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필리아 (비의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06 Apr 2026 21:22:32 +0900</lastBuildDate><image><title>비의식</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903410318852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비의식</description></image><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대단한 익살극의 함정에 빠지다 - 절대성에 함몰된 어느 시인의 생애 - [삶은 다른 곳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96010</link><pubDate>Sat, 04 Apr 2026 12: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960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0463X&TPaperId=171960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1/92/coveroff/893740463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0463X&TPaperId=171960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삶은 다른 곳에</a><br/>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아베나리우스: 자네 소설이 따분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군, 밀란 쿤데라: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 『불멸(L'immortalite)』, 225쪽에서  &nbsp;  인간 행위 수행에 이르는 의사(意思)들을 요소들로 해체하면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경박한 것들의 수행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쿤데라의 지론인 듯싶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제목을 붙여도 될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가벼움’ 말이다. 이 소설 『삶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nbsp;이후에&nbsp;발표된 『불멸(L'immortalite)』 에서도 쿤데라는 제목이 잘 못 달렸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제목이어야 한다고 말하듯, 이 소설 역시 동일한 제목을 붙여도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독자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nbsp;  이 작품을 부랴부랴 펼쳐든 이유는 『불멸(L'immortalite)』 「3부, 투쟁」에서 『삶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인 야로밀에 대한 인물평을 하는 한 단원 때문이었다. 랭보의 《지옥에서 한 철》에 등장하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시구를 맹신함으로써 ‘자기 무덤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 풋내기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잡아챈 것이다. 배속을 간질이는 쿤데라의 그 흔쾌하게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 빚어내는 해학적 문장들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속에서 어떻게 시인을 꿈꾸고 그 꿈의 성분이 된 것들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것도 희극들일 것일 텐데, 그 빚어지는 삶의 현실태(現實態)를 보면서 한바탕 웃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진정 웃음에 목말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r>위에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쿤데라의 소설들이 다채로운 요리들이 나오는 향연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註1)배실배실 나오는 웃음, 혼자 킥킥대며 그 가볍기 그지없는 문장을 쓰는 작가의 심사(心思)를 떠올리며 인간의 세계가 한없이 경박한 것들의 집합임에 수긍한다. 서너 줄로 내용을 요약한다면 랭보의 문구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현대시를 사랑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 되자, 죽도록 사랑하던 현대 예술을 즉각 거침없이 규탄한다. 그리곤 이 위대한 계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냉소하며 부인하고, 이 난폭행위를 통해 성년(여자를 알게 되는 사내 됨)의 삶으로 들어가는 이 젊은이는 부인 행위, 즉 절대성(그에게는 현대성이 곡 절대이고, 그래서 죽음의 절대성은 곧 그에게 달콤한 향기이다)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광신을 쏟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희생하는 사내로서의 용기 때문에 가담하는 광경,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꿈과 각성의 비극적 불일치 속에 서글프게 죽는다는 이야기다.   &nbsp;  내용을 간추리고 보니 보잘 것 없기 그지없지만, 그침 없이 흐르는 사람들의 그 경박한 배경 속에 혁명의 시대가 소극(笑劇)이 되어 흐르고, 역사는 희극(戱劇)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간들의 욕망의 의지와 달리 늘 여기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삶이 놓여있음을 뼈저리게 감각하게 만든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비참의 웃음이 그만 묵직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이 풋내기가 고수하는 ‘절대적 현대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 하찮은 죽음이 외려 연민보다는 고작 그렇게? 라는 조소가 흘러나오니 말이다.          &nbsp;  자, 웃기는 것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열정에 찬 확신이 그가 체험으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에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고, ‘현대적’이라는 단어가 늘 내용이 변하는 파악할 수 없는 개념임을 어떻게 깨닫지 못했는가라는, 또한 그렇게 절대적 현대성을 위해 사랑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인간이 사랑하는 여자를 배반하고 사회주의혁명 정부의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현대성’을 수호한다는 광신은 사실 혐오스럽고 소름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따분한 얘기는 소설이 자아내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기에 예서 줄이기로 하고,  야로밀의 출생부터 시인을 꿈꾸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따라가 보자. 삶이란 콩트이고, 코미디이며, 한낱 유희적 행위의 우연적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nbsp;  “시인의 어머니가 어디에서 시인이 잉태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볼 때면 딱 세 가지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 - 소설 첫 문장  &nbsp;  잉태 장소에 대한 설레발이 몇 쪽에 걸쳐 진술되는데, 이 기억이란 것이 삶의 상황 맥락에 따라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다.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는 말도 우습기 짝이 없지 않은가. 어쨌건 가난한 엔지니어 청년의 씨를 잉태한 시인의 어머니는 아버지 재산의 권위에 의지해 결혼을 성사시키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아들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붓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외톨이로 겉도는데, 아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엇, 야로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야로밀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겼으니, 셔츠, 머리 모양, 사용하는 단어.., 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의 이마 위에 친구들의 호감을 밀어놓는 표지를 새겨놓은 것이다.  &nbsp;  이것은 시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시인의 어머니가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들의 목줄을 잡고 놓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삶은 다른 곳에’라는 표현은 이같이 그 의지 또는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저쪽 다른 곳에 있다는 가벼운 진실을 말하는 것일 게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엉뚱하고 예상과 다른 반전들이 야기하는 웃음의 연속이다. 사람 얼굴을 잘 그리지 못하는 탓에 인간의 몸을 한 짐승으로 개를 그리는데, 이 기묘한 그림을 아들의 비범한 재능으로 여긴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에게 전문 교습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림을 받아든 현대예술의 전문가인 화가 또한 “아이가 종이 위에 표출해 놓은 저 너무도 독창적인 내면세계”를 해독한다. 야로밀은 단지 사람의 얼굴을 못 그리는 바람에 그냥 어쩌다가 개(犬) 인간이라는 경탄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음에 불과한 것인데, 이 황당한 내면의 독창성은 아이에게 금지된 이해의 심연을 바라보듯 하는 자기 관찰에의 관심을 부여한다. 쿤데라의 이러한 해프닝의 연출, 삶의 모든 수행들이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유희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 가벼운 존재들인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음에 독자를 동참하게 한다.   &nbsp;  <br>이 사내에도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또 청년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자기 부모의 집 벽에 걸린 정물화나 풍경화와는 아주 다른 현대 예술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은 현대 예술에 대한 우월적 환상을 심어준다. 야로밀은 자신이 집에서 그린 그림을 화가에게 보여주고, 그 그림들이 모두 머리가 없는 여자 나체들이기에, 화가는 인간의 얼굴을 인정하기를 집요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해한다. 급기야 시인의 어머니는 인간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아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따지기 위해 화가를 방문한다. 이 방문에서 화가와 시인의 어머니의 대화와 간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대단한 해프닝, 길이 남을 소극의 명장면이라 해도 될 듯싶다.   &nbsp;  머리 없는 여자들의 그림은 “매순간 우리 삶을 뒤흔드는 전쟁 사이에 어떤 숨은 연관”의 느낌이 되고, “전쟁의 피로 물든 세상 뒤에서 나타나는 사랑”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이 의미심장한 진지한 해석에 매료된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의 혀가 자기 입안으로 들어 온 것을 느낀다. 이 순간적 상황에 봉착한 여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의 묘사는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간음의 자기 정당화에 대한 내심의 변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잠깐 생각할 틈이 있었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므로 답은 뒤로 미루고 지금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간의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는 얘기에서부터 “자신을 순진무구한 반-성숙 상태 속에 놓아둔 남편에 대한 즉각적 분노로 옮겨가며, 그 분노가 장막이 되어 자신의 헐떡이는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로 이어지는데 어찌 진지함 속에 이렇게 가벼움이 잔뜩 내재할 수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진지함에 빠져있다고 여기겠지만)  &nbsp;  이 소극들로 빼곡한 소설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시인 야로밀의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쿤데라가 어깃장을 놓으려는, 아니 통상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어떻게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그 가벼움의 진상 드러내기이기도 할 것이기에 옮겨본다. “녹아내려 물로 변하는 슬픔/ 수면이 올라오고 또 올라가 내 눈까지 차오르는 초록빛 물/ 슬픈 몸 / 한없는 물을 가로질러 내가 쫓아가는”,  이 시는 자기 집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것을 열쇠구멍에 바짝 눈을 갖다 대고 훔쳐보며 처음 보는 여체에 대한 갈망을 적은 것이다. 대체 어느 누가 이 시를 사춘기 소년의 관음이라고 읽겠는가. 이 시의 근원에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야로밀은 이 시를 타자기로 쳐서 종이에 옮겨 놓고는 그 시가 단순한 단어의 연속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사물이 됨으로써 시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소멸이 아니라 오랜 지속이 예정되었음을 느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실 쿤데라의 소설은 그 주제의 용의주도한 이야기 속 배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존재의 경박성에 대한 까발림이 주는 흔쾌한 즐거움, 생이 무겁다고 쳐진 몸을 가볍게 떠올려주는 그 가벼움이 만들어내는 배에서 올라오는 웃음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nbsp;  이 가벼움의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둔중한 역사성, 즉 역사를 해석하는 자의 지금 여기서 라는 상황 맥락이라는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달리 수용되는가를 시인의 어머니가 화가와의 화간(和姦)을 단절하고 아들과 남편에 충실한 여인으로 되돌아와 자책함으로써 애인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나치에 박해받는 유대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끌려가 사망했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겠는가. “이제 그녀는 남편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배신했다고 머리카락을 집어 뜯”는다. 이때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말한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완전히 끝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돌아 볼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성이란 것은 한 여인의 상황변화에 따라 춤추는 사랑의 감정을 빗대 이렇게 경박하게 날아오른다.  &nbsp;  “자신의 삶이 아무 사건 없이 빈약하기 때문에 자화상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347쪽  &nbsp;  소설은 내내 자기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여자의 몸, 여자에 대한 몽환적이고 유희적 몽상으로 가득한 풋내기 야로밀의 애정사로 가득하다. 시인의 어머니가 읽는 아들의 시는 저 높은 형이상학적 지대를 거닐지만 정작 그 시들은 생식과 성교의 기관, 달콤한 사랑의 나라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추상의 지대, 상상의 테마였을 뿐임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목줄로 길게 연결되어 묶인 야로밀의 경험의 협소함은 그야말로 궁핍의 영역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로밀은 이 궁핍의 지대에서 자유의 지대, 진정한 현대성의 왕국을 향한 도약이 도래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여자와의 첫 잠자리의 실패 이후 못생긴 가게 점원 빨강머리 여자가 그를 성년의 남자로 만들어준다. 사랑의 영역, 여자에 대한 몽상이 현실의 사건이 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 인간의 생의 변곡점도 그가 주도하고자 하는, 꿈꾸던 그런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삶은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자동성이라는 법”의 실존이 삶의 진실임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nbsp;  여기서 우리네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통제의 실패,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하게 보지 못하는 무능력의 실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사랑의 절대성을, 삶의 궁극의 질서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알지 못하는 삶의 행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불행의 도정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것을 비극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가볍고 하찮아 비극이 되지 못한다.  혁명의 대열에 참가한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 시인, 절대성의 메신저가 되고자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깃든 경박함으로 인해 그의 죽음조차 불꽃처럼 승화하는 혁명시인의 그럴듯한 자살이 아니라 몽매한 시 나부랭이, 기막힌 똥덩어리를 써대는 애송이라는 웃음거리가 되어 차가운 밖으로 내던져지고 폐렴으로 앓다가 죽듯, 불꽃 없는 죽음을 맞기에 더욱더 비극의 그 어떤 위대성도 없는 소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되고 만다.   &nbsp;  이 소극은 삶은 항상 다른 곳에 있기에 생의 통제는 궁극적으로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정작 자기 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을 믿었던 야로밀이지만 그 인생의 무엇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 표피적 삶이라는 경박한 생의 걸음에 불과했음을 독자는 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이 인간의 실체임을 확인케 하는 쿤데라 의도의 발칙함에 굴복하게 된다. 실상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야로밀이라는 풋내기보다 더 아는 것도 없음을 아는 독자 어느 누가 자기 삶의 가벼움을 부인 할 수 있을까. 공포의 시대, 경찰 연수원 단상에 앉아 시를 읊었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당하는 부끄러운 이름 모를 시인의 피 흘리는 미소를 띤 순진무구, 나는 그 익살극의 함정에 빠져 어떻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다.-------------------------(註1)배실배실 웃음이 나오다: 모순적이거나 예상과 다른 반전, 또는 누군가의 어설픈 행동이 엉뚱하게 느껴질 때 나오는 웃음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註2)소설 주인공 야로밀은 체코 사회주의 시의 창시자로 알려진 야로밀과 같은 24년 남짓 삶을 살다간 체코 시인, ‘이르지 볼케르(Jiri Wolker, 1900-1924)’를 모델로 한 것 아닐까하고 추정해본다. 소설 속에서도 스치듯 한 번 거론되는 시인이다. 고난에 찬 프롤레타리아들의 삶이 있고,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믿음, 해방과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역설, 집단주의와 상호연대와 자기희생에 대한 강조를 실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1/92/cover150/893740463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1923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내밀하고 도발적인 굴욕의 푸가 - [굴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83958</link><pubDate>Mon, 30 Mar 2026 15: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839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19&TPaperId=171839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9/17/coveroff/89320451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19&TPaperId=171839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굴욕</a><br/>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굴욕의 상처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직접 침해한다. 굴욕은 괴로움, 취약함, 욕구, 몸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는 사적 차원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공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안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밖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55쪽에서  &nbsp;  어쩌면 웨인 케스텐바움의 이 책은 “숭고와 ‘굴욕’ 사이에 길을 내는 삶”을 살았던 장 주네가 부활하여 쓴 것 같은, 굴욕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의 정당화를 위해 굴욕의 변신술을 익혀 온 인간 존엄의 내밀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총 11개의 푸가로 구성된 이 책은 제 1푸가 「알몸 수색」에서 ‘굴욕’이라는 감정 또는 정동에 대한 정의와 유형들의 정리를 시작으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거나 상상될 수 있는 사실들 속에서 저자 자신의 일상적 굴욕에 대한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어찌나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그것이 마치 굴욕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니 이 악의로 범벅된 치욕의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금술에 의해 생의 유익하고 긍정적인 성소(聖所)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nbsp;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저자 자신의 굴욕적 전사(全史 혹은 前史)를 발가벗겨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이유를 바로 그 굴욕의 역사라는 “심해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쓰고 있듯,  ‘굴욕’이라는 단어를 되뇌는 데서 고통과 슬픔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이 단어의 되풀이가 용서와 위로의 향기가 되어주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굴욕의 감정이란 정말 더러운 정동(affect)인데, 내 안의 무언가가 뒤집혀 수모가 되고 불안정을 야기하는, 누군가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느낌이다. 육체이건, 정신이건, 이 굴욕의 감정은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굴욕은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고갈시키고 소모시키는 과정이다. 굴욕은 현존했던 것, 온전하고 견고하고 중요했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그 존재의 주체를 한없이 축소시켜 마침내 탈주체화하여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치게까지 하는 추악한 감정이다.  &nbsp;【웨인 케스텐바움,&nbsp;시인이자 미술가이며 영화제작자이고 예술비평가로&nbsp;뉴욕시립대 비교문학 석좌교수이기도 한 퀴어연구 창시자 중 한 명이다.&nbsp;퀴어연구의 대표적 창시자 이브 코소프스키 새지윅에 영향을&nbsp;받은 학문적 동료이자 정서적 친구이기도 하다】<br>그런데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내면서 ‘굴욕’과 결코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필수 덕목으로 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사실 상상해 볼 것도 없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굴욕은 이미 모든 곳에서 차고 넘쳐 통과의례적 사건임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체가 뒤집어지는 이 수모의 체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즉 굴욕을 겪어냄으로써, 아니 굴욕의 만연, 그 짓밟힘을 침착하게 견뎌내기 위해서 양감감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굴욕을 생의 필연적 운명으로 수용하는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주인공 야곱이거나, 혁명의 에너지이자 전주곡으로 삼은 프란츠 파농이거나, 자아 행진을 강제 중지당한 예수의 숭고함처럼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 쯤으로 수용하는 것 말이다. 굴욕을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바꿔내는 감정능력을 갖추는 것일 게다.  &nbsp;  하지만 굴욕을 이렇게 긍정성으로 수용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해서 저자 케스텐바움의 이러한 양가감정 갖추기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책의 작업을 남들에게 가해지는 굴욕을 감지하는 “굴욕 레이다(humiliation-radar)를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며 ‘관찰자 혹은 조사자’로서 굴욕의 연금술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지만, 미군 병사에 의해, 개 목줄에 묶여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교도소 바닥에 쌓아올려진 이라크 병사들의 굴욕이 과연 긍정성과 유익의 원천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나치의 아우슈비츠 절명수용소에서 인간이 아닌 한낱 물건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수감자의 굴욕은? 백인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절단당한 신체로 거꾸로 매달린 흑인의 참담한 굴욕은? 케스텐바움은 굴욕 받아 죽을 때까지 씻어내지 못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처럼 대속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라는 말인가?   &nbsp;  케스텐바움의 주장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비인간으로 탈주체화를 강요당한 인간에게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 않을까.  “굴욕을 다 겪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는 문장처럼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경우, 그래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경우라면, 혹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큰 고통이 지나면 형식적인 감정이 올” 수도 있겠다. 케스텐바움은 시몬 베유의 글을 오독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 안에 들어갈 방법은 자기 소멸뿐, 극심하고 ‘전면적인 굴욕의 상태’에 오래 머무는 것뿐이다. (시몬베유,『인간의 성격』)”는 글은 낮고 작아져 스스로 겸허 속에서 살아갈 때,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  ‘전면적 굴욕’이란 인간적 지위와 위치의 하락을 강요하는 일시적 관계적 긁힘인 굴욕이 아니다.  &nbsp;  더구나 조르조 아감벤이 ‘탈주체화’라고 명명했듯 원치 않는 물질이나 작용력에 의해 무방비의 육체가 갑작스레 침범당하여 고통을 느끼고,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 주체이기를 멈추도록 강제 작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훼손당하는 지형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은 존재할 가능성을 부인당하고, 결국 소멸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가. 케스텐바움은 성추행자인 상원의원, 자기 딸에게 욕설을 퍼붓는 헐리웃 대스타, 고급매춘부를 출장에 동행하여 시민에 지탄받는 뉴욕주지사의 공개 석상에서의 사과연설을 굴욕이라 칭하고 있는데, 과연 그 추락이 숱한 약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굴종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nbsp;  이러한 냉정한 비교분석 없이 그저 그네들의 오만이 초래한 도덕적 법적 부정의 감정에 대한 질타보다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양가감정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 무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 전반의 논지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케스텐바움은 굴욕의 본질이 더럽고 악한 것임을,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하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고 나아가 승화하는 동기로 삼고 싶어 함을 안다. 훼손당한 주체들이 안고 가야만 하는 그 고통을 흔쾌하게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사고과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 해소하고 싶어함을 이 글쓰기를 통해 케스텐바움은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nbsp;  크리스테바가 “언어가 침을 흘린다. 대화가 똥을 싼다.”라고 통제되지 않은 단어를 마구 흘려내어 올바름의 규칙들을 뒤집어 소위 구리고 습하기 그지없는 비체(卑體)문학의 영광(?)을 구현했다는 루이 페르디낭-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처럼, 표준화된 언행을 위해 무언의 조절이라는 고된 작업을 내던진 ‘속 뚫림’의 시원함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퍼포먼스들을 즐기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 “굴욕의 대문은 우리들 삶의 일상에 늘 열려”있기에, 그것에 익숙해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nbsp;  그러나 저자가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짐 크로(Jim-Coow)눈총’이라는, 다른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하기를 그친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침 뱉는 자의 눈총, 앞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냉담함이나 무반응, 옹졸하고 편협한 비승인의 악의적 눈길에는 인간이 없다. 더러운 것, 기분 나쁜 것, 사람이 없는 것을 보는 가해자의 눈길은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을 가하겠다는 집요한 선언이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출처: 『사람, 장소, 환대』)”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정의에서처럼 사회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람이 아닌 사물로 처해지는 굴욕을 당한 존재가 과연 그 굴욕의 경험을 구원 또는 승화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굴욕을 야기하는 내용이나 상황, 당하는 사람의 현실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일률적으로 이러한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의 단어에 개념화함으로써 굴욕의 의미를 호도(糊塗)하고 있는 듯 보인다.<br> 매춘부를 데리고 공적 행사를 다닌 뉴욕지사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동반하여 TV화면을 마주보고 수사를 동반한 전혀 사죄 같지 않은 사죄 담화를 발표하는 상황과 발길질을 일방적으로 감수하여야 하는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의 굴욕이 동일한 것인가? 목소리 톤이 높고, 긴 머리를 한 남자 아이가 아이스크림 점원에게 여자 아이로 인식되는 것과 흑인들을 거꾸러뜨리고 종속상태를 선전하고 강화하기 위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린치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뉴욕경찰이 가하는 굴욕이 같은 범주로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케스텐바움이 이들 굴욕을 옹호나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굴욕이 사회의 시스템이고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이기에 그것을 삶의 배경처럼 인식함으로써 승화된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독하게 이상주의적이며, 윤리의식을 모호하게 할 우려가 심각해 보인다.  &nbsp;  성소수자로 인식되어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이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굴욕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즉 탈주체화를 목적으로 하는 굴욕과 일시적, 상황적 모욕으로서의 굴욕은 구분되어야 한다. 즉 나는 케스텐바움과 같이 굴욕과 부끄러움을 구분하는 회피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굴욕을 나는 탈주체화로서의 굴욕과 모욕으로서의 굴욕으로 크게 구분하여 설명하여야 후자의 굴욕을 케스텐바움의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즉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으로서 굴욕에 겨우 동의 할 수 있을 것 같다.  &nbsp;  <br>케스텐바움은 말한다. “나는 굴욕에는 이골이 났어요 / 최근에는 / 굴욕을 당해도 굴욕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예요.” 라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내 목표다” 라 선언하며 그곳에 행복한 마취가 있고 무심이 있으며, 굴욕이 더러움을 씻어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미학 놀음, 예술적 신선놀이라는 상상의 공감에서나 거둘 과실(果實)로 여겨진다. 그는 장 주네를 호출하여 침과 악취, 분비물로 흥건한 음습함을 반복적으로 성애화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가치의 안과 밖을 뒤집어 굴욕의 아픔을 초월로 가는 우회로로 삼았다고, 더러움 속에서 새로운 신성함을 발견했다고 평가한다. 주네가 찾은 것이 정말 “칵테일 빛깔의 신성함”이었을까?   &nbsp;  관념적 추상에 터 잡은 존재론적 성찰과 현실적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빚어지는 굴욕은 결코 동일한 개념적 범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케스텐바움의 글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굴욕을 성상화(聖像化)하기까지 하다가 “너무 잔인하게 취급당한 굴욕의 기억 앞에서 사람들은 뒷걸음친다”고, “그 심한 고통 탓에 묘사의 재능을 상실하고, 그들의 언어는 굴욕의 흔적인 공백을 가리켜 보일뿐, 그 공백을 충만하게 채워내지 못한다”고 까지 굴욕 이후에 말을 잃은, 부재하게 된 존재의 극한적 고통을 이해하는 듯 말하기도 한다. 굴욕이 이러한 극한적인 것이라면 이것을 그 무슨 승화와 성화의 원천으로 삼겠는가? 언어도단이요, 미학에 몸을 감춘 채 머리로 하는 공허한 사적 위안 놀음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굴욕을 반복할 수 있는 자는 신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nbsp;  공중화장실, 백화점, 극장 등을 배회하는, 즉 크루징(cruising)을 하는 게이에겐 굴욕의 시선이 항상 온몸에 들러붙어 존재를 한없이 축소시킬 것이다. 그런 사람에겐 상시적 굴욕을 일상성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 굴욕이라는 주체의 훼손을 신선한 쾌감으로 전도해야만 살아 갈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매 순간을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굴욕의 상시적 고통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다. 다시 말해 굴욕이 인간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 빚어내는 불가피성이라면 존재의 주체성을 앗아가는 이 악의성에 대한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지, 굴욕 그 자체를 내면화하는 것은 영원한 시선의 노예적 삶의 익숙성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nbsp;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바닥으로의 추락, 즉 왕의 굴욕이 도덕적 부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들을 알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졌다는 해석은 물론 옳다. 굴욕이 만들어 낸 “여파(餘波)의 위안”에 대한 이러한 황량한 통찰이 굴욕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케스텐바움은 자신의 도덕적 패착이 몰고 온 비극의 결과를 자기 지위의 추락이라는 굴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굴욕이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굴욕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내적 도덕성의 결여, 위치의 우월성이 가져온 교만의 착각에 동반되는 정상화로의 복귀이다. 케스텐바움의 자가당착적 해독이 불러온 두루뭉술한 개념 정의의 불비로 인해 그의 다채롭고 풍부한 사회적 감정의 고찰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아쉬운 텍스트가 되고 마는 것 같다.  &nbsp;  오히려 케스텐바움의 여러 푸가 중에서도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에서 점령군 나치의 첩이라고 조리돌림 당하느니 자기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범의 길을 선택한 헤티 소렐의 인용이 가장 동의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시민대중의 무감각에 의한 집단적 짐크로의 눈총이 도덕적 무능력이라는 악의임을 해독 하는 시선 말이다. 프랑스 시골마을 주민들의 자신들만은 확고한 윤리적 우월감을 갖추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기초해 헤티를 향해 더러운 존재라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곤 추방하는 그 무심한 굴욕의 강제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이어 케스텐바움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다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이 남자로 읽히는 데 실패함에 따른 굴욕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감정적 긁힘의 정도를 객관적 척도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헤티 소렐의 굴욕과 무성성, 혹은 양성성의 존재로 읽혔음으로 인한 내적 굴욕은 조금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전자에는 탈주체화의 강제가 있지만 후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즉 동일한 비교대상으로서의 굴욕이 아니다.  &nbsp;  다만 케스텐바움 자신이 백인으로서 굴욕의 가해자라는, 즉 짐크로 눈총의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윤리적 수렁인 시선을 내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는 성찰적 이해는 고귀한 교훈을 던져준다. 우리들은 굴욕의 수용자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굴욕을 가해하는 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존재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무심히 행사되는 굴욕의 강제는 그 상대에게 끔찍한 내면의 좌절감과 자기혐오, 굴욕의 장면이 초래한 기억으로 야기된 인격의 훼손과 마비로 삶의 황폐화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케스텐바움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기 황폐화, 굴욕의 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도록 이끄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TV 리얼리티 쇼, 특히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이나 신체의 교정을 통해 'before vs after'를 선보이며 자신의 맵시나 몸을 굴욕스러워 하는 여자들의 변화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미운오리새끼들을 백조로 바꿔준다고 선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nbsp;  시청자들은 왜 이러한 굴욕의 퍼레이드에 흥분하고 감동하며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몸을 수술대에 바치거나 의상과 미용술에 맡기는 계약에 동의하고 그 수술 또는 성형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굴욕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유일까. 시청자들은 운명을 바꾸고 행복을 쟁취한다는 잘못된 신화적 감동, 그 근거 없는 믿음에 근거한 기쁨에 도취하려는 것일 테고, 참가자는 여성성 혹은 미적 성취라는 것을 확보함으로써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고 그것이 곧 행복쟁취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수술의사로 참여한 의사들의 말을 보면 정말 가관인데, “XX에게는 여성화 대책이 더 필요합니다.”라거나, “우리가 목표를 성취한다면 그녀는 정말 예쁜 아가씨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들에서 우리는 의료윤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려는 욕구말고 그 무엇이 있는가.  여성화 대책이라니, 예쁜 아가씨가 목표라니, 더구나 이러한 굴욕 프로그램에 환호하는 시청자 시민대중의 그 무심한 가해자의 동참행위는 정말 끔찍스럽기까지 하다.    &nbsp;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이 OO이 아빠는 청소부이시니 도시 청소에 대해 급우들에게 설명해주면 좋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아이가 도시 청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유사한 사례들이 학교, 직장, 여러 공동체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심을 가장한 채 앞에 있는 인간의 내부를 외부로 꺼집어내 존재를 축소시키는 행위들 말이다. 저자 케스텐바움의 내적 고백의 이야기들은 텍스트에 맡기련다. 아마 이 책을 읽다보면 굴욕의 똥통을 뒹굴다가 나온 느낌이다. 똥통에 떨어진 더러워진 인간 존엄의 이야기들을 헤엄치다보면 잠간 내민 머리통에 다가오는 신선함이 마치 세계의 신성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굴욕이란 그 어떤 미화로도 깨끗함으로 돌아오는 감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nbsp;  동의 할 수 없는 글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굴욕으로 뭉쳐진 케스텐바움 몸의 항변, 굴욕의 승화를 향한 글쓰기의 의도를 알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 음악 등 황홀할 정도의 예시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더불어 우리들이 잃어가고 있거나 망각한 도덕감각을 회복하는 데 어떤 단서를 수확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굴욕의 백과전적 탐색을 통한 이 자전적 고백서는 굴욕의 밑바닥을 지나온 한 인간의 내밀한 성찰 과정이기도 하다. 이 굴욕의 다이어리는 훔쳐 볼만하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9/17/cover150/89320451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9172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앎의 문제, 인간 무능성을 깨우는 가장 본질적인 것: 오이디푸스 비극을 중심으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link><pubDate>Thu, 19 Mar 2026 20: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329&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0/94/coveroff/899129032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213&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82/coveroff/899129021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4886&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5/coveroff/893102488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2176&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47/88/coveroff/893746217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591&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3/60/coveroff/8932920591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왜 프로이트 자신의 정신분석적 발견에 ‘오이디푸스 콤플레스’ 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이것은 21세기 오늘의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삶에 있어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nbsp;소포클레스의 비극&nbsp;《오이디푸스 왕》은&nbsp;계급주의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유산을 과신하는 논자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그 무참한 몽매성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통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nbsp;  1.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의 의미  &nbsp;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공연되었던 기원전 5세기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조금은 해야 한다. 당대의 아테네인들은 비극(연극)을 자신들 도시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는 것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 비극들이 모두 기원전 5세기의 7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겨나고 사라졌음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로서 폭발한 문화적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비극은 그들의 교육과정에서 읽고 암기되었으며, 비평가와 철학자들은 이 극들을 읽고 연구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시민에게 감정적, 지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긍정적인 교육경험을 준다”고 보았으며,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는 시민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인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음을 들 수 있겠다.   &nbsp;  그리고 매우 중대한 사실인데, 이 비극(연극)들은 아테네에서 매년 개최되던 디오니소스 대축제(국가적 종교축제였음)의 주요행사로 단 한 번 공연되기 위해 쓰여져 무대에 올려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인에게는 이 비극 관람이 오늘날 우리들이 연극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는데, 연극관람, 디오니소스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민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축제에는 아테네 시민은 물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는 외교사절들의 의무적 참석과 국가 관료인 아르콘(집정관)이 직접 경연에 참가할 세 명의 극작가 선발부터 행사를 주관했다는 점에서도 비극 공연 참관이 시민정치 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nbsp;  이 행사의 의식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아테네 제국의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의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배력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의도된 스펙터클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부심 가득한 의식이 끝나면 하루에 한 작가의 세 작품씩 3일에 걸쳐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힘의 과시라는 의식 이후에 시민생활의 토대가 산산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세계를 보여주는 비극과 정치적 부패를 비롯한 부정한 삶들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한 희극이 공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이 두 극단인 긍정성의 의식과 부정성의 연극이 결합된 축제는 바람직한 도시국가는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낯설면서도 신선한 그들의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nbsp;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민적 자부심이 불러 올 자만이 일으킬 비극성을 통해 시민의 바람직한 도덕적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비극 작품들은 그들에게 지적, 감정적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이러한 시민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기성찰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은 오늘 우리들이 이 작품에서 발견해야 할 앎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필수적 배경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임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지중해 패권자로 군림하는 아테네 제국처럼 오이디푸스는 지적이고 존경받는 성공한 인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알지만 신탁이 예언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모범적인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데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 인간적 비극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성찰로 나아가게 된다.&nbsp;<br>현전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예외 없이 이러한 구도를 따른다. 디오니소스 대축제(이데올로기 과시의 의식+비극(연극)공연)는 이렇게 시민들이 일반적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자기반성을 하는 감정적 연대의 장(場)이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시민적 자기성찰과 비판적 감정적 연대의 장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매혹적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어떠한 의미를 지닌 배경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이해는 갖춘 것 같다. 이제 20세기 독일의 한 정신분석가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인물을 자신의 발견 이론의 이름으로 삼았는지를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nbsp;  2. 20세기 독일 사회의 고대 그리스의 집착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nbsp;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배경의 파악이 필요한데, 19세기 전후에 시작된 독일인들의 정체성 발견을 위한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 즉 자기이해의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헤겔부터 시작해서 실러, 바그너, 니체에 이르는 독일 사상가들은 마치 입을 모아 말하듯 그리스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는  “역사에서의 빛의 초점이었으며,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의 이름으로 유럽의 교양인들,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고향처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라거나, 니체 또한  “더 이상 어느 곳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향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우리가 우리의 고향이기를 바라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그리스다.”라며 독일인들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음을 천명한다.   &nbsp;  <br>이것은 바그너의 독일국가주의라는 흉물스러운 정치적 열정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독일과 그리스 사이에 친족관계라는 무모한 혼합을 통해 자신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이한 논법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묘사한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를 침입하여 스파르타와 코린토인을 구성하게 되는 도리스인을 독일인 자신들이라고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공통된 신체적 특징인 큰 키, 금발, 푸른 눈동자, 잘 발달된 근육을 종족 아리아인의 전형적 표지라고 진리로 확증하기에 이른다. 독일인들은 이같은 날조된 정당화의 궤변에 열광하며 감명 받은 것은 물론이다.   &nbsp;  독일의 모든 교육기관에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 대한 교육과정이 필수가 되고, 모든 교육제도는 이러한 그리스 애호 열풍에 부응하기위해 재편되기까지 한다. “국민이 세대에 걸쳐 그 나라의 본질을 유지하며, 국가는 없을지언정 독일 국민은 언제나 존재한다. (...) 신화는 한 국민에게 특유한 것으로 한 국민에게는 그러한 신화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과 독일 정체성의 신화 발명이 이렇게 독일에서 출현한다.  이황당한 계보학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혈통에 대한 왜곡된 극단적 환상이 지속되어 편견의 역사를 만들고 그릇된 독단은 확실성이 된다.  &nbsp;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는 이렇게 환상에 맹목적으로 심취한 독일인의 정신과 섹슈얼리티의 발달에 대한 거대 서사를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대유행에 따르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 탁월한 지성은 오이디푸스에서 자신의 태생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탐구해나가는 그 고통스럽고 집요한 자아탐색이 독일인들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계 독일인은 국가주의적 열정이 절정에 이른 독일인들의 민족적 가족사에 욕망과 폭력이 얽힌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기로 한다. 그리스에 순수하고 순결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독일 국가 신화를 위협하는 망측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nbsp;  독일인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이다. 날조된 독일인들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뜨림은 물론 이 똑똑한 천재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최신 유행하는 그리스 고전이 갖는 위상, 즉 그 권위를 올라타기 위한 전략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꾀바름은 곧바로 권위를 지닌 이론으로 격상된다. 프로이트는 독일인들의 그리스 열광을 고의로 이용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왜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이론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의 배경까지 더듬어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의식과 독일 사회의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부수는 이름의 배경과 더불어 그 토대로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르렀다.  &nbsp;  3.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이&nbsp;말하려는 것 ; 앎의 불가능성   &nbsp;  앞서 언급했지만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된 연극이라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大 그리스고전문학 교수를 지낸 사이먼 골드힐은 그의 역작 《Love, Sex and Tragedy》에서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Oidipous)라는 말로 말장난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안다’ 라는 뜻을 가진 oida라는 말과 ‘어디’라는 의미인 pou를 조합하여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름은 ‘나는 어디인지 안다’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이 분열적 말놀이를 통해 앎에 대한 매혹과 은폐와 폭로에서 하나의 전기를 맞게 하려한 것이라고 해독하고 있다.  &nbsp;  《오이디푸스 왕》은 단순히 근친상간이나 오인된 정체성에 관한 슬픈 이야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그 이름에서 말장난을 하였듯, ‘너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의도이자 공연행사에 부합하는 주제였다. 이 극이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통찰에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비극을 읽어본 사람들은 극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물음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나쁘거나 타락한 사람이 아니다. 지적이고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며, 주변 상황의 통제를 위해 자신이 지닌 온갖 수완을 사용하여 운명에 투쟁하는 인간이다.   &nbsp;  자기 삶의 방향을 통제하려고 애쓰지만 운명 또는 우연이라 불리는 다른 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끈다. 자기 삶의 이야기의 통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자기 삶의 파괴, 삶의 실패로 귀결된다. 즉 이 비극은 인간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 실패,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히 보지 못하는 무능함을 가리킨다. 우리들 모든 인간은 오이디푸스와 같이 자기 삶을 통제하려고 하기에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자극 혹은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삶에서 적절한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nbsp;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한 남자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비극이라고 여기지만, 이 극의 진짜 충격적인 목소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야말로 가장 자기기만의 참극을 초래하기 쉬운 순간임을 끈질기고 불안할 정도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극한의 비극성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의 해독자이자 문제해결사이며 앎의 추구자이다. 그리고 성공을 거둠에도 그럴수록 점점 더 불운한 자기파멸을 향해 나간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비극인 것은 인간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답을 찾는 능력을 훼손시켜 놓는데 있기 때문이다.   &nbsp;  이 비극의 중추골조는 한 인간의 혈연의 관계망이 뒤엎어지면서 그 관계망이 뒤죽박죽이 되어 찢어발겨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내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은 그의 형제이거나 자매이기도 하다. 자아를 규정하는 통상의 언어가, 근친상간에서는 내파(內波)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할 수 있는 범주는 아무것도 없다.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가족 가치가 붕괴되는 전조일 뿐이다. 잘 안다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불행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잘 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어쩌면 이러한 앎의 진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이디푸스를 선택한 것은  결과론적이지만 정말 매우 통찰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로부터 독일인과 그네들 사회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망상이 초래할 자기파멸을 보았던 것일 게다.   &nbsp;  4. 결어 ; 범국민적 자기비판의 공통감각은 불가능한 것인가  &nbsp;  오늘 한국 사회의 모든 개인, 사회, 정치적 수행에 있어서 갈등과 반목은 앎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서 초래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에 대한 오만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오인은 지금 벌어지는 이 세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적절한 인식을 형성하는 지에 대해 안다는 것, 이러한 앎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야기하는 불행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비극을 오늘날에는 소설과 시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가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게 하는 과거와 그 파묻혀 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스 비극공연처럼 그 감정적 연대적 자기비판을 공유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nbsp;  오늘에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독자(관객)로 하여금 한 인간의 자멸을 공포감에 차서 바라보게 함으로서 내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극 작품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뜻 깊은 의미를 열어놓는다. 오만해지고 부패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앎의 경계를 두려울 만큼 읊어대는 이 비극은 인간 앎의 궁극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통함을 상기시킨다. 내 날 것의 마음을 보려는, 생의 통제력을 지니려고 시도하는 내 교만이 이 비극 작품과 그 역사적 배경을 더듬게 했다.   &nbsp;  독일인들은 그렇게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열렬히 떠들면서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프로이트가 이들의 환상을 깨부수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러한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자기 성찰 없는 인간들이 너무도 날뛰고 있다. 이러한 비극 작품을 모든 국민이 관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획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통의 자기비판이라는 감각적 유대를 지닐 수 있는 방법 말이다. <br>  &nbsp;------------------------------------------------<br>※이 글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더불어 사이먼 골드힐의 《Love, Sex and Tragdy(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오만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한 앎의 불가능성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70/cover150/89708432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705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생 마음, 독하지만 정(淨)한 것이라고 - [생 마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8147</link><pubDate>Wed, 18 Mar 2026 18: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81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264&TPaperId=171581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7/coveroff/k6421372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264&TPaperId=171581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 마음</a><br/>김복희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3월<br/></td></tr></table><br/>“나 자신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니, 이렇게 작다니, 커지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에서<br>시(詩)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시는 사라져버린 적도 없고,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시를 읽기에 적절한 시대가 아니게 되었을 뿐일 게다. 시 비평가이기도 한 조연정 시인은 『시 보다 2025』에 실린 「보조 영혼」, 「요정의 마당」 등 김복희 시인의 시를 말하는 문장 속에서 “회한에 얽매이고 불행에 저당 잡혀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삶을 들여다보는, 그 삶의 표면과 속살을 샅샅이 눈으로 생각으로 매만지며 관찰하여야만 하는 시 읽기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삶 자체인 시는 더욱 읽어야 할 시대의 언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br>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시의 본질 상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기다리는 언어이고,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것”이기에 그 낯선 감각이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바로 그 고민 하는 시간을 참을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라는 점이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렸다는 곤란의 변(辨)일 것이다. 김복희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시를 읽는 영혼들에 마음의 양식을 함께 고양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에는 귀신, 요정, 소인(小人), 새와 같은 작은 것들, 비인간 존재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 이를 문학비평가 강동호 교수는 “작은 것의 큼을 드러내며 존재와 삶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미묘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결코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다차원성과 그 뜻밖의 광활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김복희 시인의 시작(詩作)들을 말한다.  &nbsp;또한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임유영 시인은 “말의 몸집을 끝없이 부풀리는 언어”, 그렇게 “커진 말을 뒤집어 까서 이것들 속에 축적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김복희 시인의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을 시인은 「생 마음」에서 백지에 놓기 위해 백지부터 만들기로 한다. 그때 그 재료인 필요한 것으로  “티끌 없는 오전 / 진솔 속옷 진솔 양말 / 온갖 말 가르쳐준 이들 /생각처럼 들어와 / 피도 땀도 함께 흘려주는 것“ 이라고 한다.  &nbsp;  ........(前略)내 피 내 땀에스미는 것  &nbsp;  백지에  &nbsp;  생 마음은 독한 것이군  &nbsp;백지를 가리키며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마음을 넌지시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생 마음은 독하지만 정한 것이라고  &nbsp;  - 「생 마음」, 『생 마음』 60~61쪽에서  &nbsp;  나는 이 시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도래하고 있거나 도래하는 낯선 감각의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익히 알고 있는 계절의 바뀜을 뜻하는 ‘환절(換節)’이 “짧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라는 새로운 감각을 내 몸에 기입한다. 그리고 시 속 작은 것들 - 새, 요정, 소인 - 인 이 젊은 시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인이 발표했던 「새 입장」 속 시구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nbsp;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생각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nbsp;  .............(中略)  &nbsp;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더 작아져도 되는 곳,희망에게      - 「새 입장」, 『보조 영혼』, 110쪽에서   &nbsp;  대한민국의 희망이 스스로 커졌다는 망상에 잠기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역설적 장면은 그것이 망상임을 자각하게도 하지만 바로 이 자각으로 그 작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능성, 희망은 더 작아져도 되는 희망이 된다. 시인의 언어에는 그 어떤 윤리적 잣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있는 사실 그대로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그것은 샅샅이 관찰하는 것, 작은 상대라도 더 유심히 살피는 감각 그것일 게다.   &nbsp;  <br>장시(長詩)라고 할까, 우화라고 할까, 아무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제목 또한 여느 시처럼 기묘하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이다.  &nbsp;  ...........(前略)  &nbsp;  저는 환절기가 되면, 아, 내가 호랑이 되어 개 백 마리를 죽일 결심하고, 마침내 고민 없이 아흔아홉 마리를 죽이고 사람도 죽인 호랑이 되어 이제 다시 사람 될 길 없겠네. (...) 매일매일 내 기분 내 심정 내 상황 내 허기, 호랑이 고개 넘듯 뛰어넘고 싶어집니다.  (中略) 뉘우침 없이 내 서러운 것만 생각할까요. 기구하다 하며 아득해 할까요. 그럴 수 없기에 짧은 틈을 놓치지 않으려 배를 깔고 엎드려봅니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생 마음』, 69~79쪽에서  &nbsp;  나라를 온통 자신의 허기 채우기 놀음으로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인간이 떠오른다. 배를 깔고 엎드려 그 인간은 그 강렬하고 짧은 환절의 시간에 과연 제 서러움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내 마음을 더럽힌다. 아 털어내고 날 것의 내 마음, 생 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삶이란 아쉬움투성이 같다. 시와 시의 제목이 마치 선문답처럼 대조를 이루는 몇몇 시들은 그 자체로 낯설어 힘겹게 읽어가는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도 불러일으키는데, 「춘향이 집 가리키기」,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과 같은 시들은 잘 알려진 관용적 의미를 앞세워 읽어나가며 시어의 감각을 학습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nbsp;  .............(前略)  &nbsp;  잠들어 깨어났다모르는 여자 남자가 우리 딸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목마르냐고 차가운 물 한 사발을 내밀었다찰랑찰랑 물 코 닿을 듯 들여다보았으나묘하게 닿지 않는 것이었다-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 『생 마음』, 30쪽에서  &nbsp;  잠결에 마주한 낯선 상황에서 닿을 듯 닿지 않는 골똘한 생각 끝에도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의 많은 실재들을 생각게 된다. 이왕 이 낯선 감각의 언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요정에게 시의 화자(話者)는 ‘나’를 쓰는 법부터 가르치고, 요정은 “‘나’를 향해 / 멀리 돌아가는 시를 쓴다” 그리곤 요정은 “시에 외롭다는 말을 없애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때 화자는 “요정의 시에/ 손대지 않고/ 요정의 앉을 자리를 정돈해“ 둔다. 보이지 않는, 아니 미력한 존재를 위한 환대의 모습, 아마 시를 읽는 독자들을 위한 넉넉한 품일 것이다.   &nbsp;  모기가 앉은 작은 토끼를 돕는다고 찰싹 휘두르는 곰의 친절(「곰의 친절」, 130쪽)은 그 약자를 죽인다. 강자의 몰이해에 천착한 친절이란 곧 무지의 폭력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렇게 민담, 민요나 속담을 인용할 때 시인의 시는 임유영 시인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들에 대한 까발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바로 여기와의 연루됨을 잃지 않는 예리한 시선과 더불어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인의 시집이 어쩌면 소원해졌던 시에 대한 감각을 다지는 전환이 되어줄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7/cover150/k6421372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176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무너지는 삶들이 급박하게 접속한 마지막 파편들; - [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1995</link><pubDate>Sun, 15 Mar 2026 18: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19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00&TPaperId=171519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63/coveroff/89320451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00&TPaperId=171519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a><br/>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열일곱 장의 이미지, 그것을 몽타주적이라고 하든 그 어떤 정동(affect)적 반영이라 하든 그 이미지들을 통한 사유 전개작업으로써의 글쓰기가 이 책이다. 그 대상은 1940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 될 폴란드 유대인 게토 내 민중들의 모든 자료 - 편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쪽지들, 사진들, 일기들, 유언들, 오고간 행정문서들, 은밀히 건네던 자체 소식 문서들, 그 밖의 타자원고와 등사본, 인쇄본 등의 문서들 - 를 ‘오이네그 샤베스’라는 비밀 모임을 통해 수집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의 3만 5,269쪽 분량의 자료들을 모체로 한 상상과 반추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해석 에세이다. (린겔블룸은 1944년 가족과 함께 총살 처형되었다)  &nbsp;  이 상상과 반추는 흩어지고 누락된 결핍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이해의 목소리이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집단적으로 체험되고 전승된 고통과 흔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터무니없는 지적(知的)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화적 경험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억의 매체로서 해독하기이다. 첫 장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절망 속에 쓰여진 글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읽을 때 그 글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비극적인 탄식의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이 첫 장의 일면 감성적 시작은 책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르며, 린겔블룸의 아카이브들과 그 아카이브들의 매립과 발굴에서 감지되는 고통과 정념의 몸짓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들이 머금은 가능한 의미들의 추적을 실행해나간다.  &nbsp;  1943년 5월, 750명 남짓 남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봉기를 진압하는 SS(나치 친위대)장군 위르겐 슈트로프가 벌인 ‘최종 게토 청산 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폴란드 내 유대인은 절멸한다. 저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응과 내 감응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을 게다. 높이 3미터 둘레 13킬로미터에 달하던 게토 장벽의 잔해들을 모아 전쟁 후 다시 세워놓은 붉은 벽돌 장벽의 틈새에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탄식의 사물 혹은 결정화된 눈물”로 읽어내는 그러한 감응을 나는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파괴와 학살의 흔적으로부터 그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nbsp;  지하 통로의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이미지 아래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얼굴을 벽에 대고 서 있게 하고서는 귀와 머리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인간 사냥, 유흥거리로 삼기위해 유대인을 죽이는 인간성 침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942년 7월 22일부터 9월 21일까지 나치는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이 두 달 동안 유대인 30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 역사의 눈으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적어도 문서들만큼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고통과 한탄의 기록들이 미래 세대에 전달될 수 있기를 거대한 욕망으로 생동하면서 죽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의 바람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nbsp;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절멸될 것임을 이미 잘고 있었던 듯하다. 게토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모든 음식의 수급은 차단되었으며, 극단적 굶주림과 반복되는 처형, 가축 열차에 실려 절멸 수용소로의 이송되어 사라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참혹함은 구태여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양철상자에 담아 세 차례에 걸쳐 노블립키 거리 38번지, 시비에토 에르스카 거리 31번지 건물 지하에 각기 매립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 난 후 1946년 4월 게토봉기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렇게 매립되었던 린겔블룸 아카이브를 발굴해야 한다고 라헬이라는 여성이 호소한다. 그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아카이브를 찾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며, 하찮은 종이쪽지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친 방해의 목소리다.   &nbsp;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그것을 찾는 일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기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종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히 흉물스럽다.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수색이 결정되었지만 이미 잔해가 말끔히 정리된 바르샤바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니, 그 엄청난 길이와 높이의 장벽,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항공 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굴을 시작하여 표면이 산화된 양철통이 발굴되기까지 4년 동안 물이 흘러들어가고 곰팡이가 서식하면서 습기와 팽창으로 상자에 눌러 붙고, 글자가 지워지고 부패되고 훼손된 문서들의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다. 린겔블룸이 주도하여 수집한 오이네그 샤베스 아카이브는 그렇게 윤리적,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물려준다.  &nbsp;  사진 이미지 작업을 통해 사유이론을 전개하는 이 독특한 저자는 지워지고 뭉그러지고 종이끼리 들러붙어 흐려진 문서들과 사진으로부터 역사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애초에 흐릿했기 때문에 사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역사의 사물들과 사건은 존재하게 되고, 광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독성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재가 현실에 뒤섞여 역사는 그 흐릿함에서 건져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매립된 양철통을 발굴해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디-위베르만은 그 자료들이 두 번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한 번은 땅 속 지하의 물속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증언하는 눈물의 감동적 물속에서”라고.   &nbsp;  <br>책은 이렇게 발굴해내 복원한 문서들의 내용이 빼곡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긴박하고 다급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간절함들, 비통한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제 이름은 나흠 그지바치입니다.”,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동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그곳으로 이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nbsp;  그런가하면 매립의 마지막 순간에 상자에 밀어 넣었던 19살 소년의 개인적 유언 같은 글도 있다. “우리가 당대의 세계를 향해 외치고 울부짖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땅 속에 묻습니다.  나는 이 소중한 보물이 언젠가 발굴되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순간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이 어린 소년조차 자신들이 곧 절멸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쪽지와 문서들이 미래 세계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사로워 보이는 서신들에는 당시의 급박한 동료들을 향한 정보들도 있는데,  트레블링카 절명 수용소를 급하게 그린 지도가 그려진 우편엽서, 특수 트럭에서 자행된 가스학살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들도 있다. 헤움노 절명수용소에서 1942년 1월 탈출하여 4개월 후 체포되어 베우제츠(Bełzec)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슐라메크가 전한 정보기록이다.   &nbsp;  그런데 더욱 아찔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명 “상상하기의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여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 되면 스스로 고의적 무지나 자발적 예속의 심리상태로 빠져드는 현상이다. 상상력이 현실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아니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현실의 가혹한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연한 목소리들, 경악스러운 사실들이 매장된 종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일상적 생존의 단순한 몸짓들, 비참 속의 고귀한 몸짓들, 비영웅적 몸짓들로 직조된 이들 자료를 그들로부터 물리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텍스트 속 문자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감상적이라고? 어찌 감상적이기만 하겠는가, 더는 합리적 이성이란 것으로 해독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면서 차가운 이성 어쩌구 하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고 문명적 퇴화의 비윤리 아닌가.  &nbsp;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이 수집행위, “가능한 많이 수집하라, 분류 작업은 전쟁 후의 일이 될 것이니”라며 오이네그 샤베스의 동료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은 현재의 무력함을 미래의 힘으로, 나중에 쓰일 당신들의 역사로 바꾸기 위한, 생존의 불가능성을 잔존의 기회로 만들고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디디-위베르만의 진술처럼 “일관된 무언가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 흩어진 이미지들”로부터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 문명 퇴화적 표징이나 그들이 축조한 절멸용 기술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해석을 통해 흩어진 도덕 관점들을 다시 주워 모을 수 있으며, 1942년 독일군이 게토에서 촬영한 사전 위조되고 연출되어 왜곡되고 억압되어 전복된 이미지들이 같은 이미지 자료임에도 얼마나 은밀하게 다른 관점을 생성하게 하는지도 분별하게도 된다.   &nbsp;  게토 내에는 유대인 자체 행정기구인 유덴라트라는 것이 있었으며, 유대인 동료를 감시 통제하는 유대인 경찰도 있었다. 유덴라트라는 특권 계층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하는 격식을 갖춘 단체 초상 사진과 유대인 경찰이 줄지어 세우거나 무리를 이루게 하여 조밀하게 모아 놓은 채로 찍은 일반 민중 사진의 뚜렷한 분할을 보는 것도 당시 게토 내 유대인들의 권력구조와 갈등을 상상케 한다. 어차피 1943년 8월 이후에는 모두 절멸할 동족임에도 구별짓고 위계를 부리는 인간들의 그 던적스러움은 역사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nbsp;  무엇보다 이 책을, 아니 유대인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아카이브에 담긴 그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기대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 얼굴들을 시간을 넘어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평범성에 깃든 숭고함과 극악스러움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늘 이런 외침은 반복되었고, 그 외침은 헛되이 울렸고, 훨씬 나중에야 메아리를 만들어냈다”고, 때문에 “글쓰기가 전달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통의 외침 앞에서 글쓰기에 내재된 본질적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만큼은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  &nbsp;  우리에게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극악한 압제의 시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시간을 멈춘 채 묻혀 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일경에, 조선인 일제 주구(走狗)들에 쫓기면서 던져지듯 남긴 쪽지들, 색 바랜 사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날뛰는 뉴라이트로 불리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민족역사의 왜곡 날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해석이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묻힌 소소한 자료들에서 그날들의 진실을 우리는 읽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품고 있을 “단 한 번의 단순한 감정적 체험의 틈 속 깊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지 모를 흩어진 심리적 자리”를 우리는 복원하고 해독해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시작하는 이 문장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일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63/cover150/89320451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639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텅 빔의 충만 - 맑고 향기로운 글들 -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9468</link><pubDate>Sat, 14 Mar 2026 09: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94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5050&TPaperId=171494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63/94/coveroff/k7421350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5050&TPaperId=171494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a><br/>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02월<br/></td></tr></table><br/>“언젠가 우리가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돌보는 사람들이다.“- 다시 채소를 가꾸며. 《아름다운 마무리》, 46쪽  &nbsp;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법화(法話)나 법문, 강연 기록들을 인쇄된 문자로 접할 길이 없는 가운데, 스님의 말씀을 엮은이의 체화된 사유의 깊이 있는 글과 더불어 하나의 총체적 흐름으로 만날 수 있게 펴낸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전한다. 법정스님 하면 《무소유》를 떠 올리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아마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앎이 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내려놓음의 마음공부’ 이듯, 무소유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몫을 덜어내는 선택의 기준을 세우라”는 가르침이며, 그렇게 덜어내어 가벼워진 자리에서 단순화한 선택이 쌓이면 삶의 방향도 선명해지고 그럼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자기답게 살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게다.  &nbsp;  이 책은 단순히 법정스님의 고귀한 문장들을 수집하여 배열한 문장 모음집이 아니다. 엮은이라 표기하지만 스님의 말씀에 더해 엮은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의 결과임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모든 법화를 총체화한 해설서이자 독자적인 명상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움과 자유, 가족과 사랑, 갈등에서 상실과 병, 죽음, 단련과 실천에 이르는 인생의 단면들인 7개 주제 아래 법정스님의 저작들과 법문, 법회 말씀을 망라한 총 245 문장과 각 해당 문장에 따른 엮은이의 풀어 쓴 시의적 해설,  해당 문장에 스며든 사유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네 삶의 태도가 선택의 지점에서 방황하게 될 때 언제라도 다시 펴들고 읽게 될 그런 책으로 항시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nbsp;  “오늘의 걸음, 말, 시선을 조금만 바꾸고, 오래 붙잡고 있던 기대와 습관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달라진다.“ - 본문 36쪽  &nbsp;  소유냐 존재냐 또는 소유하기와 소유되기와 같이 그 어떤 대상을 취득하여 자기 지배하에 두려는 욕구와 이와 달리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의 능동적 과정으로서 공유와 결속의 양식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뚜렷하게 다른 두 이해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질과 부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게 되면서 물질을 비롯한 외적 대상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더, 더 소유함으로써 대상을 지배하는 느낌의 상승, 즉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됨으로써 욕구와 충동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아집과 소외와 굴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유 집착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된 그것에 얽매여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삶의 감각을 잃고 세상을 탓하게 하곤 한다. 자신임을 확신하게 하는 느낌의 이 왜곡된 현상에 대한 동서를 막론한 가르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nbsp;  어쩌면 법정스님의 말씀은 바로 이 소유의식, 무언가를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동안 충만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향과 방법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것이 곧 비워냄, 덜어내 가벼워진 마음이고 그 내려놓고 가벼워져 단순해진 자리에서 삶의 선택 기준은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오히려 그 텅 빔이 생에 대한 태도와 삶의 품격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소욕지족 소병소뇌(小慾知足 小病小惱) 라 하여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또렷이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nbsp;  우리들의 지나 온 인생길을 가만히 돌아보면 삶의 길은 결코 물질의 풍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과 베풂 말고 그 밖의 것들인 재화와 물질, 명예와 권력,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소중하겠는가. 무상한 것이다. 즉 항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 삶의 가치기준이 흐트러지기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때 내려놓음, 비움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삶의 결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오늘처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고 가난하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nbsp;  <br><br>“내 안에 중심이 잡히면 (...) 나를 스스로 돌볼 힘이 자란다.” - 본문 195쪽  &nbsp;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타자는 시선에서 지워지고 저 위만 보며 계속 달리다 보면 불안의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그 극렬한 경쟁의 전선을 쉬지 않고 내달림으로서 성취는 늘어나겠지만 삶의 이유가 흐려지고 자기 삶을 상실한 허전함, 공허가 밀려들어온다. 스님은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다.” 라 말하고 있다.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렇게 비워 간소해진 자리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리듬과 속도를 찾아내고 그렇게 명확해진 기준을 삶의 방향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와 오래 앉아 있게 한다.’는 의미인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의 마음의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태도일 것이다.  &nbsp;  “마음도 매달린 것을 조금 내려놓아야 새 감정과 풍경이 들어온다. 그 빈자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삶의 방향을 다시 고르는 자리가 된다.” -본문 196쪽  &nbsp;  양과 크기를 키우려는 우리네 자세는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위의 시선과 인식에 휘둘리는 삶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의 리듬이 없다. 그래서 삶은 고통스럽고 쉽게 짜증나며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친다. 이러한 비교와 너저분한 장식을 덜어내어 자신에 맞는 속도를 찾아 지켜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욕심의 속도도 느려지며, 계산하는 관계는 배려와 베풂으로 옮겨갈 것이다. 아마 이렇게 자기 리듬에 맞춰 세워진 자기만의 삶의 기준에 정성을 다하면 생의 밀도가 높아지고 그것은 충만한 행복감이 될 것이다.   &nbsp;  “어떤 세상을 사는지는 오늘 내가 고른 시선이 정한다.”고 엮은이는 말한다. 내려놓기, 비워내기는 자기답게 살기 위한 방식이지 그 뭐를 인색하게 절약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버릴수록 선택이 또렷해진다. 비교와 기대의 볼륨을 낮추고 내 속도를 지킬 때 여백이 생기고 그 위로 자연스레 삶의 여유와 평온이 찾아온다. 이렇게 과한 것을 덜어내 중심을 선명하게 만들면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오래 남는 삶의 품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세련된 기품이며 멋이다.   &nbsp;  “한 줄 한 줄 자꾸 멈추게 만드는 책은 불친절한 글이 아니라, 내 삶을 끌어와 함께 생각하게 하는 친구에 가깝다. 결국 독서는 한 문장을 앞에 두고 얼마나 오래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는가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 본문 253쪽  &nbsp;  법정 스님의 말씀들은 시적 고아함이 배어나오고 그것에 엮은이의 사유 품격이 더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문장은 절제되어 적은 말들임에도 그 속의 마음이 절로 건네져 옴을 느낀다. 엮은이는 이처럼 “말 대신 눈길로 서로의 마음을 건네는 시간을 목격전수(目擊傳受)”라 알려준다. 책 속 문장을 바라보면 그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 선명하여 이렇게 가르침과 문장의 리듬이 공명한 그 의미는 증폭되어 다가온다.    &nbsp;  스님의 저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의 「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 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혀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의 지적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그 인고의 체험을 겪은 것들이어서 술술 읽힘에도 수시로 책장을 덮고 반추하게 된다. 뭇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정체성의 발견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런 말은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정체성은 무언가를 껴입고 장식하여 구성한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남의 시선과 기준, 체면, 증명하고 과시 하고픈 강박 등과 같은 것들을 떼어내는 일, 그렇게 단순화한 것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후 책장을 덮으면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삶을 바꾸는 힘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고 있는 기분 좋은 충만감에 싸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63/94/cover150/k7421350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63945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좋은 삶을 산다는 것 - [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6312</link><pubDate>Thu, 12 Mar 2026 17: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63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1463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off/k1721366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1463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a><br/>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03월<br/></td></tr></table><br/>“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nbsp;(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  &nbsp;  어떤 분야가 되었건 자기 삶의 기준을 선명히 세우고 자신만의 리듬, 속도와 분량을 정해 선택을 단순하게 하여 오랜 시간 작은 정성을 반복해 온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그 어떤 본질적 감각을 체득하는 순간을 맞이하기 마련인 듯하다. 글쓴이는 “브랜드 내러티브 설계 및 메시지” 제작 일을 하는, 추정컨대 대략 15년쯤 광고 분야의 일에 종사해 온 듯싶다. 이 작은 책자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을 당당하게 공표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독자들은 어느만큼 수긍할 수 있을 터이다.  &nbsp;  <br>‘영한(英韓) 인생 사전’이라는 표제어가 곧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의 표현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영어 단어나 문장의 뜻을 깊이 있게 음미하기 위해 “단어의 은밀한 부분에 놓인 부스러기까지 한 톨도 빠뜨리지 않고 옮기는” 고심의 작업의 결과이고. 바로 이를 통해 인생에서 뜻 깊은 열 가지 주제어로부터 삶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길어 올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선정된 자아(Identity), 직업, 성취, 자유 등 열 가지 주제어 아래 두세 꼭지의 함축된 문구와 체험한 인생을 교호하면서 통찰적 시선을 풀어내고 있다.  &nbsp;  청년 시절에나 혹시 손에 들었을 법한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True integrity' 라는 어휘에 대한 작가의 직장에서의 경험이 녹아든 지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충분히 성찰적 인물로 여겨졌고, 바쁜 직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에 대한 건강한 균형의 태도가 엿보였던 까닭이다. 사실 이 어휘를 포함하는 “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 (다른 이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 진다.)”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말하는 문장은 아니지만, 온전함 또는 완전함으로 해석되는 'integrity'의 의미 수용의 맥락을 포함하는 애플에서의 경험 이야기는 단어의 뜻을 보다 풍부하게 전달해준다.   &nbsp;  결국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오랫동안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끈기를 가지고 공들인 사람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그러한 완전함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으로 첫 장을 시작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글쓴이가 선택한 30여 인생문장 중 내 믿음과 공명하는 것 몇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을 이어가련다. 글쓴이가 광고업계에 바탕을 둔 사람이다 보니 이들 문장의 다수가 브랜드 광고 문구나 옥외광고 문구 등 대중을 향한 메시지들이다. 그 첫째는 “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 (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이라는 문장인데, 삶이란 완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는 내 오랜 좌우명이기도 한데,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이라는 형용사의 모호함으로 인해 항상 반성적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삶이 주는 모든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쓰고 있는데, 항시 깨어있는 정신,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지각하려는 태도를 지닌 자신의 내면에서 다져진 목소리일 것이다.  &nbsp;  두 번째 문장은 무수한 선택지로 들끓는 세계에서 자신을 정립하는 태도로서도, 또한 일상적 욕망의 발현과 절제의 균형에 있어서도, 혹은 글쓰기와 같은 심미적이거나 다수의 이해를 위한 쓰임새에 이르기까지 단순함은 살아가는 태도의 궁극적 섬세함의 구현일 것이다.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단순함은 궁극적 섬세함이다.)” 이 간결한 문장이 품은 풍부한 의미들은 일본대중의 언어인 와비사비(侘寂, わびさび)와 어울려 고아한 품격과 정취까지 더한다. 오랜 시간의 풍화를 견뎌온 사람이나 사물들에서 드러나는 우아한 품격과 궁극적인 섬세함을 품은 단순함은 개인 고유의 기준을 위해 비워져 단순하고 선명해진 자신만의 단단한 생의 태도와 다시금 연결된다.   &nbsp;  삶의 품질, 혹은 품격이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진 단순성에 대한 지극한 정성일 것이다.  시(詩)구절, 광고문구들, 유명가수의 노래가사, 연설문들을 아우르며 생의 지혜를 꼭꼭 눌러 담고 있는 이들 영어문장 또는 번역된 문장들에 글쓴이의 체험적 사유가 더해져 청년들에게는 다가오는 풍부한 미래에 대한 선배의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중장년의 독자들에게는 인생을 반추하며 삶의 소중한 것들에 공감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nbsp;【『영한 인생 사전(Life Dictionary)』,&nbsp;본문&nbsp;83쪽】<br>  법정(法頂) 스님은  『산방한담』에서 “사람은 내일에 가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자기만의 굳건한 기준을 지닌 인간의 바로 지금 순간에서의 철저한 열정과 지극한 공들임, 현재의 최선이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라고 지적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곤 한다. 오늘을 흘려보내며 남의 시선에 휘둘리고 무수한 선택지를 우왕좌왕하는 인생은 기다리는 미래조차 무의미해지기 일쑤일 것이다. “Small habits compound into greatness.(작은 습관이 복리로 쌓여 위대함이 된다.)” 꾸준히 현재의 시간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영역에서든 자신들만의 인생의 본질을 건져 올리는 만족스러움이라는 보상을 받을 터이다.   &nbsp;  글쓴이는 성취의 장에서 'officially'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이키 캠페인 문장인 “You don't need an official court or official uniforms to be officially great.(공식적 장소, 공식적 의상이 없어도 진정 위대해질 수 있다.)”를 통해 삶의 위대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국가나 사회의 인정이라는 official의 사전적 의미와 인기 노래 제목인 &lt;Officially missing you(공식적으로 네가 그리워)&gt;처럼 국가나 사회가 승인할 만큼 공식적으로 그리울 정도임을 뜻하는 과장된 관용적 표현을 오가며 정말로, 진짜로 그러함이란 의미를 품은 official의 의미를 풀어놓는다. 즉 그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성을 다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함을 역설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글쓴이가 시종 가리키는 곳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정성스러운 반복, 꾸준한 공들임의 습관, 바로 지금의 열정일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러한 자기 기준 확립의 태도만을 발견하더라도 충분히 이 인생사전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nbsp;  아마 그것은 글쓴이가 단어 하나하나에 숨은 의미들을 이해하려는 수고와 닮아있을 것이다. 본질, 중요한 알맹이, 삶의 중요한 키워드를 또렷하게 손에 쥐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이다. 글쓴이의 바람처럼 “자아, 시간, 유대, 건강, 직업, 취향, 낭만, 성취, 의식, 자유”라는 핵심어 속에서 “꿈꾸고자 하는 무엇을 통찰”하는 데 소중한 참고 사전이 되어줄 수도 있을 터이다. 독자들 제위(諸位)도 “없으면 자신이 성립되지 않을 단어”를 골라보시라. 그것이 여러분을 지어올린 인생일 것이다. 그것에서 털어버릴 것이 있다면 버리고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선택하면서 단순한 자신만의 인생기준을 세우는 시간으로 아깝지 않을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150/k1721366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5779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언어의 아름다움, 지옥의 재미 - [죔레는 거기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37633</link><pubDate>Sun, 08 Mar 2026 15: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376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1376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off/k5820328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1376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죔레는 거기에</a><br/>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2월<br/></td></tr></table><br/>“긴 삶을 살아오며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소. (....) 큰 욕심의 끝은 신음이라고 하지 않았소, (...) 이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거요.”&nbsp;- 4장 134쪽  &nbsp;  "언어의 아름다움, 지옥의 재미"를 자신의 문체적 모토로 삼고 있다고 강조해 온 이 종말론적이고 해학적인 긴 문장의 미학적 경이로움을 창작하는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던 2025년에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전통적인 서사의 작품을 발표했다. 영리하고 다면적이며 정교한 구성으로 저항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를 그려내는 그만의 강렬한 어둠의 문학적 기교가 조금은 더 유머러스해지고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평온해진 느낌이다.  &nbsp;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세계가 권위주의와 극우 과대망상으로 인해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과 이념적 공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재적 상황일 것이다. 소설은 왕정복고라는 극단적인 퇴행적 향수의 서사를 중심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반동적 정치모델에 대한 갈망을 신랄하고 냉소적인 유머로 지펴낸 정치 풍자소설이라 정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멸시의 빈정거림의 거대 서사가 그렇게 진지한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데, 시적이고 서정적인, 아니 이보다는 애잔한 슬픔의 장막이 드리워진 듯 생의 어떤 순간들의 아름다움이 이를 경감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소설의 주인공 아흔 한 살의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은퇴한 전기기사로 12년 전 아내 일리아를 떠나보내고 홀아비로 반려견 죔레와 함께 산 속 작은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문과 출신을 비밀에 부치고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 온 칭기스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왕가의 후손이며, 헝가리 왕위 계승권까지 주장할 수 있는 아르파드 왕가의 왕위 계승자다. 그런데 “정치를 피해 도망치는 자는 언제나 정치의 그림자에 시달린다.”는 격언처럼 정치에 관여하기를 거부하고 조상들처럼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그에게 “전기 기술자, 기타를 든 순회 가수, 자동차 도장공, 종마 목장 주인(소위 옛 품종을 보존하는 사람), 경찰관, 회계 사무원, 은퇴한 하사관, 그리고 교사”까지 한 무리의 왕정복고주의자들이 노인의 평온한 삶을 깨뜨린다.  &nbsp;  이들은 오랜 조사 끝에 그가 1301년 사라진 아르파드 왕조의 후계자이며, 따라서 헝가리 왕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알아냈음을 말한다. 오직 그만이 부패하고 권력에 굶주린 독재정권으로 얼룩진 헝가리 정치에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기에 왕국의 수장임을 승인해줄 것을 간구(干求)한다. 헝가리는 쇠퇴하고 영광은 사라졌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식적으로 정치에 등을 돌렸고 다시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은 노인에겐 이들 왕정복고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달갑지 않다.   &nbsp;  소설은 이렇듯 헝가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는 헝가리라는 단일 영토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허구적 기원의 서사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의 마무리 끝에 짧게 언명하고 있는데,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로도 현실의 일부로서 이번에도 현실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지만” 에서와 같이 2022년 독일 사회에서 일어난 극우단체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을 거의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극우 파시스트들의 권위주의적 망상을 조롱하는 은유로 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빅토르 오르반 극우 독재정권의 헝가리 정치 사회뿐 아니라 유럽, 나아가 현 세계의 반동적 정치질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일명 '제국 시민(라이히스뷔르거,Reichsbürger)' 단체라는 군주주의와 반유대주의, 역사수정주의 등을 포함하는 퇴행적이고 종파적인 극우집단의 대규모 검거와 재판 사건인 극단주의자들의 행태가 이 소설의 중심 서사 축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과 같다. (소설에서는 '조율된 플랫폼(Koordinált Platform)', 줄여서 KP라는 왕정복고주의자 무리로 묘사됨)  &nbsp;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이들 찾아 온 무리에게 말한다. 그리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라며, 그를 추종하는 이 무리들이 폐하, 라 자신을 칭하는 것을 금지하며, “요지 아저씨”로 부를 것을 요구한다. 이후 추종자들이 그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요지 아저씨로 부르는 것에 복종하자 마지못해 왕위 제안을 수락한다. 요지아저씨는 다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왕이 되고 싶을 뿐,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거절하리라고 말하면서. 추종자 무리는 점점 늘어나고 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거듭하면서 점차 옛 시절의 향수에 젖어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나 온 사적 삶에 대해 들려준다.   &nbsp;  여기서 그는 헝가리 극우 민족시인 버시 얼베르트의 시작(詩作)들을 칭송하면서 한 때 자신과 연인 사이였던 열렬한 파시스트 가수겸 배우인 지타 셀레츠키의 노래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거듭 열정적 기억으로 소환한다. 이러한 사적 진술 속에 작가는 교묘하게 2022년 라이히스뷔르거 운동의 극단주의 주동자의 한 명인 로이스 공작 하인리히 13세와의 친분을 요지 아저씨의 입으로 발설하게 하는데, 이는 이 소설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 구분선을 흐릿하게 하여 역사적 사실의 진술로 수용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등장인물들에 부여한 고유한 은유적 역할은 아마도 작가의 탁월한 특징일 것이다.   &nbsp;<br>추종자 무리에는 작가와 동명인 덩치 큰 젊은 유랑음악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라는 청년이 등장하는데, 이 떠돌이 음유시인은 기타를 치며 요지 아저씨에게 옛 권위주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물론 그것은 한때 소중히 여겼던 미덕과 현재의 타락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역시나 반동적 향수를 부추기는 역할이다. 작가가 왜 자신과 같은 이름의 인물에게 이러한 역할을 부여했는지, 어떤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여 자신이 쓴 소설들이 의도하지 않은 수구적 반동성을 지닌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회의를 위한 반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nbsp;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 예순네 살의 역사 교수인 “젊은 버지디”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모든 서사에 대해 역사적 기록, 즉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이야기들에 회의를 지닌 인물로 홀로 요지 아저씨를 찾아와 발칙한 말을 쏟아낸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 우리에게는 아르파트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요지 아저씨 당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말은 헛소리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합당한 서사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이용하겠으니,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라는 협박이다. 사실 요지 아저씨는 왕정복고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떠한 증거도 필요치 않다고 버지디의 무례함을 비난하며, 내쫓아버린다. 이렇게 내쳐진 인물이 자료의 추적과 탐문 끝에 요지아저씨의 이야기가 자신의 조사기록들과 일치함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어 현실 정치세계에 왕의 복귀를 은밀히 추진한다.  &nbsp;  사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요지아저씨의 반려견인 죔레(Zsömle)는 왕정복고를 준비하는 무리들의 인간적 충동을 상징하는 은유로서 언제든 대체 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는(처음 등장하는 죔레는 몇 페이지만에 죽고, 같은 이름을 가진 어린 개로 대체된다)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한 떠돌이 음악가가 왜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졌을까 에 대한 동일한 미해결의 과제가 독자를 답답한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러한 해결되지 못하는 소재들은 정말 너무 찝찝하다. 아무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식(式) 은유와 상징, 암시는 온화한 우울함, 냉소적 유머와 더불어 높은 지적 통찰력으로 예술적 야망을 달성한다. 현재에 개입하고 현재를 서술적으로 탐구하면서도 문학성을 잃지 않는 이 특유의 기이한 문학은 기이한 놀라움과 매력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어느 순간 급전하여 요지 아저씨의 왕정복고를 위한 순탄하게 보였던 진행은 그들의 계획이 드러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nbsp;  이 무너져 내림의 서사인 배신과 숙청, 느닷없는 인신 구속과 교도원의 구속된 삶의 기록들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다만 한 가지 작가의 동일 장면의 묘사 속 미세한 반복 기술이 가져오는 미학적 묘미는 여기서도 반복되는데, 꿈인가 하면 현실인 사태들은 민족주의적 파시스트들인 조국의 구원을 군주제의 복원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또 다른 축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해체되는 형국과 함께  큰 욕심은 결국은 신음이요,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것임의 다른 표현인 것만 같아 왠지 코끝이 시큰거리고 목메는 느낌임만을 적어둔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끝없는 수다에 완벽하게 부합하듯 전작인 『헤르쉬트 07769』와 같이 호흡이 긴 문장과 거의 없는 마침표를 지닌 이 소설은 초월을 향한 잘못된 인간들의 열망을 그 이념적 공허함만큼 지옥 속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nbsp;  한편 이 소설은 정치 풍자의 무거운 서사적 은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애잔한 슬픔,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왕정복고를 모의하는 추종자 무리들의 파괴적 활동이 초래한 분노가 거의 드러나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평온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테라스에 나와 앉아 죔레와 함께 석양을 감상하는 요지 아저씨의 관조의 장면은 내게 이 소설의 인상적 몇 장면의 하나로 남게 될 것 같다.  "구름 줄기들이 서로 미끄러지듯 지나가거나, 마치 신의 한숨처럼 가볍게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녔다. 핏빛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옅은 보라색과 진한 보라색, 무수한 색조가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계곡 위로 솟아오르는 산양의 물결치는 듯한 모습과 어우러져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한 장면일 것이다.   &nbsp;  끝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와 더불어 이야기의 모든 아이러니한 기록이 발하는 불쾌함과 세계의 발작적 모순의 현상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듯한 탈주의 비상을 상상하게 해주었는데, “삶의 끈은 닳아 없어지고, 생각은 맴돌며, 행복은 오직 지나간 기억” 속에만 존재함을 깨달은 자의 날아오름이다. 남은 것이 갇힌 곳에서의 탈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마침내 기쁜 흥분에 떨고 있는 죔레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열린 창으로 기어 올라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에게 말했다. 꽉 잡아.”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3층에 있는 그의 병실에서 뛰어내림이 아니라 비상(飛上)으로 해석코자 한다. 성탄 전야의 비상이 재생의 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흔 두 살 노인의 삶의 행적, 그 미학적 경이로움의 기록으로부터 이 잔혹한 세계 속의 작은 행복을 기대하게 된다. 풍자적이고 재미있고 친근한 아이러니가 넘치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소설이다. 절망적 현재를 풍자적 냉소와 유머로 맞선 정치 풍자극의 위대한 금자탑이라 해도 지나친 수사는 아닐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150/k5820328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55988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섹스트들(sextes)을 보여주자, 여성 글쓰기의 전범(典範) - [메두사의 웃음 -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선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24594</link><pubDate>Sun, 01 Mar 2026 18: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2459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5438&TPaperId=171245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149/20/coveroff/k412135438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5438&TPaperId=1712459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메두사의 웃음 -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선언</a><br/>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마티 / 2026년 02월<br/></td></tr></table><br/>“나는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우리가 쓰고-웃을(éc-rire) 때야.“  - 「장미가시 효과」, 113쪽에서  &nbsp;  [Hele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br>2026년 제49회 이상 문학상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작이 모두 여성 작가(위수정,김혜진·성혜령·이민진·정이현·함윤이)의 작품이라며 성비(性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담론을 보았다. 나는 이러한 잡설들에 대해 논의의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데, 억압되고 재갈 물려 처형되었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표상 불가능하거나 짓눌림에서 풀려나 세계의 전체적 목소리를 지니게 되었음의 한 상징적 사건으로 환영할 따름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젊은 엘렌 식수가 아마존의 전사가 되어 팔루스로고스(pallogocentrique)중심의 여성 억압의 장막을 찢고 저 높이 비행(볼리;voler) - 飛行, 非行, 卑行 - 하며 분기탱천하여 깔깔대던 그 쾌활한 분노의 웃음소리 - 『메두사의 웃음』 -가 요구되는 시대로부터 제법 멀리 날아올랐음의 증거일 게다.   &nbsp;  하지만 한 문학상 수상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라고 시비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전히 망상적인 팔루스를 쥐고흔들어대는 못난 남자들과 젠더에 의해 세뇌된 여성성에 잠자고 있는 팔루스적 여성들이 있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 세계의 모든 시대의 역사들이 보여주듯 동시대라고 모두 동시성의 인식이나 지각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동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퇴행적이거나 반동적으로 역행하는 비동시성의 무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장미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저 깊숙이 켜켜이 쌓인 먼지들 속까지 찔러대는 가시 말이다.     &nbsp;  『메두사의 웃음』(1975년)에 2003년에 쓰여지고 2010년 판본에 추가 수록된  「장미가시 효과」에서 위의 인용 문장처럼  ‘우리(여성)가 웃을 차례라고, 쓰고-웃을 때’라고 전하고 있듯, 이젠 “여성이 그 몸으로 멍에와 검열을 깨부수고 사방으로 온몸을 관통하는 의미의 팽창을 발화” 한다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웃음은 메두사의 분노에 찬 조롱의 웃음이 아니라 마음껏 여성 고유의 힘을 무한히 발산할 수 있음에 대한 자유의 유쾌한 웃음일 것이다.  &nbsp;  이 책을 다시금 찾아 읽게 된 연유는 이처럼 동등한 주체로 자리매김한 여성의 시대에 대한 소회를 감각하는 것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여성이 공적 공간에서 입을 열어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곧 금지의 위반이던 시대에 살며 자신을 감금했던 초자아화된 팔루스중심 구조를 탈주하여 자신의 (註1)섹스트들(sextes)들을 보여주려 했던 김명순, 나혜석, 이선희 등 최초의 싸움의 현장에 나섰던 식민지조선 여전사들의 고통의 실체를 엘렌의 글쓰기로부터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사들을 무참히 처형했던 김기진, 김동인, 방정환 등 일군의 남성 문인들의 저열함에 나는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성(性)위계의식에 터 잡은 비루한 권위의식이다. 지적으로 세련된 여성을 욕망하면서도 그 각성한 지성의 존재들의 행위는 참을 수 없어했던 뒤틀린 욕망의 소유자들이었던 당대 남성들의 전근대적 지각이 그렇게 싫을 수 없다.  &nbsp;  사실 엘렌 식수의 이 텍스트를 나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 즉 팔루스중심의 가부장적 권위가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그 전통적 남자들과 불가피하게 싸우며, “그녀들의 견지(와 성적충동)에서 여성들과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해야 하는 보편적인 여성-주체” 되기를 향해  “여성들의 성기를 지닌 텍스트들, 여성들의 진정한 텍스트들”을 썼던 여성 작가들의 불안 속 용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교과서로 읽는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 첨예한 최초의 경계 전장에 나섰던 김명순과 나혜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어인 것만 같다.   &nbsp;  <br>해서 엘렌의 문장들은 그 자체로 그녀들 삶의 목소리로 들리기까지 한다. 엘렌은 공식석상에서 여성이 말한다는 것은 만용이며 위반이었다는 것을, 설령 그 위반을 과감하게 수행했더라도 그 말이 닿는 곳은 거의 항상 귀먹은 남성들이었기에, 그 남성들은 오직 언어 속 남성으로 말하는 것으로만 해석할 줄 몰랐을 뿐임을 지적한다.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에 도전하는 것은 처절한 응징에 맞서 싸우는 길 뿐이었을 게다. 엘렌은 마치 이러한 전장의 결과를 눈앞에서 보듯 쓰고 있는데,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는 누이이자 연인들, 어머니 같은 딸들, 어머니이자 누이들이 살기를 원하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 통제 불가능한 분자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으로 끝나는 싸움이었음을, 한국사회 최초의 여전사들은 정말 미치거나 죽어야만 했다.   &nbsp;  “창피함과 두려움을 집어삼켰어. 네가 미쳤구나! 혼잣말을 했지.” -18쪽에서  &nbsp;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 싸움에 나선 전사는 엘렌의 혼잣말처럼 미쳐버려야 하는 공간에서의 처절한 투신이었다.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미친 여성들의 텍스트들에서 차오르고 범람하여 펄펄 끓어오르는 전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엘렌 식수의 여성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이 위대한 텍스트가 반백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이렇게 현실 사회의 틀 내에서 유지, 수용 거부되어 내쳐졌던 불가능했던 여성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러한 점이 팔루스중심의 남성 지배사회가 용서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게다.  성적 대립의 모든 기호를 조잡하게 운반하는 장소로서 대상화된 여성, 욕망의 배출구로서의 여성이 아닌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된 텍스트는 질서, 자신들 권력의 전복이었을 테니 말이다.  &nbsp;  엘렌의 이 텍스트 속 많은 문장들이 문학 비평이 주제인 글들의 해석도구로 인용되거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연유일 것이다. 즉 “반(反)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을 쓰기.  모든 상징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소송에서 마침내 그녀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관계자이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서”와 같이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의 도전에 응하면서, 상징 안에, 상징으로 그녀에게 부과된 자리, 즉 침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긍정하게” 하는 글쓰기의 전범인 까닭이다.  &nbsp;  엘렌이 예언처럼 전하는 문장이 있는데. “과거에 사형당한 이 여성들을 앞서가고, 그녀들 이후에 오는 그 어떤 상호주관적 관계도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이 최초의 싸움에서 미치고 죽어간 여성들 이후의 여성 글쓰기는 결코 팔루스 지배질서로 회귀할 수 없음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그대, 길들일 수 없는 여자, 시적인 몸, 기표의 진정한 ‘여주인’, 그대의 효력, 우리는 그걸 내일 이전에 볼 것이다!” 여성의 말은 더 이상 억눌리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효력은 바로 지금에서부터라는 얘기다.    &nbsp;  이 텍스트에서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빠지곤 하는 오해에 대한 지적이다. 바로 “의식화를 가장하여 추가적인 금지 사항으로 여성을 짓누르지 말자.”며, 결혼과 임신이 남성과의 싸움이라는 격전지에서 가당치 않다는 목소리에 대해 비판한다. 엘렌은 말한다. “쾌락과 현실이 서로 껴안은 모순들의 공감에서 그대의 위치를 그대가 결정하라. 타자를 살려 두어라. 다른 욕구를 기입하라(Mets l'autre en vie)” 만약 우리(여성)가 내킨다면, 임신의 감미로움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임신한 여성에 관한 터부, 그녀에게 투여된 팔루스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말라고. 그러면서 “내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남성이 대상화한 욕구가 아니라 여성 주체의 욕구 드러내기가 바로 여성의 글쓰기임을 공표한다. “나는 모든 걸 원한다. 나는 그의 전체를 원하고 동시에 내 자신 전체를 원한다. 내가 왜 나에게서 우리의 일부를 박탈하겠는가?” 라고 묻기까지 한다.   &nbsp;  오래된 “팔루스적 소극들(pharces)”에 위협받는 여성은 옛날 여성이라고 말이다. 남성들, 메두사를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방패로 가리고 시선을 피한 채 검을 휘둘러대는 남성들을 겁나게 하는 정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여성의 성기다. 벌벌 떨며 뒷걸음치면서 방패와 부적으로 무장한 채 메두사에 다가서는 그 못난 남성 신화는 발가벗겨져 저 멀리 내팽개쳐진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경제적인 민주적 대리보충인 이 여성 글쓰기의 선언문은 이처럼 맑고 청아하며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있다. 메두사, 퀴어의 퀸, 엘렌 식수의 텍스트는 모든 여성들은 물론 장 주네(Jean Genet)를 닮은 남성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기쁘게 해줄 것만 같다.  &nbsp;  註(1) 섹스트(sextes) : 섹스(sex)와  텍스트(texte)가 결합된 조어로 복수형태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149/20/cover150/k412135438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49209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1930년대, 근대 식민지조선의 풍경 - [에로 그로 넌센스: 근대적 자극의 탄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21123</link><pubDate>Sat, 28 Feb 2026 19: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211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203348&TPaperId=171211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4/12/coveroff/895220334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203348&TPaperId=171211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에로 그로 넌센스: 근대적 자극의 탄생</a><br/>소래섭 지음 / 살림 / 2005년 01월<br/></td></tr></table><br/>여러모로 아쉽긴 하지만 흥미로운 담론서다. 우리사회에 대중적인 근대적 자극이 본격화 된 시기는 대략 1930년 전후의 시대라 할 수 있는데, ‘에로’와 ‘그로’, ‘넌센스’는 당시의 대중적 화두였던 모양이다.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를 일본식으로 줄여 쓴 이 외래어가 식민지 조선을 휩쓸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불황, 게다가 식민지민으로서의 불안과 제국주의적 약탈식 자본주의의 침투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등으로 사회 전체가 극단적인 의기소침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압도적 시각문화를 동반한 새로운 감각적 자극이 당대인들의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일까?  &nbsp;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소비 배출구로써 향락산업과 성 풍속의 식민지로의 이동, 근대화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와 대중사회의 도래는 시대환경과 결합하여 현대적인 것의 맹목적 지향과 눌려진 욕망의 분출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고, ‘에로 그로 넌센스’는 당시 모든 문화적 현상들의 배후에서 욕망을 압축한 말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저작은 바로 이를 근대성의 징후로서 인식하고 당시 대중 연예잡지라 할 수 있는 『별건곤(別乾坤 )』, 문예지 『동광』을 비롯하여 각종 미디어 매체, 산업의 현상, 대중의 일상적 풍경을 통해 한국사회의 민중문화를 해독하고 있다.  &nbsp;  3차 산업의 확대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었지만 가부장적 팔루스중심 사회에서 이들이 주로 향한 곳은 도시의 소비문화 및 향락산업에 치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예로 그간의 전통적인 상인이 갖추어야 할 전문적 지식보다는 여성의 애교를 통한 판매력 증진이 더 효과적인 상술이 되고, 숖걸(점원), 데파트걸, 바걸, 헬로걸(전화교환수), 티켓걸, 카페여급(웨이트리스)과 같이 첨단직업부인 ‘걸 전성기’를 맞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nbsp;  또한 1931년 ‘낙원’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면서  “가벼운 우울, 살이 미소하며 엉덩이가 춤을 추는 날카로운 육감, 상대자를 탐색하는 야릇한 피로, 귀가 멍멍한 음향, 농염한 색채, 환각적 말초신경의 기괴한 발동으로 가득찬 ‘청춘의 놀이터’”로서 향락을 구비한 곳, 에로에 대한 욕망의 배출구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시대배경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nbsp;  <br>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적 열기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모던의 색등(色燈)에 시각을 빼앗긴 그들은 드디어 맹목이 되고 과민한 백치가 되었다.”는 비평이나, 이상(李箱)의 “타락으로 이루어진 축제”라는 시선, 웃음마저 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시켜버린 “카페와 흥행물을 통해 복제되고 대량생산되는 상업화된 웃음”과 같이 조롱과 냉소, 자성이 잇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 또한 남성권력의 이익중심, 즉 모던걸에 투여된 자신들의 욕망에 기초한 것이었을 뿐, 이중적 시선에 의한 모순의 발로일 뿐이었다.  &nbsp;  그러나 이 저작에서 주목할 만한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당대를 대표하는 한 묶음의 ‘에로 그로 넌센스’에서, ‘넌센스’가 지니는 의미의 고찰이다. 즉 넌센스는 에로와 그로와 같은 향락산업의 진전과 어울려 이를 진작시키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려는 욕망으로서 에로그로로 대변되는 현실의 떠들썩한 남성지배계층을 풍자하고 전복하는 냉소적 태도로서 작동하였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열기는 강력한 근대적 감각으로서의 시각문화로 다른 감각들이 퇴화됨에 따른 반작용으로 그렇게 퇴화된 감각들에 대한 향수, 즉 현대적 감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가깝다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nbsp;  특히 이와 같은 성찰은 집단의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는 유력한 수단이었던 전통적 민속적 축제를 단절시키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에로-그로, 즉 ‘불야성의 별천지’라는 새로운 이 근대의 변질된 축제는 개인을 공동체에 동화시킬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편 이처럼 고대의 신성성으로부터 멀어지기는 하였지만 삶의 권태와 피로를 떨치고 위안을 얻는 축제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매체로서 유성기, 영화, 연극의 대두는 비근대인들을 근대인의 삶으로 체화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읽어내기도 한다.   &nbsp;  반면 새로운 매체이긴 하나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는 소설이나 신문을 읽어주고, 전통 가락이나, 민속적 고적 문화를 들려줌으로써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하게 하는 등 전통적 유산을 부활시키는데 기여함으로써 외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들이 부딪치고 굴절되어 대중문화로의 근대적 요소의 침투를 완충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nbsp;  이 저술의 대미라 할 수 있는 이상(李箱)과 채만식 두 문인의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민중문화가 지니고 있던 급진성과 전복성을 거세시킨 ‘에로 그로 넌센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분석으로서, 고유의 비근대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 ‘죄지은 자의 징벌’이라는 구조를 통한 풍자와 자조의 경향이 앞서는 냉소라는 작품 고유의 틀을 통찰하여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당대서사문학들에 대한 독법은 귀중한 문학적 지식기반을 제공하여 준다.   &nbsp;  1930년대 우리사회를 깊숙이 들어가서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그리고 넌센스라는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 근대화를 어떻게 촉발하고 사람들을 변화시켰는지, 또한 그 변화과정에서 충돌하였던 시각문화와 청각문화의 조화, 현실의 불만과 우울을 해소하려는 욕구로서 이들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압축적으로 명쾌하게 서술되고 있는 이 저술은, 21세기 오늘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소비과잉과 과시적 사회의 현상이 당시대의 야릇한 화두가 발설하고 있는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낯설지 않은 공감을 형성한다. 깔끔한 대중문화 연구서이자 유쾌한 문화역사 담론서로서 손색없는 저작으로 보다 풍부한 비판적 시선을 읽기를 위한 개괄입문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4/12/cover150/895220334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4122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의식의 존재로서 두족류 문어, 흥미로운 생태철학 - [아더 마인즈 -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11573</link><pubDate>Tue, 24 Feb 2026 19: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115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5855&TPaperId=171115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5/27/coveroff/k4521358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5855&TPaperId=171115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더 마인즈 -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a><br/>피터 고프리스미스 지음, 김수빈 옮김 / 이김 / 2026년 02월<br/></td></tr></table><br/>‘비(非)인간의 마음(정신)’에 대한 우리 인간의 지식이 소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쌓여왔다. 오늘날 동물생태학의 시조라 불리는 윅스퀼에서 시작하여 생물철학자들인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경유하며 이 책의 저자인 피터 고프리스미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는 달랐지만 이들 비인간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수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책의 부제와 같이 문어와 갑오징어 등 두족류(頭足類,cephalopod)의 연구를 통해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이란 무엇인지,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적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nbsp;  일단 밋밋하고 흉물스러운 머리와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지닌 별로 매력적인 생김새라 할 수 없는 이 동물에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내 편견이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렇게 알량한 이해를 전복시키는 과학철학적 내용임에도 저자가 주인공으로 나서서 들려주는 논구에 재미있는 옛 이야기처럼 빠져든다. 문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온통 문어요리 손질하는 법, 숙회 삶는 법 등 미식가들이 적어놓은 글들과 식당 광고들로 화면이 가득 채워진다.   &nbsp;  그런데 문어가 통증을 느끼는 주관적 경험을 하고,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구분할 줄 알며, 따라서 목표 지향적이며 계획을 할 줄 아는 동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펄펄 끓는 물이 있는 솥단지에 던져 넣는 행위는 더없이 야만적 행위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럽연합은 동물실험 규범에 문어 등 두족류를 ‘명예 척추동물’로 등재”함으로써 뇌 절제, 신경 절단 등 고통을 가하는 실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명문화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사회의 어부들이나 식당들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주장이냐며 펄쩍 띌 것 같다. 아니 이들을 즐겨 먹는 우리들에게도 입맛을 거북하게 하는 주장으로 여겨질 것도 같다. 통증을 느끼는 동물을 식용의 대상으로 삼을지 말지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nbsp;  책은 언제부터 감각-행동 반응을 가진 동물이 출현했으며, 이러한 반응 행동을 위한 신경세포의 진화적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단세포에서 다세포 유기체에서 어떠한 기능의 요구에 의해 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문어 등 두족류가 우리 포유류 인간과 언제 공통조상에서 분기하여 각자의 고유한 신체 구조와 신경연결과 뇌를 발달시켜 왔는가를 추적한다. 고생물의 진화적 분기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의식의 차원으로 이어질 때면, 이 의식이란 것이 인간 등 척삭동물(등쪽 신경삭에서 유래한 중추신경계를 갖는 동물군)의 고유한 것이라는 이해에서 어떤 진화적 우월의식의 분기를 전제할 때 더욱 그러하다.  &nbsp;  이는 중추신경계, 즉 큰 뇌를 발달시킨 동물에 대한 포유류의 자부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하고 활동적인 신체를 갖는 종을 배출한 동물문은 세 가지가 있다. 절지동물, 척삭동물, 그리고 연체동물의 한 집단인 두족류가 그러하다. 문어가 큰 뇌와 많은 뉴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겐 전혀 새로운 이해이다. 참문어는 대략 5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1천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뇌의 상대적 크기, 한 동물 개체가 뇌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은 상대적 크기이다. 이러한 상대적 비교에서 문어는 단연코 엄청난 신경세포를 지닌 보기 드문 동물이다.  뇌는 행동을 제어하는 도구상자와 같다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이 도구상자는 일종의 인지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상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문어가 인간과 같은 인지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비롯한 척삭동물의 뇌 구조와 문어의 뇌구조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지녔다. 더구나 문어 한 개체가 지닌 뉴런은 뇌에 모여 있지 않고 다리에 뇌의 두 배에 달하는 뉴런이 분포되어 있다. 문어의 신체는 전체가 뉴런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nbsp;  두족류의 진화역사 - 신경계의 진화  &nbsp;  잠시 진화의 사다리를 거슬러 이러한 신경세포가 왜 발달되어야 했는가의 의문은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불리는 생물군의 무한한 다양성이 나타났던 시기에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nbsp;이러한 신경세포의 진화가 생물체들에게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의 현상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캄브리아기에 앞선 시기를 대략 6억 5천만 년~5억 4,200만 년의 에디아카라기(Ediacaran)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우리의 조상과 문어의 조상인 공통조상이 분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한 생물학자의 우연한 화석 발견에서 시작된다. “양치식물 잎사귀를 닮은 생물로 몸 전체가 누비이불처럼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으며, 그 DNA로부터 신경계가 존재했음을 추정”케 하는 동물 디킨소니아(Dickinsonia)이다. 아마 인간과 문어의 공통조상은 이 벌레 같은 동물과 닮았으리라 추정된다. <br>【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 디킨소니아(Dickinsonia) 화석】  &nbsp;  이들에게는 큰 눈도, 발톱도 가시도 껍데기도 없으며, 그 어떤 무기도 방패도 없다. 즉 캄브리아기가 도래하기 전인 이 시대의 생물들은 전혀 다른 생물을 감지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음을 뜻한다. 이때에는 단세포가 다세포가 됨으로써 주변의 다른 세포들의 존재와 활동을 감각하던 것이 다세포, 즉 단세포의 뭉텅이가 됨으로써 다른 존재가 지각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화학물질이라는 신호보내기가 자신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신호, 협응의 신호능력에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동물들 내부에서 일부 세포들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이 신경계의 기반이 되었다.  여기 한 가지 난제가 존재한다. 이 내부의 소란을 통제하기 위한 신경계의 구축은 비싼 경제적 대가를 요구한다. 매 초 수백 번씩 배터리가 충전되고 방전되는 전기적 경련을 위한 에너지는 매우 사치스러운 경제이다.   &nbsp;  신경계는 왜, 뭘 위해서 필요했는가의 문제이다. 기본적 기능은 다세포 유기체가 자신의 지각 행위를 이끌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세포유기체가 된 자신의 행위를 유용한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은 일과 본 것을 연결하는 일이다, 즉 주변환경을 포착하고 이 정보를 이용해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행위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무수한 일부분들이 만들어내는 수축, 뒤틀림, 경련들을 가지고 한 개체 차원에서 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단세포들의 미세-행위들을 다세포인 하나의 유기체로서 거시-행위로 빚어내야 하는 것이다. 미시행위의 조정자로서 행위-형성적 능력을 초기 신경계가 한 것이다.   &nbsp;  에디아카라기의 생존한 많은 생명체들은 이러한 기초적 신경세포를 구축했지만, 캄브리아기가 되자 이 세포유기체인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의 환경에서 주요한 일부분이 되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감각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이 시점부터 정신은 다른 정신에 반응하여 진화해왔다”고 저자는 급진적으로 의인화된 표현을 구사하며 캄브리아기 고대 생물체들에 정보혁명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이때 겹눈, 카메라눈이 모두 등장했으며, 감각 정보의 유입으로 복잡한 정보를 내부에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빠르게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의 군비경쟁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nbsp;  “포식이 등장하면서 서로의 존재가 생존이 결린 결정적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 새로운 관계는 연쇄반응을 촉발, 한 종의 진화가 다른 종에게 변화된 환경이 되었고, 그 다른 종 역시 그에 맞춰 진화해야 했다. 추적, 추격, 방어, 사냥감이 숨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진화능력을 갖추면 포식자는 추적하고 제압하는 능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nbsp;  이때 공통조상으로 분기된 두족류는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다. 두족류는 초기에 껍데기로 몸을 싸고 있었다, 두족류의 하나인 앵무조개는 2억 년 전의 모습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 일부 두족류는 껍데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움직임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취약함이라는 대가를 가지게 되었다. 갑오징어는 껍데기를 몸 안에 보존했으며, 오징어는 몸 안에 연갑이라는 칼 모양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문어는 완전히 껍데기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 이로써 자신의 눈알만한 크기의 구멍을 통과하는 몸의 형태를 지닌 유일한 두족류가 되었다. 완전한 유연성을 확보한 것이다.   &nbsp;  문어, 갑오징어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nbsp;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나폴리동물연구소에서는 피터 듀스라는 인물에 의해 문어에 대한 행동연구가 실험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문어는 자신만의 생각을 지닌 동물임이 보고되었다. 장난과 호기심이 많고, 수족관의 불을 끄는 법을 익히고,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대상에게 물을 뿜기도 한다. 불을 끄기 위해 자리를 잡고 빛을 겨냥할 가치가 있음을 빠르게 익혔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야생이 아닌 수족관에 갇혀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에 문어는 자신이 갇혀있음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을 식별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은밀히 파악하고 있다가 보고 있지 않을 때 행동을 개시한다. 이 실험은 저자가 옥토폴리스로 불리는 시드니 해안의 15미터 해저에 열 두어 마리의 문어가 서식하는 야생에서의 관찰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nbsp;  옥토폴리스는 문어가 즐겨먹는 조가비들이 많은 곳이다. 그곳은 조가비 껍데기기 수북이 쌓여 그 사이에 굴을 만들어 들어앉아 서로를 주시하거나 간헐적으로 굴에서 나와 돌아다니거나 서로를 지나치다 다리를 내밀어 상대를 쿡 찔러보거나 탐색하며 그에 대한 응수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모습을 들려준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사냥하는 포식자로서 유연하고 까다로운 추출식 먹이 사냥을 한다. 문어의 다리에는 수많은 뉴런이 있다고 했다. 다리는 그 뉴런들에 의해 독자적인 감각-행동을 한다. 문어의 뉴런이 대량으로 증가한 것은 이렇게 제어하기 힘든 다리와의 협응과 제어를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신경세포의 필요는 내부적 제어를 위한 진화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은 부산물로써 부수적 이익을 가져왔다.   &nbsp;  앞선 실험 사례처럼 외부 대상의 식별은 ‘지각 항상성’이라는 시점을 달리하여도 동일한 대상임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 척삭동물인 많은 새들은 이러한 지각 항상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비둘기 눈 실험에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사물을 보게 했을 때, 다른 눈으로는 그 사물을 알지 못한다. 즉 비둘기는 반쪽의 뇌를 가졌다. 동일한 대상을 식별하지 못한다, 새들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안구(眼球)간 전달이 되지 않는 지각항상성이 결여되었기에 여러 방면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조잡스러운 임시방편으로 고안된 기술이다. 문어는 자신이 먹을 수 없는 새로운 사물에 호기심을 보인다. 대부분의 동물은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지만 문어는 한동안 그 사물을 잡고 이리저리 훑어보고 자신의 놀이기구로 삼는다. 이러한 관찰 사례들은 문어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의식의 한 편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  <br>일부 생물학자들은 저자의 문어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 경험을 의식으로 이해하는 데 반론을 편다. 경험하는 것은 생명체 개체 내부의 복잡한 활동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세계의 내적 모형”이기에 문어와 같은 단순한 생물에게는 이러한 내적 세계의 모형이 없으므로 의식이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증이나 갈증, 호흡곤란과 같은 원초적 감정들, 즉 신체적 결핍과 상태를 파악하는 느낌과 같은 주관적 경험의 오래된 것들을 왜 의식이라 할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nbsp;  <br>이러한 느낌들은 정교한 세계에 대한 내적 모형 없이도 느낄 수 있으며, 결코 복잡한 인지 처리 능력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회의적 태도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통증은 보편적인 주관적 경험의 형태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 인간의 경험을 동물에게 투사하여 우리에게 없는 특성에 기대어 판단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문어는 심하게 손상된 자신의 다리를 잘라냈고, 부상 입은 부위를 한동안 살피고 보호했다. 돌봄과 보호는 통증의 지표이며,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구별하는 것은 주관적 경험 능력의 표지라는 것이다. 문어의 사냥 여행 관찰에서 저자는 고리 형태의 경로를 기록하며, 능동적으로 이동하고 제어가 가능하며 목표 지향적으로 가득한 삶의 모습을 여행을 마친 후 본래 자신의 굴에 돌아와 앉는 문어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의식으로써의 문어의 주관적 경험을 입증한다.  &nbsp;  그 밖의 주관적 경험의 양태들  &nbsp;  문어는 위장의 대가이다. 문어는 자기 주변의 색깔들과 완전하게 일치된 색깔로 변색한다. 이 뿐 아니라 수많은 화려한 색깔들로 수초 사이에 파노라마처럼 색을 변화하며 마치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듯하기도 한다. 색깔, 포즈, 디스플레이의 다양한 패턴으로 의례화(儀禮化)된 디스플레이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짝짓기 상황에서 신호와 반응의 조합은 그 다채로운 색깔의 변화가 미묘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일 수 있음을 비추기도 한다.   &nbsp;  “문어의 피부는 그 자체로 빛을 감각하며 동시에 피부의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문어는 피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정교한 색채 제어 기제를 조작하여 반응한다.”&nbsp; &nbsp;-본문 166쪽에서  &nbsp;  정말 놀라운 것이기도 한데, 노란색, 은회색, 검붉은 색 등 무수한 색깔로 자신의 신체를 변색하는 문어가 실은 색맹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변화하는 찬란한 색을 볼 수 없다면 이 무슨 해괴망측하고 사치스러운 조화란 말인가? 막대한 비용을 소요하는 이 변색은 위장과 신호보내기를 위한 진화 산물이었으며, 그 부산물로 위장과 신호보내기의 중간적 위치인 데이마틱 디스플레이(deimatic display)라는 포식자로부터 도주하면서 생성하는 강한 대비의 패턴을 통해 적을 놀라게 하거나 혼동케 하려는 시도의 효과를 얻었으며,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표지, 일종의 언어(?)로의 가능성을 얻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즉 위장 기제가 의사소통과 정보 전파의 수단이라는 새로운 쓰임을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눈은 색맹이지만 피부 세포는 이러한 빛을 감지하는 소포들이 있어 자신의 색깔을 피부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변화하는 색깔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판단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nbsp;  비고츠키나 다윈과 같은 탁월한 생물학자들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언어는 복잡한 사고에 필수적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언어 없이는 지각, 인지와 같은 의식에 다른 행동은 불가능하다며 문어와 같은 단순한 두족류의 ‘감각-행위’ 및 ‘행위-형성’ 적 활동을 부정했다. 그러나 내면의 언어적 흐름 없이도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조직화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언어 중추가 손상된 실어증 환자의 실험 사례는 언어를 잃었어도 주변세계의 감각과 판단, 행동에 문제가 없었으며, 단 세 가지 정도의 소리를 내는 개코원숭이는 이러한 단순한 소리를 해석하여 주변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 없이 인지-판단-행동 활동은 부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어도 역시 이러한 경험 기억과 계획하는 마음이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nbsp;  <br>결 어  &nbsp;  2015년 처음으로 문어의 유전체 염기서열이 분석 되었던 모양이다. 각 개체의 생애 동안 신경계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읽었는데, 인간의 몸에서 발견되는 세포가 정확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프로토카트헤린이라는 분자군이 문어에게서도 동일한 일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문어와 인간이 유사한 분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다. 또한 최근의 갑오징어 연구에서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인 일화기억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기억과 구분하기 위해 주관적 경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유사 일화기억’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 용어를 동물에게 적용해도 되는 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명명일 것이다. 특정한 먹이로 무엇을, 언제,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료한 기억을 지녔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각기 다른 계열에서 거의 확실히 평행 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전혀 다른 신체에서 큰 뇌를 진화시킨 이들 두족류의 신경계 진화는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nbsp;  오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인간중심주의는 이제 그 환상이 비인간들의 적대가 환경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관계로 이해될 것을 요구하는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nbsp;육지 생물은 물론 바다의 생물도 남획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점증하는 스트레스로 사라지고 있다. 어떤 생물체도 살아갈 수 없는 오염물질과 산소가 희박한 데드존이 바다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1883년 다윈의 전사를 자처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중요한 물고기의 어장은 무한정에 가깝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낙관론은 틀렸으며,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nbsp;  바닷물의 산성화로 PH균형도가 무너지면서 유기체들의 영향이 심각한 것이 각종 생물체의 군집 붕괴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수년 간 바다 속 야생의 문어 관찰지였던 옥토폴리스에도 문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바다를 기원으로 한 생명체들이다. 기원이 파괴되고 있다. 『아더 마인즈(Other Minds)』, 타자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저술은 큰 신경계를 지녔으며, 일화기억은 물론 풍부한 주관적 경험의 실례들을 지닌 문어, 갑오징어 등 이들 두족류가 통증을 느끼는 생명체일 가능성을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nbsp;  우리 주변의 비인간들의 마음의 세계를 마치 인간의 다운그레이드(down-grade)된 버전 정도로 인간적 경험으로 투사하는 인식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들만의 독특한 마음(?)이 있음을, 그것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생태학적 문제는 물론 행성 지구의 보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나무, 그 어느 지점에서 분기된 공통조상을 지닌 생태계 만물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획득하게 되는 저술이다.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극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 그 타자가 문어가 되었건 저 어느 곳에서 배제된 채 고립된 존재들이건 그들의 주관적 경험이란 것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이 행성을 조금은 더 살아있음의 풍요로운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 속 낯선 존재, 징그러운 외형의 연체동물, 문어의 삶을 쫓다보니 더는 이들 두족류를 먹거리로 여기는 게 불편해진 마음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5/27/cover150/k4521358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55274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彈實, 김명순의 소설 ❶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93841</link><pubDate>Sun, 15 Feb 2026 15: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9384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641443&TPaperId=1709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635/17/coveroff/896764144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030684&TPaperId=1709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702/79/coveroff/k90203068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030684&TPaperId=1709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702/84/coveroff/k26203068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42038655&TPaperId=1709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32/30/coveroff/k24203865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269207&TPaperId=1709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33/82/coveroff/89572692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한국근대문학 여성문학의 길을 열었던 김명순의 소설을 몇 차례에 나눠 각 작품의 내용과 소소한 몇 글자 감상기록으로 남겨둔다. 1917년 11월 《청춘》11호를 통해 작가 생활을 시작케 했던 「의심의 소녀」와 1920년 3월 작가의 아명이자 필명이기도 했던 탄실 이전에 망향초(望洋草)라는 필명으로 《여자계》 4호에 게재했던 「조모의 묘전에서」, 그리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1년 남짓한 교토의 음악학교로 추정되는 생활 끝에 학비와 생활비의 곤궁으로 다시 귀국한 1921년 12월~1922년 2월 2회에 걸쳐 《개벽》 18~19호에 연재했던 「칠면조」 세 편으로 시작하련다.  &nbsp;  【彈實,&nbsp;김명순&nbsp;1896.1.20.~1951.6.22】<br>단편 「의심의 소녀」는 내겐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산월에 대한 애도이자 자기 삶에 대한 주체자로서의 세상을 향한 투명한 공개선언으로 여겨진다. 소설은 평양의 한 마을에 기거하게 된 범네로 불리는 8,9세 소녀와 그녀의 외할아버지 황진사에 대해 동리 사람들의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부터 그네들의 삶에 드리웠던 진실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며, 당대 세력을 지닌 남성들의 중혼과 축첩의 야만성과 그로인한 모욕과 폭력에 더불어 이를 감당하여야만 했던 여인네들의 삶의 현실에 애도를 보낸다.&nbsp;  소녀 범네에 대한 세간의 묘사를 보면 “풋남(藍) 순안치마에 담황색 겹저고리 입고 분홍신을 신었다....실로 새마을 동리 소녀들과는 군계일학“ 이지만 그 ”어여쁜 얼굴에는 어린 아이에게는 없을 비애(悲哀)에 지친 빛이 보인다.“  오지랖 넓은 마을 아낙네는 어느 날 황진사와 범네가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행적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전해들은 마을 이장의 목소리로 범네는 탕자인 조 국장과 강제 혼인하게 되었던 황진사의 무남독녀가 낳은 딸 가희(佳姬)임이 드러난다.&nbsp;  조 국장이라는 자는 경성에 세력의 기반을 둔 여색에 몰두하는 파렴치한이다. 이 자는 “세 번 처를 바꾸고 첩을 갈기도 10여 인”이고,  “화류에 놀고 촌백성 계집까지 희롱하는” 그야말로 희대의 탕자(蕩子)이다. 범네, 즉 가희의 어머니인 조 국장 부인은 학대와 감금의 비관 끝에 24세에 자결하였으며, 황진사는 어린 가희가 조 국장의 첩들에 의해 곤경을 겪을 것을 걱정해 이름을 범네로 바꾸고 조 국장의 시선을 피해 방랑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이 소설이 이광수에 의해 선외가작으로 뽑혀  《청춘》에 등단하게 된 것은 중혼과 축첩이라는 악습에 대한 얼마간의 시대적 공감이 태동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nbsp;  단편 「조모(祖母)의 묘전(墓前)에서」는 장편(掌篇;손바닥)소설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인데, 여성의 혼인 풍습이 지닌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다. 박춘채(春菜)는 열일곱 여성이다. 당시 유명한 여자 묵화가인 할머니 운계(雲溪)여사의 손녀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다. 그런데 운계여사에게는 남자 자식이 없어, 상철이라는 사내를 아들로 입적시킨다. 운계가 임종하자 막대한 유산을 가로 챈 상철이란 자는 사업을 벌이다 운계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은 물론 춘채의 재산까지 몰수하여 말아먹는다. &nbsp;  이에 더해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되자 춘채를 채권자의 방탕한 자식 김영수에게 부리나케 시집보낼 준비에 돌입한다. 작가 김명순은 아들 입적이라는 당대 호주 상속제에 의문을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성을 한낱 금전적 소모품으로 여기는 가부장제 남성들과 사회 인식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다.&nbsp;  “유탕자(遊蕩子)는 심산에 나날이 시들어 말라가는 산 백합을 돌아도&nbsp;안 볼 뿐 아니라도화의 이름 난 기생을 작첩하였다.&nbsp;상철의 부처는 춘채를 김수영에게&nbsp;약혼시켰으므로&nbsp;부채를 담당치 않고...” - 「조모(祖母)의 묘전(墓前)에서」에서&nbsp;  처를 박대하는 것은 물론 구타와 학대를 일상으로 자행하는 유탕자(遊蕩子)에게 춘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재정적 이익을 위해 혼사가 강행된다. 소설의 제목이 ‘할머니 묘지 앞에서’인 것은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몰린 춘채가 할머니 묘소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하소연하기 때문이며. 바로 그 탄식의 음성에 고스란히 당대 남성중심의 질서에 대한 강한 전복의 의지가 있음이다.  “치욕의 혼인 가마를 김씨 댁 문내에 머무를 손녀의 비운을 모르십니까?”에 이어, “금지옥엽 길러주신 열일곱 생명이 구수(仇讐)되어 금전에 바뀌어 물품같이 유탕자(遊蕩子)의 희생이 되어가는 손녀의 운명을 어찌하오리까?”라고 할머니 묘소 앞에서 부르짖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한 여성의 자기 주체로서의 분노에 찬 항의였을 것이다. &nbsp;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에 의해 채색되어 문란한 여성으로 낙인이 찍혀 문단 내 남성 작가들을 비롯, 세간의 온갖 혐오스러운 비난은 김명순을 재차 일본의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그 식민제국인 일본 유학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에 똬리를 튼 또 다른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동족 여성들에 대한 성 착취의 시선이고, 경제적 곤궁의 고통이었다. 필요 생활경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모국으로 돌아 온 직후 《개벽》에 발표한 소설이 「칠면조」 다. &nbsp;【《開闢》18호에 게재된 소설 ‘칠면조(七面鳥’), 김명순 여사로 표기됨.】<br>「칠면조」는 조금 독특한 소설인데, 서간문, 즉 편지의 형식을 띤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서간문이란 수신자를 향한 쓰는 이의 내면이 밝혀지는 글이며, 그것이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을 알며 쓰는 편지의 경우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수신자는 ‘나-나 슐츠 선생’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소설의 화자가 교토 음악학교를 다닐 때의 스승으로 짐작된다. 즉 음악(피아노)학교 시절에 대한 자신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 대한 내적 고백의 기록이라는 얘기다. 서구 문명에 대한 이른 학습을 했던 작가 김명순은 ‘칠면조’라는 단어가  ‘말이 많지만 의미 없는 소리’나 ‘어리석은 사람’을 은유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nbsp;  특히 ‘실패자’라는 의미로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두 번째 감행된 1920년에서 1921년의 1년 남짓한 일본 유학생활은 그녀의 의지를 다방면에서 좌절케 하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소설에서 K부(府)라고 표기되는 지역은 교토(京都)를 이르는 것일 게다. 음악학교는 화자에게 월사금을 보증하는 사람을 세울 것을 요구하고, 궁여지책 끝에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재일 조선인 노동자 박의 보증을 받게 되지만 그 남자의 태도에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박이 화자에게 “아직도 여자답고 활발치 못한 데가 있다고 무엇을 풀어버리라는 듯이 말하였습니다.”와 같이 은근한 성적 개방의 요구를 암시하는 말을 건넨다.&nbsp;  화자는 D씨로 불리는 “미소하던 흰 얼굴에 시원한 눈이 애교있는 입이 기꺼운 해조(諧調)를 외우려는 듯한” 세련된 젊은 남성에게 호감이 있다. 그러나 화자는 세상에 대한 불안의 시선이 내재되어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망설인다. “사교계에 나서려는 것은 과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실 사회는 너무도 잔혹하지 않을까 겁도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대 여성의 자기 억압으로 온전한 주체를 정립하는 데 여전히 불안의 심리를 떨쳐내지 못했음의 자기 성찰일 것이다. &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은 화자의 이러한 세상 남자들과의 자유로운 교제의 생각에 음란한, 문란한 이라는 혐오의 수식어를 붙이며 여성의 자유는 곧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라고 사회 밖으로 내쫓는다. “안 뜰에 심겨진 동백꽃 나무에서는 비 맞는 꽃송이들이 그 담 밖 길가에 떨어졌습니다.”라는 시적 문장은 화자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내쳐질 것을 예감하는 문장일 것 이다. 1917년으로부터 1921년에 이르는 대략 5년 남짓한 시간의 경과 속에서 작가 김명순이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여전히 높은 불안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 같다.  김명순의 소설은 시적 정체성과 아울러 당대 조선인들의 지적 수준을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김명순은 이러한 내적 불안과 외적 공포라는 이중의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nbsp;  김명순 소설의 두 번째 감상기록은 당대 식민지조선의 남성들이 지닌 자유연애와 여성의 성적 정결에 대한 이중의 모순에 놓인 위태로운 욕망의 갈등을 묘파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탄실이와 주영이」에 한 달 앞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오늘날 경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당대 남성 문인들이 김명순에 가하는 질시와 혐오가 본격적으로 가해지는 시기에 즈음한 작품이기에 예사롭지 않은 글이라 하겠다. 김명순은 영어, 독일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했던 남녀불문 당대 보기 드문 지식엘리트였다. 이 특출한 여성에 대한 못난 식민지조선 남성들의 머리와 욕구는 여전히 전근대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으니 그 간극만큼이나 각성한 여성 주체의 삶은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이다. 으이그 지지리 못난 놈들의 역사라니.<br><br><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33/82/cover150/89572692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3823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한국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주체의 글쓰기 - [외로운 사람들 - 김명순 소설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90203</link><pubDate>Fri, 13 Feb 2026 18: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9020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269207&TPaperId=170902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33/82/coveroff/89572692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269207&TPaperId=1709020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외로운 사람들 - 김명순 소설집</a><br/>김명순 지음, 송명희 엮음 / 한국문화사 / 2011년 12월<br/></td></tr></table><br/>『탄실이와 주영이』와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에 대해서  &nbsp;  1924년 6월 14일부터 같은 해 7월 15일까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27회 연재된 김명순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는 당대 신여성이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과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또한 여성 대다수인 구여성은 물론 동료 신여성에게 조차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발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한국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여성 저항의 음성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당시 일본의 소설가로서 김명순을 모델로 쓰여졌다는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에 대한 비판적 위치에서 써진 김명순 자신과 조선인으로서의 변호의 소설이기도 하다.  &nbsp;  카프(KAPF)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김기진은 김명순이 나카니시 소설의 모델(순결을 잃는 여성인물-주영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원색적 비하와 혐오 발언을 쏟아 부었다. 또한 방정환은 공개장을 통해 자신들의 공개장에 대한 김명순의 반박문 게재 지면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신문 지면을 통해 김명순의 명예를 더없이 추락시킨다. 김동인이 김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을 발표하여 2차 가해를 가하며 가장 더러운 추행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들 당대 문단의 남성 작가들은 문란하고 더러운 여성의 이미지를 그녀에게 가두고 매체를 이용하여 방탕하고 오염된 여성으로서의 낙인을 찍는다. 자신들의 좌절된 욕망과 한계를 김명순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투사하여 공격하면서 그 비루한 감정을 배설했다.   &nbsp;  공개장, 신문, 잡지 등 온갖 매체를 이용한 이들의 공격은 대중에게 학습되고 용해되어 광범위하게 김명순과 신여성에 대한 혐오감정으로 퍼져나갔다. 식민지조선의 남성들의 저열하고 무분별했던 당대의 사태를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서 일종의 못난 놈들의 비열한 시기심과 그 천박하고 무지한 욕망의 방향이 식민지 통치 권력인 일제로 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료인 잘난 여성에게 향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배경에 대한 약술은 이쯤하기로 한다.  &nbsp;  이 책 『외로운 사람들』은 김명순이 작가로 데뷔하게 되는 1917년 11월 잡지 《청춘(靑春)》 11호에 게재된  「의심의 소녀」에서부터 1921년 12월부터 1922년 1월 《개벽(開闢)》 18~19호에 연재된 「칠면조」를 비롯, 《신여성(新女性)》,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문단》 등에 연재되거나 게재된 총 15편의 소설 작품 모음이다. 표제가 된 「외로운 사람들」은 「탄실이와 주영이」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직전인 1924년 4월 20일부터 같은 해 5월 31일까지 연재된 거의 장편 분량에 가까운 소설이다. 수록된 많은 작품들이 원본 결락과 부분 손상으로 인하여 완전성을 지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탄실이와 주영이」가 어떠한 사유도 없이 돌연 연재 중단되었던 사정도 알길 없이 미완의 작품으로 수록될 수밖에 없었음에 애석함이 가득하다. 당대 문단은 물론 오랜 시간 김명순을 한국문학사에 지워버리려 했던 남성문인들의 작태가 거들었던 비열함의 흔적인 것만 같아 더욱 분노가 치민다.   &nbsp;  <br>단편 「탄실이와 주영이」에 대해서;  &nbsp;  ‘탄실’은 김명순의 아명(兒名)이자 필명(筆名)이다. ‘주영’은 일본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의 여성 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가 두 명의 남성 문인(시인과 소설가)이 탄실이 의지처를 삼고 있는 이복오빠인 의사 김정택의 병원을 방문하여  『너희들의 등 뒤에서』가 탄실을 모델로 하였음을 화제로 하여 탄실의 정절 상실에 대한 당대 남성들의 시선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의 모순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nbsp;  또한 나카니시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의 연민을 보내지만, 그의 소설적 상상력이란 자신의 욕망을 식민지 조선인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지배적 평가처럼 소설을 통해 일본인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우리(조선인)에게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는 반론이다. 탄실은 이러한 일본인 작가의 은폐된 욕망을 간파하고 있다. 이는 조선인 두 문학청년을 향해 탄실의 처지를 두둔하는 의사 김정택의 입을 통해 대변되고 있다.   &nbsp;  소설의 시작 문장은 당대 식민지조선 서울 종로의 풍경과 그 안의 인간군상의 모습이 대비되어 기술되고 있다.   &nbsp;  “6월 초승의 요사이 일기로는 아주 더운 어느 날 오후였다. 석양은 지금 황금빛같이 찬란함으로 조선 서울 종로 네거리에 뜨겁게 내리비친다....상점의 광고판들...,종로경찰서 지붕 위 독일병정 모자 같은 시계,...지루한 볕에 반짝이는 반(半)서양식 건물의 유리창들...마치 찬란한 심포니를 보는 것 같을 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의 구릿빛같이 무르익을 것을 저들의 약함으로써 받는 모든 학대 때문에, 기운이 쇠침해지고 행동이 느려져서 전체로 빈혈 된 그들의 얼굴에는 붉은빛이라고는 볼 수 없고, 누렇고 검어서 부질없이 의지 약한 힘없음을 보인다.“   &nbsp;  일본 경제의 소비 도시화된 식민지 경제의 지루한 찬란함과 무력감과 무능함, 비루함으로 체화된 인간들을 이렇게 소설의 전면 배경으로 삼은 것은 김명순이 식민지 조선과 그 나라의 사람들에 지니는 비판적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성폭력의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한 단순한 변명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 병정처럼 뾰족하게 높이 치솟은 시계탑 같은 일제의 억압에 눌려 의지가 빈약해진 남성들은 자신들의 결여와 무능을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의식을 통해 조선의 여성들을 이중으로 식민화했다.   &nbsp;  남성들은 근대화와 함께 밀려든 서구 문명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정신적 사랑의 물결에 대한 동경으로 지적이고 세련된 신여성을 욕망하면서 그런 여성들이 성적 사회적 욕망의 각성을 통한 주체로의 전환, 공동체적 자아로의 확장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발견을 향한 탐색에 나설 때는 방종하고 문란한 여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여성 주체의 언어를 말하는 여성을 무참히 내몰아 매장해버렸다.  「탄실이와 주영이」는 바로 여성의 성적 운명, 즉 순결한가, 순결을 잃었는가에 따라 여성에 대한 평판이 좌우되었던 가부장제 식민지 조선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자기 존재를 새로이 증명하려는 깊은 투쟁이다.   &nbsp;  김정택과 두 문인 청년의 대화에서 소비되고 있는 일본작가의 주영이는 남성들의 성적 뒷담화로 소비되는 탄실의 왜곡된 성으로 대상화된 소모품이다. 탄실은 이렇게 자신을 왜곡하여 소비하는 세계에 대항하여 스스로 말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삶을 언어화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의 허영과 허위의식들인 그 무의미를 도처에서 들추어낸다.  한 문인청년은 말한다. “탄실이가 정조를 잃고 그 사나이에게 달려들던 생각을 하면 어찌 한낱 여자가 그다지 지독한지 치가 떨려집니다....그 남자를....사랑도 안 하면서 다시는 육체적 관계도 맺지 않으려면서 강제로 한 남자의 일평생 행복을 흐지부지 해주려 했던 것입니다.” 탄실을 겁탈했던 조선인 일본육사출신의 장교의 행위에 대한 탄실의 저항을 지독하다고, 그 남성의 일평생을 망가뜨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여성에 씌워진 순종과 무력감, 수치심으로의 절망과 침묵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발설이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꾸는 뒤넘스러운 언설인 것이다.   &nbsp;  탄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이복오빠 김정택의 다음의 문장은 그녀의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탄실이는 그 반대로 조선 사람이면서 일본 사람의 생활 감정에 동화된 조선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았네.” 라거나, “분명한 짐승 같은 것에게 팔 힘으로 앗기었다 하면, 시방도 바로 듣지 않고 내 누이만을 불량성 가진 여자로”, 때문에 탄실은 “참 작은 한 여자의 10년 동안 걸어 온 길이 지독히도 무서워”라는 말처럼 문단은 물론 사회 대중으로부터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의 길이었음의 증언 일 것이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이 지닌 한계를 화자의 전환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데, 탄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재일마다 번갈아 서술되면서 문자그대로의 한 여성의 성장과 과거의 삶을 여성 주체자로서의 목소리로 드러낸다.   &nbsp;  어머니 산월이의 가문이 갑오경장 이후 몰락함에 따라 삶의 형편으로 기생으로 팔리게 되고, 평양의 거부 김형우의 첩실이 되는 일련의 이야기가 담담히 흐른다. 당대 일반 평민의 팍팍한 삶의 형편이란 것이 이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한 개인에 그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의 선악을 평가할 수 있냐는 항변일 것이다. 어머니 산월이를 이끌어 교회에 갔던 날의 기억을 술회할 때, 세상이 어린 탄실에게 손가락질하며 기생의 딸, 첩년의 딸이라는 차별의 호명으로 어머니를 멀리하려 했던, 다시 말해 자신의 출신과 관련한 어머니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의식의 전환을 보여주며, 당대 여성의 삶을 당당하게 진술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로서의 거듭남을 선언하는 것으로 읽힌다.   &nbsp;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세상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가졌습니다.”라는 교회사목의 말에 산월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러분이 아다시피 기생이라는 것은 남의 큰마누라가 되는 법이 없으니까 자연히 나도 남의 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지금은 내 한 몸도 아니고 이런 어린 것이 있고 보니 그 집에서 나올 수도 없지 않습니까....이 세상 사람이 죄다 죄악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실지라도 그것을 일절 헤아리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기생이라 주눅들지 않으며 여성으로서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을 어떻게 당신들은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nbsp;  이제 좀 건너뛰어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 몰래 일본 유학길에 나선 열여덟 어린 여성 탄실의 사정이 술회된다. 그녀가 관찰한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인 남성들의 모습들이란 그야말로 비루하기 그지없다.  “일본 유학생 군인들은 분풀인지 낙담인지를 향할 곳 없어서 되는 대로 방탕에 몸을 맡겼다. 입으로 한국을 근심하고 상관을 욕해서 그럴 듯이 인심을 사놓고....운동비를 무척 탐해서 소비해버리고 나라가 글러서 그렇다고 핑계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열성스러운 의의도 분명히 갖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잃겠다....그런 중에서도 서로 음모하고, 서로 욕하기는 잊지 않았다.” 며 이미 심리적 종이 된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방종과 다름없는 자유를 비판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요. 심한 경멸이라고.  &nbsp;  탄실 김명순은 소설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성폭력피해자는 곧 문란한 신여성이라는 낙인,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기 위한 고군분투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낙인을 벗어나려는,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질서가 근원적으로 봉쇄했던 여성의 삶에 대한 언어의 진술을 통해서 자신을 가둔 채색된 이미지로부터 탈주하여 여성이라는 제한적 이해가 아닌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으로 인식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던 사회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작품을 통해 새롭게 여성을 재정의 하려는 절박한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  소설의 연재는 완료되지 못하고 중간에 소리 소문 없이 중단되어 끝내 그녀의 문학적 시도는 지배집단의 경계 바깥으로 내쳐지고 만다.   &nbsp;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남이 겉으로 명예를 찾을 때 나는 속으로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한 마디의 모욕을 백 마디로 갚고 싶었다.”  &nbsp;  남성중심 사회의 강고한 질서에 대항하여 여성으로서의 자기주장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김명순은 생생하게 입증했다. 그녀에게 가해진 그 거친 모욕들을 갚지 못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쓸쓸히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뇌병원(靑山腦病院)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 또한 그 어떤 지배질서 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비단 젠더 투쟁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변화를 향한 욕망의 실천에서의 그 처참한 곤경을 발견하게 한다.   &nbsp;  멍투성이로 실패한 여성 전사를 만나는 우리 근대소설의 읽기는 오늘에도 여전한 전근대적 성역할 고정 관념에 충실한 불평등과 불의의 문제가 잔존하고 있다는 문제인식 때문이다. 이미 지나쳐 온 20세기 한국문학 읽기는 서구의 문학들과 달리 바로 오늘의 우리네 문제에 그대로 계승 또는 이전되고 있기에 소설 문학의 미적 양태 이상의 감상을 던져준다. 이제 막 시작했다, 김명순의 소설로 시작된 한국근대문학 읽기는 내게 어린 시절 수동적으로 수용되어야만 했던 그런 읽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시선과 감응으로서의 이야기들로 전해져온다. 이선희로 갈까, 백신애로 갈까, 인격적 소통과 외설적 가능성을 여는 사랑이라는 곤경 앞에선 이선희의 글쓰기로 갈까, 아니면 김명순의 처절한 배제를 본 백신애의 광기로 갈까.&nbsp;<br>[참고] 본 소설의 1924년 연재분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신문사와 일자를 검색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nbsp; LINK]]></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33/82/cover150/89572692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3823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한국문학 속 ‘미친년들‘의 여성 서사 系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79084</link><pubDate>Sun, 08 Feb 2026 15: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7908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34834&TPaperId=17079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393/6/coveroff/893203483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4634&TPaperId=17079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35/59/coveroff/8932024634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0302&TPaperId=17079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15/35/coveroff/893202030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535465&TPaperId=17079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489/33/coveroff/k562535465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92936385&TPaperId=17079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780/20/coveroff/k492936385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79084'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nbsp;이 글은 『동시대 문학사 1권 ‘나’』와 『동시대 문학사 3권, 사랑』에 각기 수록된 이광호 평론가의 「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 강계숙 평론가의 「한국 여성시의 시작(始作/詩作)을 돌아보다」,  심진경 평론가의 「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 강동호 평론가의 「종언 이후의 사랑」,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을 바탕으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의 문제의식에 터 잡은 일종의 글모음이자, 소소한 잡설이다.<br>과거가 잔존하는 현재라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이 현시대에 혼융되어 실재함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체감하는 시절이다. 국민대중을 기초(基礎)로 한 민주주의와 자율적 윤리의 성숙에 대한 요구가 강한 지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권위주의와 같은 과거의 퇴행적 유령들이 상존하며 세상을 갈등과 혐오, 혼돈의 시대로 몰고가는 것처럼 결코 동시대는 동시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의 이러한 시간적 얽힘은 지난 것들에 대한 내 관심을 자극해오던 차에 ‘동시대의 문학사’라는 기획 하에 ‘폭력, 사랑, 나, 젠더’라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네 개의 주제어로 출간된 책을 읽게 되었다.   &nbsp;  그것은 지금 여기, 바로 오늘에 활발히 논의되거나 논의되어야 할 하나의 문학사라는 거대한 역사의 범주로 포섭할 수도 없는, 아니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근대 문학의 주제계(主題系)들 각기의 기원을 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들의 각 담론 혹은 계보(系譜)史들을 읽다가 예기치 못한 우리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작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 글은 이로인해 촉발된 개인의 욕망에 따라 발췌한 글 모음의 보관용 기록이다. 잊혀진 그 문제적 작가와 작품, 그리고 커다란 시차를 두고 계보를 잇는 작품들은 그러한 기록에서의 부수적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nbsp;  <br>문제의 작가 김명순과 그녀의 작품 세계는 앞서 열거한 &lt;사랑과 ’나‘와 젠더&gt; 세 주제계열의 주제 글들 모두에서 설명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시사하는 내용은 매우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감정은 곧 이어 한국문학에 대한 나의 많은 몰이해와 오독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고, 부지런히 몇 권의 책을 부랴부랴 구입하도록 이끌었다. 그것을 어떤 범주의 언어로 특정한다면 한동안 여성 독자들에게 베스트셀러였던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이미 분석 제시한 “문학적 열기와 충돌이 적절한 출구를 얻지 못해 내면의 심층에 갇혀있어 제 숨을 틀어막는 병인으로서의 정신분열”에 내몰린 ‘미친 여자’이고, “여성이 여성을 서로 감시, 단속하게 하는 신화적 지층을 탐사한”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이기도 하다.  &nbsp;   『동시대 문학사 1권 ‘나’』의 「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라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근대 초기 여성 작가에게 ‘나’의 글쓰기를 밀고 나가는 것은 모성 이데올로기와 인습적인 가족제도에 얽혀있는 식민지 젠더 시스템과의 투쟁을 의미했”으며, “여성이 ‘나’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나’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이다.”라고 쓰고 있다.   &nbsp;  1920년대 식민지조선은 중혼(축첩)과 남성불륜이라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는 사회였으며, “여성의 지식과 교양은 불행을 가져오는 화근이며, 기껏해야 남성사회를 보완하는 범위 내의 지식습득만 허용되는 세계”였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론 ‘신여성’이라는 식민지 남성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과 결핍을 투사하는 허구적 대상으로서의 환상을 씌워놓곤 막상 그 여성들이 새로운 풍속과 여성의 주체적 정립을 향한 해방의 목소리를 낼 때에는 여지없이 온갖 비아냥과 조롱으로 무참한 폭언과 비열한 가해를 가하여 문학의 장은 물론 사회적 낙인을 찍어 내치는 시절이기도 했다. 즉 ‘신여성=근대적 지식인 여성=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을 남성 자신들이 유용성에 따라 활용하는 비열한 언어였다.  &nbsp;  이때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1917년 잡지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명순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출간되던 1925년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의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詩集『생명의 과실』을 출간한다. 이미 활발한 문학 작업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문단 남성 작가들 또한 김명순에게 ‘신여성’이라는 더러운 기호로 자신들의 욕망을 투여하며 열광했지만, 그녀가 근대적 자아인 개인 주체로서의 여성 자기의 목소리를 내자 남성 문인들은 연애 스캔들을 내세워 그녀의 글쓰기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nbsp;   김명순이 유학시절 일본군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이응준이라는 소위로 임관한 조선인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매일신문》의 기사는 곧바로 김명순을 문란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끝없이 채색하고 소비하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으로 변질되는 괴이한 윤리적 잣대가 작동했다. 특히 남성중심의 문단은 정말 파렴치했는데, 김기진, 방정환, 김동인 등이 “린치에 가까운 공격”으로 악질적 가해를 해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동시대 문학사 3권, 사랑』「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nbsp;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추악한 소설(김연실전)을 써서 2차 가해질까지 해댄 것인데, 이 친일 매국노는 한국문학사의 더러움을 장식하는 감초인 듯하다. 김명순은 이러한 적대적 불화에 고군분투하며 격렬한 언어적 발설과 분출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기를 희구했지만 문단과 사회의 극단적이고 처절한 단절과 처벌은 그녀에게 그 어떤 극복의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앗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완전한 절망감에 부딪쳤을 때 그 어떤 존재건 미치거나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울분과 수치심과 복수심을 발산함으로써 세계에 호소하며 그런 스스로의 정념을 객관화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삼인칭 장치를 활용하여 분투하지만 결국 분열로 진행되고 만다. 그녀의 「내 가슴에」라는 시를 읽다보면 “조각조각 찢어진 붉은 꽃잎들같이도”, “나는 무수한 검붉은 아이들에게 묻노라.”, “분노에 매맞아 부서진 거울 조각들아,”, “피 맞아 피에 젖은 아이들아,” 와 같이 시문장의 전체가 찢어지고, 조각나고, 아이들이라는 분열의 언어로 쓰여져 있음을 읽게 된다.   &nbsp;[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4년 6월 14일자 조선일보 영인본]  <br>『동시대 문학사 1권 ‘나’』의 「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라는 글에서 심진경 평론가는 김명순의 분투가 가장 짙게 남아있는 작품으로 1924년 신문에 28회 연재되었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1924년)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김명순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스스로를 새롭게 재정의하기 위해 절박한 시도를 한다. 심진경은 이를 “자기변명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해독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분투는 실패하고, 거처도 없이 떠돌다 일본의 뇌(정신)병원에서 죽고 만다. 여기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여성이 ‘나’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나’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 빠르기도 하여라.)  &nbsp;  이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미친년들, 미쳤다고 낙인찍힌 여성들은 고정된 성역할 규범을 벗어났기에 들어야 했던 사회적 징계의 언어”였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적 욕망과 주체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의 비열함에서 비롯된 ‘여성의 광기’라는 언어가 역설적으로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시도하는 언어의 의미로 비로소 와 닿은 것이다. 성폭행당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를 가해한 당대 문단 남성들의 위선과 비열함이란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김명순에게 가해진 일방적 단절과 폭력과는 차이가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고 재구성하려는 고백적 자기 서사인 1934년에 게재된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청구(靑邱)씨에게」는 곧바로 “뻔뻔한 불륜녀”라는 비난과 더불어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로 낙인찍어 내버려졌다. 나혜석도 알츠하이머로 떠돌다 행려병자로 객사하고 만다. 여성이 자기 주체의 정립을 위한 목소리를 내면 곧바로 처단되던 그 비루한 실제는 이렇게 미친년, 여성의 광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nbsp;  어쨌거나 김명순과 나혜석은 소위 ‘신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여성 지식인 엘리트였다. 그런 그녀들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처절하게 내쳐지고 미친년이 되고, 이름 없이 사라졌다. 당대 여성 인구의 대다수는 이렇게 근대화를 체화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위 ‘구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권력이 들어서서야 ‘통속교육’이라 해서 자신들의 통치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소양 교육을 시행하였을 뿐 아니라, 1920년대의 식민지조선의 문단이라 해도 자유자재로 한글을 구사하는 인물이 드물었다는 증거들은 구여성들에게 자기 각성, 여성의 새로운 자율적 자기 주체의 정립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물음이 발생한다.   &nbsp;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서로 싫어하고, 서로 경쟁하며, 다른 여성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즉, 성공하거나 권력을 지닌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보호해주거나 그로인해 고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서로간의 차이로 인해 작동하는 심리적 두려움이라는 여성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간극의 문제다. 1938년 여성 소설가 백신애는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광인으로 내쳐진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광인 수기」를 발표한다.   &nbsp;  서구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가 2005년에 발표한 권력을 지닌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 놓여있는 강의 문제가 백신애의 신여성과 구여성의 물음 속에서 이미 개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신애의 소설 작품들에는 “균열적이고 병리적 상황에 빠지는 인물”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백신애는 김명순이나 나혜석이 문단이나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받고 처형되는지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취한 방법은 ‘이중 언어 전략’이다. 따르는 듯 하지만 이면으로는 저항을 감추는 듯 발설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의 광기는 살아내기 위한 불가피한 생의 필살기였던 셈이다.   &nbsp;  “네 - 이눔 하누님아, 에이 비러먹을 개새끼 가튼 하느님아, (...) 아이 무서워, 아니올시다. 거짓말이올시다.(...) 부대부대 벼락은 치지말고 잘 살두록 해주시소.“ -백신애, 「광인수기」에서  &nbsp;   「광인 수기」 속 미친 여자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된 여성이 자신의 내적 분열, 분노, 저항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다.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불복종 여성, 특히 ‘미친년’의 문학사적 전통은 근 60년간 끊어졌다 2007년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혜로 다시 출현했다.”  물론 여성의 광기를 소설의 제재로 직접 삼은 소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남성중심의 젠더화된 여성에 대한 관습화되고 스캔들화된 허구에 저항하는 무수한 여성 서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광기에 강하게 견인된 ‘김영순-백신애’의 계보는 ‘김명순-백신애-한강’이라는 연결선으로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무슨 문학적 계보를 의도적으로 만들고자하는 따위의 도식이 아니다. 소설 속 미친년들이 다만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nbsp;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스스로를 나무라고 상상하는 정신병자로 변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녀가 본래 미친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했던 여자”가 아버지에게 맞아죽은 개, 그 개를 강제로 먹어야했던 기억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로 인한 사후적 채식주의의 선택이 가부장제적 폭언과 폭력의 계기로 이어지고, 급기야 거식과 침묵을 거쳐 나무-되기라는 불가능한 변신 욕망으로 나가는 과정이 연작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아버지-남편이라는 가부장질서에서 심지어는 식물적 육체가 된 처제 영혜의 육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아 또다른 형태의 여성적 역할로 대상화하는 예술로 가장한 형부의 성폭력이 더해진다. 극단으로 치닫는 영혜의 광기는 타자화된 여성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nbsp;   정말 조소가 터져나오는 것은 이 소설의 형부의 예술적 위선 위에 펼쳐지는 패륜적 근친상간이라 부를 수 있는 영혜에 대한 성폭행 장면을 뚝 떼어내 영혜를 패륜적 여성이라 부르며, 부도덕한 소설이라고 욕설을 뱉어내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한 웅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문해력 무능을 만방에 알리는 무지의 어리석음은 물론,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 여성들 사이의 불신과 몰이해가 바로 지금에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지배질서에의 순응과 거부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오정희의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히스테리적 주체들의 전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nbsp;  라캉이 아마 이렇게 말했는가보다. “주체는 스스로의 결여를 전면에 내세워 타자의 권위, 규범, 사랑의 대상을 자극하고 그 타자가 내세우는 이름과 설명을 끊임없이 시험한다.”며 히스테리 주체란 타자의 욕망을 캐묻고 흔드는 운동 속에서 자기 인식을 이 구조의 두 자리를 왕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여성 주체가 오히려 오늘날 여성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가장 진솔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에 이른 페미니스트의 시점에서 보면 퇴행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감염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사회 속 여성들이다. 오정희는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히스테리적 주체로 상정하면서 가부장제적 질서라는 보편성 안에 스스로를 묶어두면서 그 안에서 내부의 예외로 존재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전략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완료된 능사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소설들 전반에 모호하고 불투명한 ‘그’라는 존재의 출몰이다.  &nbsp;   문학평론가 우찬제와 대담에서 오정희는 이를 설명하려 애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이거나 엄중한 금기에 짓눌린 자아 또는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불러온 곡두이거나 어쩌면 근원적 그리움일지도 모르며 내 의식에 투영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오정희, 우찬제의 대담록 『오정희 깊이 읽기』,2007년”라고.  에로스적 충동이 넘쳐흐르는 오늘에 이러한 전략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적충동을 부추기고 섹시미를 범람케 하는 문화의 장과 달리 공적 장에 이르러서는 이를 묵살하거나 손가락질하는 가히 변태적인 시대임을 목도할 수 있다. 기성의 남성중심의 지배질서는 물론 20세기 전반과 많이 다르지만, 21세기 오늘에서도 지배질서의 윤리와 여성 욕망의 배치는 그리 순조롭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여성 욕망과 변화하지만 여전히 강고히 잔존하는 질서의 압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nbsp;  나는 남성이다. 하지만 젠더화에 토대를 둔 성차별 의식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광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들의 계보 문학의 자취를 따라가다 한국문학의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내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진경 평론가가 “더 이상 순수 여성은 없다!”는 선언에 공감한다. 남성이건 권력을 쥔 여성이건 소외된 여성이건 “우리들 모두는 자기 안에 타자를 품은 양가적이고 미결정적인 자기 동일성이나 보편성으로서의 단일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다.” 결코 그 누구건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철저하게 세계와 이격되고 고립된 산 속 깊은 곳 자연인일 것이다.  &nbsp;  당연히 여성의 정체성이란 것도 단일 내부만으로 이루진 것일 수 없다. 타인과의 지속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상대화하고 자기 확신을 무력하게 만들며, 당연함을 잠식케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순수 여성’이라는 말의 정체성도 이미 습득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결국 여성이라는 말 자체도 이미 오염되어 있기에 순수 여성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게 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하여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른 무수한 정체성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nbsp;   평론가 오혜진은 「퀴어 친밀성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소문들」(『동시대 문학사 3권, 사랑』이라는 글에서 여성의 현대적 섹스는 “생물학적 번식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자아를 연출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함께』의 여성 주인공이 “애인은 셋 정도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 는 말의 변주처럼 들린다. 낭만적 사랑이 쾌락으로 대체된.  &nbsp;  그러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인  필리스 체슬러는 “차이와 고유성의 희생은 생물학적인 재생산과 문화적 무능이라는 여성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과 단단히 묶여있다.”고 현실의 삶에 놓여있는 여성의 본원적 고뇌에 대해 질문한다. 오혜진이나 은희경 식 전략은 필리스의 지적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진단은 빈곤하거나 조잡하기 짝이 없다. 내 부족한 시선과 이해는 지금 지나 온 한국문학들, 특히 여성 문학들을 다시금 읽어보도록 종용하고 있다.&nbsp;<br>한강의 『여수의 사랑』과 『노랑무늬영원』의 여성 서사들, 오정희의 소설 컬렉션들, 최윤과 배수아와 신경숙, 김명순과 백신애와 강신재, 그리고 박경리, 최승자와 김혜순의 화법 자체의 형질변화를 촉구하는 시선들을 조금은 더 깊숙이 읽어보아야 할 듯싶다. 이들 동시대 문학이 아닌 비동시성의 문학들이 우리 앞에 놓인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품고 있거나 어떤 영감이 되어주기도 한다. 다가오는 봄이 되면 이들 한국문학사에 저마다의 좌표를 남긴 여성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탐닉하는 시간이 될듯하다.<br>  &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196/26/cover150/893204502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96266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과거란 확정되지 않은, 만들어가야 하는 것 -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66358</link><pubDate>Mon, 02 Feb 2026 16: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663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5013&TPaperId=170663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37/coveroff/k2821350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5013&TPaperId=170663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a><br/>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01월<br/></td></tr></table><br/>"자신의 행동과 습속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건 중요하다.&nbsp;그래야만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nbsp;&nbsp;-고미숙의 '근대 욕망구조의 담론'중에서<br>옛 기억의 한 장면,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찻집에 마주앉아 있다. 여자는 뽀글거리는 파마 머리를 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던 남자는 ‘웨이브를 살짝 하면 더 예쁠 것 같아’ 라고 그녀에게 주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자를 향한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지만 내심으로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마주하다 이별의 걸음을 하고 헤어진다.  이 이별의 장면은 칙칙하고 우울한 자못 짙은 슬픔을 내포한 장면이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서 재해석하게 되는 이미 타자가 된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슬며시 미소와 함께 애틋한 마음이 피어난다. 왜 그 마음을 받지 못했을까. 조금은 본질과 거리가 있지만 과거인 기억은 이해의 눈을 재배치하게 하고 새로운 관점, 즉 자신에 대한 애석함과 자책하는 마음, 그것들과 비로소 해결되지 못했던 마음의 응어리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nbsp;  요아힘 마이어호프의 소설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어린 시절 과거의 기억들을 풀어놓아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 생기를 찾아 스스로 움직이며 환하게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재해석으로 삶의 의미를 재생성하는 글쓰기, 즉 자신과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들에 대한 애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허구는 곧 기억이다” 라는 의미에서 자전적 소설(허구)이며, “허구를 진실로 찾아 낸 이야기” 이기에 허구로서의 이 소설은 더없이 맑고 진솔한 목소리의 울림을 갖는다.  &nbsp;  소년 요아힘은 북부 독일의 소도시 슐레스비히의 헤스터베레크로 불리는 천 오백 명의 어린 환자를 수용한 수 채의 건물들과 영지를 지닌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에서 원장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의 따뜻함과 열정을 그리워하는 오지랖 넓은 어머니, 그리고 손위 두 형과 함께 성장했다. 질병의 분류에 따라 구분되는 병동에는 그 병세의 고저에 따라 상은 고질병, 중은 중간 증세, 하는 미약한 증세를 의미하는 A-상, G-하, D-다락과 같이 불린다. 소년은 이런 표기 방식으로 말하는 원장인 아버지의 말에 익숙하게 되고, 글자에 높낮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냄새가 고약하고 맛없는 치즈(Käse;캐제)라면 K를 높게 써야하는 식이다. 요아힘이 학교에서 최초의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진다.   &nbsp;【이 문장은&nbsp;‘배가 고픈 체 하는 나쁜 고양이다.’&nbsp;를 쓴 것이다.】<br>  선생님이 칠판에 나와 “고양이가 배고프다(Die katze hat hunger)”를 써보라고 시킨다. 당연히 아이들의 폭소가 터져 나온다. 그에게 중요한 건 글자 자체로 나타나는 명료함과 아름다움이고, “문자는 곧 정체성과 본질,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요아힘은 일 학년을 불과 사 개월만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조금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절망에 빠져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소년. 그의 두 형 중 작은 형은 빈정거린다. “일 학년에 벌써 유급이라니! 넌 앞으로 크게 될 놈이야!”  &nbsp;  이 기억의 장면, 주변의 몰이해는 그 자체로 당시 어린 요아힘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야기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그런데 그 장면의 기록들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어린소년이 성장한 어른이 되어서까지 풀려나지 못하게 했던 분노장애, 전반성 불안장애를 만들어 낸 발단의 사건을 바라보면 그 실제의 이야기들은 환한 웃음을 띠게 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해에 다가서게 된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마주함이다. 분노를 도발하고 만들어냈던 사람들과 상황들의 기억들, 그를 일생 화해하지 못하게 했던 그 불화하는 사건들의 조각들에 새롭게 숨을 불어넣자 그것들은 저절로 날아올라 새로운 의미로 환하게 미소와 기쁨과 애틋한 다정함의 의미로 다가온다.   &nbsp;  교실에 도착하자 소년은 외친다.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내가아아 죽으으은 사라라람을 발견했다아아아!”  선생님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과 함께 “제정신이니? 난데없이 이렇게 늦게 와서는 뭐? 너 미쳤어?”  &nbsp;  요아힘이 학교에 처음으로 홀로 등교하던 일 학년 어느 날 죽은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선생님에게 야단과 함께 추궁받게 되고, 이에 따라 기억의 조작, 즉 화려한 장식과 살을 붙여 급우들과 가족들에게 관심을 이끌고 싶어 했던 일련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절로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듯 진실을 향해 스스로 발전해 나간다. 소년의 마음, 사실에 대한 이해가 타자에게 수용되지 못함으로써 거짓의 낙인이 되어 자기 믿음에 대한 불안을 촉발시킴으로써 분노를 만들어냈던 사건들, 아주 사사롭고 세세한 기억의 편린들이 기술되고, 그 수많은 미소짓게 만드는 기억의 표면적 문장들 속에 내재된 그날들에 화자의 내면에 깃들어있던 짙은 애도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 간절한 흐느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음을 요아힘 그는 이제 안다.  &nbsp;  바람기로 어머니를 내내 고통에 몰아넣었던 아버지, 하지만 어린 자신을 진찰대에 눕히곤 사랑이 맘껏 담긴 진료를 하여주고, 항시 제국의 군주처럼 계획을 지시하거나 집에서는 자신의 안락의자에 책읽기에만 열중하던 그 말없는 이가 숯가마를 만드는 어린 자식을 위해 진흙구덩이에서 어설픈 작업을 해주던 아버지를 그려낸다.   &nbsp;  그런가하면 아버지와 다툼 속에서 미친 듯 바닥을 뒹굴고 신문지를 발기발기 찢어대며 흩날리던, 요아힘에 낯선 어머니의 얼굴이 두려움을 던져주고, 타인의 내면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선의의 오지랖으로 일을 그르치게 하여 분노를 야기케 했던 어머니,  북부 독일의 추위에 넌덜머리를 내며 이탈리아의 온기와 예술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전신에 퍼진 암의 고통을 겪던 말년의 아버지 곁에서 헌신으로 간병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다시금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그네들과 화해하고 보내지 못했던 애도의 세계를 써내려가기도 한다.  &nbsp;  <br>막내인 동생 요아힘의 분노를 도발하곤 했던 큰형과 작은형, &nbsp;특유의 비열한 어조로 비꼬듯 나직이 말하는 큰형의 음성, 샅샅이 꿰뚫어 볼 것처럼 오만하면서도 즐기는 듯한 엑스레이 시선의 작은형은 그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노발작의 막다른 길에 도달케 하는 데 선수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요아힘이 미국 와이오밍 주 라라미에서 교환학생으로 떠나있을 때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요아힘은 당시의 감정에 대해서  “나는 그냥 슬퍼하기를 거부했다” 고 쓴다. 그리곤 자신에게도 형들처럼 순수하고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으면, 공감 능력을 갖고 있었으면 하고 느낀다.  &nbsp;  또 다른 기억의 편린에서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절망에 빠지는데, “키스하고 몸을 만질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일에 집중 할 나름의 방법을 고안했다. 입술을 다물고 다섯 번 키스하고, 혀를 열 번 돌리고 (...) 결국 세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여자 친구가 그를 홱 밀치며 “너 지금 세고 있지, 아냐?, 미친 거 아냐? 계속 세고 있잖아! 세상에, 무슨 이런 사이코가 다 있어?”, 아마 성인이 된 요아힘은 이 문장을 씀으로써 이러한 강박증을 몰아냈을 것이다. 자기와의 화해를 위한 통렬한 글쓰기의 예가 될 것 같다.  &nbsp;  요아힘은 난데없이 일이 터진 날들을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나는 분노의 화신이었다!“고. 그렇지만 요아힘은 진술하듯 그는 정신병원에 운명처럼 갇혀있던 수많은 환자들, 자기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절망의 절규와 환희의 외침으로 울부짖던 그들을 그리워하며, 죽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온몸으로 문장 아래에서 흐느끼며 표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그를 억압하던 기억의 꾸러미를 하나하나 풀어놓음으로써 한 세계의 상실을 애도한다, 이 애도는 그저 슬픔의 떠나보냄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허구는 곧 기억이라고 말한바와 같이 기억을 허구의 이야기로 새롭게 형상화하고 꾸며 기념하는, 그럼으로써 그가 그리워하는 죽은 이들을 모두 생생하게 살려냄으로써 자신이 ”지금껏 인정했던 것 이상의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분투이다.  &nbsp;  삶이란 피할 수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를 붙들어 옥죄는 짓누름이 있다. 내면에 켜켜이 누적된 과거란 고착되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것, 이야기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과거”임을 요아힘은 자신의 허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음으로써 그것들이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바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여 과거로부터 풀려나 열린 미래의 길에 새로움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격렬했던 분노와 길고 긴 포옹과 그들의 기쁨과 하나가 되어 그가 부러워했던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사랑의 애틋함과 그리움을 자기 삶의 정체로 복원한다.   &nbsp;  그의 높낮이가 다른 문장처럼 이 소설은 작가의 정체성과 본질, 성격이 스스럼없이 투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을 읽는 그 어떤 이들도 요아힘과 같이 정화된 느낌을 지니게 될 것 같다.  “고고학 도구처럼 그것이 파묻혀 있던 지난날의 세세한 부분을 긁어내 저 깊은 기억 속의 진실을 끄집어낸” 요아힘의 가파른 감정의 협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웃음과 함께 맺혔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일종의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마음의 순화를 필요로 하는,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 동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드물게 맑고 깨끗한 작품이다.-------------------------------------------<br>【요약 정리】&nbsp; "허구는 곧 기억이다" -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글쓰기<br>지나간 시간의 진실이란 바로 여기, 현재의 글쓰기라는 자기 현전을 매개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죽은 이들은 모두 날아오른다》의 요아힘의 애도는 죽은 이들을 위한 떠나보냄의 상징적 의식(儀式)을 넘어, 살아있는 자가 스스로 진실을 구성하고 정렬해 나가려는 자기 정당화의 형식이자 의지일 것이다.<br>때문에 그의 허구로서의 기억 쓰기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의 자리를 생성하고 확정해 나가는 과정이고, 과거의 추억을 끊임없이 호출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증명하는 애도의 쓰기가 된다. 이것은  “죽은 과거가 살아있는 현재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의 소설 쓰기의 희망,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한 치열한 복원 행위 같은 것일 게다. 그래야만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37/cover150/k2821350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73373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쿠팡과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K-컬쳐 - [사상계 2026 신년특별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55745</link><pubDate>Thu, 29 Jan 2026 2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557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5587&TPaperId=170557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20/71/coveroff/k5321355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5587&TPaperId=170557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상계 2026 신년특별호</a><br/>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01월<br/></td></tr></table><br/>1970년 5월 김지하 시인의 풍자시 〈오적(五賊)〉을 《사상계(思想界)》가 게재하자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북한의 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망상적인 가능성을 적용 확대하여 시의 표현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창작자와 발행인의 일신을 구속하고 당대의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던 종합지 《사상계(思想界)》는 강제 폐간 시켰다. 그 던적스러웠던 시절의 사정은 건너뛰기로 하고, 55년 만인 2025년 복간되어 1년의 실험 출간을 거쳐 2026년 1월부터 격월간의 ‘지성인 반려’와 ‘문명전환’ 종합지로 변화된 시대정신에 맞춰 출간됨을 함께 축하하는 마음이다.  &nbsp;  시대의 사정이 1960~70년대와 달라졌다고 하지만, 내겐 이 사회의 지성과 양심의 현주소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思想界》의 시대비판적 정신의 기조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기본적 토대가 흔들린다면 새로운 기치인 문명전환이든 지성인들의 반려로든 대중의 지성들은 외면할 것이다. 물론 시대정신과 함께하여야 하지만 그것에 부응한다는 명분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호의 원로 대담의 참여자인 강대인선생의 《思想界》에 거는 기대와 조언 중에 “불특정 다수를 위한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대립하는 시민 집단의 연결을 제안하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움을 느꼈다.  &nbsp;  지난 정권 아래서 권력에 충성하며 언론의 기능을 걷어찼던 신문, 잡지, 기타 방송 미디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중립적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이란 이 세상에 존재치 않다는 듯, 옳음과 정당함을 거짓과 부정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룸으로써 불편부당(不偏不黨)의 균형을 유지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매체들의 이러한 양비론적 회색지대에 갇히면 옳음과 정당함이라는 진실은 상대화되어 부패와 불의에 대한 비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nbsp;  비판의 시선이 어느 한쪽, 즉 옳음의 자리에 서는 것이 잘못이라면 대체 지성의 양심이란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또한 불특정 다수라는 표현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요즘 대중문화 속에 발견되는 저급함으로써의 통속성을 지적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엘리트적 위계의식의 반동성이라며 뭇매를 가한다. 하지만 어떠한 매체건 고유하고 특정한 대상 층이 있다. 모두를 위한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일용의 소비물이기 십상이다.  &nbsp;  ‘종합(綜合)’은 단순히 여러 가지를 한데 모으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종합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을 지성과 양심의 판단을 거쳐 통합하여 새로운 단계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새로운 관념이나 개념을 구성, 창발하기 위해 종합하는 것이지, 그저 여러 가지를 나열하여 산만한 집합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합이라는 단어 앞에 문명전환이라는 목적개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분명 이에 부합하는 지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특정한 홍길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특정 다수와 한쪽으로 쏠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은 매우 우려스러운 말로 여겨진다. 이쯤에서 꼰대의 노파심은 접어두기로 한다.  &nbsp;  <br>이번 호에서 주목하여 읽은 것은 ‘K-문화’ 특집지면이다. 2026년 현재의 한국문화는 주변부 문화에서 세계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과정중인 것 같다. 이에따라 접두사 ‘K’가 의미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문학과 영화, 음악을 비롯 음식에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연구자들의 담론은 시의 적절한 반성과 새로운 목표 설정의 뜻있는 지표가 되어줄 것 같다.   &nbsp;  특히 K로 표기되는 기표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의 변화를 분석한 《계간 K-Writer》의 설재원 발행인의 그 기의의 통제와 가치 축적에 대한 사유의 제안은 많은 관련자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지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독일 힐데스하임大 철학과 박술 교수의 한국문학의 세계 내 보편성 획득의 사정을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빼앗겼던 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찾은 자로서 주류문화의 세련된 언어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피지배자와 폭력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있는 매우 특수한 담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nbsp;지적은 국내 비평가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외부적 시선이어서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 한강이나 김혜순이 서구 주류의 시선에 수용되는 저간의 사정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nbsp;  아마 이번 호의 가장 인상적인 담론은 〈미중 기술패권전쟁과 격변의 세계질서〉의 중국과 미국의 대표적 전문가로부터 두 국가의 기술 전선의 현황과 전선의 이동과 AI의 현 국면을 전해들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되어 준 듯하다. 중국과 미국의 기술전략 사이에서 한국의 위기는 무엇이고 기회는 무엇일지에 대한 제언들은 우리의 미래전략에 대한 귀중한 조언으로 읽힌다. 과연 이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새로운 광역질서의 주체적 창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선도자가 될 것인지, 이 거대한 질서의 변화를 조망하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nbsp;  한편 〈쿠팡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시론(時論)은 왜 이런 기형적 기업이 탄생했으며 사회적 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지를 우리사회가 방치한 구조적 공백에서 발견하고 있다. 시민대중을 비롯한 정부와 각종 사회기구, 기업들 모두가 더불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바쁨의 덧에 갇힌 과로사회, 살림의 외주화와 돌봄 공백, 지역소멸이라는 불편한 장기적 과제가 놓여있다. 이 괴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상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nbsp;  K-방산에 관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에서부터 김장하 선생과의 인터부(inter不) 또는 人taboo의 희귀한 대담글은 반가움이었다. 기타 문예란의 글이나 여러 종교에 터 잡은 글들이 과연 ‘지성의 반려’인지는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글의 내용적 깊이나 사유의 미흡이 드러나는 몇몇 글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思想界》가 자리 잡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과 통속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211호는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내용과 구성으로 더욱 성숙된 지성인의 잡지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20/71/cover150/k5321355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207132</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개인주의자의 미학적 글쓰기 - [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 동방순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50681</link><pubDate>Tue, 27 Jan 2026 2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506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03999&TPaperId=170506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97/9/coveroff/89897039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03999&TPaperId=170506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 동방순례</a><br/>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이유 / 2014년 03월<br/></td></tr></table><br/>“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제나 집으로 가는 것이지.”- 노발리스, 《푸른꽃》 2부 〈실현〉 중에서  &nbsp;  《동방 순례;Die morgenlandfahrt》는 1932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들어서기 1년 전에 발표된 글이다. 이 시점에 주목하고 읽었는데, 독일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이 극한에 이르렀던 시기이기에,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작가로서 담론세계에서 침묵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본국 독일로부터 벗어나 스위스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한편으론 외부 세계에 보여지듯 융의 심리학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신비주의 세계를 통한 은유의 공간에 침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공개적으로 천명했듯 개인주의자임을, 그 정당성을 내세웠기에 내면세계는 그의 독보적인 문학세계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nbsp;  나는 헤르만 헤세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의 시선에서 그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문학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격하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언정 결코 표면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도 《데미안》은 마치 성서처럼 읽힌다, 무수한 번역본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새로운 표지와 번역으로 출간이 그치질 않는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그의 작품들의 한결같은 인물구도이다. 불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인격으로의 이행을 삶의 여정으로 보여주며 초월적 인격형성을 제안한다. 이 작품이라고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H.H와 레오는 이름만 달리하는 거의 동일한 인격들이다. 따라서 작품 발표 시기에 따라 그 유사 동일 구조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는 이야기의 외피 아래로 숨어든다.  &nbsp;  드러난 이야기는 숨어든 진짜 본심을 은폐하는 미학적 테크닉이다. 헤세는 이 미학적인 글쓰기의 달인이다. 어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휘감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지만, 노벨상 수상을 하게 되자 한국 독서시장에서 급작스레 읽히기 시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이러한 미학적 글쓰기의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헤세처럼 의도를 숨기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책의 제목이 동방순례라고 하여 어떤 지역이나 방향으로서 동방(東邦)이 아니다. 이것은 원제목 모르겐란트파르트(morgenlandfahrt)가 ‘광명(빛)의 땅’으로 해독하여야 하듯, 어떤 나라,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며,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관념적 이상(理想)의 지대이다.  &nbsp;  즉 소설은 바이올리니스트인 H.H 라는 예술가가 일종의 정신 공동체로서 순례자들의 단체인 결맹(Bund;結盟)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결맹의 일원들과 함께 빛의 땅을 향한 순례의 기록이다. 이 순례의 구성원들에는 레오라는 하인이 있는데, 이 인물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을 흡족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고매한 영적인 인물이다. 데미안의 다른 화신이다. H.H는 이 순례 길의 여정을 실제로 꿈을 꾸면서 느끼는 행복과 같은, 내면과 외면을 유희하듯 시공간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소중한 과정으로 믿으며 긍정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nbsp;  그런데 사달이 나고 마는데, 믿음을 상실하고 회의에 빠지는 ‘죽음에 이르는 영혼의 병’을 뜻하는 ‘모르비오 인페리오레(Morbio Inferiore)’협곡에 이르러 하인 레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맹의 일원들은 순례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라지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의심으로 의견이 갈기갈기 나뉘어 갈등하고 분열된다. 광명의 땅, 이상의 꿈을 함께 향했던 결맹원들은 여기서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H.H가 결맹의 비밀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준수하며 온전히 개인적인 행로에 관한 기록만을 하는 과정에 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nbsp;  여기에 하나의 중대한 은폐가 있는데, 독자는 H.H가 쓴 기록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갑자기 H.H가 레오의 사라짐 이후 기록을 더 밀고나가지 못했던 이유를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H.H가 결맹의 최고법정인 거대한 문서고(文書庫)에 보존된 당시 결맹원들의 주장이 담긴 각각의 기록에서 모르비오 인페리오레에서 해체되게 된 원인들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읽으면서 드러난 사실들에 입각한 실상이다. 이에 대해 H.H는 자신만의 해석을 말하는데, “모두가 서로 상반되고 서로 다른 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 우리의 역사학적 노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술을 계속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nbsp;  <br>진실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당대 독일사회가 휩싸인 시국 혼돈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인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진실에서 자신을 멀리 이격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양식은 그의 산문 〈고집〉이라는 글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nbsp;  개인주의의 끝판 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왜 옳고 그름이 없겠는가.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완성이 곧 미래의 길이라고 독일인들을 향해 설파하면서, 현실은 외면하는 개인주의, 이러한 독일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나치의 발흥에 일조한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본국의 지식인들, 특히 작가그룹의 일원들은 스위스에서 주절거리는 헤세의 안일한 개인주의적 내면성장의 담론이 불쾌했음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nbsp;  당시 스위스에 어렵게 도피하여 빈궁한 삶을 지탱하던 로베르트 무질이 근거리에 있는 헤세가 아니라 미국에 도피해있는 토마스 만에게 5달러를 도와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썼겠는가. 동료의 삶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독일인의 삶을 위해 무의식 세계의 탐닉을 통해 신비주의적 행복의 낙원을 말하는, 인격의 궁극적 합일성을 향한 관념적 이상론은 정말 괴이쩍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대단원으로 옮겨가보면 더욱 가관이다. 협곡에서 사라져버렸던 하인 레오는 결맹의 최고법정 심판관으로 결맹의 최고권위자로 출현하여 결맹을 이탈하여 순례를 중단시킨 H.H의 중대한 잘못에 대해 유죄임을 지적하면서도 인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행위로 웃어넘긴다. H.H는 법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벼움을 느낀다. 그러자 최고심판관 레오는 이 가벼움을 경고하며, 양심의 법정으로 자신의 죄를 이끌 것을 주문한다.  &nbsp;  그런데 이 논법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다. “모든 보고와 반증과 꾸며댄 이야기들 배후에서 얼마나 비웃으며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가!  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 .이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정보를 알게 된다 할지라도 대체 무엇이 남을 것이란 말인가?”라며, 다시금 다른 이들이 쓴 문서는 진실이 아니며, 자신의 체험 사실만이 신뢰할 수 있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체험 사실이라는 주관적 기억, 그 변조되기 일쑤인 불안정한 기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진실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nbsp;  “거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뚤어지고 달라지고 일그러져 버렸던가!”, 물론 기록 또한 기록자들의 작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에는 일말의 진실들이 잠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진위를 밝혀내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진실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추구한다. 문명의 기록자인 작가가 이것들을 거짓이라 폄하하면서 자기의 글만은 진실이라 주장한다면 그런 독단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문서고에 자신의 기록이 보관된 함에 이르러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어떤 서류도 없다, 오직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조각상 하나만 있다. 정말 매우 유치하게도 서로 등이 붙어있는 두 개의 상(像)이 하나가 된 조각상이다.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장면이다.   &nbsp;  촛불을 켜자 한 쪽 상의 모든 정수가 다른 쪽 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오로지 하나의 상, 레오만이 남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 내면의 또다른 인격이듯 레오는 H.H의 또다른 인격이다. 즉 완전함에 이른 초월적인 궁극의 합일체인 레오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멋진 말을 남긴다. “그(레오)는 번창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H.H)는 소멸해야만 했다.”  새로운 존재자로 태어나기 위해 자기 소멸의 희생이라는 용기를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 나치의 정치 강령(綱領)과 닮지 않았나?&nbsp;<br>마치 소멸과 생성이라는 우주자연 궁극의 법을 각성한 듯하지만, 나치가 타자의 철저한 배제를 얼마나 잔혹하게 자행했는가. 그 참담한 소멸이 진정 새로운 생성을 창출했는가? 인간 인격의 완전성이라는 구원을 향한 이 낭만적 신비주의자의 기록은 읽을수록 흉물스럽다. 조금 더 쓰게 되면 거친 말이 연장될 것 같아 예서 그친다. 헤세의 글들은 세밀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는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97/9/cover150/89897039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97094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참을 수 없는 통속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25101</link><pubDate>Fri, 16 Jan 2026 12: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2510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510817&TPaperId=17025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2/60/coveroff/899151081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535139&TPaperId=17025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540/46/coveroff/k35253513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034988&TPaperId=17025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29/42/coveroff/k71203498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803253&TPaperId=17025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31/12/coveroff/8966803253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5389&TPaperId=17025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0/90/coveroff/8972755389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2510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통속(通俗)이라는 어휘는 20세기 식민지 사회로 이행되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그 사용례가 드문 말이었다. 굳이 그 용례를 살펴보자면 사대부 양반계층이 하위계층의 문화를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雅)와 속(俗)으로 분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하다. 강용훈 교수는 통속에 대한 개념사 연구서인 『통속의 계보학』에서 “1906년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서 '통속'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식민지 지배권력이 속의 세계로 통치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nbsp;  <br>즉 20세기 일제의 식민통치권력이 식민지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어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인 최초의 한글사전인 《조선어 사전》이 19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데, 거기에서 ‘통속’은 ‘모든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의미라고 기술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거나 통속이라는 어휘의 본격적 사용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라는, 다시 말해 식민통치권력이 피지배민의 소위 계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보니 장황한 시작이 되었다.  &nbsp;  오늘날 한글사전에는 1938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저급, 저속한’이란 의미가 추가되어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아, 그거 너무 통속적인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금 저급하다고 얕잡는 어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통속을 말하고자 한 계기가 저급함을 느낀 소설 때문이다. 누군가가 쓴 창작품, 더군다나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에 나는 그야말로 통속적이라는 평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비하하려는 의도이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그 진부함을, 기대 이하의 것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nbsp;  그 소설은 20세기 일제 식민치하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매우 정형화된, 아니 유형화(類型化)된 이라고 해야 할 인물들이 꼭 그만큼 유형화된 행태를 하는 인물전개나, 시대적 통찰의 세부를 표현하지 못하고 이미 드러난 외피의 변죽만을 우려먹는, 한마디로 저급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기생이 인력거를 끄는 가난한 고학생을 도와 성공시키고, 거지 대장이었던 인물이 사랑에 눈멀어 일제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는, 또 다른 한편은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자의 딸과 결혼을 위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연인을 배반하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신문에 연재되던 심훈, 염상섭, 김말봉 등의 통속소설, 그리고 오늘날의 막장 TV드라마와 빼닮지 않았나? 21세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한국인만을 위해 쓴 소설은 물론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계몽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있음에 대한 불쾌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상식,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런 것으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 그 불순한 저의라니.   &nbsp;  <br>오늘에는 이 어휘, 통속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는 대중이라는 말이 그 개념의 상당부분을 대체 수용하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통속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싸잡아 넣고, 소설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범주를 평등화시켜버린 것만 같다. 아, 여기서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2000년대 한창이었던 철지난 문학논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중문학이라 불리는 오늘의 소설작품들을 세분하여 문학을 서열화하는 위계질서를 부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통속이라는 사용례가 드물어진 어휘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음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nbsp;  통속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도 대략 50년 쯤 된 것 같다. 한국사회에 TV가 널리 보급되던 197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통속은 슬그머니 대중문화, 대중문학, 대중 예술로 불리기 시작했을 테다. 20세기 내내 계도(啓導)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던 수많은 사람의 집단이었던 '통속'으로 멸시되던 존재들이 문화주체인&nbsp;‘대중(大衆)’으로&nbsp;그 지위가 격상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니 말이다. 통속이 사회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의 앎의 수준도 갑자기 뛰어오른 것일까? 매체가 쏟아내는 잡다한 정보의 영향으로 어느 만큼의 도약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중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앎의 질적 도약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nbsp;  어쨌거나 대중이라는 이 의뭉스런 어휘에는 온갖 잡다한 의미들을 상층부 지배계층과 다른 일반의 사람들이 지닌 속성 모두를 싸잡아 넣은 두루뭉술한 어휘가 되어 그 용례의 폭이 무한하게 넓어졌다. 즉 평준화되고, 평등화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집합을 지칭하는 효율적 어휘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무언가 저급함을 말하려하면 대중을 비하하여만 하게 된다. 곧 대중이 저급한 것이 된다. 통속이 지닌 저급, 천속한 의미가 구별짓기의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이라는 날선 비판을 지우기 위해 대중이라고 퉁치면서 비하의 목소리는 이면으로 은닉되었다. ‘대중은 문화의 주체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때 그것은 단지 소비대상이거나 투표의 수량이라는 계산적 필요성에 근거한 가장된 권력주체로서의 기만적인 가면의 언어일 뿐이다.   &nbsp;  그렇다면 통속소설이라고, 통속문화라고 분별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 음흉하게 대중소설이라고 그 문학적 품질의 분별을 감춘 채 독자 일반인 대중 감식안의 천박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기만적이다. 20세기를 관류하면서 통속이라는 어휘의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이라는 뭇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긍정적 시선과 저속 또는 저급한의 의미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교육(계몽), 윤리, 상식, 도덕의 의미와 연결하여 사용하며 그 긍정적 용례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천속(賤俗)한 것 일반이라는 부정적 용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쳐 왔다는 사실이다.  &nbsp;  통속에 대한 이러한 개념변천의 관점을 나는 거부한다. 마치 용례의 긍정과 부정의 부단한 충돌처럼 보이는 시대적 담론들은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 또는 입지에 따라 통속의 잣대를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통속소설 작가로 비하되어 불리던 김말봉은 통속의 가치 폄하에 다음과 같이 강력한 반론을 편다.  &nbsp;  “대중문학이라면 통속과 통하는 것으로 믿고, 통속이기에 멸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힌 족속이 있다. (...) 저속이 대중의 취미라고 속단하는 작가배가 있다면 이것은 대중을 모욕하는 뜻이 된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랄(morals)’ 아래서 대중이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정신문화를 지향해준다면 대중문학의 사명은 수행된다 해도 좋다.”  - 출처: 《경향신문》 1958.3.5.字기사 「대중문화」에서  &nbsp;  김말봉은 이렇게 통속을 저속과 구별하며 슬며시 통속을 대중과 또한 구별해버린다. 이 글에는 통속을 저속이라 말한다면 대중의 취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윤리의식과 정신문화 지향을 앞세워 재미가 대중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이라는 문제적 정의가 보인다.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 통속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중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 뒤에 숨어든 통속, 대중의 의미는 이렇듯 흉측스러운 전략이 있다. 자기 저급성을 은폐, 대중에 영합하여 사욕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중성이라는 것의 민낯이다. 또한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를 앞세워 재미를 판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김말봉의 주장에는 별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체 어떤 윤리이고 정신이냐는 것이다.  &nbsp;  <br>김말봉은 오늘날 TV의 막장드라마의 효시이다.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내용과 기성의 질서에의 순응이라는 규율과 상식에 봉사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말의 수사(修辭)로 부패한 양심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통속은 대중과 분리하여 그 선명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대하는 소비대중(독자, 관객, 청중)의 안목을 대우하는 것이 된다. 통속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대중을 저속하다고 폄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통속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화생산자 당사자가 고급과 저급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입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평가들이 나서야 할 때다.   &nbsp;  통속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부정적 배제의 논쟁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주체적 성질의 표현들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본질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통속이 지니는 의미를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다른 대척의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편의주의적 해석이 있어 보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의 의미는 현상을 사실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긍정의 의식, 즉 현실 질서에 그대로 순응하며 어떤 이의도 지니지 않는 이라는 의미와 저급 저속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적 시선에서는 충돌이지만 어휘가 내재하고 있는 함의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는 것이다. 통속은 그저 저속한 것이지, 여기에 그 어떤 시대적 담론을 끼얹어봐야 자기 이해에 터 잡은 말장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nbsp;  누구나 다 아는 것이 통속이다. 규율 순응을 반복하는 것, 자신이 모르거나 다른 것을 배제하려는 폭력성의 다른 표현이다. 대다수 식민지민에게 자신들의 통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을 위해 통속강의, 통속교육을 시키면서 통속은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언어다. 이를 뒤집어 바라보면 식민지 한국인들을 싸잡아 무지와 몽매에 안주하고 있는 저속함이라는 멸시의 의미와 더불어, 이를 적정한 앎의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즉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길들이겠다는 의도된 의미가 있다.   &nbsp;  통속성은 이처럼 오만한 태도와 전체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 통속성을 답습하는 것과 통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란범 재판에서 윤은 최후변론에서 계엄명령은 계몽(啓蒙)령이라고 비굴한 항변을 반복했다.  누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계몽하겠다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상반기 식민지민들의 문자 해독능력과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앎이 일천했던 시대와 21세기 K-Culture로 상징되고 대중지성 또는 집합지성이라 불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계몽, 통속성을 향한 행보는 그 무엇이든 퇴행적인 것이다.   &nbsp;   개념사 연구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 자체가 정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개념의 잣대를 통해 인지된다.”며 “개념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통속은 저급으로 분명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분명 몰아내야 할 선명한 것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또 한명의 개념사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어휘들의 의미변화 양상은 역사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 이제 통속은 한국사회의 변화적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은폐되었지만 일상의 이해에서의 용례에 주목해 우리 문학의 수용자들인 대중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속은 저급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nbsp;   어느 평론가가 대중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대중의 문학적 취향을 통속으로 싸잡아 단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중이 곧 통속이라고 여긴 것인데, 이러한 대중의 용례에서 보이듯 통속은 분별되어 지적되어야만 한다. 통속이 계속해서 대중 속에 암약하게 방치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날뛰는 저 통속적인 것들처럼 대중을 전락시킨다. 일종의 낙인찍기라는 극약의 처방으로서 대중과 통속의 분리, 나아가 통속의 부활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nbsp;  통속을 주장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차별의지도 아니며, 문화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 속에 내포된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폐를 모르는 체 하려는 대중 뒤에 숨은 불순한 의지들을 봉쇄하기 위함이다. 계몽령이라는 반시대적 수작이 가능한 것도 대중이라는 언어 뒤에 숨어있는 통속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동질화 형성하겠다는 이 전체주의적 욕망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문화 선진국으로의 진정한 돋움을 위해서라도 통속성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nbsp;  선정적 감상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문화, 통속적 취향에 입맛을 맞춘 문화는 자기 파멸적이다. 대중의 지성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하나의 소설이 장황한 설레발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 잡설을 쓰면서 우리의 20세기 상반기 근대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속과 순수, 정통문학과 대중, 통속문학의 논의를 뜨겁게 달구었던 김기진, 안회남, 이태준 등을 읽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언어가 시대와 상호반응 변천하는 개념사도 더불어서.&nbsp;---------------------------------------* 이 글은 강용훈 교수의&nbsp;『통속의 계보학』이 부분적 바탕지식이 되었으며,&nbsp;김주혜 작가의 소설&nbsp;『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 비롯되었으며,&nbsp;김말봉 소설들에 대한 회의적 읽기로의 전환을 계기로 작성되었습니다.<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393/91/cover150/k7428300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3939152</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부드러운 어머니 자연 앞에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 - [장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10403</link><pubDate>Fri, 09 Jan 2026 16: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01040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030302&TPaperId=170104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47/95/coveroff/k2820303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030302&TPaperId=1701040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장미</a><br/>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07월<br/></td></tr></table><br/>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밀려드는 이미지는 낯선 길을 쓸쓸히 고독하게 걸어가는 떠돌이 산책자의 형형(炯炯)한 눈빛이다. 그것은 탁월성을 간직했지만, ‘소유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이기를 포기한’ 인간의 모습이어서 와락 눈물이 흐르게 한다. 예리한 관찰력에 더해 상상력이 더해진 고매한 정신이 안주할 그 어느 곳도 마땅치 않았던 현실 속 한 인간의 초상(肖像)을 통해 인간 보편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까닭일 것이다.  &nbsp;  번역자 안미현 교수는 해설의 글에서 1929년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인 『Die Rose(장미)』의 산문들은 “사심 없고 얽매이지 않고 건강한 영혼”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소한 주인공들”의 파편화된 허약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분열되고 해체된 현대의 신경증적이고 통일되지 않은 자아“를 통한 ”시대의 징후적 모습“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글들에는 이렇다 할 플롯이나 줄거리가 없는 어떤 상황들이 그저 의미 없이 배열된 듯 보인다.   &nbsp;  평생을 산책하는 삶으로 살다 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 「일요일 산책」에서 그의 방랑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길을 잃었다고 주장할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길을 잃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라고 당당하게 믿기 때문이다.”라 말하듯,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임의 수행(遂行)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산책은 “상상을 하거나 시를 짓거나 하는”, 삶의 풍부함이 만들어지는 기분 좋은 삶의 방법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nbsp;  루트비히 티크의 소설 「금발의 에크베르트」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산문 「에리히」에는 늦은 밤 등불을 밝힌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에서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는”, 삶의 행운을 믿는 한 젊은 작가의 모습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는 “믿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황홀감“ 때문에 행운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곤 ”금발의 순진함과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에리히라고 부르기로 한다고 말한다.   &nbsp;  “어제 나는 초봄의 황금빛에 둘러싸인 풍경 속으로 나가서 부드러운 어머니 자연 앞에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라는 산문 「타투스」의 문장을 접했을 때,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었는지 앙드레 지드의 소설 『Paludes (팔뤼드)』 속 타튀루스가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이라며 바라보는 늪의 전경,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에 놓인 자의 해방의 울음에 가 닿아 목이 메여왔다. 몇 몇 산문의 이 같은 생의 비의(秘義)가 짙게 배어있는 어떤 격함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기도 했다.  &nbsp;  책의 첫 산문  「블라디미르」는 작가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묘사한 듯한 겸허하지만 냉철한 인물 판단이 내려진 존재다. 나는 발저의 생의 태도의 일면으로 읽었는데,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생각이 병들고 경직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이 독창적 삶의 태도는 어쩌면 1920년대 전쟁의 폐허와 혼돈에 휩싸인 유럽인들의 정신이 숨어든 개인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nbsp;  <br>이 산문집에는 일종의 서평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형식성과 현학성을 배격하는 발저 고유의 글들처럼 지극히 표면적 감상이다. “나는 표면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산문 「아이」의 문장처럼, 발저는 이 경박함이 종종 호응을 얻지 못함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지닌 사람의 날카로움, 비평적 눈빛이 번뜩이는 겸허함이다.  산문 「켈러의 노벨레」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 “기분이 좋아져서 보다 예리한 분별력을 찾기 위해” 간 레스토랑에 앉아 “주변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단편 「마을의 로메오와 율리아」에 대한 감상은 그가 인간 삶의 어느 측면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당한 선을 소유하는 것이 초래하는 불행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이 특별히 아름다웠고”, “행복에 취한 불행한 사람들을 남다른 심오한 기질을 이유로 그렇게 솔직하게 동정하고 시기하는지를 암시하는”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nbsp;  위축된 영혼에 깃든 선이 이 세계에서 결코 행복으로 보상되지 않음을 꿰똟는 켈러의 경이로운 문장들이 발하는 성스러움, 그 시적 숨결에 매혹되었던 모양이다. 산문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는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비교적 진솔한 비평의 시선이다. 그에게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고 할 만큼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와 교감했던 모양이다. 특히 모파상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며 칭송한다.  &nbsp;  또한 근원적이고 환상적인 글로 문학적 가치를 보여준 두 명의 작가로 뒤마와 외젠 쉬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젊은 여성의 회고』를 각기 거론하고 있기도 하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갑자기 과대평가된 작가라며, “정서와 이성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운문”이지만 성공적이었다고 여긴다며 세평(世評)의 천박성을 은연히 힐난하기도 한다. 발자크에 대한 “넘치는 교양”이란 평가는 슬그머니 그의 조크가 읽혀 미소를 짓게 된다. 산문 「자허마조흐」는 발저가 수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기꺼이 복종했던 부인은 그를 너무 싱겁다고 여겨 그를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며, “자기 삶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저 멍청한 사내를 자신이라면 더 심하게 다루게 했을 텐데”라며 한 방향으로 치닫는 영혼에 대한 불쾌를 표현하기도 한다. 발저식 유머일 것이다.  &nbsp;  산문 「따귀 한 대와 그 외」에는 촌철살인의 문장 모음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인간 삶과 그 심리의 형태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이 돋보인다. "저와 함께 가실래요?”라는 그의 제안에 “당신은 따귀 한 대를 맞고 싶은 모양이군요!”라고 반응하는 여성의 말에 이어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연결시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나의 목적에 맞출 무수한 기회를, 그리고 쾌활함과 직관을 함께 나눌 무수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다.” 라는 이 문장은 그 비약만큼 재밌다. 그렇게 쌀쌀맞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이다. 여자는 삶 속 하나의 기회, 그 풍요로운 관계의 하나를 놓친 것이다. 아마 요즘에 이러한 수작을 하였다간 성추행이라고 고발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발저의 소망이었던 아이 하나를 낳고 거절하지 않을 출판사에 작품을 내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는 것 만 같다.&nbsp;<br>무심히 의미를 두지 않고 내뱉은 말에 상처입은 자의 표정과 태도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자신의 이해력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순한 것에 대해 자신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말한다. “알아들었어요?”, 이&nbsp;말을 들은 상대는 순간 모욕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듯한 이 표현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바르르 떨며 대거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슬기롭게 대처할지. 발저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간계와 사랑』에 나오는 루이제처럼, 무능한 작은 뇌처럼 아주 딱해보였다.”고.   &nbsp;  “전혀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지” - 46쪽“나는 자부심 때문에 자부심 없이 행동했고,&nbsp;강인함 때문에 부드럽게 행동했다.” “수줍어하는 자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사이의 전쟁은&nbsp;아마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nbsp; &nbsp;&nbsp;-92쪽  &nbsp;  발저는 자의식에 차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을 극도로 싫어했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하나의 움직임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 오히려 올려다보는 삶의 믿음이 그에게는 훨씬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엄숙주의와 규범주의를 거부하는 삶을 추구하며 무고하고 정직한 삶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예술인의 이 미미하고 존재성 희미한 파편의 글들에서 어떤 불가불의 절대 고독의 감응에 휩싸인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익명의 인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의 삶의 속성들이 나열된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때문에 발저의 글 속 우연한 일상의 표정들과 목소리를 읽어가며 분열되고 해체된 우리네 조각난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발저를 읽는 것은 항상 쓸쓸한 사랑의 느낌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47/95/cover150/k2820303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47954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