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필리아 (비의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19 Jul 2026 09:50:12 +0900</lastBuildDate><image><title>비의식</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903410318852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비의식</description></image><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호러(Horror)의 계절: 성찰과 쾌락 사이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link><pubDate>Sat, 18 Jul 2026 17: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9489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54/94/coveroff/895279489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91283210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841/54/coveroff/d8028324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536785&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217/85/coveroff/k71253678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775X&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98/68/coveroff/896017775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83293951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이 글은 듀나의 책《공포의 문법》과는 그 이론적, 경험적 지평을 달리하며,&nbsp;&nbsp;다만 참고 도서의 하나임을 밝힙니다.<br>“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nbsp;  무더위의 계절이면 독서나 영화 시장은 슬그머니 호러(horror)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대체 인간의 원시적 감정인 공포를 자극하려는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곁에 머물러 마치 더위와 결합한 계절상품처럼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습관적 계절 행위에 편승하듯 30년 가까이 익명을 고수하는 작가 듀나의 《공포의 문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nbsp;  <br>그는 호러 작품들을 열거하며 독자,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섭게 하려는 작품들의 테크닉에서부터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나 진실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서의 호러 장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결론에 가까운 장들에 이르러 실제 현실의 사악함은 언제나 허구를 뛰어넘는다고, 호러는 이처럼 사회의 억압된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의 괴물성을 들추어내어 인간과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호러의 사회적 가치는 사람들을 단순히 무서움에 떨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nbsp;  그러면서 자극과 쾌감만을 소비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극만을 소비하는 디지털 환경 세계 속에서 마비된 지각과 편협성으로 인해 호러 작품들의 사회적 가치의 의도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호러 작품들이 왜 오늘에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의 독자적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 많은 질문을 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답변이 있다. 사람을 오싹함과 무서움으로 놀라게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평소 외면하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에 살아남았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공포를 이용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인간은 죽음, 질병, 타인의 적의, 신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근원적 불안을 살아가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기에 이 억압된 불안을 형상화함으로써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그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접하게 된다.  &nbsp;  그런데 이러한 일사천리의 답변들은 그리 명료하지도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여겨지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그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호러 작품들은 이러한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독자나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락산업으로서 폭력의 잔학성, 괴이한 공포를 안전한 장소에서 즐기는 쾌락의 소비를 판매하는 상품이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호러는 노골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판매하는 상품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고어(Gore)부류나 슬래셔(slasher film)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보다 신체훼손의 충격 자체를 상품화하는 감각소비 중심의 상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창작, 제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장르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과연 그것은 진정 공포를 이용해 무언가를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유를 명분으로 공포를 소비하는 자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장벽이다.  &nbsp; <br>  호러가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건드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변신》, 《샤이닝》과 같은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기를 즐긴다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에 오래전부터 이같은 모순이 존재해 왔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호러를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진실을 탐구하는 장르라고 평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산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nbsp;  그럼에도 우리는 호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감각을 이용하는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사회비판까지 하나의 소비상품이 되는 오늘이기에 호러의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장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조차 상품의 포장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남는다. 왜 굳이 공포를 재현하는가? 수많은 비극, 전쟁영화, 범죄실화물, 심지어 뉴스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전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 재현은 진정 성찰인가, 아니면 소비인가?   &nbsp;   <br>《공포의 문법》에서 저자는 호러 작품들에 표현되는 공격성과 잔혹성이 이미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호러 작품이 새로운 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내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좀 더 냉철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호러 작가들이 그려내는 그 소름끼치는 표현들, 장면들의 충격적 이미지가 과연 사회를 구현하고 인간을 개선하는 도구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혹은 인간의 얇은 표면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진단 장치인 것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nbsp;  상기 책의 14장 「남은 것들에 대하여」에는 아버지 앞에서 이스라엘군이 22개월 어린아이를 고문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우리들은 아마 그 영상의 댓글에는 ‘아이를 괴롭혀서 안 된다’라는 보편적 윤리 준칙에 해당하는 글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거기엔 그러한 글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을 즐기며, 나아가 잔악한 글들로 도배되는 의외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보다. 자, 이미 현실 세계는 허구로서의 호러가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잔인한 곳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사례를 저자가 쓴 까닭은 이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호러 문학, 영화 따위가 무슨 순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의 배경으로 인용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미 실제 이러한 공포의 세계가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nbsp;  이는 호러의 세계를 작품화하는 것에 더욱 현실적 의혹을 강화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 억압 문제를 드러내 성찰을 요구한다는 명분의 그 어떤 기만성 아닌가라는 의심 말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온라인 사회관계망이 보편화되기 전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이러한 정당성의 변론 가능성이 잔존했지만 이제 그런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허구적 호러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물의 장르 무용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다. 사회적 불안을 가시화한 언어로서, 타자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세상에 우리는 도달해 있다.   &nbsp;   <br>이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려는 오래되고 강력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장르에 대해 그것이 과연 소비하는 장치인지, 성찰의 장치인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더욱 민감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각성의 변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문화산업은 비판마저 상품으로 소비시킨다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낙관론에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력과 잔혹성을 재료로 공포를 효과로 이용하는 장르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감수성의 둔화로 더 큰, 상상 초월의 잔혹성으로 무감각한 비도덕의 지대를 일상화 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감각의 작동이 멈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nbsp;  안전한 거리에서 공포를 경험하는 것,  마치 비극을 보며 슬픔을 경험하듯, 실제 위험은 없지만 위험을 체험함으로써 긴장과 해방의 감정을 얻는 것은 분명 일상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어떤 순기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자극에 머문, 하나의 쾌락으로서 감정의 소비에 머무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을 괴물화하는 하나의 무감각의 양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게 된다.  어쨌거나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드거 앨런 포,  H.P러브크래프트, 스티븐 킹, 아니 그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그리고 발 루튼, 조지 로메로, 스탠리 큐브릭, 리들리 스콧, 마틴 스코세이지 등 지난 호러 걸작들을 살펴 볼 일이다. 특히 스티븐 킹이 원한을 삼켰던 자신의 소설 《샤이닝》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던 큐브릭의 작품과 비교하며 그 맹렬한 거부감을 들끓게 했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주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 사이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지 흥미로운 과제를 풀어보아야 할 것 같다.<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에드거 앨런 포의 &lt;아서 고든 핌 이야기&gt;는&nbsp;&nbsp;‘심스의 구멍Horror)(Symmes Holes)’이라 불리었던 '지구공동설'과 관련한 SF상상의 한 자락을 발견하는 새로운 독서가 되어줄 듯하다. 19세기 남극이 상징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아는 세계 밖의 공간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656/60/cover150/89919319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56608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온 세상을 품은 사랑이라는 것 - [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1613</link><pubDate>Tue, 14 Jul 2026 18: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161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030336&TPaperId=173916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64/2/coveroff/k2720303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030336&TPaperId=1739161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a><br/>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09월<br/></td></tr></table><br/>치열한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 중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 즈음의 내 습관적 행위가 이어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학교가 있는 계동 골목을 내려와 당시 유일한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의 생활패턴이었다. 정말 오래된 시절의 얘기지만, 결코 오래전 얘기로 기억되지 않는 얘기다. 어쩌면 그 시절의 책 읽기가 내 언어와 태도와 행위를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nbsp;  막스 뮐러의 책은 아마도 아껴 모은 돈으로 한권이라도 더 읽기위해 값싼 문고본으로 서너 권씩 구입해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판본이나 제본형식 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을 법하지만 그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튼 세상 얘기들이 마구 전파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순박한 소년에게 진실의 사랑이라거나 순진한 사랑이라는 사랑에 수식어가 붙어있는 이 유별한 사랑의 담론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마리아와 화자와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남긴 상실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을 것이다.   &nbsp;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한 뼘만큼 성장했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화자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라는 고요한 신비의 숲”에 대해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그 고요한 신비의 숲 속에 있었으니 알 턱이 있었겠는가? 요즘 부쩍 소년기의 시간이 자주 떠오른다. 어쩌면 그 때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으며 온 세상에 속했던, 영원한 삶을 살았던 시간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이 책 『회상(Memories-A story of German love)』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하는 화자의 물음이 괜한 수다를 떨게 했다.  &nbsp;  <br>이제 막스 뮐러의 “순수하고 깊은 사랑,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의 풍파를 겪은 듯하다. ‘좋아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 라는 낯선 규칙과 후작 부인은 남(他人)이고 신분도 높은 사람이니 더욱더 어머니에게 하듯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예의, 이것을 깨닫는 순간, 아마 어린아이로서의 세상은 종말을 고했을 터인데, 나는 그 순간에 해당하는 정확한 장면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내겐 순수한 사랑이라 말할 것이 없고, 언제나 이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이 아닌 변덕스럽고, “뜨거운 사막 위에 뿌려진 빗방울처럼 스스로 소멸”하는, 또는 “타오르다 꺼지고 마는 불길로 온기를 주기는커녕 연기와 재만” 남긴 이기적이고 의심 많은 사랑에 대한 기억만이 주렁주렁하다.  &nbsp;  여기서 사회적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니 하는 그 어떤 윤리적 삶의 태도 같은 걸 길어 올릴 생각은 없다. 마지막 회상까지 여덟 번의 회상의 기록이 분리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른 기록이기는 하지만 각 회상(回想;memory)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첫 번째 회상」에서 화자가 다 잊은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를 말 할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와 달리 내겐 어머니가 들려주고 가리켜 보이던 별자리와 성스러운 노래 소리가 없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이기적인 분이셨고, 자식들에게 냉엄한 분이었다.  내겐 화자처럼 머릿속까지 스며든 어머니 손에 들린 한 다발의 보라색 꽃 싱그런 향기를 지닌 오랑캐꽃도 없으며, 별에 감탄하며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도, 영혼을 속속들이 파고든 경쾌하고 성스러웠던 찬송의 노래 소리도 없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한 인간의 품성을 만드는데 귀중한 것들일 것이다. 화자의 고귀한 품성, 인간애에 대한, 모든 존재의 우주적 얽힘에 대한 감수성은 이렇게 스며든 것일 게다.  &nbsp;  “남이 뭐예요? 나를 예쁘게 봐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다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건 괜찮단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아.“ - 「두 번째 회상」, 28~29쪽  &nbsp;  「두 번째 회상」은 화자가 여섯 살 쯤 부모와 함께 후작(marquess,侯爵)의 성을 방문했던, 자신도 모르게 후작 부인에게 입맞춤을 함으로써 버릇없는 아이로 질책 받던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경계 없는, 나와 너라는, 사회적 신분이라는 분류체계가 스며들지 않은 아이에게 그 오염된 질서와 규칙이 처벌로 가해졌을 때 아이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너는 봄철에 벌써 꽃잎을 뜯기고 날개의 깃을 뽑히는 구나.”라고 탄식하는 이의 아쉬움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던”,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인 사랑에 대한 침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nbsp;  아이의 사랑의 샘은 이때부터 막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메말라간다. 더 이상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은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과 윤리 규칙 등이라는 이름으로 무례이자 범죄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세상은 작열하는 격정, 타오르는 정열, 요구하는 사랑만을 사랑이라 말한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제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푸념하면서 거듭 첫 사랑, 첫 경험의 강렬함을 쫓는다.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솔직함, 자기존엄의 욕구라고 정당화한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겐 고독만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nbsp;  「세 번째 회상」에서는 사물에 대한 소유,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진정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조용한 사색이 흐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황금 팔찌가 해낼 수 있다면 소년은 당당하게 그것을 내어줄 수 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 낸다. 이 회상에는 타인의 아픔, 고통에 대한 나눔의 감수성이 백작 지위를 가졌으며, 심장병을 앓고 있는 후작의 딸 마리아와의 최초의 기억으로 옮겨간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리아가 형제자매들에게 반지를 나눠주는데, 마지막 하나의 반지가 남았을 때, 혈육이 아닌 화자에게 반지를 빼 건넨다. 이때 화자는 그 행위가 그녀의 희생임을 안다. 화자는 반지를 다시 돌려주며 말한다. “이 반지는 날 주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니까.” 화자는 세상이 강요하는 규칙들에 저항한다. 사랑이라는 태곳적 본래의 감수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화 된, 아니 사랑이란 말이 너무 오염되었기에 우리는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이미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늘.   &nbsp;  「네 번째 회상」에서는 기억 속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학생이 된 화자는 방학시즌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한다. 후작의 성(城)에서 어린 시절 함께 놀던 공자(公子)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성주가 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관계로 더 이상 친밀한 벗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거의 날마다 이름을 불러보고 그리워했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 아마 화자는 마리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존재라면 그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다. 편지가 전해진다. 마리아가 화자를 초대하는 그토록 갈망했던 영혼으로부터. 재회, 재발견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한 회상의 기록이 이어진다. “우리는 옛 친구잖아요”라는 말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서로 소개하지 않고도 함께 노래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새들의 그 다정한 정경을 떠올려보며 그 어울림, 사랑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상념을 펼쳐보기도 한다.   &nbsp;  이후 「다섯 번째 회상」에서 「마지막 회상」의 기록들은 마리아와 화자의 봄날 아침처럼 맑고 신선한 영혼들의 고귀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아마 사랑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이미 이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러나 속마음 숨기라고, 그렇게 숨기는 일이 예의요, 분별력이며, 현명함이라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회는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것을 억압한다.   &nbsp;  온갖 강제로 억압되어 실종된 사랑, 그 잊어버린 사랑이 매슈 아널드의 詩 &lt;파묻힌 생명&gt; 속 생명의 강이 되어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한다. 화자는 이 시(詩)가 수록된 시집을 마리아에게 전한다. “나의 고백이었다”고, 장시(長詩)인 까닭에 세 연(聯)만 옮겨본다.  &nbsp;  지금 우리 사이에 가벼운 농담 오고 가지만보라, 눈물 고인 나의 눈을이름 모를 슬픔이 가슴을 울리누나.  &nbsp;  그렇다! 그렇다! 우리는 안다,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고미소도 지을 줄 안다.그러나 이 가슴에 무언가 있어그대의 농담 안식이 못 되고그대의 미소 위안이 못 된다.  &nbsp;  .......中略.....  &nbsp;  예견된 운명, 변덕스러운 아이가 되어때로는 장안에 마음을 빼앗기고때로는 온갖 싸움에 몸을 던지고본성마저 변하는구나.그러나 운명은,변덕스러운 장안 속에서도순수한 자아를 지키고존재의 법칙에 순응케 하기 위해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에 명령하여우리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흐르게 하였구나.그래서 인간의 눈은파묻힌 그 흐름을 보지 못하고장님 같은 불안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정처 없이 흐르며영원히 떠도는 것 같구나........後略...........  &nbsp;    &nbsp;【꾸밈 없는 마음, 진실의 사랑, 사랑의 추억 등 꽃말을 지닌 보라색 오랑캐꽃】<br><br>“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 「마지막 회상」, 145쪽  &nbsp;  마리아와 화자의 정기적 만남은 심장병을 앓는 마리아의 생명에 위험신호를 발하였는가보다. 후작 가족의 주치의로부터 자네 탓이니 그만 찾아가라는 완곡한 부탁을 받는다. 인간에게 위안과 사랑을 앗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을 위한 고귀한 보호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화자가 마리아를 설득하는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의 것이라는 공상적 사랑의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것뿐이라며, 속속들이 이해가 되는 인간처럼 우리를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는 내 협소한 경험이 거부할 말을 찾지 못한다. 사랑에 무슨 윤리적 합리주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nbsp;  “신은 너에게 고통을 주셨지만 또한 나를 너에게 보내 그 고통을 나누게 하셨어. 그러니 너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어야 해. 우리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해.” 이 말이 화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마리아로부터 마침내 “나는 너의 것이야. 신의 뜻이라면,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너의 것이야”라는 생의 마지막 인사인 편지를 받는다. 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다 잃어버렸음을 감사하게 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이제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내 사랑의 기억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을 남들과 연결되었던 기억에서 사라진 어린아이인 나를 찾는 걸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그 순수의 시절을 향해.]]></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64/2/cover150/k2720303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64020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백치(白痴)와 다정한 서술자, 그리고 어린아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link><pubDate>Thu, 09 Jul 2026 17: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950&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78/80/coveroff/k64213795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09288&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98/22/coveroff/893290928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3436&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307/17/coveroff/895468343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77&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15/30/coveroff/89374649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2968&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85/64/coveroff/893202296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다섯 살 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얼굴을 디밀고 눈을 마주친다. 그 생글거리는 아이에게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그 존귀한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나도 “안녕”하고는 “몇 살이야?”라고 친근함을 표현한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nbsp;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아직 거절로 인해 내려앉아본 적 없다. 아이에게는 아직 ‘나’의 테두리가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나’와 타인은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의 타인들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nbsp;- 평론가 김예솔비, 「나에게서 나에게로」, 『유령들』  &nbsp;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의 회복을 사유하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라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 글은 순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상 수상 강연의 글인 「다정한 서술자(Tender Narrator)」의 4인칭 서술자의 다정함에 가닿았고, 다시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치(Идиот, The Idiot)』의 미쉬킨 공작, 그가 말하는 스위스에서의 삶의 한 에피소드인 어린아이들과 사랑이야기의 연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Corpus)』의 몸의 존재론,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있음(being-with)'으로 이해하려는 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까닭일 것이다.   &nbsp;  이러한 연상은 이 존재론적 얽힘에 관한 사유가 갑작스레 새롭게 대두된 물음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다섯 살 꼬마 아이처럼 낯선 사람에게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감성을 보이면 오늘 우리들은 왜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회적 분류 체계 이전, 즉 사회적 정체성 이전의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아이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라는 ‘존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  &nbsp;   <br>이 물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야기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초반부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아마 이 장면이 소설 전체의 의미를 이끄는 열쇠의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이 스위스에서의 4년간 병 치료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 성(saint)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 간 곳은 미쉬킨 공작 가문의 먼 친척인 예빤친 장군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집이다. 여기서 미쉬킨은 리자베따와 그녀의 세 딸에 둘러싸여 스위스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nbsp;  【『백치』 1부 챕터 7에 등장하는 주제 전체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 예빤친 장군 부인과 세 딸 앞에서 미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장면】  &nbsp;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는 불행한 여성 마리를 아이들이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미쉬킨이 하려는 말은 타인을 판단하려는 시선이 아닌, 존재 자체, 즉 상처입은 사람을 보면 다가가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사회적 낙인보다 그 사람이 입은 고통 자체를 먼저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순수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의 감각’이라는 차원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그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이 사회적 분류체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죄인과 정상인, 성공자와 실패자,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의 구분이 굳어지지 않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의 감각이다.  &nbsp;   <br>그는 타인을 하나의 범주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 혹은 ‘나’의 연장(延長)‘으로 느낀다, 여기서 미쉬킨과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ten der narrator)'가 만난다고 여겨진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가까이에서 주의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정함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지닌 서술자를 4인칭 서술자로 명명하고,  그것은 모든 인물의 시선을 품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 바라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의 연결을 보는 시선으로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말한다.   &nbsp;  이와 정확하게 상관하는 인물로서 미쉬킨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개별적 자아로 보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다. 토카르추크의 4인칭 서술자가 문학적 장치라면, 미쉬킨은 바로 그것의 인간적 구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차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이러한 감각은 거의 종교적이다. 미쉬킨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실패하기에 『백치』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반면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은 구원이라기보다 연결성의 인식에 가깝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심지어 초월적 시간 속 존재까지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을 미쉬킨의 존재론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nbsp;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고상한 것으로 속이 가득 찬 분이시다.” -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아무것도 모른 주제에...백치 같으니!” -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nbsp;  미쉬킨 공작에 대한 이 두 상반된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하는 인물의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아니 그 인물의 됨됨이 자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미쉬킨의 이러한 어린아이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그의 육체가 품고있는 간질발작과 결합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는 순수함이 아니라 백치(白痴)성으로 읽는다. 미쉬킨이 앓고 있는 간질은 여기서 사회적 낙인의 상징이 된다. 병든 몸,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존재,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미쉬킨의 자리를 위치시킨다. 즉 미쉬킨의 일면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민이 간질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결합되어 영적 순수성과 육체적 취약성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인간 세계에서의 타자성 충돌의 봉합은 영원한 불가능성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쉬킨의 간질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과연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육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nbsp;  미쉬킨은 그 어떤 존재이건 사회적 범주 그늘아래 덧씌워진 존재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고통받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야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킨은 사회 분류 체계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그 분류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미쉬킨과 아이들은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다. 결국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가 백치로 이해하고자하는 미쉬킨이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은 결코 미성숙함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잊어버린 원초적 관계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nbsp;<br> <br>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나 김예솔비의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에 편재하는 유령으로서 ‘나’,&nbsp;&nbsp;낭시의 타자란 존재의 조건 자체라는 ‘관계성에 놓인 존재’는 같은 지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들 모두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혐오와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꼭 내 혈족, 이웃, 동료, 동일 이해집단의 고통만이 고통이 아니다. 우린 애초에 서로 얽힌 존재이다.   &nbsp;   <br>사회적 상징이 축조해 놓은 나와 너의 경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감각의 회복은 기계생성 시대에 돌입한 오늘 더욱 필요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상징적 세계의 축조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감수성, 사회적 분류 체계에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존재들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nbsp;<br>『백치』는 가장 성스러운 인물이 현재 세계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끝날 수 없는 작품, 생각해 볼수록 새로운 연결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작품이어서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이의 손을 잡으려는 시원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회복은 불가능한 염원에 불과한 것일까?<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90/98/cover150/89497066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90983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타인에게 무람없이 손을 내미는 기억 저편 ‘나’들의 이야기 - [유령들 4]</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8530</link><pubDate>Tue, 07 Jul 2026 1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85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0697&TPaperId=173785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8/47/coveroff/k15213069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0697&TPaperId=173785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령들 4</a><br/>최미래 외 지음 / 스위밍꿀 / 2026년 07월<br/></td></tr></table><br/>이러한 문학잡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지은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책의 몸피는 여느 소설집 또는 시집과 같은 단행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에 매혹된 것은 책표지의 안 날개에 작게 써진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이어진 ‘유령의 목소리가 때론 와글와글 그리고 소곤소곤 들려주는 목소리’에 대한 이유 없는 끌림이었다. 이 작은 문학잡지 《유령들(ghost friends)》 Volume4.에는 소설 세편, 네 편의 시, 두 평론과 에세이가 소박하지만 밀도높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nbsp;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말했던 4인칭 서술자로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 따르는 감정을 그대로 기술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전달해주는 충실한 대변자의 음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나에게서 나에게로」에서 말하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으로서 우리들이 망각 저편으로 던져버린 잃어버린 목소리로서의  ‘유령들’이기도 할 것이다. &nbsp;  소설가 권혜영 작가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도깨비라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로 인해 가장 직관적으로 유령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게, 가야당이라 불리는 허름한 구제숍을 맡아 운영한다. 인수인계도 없이 돌아가신 탓에 화자 ‘나’는 할머니가 기록해 둔 업무일지를 지침삼아 미숙하나마 관리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괴생활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도깨비 가족을 데리고 방문한다. 물론 도깨비들은 “쉬었음 청년과 은둔 중년, 쪽방촌 노인, 쓰레기집 주민, 중독자”처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속 존재들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메리트를 이용해 지식과 경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배제된 자들의 회복과 자립을 지원하는 대기업 운영 집안을 요괴라 지칭한 것은 흥미롭다. &nbsp;  도깨비와 요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의 향연은 건너뛰기로 한다. 한 달도 못 돼 도깨비 가족은 갱생프로젝트에서 떨려나고 공무원이 그들을 인솔하고 ‘나’에게 봉인을 의뢰하기 위해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이들 유령적 존재들을 봉인이라는 절대 감금의 처벌권을 가진 인물이다. 봉인 하루 전날, 이들은 한바탕 흔쾌한 춤과 떼창으로 어우러진다. 이를 방관하며 어울리지 못하던 ‘나’는 사물 상태로만 있으려는 백소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잘 들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나’는 귀를 기울여 그네들의 시끄럽기만한 소리를 비로소 서서히 듣기 시작한다. 엉망이면서 묘하게 기승전결이 있는, 세상과 부딪치는 데도 완전히 매력 있는 선율과 보컬을. 이윽고 ‘나’도 그들에 끼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천천히 적는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춤추게 만든다.”고. &nbsp;  이 세계의 요지경을 흔쾌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소음같은 배제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시간이 된다. “장마철엔 물건들이 잠을 설친다.”,  “오래된 거울은 습기를 먹으면 요기가 생겨서 시커멓게 흐려진다.”라는 할머니가 남긴 여름철 관리지침의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만 않는다.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지닌 작품이다.&nbsp;  <br>두 번째 소설, 최미래 작가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산다는 것에 어느만큼 무심한 존재가 된 인물, 그래서 세상사에 펄펄 끓는 마음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첫 단원을 읽어나갈 때 혈액에서 원심분리기로 혈장을 분리하는 장면이 묘한 호기심으로 작동해 내쳐 읽은 작품이다. 삶의 징그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것에 서로들 얽혀드는 관계를 생각게 하는 소설이랄까. &nbsp;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는, 손님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가난한데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징글징글했다. 그 덕을 보고 있는 나도 징그러운 건 마찬가지만”&nbsp;  피부과 간호조무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나’는 기력회복주사, 일명 혈장 주입술이라는 불법 시술을 독립적으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하여 혈장을 분리하여 젊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판다. 이렇게 시술을 위해 손님들을 만날수록 사람에게 정이 떨어지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유일한 정규 손님인 호떡 장수 이난희 할머니라는 펄펄끓는 존재를 보며 자신이 그런 삶에 끈적하게 얽혀있음을 자각한다. 사실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이난희 여사보다는 무심한 ‘나’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원’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이유가 “이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환상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br>“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온 마음에 열이 오르며 다시 살고 싶어지는”, 그런 열정으로만 살아가는 펄펄끓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아마 열역학적으로 심정지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혈장은 맑고 투명한 노란색, 노란 피가 내 몸속을 돌고 있는 한, 나는 이 징글징글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그 모든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문장의 이해 불능의 삶이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게다. ‘나’를 따라다니는 소녀 고서라에게 간택당하는 삶이 되듯, 모든 삶의 추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일 게다.&nbsp;  이 잡지의 기획자인 김화진 작가의 「편 고르기」는 작품 속 출판사 편집자 이완희의 혼잣말인  “내가 한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걸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큰데도 자꾸 그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것만 같다.  매번 잘 안 되지만 누군가의 옆자리에 못 박히고 싶어하는, 사람이랑 꼭 붙어 앉으려고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의 외사랑 이야기이며, “흘러 지나칠 수 있는 얘기도 품에  잘 안고 가는 사람”을 향한 끝내 말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말하지 못하는, ‘주변을 맴도는 말, 서성이는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nbsp;  “나에게는 몰라도 너에게는 소중한 책, 그런 게 되겠구나. 거보세요, 쓰시기를 잘했죠. 그런 마음은 분명 편집자의 마음이었다.”처럼 후련하고 허망하기도 한 마음,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헛손질하는 마음, 그것 그대로가 좋은” 이야기이도 하다. 작품 속 편지 쓰기 워크숍 참가자들의 끝내 닿을 수 없는 편지들처럼 우리의 선택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의 반향과 무관하게 그 행위자체가 이미 회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 읽기보다 소설의 이야기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서 따라 읽으면 어떤 마음의 좋은 향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고 싶다. 김화진의 소설들을 조금 더 읽고 싶어졌다.&nbsp;【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대표작, 〈Object; 모피로 된 아침 식사,&nbsp;최지은 시인의 詩 &lt;오브제&gt;의 모티브가 된 작품】<br>  최지은 시인의 네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정말 반가웠다.  첫 시 「오브제」는 조금 낯설다. “그가 만지고 간 자리마다 털이 났다”로 시작되는 시의 문장은 커피 머그 손잡이 안쪽에서부터 컵의 내외부로, 그리곤 집 안이 털로 뒤덮인 전경을 말하지만, 감추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만도 않아서 홀로 여기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가 떠난 뒤의 일이고, 시 속 화자는 빗질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들여 쓰다듬는 사람이 된다. 자꾸 눈물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nbsp;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털이라는 장식이 아니라 이미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장치로 읽히듯, 어떤 본능, 육체성, 또는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다. 집 안 모두에 털이 덮이듯, 나의 상념 속에서는 이 세계의 질서를 찢고 그 아래 잠긴 그리움의 감각과 접하는 매개물, 그 경계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보 나왔어/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 무슨 일인지 ‘나’는 답할 수도 없다. 경계 너머에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슬픔의 감각은 그 애틋한 그리운 육체들에 다가서기 위해 쓰다듬음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마음」처럼 “봄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열린 문틈으로/ 아끼는 고양이 달려와 안기어오는 오늘 아침(「봄」 詩전문)”처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며 응원을 보낸다.&nbsp;  김예솔비, 김병규 평론가와 김미래, 황예인 네 분의 평론과 에세이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 기울이지 못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소설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1947~2016) 의 소설집  『나 (私)』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 〈세 여인〉을 오가며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두와 손잡고 싶었던 유년기의 감각, 나와 타인을 분리시켰던 최초의 거절이라는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영화평론가 김예솔비 작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손을 붙잡는 아이의 모습들을 연상하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 월간도 계간도 아닌 비정기 문학잡지 《유령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김화진 작가를 비롯 김미래, 황예인 작가 등 편집진들의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라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은 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8/47/cover150/k1521306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18475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불확실성의 시대, 이미지는 어떻게 현실을 생산하는가 - [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5266</link><pubDate>Sun, 05 Jul 2026 18: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52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635954&TPaperId=173752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294/68/coveroff/k1126359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635954&TPaperId=173752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a><br/>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08월<br/></td></tr></table><br/>우리는 흔히 오늘을 ‘음모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초국적 미디어와 플랫폼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유통시키고, SNS는 누구나 기록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이 형성되고, 사실과 허구, 증언과 조작, 신뢰와 의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혔다. 감정적 키치와 스펙터클은 소통을 대신하고,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맥락을 제거한 편집 영상은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허위와 조작을 방조하는 사이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하고 인간의 판단을 선행하는 정치적 장치가 되었다.  &nbsp;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한 철학적 응답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한다. 대신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기억과 증언, 기록과 픽션, 역사와 정치,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서로 얽혀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다큐멘터리론이 아니라 이미지 철학이며, 동시에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nbsp;  책의 첫 장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보편적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과 사실성을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그 믿음 자체를 의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CNN이 동시 송출한 영상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저해상도의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현실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숨소리, 어둠 속의 모호한 화면은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있다'는 감각만큼은 강렬하게 생산했다. 즉 다큐멘터리의 신뢰는 명료함에서가 아니라 식별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진짜라고 믿게 되는 역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nbsp;  이 통찰은 '다큐멘터리=사실'이라는 오래된 등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는 순간 이미 화면은 촬영자의 시선과 구도, 편집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인터뷰 역시 기억의 왜곡과 언어의 한계, 사회적 위치에 따른 침묵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의 증언조차 진실 전체를 재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서발턴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실패한 장르일까. 슈타이얼의 대답은 오히려 반대이다. 진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nbsp;  그래서 그는 실재와 연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해체한다. 영화 「타이타닉」 제작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이 지나간 자리(Titanic's Wake)〉〉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은 거대한 세트장과 화려한 영화 제작 과정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 놓인 멕시코 해안 마을의 빈곤과 물 부족 지역에 대규모 인공 수조를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민물을 끌어오는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거대한 허구를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복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된다. "진실은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표명된다."는 라캉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nbsp;  <br>이 지점에서 『진실의 색』은 아카이브의 정치학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를 과거를 보존하는 중립적 저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기억을 선별하는 권력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남기고 누구를 침묵시킬 것인가는 언제나 정치적 선택이다. 기록은 객관적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질서를 조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무한한 저장 능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결정한다. 삭제는 기록만큼 정치적이며,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의 효과가 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장치인 셈이다.  &nbsp;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와 몽타주 편집, 그리고 맥락을 제거한 영상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모론은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 속에서 허구는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낳으며, 행동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체주의와 선전 정치 속에서 반복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AI 합성 이미지와 왜곡된 영상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따라 형성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nbsp;  베르토프가 외쳤던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라는 선언도 슈타이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삶은 결코 '있는 그대로' 이미지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성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삶만을 '진정한 삶'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 담론이 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분은 쉽게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하나의 전형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삶은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보편적 불확실성이라는 슈타이얼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진실은 단일한 명확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해소되지 않는 균열과 모순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nbsp;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와 허위 정보, 기록과 연출, 사실과 픽션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교차한다. 다큐멘터리 역시 더 이상 진실을 보증하는 장르가 아니다. 때로는 스펙터클과 감정 소비를 위한 쇼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은폐하는 선전의 형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더욱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미지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 욕망이 스며있다.  &nbsp;  결국 『진실의 색』은 우리에게 진실한 이미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며,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를 끝까지 읽어내라고 요구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며 사유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필요한 비판적 감각이다. 『진실의 색』은 다큐멘터리에 관한 철학 에세이를 넘어, 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가는 시대에 진실이 어떻게 생산되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문하는 보기 드문 정치철학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가장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 용기일 것이다. 이 이미지 철학의 현대의 고전적 지위를 지닐 역작을 거듭 추천한다.   &nbsp;----------------------------------------------<br>CF: 책 제본의 부실로 낱장으로 흩어져 읽을 때마다 매 쪽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조악한 제본은 처음이다. 21세기에 쓰여진 고전으로 남을 만큼 압도적인 저술이 이렇게 출간된 것은 정말 수치스럽다. 출판사여, 제발 책 제본도 신경 좀 쓰세요. (책의 물성을 문제 삼는 글을 쓰는 독자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294/68/cover150/k1126359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29468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읽었다가 아니라 읽어버렸다고 말 할 수 있기를 - [걷는 독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62330</link><pubDate>Mon, 29 Jun 2026 16: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623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18317&TPaperId=173623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224/23/coveroff/8991418317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18317&TPaperId=173623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걷는 독서</a><br/>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06월<br/></td></tr></table><br/>  “(나는 삶에 대해서)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 페르난도 페소아, &lt;사실 없는 자서전&gt; P14에서  &nbsp;  삶을 체험으로서 살아낸 생의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토록 그리운 적이 없다.  진정 떨어보고 피 흘려 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자기 강화와 같은 텅 빈 오만함이 아닌 자기 소멸을 거듭하며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박노해 시인의 이 침묵의 언어로 한없이 간결하게 최소화된 언어의 음성들은 그래서 살아내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침에 겨워하는 내겐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聖所)”가 되어주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nbsp;  <br>이 책은 항상 내 곁에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벗어나 고독을 향유 할 때 함께하는 스승 같고 때론 벗처럼 도란도란 그 마음을 나누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내겐 그런 책이 되었다. 나는 시인이 홀로 산책길을 걸으며 수없이 떠올리고 다져왔을 그 내면의 이야기들에 감응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자기 소멸의 독서를 말하는 시인의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살라지고 비워져 저 영원의 빛에 감광된 그 순간”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도록 내려치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하는 그 감응의 찰나를 알기에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읽었다. 아마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nbsp;  잠언(箴言)이자 시(詩)로 엮인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430여 구절이 사진화보와 어울려 구성된 작고 두툼한 책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공연의 막간에 잠깐 진행되는 그 무엇이고, 가끔 문을 통해 기껏해야 무대배경에  불과한 것을 훔쳐보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의 문장들을 읽을 때 나는 페소아처럼 ‘고통 받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성스러운 길손이 되려했고, 목적 없는 세상에 이유 없이 묵상하는 순례자’가 되려했다.  그럼에도 ‘나의 키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는 한계를 알기에 불가피하게 내 마음이 감응하는 소수의 음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느 날 또 다른 문장에 내 정신이 번쩍 뜨일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nbsp;  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책의 문장들 앞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아니 읽어버리려고 애썼다. 온 삶으로 읽어내기 위해, 삶이라는 한 권의 책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내 무딘 감수성이 호응한 몇 문장들을 이렇게 옮겨 적는다,   &nbsp;  가을볕이 너무 좋아가만히 나를 말린다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nbsp;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 속도로, 깊이깊이.”, 그런데 자기 삶의 제 속도를 잃기 일쑤다. 그리고는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몸을 떨곤 한다. 제아무리 그 아쉬움이 무용함을 알지만 진정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아~ 돌아보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건만 그 질긴 회한을 떨어내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 것인지. 삶의 미련이 너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산다는 것을 진정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욕망인 것 같아 자괴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래 가을 볕 드는 어느 날 나도 가만히 나를 말려야겠다.  &nbsp;  산다는 것에 그 무어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실재하는 이 몸을 체감하는 동안만큼은 여느 사람도 겪는 그 모든 희로애락을 겪어 볼 일이다. 그리고 가끔은 가슴 벅차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끼는 날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또한 모든 길흉화복이 크거나 작게 반복되지 않았나. 그런게 산다는 것이지 더 무어가 있겠는가. 잊지 말자. “막막한 날도 있어야 하리, 떨리는 날도 있어야 하리, 그래, 꽃피는 날이 오리니.”  &nbsp;  문득문득 내 옹졸한 욕망이 경험(지식)을 쌓아가려 할 때가 있었음에 쓰디쓴 웃음을 웃을 때가 있다. 체험 속에서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어야 그 빈 곳에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자리 잡을 수 있을 터인데, 그만 욕심이 망각을 일으켜 그 무엇도 들어 올 수 없이 꽉 차 편벽해지고 만다.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왜 빈번히 잊게 되는 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사회에서 나와 더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져 나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만들 수 있음에도 나만의 이야기가 없는 하루가 반복되는 날이 더해지기만 한다. 아마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nbsp;  하나의 말은그 말을 하는 순간사건이 된다.힘 들어야힘이 들어온다.  &nbsp;  이 다층적 의미를 지닌 아포리즘은 인공지능에 의존해 힘 들이지 않는, 사고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경계의 음성으로도 들린다. 자기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기계에 대한 영원한 종속, 자본에 대한 노예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을 위한 나일 때 나는 한없이 작게 축소된다. 그 축소된 나 들로 군집을 이룬 집단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nbsp;  <br>악은 갈수록 새로워지고 다양해지고,평범해지고 다수결 속에 강력해진다.나는 악의 신비를 지켜보고 있다.  &nbsp;  악의 신비를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은 변화무쌍한 악의 양태를 꿰뚫어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로운 탐욕, 정의로운 교만, 지혜로운 위선.(Free greed, Just Pride, Wise hypocrisy.)”으로 이름붙일 오늘날의 대죄가 아닐까.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내 목소리에 대한 착각, 이 본질적 자기 성찰의 한계는 항상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고 있다. 가장 소홀하기 쉬워,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일 테다.   &nbsp;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있지 않은 말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있지 않은 말을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  &nbsp;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배어 있지 않은, 육화된 즉 숙성된 인식 속에서 다져지지 못한 말 아닌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절제되어야 할 것들이 기만적이게도 활개를 친다. 정말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이 인간의 말이거늘.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데 타인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듣기 위해 온몸을 기울여 느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일 게다. 달콤하거나 때론 편협과 헛된 위선의 말을 뿌리치기 위해. 그리고 진실의 언어에 공감하기 위해.  &nbsp;  “내가 가장 상처 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그 욕망이라는 심연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향해 저주를 내뱉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실패 앞에 정직하게 성찰하게 하소서, 지금의 실패가 오히려 나의 길을 찾아가는 하나의 이정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비로소 낼 수 있는 것일 게다.  &nbsp;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nbsp;  이 단순한 자세를 잊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고독한 사유의 자리를 찾아내는 여유를 가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nbsp;  이 소란한 세계의 한 구석에내 영혼이 오롯이 앉을 수 있는오래되고 아늑한 의자 하나, 잠깐,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자리  &nbsp;  자기만의 의미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자리를 찾아 여행이라도 떠나봐야 할 것 같다.  반드시 홀로 떠나는 여행으로, 그래서 그 여행의 낯선 길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 둘이서 손잡고 돌아오기 위한 여행길을 향해서 말이다. 세상이 너무 재밌어졌다. 화려한 빛과 소음이 마치 활력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그리움도, 벗도 이웃도, 내 안의 창조성도 사라지고 만다. 조금 심심해 질 필요가 있는 세상이다. 그래야 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깨어날 테다.   &nbsp;  시인의 생의 체험에서 응결된 이들 시와 잠언들을 읽다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 무언가와 만난다는 것,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어떤 진리의 광채에 자신을 잃고 잠시 정지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읽지 말고, 읽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된다면 어쩌면 자신을 잃은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진리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삭막한 이 시대에,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라지지 말자고” 하는 품속의 다정한 말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 바로 지금 진실 되게 와 닿음을 체감 하는 독서가 될 터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224/23/cover150/8991418317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224232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영화 아바타는 왜 예술이 못 되는가, 그 의미는 뭔가 - [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7843</link><pubDate>Sat, 27 Jun 2026 1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78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71&TPaperId=173578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38/29/coveroff/k0421301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71&TPaperId=173578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a><br/>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07월<br/></td></tr></table><br/>“그들은 뱀이 근처에 없을 거라며 마음 놓고 있는 새들 같고, 카멜레온의 끈끈한 혓바닥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나무줄기 주위를 맴도는 파리들 같다.”&nbsp;-&nbsp;페르난두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 에서<br>예술 평론가 장 프랑수아 마르텔의 이 책 『Reclaiming Art in the Age of Artifice』는 예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철학서이자 문명비평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인공물(Artifice)시대'의&nbsp;위기를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기'로 규정한다. 정치와 시장, 기술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거대한 '인공물(Artifice)'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적 가치만으로 평가되는 존재가 되었고,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마지막 통로가 된다.&nbsp;  마르텔은 예술의 기원을 매우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은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하나의 사건"이며, "낯선 차원에서 들이닥친 한 줄기 빛"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피카소가 "최초의 인간이 예술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완성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가 "모든 예술은 쓸모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예술은 정치나 경제, 도덕의 도구가 될 때 본질을 잃고, 오직 자기 목적성을 지킬 때만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nbsp;  마르텔이 말하는 아름다움 역시 단순한 조화나 질서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별한다. 아름다움이 내가 이해하는 세계와 일치할 때 느끼는 안정감이라면 숭고는 현실이 내 예상을 무너뜨릴 때 찾아오는 파괴적 아름다움이다. 숭고는 불쾌하고 두렵지만 바로 그 공포를 통해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의 진실을 폭로한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감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낸다.&nbsp;  그런 점에서 화가 폴 세잔이 남긴 말은 마르텔이 말하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다. "나는 이슬비를 맞으며 세상의 순수한 근원을 들이마신다. 그 순간 나는 그림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 혼돈이다." 세잔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완전히 동화되는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황홀한 몰입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실재가 되었다. 예술은 현실을 복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실의 숨겨진 근원에 접속하는 행위임을 세잔은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마르텔이 "예술의 가치는 세상의 근원적 신비를 얼마나 예민하게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대목은 세잔의 작업과 정확히 만난다.&nbsp;  반대로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술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인공물은 예술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특정한 감정과 행동을 유도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장치다. 진짜 예술은 질문을 남기지만 인공물은 정답을 주입한다. 예술은 모호함을 사랑하지만 인공물은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결국 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확실성'이다.&nbsp;  이 점에서 마르텔이 예로 드는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 특징은 흥미롭다. 이 영화는 경이로운 영상미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한 치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본, 세트, 연기, 연출, 편집까지 모든 요소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관객은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설계 안에서 움직인다. 악당은 절대적으로 악하며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인간은 악하고 자연은 선하다는 도덕적 결론을 향해 관객은 조금의 의심도 품지 못한 채 질주한다. 압도적인 영상미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를 더욱 자연스럽게 내면에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텔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 인공물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을 것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백을 남기는 대신 이미 설계된 감정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nbsp;  인공물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조종한다. 말초적 인공물은 소비와 소유를 자극하고, 교훈적 인공물은 증오와 도덕적 우월감을 생산한다. 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제거하고 통념과 독사(Doxa)를 강화한다. 그래서 인공물은 언제나 상식을 반복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상식을 배신한다.이 과정에서 예술의 언어인 상징도 기호로 축소된다. 마르텔은 "기호는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상징이 된다"고 말한다. 기호가 정보를 전달한다면 상징은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예술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이며, 표현을 통해 상징은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태어난다. 노래와 영화, 그림은 내 안의 감정을 객관적 실체로 탄생시키고 일시적인 감정을 영속적인 존재로 바꾸는 마법을 수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이중 시선(Double Vision)'은 바로 이러한 상징을 읽는 능력이다.&nbsp;  <br>이와 반대로 현대 대중문화는 상징을 제거하고 키치를 양산한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는 죽음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병풍"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이토록 강렬한 이유는 키치가 현실의 근본 조건인 죽음과 상실, 혼돈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불안정한 변화의 과정인데, 키치는 오직 매끈한 질서와 행복만을 보여 준다. 결국 키치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가짜 위안이다. 녹음된 웃음소리가 우리 대신 웃어 주듯 키치는 우리가 직접 감당해야 할 삶의 고통을 값싼 감상주의로 덮어 버린다. 그래서 키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회피이며, 진정한 예술과 가장 멀리 떨어진 미적 환상이다.&nbsp;  마르텔은 예술이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멀어질 때 예술은 가장 혁명적인 힘을 획득한다. 정치가 은폐한 현실을 드러내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통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정치적이기에 오히려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그의 명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nbsp;  오늘날 이러한 인공물의 지배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거대해졌다. 이제 소셜미디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삶의 틀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그 안의 이미지에 맞추어 끊임없이 수정하고, 기술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감정과 가치관까지 재편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인공물이 설계한 욕망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nbsp;  마르텔은 이러한 시대를 설명하며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떠올린다. 작품 속 사람들은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미쳐 죽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목격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그저 색채일 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색채' 너머에 훨씬 더 거대한 존재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그저 알고리즘일 뿐", "그저 기계학습일 뿐",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하며 인공물의 실질적인 지배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문제는 색채 자체가 아니라 그 색채가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nbsp;  러브크래프트가 예견한 미래는 바로 '유령사회(Spectral)'였다. Spectral은 빛의 배열인 스펙트럼(Spectrum)과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Specter)를 동시에 품은 말이다. 화려한 빛의 배열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정작 우리는 그 뒤편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SNS 속 자아는 점점 선명해지지만 실제의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형체 없는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시대, 인간은 자신마저 잃어버린 채스스로 클라우드 구름 속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간다.&nbsp;  그래서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인간 정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칼 융은 "인류의 진짜 적은 인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숭배하는 인간의 정신이며, 인공물을 진실로 착각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결국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현실로 되돌리는 마지막 통로다. 진정한 예술은 정답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을 깨뜨리고, 통념에 균열을 내며, 인간을 실재 앞에 다시 세운다. 인간은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장 프랑수아 마르텔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이다.&nbsp;  사실 마르텔의 이 책은 읽을수록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술을 정의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설명하지만,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이미 예술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책은 논리적으로 예술을 증명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예술을 다시 경험하도록 이끄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nbsp;  예술은 혼돈을 견디는 능력이고, 인공물은 혼돈을 제거하려는 장치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칼 융의 말을 인용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기술도, AI도, 시장도 아니며,  그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인간 정신이라는 말이다. 결국 마르텔은 예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끝으로 이 예술철학 에세이로 규정짓고 싶은 글의 미덕을 말해야겠다. &nbsp;  그것은 “예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한 사건이다”와 같이 존재론, “기호를 상징으로 바꾸어 실재를 보게 한다.”는 인식론, “아름다움보다 숭고, 질서보다 균열이 예술의 본질이다.”라 말하는 미학, “인공물·키치·소셜미디어가 인간 정신을 획일화한다”는 사회비평, “예술은 비정치적일 때 가장 혁명적이다.”라는 정치철학을 망라한 명료한 지향의식과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사례들의 놀라운 대응이 그 어느 예술비평서보다 총체적 이해의 바탕을 토대로 하여 대중의 수월한 접근을 향한 깊은 노고를 투여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성큼 들어선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해보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모처럼 강력 추천한다는 사족을 단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38/29/cover150/k0421301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38292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고통과 죽음의 스펙터클 세기에 대해서 - [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4591</link><pubDate>Thu, 25 Jun 2026 1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45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45349571&TPaperId=173545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40/coveroff/034534957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45349571&TPaperId=173545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a><br/>Barbara Wertheim Tuchman / Ballantine Books / 1987년 07월<br/></td></tr></table><br/>600년 시차의 낯선 문명의 과거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한다.그 발견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nbsp;  [summary]  &nbsp;  감상글의 요약을 앞세우는 이유는 책의 방대함, 이를테면 ‘중세 백과사전’이라할 만큼 당대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비롯한 정치, 종교, 문화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내 누추한 소회가 산만한 감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 마디로 이 걸출한 역사저술은 타락해가는 교회와 전장의 참상, 궁정과 귀족들의 흥청만청 풍요와 대비되어 절규하는 농민 모두를 목격한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라는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14세기 파국의 유럽을 들여다보는 역사 서사(敍事)이다.  &nbsp;  1303년 훗날 소빙하기로 불릴 혹한과 냉해가 유럽대륙 전체를 휩쓸며 대기근으로 14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은 이 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간 퇴행의 시대로 기록될 것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이 독특한 역사저술은 600년 시차의 먼 역사의 시간을 오늘의 세계에 비춘다. 그것은 먼 거울, 즉 낯선 문명의 과거에 맺힌 상(像)으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발견을 위한 물음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nbsp;  야만과 폭력의 끝을 향하기라도 한 듯 지옥의 구렁텅이로 질주하는 14세기라는 과거는 오늘 우리들의 행동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본성의 거울이 된다. 변화없이 무한 반복하는 인간의 그 어리석은 행동들을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를 통해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이 위대한 저술에서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이 책의 국역본 출간에 앞서 거듭 두 차례 읽으며, 오래 펼쳐볼 소장본의 필요성을 느낀 책이었다. 가족들 모두 돌아가며 읽어 보고 서로 그 소회를 나누기에 좋은 저작이다. 터크먼은 14세기 이 야만의 인간 양상이 20세기 나치의 잔혹상으로 반복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오늘 신파시즘과 극우화되어가는 이 세계 양상의 거울이 되어 인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들은 이 책으로부터 무수한 인간 반영(反映)들을 발견하고 현실 통찰의 지혜를 거둬 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nbsp;  ------------------------------------------<br>1.  역사는 인간  진보(발전)의 문명 서사가 아니다.  &nbsp;  ​역사철학자로서의 헤겔은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특히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으로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즉 ‘자유의 진보’라는 통일적 의미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은 이 주장의 빈틈을 쫓기라도 하듯 진보의 대척에 있는 퇴행의 역사로, 오직 폭력과 야만의 지배로 규칙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바닥의 한계로 빠져드는 ‘속박의 진보(?)’가 인간 정신을 휩쓸던 14세기 중세 100년의 재앙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을 조롱하듯 자유의 보편원리가 이성의 운동으로 진전해가기는커녕 이 시대는 인간의 오판과 우연, 모순과 정신적 지체를 넘어 퇴행으로 치달으며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인간 본성의 항구적 변화 불능성을 입증한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싫어하고 회피하는데, 인류의 진보라는 패턴에 끼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저자 서문의 글은 곧 헤겔 부류의 철학에 대한 반박의 의지표명일수도 있을 것이다.  &nbsp;  아마 터크먼은 이러한 반(反)헤겔주의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문헌과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를 강조하여 역사의 정확성을 기술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기초한 연대기적 서사형식으로 독자적인 역사서술방식을 선택하였을 것만 같다. 이처럼 전통적 역사학자와 다른 걸음으로 자유로운 문체와 극적(劇的) 역사서술을 채택하는, 다시 말해 학술적 엄밀성과 문학적 서사를 결합하여 일반 독자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비춘다. 종말로 치닫는 14세기라는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로서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nbsp;  이 책 《먼 거울 (A distant mirror)》은 역사 속 인간의 행위로부터 윤리적, 정치적 반성의 사유를 추출하고자 하는 치밀한 노고의 과실이다. 대체 인간과 인간사회의 반복되는 재앙의 뿌리에 있는 근원 혹은 요인들은 무엇인지 역사적 시간을 따라 밀도 높고 긴장감 있는 전개로 마치 소설처럼 몰입하게 한다. 터크먼 역사서술의 한 특징인데 저자는 추상적 구조보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특정인물의 삶을 서사의 도구로 삼아 그들의 판단, 오판, 성격, 감정에 주목하게 하여 역사를 인간적 드라마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것이 이 독특한 역사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이 책의 중심인물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대(大)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1340-1397)의 행적과 관련하여 전개된다.   &nbsp;  “공감의 어려움, 즉 중세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가치에 진정으로 들어가기의 어려움이야말로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여기서의 주된 장벽은 바로 당시의 기독교인 것 같다. (...) 중세 기독교의 지배원리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극은 중세의 거대한 함정이었다.”  -저자 〈서문〉 에서  &nbsp;  이 파국의 시대를 둘러보며 “인간이라는 종이 이전에 오늘보다 더 나쁜 일도 견디고 살아남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오늘의 삶을 안심하게 될 거라는 저자의 조크의 목소리에 독서 내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대체 14세기가 왜 치명적 재앙의 시기였는지, 역사의 진보라는 이해에 파열음을 내게 하는지, 그 영향의 요인들을 찾는 대항해(총 1,200여 쪽에 이르는)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시간이 된다. 14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인간을 더할 나위 없는 야만과 폭력의 심화상태로 몰아넣은 현상들을 시시콜콜 열거하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쏟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수하게 복잡한 사안들의 상호 얽힘을 일일이 기술해야 할 터일 것이다.   &nbsp;  2. 세계의 질서와 규칙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nbsp;  그것은 14세기가 시작되자 몰아치기 시작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대기근, 교회의 극단적인 부패와 타락을 비롯한 교권의 분열, 14세기 내내 시차를 두고 6차례나 유럽 인구를 몰살시킨 흑사병의 창궐,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빌미로 삼아 영지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시작되어 이후 100년간 이해관계망의 복잡한 얽힘으로 심화 확장되어간 백년전쟁, 이 전쟁의 부산물인 유럽대륙 전체를 약탈 유린, 방화, 살해가 무법적으로 자행되는 예외없는 유럽전역으로의 귀족과 기사계급들로 구성된 산적단과 용병 무리의 확산, 기사도라는 모순으로 점철된 영예와 관능이 뒤섞인 허위의 정신이 야기한 폭력성의 파급으로서 이식된 파국적 발현들, 여전히 기독교 아마겟돈, 예수 재림이라는 유한 역사성에 매몰된 어리석은 도시평민과 농민들의 노예근성 등이 상호 최악의 상태를 향한 암흑, 즉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의 압력으로 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무법의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  &nbsp;  정말이지 스위스 역사학자 시스몽디(J.C.LS. de Sismondi)의 말처럼 “14세기는 인류에게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꺼번에 이러한 동시다발의 재앙적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야만으로 복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겠다. 대량운송 역량이 없던 시대에 기근은 지역자원에 의존해야만 하던 사람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을 것이고, 거기에 교회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탈적 세금 징수, 전쟁으로 인한 자원 강탈,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불러온 노동력의 가공할 감소, 여기에 일 없는 귀족들이 벌이는 산적단의 약탈과 파괴, 살인 등이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세상이라면 그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사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낯선 문명, 아니 문명이랄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nbsp;  “14세기의 헤픈 정서의 이면에는 고통과 죽음의 장관에 대한 전반적인 무감각이 있었다.”   &nbsp;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교회에서도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은커녕 하루를 견딜 구원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도덕성이란 어쩌면 낯선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거듭되는 국왕 등 귀족세력의 오판과 실정(失政)은 체포된 귀족과 국왕을 석방하기 위한 몸값이라는 납세의 부담 증가로 돌아오고,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이 휩쓰는 흑사병은 무의식적으로 인명(人命)에 대한 경시를 조장했을 것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약탈전쟁과 산적단의 싹쓸이식 집단 학살에 노출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는 “삶이란 기껏해야 영원한 고향을 향한 힘들고 지치는 여행”일 뿐이며, “내세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중에 겪는 유배의 한 단계라는 의식”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지상의 삶에서 겪는 잔인하고 참혹한 헤어날 수 없는 형편은 더더욱 축적된 인류의 지식들인 규칙들의 가치를 상실토록 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nbsp;  영토의 지배를 통한 권력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폭력을 요구한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백년전쟁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의 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3세가 프랑스왕위 계승권의 주장을 빌미로 시작한 영토 야욕, 즉 교역로의 안정적 확보와 생산물 거점의 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이 발단이다. 이것을 오늘날 형성된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부계와 모계의 가문들, 결혼으로 인해 얽힌 가문들, 조약과 동맹으로 결합된 관계들로 인해 유럽 대륙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그들의 영지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국가이전의 봉건체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바라 터크먼이 서사의 중심인물로 내세운 대영주 쿠시가문의 앙게랑 7세는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귀족이자, 기사이며, 소위 산적단(용병부대)으로 불리는 세력과의 그 경계가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nbsp;  <br>앙게랑 7세의 아버지인 앙게랑 6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공국 카타리나 공주와의 결합은 프랑스 국왕과 오스트리아 공작 사이에 두 번의 조약 체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이미 영토와 부와 정치적 거래를 함유하고 있다. 이것은 카타리나를 통한 새로운 영지를 포함하고 막대한 결혼 지참금과 상호 전쟁동맹을 의미한다. 또한 앙게랑 7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국왕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산재한 그의 영지는 유럽 대륙 곳곳에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실체화되는 과정으로서 교황령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 지역을 통과하며 벌이는 전쟁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데, 경로의 도처에서 이해관계자들과 마주치게 되고, 분명 적대적 전쟁이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영주의 지역을 지나갈 때면 상호 양해 아래 공격 없이 그저 통과한다거나, 어제의 우호관계가 돌연 상대의 이해관계의 변화로 인해 배신을 당하는 낭패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정상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혼전의 양태를 드러낸다.   &nbsp;  게다가 교황은 이를 자기 권력의 보호를 위한 대리전으로 삼음으로써 그 혼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교황파(그 속에서도 또 여러 분파들), 국왕파(잉글랜드 국왕파 프랑스 국왕파 등), 그리고 개별 영주의 이해득실의 판단에 따른 내편과 네편의 규정 불가능성은 더욱 전쟁을 난감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난맥상이 역사의 유래가 없는 100년 전쟁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킨다. 이에 대한 피해는 누가 안아야 할까. 고스란히 피지배자들인 농민과 상인 등 평민들이다. 더구나 공식 전쟁이 아닌 지역약탈 전쟁도 쉴 새 없이 발생되는데, 이것의 토대인 당대 기사귀족계급의 정신인 기사도 정신이라는 허무맹랑하고 모순으로 점철된 폭력성과 예절이 결합된 기이함의 발로가 중대하게 작용한다.   &nbsp;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식 전쟁이 일시적 휴전 상태에 들어가면 병력은 갑자기 주 수입원인 약탈수입이 사라진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약탈을 지속하는 소위 산적단이라는 집단이다. 이것의 세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수장들이 귀족의 이름을 하고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이유이다. 전쟁으로 이미 손상이 극심한 지역의 살아남은 곳을 이들이 다시금 유린한다. 이들 폭력성의 궁극적 배경과 관련해서 눈에 띄게 유치하고 잔인했던 중세 행동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억제되지 못한 충동으로 인한 두드러진 무능력”의 원천을 주목하게 된다.  &nbsp;  “인구의 절반이 21세 미만이었고, 3분의 1인 14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각종의 전쟁 지휘자들과 기사들이 대개 20세 전후였다는 사실에서 전장의 잔인한 야수성이 그들의 격렬한 충동의 배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강간, 약탈, 파괴, 방화, 살인. 한 세기 내내 인구를 절멸하다시피 생명을 반복적으로 습격한 흑사병과 이러한 참혹한 야만적 전쟁은 서로 지옥의 형상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넘쳐나는 시체들과 악화된 생활환경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원인을 모호하게 하며 삶을 더욱 황폐시켰을 것이다. 이 14세기 중세의 심리란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유아성 탈피에 실패한 시대성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위시한 국왕과 귀족 지배세력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이라는 정신적 부패의 기반위에 전염병과 전쟁으로 넘쳐나는 시체와 굶주림은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며 그 부정성의 끝으로 치달았다.  &nbsp;  3. 파괴되는 인간의 삶 - 성숙하지 못한 시민 의식  &nbsp;  앞서 언급했듯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와의 싸움으로 비롯된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칭하기도 하는 교황청 이전의 배경도 “어떤 세속 군주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세금도 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국왕의 조세 부과권은 교황 자신의 승인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황금 독점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권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은 유일한 거룩한 자인 (자신인)교황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필수”라는 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선언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영지가 있던 프랑스 영토 내 아비뇽으로 교황청의 이전을 초래한다. “세입과 모든 통치 조직을 중앙집중화하여 위신과 권력 벌충에 혈안이 되어있던 교황의 무차별적 조세 약취(略取)와 기만적 성물거래 판매 수익, 사면권 판매, 죽어가는 자의 유증 몰수”에 이르기까지 그악한 부에 대한 탐닉이 만들어낸 결과다. 조세 부과를 두고 벌어진 싸움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부담이었다.  &nbsp;  “아아,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 촌민으로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힘들구나. 태어날 때에 고통도 함께 태어나는 구나 (...) 너희 귀족들은 마치 먹이를 찾는 늑대와도 같다. 너희는 지옥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니...“  &nbsp;  이렇게 요구되는 것이란 인내, 고통, 체념뿐이었던 농민의 비참은 절정에 이르렀다. 끊임없는 전쟁 자원의 강제부담과 대기근의 굶주림, 흑사병의 반복적 강타. 교회와 귀족 계급의 폭력적 강탈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자행되는 사회는 사실 그리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홉스가 말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말이 여지없이 들어맞는 사회, 오늘의 독자인 내게는 하나의 폭력을 야기했던 극히 사적 탐욕의 추구를 모두가 개별적으로 자행할 경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규칙파괴의 압력은 자동적으로 작동된다는 실증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nbsp;  시민이나 농촌 빈민의 저항이 왜 없었겠는가. 1358년 우아즈 강변 생뢰마을에서 시작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조직이 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소부르주아와 연합한 이 비(非)귀족 공동전쟁은 기사귀족, 혹은 산적단에 의해 무참하게 도륙되어 한 달 만에 절멸되기도 한다. “젊은 쿠시 영주 앙게랑 7세가 자기 영지의 신사계급의 선두에 나서서 자크들의 절멸을 완수했다.” 이 기록처럼 쿠시의 영주는 자크들이 집결한 클레르몽으로 진격하여 3000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하여 저항운동을 압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자크(Jacques)는 귀족계급이 농민을 비하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nbsp;  사실 이 농민봉기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변화도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미 누적된 죽음만을 더 늘렸다는 사가(史家)들의 평처럼 농민저항자들은 스스로의 심리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직 그들의 정신이 숙성되려면 역사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와 더불어 1358년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국왕의 실정과 추밀관 등 왕의 측근들의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상인들로 이루어진 제3계급의 개혁운동도 있었다. 시민지도자인 마르셀의 도시 파리 성벽의 수호를 통해 국왕을 비롯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실정과 부패의 시정에 접근했지만 내부 지지자들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좋은 정부를 향한 꿈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다.   &nbsp;  바라바 터크먼은 이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는데, “프랑스 국민은 군주제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지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시민대중의 인식능력은 시대의 문화를 호령하고 사회구조 깊이 뿌리내린 제도 종교인 기독교 천년 지배가 만들어놓은 수동적 삶을 떠날 수 없었을 게다. 삼부회의 권리가 사라지고, 이들이 결의했던 개혁법 조항들은 페기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왕실은 절대왕정 시대를 누리며 더욱 왕권이 방치되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시민대중은 “모든 문제, 즉 과도한 세금, 부정직한 정부, 변조된 주화, 군사적 패배. 산적단의 도적질, 자국의 영락한 상황 등을 황실의 사악한 추밀관과 비겁한 귀족 탓으로 돌렸으며. 국왕이나 왕세자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역사의 발목을 잡는 시민적 몽매성이라는 수구성의 본질을 보는듯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nbsp;  4. 결어 - 파국의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  &nbsp;  이 600년 시차의 먼 거울인 14세기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던 고통의 시대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시민 개혁운동의 실패의 과정에 주목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경계해야하는 것은 실정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던 삼부회의 지도자 마르셀이 자신의 지지토대인 시민집단에 의한 피살로 끝났다는 이면의 실체이다. 이러한 살해집단의 심리적 본성은 아렌트도 지적했듯 오늘날 파시즘으로 지칭되는 것, 특히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강자 동일시의 유해한 감정이다. 자신들은 분명 피지배 계급임에도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의 그 약탈적 폭력성과 진실을 호도하는 은폐된 탐욕에 자신들의 권한을 떠넘기는 노예근성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떠도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취약한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쾌락을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그 금지를 파열시키는 주체였기에.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관심을 쏟았던 시대가 없었으며, 이른바 육(肉)에 대한 관심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nbsp;  또한 타락의 극한 지점까지 치달은 그들만의 폐쇄된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결탁하여 사회를 밑바닥까지 좀먹었던 중세 교회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마피아나, 사법카르텔, 언론 카르텔 등 기득권으로 결탁한 세력처럼 이 사회가 오랜시간 축적한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들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악성 요인의 실체를 보여준다. 혼인과 동맹과 이해거래로 혼란스럽게 엮인, 폐쇄된 카르텔 네트워크로 형성된 14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보인 양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 세계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원인임을 증거 한다. 혈연과 이해(利害)로 얽힌 관계에는 정의(正義)의 윤리가 들어서지 못한다. 즉 규칙과 질서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한 세계에서 대중의 삶을 실종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침몰을 맞이하게 될 때, 중세의 사람들처럼 아마겟돈이라는 최후의 전쟁 승리로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망상의 기다림 같은 것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힘겨운 고통의 나락에 젖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nbsp;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공국의 왕과 대영주 귀족들이 그네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평민들의 무고한 죽음과 삶의 기반 상실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전쟁을 야기한 지배계급은 어떻게 행동했나? 끊임없는 강탈과 협박, 살해의 위협 아닌가 말이다. 그들 지배계급은 그 오랜 소모적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의 기록에는 휘황찬란한 궁중과 금을 입힌 산해진미의 성찬 아닌가. 죽을 때까지 쥐어짜여지는 평민과 농민의 한탄이 무얼 말하고 있는가. 전쟁의 폭력을 미화하고 그 야만적 폭력에 환호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nbsp;  이 저술의 제목이 "A Distant Mirror"인 것은 이 야만과 파국의 역사를 오늘의 우리들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기를 바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 역사 속 인간의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인간행위의 그 반복성에 대한 경고의 선언인 것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발견된 모습으로부터 자기 인식의 지평을 돌보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세세하게 서술된 방대한 이 역사저술의 미흡한 감상에 머문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내 능력의 한계이다. 독자들은 흑사병, 십자군 전쟁, 교회의 타락, 세금, 노역, 노예제(봉건제)등 사회구조의 붕괴와 함께 결혼, 출산, 노동, 성 역할 등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의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심리와 정치적 긴장을 극적으로 직조해낸 이 저술로부터 무한한 영감과 반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40/cover150/034534957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0401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풀밭 위에 누운 소녀, 이 통계적 생성물은 무얼 의미하는가? - [미디엄 핫: 발열 시대의 이미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38222</link><pubDate>Tue, 16 Jun 2026 15: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382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139612&TPaperId=173382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9/35/coveroff/k84213961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139612&TPaperId=173382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디엄 핫: 발열 시대의 이미지</a><br/>히토 슈타이얼 지음, 이계성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6년 06월<br/></td></tr></table><br/>AI가 만들어내는 평균적 세계의 이미지들,&nbsp;텍스트들은 어떤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는가?<br>책의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괴한 형상의 표지 이미지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저자가 2024년 스테빌리티 AI가 공개한 오픈소스 모델 디퓨전 3(SD3) 미디엄에 “‘풀밭 위에 누운 소녀’라는 무해한” 요청을 프롬프트에 입력하고 그에 반응해 내놓은 출력 이미지라는 말 밖에 모른다. 히토 슈타이얼이 정확하게 어떤 형용을 추가한 요구를 써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요청에 의해 생성된 사지가 뒤틀린 기괴한 이미지가 책 표지의 생물체 이미지다.  &nbsp;  【표지 및 62쪽, 스테이블 디퓨전 3가 ‘풀밭위의 소녀를 생성한 이미지】  &nbsp;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기계학습 재료로 수집된 대량의 데이터와 그 학습을 위한 막대한 에너지자원의 소비의 결과가 이것인가? 우린 AI, 나아가 AGI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위해 미친 듯 자원을 쏟아부으며 맹렬하게 독점적 지위를 선점하기위해 광란의 질주를 하는 기업들 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들이&nbsp;AI에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을 향한 2017년부터 2024년에 이르는 이미지 제작 현장에 대해 2025년 출간한 일종의 현장 보고서가 이 저작이다.  &nbsp;  히토 슈타이얼의 이 책은 생성형 AI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창작 도구로 바라보지 않는, 즉&nbsp;AI 자체에 대한 기술 비평이나 예술 비평을 넘어선다. 그것은 생성형 AI를 둘러싼 기술, 자본, 국가, 전쟁, 노동, 이미지, 정치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려는 오늘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비판적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AI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가 아니라 ‘AI는 어떤 사회,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잃고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nbsp;  1. 위기 자체를 성장 동력으로 하는 AI  &nbsp;  우선 슈타이얼은 생성형 AI의 등장을 기술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금융위기, 팬데믹, 기후위기, 전쟁, 극우 정치의 부상이라는 다중 위기 속에서 출현한 현상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AI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라기보다, 위기 자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자본주의적 프로젝트와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즉 생성형 AI는 이러한 세계의 위기와 무관하게 등장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들을 새로운 경제적 기회로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체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한다.  &nbsp;  특히 슈타이얼은 AI와 전쟁의 결합을 중요한 문제로 제기한다.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전쟁터가 아니라 AI 기반 감시 체계와 표적 생성 시스템, 자동화된 군사 기술이 실험되는 거대한 연구소가 되었다. 팔란티어와 같은 기업들이 군사 데이터를 분석하여 전장에 활용하는 사례는 AI 발전이 국가안보 논리와 군비 경쟁 속으로 깊이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를 생산하는 장치처럼 기능하기 시작한다. 범용 인공지능과 초지능 개발 경쟁은 결국 ‘승자독식’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국가와 기업은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이러한 가속주의적 담론이 실제로는 소수의 기술 기업과 초고액 자산가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이 지금 전쟁을 끝낼 의지를 보이지 않은 요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nbsp;  2. 통계적 산물로서 AI 생성물이 의미하는 것 - 평균성, 누구를 위한 평균인가, 그것이 수렴하는 것은?  &nbsp;  그녀의 비판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생성형 AI는 흔히 창조적 도구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미술사와 인터넷 전체에 축적된 방대한 인간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수집하고 평균화하여 재가공하는 체계에 가깝다. 따라서 AI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사진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실재와의 접촉이 아니라 확률과 통계에 기초한다. 과거 사진이 현실의 흔적이었다면, AI 이미지는 데이터세트 속 관계들의 평균값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실이나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개연적인 것, 가장 그럴듯한 것, 가장 자주 등장한 것에 수렴한다.  &nbsp;  【 본문 78쪽, 상단 이미지: LAION-5B 데이터 세트의 학습재료/ 하단 이미지: 스테이블 디퓨전이 생성한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  &nbsp;  이 심층학습 텍스트2 이미지 생성기 중 하나인 LAION-5B데이터 세트에 그녀의 사진도 몇 장 들어있는 모양이다. 슈타이얼은 모델에게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를 생성해달라고 요청한다.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을까? 날조로 증강된, 사회적 신호들을 극단적 논리로 밀어붙인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동양인의 이미지를 내놓는다. 슈타이얼은 화가 많이 났을 테다. 얼굴인식의 편향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위선적 명분에 기대 유령같은 인종화된 표현형으로 사회관계를 고도로 이념화된 최적치로 수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nbsp;  이것이 슈타이얼이 말하는 ‘통계적 사실주의’에 숨어있는 권력의 편향이다. AI는 대규모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추출하여 이미지를 생성하지만, 그 과정은 현실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양적 축적에 의존한다. 충분히 많은 데이터를 모으면 세계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현실을 이해하기보다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 위험을 내포한다. 생성된 이미지는 특정 개인이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평균적 인간상과 평균적 세계를 시각화한다.  &nbsp;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슈타이얼이 언급하는 ‘야누스 문제’이다. 드림 퓨전이나 텍스트 투 3D와 같은 시스템은 종종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이 결합된 기이한 인물을 생성한다. 이는 기계학습이 얼굴 인식에 지나치게 편중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집단을 대표하는가? 반대로 군중은 어떻게 하나의 얼굴로 표상될 수 있는가? AI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수많은 얼굴들의 평균적 합성물이다. 이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집단적 통계가 만들어낸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nbsp;  이 지점에서 슈타이얼은 19세기 우생학자 프랜시스 골턴의 합성사진을 떠올린다. 골턴은 범죄자, 유대인, 결핵 환자 등의 사진을 겹쳐 특정 집단의 ‘전형적 얼굴’을 만들려 했다.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평균적 얼굴 역시 이와 유사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인종화된 표현형이나 사회적 편견이 데이터세트 속에 축적될 경우, AI는 그것을 객관적 현실인양 재생산한다. 데이터는 복잡한 사회적·역사적 과정을 삭제한 채 마치 특정 특성이 집단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매개와 해석의 과정이 사라지고 통계적 결과가 곧 진실인 것처럼 제시된다.  &nbsp;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조건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AI는 서로 연관된 평균치를 계산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치를 향해 수렴한다. 예컨대 아름다움, 성공, 생산성의 기준은 평균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 모델을 규범으로 제시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범이 자연스럽고 자생적인 결과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시장의 이해관계와 알고리즘적 최적화, 수많은 가중치와 매개변수가 작동하고 있다. 신경망의 은닉층은 이러한 사회적·이념적 개입을 가린 채, 결과만을 객관적 사실처럼 드러낸다.  &nbsp;  3. AI의 물질적 토대가 말하는 것 -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체계  &nbsp;  슈타이얼은 또한 AI의 물질적 토대를 강조한다. 생성형 AI는 막대한 전력과 자원을 소비하며, 데이터센터와 화석연료 기반 인프라에 의존한다. 따라서 AI는 비물질적 정보 기술이 아니라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 체계다. 화석연료를 태워 얻은 에너지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녀가 “이익은 사유화되고 위험은 사회화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이터를 제공한 이용자들, 콘텐츠를 만든 창작자들, 편향을 제거하기 위해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미세노동자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기술 기업들은 그 성과를 독점한다.  &nbsp;  결국 슈타이얼이 비판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AI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이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확장하는 도구일 수 있지만, 동시에 전쟁을 자동화하고,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며, 편향과 차별을 재생산하고, 방대한 무급 노동을 수탈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AI가 얼마나 더 강력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며, 그 혜택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슈타이얼에게 AI는 미래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반향적 실체이며, 우리는 그 반영 속에서 기술의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와 인간 사회의 미래를 보아야 한다.  &nbsp;  한편 슈타이얼은 AI가 문화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우려한다. AI는 대규모 데이터의 평균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예외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을 점차 제거하고 가장 그럴듯한 것만 반복한다. 이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현상으로 나타나며, 결국 문화는 획일화되고 상투화된다. 인터넷과 AI는 표현 비용을 낮췄지만, 그 결과 형성된 공론장은 깊은 정치적 조직화보다 단기적 관심과 인정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다. 정치 역시 점점 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며, 연대보다는 정체성 경쟁으로 변질된다.  &nbsp;  이러한 비판의 밑바탕에는 더욱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놓여 있다. 상식은 무엇인가? 인간의 직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개인과 집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AI는 인간의 사고를 모방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통해 세계를 계산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판단과 경험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nbsp;  4. 결어 - 생성형 AI, 범용 AGI를 향한 궁극적 각축전의 의미; 현대사회의 권력구조의 거울  &nbsp;  반복하지만 슈타이얼의 핵심 주장은 생성형 AI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AI가 생산하는 것은 이미지뿐 아니라 평균성, 순응성, 군사화, 착취, 그리고 통계적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가?”, “누가 이 시스템을 소유하고 통제하는가?”, “확률이 진실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의 판단과 정치적 책임은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슈타이얼에게 AI 비판은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의 미래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인 셈이다.  &nbsp;  슈타이얼은 AI 자체를 본질적으로 악한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점이다. 오히려 그녀는 반복해서 ‘왜 현재의 AI가 이런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비판 대상은 기술 자체라기보다 기술을 둘러싼 자본주의적·군사적·국가주의적 권력장치(dispositif;배치)에 가깝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란 바로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생성형 AI는 단순한 이미지 생산 기술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이 세계를 평균화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거대한 통계적 장치이며, 따라서 AI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nbsp;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슈타이얼의 통찰로 마무리하련다. “기계 학습 이미지는 정체된 시각적 *슬롭을 만들어내는 최적화 시스템”이라는 지적이다. 이것은 평균을 향해 수렴하여 중간이라는 통계적 조합, 그 주변을 공전하면서 협소한 주류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장성 발현이다. 관습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상의 정규분포곡선에 몰려들며 고만고만한 이미지와 텍스트로 귀결되는, 그러함으로써 문화의 교착과 획일화를 조성한다. 결국 과거를 끝없이 변주하는 수구성과 획일성이라는 전체주의는 오늘 AI의 본질에 내재된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nbsp;  사실 슈타이얼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압축적이고, 철학·미디어이론·정치경제학·기술비평이 뒤섞여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논점이 흩어져 보이기 쉽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축은 의외로 단순하다. "AI가 만들어낸 평균적 세계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가?", "지금 AI가 학습하고 있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플랫폼 사회가 이미 왜곡해 놓은 세계상은 아닌가?" 로 압축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AI 기술철학+ AI 정치경제학’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사회가 가진 규범과 편견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아마 이 글의 소임은 다한 것일 테다.  &nbsp;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1966.1,1~), 독일 뮌헨 출생의 일본계 독일인,&nbsp;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중】<br>*AI 슬롭(AI Slop):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단어다. 이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량 생산된 ‘저품질의 디지털 콘텐츠‘라는 뜻을 가진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9/35/cover150/k84213961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19359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그 어느 때보다 유쾌하고 강렬하다 - [소설 보다 : 여름 2026]</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31975</link><pubDate>Sat, 13 Jun 2026 09: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319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313&TPaperId=173319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97/47/coveroff/89320453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313&TPaperId=173319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설 보다 : 여름 2026</a><br/>구소현.남궁지혜.박민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한 해의 〈문지문학상〉 후보작들을 ‘이 계절의 소설’로 세 편씩 선정해 소설선집을 꾸려 펴내는 《소설보다》를 매 계절 읽으며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문득, 아니 새삼스레 알아차렸다고 해야 할까? 이 선집에는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들이 해당 단편작품에 이어 실려 있다. 그 글들을 읽으며, 평론가들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또한 다정하지만 엄격한 시선들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작품을 떠나 작가의 다른 장소와 지면에서의 지나가듯 언급한 말(문장)들 조차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려는 노고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 선집은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젊은 소설가들과 그네들의 작품 뿐 아니라 문학평론가들의  독해 관점을 엿보는 작은 통로로서 독자 대중과 평론가를 이어주는, 그래서 그들과 독자들이 연결되는 가교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은 말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았다.  &nbsp;  소설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즐거운 나라」를 쓴 박민경 작가의 예전 인터뷰 내용 “코끼리를 좋아합니다. 눈은 온순한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를 상기하며 이소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을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예술가 소설로도 읽을 수 있었음을 말할 때, 작가의 조심스러움만큼이나 독자의 읽기에도 다정한 주의 깊음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신나라’가 소설 첫 문장에 타율적으로 등장할 때, 그녀의 “나 좀 살자!”라는 절규의 강렬함은 여느 코믹한 온라인 숏컷의 한 장면처럼 가벼운 흥미로 다가왔다. “짐승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저항하는 거구의 여성이 담겨있는 충격적 영상”은 이미 그 후의 소설 속 설명 없이도 이미 독자의 상상 속에서는 빠른 인터넷 유포와 확산을 이어가며 희화화되는 과정을 그릴 수 있다.    &nbsp;  ‘살자녀’로 불리는 밈으로 폭발적으로 소비되는 이 사회 저변의 욕망, 인간들의 변하지 않는 본성들이 배경처럼 빠르게 흐른다. 사실 나는 거의 눈이 지면(紙面)위를 날아다닐 정도로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에 빠져 읽었다는 것은 내게도 오직 큰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거부하는 부당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제로,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정상성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암묵적이고도 끈질긴 배제”의 몸짓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nbsp;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소설들에서 나는 가벼운 경쾌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이 소외나 배제의 고통이나 고뇌라는 바다에 푹 절어 있는, 그 찰랑거리는 수면의 가벼움에 올라 타는 즐거움에 빠지면서도 바로 그 물 속에 깃든 이 세계의 무거운 속살을 직면케 하는 웃음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경박함의 역설이랄까? 마치 소설 속 살자녀 밈이 “반복될수록 가벼워져 멀리 흩어짐”으로써 마침내 누구든 읽을 수 있는 것이 되는 역설처럼 말이다. 신나라의 절규가 왜 터져 나왔는지, 그 절규는 우리들 사회의 어떤 모습이 만들어냈는지를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해내는 여정이 될 것 같다,  &nbsp;  <br>「측은지심」의 남궁지혜 작가는 홍성희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능청스러움이 제 안에서 좀 더 커졌으면 해요.”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유쾌한 능글맞음이 차고 넘쳐흐른다. 소설은 코인으로 인생 말아먹고 “사람다운 채팅봇 노릇”으로 로맨스 스캠 알바를 하는 ‘나’라는 인물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심리적 육체적인 권력관계의 자리 변동을 관찰케 하는, 그로부터 인간성, 혹은 윤리성의 생각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소설의 소재인 스캠(scam)사기는 캄보디아에서의 한국인 피살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큰 관심을 유발했던 악랄한 신종 범죄이다.   &nbsp;  주인공의 대사나 행위가 하도 유쾌하게 그려져서 마치 징글맞은 범죄 현장이 희극같이 느껴졌는데, 이 작품의 묘미 중 하나는 남의 불행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을 뜻하는 제목 측은지심처럼 주인공 ‘나’라는 인물이 거짓과 기만의 행위를 하며 이러한 자신의 얄팍한 마음을 정당화하는 인간성을 표현하는 이 말을 중심으로 관찰토록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캠 범죄에 가담한 인간들의 모순된 위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양상과 이들에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 이 범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통속적으로 그 구체적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nbsp;  소설의 첫 문장, “사랑한다면서 고추 안 보여주는 심리는 뭘까”라는 이 발칙한 물음은 피해자가 될 표적에게 젊은 여성인 채하는 채팅봇을 연기하여 기만한 뒤에 표적으로부터 받은 고추 사진과 채팅 글들로 위협하여 재산을 갈취하는  ‘나’가 수입원으로 낚아채지 못해 아쉬워하며 표적의 심리를 고민하는 구절이다. 측은지심을 곱씹으며 이 인물을 따라가는 내내 그 어리숙함에 내재된 윤리적 불모성과 정당화의 임기웅변 등 오늘 우리들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소위 AI시대의 미세노동의 기만적 실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nbsp;  남궁지혜 작가의 「측은지심」이 스캠 범죄의 현장 속에 있는 인물을 통해 진짜와 가짜, 진심과 위선, 신뢰와 기만의 경계를 오가며 물음을 던졌다면, 구소현 작가의 「화이트 데이」는 진짜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부족한 오늘의 사회에서 가짜를 진짜라고 믿기를 스스로 요구하는 현실을 깊숙이 찌른다. “하늘의 날개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이비 종교 약속천익사원이 신도 착취와 사기, 살인교사, 불법 의료행위로 고발되며 세상에 알려지자 교주가 죽음으로써 해체됨에 따라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의 이후 삶의 양태를 다룬다.   &nbsp;  소설은 성장한 세 인물의 삶의 현실을 쫓는데,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 빠져들거나 중독된 삶을 살아가며, 일군의 사람들이 이미 해체되었던 약속천익사원에 다시금 몰려드는 상황들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의 실종을 이루는 원인들을 생각하려는 듯하다. 아주 최근에 나는 이 맹목적 믿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이 최초의 무조건적, 타율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자율도 성립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란 것도 모두 이 맹목적 믿음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처럼 말이다. 거기에 무슨 이성,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겠는가. 어쩌면 소설 속 재원, 승현, 연주가 자신들이 어린시절 믿었던 새(鳥)인간의 종교가 비록 가짜임을 깨달았더라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으려하는, 그 이유에 대한 탐문은 “확신에 가득 찬 눈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는 구소현 작가의 말처럼, 그저 믿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음을 포용하게 된다.   &nbsp;  현실의 안과 밖 어디에도 편히 머물 수 없는 오늘의 우리들이 겪는 무력감이 바로 이러한 맹목성의 믿음이 우리들의 자리, 숨 쉴 자리를 마련해주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안간힘”을 쓰려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이들 거짓된 믿음의 진짜를 이해하려 든다면 바로 그 행위가 삶의 평온, 제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각 작품들을 통해 이 세계를 읽는 관심사와 지향 가치까지 드러내 보여준 하혁진, 홍성희, 이소 세 분의 평론가들과 신선하고 유쾌한 가운데 진지함까지 아울러 지펴 낸 세 작가에게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고 조용한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아직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의 여섯 작품이 남았지만 이번 여름 호에서 문지문학상 수상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97/47/cover150/89320453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97478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7139</link><pubDate>Wed, 10 Jun 2026 15: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713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441170&TPaperId=1732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88/96/coveroff/895644117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64820&TPaperId=1732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450/51/coveroff/893566482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954121&TPaperId=1732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12/96/coveroff/8961954121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351909&TPaperId=1732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451/86/coveroff/896735190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32139317&TPaperId=1732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81/54/coveroff/k13213931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기술경제 지배 시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nbsp;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인터넷 기반의 오늘, 유비쿼터스(ubiquitous)기술이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논쟁은 제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도출은 매우 중차대한 바로 지금의 인간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다. 이 결정이 곧 인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국제도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인간선언, Homo duduri』이라는 국내 문학인들의 글모음집도 눈에 띈다. 그들이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과연 이 세계의 추세에 어떤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nbsp;   <br>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는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의 “이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성을 만든다.”라는, 즉 법의 교리적 기능, 하나의 믿음 체계로서 법의 교조적 역할을 역설한 『법률적 인간의 출현(Homo Juridicus)』의 2부 〔법적 기술〕 제 4장 〈과학 기술의 제어: 금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로서의 법”을 읽으며 제기된 법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생각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숙의 과제로 또 하나의 층위인 법과 기술의 문제를 덧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nbsp;  특히 시간과 장소라는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인간 서로가 연결되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오늘의 유비쿼터스 세계에서 법(法)은 어떠한 변화된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논의가 내 정신을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 기반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사회가 믿어 온 믿음의 문턱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이 세계가 믿어 온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인격 전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균열이다.  &nbsp;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끔찍한 인간을 향한 물음이 된다. 만약 이러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진다거나, 기술경제 주도 자본가들을 비롯한 그 집단이 이 영역을 부정하여 사라지게 된다면, 소위 ‘인간의 사물화’는 단순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법적 구조 자체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기능은 그 대상을 상실하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도 인간은 기술진보 보다 상위의 원리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이처럼 철학적이고, 헌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nbsp;  1. 도그마(dogma)로서의 法  &nbsp;  문제가 되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온 불가침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짧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알랭 쉬피오 교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노동연구원 박제상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구조로서의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을 도그마로 정의하며, 모든 인간 사회는 나름의 믿음 체계인 이 도그마에 기초해야하며, 이러한 보편적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인간 사회는 어떤 확립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렇게 믿을 뿐인 도그마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nbsp;  이의 예로서 우리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거슬러 유추해보면 그곳에는 무턱대고 믿어야 하는 교조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세계라는 체계에 다가가려면 어린아이는 우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언어의 입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제약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최초에는 완전한 타율성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 이 근원적 타율성 없이는 그 어떤 자율성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 최초의 타율성, 맹목적 믿음이 주체 형성의 첫 번째 교리이자 인간 삶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한국어를 쓰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맹목적 믿음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이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 말(언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 기초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nbsp;  그렇다면 도그마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스스로 정한 나아갈 방향이며,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상적 모습이 곧 법이다. 법은 거울에 비친 사회의 표상이다. 즉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 체계가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의 이성은 법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법의 교리적 기능을 파괴할 때, 즉 법을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해석하게 될 때, 과학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환원물로 취급한 끔찍한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은 인간에게 금기나 터부처럼 인류학적 기능을 지닌 교리이자 교조이며 교의인 것이다.   &nbsp;  법은 시대, 장소를 달리하며 그 환경에서 인간과 세계의 중재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한계를 설정하는 도그마인 것이다. “법질서에 터 잡고 있는 원리들은 천명되고 찬양되는 것이지 계산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은 그 어떤 과학적 토론이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 발 딛고 서야하는 토대로서 법 원리이며, 과학이 이 법질서를 정초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최초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어떠한 이성도 세워지지 않는다. 수학의 무수한 공리들을 생각해보라, 그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증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으며, 수학(기하학)이라는 골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의 도그마로서의 정의는 오늘날 생물학주의나 기술경제주의를 주장하는 집단들로 인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간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이다. 법의 도그마성이 부정되는 순간이 곧 인간과 인간 사회의 파국일 것이다. <br>  &nbsp;  2.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으로서의 法  &nbsp;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도구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 여부에 따라 특정한 금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도구의 용도를 제한하는 일을. (...)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  알랭 쉬피오 著,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nbsp;  이 같은 법의 도그마로서의 존재 위치를 기반으로 해서 기술경제중심주의의 시대인 오늘에 있어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법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인간들을 이성의 왕국에 복종시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지금처럼 사람들 일상의 행위를 점령하기 전, 산업사회에서는 법이 사무실이나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같은 개념도 모두 물리적 공간의 출입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의 환경에서는 그 출입 담장이 사라지고 집, 카페, 지하철, 심지어 침실에서도 업무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노동법은 더 이상 공간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접속(연결)을 규제하는 법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nbsp;  이것은 단순히 언제부터 연결을 끊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서 법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법기술적 문제를 넘어서는 물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비쿼터스 기술이 노동시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 최적의 도구이기에 자본의 시간 점유에 맞서 개인 삶의 시간을 방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리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낳고 그 결과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현대 법은 연결을 차단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nbsp;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 라는 매우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통적 법률들은 노동자에게 노동력만을 거래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의 인격 자체는 계약밖에 남겨 둔다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허구의 전제 위에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팔수는 없다는 믿음에 서서 노동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에두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비근하게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권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가능해왔다. 사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nbsp;  그런데 원격 근무, 스마트기기 기반 업무, 플랫폼 노동 등에서는 노동 그 자체보다도 노동자의 주의력, 감정, 반응속도, 생활패턴, 심지어 수면과 이동 데이터까지 생산성의 일부로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과 인격 사이의 경계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기술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노동의 상품화라는 말은 지나간 옛 표현이다. ‘삶의 상품화’, ‘주체성의 상품화’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금은 남은 표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오늘의 기술경제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사물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본이 고의적으로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사물화 하고자 한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생산성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법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에 지시점이기 때문이다.  &nbsp;  3. 기술경제 자본 지배시대의 법의 향방, 의미 부재의 시대가 뜻하는 것  &nbsp;  인류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포드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각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신체, 시간으로부터, 지식에 대해, 인간의 주목과 관심에 대해 법은 그것들에 의해 침해될 인간존엄을 보호해왔다. 그것은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데이터 소유권과 같은 권리가 인공지능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과거의 법이 인간의 몸을 보호했다면 지금의 법은 인간의 정신적, 정보적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이것은 법이 기존의 노동법 확장의 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격권 체계’로 발전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nbsp;  이렇게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에서 그 중재를 통해 인간 존엄의 훼손을 방어하는 데 그 기능을 존속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기술경제 자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는 거래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오랜 인간의 법률에서 방어해 온 인간의 인격과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는 인간존엄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가는 하는 것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생명주의나 경제중심주의 법학자들은 인간을 세포들의 화학적 물리적 조성물, 계산 될 수 있는 수량적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nbsp;  법은 언제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제도화해 온 인간의 기술적 산물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반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법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 관리 가능한 생산성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체계로 재편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측정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유지된다면 법은 그 영역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기술한다면 법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발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술자본은 더 이상 그 보호대상의 위치에서 인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숫자이고 물질이라고 말이다.   &nbsp;  “우리는 유전학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독일 민족의 삶과 법을 만들어간다. (...) 국가는 인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히틀러 『유겐트 입문서』에서  &nbsp;  인간의 세계를 사물의 세계로 깎아내리는 소위 ‘인적 물자’라는 개념 사용을 통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법 주체를 없애버린 히틀러의 제3제국 언어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부정”함으로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말살했는가라는 인간 사물화가 초래하는 법과 세계 파국의 적절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나치의 생물학적 법의식은 바로 지금의 기술경제주의 법의식과 빼닮아있다. 소위 과학적 법칙을 정치적, 법적 기준으로 삼을 때, 거기에는 일체의 책임감이나 죄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nbsp;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법이라는 도그마는 그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인간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있던 법이 그 기초가 부재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에 인간의 이 맹목적 믿음인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믿음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편리함과 효율성의 증가라는 진보에 매몰되어 기술경제 자본이 인간의 삶에서 인간 존엄을 서서히 박탈해 가 궁극에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nbsp;  사람들은 아주 막연하게 인공지능이 몰고 온 시대를 자신들의 편리를 비롯한 유무형의 이익 관점으로, 즉 효율성 높은 긍정의 낭만적 기술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발견되지 못한 드러나지 않은 층위의 과제들을 망라해 숙의되어 할 현 인류의 시급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법이 관리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자본과 협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금 한국의 정치권력은 실용주의에 매달려 그 기술자본의 압도적 부와 권력에 매료된 듯하다.   &nbsp;  우리는 허구, 맹목적 믿음에 기대 이 세계를 구축해 온 존재이다. 이제 인간 존엄이라는 최후의 허구를 포기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 영역을 버텨낼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인간들 인식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나? 기술경제 자본주의자들의 특이점의 시대, 인간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더 이상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과연 인간사회를 존립해온 믿음이라는 허구의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국이 아닐까?   &nbsp;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 존재의 의미실현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 작동했던 법이라는 의미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의미체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큰 울림을 주는 이 문장으로 맺는다. 인간 존엄이라는 이 교조적 믿음을 우리들이 잃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는 물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법의 붕괴를 초래한다. 법이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엄중한 교리를 버텨낼 수 있도록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nbsp;  “이성은 약(弱)한 것이다. 끊임없이 그 딛고 선 바를 돌아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라도 광기와 망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 (...) 도그마는 인간의 탐욕과 망상에 한계를 설정하는 외부적 조건으로 기능한다.”&nbsp;&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81/54/cover150/k1321393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81543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첫사랑, 첫키스, 결코 동일 강도의 감각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 [커플들, 행인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0354</link><pubDate>Sat, 06 Jun 2026 18: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03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536996&TPaperId=173203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5/56/coveroff/k792536996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536996&TPaperId=173203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커플들, 행인들</a><br/>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08월<br/></td></tr></table><br/>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의 ‘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년 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nbsp;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nbsp;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글〉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nbsp;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글〉, 117쪽에서  &nbsp;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nbsp;  <br>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nbsp;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nbsp;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nbsp;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nbsp;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nbsp;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 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즉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nbsp;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nbsp;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nbsp;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돈&gt;상품&gt;더 많은 돈’ 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gt;만족&gt;더 큰 욕망’ 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nbsp;【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nbsp;《感覺の帝國》에서】<br>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nbsp;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nbsp;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裏面)  &nbsp;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nbsp;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nbsp;&nbsp;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nbsp;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nbsp;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의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nbsp;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nbsp;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 과 히치콕의 〈새〉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기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nbsp;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nbsp;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br>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nbsp;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5/56/cover150/k792536996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5561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思想界 212호(2026.5~6),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 [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10626</link><pubDate>Mon, 01 Jun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106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138885&TPaperId=173106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00/26/coveroff/k33213888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138885&TPaperId=173106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a><br/>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05월<br/></td></tr></table><br/>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nbsp;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nbsp;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nbsp;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즉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nbsp;  ■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nbsp;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호(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nbsp;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nbsp;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nbsp;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低)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nbsp;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은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nbsp;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라는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nbsp;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nbsp;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의 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nbsp;  <br>“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汚], 그릇된[誤],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nbsp;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로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nbsp;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nbsp;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nbsp;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nbsp;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nbsp;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다.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nbsp;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nbsp;  ■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nbsp;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nbsp;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00/26/cover150/k33213888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00264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이유리 작가 전작주의자가 되기로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link><pubDate>Fri, 22 May 2026 17: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935398&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9/72/coveroff/k39293539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038963&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99/19/coveroff/k35203896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32834795&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058/53/coveroff/k13283479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39119&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210/51/coveroff/893203911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145&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632/47/coveroff/k512032145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분석 비판하려는 관념에 장악된 그늘진 정신의 무게에 짓눌린 나를 느낄 때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작가의 소설들은 제 아무리 힘겨운 삶에 직면한 인물일지라도 그 무게를 오히려 가벼운 무엇으로 인식하게 할 만큼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좋은 정조(情調)의 발랄한 생기로 전환시킨다. 그 작품들의 통통 튀는 밝은 기운을 내 마음에 잔뜩 흡수하고 싶은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분석하는 마음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문장들과 이야기가 발산하는 젊음의 생동감, 그 미완의 풍부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유쾌함과 명랑함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nbsp;   <br>이 작품집은 작가의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재구성된 단편선집이다. 선집의 표제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첫 문장은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로 시작된다. 수진은 연인 성재와 이별했지만 “짐짝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 그 남는 사랑을 팔기로 한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친구 영인이 수진에겐 필요없는 사랑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고, 수진은 냉큼 받아들인다. 감정전이센터를 찾아 기증자 수진은 수령자 영인에게 전이할 감정을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이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인의 남편 민후의 말처럼 “무슨 장기 이식 하듯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되겠는가.  &nbsp;  사랑이 끝난 자리, 사랑을 잃은 자리에 남거나 비어버린 곳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그래서 약이 되고 “마음의 굳은살”이 되는 시간의 신비에 의존한다. 사랑이란 이미 누군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펴 이 진실을 음미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nbsp;  「그때는 그때 가서」 화자의 이름도 수진인데, 아쿠아리움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엉덩이가 근지러워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유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수진의 이 직업을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녀의 연인 정우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니다.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중요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그저 놀기를 좋아”하는 수진으로부터 정우가 떠난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지만, 네 “머릿속은 꽃밭이라”는 정우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물적인 새끼.” 어찌 욕까지 악의 없이 무해하게 들리는 것일까.  &nbsp;  이 소설은 내게 미소와 활력이 필요할 때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펼쳐 읽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아니 이유리 작가의 소설들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책장 보이는 곳에 꽂아 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설의 대표작이 이 작품 「그때는 그때 가서」이다.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해파리 보는 것이라는 수진은 “투명한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고 목적도 욕심도 없이 그저 흘러 다닐 뿐”이기에 “흩날리는 꽃처럼 꿈결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 자유로운 생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nbsp;  새벽 다섯 시부터 개장시간인 여덟 시까지 그녀가 터득한 숙련된 노하우로 손발이 맞는 파트너 예순다섯 살 김선자씨와 잽싸고 날렵한 청소일은 결코 대강대강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자신의 일처리에 어떤 긍지마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정우에겐 “그따위 것은 누구나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싼 돈 주고 대학까지 나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수진은 말한다.  &nbsp;  “수진아, 제발 어른답게 생각하고 살아. 쟤들은 해파리고 넌 사람이잖아. 쟤들은 집도 있고 때 되면 누가 밥을 주지만 넌 아니잖아.” 정우와 다투거나 싸우고 난 다음 날, 청소를 일찌감치 마치고 해파리 수조 앞에 있으면 뒤이어 일을 마친 김선자씨는 휴대폰에서 맞춤의 음악을 틀어놓고 목청껏 노래를 시작한다. 여진의 &lt;그리움만 쌓이네&gt;에서부터 김연자의 &lt;아모르 파티&gt;에 이르는 그 절묘한 생의 풍악이 드리웠던 그림자를 거두어간다. “꿍짜라작작 쿵짜라작작 쿵작쿵작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 해파리 수조 앞에서의 이 이상하지만 결코 “유해하지 않은 무해한 이상함”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둘의 이 이상한 순간이 내겐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뭐 있나. 다 그런 거지.  &nbsp;  【민음 북클럽 에디션,&nbsp;소설집『비눗방울 퐁』속&nbsp;세 편의 선집】<br>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 것인가. 미래를 위해 하기 싫은 것을 끈질기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자유로운 비둘기와 해파리처럼 살아가야 하나. 수진은 김선자씨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서”, “돈은 많이 모으셨어요?”라고 말해버린다. 그때 “참.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몰라서“라며, 수족관 앞에서 자신이 노래 부르는 이유를 설명한다. ”꼭 지구를 앞에 놓고 부르는 것 같아요. 동그랗고 새파랗고, 그 안에 뭔가 살아있는 것들이 오글오글 돌아다니는 게 그렇지 않아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뭐 그렇게 살면 되지.    &nbsp;  수진은 정우가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과 해방 된 삶에 대한 생각을 오가지만, 김선자씨의 말 속 ‘뭔가 살아있는 것들의 오글거림’,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열심인 삶, 바로 그것을 즐기는 삶,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는가.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많은 수진들을 응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그런 것 따위가 무어있겠는가. 생활비 조달에도 빠듯한 월급날 단 한 번 배달앱을 켜 맛있는 것을 먹는 호사(?)는 부려도 괜찮다. 무책임한 소리라 나무라는 목소리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삶이라는 길에 정답이라거나 보편이나 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족한 것을. 바로 그 살아있음의 감정이 죽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에 삶이 삶 같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파란 수조 불 빛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둥근 해파리의 모습을 닮은 이 땅의 수진이들을 위한 유쾌 발랄한 생의 축가 같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읽게 만드는 이유리표 소설이다. 그래서 이 각양의 형태를 지닌 생의 슬픔이 한껏 기분좋게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nbsp;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달리는 무릎」에서  &nbsp;  「달리는 무릎」의 문장이다. 새벽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話者)가 늦은 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하얀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것이다. 요즘 내가 부쩍 좋아하는 묘사들이 귀여움인 것은 순수에 대한 향수인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도 귀여움이 발산하는 명랑함이 작품 전체의 정조(情調)를 에워싸고 있다. 아홉 바늘을 꿰맨 무릎에 반 깁스를 한 채 자고 났을 때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시스템의 결정으로 공동체에 덜 기여한다고 선택되어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존재의 이 낯선 목소리는 너 같은 사람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중력을 벗어날 추진력을 모아야 함을 말한다.   &nbsp;  그리고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그 어느 날의 우주 시스템의 생각이란 것”에 대해 비난하는 화자의 분개에 마침내 무릎 속 외계 존재 자신도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함을, 그래서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성취를 이루면 돌아와 알려주리라 약속한다. 인간 사회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를 나는 “자격증이든 시험이든 그놈의 적성이라는 것을 찾아서”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하기에 하루 두 시간의 달리기만을 통해 운동에너지의 흡수를 돕기로 한다. 이윽고 나의 무릎 속 외계 존재가 중력을 벗어날 운동에너지를 거의 모았을 때 그 마지막 흡수를 위한 도움의 달리기를 한다. “좀 더 빨리!”  &nbsp;  “그때였다. 무릎에서 푸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갔어요?”,  대답 없는 우주 존재와의 이별, 손차양을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스템이 옳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채 싸우기도 전에 져버릴 것을 오랫동안 걱정했지만” 그 외계 존재의 결심에 초를 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비참해질까봐 말하지 않았음을 떠올리는 화자의 고달픔이 경쾌한 언어로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nbsp;  <br>외계의 존재라는 이 환각, 혹은 환상의 존재는 화자인 ‘나’의 반영, 나의 소망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고된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홀로 뛰던 천변의 달리기는 어느덧 외롭지 않은 두 존재의 달리기로 공동의 목표를 위한 행위가 된다. 그리곤 이 이별이 비록 기약없는 이별이긴 하지만 언젠가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이겨 돌아올 기대를 가진 응원과 기대를 품은 이별이기에 슬픔의 그늘과 달리 밝게 빛난다. 처박힘에서 일어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에너지를 얻는 그 마지막 혼신의 질주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유리표 소설들의 이 밝은 에너지인 명랑함, 환한 빛을 비추는 이 발랄함의 정조가 세대를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웃음과 더불어 생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준다. 세 편 모두 이별이 있지만 그것은 상처로 머물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고, 사랑의 핑크빛 숨결처럼 더없이 포근한 생의 위로와 기쁨이 되어 우리들 방황하던 정신을 토닥인다. 이유리 전작주의(全作主義)자가 되리라.  &nbsp;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183/28/cover150/893742823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183287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칠논변(四七論辯): 성리학 두 거두의 의리(義理)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7788</link><pubDate>Wed, 20 May 2026 1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77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39319X&TPaperId=17287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coveroff/897139319x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39319X&TPaperId=172877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a><br/>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01월<br/></td></tr></table><br/>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두 사림(士林)간의 성리학 논쟁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論辯), 줄여서 ‘사칠논변(四七論辯)’ 또는 두 사람의 호를 따서 ‘퇴고(退高)논변’이라 일컫는, 본체(혹은 실재)인 ‘이(理)’와 현상인 ‘기(氣)’의 근본이 하나인가 둘인가를 두고 나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서신집이다.  &nbsp;  고봉 기대승은 이조 정랑, 승정원 좌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세(1572년)에 병사했다, 퇴계 이황 또한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사림의 거두로 70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26세,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차이이며, 고봉이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던 1558년 명종 13년에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오늘날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니 그 지위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처럼 연령과 그 지위가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퇴계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의 13년에 이르는 편지 일백여 통이 이 책이다. 이들 편지 글은 안부와 정사(政事)에서의 고충에 대한 서로의 위로와 조언,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바로 사칠논변(四七論辯)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구(論究)의 글이다.  &nbsp;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論爭)’이 보이는 이전투구(泥田鬪狗)의 싸움으로 인해, 두 대척하는 의견이 서로 상대의 주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말싸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조선조 붕당(朋黨)의 폐해를 아는 우리들은 이 논쟁을 정치적 세력간의 싸움을 대리한 표면적 학문 싸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리학이라는 조선조 독자적 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연구의 기틀이었음을 간과하기도 한다. 모두 그 논변의 내용과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나 또한 퇴계가 동인(東人)의 시조로 불리게 됨으로써, 특히 이 사단칠정 논변에서 비롯된 훗날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극한의 대립이 조선 후기 동인과 서인의 참혹한 정치적 파당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무모한 책임을 덮어씌우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사실 이 서신집을 읽기 전에 두 사람간의 연령과 지위의 차이로 인해 유교 질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미 기울어진 논쟁이 아닐까하는, 즉 한쪽의 고압적 자세와 겸허 또는 굴종의 자세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방적 논의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nbsp;  이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변론(四端七情分理氣辯)』에 대한 퇴계에게 보내는 반론의 글에 무릇 학자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찬 고봉의 지적 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저 물렁물렁한 논쟁이 아니구나! 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봉이 퇴계를 한낱 논쟁의 상대로만 여긴 것은 아닌데, 깍듯한 예의와 겸양의 언어, 선학(先學)을 대하는 낮은 배움의 자세와 진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공경(恭敬)이상의 덕목을 보여준다. 학문 연구자로서 고봉의 글은 날카롭고 준엄하지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겸손과 존경의 자세로 일관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 인간적 이해를 축적해 온 신뢰가 두터워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nbsp;  그 신뢰의 면목이 드러나는 글들이 있는데, “그대처럼 저와 ‘지극히 각별한 사이’에 있는 이조차 제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너그럽게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관직을 받들지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연구를 하고자하는 퇴계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정에 붙들어두려는 고봉에게 서운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고봉을 칭하는 표현도 급제 후에 관직을 받기 전의 고봉에게는 기선달로, 그 후로 최초의 관직을 받자 기정자로, 이후 정3품 관직에 오르자 영공(令公)으로, 잠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에는 고봉의 자(字)인 명언으로 부르며, 관직의 오름에 따른 칭호와 친근함이 더해진 자로 부를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nbsp;  그런데 또 한 번 고봉이 선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라며, 퇴계 자신을 추켜세워 임금께 아뢴 고봉을 강하게 힐난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다 그만두어 주면 편하겠다”는 절교의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단교의 표현은 친근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화의 표현일 것) 이런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기 어려운 것 아니겠냐며, 고봉의 섣부른 행동을 나무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밀착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nbsp;  위와 같은 해인 선조 원년, 1568년에는 퇴계가 고봉에게 “영공께 아룁니다”며, “병환이 어떤지, 근자에 소식이 막혀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우스개 이야기도 전하고, 부채, 서책과 약, 꿩고기 등을 보내 마음 속 정성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퇴계는 고봉의 정치적, 학문적 후견인이자 스승이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벗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자신의 부친 묘비 갈문을 부탁할 정도의 신망을 지닌 아들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논변은 당대 고관대작들은 물론 유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서신이었기에 이들의 편지는 여느 선비들의 것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것이었던 것 같다. 붕당정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해서 정국의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서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당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살엄음판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대와 지위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의 깊이를 통한 삶의 고귀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품격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nbsp;<br>사단칠정논변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그 발단은 이러하다. “사단은 이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 있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이 온당치 못하다는 고봉의 논박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性)과 정(情)에 대한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데,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성(性)이라 하고, 이미 발현 된 것을 정(情)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nbsp;  여기서 고봉은 성과 정이 다른 까닭에는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과 감정인 칠정(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樂). 애(愛), 오(惡), 욕(欲))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바깥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이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고 고쳐 쓰지만, 이 역시 사단과 칠정의 연원이 다르다는 분리의 전제를 하고 있기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논박한다. 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라고 구분을 하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고봉은 사단은 칠정과 다르지 않은 연원을 지닌 것으로 단지 발현되기 전의 성(性)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기는 그 연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퇴계는 이와 기는 다른 연원을 가진 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nbsp;  사실 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적 논구들, 이에따라 부속되는 철학적 논변들이 이들이 5년에 걸쳐 주고받는 논변들의 내용이다. 그 철학적 함의들을 논구하는 것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상대의 논변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그네들 학문의 자세에서 오늘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스승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후학은 학문적 겸허를 잃지 않으면서 선학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가운데, 그 날카로움은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움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그대가 찾아낸 서너 조항을 김이정이 전해주었습니다. (...) 비로소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라며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회하는 퇴계의 학문적 자세는 숭고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nbsp;  한편 고봉 역시 “기운을 드러내고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꺾어버린다”는 자신의 고질병과 공부의 소홀함에 대한 경계를 다짐하거나, “선생님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자세히 답해주시니, 제 평생 이보다 큰 은혜는 없었습니다.”라며 거듭하여 자신의 소견을 깨우쳐 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고봉의 사유에 귀 기울이는 편이어서 고봉 중심의 독해를 하였는데, 퇴계의 후학에 대한 성심의 인물됨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후일 동인(남인+북인)의 갈라치기, 그 분리의 원천이 되기에 붕당정치의 파멸성 이전에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사변은 오늘 다시 재고되고 심층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nbsp;  사실 퇴고(退,高)논변은 조선 중기까지의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간의 논구라는, 다시 말해 같은 왕권수호 세력의 일원이었기에 반목이 심하게 충돌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이 파기되고 객체지향의 존재론이라는 일원론적 모색으로 전환되는 오늘에 고봉의 일원론적 접근은 다시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유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조선조 성리학 두 거두의 인간적 우애와 학문적 교감의 성숙된 면모를 읽어 볼 기회가 되었음은 내겐 예기치 못한 감응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자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에 선악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형체라는 보이는 것의 간섭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실체에 대해 구별하려는 인간의 습관인 것 아니겠는가. 고봉 사후 82년이 지난 1654년 효종이 고봉을 기리기 위해 월봉 서원을 내렸는가 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cover150/897139319x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4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우리’라고 부르기 위한 피와 뼈의 목소리 - [우리 세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1731</link><pubDate>Sun, 17 May 2026 13: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17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8606&TPaperId=172817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5/47/coveroff/k71213860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8606&TPaperId=172817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 세희</a><br/>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5월<br/></td></tr></table><br/>부패한 윤리의식 갱신을 위해,&nbsp; ‘우리’&nbsp;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  &nbsp;    &nbsp;<br>  “그들이 내게 들려 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숨이 멎는 날까지&nbsp;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nbsp;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nbsp;&nbsp;-116쪽  &nbsp;  “‘우리’ 세희, 함께 기억하기 위하여”라는 조해진 작가의 말에 담긴 지향(指向)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깊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우리’라고 말하여야 하고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타인이 껴안아야만 했던 고통의 내밀함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몸에 새겨지듯 치밀어 들어오는 관계성에 대한 배움과 적극적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일 게다.   &nbsp;  한글 이름 세희는 화자인 미술평론가 남연주의 엄마,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의 무국적자를 가리킨다.  일본명 미나가와 히로코, 어머니 아버지를 오마니, 아바이로 부르며,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졸업 후 취업한 일본 회사에 협력 업체로 드나들던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거주하게 된 연주의 엄마다.  &nbsp;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신작”을 발표하는 제이비 류라는 설치미술작가의 작품전과 작가 인터뷰기획을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영국 런던에서의 사흘에 걸쳐 마주하게 된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현실과 기억의 기록이다. 도착한 첫날 런던의 밤 거리에서 두 백인 남성이 연주를 향해 “니하오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칭챙총 칭챙총...”, 아시아인을 향한 이 명백한 조롱, 차가운 돌덩어리 같은 모멸의 감정이 스스로를 향한 분노로 치밀어든다. 그녀의&nbsp;기억은 쪽바리, 매국노라며 저들끼리 웃어대며 슬픈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nbsp;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되어 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엄마 세희는 자이니치로 분류되어 사실상의 무국적자이었으니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에도 한국의 이웃들은 끝없이 악의적 뒷담화로 조롱하고 멸시했음을. “아무 잘못이 없어도 내력이 죄가 되고 죄로 수렴되는” 한국에서의 삶, 엄마 세희를 향한 이 시선들은 국가의 무능과 잘못을 어느 순간인가부터 피해자인 개인을 향해 마치 개인의 허물인 듯 바라보도록 한 권력의 오랜 세뇌였을 것이다.  &nbsp;  엄마 세희의 아바이, 연주의 외할아버지 박태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부로 “북한을 저버리고 일본에 귀화하는 자이니치들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딸 세희를 검정색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 민족학교를 고집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뚜렷한 복식이 그네들에게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하는 데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다. 무관심으로 가장된 경멸, 어린 소녀에게 그 시선과 무례에 대한 반항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움과 서글픔이 섞인 혼탁한 외로움”은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무게가 되었을 것이다.   &nbsp;  여섯 살 위 스물두 살의 오빠는 고집스런 아바이에게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자신이 졸업하면 북송사업에 지원하겠으니 세희에겐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는 설득으로 고등학교부터는 일반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나가와 히로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만 자이니치는 그저 조센진일 뿐,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무조건 오세희가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는 차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 그 기억이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자신의 모멸과 겹쳐 흐른다.  &nbsp;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찾던 북촌에서의 남녀 두 어른과의 만남, 서정우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기쿠치 사치에 센세는 엄마 세희와 어느 곳에서도 이방인이어야 하는 서로의 삶을 위무하는 그런 관계 맺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나 자이니치에게는 공무원도 기업 취업의 문도 봉쇄되어 빠칭코 매장의 매니저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선생님과 엄마 세희의 만남의 사연,  자이니치를 위한 시위에선 늘 맨 앞에서 구호를 외쳤던 전사나 다름없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떠올린다. 이처럼 연주는 “엄마의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가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nbsp;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암 투병 중 마지막 말처럼 연주에게 남긴 말, “우리 오마니와 아바이, 그리고 오빠를.... 잊지 말아줄래?” “잊지 않아...” 아바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송선을 타고 이북으로 간 오빠의 죽음에 대한 부모에 대한 원망, 자신을 위한 오빠의 희생이라는 죄책감과 더불어 결혼 이후 자기 부모와 단절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오사카 이쿠노구 골목에 있는 첫 외갓집 방문에서의 다감한 외조부모의 따뜻한 정감을 떠올린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치매로 요양원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의 방문에서 연주 자신을 발견하고 세희야, 라고 부르는 외할머니, 오세희를 연기하는 연주가 그 연기가 어렵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이미 연주가 오세희를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nbsp;  <br>해방 이후 왜 일본에 있던 한반도의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국적 없는 이들의 필요서류 작성 불가, 받지 못한 노임으로 무일푼으로 당장 살아가기조차 곤궁한 이들의 처지, 설혹 밀항으로 고향을 찾아 떠났지만 일경(日警)을 승계한 한국 경찰의 무조건의 사상범 취급과 갖은 고문 끝에 길거리에 내버려져 다시 남루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이어진다. 제이비 류, 한국의 성씨인 류가 드러나는 인물과의 인터뷰는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 속 할아버지 류성철의 이야기로,  해방 후 돌아간 고향 제주를 지배하던 광기어린 살의, 이승만 독재정권이 도민 모두를 심판과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던 시대를 들려준다.   &nbsp;  사랑하던 연인이 해안가 절벽에 무참하게 뭉개져 매달린 시신으로 발견된 사연, 그녀의 시신을 몰래 매장했다는 사유만으로 숨어 지내야 했으며, 그를 숨겨준 사촌이 살해되고, 돌아간 집에는 이미 끌려가 처형된 부모의 소식만이 고통스럽게 나뒹군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 어떤 다름도 수용할 수 없이 극단적인 전체주의의 독단성을 띰으로써 살아갈 수 없는 지대였음의 한 조각의 기억이다. 일본계 영국인 제이비 류의 가계는 그렇게 우리와 무관한 듯 보이던 사람에게서 우리들이 지워버리고 방치한 역사 속의 관계를 드러낸다.  &nbsp;  엄마 세희가 단절했던 외조부모를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엄마는 연주에게 말한다. “외삼촌의 죽음에 부모의 오판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고.”,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딸 연주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르는 상태로 자라게 함으로써 그분들의 사랑을 받을 기회까지 빼앗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멘네(ごめんね, 미안하다)라고. 낯선 일본 땅, 그치지 않는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이 묶인 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국가 공동체와 역사가 떠안아야 할 책임의 문제임을 증언한다.   &nbsp;  연주, 그녀를 부르는 선생님, 센세, 외할머니의 욘짱은 그렇게 "알지 못하던 이국의 그들이 자신의 뿌리이자 가족이었음을, 아니, 바로 그녀 자신이었음을" 몸에 그려 넣는다. 한 덩어리 배신감만을 안기던 조국은 그들을 내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음을, 이 작품은 우리 공동체가 너무 쉽사리 타자로 치부하는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바로 ‘나’임을, 그래서 그들의 기억이 바로 우리 몸의 기억임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것일 게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공감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가능치 않게 하는 그런 불온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이 어찌 개인이 떠안아야 할 시선이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nbsp;  그 이야기들이 내 몸 안에 새겨져 있으며,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연주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자이니치(在日) 뒤에 동포, 교포를 붙이는 건 민족개념으로 제한된 배제의 표현이고, 이어 한국인을 붙여 쓰면 고국 분단 이전의 북한 출신을 제외하는 표현이기에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올바른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무심한 시선과 행동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는가, 결코 우리들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 흔적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nbsp;  역사적 고통의 재현은 제아무리 완전을 지향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에 대한 우리네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제주 4.3의 가공할 잔악한 폭력, 자이니치가 겪는 이중의 차별에 놓인 또 다른 폭력의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모두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들은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하나의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우리들 윤리의식을 갱신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감히 ‘우리’라고 말 할 수 있기 위해, 아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5/47/cover150/k71213860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95471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초한전쟁, 인간본성의 거대한 실험실 - [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77962</link><pubDate>Fri, 15 May 2026 1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77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7459&TPaperId=172779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2/18/coveroff/k76213745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7459&TPaperId=17277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a><br/>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05월<br/></td></tr></table><br/>인간 내면에 꿈틀대는 야수적 정신(animal sprit)이 표출되는 실체의 현장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것이 설령 반복되는 읽기여도 내 영혼은 그 적나라한 광경들에서 예기치 않은 삶의 지혜라는 수확을 건져 올리게 된다. 초한(楚漢)쟁투,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이 발산하는 그 동물성과 그것의 미묘한 절제와 절충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빛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한 걸음의 이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지대를 열어 보여준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변주된 이야기들인 『초한지』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이 책 『초한지 인생 공부』는 그 이야기들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nbsp;  ‘인생 공부’라고 하지만 지은이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 책은  2,200년 전 초,한(楚漢)이라는 시대적 무대를 “거대한 전장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충돌하는 ‘심리의 실험실’”로써, “인간학의 문법과 존재의 교과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 같다. 인간 욕망과 권력의 미묘한 충돌, 혼란과 안정기의 두 다른 체제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들, 리더의 태도와 자질이 빚어내는 인과의 상황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무수한 갈림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nbsp;  ‘초한지’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토대로 하여 초한충돌 시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각색한 이야기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중원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사기(史記)』의 역사를 재구성,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대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반하고, 문학적 장면 묘사는 『서한연의(西漢演義)』를 인용”하여 저자가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생존과 존엄, 권력과 사랑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들의 내면 심리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nbsp;  이미 이 시대의 역사와 영웅들에 대한 내용은 사마천의 《史記本紀》와 《史記世家》 《史記列傳》을 통해, 그리고 장편소설로 재구성된 『서한연의(西漢演義)』의 무수한 아류본(亞流本)들인 ‘초한지’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더구나 장국영, 공리가 열연한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로 익숙한 것이다. 또한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背水陣), 성동격서(聲東擊西), 사면초가(四面楚歌), 역발산기개세(力拔山氣蓋世), 토사구팽(兔死狗烹)과 같이 비근하게 우리들 일상에서 사용되는 이들 성어(成語)들로도 전투(심리)전략, 인간 본성, 정치 책략 등 배후의 의미를 알고 있다.   &nbsp;  그럼에도 인간학(人間學)이라 불릴만한 하나의 집적된 관점으로 이들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면모를 통찰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오늘의 언어로 수려하게 한 시대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 책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아무렴 바로 우리들이 실제로 이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의 다채로운 형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어린 시절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협소할 때 읽었던 『사기(史記)』 속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그저 서사적 흐름이 주는 이야기의 재미와 흔한 교훈들을 주워 삼키는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제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제법 싸인 지금, 진(秦)의 수도 함양을 복속시키고 난 후 승리의 축연 자리인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우와 유방, 그네들의 책사 범증과 장량의 언행이 역사 행방에 얼마나 중대한 전환적 사건이었는지를 새삼스레 곰곰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과연 내가 항우였다면, 유방이었다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하고 상상의 자리에 참석해보기도 한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항우의 미적거림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유방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죽음의 장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우위의 힘을 가진 항우 앞에서 나는 어떻게 닥친 위기를 넘겼을까?   &nbsp;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 (불자,약속개차위소로, 不者,若屬皆且爲所盧)” 라는 책사 범증의 말을 항우가 아닌 나라면 어떻게 수용했을까? 이 말은 훗날 항우를 포위한 역전된 상황에서 홍구화약(鴻溝和約)으로 일시적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다 잡은 항우의 숨통을 트여주려 할 때 ‘양호자유환(養虎自遺患)’,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근을 만드는 것이라는 유방 책사의 말로 변주되어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네가 빈번하게 망각하는 자성(自省)과 경청의&nbsp;중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본질은 말하는 힘이 아니라 듣는 힘”이라는 것, 즉 리더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보이는 행보를 보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일방적 말만 쏟아내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 절대 우위 의식이라는 오만은 항상 실패를 몰고 온다. 폐쇄된 소통과 열린 소통, 이보다 보편적 진실의 감각이 어디 있겠는가.  &nbsp;  진을 복속시킴으로써 천하를 쥔 항우가 “측근을 챙기고 잠재적 적들을 고립시키는 사실상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 함으로써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중원으로 나오기 힘든 파촉(巴蜀)지역 한중(漢中) 땅을 다스리는 한왕(漢王)으로 밀려나는 유방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책사 장량의 권유에 따라 지나온 잔도(棧道)를 불태워 오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 속 정치적, 전략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도 쏠쏠한 흥미로움이다. 홍문연에서의 항우의 행위에서 드러나듯 그는 타인의 조언을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자기애적 인물이다. 그 심리를 꿰뚫은 유방의 책사 진평의 이간계(離間戒)는 사마천이 “성인의 경지에 오른 지략가”로 평가한 책사 범증과 항우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한다. “귀가 닫힌 자는 곧 눈도 먼다.”는 이 평범한 진실이 사실로 입증되는 현장이다.  &nbsp;  절대적 힘의 우위에 대한 환상,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여 상황 변화의 유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된 소통으로 고립되어 자만에 빠지는 실상들은 우리네의 일상 환경에서 즐비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동네 건달이었던 유방이 대귀족 금수저 출신의 항우를 몰락시키는 것은 그네들의 출신성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에 대한 태도, 상황에 대한 전체적 인식의 여부, 즉 겸허와 오만,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차이가 갈라놓는다.   &nbsp;  하급 창고관리 병사에 머물던 한신의 출중한 전략술을 감지한 유방의 탁월한 행정책임자인 재상 소하의 수차례에 걸친 천거에 유방은 그를 대장으로 임명한다. 이때 한신의 확신에 찬 비전과 항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의 언급이 그 까닭이 될 것이다. “항우가 준 땅이 아니라 백성이 주는 땅을 차지하십시오. 그러면 천하는 대왕의 것이 됩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하며 했다는 말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생 한중의 왕으로 남으려 하신다면 한신이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사기열전》〈회음후열전〉  &nbsp;  유방은 한신에게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중 땅의 정벌을 명한다. 여기서 한신은 그 유명한 동쪽에서 소리 내어 주의를 끌고 서쪽을 격퇴한다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함정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으로 변모시켜 가짜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기동의 전략적 의미를 보여준다. 잔도 수리에 적의 시선을 모아 놓고는 험난한 우회로를 통해 관중의 중심인 진창(陳倉)을 기습 점령하고 연이어 삼진을 평정해버린다. 유방이 얼마나 신이 났을까. 연이은 승리의 동력으로 유방은 한신과 함께 제나라 반란에 출정하여 빈집이 된 항우의 초나라 수도 팽성을 공격, 무혈 입성하기까지 한다. 손쉽게 얻은 승리(성취),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임을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신중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던 유방이 순간적으로 승리에 도취하여 절제력을 상실하고 상황을 방기하고 만다.  &nbsp;  <br>팽성 대전, 훗날 항우가 자결하는 초한(楚,漢)의 마지막 전쟁인 해하전투만큼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의 56만 대군에게는 급하게 비보를 전해 듣고 달려오는 항우의 정예기병 3만은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항우가 초패왕(楚覇王)이라는 천하의 군웅으로 이름을 얻게 된 거록전투에서 보인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부수고 막사는 불태우고, 식량은 사흘치만 남긴 채 돌아갈 길은 앞길만 있다고 적에게 쇄도하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결단은 실로 가공할 만한 심리 전술이라 할 수 있다. 〈항우본기〉에 사마천은 팽성대전의 참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한(漢)나라 죽은 병사가 10만, 초(楚)나라 군대가 영벽 동쪽 수수(睡水)까지 추격했다. 10만이 모두 수수로 빠지니 수수의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게 했던 참혹함의 이 생생한 증언만큼이나 성공의 도취가 부르는 참사에 대한 경계의 교훈은 없을 것이다.  &nbsp;  팽성의 참사와 동일한 유방의 실기로 형양 공방전이 있는데, 팽성의 참패는 유방 연합군의 와해 움직임을 초래한다. 위나라 위표가 배신한 것인데, 이것은 유방의 미래전략에 대한 큰 상처가 되었을 게다. 이를 급히 봉쇄하지 않으면 연합군의 연쇄적 이탈을 초래할 시발이 될 것이기에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하며 위표를 칠 것을 명한다. 한신은 여기서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술책을 감행한다. 위표의 주의력을 황하(黃河)나루에 집중시키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은밀히 상류로 이동, 뗏목을 타고 위의 수도 안읍을 기습, 위표를 생포함으로써 관중과 형양을 잇는 북방 제후국을 격파하는 교두보의 확보와 아울러 연합세력의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적이 성동격서의 잘 알려진 교훈을 왜 망각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반복된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 바로 교만이다. 수적, 지리적 우위에 대한 자만이 이 뻔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우매함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nbsp;  유방은 여기서도 반복된 실수를 하는데 형양성 함락의 승리로 다시금 도취되어 방어를 소홀히 한다. 형양은 항우의 초군에게 틈도 없이 완벽하게 포위되어 탈주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신이라는 충신의 자신이 유방 대신 죽겠다며 변장을 통한 탈출 양동작전으로 구사일생 형양 포위 망에서 벗어난다. 사마천은 기신의 행위를  《사기열전》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충신이어서? 제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인물을 알아본 예지력 때문에?, 생명의 희생이 전달하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위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nbsp;  초한 전쟁의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한신임을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데, 분노를 복수로 쓸지, 삶의 미래 설계를 위한 동력으로 쓸지 인간 존재의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던 냉정의 미학을 실천한 차가운 이성의 두뇌를 가진 인물이 왜 결정적 순간 자기 삶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못했는가에 곤혹감마저 들게 하는 장수이기 때문이다. 내 단순한 결론은 유방이나 항우와 같은 동물적 영혼을 그는 수없이 압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야수적 욕망의 표출 말이다. 한신의 내면, 특히 “감정을 규율로 구조화한 인물”이라는 저자의 평가는 참신하고 탁월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감정의 파도를 지적 구조로 재조립하여 이성의 설계도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인물임에도 공이 커질수록 증가하는 권력자의 의심 속에서 장수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방법을 냉정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더 그에게 동물적 감각이라는 야수적 충동의 표출 능력이 없었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br> 한신은 많은 성어(成語)와 관련된 주인공이다. 이미 언급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은 물론 배수진(背水陣), 토사구팽(兔死狗烹), 또 하나의 역사적 전투인 조나라 정벌에서 벌인 정형(井陘)전투에서의 전략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다. 사실 항우가 앞서 보인 파부침주(破釜沈舟)와 유사한 전술이다. 당대 전술에는 금기인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전쟁의 전(戰)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방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장 자체를 하나의 무대로 계산한 치밀한 전략의 결과라는 점이다. 패배할 줄 모르는 전쟁의 신, 한신은 조나라의 격파에 이어 연과 초와 국경을 맞닿은 제나라까지 복속시키고는 유방에게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임시왕 봉책의 사건은 한신의 소심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 요청의 서신을 받은 유방의 불쾌함에서는 공적에 대한 인색함, 언제 적으로 둔갑할 줄 모르는 증대하는 힘에 대한 의심을 보게 된다.  &nbsp;  가장 주목해서 골똘히 생각하며 읽게 된 장면은 이로 인한 한신이 겪는 갈등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책사 괴통(蒯通)과의 대화이다.“충성으로만 스스로를 지키려 하면 훗날 의심이 덮칠 때 구원할 논리와 힘이 없게 됩니다. (...) 제나라 땅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곳의 풍부한 경제기반과 병참의 지속성은 대왕을 지탱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역을 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안전 설계입니다. 한(漢)왕은 겉으로 기뻐하나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고 있습니다.”  &nbsp;  전승의 결과로 높아진 명성이 최고 권력자에게 곧 죄로 비칠 수 있음의 지적이고, 현실권력의 의심 앞에서 스스로 지킬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없다면 곧 죽음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괴통의 진언은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초(楚)와 한(漢)과 제(齊)의 삼분지계(酸三分之堺)를 형성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신은 자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수동적 무능성에 좌초되고 만다.&nbsp;오 애재(哀哉)라,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인간사 만고의 진리인 것을!  &nbsp;  이것은 한(漢)의 제국통일, 즉 적이 사라진 제도화된 국가의 정비 안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대들은 모두 토끼를 잡는 사냥개와 같소, 소하는 그 사냥개들에게 토끼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사람일 뿐이오.” 라는 유방의 말처럼 모든 공은 한순간에 사냥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유방의 행정 책임자인 소하의 말처럼 “왕의 신뢰는 언제나 경계와 함께 오는 것이며, 충성은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이 깨달음의 음성은 어떤 조직이던 그 수장과 수뇌부와의 관계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인간학의 보편 법칙일지도 모른다.   &nbsp;  “권력의 절정은 언제나 낭떠러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권력자의 의심을 처리하는 태도와 방책들의 모범이랄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지혜가 되어 줄 터이다. 소하와 실행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형식과 체면보다 생존과 실리를 중시하는 책략가 진평의 “권력자의 의심을 흡수하는 피뢰침” 같은 태도는 꽤 호감을 자아낸다.   &nbsp;  “승상,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과연 평안하겠는가?폐하의 마음이 평안하시면 나라 또한 평안해집니다.  &nbsp;  모두가 좋다 하는데, 승상만 말이 없구나.모두가 좋다 하면 그 안에 분명히 허점이 있을 것이옵니다.  &nbsp;  승상은 참 이상하오, 내 마음을 읽는 듯하오.폐하의 뜻이 곧 천하의 뜻 이옵니다.“  《사기세가》 〈진승상세가〉  &nbsp;  왕과 승상 진평의 이 대화 장면은 왕이 자신을 통제한다고 느끼게 하면서 실제로는 왕의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자의 가히 우아하기까지 한 조용한 통치의 예술을 보여준다. 침묵과 순응 속에서 왕이 폭주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제동장치로서 역할, 칭송도, 간언도, 조언도 없지만 미묘하게 안심되는 진평의 대답에는 언어의 온도를 낮추어 안정의 언어로 돌려주는 신묘함이 있다. 충성과 처세의 경계선, 권력의 미세한 줄 위를 걸었던 회색지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생존기술과 불안한 제국을 다스렸던 인물들을 이렇게 읽다보면 마치 세계의 한 지대를 달관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nbsp;  조직의 리더로서, 권력자로서, 때로는 권력의 전략가로서, 인간사의 한 지평으로서, 어떠한 태도가 우리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척도들의 집약된 한 편의 탁월한 실험 사례라 해도 될 것 같다. 그래, 인간 본성,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왔을 때의 상황은 이미 많이 변한 것이다. 그 상태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태도와 기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당위를 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상황의 인식, 듣는 귀에 대해서, 언어의 온도에 대해서, 그 균형 감각을 되새기는 아무쪼록 의미 있는 독서가 되어 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2/18/cover150/k76213745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22185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요재지이(聊齋志異)』,공짜 커피 마실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link><pubDate>Sun, 10 May 2026 16: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772430765&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362634460&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05/23/coveroff/d36263446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99965X&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84/coveroff/898699965x_1.gif"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11768&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coveroff/8937411768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8061207&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5/coveroff/8908061207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명(明),청(靑)시대를 살았던 문사(文士) 포송령(蒲松齡,1640-1715)이란 인물에 대한 호감이 읽어나갈수록 크게 자라난 책이다. 천재로 불렸으나 일평생 계속된 과거 응시의 낙방에서 오는 시름을 덜어내고 “혼자 술잔을 기울여가며 붓끝을 놀려” 세상에 분개하고 부조리한 풍속의 해악을 써내려가는 이 고분지서(孤憤之書)는 그가 마음을 기댈 유일한 것이었을 게다. 이 작고 아담한 책은 주워들은 민담, 자신의 경험담을 합쳐 죽기 직전까지 수십 년간 모은 포송령이라는 인생 자체이기도 한 일생의 자취인 대표작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아주 작은 분량인 열편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발췌 선집이다.  &nbsp;  【1776년 출간,『요재지이(聊齋志異)』판본】<br>요재(聊齋)는 포송령이 사용한 서재의 이름이자 호(號)이기도하니, 요재에서 또는 요재가 기록했음을 뜻하고, 지이(志異)란 기이한 일이라는 뜻으로 책의 성격을 의미한다. 즉 요재지이(聊齋志異)란 ‘요재에서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책의 표제인 『천녀유혼』은 동명의 다소 변형된 내용의 영화로도 알려진 원제 ‘섭소천(聶小倩)’의 번안 제목이다. 소천이라는 예쁜 처녀의 소곤거림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책의 서문 격으로 「포송령 자서」가 실려 있는데, 왜 그가 이렇게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써내려가야만 했는지, 신선과 귀신들의 이야기의 흥취에 몰입했는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변명을 마주하게 된다.  &nbsp;  “서리에 놀란 겨울 참새는 나뭇가지를 껴안아 보지만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고. (...) 고적한 나는 난간에 기대어 감상한다. 진정 나를 알아줄 이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신들뿐이런가?”   &nbsp;  환상의 세계에서나 자신의 기개를 마음껏 뽐낼 수 있음에 삶을 지탱해낼 수 있었을 고독한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있는 「동전 점」의 주인공 하상이라는 인물은 주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거듭 실패하고야마는 인물인데, 아버지, 즉 ‘껍질 버리는 태위 나리’라는 낭비벽과 방탕한 조상의 악행으로 후손인 그가 그 악업의 화가 종결되는 쉰여덟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으로 바뀐다는 점(占)의 이야기다.  욕심없이 분수를 지켜내어 마침내 한평생 나쁜 짓하고는 인연이 없었으나 내세의 복이 무궁무진 할 거라는 인물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빈낙도의 삶이 포송령의 삶과 닮아 있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nbsp;  이처럼 작가의 삶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로 「신선 세계에 다녀 온 동안」의 주인공 역시 재주가 당대 제일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시험만 보면 낙방하는 불운한 서생 가봉치가 있는데, 내적 훌륭함의 미덕과 부귀영화와 공명이라는 두 갈래 삶의 길을 경험하며 마침내 “부귀영화의 장이란 한갓 고통이나 따른 지옥 땅에 불과한 것을 알겠소.”라며, 세상사 공명이란 것의 휘장 뒤에 있는 인간세태의 더러움을 은연히 비판하기도 한다. 각 이야기들의 끝에는  “이사씨(異史氏曰)는 말한다”며, 포송령 자신의 의견, 즉 이야기가 지닌 교훈이나 비판적 의지를 펼치곤 하는데, 이 이야기의 끝에는 “가난이 인간에 미치는 해악이 실로 적지 않다”며, 물질적 삶의 해악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4남1녀의 가장이었던 포송령으로서는 이렇다 할 직위나 부를 쌓지 못한 처지고보니 이러한 가상의 이야기로나마 자신의 불운을 다독일 수 있었을 것만 같다.  &nbsp;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태를 전도시켜 자신이 이루지 못하거나 저지당했던 고통의 실체를 뛰어넘어보는 즐거움은 그의 말처럼 마음 기댈 유일한 흥취였을 것이다. 「저승도 무전 유죄?!」는 층층이 사슬처럼 이어져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관료조직의 부패상을 고발하는데, 저승 서열의 최상층인 옥황상제의 감찰에 의해 염라대왕부터 저 말단 옥사장, 그 졸개들로 이어지는 탐욕상에 대한 판결문은 오늘 한국사회의 관료조직 도처에 스며있는 더러움의 일목요연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만 같다. “가난한 귀신이야 더욱 안중에도 없었겠지. 죄 지은자의 죄를 죄 없는 자에게 덮어 씌워 조작하는 짓거리”에서부터 “원숭이처럼 교활한 간계나 부리는 자를 제멋대로 발호하도록 내버려두고 오로지 뇌물이나 받아먹고 국법을 어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니 진정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구나!”에 이르는 탐욕의 사슬은 인간사회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4백 년 전 청나라의 사법관리나 21세기 한국사회의 법(法)과 검찰(檢察)관리들의 행태가 복사한 듯 동일한 양상을 보이니 말이다.  &nbsp;  【민음북클럽 에디션】<br>「비둘기 애호가」라는 장유령이라는 공자의 이야기는 무지하고 옹렬한 인간들에게 제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인들 고작 자신들의 입속에 처넣는 맛밖에 알지 못하거나, 허튼 예의로 가장된 볼품없는 무식함뿐임을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지극한 정성을 들여 비둘기를 돌보는 장공자는 자기 살을 베는 듯 아까운 희귀종 두 마리를 아버지 친구인 고관대작에게 선물한다. 후일 장공자가 그 고관을 만나 “저번에 보내드린 비둘기가 마음에 드셨는지요?”라고 묻는다. 그 고관대작 왈, “응, 살이 통통하게 쪄서 맛이 괜찮던 걸”, “삶아 잡수셨단 말입니까? 그건 세간에서 말하는 ‘단달’이란 희귀한 새에요.”, “맛은 그다지 대단치 않던데.” 이를 말하는 사자성어가 있다. “섭공호룡(葉公好龍)”,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 실제 그 내용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부하지 않는, 고작 한 때 시험의 결과로 평생을 놀며 호가호위하는 것들의 무지가 이 사회를 얼마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가. 아무튼 이 무지라는 병은 인간세계의 가장 더러운 악이리라.<br> 표제작 「천녀유혼」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한평생 아내 말고는 다른 여자는 없다”를 신조로 살아가는 품행이 단정하며 자중하는 영채신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과거시험으로 인해 방 값이 급등하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찾아 든 곳이 주인 없는 절간이다. 영생은 먼저 머물고 있던 연적하라는 서생을 만나자 그곳에 거처할 것을 결심하고 머물기로 한다. 마침내 잠을 청하는데 미모의 여인이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 “달빛이 너무 좋아 잠을 이루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네요.” 햐~아, 영생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꾸짖는다. “한 번의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싶은 거요?” 여자는 황금덩어리를 그의 이부자리에 놓으며 다시 한 번 유혹한다. “의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려 들다니!”, 그렇게 요괴의 시험에 빠지지 않아 죽지 않는다. 정말 대단한 성인(聖人) 납시셨다. 물론 죽음을 피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영생은 군자 소리를 들을 만하다.   &nbsp;  다음날 아침 동쪽 승방에 묵었던 서생이 한 밤중에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다음 날 밤 여자는 다시 찾아들어 영생에게 자신이 유혼이 되어 떠도는 사연을 말하고 버려져 묻힌 곳에서 뼈를 거둬 조용한 곳에 묻어준다면 그 은혜는 새 생명을 주는 거와 다름없음을 하소연한다. 영생은 집으로 돌아와 거둔 뼈를 정성들여 묻어준다. 이 유혼(幽魂)의 이름이 ‘소천(小倩)’이다. 소천이 영생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며 영생의 노모를 섬길 것을 제안한다. 그 후로 이야기는 일사천리다. 영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소천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 둘을 낳고 해로했다는 포송령이 꿈꾸는 미인과 함께하는 삶, 공명을 누리는 삶, 정겨운 가정생활은 이렇게 상상에서 화려하게 자라나 그의 마음을 풍성한 꽃밭으로 만들어주었을 게다. 포송령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 상상의 세계들은 현실의 가치관, 시선들이 전도(顚倒)되어 그려지곤 한다. 「못 생길수록 출세하는 나라」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랄 수 있겠다.   &nbsp;  이는 그가 “오호라, 출세와 부귀영화는 *신루해시(蜃樓海市)로나 가서 찾아야 할까보다!”라고 말하듯, 그를 거부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냉엄한 비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환상의 세계를 거니는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시원적 소망의 심연들을 건드린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그 누구들처럼 그리 밉지 않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아마 그 까닭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소박한 진심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이 고립된 오늘의 세계에서 포송령의 이야기들은 우리들 얼어붙은 삶의 추위를 녹여내 준다.  &nbsp;  이 환상의 이야기들은 무언가를 분석하고 증명하려들지 않는다. 권태롭고 얼어붙은 삶을 녹이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삶이라는 심지를 은은히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학적 음화(陰畵)라는 벤야민의 이야기에 대한 정의가 바로 포송령이 모은 이 이야기들일 것만 같다. 부쩍 이런 정말의 이야기들이 그리워지는 즈음이다. 전도된, 세계의 음화같은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말이다. 지금은 품절되어 요재지이 전권을 구입할 수가 없다. 한 질 전체를 옆에 두고 쉬엄쉬엄 읽고 싶은 책이다. 돈 대신 맞바꿀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요재지이』에서 한 편 마음에 담아 들려주면 아마 들은 이들의 표정에 피어나는 평온한 미소와 함께 공짜 커피를 내 줄런지.  &nbsp;  --------------------------------*신루해시: 교룡이 숨을 내쉬면 누각이 만들어지듯, 빛의 반사작용으로 인해 바다나 사막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환상의 세계’를 뜻함.<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cover150/893741171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19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몰 플랜더스, 여성의 운명과 사회구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link><pubDate>Sat, 02 May 2026 16: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53260738&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9/5/coveroff/18532607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82635020&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77/27/coveroff/e58263502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953001&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578/89/coveroff/896195300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40411&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973/7/coveroff/893004041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5026&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245/11/coveroff/8932405026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몰 플랜더스, 질서 탈주 인물인가, 체제 순응 인물인가?  &nbsp;시대의 걸작이자 삶의 방식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비평적 논의의 대상으로 꾸준히 회자되는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1722년》가 종이책으로 국역 출간되었다는 데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열렬하게 환영한다. 이 걸출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60-1731)의 작품은 초기 자본주의의 물질화의 욕망이 거세게 세상을 지배할 때, 그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여전히 협소하여 삶의 주체자로 설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을 때, 그러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욕망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nbsp;   <br>디포의 잘 알려진 《로빈슨 크루소 (The life and adventure of Robinson Crusoe),1719년》를 넘어서는 1722년 발표된 대표작이다.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1인칭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주인공 몰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도덕, 경제, 여성의 생존 조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몰은 감옥에서 태어나 숙녀가 되기를 꿈꾸며 성장하지만 그녀의 삶은 일관된 도덕적 성장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기 선택과 자기 합리화의 반복으로 전개된다.  &nbsp;  다섯 번의 결혼, 이 결혼들은 사랑에 있지 않고 오직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상승을 향한 전략의 일환이고, 자신의 형제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결혼은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불안정한 사회적 신분 구조와 정보의 결핍이 낳은 비극으로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재산을 잃은 후 본격적으로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 도둑으로 살아간다. 깜쪽 같은 변장과 뛰어난 기지로 수많은 절도를 저지르지만 이를 죄라고 여기기보다는 필요한 생존 기술로 정당화한다. 그녀는 이러한 반도덕적 행위에 대해 내면적 갈등보다는 계산적이고 실용적 태도를 보이면서 당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가치가 어떻게 물리적 기준으로 환원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nbsp;  주인공 몰이 생존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성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I saw world was so taken up with self...(세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처럼 자기 살기 바쁘다는 인식, 즉 도덕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배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합리화와 죄 의식의 공존,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은 “I had no remorse about me...(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Get money. honestly if you can...(가능하면 정직하게 돈을 벌되”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 돈이 중요하다는 냉혹한 가치관을 도처에서 보여준다.  &nbsp;  결국 몰은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고, 이 시점에서 그녀는 회개의 태도를 보이며 소설은 구원의 서사로 전환된다. 식민지로 이송되었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디포의 체제 수호적 의지가 반영된 인위적 결말로 작품의 아쉬운 흠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몰의 회개가 진정한 도덕적 각성인지 아니면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랄 수 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몰이라는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물음을 가능케 하는 특출한 모델을 설립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학적 업적이랄 수 있다.  &nbsp;   몰 플랜더스는 《테스》나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와 비교되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읽는다면 몰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해독하는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몰과 테스는 여성의 운명이 사회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테스는 가난과 계급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도덕적 낙인이 따라다닌다. 테스는 몰과 달리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몰이 생존형 현실주의자라면 테스는 사회적 희생양에 가깝다. 한편 마담 보바리는 물질적 욕망과 환상을 좇는다는 측면에서 몰과 유사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낭만적 환상을 좇다가 파멸하고 만다. 그러나 몰은 현실적 계산이 뛰어나다. 엠마의 감정적 욕망과 몰의 실용적 욕망을 대비하며 읽어나가면 결국 두 인물 모두 사회가 만든 욕망에 갇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제인 에어는 여성 독립의 문제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몰과 동일하지만 둘은 도덕적으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반례로서 사회적 조건이 인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사유케 한다. 몰은 이러한 비교대상의 여성 인물 중에서도 특출한 역사적 모델이다.  <br>이러한 비교 독서를 이 작품은 자연스레 이끄는데, 그만큼 몰이라는 인물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여러 방향의 물음을 요구하는 독특한 존재다. 죄의식 없는 반도덕적 실용주의적 삶을 수행하는 나쁜 여자로서의 몰은 정말 악의 화신인가, 나아가 이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질서, 즉 주류 권력이 만든 틀 속의 체제 종속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와는 대비되어 소위 페미니즘적 관점, 혹은 들뢰즈의 욕망의 생산의 관점에서 몰의 지배질서를 교란하는 반도덕적 행위는 사회적 흐름(화폐, 신분계급, 성적지위)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생산적 욕망의 수행이라는 자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는 긍정적 존재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은 기성의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되기(becoming)를 실험하는 존재로 해독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몰과 같은 삶이 가능해진 사회적 배치(질서와 제도, 체제)란 어떤 것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17~18세기 영국 사회란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물질과 화폐에 대한 물신적 풍조가 전통적 미덕을 강하게 밀어내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제적, 정치사회적 지위는 전통에서 풀려나지 못한 그야말로&nbsp; 취약 지대에 놓여있었으며, 이는 결혼이 화폐에 의해 거래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여성이 그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가에 대한 심원한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관점, 즉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여성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몰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바라보는 기성의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 담론에 이미 종속되어있는 비평이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합법과 범죄, 아내와 창녀,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권력이 사람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몰은 소설의 전환점 이후에 구원과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nbsp;  <br>이것은 이 소설이 1인칭 고백(confession)의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몰의 서사는 거의 전부 자신의 죄라는 과거를 서술하고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인데, 이는 단순 서술이 아니라 권력에 순응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고백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이는 곧 스스로 말함으로써 권력에 협력하는 주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몰은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도덕적으로 재구성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러한 양태를 자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권력(법, 제도, 처벌)보다 내부 권력(양심, 자기감시)이 더 강력해지고, 결국 몰은 순종적인 주체로 재형성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몰을 권력에서 탈주하는 여성으로 해독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기 통치라는 그물망에 포획되기에 이는 과잉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이 소설은 여성과 사회경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성적 규율, 결혼 제도, 빈곤과 노동, 범죄화 등 중요 요소들이 어떻게 개인에 작동하는지를 발견토록 하는 거대한 사례연구라 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작용하는 인간 삶의 조건을 생각토록 하는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몰이 자신을 범죄자, 타락한 여성으로 자성토록 하는 것은 사회가 읽고 관리 가능한 범주에 포획된 존재에 대한 계도(啓導)적 인물로 이해할 것을 은근히 제안하는 디포의 수구적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nbsp;  작가의 이러한 의도야 어쨌건 몰 플랜더스라는 여성의 삶의 행적은 도덕 이전의 문제로서 인간 욕망과 생존 실험의 방식으로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검토를 요구한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으로서, 욕망의 배치가 드러나는 공간으로서, 독자를 훈육하는 장치인 규율 장치로서의 소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하는 문제적 소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하고 기회주의적 여성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누구나 이 매혹적 서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땅한 국역본이 없어 원서를 통해 어설프게 읽었던 작품을 우리말로 다시 읽게 될 기대가 크다. 이 기회에 테스와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과연 몰의 반도덕과 타락은 개인의 윤리문제인가, 아니면 경제사회구조가 만든 선택인가? 이 입체적 인물은 질서 탈주의 존재인가 아니면 체제 순응적 인물인가? 독자들의 감상이 기다려진다.&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98/98/cover150/k09213888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98988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