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필리아 (비의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18 Sep 2026 19:08:18 +0900</lastBuildDate><image><title>비의식</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903410318852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비의식</description></image><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인간에게 고정된 본질이란 없다? - [인간 판박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17851</link><pubDate>Tue, 15 Sep 2026 14: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178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1679&TPaperId=175178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6/5/coveroff/k872131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1679&TPaperId=175178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간 판박이</a><br/>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인간 판박이』는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함께 아베 고보의 1960년대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같이 정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인간이라 믿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지위 등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br>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판박이』는 이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화성인의 지구 침투’라는 본격적 SF적 발상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궤변과 논리적 말싸움(舌戰)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차별화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진정 ’나‘인가?”, 그리고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즉 이 작품은 두 작품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의 변주를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의 논리적, 언어적 구성물로 해체해보는 실험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간 판박이』는 인간 정체성 상실의 소설을 더 깊이 파내려가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증명의 체계’를 해체하는 소설이라고.  &nbsp;  『타인의 얼굴』이 시각적 단절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하고 있다면 『모래의 여자』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묻고 있음에 비해, 『인간 판박이』는 지성마저 가짜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 의심에 도달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그 원형을&nbsp;1951년 발표된 그의 단편 「S. 카르마씨의 범죄」에서 발견한다. 소설의 주인공 S.카르마가 존재를 박탈당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는 일련의 장면이 떠오른다. 즉 인간 정체성과 실존의 물음은 아베 고보가 일생 천착하던 중심 주제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판박이』는 이러한 물음의 극단인 ’인간‘이란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하고 있기에)  &nbsp;  S.카르마는 인간이 사회적 기호(이름, 명함, 얼굴 등)를 잃었을 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체성 상실과 실존의 그 질긴 관계성을 묻는다. 사람으로서의 환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의 마련을 말하던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의 목소리 중 한 측면에서 좀 더 밀어붙인, 다시 말해 사회적 승인보다 더 심층의 물음인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는 정말 자명한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즉 『인간 판박이』 에서는 외형만 인간인 화성인이 진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함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존재 우위론의 허상을 박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nbsp;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란,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자기 실존성을 인식하거나, 얼굴, 소위 외피(가죽)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서의 정체성에 불과하거나, 진짜와 모방의 경계나, 공통상식과 망상의 경계의 흐릿함을 들추어냄으로써 인간성 혹은 인간이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을 허물어뜨린다.  &nbsp;  사실 우리들이 같은 종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아니 김현경의 말처럼 인간 상호간의 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이름인 ‘사람’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규제 규칙들을 가지고 사람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로써 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언어에 씌워진 정체성이란 환상이거나 진짜 없는 짝퉁처럼 그 실체기반의 취약함, 그 조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nbsp;  이 소설 『인간 판박이』의 기묘한 핵심은 바로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논리로서, 평론 풍 사회극인 &lt;안녕하세요 화성인&gt;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각본가인 주인공과의 논쟁이며, 그 핵심 질문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사실상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전제 위에 세워진 약속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고,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명제가 아니라 공리(公理), 즉 너무 당연하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화성인이 등장하면서 이 증명하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가 화성인이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이 증명 책임에 인간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nbsp;  &nbsp;  『타인의 얼굴』에서는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간 판박이』에서는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결 쉽게 물을 수 있었지만, 『인간 판박이』는 완전히 같기에 얼굴만으로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지점에 도달한다. 즉 정체성이 얼굴의 상실에 의해서 흔들린 『타인의 얼굴』과 달리 완벽한 동일성이 정체성을 흔든다. 제목 『人間そっくり』, ‘인간과 똑같다.’ 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인간과 닮은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더욱 모호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화성인은 주인공의 말을 반박하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정말의 사유를 촉구하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nbsp;  "당신은 인간처럼 보인다.그렇습니다. 인간처럼 보입니다.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입니다.그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nbsp;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제가 전제를 의심하는 무한회귀에 빠져드는 논리의 미로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전제에 의심을 품게 됨으로써 인간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임이 흔들리게 된다. 이 대화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까지 뒤집히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인간언어의 의미가 인간 사회의 약속이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제 소설은 그야말로 이들 대화 속에 작가의 말이 작품의 현실을 침범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을 다루는 SF를 초월하여 소설가와 이야기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라디오 프로그램 &lt;안녕하세요 화성인&gt;을 쓰는 각본가에게 실제로 갑자기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화성인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허구를 만드는 사람에게 허구가 현실로 침입하고,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다.  &nbsp;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는 갑작스레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이 쓴 이야기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베 고보가 쓴 것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주인공에게 쓰게 만든 이야기인가? 진정 이야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며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적 층위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된다. 이 메타픽션의 층위는 인간 존재 증명의 문제와 뒤엉켜 존재자의 믿음에 근본적 구멍을 뚫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아베 고보가 장식처럼 도입한 위상수학(topology)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nbsp;  모양이 겉으로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보다 관계와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위상수학 기능의 하나이다. 도넛과 손잡이달린 컵이 모양은 다르지만 구멍이 하나라는 위상적 구조가 같기에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듯, 인간과 화성인의 외형이 같다면 둘은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 화성인의 관계 구조가 같다면 둘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정상인과 미친 사람, 현실과 허구,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도 위상적 관계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설은 누가 진짜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어떤 관계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즉 김현경의 절대 환대의 문제와 유사하게 회귀하는 것 같다.  &nbsp;  이러한 인간 존재 증명의 물음에 휩싸여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부터 나는 오늘의 트랜스휴머니즘, 즉 인간 신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 찬양문제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인간 존재의 최종적 경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편집과 인공지능, 신체 증강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존재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인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bsp;  그러나 『인간 판박이』가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사유와 만나는 더욱 근본적인 지점은 ‘새로운 인간’을 상상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묻는 데 있다. 소설 속 화성인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인간과 똑같이 말하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외형은 인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의 기억과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임을 보장한다면, 그것들이 인공적으로 복제되거나 변형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nbsp;  이런 의미에서 『인간 판박이』는 포스트휴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는 역설을 앞당겨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이라는 기존의 종을 변형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지만, 『인간 판박이』는 오히려 ‘기존의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 그렇게 명확하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오늘의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듯하다. 이제 최근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문제인 AI와 이미지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언어를 생성하고, 문체를 모방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대화한다면 이 인간처럼 보이는 AI는 인간과 다른가? 이 질문은 『인간 판박이』의 제목이자 물음과 정확하게 겹친다.  &nbsp;  ‘인간처럼 보이는 것(Human-like)’과 ‘인간(Human)’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따라 둘의 차이는 극히 모호해진다.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오늘의 AI를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선취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고보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인간능력을 새로이 확장하는 방향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거의 대척에 놓여있는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개선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인간’이라는 말을 먼저 의심한다. 아베 고보는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특별한 것으로 지정하기 위해 명명한 행위일 수 있다고 말이다.  &nbsp;  자, 이제 소설의 물음을 돌고 돌아 ‘인간 판박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화성인이 인간 판박이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실상 인간 판박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고 말이다. 즉 판박이가 화성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속성이 되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고, 행동 양식을 배우고, 규범에 적응하며 인간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 ‘人間そっくり’는 정말 무서운 의미로 와 닿는다.  &nbsp;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고 자신들이 정의한 것을 닮은 존재일 뿐이라는 역설로 뒤집혀 버린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근거가 사회적 약속, 기억, 외모, 이름, 가족, 정상성, 언어, 이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작품 앞에서 그저 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 판박이에 불과함에 당혹감과 그 불의하게 보이는 진술에 발끈할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인간윤리에 대한 다른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게 되는 이 위대하고 선취적인 논리의 미로를 거닐어보는 것은 당면한 오늘의 세계에 시의적인 독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nbsp;  여러분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인간의 언어라는 그 허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인간과 닮은 AI와 인간인 자신이 같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 선구적 작품을 읽어보시라! 논리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다보면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그 허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허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이 위대한 논리게임과 위상학적 주제와 형식 속에서 우리들의 잘 난 인식론은 허물어질 것이다. 타자와 사회라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만 만들어질 뿐인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을 독자적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증명의 체계로 세워들 보시라, 아베 고보의 인간 증명체계의 해체에 도전하시는 독자는 아마 AI의 도전에서도 승리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가을을 시작하는 멋진 독서가 되어 줄 걸작 중의 걸작이다.   &nbsp;---------------------------------------------P.S. 최근 글로벌 AI기업 앤트로픽의 수장인 다리오 아모데이의 인간 이해와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AI의 재귀적 자기개선 기능에 대한 위험 경고는 공포로 가득했다. 기술 자본들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촉발된 가속화된 AI경쟁은 그 어떤 윤리적 물음조차 건너뛰었다. 그가 근심스럽게 외친 향후 10년 내 인류 종말 가능성은 아베 고보가 말하는 인간 증명에 대한 부실함과 불완전성에 기초한 자기 원인에 대한 무지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위험 앞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6/5/cover150/k872131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26053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곰브로치의 희곡에는 유치함 속에 벼려진 칼날이 번뜩인다. -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03343</link><pubDate>Tue, 08 Sep 2026 19: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5033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207503&TPaperId=175033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267/47/coveroff/89942075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207503&TPaperId=175033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a><br/>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01월<br/></td></tr></table><br/>“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nbsp;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의 “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nbsp;  【콘스탄티 옐렌스키(좌), 비톨드 곰브로비치(우)】<br>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nbsp;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nbsp;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nbsp;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nbsp;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nbsp;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nbsp;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nbsp;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nbsp;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先)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nbsp;  <br>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nbsp;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nbsp;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nbsp;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 속 ‘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nbsp;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nbsp;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대공: 전등입니다.피오르: 누구?대공-전등: 전등이요.피오르: 대공 아닙니까!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아!&nbsp; &nbsp; &nbsp; &nbsp; -  『오페레타』 3막 중에서  &nbsp;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nbsp;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nbsp;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nbsp;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267/47/cover150/89942075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2674762</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미래 윤리를 위한 「공포(恐怖)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link><pubDate>Sun, 30 Aug 2026 09: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56138&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31/coveroff/89777561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82532580&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649/54/coveroff/e9825325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319815350&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145/69/coveroff/331981535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6323&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44/18/coveroff/897291632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6978&TPaperId=17480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686/88/coveroff/897199697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8005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nbsp;이 단상은 프린스턴, 뮌헨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제2장, 미래 윤리에 있어서의 「토대와 방법의 문제」의 몇 절을 기초로 필자의 현실 自省의 생각이 더해져 작성된 것입니다. 선과 당위 등 존재론적 물음을 비롯해 도구의 목적성이 지니는 윤리성 등, 사유를 더 이어가시고자 분은 원(原)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스 요나스는 전통적 윤리는 대체로 ‘행위자–행위–피해자’가 가까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생명공학, AI, 유전자 편집, 자율 시스템 등 기술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조건,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나스가 윤리의 시간적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습니다. 즉 미래의 인간을 위해 현재의 행위를 규율할 당위에 대해 윤리적 검토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 윤리에 대한 문명 비판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선도적 윤리의 길을 개척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고 싶습니다...................................................................<br><br>"기술적 힘이 미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만큼 책임의 범위도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  &nbsp;  ‘미래 윤리’라는 말은 현재라는 사건에 얽매여있는 오늘의 전통적 윤리로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도덕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기에 출현한 윤리의 이름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기술들의 후과(後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들과 달리 훨씬 장기간에 걸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기술은 인간생명 조건의 변형을 통한 종(種) 자체의 변화, 인간 삶의 의식에 대한 중대한 가치의 변화, 지식 생산과 그 실천적 수행의 기계로의 이전과 의존 등 인간의 본질과 삶의 형태에 대한 근본적 수정 또는 종말을 품고 있다. 이것은 근(近)미래이거나 먼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술적 수행이 인류의 본질을 건드리는 근원(根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히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상(像)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단지 상업적 이익과 장밋빛 기술의 낭만적 이점만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나가고 있다.   &nbsp;  사실 이러한 현대기술 사업에 대한 우려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종말론적 위기로 표현(*4.부기 참조)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의 외침들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처럼 개인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머나먼 나라의 일이거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언어이기에 전혀 어떤 공포도 일으키지 않으니, 제아무리 전지구적 규모의 심각한 위협일지언정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미래 윤리를 주창하면서 첫 번째 명령을 도출하는 가운데 ‘공포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이라는 인간본성의 취약점을 건드림으로써 하나의 윤리 명령을 도출해낸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개인의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현재적 삶의 중요 문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가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nbsp;  1. 공포의 발견술: 도덕관념의 발원(發源)  &nbsp;  요나스의 진술을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인간은 어떻게 떠올렸을까? 아마 인간에게 살인의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이 행위 능력을 통해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살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명의 신성함은 물론 살인 금지 명령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 없었다면 진실의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부자유가 없었다면 자유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침해사실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지만 어떤 윤리 명령, 즉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일을 자신들이 당하지 않고 보호될 수 있기 위해 윤리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위협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엇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것은 무언가에 대해 경악하는가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nbsp;  이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 우리는 질병을 보지 않고서는 건강에 대한 찬가를 읊을 수 없으며, 파렴치한 행위를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찬양하는 데 미숙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서 평화를 찬양하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체감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는 데 몹시 서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악(惡,malum)의 인식이 선(善,bonum)의 인식보다 무한히 쉽다. 악의 인식은 더 직접적이며 설득력 있고 의견의 차이에 별로 시달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다. 반면 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며 반성하지 않으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이 비로소 노출되어서야 감지한다. 즉 선에 관해서는 대체로 악의 우회로를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윤리 도덕관념은 희망이나 선보다는 공포와 악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포의 발견술은 우리가 윤리명령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nbsp;  <br>2. 신중성의 도덕적 명령 : 思惟의 의무로서의 도덕  &nbsp;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기술들은 훗날의 결과를 추론을 통해서만 인식해야만 하는 고도의 어려움이 있다. 미래의 발명품을 미리 발명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적 탐구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물론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효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명령을 할 수 있을까?   &nbsp;  현대기술의 대사업은 자연적 발전 과정의 수많은 작은 행보들을 소수의 거대한 행보로 응축시킴으로써 천천히 움직이는 자연의 생명(즉 진화의 긴 여정)을 보장하는 이점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조직에 대한 기술적 침해가 가지는 인과적 속도는 마찬가지로 인과적 규모를 야기한다, 그 침해의 파급속도와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 혹은 결정적 파국의 초래일 수 있음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의도적 계획으로 대체하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진화적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인간에 대한 기술적 침해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안과 위험을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대기술들이 선전하는 위대한 목표에 이르는 시간의 축소에 비례하여 완전히 회피불가능하고 더 이상 작지도 않은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류의 불가피성에 관한한 우리가 자연적 진화의 장기성을 인간적 계획 행위의 상대적 단기성으로 대체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매우 급속하게 인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nbsp;  기술론적 행위에 의해 근거리 목표를 가지고 그때그때마다 진행되었던 발전들은 스스로 자율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간의 학문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기술적 발전은 자신의 고유한 강제적 역동성을 띠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동적 동인(動因)으로 인해 기술적 발전은 비환원적일 뿐 아니라, 자체 추진력을 가지고 행위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계획을 뛰어넘기도 한다. 한 번 시작된 것은 우리에게 행위 법칙을 빼앗아가고, 시작이 만들어 놓은 완성된 사실은 점증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영속성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근현대 3세기동안 기술 발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기술적으로 추진되는 발전의 가속화는 자기 수정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에도 수정은 어려워지며,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극도로 작아진다.   &nbsp;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생체기술, 로봇기술 등은 오직 산업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와 산업국가 간의 헤게모니 쟁탈에 매몰되어 기술 정당화의 의무가 면제된 채 자유주의 관점으로 천명된 무책임성이 마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듯 행위하고 있다. 세상에 전체 인류가 이처럼 산업기술의 무책임성에 동시에 맡겨진 적이 없다. 인류를 이끌어갈 지도적 표본의 규정 없이 대체 그 어떤 권위가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충분성에 칼을 댈 수 있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인간의 왜곡과 위협과 변형의 권한을 주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이익의 전망도 희생의 위험도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치 작금의 기술과 기술자본은 초월적 권능을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들의 기술론적 연금술의 도가니에 인류를 던져 넣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 윤리의 명령을 또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가 우선성을 부여하는(작금의 한국 정부의 AI 우선 정책과 같은 것) 최초의 시작들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하는 것으로써의 의무와 신중성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유(思惟) 의무’라는 도덕이다.   &nbsp;  3. 맺음말: 경험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nbsp;  참으로 오늘의 세계에서 그 의미의 힘이 한없이 취약해지고 잊혀져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의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보존되지 않은 바로 오늘, 이를 구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경험도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상(像)을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위해서 우리는 경험된 악 대신에 ‘표상(表象)된 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악과 공포의 침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체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윤리 명령의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생각하여 제공하는 것을 미래 윤리가 갖는 예비적 의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nbsp;  표상된 악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내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된 악과 같은 자발적 의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즉 대상에 대한 공포는 그 많은 위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듯, 결코 자신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리 본성에 주어져 있는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가장 비자의적이고 억압적인 반동으로써 극단적 공포를 유발한다. 자기에게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 공동 생활의 유대로 결합된 다른 어떤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 지구의 운명은 차치하고라도, 미래 인간에 관해 표상된 운명은 자체로부터 우리의 심정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향을 표상된 악의 제작을 통해서라도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수용, 후세대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촉발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태도가 미래 윤리이다. 우리는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nbsp;  이로부터 많은 도덕적 창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이 미래에도 과연 존재 당위의 권한이 있는가? 현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라는 장기에 발생할 후과에 대해 책임을 왜 가지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도박에 걸어도 되는가? 나는 타인의 이해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대체 어디서 획득했는가? 인간의 실존이 내기의 담보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류가 실존해야할 무조건적 의무라는 것이 과연 존립 가능한 윤리명령인가? 이러한 논증들을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nbsp;  우리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구원의 예측이라는 낙관적 기대보다는 불행의 예측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리원칙만으로는 이미 접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술들의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현재에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지금의 기술 행위들은 그 대상과 규모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며, 그것은 모든 직접적 의도와 무관한 결과에 따르며 전혀 중립적이지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윤리적 진공 상태’에 이른 지금의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가 던지는 물음들에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윤리 명령을 구할 필요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nbsp;  오늘날 소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확대하고 사용을 강제 받고 있는 극단적 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에 대해 규율할 수 있는 윤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작 장기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로만을 쓰다듬으며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악질의 인간들이 살던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류의 행위 능력을 가진 작금의 기술들은 윤리의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미래 윤리에 대한 사유가 반세기 전에 한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검토되었음에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다.   &nbsp;  4. 부기(附記) - 더 읽어 볼 현대 기술의 미래 윤리를 체계화한 글들  &nbsp;  요나스는 현대 기술들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 (2014년)에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인류문명의 장기적 잠재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히 인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라는 최고명령을 위한 윤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nbsp;  반면 인간을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로 보지 않고 정보적 존재로 보는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The Ethics of Biomedical Big Data』에서 인간을 계산 가능한 정보 객체로 본다. 이러한 인물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을 평균적인 통계적, 집단적 형상으로 환원해서 기계적 존재로 변질시킨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도 『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 (2013년)에서 ‘미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해야 한다.’며 인간의 실존을 중시하지만 요나스와는 달리 단순 생존이 아니라 신체의 온전성, 사고와 상상, 자율적 선택,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고 있다.  &nbsp;  다시 말해 그녀는 미래 윤리는 안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능력 보존의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결국 인간을 능력면에서 존속을 말하는 것과 인간 생명체 자체의 실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 철학자는 모호한 경계선을 주행한다. 그런데 요나스의 장기주의적 윤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극단적 장기주의 윤리를 내세우는 일군의 학자들도 있는데, 요나스의 책임의 윤리와 다르게 이들은 현재의 몇 십만 명의 희생보다 미래의 수십 억 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극단성을 띠기도 한다.   &nbsp;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희생시키는 괴이한 윤리이다. 즉 기술 종속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기술 성공주의의 역설적 윤리파괴를 잠재한 위험한 윤리로 보인다. 따라서 맥어스킬이나 보스트롬 같은 장기주의자들과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엄격히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미래 기술과 관련한 윤리 담론이 형성조차 되지못하고 있기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짧은 단상을 해보았다. 아무쪼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단기적 현실과제에 매몰되는 우리들의 실용주의적 정치체(政治体)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많이 늦었지만 윤리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noimg_150_b.gif</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0986</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서다? - [돈 후안 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73482</link><pubDate>Wed, 26 Aug 2026 19: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7348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643&TPaperId=174734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59/coveroff/8932403643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643&TPaperId=1747348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돈 후안 외</a><br/>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06월<br/></td></tr></table><br/>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nbsp;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lt;돈 조반니&gt;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nbsp;<br>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에 ‘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nbsp;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는 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nbsp;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자,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nbsp;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nbsp;&nbsp;-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nbsp;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量)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nbsp;  <br>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nbsp;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性)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nbsp;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아,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nbsp;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nbsp;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59/cover150/8932403643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459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집합행동의 딜레마에 빠진 AI 경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link><pubDate>Sat, 22 Aug 2026 19: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130226&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1/23/coveroff/k41213022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00264631&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967/23/coveroff/0300264631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031539745&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35/70/coveroff/303153974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715738&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794/1/coveroff/89707157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030721906&TPaperId=17465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77/15/coveroff/3030721906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582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당한 목표 없는 경쟁을 물으며;<br>지금 벌어지는 AI 기업 간의 과열 경쟁은 단지 그들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군비경쟁(arms race) 구조가 이들 산업주체들의 전략적 경쟁논리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1960년대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더 큰 모델을 훈련하면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더 큰 GPU, 더 큰 데이터 센터(Data Center)’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보면 전혀 최적(最適)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과는 비효율적인, 즉 현재 투자 규모가 미래 전망에 의해 정당화되는 실제 수익보다 큰, 수요보다 기대가 먼저 움직이는 과다한 낭비이다.&nbsp; &lt;현대의 고전이 된 AI 윤리비평 &gt;<br>AI의 미래 가치가 이미 현재 가격에 과도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부분의 과잉투자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우려이지만, 이 불합리성으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전가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대되는 미래가치를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대중은 그 비효율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고, 더구나 기술 편익을 누리는 사람과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지금의 AI 경쟁은 인류 자원의 측면에서 어떤 조건에서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마치 AI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무조건적 당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아가 과열 양상의 AI 산업에 그 어떤 면밀하고 세심한 도덕적, 정치적 고려도 없으며,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nbsp;  AI관련 연구나 저술들도 획일적으로 AI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저 효율적 사용방법에 맞춰져 있고, 더구나 AI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 제기도 대세에 낙오된 자의 푸념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AI 산업과 관련하여 예견되는 각양의 형태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고, 이러하다보니 그저 AI데이터 센터 건설이나 관련 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아예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관련 연구가 멸종하다시피한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AI 연구자들은 AI 기술의 현재가치 평가와 미래 세대 비용의 문제, 향후 50년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 경쟁적 인프라 구축의 경쟁적 투자의 문제, AI의 인류사회에 대한 편익(효용)의 문제, 기술의 가능성이 그 기술의 실행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기술적, 정치적 연구와 논의가 학계와 정책 분야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nbsp;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만큼의 AI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 때문에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가?"&nbsp;  AI가 필요한가? 라는 이미 떠난 기차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자원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AI 개발 목표가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술 자체보다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nbsp; &lt;AI 의 숨겨진 비용을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gt;<br>대중들은 AI를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기술을 역사학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하버드 역사학교수 질 레포어(Jill Lepore, 1966~)는 『인공人工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Artificial State)』(2026.8)이라는 조지오웰의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최근 저술에서 AI기술이 어떻게 “전 세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인간 공동체와 자치 능력을 파괴“했는지를 설명하면서 AI 국가의 등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서 봉건주의 파시즘,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체제들도 결국 해체되었듯 AI 체제도 해체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반(反)AI체제 논의도 있지만, 지금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AI체제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지금의 가공할 만한 자원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AI와 거대 기술기업들이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행세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당해 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국가 의지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압도하고, 나아가 잠식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 물음의 본질을 생각해보자.&nbsp;  미국 내 인디언 부족연합체인 체로키 네이션은 부족 소유지 내 AI 데이터 센터 건설을 금지하고, 부족 영토 내 다른 부지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 협의를 요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소비, 물(用水) 사용, 대기·소음·빛 공해, 문화유산 보호, 지역 사회가 ‘획득 가능한 실질적 이익’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전통적 숙고의 원칙인 ‘이로쿼이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란 것에 사유의 뿌리가 있다. 즉 ‘오늘의 선택이 7세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대략 정책 결정으로부터 200년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지역 사회가 감당해야하는 물, 전기, 토지에 비해 AI 데이터센터로부터 지역사회가 얻는 효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nbsp;  막대한 전력 소비, 대량의 냉각수 사용, 소음 및 빛 공해, 생태계 압박,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고용효과, 자원소비 대비 경제 기여가 턱없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주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공공요금 상승, 지역 물 공급 약화 등을 초래한다. 특히 막대한 전력 소비는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크며, 이는 지역 전력망 부담, 전기 요금 상승, 발전소 증설 압력으로 연결된다. 실제 이러한 요구가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 논의될 정도이다. 또한 데이터센터가 유치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경제효과가 해당 지역에 남는가? 로 바뀌어 실제 운영상태에서는 고용효과가 극히 작을 뿐 아니라 수익은 당해 기업의 본사로 집중되어 지역 경제에는 상대적 부담만 가중된다는 것이다.&nbsp;  이렇게 가시적인 자원 효용과 배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데, 지역민이 감수하여야 할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어 민주주의 공동체 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보 비공개, 불투명한 협상, 사후 통보 등 절차 적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건설할 것인가가 중대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의무, 물 재활용시스템, 지역전력망 투자, 지역사회 이익공유, 환경영향 공개, 주민동의 절차 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사회는 이러한 법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적 법규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거대기업의 건설행위가 추진되고 있기에 각 지역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nbsp; <br>투자수익자가 비용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과실만 챙기려는 현재의 AI기업들의 체리피킹식 행태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나아가 데이터 주권과 AI정책의 수립에서 단지 적극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과 전기, 토지와 생태계의 비용은 나 몰라라 하고서는 지역민, 다른 공동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작금의 거대기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절대 교정(矯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50년 뒤에도 이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이 같은 정치철학적 질문 없이 행위가 앞서는 지금의 AI 국가 정책과 기술기업의 행보는 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nbsp;  하고자 하는 말은 AI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자원을 지금과 같이 소비할 만큼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증명하라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건설되는 엄청난 수의 AI데이터 센터와 이를 추진하는 거대 기술기업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AI가 인류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미국 및 유럽 대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의 투자 규모와 자원 투입이 그 목적에 비례하는지는 짙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대표저술 『책임의 원칙』에서 “현대기술의 파괴적 힘에 맞서 미래 세대와 자연환경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태학적 책임 윤리”를 주장했다. &nbsp;&lt;오늘 맞이하고 있는 기술은 현재의 도덕만을 말하는 전통 윤리로는 대응할 수 없다.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문법을 지닌 AI는 새로운 윤리로서 '책임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gt;&nbsp;<br>  AI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지구(생태)자원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없이 자본과 개발기술의 사용 논리에 압도된 자본헤게모니 쟁탈이 진행되다보니 윤리와 인류 복지와 정치적 문제를 건너뛰고 진행되는 기이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은 누구의 자원인가? AI가 창출하는 생산성 증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환경 비용은 어느 지역과 세대가 부담하는가? 기술 경쟁은 실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경쟁 자체를 위해 계속 확장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술공학보다는 정치철학, 환경윤리, 경제사에 가까운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기술기업이나 기술공학자들로부터 빼앗아 지금이라도 경제학자, 정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사회의 AI체제에 대해 그 근원부터 다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nbsp;  "AI는 구름(cloud)이 아니라 광산(mine)에서 시작된다"-  Kate Crawford, 『The Atlas of AI(AI 지도책)』 &nbsp;  AI의 숨겨진 비용부터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학계와 관련 연구자들은 이 중대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 학계는 'AI의 생애 주기에 대한 연구'가 중대하게 수행되고 있다. 사용 자원이 AI 잠재적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무수히 들려온다. 또한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정당한 목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목적인지, 테크노크라트의 사회를 통한 권력의 쟁취인지, 자본이라는 재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인지, 이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nbsp; &lt;인공 국가(Artificial State)&nbsp;부상의 성급함과 무모함에 대한 독보적 비판서&gt;<br>이러한 연구 결과물중 AI 윤리비용을 추적하는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 1974~)의  『The Atlas of AI(AI 지도책)』 는 단연 돋보인다. AI 관련 윤리의 많은 연구들이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에 한정되어 AI 체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출신의 이 호주인 AI 연구가는 AI를 단순 기술로서가 아니라 자원, 노동, 데이터, 권력이 얽힌 거대 산업체계로 분석한다. 그래서 AI 윤리는 단순한 기업의 자율규제나 ‘착한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정의·노동권·데이터 권리·민주적 통제를 함께 고려하는 정치적 과제가 된다. 특히 크로포드는 AI를 자동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분류와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수집된 이미지와 개인정보, 무수한 데이터 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AI는 혁신 기술이라기보다는 자원 추출과 노동 통제, 데이터 수집, 권력 집중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총아일 뿐이라고 해부하고 있다. &nbsp;  오늘날 AI 기업들이 사용하는 '클라우드', '가상공간', '지능' 같은 표현은 마치 AI가 비물질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지만, 크로포드는 그 뒤에 있는 광산, 발전소, 데이터센터, 공급망, 그리고 인간 노동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 점에서 『Atlas of AI』는 앞서 언급한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즉, 문제는 ‘AI가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유용성을 위해 어느 정도의 토지·전력·물·희귀광물·인간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nbsp;  크로포드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술윤리서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정치경제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크로포드의 이 연구 결과물은 기술 비평서이며,  21세기 디지털 산업의 ‘환경사(環境史)’이자 ‘자원사(資源史)’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AI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라는 이 원색적 질문을 회피해서는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사회는 장기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린 듯하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계와 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편리에 어마어마한 인간의 삶을 그저 내버릴 가능성은 없는지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다시 사유해야 한다.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정치, 윤리, 인류경제를 모른 체하고 질주하고 있는 형세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자라는 이 무식한 도전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런 저급한 사회가 아니다.&nbsp;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반(反)AI, 반(反)기술주의가 아니다. AI산업이 한국 사회의 국민경제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기실적과 주가 중심의 경제시스템만으로 체제를 이해하는 정책은 정말 우려스러운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이로쿼이 7세대 원칙은 시간의 척도를 현재에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축,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수익자와 비용 부담자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물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차, 즉 이 사회 구성원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을 고려하는 윤리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AI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더욱 아름다운 구상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현대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책임의 범위도 그 만큼 길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제에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제 남의 뒤 만을 따라가는 과거의 후진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nbsp;<br>   <br>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86/44/cover150/k23283081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586444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 일기』와 지하인의 고백록 - [도스토옙스키 고백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2051</link><pubDate>Thu, 20 Aug 2026 17: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620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3617&TPaperId=174620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0/29/coveroff/89324736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3617&TPaperId=174620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스토옙스키 고백록</a><br/>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09월<br/></td></tr></table><br/>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nbsp;  『작가일기』는 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년 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 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nbsp;  『작가일기』 중 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nbsp;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nbsp;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nbsp;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nbsp;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nbsp;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nbsp;  <br>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nbsp;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nbsp;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nbsp;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이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nbsp;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反)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nbsp;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 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nbsp;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0/29/cover150/89324736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870290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문학적 유언: 실패 없는 결행의 순간 - [자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55660</link><pubDate>Mon, 17 Aug 2026 14: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556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832679&TPaperId=174556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9/34/coveroff/k042832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832679&TPaperId=174556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살</a><br/>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3년 03월<br/></td></tr></table><br/>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가 2007년 10월 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한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nbsp;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nbsp;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한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nbsp;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nbsp;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성(城)』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nbsp;  <br>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nbsp;  “흐린 날씨, 겨울, 비,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nbsp;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nbsp;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nbsp;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nbsp;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nbsp;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nbsp;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젊음은 나를 떠나고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nbsp;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죽음은 나를 기다린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9/34/cover150/k042832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289347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란츠베르크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 - 끝까지 살아야 할 이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link><pubDate>Wed, 12 Aug 2026 17: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556&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5/42/coveroff/893291255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627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520/92/coveroff/8972916277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939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43/63/coveroff/k66203939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8325&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592/94/coveroff/897418832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030507&TPaperId=1744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68/43/coveroff/k63203050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6795'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이창익 著,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쪽, 인간사랑 刊  &nbsp;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nbsp;『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amp;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nbsp;   <br>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nbsp;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nbsp;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자,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nbsp;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nbsp;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nbsp;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nbsp;  <br>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nbsp;   <br>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nbsp;&nbsp;“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nbsp;&nbsp;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nbsp;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nbsp;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며,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nbsp;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nbsp;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nbsp;&nbsp;-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nbsp;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nbsp;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나’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nbsp;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nbsp;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nbsp;"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P17, 열린책들 刊<br>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05/14/cover150/190333159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05148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브람 스토커에게 드라큘라는 무엇이어야 했을까? - [주석 달린 드라큘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0671</link><pubDate>Sun, 09 Aug 2026 13: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406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548X&TPaperId=174406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8/0/coveroff/896017548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548X&TPaperId=174406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주석 달린 드라큘라</a><br/>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03월<br/></td></tr></table><br/>엄청난 주석들과 해석이 쌓여있는, 이 작품이 발표 된 이후 흡혈귀 소설의 전형이 된 브람 스토커의 『DRACULA』에는 성의 정치학이 어떠하다든지, 문화적 편견의 집대성이니, 신구 세계의 충돌이라든가 하는, 한편 정신분석적 비평이니,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니 하는 진부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관점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작품의 재미를 오롯이 즐기기 위해 낯선 것이 주는 서늘함을 느끼기 위해 읽었다.  &nbsp;  계속되는 무더위와 더불어 지치고 지루해진 일상적 연속감을 잠시 상실케 할지도 모를 어떤 낮선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무 지치고 내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일상을 단절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오래된 소설을 집어 들었다. 가장 낯선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무엇이 아주 조금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몸이 굳어버림으로써 공포를 비로소 체감하듯 이질성을 통해 불연속적인 이질적 세계의 당혹스러움이 필요했던 탓일 게다.  &nbsp;  <br>소설 첫 장을 펼치면 헝가리-루마니아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향하는 변호사 조너선 하커의 마음에 드리운 불안과 황폐한 풍광이 어우러져 그의 행보가 마치 죽음의 덧으로 들어가는 듯한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여 읽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를 백작의 성으로 실어 나르는 마차와 기이한 마부, 늑대들의 울음소리와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안광(眼光)들, 굳게 닫친 성의 문 앞에 장시간 홀로 서 있어야만 하는 조너선이 느꼈을 두려움이 온전히 전달되어 온다. 일단 이 소설 읽기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 이질적 세계의 시공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뛰어들었으니까.  &nbsp;  엄청나게 큰 성에 자신과 백작 이외에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너선 하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을 땀줄기의 성분은 혐오와 공포, 백작이 내뿜는 썩은 내 나는 악취의 진저리였을 것이다. 런던에 백작의 거처 구입과 관련한 계약을 위해 고용주 호킨스를 대리한 조너선의 방문은 그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백작의 음흉한 의도에 의해 자유를 빙자한 감금 상태에 처해지고, 백작의 실체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탈주를 향한 그의 시도들은 긴박함과 실패의 두려움이 혼합된 죽음의 공포로 뒤범벅되어 독자의 정신을 꿰찬다.   &nbsp;  장면은 훌쩍 넘어 조너선 하커의 약혼녀 미나와 그녀의 친구 루시 웨스턴라가 살고 있는 영국의 휘트비로 향한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일기와 편지, 전보, 신문기사 스크랩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재된 기록 일자들을 서로 이어 맞추며 그 간극에 있을 추리와 논리는 독자의 몫이다. 조너선 하커, 그의 생존을 알 수 없이 끝난 일기에 이어 미나의 편지와 일기가 등장하여 휘트비 항에서 발생한 이상한 사건을 진술한다. 폭풍우 속에 항구에 도달한 배와 느닷없이 뛰어내려 홀연 사라진 개 한 마리, 그리고 키잡이에 묶인 채 사망한 선장의 시신 외에 그 어떤 생명도 없는 배, 이후 평소 몽유병을 앓고 있던 절세 미녀인 루시 웨스턴라의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척하고 창백해져만 가는 병세는 드라큘라가 이미 영국에 거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nbsp;  여기에 더해 루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정신병원 소장 수어드 박사, 그의 스승인 반 헬싱, 미국에서 왔다는 아서 홈우드의 친구 퀸시 모리스, 약혼자인 아서 홈우드(고달 경), 드라큘라 행적의 전조로서 간접적 기호로 작동하는 렌필드라는 광인에 대한 관찰 기록이 뒤엉켜 드라큘라의 루시를 향한 지속되는 흡혈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이어진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는데, 루시를 위해 남성들이 돌아가며 수혈을 하는 것인데, 이 소설이 써질 때 혈액형과 항체반응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지만 수혈이 마구잡이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 만큼의 이해가 있었음에도 굳이 수혈 부작용의 확률을 늘리면서까지 네 명의 남자가 모두 한 번씩 수혈하는 것이다. 드라큘라에 의한 과다한 혈액의 누출로 루시는 기어이 사망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데,  루시는 혈액이 모자라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수혈자인 모리스의 혈액이 루시의 혈액형과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비평가들은 반 헬싱의 무지에서 비롯된 폭력을 보았기에 이 같은 논평을 그치지 않는 것일 게다.  &nbsp;  그 이유야 어쨌든 흡혈귀를 쫓는 만능의 지식자로 행세하는 반 헬싱이라는 인물의 행위는 시선을 끌었는데, 조너선 하커가 이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미나와 혼인함으로써 수어드 박사의 정신병원에 임시 거처를 정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사단이다. 미나 하커에게 모든 기록들의 정리자로서, 드라큘라를 쫓는 계획의 주요 종사자의 임무를 맡김으로써 여성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은연히 표현했다는 점은 반 헬싱의 남성중심주의와 보수주의적 작품이라는 딱지를 상당부분 떨어내게 해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언데드(undead)가 되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흡혈귀가 된 루시의 영원한 죽음을 위한 행위와 드라큘라의 행적을 쫓는데 시선이 빼앗기고 있을 때 그들의 안 마당에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뒤늦은 발견의 장면이다.   &nbsp;  반 헬싱은 미나 하커가 황홀감에 도취되어 드라큘라에게 목이 물려 피를 빼앗기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피를 미나에게 주는 언데드의 세례를 보는 장면이다. 흡혈과 수혈의 행위를 유사 성행위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 선정성을 더욱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이 쓰여지고 있던 1890년대가 빅토리아시대의 절정기였다는 점이다. 엄격한 순결주의, 도덕주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인 엄숙주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게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마 반 헬싱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시대의 윤리적 기만을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nbsp;  문학비평가 크리스토퍼 F. 벤틀리는 그의 저서 『침대의 괴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나타난 성적 상징』 (1972)에서 “성기 없는 성교, 혼란 없는 성교, 책임 없는 성교, 죄책감 없는 성교, 사랑 없는 성교, 더 나아가 성교 그 자체라고”,  일종의 근친상간적이며 시체 애호적이고  가학적 성교 요소가 뒤엉킨 작품이라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일정 부분 정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출간되자 “극도로 선정적, 문학적 감각뿐 아니라 건설적 예술성도 부족”하다고 비난한 1897. 6. 26자  《애서니엄(Athenaeum)》 런던 版이나 “예술적 절제가 결핍된 문학적 실패작”이라 논평한 미국판 출간에 대한 1899.12.9. 《웨이브(wave)》 샌프란시스코 版처럼 선정성이기는커녕 당대의 위선에 대한 역설적 은유에 가깝기에 닐 게이먼의 비난처럼 소설적으로 취약한 것은 물론 아니다.   &nbsp;  나는 브람 스토커가 쓴 서문의 한 문장에 더욱 주목했는데, “우리의 철학이 꿈꾸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이 지상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이 말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너머에 훨씬 더 많은 미지의 것, 낯선 것, 외면한 것 들이 있다는 지성에 대한 겸허한 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낯선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흡혈 행위는 당대, 아니 오늘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익숙한 것에의 안주라는 편협이 야기하는 위선과 폭력성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것에 덧씌운 자기 몰지각과 편벽함, 아마 당대 영국인들, 나아가 서유럽인들의 심리를 채우고 있던 순혈주의가 여성들의 순결과 궤를 같이 함으로써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그 묘사가 일치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즉 드라큘라의 흡혈은 인종적 위협의 상징적 기호로서 드라큘라의 불쾌한 체취, 희생자의 피의 오염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작동하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한 예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nbsp;  이 소설의 원제목을 두고 스토커는 고심했던 같은데, 집필 원고의 제목은 『언데드』였으며, 소설로 출간하기 직전 자신이 영업매니저로 일하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을 위한 드라마 개작 작품명은 『드라큘라 혹은 언데드』 였던 것으로 보아도 죽음과 살아있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계지대의 존재임을, 미지의 영역을 활보하는 존재로서 드라큘라를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눈에 보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을 인식하려 할 때 우리는 고집불통이 된다. 루시의 약혼자인 아서는 자신의 피앙새(fiancée)의 시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한 시체훼손에 대해 강한 반대 의지를 보이지만, 반 헬싱의 조작으로 루시의 언데드가 성난 흡혈귀의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자 급작스레 그녀의 시신에 대못을 내리치는 일을 손수 하는 모습은 작가 의도의 한 표현 예라 해도 될 것 같다.   &nbsp;  【Luc Besson, 《Dracula: A love Tale, 2025》】<br>드라큘라의 안식처인 언데드가 휴면을 취할 흙으로 채워진 관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 끝에 영국을 떠나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드라큘라 백작을 쫓아 마침내 모리스가 그의 보이나이프를 심장에 꽂는 순간 미나 하커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은 길이 남을 장면일 것 이다.  흡혈의 피의 세례로 백작과 텔레파시의 소통력을 지니게 된 미나 하커가 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움이다. 백작이 분해되는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평온한 표정”에 미나 하커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기뻐할 것”이라는 표현은 자못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백작의 부재로 인한 자유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영적 파트너였던 백작의 평온한 표정이 준 그와 연결된 자기 영혼의 지속성에 대한 환희였을까. 사실 소설이 끝났음에도 드라큘라를 정말 없애는 데 반 헬싱과 동료 사냥꾼 무리들이 성공한 것인지 장담하기가 애매하다. 낯선 이질의 문명에 대한 반감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든 그것은 우리에게 다시금 이질의 괴물성으로 출현하고 부단히 편협의 질서와 투쟁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네의 세계는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는 의문부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nbsp;  발표되고 60년이 지날 때까지 대중성이라는 폄훼의 시선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작품이었다는 점도 아마 우리들의 집요한 배제의 논리에 은폐된 순수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 때문일 것이다. 이제 무수한 아류(pastiche)들을 낳고 있으며, 오늘날 가장 강력한 소설 중 하나로 연구되고 기억되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낯섦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붙인 이름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은 더 많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을 게다.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뾰족한 송곳니, 아직까지도 살아있고, 예술로서 성공하고 많은 주석과 해설을 이끈 역작이다. 마침 뤽 베송 감독이 다크 판타지 물로 각색한  《Dracula: A love Tale, 2025》가 올 여름(8.26) 개봉될 예정인 모양이다. 아마 브람 스토커의 원작과는 달리 15세기 일명 꼬챙이 블라드로 불렸던 블라드 드라큘라(Vlad Dracula) - 오늘날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기려지는 - 가 활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21세기 드라큘라라는 낯선 존재가 이 프랑스인에게는 어떻게 표현될지 자못 궁금하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8/0/cover150/896017548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78000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삶을 속박, 파괴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 - [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8040</link><pubDate>Sun, 02 Aug 202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80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838015&TPaperId=174280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01/60/coveroff/k7128380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838015&TPaperId=174280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a><br/>데라야마 슈지 지음, 손정임 옮김 / 미행 / 2022년 07월<br/></td></tr></table><br/>‘가출, 악덕, 저항, 독립’, 네 범주의 ‘예찬(禮讚)’을 하고 있는 이 책은 1963년 첫 출간되었지만, 인간과 인간사회에 있는 그 항상(恒常)적 내용처럼 21세기 오늘과 동시대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반감의 냄새가 범상한 글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당대에는 급진성으로 비난과 공감의 물결이 마구 뒤엉켰을 문제작이었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흥미로운 것은 현학을 흉내 내거나 진지함을 방패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위선도 날려버린 날 것의  체 하지 않는 솔직함이다.  &nbsp;  가출예찬을 비롯한 네 개의 예찬은 공히 오늘날 가족 제도의 근간인 ‘집’, 페미니스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일부일처와 그들의 아이들로 견고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깨부수고 그 질척질척한 애정으로 묶인 혈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허위의식과 기만성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날아오르자는 변(辯)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심리적 젖떼기’이고,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자신의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엄마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의 내부를 해체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아이의 독립적 인생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nbsp;  한편 스위트홈의 중추인 부부중심의 결혼 제도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유명한 성(性)혁명론자이자 성정치론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주장을 토대로 “관능적 체험의 결과로서의 성적인 애착”의 충족 관계가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고, 오늘날 사회의 생산수단 사유화로서 경제 기반만을 문제 삼게 되면서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 ‘집’에 씌워진 권위주의로 포장된 긍정의식을 해체하고 있다.  &nbsp;  스위트 홈의 일부일처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사례로써 제법 길게 인용되고 있는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원작의 만화  「사자에 씨(サザエさん)」 의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치 가장 정당한 이데올로기인 양 오늘날 가정을 지탱하는 일부일처제 중심의 ‘집’에 대한 충성심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교조성을 비판한다. 집의 힘에 의해 거세당한 사자에 씨의 남편 마스오와 에로티시즘에 무관심한, 오로지 일부일처를 지켜야 한다는 체념에서 집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는 사자에 씨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복속된 집의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 내고 있다. 이 만화가 일본인들의 최고 드라마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각색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그네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성정치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통치하려하는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nbsp;  가출을 말하는데 있어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인데, 극(劇)에는 없는 노라의 가출 이후에 조명을 맞추어 “집을 나가 매춘부가 되어도 괜찮다.”며, 중요한 것은 노라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인형으로 취급했던 ‘집’으로부터의 단절을 감행했다는 것, 즉 노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출한 것이므로 그녀 자신의 존재 형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선택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에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집”, 노라와 헤르마가 마주해 창조해서 만든 집이 아닌 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nbsp;  집 제도와 관련한 수많은 속박과 금기가 작동한다. 바로 이 금기로서 금지된 것들은 황홀감과 불안이라는 기묘한 쾌락을 대기시키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 금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으니 절대적 윤리 덕목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데라야마 슈지는 대다수의 스위트 홈을 둘러싼  금기란 “생생한 연대성”을 강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성을 잃지 않은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통에 찬성하지 않는데, 그 이유 또한 의외의 희극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계약으로서 사기인 기브앤테이크의 불균형” 때문이란다.   &nbsp;  한국사회도 형사상 범죄에서 ‘비범죄화’한 것뿐이고 여전히 민법상 불법으로 보고 있으니 간통에는 신의(信義)의 원칙, 즉 경제적, 심리적 균형에 대한 기대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깊숙이 응시하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일부일처, 집에 대한 환상이라는 뿌리와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집이라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이 경제조건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 간통에 대한 불안한 법적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nbsp;  <br>악의 예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디즘과 연결 지어 그 발음의 유사성을 지닌 ‘아베 사다(阿部定)’의 실화사건을 소설(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 영화화한(오시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 가학적 성욕을 둘러싸고 사다이즘이자 사디즘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며, 이들이 이러한 소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새로운 모럴,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사색과 행동의 제안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상에 악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 선이 있고, 습관화된 선행 속에 악이 있지 않은 지 자문해 보라고, 스스로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모럴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당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행복의 질서”는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nbsp;  이렇게 악의 예찬을 읽다 그의 “악의 숭배 속에 자유에 대한 인간적 욕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일상 파괴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이 예찬의 속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악을 숭배하는 것이지, 악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nbsp;  조금 시선을 달리해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비프야, 지금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안 돼. 모두가 너를 좋아해야 해.”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착각이 그를 하찮은 소시민으로 죽어가게 했다. 어떤 인간에 대한 확실한 평가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한 것이고, 욕을 먹음으로써 오히려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말끔하게 청결한 인간은 데라야마의 말처럼 무능한 인간이기 십상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의 시선에 속박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먼저 욕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데라야마의 충심은 스스로 얽어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nbsp;  아마 이 책을 구성하는 무수한 주제를 지닌 작은 글 조각들은 그 가리키는 곳의 삶의 엄중함 탓에 거의 모두가 매혹의 색채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약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가난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극적 연민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연대의식에 대해 막연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실체적인 책임과는 관계없이 분위기적 책임의식으로 치환하여 실질적인 무책임을 가린다.    &nbsp;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 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센 강가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수영도 할 줄 모른다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 후 그는 강가 길을 피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걸으며 다시는 그런 갈등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요령을 부린다. 죄책감, 위선, 기만과 심판의 문제가 뒤섞인 이 장면은 오늘의 시대가 책임의 문제, 인간 윤리의 문제를 엄중히 시험대에 올려야 할 사안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문제들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수히 건네며,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nbsp;  사실 이 책으로 이끈 동기는 정기현 작가의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의 짤막한 소개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제안, 데라야마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집’에 대한 가능성의 소망이었다. 데라야마의  「말을 거는 날」이라는 글은 진짜배기 소통, 대화, 사교를 잃어버린 오늘의 사회 속에서 소외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과의 친교, 아니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임의 제안을 보게 된다.    &nbsp;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임,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 등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지는 작은 모임이 많이 열려도 좋을 것이라며,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듯 대화내용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카타르시스를 향한 모임은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모임이 있다면 기발한 문예의 향연이고 친교 성장의 토양이 될 법도 하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기념일처럼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날로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법하기도 하다.  &nbsp;  반짝거리는 생의 걸음 길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빛나는 이 책은 그것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맥락을 주의깊은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 그 부정과 저항의 몸짓들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삶의 생동력임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몰라 옮기는 것으로 맺으련다. 삶의 미묘함이란...  &nbsp;  “모두가 착한 사람이고, 날씨도 좋고, 작은 새들도 지저귀는 데 일어나는 비극...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사랑이나 증오는 사악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미묘함과 닿아 있어서 세 배로 눈물 나는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01/60/cover150/k7128380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01606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랑의 찬란한 빛;  낙원의 기억 -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1219</link><pubDate>Thu, 30 Jul 2026 1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212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01&TPaperId=174212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70/32/coveroff/k0421301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01&TPaperId=174212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a><br/>전경린 지음 / 김영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생과 사의 균형추가 어느 사이엔가 점차 죽음에 무게가 실리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이를테면 무기물이 되어 가는 과정의 시작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 이후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을 형상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들에는 기쁨과 행복의 웃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프고 아쉬운 것들과 때론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도 있지만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조차 소중한 감정으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  &nbsp;  아마 자신의 어린 시절 어느 때의 시간을 그리는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의 화자도 따뜻하고 충만한 기쁨의 기억들뿐만 아니라 원망의 그늘을 드리웠던 슬픔과 흐느낌들을 더 없이 미소를 짓게 하는 자기 생의 원천으로 보듬는다. 그래서 화자는 “누구나 자기 생의 밑바닥에 휘황한 보석이 깔려 있을까?” 라는 물음에 바로 긍정하며,  “어린 시절에 묻어 두었던 보석의 황금빛 광휘” 라고 말한다. 화자는 “나라고 하기엔 너무 먼 그 아이를 새별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억 속 어린 자신은 ‘새별’이 되어 무한 생명성을 품고 환하게 살아난다.   &nbsp;  “슬픈 건 연못 같은 거야. 마음에 틈이 있는 것처럼 저절로 물이 새어 들었다.” -16쪽  &nbsp;  작은 틈새로 물이 새어 들어 연못이 되듯, 기억의 못에 자기 삶을 밝혀주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시간들이 마음에 가득 들어찬다. 딸아이에 대한 소홀과 방치를 그것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새별이의 슬픔은 마을 친구들, 언니들과 키득거리며 웃음 짓던 장면들과 엄마, 아버지로부터 거부의 손짓으로 내쳐지는 봉연 할매의 따뜻한 등의 온기, 웃음이 옆구리에서 자꾸만 터져 나오던 달구지 타고 장터로 가던 길의 추억들이 감싸며 삶의 자양분으로 포용된다. 수많은 웃음과 눈물을 지닌 낙원(樂園)으로서.  &nbsp;  소설은 이처럼 어린 새별이의 낙원의 기억들이지만, 그것은 틈새로 스며든 간절한 흐느낌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새로운 동력으로서의 생명을 얻은 귀중한 감정들로 수용하게 되었을 테다. 왜 그 시절 엄마들, 사람들은 그토록 질긴 편견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항상 오빠, 남자아이가 우선되고 남은 찌꺼기만을 겨우 눈치 보며 긁어야만 하는 지독한 차별의 시선은 모진 세월 다 겪어 세상에 그 어떤 업보도 남기지 않게 된 봉연 할매의 세대를 건너 뛴 천륜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사랑으로 감싸진다.  &nbsp;  그 모든 차별과 무관심의 슬픔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관류하는 “댓잎과 구름을 흔들”만큼의 새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들은 “작은 종이배처럼 접혀” 새별이의 마음에만 닻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시선도 한동안 머물게 했다. 그 일화적 장면들을 꺼내 올리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가에서 마을의 가장 친한 친구 재남이와 발가락으로 다리를 간질이고 달아나며 깔깔거리고, 함께하던 마을 언니들과 웃음을 터뜨리며, 뱃속이 간지러워 자신도 웃음을 터뜨리는 새별이의 천진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nbsp;  마을 사람들이 찍어 회피하는 사람들, 상이용사인 다리 하나가 없어 절룩거리며 걷는 희조 아재, 넋이 빠졌다는 복덕이, 뻘다니, 욕쟁이, 여장부로 불리는 봉연 할매도 새별이게는 무람없는 친교의 대상이다. 희조 아재의 절룩거림을 놀리고 달아나는 아이들의 무리와 달리다 누런 보리가 넘실넘실 춤을 추는 보리밭 한 곳을 깔고 누운 새별이와 풀꾹새, 여치, 신나게 웃으며 아이들을 좇다 어딘가에 자빠져 누워있을 희재 아재, 한나절의 이 장면은 차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nbsp;  <br>마을 언니들을 따라 놀러갔던 재실에 깜박 잠든 새 언니들은 모두 사라지고 금지된 장소에 혼자가 되었음을 자각했을 때 새별이는 두려움으로 운다. 그때 엄마와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내쳤던 봉연 할매가 새별이를 업어 집에 데려다 준다. 이 장면은 오래된 어떤 그리움 때문에 내게 하나의 깊은 인상이 되었다.  “허엉허엉 울자, 할매가 ‘어이구 내 강생이, 어이구 내 강생이’하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느꼈을 보호받음의 포근한 안락감은 그야말로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 언니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새별이는 자신이 아끼는 늘 업고 다니는 납작한 베개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주지 않는 결핍된 사랑의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nbsp;  소설은 이처럼 새별이의 흐느낌과 슬픔이 작게 새어들지만 그것들에 웃음의 밝은 빛이 비추어지면서 충만한 삶의 재료들이었음을, 지금의 나 자신의 빛나는 시간들이었음을 설득한다. 새별이는 엄마와 아버지, 형제로부터 살가운 보살핌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어린 새별이를 홀로 남겨두고 가족 모두가 서울로 가버린 날의 그 헛헛함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여섯 살짜리를 집에 홀로 두고 가버릴 수 있는 엄마.  장터에 봉연 할매와 함께 간 국밥집에서 듣게 되는 “눈도 크고 입매가 야무진 기, 참 이뿌게 생깄네예.”하는 국밥집 여주인의 말은 더욱 버려진 상황과 대비되어 화자의 슬픔이 강조되어 떠오르는 듯하다.   &nbsp;  “천지간에 혼자 된 아 속이 만신창이가 됐을낀데...” 하는 봉연 할매가 막이 할매에게 하는 천륜의 이야기는 새별이의 상황과 겹치며 아마도 이 소설의 중심 정서(情緖)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나는 고마 갸만 잘 살면 된다” 하는 그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내리 사랑, 천륜이 부모 자식 사이를 말한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새별이가 놀라 입을 벌리는 장면은 이 의미를 엄마로부터 듣게 됨으로써 더욱 기막힌 장면으로 다가온다. “와 그라는데?  아니야, 아니야.” 새별이 마음이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는 말은 깊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nbsp;  엄마로부터 돌아 온 말은 “속에 뭣이 들어앉았는지, 참말로 맹랑하기는.”이다. 이틀간 새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가족모두가 서울을 다녀 온 뒤 서울에서 찍은 사진에 새별이만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와 내만 서울에 없노. 나도 여기 있고 싶다.”라는 아이의 서러운 푸념, 친구 재남이에게 자신의 치마를 벗어주었을 때 새별이를 다그치는 엄마에게 “내 거는 없나? 내 거는 아무것도 없나?”를 외치는 새별이의 분노가 내 마음을 휘젓는다. 여기에 “그만한 일에 천륜을 입에 올리고, 아이고 여시 매구 같은 기.”라고 내뱉는 엄마의 말은 그녀의 딸아이에 대한 무신경의 수준일 것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산속 마을 집에 홀로 두고 이틀을 비운다는 것이 그만한 일일까? 그것에 천륜의 의미를 따져 묻는 것이 여우같은 짓인 걸까? <br>  &nbsp;“엄마 천륜이 뭐꼬? 아가 맹랑하거로, 그런 걸 와 묻노?부모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고 한다. 새별이는 놀라 입을 벌렸다.“ - 110쪽<br>고운 천조각을 붙여 알록달록한 베갯잇을 한 작고 납작한 베개가 새별이에게 다시 안길 때 어린 새별이는 다시 사랑의 대체물을 돌려받은 것일 게다. 사랑의 상징성을 지닌 이 베개가 화려하게 돌아 온 것은 아마 새별이가 그 어리석은 차별의 슬픔에도 사랑을 잃지 않는 매개였을 것만 같다. 소설은 빛나는 어린 시절 낙원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그것은 온통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것의 작은 틈새로 스며드는 슬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황혼의 삶에 이른 누군가에겐 자신의 삶을 이룬 귀중한 기록일 것이다. 남은 생을 이어갈 삶 의지의 원천으로서 말이다. 산 속 깊은 마을의 감나무와 길바닥에 깔린 감꽃, 너울거리는 보리밭 물결, 새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들, 깊은 숲 속 보슬비 내리는 소리 같은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술처럼 펼쳐지는 세계에 모처럼 잠겼던 시간이다. 그 포근한 추억의 시간들, 자기애도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찬란한 빛이 가득한 작품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70/32/cover150/k0421301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70327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괴물에 이름을 붙여주자; 아베고보를 다시 읽는 까닭</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14845</link><pubDate>Mon, 27 Jul 2026 14: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1484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0822&TPaperId=17414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4/90/coveroff/k882130822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556&TPaperId=17414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2/coveroff/s93293478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715X&TPaperId=17414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34/coveroff/893102715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2366&TPaperId=17414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702/17/coveroff/897682236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686637&TPaperId=17414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0/98/coveroff/895668663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14845'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제4간빙기』, 「S, 카르마 씨의 범죄」에 대해서  &nbsp;  읽어 본 적 없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중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재앙’을 기다리는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정글 속의 짐승」이라는 작품이 있는가보다. 이것은 명명(命名)이 세계를 길들인다는 관념을 설명하는 예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정체불명의 그 무엇, 인간 이해의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 분류할 수도 없어, 종(種)의 이름아래 포섭할 수 없는 개체를 우리는 흔히 뭉뚱그려 괴물이라 부른다.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것들은 이름이 부여되어 이미 인간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을 지닌 무엇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 안에 배치될 때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타자성이나 낯섦이 인간 세계의 인식구조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nbsp;  <br>이같이 미지와 기지가 야기하는 인식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름을 갖기 전의 그 무엇인 개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아직 세계 속에 자리를 얻지 못한 미지의 존재일 뿐이라는 이해를 갖게 된다. 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다. 아베 고보의 대표적 작품들(대개 1950년대 발표)은 국내에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이형(異形)신체의 존재들과 SF적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아베 고보의 작품에 대해 내 관심이 환기된 것은 컴퓨터 계산으로 일어나는 종적 변신의 문제를 다룬 SF장편 『제4간빙기』와 단편소설 「S, 카르마 씨의 범죄」에서의 신체의 물화와 변형에 내재시킨 다분히 21세기 현대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nbsp;  “괴물성의 효과에 의한 각성이란 예술의 정통성으로부터탈피와 동시에 현실 모순의 직시를 의미한다.”   &nbsp;  아베 고보는 대중에게 친숙한, 즉 그 기이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 당연시되는 타계(他界)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져 의문부호를 첨가하지 않는 취향(趣向)화 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깊이 도려내기 위한 가설(假說)로서의 기이한 신체, 이형의 존재들을 계보화한 작가이다. 그는 분열된 현실, 무엇보다 그에 직면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모순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 유형화된 괴기는 그저 괴기취미일 뿐, 괴물성, 낯섦에 직면했을 때 ‘순간의 망설임’ 속에서 타자로서의 괴물을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바라봄으로써 문제의식을 부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문학을 취향의 허구들인 괴기문학과 구별하여 ‘가설의 문학’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 그의 가설의 문학 작품들은 ‘괴물’에 의해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여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nbsp;  때문에 그의 소설이나 희곡작품들은 현실계와 충돌이나 갈등이라곤 없는 요정 또는 이미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동물원에 갇힌 괴수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내적 균열과 안정성의 파괴로 나타나고 공포라는 시대적 고뇌를 반영하여 불안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처럼 논리화가 거부된 것들을 배제하고 외면하여 자신들의 세계를 매끈한 균질적 안정성의 영역으로 만들어 그곳에만 시선을 고정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배제한 이름 없는 그것들에 논리가 부재하는 괴물성을 부과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논리화하는 순간 괴물성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괴물성의 사태는 우리들의 욕망과 인식의 지평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낯선 무엇에 대한 공포는 그것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틈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폭력과 비논리를 통해 희생시킨다. 아베의 작품들은 바로 이렇게 희생된 목소리들에 대한 논리화를 촉구한다.  &nbsp;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생각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상(異常)사태 앞에서 순간 망설이게 된다. 이 순간의 망설임을 판단유보라 한다. 이 유보상태에서 우리는 어딘가로 생각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 낯섦, 이질적 공포를 오감의 환각 또는 상상력의 산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두 갈래 선택과 마주친다. 아마 많은 대중들이 괴기물을 오싹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즐기는 것은 전자일 것이고. 후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 온 세계에 대한 인식방법을 뒤집는 전복의 선택이라는 경이로움을 통한 새로운 사유로의 행보가 될 것이다. 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 “고정된 탄탄한 질서로 간주되어 온 관념이나 개념, 정전(正典), 관습 등이 가변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에 나서게 된다. 그때 아베 고보 작품들의 이형화(異形化)된 신체들의 낯선 혐오와 공포는 현행의 규범적인 것들에 의문을 발하게 되고, 그 자체의 재인식을 촉진하는 전복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nbsp;   <br>「S, 카르마 씨의 범죄」의 주인공 카르마 씨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 커피숍에서 장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려 할 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윽고 자기 재킷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려하지만 그곳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것, 아니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인물이 된 것이다. 이름 상실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존재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서 흔들린다. 이 작품은 이름 없는 괴물이 주는 불안을 카르마 씨라는 인물을 통해 체현한다. 이름 없는, 즉 규정 되지 않은 존재는 새로운 규정이 가능한 공백이다. 카르마씨는 그 공허한 가슴으로 사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자기 동일성을 상실한 존재가 이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채워 넣음으로써 기존의 신체와 다른 새로운 이질적 신체성을 지니게 된다.  &nbsp;  이렇게 이질화된 신체의 존재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세상은 그를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소멸=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험인물로 찍혀 도망자로 변신한다. 이제 카르마 씨의 신체를 조사하기 위해 ‘성장하는 벽 조사단’이 파견되는 데, 이때 부단장 유르반 교수는 카르마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알아본 카르마를 향해 유르반(Urban;도시)은 ‘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부성(父性)을 부정한다. 아마 이에 대한 조롱 혹은 비난의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르반은 작게 축소되어 카르마 씨의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nbsp;  “아들의 체내로 회귀하고 다시 그곳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일종의 탄생을 겪는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권위의 위선과 경박함, 질서를 강조하지만 절서 체계는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후(戰後)시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시 권력의 주류로 복귀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철폐되어야 할 구질서 권력의 부조리를 향한 강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 한국사회에 그 비판인식을 그대로 이식해 읽게 되는데,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고 주류로 행세해 온 이 사회의 비틀린 기득권 집단의 천박한 탐욕의 끈을 끊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 분기점, 그 전환의 정점에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혹은 관료와 기업 등의 이해관계로 엮인 오랜 카르텔, 혈연과 지역이기주의의 타파를 위한 중대한 전환의 국면과 마주하고 있다는 자각이 떠올랐는데, 아마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신선한 새로움으로 읽힌다.  &nbsp;  “자본은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소모와 죽음에 의해 시장에서 철수하는 노동력을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해야 한다.”  &nbsp;   <br>한편 SF장편 『제4간빙기』 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과학기술주의자들과 자본이 결합한 컴퓨터 시스템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배경에서 70년 전의 작품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선견이 빛나는 매우 현대적 발상을 품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베 고보 텍스트들의 중요 모티브인 신체, 기계, 폭력이라는 문제가 정치와 합체된 과학테크놀로지와 신체 변형의 양상에 주목하며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특히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궁극적 목표는 일체의 외부가 없는 내적 논리에 근거한 자동운동”임을, 외부 없는 완전 자동을 목표로 하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자본의 폭력성을 통찰하고 있는 점이다.  &nbsp;  예언기계 KEIGI-1은 지구온난화와 지각변동으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육상 생활공간의 격감으로 지구 문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이때 테크노크라트들과 자본가들은 해저목장과 연구소를 은밀히 설립하고 인간 신체와 지구상 동물의 신체를 수서동물로 변형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종(種) 유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인간 태아를 사들여 유전자를 변형, 배양 사육한다. 과학기술자와 경제권력 연합은 환경변화에도 견뎌낼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출산, 보육 기계라는 더 효율적인 신체수탈 방법을 고안해 운용한다.  &nbsp;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의지를 묵살하는 형태로 진화를 이루어가는 양상이고, 테크놀로지를 자본의 존속을 위한 인간 신체지배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오늘날의 인공지능까지 상상해 내지는 못했지만 과학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어선 금지된 실험을 실행했을 때의 인류에 대한 후과(後果)가 만들어 낼 통제력 잃은 과학에 대한 윤리적 사유를 제안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빌리에 드 릴아당 『미래의 이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등의 통제력을 잃은 과학자들이 야기한 극한적 형태의 공포의 한 계보를 잇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괴물이 화면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이 드러난 후보다 더 무섭다.” 그 이유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과 직면해 그 낯섦을 그저 즐기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유, 논리 부재에서 논리의 부여를 통한 인간 인식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 낯섦의 외면과 배제를 넘어 이 세계에 자리를 부여하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미지는 항시 우리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들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름 모를 숲속의 야수에게 사자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실체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통제할 인식과 능력을 지닐 수 있다.   &nbsp;  이 사회가 배제한 타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고 괴물처럼 보여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나,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지능기계를 프랑켄슈타인, 에디슨, 스트레인지와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에 맡겨둔 채 환상에 갇혀 있는 어리석음에서 우리 자신들의 인식을 해방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다.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 언어의 현혹이 이 세계를 혼돈으로 잠식시키고 있다. 정작 요구되는 이름의 부여를 회피하면서 차별과 분리와 배제의 낙인을 찍어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인식의 편협성을 아베 고보는 집요하게 촉구하는 듯하다. 아베 고보는 오늘날 우리네 정치, 경제 현실 속 첨예한 문제들을 다각도에서 통찰한 작가이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 할 식민지 부역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은 오늘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nbsp;   <br>강자에 대한 르상티망(resentment), 강자 동일시(모방)라는 노예의 도덕이 활개 치는 이 땅의 현실은 존 W. 다워의 미국과 일본의 구질서와 공범관계임을 지적한 『패배를 안고서(Embracing Defeat)』(1999)의 다섯 가지 핵심 정책들에서 그 실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한일 간의 외교현실에 놓인 그 고착된 혐오의 배경을 안긴다. 부패한 권력 시스템을 묵인하거나 동조해 온 70여 년의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뿌리 깊게 타자상(他者像)의 양산과 르상티망이라는 역겨운 노예의식(미국과 일본의 의존적 찬양)에 집착하면서 국민을 분리해 왔는지를, 우리 내면에 심어진 심리적 의존성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nbsp;  진부한 얘기이지만 괴물, 이름 없는 것들, 낯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가끔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괴물이 출현하도록 만드는 비판정신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성의 눈을 크게 뜨고 그 괴물, 이형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아베 고보의 작품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비판의 경고 메시지들을 보내주고 있다.&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68/66/cover150/k9220364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568661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잔여와 얽힘, 그리고 친족 맺기 - [이웃집의 탐스러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04116</link><pubDate>Tue, 21 Jul 2026 17: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4041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98&TPaperId=174041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7/4/coveroff/k1221392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98&TPaperId=174041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웃집의 탐스러움</a><br/>정기현 지음 / 북다 / 2026년 05월<br/></td></tr></table><br/>“기은과 준영과 나, 우리는 이웃이다. 그리고 나는 이웃 그다음이 있다고 자꾸만 믿게 되는 것이다. (...) 내게도 세상에도 미지일 그다음 영역을 기꺼이 탐사해 보고 싶다.” -149쪽  &nbsp;  흥미로운 관점을 안긴 작품이다. 그것은 화자인 서른세 살 기현이 충주의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손이 닿았던 짐들을 가득 싣고 서울의 46제곱미터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여 그 공간을 넘어서 부려놓은 가구와 각종 기기들인 잔여(殘餘)물이다. 이 ‘잔여’의 소재가 소설 여러 플롯으로 가지를 뻗으며 그 인식론적, 존재론적 의미로 연결되는 구조의 경이로움이다.   &nbsp;  이웃인 기은과 준영과의 친교의 일상으로, 동네 축제 임시계약직으로 타인에 대한 미소와 배려의 행동으로, 축제 연극 무대로, 살인 사건과 이 세계에 범람하는 실제 호러의 영상으로, 그리고 새로운 가족 형태의 제안으로, 시간과 분산된 위치로서 잔여가 얽혀들며 그 여러 이야기들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접착하듯 705호 기현이 이웃인 706호 기은과 준영 부부에게 드리는 책으로서 써진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의 메시지인 “진짜 이웃관계를 당신들과 맺고 싶기 때문“임이라는 주제에 이르게 한다.  &nbsp;  짐으로 가득해 자기 집 현관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려 기현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길을 내기 위해 가구들을 하나씩 재활용폐기장에 내려놓기 시작한다. 문화비평가 리베카 슈나이더의 “오래된 것을 소거(掃去)하는 모더니티(자본주의)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물간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이 구절처럼 기현이 버린 가구와 각종의 기기들은 내려놓기 무섭게 사라져 이웃집의 공간을 채운다. 누군가에 버려진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킨다.   &nbsp;  이웃집 706호에는 “내가 버린 가구들이 새 주인 아래 새로운 질서를 얻어 갑자기 들이닥친 옛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물꼬가 터진 705호 기현과 706호 기은과 준영 부부는 밥을 함께 먹고 소소한 일상의 화제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즉 기현과 기은,준영은 ‘잔여’로 맺어진 관계다. 이로써 잔여의 부정적 의미의 폐기성과 같은 진부한 타령인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분별을 초월해 그 자체로 세 사람의 시간과 공간적 삶에 얽혀든다. 그러던 어느 날 706호에 기현의 것이 아닌 ‘손잡이가 달린 4단 새파란 나무 서랍장(또 하나의 잔여)’에 질투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nbsp;  평소 버려진 것들에 눈썰미를 거두지 않았던 기은, 준영이 주워온 것이다. 그러던 차에 TV뉴스에서 2년 전 벌어진 동장 납치 및 살해 사건의 중요한 단서인 새파란 나무 서랍장에 대한 소유자의 신고안내 방송을 보게 되고, 방송국에 동행하기도 한다. 슈나이더는 다층의 시간성과 분산된 위치성이 얽혀있는 것으로 잔여의 특성을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이제 새파란 나무 서랍장은 세 사람 이웃의 얽힘은 물론 과거 어떤 존재와 공간의 역사까지 얽혀든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기현 작가의 이 소설을 계속 읽도록 추동한 것이 바로 최초의 잔여인 기현의 짐 버리기와 그것의 위치 이동이고, 그 이동은 귀환하여 기현과 이웃의 관계 맺기로 얽혀들며, 또 다른 잔여인 파란 서랍장은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기억을 더한다.   &nbsp;  <br>잔여에 대해 얄팍하게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겐 잔여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옮겨져 채움이 된다. 그 잔여는 낯선 존재들의 관계를 매개하고, 옛 시간과 공간들의 기억이 얽혀든다. 그렇게 얽혀들어 새로운 현실적 질서로 재배치되어 어떤 미지의 형태로서 새로운 세계를 구현해 낼 가능성의 무엇을 품게 된다. 기현이 이웃집 706호의 공간과 사람들과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누고 교류하려는 것은 이 잔여의 매개로서의 성질이고, 이 잔여는 또한 기원(基源)의 문제에 가닿는다. 그래서 기현은 자신의 기원을 풀어놓는다.  ‘가문이야기’에서 기현은 이야기 수집가인 부모에 관해 말하던 중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말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자면 그곳에는 늘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nbsp;  기현은 타인의 말과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의 시선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타자와 자기가 분리되지 않은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은 존재의 감각을 지닌 사람이 보인다. 잔여에 얽혀있는 시간과 공간적 다층성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발하는데 단지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되기(becoming) 상태에 있는 기억에 대한 질문으로서 새로운 관계들과 잠재성들을 소환하는 사건에 가깝다는 점이다.  &nbsp;  이것은 소설에서 기현과 기은, 준영이 함께 공연하는 축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연극을 하는 것인데, 이 연극의 내용이 2년 전 동장 살해와 사체 유기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고, 파란 서랍장은 그 사체 유기공간의 소품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공연이 완료되지 못한다. 이 연극 무대는 살아있는 것과 지나간 것이라는 정식 사이 미결의 공간으로서 잔여의 또 다른 측면인 교차 시간적 참여의 사유를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은 세 사람에게 분명 슬픔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당혹이었을 것이고, 706호에 모인 세 사람의 침묵의 대화 속에 기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때 개척교회 부목사인 준영은 기현의 마음을 토닥이듯 그녀의 손을 따뜻한 온기로 감싼 채 기도를 올린다. 기현의 마음의 목소리는 “부부가 되면 이렇게 매일같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거야? 부부란 좋은 것이구나.”로 나지막이 울린다. 이로써 소설 제목 ‘이웃집의 탐스러움’이 기현의 관점임이 분명해진다.  &nbsp;  동장의 살해 사건은 2년 전의 사건과 연관이 없음에도 두 번째 동장 살인사건이라 명명되어 거듭 재생 확산된다. 기현과 기은, 준영은 매주 금요일마다 세상의 탄식소리를 묵묵히 듣는 일로서 “동급생 열 손톱 밑에 바늘을 꽂아 넣은 열다섯 아이, 잘 벼린 장검으로 애인 목숨을 반만 베곤 참된 대화를 나누었다는 어느 중년 이야기, 관리인을 때려 죽인 노숙인 이야기,  희생자 수를 경신해나가는 연쇄 살인마인 일명 ‘첨단의 살인마’에 대한 영상”들을 시청한다. 이들은 왜 현실세계는 언제나 허구의 호러를 능가한다는 실체를 보았을까? 기현은 그 호러같은 현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그럼으로써 그 두려움으로부터 적어도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호러 장르의 순기능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nbsp;  어쨌든 기현은 기은과 준영을 위해 쓰고 있는 이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남김없이 박박 긁어 보여드리는 것”으로서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웃 간의 다정한 교류를 넘어 “맞잡은 손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죠. 너무 따뜻했고 왜 내게는 그동안 이런 감각을 선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걸까 슬프기도 했고요. 나도 배우자라는 게 되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격식 차리는 친밀함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친밀함이 이웃사이에 허락된다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안의 꿈에 이른다. <br>기현, 기은, 준영은 물론 그네들의 집에 (재)배치된 사물들은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 형성되는 , 즉 그들 모두는 관계의 결과에 의해 어떤 존재가 비로소 된다. 페미니스트  물리학자 캐런 바라드(Karen Barad)가 제안하고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가 수용 발전시킨,&nbsp; ‘관계가 존재보다 먼저이며, 개체는 관계의 결과’라며 ‘함께 만들기(sympoiesis)’라고 명명한 ‘친족 맺기(making kin)’의 실천 형상 같기도 하다.  &nbsp;  또한 잔여라는 이동과 얽힘으로 비워진 것에 기현은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잔여로 이미 채워지고 얽혀있는데 다시 그것에 새로운 무엇을 채운다는 생각에 조금 거북한 반감을 느꼈다. 그것은 비워져 텅 빈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배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현은 잔여를 잘 못 생각한 것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 데라야마 슈지의 소설  『가출 예찬』과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최인훈, 손턴 와일더의 작품이 기현의 독서 경험 몇 가지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세상에 있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기현이 소망하는 이웃 그 다음이 있다고 자꾸 믿게 하는 그 미지의 영역은 무엇일까?    &nbsp;  서로의 기원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기원으로부터 존재들의 서로 얽힘의 관계를 길어 올리고 싶어서일까? 점점 타인에 대해 냉랭하고 잔인한 시선이 고착화되고, 새로운 물질 생산이 마치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비자본주의 세상에서 잔여의 의미를, 그 얽힘의 사유를 제안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가능할지 회의를 떨치기가 쉽지 않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현실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는 현실에서의 용기 있는 실천의 제안이 정말 이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들릴 수 있기를 바란다.<br>“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말을 걸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날을 하루 만들어&nbsp;전국에서 단체 미팅하는 날처럼 지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데라야마 슈지, 『가출 예찬』, 「말을 거는 날」 161쪽에서<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7/4/cover150/k1221392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7041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호러(Horror)의 계절: 성찰과 쾌락 사이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link><pubDate>Sat, 18 Jul 2026 17: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9489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54/94/coveroff/895279489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91283210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841/54/coveroff/d8028324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536785&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217/85/coveroff/k71253678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775X&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98/68/coveroff/896017775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832939513&TPaperId=17398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860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이 글은 듀나의 책《공포의 문법》과는 그 이론적, 경험적 지평을 달리하며,&nbsp;&nbsp;다만 참고 도서의 하나임을 밝힙니다.<br>“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nbsp;  무더위의 계절이면 독서나 영화 시장은 슬그머니 호러(horror)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대체 인간의 원시적 감정인 공포를 자극하려는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곁에 머물러 마치 더위와 결합한 계절상품처럼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습관적 계절 행위에 편승하듯 30년 가까이 익명을 고수하는 작가 듀나의 《공포의 문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nbsp;  <br>그는 호러 작품들을 열거하며 독자,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섭게 하려는 작품들의 테크닉에서부터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나 진실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서의 호러 장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결론에 가까운 장들에 이르러 실제 현실의 사악함은 언제나 허구를 뛰어넘는다고, 호러는 이처럼 사회의 억압된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의 괴물성을 들추어내어 인간과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호러의 사회적 가치는 사람들을 단순히 무서움에 떨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nbsp;  그러면서 자극과 쾌감만을 소비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극만을 소비하는 디지털 환경 세계 속에서 마비된 지각과 편협성으로 인해 호러 작품들의 사회적 가치의 의도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호러 작품들이 왜 오늘에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의 독자적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 많은 질문을 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답변이 있다. 사람을 오싹함과 무서움으로 놀라게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평소 외면하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에 살아남았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공포를 이용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인간은 죽음, 질병, 타인의 적의, 신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근원적 불안을 살아가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기에 이 억압된 불안을 형상화함으로써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그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접하게 된다.  &nbsp;  그런데 이러한 일사천리의 답변들은 그리 명료하지도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여겨지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그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호러 작품들은 이러한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독자나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락산업으로서 폭력의 잔학성, 괴이한 공포를 안전한 장소에서 즐기는 쾌락의 소비를 판매하는 상품이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호러는 노골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판매하는 상품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고어(Gore)부류나 슬래셔(slasher film)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보다 신체훼손의 충격 자체를 상품화하는 감각소비 중심의 상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창작, 제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장르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과연 그것은 진정 공포를 이용해 무언가를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유를 명분으로 공포를 소비하는 자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장벽이다.  &nbsp; <br>  호러가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건드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변신》, 《샤이닝》과 같은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기를 즐긴다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에 오래전부터 이같은 모순이 존재해 왔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호러를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진실을 탐구하는 장르라고 평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산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nbsp;  그럼에도 우리는 호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감각을 이용하는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사회비판까지 하나의 소비상품이 되는 오늘이기에 호러의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장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조차 상품의 포장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남는다. 왜 굳이 공포를 재현하는가? 수많은 비극, 전쟁영화, 범죄실화물, 심지어 뉴스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전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 재현은 진정 성찰인가, 아니면 소비인가?   &nbsp;   <br>《공포의 문법》에서 저자는 호러 작품들에 표현되는 공격성과 잔혹성이 이미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호러 작품이 새로운 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내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좀 더 냉철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호러 작가들이 그려내는 그 소름끼치는 표현들, 장면들의 충격적 이미지가 과연 사회를 구현하고 인간을 개선하는 도구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혹은 인간의 얇은 표면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진단 장치인 것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nbsp;  상기 책의 14장 「남은 것들에 대하여」에는 아버지 앞에서 이스라엘군이 22개월 어린아이를 고문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우리들은 아마 그 영상의 댓글에는 ‘아이를 괴롭혀서 안 된다’라는 보편적 윤리 준칙에 해당하는 글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거기엔 그러한 글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을 즐기며, 나아가 잔악한 글들로 도배되는 의외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보다. 자, 이미 현실 세계는 허구로서의 호러가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잔인한 곳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사례를 저자가 쓴 까닭은 이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호러 문학, 영화 따위가 무슨 순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의 배경으로 인용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미 실제 이러한 공포의 세계가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nbsp;  이는 호러의 세계를 작품화하는 것에 더욱 현실적 의혹을 강화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 억압 문제를 드러내 성찰을 요구한다는 명분의 그 어떤 기만성 아닌가라는 의심 말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온라인 사회관계망이 보편화되기 전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이러한 정당성의 변론 가능성이 잔존했지만 이제 그런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허구적 호러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물의 장르 무용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다. 사회적 불안을 가시화한 언어로서, 타자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세상에 우리는 도달해 있다.   &nbsp;   <br>이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려는 오래되고 강력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장르에 대해 그것이 과연 소비하는 장치인지, 성찰의 장치인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더욱 민감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각성의 변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문화산업은 비판마저 상품으로 소비시킨다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낙관론에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력과 잔혹성을 재료로 공포를 효과로 이용하는 장르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감수성의 둔화로 더 큰, 상상 초월의 잔혹성으로 무감각한 비도덕의 지대를 일상화 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감각의 작동이 멈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nbsp;  안전한 거리에서 공포를 경험하는 것,  마치 비극을 보며 슬픔을 경험하듯, 실제 위험은 없지만 위험을 체험함으로써 긴장과 해방의 감정을 얻는 것은 분명 일상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어떤 순기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자극에 머문, 하나의 쾌락으로서 감정의 소비에 머무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을 괴물화하는 하나의 무감각의 양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게 된다.  어쨌거나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드거 앨런 포,  H.P러브크래프트, 스티븐 킹, 아니 그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그리고 발 루튼, 조지 로메로, 스탠리 큐브릭, 리들리 스콧, 마틴 스코세이지 등 지난 호러 걸작들을 살펴 볼 일이다. 특히 스티븐 킹이 원한을 삼켰던 자신의 소설 《샤이닝》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던 큐브릭의 작품과 비교하며 그 맹렬한 거부감을 들끓게 했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주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 사이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지 흥미로운 과제를 풀어보아야 할 것 같다.<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에드거 앨런 포의 &lt;아서 고든 핌 이야기&gt;는&nbsp;&nbsp;‘심스의 구멍Horror)(Symmes Holes)’이라 불리었던 '지구공동설'과 관련한 SF상상의 한 자락을 발견하는 새로운 독서가 되어줄 듯하다. 19세기 남극이 상징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아는 세계 밖의 공간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656/60/cover150/89919319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56608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온 세상을 품은 사랑이라는 것 - [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1613</link><pubDate>Tue, 14 Jul 2026 18: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9161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030336&TPaperId=173916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64/2/coveroff/k2720303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030336&TPaperId=1739161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a><br/>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09월<br/></td></tr></table><br/>치열한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 중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 즈음의 내 습관적 행위가 이어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학교가 있는 계동 골목을 내려와 당시 유일한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의 생활패턴이었다. 정말 오래된 시절의 얘기지만, 결코 오래전 얘기로 기억되지 않는 얘기다. 어쩌면 그 시절의 책 읽기가 내 언어와 태도와 행위를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nbsp;  막스 뮐러의 책은 아마도 아껴 모은 돈으로 한권이라도 더 읽기위해 값싼 문고본으로 서너 권씩 구입해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판본이나 제본형식 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을 법하지만 그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튼 세상 얘기들이 마구 전파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순박한 소년에게 진실의 사랑이라거나 순진한 사랑이라는 사랑에 수식어가 붙어있는 이 유별한 사랑의 담론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마리아와 화자와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남긴 상실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을 것이다.   &nbsp;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한 뼘만큼 성장했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화자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라는 고요한 신비의 숲”에 대해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그 고요한 신비의 숲 속에 있었으니 알 턱이 있었겠는가? 요즘 부쩍 소년기의 시간이 자주 떠오른다. 어쩌면 그 때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으며 온 세상에 속했던, 영원한 삶을 살았던 시간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이 책 『회상(Memories-A story of German love)』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하는 화자의 물음이 괜한 수다를 떨게 했다.  &nbsp;  <br>이제 막스 뮐러의 “순수하고 깊은 사랑,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의 풍파를 겪은 듯하다. ‘좋아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 라는 낯선 규칙과 후작 부인은 남(他人)이고 신분도 높은 사람이니 더욱더 어머니에게 하듯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예의, 이것을 깨닫는 순간, 아마 어린아이로서의 세상은 종말을 고했을 터인데, 나는 그 순간에 해당하는 정확한 장면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내겐 순수한 사랑이라 말할 것이 없고, 언제나 이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이 아닌 변덕스럽고, “뜨거운 사막 위에 뿌려진 빗방울처럼 스스로 소멸”하는, 또는 “타오르다 꺼지고 마는 불길로 온기를 주기는커녕 연기와 재만” 남긴 이기적이고 의심 많은 사랑에 대한 기억만이 주렁주렁하다.  &nbsp;  여기서 사회적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니 하는 그 어떤 윤리적 삶의 태도 같은 걸 길어 올릴 생각은 없다. 마지막 회상까지 여덟 번의 회상의 기록이 분리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른 기록이기는 하지만 각 회상(回想;memory)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첫 번째 회상」에서 화자가 다 잊은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를 말 할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와 달리 내겐 어머니가 들려주고 가리켜 보이던 별자리와 성스러운 노래 소리가 없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이기적인 분이셨고, 자식들에게 냉엄한 분이었다.  내겐 화자처럼 머릿속까지 스며든 어머니 손에 들린 한 다발의 보라색 꽃 싱그런 향기를 지닌 오랑캐꽃도 없으며, 별에 감탄하며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도, 영혼을 속속들이 파고든 경쾌하고 성스러웠던 찬송의 노래 소리도 없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한 인간의 품성을 만드는데 귀중한 것들일 것이다. 화자의 고귀한 품성, 인간애에 대한, 모든 존재의 우주적 얽힘에 대한 감수성은 이렇게 스며든 것일 게다.  &nbsp;  “남이 뭐예요? 나를 예쁘게 봐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다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건 괜찮단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아.“ - 「두 번째 회상」, 28~29쪽  &nbsp;  「두 번째 회상」은 화자가 여섯 살 쯤 부모와 함께 후작(marquess,侯爵)의 성을 방문했던, 자신도 모르게 후작 부인에게 입맞춤을 함으로써 버릇없는 아이로 질책 받던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경계 없는, 나와 너라는, 사회적 신분이라는 분류체계가 스며들지 않은 아이에게 그 오염된 질서와 규칙이 처벌로 가해졌을 때 아이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너는 봄철에 벌써 꽃잎을 뜯기고 날개의 깃을 뽑히는 구나.”라고 탄식하는 이의 아쉬움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던”,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인 사랑에 대한 침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nbsp;  아이의 사랑의 샘은 이때부터 막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메말라간다. 더 이상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은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과 윤리 규칙 등이라는 이름으로 무례이자 범죄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세상은 작열하는 격정, 타오르는 정열, 요구하는 사랑만을 사랑이라 말한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제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푸념하면서 거듭 첫 사랑, 첫 경험의 강렬함을 쫓는다.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솔직함, 자기존엄의 욕구라고 정당화한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겐 고독만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nbsp;  「세 번째 회상」에서는 사물에 대한 소유,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진정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조용한 사색이 흐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황금 팔찌가 해낼 수 있다면 소년은 당당하게 그것을 내어줄 수 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 낸다. 이 회상에는 타인의 아픔, 고통에 대한 나눔의 감수성이 백작 지위를 가졌으며, 심장병을 앓고 있는 후작의 딸 마리아와의 최초의 기억으로 옮겨간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리아가 형제자매들에게 반지를 나눠주는데, 마지막 하나의 반지가 남았을 때, 혈육이 아닌 화자에게 반지를 빼 건넨다. 이때 화자는 그 행위가 그녀의 희생임을 안다. 화자는 반지를 다시 돌려주며 말한다. “이 반지는 날 주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니까.” 화자는 세상이 강요하는 규칙들에 저항한다. 사랑이라는 태곳적 본래의 감수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화 된, 아니 사랑이란 말이 너무 오염되었기에 우리는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이미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늘.   &nbsp;  「네 번째 회상」에서는 기억 속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학생이 된 화자는 방학시즌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한다. 후작의 성(城)에서 어린 시절 함께 놀던 공자(公子)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성주가 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관계로 더 이상 친밀한 벗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거의 날마다 이름을 불러보고 그리워했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 아마 화자는 마리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존재라면 그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다. 편지가 전해진다. 마리아가 화자를 초대하는 그토록 갈망했던 영혼으로부터. 재회, 재발견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한 회상의 기록이 이어진다. “우리는 옛 친구잖아요”라는 말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서로 소개하지 않고도 함께 노래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새들의 그 다정한 정경을 떠올려보며 그 어울림, 사랑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상념을 펼쳐보기도 한다.   &nbsp;  이후 「다섯 번째 회상」에서 「마지막 회상」의 기록들은 마리아와 화자의 봄날 아침처럼 맑고 신선한 영혼들의 고귀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아마 사랑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이미 이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러나 속마음 숨기라고, 그렇게 숨기는 일이 예의요, 분별력이며, 현명함이라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회는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것을 억압한다.   &nbsp;  온갖 강제로 억압되어 실종된 사랑, 그 잊어버린 사랑이 매슈 아널드의 詩 &lt;파묻힌 생명&gt; 속 생명의 강이 되어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한다. 화자는 이 시(詩)가 수록된 시집을 마리아에게 전한다. “나의 고백이었다”고, 장시(長詩)인 까닭에 세 연(聯)만 옮겨본다.  &nbsp;  지금 우리 사이에 가벼운 농담 오고 가지만보라, 눈물 고인 나의 눈을이름 모를 슬픔이 가슴을 울리누나.  &nbsp;  그렇다! 그렇다! 우리는 안다,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고미소도 지을 줄 안다.그러나 이 가슴에 무언가 있어그대의 농담 안식이 못 되고그대의 미소 위안이 못 된다.  &nbsp;  .......中略.....  &nbsp;  예견된 운명, 변덕스러운 아이가 되어때로는 장안에 마음을 빼앗기고때로는 온갖 싸움에 몸을 던지고본성마저 변하는구나.그러나 운명은,변덕스러운 장안 속에서도순수한 자아를 지키고존재의 법칙에 순응케 하기 위해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에 명령하여우리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흐르게 하였구나.그래서 인간의 눈은파묻힌 그 흐름을 보지 못하고장님 같은 불안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정처 없이 흐르며영원히 떠도는 것 같구나........後略...........  &nbsp;    &nbsp;【꾸밈 없는 마음, 진실의 사랑, 사랑의 추억 등 꽃말을 지닌 보라색 오랑캐꽃】<br><br>“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 「마지막 회상」, 145쪽  &nbsp;  마리아와 화자의 정기적 만남은 심장병을 앓는 마리아의 생명에 위험신호를 발하였는가보다. 후작 가족의 주치의로부터 자네 탓이니 그만 찾아가라는 완곡한 부탁을 받는다. 인간에게 위안과 사랑을 앗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을 위한 고귀한 보호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화자가 마리아를 설득하는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의 것이라는 공상적 사랑의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것뿐이라며, 속속들이 이해가 되는 인간처럼 우리를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는 내 협소한 경험이 거부할 말을 찾지 못한다. 사랑에 무슨 윤리적 합리주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nbsp;  “신은 너에게 고통을 주셨지만 또한 나를 너에게 보내 그 고통을 나누게 하셨어. 그러니 너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어야 해. 우리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해.” 이 말이 화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마리아로부터 마침내 “나는 너의 것이야. 신의 뜻이라면,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너의 것이야”라는 생의 마지막 인사인 편지를 받는다. 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다 잃어버렸음을 감사하게 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이제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내 사랑의 기억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을 남들과 연결되었던 기억에서 사라진 어린아이인 나를 찾는 걸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그 순수의 시절을 향해.]]></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64/2/cover150/k2720303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64020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백치(白痴)와 다정한 서술자, 그리고 어린아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link><pubDate>Thu, 09 Jul 2026 17: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950&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78/80/coveroff/k64213795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09288&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98/22/coveroff/893290928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3436&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307/17/coveroff/895468343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77&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15/30/coveroff/89374649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2968&TPaperId=1738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85/64/coveroff/893202296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8284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다섯 살 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얼굴을 디밀고 눈을 마주친다. 그 생글거리는 아이에게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그 존귀한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나도 “안녕”하고는 “몇 살이야?”라고 친근함을 표현한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nbsp;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아직 거절로 인해 내려앉아본 적 없다. 아이에게는 아직 ‘나’의 테두리가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나’와 타인은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의 타인들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nbsp;- 평론가 김예솔비, 「나에게서 나에게로」, 『유령들』  &nbsp;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의 회복을 사유하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라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 글은 순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상 수상 강연의 글인 「다정한 서술자(Tender Narrator)」의 4인칭 서술자의 다정함에 가닿았고, 다시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치(Идиот, The Idiot)』의 미쉬킨 공작, 그가 말하는 스위스에서의 삶의 한 에피소드인 어린아이들과 사랑이야기의 연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Corpus)』의 몸의 존재론,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있음(being-with)'으로 이해하려는 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까닭일 것이다.   &nbsp;  이러한 연상은 이 존재론적 얽힘에 관한 사유가 갑작스레 새롭게 대두된 물음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다섯 살 꼬마 아이처럼 낯선 사람에게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감성을 보이면 오늘 우리들은 왜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회적 분류 체계 이전, 즉 사회적 정체성 이전의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아이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라는 ‘존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  &nbsp;   <br>이 물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야기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초반부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아마 이 장면이 소설 전체의 의미를 이끄는 열쇠의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이 스위스에서의 4년간 병 치료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 성(saint)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 간 곳은 미쉬킨 공작 가문의 먼 친척인 예빤친 장군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집이다. 여기서 미쉬킨은 리자베따와 그녀의 세 딸에 둘러싸여 스위스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nbsp;  【『백치』 1부 챕터 7에 등장하는 주제 전체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 예빤친 장군 부인과 세 딸 앞에서 미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장면】  &nbsp;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는 불행한 여성 마리를 아이들이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미쉬킨이 하려는 말은 타인을 판단하려는 시선이 아닌, 존재 자체, 즉 상처입은 사람을 보면 다가가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사회적 낙인보다 그 사람이 입은 고통 자체를 먼저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순수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의 감각’이라는 차원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그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이 사회적 분류체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죄인과 정상인, 성공자와 실패자,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의 구분이 굳어지지 않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의 감각이다.  &nbsp;   <br>그는 타인을 하나의 범주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 혹은 ‘나’의 연장(延長)‘으로 느낀다, 여기서 미쉬킨과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ten der narrator)'가 만난다고 여겨진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가까이에서 주의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정함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지닌 서술자를 4인칭 서술자로 명명하고,  그것은 모든 인물의 시선을 품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 바라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의 연결을 보는 시선으로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말한다.   &nbsp;  이와 정확하게 상관하는 인물로서 미쉬킨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개별적 자아로 보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다. 토카르추크의 4인칭 서술자가 문학적 장치라면, 미쉬킨은 바로 그것의 인간적 구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차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이러한 감각은 거의 종교적이다. 미쉬킨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실패하기에 『백치』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반면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은 구원이라기보다 연결성의 인식에 가깝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심지어 초월적 시간 속 존재까지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을 미쉬킨의 존재론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nbsp;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고상한 것으로 속이 가득 찬 분이시다.” -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아무것도 모른 주제에...백치 같으니!” -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nbsp;  미쉬킨 공작에 대한 이 두 상반된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하는 인물의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아니 그 인물의 됨됨이 자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미쉬킨의 이러한 어린아이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그의 육체가 품고있는 간질발작과 결합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는 순수함이 아니라 백치(白痴)성으로 읽는다. 미쉬킨이 앓고 있는 간질은 여기서 사회적 낙인의 상징이 된다. 병든 몸,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존재,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미쉬킨의 자리를 위치시킨다. 즉 미쉬킨의 일면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민이 간질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결합되어 영적 순수성과 육체적 취약성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인간 세계에서의 타자성 충돌의 봉합은 영원한 불가능성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쉬킨의 간질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과연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육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nbsp;  미쉬킨은 그 어떤 존재이건 사회적 범주 그늘아래 덧씌워진 존재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고통받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야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킨은 사회 분류 체계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그 분류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미쉬킨과 아이들은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다. 결국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가 백치로 이해하고자하는 미쉬킨이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은 결코 미성숙함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잊어버린 원초적 관계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nbsp;<br> <br>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나 김예솔비의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에 편재하는 유령으로서 ‘나’,&nbsp;&nbsp;낭시의 타자란 존재의 조건 자체라는 ‘관계성에 놓인 존재’는 같은 지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들 모두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혐오와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꼭 내 혈족, 이웃, 동료, 동일 이해집단의 고통만이 고통이 아니다. 우린 애초에 서로 얽힌 존재이다.   &nbsp;   <br>사회적 상징이 축조해 놓은 나와 너의 경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감각의 회복은 기계생성 시대에 돌입한 오늘 더욱 필요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상징적 세계의 축조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감수성, 사회적 분류 체계에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존재들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nbsp;<br>『백치』는 가장 성스러운 인물이 현재 세계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끝날 수 없는 작품, 생각해 볼수록 새로운 연결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작품이어서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이의 손을 잡으려는 시원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회복은 불가능한 염원에 불과한 것일까?<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90/98/cover150/89497066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90983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타인에게 무람없이 손을 내미는 기억 저편 ‘나’들의 이야기 - [유령들 4]</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8530</link><pubDate>Tue, 07 Jul 2026 1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85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0697&TPaperId=173785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8/47/coveroff/k15213069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0697&TPaperId=173785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령들 4</a><br/>최미래 외 지음 / 스위밍꿀 / 2026년 07월<br/></td></tr></table><br/>이러한 문학잡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지은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책의 몸피는 여느 소설집 또는 시집과 같은 단행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에 매혹된 것은 책표지의 안 날개에 작게 써진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이어진 ‘유령의 목소리가 때론 와글와글 그리고 소곤소곤 들려주는 목소리’에 대한 이유 없는 끌림이었다. 이 작은 문학잡지 《유령들(ghost friends)》 Volume4.에는 소설 세편, 네 편의 시, 두 평론과 에세이가 소박하지만 밀도높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nbsp;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말했던 4인칭 서술자로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 따르는 감정을 그대로 기술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전달해주는 충실한 대변자의 음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나에게서 나에게로」에서 말하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으로서 우리들이 망각 저편으로 던져버린 잃어버린 목소리로서의  ‘유령들’이기도 할 것이다. &nbsp;  소설가 권혜영 작가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도깨비라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로 인해 가장 직관적으로 유령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게, 가야당이라 불리는 허름한 구제숍을 맡아 운영한다. 인수인계도 없이 돌아가신 탓에 화자 ‘나’는 할머니가 기록해 둔 업무일지를 지침삼아 미숙하나마 관리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괴생활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도깨비 가족을 데리고 방문한다. 물론 도깨비들은 “쉬었음 청년과 은둔 중년, 쪽방촌 노인, 쓰레기집 주민, 중독자”처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속 존재들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메리트를 이용해 지식과 경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배제된 자들의 회복과 자립을 지원하는 대기업 운영 집안을 요괴라 지칭한 것은 흥미롭다. &nbsp;  도깨비와 요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의 향연은 건너뛰기로 한다. 한 달도 못 돼 도깨비 가족은 갱생프로젝트에서 떨려나고 공무원이 그들을 인솔하고 ‘나’에게 봉인을 의뢰하기 위해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이들 유령적 존재들을 봉인이라는 절대 감금의 처벌권을 가진 인물이다. 봉인 하루 전날, 이들은 한바탕 흔쾌한 춤과 떼창으로 어우러진다. 이를 방관하며 어울리지 못하던 ‘나’는 사물 상태로만 있으려는 백소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잘 들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나’는 귀를 기울여 그네들의 시끄럽기만한 소리를 비로소 서서히 듣기 시작한다. 엉망이면서 묘하게 기승전결이 있는, 세상과 부딪치는 데도 완전히 매력 있는 선율과 보컬을. 이윽고 ‘나’도 그들에 끼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천천히 적는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춤추게 만든다.”고. &nbsp;  이 세계의 요지경을 흔쾌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소음같은 배제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시간이 된다. “장마철엔 물건들이 잠을 설친다.”,  “오래된 거울은 습기를 먹으면 요기가 생겨서 시커멓게 흐려진다.”라는 할머니가 남긴 여름철 관리지침의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만 않는다.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지닌 작품이다.&nbsp;  <br>두 번째 소설, 최미래 작가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산다는 것에 어느만큼 무심한 존재가 된 인물, 그래서 세상사에 펄펄 끓는 마음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첫 단원을 읽어나갈 때 혈액에서 원심분리기로 혈장을 분리하는 장면이 묘한 호기심으로 작동해 내쳐 읽은 작품이다. 삶의 징그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것에 서로들 얽혀드는 관계를 생각게 하는 소설이랄까. &nbsp;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는, 손님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가난한데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징글징글했다. 그 덕을 보고 있는 나도 징그러운 건 마찬가지만”&nbsp;  피부과 간호조무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나’는 기력회복주사, 일명 혈장 주입술이라는 불법 시술을 독립적으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하여 혈장을 분리하여 젊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판다. 이렇게 시술을 위해 손님들을 만날수록 사람에게 정이 떨어지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유일한 정규 손님인 호떡 장수 이난희 할머니라는 펄펄끓는 존재를 보며 자신이 그런 삶에 끈적하게 얽혀있음을 자각한다. 사실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이난희 여사보다는 무심한 ‘나’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원’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이유가 “이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환상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br>“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온 마음에 열이 오르며 다시 살고 싶어지는”, 그런 열정으로만 살아가는 펄펄끓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아마 열역학적으로 심정지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혈장은 맑고 투명한 노란색, 노란 피가 내 몸속을 돌고 있는 한, 나는 이 징글징글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그 모든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문장의 이해 불능의 삶이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게다. ‘나’를 따라다니는 소녀 고서라에게 간택당하는 삶이 되듯, 모든 삶의 추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일 게다.&nbsp;  이 잡지의 기획자인 김화진 작가의 「편 고르기」는 작품 속 출판사 편집자 이완희의 혼잣말인  “내가 한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걸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큰데도 자꾸 그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것만 같다.  매번 잘 안 되지만 누군가의 옆자리에 못 박히고 싶어하는, 사람이랑 꼭 붙어 앉으려고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의 외사랑 이야기이며, “흘러 지나칠 수 있는 얘기도 품에  잘 안고 가는 사람”을 향한 끝내 말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말하지 못하는, ‘주변을 맴도는 말, 서성이는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nbsp;  “나에게는 몰라도 너에게는 소중한 책, 그런 게 되겠구나. 거보세요, 쓰시기를 잘했죠. 그런 마음은 분명 편집자의 마음이었다.”처럼 후련하고 허망하기도 한 마음,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헛손질하는 마음, 그것 그대로가 좋은” 이야기이도 하다. 작품 속 편지 쓰기 워크숍 참가자들의 끝내 닿을 수 없는 편지들처럼 우리의 선택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의 반향과 무관하게 그 행위자체가 이미 회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 읽기보다 소설의 이야기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서 따라 읽으면 어떤 마음의 좋은 향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고 싶다. 김화진의 소설들을 조금 더 읽고 싶어졌다.&nbsp;【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대표작, 〈Object; 모피로 된 아침 식사,&nbsp;최지은 시인의 詩 &lt;오브제&gt;의 모티브가 된 작품】<br>  최지은 시인의 네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정말 반가웠다.  첫 시 「오브제」는 조금 낯설다. “그가 만지고 간 자리마다 털이 났다”로 시작되는 시의 문장은 커피 머그 손잡이 안쪽에서부터 컵의 내외부로, 그리곤 집 안이 털로 뒤덮인 전경을 말하지만, 감추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만도 않아서 홀로 여기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가 떠난 뒤의 일이고, 시 속 화자는 빗질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들여 쓰다듬는 사람이 된다. 자꾸 눈물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nbsp;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털이라는 장식이 아니라 이미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장치로 읽히듯, 어떤 본능, 육체성, 또는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다. 집 안 모두에 털이 덮이듯, 나의 상념 속에서는 이 세계의 질서를 찢고 그 아래 잠긴 그리움의 감각과 접하는 매개물, 그 경계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보 나왔어/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 무슨 일인지 ‘나’는 답할 수도 없다. 경계 너머에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슬픔의 감각은 그 애틋한 그리운 육체들에 다가서기 위해 쓰다듬음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마음」처럼 “봄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열린 문틈으로/ 아끼는 고양이 달려와 안기어오는 오늘 아침(「봄」 詩전문)”처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며 응원을 보낸다.&nbsp;  김예솔비, 김병규 평론가와 김미래, 황예인 네 분의 평론과 에세이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 기울이지 못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소설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1947~2016) 의 소설집  『나 (私)』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 〈세 여인〉을 오가며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두와 손잡고 싶었던 유년기의 감각, 나와 타인을 분리시켰던 최초의 거절이라는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영화평론가 김예솔비 작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손을 붙잡는 아이의 모습들을 연상하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 월간도 계간도 아닌 비정기 문학잡지 《유령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김화진 작가를 비롯 김미래, 황예인 작가 등 편집진들의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라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은 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8/47/cover150/k1521306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18475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불확실성의 시대, 이미지는 어떻게 현실을 생산하는가 - [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5266</link><pubDate>Sun, 05 Jul 2026 18: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752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635954&TPaperId=173752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294/68/coveroff/k1126359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635954&TPaperId=173752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a><br/>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08월<br/></td></tr></table><br/>우리는 흔히 오늘을 ‘음모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초국적 미디어와 플랫폼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유통시키고, SNS는 누구나 기록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이 형성되고, 사실과 허구, 증언과 조작, 신뢰와 의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혔다. 감정적 키치와 스펙터클은 소통을 대신하고,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맥락을 제거한 편집 영상은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허위와 조작을 방조하는 사이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하고 인간의 판단을 선행하는 정치적 장치가 되었다.  &nbsp;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한 철학적 응답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한다. 대신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기억과 증언, 기록과 픽션, 역사와 정치,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서로 얽혀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다큐멘터리론이 아니라 이미지 철학이며, 동시에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nbsp;  책의 첫 장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보편적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과 사실성을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그 믿음 자체를 의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CNN이 동시 송출한 영상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저해상도의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현실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숨소리, 어둠 속의 모호한 화면은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있다'는 감각만큼은 강렬하게 생산했다. 즉 다큐멘터리의 신뢰는 명료함에서가 아니라 식별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진짜라고 믿게 되는 역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nbsp;  이 통찰은 '다큐멘터리=사실'이라는 오래된 등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는 순간 이미 화면은 촬영자의 시선과 구도, 편집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인터뷰 역시 기억의 왜곡과 언어의 한계, 사회적 위치에 따른 침묵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의 증언조차 진실 전체를 재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서발턴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실패한 장르일까. 슈타이얼의 대답은 오히려 반대이다. 진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nbsp;  그래서 그는 실재와 연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해체한다. 영화 「타이타닉」 제작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이 지나간 자리(Titanic's Wake)〉〉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은 거대한 세트장과 화려한 영화 제작 과정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 놓인 멕시코 해안 마을의 빈곤과 물 부족 지역에 대규모 인공 수조를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민물을 끌어오는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거대한 허구를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복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된다. "진실은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표명된다."는 라캉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nbsp;  <br>이 지점에서 『진실의 색』은 아카이브의 정치학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를 과거를 보존하는 중립적 저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기억을 선별하는 권력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남기고 누구를 침묵시킬 것인가는 언제나 정치적 선택이다. 기록은 객관적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질서를 조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무한한 저장 능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결정한다. 삭제는 기록만큼 정치적이며,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의 효과가 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장치인 셈이다.  &nbsp;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와 몽타주 편집, 그리고 맥락을 제거한 영상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모론은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 속에서 허구는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낳으며, 행동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체주의와 선전 정치 속에서 반복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AI 합성 이미지와 왜곡된 영상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따라 형성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nbsp;  베르토프가 외쳤던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라는 선언도 슈타이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삶은 결코 '있는 그대로' 이미지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성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삶만을 '진정한 삶'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 담론이 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분은 쉽게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하나의 전형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삶은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보편적 불확실성이라는 슈타이얼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진실은 단일한 명확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해소되지 않는 균열과 모순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nbsp;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와 허위 정보, 기록과 연출, 사실과 픽션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교차한다. 다큐멘터리 역시 더 이상 진실을 보증하는 장르가 아니다. 때로는 스펙터클과 감정 소비를 위한 쇼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은폐하는 선전의 형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더욱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미지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 욕망이 스며있다.  &nbsp;  결국 『진실의 색』은 우리에게 진실한 이미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며,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를 끝까지 읽어내라고 요구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며 사유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필요한 비판적 감각이다. 『진실의 색』은 다큐멘터리에 관한 철학 에세이를 넘어, 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가는 시대에 진실이 어떻게 생산되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문하는 보기 드문 정치철학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가장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 용기일 것이다. 이 이미지 철학의 현대의 고전적 지위를 지닐 역작을 거듭 추천한다.   &nbsp;----------------------------------------------<br>CF: 책 제본의 부실로 낱장으로 흩어져 읽을 때마다 매 쪽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조악한 제본은 처음이다. 21세기에 쓰여진 고전으로 남을 만큼 압도적인 저술이 이렇게 출간된 것은 정말 수치스럽다. 출판사여, 제발 책 제본도 신경 좀 쓰세요. (책의 물성을 문제 삼는 글을 쓰는 독자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294/68/cover150/k1126359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29468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읽었다가 아니라 읽어버렸다고 말 할 수 있기를 - [걷는 독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62330</link><pubDate>Mon, 29 Jun 2026 16: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623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18317&TPaperId=173623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224/23/coveroff/8991418317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18317&TPaperId=173623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걷는 독서</a><br/>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06월<br/></td></tr></table><br/>  “(나는 삶에 대해서)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 페르난도 페소아, &lt;사실 없는 자서전&gt; P14에서  &nbsp;  삶을 체험으로서 살아낸 생의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토록 그리운 적이 없다.  진정 떨어보고 피 흘려 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자기 강화와 같은 텅 빈 오만함이 아닌 자기 소멸을 거듭하며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박노해 시인의 이 침묵의 언어로 한없이 간결하게 최소화된 언어의 음성들은 그래서 살아내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침에 겨워하는 내겐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聖所)”가 되어주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nbsp;  <br>이 책은 항상 내 곁에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벗어나 고독을 향유 할 때 함께하는 스승 같고 때론 벗처럼 도란도란 그 마음을 나누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내겐 그런 책이 되었다. 나는 시인이 홀로 산책길을 걸으며 수없이 떠올리고 다져왔을 그 내면의 이야기들에 감응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자기 소멸의 독서를 말하는 시인의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살라지고 비워져 저 영원의 빛에 감광된 그 순간”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도록 내려치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하는 그 감응의 찰나를 알기에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읽었다. 아마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nbsp;  잠언(箴言)이자 시(詩)로 엮인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430여 구절이 사진화보와 어울려 구성된 작고 두툼한 책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공연의 막간에 잠깐 진행되는 그 무엇이고, 가끔 문을 통해 기껏해야 무대배경에  불과한 것을 훔쳐보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의 문장들을 읽을 때 나는 페소아처럼 ‘고통 받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성스러운 길손이 되려했고, 목적 없는 세상에 이유 없이 묵상하는 순례자’가 되려했다.  그럼에도 ‘나의 키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는 한계를 알기에 불가피하게 내 마음이 감응하는 소수의 음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느 날 또 다른 문장에 내 정신이 번쩍 뜨일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nbsp;  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책의 문장들 앞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아니 읽어버리려고 애썼다. 온 삶으로 읽어내기 위해, 삶이라는 한 권의 책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내 무딘 감수성이 호응한 몇 문장들을 이렇게 옮겨 적는다,   &nbsp;  가을볕이 너무 좋아가만히 나를 말린다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nbsp;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 속도로, 깊이깊이.”, 그런데 자기 삶의 제 속도를 잃기 일쑤다. 그리고는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몸을 떨곤 한다. 제아무리 그 아쉬움이 무용함을 알지만 진정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아~ 돌아보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건만 그 질긴 회한을 떨어내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 것인지. 삶의 미련이 너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산다는 것을 진정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욕망인 것 같아 자괴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래 가을 볕 드는 어느 날 나도 가만히 나를 말려야겠다.  &nbsp;  산다는 것에 그 무어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실재하는 이 몸을 체감하는 동안만큼은 여느 사람도 겪는 그 모든 희로애락을 겪어 볼 일이다. 그리고 가끔은 가슴 벅차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끼는 날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또한 모든 길흉화복이 크거나 작게 반복되지 않았나. 그런게 산다는 것이지 더 무어가 있겠는가. 잊지 말자. “막막한 날도 있어야 하리, 떨리는 날도 있어야 하리, 그래, 꽃피는 날이 오리니.”  &nbsp;  문득문득 내 옹졸한 욕망이 경험(지식)을 쌓아가려 할 때가 있었음에 쓰디쓴 웃음을 웃을 때가 있다. 체험 속에서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어야 그 빈 곳에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자리 잡을 수 있을 터인데, 그만 욕심이 망각을 일으켜 그 무엇도 들어 올 수 없이 꽉 차 편벽해지고 만다.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왜 빈번히 잊게 되는 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사회에서 나와 더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져 나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만들 수 있음에도 나만의 이야기가 없는 하루가 반복되는 날이 더해지기만 한다. 아마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nbsp;  하나의 말은그 말을 하는 순간사건이 된다.힘 들어야힘이 들어온다.  &nbsp;  이 다층적 의미를 지닌 아포리즘은 인공지능에 의존해 힘 들이지 않는, 사고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경계의 음성으로도 들린다. 자기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기계에 대한 영원한 종속, 자본에 대한 노예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을 위한 나일 때 나는 한없이 작게 축소된다. 그 축소된 나 들로 군집을 이룬 집단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nbsp;  <br>악은 갈수록 새로워지고 다양해지고,평범해지고 다수결 속에 강력해진다.나는 악의 신비를 지켜보고 있다.  &nbsp;  악의 신비를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은 변화무쌍한 악의 양태를 꿰뚫어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로운 탐욕, 정의로운 교만, 지혜로운 위선.(Free greed, Just Pride, Wise hypocrisy.)”으로 이름붙일 오늘날의 대죄가 아닐까.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내 목소리에 대한 착각, 이 본질적 자기 성찰의 한계는 항상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고 있다. 가장 소홀하기 쉬워,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일 테다.   &nbsp;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있지 않은 말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있지 않은 말을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  &nbsp;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배어 있지 않은, 육화된 즉 숙성된 인식 속에서 다져지지 못한 말 아닌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절제되어야 할 것들이 기만적이게도 활개를 친다. 정말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이 인간의 말이거늘.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데 타인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듣기 위해 온몸을 기울여 느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일 게다. 달콤하거나 때론 편협과 헛된 위선의 말을 뿌리치기 위해. 그리고 진실의 언어에 공감하기 위해.  &nbsp;  “내가 가장 상처 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그 욕망이라는 심연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향해 저주를 내뱉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실패 앞에 정직하게 성찰하게 하소서, 지금의 실패가 오히려 나의 길을 찾아가는 하나의 이정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비로소 낼 수 있는 것일 게다.  &nbsp;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nbsp;  이 단순한 자세를 잊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고독한 사유의 자리를 찾아내는 여유를 가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nbsp;  이 소란한 세계의 한 구석에내 영혼이 오롯이 앉을 수 있는오래되고 아늑한 의자 하나, 잠깐,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자리  &nbsp;  자기만의 의미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자리를 찾아 여행이라도 떠나봐야 할 것 같다.  반드시 홀로 떠나는 여행으로, 그래서 그 여행의 낯선 길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 둘이서 손잡고 돌아오기 위한 여행길을 향해서 말이다. 세상이 너무 재밌어졌다. 화려한 빛과 소음이 마치 활력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그리움도, 벗도 이웃도, 내 안의 창조성도 사라지고 만다. 조금 심심해 질 필요가 있는 세상이다. 그래야 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깨어날 테다.   &nbsp;  시인의 생의 체험에서 응결된 이들 시와 잠언들을 읽다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 무언가와 만난다는 것,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어떤 진리의 광채에 자신을 잃고 잠시 정지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읽지 말고, 읽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된다면 어쩌면 자신을 잃은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진리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삭막한 이 시대에,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라지지 말자고” 하는 품속의 다정한 말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 바로 지금 진실 되게 와 닿음을 체감 하는 독서가 될 터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224/23/cover150/8991418317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224232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영화 아바타는 왜 예술이 못 되는가, 그 의미는 뭔가 - [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7843</link><pubDate>Sat, 27 Jun 2026 1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78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71&TPaperId=173578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38/29/coveroff/k0421301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0171&TPaperId=173578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a><br/>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07월<br/></td></tr></table><br/>“그들은 뱀이 근처에 없을 거라며 마음 놓고 있는 새들 같고, 카멜레온의 끈끈한 혓바닥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나무줄기 주위를 맴도는 파리들 같다.”&nbsp;-&nbsp;페르난두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 에서<br>예술 평론가 장 프랑수아 마르텔의 이 책 『Reclaiming Art in the Age of Artifice』는 예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철학서이자 문명비평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인공물(Artifice)시대'의&nbsp;위기를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기'로 규정한다. 정치와 시장, 기술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거대한 '인공물(Artifice)'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적 가치만으로 평가되는 존재가 되었고,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마지막 통로가 된다.&nbsp;  마르텔은 예술의 기원을 매우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은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하나의 사건"이며, "낯선 차원에서 들이닥친 한 줄기 빛"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피카소가 "최초의 인간이 예술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완성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가 "모든 예술은 쓸모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예술은 정치나 경제, 도덕의 도구가 될 때 본질을 잃고, 오직 자기 목적성을 지킬 때만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nbsp;  마르텔이 말하는 아름다움 역시 단순한 조화나 질서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별한다. 아름다움이 내가 이해하는 세계와 일치할 때 느끼는 안정감이라면 숭고는 현실이 내 예상을 무너뜨릴 때 찾아오는 파괴적 아름다움이다. 숭고는 불쾌하고 두렵지만 바로 그 공포를 통해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의 진실을 폭로한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감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낸다.&nbsp;  그런 점에서 화가 폴 세잔이 남긴 말은 마르텔이 말하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다. "나는 이슬비를 맞으며 세상의 순수한 근원을 들이마신다. 그 순간 나는 그림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 혼돈이다." 세잔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완전히 동화되는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황홀한 몰입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실재가 되었다. 예술은 현실을 복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실의 숨겨진 근원에 접속하는 행위임을 세잔은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마르텔이 "예술의 가치는 세상의 근원적 신비를 얼마나 예민하게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대목은 세잔의 작업과 정확히 만난다.&nbsp;  반대로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술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인공물은 예술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특정한 감정과 행동을 유도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장치다. 진짜 예술은 질문을 남기지만 인공물은 정답을 주입한다. 예술은 모호함을 사랑하지만 인공물은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결국 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확실성'이다.&nbsp;  이 점에서 마르텔이 예로 드는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 특징은 흥미롭다. 이 영화는 경이로운 영상미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한 치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본, 세트, 연기, 연출, 편집까지 모든 요소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관객은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설계 안에서 움직인다. 악당은 절대적으로 악하며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인간은 악하고 자연은 선하다는 도덕적 결론을 향해 관객은 조금의 의심도 품지 못한 채 질주한다. 압도적인 영상미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를 더욱 자연스럽게 내면에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텔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 인공물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을 것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백을 남기는 대신 이미 설계된 감정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nbsp;  인공물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조종한다. 말초적 인공물은 소비와 소유를 자극하고, 교훈적 인공물은 증오와 도덕적 우월감을 생산한다. 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제거하고 통념과 독사(Doxa)를 강화한다. 그래서 인공물은 언제나 상식을 반복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상식을 배신한다.이 과정에서 예술의 언어인 상징도 기호로 축소된다. 마르텔은 "기호는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상징이 된다"고 말한다. 기호가 정보를 전달한다면 상징은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예술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이며, 표현을 통해 상징은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태어난다. 노래와 영화, 그림은 내 안의 감정을 객관적 실체로 탄생시키고 일시적인 감정을 영속적인 존재로 바꾸는 마법을 수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이중 시선(Double Vision)'은 바로 이러한 상징을 읽는 능력이다.&nbsp;  <br>이와 반대로 현대 대중문화는 상징을 제거하고 키치를 양산한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는 죽음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병풍"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이토록 강렬한 이유는 키치가 현실의 근본 조건인 죽음과 상실, 혼돈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불안정한 변화의 과정인데, 키치는 오직 매끈한 질서와 행복만을 보여 준다. 결국 키치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가짜 위안이다. 녹음된 웃음소리가 우리 대신 웃어 주듯 키치는 우리가 직접 감당해야 할 삶의 고통을 값싼 감상주의로 덮어 버린다. 그래서 키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회피이며, 진정한 예술과 가장 멀리 떨어진 미적 환상이다.&nbsp;  마르텔은 예술이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멀어질 때 예술은 가장 혁명적인 힘을 획득한다. 정치가 은폐한 현실을 드러내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통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정치적이기에 오히려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그의 명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nbsp;  오늘날 이러한 인공물의 지배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거대해졌다. 이제 소셜미디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삶의 틀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그 안의 이미지에 맞추어 끊임없이 수정하고, 기술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감정과 가치관까지 재편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인공물이 설계한 욕망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nbsp;  마르텔은 이러한 시대를 설명하며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떠올린다. 작품 속 사람들은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미쳐 죽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목격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그저 색채일 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색채' 너머에 훨씬 더 거대한 존재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그저 알고리즘일 뿐", "그저 기계학습일 뿐",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하며 인공물의 실질적인 지배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문제는 색채 자체가 아니라 그 색채가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nbsp;  러브크래프트가 예견한 미래는 바로 '유령사회(Spectral)'였다. Spectral은 빛의 배열인 스펙트럼(Spectrum)과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Specter)를 동시에 품은 말이다. 화려한 빛의 배열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정작 우리는 그 뒤편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SNS 속 자아는 점점 선명해지지만 실제의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형체 없는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시대, 인간은 자신마저 잃어버린 채스스로 클라우드 구름 속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간다.&nbsp;  그래서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인간 정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칼 융은 "인류의 진짜 적은 인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숭배하는 인간의 정신이며, 인공물을 진실로 착각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결국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현실로 되돌리는 마지막 통로다. 진정한 예술은 정답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을 깨뜨리고, 통념에 균열을 내며, 인간을 실재 앞에 다시 세운다. 인간은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장 프랑수아 마르텔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이다.&nbsp;  사실 마르텔의 이 책은 읽을수록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술을 정의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설명하지만,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이미 예술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책은 논리적으로 예술을 증명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예술을 다시 경험하도록 이끄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nbsp;  예술은 혼돈을 견디는 능력이고, 인공물은 혼돈을 제거하려는 장치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칼 융의 말을 인용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기술도, AI도, 시장도 아니며,  그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인간 정신이라는 말이다. 결국 마르텔은 예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끝으로 이 예술철학 에세이로 규정짓고 싶은 글의 미덕을 말해야겠다. &nbsp;  그것은 “예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한 사건이다”와 같이 존재론, “기호를 상징으로 바꾸어 실재를 보게 한다.”는 인식론, “아름다움보다 숭고, 질서보다 균열이 예술의 본질이다.”라 말하는 미학, “인공물·키치·소셜미디어가 인간 정신을 획일화한다”는 사회비평, “예술은 비정치적일 때 가장 혁명적이다.”라는 정치철학을 망라한 명료한 지향의식과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사례들의 놀라운 대응이 그 어느 예술비평서보다 총체적 이해의 바탕을 토대로 하여 대중의 수월한 접근을 향한 깊은 노고를 투여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성큼 들어선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해보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모처럼 강력 추천한다는 사족을 단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38/29/cover150/k0421301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38292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고통과 죽음의 스펙터클 세기에 대해서 - [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4591</link><pubDate>Thu, 25 Jun 2026 1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545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45349571&TPaperId=173545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40/coveroff/034534957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45349571&TPaperId=173545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a><br/>Barbara Wertheim Tuchman / Ballantine Books / 1987년 07월<br/></td></tr></table><br/>600년 시차의 낯선 문명의 과거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한다.그 발견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nbsp;  [summary]  &nbsp;  감상글의 요약을 앞세우는 이유는 책의 방대함, 이를테면 ‘중세 백과사전’이라할 만큼 당대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비롯한 정치, 종교, 문화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내 누추한 소회가 산만한 감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 마디로 이 걸출한 역사저술은 타락해가는 교회와 전장의 참상, 궁정과 귀족들의 흥청만청 풍요와 대비되어 절규하는 농민 모두를 목격한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라는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14세기 파국의 유럽을 들여다보는 역사 서사(敍事)이다.  &nbsp;  1303년 훗날 소빙하기로 불릴 혹한과 냉해가 유럽대륙 전체를 휩쓸며 대기근으로 14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은 이 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간 퇴행의 시대로 기록될 것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이 독특한 역사저술은 600년 시차의 먼 역사의 시간을 오늘의 세계에 비춘다. 그것은 먼 거울, 즉 낯선 문명의 과거에 맺힌 상(像)으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발견을 위한 물음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nbsp;  야만과 폭력의 끝을 향하기라도 한 듯 지옥의 구렁텅이로 질주하는 14세기라는 과거는 오늘 우리들의 행동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본성의 거울이 된다. 변화없이 무한 반복하는 인간의 그 어리석은 행동들을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를 통해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이 위대한 저술에서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이 책의 국역본 출간에 앞서 거듭 두 차례 읽으며, 오래 펼쳐볼 소장본의 필요성을 느낀 책이었다. 가족들 모두 돌아가며 읽어 보고 서로 그 소회를 나누기에 좋은 저작이다. 터크먼은 14세기 이 야만의 인간 양상이 20세기 나치의 잔혹상으로 반복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오늘 신파시즘과 극우화되어가는 이 세계 양상의 거울이 되어 인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들은 이 책으로부터 무수한 인간 반영(反映)들을 발견하고 현실 통찰의 지혜를 거둬 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nbsp;  ------------------------------------------<br>1.  역사는 인간  진보(발전)의 문명 서사가 아니다.  &nbsp;  ​역사철학자로서의 헤겔은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특히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으로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즉 ‘자유의 진보’라는 통일적 의미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은 이 주장의 빈틈을 쫓기라도 하듯 진보의 대척에 있는 퇴행의 역사로, 오직 폭력과 야만의 지배로 규칙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바닥의 한계로 빠져드는 ‘속박의 진보(?)’가 인간 정신을 휩쓸던 14세기 중세 100년의 재앙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을 조롱하듯 자유의 보편원리가 이성의 운동으로 진전해가기는커녕 이 시대는 인간의 오판과 우연, 모순과 정신적 지체를 넘어 퇴행으로 치달으며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인간 본성의 항구적 변화 불능성을 입증한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싫어하고 회피하는데, 인류의 진보라는 패턴에 끼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저자 서문의 글은 곧 헤겔 부류의 철학에 대한 반박의 의지표명일수도 있을 것이다.  &nbsp;  아마 터크먼은 이러한 반(反)헤겔주의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문헌과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를 강조하여 역사의 정확성을 기술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기초한 연대기적 서사형식으로 독자적인 역사서술방식을 선택하였을 것만 같다. 이처럼 전통적 역사학자와 다른 걸음으로 자유로운 문체와 극적(劇的) 역사서술을 채택하는, 다시 말해 학술적 엄밀성과 문학적 서사를 결합하여 일반 독자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비춘다. 종말로 치닫는 14세기라는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로서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nbsp;  이 책 《먼 거울 (A distant mirror)》은 역사 속 인간의 행위로부터 윤리적, 정치적 반성의 사유를 추출하고자 하는 치밀한 노고의 과실이다. 대체 인간과 인간사회의 반복되는 재앙의 뿌리에 있는 근원 혹은 요인들은 무엇인지 역사적 시간을 따라 밀도 높고 긴장감 있는 전개로 마치 소설처럼 몰입하게 한다. 터크먼 역사서술의 한 특징인데 저자는 추상적 구조보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특정인물의 삶을 서사의 도구로 삼아 그들의 판단, 오판, 성격, 감정에 주목하게 하여 역사를 인간적 드라마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것이 이 독특한 역사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이 책의 중심인물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대(大)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1340-1397)의 행적과 관련하여 전개된다.   &nbsp;  “공감의 어려움, 즉 중세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가치에 진정으로 들어가기의 어려움이야말로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여기서의 주된 장벽은 바로 당시의 기독교인 것 같다. (...) 중세 기독교의 지배원리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극은 중세의 거대한 함정이었다.”  -저자 〈서문〉 에서  &nbsp;  이 파국의 시대를 둘러보며 “인간이라는 종이 이전에 오늘보다 더 나쁜 일도 견디고 살아남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오늘의 삶을 안심하게 될 거라는 저자의 조크의 목소리에 독서 내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대체 14세기가 왜 치명적 재앙의 시기였는지, 역사의 진보라는 이해에 파열음을 내게 하는지, 그 영향의 요인들을 찾는 대항해(총 1,200여 쪽에 이르는)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시간이 된다. 14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인간을 더할 나위 없는 야만과 폭력의 심화상태로 몰아넣은 현상들을 시시콜콜 열거하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쏟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수하게 복잡한 사안들의 상호 얽힘을 일일이 기술해야 할 터일 것이다.   &nbsp;  2. 세계의 질서와 규칙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nbsp;  그것은 14세기가 시작되자 몰아치기 시작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대기근, 교회의 극단적인 부패와 타락을 비롯한 교권의 분열, 14세기 내내 시차를 두고 6차례나 유럽 인구를 몰살시킨 흑사병의 창궐,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빌미로 삼아 영지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시작되어 이후 100년간 이해관계망의 복잡한 얽힘으로 심화 확장되어간 백년전쟁, 이 전쟁의 부산물인 유럽대륙 전체를 약탈 유린, 방화, 살해가 무법적으로 자행되는 예외없는 유럽전역으로의 귀족과 기사계급들로 구성된 산적단과 용병 무리의 확산, 기사도라는 모순으로 점철된 영예와 관능이 뒤섞인 허위의 정신이 야기한 폭력성의 파급으로서 이식된 파국적 발현들, 여전히 기독교 아마겟돈, 예수 재림이라는 유한 역사성에 매몰된 어리석은 도시평민과 농민들의 노예근성 등이 상호 최악의 상태를 향한 암흑, 즉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의 압력으로 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무법의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  &nbsp;  정말이지 스위스 역사학자 시스몽디(J.C.LS. de Sismondi)의 말처럼 “14세기는 인류에게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꺼번에 이러한 동시다발의 재앙적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야만으로 복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겠다. 대량운송 역량이 없던 시대에 기근은 지역자원에 의존해야만 하던 사람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을 것이고, 거기에 교회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탈적 세금 징수, 전쟁으로 인한 자원 강탈,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불러온 노동력의 가공할 감소, 여기에 일 없는 귀족들이 벌이는 산적단의 약탈과 파괴, 살인 등이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세상이라면 그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사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낯선 문명, 아니 문명이랄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nbsp;  “14세기의 헤픈 정서의 이면에는 고통과 죽음의 장관에 대한 전반적인 무감각이 있었다.”   &nbsp;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교회에서도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은커녕 하루를 견딜 구원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도덕성이란 어쩌면 낯선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거듭되는 국왕 등 귀족세력의 오판과 실정(失政)은 체포된 귀족과 국왕을 석방하기 위한 몸값이라는 납세의 부담 증가로 돌아오고,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이 휩쓰는 흑사병은 무의식적으로 인명(人命)에 대한 경시를 조장했을 것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약탈전쟁과 산적단의 싹쓸이식 집단 학살에 노출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는 “삶이란 기껏해야 영원한 고향을 향한 힘들고 지치는 여행”일 뿐이며, “내세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중에 겪는 유배의 한 단계라는 의식”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지상의 삶에서 겪는 잔인하고 참혹한 헤어날 수 없는 형편은 더더욱 축적된 인류의 지식들인 규칙들의 가치를 상실토록 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nbsp;  영토의 지배를 통한 권력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폭력을 요구한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백년전쟁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의 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3세가 프랑스왕위 계승권의 주장을 빌미로 시작한 영토 야욕, 즉 교역로의 안정적 확보와 생산물 거점의 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이 발단이다. 이것을 오늘날 형성된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부계와 모계의 가문들, 결혼으로 인해 얽힌 가문들, 조약과 동맹으로 결합된 관계들로 인해 유럽 대륙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그들의 영지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국가이전의 봉건체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바라 터크먼이 서사의 중심인물로 내세운 대영주 쿠시가문의 앙게랑 7세는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귀족이자, 기사이며, 소위 산적단(용병부대)으로 불리는 세력과의 그 경계가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nbsp;  <br>앙게랑 7세의 아버지인 앙게랑 6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공국 카타리나 공주와의 결합은 프랑스 국왕과 오스트리아 공작 사이에 두 번의 조약 체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이미 영토와 부와 정치적 거래를 함유하고 있다. 이것은 카타리나를 통한 새로운 영지를 포함하고 막대한 결혼 지참금과 상호 전쟁동맹을 의미한다. 또한 앙게랑 7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국왕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산재한 그의 영지는 유럽 대륙 곳곳에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실체화되는 과정으로서 교황령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 지역을 통과하며 벌이는 전쟁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데, 경로의 도처에서 이해관계자들과 마주치게 되고, 분명 적대적 전쟁이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영주의 지역을 지나갈 때면 상호 양해 아래 공격 없이 그저 통과한다거나, 어제의 우호관계가 돌연 상대의 이해관계의 변화로 인해 배신을 당하는 낭패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정상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혼전의 양태를 드러낸다.   &nbsp;  게다가 교황은 이를 자기 권력의 보호를 위한 대리전으로 삼음으로써 그 혼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교황파(그 속에서도 또 여러 분파들), 국왕파(잉글랜드 국왕파 프랑스 국왕파 등), 그리고 개별 영주의 이해득실의 판단에 따른 내편과 네편의 규정 불가능성은 더욱 전쟁을 난감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난맥상이 역사의 유래가 없는 100년 전쟁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킨다. 이에 대한 피해는 누가 안아야 할까. 고스란히 피지배자들인 농민과 상인 등 평민들이다. 더구나 공식 전쟁이 아닌 지역약탈 전쟁도 쉴 새 없이 발생되는데, 이것의 토대인 당대 기사귀족계급의 정신인 기사도 정신이라는 허무맹랑하고 모순으로 점철된 폭력성과 예절이 결합된 기이함의 발로가 중대하게 작용한다.   &nbsp;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식 전쟁이 일시적 휴전 상태에 들어가면 병력은 갑자기 주 수입원인 약탈수입이 사라진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약탈을 지속하는 소위 산적단이라는 집단이다. 이것의 세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수장들이 귀족의 이름을 하고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이유이다. 전쟁으로 이미 손상이 극심한 지역의 살아남은 곳을 이들이 다시금 유린한다. 이들 폭력성의 궁극적 배경과 관련해서 눈에 띄게 유치하고 잔인했던 중세 행동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억제되지 못한 충동으로 인한 두드러진 무능력”의 원천을 주목하게 된다.  &nbsp;  “인구의 절반이 21세 미만이었고, 3분의 1인 14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각종의 전쟁 지휘자들과 기사들이 대개 20세 전후였다는 사실에서 전장의 잔인한 야수성이 그들의 격렬한 충동의 배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강간, 약탈, 파괴, 방화, 살인. 한 세기 내내 인구를 절멸하다시피 생명을 반복적으로 습격한 흑사병과 이러한 참혹한 야만적 전쟁은 서로 지옥의 형상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넘쳐나는 시체들과 악화된 생활환경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원인을 모호하게 하며 삶을 더욱 황폐시켰을 것이다. 이 14세기 중세의 심리란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유아성 탈피에 실패한 시대성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위시한 국왕과 귀족 지배세력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이라는 정신적 부패의 기반위에 전염병과 전쟁으로 넘쳐나는 시체와 굶주림은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며 그 부정성의 끝으로 치달았다.  &nbsp;  3. 파괴되는 인간의 삶 - 성숙하지 못한 시민 의식  &nbsp;  앞서 언급했듯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와의 싸움으로 비롯된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칭하기도 하는 교황청 이전의 배경도 “어떤 세속 군주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세금도 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국왕의 조세 부과권은 교황 자신의 승인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황금 독점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권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은 유일한 거룩한 자인 (자신인)교황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필수”라는 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선언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영지가 있던 프랑스 영토 내 아비뇽으로 교황청의 이전을 초래한다. “세입과 모든 통치 조직을 중앙집중화하여 위신과 권력 벌충에 혈안이 되어있던 교황의 무차별적 조세 약취(略取)와 기만적 성물거래 판매 수익, 사면권 판매, 죽어가는 자의 유증 몰수”에 이르기까지 그악한 부에 대한 탐닉이 만들어낸 결과다. 조세 부과를 두고 벌어진 싸움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부담이었다.  &nbsp;  “아아,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 촌민으로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힘들구나. 태어날 때에 고통도 함께 태어나는 구나 (...) 너희 귀족들은 마치 먹이를 찾는 늑대와도 같다. 너희는 지옥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니...“  &nbsp;  이렇게 요구되는 것이란 인내, 고통, 체념뿐이었던 농민의 비참은 절정에 이르렀다. 끊임없는 전쟁 자원의 강제부담과 대기근의 굶주림, 흑사병의 반복적 강타. 교회와 귀족 계급의 폭력적 강탈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자행되는 사회는 사실 그리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홉스가 말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말이 여지없이 들어맞는 사회, 오늘의 독자인 내게는 하나의 폭력을 야기했던 극히 사적 탐욕의 추구를 모두가 개별적으로 자행할 경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규칙파괴의 압력은 자동적으로 작동된다는 실증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nbsp;  시민이나 농촌 빈민의 저항이 왜 없었겠는가. 1358년 우아즈 강변 생뢰마을에서 시작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조직이 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소부르주아와 연합한 이 비(非)귀족 공동전쟁은 기사귀족, 혹은 산적단에 의해 무참하게 도륙되어 한 달 만에 절멸되기도 한다. “젊은 쿠시 영주 앙게랑 7세가 자기 영지의 신사계급의 선두에 나서서 자크들의 절멸을 완수했다.” 이 기록처럼 쿠시의 영주는 자크들이 집결한 클레르몽으로 진격하여 3000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하여 저항운동을 압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자크(Jacques)는 귀족계급이 농민을 비하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nbsp;  사실 이 농민봉기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변화도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미 누적된 죽음만을 더 늘렸다는 사가(史家)들의 평처럼 농민저항자들은 스스로의 심리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직 그들의 정신이 숙성되려면 역사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와 더불어 1358년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국왕의 실정과 추밀관 등 왕의 측근들의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상인들로 이루어진 제3계급의 개혁운동도 있었다. 시민지도자인 마르셀의 도시 파리 성벽의 수호를 통해 국왕을 비롯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실정과 부패의 시정에 접근했지만 내부 지지자들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좋은 정부를 향한 꿈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다.   &nbsp;  바라바 터크먼은 이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는데, “프랑스 국민은 군주제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지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시민대중의 인식능력은 시대의 문화를 호령하고 사회구조 깊이 뿌리내린 제도 종교인 기독교 천년 지배가 만들어놓은 수동적 삶을 떠날 수 없었을 게다. 삼부회의 권리가 사라지고, 이들이 결의했던 개혁법 조항들은 페기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왕실은 절대왕정 시대를 누리며 더욱 왕권이 방치되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시민대중은 “모든 문제, 즉 과도한 세금, 부정직한 정부, 변조된 주화, 군사적 패배. 산적단의 도적질, 자국의 영락한 상황 등을 황실의 사악한 추밀관과 비겁한 귀족 탓으로 돌렸으며. 국왕이나 왕세자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역사의 발목을 잡는 시민적 몽매성이라는 수구성의 본질을 보는듯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nbsp;  4. 결어 - 파국의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  &nbsp;  이 600년 시차의 먼 거울인 14세기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던 고통의 시대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시민 개혁운동의 실패의 과정에 주목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경계해야하는 것은 실정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던 삼부회의 지도자 마르셀이 자신의 지지토대인 시민집단에 의한 피살로 끝났다는 이면의 실체이다. 이러한 살해집단의 심리적 본성은 아렌트도 지적했듯 오늘날 파시즘으로 지칭되는 것, 특히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강자 동일시의 유해한 감정이다. 자신들은 분명 피지배 계급임에도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의 그 약탈적 폭력성과 진실을 호도하는 은폐된 탐욕에 자신들의 권한을 떠넘기는 노예근성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떠도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취약한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쾌락을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그 금지를 파열시키는 주체였기에.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관심을 쏟았던 시대가 없었으며, 이른바 육(肉)에 대한 관심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nbsp;  또한 타락의 극한 지점까지 치달은 그들만의 폐쇄된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결탁하여 사회를 밑바닥까지 좀먹었던 중세 교회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마피아나, 사법카르텔, 언론 카르텔 등 기득권으로 결탁한 세력처럼 이 사회가 오랜시간 축적한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들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악성 요인의 실체를 보여준다. 혼인과 동맹과 이해거래로 혼란스럽게 엮인, 폐쇄된 카르텔 네트워크로 형성된 14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보인 양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 세계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원인임을 증거 한다. 혈연과 이해(利害)로 얽힌 관계에는 정의(正義)의 윤리가 들어서지 못한다. 즉 규칙과 질서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한 세계에서 대중의 삶을 실종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침몰을 맞이하게 될 때, 중세의 사람들처럼 아마겟돈이라는 최후의 전쟁 승리로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망상의 기다림 같은 것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힘겨운 고통의 나락에 젖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nbsp;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공국의 왕과 대영주 귀족들이 그네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평민들의 무고한 죽음과 삶의 기반 상실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전쟁을 야기한 지배계급은 어떻게 행동했나? 끊임없는 강탈과 협박, 살해의 위협 아닌가 말이다. 그들 지배계급은 그 오랜 소모적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의 기록에는 휘황찬란한 궁중과 금을 입힌 산해진미의 성찬 아닌가. 죽을 때까지 쥐어짜여지는 평민과 농민의 한탄이 무얼 말하고 있는가. 전쟁의 폭력을 미화하고 그 야만적 폭력에 환호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nbsp;  이 저술의 제목이 "A Distant Mirror"인 것은 이 야만과 파국의 역사를 오늘의 우리들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기를 바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 역사 속 인간의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인간행위의 그 반복성에 대한 경고의 선언인 것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발견된 모습으로부터 자기 인식의 지평을 돌보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세세하게 서술된 방대한 이 역사저술의 미흡한 감상에 머문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내 능력의 한계이다. 독자들은 흑사병, 십자군 전쟁, 교회의 타락, 세금, 노역, 노예제(봉건제)등 사회구조의 붕괴와 함께 결혼, 출산, 노동, 성 역할 등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의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심리와 정치적 긴장을 극적으로 직조해낸 이 저술로부터 무한한 영감과 반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40/cover150/034534957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0401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