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필리아 (비의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07 Jun 2026 18:59:59 +0900</lastBuildDate><image><title>비의식</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903410318852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비의식</description></image><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첫사랑, 첫키스, 결코 동일 강도의 감각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 [커플들, 행인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0354</link><pubDate>Sat, 06 Jun 2026 18: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203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536996&TPaperId=173203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5/56/coveroff/k792536996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536996&TPaperId=173203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커플들, 행인들</a><br/>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08월<br/></td></tr></table><br/>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의 ‘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년 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nbsp;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nbsp;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글〉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nbsp;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글〉, 117쪽에서  &nbsp;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nbsp;  <br>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nbsp;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nbsp;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nbsp;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nbsp;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nbsp;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 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즉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nbsp;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nbsp;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nbsp;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돈&gt;상품&gt;더 많은 돈’ 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gt;만족&gt;더 큰 욕망’ 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nbsp;【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nbsp;《感覺の帝國》에서】<br>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nbsp;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nbsp;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裏面)  &nbsp;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nbsp;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nbsp;&nbsp;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nbsp;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nbsp;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의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nbsp;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nbsp;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 과 히치콕의 〈새〉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지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nbsp;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nbsp;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br>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nbsp;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5/56/cover150/k792536996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55611</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思想界 212호(2026.5~6),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 [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10626</link><pubDate>Mon, 01 Jun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3106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138885&TPaperId=173106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00/26/coveroff/k33213888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138885&TPaperId=173106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a><br/>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05월<br/></td></tr></table><br/>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nbsp;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nbsp;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nbsp;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즉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nbsp;  ■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nbsp;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호(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nbsp;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nbsp;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nbsp;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低)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nbsp;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은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nbsp;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라는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nbsp;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nbsp;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의 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nbsp;  <br>“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汚], 그릇된[誤],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nbsp;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로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nbsp;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nbsp;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nbsp;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nbsp;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nbsp;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다.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nbsp;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nbsp;  ■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nbsp;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nbsp;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00/26/cover150/k33213888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00264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이유리 작가 전작주의자가 되기로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link><pubDate>Fri, 22 May 2026 17: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935398&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9/72/coveroff/k39293539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038963&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99/19/coveroff/k35203896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32834795&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058/53/coveroff/k13283479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39119&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210/51/coveroff/893203911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145&TPaperId=172916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632/47/coveroff/k512032145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9166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분석 비판하려는 관념에 장악된 그늘진 정신의 무게에 짓눌린 나를 느낄 때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작가의 소설들은 제 아무리 힘겨운 삶에 직면한 인물일지라도 그 무게를 오히려 가벼운 무엇으로 인식하게 할 만큼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좋은 정조(情調)의 발랄한 생기로 전환시킨다. 그 작품들의 통통 튀는 밝은 기운을 내 마음에 잔뜩 흡수하고 싶은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분석하는 마음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문장들과 이야기가 발산하는 젊음의 생동감, 그 미완의 풍부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유쾌함과 명랑함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nbsp;   <br>이 작품집은 작가의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재구성된 단편선집이다. 선집의 표제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첫 문장은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로 시작된다. 수진은 연인 성재와 이별했지만 “짐짝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 그 남는 사랑을 팔기로 한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친구 영인이 수진에겐 필요없는 사랑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고, 수진은 냉큼 받아들인다. 감정전이센터를 찾아 기증자 수진은 수령자 영인에게 전이할 감정을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이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인의 남편 민후의 말처럼 “무슨 장기 이식 하듯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되겠는가.  &nbsp;  사랑이 끝난 자리, 사랑을 잃은 자리에 남거나 비어버린 곳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그래서 약이 되고 “마음의 굳은살”이 되는 시간의 신비에 의존한다. 사랑이란 이미 누군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펴 이 진실을 음미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nbsp;  「그때는 그때 가서」 화자의 이름도 수진인데, 아쿠아리움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엉덩이가 근지러워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유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수진의 이 직업을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녀의 연인 정우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니다.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중요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그저 놀기를 좋아”하는 수진으로부터 정우가 떠난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지만, 네 “머릿속은 꽃밭이라”는 정우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물적인 새끼.” 어찌 욕까지 악의 없이 무해하게 들리는 것일까.  &nbsp;  이 소설은 내게 미소와 활력이 필요할 때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펼쳐 읽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아니 이유리 작가의 소설들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책장 보이는 곳에 꽂아 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설의 대표작이 이 작품 「그때는 그때 가서」이다.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해파리 보는 것이라는 수진은 “투명한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고 목적도 욕심도 없이 그저 흘러 다닐 뿐”이기에 “흩날리는 꽃처럼 꿈결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 자유로운 생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nbsp;  새벽 다섯 시부터 개장시간인 여덟 시까지 그녀가 터득한 숙련된 노하우로 손발이 맞는 파트너 예순다섯 살 김선자씨와 잽싸고 날렵한 청소일은 결코 대강대강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자신의 일처리에 어떤 긍지마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정우에겐 “그따위 것은 누구나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싼 돈 주고 대학까지 나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수진은 말한다.  &nbsp;  “수진아, 제발 어른답게 생각하고 살아. 쟤들은 해파리고 넌 사람이잖아. 쟤들은 집도 있고 때 되면 누가 밥을 주지만 넌 아니잖아.” 정우와 다투거나 싸우고 난 다음 날, 청소를 일찌감치 마치고 해파리 수조 앞에 있으면 뒤이어 일을 마친 김선자씨는 휴대폰에서 맞춤의 음악을 틀어놓고 목청껏 노래를 시작한다. 여진의 &lt;그리움만 쌓이네&gt;에서부터 김연자의 &lt;아모르 파티&gt;에 이르는 그 절묘한 생의 풍악이 드리웠던 그림자를 거두어간다. “꿍짜라작작 쿵짜라작작 쿵작쿵작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 해파리 수조 앞에서의 이 이상하지만 결코 “유해하지 않은 무해한 이상함”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둘의 이 이상한 순간이 내겐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뭐 있나. 다 그런 거지.  &nbsp;  【민음 북클럽 에디션,&nbsp;소설집『비눗방울 퐁』속&nbsp;세 편의 선집】<br>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 것인가. 미래를 위해 하기 싫은 것을 끈질기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자유로운 비둘기와 해파리처럼 살아가야 하나. 수진은 김선자씨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서”, “돈은 많이 모으셨어요?”라고 말해버린다. 그때 “참.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몰라서“라며, 수족관 앞에서 자신이 노래 부르는 이유를 설명한다. ”꼭 지구를 앞에 놓고 부르는 것 같아요. 동그랗고 새파랗고, 그 안에 뭔가 살아있는 것들이 오글오글 돌아다니는 게 그렇지 않아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뭐 그렇게 살면 되지.    &nbsp;  수진은 정우가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과 해방 된 삶에 대한 생각을 오가지만, 김선자씨의 말 속 ‘뭔가 살아있는 것들의 오글거림’,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열심인 삶, 바로 그것을 즐기는 삶,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는가.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많은 수진들을 응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그런 것 따위가 무어있겠는가. 생활비 조달에도 빠듯한 월급날 단 한 번 배달앱을 켜 맛있는 것을 먹는 호사(?)는 부려도 괜찮다. 무책임한 소리라 나무라는 목소리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삶이라는 길에 정답이라거나 보편이나 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족한 것을. 바로 그 살아있음의 감정이 죽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에 삶이 삶 같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파란 수조 불 빛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둥근 해파리의 모습을 닮은 이 땅의 수진이들을 위한 유쾌 발랄한 생의 축가 같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읽게 만드는 이유리표 소설이다. 그래서 이 각양의 형태를 지닌 생의 슬픔이 한껏 기분좋게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nbsp;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달리는 무릎」에서  &nbsp;  「달리는 무릎」의 문장이다. 새벽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話者)가 늦은 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하얀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것이다. 요즘 내가 부쩍 좋아하는 묘사들이 귀여움인 것은 순수에 대한 향수인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도 귀여움이 발산하는 명랑함이 작품 전체의 정조(情調)를 에워싸고 있다. 아홉 바늘을 꿰맨 무릎에 반 깁스를 한 채 자고 났을 때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시스템의 결정으로 공동체에 덜 기여한다고 선택되어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존재의 이 낯선 목소리는 너 같은 사람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중력을 벗어날 추진력을 모아야 함을 말한다.   &nbsp;  그리고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그 어느 날의 우주 시스템의 생각이란 것”에 대해 비난하는 화자의 분개에 마침내 무릎 속 외계 존재 자신도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함을, 그래서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성취를 이루면 돌아와 알려주리라 약속한다. 인간 사회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를 나는 “자격증이든 시험이든 그놈의 적성이라는 것을 찾아서”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하기에 하루 두 시간의 달리기만을 통해 운동에너지의 흡수를 돕기로 한다. 이윽고 나의 무릎 속 외계 존재가 중력을 벗어날 운동에너지를 거의 모았을 때 그 마지막 흡수를 위한 도움의 달리기를 한다. “좀 더 빨리!”  &nbsp;  “그때였다. 무릎에서 푸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갔어요?”,  대답 없는 우주 존재와의 이별, 손차양을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스템이 옳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채 싸우기도 전에 져버릴 것을 오랫동안 걱정했지만” 그 외계 존재의 결심에 초를 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비참해질까봐 말하지 않았음을 떠올리는 화자의 고달픔이 경쾌한 언어로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nbsp;  <br>외계의 존재라는 이 환각, 혹은 환상의 존재는 화자인 ‘나’의 반영, 나의 소망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고된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홀로 뛰던 천변의 달리기는 어느덧 외롭지 않은 두 존재의 달리기로 공동의 목표를 위한 행위가 된다. 그리곤 이 이별이 비록 기약없는 이별이긴 하지만 언젠가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이겨 돌아올 기대를 가진 응원과 기대를 품은 이별이기에 슬픔의 그늘과 달리 밝게 빛난다. 처박힘에서 일어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에너지를 얻는 그 마지막 혼신의 질주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유리표 소설들의 이 밝은 에너지인 명랑함, 환한 빛을 비추는 이 발랄함의 정조가 세대를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웃음과 더불어 생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준다. 세 편 모두 이별이 있지만 그것은 상처로 머물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고, 사랑의 핑크빛 숨결처럼 더없이 포근한 생의 위로와 기쁨이 되어 우리들 방황하던 정신을 토닥인다. 이유리 전작주의(全作主義)자가 되리라.  &nbsp;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183/28/cover150/893742823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183287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칠논변(四七論辯): 성리학 두 거두의 의리(義理)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7788</link><pubDate>Wed, 20 May 2026 1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77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39319X&TPaperId=17287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coveroff/897139319x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39319X&TPaperId=172877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a><br/>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01월<br/></td></tr></table><br/>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두 사림(士林)간의 성리학 논쟁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論辯), 줄여서 ‘사칠논변(四七論辯)’ 또는 두 사람의 호를 따서 ‘퇴고(退高)논변’이라 일컫는, 본체(혹은 실재)인 ‘이(理)’와 현상인 ‘기(氣)’의 근본이 하나인가 둘인가를 두고 나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서신집이다.  &nbsp;  고봉 기대승은 이조 정랑, 승정원 좌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세(1572년)에 병사했다, 퇴계 이황 또한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사림의 거두로 70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26세,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차이이며, 고봉이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던 1558년 명종 13년에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오늘날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니 그 지위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처럼 연령과 그 지위가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퇴계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의 13년에 이르는 편지 일백여 통이 이 책이다. 이들 편지 글은 안부와 정사(政事)에서의 고충에 대한 서로의 위로와 조언,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바로 사칠논변(四七論辯)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구(論究)의 글이다.  &nbsp;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論爭)’이 보이는 이전투구(泥田鬪狗)의 싸움으로 인해, 두 대척하는 의견이 서로 상대의 주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말싸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조선조 붕당(朋黨)의 폐해를 아는 우리들은 이 논쟁을 정치적 세력간의 싸움을 대리한 표면적 학문 싸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리학이라는 조선조 독자적 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연구의 기틀이었음을 간과하기도 한다. 모두 그 논변의 내용과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나 또한 퇴계가 동인(東人)의 시조로 불리게 됨으로써, 특히 이 사단칠정 논변에서 비롯된 훗날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극한의 대립이 조선 후기 동인과 서인의 참혹한 정치적 파당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무모한 책임을 덮어씌우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사실 이 서신집을 읽기 전에 두 사람간의 연령과 지위의 차이로 인해 유교 질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미 기울어진 논쟁이 아닐까하는, 즉 한쪽의 고압적 자세와 겸허 또는 굴종의 자세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방적 논의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nbsp;  이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변론(四端七情分理氣辯)』에 대한 퇴계에게 보내는 반론의 글에 무릇 학자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찬 고봉의 지적 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저 물렁물렁한 논쟁이 아니구나! 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봉이 퇴계를 한낱 논쟁의 상대로만 여긴 것은 아닌데, 깍듯한 예의와 겸양의 언어, 선학(先學)을 대하는 낮은 배움의 자세와 진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공경(恭敬)이상의 덕목을 보여준다. 학문 연구자로서 고봉의 글은 날카롭고 준엄하지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겸손과 존경의 자세로 일관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 인간적 이해를 축적해 온 신뢰가 두터워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nbsp;  그 신뢰의 면목이 드러나는 글들이 있는데, “그대처럼 저와 ‘지극히 각별한 사이’에 있는 이조차 제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너그럽게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관직을 받들지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연구를 하고자하는 퇴계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정에 붙들어두려는 고봉에게 서운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고봉을 칭하는 표현도 급제 후에 관직을 받기 전의 고봉에게는 기선달로, 그 후로 최초의 관직을 받자 기정자로, 이후 정3품 관직에 오르자 영공(令公)으로, 잠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에는 고봉의 자(字)인 명언으로 부르며, 관직의 오름에 따른 칭호와 친근함이 더해진 자로 부를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nbsp;  그런데 또 한 번 고봉이 선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라며, 퇴계 자신을 추켜세워 임금께 아뢴 고봉을 강하게 힐난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다 그만두어 주면 편하겠다”는 절교의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단교의 표현은 친근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화의 표현일 것) 이런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기 어려운 것 아니겠냐며, 고봉의 섣부른 행동을 나무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밀착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nbsp;  위와 같은 해인 선조 원년, 1568년에는 퇴계가 고봉에게 “영공께 아룁니다”며, “병환이 어떤지, 근자에 소식이 막혀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우스개 이야기도 전하고, 부채, 서책과 약, 꿩고기 등을 보내 마음 속 정성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퇴계는 고봉의 정치적, 학문적 후견인이자 스승이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벗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자신의 부친 묘비 갈문을 부탁할 정도의 신망을 지닌 아들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논변은 당대 고관대작들은 물론 유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서신이었기에 이들의 편지는 여느 선비들의 것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것이었던 것 같다. 붕당정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해서 정국의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서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당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살엄음판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대와 지위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의 깊이를 통한 삶의 고귀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품격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nbsp;<br>사단칠정논변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그 발단은 이러하다. “사단은 이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 있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이 온당치 못하다는 고봉의 논박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性)과 정(情)에 대한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데,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성(性)이라 하고, 이미 발현 된 것을 정(情)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nbsp;  여기서 고봉은 성과 정이 다른 까닭에는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과 감정인 칠정(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樂). 애(愛), 오(惡), 욕(欲))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바깥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이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고 고쳐 쓰지만, 이 역시 사단과 칠정의 연원이 다르다는 분리의 전제를 하고 있기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논박한다. 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라고 구분을 하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고봉은 사단은 칠정과 다르지 않은 연원을 지닌 것으로 단지 발현되기 전의 성(性)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기는 그 연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퇴계는 이와 기는 다른 연원을 가진 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nbsp;  사실 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적 논구들, 이에따라 부속되는 철학적 논변들이 이들이 5년에 걸쳐 주고받는 논변들의 내용이다. 그 철학적 함의들을 논구하는 것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상대의 논변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그네들 학문의 자세에서 오늘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스승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후학은 학문적 겸허를 잃지 않으면서 선학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가운데, 그 날카로움은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움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그대가 찾아낸 서너 조항을 김이정이 전해주었습니다. (...) 비로소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라며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회하는 퇴계의 학문적 자세는 숭고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nbsp;  한편 고봉 역시 “기운을 드러내고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꺾어버린다”는 자신의 고질병과 공부의 소홀함에 대한 경계를 다짐하거나, “선생님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자세히 답해주시니, 제 평생 이보다 큰 은혜는 없었습니다.”라며 거듭하여 자신의 소견을 깨우쳐 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고봉의 사유에 귀 기울이는 편이어서 고봉 중심의 독해를 하였는데, 퇴계의 후학에 대한 성심의 인물됨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후일 동인(남인+북인)의 갈라치기, 그 분리의 원천이 되기에 붕당정치의 파멸성 이전에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사변은 오늘 다시 재고되고 심층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nbsp;  사실 퇴고(退,高)논변은 조선 중기까지의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간의 논구라는, 다시 말해 같은 왕권수호 세력의 일원이었기에 반목이 심하게 충돌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이 파기되고 객체지향의 존재론이라는 일원론적 모색으로 전환되는 오늘에 고봉의 일원론적 접근은 다시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유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조선조 성리학 두 거두의 인간적 우애와 학문적 교감의 성숙된 면모를 읽어 볼 기회가 되었음은 내겐 예기치 못한 감응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자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에 선악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형체라는 보이는 것의 간섭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실체에 대해 구별하려는 인간의 습관인 것 아니겠는가. 고봉 사후 82년이 지난 1654년 효종이 고봉을 기리기 위해 월봉 서원을 내렸는가 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cover150/897139319x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4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우리’라고 부르기 위한 피와 뼈의 목소리 - [우리 세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1731</link><pubDate>Sun, 17 May 2026 13: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817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8606&TPaperId=172817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5/47/coveroff/k71213860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8606&TPaperId=172817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 세희</a><br/>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5월<br/></td></tr></table><br/>부패한 윤리의식 갱신을 위해,&nbsp; ‘우리’&nbsp;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  &nbsp;    &nbsp;<br>  “그들이 내게 들려 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숨이 멎는 날까지&nbsp;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nbsp;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nbsp;&nbsp;-116쪽  &nbsp;  “‘우리’ 세희, 함께 기억하기 위하여”라는 조해진 작가의 말에 담긴 지향(指向)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깊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우리’라고 말하여야 하고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타인이 껴안아야만 했던 고통의 내밀함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몸에 새겨지듯 치밀어 들어오는 관계성에 대한 배움과 적극적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일 게다.   &nbsp;  한글 이름 세희는 화자인 미술평론가 남연주의 엄마,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의 무국적자를 가리킨다.  일본명 미나가와 히로코, 어머니 아버지를 오마니, 아바이로 부르며,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졸업 후 취업한 일본 회사에 협력 업체로 드나들던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거주하게 된 연주의 엄마다.  &nbsp;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신작”을 발표하는 제이비 류라는 설치미술작가의 작품전과 작가 인터뷰기획을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영국 런던에서의 사흘에 걸쳐 마주하게 된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현실과 기억의 기록이다. 도착한 첫날 런던의 밤 거리에서 두 백인 남성이 연주를 향해 “니하오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칭챙총 칭챙총...”, 아시아인을 향한 이 명백한 조롱, 차가운 돌덩어리 같은 모멸의 감정이 스스로를 향한 분노로 치밀어든다. 그녀의&nbsp;기억은 쪽바리, 매국노라며 저들끼리 웃어대며 슬픈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nbsp;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되어 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엄마 세희는 자이니치로 분류되어 사실상의 무국적자이었으니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에도 한국의 이웃들은 끝없이 악의적 뒷담화로 조롱하고 멸시했음을. “아무 잘못이 없어도 내력이 죄가 되고 죄로 수렴되는” 한국에서의 삶, 엄마 세희를 향한 이 시선들은 국가의 무능과 잘못을 어느 순간인가부터 피해자인 개인을 향해 마치 개인의 허물인 듯 바라보도록 한 권력의 오랜 세뇌였을 것이다.  &nbsp;  엄마 세희의 아바이, 연주의 외할아버지 박태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부로 “북한을 저버리고 일본에 귀화하는 자이니치들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딸 세희를 검정색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 민족학교를 고집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뚜렷한 복식이 그네들에게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하는 데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다. 무관심으로 가장된 경멸, 어린 소녀에게 그 시선과 무례에 대한 반항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움과 서글픔이 섞인 혼탁한 외로움”은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무게가 되었을 것이다.   &nbsp;  여섯 살 위 스물두 살의 오빠는 고집스런 아바이에게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자신이 졸업하면 북송사업에 지원하겠으니 세희에겐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는 설득으로 고등학교부터는 일반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나가와 히로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만 자이니치는 그저 조센진일 뿐,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무조건 오세희가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는 차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 그 기억이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자신의 모멸과 겹쳐 흐른다.  &nbsp;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찾던 북촌에서의 남녀 두 어른과의 만남, 서정우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기쿠치 사치에 센세는 엄마 세희와 어느 곳에서도 이방인이어야 하는 서로의 삶을 위무하는 그런 관계 맺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나 자이니치에게는 공무원도 기업 취업의 문도 봉쇄되어 빠칭코 매장의 매니저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선생님과 엄마 세희의 만남의 사연,  자이니치를 위한 시위에선 늘 맨 앞에서 구호를 외쳤던 전사나 다름없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떠올린다. 이처럼 연주는 “엄마의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가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nbsp;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암 투병 중 마지막 말처럼 연주에게 남긴 말, “우리 오마니와 아바이, 그리고 오빠를.... 잊지 말아줄래?” “잊지 않아...” 아바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송선을 타고 이북으로 간 오빠의 죽음에 대한 부모에 대한 원망, 자신을 위한 오빠의 희생이라는 죄책감과 더불어 결혼 이후 자기 부모와 단절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오사카 이쿠노구 골목에 있는 첫 외갓집 방문에서의 다감한 외조부모의 따뜻한 정감을 떠올린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치매로 요양원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의 방문에서 연주 자신을 발견하고 세희야, 라고 부르는 외할머니, 오세희를 연기하는 연주가 그 연기가 어렵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이미 연주가 오세희를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nbsp;  <br>해방 이후 왜 일본에 있던 한반도의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국적 없는 이들의 필요서류 작성 불가, 받지 못한 노임으로 무일푼으로 당장 살아가기조차 곤궁한 이들의 처지, 설혹 밀항으로 고향을 찾아 떠났지만 일경(日警)을 승계한 한국 경찰의 무조건의 사상범 취급과 갖은 고문 끝에 길거리에 내버려져 다시 남루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이어진다. 제이비 류, 한국의 성씨인 류가 드러나는 인물과의 인터뷰는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 속 할아버지 류성철의 이야기로,  해방 후 돌아간 고향 제주를 지배하던 광기어린 살의, 이승만 독재정권이 도민 모두를 심판과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던 시대를 들려준다.   &nbsp;  사랑하던 연인이 해안가 절벽에 무참하게 뭉개져 매달린 시신으로 발견된 사연, 그녀의 시신을 몰래 매장했다는 사유만으로 숨어 지내야 했으며, 그를 숨겨준 사촌이 살해되고, 돌아간 집에는 이미 끌려가 처형된 부모의 소식만이 고통스럽게 나뒹군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 어떤 다름도 수용할 수 없이 극단적인 전체주의의 독단성을 띰으로써 살아갈 수 없는 지대였음의 한 조각의 기억이다. 일본계 영국인 제이비 류의 가계는 그렇게 우리와 무관한 듯 보이던 사람에게서 우리들이 지워버리고 방치한 역사 속의 관계를 드러낸다.  &nbsp;  엄마 세희가 단절했던 외조부모를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엄마는 연주에게 말한다. “외삼촌의 죽음에 부모의 오판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고.”,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딸 연주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르는 상태로 자라게 함으로써 그분들의 사랑을 받을 기회까지 빼앗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멘네(ごめんね, 미안하다)라고. 낯선 일본 땅, 그치지 않는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이 묶인 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국가 공동체와 역사가 떠안아야 할 책임의 문제임을 증언한다.   &nbsp;  연주, 그녀를 부르는 선생님, 센세, 외할머니의 욘짱은 그렇게 "알지 못하던 이국의 그들이 자신의 뿌리이자 가족이었음을, 아니, 바로 그녀 자신이었음을" 몸에 그려 넣는다. 한 덩어리 배신감만을 안기던 조국은 그들을 내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음을, 이 작품은 우리 공동체가 너무 쉽사리 타자로 치부하는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바로 ‘나’임을, 그래서 그들의 기억이 바로 우리 몸의 기억임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것일 게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공감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가능치 않게 하는 그런 불온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이 어찌 개인이 떠안아야 할 시선이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nbsp;  그 이야기들이 내 몸 안에 새겨져 있으며,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연주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자이니치(在日) 뒤에 동포, 교포를 붙이는 건 민족개념으로 제한된 배제의 표현이고, 이어 한국인을 붙여 쓰면 고국 분단 이전의 북한 출신을 제외하는 표현이기에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올바른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무심한 시선과 행동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는가, 결코 우리들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 흔적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nbsp;  역사적 고통의 재현은 제아무리 완전을 지향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에 대한 우리네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제주 4.3의 가공할 잔악한 폭력, 자이니치가 겪는 이중의 차별에 놓인 또 다른 폭력의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모두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들은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하나의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우리들 윤리의식을 갱신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감히 ‘우리’라고 말 할 수 있기 위해, 아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5/47/cover150/k71213860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95471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초한전쟁, 인간본성의 거대한 실험실 - [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77962</link><pubDate>Fri, 15 May 2026 1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77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7459&TPaperId=172779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2/18/coveroff/k76213745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7459&TPaperId=17277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a><br/>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05월<br/></td></tr></table><br/>인간 내면에 꿈틀대는 야수적 정신(animal sprit)이 표출되는 실체의 현장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것이 설령 반복되는 읽기여도 내 영혼은 그 적나라한 광경들에서 예기치 않은 삶의 지혜라는 수확을 건져 올리게 된다. 초한(楚漢)쟁투,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이 발산하는 그 동물성과 그것의 미묘한 절제와 절충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빛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한 걸음의 이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지대를 열어 보여준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변주된 이야기들인 『초한지』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이 책 『초한지 인생 공부』는 그 이야기들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nbsp;  ‘인생 공부’라고 하지만 지은이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 책은  2,200년 전 초,한(楚漢)이라는 시대적 무대를 “거대한 전장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충돌하는 ‘심리의 실험실’”로써, “인간학의 문법과 존재의 교과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 같다. 인간 욕망과 권력의 미묘한 충돌, 혼란과 안정기의 두 다른 체제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들, 리더의 태도와 자질이 빚어내는 인과의 상황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무수한 갈림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nbsp;  ‘초한지’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토대로 하여 초한충돌 시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각색한 이야기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중원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사기(史記)』의 역사를 재구성,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대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반하고, 문학적 장면 묘사는 『서한연의(西漢演義)』를 인용”하여 저자가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생존과 존엄, 권력과 사랑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들의 내면 심리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nbsp;  이미 이 시대의 역사와 영웅들에 대한 내용은 사마천의 《史記本紀》와 《史記世家》 《史記列傳》을 통해, 그리고 장편소설로 재구성된 『서한연의(西漢演義)』의 무수한 아류본(亞流本)들인 ‘초한지’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더구나 장국영, 공리가 열연한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로 익숙한 것이다. 또한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背水陣), 성동격서(聲東擊西), 사면초가(四面楚歌), 역발산기개세(力拔山氣蓋世), 토사구팽(兔死狗烹)과 같이 비근하게 우리들 일상에서 사용되는 이들 성어(成語)들로도 전투(심리)전략, 인간 본성, 정치 책략 등 배후의 의미를 알고 있다.   &nbsp;  그럼에도 인간학(人間學)이라 불릴만한 하나의 집적된 관점으로 이들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면모를 통찰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오늘의 언어로 수려하게 한 시대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 책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아무렴 바로 우리들이 실제로 이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의 다채로운 형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어린 시절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협소할 때 읽었던 『사기(史記)』 속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그저 서사적 흐름이 주는 이야기의 재미와 흔한 교훈들을 주워 삼키는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제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제법 싸인 지금, 진(秦)의 수도 함양을 복속시키고 난 후 승리의 축연 자리인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우와 유방, 그네들의 책사 범증과 장량의 언행이 역사 행방에 얼마나 중대한 전환적 사건이었는지를 새삼스레 곰곰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과연 내가 항우였다면, 유방이었다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하고 상상의 자리에 참석해보기도 한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항우의 미적거림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유방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죽음의 장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우위의 힘을 가진 항우 앞에서 나는 어떻게 닥친 위기를 넘겼을까?   &nbsp;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 (불자,약속개차위소로, 不者,若屬皆且爲所盧)” 라는 책사 범증의 말을 항우가 아닌 나라면 어떻게 수용했을까? 이 말은 훗날 항우를 포위한 역전된 상황에서 홍구화약(鴻溝和約)으로 일시적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다 잡은 항우의 숨통을 트여주려 할 때 ‘양호자유환(養虎自遺患)’,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근을 만드는 것이라는 유방 책사의 말로 변주되어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네가 빈번하게 망각하는 자성(自省)과 경청의&nbsp;중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본질은 말하는 힘이 아니라 듣는 힘”이라는 것, 즉 리더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보이는 행보를 보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일방적 말만 쏟아내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 절대 우위 의식이라는 오만은 항상 실패를 몰고 온다. 폐쇄된 소통과 열린 소통, 이보다 보편적 진실의 감각이 어디 있겠는가.  &nbsp;  진을 복속시킴으로써 천하를 쥔 항우가 “측근을 챙기고 잠재적 적들을 고립시키는 사실상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 함으로써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중원으로 나오기 힘든 파촉(巴蜀)지역 한중(漢中) 땅을 다스리는 한왕(漢王)으로 밀려나는 유방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책사 장량의 권유에 따라 지나온 잔도(棧道)를 불태워 오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 속 정치적, 전략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도 쏠쏠한 흥미로움이다. 홍문연에서의 항우의 행위에서 드러나듯 그는 타인의 조언을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자기애적 인물이다. 그 심리를 꿰뚫은 유방의 책사 진평의 이간계(離間戒)는 사마천이 “성인의 경지에 오른 지략가”로 평가한 책사 범증과 항우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한다. “귀가 닫힌 자는 곧 눈도 먼다.”는 이 평범한 진실이 사실로 입증되는 현장이다.  &nbsp;  절대적 힘의 우위에 대한 환상,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여 상황 변화의 유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된 소통으로 고립되어 자만에 빠지는 실상들은 우리네의 일상 환경에서 즐비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동네 건달이었던 유방이 대귀족 금수저 출신의 항우를 몰락시키는 것은 그네들의 출신성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에 대한 태도, 상황에 대한 전체적 인식의 여부, 즉 겸허와 오만,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차이가 갈라놓는다.   &nbsp;  하급 창고관리 병사에 머물던 한신의 출중한 전략술을 감지한 유방의 탁월한 행정책임자인 재상 소하의 수차례에 걸친 천거에 유방은 그를 대장으로 임명한다. 이때 한신의 확신에 찬 비전과 항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의 언급이 그 까닭이 될 것이다. “항우가 준 땅이 아니라 백성이 주는 땅을 차지하십시오. 그러면 천하는 대왕의 것이 됩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하며 했다는 말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생 한중의 왕으로 남으려 하신다면 한신이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사기열전》〈회음후열전〉  &nbsp;  유방은 한신에게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중 땅의 정벌을 명한다. 여기서 한신은 그 유명한 동쪽에서 소리 내어 주의를 끌고 서쪽을 격퇴한다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함정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으로 변모시켜 가짜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기동의 전략적 의미를 보여준다. 잔도 수리에 적의 시선을 모아 놓고는 험난한 우회로를 통해 관중의 중심인 진창(陳倉)을 기습 점령하고 연이어 삼진을 평정해버린다. 유방이 얼마나 신이 났을까. 연이은 승리의 동력으로 유방은 한신과 함께 제나라 반란에 출정하여 빈집이 된 항우의 초나라 수도 팽성을 공격, 무혈 입성하기까지 한다. 손쉽게 얻은 승리(성취),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임을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신중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던 유방이 순간적으로 승리에 도취하여 절제력을 상실하고 상황을 방기하고 만다.  &nbsp;  <br>팽성 대전, 훗날 항우가 자결하는 초한(楚,漢)의 마지막 전쟁인 해하전투만큼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의 56만 대군에게는 급하게 비보를 전해 듣고 달려오는 항우의 정예기병 3만은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항우가 초패왕(楚覇王)이라는 천하의 군웅으로 이름을 얻게 된 거록전투에서 보인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부수고 막사는 불태우고, 식량은 사흘치만 남긴 채 돌아갈 길은 앞길만 있다고 적에게 쇄도하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결단은 실로 가공할 만한 심리 전술이라 할 수 있다. 〈항우본기〉에 사마천은 팽성대전의 참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한(漢)나라 죽은 병사가 10만, 초(楚)나라 군대가 영벽 동쪽 수수(睡水)까지 추격했다. 10만이 모두 수수로 빠지니 수수의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게 했던 참혹함의 이 생생한 증언만큼이나 성공의 도취가 부르는 참사에 대한 경계의 교훈은 없을 것이다.  &nbsp;  팽성의 참사와 동일한 유방의 실기로 형양 공방전이 있는데, 팽성의 참패는 유방 연합군의 와해 움직임을 초래한다. 위나라 위표가 배신한 것인데, 이것은 유방의 미래전략에 대한 큰 상처가 되었을 게다. 이를 급히 봉쇄하지 않으면 연합군의 연쇄적 이탈을 초래할 시발이 될 것이기에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하며 위표를 칠 것을 명한다. 한신은 여기서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술책을 감행한다. 위표의 주의력을 황하(黃河)나루에 집중시키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은밀히 상류로 이동, 뗏목을 타고 위의 수도 안읍을 기습, 위표를 생포함으로써 관중과 형양을 잇는 북방 제후국을 격파하는 교두보의 확보와 아울러 연합세력의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적이 성동격서의 잘 알려진 교훈을 왜 망각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반복된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 바로 교만이다. 수적, 지리적 우위에 대한 자만이 이 뻔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우매함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nbsp;  유방은 여기서도 반복된 실수를 하는데 형양성 함락의 승리로 다시금 도취되어 방어를 소홀히 한다. 형양은 항우의 초군에게 틈도 없이 완벽하게 포위되어 탈주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신이라는 충신의 자신이 유방 대신 죽겠다며 변장을 통한 탈출 양동작전으로 구사일생 형양 포위 망에서 벗어난다. 사마천은 기신의 행위를  《사기열전》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충신이어서? 제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인물을 알아본 예지력 때문에?, 생명의 희생이 전달하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위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nbsp;  초한 전쟁의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한신임을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데, 분노를 복수로 쓸지, 삶의 미래 설계를 위한 동력으로 쓸지 인간 존재의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던 냉정의 미학을 실천한 차가운 이성의 두뇌를 가진 인물이 왜 결정적 순간 자기 삶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못했는가에 곤혹감마저 들게 하는 장수이기 때문이다. 내 단순한 결론은 유방이나 항우와 같은 동물적 영혼을 그는 수없이 압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야수적 욕망의 표출 말이다. 한신의 내면, 특히 “감정을 규율로 구조화한 인물”이라는 저자의 평가는 참신하고 탁월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감정의 파도를 지적 구조로 재조립하여 이성의 설계도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인물임에도 공이 커질수록 증가하는 권력자의 의심 속에서 장수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방법을 냉정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더 그에게 동물적 감각이라는 야수적 충동의 표출 능력이 없었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br> 한신은 많은 성어(成語)와 관련된 주인공이다. 이미 언급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은 물론 배수진(背水陣), 토사구팽(兔死狗烹), 또 하나의 역사적 전투인 조나라 정벌에서 벌인 정형(井陘)전투에서의 전략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다. 사실 항우가 앞서 보인 파부침주(破釜沈舟)와 유사한 전술이다. 당대 전술에는 금기인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전쟁의 전(戰)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방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장 자체를 하나의 무대로 계산한 치밀한 전략의 결과라는 점이다. 패배할 줄 모르는 전쟁의 신, 한신은 조나라의 격파에 이어 연과 초와 국경을 맞닿은 제나라까지 복속시키고는 유방에게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임시왕 봉책의 사건은 한신의 소심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 요청의 서신을 받은 유방의 불쾌함에서는 공적에 대한 인색함, 언제 적으로 둔갑할 줄 모르는 증대하는 힘에 대한 의심을 보게 된다.  &nbsp;  가장 주목해서 골똘히 생각하며 읽게 된 장면은 이로 인한 한신이 겪는 갈등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책사 괴통(蒯通)과의 대화이다.“충성으로만 스스로를 지키려 하면 훗날 의심이 덮칠 때 구원할 논리와 힘이 없게 됩니다. (...) 제나라 땅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곳의 풍부한 경제기반과 병참의 지속성은 대왕을 지탱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역을 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안전 설계입니다. 한(漢)왕은 겉으로 기뻐하나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고 있습니다.”  &nbsp;  전승의 결과로 높아진 명성이 최고 권력자에게 곧 죄로 비칠 수 있음의 지적이고, 현실권력의 의심 앞에서 스스로 지킬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없다면 곧 죽음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괴통의 진언은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초(楚)와 한(漢)과 제(齊)의 삼분지계(酸三分之堺)를 형성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신은 자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수동적 무능성에 좌초되고 만다.&nbsp;오 애재(哀哉)라,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인간사 만고의 진리인 것을!  &nbsp;  이것은 한(漢)의 제국통일, 즉 적이 사라진 제도화된 국가의 정비 안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대들은 모두 토끼를 잡는 사냥개와 같소, 소하는 그 사냥개들에게 토끼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사람일 뿐이오.” 라는 유방의 말처럼 모든 공은 한순간에 사냥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유방의 행정 책임자인 소하의 말처럼 “왕의 신뢰는 언제나 경계와 함께 오는 것이며, 충성은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이 깨달음의 음성은 어떤 조직이던 그 수장과 수뇌부와의 관계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인간학의 보편 법칙일지도 모른다.   &nbsp;  “권력의 절정은 언제나 낭떠러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권력자의 의심을 처리하는 태도와 방책들의 모범이랄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지혜가 되어 줄 터이다. 소하와 실행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형식과 체면보다 생존과 실리를 중시하는 책략가 진평의 “권력자의 의심을 흡수하는 피뢰침” 같은 태도는 꽤 호감을 자아낸다.   &nbsp;  “승상,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과연 평안하겠는가?폐하의 마음이 평안하시면 나라 또한 평안해집니다.  &nbsp;  모두가 좋다 하는데, 승상만 말이 없구나.모두가 좋다 하면 그 안에 분명히 허점이 있을 것이옵니다.  &nbsp;  승상은 참 이상하오, 내 마음을 읽는 듯하오.폐하의 뜻이 곧 천하의 뜻 이옵니다.“  《사기세가》 〈진승상세가〉  &nbsp;  왕과 승상 진평의 이 대화 장면은 왕이 자신을 통제한다고 느끼게 하면서 실제로는 왕의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자의 가히 우아하기까지 한 조용한 통치의 예술을 보여준다. 침묵과 순응 속에서 왕이 폭주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제동장치로서 역할, 칭송도, 간언도, 조언도 없지만 미묘하게 안심되는 진평의 대답에는 언어의 온도를 낮추어 안정의 언어로 돌려주는 신묘함이 있다. 충성과 처세의 경계선, 권력의 미세한 줄 위를 걸었던 회색지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생존기술과 불안한 제국을 다스렸던 인물들을 이렇게 읽다보면 마치 세계의 한 지대를 달관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nbsp;  조직의 리더로서, 권력자로서, 때로는 권력의 전략가로서, 인간사의 한 지평으로서, 어떠한 태도가 우리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척도들의 집약된 한 편의 탁월한 실험 사례라 해도 될 것 같다. 그래, 인간 본성,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왔을 때의 상황은 이미 많이 변한 것이다. 그 상태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태도와 기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당위를 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상황의 인식, 듣는 귀에 대해서, 언어의 온도에 대해서, 그 균형 감각을 되새기는 아무쪼록 의미 있는 독서가 되어 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2/18/cover150/k76213745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221857</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요재지이(聊齋志異)』,공짜 커피 마실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link><pubDate>Sun, 10 May 2026 16: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772430765&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362634460&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05/23/coveroff/d36263446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99965X&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84/coveroff/898699965x_1.gif"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11768&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coveroff/8937411768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8061207&TPaperId=172681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5/coveroff/8908061207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68153'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명(明),청(靑)시대를 살았던 문사(文士) 포송령(蒲松齡,1640-1715)이란 인물에 대한 호감이 읽어나갈수록 크게 자라난 책이다. 천재로 불렸으나 일평생 계속된 과거 응시의 낙방에서 오는 시름을 덜어내고 “혼자 술잔을 기울여가며 붓끝을 놀려” 세상에 분개하고 부조리한 풍속의 해악을 써내려가는 이 고분지서(孤憤之書)는 그가 마음을 기댈 유일한 것이었을 게다. 이 작고 아담한 책은 주워들은 민담, 자신의 경험담을 합쳐 죽기 직전까지 수십 년간 모은 포송령이라는 인생 자체이기도 한 일생의 자취인 대표작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아주 작은 분량인 열편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발췌 선집이다.  &nbsp;  【1776년 출간,『요재지이(聊齋志異)』판본】<br>요재(聊齋)는 포송령이 사용한 서재의 이름이자 호(號)이기도하니, 요재에서 또는 요재가 기록했음을 뜻하고, 지이(志異)란 기이한 일이라는 뜻으로 책의 성격을 의미한다. 즉 요재지이(聊齋志異)란 ‘요재에서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책의 표제인 『천녀유혼』은 동명의 다소 변형된 내용의 영화로도 알려진 원제 ‘섭소천(聶小倩)’의 번안 제목이다. 소천이라는 예쁜 처녀의 소곤거림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책의 서문 격으로 「포송령 자서」가 실려 있는데, 왜 그가 이렇게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써내려가야만 했는지, 신선과 귀신들의 이야기의 흥취에 몰입했는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변명을 마주하게 된다.  &nbsp;  “서리에 놀란 겨울 참새는 나뭇가지를 껴안아 보지만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고. (...) 고적한 나는 난간에 기대어 감상한다. 진정 나를 알아줄 이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신들뿐이런가?”   &nbsp;  환상의 세계에서나 자신의 기개를 마음껏 뽐낼 수 있음에 삶을 지탱해낼 수 있었을 고독한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있는 「동전 점」의 주인공 하상이라는 인물은 주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거듭 실패하고야마는 인물인데, 아버지, 즉 ‘껍질 버리는 태위 나리’라는 낭비벽과 방탕한 조상의 악행으로 후손인 그가 그 악업의 화가 종결되는 쉰여덟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으로 바뀐다는 점(占)의 이야기다.  욕심없이 분수를 지켜내어 마침내 한평생 나쁜 짓하고는 인연이 없었으나 내세의 복이 무궁무진 할 거라는 인물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빈낙도의 삶이 포송령의 삶과 닮아 있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nbsp;  이처럼 작가의 삶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로 「신선 세계에 다녀 온 동안」의 주인공 역시 재주가 당대 제일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시험만 보면 낙방하는 불운한 서생 가봉치가 있는데, 내적 훌륭함의 미덕과 부귀영화와 공명이라는 두 갈래 삶의 길을 경험하며 마침내 “부귀영화의 장이란 한갓 고통이나 따른 지옥 땅에 불과한 것을 알겠소.”라며, 세상사 공명이란 것의 휘장 뒤에 있는 인간세태의 더러움을 은연히 비판하기도 한다. 각 이야기들의 끝에는  “이사씨(異史氏曰)는 말한다”며, 포송령 자신의 의견, 즉 이야기가 지닌 교훈이나 비판적 의지를 펼치곤 하는데, 이 이야기의 끝에는 “가난이 인간에 미치는 해악이 실로 적지 않다”며, 물질적 삶의 해악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4남1녀의 가장이었던 포송령으로서는 이렇다 할 직위나 부를 쌓지 못한 처지고보니 이러한 가상의 이야기로나마 자신의 불운을 다독일 수 있었을 것만 같다.  &nbsp;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태를 전도시켜 자신이 이루지 못하거나 저지당했던 고통의 실체를 뛰어넘어보는 즐거움은 그의 말처럼 마음 기댈 유일한 흥취였을 것이다. 「저승도 무전 유죄?!」는 층층이 사슬처럼 이어져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관료조직의 부패상을 고발하는데, 저승 서열의 최상층인 옥황상제의 감찰에 의해 염라대왕부터 저 말단 옥사장, 그 졸개들로 이어지는 탐욕상에 대한 판결문은 오늘 한국사회의 관료조직 도처에 스며있는 더러움의 일목요연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만 같다. “가난한 귀신이야 더욱 안중에도 없었겠지. 죄 지은자의 죄를 죄 없는 자에게 덮어 씌워 조작하는 짓거리”에서부터 “원숭이처럼 교활한 간계나 부리는 자를 제멋대로 발호하도록 내버려두고 오로지 뇌물이나 받아먹고 국법을 어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니 진정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구나!”에 이르는 탐욕의 사슬은 인간사회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4백 년 전 청나라의 사법관리나 21세기 한국사회의 법(法)과 검찰(檢察)관리들의 행태가 복사한 듯 동일한 양상을 보이니 말이다.  &nbsp;  【민음북클럽 에디션】<br>「비둘기 애호가」라는 장유령이라는 공자의 이야기는 무지하고 옹렬한 인간들에게 제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인들 고작 자신들의 입속에 처넣는 맛밖에 알지 못하거나, 허튼 예의로 가장된 볼품없는 무식함뿐임을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지극한 정성을 들여 비둘기를 돌보는 장공자는 자기 살을 베는 듯 아까운 희귀종 두 마리를 아버지 친구인 고관대작에게 선물한다. 후일 장공자가 그 고관을 만나 “저번에 보내드린 비둘기가 마음에 드셨는지요?”라고 묻는다. 그 고관대작 왈, “응, 살이 통통하게 쪄서 맛이 괜찮던 걸”, “삶아 잡수셨단 말입니까? 그건 세간에서 말하는 ‘단달’이란 희귀한 새에요.”, “맛은 그다지 대단치 않던데.” 이를 말하는 사자성어가 있다. “섭공호룡(葉公好龍)”,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 실제 그 내용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부하지 않는, 고작 한 때 시험의 결과로 평생을 놀며 호가호위하는 것들의 무지가 이 사회를 얼마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가. 아무튼 이 무지라는 병은 인간세계의 가장 더러운 악이리라.<br> 표제작 「천녀유혼」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한평생 아내 말고는 다른 여자는 없다”를 신조로 살아가는 품행이 단정하며 자중하는 영채신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과거시험으로 인해 방 값이 급등하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찾아 든 곳이 주인 없는 절간이다. 영생은 먼저 머물고 있던 연적하라는 서생을 만나자 그곳에 거처할 것을 결심하고 머물기로 한다. 마침내 잠을 청하는데 미모의 여인이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 “달빛이 너무 좋아 잠을 이루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네요.” 햐~아, 영생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꾸짖는다. “한 번의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싶은 거요?” 여자는 황금덩어리를 그의 이부자리에 놓으며 다시 한 번 유혹한다. “의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려 들다니!”, 그렇게 요괴의 시험에 빠지지 않아 죽지 않는다. 정말 대단한 성인(聖人) 납시셨다. 물론 죽음을 피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영생은 군자 소리를 들을 만하다.   &nbsp;  다음날 아침 동쪽 승방에 묵었던 서생이 한 밤중에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다음 날 밤 여자는 다시 찾아들어 영생에게 자신이 유혼이 되어 떠도는 사연을 말하고 버려져 묻힌 곳에서 뼈를 거둬 조용한 곳에 묻어준다면 그 은혜는 새 생명을 주는 거와 다름없음을 하소연한다. 영생은 집으로 돌아와 거둔 뼈를 정성들여 묻어준다. 이 유혼(幽魂)의 이름이 ‘소천(小倩)’이다. 소천이 영생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며 영생의 노모를 섬길 것을 제안한다. 그 후로 이야기는 일사천리다. 영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소천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 둘을 낳고 해로했다는 포송령이 꿈꾸는 미인과 함께하는 삶, 공명을 누리는 삶, 정겨운 가정생활은 이렇게 상상에서 화려하게 자라나 그의 마음을 풍성한 꽃밭으로 만들어주었을 게다. 포송령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 상상의 세계들은 현실의 가치관, 시선들이 전도(顚倒)되어 그려지곤 한다. 「못 생길수록 출세하는 나라」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랄 수 있겠다.   &nbsp;  이는 그가 “오호라, 출세와 부귀영화는 *신루해시(蜃樓海市)로나 가서 찾아야 할까보다!”라고 말하듯, 그를 거부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냉엄한 비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환상의 세계를 거니는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시원적 소망의 심연들을 건드린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그 누구들처럼 그리 밉지 않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아마 그 까닭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소박한 진심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이 고립된 오늘의 세계에서 포송령의 이야기들은 우리들 얼어붙은 삶의 추위를 녹여내 준다.  &nbsp;  이 환상의 이야기들은 무언가를 분석하고 증명하려들지 않는다. 권태롭고 얼어붙은 삶을 녹이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삶이라는 심지를 은은히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학적 음화(陰畵)라는 벤야민의 이야기에 대한 정의가 바로 포송령이 모은 이 이야기들일 것만 같다. 부쩍 이런 정말의 이야기들이 그리워지는 즈음이다. 전도된, 세계의 음화같은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말이다. 지금은 품절되어 요재지이 전권을 구입할 수가 없다. 한 질 전체를 옆에 두고 쉬엄쉬엄 읽고 싶은 책이다. 돈 대신 맞바꿀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요재지이』에서 한 편 마음에 담아 들려주면 아마 들은 이들의 표정에 피어나는 평온한 미소와 함께 공짜 커피를 내 줄런지.  &nbsp;  --------------------------------*신루해시: 교룡이 숨을 내쉬면 누각이 만들어지듯, 빛의 반사작용으로 인해 바다나 사막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환상의 세계’를 뜻함.<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cover150/893741171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19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몰 플랜더스, 여성의 운명과 사회구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link><pubDate>Sat, 02 May 2026 16: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53260738&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09/5/coveroff/185326073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82635020&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77/27/coveroff/e58263502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953001&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578/89/coveroff/896195300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40411&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973/7/coveroff/893004041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5026&TPaperId=172538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245/11/coveroff/8932405026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5384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몰 플랜더스, 질서 탈주 인물인가, 체제 순응 인물인가?  &nbsp;시대의 걸작이자 삶의 방식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비평적 논의의 대상으로 꾸준히 회자되는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1722년》가 종이책으로 국역 출간되었다는 데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열렬하게 환영한다. 이 걸출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60-1731)의 작품은 초기 자본주의의 물질화의 욕망이 거세게 세상을 지배할 때, 그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여전히 협소하여 삶의 주체자로 설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을 때, 그러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욕망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nbsp;   <br>디포의 잘 알려진 《로빈슨 크루소 (The life and adventure of Robinson Crusoe),1719년》를 넘어서는 1722년 발표된 대표작이다.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1인칭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주인공 몰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도덕, 경제, 여성의 생존 조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몰은 감옥에서 태어나 숙녀가 되기를 꿈꾸며 성장하지만 그녀의 삶은 일관된 도덕적 성장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기 선택과 자기 합리화의 반복으로 전개된다.  &nbsp;  다섯 번의 결혼, 이 결혼들은 사랑에 있지 않고 오직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상승을 향한 전략의 일환이고, 자신의 형제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결혼은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불안정한 사회적 신분 구조와 정보의 결핍이 낳은 비극으로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재산을 잃은 후 본격적으로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 도둑으로 살아간다. 깜쪽 같은 변장과 뛰어난 기지로 수많은 절도를 저지르지만 이를 죄라고 여기기보다는 필요한 생존 기술로 정당화한다. 그녀는 이러한 반도덕적 행위에 대해 내면적 갈등보다는 계산적이고 실용적 태도를 보이면서 당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가치가 어떻게 물리적 기준으로 환원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nbsp;  주인공 몰이 생존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성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I saw world was so taken up with self...(세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처럼 자기 살기 바쁘다는 인식, 즉 도덕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배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합리화와 죄 의식의 공존,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은 “I had no remorse about me...(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Get money. honestly if you can...(가능하면 정직하게 돈을 벌되”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 돈이 중요하다는 냉혹한 가치관을 도처에서 보여준다.  &nbsp;  결국 몰은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고, 이 시점에서 그녀는 회개의 태도를 보이며 소설은 구원의 서사로 전환된다. 식민지로 이송되었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디포의 체제 수호적 의지가 반영된 인위적 결말로 작품의 아쉬운 흠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몰의 회개가 진정한 도덕적 각성인지 아니면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랄 수 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몰이라는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물음을 가능케 하는 특출한 모델을 설립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학적 업적이랄 수 있다.  &nbsp;   몰 플랜더스는 《테스》나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와 비교되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읽는다면 몰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해독하는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몰과 테스는 여성의 운명이 사회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테스는 가난과 계급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도덕적 낙인이 따라다닌다. 테스는 몰과 달리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몰이 생존형 현실주의자라면 테스는 사회적 희생양에 가깝다. 한편 마담 보바리는 물질적 욕망과 환상을 좇는다는 측면에서 몰과 유사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낭만적 환상을 좇다가 파멸하고 만다. 그러나 몰은 현실적 계산이 뛰어나다. 엠마의 감정적 욕망과 몰의 실용적 욕망을 대비하며 읽어나가면 결국 두 인물 모두 사회가 만든 욕망에 갇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제인 에어는 여성 독립의 문제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몰과 동일하지만 둘은 도덕적으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반례로서 사회적 조건이 인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사유케 한다. 몰은 이러한 비교대상의 여성 인물 중에서도 특출한 역사적 모델이다.  <br>이러한 비교 독서를 이 작품은 자연스레 이끄는데, 그만큼 몰이라는 인물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여러 방향의 물음을 요구하는 독특한 존재다. 죄의식 없는 반도덕적 실용주의적 삶을 수행하는 나쁜 여자로서의 몰은 정말 악의 화신인가, 나아가 이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질서, 즉 주류 권력이 만든 틀 속의 체제 종속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와는 대비되어 소위 페미니즘적 관점, 혹은 들뢰즈의 욕망의 생산의 관점에서 몰의 지배질서를 교란하는 반도덕적 행위는 사회적 흐름(화폐, 신분계급, 성적지위)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생산적 욕망의 수행이라는 자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는 긍정적 존재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은 기성의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되기(becoming)를 실험하는 존재로 해독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몰과 같은 삶이 가능해진 사회적 배치(질서와 제도, 체제)란 어떤 것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17~18세기 영국 사회란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물질과 화폐에 대한 물신적 풍조가 전통적 미덕을 강하게 밀어내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제적, 정치사회적 지위는 전통에서 풀려나지 못한 그야말로&nbsp; 취약 지대에 놓여있었으며, 이는 결혼이 화폐에 의해 거래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여성이 그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가에 대한 심원한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관점, 즉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여성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몰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바라보는 기성의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 담론에 이미 종속되어있는 비평이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합법과 범죄, 아내와 창녀,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권력이 사람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몰은 소설의 전환점 이후에 구원과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nbsp;  <br>이것은 이 소설이 1인칭 고백(confession)의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몰의 서사는 거의 전부 자신의 죄라는 과거를 서술하고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인데, 이는 단순 서술이 아니라 권력에 순응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고백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이는 곧 스스로 말함으로써 권력에 협력하는 주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몰은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도덕적으로 재구성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러한 양태를 자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권력(법, 제도, 처벌)보다 내부 권력(양심, 자기감시)이 더 강력해지고, 결국 몰은 순종적인 주체로 재형성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몰을 권력에서 탈주하는 여성으로 해독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기 통치라는 그물망에 포획되기에 이는 과잉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이 소설은 여성과 사회경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성적 규율, 결혼 제도, 빈곤과 노동, 범죄화 등 중요 요소들이 어떻게 개인에 작동하는지를 발견토록 하는 거대한 사례연구라 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작용하는 인간 삶의 조건을 생각토록 하는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몰이 자신을 범죄자, 타락한 여성으로 자성토록 하는 것은 사회가 읽고 관리 가능한 범주에 포획된 존재에 대한 계도(啓導)적 인물로 이해할 것을 은근히 제안하는 디포의 수구적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nbsp;  작가의 이러한 의도야 어쨌건 몰 플랜더스라는 여성의 삶의 행적은 도덕 이전의 문제로서 인간 욕망과 생존 실험의 방식으로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검토를 요구한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으로서, 욕망의 배치가 드러나는 공간으로서, 독자를 훈육하는 장치인 규율 장치로서의 소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하는 문제적 소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하고 기회주의적 여성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누구나 이 매혹적 서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땅한 국역본이 없어 원서를 통해 어설프게 읽었던 작품을 우리말로 다시 읽게 될 기대가 크다. 이 기회에 테스와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과연 몰의 반도덕과 타락은 개인의 윤리문제인가, 아니면 경제사회구조가 만든 선택인가? 이 입체적 인물은 질서 탈주의 존재인가 아니면 체제 순응적 인물인가? 독자들의 감상이 기다려진다.&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98/98/cover150/k09213888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98988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말랑말랑한 속삭임이 전하는 새로운 관계의 풍경들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10885</link><pubDate>Sat, 11 Apr 2026 22: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108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108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108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내게 가장 평온하고 즐거운 마음을 주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음이 기쁘다. 그 호감의 정체는 선물(膳物) 같은 감정의 풍경들이 선사하는 내적 단단함 속에 내재된 어진 마음의 인물들이 어른거리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밀고 들어오는 진짜배기 웃음 코드에 심어져 있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관계에 벌어진 틈을 연결하려는 애씀과 그 지혜이다.1)&nbsp;이처럼 관계들이 빚어내는 온갖 감정들의 풍속화는 기 발표작인 단편  「우리는 계절마다」에서의 ‘이상한 낙차’라는 타자와의 간극에서부터, 「그 개와 혁명」에서의 간극의 이해, 간극이 벌어진 틈새로서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변화로써 ‘유대의 가능성’이 되고, 이 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에서는 그 간극의 봉합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고자 한다.  &nbsp;  아마 이 작품집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이 〔발문〕에서 말하는 바로 새로운 관계를 형상화하기 위한 이 시대 풍경의 “채집(採集)”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의 감각을 포착하는 섬세한 시선이고, 그로부터 소원하고 단절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얽매인 질곡(桎梏)들의 형상을 풀어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공감을 통해 연결의 가능성을 엿보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가 이러한 중심에 모이는 이야기들이지만 특히 표제작 「너의 나쁜 무리」를 비롯하여 「아무 사이」와 「소란한 속삭임」, 이 세 편의 단편소설만큼 기분 좋은 가벼움, 웃음의 평온 속에서 읽은 작품은 근래에 없었던 듯하다.  &nbsp;  경쾌하고 소박한 감정들의 정경 속에서 이 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무수한 관계의 형태들을 포착해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그대로 내 감각에 스며들어 그 어떤 해석도 요구되지 않는 온전히 평온한 공감과 이해가 되었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 가운데 절로 수긍케 되는 다채로운 관계의 상황들에서 우리들이 꾸는 작은 소망, 그것은 「아무 사이」의 노인 돌봄 일을 하는 희지가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 말하는 그 작고 높은 자부심에 깃든 소박한 삶의 책임성이고, 「뜰의 미래」의 문주의 둘째 고모, 뚜비의 도자기 안 쪽지에 써진 유언 “지름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서, 나의 방식대로 나를 물림할 것”일 게다.  &nbsp;  나는 「소란한 속삭임」에서 시내가 모아에게 귓속말로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이듯 들려주는 속삭임을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힘 같은 것”이라 할 때, 이 소설집 전체를 표현하는 말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 이 소설집 전체는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힘으로 가득 차있다. 이 표현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입 밖으로 소리 내 본다. 이 작품은 서로들 자기주장을 어떻게든 펼쳐 보이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이 세계, 그래서 서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갈등과 혐오에 지쳐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초상인 네 사람 - 모아, 시내, 수자, 두리 - 이 저마다 안고 있는 질병 아닌 질병을 극복해내려는 시도, 그럼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속삭임 모임’의 인간 풍경이다. 누군가에 속삭이듯 귀엣말을 나누는 것은 친밀감으로 거리감, 단절감을 없앤다. 물론 이 속삭임 모임의 시도는 커다란 은유일 것이지만 나는 그 말랑말랑함이 이 세계의 소외에 대한 하나의 처방이 되어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제발 목소리들을 낮추어주시기를. 아, 저는요,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싫어요,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2)  &nbsp;  속삭임은 거리감을 해소하고 친밀감을 만들어주는, 단절의 관계를 연결의 관계로, 서로를 책임의 관계로 연결해주는 하나의 시도이다. 노인들의 돌봄 일을 하는 「아무 사이」의 일산 일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베스트 시터(sitter) 중 한 명인 ‘희지’의 이야기는 이 시도의 변주된 하나의 현실 속 이야기로 다가온다. 희지는 자신의 일, 노인 돌봄 노동을 “가족 사이에 끼어들어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하되, 분명한 선을 지켜야만 하고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제 몫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되다 못해 서러운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친밀감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경계)을 지켜야 하듯 적정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의 애매성이 놓여있는 일이다.   &nbsp;  두부 할머니의 돌봄 노동으로 가사일을 하던 중 노인이 희지 모르게 사라지고, 당황한 희지는 노인이 갈만한 전통시장, 성당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달린다. 노인은 어디에도 없고 찾기를 포기한 채 노인의 집에 돌아왔을 때 보호자인 며느리의 전화로부터 모멸어린 싫은 소리를 듣는다.   &nbsp;  며느리: 희지 씨, 어머니한테 초콜릿 사다 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속상하게 왜 자꾸 그러세요?희지: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며느리: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nbsp;  희지는 노인 돌봄 노동이라는 자신의 일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회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을 느끼게 해”준 일로써, 그 작고 높은 자부심을 지키기 온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이상한 모멸을 주는 언어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희지가 담당하는 뮤 할머니, 오 할머니는 희지를 자신들의 연락 목록에 ‘아줌마’로 저장해 놓거나, 설거지나 변실금 심한 속옷들의 빨래조차 한겨울에 찬 물만 쓰게 할 만큼 그녀가 선뜻 다정해지는 것을 어렵게 하고, 가슴 한편에 켜켜이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 자신을 괴롭혀 안타까워한다.   &nbsp;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라고 자책하는 희지의 마음에서 나는 굴욕을 무수하게 만들어내는 우리의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세계를 떠올리며 진저리친다. 그녀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다짐한다. 오,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는 ‘희지’라고 저장되어있다. 아줌마도 아니고, 유희지도 아닌, ‘희지’,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차렸다.”고 할 때, 그녀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친밀과 거리의 딜레마를 극복한 관계성을 찾았음에 안도했다. 제발 사람들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관계의 균형성을 적중하는 적도(適度), 즉 관계의 좋은 상태를 실현하는 것의 곤란함을 아우르는 우리들 세계의 ‘아무 사이’라는 이 문구의 울림이 꽤 크다.   &nbsp;  <br>표제작인 「너의 나쁜 무리」는 그 무엇보다 성인이 된 유선이 들려주는 독특한 성장기를 함축하는 발칙한 서사다. 부모에게 버려져 여사로 부르는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 손녀 유선이 46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를 건너뛰어 여사와 주저없이 나누는 서로의 이야기는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무게 때문에 정말이지 지적으로 웃었다. “여사 58세, 나는 12세.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나와 여사의 관계가 시종일관 괜찮은 편에 속했다는 것이다. 여사는 나를 아꼈다.”고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그 반전의 목소리를 예상해야 했는데, 속절없이 12살 소녀의 음성에 나는 그만 그 경쾌하게 날아오를 듯한 솔직한 시선들에 빠져들고 말았다.  &nbsp;  여사가 자신을 아꼈다는 것이나,&nbsp; 주저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라는 말은&nbsp; 유선과 여사의 친밀의 정도에서 거의 거리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여기에 입시를 위해 가입한 동아리 동료로서 토론대회 파트너인 남자 친구 이해신, 여사의 숫한 남자들, 특히 현구 아저씨로 불리는 인물까지 가세하며 ‘나쁜 무리’를 구성한다.   &nbsp;  유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여사가 했던 말 기억나?여사: 뭐?유선: 함부로 다리 벌리지 말라고. 기억나지. 근데 왜 여사는 그렇게 살아? 왜 맨날 다리를 벌리느냐고.여사: 나는 그러지 않고 살기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nbsp;  유선이 성인이 되자마자 여사의 집을 도망치듯 떠나 5년 남짓 되는 세월 동안 여사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정말 괘씸한 일이다. 두 사람이 5년 만에 대면하는 장면은 짜릿하다. “흑갈색으로 염색한 컬이 돋보이는 머리와 감색 모직 재킷을 입은 허리가 꼿꼿한 여사를 보자 유선은 알 수 없는 기쁨이 흘러나와 활짝 웃어 보인다.” 그런데 여사는 다짜고짜 유선의 뺨을 후려친다. “못된 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이 쿨함이란. 관계에 내재한 책임성을 소홀히 한 댓가임을 유선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친밀한 사람들, 그렇게 사람들은 감염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는 ‘나쁜’이라는 이 형용사를 멋진 선택으로 보았는데,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좋고 나쁘다는, 언제든지 뒤집어져 해석될 수 있는 언어여서 좋았다. 그래서 ‘나쁜 무리’는 선악의 판단과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되어준다. 새로운 다짐과 그에 대한 좌절의 반복이라는 굴레에 대해 아주 잘 배웠다는 유선이 여사와 해신, 현구 아저씨가 징그러운 사건으로 다시 함께하게 되었을 때 “이곳에 온 이유는 그 다짐과 가장 큰 관련이 있었다.”는 상처받고 입히면서 떨어질 수 없는 그 친밀감이 주는 말로 표현 가능하지 않은 유대를 지닌 삶을 어렴풋 이해하게 된 것 같다.   &nbsp;  그동안 나름 그들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덩그러니 놓인 굴착기를 바라보며 “징그럽다, 그치, 징그러워 암만 봐도.”를 중얼거리는 유선과 여사의 목소리, 바로 그러한 관계가 우리들의 삶일 게다. 사람냄새 물씬나는 너의 나쁜 무리란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관계의 감각 그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유선과 여사에게는 어떤 관계의 구원 같은 것은 소용없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함께 더불어 울고 웃는 연결의 관계는 좋은 것일 수 있을 테다.   &nbsp;  이들 작품보다 조금은 애잔하고 쓸쓸한 감정이 느껴지는 단편 「작은 별」은 자기 삶을 ‘이상한 평화’라고 정의내리는 삶의 허무에 시달리는 사설 구급차 요원인 이중일이라는 인물이 환자 이송에서 우연히 겪게 되는 자기 삶의 윤곽이자 견뎌내야 할 현실로부터의 탈주라는 예기치 않은 구원의 이야기다. 서사는 이 중심축과 더불어 우리네 세계의 얄팍한 표상들에 깃든 욕망3)&nbsp;을 해독하는 깨알같은 시선들이 깜찍하게 병행하며 이상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좌절된 꿈의 표상인 구급차, 그 유지를 깨뜨릴 용기가 없어 탈주하지 못했던 구급차를 벗어나게 된다.   &nbsp;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지 않기 위해 구급차가 필요했던 이송 환자와 보호자의 엉뚱한 요구에 “그들이 무엇을 해나가며 함께 그 ‘상태’에 당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이르고 마침내 “가져가세요. 제 구급차를 가져가 주세요.”라고 “활력 있는 형벌”로서 “죽지 말라는 지령”에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게 된다. 구급차로로부터 탈주하는, 그 이상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내딛는 감동적 전환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뜰의 미래」의 문주와 둘째 고모 뚜비, “너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는가?(오마에니 마모루 모노와 아루카 (お前に 守る 物は あるか?)”라는  〈극장판 야누야사 3: 천하패도의 검〉에 나오는 대사를 중심으로 마치 「아무 사이」의 요동치는 관계에 대한 의미의 변주된 판본으로 읽히기도 한다.  &nbsp;  한편 「통신 광장」 은 제법 시간이 지난 영화 〈접속〉을 원인으로 하여 온라인 채팅 공간을 매개로 한 오류의 만남들이 영원히 잔류하는 존재들의 관계를 그려가며, 「추운 뺨에 더운 손」 은 영화촬영을 위한 섭외장소에 내키지 않은 동행을 하게 된 선이의 옛 동네 친구 기문과의 관계의 깊이, 관계의 연루성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마치 뿌옇게 그려진 영화장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정신차려보면 누군가의 공범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듯 그렇게 몽롱한 느낌이 어느덧 한통속으로 얽히고 마는 관계의 그 불가해성과 어울려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nbsp;  “이제야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낼 줄 알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집 일곱 편의 소설들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말랑말랑한 음성을 지닌 사랑스런 대상의 타자들, 우리 이웃의 초상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속삭인다. 유선의 남친 이해신이 “나는 원하는 대로 되려는 게 아니야.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하는 거야.” 라는 이 작은 소망을 실현하는 그 소박한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nbsp;&nbsp;서로 얽혀들며 그 관계 속에서 사랑과 결함의 자취들을 발견하는 온갖 감정들을 포용하게 되는 기분 좋은 감정의 풍속화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이 작품집을 어느 누구든 읽는 내내 진심의 웃음을 머금으며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잔뜩 보게 될 것이다. 어찌 관계라는 사이, 간극으로만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이미 모두 공범으로 서로 얽힌 존재들인데.&nbsp;<br>“타자와의 관계는 완결적일 수 없는 관계”라고 타자성의 철학자 레비나스는&nbsp;제 아무리 타자와의 관계에 주목할지라도 삶의 무대에서의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nbsp;끝없는 문제와 끝없는 응답,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기적이고 경쟁의 폭력이 공기처럼 퍼진 오늘의 세계를 개선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이 작품집은 그러한 관계의 형상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 영역 너머의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삶을 엿보게 해준다.<br>각주:1)이전 발표 작품들에 대한 감상글에서 인용함.2)작은 글 자체는 제 속삭임이에요.(소설 속 글자구성 형식을 흉내 내 봤음)3)“출신대학과 온갖 추상명사를 갖다붙인 흔하디흔한, 또한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것들로만 들어찬 이름의 병원 이름”, 이를테면 “연세기적사랑희망병원” 이라고 말하는 시선]]></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나이스 닌을 위한 항변 - 《헨리와 준》은 성 편력의 서사가 아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04165</link><pubDate>Wed, 08 Apr 2026 14: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0416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733992200&TPaperId=17204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459/84/coveroff/173399220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156260247&TPaperId=17204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164/81/coveroff/0156260247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5595&TPaperId=17204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06/36/coveroff/895468559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833259&TPaperId=17204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54/13/coveroff/k56283325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117&TPaperId=17204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096/29/coveroff/893292011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204165'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헨리와 준》의 아나이스 닌과 《악령》의 스타브로긴&nbsp;- 악마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nbsp;  “아나이스 닌은 우리 대부분이 감히 인정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  &nbsp;  소설가 킴 크리잔(Kim Krizan)은 아나이스 닌(Anais Nin;1903-1977))에 대한 전기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음을, 시대적 당혹감으로서 위와 같이 썼다. 그것은 엘렌 식수가 말한 “반(反)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쓰기”로서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않은,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 섹스트(sextes)의 출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전경(全景)으로서의 시선이지, 아나이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발판으로 자신의, 한 여자로서의 자기 자리의 발견을 향한 고투, 자각을 향한 수행(遂行)적 걸음이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nbsp;  【출처: The Anaïs Nin Foundation】<br>1. 아나이스 닌을 말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서  &nbsp;  우리의 독서시장에는 1931년 10월부터 1932년 8월까지에 이르는 아나이스 닌의 헨리 밀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준과의 에로틱한 모험의 내용이 담겨진 《헨리와 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를 읽은 독자들, 일부 평자들은 도덕적 규범이 붕괴된 한 여인의 성적 편력 행위의 묘사들에 빠져 아나이스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그녀가 왜 이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나 또한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라는 문장처럼 유부녀가 뭇 남성들을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마치 자아발견의 행로인양 위선을 떨어대는 자기 정당화의 궤변으로 읽기도 했다.   &nbsp;  그러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의 몰인격, 악의 화신이 헨리와 준, 그리고 자신과 비교되는 성찰의 말들을 보며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잘 못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성적 쾌락의 장면들은 단지 자기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글쓰기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가 “헨리를 생각하면 나는 다리를 벌리고 싶다” 라고 쓰는 것, 마치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음에 현혹당한 읽기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다는 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자 한 충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나이스라는 여인이 이 일기를 씀으로써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로인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읽기로 전환된 것이다.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 헨리, 준의 도식(圖式)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 해명이 되어 줄 것이다.  &nbsp;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나이스 작품들에 대한 문학적 폄하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는 취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와 준》은 아나이스 닌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을 때 다듬어진 일기의 일부분으로 1966년(63세)에 첫 출판되어 자아 발견의 여정을 통찰력 있게 그려냈음을 문학적 업적으로 찬사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삭제되어 순탄치 않은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설적 윤색이 더해진 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1932년에 출판한 《D.H. 로렌스 비전문 연구서》를 필두로 1939년에 소설 《인위의 겨울(The Winter of Artifice)》, 1944년 단편소설집  《유리 종 아래에서》가 발표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어냈지만 문학적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nbsp;  이후 1950년대 내내  《내면의 도시들》, 《불의 사다리》, 《알바트로스의 아이들》, 《네 개의 방이 있는 심장》, 《사랑의 집에 들어온 스파이》 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독자층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냈으며, 1964년 소설 《콜라주》가 그해 타임지 최고 도서로 선정되면서 독보적 여성 작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71년 공쿠르, 메디치 등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세비네 상의 수상, 1974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74년 미국 국립 예술문학 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며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nbsp;  1970년대라는 시대는 여전히 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과 옹호가 상존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이 같은 글쓰기를 수행한 후배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숱한 아나이스들이 맺은 결실 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폄하 또는 비하와 격하 대상의 작가가 아니다. 즉 그녀는 《악령》 속 스타브로긴처럼 이 세계에 악을 전염시키는 위험하거나 배제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를 비교하며 그 차이 속에서 이 여인이 발견하고자 고통스럽게 애쓴 것의 자취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nbsp;  2. 도스토엡스키의 《악령》 속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  &nbsp;  아나이스가 악의 화신으로 대입하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스타브로긴은 “내 삶의 법은 내가 만든다”는 태도를 지닌, 이 세계의 모든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뒤 남은 공허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전통의 도덕도, 외부 권위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기 의지만이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 이 인물은 영웅적 행위와 타락한 행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스스로 도덕 바깥에 선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의지만 믿는 태도의 인간이다.   &nbsp;  이 인물을 악령, 악의 화신으로서 두려운, 아니 무서운 인간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지란 것이 실제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삶의 의미를 조직해주지 않는 욕망과 결단으로서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그 어떠한 교리나 신념을 설파하지 않음에도 그의 공허와 카리스마가 주변 인물들의 과격 사상과 행동을 촉발하는 중심점이 되는 데 있다. 의미와 믿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차지한 텅 빈 공백,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표상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한 핵심적 시선이다. 이를 정리하면, 도덕을 상대화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려 하지만 결국 공허와 양심의 반격 앞에서 붕괴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의 신념은 어떤 적극적 이상이라기보다, 믿음의 상실이 낳은 허무주의적 자기숭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존재다. 그래서 《헨리와 준》에서 헨리가 아나이스에게 “당신은 물론 나르시시스트야, 이 일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것에 닿는다.  &nbsp;  그렇다면 헨리가 농담처럼 뱉은 지적처럼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의 텅빈 공허로서의 의지를 수행하며 악의 덧을 마구 뿌려대는 팜므파탈인가? 스타브로긴처럼 스스로를 선악을 초월한 인간인가라고 묻게 되면 아나이스는 바로 그러한 스타브로긴의 매혹과 파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미학화하고 관계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타브로긴이 공허한 의지의 중심이라면 아나이스는 그 공허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감수성, 욕망, 자기 서사로 번역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스타브로긴은 소설 속에서 준과 헨리 중 누구인가라는 점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nbsp;  <br>3. 《헨리와 준》의 자기해석자로서의 아나이스  &nbsp;  “헨리가 말한다. (...)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준은 내가 자신을 팜므파탈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했어. 나는 악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악마에 몰두해 있지.”  &nbsp;  “준이었다면 헨리가 글 쓰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아나이스)”  &nbsp;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매혹을 맴도는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준에 대해 말하는 문장에서 다시금 확인되는데, “악을 낳고 범죄를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는 인물인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스타브로긴”을 인용하는 것에서 그녀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실제 준은 헨리를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힘의 중심으로서 악의 자기장 같은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스타브로긴적 인물에 매혹되는 해석자이자 매개자이다. 아나이스가 자신을 “the revealer, the harmonizer(드러내는 자, 조화시키는 자)”라고 부르며, “준에게는 도스토옙스키를, 헨리에게는 준을 준다”고 쓰는 것에서 그녀가 파괴의 중심이 아니라 파괴적 매혹을 언어와 관계 속에 배치하는 연출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나이스의 헨리와의 지독한 성애와 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쾌락, 삶의 안정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일련의 고통스러운 수행(遂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여정 자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감각은 하나의 요소이지 그것이 곧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자기절대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스타브로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스타브로긴으로 아나이스를 해석하는 것, 즉 그녀를 성적 쾌락에 목매단 탕녀 정도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뭇 남성들의 자존과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가정을 궤멸시키려는 그러한 성의 화신이 아니다.   &nbsp;  아나이스는 욕망과 위험, 심지어 악의 매혹에 끌리면서도 자신 안의 잔혹성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잔인함에 대한 무능력은 약점에 가깝다”고, 또한 “우리는 가장 자기답지 않을 때 가장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자기모순을 감지하고 자의식적 기록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팜므파탈이 낳는 정동을 흡수하고 서사화하는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는 타인의 욕망과 어둠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nbsp;  아나이스는 준 혹은 스타브로긴의 공허 그 자체와 달리,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고백, 이미지, 역할극을 만들어내서 허무의 매혹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고 인간을 단순한 현실의 개인으로 읽기보다는 하나의 심연적 유형, 상징적 배치로 해독한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중심으로 준을, 창조적 노동과 육체성을 가진 인물로 헨리를 읽으며, 자신은 이 둘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고 확장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위치한다. 즉 준의 중력장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혹은 깊이 끌려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녀는 허무의 공백과 타락의 에로스를 자기해석의 연료로 바꾸는 고백적 미학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악의 매혹을 사랑과 글쓰기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감수성의 공모자로서 아나이스는 끝내 양심과 문장 속으로 되돌아오는 미학적 증인이라 할 수 있다.   &nbsp;  4. 결어 - 아나이스의 글쓰기가 말하는 것  &nbsp;  아나이스 닌이 일기를 쓰는 것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일기 속 자기 정당화의 변들이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 생경한 날 것의 성적 묘사들이 혐오와 당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작 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단의 감각이 야기하는 도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인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는&nbsp;이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내적 실체를 발견하고 이 분열된 욕망들인 자신을 통합하고 진실된 인격을 형성하고자 고투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글쓰기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어떤 파괴적 영향을 받더라도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이스의 일기는 한 인격의 진화로 나아가기 위한 독특한 문서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 속으로 도피했다가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과정의 역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nbsp;  그녀는 자신이 여러 인격을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길을 잃은 허위와 망상의 미로를 인내심 있게 해쳐나가지 않고서는 자아의 통합과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나이스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찾아가는 철저한 여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깊은 외경을 통해 미학과 질서, 이상을 마침내 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지혜를 발견한다. 그녀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모든 세포가 기능할 때, 즉 꿈, 욕망, 본능, 식욕이 모두 살아날 때 풍요로움에 도달합니다”라고 쓸 때 깨달음의 충만함 속에 존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왜곡하는 거울을 부수고 온전함과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벌여 나갔던 인간의 특출한 사례라 해도 될 것이다.  &nbsp;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헨리와 관계를 가진 날 휴고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어젯밤 그는 열광하며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만했다. 즐기는 척 했을 뿐이다.”&nbsp;&nbsp;- 《헨리와 준》,165쪽  &nbsp;  이 문장을 읽을 때 교활하고 발칙한 색정적 여인을 떠올리며 도덕적 분노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러한 묘사에 함몰된 읽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매우 편향된, 남성적 시선의 읽기, 즉 절름발이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여성의 자신의 성 욕망 드러내기를 남성들은 관음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것에 편협한 (팔루스의)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럼으로써 죄의식을 부과하고 그것에 악의 그림자를 덧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억압으로 눌러 온 것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며 개방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기를 발견하려는 처절한 탐색의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다.   &nbsp;  【출처:&nbsp;헨리 밀러,&nbsp;《북회귀선》&nbsp;中&nbsp;아나이스 닌의 서문 일부 발췌】<br>아나이스는 성 탐닉에 안달하는 성 탐닉자가 아니며, 자신의 성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인물도 아니다. 《헨리와 준》에는 작가로서 또한 불륜의 관계자로서 헨리 밀러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그녀는 그의 문학적 동행자이자 지지자로서 많은 영향을 서로 나누었다. 스치듯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초고를 아나이스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 소설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미 아나이스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비판은 거두었으리라 믿어진다. 매우 높은 지성의 소지자이면서 밤의 여왕으로서 재능이라는 이 낯선 조합의 여인은 헨리를 비롯한 프레드, 그녀의 남편 휴고나 사촌 에두아르도에게도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한 세련된 감각의 소지자였음이 일기 속 도처에서 드러난다. 아나이스 닌의 텍스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검열의 시대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여인에게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미학적이고 문학적 작업의 결과를 당연하게 볼 것만은 아닐 것이다.   &nbsp;  “일기는 죽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없어서 그를 애무할 수 도 없을 때, 일기를 쓰는 것 외에 그를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헨리와 준》)” 는 문장은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글쓰기에 매달리는 아니 에르노가 《탐닉》에서 반복한다.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리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 버리는 괘락으로서의 욕망, 욕망의 부재인 삶의 멸실로서 죽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격렬하고 천박한 음란의 노래는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각고의 자기 탐색의 투쟁이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자기성찰적 반영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덕주의를 앞세워 비난당하고 잊혀지는 작가를 대신해 항변 하고 싶었다.   &nbsp;  ※이 글은 부분적으로 루퍼트 폴이 세운 ‘아나이스 닌 재단(The Anaïs Nin Foundation)’의  아카이브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루퍼트 폴은 1947년 이후 아나이스의 연인이자 1955년 정식 혼인한 남편으로 1977년 아나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한 그녀의 동행자였다. 폴은 2006년 사망했다.)  &nbsp;         <br>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29/cover150/890109603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296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대단한 익살극의 함정에 빠지다 - 절대성에 함몰된 어느 시인의 생애 - [삶은 다른 곳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96010</link><pubDate>Sat, 04 Apr 2026 12: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960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0463X&TPaperId=171960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1/92/coveroff/893740463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0463X&TPaperId=171960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삶은 다른 곳에</a><br/>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아베나리우스: 자네 소설이 따분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군, 밀란 쿤데라: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 『불멸(L'immortalite)』, 225쪽에서  &nbsp;  인간 행위 수행에 이르는 의사(意思)들을 요소들로 해체하면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경박한 것들의 수행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쿤데라의 지론인 듯싶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제목을 붙여도 될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가벼움’ 말이다. 이 소설 『삶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nbsp;이후에&nbsp;발표된 『불멸(L'immortalite)』 에서도 쿤데라는 제목이 잘 못 달렸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제목이어야 한다고 말하듯, 이 소설 역시 동일한 제목을 붙여도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독자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nbsp;  이 작품을 부랴부랴 펼쳐든 이유는 『불멸(L'immortalite)』 「3부, 투쟁」에서 『삶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인 야로밀에 대한 인물평을 하는 한 단원 때문이었다. 랭보의 《지옥에서 한 철》에 등장하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시구를 맹신함으로써 ‘자기 무덤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 풋내기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잡아챈 것이다. 배속을 간질이는 쿤데라의 그 흔쾌하게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 빚어내는 해학적 문장들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속에서 어떻게 시인을 꿈꾸고 그 꿈의 성분이 된 것들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것도 희극들일 것일 텐데, 그 빚어지는 삶의 현실태(現實態)를 보면서 한바탕 웃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진정 웃음에 목말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r>위에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쿤데라의 소설들이 다채로운 요리들이 나오는 향연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註1)배실배실 나오는 웃음, 혼자 킥킥대며 그 가볍기 그지없는 문장을 쓰는 작가의 심사(心思)를 떠올리며 인간의 세계가 한없이 경박한 것들의 집합임에 수긍한다. 서너 줄로 내용을 요약한다면 랭보의 문구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현대시를 사랑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 되자, 죽도록 사랑하던 현대 예술을 즉각 거침없이 규탄한다. 그리곤 이 위대한 계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냉소하며 부인하고, 이 난폭행위를 통해 성년(여자를 알게 되는 사내 됨)의 삶으로 들어가는 이 젊은이는 부인 행위, 즉 절대성(그에게는 현대성이 곧 절대이고, 그래서 죽음의 절대성은 곧 그에게 달콤한 향기이다)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광신을 쏟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희생하는 사내로서의 용기 때문에 가담하는 광경,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꿈과 각성의 비극적 불일치 속에 서글프게 죽는다는 이야기다.   &nbsp;  내용을 간추리고 보니 보잘 것 없기 그지없지만, 그침 없이 흐르는 사람들의 그 경박한 배경 속에 혁명의 시대가 소극(笑劇)이 되어 흐르고, 역사는 희극(戱劇)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간들의 욕망의 의지와 달리 늘 여기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삶이 놓여있음을 뼈저리게 감각하게 만든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비참의 웃음이 그만 묵직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이 풋내기가 고수하는 ‘절대적 현대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 하찮은 죽음이 외려 연민보다는 고작 그렇게? 라는 조소가 흘러나오니 말이다.          &nbsp;  자, 웃기는 것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열정에 찬 확신이 그가 체험으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에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고, ‘현대적’이라는 단어가 늘 내용이 변하는 파악할 수 없는 개념임을 어떻게 깨닫지 못했는가라는, 또한 그렇게 절대적 현대성을 위해 사랑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인간이 사랑하는 여자를 배반하고 사회주의혁명 정부의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현대성’을 수호한다는 광신은 사실 혐오스럽고 소름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따분한 얘기는 소설이 자아내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기에 예서 줄이기로 하고,  야로밀의 출생부터 시인을 꿈꾸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따라가 보자. 삶이란 콩트이고, 코미디이며, 한낱 유희적 행위의 우연적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nbsp;  “시인의 어머니가 어디에서 시인이 잉태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볼 때면 딱 세 가지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 - 소설 첫 문장  &nbsp;  잉태 장소에 대한 설레발이 몇 쪽에 걸쳐 진술되는데, 이 기억이란 것이 삶의 상황 맥락에 따라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다.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는 말도 우습기 짝이 없지 않은가. 어쨌건 가난한 엔지니어 청년의 씨를 잉태한 시인의 어머니는 아버지 재산의 권위에 의지해 결혼을 성사시키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아들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붓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외톨이로 겉도는데, 아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엇, 야로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야로밀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겼으니, 셔츠, 머리 모양, 사용하는 단어.., 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의 이마 위에 친구들의 호감을 밀어놓는 표지를 새겨놓은 것이다.  &nbsp;  이것은 시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시인의 어머니가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들의 목줄을 잡고 놓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삶은 다른 곳에’라는 표현은 이같이 그 의지 또는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저쪽 다른 곳에 있다는 가벼운 진실을 말하는 것일 게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엉뚱하고 예상과 다른 반전들이 야기하는 웃음의 연속이다. 사람 얼굴을 잘 그리지 못하는 탓에 인간의 몸을 한 짐승으로 개를 그리는데, 이 기묘한 그림을 아들의 비범한 재능으로 여긴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에게 전문 교습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림을 받아든 현대예술의 전문가인 화가 또한 “아이가 종이 위에 표출해 놓은 저 너무도 독창적인 내면세계”를 해독한다. 야로밀은 단지 사람의 얼굴을 못 그리는 바람에 그냥 어쩌다가 개(犬) 인간이라는 경탄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음에 불과한 것인데, 이 황당한 내면의 독창성은 아이에게 금지된 이해의 심연을 바라보듯 하는 자기 관찰에의 관심을 부여한다. 쿤데라의 이러한 해프닝의 연출, 삶의 모든 수행들이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유희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 가벼운 존재들인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음에 독자를 동참하게 한다.   &nbsp;  <br>이 사내에도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또 청년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자기 부모의 집 벽에 걸린 정물화나 풍경화와는 아주 다른 현대 예술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은 현대 예술에 대한 우월적 환상을 심어준다. 야로밀은 자신이 집에서 그린 그림을 화가에게 보여주고, 그 그림들이 모두 머리가 없는 여자 나체들이기에, 화가는 인간의 얼굴을 인정하기를 집요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해한다. 급기야 시인의 어머니는 인간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아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따지기 위해 화가를 방문한다. 이 방문에서 화가와 시인의 어머니의 대화와 간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대단한 해프닝, 길이 남을 소극의 명장면이라 해도 될 듯싶다.   &nbsp;  머리 없는 여자들의 그림은 “매순간 우리 삶을 뒤흔드는 전쟁 사이에 어떤 숨은 연관”의 느낌이 되고, “전쟁의 피로 물든 세상 뒤에서 나타나는 사랑”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이 의미심장한 진지한 해석에 매료된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의 혀가 자기 입안으로 들어 온 것을 느낀다. 이 순간적 상황에 봉착한 여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의 묘사는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간음의 자기 정당화에 대한 내심의 변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잠깐 생각할 틈이 있었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므로 답은 뒤로 미루고 지금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간의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는 얘기에서부터 “자신을 순진무구한 반-성숙 상태 속에 놓아둔 남편에 대한 즉각적 분노로 옮겨가며, 그 분노가 장막이 되어 자신의 헐떡이는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로 이어지는데 어찌 진지함 속에 이렇게 가벼움이 잔뜩 내재할 수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진지함에 빠져있다고 여기겠지만)  &nbsp;  이 소극들로 빼곡한 소설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시인 야로밀의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쿤데라가 어깃장을 놓으려는, 아니 통상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어떻게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그 가벼움의 진상 드러내기이기도 할 것이기에 옮겨본다. “녹아내려 물로 변하는 슬픔/ 수면이 올라오고 또 올라가 내 눈까지 차오르는 초록빛 물/ 슬픈 몸 / 한없는 물을 가로질러 내가 쫓아가는”,  이 시는 자기 집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것을 열쇠구멍에 바짝 눈을 갖다 대고 훔쳐보며 처음 보는 여체에 대한 갈망을 적은 것이다. 대체 어느 누가 이 시를 사춘기 소년의 관음이라고 읽겠는가. 이 시의 근원에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야로밀은 이 시를 타자기로 쳐서 종이에 옮겨 놓고는 그 시가 단순한 단어의 연속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사물이 됨으로써 시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소멸이 아니라 오랜 지속이 예정되었음을 느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실 쿤데라의 소설은 그 주제의 용의주도한 이야기 속 배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존재의 경박성에 대한 까발림이 주는 흔쾌한 즐거움, 생이 무겁다고 쳐진 몸을 가볍게 떠올려주는 그 가벼움이 만들어내는 배에서 올라오는 웃음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nbsp;  이 가벼움의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둔중한 역사성, 즉 역사를 해석하는 자의 지금 여기서 라는 상황 맥락이라는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달리 수용되는가를 시인의 어머니가 화가와의 화간(和姦)을 단절하고 아들과 남편에 충실한 여인으로 되돌아와 자책함으로써 애인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나치에 박해받는 유대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끌려가 사망했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겠는가. “이제 그녀는 남편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배신했다고 머리카락을 집어 뜯”는다. 이때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말한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완전히 끝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돌아 볼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성이란 것은 한 여인의 상황변화에 따라 춤추는 사랑의 감정을 빗대 이렇게 경박하게 날아오른다.  &nbsp;  “자신의 삶이 아무 사건 없이 빈약하기 때문에 자화상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347쪽  &nbsp;  소설은 내내 자기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여자의 몸, 여자에 대한 몽환적이고 유희적 몽상으로 가득한 풋내기 야로밀의 애정사로 가득하다. 시인의 어머니가 읽는 아들의 시는 저 높은 형이상학적 지대를 거닐지만 정작 그 시들은 생식과 성교의 기관, 달콤한 사랑의 나라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추상의 지대, 상상의 테마였을 뿐임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목줄로 길게 연결되어 묶인 야로밀의 경험의 협소함은 그야말로 궁핍의 영역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로밀은 이 궁핍의 지대에서 자유의 지대, 진정한 현대성의 왕국을 향한 도약이 도래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여자와의 첫 잠자리의 실패 이후 못생긴 가게 점원 빨강머리 여자가 그를 성년의 남자로 만들어준다. 사랑의 영역, 여자에 대한 몽상이 현실의 사건이 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 인간의 생의 변곡점도 그가 주도하고자 하는, 꿈꾸던 그런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삶은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자동성이라는 법”의 실존이 삶의 진실임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nbsp;  여기서 우리네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통제의 실패,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하게 보지 못하는 무능력의 실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사랑의 절대성을, 삶의 궁극의 질서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알지 못하는 삶의 행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불행의 도정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것을 비극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가볍고 하찮아 비극이 되지 못한다.  혁명의 대열에 참가한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 시인, 절대성의 메신저가 되고자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깃든 경박함으로 인해 그의 죽음조차 불꽃처럼 승화하는 혁명시인의 그럴듯한 자살이 아니라 몽매한 시 나부랭이, 기막힌 똥덩어리를 써대는 애송이라는 웃음거리가 되어 차가운 밖으로 내던져지고 폐렴으로 앓다가 죽듯, 불꽃 없는 죽음을 맞기에 더욱더 비극의 그 어떤 위대성도 없는 소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되고 만다.   &nbsp;  이 소극은 삶은 항상 다른 곳에 있기에 생의 통제는 궁극적으로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정작 자기 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을 믿었던 야로밀이지만 그 인생의 무엇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 표피적 삶이라는 경박한 생의 걸음에 불과했음을 독자는 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이 인간의 실체임을 확인케 하는 쿤데라 의도의 발칙함에 굴복하게 된다. 실상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야로밀이라는 풋내기보다 더 아는 것도 없음을 아는 독자 어느 누가 자기 삶의 가벼움을 부인 할 수 있을까. 공포의 시대, 경찰 연수원 단상에 앉아 시를 읊었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당하는 부끄러운 이름 모를 시인의 피 흘리는 미소를 띤 순진무구, 나는 그 익살극의 함정에 빠져 어떻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다.-------------------------(註1)배실배실 웃음이 나오다: 모순적이거나 예상과 다른 반전, 또는 누군가의 어설픈 행동이 엉뚱하게 느껴질 때 나오는 웃음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註2)소설 주인공 야로밀은 체코 사회주의 시의 창시자로 알려진 야로밀과 같은 24년 남짓 삶을 살다간 체코 시인, ‘이르지 볼케르(Jiri Wolker, 1900-1924)’를 모델로 한 것 아닐까하고 추정해본다. 소설 속에서도 스치듯 한 번 거론되는 시인이다. 고난에 찬 프롤레타리아들의 삶이 있고,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믿음, 해방과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역설, 집단주의와 상호연대와 자기희생에 대한 강조를 실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1/92/cover150/893740463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1923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내밀하고 도발적인 굴욕의 푸가 - [굴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83958</link><pubDate>Mon, 30 Mar 2026 15: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839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19&TPaperId=171839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9/17/coveroff/89320451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19&TPaperId=171839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굴욕</a><br/>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굴욕의 상처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직접 침해한다. 굴욕은 괴로움, 취약함, 욕구, 몸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는 사적 차원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공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안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밖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55쪽에서  &nbsp;  어쩌면 웨인 케스텐바움의 이 책은 “숭고와 ‘굴욕’ 사이에 길을 내는 삶”을 살았던 장 주네가 부활하여 쓴 것 같은, 굴욕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의 정당화를 위해 굴욕의 변신술을 익혀 온 인간 존엄의 내밀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총 11개의 푸가로 구성된 이 책은 제 1푸가 「알몸 수색」에서 ‘굴욕’이라는 감정 또는 정동에 대한 정의와 유형들의 정리를 시작으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거나 상상될 수 있는 사실들 속에서 저자 자신의 일상적 굴욕에 대한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어찌나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그것이 마치 굴욕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니 이 악의로 범벅된 치욕의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금술에 의해 생의 유익하고 긍정적인 성소(聖所)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nbsp;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저자 자신의 굴욕적 전사(全史 혹은 前史)를 발가벗겨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이유를 바로 그 굴욕의 역사라는 “심해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쓰고 있듯,  ‘굴욕’이라는 단어를 되뇌는 데서 고통과 슬픔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이 단어의 되풀이가 용서와 위로의 향기가 되어주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굴욕의 감정이란 정말 더러운 정동(affect)인데, 내 안의 무언가가 뒤집혀 수모가 되고 불안정을 야기하는, 누군가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느낌이다. 육체이건, 정신이건, 이 굴욕의 감정은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굴욕은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고갈시키고 소모시키는 과정이다. 굴욕은 현존했던 것, 온전하고 견고하고 중요했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그 존재의 주체를 한없이 축소시켜 마침내 탈주체화하여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치게까지 하는 추악한 감정이다.  &nbsp;【웨인 케스텐바움,&nbsp;시인이자 미술가이며 영화제작자이고 예술비평가로&nbsp;뉴욕시립대 비교문학 석좌교수이기도 한 퀴어연구 창시자 중 한 명이다.&nbsp;퀴어연구의 대표적 창시자 이브 코소프스키 새지윅에 영향을&nbsp;받은 학문적 동료이자 정서적 친구이기도 하다】<br>그런데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내면서 ‘굴욕’과 결코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필수 덕목으로 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사실 상상해 볼 것도 없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굴욕은 이미 모든 곳에서 차고 넘쳐 통과의례적 사건임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체가 뒤집어지는 이 수모의 체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즉 굴욕을 겪어냄으로써, 아니 굴욕의 만연, 그 짓밟힘을 침착하게 견뎌내기 위해서 양감감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굴욕을 생의 필연적 운명으로 수용하는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주인공 야곱이거나, 혁명의 에너지이자 전주곡으로 삼은 프란츠 파농이거나, 자아 행진을 강제 중지당한 예수의 숭고함처럼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 쯤으로 수용하는 것 말이다. 굴욕을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바꿔내는 감정능력을 갖추는 것일 게다.  &nbsp;  하지만 굴욕을 이렇게 긍정성으로 수용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해서 저자 케스텐바움의 이러한 양가감정 갖추기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책의 작업을 남들에게 가해지는 굴욕을 감지하는 “굴욕 레이다(humiliation-radar)를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며 ‘관찰자 혹은 조사자’로서 굴욕의 연금술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지만, 미군 병사에 의해, 개 목줄에 묶여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교도소 바닥에 쌓아올려진 이라크 병사들의 굴욕이 과연 긍정성과 유익의 원천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나치의 아우슈비츠 절명수용소에서 인간이 아닌 한낱 물건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수감자의 굴욕은? 백인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절단당한 신체로 거꾸로 매달린 흑인의 참담한 굴욕은? 케스텐바움은 굴욕 받아 죽을 때까지 씻어내지 못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처럼 대속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라는 말인가?   &nbsp;  케스텐바움의 주장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비인간으로 탈주체화를 강요당한 인간에게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 않을까.  “굴욕을 다 겪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는 문장처럼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경우, 그래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경우라면, 혹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큰 고통이 지나면 형식적인 감정이 올” 수도 있겠다. 케스텐바움은 시몬 베유의 글을 오독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 안에 들어갈 방법은 자기 소멸뿐, 극심하고 ‘전면적인 굴욕의 상태’에 오래 머무는 것뿐이다. (시몬베유,『인간의 성격』)”는 글은 낮고 작아져 스스로 겸허 속에서 살아갈 때,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  ‘전면적 굴욕’이란 인간적 지위와 위치의 하락을 강요하는 일시적 관계적 긁힘인 굴욕이 아니다.  &nbsp;  더구나 조르조 아감벤이 ‘탈주체화’라고 명명했듯 원치 않는 물질이나 작용력에 의해 무방비의 육체가 갑작스레 침범당하여 고통을 느끼고,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 주체이기를 멈추도록 강제 작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훼손당하는 지형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은 존재할 가능성을 부인당하고, 결국 소멸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가. 케스텐바움은 성추행자인 상원의원, 자기 딸에게 욕설을 퍼붓는 헐리웃 대스타, 고급매춘부를 출장에 동행하여 시민에 지탄받는 뉴욕주지사의 공개 석상에서의 사과연설을 굴욕이라 칭하고 있는데, 과연 그 추락이 숱한 약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굴종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nbsp;  이러한 냉정한 비교분석 없이 그저 그네들의 오만이 초래한 도덕적 법적 부정의 감정에 대한 질타보다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양가감정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 무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 전반의 논지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케스텐바움은 굴욕의 본질이 더럽고 악한 것임을,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하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고 나아가 승화하는 동기로 삼고 싶어 함을 안다. 훼손당한 주체들이 안고 가야만 하는 그 고통을 흔쾌하게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사고과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 해소하고 싶어함을 이 글쓰기를 통해 케스텐바움은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nbsp;  크리스테바가 “언어가 침을 흘린다. 대화가 똥을 싼다.”라고 통제되지 않은 단어를 마구 흘려내어 올바름의 규칙들을 뒤집어 소위 구리고 습하기 그지없는 비체(卑體)문학의 영광(?)을 구현했다는 루이 페르디낭-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처럼, 표준화된 언행을 위해 무언의 조절이라는 고된 작업을 내던진 ‘속 뚫림’의 시원함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퍼포먼스들을 즐기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 “굴욕의 대문은 우리들 삶의 일상에 늘 열려”있기에, 그것에 익숙해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nbsp;  그러나 저자가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짐 크로(Jim-Coow)눈총’이라는, 다른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하기를 그친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침 뱉는 자의 눈총, 앞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냉담함이나 무반응, 옹졸하고 편협한 비승인의 악의적 눈길에는 인간이 없다. 더러운 것, 기분 나쁜 것, 사람이 없는 것을 보는 가해자의 눈길은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을 가하겠다는 집요한 선언이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출처: 『사람, 장소, 환대』)”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정의에서처럼 사회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람이 아닌 사물로 처해지는 굴욕을 당한 존재가 과연 그 굴욕의 경험을 구원 또는 승화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굴욕을 야기하는 내용이나 상황, 당하는 사람의 현실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일률적으로 이러한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의 단어에 개념화함으로써 굴욕의 의미를 호도(糊塗)하고 있는 듯 보인다.<br> 매춘부를 데리고 공적 행사를 다닌 뉴욕지사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동반하여 TV화면을 마주보고 수사를 동반한 전혀 사죄 같지 않은 사죄 담화를 발표하는 상황과 발길질을 일방적으로 감수하여야 하는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의 굴욕이 동일한 것인가? 목소리 톤이 높고, 긴 머리를 한 남자 아이가 아이스크림 점원에게 여자 아이로 인식되는 것과 흑인들을 거꾸러뜨리고 종속상태를 선전하고 강화하기 위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린치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뉴욕경찰이 가하는 굴욕이 같은 범주로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케스텐바움이 이들 굴욕을 옹호나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굴욕이 사회의 시스템이고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이기에 그것을 삶의 배경처럼 인식함으로써 승화된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독하게 이상주의적이며, 윤리의식을 모호하게 할 우려가 심각해 보인다.  &nbsp;  성소수자로 인식되어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이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굴욕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즉 탈주체화를 목적으로 하는 굴욕과 일시적, 상황적 모욕으로서의 굴욕은 구분되어야 한다. 즉 나는 케스텐바움과 같이 굴욕과 부끄러움을 구분하는 회피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굴욕을 나는 탈주체화로서의 굴욕과 모욕으로서의 굴욕으로 크게 구분하여 설명하여야 후자의 굴욕을 케스텐바움의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즉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으로서 굴욕에 겨우 동의 할 수 있을 것 같다.  &nbsp;  <br>케스텐바움은 말한다. “나는 굴욕에는 이골이 났어요 / 최근에는 / 굴욕을 당해도 굴욕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예요.” 라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내 목표다” 라 선언하며 그곳에 행복한 마취가 있고 무심이 있으며, 굴욕이 더러움을 씻어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미학 놀음, 예술적 신선놀이라는 상상의 공감에서나 거둘 과실(果實)로 여겨진다. 그는 장 주네를 호출하여 침과 악취, 분비물로 흥건한 음습함을 반복적으로 성애화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가치의 안과 밖을 뒤집어 굴욕의 아픔을 초월로 가는 우회로로 삼았다고, 더러움 속에서 새로운 신성함을 발견했다고 평가한다. 주네가 찾은 것이 정말 “칵테일 빛깔의 신성함”이었을까?   &nbsp;  관념적 추상에 터 잡은 존재론적 성찰과 현실적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빚어지는 굴욕은 결코 동일한 개념적 범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케스텐바움의 글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굴욕을 성상화(聖像化)하기까지 하다가 “너무 잔인하게 취급당한 굴욕의 기억 앞에서 사람들은 뒷걸음친다”고, “그 심한 고통 탓에 묘사의 재능을 상실하고, 그들의 언어는 굴욕의 흔적인 공백을 가리켜 보일뿐, 그 공백을 충만하게 채워내지 못한다”고 까지 굴욕 이후에 말을 잃은, 부재하게 된 존재의 극한적 고통을 이해하는 듯 말하기도 한다. 굴욕이 이러한 극한적인 것이라면 이것을 그 무슨 승화와 성화의 원천으로 삼겠는가? 언어도단이요, 미학에 몸을 감춘 채 머리로 하는 공허한 사적 위안 놀음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굴욕을 반복할 수 있는 자는 신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nbsp;  공중화장실, 백화점, 극장 등을 배회하는, 즉 크루징(cruising)을 하는 게이에겐 굴욕의 시선이 항상 온몸에 들러붙어 존재를 한없이 축소시킬 것이다. 그런 사람에겐 상시적 굴욕을 일상성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 굴욕이라는 주체의 훼손을 신선한 쾌감으로 전도해야만 살아 갈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매 순간을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굴욕의 상시적 고통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다. 다시 말해 굴욕이 인간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 빚어내는 불가피성이라면 존재의 주체성을 앗아가는 이 악의성에 대한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지, 굴욕 그 자체를 내면화하는 것은 영원한 시선의 노예적 삶의 익숙성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nbsp;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바닥으로의 추락, 즉 왕의 굴욕이 도덕적 부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들을 알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졌다는 해석은 물론 옳다. 굴욕이 만들어 낸 “여파(餘波)의 위안”에 대한 이러한 황량한 통찰이 굴욕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케스텐바움은 자신의 도덕적 패착이 몰고 온 비극의 결과를 자기 지위의 추락이라는 굴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굴욕이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굴욕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내적 도덕성의 결여, 위치의 우월성이 가져온 교만의 착각에 동반되는 정상화로의 복귀이다. 케스텐바움의 자가당착적 해독이 불러온 두루뭉술한 개념 정의의 불비로 인해 그의 다채롭고 풍부한 사회적 감정의 고찰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아쉬운 텍스트가 되고 마는 것 같다.  &nbsp;  오히려 케스텐바움의 여러 푸가 중에서도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에서 점령군 나치의 첩이라고 조리돌림 당하느니 자기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범의 길을 선택한 헤티 소렐의 인용이 가장 동의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시민대중의 무감각에 의한 집단적 짐크로의 눈총이 도덕적 무능력이라는 악의임을 해독 하는 시선 말이다. 프랑스 시골마을 주민들의 자신들만은 확고한 윤리적 우월감을 갖추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기초해 헤티를 향해 더러운 존재라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곤 추방하는 그 무심한 굴욕의 강제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이어 케스텐바움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다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이 남자로 읽히는 데 실패함에 따른 굴욕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감정적 긁힘의 정도를 객관적 척도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헤티 소렐의 굴욕과 무성성, 혹은 양성성의 존재로 읽혔음으로 인한 내적 굴욕은 조금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전자에는 탈주체화의 강제가 있지만 후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즉 동일한 비교대상으로서의 굴욕이 아니다.  &nbsp;  다만 케스텐바움 자신이 백인으로서 굴욕의 가해자라는, 즉 짐크로 눈총의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윤리적 수렁인 시선을 내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는 성찰적 이해는 고귀한 교훈을 던져준다. 우리들은 굴욕의 수용자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굴욕을 가해하는 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존재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무심히 행사되는 굴욕의 강제는 그 상대에게 끔찍한 내면의 좌절감과 자기혐오, 굴욕의 장면이 초래한 기억으로 야기된 인격의 훼손과 마비로 삶의 황폐화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케스텐바움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기 황폐화, 굴욕의 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도록 이끄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TV 리얼리티 쇼, 특히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이나 신체의 교정을 통해 'before vs after'를 선보이며 자신의 맵시나 몸을 굴욕스러워 하는 여자들의 변화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미운오리새끼들을 백조로 바꿔준다고 선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nbsp;  시청자들은 왜 이러한 굴욕의 퍼레이드에 흥분하고 감동하며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몸을 수술대에 바치거나 의상과 미용술에 맡기는 계약에 동의하고 그 수술 또는 성형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굴욕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유일까. 시청자들은 운명을 바꾸고 행복을 쟁취한다는 잘못된 신화적 감동, 그 근거 없는 믿음에 근거한 기쁨에 도취하려는 것일 테고, 참가자는 여성성 혹은 미적 성취라는 것을 확보함으로써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고 그것이 곧 행복쟁취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수술의사로 참여한 의사들의 말을 보면 정말 가관인데, “XX에게는 여성화 대책이 더 필요합니다.”라거나, “우리가 목표를 성취한다면 그녀는 정말 예쁜 아가씨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들에서 우리는 의료윤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려는 욕구말고 그 무엇이 있는가.  여성화 대책이라니, 예쁜 아가씨가 목표라니, 더구나 이러한 굴욕 프로그램에 환호하는 시청자 시민대중의 그 무심한 가해자의 동참행위는 정말 끔찍스럽기까지 하다.    &nbsp;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이 OO이 아빠는 청소부이시니 도시 청소에 대해 급우들에게 설명해주면 좋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아이가 도시 청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유사한 사례들이 학교, 직장, 여러 공동체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심을 가장한 채 앞에 있는 인간의 내부를 외부로 꺼집어내 존재를 축소시키는 행위들 말이다. 저자 케스텐바움의 내적 고백의 이야기들은 텍스트에 맡기련다. 아마 이 책을 읽다보면 굴욕의 똥통을 뒹굴다가 나온 느낌이다. 똥통에 떨어진 더러워진 인간 존엄의 이야기들을 헤엄치다보면 잠간 내민 머리통에 다가오는 신선함이 마치 세계의 신성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굴욕이란 그 어떤 미화로도 깨끗함으로 돌아오는 감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nbsp;  동의 할 수 없는 글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굴욕으로 뭉쳐진 케스텐바움 몸의 항변, 굴욕의 승화를 향한 글쓰기의 의도를 알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 음악 등 황홀할 정도의 예시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더불어 우리들이 잃어가고 있거나 망각한 도덕감각을 회복하는 데 어떤 단서를 수확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굴욕의 백과전적 탐색을 통한 이 자전적 고백서는 굴욕의 밑바닥을 지나온 한 인간의 내밀한 성찰 과정이기도 하다. 이 굴욕의 다이어리는 훔쳐 볼만하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9/17/cover150/89320451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9172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앎의 문제, 인간 무능성을 깨우는 가장 본질적인 것: 오이디푸스 비극을 중심으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link><pubDate>Thu, 19 Mar 2026 20: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329&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0/94/coveroff/8991290329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213&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82/coveroff/899129021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4886&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5/coveroff/893102488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2176&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47/88/coveroff/893746217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0591&TPaperId=17160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53/60/coveroff/8932920591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6038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왜 프로이트 자신의 정신분석적 발견에 ‘오이디푸스 콤플레스’ 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이것은 21세기 오늘의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삶에 있어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nbsp;소포클레스의 비극&nbsp;《오이디푸스 왕》은&nbsp;계급주의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유산을 과신하는 논자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그 무참한 몽매성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통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nbsp;  1.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의 의미  &nbsp;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공연되었던 기원전 5세기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조금은 해야 한다. 당대의 아테네인들은 비극(연극)을 자신들 도시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는 것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 비극들이 모두 기원전 5세기의 7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겨나고 사라졌음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로서 폭발한 문화적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비극은 그들의 교육과정에서 읽고 암기되었으며, 비평가와 철학자들은 이 극들을 읽고 연구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시민에게 감정적, 지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긍정적인 교육경험을 준다”고 보았으며,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는 시민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인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음을 들 수 있겠다.   &nbsp;  그리고 매우 중대한 사실인데, 이 비극(연극)들은 아테네에서 매년 개최되던 디오니소스 대축제(국가적 종교축제였음)의 주요행사로 단 한 번 공연되기 위해 쓰여져 무대에 올려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인에게는 이 비극 관람이 오늘날 우리들이 연극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는데, 연극관람, 디오니소스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민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축제에는 아테네 시민은 물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는 외교사절들의 의무적 참석과 국가 관료인 아르콘(집정관)이 직접 경연에 참가할 세 명의 극작가 선발부터 행사를 주관했다는 점에서도 비극 공연 참관이 시민정치 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nbsp;  이 행사의 의식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아테네 제국의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의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배력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의도된 스펙터클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부심 가득한 의식이 끝나면 하루에 한 작가의 세 작품씩 3일에 걸쳐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힘의 과시라는 의식 이후에 시민생활의 토대가 산산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세계를 보여주는 비극과 정치적 부패를 비롯한 부정한 삶들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한 희극이 공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이 두 극단인 긍정성의 의식과 부정성의 연극이 결합된 축제는 바람직한 도시국가는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낯설면서도 신선한 그들의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nbsp;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민적 자부심이 불러 올 자만이 일으킬 비극성을 통해 시민의 바람직한 도덕적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비극 작품들은 그들에게 지적, 감정적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이러한 시민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기성찰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은 오늘 우리들이 이 작품에서 발견해야 할 앎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필수적 배경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임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지중해 패권자로 군림하는 아테네 제국처럼 오이디푸스는 지적이고 존경받는 성공한 인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알지만 신탁이 예언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모범적인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데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 인간적 비극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성찰로 나아가게 된다.&nbsp;<br>현전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예외 없이 이러한 구도를 따른다. 디오니소스 대축제(이데올로기 과시의 의식+비극(연극)공연)는 이렇게 시민들이 일반적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자기반성을 하는 감정적 연대의 장(場)이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시민적 자기성찰과 비판적 감정적 연대의 장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매혹적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어떠한 의미를 지닌 배경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이해는 갖춘 것 같다. 이제 20세기 독일의 한 정신분석가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인물을 자신의 발견 이론의 이름으로 삼았는지를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nbsp;  2. 20세기 독일 사회의 고대 그리스의 집착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nbsp;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배경의 파악이 필요한데, 19세기 전후에 시작된 독일인들의 정체성 발견을 위한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 즉 자기이해의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헤겔부터 시작해서 실러, 바그너, 니체에 이르는 독일 사상가들은 마치 입을 모아 말하듯 그리스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는  “역사에서의 빛의 초점이었으며,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의 이름으로 유럽의 교양인들,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고향처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라거나, 니체 또한  “더 이상 어느 곳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향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우리가 우리의 고향이기를 바라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그리스다.”라며 독일인들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음을 천명한다.   &nbsp;  <br>이것은 바그너의 독일국가주의라는 흉물스러운 정치적 열정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독일과 그리스 사이에 친족관계라는 무모한 혼합을 통해 자신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이한 논법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묘사한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를 침입하여 스파르타와 코린토인을 구성하게 되는 도리스인을 독일인 자신들이라고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공통된 신체적 특징인 큰 키, 금발, 푸른 눈동자, 잘 발달된 근육을 종족 아리아인의 전형적 표지라고 진리로 확증하기에 이른다. 독일인들은 이같은 날조된 정당화의 궤변에 열광하며 감명 받은 것은 물론이다.   &nbsp;  독일의 모든 교육기관에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 대한 교육과정이 필수가 되고, 모든 교육제도는 이러한 그리스 애호 열풍에 부응하기위해 재편되기까지 한다. “국민이 세대에 걸쳐 그 나라의 본질을 유지하며, 국가는 없을지언정 독일 국민은 언제나 존재한다. (...) 신화는 한 국민에게 특유한 것으로 한 국민에게는 그러한 신화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과 독일 정체성의 신화 발명이 이렇게 독일에서 출현한다.  이황당한 계보학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혈통에 대한 왜곡된 극단적 환상이 지속되어 편견의 역사를 만들고 그릇된 독단은 확실성이 된다.  &nbsp;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는 이렇게 환상에 맹목적으로 심취한 독일인의 정신과 섹슈얼리티의 발달에 대한 거대 서사를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대유행에 따르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 탁월한 지성은 오이디푸스에서 자신의 태생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탐구해나가는 그 고통스럽고 집요한 자아탐색이 독일인들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계 독일인은 국가주의적 열정이 절정에 이른 독일인들의 민족적 가족사에 욕망과 폭력이 얽힌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기로 한다. 그리스에 순수하고 순결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독일 국가 신화를 위협하는 망측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nbsp;  독일인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이다. 날조된 독일인들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뜨림은 물론 이 똑똑한 천재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최신 유행하는 그리스 고전이 갖는 위상, 즉 그 권위를 올라타기 위한 전략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꾀바름은 곧바로 권위를 지닌 이론으로 격상된다. 프로이트는 독일인들의 그리스 열광을 고의로 이용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왜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이론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의 배경까지 더듬어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의식과 독일 사회의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부수는 이름의 배경과 더불어 그 토대로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르렀다.  &nbsp;  3.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이&nbsp;말하려는 것 ; 앎의 불가능성   &nbsp;  앞서 언급했지만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된 연극이라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大 그리스고전문학 교수를 지낸 사이먼 골드힐은 그의 역작 《Love, Sex and Tragedy》에서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Oidipous)라는 말로 말장난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안다’ 라는 뜻을 가진 oida라는 말과 ‘어디’라는 의미인 pou를 조합하여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름은 ‘나는 어디인지 안다’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이 분열적 말놀이를 통해 앎에 대한 매혹과 은폐와 폭로에서 하나의 전기를 맞게 하려한 것이라고 해독하고 있다.  &nbsp;  《오이디푸스 왕》은 단순히 근친상간이나 오인된 정체성에 관한 슬픈 이야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그 이름에서 말장난을 하였듯, ‘너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의도이자 공연행사에 부합하는 주제였다. 이 극이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통찰에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비극을 읽어본 사람들은 극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물음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나쁘거나 타락한 사람이 아니다. 지적이고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며, 주변 상황의 통제를 위해 자신이 지닌 온갖 수완을 사용하여 운명에 투쟁하는 인간이다.   &nbsp;  자기 삶의 방향을 통제하려고 애쓰지만 운명 또는 우연이라 불리는 다른 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끈다. 자기 삶의 이야기의 통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자기 삶의 파괴, 삶의 실패로 귀결된다. 즉 이 비극은 인간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 실패,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히 보지 못하는 무능함을 가리킨다. 우리들 모든 인간은 오이디푸스와 같이 자기 삶을 통제하려고 하기에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자극 혹은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삶에서 적절한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nbsp;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한 남자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비극이라고 여기지만, 이 극의 진짜 충격적인 목소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야말로 가장 자기기만의 참극을 초래하기 쉬운 순간임을 끈질기고 불안할 정도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극한의 비극성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의 해독자이자 문제해결사이며 앎의 추구자이다. 그리고 성공을 거둠에도 그럴수록 점점 더 불운한 자기파멸을 향해 나간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비극인 것은 인간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답을 찾는 능력을 훼손시켜 놓는데 있기 때문이다.   &nbsp;  이 비극의 중추골조는 한 인간의 혈연의 관계망이 뒤엎어지면서 그 관계망이 뒤죽박죽이 되어 찢어발겨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내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은 그의 형제이거나 자매이기도 하다. 자아를 규정하는 통상의 언어가, 근친상간에서는 내파(內波)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할 수 있는 범주는 아무것도 없다.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가족 가치가 붕괴되는 전조일 뿐이다. 잘 안다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불행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잘 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어쩌면 이러한 앎의 진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이디푸스를 선택한 것은  결과론적이지만 정말 매우 통찰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로부터 독일인과 그네들 사회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망상이 초래할 자기파멸을 보았던 것일 게다.   &nbsp;  4. 결어 ; 범국민적 자기비판의 공통감각은 불가능한 것인가  &nbsp;  오늘 한국 사회의 모든 개인, 사회, 정치적 수행에 있어서 갈등과 반목은 앎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서 초래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에 대한 오만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오인은 지금 벌어지는 이 세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적절한 인식을 형성하는 지에 대해 안다는 것, 이러한 앎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야기하는 불행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비극을 오늘날에는 소설과 시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가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게 하는 과거와 그 파묻혀 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스 비극공연처럼 그 감정적 연대적 자기비판을 공유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nbsp;  오늘에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독자(관객)로 하여금 한 인간의 자멸을 공포감에 차서 바라보게 함으로서 내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극 작품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뜻 깊은 의미를 열어놓는다. 오만해지고 부패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앎의 경계를 두려울 만큼 읊어대는 이 비극은 인간 앎의 궁극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통함을 상기시킨다. 내 날 것의 마음을 보려는, 생의 통제력을 지니려고 시도하는 내 교만이 이 비극 작품과 그 역사적 배경을 더듬게 했다.   &nbsp;  독일인들은 그렇게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열렬히 떠들면서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프로이트가 이들의 환상을 깨부수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러한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자기 성찰 없는 인간들이 너무도 날뛰고 있다. 이러한 비극 작품을 모든 국민이 관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획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통의 자기비판이라는 감각적 유대를 지닐 수 있는 방법 말이다. <br>  &nbsp;------------------------------------------------<br>※이 글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더불어 사이먼 골드힐의 《Love, Sex and Tragdy(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오만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한 앎의 불가능성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70/cover150/89708432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7058</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생 마음, 독하지만 정(淨)한 것이라고 - [생 마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8147</link><pubDate>Wed, 18 Mar 2026 18: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81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264&TPaperId=171581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7/coveroff/k6421372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137264&TPaperId=171581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 마음</a><br/>김복희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3월<br/></td></tr></table><br/>“나 자신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니, 이렇게 작다니, 커지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에서<br>시(詩)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시는 사라져버린 적도 없고,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시를 읽기에 적절한 시대가 아니게 되었을 뿐일 게다. 시 비평가이기도 한 조연정 시인은 『시 보다 2025』에 실린 「보조 영혼」, 「요정의 마당」 등 김복희 시인의 시를 말하는 문장 속에서 “회한에 얽매이고 불행에 저당 잡혀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삶을 들여다보는, 그 삶의 표면과 속살을 샅샅이 눈으로 생각으로 매만지며 관찰하여야만 하는 시 읽기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삶 자체인 시는 더욱 읽어야 할 시대의 언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br>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시의 본질 상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기다리는 언어이고,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것”이기에 그 낯선 감각이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바로 그 고민 하는 시간을 참을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라는 점이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렸다는 곤란의 변(辨)일 것이다. 김복희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시를 읽는 영혼들에 마음의 양식을 함께 고양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에는 귀신, 요정, 소인(小人), 새와 같은 작은 것들, 비인간 존재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 이를 문학비평가 강동호 교수는 “작은 것의 큼을 드러내며 존재와 삶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미묘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결코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다차원성과 그 뜻밖의 광활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김복희 시인의 시작(詩作)들을 말한다.  &nbsp;또한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임유영 시인은 “말의 몸집을 끝없이 부풀리는 언어”, 그렇게 “커진 말을 뒤집어 까서 이것들 속에 축적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김복희 시인의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을 시인은 「생 마음」에서 백지에 놓기 위해 백지부터 만들기로 한다. 그때 그 재료인 필요한 것으로  “티끌 없는 오전 / 진솔 속옷 진솔 양말 / 온갖 말 가르쳐준 이들 /생각처럼 들어와 / 피도 땀도 함께 흘려주는 것“ 이라고 한다.  &nbsp;  ........(前略)내 피 내 땀에스미는 것  &nbsp;  백지에  &nbsp;  생 마음은 독한 것이군  &nbsp;백지를 가리키며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마음을 넌지시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생 마음은 독하지만 정한 것이라고  &nbsp;  - 「생 마음」, 『생 마음』 60~61쪽에서  &nbsp;  나는 이 시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도래하고 있거나 도래하는 낯선 감각의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익히 알고 있는 계절의 바뀜을 뜻하는 ‘환절(換節)’이 “짧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라는 새로운 감각을 내 몸에 기입한다. 그리고 시 속 작은 것들 - 새, 요정, 소인 - 인 이 젊은 시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인이 발표했던 「새 입장」 속 시구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nbsp;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생각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nbsp;  .............(中略)  &nbsp;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더 작아져도 되는 곳,희망에게      - 「새 입장」, 『보조 영혼』, 110쪽에서   &nbsp;  대한민국의 희망이 스스로 커졌다는 망상에 잠기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역설적 장면은 그것이 망상임을 자각하게도 하지만 바로 이 자각으로 그 작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능성, 희망은 더 작아져도 되는 희망이 된다. 시인의 언어에는 그 어떤 윤리적 잣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있는 사실 그대로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그것은 샅샅이 관찰하는 것, 작은 상대라도 더 유심히 살피는 감각 그것일 게다.   &nbsp;  <br>장시(長詩)라고 할까, 우화라고 할까, 아무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제목 또한 여느 시처럼 기묘하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이다.  &nbsp;  ...........(前略)  &nbsp;  저는 환절기가 되면, 아, 내가 호랑이 되어 개 백 마리를 죽일 결심하고, 마침내 고민 없이 아흔아홉 마리를 죽이고 사람도 죽인 호랑이 되어 이제 다시 사람 될 길 없겠네. (...) 매일매일 내 기분 내 심정 내 상황 내 허기, 호랑이 고개 넘듯 뛰어넘고 싶어집니다.  (中略) 뉘우침 없이 내 서러운 것만 생각할까요. 기구하다 하며 아득해 할까요. 그럴 수 없기에 짧은 틈을 놓치지 않으려 배를 깔고 엎드려봅니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생 마음』, 69~79쪽에서  &nbsp;  나라를 온통 자신의 허기 채우기 놀음으로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인간이 떠오른다. 배를 깔고 엎드려 그 인간은 그 강렬하고 짧은 환절의 시간에 과연 제 서러움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내 마음을 더럽힌다. 아 털어내고 날 것의 내 마음, 생 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삶이란 아쉬움투성이 같다. 시와 시의 제목이 마치 선문답처럼 대조를 이루는 몇몇 시들은 그 자체로 낯설어 힘겹게 읽어가는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도 불러일으키는데, 「춘향이 집 가리키기」,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과 같은 시들은 잘 알려진 관용적 의미를 앞세워 읽어나가며 시어의 감각을 학습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nbsp;  .............(前略)  &nbsp;  잠들어 깨어났다모르는 여자 남자가 우리 딸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목마르냐고 차가운 물 한 사발을 내밀었다찰랑찰랑 물 코 닿을 듯 들여다보았으나묘하게 닿지 않는 것이었다-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 『생 마음』, 30쪽에서  &nbsp;  잠결에 마주한 낯선 상황에서 닿을 듯 닿지 않는 골똘한 생각 끝에도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의 많은 실재들을 생각게 된다. 이왕 이 낯선 감각의 언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요정에게 시의 화자(話者)는 ‘나’를 쓰는 법부터 가르치고, 요정은 “‘나’를 향해 / 멀리 돌아가는 시를 쓴다” 그리곤 요정은 “시에 외롭다는 말을 없애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때 화자는 “요정의 시에/ 손대지 않고/ 요정의 앉을 자리를 정돈해“ 둔다. 보이지 않는, 아니 미력한 존재를 위한 환대의 모습, 아마 시를 읽는 독자들을 위한 넉넉한 품일 것이다.   &nbsp;  모기가 앉은 작은 토끼를 돕는다고 찰싹 휘두르는 곰의 친절(「곰의 친절」, 130쪽)은 그 약자를 죽인다. 강자의 몰이해에 천착한 친절이란 곧 무지의 폭력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렇게 민담, 민요나 속담을 인용할 때 시인의 시는 임유영 시인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들에 대한 까발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바로 여기와의 연루됨을 잃지 않는 예리한 시선과 더불어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인의 시집이 어쩌면 소원해졌던 시에 대한 감각을 다지는 전환이 되어줄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7/cover150/k6421372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1769</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무너지는 삶들이 급박하게 접속한 마지막 파편들; - [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1995</link><pubDate>Sun, 15 Mar 2026 18: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519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00&TPaperId=171519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63/coveroff/89320451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100&TPaperId=171519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a><br/>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열일곱 장의 이미지, 그것을 몽타주적이라고 하든 그 어떤 정동(affect)적 반영이라 하든 그 이미지들을 통한 사유 전개작업으로써의 글쓰기가 이 책이다. 그 대상은 1940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 될 폴란드 유대인 게토 내 민중들의 모든 자료 - 편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쪽지들, 사진들, 일기들, 유언들, 오고간 행정문서들, 은밀히 건네던 자체 소식 문서들, 그 밖의 타자원고와 등사본, 인쇄본 등의 문서들 - 를 ‘오이네그 샤베스’라는 비밀 모임을 통해 수집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의 3만 5,269쪽 분량의 자료들을 모체로 한 상상과 반추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해석 에세이다. (린겔블룸은 1944년 가족과 함께 총살 처형되었다)  &nbsp;  이 상상과 반추는 흩어지고 누락된 결핍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이해의 목소리이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집단적으로 체험되고 전승된 고통과 흔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터무니없는 지적(知的)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화적 경험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억의 매체로서 해독하기이다. 첫 장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절망 속에 쓰여진 글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읽을 때 그 글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비극적인 탄식의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이 첫 장의 일면 감성적 시작은 책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르며, 린겔블룸의 아카이브들과 그 아카이브들의 매립과 발굴에서 감지되는 고통과 정념의 몸짓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들이 머금은 가능한 의미들의 추적을 실행해나간다.  &nbsp;  1943년 5월, 750명 남짓 남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봉기를 진압하는 SS(나치 친위대)장군 위르겐 슈트로프가 벌인 ‘최종 게토 청산 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폴란드 내 유대인은 절멸한다. 저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응과 내 감응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을 게다. 높이 3미터 둘레 13킬로미터에 달하던 게토 장벽의 잔해들을 모아 전쟁 후 다시 세워놓은 붉은 벽돌 장벽의 틈새에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탄식의 사물 혹은 결정화된 눈물”로 읽어내는 그러한 감응을 나는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파괴와 학살의 흔적으로부터 그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nbsp;  지하 통로의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이미지 아래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얼굴을 벽에 대고 서 있게 하고서는 귀와 머리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인간 사냥, 유흥거리로 삼기위해 유대인을 죽이는 인간성 침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942년 7월 22일부터 9월 21일까지 나치는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이 두 달 동안 유대인 30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 역사의 눈으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적어도 문서들만큼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고통과 한탄의 기록들이 미래 세대에 전달될 수 있기를 거대한 욕망으로 생동하면서 죽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의 바람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nbsp;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절멸될 것임을 이미 잘고 있었던 듯하다. 게토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모든 음식의 수급은 차단되었으며, 극단적 굶주림과 반복되는 처형, 가축 열차에 실려 절멸 수용소로의 이송되어 사라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참혹함은 구태여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양철상자에 담아 세 차례에 걸쳐 노블립키 거리 38번지, 시비에토 에르스카 거리 31번지 건물 지하에 각기 매립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 난 후 1946년 4월 게토봉기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렇게 매립되었던 린겔블룸 아카이브를 발굴해야 한다고 라헬이라는 여성이 호소한다. 그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아카이브를 찾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며, 하찮은 종이쪽지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친 방해의 목소리다.   &nbsp;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그것을 찾는 일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기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종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히 흉물스럽다.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수색이 결정되었지만 이미 잔해가 말끔히 정리된 바르샤바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니, 그 엄청난 길이와 높이의 장벽,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항공 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굴을 시작하여 표면이 산화된 양철통이 발굴되기까지 4년 동안 물이 흘러들어가고 곰팡이가 서식하면서 습기와 팽창으로 상자에 눌러 붙고, 글자가 지워지고 부패되고 훼손된 문서들의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다. 린겔블룸이 주도하여 수집한 오이네그 샤베스 아카이브는 그렇게 윤리적,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물려준다.  &nbsp;  사진 이미지 작업을 통해 사유이론을 전개하는 이 독특한 저자는 지워지고 뭉그러지고 종이끼리 들러붙어 흐려진 문서들과 사진으로부터 역사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애초에 흐릿했기 때문에 사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역사의 사물들과 사건은 존재하게 되고, 광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독성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재가 현실에 뒤섞여 역사는 그 흐릿함에서 건져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매립된 양철통을 발굴해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디-위베르만은 그 자료들이 두 번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한 번은 땅 속 지하의 물속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증언하는 눈물의 감동적 물속에서”라고.   &nbsp;  <br>책은 이렇게 발굴해내 복원한 문서들의 내용이 빼곡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긴박하고 다급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간절함들, 비통한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제 이름은 나흠 그지바치입니다.”,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동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그곳으로 이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nbsp;  그런가하면 매립의 마지막 순간에 상자에 밀어 넣었던 19살 소년의 개인적 유언 같은 글도 있다. “우리가 당대의 세계를 향해 외치고 울부짖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땅 속에 묻습니다.  나는 이 소중한 보물이 언젠가 발굴되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순간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이 어린 소년조차 자신들이 곧 절멸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쪽지와 문서들이 미래 세계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사로워 보이는 서신들에는 당시의 급박한 동료들을 향한 정보들도 있는데,  트레블링카 절명 수용소를 급하게 그린 지도가 그려진 우편엽서, 특수 트럭에서 자행된 가스학살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들도 있다. 헤움노 절명수용소에서 1942년 1월 탈출하여 4개월 후 체포되어 베우제츠(Bełzec)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슐라메크가 전한 정보기록이다.   &nbsp;  그런데 더욱 아찔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명 “상상하기의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여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 되면 스스로 고의적 무지나 자발적 예속의 심리상태로 빠져드는 현상이다. 상상력이 현실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아니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현실의 가혹한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연한 목소리들, 경악스러운 사실들이 매장된 종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일상적 생존의 단순한 몸짓들, 비참 속의 고귀한 몸짓들, 비영웅적 몸짓들로 직조된 이들 자료를 그들로부터 물리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텍스트 속 문자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감상적이라고? 어찌 감상적이기만 하겠는가, 더는 합리적 이성이란 것으로 해독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면서 차가운 이성 어쩌구 하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고 문명적 퇴화의 비윤리 아닌가.  &nbsp;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이 수집행위, “가능한 많이 수집하라, 분류 작업은 전쟁 후의 일이 될 것이니”라며 오이네그 샤베스의 동료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은 현재의 무력함을 미래의 힘으로, 나중에 쓰일 당신들의 역사로 바꾸기 위한, 생존의 불가능성을 잔존의 기회로 만들고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디디-위베르만의 진술처럼 “일관된 무언가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 흩어진 이미지들”로부터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 문명 퇴화적 표징이나 그들이 축조한 절멸용 기술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해석을 통해 흩어진 도덕 관점들을 다시 주워 모을 수 있으며, 1942년 독일군이 게토에서 촬영한 사전 위조되고 연출되어 왜곡되고 억압되어 전복된 이미지들이 같은 이미지 자료임에도 얼마나 은밀하게 다른 관점을 생성하게 하는지도 분별하게도 된다.   &nbsp;  게토 내에는 유대인 자체 행정기구인 유덴라트라는 것이 있었으며, 유대인 동료를 감시 통제하는 유대인 경찰도 있었다. 유덴라트라는 특권 계층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하는 격식을 갖춘 단체 초상 사진과 유대인 경찰이 줄지어 세우거나 무리를 이루게 하여 조밀하게 모아 놓은 채로 찍은 일반 민중 사진의 뚜렷한 분할을 보는 것도 당시 게토 내 유대인들의 권력구조와 갈등을 상상케 한다. 어차피 1943년 8월 이후에는 모두 절멸할 동족임에도 구별짓고 위계를 부리는 인간들의 그 던적스러움은 역사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nbsp;  무엇보다 이 책을, 아니 유대인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아카이브에 담긴 그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기대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 얼굴들을 시간을 넘어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평범성에 깃든 숭고함과 극악스러움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늘 이런 외침은 반복되었고, 그 외침은 헛되이 울렸고, 훨씬 나중에야 메아리를 만들어냈다”고, 때문에 “글쓰기가 전달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통의 외침 앞에서 글쓰기에 내재된 본질적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만큼은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  &nbsp;  우리에게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극악한 압제의 시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시간을 멈춘 채 묻혀 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일경에, 조선인 일제 주구(走狗)들에 쫓기면서 던져지듯 남긴 쪽지들, 색 바랜 사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날뛰는 뉴라이트로 불리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민족역사의 왜곡 날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해석이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묻힌 소소한 자료들에서 그날들의 진실을 우리는 읽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품고 있을 “단 한 번의 단순한 감정적 체험의 틈 속 깊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지 모를 흩어진 심리적 자리”를 우리는 복원하고 해독해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시작하는 이 문장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일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63/cover150/89320451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6390</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텅 빔의 충만 - 맑고 향기로운 글들 -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9468</link><pubDate>Sat, 14 Mar 2026 09: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94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5050&TPaperId=171494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63/94/coveroff/k7421350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5050&TPaperId=171494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a><br/>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02월<br/></td></tr></table><br/>“언젠가 우리가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돌보는 사람들이다.“- 다시 채소를 가꾸며. 《아름다운 마무리》, 46쪽  &nbsp;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법화(法話)나 법문, 강연 기록들을 인쇄된 문자로 접할 길이 없는 가운데, 스님의 말씀을 엮은이의 체화된 사유의 깊이 있는 글과 더불어 하나의 총체적 흐름으로 만날 수 있게 펴낸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전한다. 법정스님 하면 《무소유》를 떠 올리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아마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앎이 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내려놓음의 마음공부’ 이듯, 무소유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몫을 덜어내는 선택의 기준을 세우라”는 가르침이며, 그렇게 덜어내어 가벼워진 자리에서 단순화한 선택이 쌓이면 삶의 방향도 선명해지고 그럼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자기답게 살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게다.  &nbsp;  이 책은 단순히 법정스님의 고귀한 문장들을 수집하여 배열한 문장 모음집이 아니다. 엮은이라 표기하지만 스님의 말씀에 더해 엮은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의 결과임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모든 법화를 총체화한 해설서이자 독자적인 명상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움과 자유, 가족과 사랑, 갈등에서 상실과 병, 죽음, 단련과 실천에 이르는 인생의 단면들인 7개 주제 아래 법정스님의 저작들과 법문, 법회 말씀을 망라한 총 245 문장과 각 해당 문장에 따른 엮은이의 풀어 쓴 시의적 해설,  해당 문장에 스며든 사유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네 삶의 태도가 선택의 지점에서 방황하게 될 때 언제라도 다시 펴들고 읽게 될 그런 책으로 항시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nbsp;  “오늘의 걸음, 말, 시선을 조금만 바꾸고, 오래 붙잡고 있던 기대와 습관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달라진다.“ - 본문 36쪽  &nbsp;  소유냐 존재냐 또는 소유하기와 소유되기와 같이 그 어떤 대상을 취득하여 자기 지배하에 두려는 욕구와 이와 달리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의 능동적 과정으로서 공유와 결속의 양식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뚜렷하게 다른 두 이해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질과 부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게 되면서 물질을 비롯한 외적 대상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더, 더 소유함으로써 대상을 지배하는 느낌의 상승, 즉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됨으로써 욕구와 충동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아집과 소외와 굴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유 집착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된 그것에 얽매여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삶의 감각을 잃고 세상을 탓하게 하곤 한다. 자신임을 확신하게 하는 느낌의 이 왜곡된 현상에 대한 동서를 막론한 가르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nbsp;  어쩌면 법정스님의 말씀은 바로 이 소유의식, 무언가를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동안 충만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향과 방법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것이 곧 비워냄, 덜어내 가벼워진 마음이고 그 내려놓고 가벼워져 단순해진 자리에서 삶의 선택 기준은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오히려 그 텅 빔이 생에 대한 태도와 삶의 품격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소욕지족 소병소뇌(小慾知足 小病小惱) 라 하여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또렷이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nbsp;  우리들의 지나 온 인생길을 가만히 돌아보면 삶의 길은 결코 물질의 풍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과 베풂 말고 그 밖의 것들인 재화와 물질, 명예와 권력,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소중하겠는가. 무상한 것이다. 즉 항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 삶의 가치기준이 흐트러지기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때 내려놓음, 비움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삶의 결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오늘처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고 가난하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nbsp;  <br><br>“내 안에 중심이 잡히면 (...) 나를 스스로 돌볼 힘이 자란다.” - 본문 195쪽  &nbsp;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타자는 시선에서 지워지고 저 위만 보며 계속 달리다 보면 불안의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그 극렬한 경쟁의 전선을 쉬지 않고 내달림으로서 성취는 늘어나겠지만 삶의 이유가 흐려지고 자기 삶을 상실한 허전함, 공허가 밀려들어온다. 스님은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다.” 라 말하고 있다.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렇게 비워 간소해진 자리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리듬과 속도를 찾아내고 그렇게 명확해진 기준을 삶의 방향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와 오래 앉아 있게 한다.’는 의미인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의 마음의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태도일 것이다.  &nbsp;  “마음도 매달린 것을 조금 내려놓아야 새 감정과 풍경이 들어온다. 그 빈자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삶의 방향을 다시 고르는 자리가 된다.” -본문 196쪽  &nbsp;  양과 크기를 키우려는 우리네 자세는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위의 시선과 인식에 휘둘리는 삶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의 리듬이 없다. 그래서 삶은 고통스럽고 쉽게 짜증나며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친다. 이러한 비교와 너저분한 장식을 덜어내어 자신에 맞는 속도를 찾아 지켜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욕심의 속도도 느려지며, 계산하는 관계는 배려와 베풂으로 옮겨갈 것이다. 아마 이렇게 자기 리듬에 맞춰 세워진 자기만의 삶의 기준에 정성을 다하면 생의 밀도가 높아지고 그것은 충만한 행복감이 될 것이다.   &nbsp;  “어떤 세상을 사는지는 오늘 내가 고른 시선이 정한다.”고 엮은이는 말한다. 내려놓기, 비워내기는 자기답게 살기 위한 방식이지 그 뭐를 인색하게 절약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버릴수록 선택이 또렷해진다. 비교와 기대의 볼륨을 낮추고 내 속도를 지킬 때 여백이 생기고 그 위로 자연스레 삶의 여유와 평온이 찾아온다. 이렇게 과한 것을 덜어내 중심을 선명하게 만들면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오래 남는 삶의 품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세련된 기품이며 멋이다.   &nbsp;  “한 줄 한 줄 자꾸 멈추게 만드는 책은 불친절한 글이 아니라, 내 삶을 끌어와 함께 생각하게 하는 친구에 가깝다. 결국 독서는 한 문장을 앞에 두고 얼마나 오래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는가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 본문 253쪽  &nbsp;  법정 스님의 말씀들은 시적 고아함이 배어나오고 그것에 엮은이의 사유 품격이 더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문장은 절제되어 적은 말들임에도 그 속의 마음이 절로 건네져 옴을 느낀다. 엮은이는 이처럼 “말 대신 눈길로 서로의 마음을 건네는 시간을 목격전수(目擊傳受)”라 알려준다. 책 속 문장을 바라보면 그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 선명하여 이렇게 가르침과 문장의 리듬이 공명한 그 의미는 증폭되어 다가온다.    &nbsp;  스님의 저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의 「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 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혀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의 지적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그 인고의 체험을 겪은 것들이어서 술술 읽힘에도 수시로 책장을 덮고 반추하게 된다. 뭇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정체성의 발견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런 말은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정체성은 무언가를 껴입고 장식하여 구성한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남의 시선과 기준, 체면, 증명하고 과시 하고픈 강박 등과 같은 것들을 떼어내는 일, 그렇게 단순화한 것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후 책장을 덮으면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삶을 바꾸는 힘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고 있는 기분 좋은 충만감에 싸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63/94/cover150/k7421350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639455</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좋은 삶을 산다는 것 - [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6312</link><pubDate>Thu, 12 Mar 2026 17: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463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1463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off/k1721366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1463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a><br/>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03월<br/></td></tr></table><br/>“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nbsp;(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  &nbsp;  어떤 분야가 되었건 자기 삶의 기준을 선명히 세우고 자신만의 리듬, 속도와 분량을 정해 선택을 단순하게 하여 오랜 시간 작은 정성을 반복해 온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그 어떤 본질적 감각을 체득하는 순간을 맞이하기 마련인 듯하다. 글쓴이는 “브랜드 내러티브 설계 및 메시지” 제작 일을 하는, 추정컨대 대략 15년쯤 광고 분야의 일에 종사해 온 듯싶다. 이 작은 책자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을 당당하게 공표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독자들은 어느만큼 수긍할 수 있을 터이다.  &nbsp;  <br>‘영한(英韓) 인생 사전’이라는 표제어가 곧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의 표현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영어 단어나 문장의 뜻을 깊이 있게 음미하기 위해 “단어의 은밀한 부분에 놓인 부스러기까지 한 톨도 빠뜨리지 않고 옮기는” 고심의 작업의 결과이고. 바로 이를 통해 인생에서 뜻 깊은 열 가지 주제어로부터 삶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길어 올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선정된 자아(Identity), 직업, 성취, 자유 등 열 가지 주제어 아래 두세 꼭지의 함축된 문구와 체험한 인생을 교호하면서 통찰적 시선을 풀어내고 있다.  &nbsp;  청년 시절에나 혹시 손에 들었을 법한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True integrity' 라는 어휘에 대한 작가의 직장에서의 경험이 녹아든 지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충분히 성찰적 인물로 여겨졌고, 바쁜 직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에 대한 건강한 균형의 태도가 엿보였던 까닭이다. 사실 이 어휘를 포함하는 “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 (다른 이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 진다.)”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말하는 문장은 아니지만, 온전함 또는 완전함으로 해석되는 'integrity'의 의미 수용의 맥락을 포함하는 애플에서의 경험 이야기는 단어의 뜻을 보다 풍부하게 전달해준다.   &nbsp;  결국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오랫동안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끈기를 가지고 공들인 사람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그러한 완전함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으로 첫 장을 시작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글쓴이가 선택한 30여 인생문장 중 내 믿음과 공명하는 것 몇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을 이어가련다. 글쓴이가 광고업계에 바탕을 둔 사람이다 보니 이들 문장의 다수가 브랜드 광고 문구나 옥외광고 문구 등 대중을 향한 메시지들이다. 그 첫째는 “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 (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이라는 문장인데, 삶이란 완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는 내 오랜 좌우명이기도 한데,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이라는 형용사의 모호함으로 인해 항상 반성적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삶이 주는 모든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쓰고 있는데, 항시 깨어있는 정신,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지각하려는 태도를 지닌 자신의 내면에서 다져진 목소리일 것이다.  &nbsp;  두 번째 문장은 무수한 선택지로 들끓는 세계에서 자신을 정립하는 태도로서도, 또한 일상적 욕망의 발현과 절제의 균형에 있어서도, 혹은 글쓰기와 같은 심미적이거나 다수의 이해를 위한 쓰임새에 이르기까지 단순함은 살아가는 태도의 궁극적 섬세함의 구현일 것이다.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단순함은 궁극적 섬세함이다.)” 이 간결한 문장이 품은 풍부한 의미들은 일본대중의 언어인 와비사비(侘寂, わびさび)와 어울려 고아한 품격과 정취까지 더한다. 오랜 시간의 풍화를 견뎌온 사람이나 사물들에서 드러나는 우아한 품격과 궁극적인 섬세함을 품은 단순함은 개인 고유의 기준을 위해 비워져 단순하고 선명해진 자신만의 단단한 생의 태도와 다시금 연결된다.   &nbsp;  삶의 품질, 혹은 품격이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진 단순성에 대한 지극한 정성일 것이다.  시(詩)구절, 광고문구들, 유명가수의 노래가사, 연설문들을 아우르며 생의 지혜를 꼭꼭 눌러 담고 있는 이들 영어문장 또는 번역된 문장들에 글쓴이의 체험적 사유가 더해져 청년들에게는 다가오는 풍부한 미래에 대한 선배의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중장년의 독자들에게는 인생을 반추하며 삶의 소중한 것들에 공감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nbsp;【『영한 인생 사전(Life Dictionary)』,&nbsp;본문&nbsp;83쪽】<br>  법정(法頂) 스님은  『산방한담』에서 “사람은 내일에 가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자기만의 굳건한 기준을 지닌 인간의 바로 지금 순간에서의 철저한 열정과 지극한 공들임, 현재의 최선이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라고 지적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곤 한다. 오늘을 흘려보내며 남의 시선에 휘둘리고 무수한 선택지를 우왕좌왕하는 인생은 기다리는 미래조차 무의미해지기 일쑤일 것이다. “Small habits compound into greatness.(작은 습관이 복리로 쌓여 위대함이 된다.)” 꾸준히 현재의 시간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영역에서든 자신들만의 인생의 본질을 건져 올리는 만족스러움이라는 보상을 받을 터이다.   &nbsp;  글쓴이는 성취의 장에서 'officially'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이키 캠페인 문장인 “You don't need an official court or official uniforms to be officially great.(공식적 장소, 공식적 의상이 없어도 진정 위대해질 수 있다.)”를 통해 삶의 위대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국가나 사회의 인정이라는 official의 사전적 의미와 인기 노래 제목인 &lt;Officially missing you(공식적으로 네가 그리워)&gt;처럼 국가나 사회가 승인할 만큼 공식적으로 그리울 정도임을 뜻하는 과장된 관용적 표현을 오가며 정말로, 진짜로 그러함이란 의미를 품은 official의 의미를 풀어놓는다. 즉 그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성을 다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함을 역설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글쓴이가 시종 가리키는 곳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정성스러운 반복, 꾸준한 공들임의 습관, 바로 지금의 열정일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러한 자기 기준 확립의 태도만을 발견하더라도 충분히 이 인생사전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nbsp;  아마 그것은 글쓴이가 단어 하나하나에 숨은 의미들을 이해하려는 수고와 닮아있을 것이다. 본질, 중요한 알맹이, 삶의 중요한 키워드를 또렷하게 손에 쥐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이다. 글쓴이의 바람처럼 “자아, 시간, 유대, 건강, 직업, 취향, 낭만, 성취, 의식, 자유”라는 핵심어 속에서 “꿈꾸고자 하는 무엇을 통찰”하는 데 소중한 참고 사전이 되어줄 수도 있을 터이다. 독자들 제위(諸位)도 “없으면 자신이 성립되지 않을 단어”를 골라보시라. 그것이 여러분을 지어올린 인생일 것이다. 그것에서 털어버릴 것이 있다면 버리고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선택하면서 단순한 자신만의 인생기준을 세우는 시간으로 아깝지 않을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150/k1721366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577944</link></image></item><item><author>비의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언어의 아름다움, 지옥의 재미 - [죔레는 거기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37633</link><pubDate>Sun, 08 Mar 2026 15: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9034103/171376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1376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off/k5820328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1376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죔레는 거기에</a><br/>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2월<br/></td></tr></table><br/>“긴 삶을 살아오며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소. (....) 큰 욕심의 끝은 신음이라고 하지 않았소, (...) 이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거요.”&nbsp;- 4장 134쪽  &nbsp;  "언어의 아름다움, 지옥의 재미"를 자신의 문체적 모토로 삼고 있다고 강조해 온 이 종말론적이고 해학적인 긴 문장의 미학적 경이로움을 창작하는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던 2025년에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전통적인 서사의 작품을 발표했다. 영리하고 다면적이며 정교한 구성으로 저항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를 그려내는 그만의 강렬한 어둠의 문학적 기교가 조금은 더 유머러스해지고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평온해진 느낌이다.  &nbsp;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세계가 권위주의와 극우 과대망상으로 인해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과 이념적 공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재적 상황일 것이다. 소설은 왕정복고라는 극단적인 퇴행적 향수의 서사를 중심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반동적 정치모델에 대한 갈망을 신랄하고 냉소적인 유머로 지펴낸 정치 풍자소설이라 정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멸시의 빈정거림의 거대 서사가 그렇게 진지한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데, 시적이고 서정적인, 아니 이보다는 애잔한 슬픔의 장막이 드리워진 듯 생의 어떤 순간들의 아름다움이 이를 경감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소설의 주인공 아흔 한 살의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은퇴한 전기기사로 12년 전 아내 일리아를 떠나보내고 홀아비로 반려견 죔레와 함께 산 속 작은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문과 출신을 비밀에 부치고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 온 칭기스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왕가의 후손이며, 헝가리 왕위 계승권까지 주장할 수 있는 아르파드 왕가의 왕위 계승자다. 그런데 “정치를 피해 도망치는 자는 언제나 정치의 그림자에 시달린다.”는 격언처럼 정치에 관여하기를 거부하고 조상들처럼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그에게 “전기 기술자, 기타를 든 순회 가수, 자동차 도장공, 종마 목장 주인(소위 옛 품종을 보존하는 사람), 경찰관, 회계 사무원, 은퇴한 하사관, 그리고 교사”까지 한 무리의 왕정복고주의자들이 노인의 평온한 삶을 깨뜨린다.  &nbsp;  이들은 오랜 조사 끝에 그가 1301년 사라진 아르파드 왕조의 후계자이며, 따라서 헝가리 왕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알아냈음을 말한다. 오직 그만이 부패하고 권력에 굶주린 독재정권으로 얼룩진 헝가리 정치에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기에 왕국의 수장임을 승인해줄 것을 간구(干求)한다. 헝가리는 쇠퇴하고 영광은 사라졌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식적으로 정치에 등을 돌렸고 다시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은 노인에겐 이들 왕정복고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달갑지 않다.   &nbsp;  소설은 이렇듯 헝가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는 헝가리라는 단일 영토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허구적 기원의 서사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의 마무리 끝에 짧게 언명하고 있는데,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로도 현실의 일부로서 이번에도 현실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지만” 에서와 같이 2022년 독일 사회에서 일어난 극우단체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을 거의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극우 파시스트들의 권위주의적 망상을 조롱하는 은유로 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빅토르 오르반 극우 독재정권의 헝가리 정치 사회뿐 아니라 유럽, 나아가 현 세계의 반동적 정치질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일명 '제국 시민(라이히스뷔르거,Reichsbürger)' 단체라는 군주주의와 반유대주의, 역사수정주의 등을 포함하는 퇴행적이고 종파적인 극우집단의 대규모 검거와 재판 사건인 극단주의자들의 행태가 이 소설의 중심 서사 축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과 같다. (소설에서는 '조율된 플랫폼(Koordinált Platform)', 줄여서 KP라는 왕정복고주의자 무리로 묘사됨)  &nbsp;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이들 찾아 온 무리에게 말한다. 그리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라며, 그를 추종하는 이 무리들이 폐하, 라 자신을 칭하는 것을 금지하며, “요지 아저씨”로 부를 것을 요구한다. 이후 추종자들이 그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요지 아저씨로 부르는 것에 복종하자 마지못해 왕위 제안을 수락한다. 요지아저씨는 다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왕이 되고 싶을 뿐,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거절하리라고 말하면서. 추종자 무리는 점점 늘어나고 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거듭하면서 점차 옛 시절의 향수에 젖어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나 온 사적 삶에 대해 들려준다.   &nbsp;  여기서 그는 헝가리 극우 민족시인 버시 얼베르트의 시작(詩作)들을 칭송하면서 한 때 자신과 연인 사이였던 열렬한 파시스트 가수겸 배우인 지타 셀레츠키의 노래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거듭 열정적 기억으로 소환한다. 이러한 사적 진술 속에 작가는 교묘하게 2022년 라이히스뷔르거 운동의 극단주의 주동자의 한 명인 로이스 공작 하인리히 13세와의 친분을 요지 아저씨의 입으로 발설하게 하는데, 이는 이 소설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 구분선을 흐릿하게 하여 역사적 사실의 진술로 수용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등장인물들에 부여한 고유한 은유적 역할은 아마도 작가의 탁월한 특징일 것이다.   &nbsp;<br>추종자 무리에는 작가와 동명인 덩치 큰 젊은 유랑음악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라는 청년이 등장하는데, 이 떠돌이 음유시인은 기타를 치며 요지 아저씨에게 옛 권위주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물론 그것은 한때 소중히 여겼던 미덕과 현재의 타락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역시나 반동적 향수를 부추기는 역할이다. 작가가 왜 자신과 같은 이름의 인물에게 이러한 역할을 부여했는지, 어떤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여 자신이 쓴 소설들이 의도하지 않은 수구적 반동성을 지닌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회의를 위한 반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nbsp;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 예순네 살의 역사 교수인 “젊은 버지디”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모든 서사에 대해 역사적 기록, 즉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이야기들에 회의를 지닌 인물로 홀로 요지 아저씨를 찾아와 발칙한 말을 쏟아낸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 우리에게는 아르파트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요지 아저씨 당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말은 헛소리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합당한 서사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이용하겠으니,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라는 협박이다. 사실 요지 아저씨는 왕정복고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떠한 증거도 필요치 않다고 버지디의 무례함을 비난하며, 내쫓아버린다. 이렇게 내쳐진 인물이 자료의 추적과 탐문 끝에 요지아저씨의 이야기가 자신의 조사기록들과 일치함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어 현실 정치세계에 왕의 복귀를 은밀히 추진한다.  &nbsp;  사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요지아저씨의 반려견인 죔레(Zsömle)는 왕정복고를 준비하는 무리들의 인간적 충동을 상징하는 은유로서 언제든 대체 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는(처음 등장하는 죔레는 몇 페이지만에 죽고, 같은 이름을 가진 어린 개로 대체된다)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한 떠돌이 음악가가 왜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졌을까 에 대한 동일한 미해결의 과제가 독자를 답답한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러한 해결되지 못하는 소재들은 정말 너무 찝찝하다. 아무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식(式) 은유와 상징, 암시는 온화한 우울함, 냉소적 유머와 더불어 높은 지적 통찰력으로 예술적 야망을 달성한다. 현재에 개입하고 현재를 서술적으로 탐구하면서도 문학성을 잃지 않는 이 특유의 기이한 문학은 기이한 놀라움과 매력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어느 순간 급전하여 요지 아저씨의 왕정복고를 위한 순탄하게 보였던 진행은 그들의 계획이 드러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nbsp;  이 무너져 내림의 서사인 배신과 숙청, 느닷없는 인신 구속과 교도원의 구속된 삶의 기록들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다만 한 가지 작가의 동일 장면의 묘사 속 미세한 반복 기술이 가져오는 미학적 묘미는 여기서도 반복되는데, 꿈인가 하면 현실인 사태들은 민족주의적 파시스트들인 조국의 구원을 군주제의 복원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또 다른 축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해체되는 형국과 함께  큰 욕심은 결국은 신음이요,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것임의 다른 표현인 것만 같아 왠지 코끝이 시큰거리고 목메는 느낌임만을 적어둔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끝없는 수다에 완벽하게 부합하듯 전작인 『헤르쉬트 07769』와 같이 호흡이 긴 문장과 거의 없는 마침표를 지닌 이 소설은 초월을 향한 잘못된 인간들의 열망을 그 이념적 공허함만큼 지옥 속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nbsp;  한편 이 소설은 정치 풍자의 무거운 서사적 은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애잔한 슬픔,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왕정복고를 모의하는 추종자 무리들의 파괴적 활동이 초래한 분노가 거의 드러나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평온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테라스에 나와 앉아 죔레와 함께 석양을 감상하는 요지 아저씨의 관조의 장면은 내게 이 소설의 인상적 몇 장면의 하나로 남게 될 것 같다.  "구름 줄기들이 서로 미끄러지듯 지나가거나, 마치 신의 한숨처럼 가볍게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녔다. 핏빛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옅은 보라색과 진한 보라색, 무수한 색조가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계곡 위로 솟아오르는 산양의 물결치는 듯한 모습과 어우러져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한 장면일 것이다.   &nbsp;  끝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와 더불어 이야기의 모든 아이러니한 기록이 발하는 불쾌함과 세계의 발작적 모순의 현상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듯한 탈주의 비상을 상상하게 해주었는데, “삶의 끈은 닳아 없어지고, 생각은 맴돌며, 행복은 오직 지나간 기억” 속에만 존재함을 깨달은 자의 날아오름이다. 남은 것이 갇힌 곳에서의 탈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마침내 기쁜 흥분에 떨고 있는 죔레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열린 창으로 기어 올라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에게 말했다. 꽉 잡아.”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3층에 있는 그의 병실에서 뛰어내림이 아니라 비상(飛上)으로 해석코자 한다. 성탄 전야의 비상이 재생의 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흔 두 살 노인의 삶의 행적, 그 미학적 경이로움의 기록으로부터 이 잔혹한 세계 속의 작은 행복을 기대하게 된다. 풍자적이고 재미있고 친근한 아이러니가 넘치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소설이다. 절망적 현재를 풍자적 냉소와 유머로 맞선 정치 풍자극의 위대한 금자탑이라 해도 지나친 수사는 아닐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150/k5820328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55988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