심을 가졌던 까닭이다. 존재론과 규범의 혼용 문제는 근대 사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효율성이나 성과, 피어시그의 말을 빌면 합리적 이성의 가면을 쓴 근대 과학적 이성을 객관적 가치 기준으로 내세우는 현상의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과연 가치판단의 객관적 정당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그것이 대체 인간의 정의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계속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nbsp;  ‘질’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취향이 충돌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판단은 언제 사회적 규범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명확하게 분리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하는 것과 그 대상의 좋음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판단은 실제 삶에서 뒤섞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사회적 기준을 거부하는 것 자체를 좋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두 인식은 실제 우리들 사회와 사람들에게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면서 자기 판단을 잃기도 하고, 그 기준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 판단만을 믿고 그 밖의 모든 가치 판단을 부정함으로써 광기로 치닫기도 한다.   &nbsp;  4. 질에 저항하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  &nbsp;  아마 허먼 멜빌이 창조한 인물, 사회적 가치에 단순한 불복종을 넘어, 타인이 정해놓은 일련의 판단기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이 질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 대표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피어시그는 이 말을 하지 못함으로써 지독한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사회는 질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어떤 행동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유용하고 무용한지,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들 판정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이러한 판정에 논박으로 맞서지 않고 판정의 요구자체를 무력화한다. 피어시그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대상의 질을 판단하는 충분한 근거인가?라고 묻는다. 이다. 물론 바틀비의 거부, 그의 침묵은 저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거부는 해석불가능의 지점에 내려놓는다. 질을 말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짙은 혐오를 암시하면서 말이다.  &nbsp;  이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가치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부의 의지를 보이는 문학작품들은 수두룩하다. &lt;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gt;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의 관습적 요구인 슬픔을 표현하지 않거나, 재판을 받으면서도 법정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뫼르소처럼. 그는 사회가 특정한 상황에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을 자연스레 수행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그의 행동 뿐 아니라 인격 전체를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 인간 사회의 논리적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판단하는 우리들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후회하는가? 그리고는 이 판단을 통해 그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인격에 대한 판단을 하고, 마침내 이 판단을 근거로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끌어들인다. 규범적 측면을 끌어들여 그 사실만으로 인간 존재 전체나 도덕적 성격을 확정하려는 것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질의 광범위한 무법지대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님을 뫼르소에게서 발견한다. 여기에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배제된 그레고르 잠자도 한 예로 추가해도 될 것이다.  &nbsp;  이들 문학 작품 속 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그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곤경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학들로 이 세계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질의 문제는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요청하는 중대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가 치르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써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어시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지식과 판단의 틀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자신의 사유와 사회적 삶 사이의 간극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급기야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실존철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R. D. 랭은 『분열된 자아; 정상성의 세계에서 자아가 입는 상처((The Divided Self)』,(1960)에서 이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세계가 외부의 정상성 기준에 비추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랭은 한 인간이 자기 경험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및 공동의 세계를 유지해야한다면 그 사이의 긴장은 감당키 어려운 것임을 시사한다.  &nbsp;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면, 그 인정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과 개인의 내적 경험 사이의 균열을 이해하려는 랭의 관점은 질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으로 예리하게 관찰토록 해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교정(Correction)』 (1975)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로이타머는 건축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인물로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원뿔형 건축물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현실 속의 타인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수록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를 추구하는 그의 사유자체가 그를 압박한다. 피어시그는 질에 관한 문제를 기존의 철학적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데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지만, 로이타머는 생각하는 질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유가 사회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들의 파국이 반드시 진실 추구의 대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nbsp;  5. 맺음말 : 질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다!  &nbsp;  피어시그는 말한다.  “Those are society’s standards, they aren’t my standards.” 그것들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라는 이 말은 사회기준을 거부하는 개인의 독립선언처럼 읽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은 자로서 그보다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아픈 감각의 표현에 가까움을 안다. 우리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때론 강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때론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융화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질과 실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질 사이에서 그 관계를 물으며 충돌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깊은 내상을 입어 혹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상이 결코 나쁜 질인 것은 아니다.   &nbsp;  이제 맺어야 할 것 같다. 질이 사회적 합의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질을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질을 지키면서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피어시그를 비롯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어떻게 끝까지 추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완벽한 질서와 판단의 확실성은 결코 견고한 본래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 때론 파괴되기도 하지만, 그 가치 판단의 확실성이라는 질 또한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로 그 질을 대체하기도 한다. 대상에 그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을 주장할 때 인간 세계는 대단한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대상이 가치판단을 양적으로 넘어설 때 그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때의 진통은 곤혹스러운 혼란이겠지만, 그를 이겨내면 그 변화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수시로 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질은 절대적 속성의 언어가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여기에 절대적 진실의 의미를 씌워놓으면 독단과 폭력이 자라난다. 사회적 합의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질은 이러한 임시 합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59/cover150/014118937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87593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덧없음 , 사라짐이 가치를 만든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61126</link><pubDate>Thu, 08 Oct 2026 17: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6112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039341&TPaperId=175611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71/75/coveroff/k94203934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621&TPaperId=175611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3/86/coveroff/893292062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131705&TPaperId=175611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85/76/coveroff/k3321317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덧없음 ;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 사라짐이 가치를 만든다!  &nbsp;“무상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희소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nbsp;  프로이트의 덜 알려진 에세이 한 편에 눈이 멈추었다. 유한성에 대한 애도와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한 찌르르한 공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짧은 글은 1차 대전(1914년)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어느 여름날 한 젊은 시인과 아름다운 자연 속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시인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추정되는데,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던 시인은 돌연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것이라며 아름다움을 충분히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가기에 가치도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nbsp;<br>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견해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사물의 덧없음은 반박할 길 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들이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위의 인용문장이 출현한다. 향유(享有)의 가능성에 어떤 한계가 있기에 향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영원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하룻밤만 봉오리를 피우는 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듯, 인간이나 예술작품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경험된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을수록 그 경험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는 것이다.  &nbsp;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덧없음, 무상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시인의 비관이 단순한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정서적 반응이라고 판단한다. 아름다운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미래의 상실을 미리 경험하게 만들고, 아직 잃지 않았는데도 이미 애도의 예감이라는 정서상의 강력한 요인이 판단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이 정서적 요인은 마음속에 솟아난 덧없는 슬픔에 대한 반발, 즉 사라질 아름다움의 향유가 그 덧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방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상함(허무함)을 떠올리면 현재의 아름다움조차 즐기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애도에 대한 반항(revolt against mourning)’이라고 부른다.   &nbsp;  때문에 우리들은 절정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비극이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조건이기에 상실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결국 그 상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라질 것이므로 슬프지만, 또한 사라질 것이므로 소중하다. 결국 죽음과 소멸을 부정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를 인정한 뒤,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즉 무상함은 가치의 파괴가 아니라 가치의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내내 껴안아야할 유한성, 아름다움, 상실의 의미를 매우 압축적으로 위로하는 인간의 생에 대한 애도론인 것이다.  &nbsp;  이 지점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찬양했던 징그러운 불멸성을 떠들던 작가가 떠오른다. 아름다움, 절정의 순간을 끊임없이 현재화함으로써 마치 덧없음을 부정하려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탐욕적 불모성에는 프로이트의 숙명에 대한 승인도 없고, 그 승인을 통한 승화도 없다.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지 못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하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이 난데없이 왜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다. 잠시 다른 길로 들어섰다. 다시 제자리로.  &nbsp;  이러한 연상에 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가족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로 환원한다고, 또한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며 욕망은 생산이라고, 애초부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던 들뢰즈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섰다. 들뢰즈의 생산기계로서의 인간의 이해는 유한성을 부정하고, 급기야 의도치 못했겠지만 오늘의 기계주의 세계의 문을 합리화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나는 상실에 대한 불안, 사라지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붙들려는 인간의 그 여리고 애처로운 모습이 좋다. 그래서 그 유한성이라는 시간 속에서만 빛나는 소중한 것들의 소멸에 슬픔의 정서를 느끼는 인간이 좋다. 인간의 무수한 취약성의 본질 인식 기반위에서 그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좋다. 인간을 미화하거나 인간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마치 인간본성이 선험적 도덕성을 지녔다고 비반성적 인간을 양산하는 가치에 반대한다.<br>  사라짐의 애도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들은 더욱 동료 인간들에 대한 보다 따뜻한 시선을 지닐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원성보다 유한성의 가치를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가치로 보는 프로이트의 이 에세이는 내 정서의 근간에 대한 지지의 글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 에세이는 1915년 집필되어 1916년 발표된 글이다. 훗날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으로 이어진 상실과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가 응축된 중요한 글이다. 이 글은 국내 열린책들이 출간한 프로이트 전집 14권인 『예술, 문학, 정신분석』,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333~339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프로이트의 이 산문을 표제로 한 신간이 눈에 띤다. 그 책과 이 단상은 아무 상관이 없는 우연의 동시성일 뿐이다. 우리들은 사라짐으로써 아름답다. 소멸은 항상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아등바등하지 말자. 살아온 인생이 추해지기만 할 뿐이다. 허무함, 무상함은 우리의 소중한 정서임을 인정하면 이 세상은 무한하게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br>   <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3/86/cover150/89329206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453869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오이디푸스와 햄릿 : 유년의 소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55999</link><pubDate>Mon, 05 Oct 2026 20: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5599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559&TPaperId=175559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1/20/coveroff/893292055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213&TPaperId=175559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82/coveroff/899129021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724&TPaperId=175559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78/76/coveroff/8932403724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033&TPaperId=175559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80/coveroff/s96293223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524&TPaperId=175559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1/22/coveroff/8932920524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55999'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꿈은 (억제된,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 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28, 교양인 刊, 『꿈의 해석』 재인용  &nbsp;  “꿈은 전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이기적 자아가 모든 꿈에 등장한다.&nbsp;꿈에서 성취되는 소원은 한결같이 이 자아의 소원이다.“&nbsp;- P367, 『꿈의 해석』, 열린책들 刊  &nbsp;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국내 출간 문헌들을 전반적으로 재독하는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불러일으킨 동기에 숨어있는 내 무의식을 탐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도록 나를 이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문화사가(文化史家) 피터 게이가 쓴 『프로이트』평전을 읽고 난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토대로 발표한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부터 읽어나가고 있다. 사실 세간에 자신의 무의식, 즉 그 원시적 욕망을 들여다보려 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의 무책임한 배설로 인한 소음을 떨어내려는 동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글에 내 시선이 멈췄다. 이 글은 그러한 충동에서 긁적이게 된 짧은 단상이다.  &nbsp;  <br>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인간 개체의 본질적 동력인 유전자의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반항하여 행동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강조했듯,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성하는 여러 이론들 중, ‘무의식에 남아있는 유아적 근친상간 경향’의 통찰 또한 우리 인간 정신의 심층의 욕구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덕적, 문명적 이해를 진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제안이라 해도 될 것이다.   &nbsp;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이 책을 겸손하게 『해몽(解夢)』이라 부르곤 했지만, 그의 겸허한 표현과 달리 이 책은 엄연히 정신분석학을 정초(定礎)하는 최초의 연구문헌이라는 측면에서 『꿈의 해석』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느긋하게 다시 읽는 즐거움은 예사로이 지나쳤던 문장 속에서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일 게다. “Ⅴ章 「꿈-재료와 꿈-출처」, 4節 〈전형적인 꿈들〉, (2)項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은 우리들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꾸는 꿈들을 분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특히 주목된 이유는 책이 출간되자 가장 격렬한 항변, 분노에 찬 반대와 비판을 불러온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내게 새롭게 발견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nbsp;  자라면서 우리들은 가까운 친척들의 죽음과 더불어 부모나 형제자매들로부터 그들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 자신도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의 내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하나는 꿈속에서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아 깨어난 후 자신의 무정함에 놀라고 의아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몹시 비통해 하며 잠자는 동안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꿈이다. 즉 소중한 이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거나 비통해하는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인데, 이 두 유형은 그 해석에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의미한다. 전자는 모종의 다른 소원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것이고, 후자는 관계된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nbsp;  아버지의 죽음이 꿈에 나타났고 이를 몹시 비통해하며 우는 꿈을 꾼 후자의 얘기를 해보자. 이러한 꿈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꿈일 때도 있고, 생존해 계신 아버지가 죽는 꿈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꿈은 그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발끈할 것이다. 친부(親父)의 죽음을 소망하는 무슨 되먹지 못한, 불효막심한 작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여 무의식으로 침전된 것이다. 이 억압을 뚫고 꿈을 통해 유아기건 아동기건 어떤 시절에 그러한 소원을 가졌기에 도덕적 금기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속에 묻혀있던 것일 뿐이다. 다만 꿈을 통해 일상적 삶의 행위 속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nbsp;  꿈은 이렇게 우리들이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 현실 속에서 부모의 죽음을 소망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은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소망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할 때에만 더없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행위 할 수 있다. 아마 인류문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문헌들은 이처럼 우리의 적나라한 본질을 일깨움으로써 이를 극복한 진전된 도덕적인 인간의 지향을 요구하는 것이다.  &nbsp;  우리는 아동기라는 시기에 철저하게 어린 이기주의자 안에서 이타적 움직임과 도덕이 깨어나고 이차적(성숙한) 자아가 일차적(원시적) 자아를 뒤덮고 방해(억압)함으로써 문명화된 도덕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도덕성 발달이 모든 인간에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 성장을 파악하는 일을 우리는 하지 않지만 많은 인간에게서 이 도덕성 발달이 지체되거나 정체된 상태로 어른이 되는 도덕적 퇴행에 머문 인간들이 매우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겉으로는 동일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적 도덕성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에 들끓는 혐오와 저주와 악의의 언어들과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횡행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잠깐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다시 친부 살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소망하는가의 문제를 계속해보기로 하자.  &nbsp;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아주 많다.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거세하고 스스로 지배자가 되어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는 제우스 이야기는 그리스신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약삭빠른 문인들은 부자간의 투쟁을 중심으로 작품을 쓰면 성공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순전히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일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 고대신화를 변주해 작가의 의지를 삽입한 탁월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이 비극을 운명(신)의 절대적 의지와 파멸에 직면한 인간의 헛된 반항 사이의 대립에 근거한 비극, 즉 인간 자신들의 무지와 무력함을 깨닫고 불가해한 운명의 뜻에 복종하는 법을 설파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프로이트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오늘 우리들 현대인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이러한 절대적 운명의 의지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실패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목소리가 운명이 강요하는 힘을 인정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존재, 그럴만한 계기가 내포되어 있음의 어렴풋한 수긍의 당혹스러움이라는 것이다.  &nbsp;  <br>나는 솔직히 이 비극을 읽고 대체 무엇에 감동했었는가? 무엇으로부터 비극적 감정에 전율했었는가? 오이디푸스에 닥친 일이 우리의 운명이 될 수도 있음에 대한 공감, 즉 우리 모두 어머니에게 최초의 성적 자극을, 아버지에게 최초의 증오심과 폭력적 희망을 품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저주에 대한 이해의 주장에 동의할지 망설인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꿈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설득한다고 쓰고 있다. 즉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우리 어린 시절의 소원 성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와 달리 성적 자극을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유년기의 원시적 소원을 성취한 인물 앞에서 마음속의 소원을 억압한 만큼 경악한다는 것이다. 이 비극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바로 이 경악이라는 것이다.  &nbsp;  하지만 “우리들도 오이디푸스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강요한 소원, 도덕을 모욕하는 소원의 존재를 모르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소원이 폭로되면 우리는 모두 유년 시절의 사건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그 외면에 진실이 있다. 인정할 때에 세상과 우리 인간은 도덕적으로 건강해진다. 부정하고 외면할 때 세상은 지체발달상태, 문명적 퇴행의 양상을 보인다. 마치 지금의 무책임하고 비논리적 정쟁의 담론들이 설쳐대는 세상처럼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비극인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말하는데, 수많은 비평들은 햄릿의 우유부단, 즉 부왕(父王)의 복수를 결행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불분명한 성격에 대한 오류의 지적이지만 프로이트는 결단력 있는 행동가 햄릿을 말한다.&nbsp;왜 나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작품을 주의 깊게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햄릿의 망설임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떤 무의식의 방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nbsp;  우리는 왜 『햄릿』의 이야기에 압도되는가? 고작 사고 활동의 지나친 발달 때문에 행동력이 마비된 신경쇠약증의 범주에 드는 병적일 정도의 우유부단한 한 인물의 성격에 매혹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햄릿이 행위를 할 수 없는, 결코 우유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에 휩싸여 벽 뒤에서 엿듣는 염탐꾼을 칼로 찌르고, 그를 죽이려는 두 명의 신하를 특유의 단호함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장면처럼 매우 결단력 있으며, 게다가 계획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부왕의 혼백이 맡긴 임무를 왜 실행하지 못하는가? 대체 무엇이 그의 실행을 가로막는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여기서 다시금 어린 시절의 아버지 살해라는 억압된 소원의 성취를 꺼내든다. 즉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이라는 남자가 이미 햄릿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켰기에 징벌해야 하는 죄인보다 자신이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꾸짖는 양심의 가책이 복수를 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햄릿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nbsp;  우리들은 의식의 수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억압된 금기들, 어두운 욕망들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모든 꿈은 소원성취이다”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우리들 무의식의 이기심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독보적인 꿈의 해석은 우리 자신들의 원시적 욕망,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운 창구가 되어준다. 이 통찰은 우리들의 종교와 도덕 발전 및 인류사의 이해에 중대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말끔하게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저 혼자 도덕군자이고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윤리적 무결점의 인간이라고 교만을 떨어대는 인간들이 지천이다. 수없이 은폐된 자신의 이기적 소망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조금은 더 이타적 인간이 될 수 있을 터이다. 햄릿은 신경증환자이다. 어린아이의 소원의 망상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폭로하고 현실화하는 데 이르지 못한 인간의 한 유형 아니겠는가.   &nbsp;  햄릿처럼 살지 말자. 햄릿들이 우리 세계에 너무 많다. 도덕적 지체장애자들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꿈-해석의 기초를 놓아 정신분석의 초석, 나아가 심리학을 정초하고자 한 야심의 저작이기도 하지만,  2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자기 분석의 일부,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결정적 상실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프로이트 자신) 반응”이기도 하다. 아마 이 관점에서 이 저술을 읽게 되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아니 우리들이 읽어내지 못했던 숨겨진 의미들이 무수하게 떠올라 타인과 세계와 우리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한층 성숙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류를 등지고 나만의 세계를 위한 독서를 느릿하게 하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말들, 한 인간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게도 된다. 나는 프로이트의 이 저작을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한 편의 잘 써진 휴먼드라마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이처럼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nbsp;  “모든 꿈의 바닥에는 유아적인 동시에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아마도 외설적이라 부를 소망이 깔려 있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장했다.”&nbsp;-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40, 교양인 刊<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03/2/cover150/8991799655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03025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수치심의 멸종 - 담론 비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39503</link><pubDate>Sun, 27 Sep 2026 15: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3950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35665X&TPaperId=175395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1108/47/coveroff/896735665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030515&TPaperId=175395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45/2/coveroff/k55203051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866171420&TPaperId=175395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353/75/coveroff/386617142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938658&TPaperId=175395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16/75/coveroff/k30293865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70498&TPaperId=175395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4/41/coveroff/895277049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39503'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br>“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유지되지만, 그 바탕에는 ‘이래도 되는가?’라는 자기검열의 감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결과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nbsp;- 이철우, 『수치심 잃은 사회』 P99  &nbsp;  “‘수치심 상실’에는 사무친 수치심의 느낌이 선행한다. 수치심 상실은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다. (...) 지독한 모욕, 자신의 자율성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목숨 건 뒤집기를 통해서 모욕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즉 모욕을 오만한 자만을 통해서 방어한다. (이 때)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느낀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구겨진 자존감이 수치심 상실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다.”&nbsp;&nbsp;-&nbsp;한병철,  『존중 없는 사회』 P92  &nbsp;한 사회를 극심한 분열과 혐오의 정치 장(場)으로 내몰고 있는 책임 없는 한 인간의 외설(猥褻)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독설의 파장을 지켜보다 몇 글자 적어둔다. 위에 인용한 두 학자의 글은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쓰는 정치담론의 실체를 적확하게 묘사한, 아니 그러한 냉소적 저주를 배설하는 자들의 악의의 실체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이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가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며, 또한 프랑스 정치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말한 “전통적으로 윤리의 기둥으로, 연대의 표식으로 작동해 온 감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에서 이 단어는 오로지 타자에 대한 잔인한 악의로써 멸시와 존재 부정을 강요하는 오염되고 얼룩진, 회복될 수 없는 부정적 폭력의 언어로만 사용되고 있다. 조리돌림하고 따돌림하여 배척, 매장시키려는 악의로서만 말이다.  &nbsp;   <br>혐오와 조롱, 멸시는 평등한 정치적 존중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언어가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 얼마나 철저히 비이성적 과정을 거치는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왔으며, 지켜보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과 결합하여 세계와 사회를 의도적으로 분할하는 근본악이 기승을 부리는 해로운 사회에 직면해 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대체로 이러한 조롱과 저주의 말들에는 언어 논리적으로 배설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가 일쑤고, 설혹 검증 대상이 있을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날조된 거짓의 사실이 대부분이다. 검증 불가능한 진술은 의미가 없는 헛소리이고, 하나마나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배설한 자의 감정적 악의 이외에는 없는 자기감정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이 사회에 거침없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nbsp;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지적했듯, “타자에 대한 존중이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됨으로써 타자 경멸을 양산하는 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존중에 기초하는 우정의 정치학으로서 공존의 비전을 상실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분열과 저주의 악의(惡意)를 뱉어내는 인간을 묘사한 『유해 인간(Gente toxica)』 (2013)의 작가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Bernardo Stamateas)의 말은 그 인간에 대한 이해측면에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자의 성취를 방해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권위와 언어폭력, 거짓말과 험담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무심하게 저지르는 인간은 흔히 타자에게 끊임없이 훈계하려 들고, 노이로제적 예민함을 발산하며,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신의 자존감만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nbsp;   <br>사회적으로 유해한 인간에 대한 이 정의에서 보듯 근원적 수치심은 자존감의 상실이나 인정받지 못한 데서 유래하는데, 종종 원한과 공격성으로 변환된다. 그래서 수치심, 모욕, 공격성은 서로에 대한 조건이 되고, 해당 인간이 배설하는 언어나 행위 폭력은 자신의 수치심을 거부하고 동시에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 할 수 있다. 담론가로 행세해 온 한 저열한 인간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정책이나 인사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없다’며 분노를 표현했다. 이 인간은 자신의 비대해진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레온 부름저(Leon Wurmser)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작동양태를 그의 위대한 저술 『수치심의 가면』 (1997)에 “수치심이 억압되거나 왜곡될 때 오만, 경멸, 냉소 같은 방어기제로 전환된다. 고 썼다. 결국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개인적 방어기제는 냉소주의로 표현된다. 한 유해한 인간의 악의적 배설의 언어들이 왜 저러한 형태를 띠는 것인지에 대한 근접한 정의라 할 것이다.  &nbsp;   <br>수치심의 상실, 부끄러움을 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갈등의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급기야 사회 해체를 초래하는 매우 나쁜 상황을 낳는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존중의 능력도 없는데, 수치심이란 어떤 상위의 사회적 질서에 존중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인 까닭이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이 그의 문학작품에서 일관되게 천착한 “얼굴을 붉히는 곳에서 더 고상한 자아가 시작된다.”며,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이며, 그것은 존중을 명령하는 어떤 상위 가치체계의 전제라고 말한 것에 대한 상실이자 배제이기 때문이다.   &nbsp;  전통적으로 수치심이라는 이 도덕적 감정은 손상된 명예를 의식하며 어떤 정화(淨化) 또는 속죄 의식을 통해 사회에 다시금 복귀 통합된다. 이와 달리 오늘의 수치심 문화는 타자를 파렴치할 정도로 모욕주고, 처벌하고 말살하려 한다. 수치심 상실을 냉소주의라는 방어기제의 가면을 쓴 인간은 자기 이상의 붕괴를 사회의 상위 질서의 파괴, 즉 무례함과 무존중(無尊重), 무경외(無敬畏)의 저열하고 파렴치한 세상으로 퇴행시킨다. 따라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이상과 다른 모든 가치와 이상에 대해 냉소적 경멸을 배설한다. 그것은 과잉의 자아가 선택한 암울한 자기 저주이다.   &nbsp;   <br>이 저주받은 유해한 인간은 즉시 대상을 적대하며 조리돌림 등 동원할 모든 린치를 가하려고 하며, 상대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나아가 사회구조 해체라는 문명적 퇴행을 초래한다.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타자의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조소와 조롱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 것과 적확하게 일치한다. 즉 수치심 상실에는 수치심 느낌이 선행하며, 그렇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 된다. 연일 저 악의와 저주를 배설하는 의미없는 감정의 언어로 가득한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구겨진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때문에 그 배설구(排泄口)에서는 원색적 비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nbsp;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바로 소수 기득권자라로 자임하는 인간무리들의 해체에 거칠고 극악하게 훼방하고 조롱하며 저주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정치적 조롱과 저주의 폭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속하지 않은 집단을 분리하면서 외부 집단을 향한 부정적 평가에 기초하여 난데없는 편견을 통해 극심한 차별의지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들을 주변화(周邊花)하여 부정적 감정을 들씌우는 것이 곧 차별이다. 이렇게 집단 분열의지에 사로잡힌 인간은 인식 범위가 극히 협소해지고 이윽고 인식불모지대에 빠져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수치심, 도덕심과 같은 정신적 제방을 쌓고,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성취능력을 발달시킨 인간의 본질에는 고착된 충동과 승화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수치심과 관련한 상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nbsp;   <br>『수치심 잃은 사회』에서 이철우 박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감정이며,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은 관계의 감정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작동시키는 윤리적 신호다. 이것을 잃었을 때 인간과 사회가 겪는 것은 지금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 듯 “감정적 해체, 윤리적 무감각,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이다.” 무례함이 솔직함이 되고, 책임 회피가 전략이 된 작금의 정치 담론 양상은 너무도 불온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개인의 존중은 물론 공동체의 안정과 신뢰를 보증하는 권위마저 무시하게 된다. 헌법적 권위마저 무시하려는 권위의 진공상태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이 우글대는 세상은 이 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다. “존중(수치심 갖기)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필수 조건”이라는 한병철 교수의 지적은 신뢰성 상실이라는 병든 오늘의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일깨움을 제공한다.  &nbsp;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을 제발 잃지 말자. 적어도 수치심을 아는 사람은 저 악의적 괴물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분열과 갈등, 사회적 해체만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는 무리들로부터 이 사회, 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도덕적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이다. 이것을 잃을 때 차별과 권력의 탐닉과 독단과 사회적 유대 파괴만이 남는다. 서로 존중하는 사회,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정치적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저 표독스러운 오만과 경멸, 냉소의 저주의 말아닌 말들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인 까닭이다.   &nbsp;   <br>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적 변동으로 인한 이상의 상실을 부끄러움의 상실이라는 가면으로 가리지 말자. 그것은 정말 나쁜 근본악이자 사회악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전락시키는 사악함은 수치심의 상실에서 출현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이처럼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가 왜곡된 인간 감정들인 혐오와 조롱, 분노, 배제와 분리, 그리고 폭력으로 진행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증오와 멸시, 외면의 감정에 도사린 정치 행위의 편재, 그 왜곡과 불온함의 근저는 어떤 특정 개인에 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칸트가 지적했듯 수치심 상실은 “어떤 사회구조보다 인간 존재에 깊이 내재한 악행의 뿌리”라고, 그것은 타인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려는 성향인 근본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말했다. 낙인과 배제, 저주의 악담은 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우리들은 존중의 언어를 어느 샌가 잃어버렸다.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들(진상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를 우리는 몸서리치지 않는가? 수치심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배설된 언어가 귀중한 공동체의 에너지를 쓸모없이 낭비케 하는 작태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안타까움이 여기서 그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런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17/10/cover150/89975337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17105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이기적 유전자(50주년 기념판), 유전자 독재와 인간의 반역 - [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25723</link><pubDate>Sat, 19 Sep 2026 16: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257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500&TPaperId=175257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29/13/coveroff/893247650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500&TPaperId=175257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a><br/>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와 인간의 반역  &nbsp;  “새로운 가속된 진화 양식을 출범시켰다. 바로 비유전적 진화다. (...)&nbsp;삼차 진화 과정일 것이다. 기계 자신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nbsp;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도 떨어져 나갈까?”&nbsp;&nbsp;- P594, 「5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에서  &nbsp;  모든 학문 분과의 연구목적이란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種)의 인간상(像)이 바로 현재의 양태로 존재하는 원인과 그 원인이 야기하는 상태의 진실, 나아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과 우주의 그러함 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자신과 그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과 미래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실체적 유익(有益)일 것이다. 물론 좋은(nice) 무엇에 대한 지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일 모든 인간학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르지 않다면 자연선택의 기준 단위가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라고 선언하는 이 위대한 진화론의 한 관점 또한 인간의 이해와 가능성 높은 인간 미래상의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nbsp;  다시 말해, 단지 진화이론의 한 관점으로 여타 관점을 압도하려는 유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그 세계가 왜 그렇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진실을 추정하고 해석,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인간 개체들과 그 집단이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든다섯 살이 된 노학자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저술이 50년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 어제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그 진실성을 잃고 철회, 폐기되기 일쑤임에도 이 저술은 “당장 사과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다”고, 나아가 앞으로 50년 뒤(2076년)에도 여전히 통용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 &nbsp;  이 저술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3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관심은 아직 인간과 인간사회의 형상 이유와 같은 본질적 사안에 미치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격적 형용이 붙은 유전자 명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V.C 윈-에드워즈의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대립하는 새로운 관점을 알고자 하는 순전히 지식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지금, 이 저술은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현실적 앎의 이해로 읽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시선에 들어 온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반역 가능성의 물음’이 AI로 인한 당면 문제들과 어울려 낯선 긴장을 몰고 왔다.&nbsp;  1. 유전자의 생존 논리&nbsp;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단순히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로만 읽는다면,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의 급진성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데 있다. 개체가 유전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유전자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단위를 유전자라는 복제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이타주의, 협력, 도덕, 문화, 나아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nbsp;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편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사회적 존재들은 서로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익숙한 세계를 뒤집는다. 생명체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여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 훨씬 오래되고 안정적인 어떤 존재, 즉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몸은 유전자가 세대를 넘어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탈것이며, 뇌와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돕도록 형성되어 왔다.&nbsp;  이 주장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가깝다. 도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반드시 개체나 집단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G. C. 윌리엄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 복제될 수 있는 안정된 단위, 즉 유전자를 선택의 핵심 단위로 본다. 복제자는 장수하고, 많이 복제하며, 높은 정확도로 자신을 복제할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완벽한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류가 발생하고 변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완전성이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역사가 아니라, 복제와 오류와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특정한 복제자가 다른 복제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온 역사인 셈이다.&nbsp;  여기에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시선도 달라진다. 몸은 더 이상 생명의 궁극적 주체가 아니다. 몸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며, 유전자는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면서 훨씬 긴 시간 동안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복제자며 우리는 생존기계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생애는 장구한 복제 과정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개체는 탄생하고 늙고 죽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건너뛰며 살아남는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nbsp;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의식적인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우선 심리적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행동의 효과에 관한 개념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은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타적이다. 일벌이 침을 쏘고 죽는 행동이나 포식자를 둥지에서 멀리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새의 행동이 그러하다. 표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이지만, 그 행동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전자의 사본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면 유전자 수준에서는 오히려 이기적인 결과를 낳는다.&nbsp;  이 지점에서 도킨스는 ‘종의 보존’을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처럼 설명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이타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집단선택설은, 그 집단 안에 단 한 명의 배신자가 들어오는 순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동안 그 희생의 혜택을 자신만 취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면, 자연선택은 그 배신자의 형질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이타주의 집단은 내부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잠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이 곧바로 진화의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nbsp;  <br>2. 이타주의와 협력의 역설 : ESS(진화적 안정 전략)&nbsp;  오히려 도킨스가 보여주는 것은 더욱 기묘하다. 이기주의는 때때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 행동이 자신의 유전적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의 놀라운 자기희생도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일벌은 자신의 자식을 직접 남기지 않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겉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적 복제의 지속이 중심에 있다.&nbsp;  그렇다고 도킨스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애쓰자”고 말한다. 생물학적 본성이 곧 윤리적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이 이기적 복제자의 확산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설명과 규범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인간의 과제는 자연적 경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nbsp;  이 점에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개체들이 서로 공격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비용이 따르고, 상대의 반격으로 자신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공격하라. 달아나면 뒤쫓아라. 반격한다면 달아나라”와 같은 조건부 전략이 특정 환경에서는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액설로드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서 등장하는 '팃포탯(Tit for Tat)'은 첫 번째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선행이나 무조건적인 배신과 다르다. 먼저 배신하지 않지만 배신을 용인하지 않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용서한다.&nbsp;  여기서 인간의 도덕은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협력은 반드시 순수한 선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 기대, 반복되는 관계, 상호 보상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때 협력은 이기적인 개체들 사이에서도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도킨스의 세계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기적 복제자의 논리 속에서도 협력과 신뢰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협력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사기꾼과 호구’, ‘갚는 자’의 관계가 보여주듯 이타적 체계는 언제든 착취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적 교육이 필요하다.&nbsp;  3. 밈(Meme)이라는 새로운 복제자&nbsp;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사유가 가장 멀리 나아가는 지점은 문화 전달 단위인 밈(meme)의 등장이다. 유전자만이 유일한 복제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 개념, 사상, 표어, 유행, 예술적 형식과 같은 문화적 단위 역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고 복제된다. 이때 뇌는 밈의 탈것이 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면 밈은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nbsp;  이 발상은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마저 흔든다. 한 인간의 유전자는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의 유전적 흔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흩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이름은 여전히 문화 속에서 복제되고 있다. 『시학』이나 『국가』 역시 그것을 쓴 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만든 복제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nbsp;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두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서 벗어나 밈 기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복제자의 숙주가 된 것인가. 도킨스는 밈 역시 장수, 다산성, 복제 정확도라는 선택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는 또 다른 진화의 장(場)이 된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밈에 의해 배양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적 복제자에게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된다.&nbsp;  4. 확장된 표현형&nbsp;  그리고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이 문제를 더욱 먼 곳까지 밀어붙인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더 이상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몸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이나 새의 둥지처럼 몸 바깥에 만들어진 구조물 역시 특정 유전자의 생존에 기여한다면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기술과 인공지능도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도구라면,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을까?&nbsp;  특히 오늘날처럼 AGI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도킨스의 마지막 질문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적 본성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뇌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이어 문화적 진화가 나타났다면, 이제 실리콘 기반의 인공물이 새로운 진화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비유전적 진화’가 단순한 문화적 은유를 넘어 기술적 현실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nbsp;  5. 결어 : 인간의 반역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선택&nbsp;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도킨스의 사유를 단순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은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사하고, 단기적인 생존 이익과 다른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한 가능성이다. 자연의 역사에서는 이타주의가 언제나 유전자 수준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nbsp;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의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 인간의 몸도 떨어져 나갈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만들어지고 밈 기계로 배양되지만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맞설 힘을 갖고 있다”는 앞선 선언처럼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인간은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유전자를 사유할 수 있고, 밈의 운반자이지만 밈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술의 창조자이면서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질문할 수 있다.&nbsp;  결국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유전자가 이기적인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자기복제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거슬러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몸은 유전자의 탈것일 수 있다. 문화는 밈의 탈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AI 역시 새로운 복제와 진화의 탈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유전자의 독재에서 벗어난 인간이 다시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의식과 선견지명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그 진화의 방향 자체를 질문할 것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고전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명적,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29/13/cover150/893247650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2913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인간에게 고정된 본질이란 없다? - [인간 판박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17851</link><pubDate>Tue, 15 Sep 2026 14: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178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1679&TPaperId=175178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6/5/coveroff/k872131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1679&TPaperId=175178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간 판박이</a><br/>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인간 판박이』는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함께 아베 고보의 1960년대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같이 정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인간이라 믿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지위 등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br>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판박이』는 이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화성인의 지구 침투’라는 본격적 SF적 발상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궤변과 논리적 말싸움(舌戰)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차별화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진정 ’나‘인가?”, 그리고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즉 이 작품은 두 작품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의 변주를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의 논리적, 언어적 구성물로 해체해보는 실험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간 판박이』는 인간 정체성 상실의 소설을 더 깊이 파내려가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증명의 체계’를 해체하는 소설이라고.  &nbsp;  『타인의 얼굴』이 시각적 단절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하고 있다면 『모래의 여자』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묻고 있음에 비해, 『인간 판박이』는 지성마저 가짜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 의심에 도달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그 원형을&nbsp;1951년 발표된 그의 단편 「S. 카르마씨의 범죄」에서 발견한다. 소설의 주인공 S.카르마가 존재를 박탈당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는 일련의 장면이 떠오른다. 즉 인간 정체성과 실존의 물음은 아베 고보가 일생 천착하던 중심 주제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판박이』는 이러한 물음의 극단인 ’인간‘이란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하고 있기에)  &nbsp;  S.카르마는 인간이 사회적 기호(이름, 명함, 얼굴 등)를 잃었을 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체성 상실과 실존의 그 질긴 관계성을 묻는다. 사람으로서의 환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의 마련을 말하던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의 목소리 중 한 측면에서 좀 더 밀어붙인, 다시 말해 사회적 승인보다 더 심층의 물음인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는 정말 자명한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즉 『인간 판박이』 에서는 외형만 인간인 화성인이 진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함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존재 우위론의 허상을 박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nbsp;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란,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자기 실존성을 인식하거나, 얼굴, 소위 외피(가죽)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서의 정체성에 불과하거나, 진짜와 모방의 경계나, 공통상식과 망상의 경계의 흐릿함을 들추어냄으로써 인간성 혹은 인간이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을 허물어뜨린다.  &nbsp;  사실 우리들이 같은 종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아니 김현경의 말처럼 인간 상호간의 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이름인 ‘사람’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규제 규칙들을 가지고 사람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로써 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언어에 씌워진 정체성이란 환상이거나 진짜 없는 짝퉁처럼 그 실체기반의 취약함, 그 조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nbsp;  이 소설 『인간 판박이』의 기묘한 핵심은 바로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논리로서, 평론 풍 사회극인 &lt;안녕하세요 화성인&gt;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각본가인 주인공과의 논쟁이며, 그 핵심 질문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사실상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전제 위에 세워진 약속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고,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명제가 아니라 공리(公理), 즉 너무 당연하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화성인이 등장하면서 이 증명하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가 화성인이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이 증명 책임에 인간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nbsp;  &nbsp;  『타인의 얼굴』에서는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간 판박이』에서는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결 쉽게 물을 수 있었지만, 『인간 판박이』는 완전히 같기에 얼굴만으로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지점에 도달한다. 즉 정체성이 얼굴의 상실에 의해서 흔들린 『타인의 얼굴』과 달리 완벽한 동일성이 정체성을 흔든다. 제목 『人間そっくり』, ‘인간과 똑같다.’ 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인간과 닮은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더욱 모호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화성인은 주인공의 말을 반박하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정말의 사유를 촉구하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nbsp;  "당신은 인간처럼 보인다.그렇습니다. 인간처럼 보입니다.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입니다.그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nbsp;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제가 전제를 의심하는 무한회귀에 빠져드는 논리의 미로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전제에 의심을 품게 됨으로써 인간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임이 흔들리게 된다. 이 대화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까지 뒤집히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인간언어의 의미가 인간 사회의 약속이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제 소설은 그야말로 이들 대화 속에 작가의 말이 작품의 현실을 침범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을 다루는 SF를 초월하여 소설가와 이야기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라디오 프로그램 &lt;안녕하세요 화성인&gt;을 쓰는 각본가에게 실제로 갑자기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화성인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허구를 만드는 사람에게 허구가 현실로 침입하고,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다.  &nbsp;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는 갑작스레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이 쓴 이야기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베 고보가 쓴 것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주인공에게 쓰게 만든 이야기인가? 진정 이야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며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적 층위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된다. 이 메타픽션의 층위는 인간 존재 증명의 문제와 뒤엉켜 존재자의 믿음에 근본적 구멍을 뚫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아베 고보가 장식처럼 도입한 위상수학(topology)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nbsp;  모양이 겉으로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보다 관계와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위상수학 기능의 하나이다. 도넛과 손잡이달린 컵이 모양은 다르지만 구멍이 하나라는 위상적 구조가 같기에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듯, 인간과 화성인의 외형이 같다면 둘은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 화성인의 관계 구조가 같다면 둘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정상인과 미친 사람, 현실과 허구,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도 위상적 관계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설은 누가 진짜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어떤 관계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즉 김현경의 절대 환대의 문제와 유사하게 회귀하는 것 같다.  &nbsp;  이러한 인간 존재 증명의 물음에 휩싸여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부터 나는 오늘의 트랜스휴머니즘, 즉 인간 신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 찬양문제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인간 존재의 최종적 경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편집과 인공지능, 신체 증강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존재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인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bsp;  그러나 『인간 판박이』가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사유와 만나는 더욱 근본적인 지점은 ‘새로운 인간’을 상상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묻는 데 있다. 소설 속 화성인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인간과 똑같이 말하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외형은 인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의 기억과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임을 보장한다면, 그것들이 인공적으로 복제되거나 변형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nbsp;  이런 의미에서 『인간 판박이』는 포스트휴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는 역설을 앞당겨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이라는 기존의 종을 변형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지만, 『인간 판박이』는 오히려 ‘기존의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 그렇게 명확하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오늘의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듯하다. 이제 최근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문제인 AI와 이미지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언어를 생성하고, 문체를 모방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대화한다면 이 인간처럼 보이는 AI는 인간과 다른가? 이 질문은 『인간 판박이』의 제목이자 물음과 정확하게 겹친다.  &nbsp;  ‘인간처럼 보이는 것(Human-like)’과 ‘인간(Human)’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따라 둘의 차이는 극히 모호해진다.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오늘의 AI를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선취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고보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인간능력을 새로이 확장하는 방향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거의 대척에 놓여있는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개선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인간’이라는 말을 먼저 의심한다. 아베 고보는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특별한 것으로 지정하기 위해 명명한 행위일 수 있다고 말이다.  &nbsp;  자, 이제 소설의 물음을 돌고 돌아 ‘인간 판박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화성인이 인간 판박이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실상 인간 판박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고 말이다. 즉 판박이가 화성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속성이 되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고, 행동 양식을 배우고, 규범에 적응하며 인간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 ‘人間そっくり’는 정말 무서운 의미로 와 닿는다.  &nbsp;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고 자신들이 정의한 것을 닮은 존재일 뿐이라는 역설로 뒤집혀 버린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근거가 사회적 약속, 기억, 외모, 이름, 가족, 정상성, 언어, 이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작품 앞에서 그저 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 판박이에 불과함에 당혹감과 그 불의하게 보이는 진술에 발끈할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인간윤리에 대한 다른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게 되는 이 위대하고 선취적인 논리의 미로를 거닐어보는 것은 당면한 오늘의 세계에 시의적인 독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nbsp;  여러분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인간의 언어라는 그 허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인간과 닮은 AI와 인간인 자신이 같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 선구적 작품을 읽어보시라! 논리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다보면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그 허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허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이 위대한 논리게임과 위상학적 주제와 형식 속에서 우리들의 잘 난 인식론은 허물어질 것이다. 타자와 사회라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만 만들어질 뿐인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을 독자적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증명의 체계로 세워들 보시라, 아베 고보의 인간 증명체계의 해체에 도전하시는 독자는 아마 AI의 도전에서도 승리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가을을 시작하는 멋진 독서가 되어 줄 걸작 중의 걸작이다.   &nbsp;---------------------------------------------P.S. 최근 글로벌 AI기업 앤트로픽의 수장인 다리오 아모데이의 인간 이해와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AI의 재귀적 자기개선 기능에 대한 위험 경고는 공포로 가득했다. 기술 자본들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촉발된 가속화된 AI경쟁은 그 어떤 윤리적 물음조차 건너뛰었다. 그가 근심스럽게 외친 향후 10년 내 인류 종말 가능성은 아베 고보가 말하는 인간 증명에 대한 부실함과 불완전성에 기초한 자기 원인에 대한 무지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위험 앞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6/5/cover150/k872131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26053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곰브로치의 희곡에는 유치함 속에 벼려진 칼날이 번뜩인다. -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03343</link><pubDate>Tue, 08 Sep 2026 19: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033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207503&TPaperId=175033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267/47/coveroff/89942075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207503&TPaperId=175033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a><br/>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01월<br/></td></tr></table><br/>“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nbsp;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의 “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nbsp;  【콘스탄티 옐렌스키(좌), 비톨드 곰브로비치(우)】<br>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nbsp;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nbsp;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nbsp;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nbsp;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nbsp;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nbsp;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nbsp;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nbsp;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先)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nbsp;  <br>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nbsp;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nbsp;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nbsp;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 속 ‘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nbsp;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nbsp;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대공: 전등입니다.피오르: 누구?대공-전등: 전등이요.피오르: 대공 아닙니까!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아!&nbsp; &nbsp; &nbsp; &nbsp; -  『오페레타』 3막 중에서  &nbsp;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nbsp;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nbsp;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nbsp;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267/47/cover150/89942075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2674762</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미래 윤리를 위한 「공포(恐怖)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link><pubDate>Sun, 30 Aug 2026 09: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56138&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31/coveroff/89777561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82532580&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649/54/coveroff/e9825325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319815350&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145/69/coveroff/331981535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6323&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44/18/coveroff/897291632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6978&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686/88/coveroff/897199697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nbsp;이 단상은 프린스턴, 뮌헨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제2장, 미래 윤리에 있어서의 「토대와 방법의 문제」의 몇 절을 기초로 필자의 현실 自省의 생각이 더해져 작성된 것입니다. 선과 당위 등 존재론적 물음을 비롯해 도구의 목적성이 지니는 윤리성 등, 사유를 더 이어가시고자 분은 원(原)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스 요나스는 전통적 윤리는 대체로 ‘행위자–행위–피해자’가 가까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생명공학, AI, 유전자 편집, 자율 시스템 등 기술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조건,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나스가 윤리의 시간적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습니다. 즉 미래의 인간을 위해 현재의 행위를 규율할 당위에 대해 윤리적 검토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 윤리에 대한 문명 비판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선도적 윤리의 길을 개척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고 싶습니다...................................................................<br><br>"기술적 힘이 미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만큼 책임의 범위도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  &nbsp;  ‘미래 윤리’라는 말은 현재라는 사건에 얽매여있는 오늘의 전통적 윤리로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도덕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기에 출현한 윤리의 이름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기술들의 후과(後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들과 달리 훨씬 장기간에 걸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기술은 인간생명 조건의 변형을 통한 종(種) 자체의 변화, 인간 삶의 의식에 대한 중대한 가치의 변화, 지식 생산과 그 실천적 수행의 기계로의 이전과 의존 등 인간의 본질과 삶의 형태에 대한 근본적 수정 또는 종말을 품고 있다. 이것은 근(近)미래이거나 먼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술적 수행이 인류의 본질을 건드리는 근원(根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히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상(像)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단지 상업적 이익과 장밋빛 기술의 낭만적 이점만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나가고 있다.   &nbsp;  사실 이러한 현대기술 사업에 대한 우려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종말론적 위기로 표현(*4.부기 참조)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의 외침들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처럼 개인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머나먼 나라의 일이거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언어이기에 전혀 어떤 공포도 일으키지 않으니, 제아무리 전지구적 규모의 심각한 위협일지언정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미래 윤리를 주창하면서 첫 번째 명령을 도출하는 가운데 ‘공포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이라는 인간본성의 취약점을 건드림으로써 하나의 윤리 명령을 도출해낸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개인의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현재적 삶의 중요 문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가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nbsp;  1. 공포의 발견술: 도덕관념의 발원(發源)  &nbsp;  요나스의 진술을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인간은 어떻게 떠올렸을까? 아마 인간에게 살인의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이 행위 능력을 통해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살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명의 신성함은 물론 살인 금지 명령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 없었다면 진실의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부자유가 없었다면 자유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침해사실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지만 어떤 윤리 명령, 즉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일을 자신들이 당하지 않고 보호될 수 있기 위해 윤리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위협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엇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것은 무언가에 대해 경악하는가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nbsp;  이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 우리는 질병을 보지 않고서는 건강에 대한 찬가를 읊을 수 없으며, 파렴치한 행위를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찬양하는 데 미숙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서 평화를 찬양하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체감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는 데 몹시 서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악(惡,malum)의 인식이 선(善,bonum)의 인식보다 무한히 쉽다. 악의 인식은 더 직접적이며 설득력 있고 의견의 차이에 별로 시달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다. 반면 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며 반성하지 않으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이 비로소 노출되어서야 감지한다. 즉 선에 관해서는 대체로 악의 우회로를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윤리 도덕관념은 희망이나 선보다는 공포와 악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포의 발견술은 우리가 윤리명령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nbsp;  <br>2. 신중성의 도덕적 명령 : 思惟의 의무로서의 도덕  &nbsp;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기술들은 훗날의 결과를 추론을 통해서만 인식해야만 하는 고도의 어려움이 있다. 미래의 발명품을 미리 발명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적 탐구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물론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효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명령을 할 수 있을까?   &nbsp;  현대기술의 대사업은 자연적 발전 과정의 수많은 작은 행보들을 소수의 거대한 행보로 응축시킴으로써 천천히 움직이는 자연의 생명(즉 진화의 긴 여정)을 보장하는 이점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조직에 대한 기술적 침해가 가지는 인과적 속도는 마찬가지로 인과적 규모를 야기한다, 그 침해의 파급속도와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 혹은 결정적 파국의 초래일 수 있음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의도적 계획으로 대체하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진화적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인간에 대한 기술적 침해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안과 위험을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대기술들이 선전하는 위대한 목표에 이르는 시간의 축소에 비례하여 완전히 회피불가능하고 더 이상 작지도 않은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류의 불가피성에 관한한 우리가 자연적 진화의 장기성을 인간적 계획 행위의 상대적 단기성으로 대체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매우 급속하게 인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nbsp;  기술론적 행위에 의해 근거리 목표를 가지고 그때그때마다 진행되었던 발전들은 스스로 자율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간의 학문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기술적 발전은 자신의 고유한 강제적 역동성을 띠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동적 동인(動因)으로 인해 기술적 발전은 비환원적일 뿐 아니라, 자체 추진력을 가지고 행위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계획을 뛰어넘기도 한다. 한 번 시작된 것은 우리에게 행위 법칙을 빼앗아가고, 시작이 만들어 놓은 완성된 사실은 점증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영속성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근현대 3세기동안 기술 발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기술적으로 추진되는 발전의 가속화는 자기 수정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에도 수정은 어려워지며,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극도로 작아진다.   &nbsp;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생체기술, 로봇기술 등은 오직 산업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와 산업국가 간의 헤게모니 쟁탈에 매몰되어 기술 정당화의 의무가 면제된 채 자유주의 관점으로 천명된 무책임성이 마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듯 행위하고 있다. 세상에 전체 인류가 이처럼 산업기술의 무책임성에 동시에 맡겨진 적이 없다. 인류를 이끌어갈 지도적 표본의 규정 없이 대체 그 어떤 권위가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충분성에 칼을 댈 수 있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인간의 왜곡과 위협과 변형의 권한을 주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이익의 전망도 희생의 위험도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치 작금의 기술과 기술자본은 초월적 권능을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들의 기술론적 연금술의 도가니에 인류를 던져 넣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 윤리의 명령을 또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가 우선성을 부여하는(작금의 한국 정부의 AI 우선 정책과 같은 것) 최초의 시작들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하는 것으로써의 의무와 신중성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유(思惟) 의무’라는 도덕이다.   &nbsp;  3. 맺음말: 경험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nbsp;  참으로 오늘의 세계에서 그 의미의 힘이 한없이 취약해지고 잊혀져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의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보존되지 않은 바로 오늘, 이를 구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경험도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상(像)을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위해서 우리는 경험된 악 대신에 ‘표상(表象)된 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악과 공포의 침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체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윤리 명령의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생각하여 제공하는 것을 미래 윤리가 갖는 예비적 의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nbsp;  표상된 악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내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된 악과 같은 자발적 의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즉 대상에 대한 공포는 그 많은 위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듯, 결코 자신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리 본성에 주어져 있는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가장 비자의적이고 억압적인 반동으로써 극단적 공포를 유발한다. 자기에게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 공동 생활의 유대로 결합된 다른 어떤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 지구의 운명은 차치하고라도, 미래 인간에 관해 표상된 운명은 자체로부터 우리의 심정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향을 표상된 악의 제작을 통해서라도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수용, 후세대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촉발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태도가 미래 윤리이다. 우리는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nbsp;  이로부터 많은 도덕적 창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이 미래에도 과연 존재 당위의 권한이 있는가? 현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라는 장기에 발생할 후과에 대해 책임을 왜 가지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도박에 걸어도 되는가? 나는 타인의 이해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대체 어디서 획득했는가? 인간의 실존이 내기의 담보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류가 실존해야할 무조건적 의무라는 것이 과연 존립 가능한 윤리명령인가? 이러한 논증들을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nbsp;  우리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구원의 예측이라는 낙관적 기대보다는 불행의 예측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리원칙만으로는 이미 접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술들의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현재에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지금의 기술 행위들은 그 대상과 규모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며, 그것은 모든 직접적 의도와 무관한 결과에 따르며 전혀 중립적이지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윤리적 진공 상태’에 이른 지금의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가 던지는 물음들에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윤리 명령을 구할 필요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nbsp;  오늘날 소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확대하고 사용을 강제 받고 있는 극단적 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에 대해 규율할 수 있는 윤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작 장기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로만을 쓰다듬으며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악질의 인간들이 살던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류의 행위 능력을 가진 작금의 기술들은 윤리의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미래 윤리에 대한 사유가 반세기 전에 한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검토되었음에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다.   &nbsp;  4. 부기(附記) - 더 읽어 볼 현대 기술의 미래 윤리를 체계화한 글들  &nbsp;  요나스는 현대 기술들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 (2014년)에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인류문명의 장기적 잠재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히 인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라는 최고명령을 위한 윤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nbsp;  반면 인간을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로 보지 않고 정보적 존재로 보는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The Ethics of Biomedical Big Data』에서 인간을 계산 가능한 정보 객체로 본다. 이러한 인물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을 평균적인 통계적, 집단적 형상으로 환원해서 기계적 존재로 변질시킨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도 『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 (2013년)에서 ‘미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해야 한다.’며 인간의 실존을 중시하지만 요나스와는 달리 단순 생존이 아니라 신체의 온전성, 사고와 상상, 자율적 선택,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고 있다.  &nbsp;  다시 말해 그녀는 미래 윤리는 안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능력 보존의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결국 인간을 능력면에서 존속을 말하는 것과 인간 생명체 자체의 실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 철학자는 모호한 경계선을 주행한다. 그런데 요나스의 장기주의적 윤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극단적 장기주의 윤리를 내세우는 일군의 학자들도 있는데, 요나스의 책임의 윤리와 다르게 이들은 현재의 몇 십만 명의 희생보다 미래의 수십 억 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극단성을 띠기도 한다.   &nbsp;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희생시키는 괴이한 윤리이다. 즉 기술 종속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기술 성공주의의 역설적 윤리파괴를 잠재한 위험한 윤리로 보인다. 따라서 맥어스킬이나 보스트롬 같은 장기주의자들과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엄격히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미래 기술과 관련한 윤리 담론이 형성조차 되지못하고 있기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짧은 단상을 해보았다. 아무쪼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단기적 현실과제에 매몰되는 우리들의 실용주의적 정치체(政治体)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많이 늦었지만 윤리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noimg_150_b.gif</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0986</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서다? - [돈 후안 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73482</link><pubDate>Wed, 26 Aug 2026 19: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7348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643&TPaperId=174734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59/coveroff/8932403643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643&TPaperId=1747348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돈 후안 외</a><br/>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06월<br/></td></tr></table><br/>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nbsp;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lt;돈 조반니&gt;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nbsp;<br>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에 ‘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nbsp;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는 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nbsp;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자,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nbsp;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nbsp;&nbsp;-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nbsp;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量)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nbsp;  <br>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nbsp;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性)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nbsp;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아,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nbsp;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nbsp;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59/cover150/8932403643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459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집합행동의 딜레마에 빠진 AI 경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link><pubDate>Sat, 22 Aug 2026 19: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0226&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1/23/coveroff/k41213022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00264631&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967/23/coveroff/0300264631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031539745&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35/70/coveroff/303153974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715738&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794/1/coveroff/89707157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030721906&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77/15/coveroff/3030721906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당한 목표 없는 경쟁을 물으며;<br>지금 벌어지는 AI 기업 간의 과열 경쟁은 단지 그들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군비경쟁(arms race) 구조가 이들 산업주체들의 전략적 경쟁논리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1960년대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더 큰 모델을 훈련하면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더 큰 GPU, 더 큰 데이터 센터(Data Center)’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보면 전혀 최적(最適)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과는 비효율적인, 즉 현재 투자 규모가 미래 전망에 의해 정당화되는 실제 수익보다 큰, 수요보다 기대가 먼저 움직이는 과다한 낭비이다.&nbsp; &lt;현대의 고전이 된 AI 윤리비평 &gt;<br>AI의 미래 가치가 이미 현재 가격에 과도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부분의 과잉투자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우려이지만, 이 불합리성으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전가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대되는 미래가치를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대중은 그 비효율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고, 더구나 기술 편익을 누리는 사람과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지금의 AI 경쟁은 인류 자원의 측면에서 어떤 조건에서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마치 AI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무조건적 당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아가 과열 양상의 AI 산업에 그 어떤 면밀하고 세심한 도덕적, 정치적 고려도 없으며,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nbsp;  AI관련 연구나 저술들도 획일적으로 AI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저 효율적 사용방법에 맞춰져 있고, 더구나 AI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 제기도 대세에 낙오된 자의 푸념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AI 산업과 관련하여 예견되는 각양의 형태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고, 이러하다보니 그저 AI데이터 센터 건설이나 관련 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아예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관련 연구가 멸종하다시피한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AI 연구자들은 AI 기술의 현재가치 평가와 미래 세대 비용의 문제, 향후 50년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 경쟁적 인프라 구축의 경쟁적 투자의 문제, AI의 인류사회에 대한 편익(효용)의 문제, 기술의 가능성이 그 기술의 실행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기술적, 정치적 연구와 논의가 학계와 정책 분야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nbsp;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만큼의 AI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 때문에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가?"&nbsp;  AI가 필요한가? 라는 이미 떠난 기차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자원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AI 개발 목표가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술 자체보다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nbsp; &lt;AI 의 숨겨진 비용을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gt;<br>대중들은 AI를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기술을 역사학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하버드 역사학교수 질 레포어(Jill Lepore, 1966~)는 『인공人工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Artificial State)』(2026.8)이라는 조지오웰의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최근 저술에서 AI기술이 어떻게 “전 세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인간 공동체와 자치 능력을 파괴“했는지를 설명하면서 AI 국가의 등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서 봉건주의 파시즘,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체제들도 결국 해체되었듯 AI 체제도 해체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반(反)AI체제 논의도 있지만, 지금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AI체제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지금의 가공할 만한 자원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AI와 거대 기술기업들이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행세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당해 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국가 의지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압도하고, 나아가 잠식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 물음의 본질을 생각해보자.&nbsp;  미국 내 인디언 부족연합체인 체로키 네이션은 부족 소유지 내 AI 데이터 센터 건설을 금지하고, 부족 영토 내 다른 부지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 협의를 요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소비, 물(用水) 사용, 대기·소음·빛 공해, 문화유산 보호, 지역 사회가 ‘획득 가능한 실질적 이익’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전통적 숙고의 원칙인 ‘이로쿼이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란 것에 사유의 뿌리가 있다. 즉 ‘오늘의 선택이 7세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대략 정책 결정으로부터 200년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지역 사회가 감당해야하는 물, 전기, 토지에 비해 AI 데이터센터로부터 지역사회가 얻는 효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nbsp;  막대한 전력 소비, 대량의 냉각수 사용, 소음 및 빛 공해, 생태계 압박,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고용효과, 자원소비 대비 경제 기여가 턱없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주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공공요금 상승, 지역 물 공급 약화 등을 초래한다. 특히 막대한 전력 소비는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크며, 이는 지역 전력망 부담, 전기 요금 상승, 발전소 증설 압력으로 연결된다. 실제 이러한 요구가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 논의될 정도이다. 또한 데이터센터가 유치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경제효과가 해당 지역에 남는가? 로 바뀌어 실제 운영상태에서는 고용효과가 극히 작을 뿐 아니라 수익은 당해 기업의 본사로 집중되어 지역 경제에는 상대적 부담만 가중된다는 것이다.&nbsp;  이렇게 가시적인 자원 효용과 배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데, 지역민이 감수하여야 할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어 민주주의 공동체 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보 비공개, 불투명한 협상, 사후 통보 등 절차 적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건설할 것인가가 중대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의무, 물 재활용시스템, 지역전력망 투자, 지역사회 이익공유, 환경영향 공개, 주민동의 절차 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사회는 이러한 법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적 법규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거대기업의 건설행위가 추진되고 있기에 각 지역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nbsp; <br>투자수익자가 비용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과실만 챙기려는 현재의 AI기업들의 체리피킹식 행태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나아가 데이터 주권과 AI정책의 수립에서 단지 적극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과 전기, 토지와 생태계의 비용은 나 몰라라 하고서는 지역민, 다른 공동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작금의 거대기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절대 교정(矯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50년 뒤에도 이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이 같은 정치철학적 질문 없이 행위가 앞서는 지금의 AI 국가 정책과 기술기업의 행보는 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nbsp;  하고자 하는 말은 AI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자원을 지금과 같이 소비할 만큼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증명하라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건설되는 엄청난 수의 AI데이터 센터와 이를 추진하는 거대 기술기업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AI가 인류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미국 및 유럽 대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의 투자 규모와 자원 투입이 그 목적에 비례하는지는 짙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대표저술 『책임의 원칙』에서 “현대기술의 파괴적 힘에 맞서 미래 세대와 자연환경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태학적 책임 윤리”를 주장했다. &nbsp;&lt;오늘 맞이하고 있는 기술은 현재의 도덕만을 말하는 전통 윤리로는 대응할 수 없다.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문법을 지닌 AI는 새로운 윤리로서 '책임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gt;&nbsp;<br>  AI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지구(생태)자원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없이 자본과 개발기술의 사용 논리에 압도된 자본헤게모니 쟁탈이 진행되다보니 윤리와 인류 복지와 정치적 문제를 건너뛰고 진행되는 기이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은 누구의 자원인가? AI가 창출하는 생산성 증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환경 비용은 어느 지역과 세대가 부담하는가? 기술 경쟁은 실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경쟁 자체를 위해 계속 확장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술공학보다는 정치철학, 환경윤리, 경제사에 가까운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기술기업이나 기술공학자들로부터 빼앗아 지금이라도 경제학자, 정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사회의 AI체제에 대해 그 근원부터 다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nbsp;  "AI는 구름(cloud)이 아니라 광산(mine)에서 시작된다"-  Kate Crawford, 『The Atlas of AI(AI 지도책)』 &nbsp;  AI의 숨겨진 비용부터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학계와 관련 연구자들은 이 중대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 학계는 'AI의 생애 주기에 대한 연구'가 중대하게 수행되고 있다. 사용 자원이 AI 잠재적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무수히 들려온다. 또한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정당한 목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목적인지, 테크노크라트의 사회를 통한 권력의 쟁취인지, 자본이라는 재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인지, 이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nbsp; &lt;인공 국가(Artificial State)&nbsp;부상의 성급함과 무모함에 대한 독보적 비판서&gt;<br>이러한 연구 결과물중 AI 윤리비용을 추적하는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 1974~)의  『The Atlas of AI(AI 지도책)』 는 단연 돋보인다. AI 관련 윤리의 많은 연구들이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에 한정되어 AI 체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출신의 이 호주인 AI 연구가는 AI를 단순 기술로서가 아니라 자원, 노동, 데이터, 권력이 얽힌 거대 산업체계로 분석한다. 그래서 AI 윤리는 단순한 기업의 자율규제나 ‘착한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정의·노동권·데이터 권리·민주적 통제를 함께 고려하는 정치적 과제가 된다. 특히 크로포드는 AI를 자동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분류와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수집된 이미지와 개인정보, 무수한 데이터 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AI는 혁신 기술이라기보다는 자원 추출과 노동 통제, 데이터 수집, 권력 집중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총아일 뿐이라고 해부하고 있다. &nbsp;  오늘날 AI 기업들이 사용하는 '클라우드', '가상공간', '지능' 같은 표현은 마치 AI가 비물질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지만, 크로포드는 그 뒤에 있는 광산, 발전소, 데이터센터, 공급망, 그리고 인간 노동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 점에서 『Atlas of AI』는 앞서 언급한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즉, 문제는 ‘AI가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유용성을 위해 어느 정도의 토지·전력·물·희귀광물·인간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nbsp;  크로포드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술윤리서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정치경제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크로포드의 이 연구 결과물은 기술 비평서이며,  21세기 디지털 산업의 ‘환경사(環境史)’이자 ‘자원사(資源史)’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AI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라는 이 원색적 질문을 회피해서는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사회는 장기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린 듯하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계와 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편리에 어마어마한 인간의 삶을 그저 내버릴 가능성은 없는지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다시 사유해야 한다.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정치, 윤리, 인류경제를 모른 체하고 질주하고 있는 형세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자라는 이 무식한 도전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런 저급한 사회가 아니다.&nbsp;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반(反)AI, 반(反)기술주의가 아니다. AI산업이 한국 사회의 국민경제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기실적과 주가 중심의 경제시스템만으로 체제를 이해하는 정책은 정말 우려스러운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이로쿼이 7세대 원칙은 시간의 척도를 현재에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축,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수익자와 비용 부담자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물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차, 즉 이 사회 구성원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을 고려하는 윤리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AI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더욱 아름다운 구상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현대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책임의 범위도 그 만큼 길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제에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제 남의 뒤 만을 따라가는 과거의 후진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nbsp;<br>   <br>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86/44/cover150/k23283081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586444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 일기』와 지하인의 고백록 - [도스토옙스키 고백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2051</link><pubDate>Thu, 20 Aug 2026 17: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20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3617&TPaperId=174620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0/29/coveroff/89324736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3617&TPaperId=174620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스토옙스키 고백록</a><br/>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09월<br/></td></tr></table><br/>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nbsp;  『작가일기』는 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년 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 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nbsp;  『작가일기』 중 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nbsp;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nbsp;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nbsp;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nbsp;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nbsp;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nbsp;  <br>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nbsp;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nbsp;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nbsp;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이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nbsp;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反)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nbsp;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 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nbsp;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0/29/cover150/89324736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870290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문학적 유언: 실패 없는 결행의 순간 - [자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55660</link><pubDate>Mon, 17 Aug 2026 14: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556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832679&TPaperId=174556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9/34/coveroff/k042832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832679&TPaperId=174556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살</a><br/>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3년 03월<br/></td></tr></table><br/>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가 2007년 10월 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한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nbsp;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nbsp;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한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nbsp;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nbsp;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성(城)』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nbsp;  <br>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nbsp;  “흐린 날씨, 겨울, 비,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nbsp;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nbsp;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nbsp;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nbsp;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nbsp;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nbsp;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젊음은 나를 떠나고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nbsp;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죽음은 나를 기다린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9/34/cover150/k042832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289347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란츠베르크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 - 끝까지 살아야 할 이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link><pubDate>Wed, 12 Aug 2026 17: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556&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5/42/coveroff/893291255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627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520/92/coveroff/8972916277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939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43/63/coveroff/k66203939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8325&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592/94/coveroff/897418832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03050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68/43/coveroff/k63203050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이창익 著,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쪽, 인간사랑 刊  &nbsp;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nbsp;『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amp;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nbsp;   <br>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nbsp;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nbsp;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자,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nbsp;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nbsp;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nbsp;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nbsp;  <br>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nbsp;   <br>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nbsp;&nbsp;“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nbsp;&nbsp;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nbsp;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nbsp;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며,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nbsp;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nbsp;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nbsp;&nbsp;-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nbsp;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nbsp;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나’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nbsp;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nbsp;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nbsp;"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P17, 열린책들 刊<br>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05/14/cover150/190333159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05148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브람 스토커에게 드라큘라는 무엇이어야 했을까? - [주석 달린 드라큘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0671</link><pubDate>Sun, 09 Aug 2026 13: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06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548X&TPaperId=174406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8/0/coveroff/896017548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548X&TPaperId=174406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주석 달린 드라큘라</a><br/>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03월<br/></td></tr></table><br/>엄청난 주석들과 해석이 쌓여있는, 이 작품이 발표 된 이후 흡혈귀 소설의 전형이 된 브람 스토커의 『DRACULA』에는 성의 정치학이 어떠하다든지, 문화적 편견의 집대성이니, 신구 세계의 충돌이라든가 하는, 한편 정신분석적 비평이니,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니 하는 진부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관점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작품의 재미를 오롯이 즐기기 위해 낯선 것이 주는 서늘함을 느끼기 위해 읽었다.  &nbsp;  계속되는 무더위와 더불어 지치고 지루해진 일상적 연속감을 잠시 상실케 할지도 모를 어떤 낮선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무 지치고 내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일상을 단절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오래된 소설을 집어 들었다. 가장 낯선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무엇이 아주 조금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몸이 굳어버림으로써 공포를 비로소 체감하듯 이질성을 통해 불연속적인 이질적 세계의 당혹스러움이 필요했던 탓일 게다.  &nbsp;  <br>소설 첫 장을 펼치면 헝가리-루마니아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향하는 변호사 조너선 하커의 마음에 드리운 불안과 황폐한 풍광이 어우러져 그의 행보가 마치 죽음의 덧으로 들어가는 듯한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여 읽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를 백작의 성으로 실어 나르는 마차와 기이한 마부, 늑대들의 울음소리와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안광(眼光)들, 굳게 닫친 성의 문 앞에 장시간 홀로 서 있어야만 하는 조너선이 느꼈을 두려움이 온전히 전달되어 온다. 일단 이 소설 읽기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 이질적 세계의 시공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뛰어들었으니까.  &nbsp;  엄청나게 큰 성에 자신과 백작 이외에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너선 하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을 땀줄기의 성분은 혐오와 공포, 백작이 내뿜는 썩은 내 나는 악취의 진저리였을 것이다. 런던에 백작의 거처 구입과 관련한 계약을 위해 고용주 호킨스를 대리한 조너선의 방문은 그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백작의 음흉한 의도에 의해 자유를 빙자한 감금 상태에 처해지고, 백작의 실체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탈주를 향한 그의 시도들은 긴박함과 실패의 두려움이 혼합된 죽음의 공포로 뒤범벅되어 독자의 정신을 꿰찬다.   &nbsp;  장면은 훌쩍 넘어 조너선 하커의 약혼녀 미나와 그녀의 친구 루시 웨스턴라가 살고 있는 영국의 휘트비로 향한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일기와 편지, 전보, 신문기사 스크랩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재된 기록 일자들을 서로 이어 맞추며 그 간극에 있을 추리와 논리는 독자의 몫이다. 조너선 하커, 그의 생존을 알 수 없이 끝난 일기에 이어 미나의 편지와 일기가 등장하여 휘트비 항에서 발생한 이상한 사건을 진술한다. 폭풍우 속에 항구에 도달한 배와 느닷없이 뛰어내려 홀연 사라진 개 한 마리, 그리고 키잡이에 묶인 채 사망한 선장의 시신 외에 그 어떤 생명도 없는 배, 이후 평소 몽유병을 앓고 있던 절세 미녀인 루시 웨스턴라의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척하고 창백해져만 가는 병세는 드라큘라가 이미 영국에 거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nbsp;  여기에 더해 루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정신병원 소장 수어드 박사, 그의 스승인 반 헬싱, 미국에서 왔다는 아서 홈우드의 친구 퀸시 모리스, 약혼자인 아서 홈우드(고달 경), 드라큘라 행적의 전조로서 간접적 기호로 작동하는 렌필드라는 광인에 대한 관찰 기록이 뒤엉켜 드라큘라의 루시를 향한 지속되는 흡혈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이어진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는데, 루시를 위해 남성들이 돌아가며 수혈을 하는 것인데, 이 소설이 써질 때 혈액형과 항체반응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지만 수혈이 마구잡이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 만큼의 이해가 있었음에도 굳이 수혈 부작용의 확률을 늘리면서까지 네 명의 남자가 모두 한 번씩 수혈하는 것이다. 드라큘라에 의한 과다한 혈액의 누출로 루시는 기어이 사망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데,  루시는 혈액이 모자라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수혈자인 모리스의 혈액이 루시의 혈액형과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비평가들은 반 헬싱의 무지에서 비롯된 폭력을 보았기에 이 같은 논평을 그치지 않는 것일 게다.  &nbsp;  그 이유야 어쨌든 흡혈귀를 쫓는 만능의 지식자로 행세하는 반 헬싱이라는 인물의 행위는 시선을 끌었는데, 조너선 하커가 이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미나와 혼인함으로써 수어드 박사의 정신병원에 임시 거처를 정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사단이다. 미나 하커에게 모든 기록들의 정리자로서, 드라큘라를 쫓는 계획의 주요 종사자의 임무를 맡김으로써 여성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은연히 표현했다는 점은 반 헬싱의 남성중심주의와 보수주의적 작품이라는 딱지를 상당부분 떨어내게 해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언데드(undead)가 되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흡혈귀가 된 루시의 영원한 죽음을 위한 행위와 드라큘라의 행적을 쫓는데 시선이 빼앗기고 있을 때 그들의 안 마당에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뒤늦은 발견의 장면이다.   &nbsp;  반 헬싱은 미나 하커가 황홀감에 도취되어 드라큘라에게 목이 물려 피를 빼앗기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피를 미나에게 주는 언데드의 세례를 보는 장면이다. 흡혈과 수혈의 행위를 유사 성행위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 선정성을 더욱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이 쓰여지고 있던 1890년대가 빅토리아시대의 절정기였다는 점이다. 엄격한 순결주의, 도덕주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인 엄숙주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게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마 반 헬싱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시대의 윤리적 기만을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nbsp;  문학비평가 크리스토퍼 F. 벤틀리는 그의 저서 『침대의 괴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나타난 성적 상징』 (1972)에서 “성기 없는 성교, 혼란 없는 성교, 책임 없는 성교, 죄책감 없는 성교, 사랑 없는 성교, 더 나아가 성교 그 자체라고”,  일종의 근친상간적이며 시체 애호적이고  가학적 성교 요소가 뒤엉킨 작품이라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일정 부분 정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출간되자 “극도로 선정적, 문학적 감각뿐 아니라 건설적 예술성도 부족”하다고 비난한 1897. 6. 26자  《애서니엄(Athenaeum)》 런던 版이나 “예술적 절제가 결핍된 문학적 실패작”이라 논평한 미국판 출간에 대한 1899.12.9. 《웨이브(wave)》 샌프란시스코 版처럼 선정성이기는커녕 당대의 위선에 대한 역설적 은유에 가깝기에 닐 게이먼의 비난처럼 소설적으로 취약한 것은 물론 아니다.   &nbsp;  나는 브람 스토커가 쓴 서문의 한 문장에 더욱 주목했는데, “우리의 철학이 꿈꾸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이 지상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이 말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너머에 훨씬 더 많은 미지의 것, 낯선 것, 외면한 것 들이 있다는 지성에 대한 겸허한 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낯선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흡혈 행위는 당대, 아니 오늘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익숙한 것에의 안주라는 편협이 야기하는 위선과 폭력성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것에 덧씌운 자기 몰지각과 편벽함, 아마 당대 영국인들, 나아가 서유럽인들의 심리를 채우고 있던 순혈주의가 여성들의 순결과 궤를 같이 함으로써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그 묘사가 일치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즉 드라큘라의 흡혈은 인종적 위협의 상징적 기호로서 드라큘라의 불쾌한 체취, 희생자의 피의 오염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작동하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한 예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nbsp;  이 소설의 원제목을 두고 스토커는 고심했던 같은데, 집필 원고의 제목은 『언데드』였으며, 소설로 출간하기 직전 자신이 영업매니저로 일하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을 위한 드라마 개작 작품명은 『드라큘라 혹은 언데드』 였던 것으로 보아도 죽음과 살아있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계지대의 존재임을, 미지의 영역을 활보하는 존재로서 드라큘라를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눈에 보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을 인식하려 할 때 우리는 고집불통이 된다. 루시의 약혼자인 아서는 자신의 피앙새(fiancée)의 시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한 시체훼손에 대해 강한 반대 의지를 보이지만, 반 헬싱의 조작으로 루시의 언데드가 성난 흡혈귀의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자 급작스레 그녀의 시신에 대못을 내리치는 일을 손수 하는 모습은 작가 의도의 한 표현 예라 해도 될 것 같다.   &nbsp;  【Luc Besson, 《Dracula: A love Tale, 2025》】<br>드라큘라의 안식처인 언데드가 휴면을 취할 흙으로 채워진 관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 끝에 영국을 떠나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드라큘라 백작을 쫓아 마침내 모리스가 그의 보이나이프를 심장에 꽂는 순간 미나 하커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은 길이 남을 장면일 것 이다.  흡혈의 피의 세례로 백작과 텔레파시의 소통력을 지니게 된 미나 하커가 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움이다. 백작이 분해되는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평온한 표정”에 미나 하커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기뻐할 것”이라는 표현은 자못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백작의 부재로 인한 자유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영적 파트너였던 백작의 평온한 표정이 준 그와 연결된 자기 영혼의 지속성에 대한 환희였을까. 사실 소설이 끝났음에도 드라큘라를 정말 없애는 데 반 헬싱과 동료 사냥꾼 무리들이 성공한 것인지 장담하기가 애매하다. 낯선 이질의 문명에 대한 반감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든 그것은 우리에게 다시금 이질의 괴물성으로 출현하고 부단히 편협의 질서와 투쟁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네의 세계는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는 의문부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nbsp;  발표되고 60년이 지날 때까지 대중성이라는 폄훼의 시선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작품이었다는 점도 아마 우리들의 집요한 배제의 논리에 은폐된 순수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 때문일 것이다. 이제 무수한 아류(pastiche)들을 낳고 있으며, 오늘날 가장 강력한 소설 중 하나로 연구되고 기억되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낯섦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붙인 이름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은 더 많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을 게다.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뾰족한 송곳니, 아직까지도 살아있고, 예술로서 성공하고 많은 주석과 해설을 이끈 역작이다. 마침 뤽 베송 감독이 다크 판타지 물로 각색한  《Dracula: A love Tale, 2025》가 올 여름(8.26) 개봉될 예정인 모양이다. 아마 브람 스토커의 원작과는 달리 15세기 일명 꼬챙이 블라드로 불렸던 블라드 드라큘라(Vlad Dracula) - 오늘날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기려지는 - 가 활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21세기 드라큘라라는 낯선 존재가 이 프랑스인에게는 어떻게 표현될지 자못 궁금하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8/0/cover150/896017548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78000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삶을 속박, 파괴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 - [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8040</link><pubDate>Sun, 02 Aug 202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80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838015&TPaperId=174280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01/60/coveroff/k7128380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838015&TPaperId=174280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a><br/>데라야마 슈지 지음, 손정임 옮김 / 미행 / 2022년 07월<br/></td></tr></table><br/>‘가출, 악덕, 저항, 독립’, 네 범주의 ‘예찬(禮讚)’을 하고 있는 이 책은 1963년 첫 출간되었지만, 인간과 인간사회에 있는 그 항상(恒常)적 내용처럼 21세기 오늘과 동시대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반감의 냄새가 범상한 글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당대에는 급진성으로 비난과 공감의 물결이 마구 뒤엉켰을 문제작이었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흥미로운 것은 현학을 흉내 내거나 진지함을 방패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위선도 날려버린 날 것의  체 하지 않는 솔직함이다.  &nbsp;  가출예찬을 비롯한 네 개의 예찬은 공히 오늘날 가족 제도의 근간인 ‘집’, 페미니스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일부일처와 그들의 아이들로 견고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깨부수고 그 질척질척한 애정으로 묶인 혈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허위의식과 기만성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날아오르자는 변(辯)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심리적 젖떼기’이고,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자신의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엄마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의 내부를 해체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아이의 독립적 인생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nbsp;  한편 스위트홈의 중추인 부부중심의 결혼 제도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유명한 성(性)혁명론자이자 성정치론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주장을 토대로 “관능적 체험의 결과로서의 성적인 애착”의 충족 관계가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고, 오늘날 사회의 생산수단 사유화로서 경제 기반만을 문제 삼게 되면서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 ‘집’에 씌워진 권위주의로 포장된 긍정의식을 해체하고 있다.  &nbsp;  스위트 홈의 일부일처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사례로써 제법 길게 인용되고 있는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원작의 만화  「사자에 씨(サザエさん)」 의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치 가장 정당한 이데올로기인 양 오늘날 가정을 지탱하는 일부일처제 중심의 ‘집’에 대한 충성심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교조성을 비판한다. 집의 힘에 의해 거세당한 사자에 씨의 남편 마스오와 에로티시즘에 무관심한, 오로지 일부일처를 지켜야 한다는 체념에서 집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는 사자에 씨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복속된 집의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 내고 있다. 이 만화가 일본인들의 최고 드라마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각색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그네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성정치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통치하려하는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nbsp;  가출을 말하는데 있어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인데, 극(劇)에는 없는 노라의 가출 이후에 조명을 맞추어 “집을 나가 매춘부가 되어도 괜찮다.”며, 중요한 것은 노라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인형으로 취급했던 ‘집’으로부터의 단절을 감행했다는 것, 즉 노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출한 것이므로 그녀 자신의 존재 형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선택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에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집”, 노라와 헤르마가 마주해 창조해서 만든 집이 아닌 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nbsp;  집 제도와 관련한 수많은 속박과 금기가 작동한다. 바로 이 금기로서 금지된 것들은 황홀감과 불안이라는 기묘한 쾌락을 대기시키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 금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으니 절대적 윤리 덕목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데라야마 슈지는 대다수의 스위트 홈을 둘러싼  금기란 “생생한 연대성”을 강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성을 잃지 않은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통에 찬성하지 않는데, 그 이유 또한 의외의 희극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계약으로서 사기인 기브앤테이크의 불균형” 때문이란다.   &nbsp;  한국사회도 형사상 범죄에서 ‘비범죄화’한 것뿐이고 여전히 민법상 불법으로 보고 있으니 간통에는 신의(信義)의 원칙, 즉 경제적, 심리적 균형에 대한 기대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깊숙이 응시하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일부일처, 집에 대한 환상이라는 뿌리와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집이라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이 경제조건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 간통에 대한 불안한 법적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nbsp;  <br>악의 예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디즘과 연결 지어 그 발음의 유사성을 지닌 ‘아베 사다(阿部定)’의 실화사건을 소설(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 영화화한(오시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 가학적 성욕을 둘러싸고 사다이즘이자 사디즘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며, 이들이 이러한 소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새로운 모럴,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사색과 행동의 제안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상에 악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 선이 있고, 습관화된 선행 속에 악이 있지 않은 지 자문해 보라고, 스스로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모럴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당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행복의 질서”는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nbsp;  이렇게 악의 예찬을 읽다 그의 “악의 숭배 속에 자유에 대한 인간적 욕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일상 파괴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이 예찬의 속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악을 숭배하는 것이지, 악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nbsp;  조금 시선을 달리해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비프야, 지금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안 돼. 모두가 너를 좋아해야 해.”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착각이 그를 하찮은 소시민으로 죽어가게 했다. 어떤 인간에 대한 확실한 평가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한 것이고, 욕을 먹음으로써 오히려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말끔하게 청결한 인간은 데라야마의 말처럼 무능한 인간이기 십상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의 시선에 속박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먼저 욕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데라야마의 충심은 스스로 얽어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nbsp;  아마 이 책을 구성하는 무수한 주제를 지닌 작은 글 조각들은 그 가리키는 곳의 삶의 엄중함 탓에 거의 모두가 매혹의 색채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약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가난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극적 연민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연대의식에 대해 막연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실체적인 책임과는 관계없이 분위기적 책임의식으로 치환하여 실질적인 무책임을 가린다.    &nbsp;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 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센 강가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수영도 할 줄 모른다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 후 그는 강가 길을 피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걸으며 다시는 그런 갈등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요령을 부린다. 죄책감, 위선, 기만과 심판의 문제가 뒤섞인 이 장면은 오늘의 시대가 책임의 문제, 인간 윤리의 문제를 엄중히 시험대에 올려야 할 사안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문제들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수히 건네며,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nbsp;  사실 이 책으로 이끈 동기는 정기현 작가의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의 짤막한 소개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제안, 데라야마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집’에 대한 가능성의 소망이었다. 데라야마의  「말을 거는 날」이라는 글은 진짜배기 소통, 대화, 사교를 잃어버린 오늘의 사회 속에서 소외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과의 친교, 아니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임의 제안을 보게 된다.    &nbsp;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임,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 등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지는 작은 모임이 많이 열려도 좋을 것이라며,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듯 대화내용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카타르시스를 향한 모임은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모임이 있다면 기발한 문예의 향연이고 친교 성장의 토양이 될 법도 하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기념일처럼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날로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법하기도 하다.  &nbsp;  반짝거리는 생의 걸음 길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빛나는 이 책은 그것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맥락을 주의깊은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 그 부정과 저항의 몸짓들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삶의 생동력임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몰라 옮기는 것으로 맺으련다. 삶의 미묘함이란...  &nbsp;  “모두가 착한 사람이고, 날씨도 좋고, 작은 새들도 지저귀는 데 일어나는 비극...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사랑이나 증오는 사악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미묘함과 닿아 있어서 세 배로 눈물 나는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01/60/cover150/k7128380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01606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