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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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열일곱 소년 이며, 마흔다섯 중년이 된 이다. 열일곱 와 열여섯 소녀인 가 만든 도시, 높은 벽과 망루, 오래된 꿈들이 있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일하는 너의 모습, 둘이 쌓아 올린 하나 됨의 믿음이 이루어 낸 것이다. ‘는 네가 있는 곳,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어 도시의 벽 안()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이가 되어 살고 있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의 관문이자 핵심 설정일 것 같다. 단단히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리고 그림자를 잃고 사는 사람들’, 드디어 하루키만의 고유한 세계, 소위 하루키 월드라 불리는 세계로 입성한 것일 게다. 그런데 벽과 그림자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는 후기(後記)에서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1980년 한 문예지에 발표했던 동명의 조금은 긴 단편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장편으로 송두리째 고쳐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쓰고(2020~2022) 있다. 이 문장이 이 소설의 감상을 나름 정리하는 데 하나의 단서가 되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세계는 대략 년 여에 걸친 팬데믹으로 단단한 방벽을 세우고 어떠한 해()도 침투할 수 없는 빈틈없이 견고한 폐쇄적 장소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그리고는 이젠 그 심리적 벽마저도 서서히 제거했다. 어쩌면 작가에게 전 인류적 이 사건은 40년 넘은 소설을 마무리할 단서가 되었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벽으로 싸인 그 견고한 폐쇄적 도시를 하나의 완결된 완전한 영역으로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칼끝조차 들이밀 틈이 없는 소설 속 도시의 벽은 도시를 대단히 기교적이고 인공적으로 균형을 정묘하게 지켜내고 유지하는 장치로 빈틈없이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내부의 잔존하는 역병의 씨앗까지 막아내지는 못한다. 묘사되는 도시는 견고하고 자기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폐쇄성에도 몇몇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출입하는 단각수들의 번식과 도태를 통한 에너지의 균형 유지, 웅덩이라는 심리적 울타리라는 공포심의 이용으로 내부단속과 외부유입의 차단을 위한 폐쇄 시스템 그 자체인 내부 취약성의 불가피함을 드러낸다.

더구나 내부에 잔류하는 마음의 잔향들, 혹은 역병의 씨앗’”이 야기할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킬 장치로 꿈 읽는 이가 오래된 꿈들을 읽고 그것들의 감정에 공감하며 존재의 안정을 도모토록 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벽의 완전성, 도시의 자기 방호 또는 벽의 견고함은 불확실한 것이다. 어쩌면 하루키 월드로 불리는 다분히 컬트의 성격을 지녔던 폐쇄적 공간은 팬데믹을 경험하며 열린 시스템으로 변화를 겪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자신의 그림자만을 탈출시키고 도시에 남기로 결정한 의 의지와 관계없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도시 밖 세계로 돌아 온 것처럼 철저하게 차단된 폐쇄적인 벽, 도시 안의 그 어떤 존재도 밖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음에도 그는 벽을 통과해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도시는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 본체는 벽 바깥으로 추방하여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그 어떤 틈도 없이 완전히 폐쇄된 완결성의 장소라는 점에서 는 꿈을 읽는 이로 부적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아무리 견고한 벽이라도 완전한 것 따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벽이라는 안과 밖을 차단하는 폐쇄 장치라는 것이 본래 불확실한 것이라는 의미일까? 사실 우리들 마음이나 도시의 안정과 평화는 항상 위태로웠으며, 어딘가 그 견고함에 대한 결여를 지울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기 완결의 폐쇄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상적 지대라는 것이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와 함께하기 위해 마련된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함으로써 삶의 가능성으로서 무한한 선택의 열림이 충족되었기 때문일까?  아마 이 모든 답변을 포함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닫힌 체계로 작동하는 벽과 도시의 불완전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이야기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줄기가 집요하게 내 생각을 떠나지 않았는데, 열일곱 소년과 열여섯 소녀가 숙성시킨 사랑의 감각이자 관념이다. 벽돌을 긴밀히 쌓아올린 벽의 도시는 소녀가 들려주고 소년이 받아 적은, 두 사람이 만든 도시이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라는 열여섯 소녀 의 말처럼 열일곱 소년 의 풋풋한 사랑으로 가없이 충만해 가지만 는 어느 날 와 이 세계로부터 그 어떤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립감으로 황폐해진 이 세계에서 너의 본체가 있다고 했던 도시로 존재의 하나 됨에 대한 그 절실함이 를 절로 이끈 것이리라.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현실 세계에 돌아 온 나는 순수하고 절대적 관념으로서 너와의 심적 유대의 상실에 대한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너의 존재, 너의 이야기, 너의 모습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열일곱 살 때부터 이십 삼 년에 걸친 기다림, 침묵과 무()만이 흐르는 공허의 시간이 흐르고 마흔 다섯 살 는 출판 유통분야의 일을 떠나 새롭게 전환할 요구를 느낀다. 오랜 직장을 그만두고 전형적 지방 소도시인 후쿠시마 현 Z**마을의 작은 도서관에 관장으로 자리를 잡는다. 단각수와 벽 등 이 소설과 소재에서 무척이나 닮은, 소위 하루키 월드를 연 작품으로 지칭되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일 것이다. 마을 도서관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 된다. 이 작품을 나와 너의 심적 유대,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는 유령인 전임 관장 고야스와 초월적 만남을 가진다. 인생을 자기 자신, 즉 본체로 실감하지 못하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에게 고야스는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하는 것이라며, 그럼으로써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본체와 그림자의 표리일체를 말하며 를 도서관의 소소한 새로운 생활이 마치 상쾌한 바람이 불고 간 것처럼 물이 흐르듯자신의 몸과 영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고야스 또한 사랑했던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깊은 상실을 지닌 인물이고, 그로부터 나는 삶과 죽음의 세계, 본체와 그림자라는 존재의 실재에 대한 영혼의 깊이를 더해 나간다.

 

휴관일인 월요일이 되면 는 고인이 된 고야스 관장과 그 일가의 묘소를 찾아 반향 없는 물음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그리고는 마을의 역 근처 커피숍에서 30대 여인의 친절한 응대와 함께 한 잔의 커피와 머핀을 먹으며, 둘 만의 유대를 쌓아 나간다. ‘는 열일곱 소년이 했던 사랑의 기운을 느낀다. 바로 잃어버린 마음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공간에서 새로운 사랑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리라.

 

사랑의 이야기는 이렇게 인물을 달리하면서 다시금 이어지는데, 이 사랑은 더욱 확장되어, 도서관에 종일 무섭게 책을 읽어나가는 일종의 서번트 증후군의 소년에 대한 공감으로서의 사랑에 이른다. 아버지의 냉혹함, 어머니의 분별없는 집착, 이 세계에 대한 단절감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려는 아이는 의 벽으로 싸인 도시에 이르는 길을 묻는다. 이윽고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으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절로 뚜렷하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처럼 소년은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는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는 궁극의 개인 도서관인 소년이 꿈 읽는 이로서 적절한 존재임을 생각한다. 현실과 상상적 공간을 넘나드는 이 야릇하게 공존하는 세계는 벽 안의 도시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는 꿈을 읽는 이로 도시의 도서관에서 소년의 영혼을 받아들여 오래된 꿈들을 읽어나간다. 소년은 로부터 공감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나는 소년의 도서관적 능력으로 속도를 높여나가지만, 소년에게 꿈 읽는 자의 역할을 승계하곤 이 세계로 돌아온다. 여기서 어럼풋 도시와 벽 바깥 이 세계의 불가피한 공존을 발견한다. 벽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벽 안의 도시는 이 세계와 불화하는, 혹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 실현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가능성의 공간으로 열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 세계 또한 존재들이 사랑을 꿈꾸고 그를 실행하는 감각의 세계로서 또한 가능한 세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그래서 의 도시로부터 이 세계로의 귀환은 커피숍 그녀의 불안이 사라지는 그날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배려로서의 또 다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기대를 하게한다. 만일 도시의 벽이 제목처럼 불확실한 것이라면, 그 어떤 높은 벽도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우리들 마음의 단단한 벽의 그 폐쇄적이고 인위적 장벽을 허물거나 통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도시의 벽이란 영혼이 앓는 역병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들의 마음이나 사회는 모두 그 자체로 굳건하고 완결성을 지향하는 견고한 폐쇄적 체계에 대한 이끌림이 있다.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유해한 침범을 차단할 수 있는, 그러나 이런 체계는 그 울타리 속 존재들의 자생적 이탈에 대한 불안, 벽의 불완전성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을 단속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와 이 세계가 쌓아 올린 벽은 불완전성을 이미 배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우리 개인들과 사회는 이러한 벽을 수시로 둘러쌓곤 한다. 전염병으로부터, 나와 다른 이질성의 그 무엇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고, 내부의 순결성을 주장하려 하지만, 그 견고하게 둘러친 인위적 벽의 균형은 항상 그 안정성을 잃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네 마음속 벽의 존재와 부재는 우리 스스로에 달려있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불확실한 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돌아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심리적 경계로서 유연한 무엇이 되어야 함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마구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견고하지만 통과 가능한 삶의 선택지인 열린 도시의 벽으로서. 사랑과 믿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도시로서. 아마 이로써 하루키 월드의 그 닫힌 컬트의 세계는 이 세계에 활짝 열린 또 하나의 가능한 세계가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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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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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 세계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수시로 망각하고 동료 인간을 무심히 타자화(他者化)한다. 그리곤 그 타자들을 마치 인격 없는 비인간의 망령된 기표로 명명하곤 한다. 통계화된 수치로, 생존자로, 증언자라 부르며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자로 구분하거나, 거기에 온갖 형용사로 수식하여 신성한 무엇으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하며, 관음증적 호기심의 충족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들만은 짐짓 대단한 연민을 지닌 존재라도 되는 양 형식화된 애도의 흉내를 내거나, 높은 도덕성을 과시하는 언어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5.18 광주나 제주 4.3사건의 희생자의 추도와 같은 아픈 역사의 환기에 있어서조차 이러한 양상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출현하여 고인과 그 유족들을 모욕하거나, 어설픈 연민에 동참했다는 거짓 위안의 도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할 것들이지만, 어떤 이름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이러한 반역사적 돌발 사건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실로 조심스럽고 진중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소설이나 여타 글이 이들을 소재로 삼을 때, 자칫 사건을 하나의 지식이나 사회적 방편의 사례를 위한 수단화하여 망각이나 주류사회의 동일성의 관념으로 통일하거나하여 사회 내부의 도덕적 변화 동력을 훼손할 수도 있다. 예술 또는 학문이거나 정책이거나 그 무슨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그것이 대상 사건 관련자들의 인간 조건을 도외시하는 것일 때, 우리는 우리들이 인간성이라 부르는 것에 의심을 초래하게 된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불리는 신시아 오직’(Cynthia Ozick;1928~ )로사, 두 편의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악행이 저질러지는 공간에 있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장황한 사설을 앞세웠다. 이 소설 속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히틀러’, ‘폭력’, ‘유대인 학살과 같은 단어를 발견할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상황의 간결하고 농축된 언어만으로 그 참담함과 사라진 인간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지워지고 숨겨진 것들의 역사화를 둘러싼 그 어떤 상기(想起)도 이 작품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

 


단편 (The shawl)

 

스텔라는 추웠다. 뼛속까지 추웠다. 지옥인가 싶은 추위였다. 그들은 함께 걷고 있었다. 로사는 젖가슴 사이 숄에 둘둘 싸인 마그다를 웅크려 안고 있었다.” -11

 

소설의 첫 문단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드러나 있으며,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짐작이 가능한 문장들이다. 이 소설은 무척 짧다. 이 첫 문단처럼 압축된 언어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장편소설을 능가하는 이야기와 의미를 품고 있다.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의 강렬함은 가히 압도적이다. 로사는 아기 마그다의 엄마이고 조카인 스텔라는 열다섯 소녀다. 그들은 사흘 밤낮을 굶주린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아기는 로사의 숄을 요람삼아 그 속에서 이미 메마른 젖꼭지를 빨고 있다. 이미 말라버린 로사의 젖꼭지에서는 젖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고, 죽은화산처럼 싸늘한 구멍 뿐이다.

 

마그다는 이제 숄 모서리를 대신 붙잡고 빨아댄다. 리넨 젖이었다. 마그다에게 숄은 안전한 둥지이고 작은 집이며, 양분인 마법의 숄이 되었다. 로사는 그렇게 아기를 숄에 담아 가슴에 숨긴 채 수용소에 들어간다. 밀집된 지옥같은 수용소는 너무 춥다. 스텔라는 너무 추워 숄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감싼다. 막사 밖 광장 점호 구역으로 뛰어나간 어느 날, 숄을 감싸 벽 뒤에 숨겨 세워두면 소리없이 숄 모퉁이를 빨고 있던 마그다가 점호구역의 햇빛 속에서 몸을 흔들며 움마아--를 부르짖고 있다. 들키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로사는 주저하다 막사로 뛰어들어 숄을 찾아내지만 이미 늦었다. 마그다는 누군가의 어깨위에 들려 저 멀리 가고 있다. 이윽고 마그다는 전기 철책위로 던져진다. 로사는 뛰어가 아기를 안아들어야 하지만 그들이 총을 쏠까봐 감히 달려가지 못한다.

 

그녀의 뼈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늑대의 울부짖음을 토해냈다가는 그들이 총을 쏠 테니까, 로사는 마그다의 숄을 쥐고 입에 쑤셔넣는다. 울부짖음을 삼키게 될 때까지. 이 참혹한 광경이 소설이라는 예술적 장치에 의해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 이 관능적 장면을 단지 이야기의 재미로 소비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작가의 경고였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렇게 인간존엄과 생명윤리가 부정되고 수시로 파괴되곤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를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우리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구하는, 그래서 우리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이야기들을 멈 출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로사

 

의 속편이 랄 수 있겠다. 자신의 아기, 마그다의 죽음에 달려가지 못했던, 어떠한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어머니, 로사는 해방되어 미국으로 조카 스텔라와 건너왔다. 시간적 배경은 30년이 지난 어느 시점인 듯하다. 스텔라가 마흔 아홉이고, 로사의 말로 자신의 나이는 쉰여덟이라는 말로 추정하면 대략 그럴 것이다. 로사는 꾸려가던 가게를 자기 손으로 때려 부수고 가게를 접었다. 그리고는 뉴욕을 떠나 태양에 튀겨져 껍데기처럼 살아가는 노인들이 득실거리는 마이애미의 컴컴한 구멍이나 다름없는 방에서 살고 있다.

 

로사는 과거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더 많은 최악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텔라는 고모인 로사에게 이제 그만 과거를 잊을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삶을 찾아야 한다고. 더 이상 마그다의 강보, 마그다의 수의, 일어버린 아기의 거룩한 향기, 살해당한 아기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리는 일을 멈추라고.

 

그러나 로사는 스텔라를 심장이 없는 죽음의 천사,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환자라 부른다. 로사는 이 세계가 진실을 도둑질하고, 거짓말에 보상을 주는 천박하고 혐오스런 곳으로만 보인다. 과거를 모두 두려워하고 예전 존재의 모든 흔적을 모욕으로 아는 스텔라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로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감금, 노출, 영양실조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된 환자이며, 인도주의 맥락에서 수집하는 생존자 데이터이고, 억눌린 활기를 가진 조사 대상자일 뿐이다. 로사는 이에 대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흥분”, “평범한 무리와 따로 셈해지는 존재, 더구나 한 여성으로 보지 않고 생존자라 부르는 비인간화를 비난한다. 누가 이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같은 단어를!”

 

로사는 죽은 아기 마그다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그녀만의 애도 방식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마그다에게 보내는 두 편지가 기록되고 있는데, 이 편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인 친절한 노신사의 자기와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를 향한 노력과 함께 마그다를 그녀의 세계로부터 떠나보내는 과정으로, 로사가 결코 세계를 비난하기만 하는 인간이 아님을 발견케 한다. 오늘 우리들은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한 영역에 대해 알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안주에서 결코 밖을, 가려진 곳을 보려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순수성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로사에게 푹 빠져 읽었다.

 

우월한 위치에 선 방관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들은 빈번하게 터무니없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무례하고 천박한 말들로 존재를 무시하며, 잔인성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신시아 오직의 이 소설들을 지나치게 재미있게 몰입하여 읽었는데, 어쩌면 작가의 예술적 역량의 탁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겁기만 한 의제를 가볍게 조탁해낸 작가의 솜씨에 빠져든 것은 결단코 무지의 연민 때문은 아니라고 변명하련다. 내겐 새로운 작가의 발견이고 입문이다. 이 대가의 황홀한 픽션들이 거듭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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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5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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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끝나버리면 생의 갈등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느끼며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 안과 겉,긍정과 부정의 사이, 책세상, 200912, 개정15, 52


소설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은 카뮈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이방인에 앞서 써진, 작가가 생전에 결코 발표하지 않으려했던 작품이다. 구성의 미숙함과 산만하게 열거된 에피소드들, 한 청년의 방황과 일상의 실체가 그대로 투영된 글이기에 전기적 이해에 귀중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내적 고백에 가까운 이 글은 그대로 묻어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의 그 무한한 호기심이 작가의 사후 10년이 지나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문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란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의지보다 과연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무튼 이 작품은 이러한 상념 속에서 읽게 되었다.

 

모두(冒頭)에 카뮈의 첫 출간작인 에세이 안과 겉의 한 문단을 인용한 것은 이 소설이 1937년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글이기도 하거니와, 주제의 동일성 때문이다.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입니다.”라는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전하는 한 문장이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을 완수한 죽음, 그것을 명징하게 의식하며 죽음에 이르는 것이 곧 행복한 죽음에 대한 내 조악한 이해가 될 것 같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자연적인 죽음의식적인 죽음이라는 부제가 달려있고, 읽어나가며 이 제목들이 아주 역설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은 메르소가 하반신을 잃고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그뢰스란 인물을 살해한 그날의 행위와 그에 이르는 두 인물의 대화와 회상들이다. 삶의 의지와 행복의 의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세계와의 합일, 인간들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는, 추구되는 행복한 죽음의 완성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있는 인물에서 오히려 나는 카뮈의 현실, 스물다섯 무렵의 프랑스 식민지 지중해 연안 알제의 청년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그의 현실 경험 속 인물들이 역할을 달리하여 등장하고, 그의 일기와 작가노트에 기록되었던 실제의 역사가 도처에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며 달리고 있다. 그의 기억, 그의 삶의 실체를 잡아매고 있던 어린 시절, 리옹가()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벨쿠르에서의 지독히 가난한 냄새에 대한 애착, 적어도 자신과 접할 수 있었던 그 너저분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대결의 슬픔과 회한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신의 발견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정경들이 있으며, 프라하 골목길에서 그의 마음속에 잠겨있던 모든 고통의 힘을 깨어나게 했던 냄새의 정체, 식초에 절인 오이가 불러내는 어머니와 둘만이 느꼈던 광대한 기억이 있고, 어머니의 침묵, 그 기이한 어머니의 무관심!에 깃들어있는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의 의미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라고 메르소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명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모든 것은 단순함이라는 명징성임을 확신한다. 그 명징성과 단순성은 사형 받은 자를 가리켜 말할 때,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 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는 불분명한 말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가 되어야 함이라 말하듯, 그는 세상에는 자기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그의 생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치밀한 의지와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운명을 마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내 흥미를 끄는 경험은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되어가는 경험들이거든요.”라고, 의사 베르나르에게 재단해 놓은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급기야   한 인간의 문명이란 열정적으로 걸머지는 경우에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죠. 한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흥미진진한 운명이란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이죠.”라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무언가 훅 하고 명치를 들이미는 당혹감을 느꼈다.

 


메르소가 살해하게 되는 자그뢰스는 메르소가 사귀고 있는 마르트의 한때의 연인이었기에 만나게 된 인물이다. 메르소는 마르트와 영화 관람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메르소는 마르트의 분방한 남자관계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며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는 불쾌한 망상에서 문득 깨어나 스크린 속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고요한 가운데 오직 바퀴 하나만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본다. 고집스럽게 허전하면서 사나운 마음속에서 생긴 수치와 모욕감을 함께 이끌고 돌았다고 심정을 묘사한다. 이 문장을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과 연결 짓게 되면, 카뮈가 그의 문학적, 정치적 반대진영에 의해 무참한 시련에 놓여있던 고뇌와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왠지 우연한 불운의 사건으로만 보여지지 않게 된다. 자신의 작품 집필 순서나 체계는 물론, 행복함이라는 생의 완수를 끝낸 한 인간의 의지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2부 의식적인 죽음은 자그뢰스의 살해와 관념적인 연결고리는 맺을 수 있을지언정, 긴밀한 연속선상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구성상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 그의(카뮈) 에세이 결혼을 구성하는 제밀라의 바람이나 사막등에서 느껴지던 고독과 운명의 정념들, 대지와 인간에 공통된 어떤 울림들이 소설적 구성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제밀라의 바람에서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쓰고 있다.

 

내팽개쳐진 상태로 고독과 마주 대하고 있자니 불쾌한 감미로움이 입 안에 고였다.”라고 소설의 주인공 메르소가 말하듯, 프라하의 골목길을 걷고, 알제의 언덕 꼭대기에 매달린 듯 있던 세 여학생의 집에서의 일상이나, 슈누아에서 마주하는 고독한 삶에서 길어올리는 것은, 당시 카뮈의 경험 세계와 거의 동일한 모습들이다. 가난과 사랑, 여자와 꽃과 미소에 대한 욕망, 이러한 것들은 그의 성장을 이루는 빈곤의 장소, 즉 가장 혐오스러운 세상과 끊을 수 없는 유대의 긍정이며, 바로 그러한 삶과 자신이 공범자임을 소리쳐 말하는 충동으로 터져 나온다.

 

그는 자그뢰스의 살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마침내 자신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인간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 메르소는 바다에 뛰어들어 비겁해지지 않은 채 자신과 일 대 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보는 실행에 착수한다. 거기에는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라고 되뇐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은 세계의 진실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 소설은 청년 카뮈가  문학예술 행로의 설계를 마쳤음에 대한 자신을 향한 선언이 아니었을까? 가난과 절망, 자신의 병(결핵)이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삶의 방해에 대해 끝없이 반항하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반항을 형성하는 것들이 바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벨쿠르의 그 어두운 방에서의 절망적이고 슬픈 기억들에 대한 사랑이고, 여인들과 친구들, 그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이후 발표되는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소설들이 어떤 단계를, 방향을 내딛게 될 지에 대한 예술적 지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그 무관심과 단순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한 인간 삶의 구체적 실체, 즉 인간적 숨결만을 묵묵히 추구하며, 기한이 정해진 미래라는 부조리는 단지 관념 덩어리로서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페스트의 리외에 가 닿는다.

 

메르소는 말한다. 어떠한 정열이 온통 나를 흥분케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 지금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괴로워하는 것, 그게 바로 산다는 겁니다. 투명해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라고, 아마 이때 이미 반항 상태라는 삶의 여정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카뮈의 문학 세계를 거니는데 이 작품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이해의 토대를 얻게 되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 안과 겉책세상, 200912, 개정15, 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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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이 소설을 단순 명쾌하게 읽는 법?

 

삶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이 여덟 시간의 사무실 근무가 그걸 못하게 막아요. 메르소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58


다만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삶을 허비해요. 돈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말예요. 바로 이게 내 관심을 끌었던 유일한 문제였습니다.” - 61,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하는 말

 

아마 메르소와 자그뢰스가 나눈 위의 두 대화 문장에 소설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될까? 메르소는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자그뢰스의 지적에 따라 그를 살해함으로써 자그뢰스가 모아 둔 돈 200만 프랑을 지니게 된다


"그 이튿날, 메르소는 자그뢰스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74

 

메르소는 존재적 무용함인 여덟 시간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후 중부 유럽의 여행과 알제로부터 떨어진 교외지역인 슈누아에서 고독이라는 시간을 만끽한다. 바다에서의 수영, 태양과 꽃과 여자들, 완벽한 시간의 누림, 인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의 완성, 삶의 완성을 이룬 자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다? 라는 것.

 

사실 이러한 도식적인 해석으로 읽게 되면 물론 단순 명쾌함이 있지만, 과연 이 소설을 제목에 매여 읽을 필요가 있을까싶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이 자신의 삶과 세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내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때 더 풍부한 의미들로 살아 날 것 같다. 작가의 문학 여정이 시발점에 놓이기까지의 탐색,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문학적 청사진, 작가 경험의 실체와 그것의 문학적 연결 고리들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훨씬 쏠쏠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특히 이방인의 뫼르소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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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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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   - 120쪽에서

  

머릿속에는 온갖 지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실천하고, 삶의 실천적 의지나 지혜로 실행하는 데에는 미숙하거나 좀처럼 삶의 일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더구나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나 상실의 슬픔, 이유를 딱히 규명하기 어려운 공허나 우울감에 휩싸일 때면 이성의 작동이 멈추기 일쑤이다. 결코 앎이 삶의 지혜로 전용되지 않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때면 내 마음을 마음껏 토로하고 그것을 묵묵히 공감하며 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또한 따뜻한 포옹이 간절해진다.

 


이 책에 손이 가 닿은 것은 누군가의 감정의 영역에서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막다른 길에 서있는 듯한 답답함과 이젠 그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도주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이다. 책은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내내 말없이 경청해주고 있는 듯, 시인과 그의 경험 속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지막하게 흐르며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토닥인다.

 

우리들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얼마나 섣불리 예단하고, 마치 다 안다는 듯 자신이 겪은 사례를 빌어 일반화하고, 공허한 말을 건네곤 하는가. 시인은 상처는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이며, 영혼의 일이기에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어야 함을 안다. 섣부른 아픔의 일반화된 말의 진부함이 아닌,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거기 함께 있어주는 일로서 곁에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시인의 지적처럼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어져 다른 모습들을 나로부터 제외시켜버린 에고의 고집과 자아집착" 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인용하여 전달하는 13세기 수피파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구절은 이처럼 삶의 바깥쪽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 채 꽃이 피어나지 않는 이유를 외부 세계에서 찾으려 한 내게 빛과 같은 깨우침이 되었다.

 

단단한 봄이 어떻게

정원을 만드는가.

흙이 되라, 부서져라.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다.

.....[後略]......

 

한 가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밭에서 그 무엇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부서져야 한다. 산산이 부서져 수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날 수 있는 흙이 되어야 함을. 이렇게 한 가지에 붙들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삶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마치 삶의 시간이 무한하다는 듯 메여있었으니 기쁨도 사랑도 잊어버린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유한하다는 지각에서 시작된다. [...]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86)”  유한성과 결여가 바로 지금의 실존에 풍요한 감각을 준다는 이 뻔한 지혜가 잊고 있었던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이 책의 많은 번뜩이는 지혜의 문장들은 새로워서 라기보다는 정말 우리네 감정의 정곡 언저리를 생생하게 들춰내어 그 바닥의 정서가 체험할 수 있는 영혼에 길을 비추어주기에 고마운 생의 선물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 속에서 요즘 거듭 마주하게 되는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시인은 인도북부 마나리에서 출발해 라다크의 라는 소도시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졌던 축복의 순간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아찔한 4,000미터 고산지대 로탕패스(시체가 쌓인 고개라는 뜻)를 지나 5,300미터 타그랑라의 황량한 어디쯤 차를 멈추고 고개를 처 들었을 때, 존재가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너무 놀라 넋을 잃은 한 인간의 형용할 수 없는 환희를 전하고 있다. 내가 열리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시인은 이때 명백한 이것을 여태 보지 못하고 살았음에 후회와 다행의 감정을 오간다. 그래 나를 위한 로드무비를 찍는 여정에 나서 보아야 할 테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 어떤 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자신에 대한 절망 없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도 없다. 결함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이다. (204)이 세계 혹은 자아와의 불화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기꺼이 그 고통을 단지 생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존적 문제로 경청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을 잃어버린 한 소녀의 영혼을 돕기 위해 허구의 생생한 편지를 지어냈던 카프카의 작고 조용한 도움처럼, 이 책은 슬퍼하는 영혼들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온기를 전해준다. 절벽으로 밀어줘서 날 수 있었다는 시인이 절실하게 갈구하던 그 어느 날의 기록에서 조금은 더 시간을 보냈다.

 

아마 내가 회피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처절하게 나를 밀어 넣어야 할 진실이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 구절처럼 다친 새처럼 웅크린모든 이에게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손을 잡아주기 위해 그의 손을 내민다. 금 가고 무시당해 숨겨진 자아를 지닌 무수히 많은 이들에 기쁨을 위한 손을 내밀어준다. 그래 인생극장 특별석으로 초대하는 42편의 산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자주 길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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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과 구경꾼 -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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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반 학문을 비롯한 이론들은 명석판명(明晳判明)한 개념을 추구해 온 서구의 근,현대 사상적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은폐되어있거나 말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거나, 또는 말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애쓰는 사유를 더 좋아한다. 때문에 퀴퀴한 지하 창고에 잠들고 있는 오랜 문서고를 들춰내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발굴해내고 연결하여 알지 못했던 진실을 길어 올리는 작업들의 노고에 귀 기울이고 찬탄하곤 했다. 사실 내 시선이 좁은 까닭도 있지만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과 시선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로 은유라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 또는 말 할 수 있는 개념이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언어기술, 즉 비-개념을 해독하는 방법을 통해 일의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언어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이 부딪치는 불편함의 대안으로 은유를 우리들 앎의 지평 속으로 끼워 넣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 책은 은유를 개념형성을 위한 보조적 기여도구로만 인식하지 않고, 우리들 생활세계 전반을 검토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아, 세계에서 은폐된 채 실존하는 실제를 건져내 세계와 역사를, 인간의 윤리 인식과 지성의 변천을 드러내고 입증해 보인다. 아마 지하에 숨기고 감춰 놓은 것들이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리라는 믿음일 것이다.

 

이 시대의 거실에 진열된 앎이란 것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어 사유와 정치에서 무수한 동굴의 영역으로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감춰진 것과 은폐된 것, 연기된 것을 밝혀 움켜쥐려는 이 비-개념의 탐구는 우리들이 지각하지 못했음에도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버마스, 울리히 벡과 함께 20세기 지성계의 3대 문제작의 저술자인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이 국내 번역본에 없다는 것도 한국사회의 지성이란 것이 얼마나 편향적인가의 반증이라면 왜곡된 판단이 될까? 아무튼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소품적 성격의 이 철학 에세이라도 접할 수 있게 됨에 옮긴이와 출판사에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한다.

 

책은 독일어 초판본 소개 글로부터 시작되는데,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 왔다며, 이러한 작업은 위대한 은유와 비유 속에서 압축되고, 변형되고, 정교화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델 중에 인생은 항해다.”라는 은유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서 현실화의 역사를 추적하고, 세계와 인간이 맺은 관계의 변화를 식별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책의 끝에 부록으로 수록된 비개념성의 이론을 위한 전망을 본문 읽기에 앞서 읽는다면 책 전반의 정신을 헤아리기 위한 은유학, 또는 비-개념성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나는 본문을 읽고 이 부록을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때문에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됨으로써 다시 본문을 한 번 더 읽는 수고를 해야 했다.)

 

책의 제목으로 짐작되는 것이지만 이 사유의 시발점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해2서시의 다음과 같은 시작 구절이다. 즉 이 철학에세이는 루크레티우스 수용사(受用史)’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 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오늘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이 구경꾼의 공감능력 없음과 그 관음증적 쾌락에 몸서리치는 혐오의 감정이 앞 설 것이다. 이 고대 원자론자인 시인이 난파를 보고는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는 사유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사실 그의 쾌락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세계의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시대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지식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또 다른 세계인식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살던 시대는 바다란 인간의 계획이 실행되는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 주어진 경계라는 것과, 육지와 달리 규정 가능한 힘의 권역을 집요하게 벗어나는 마력들과 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는 점에 있다. 바다로 나가는 인간에겐 의심의 눈초리가 주어졌고, 난파란 그 응당한 처벌이었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를 21세기 도덕의 잣대로 해석하면 당대의 인간과 세계관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항해와 난파, 그리고 구경꾼이라는 이 은유는 16세기 몽테뉴에 의해 일종의 보신주의 철학으로 변모하는데, 단단한 대지에 난파라는 몰락[침몰]과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에 만족하며 자기 보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잡히는 일에 집착한다. [...]

그리고 항구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 에세2교만에 관하여

 

그러나 개인의 난파와 거리를 지킴으로서 개인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만일 국가나 세계적 사태의 몰락의 경우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당신의 도덕은 지나치게 자족적 도덕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우리는 약삭빠른 몽테뉴가 침몰에 몸 맡길 준비가 되어있을 조건을 까다롭게 높여감으로써 안전한 구경꾼의 입장으로 끊임없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블루멘베르크는 구경꾼의 운명에 만족하는, 그리고 비참한 사건을 보고 고작 자기 인생의 고통을 환기하며 쾌감을 느끼는 몽테뉴에게 쓴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17~18세기의 괴테라고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할 줄 알았던 이 역사철학이 부재했던 인간은 1806년 예나에서 프랑스에 패배하자 많은 독일 지식인들과 민중은 고통스러워했다. 예나대학교 역사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루덴1847삶의 회고라는 책에서 괴테와 이 전쟁 패배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그는 괴테에게 솔직한 심정을 물었으며, 괴테는 고대의 구경꾼을 넌지시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대화록만이 그의 인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철면피한 괴테의 자기 미화는 수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 한 구절이면 족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불평할 게 뭐 있겠나, [...] 단단한 바위 위에 서서 사납게 놀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난파자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밀려오는 거친 파도에 휩쓸릴 일도 없는 사람 같은 심경이네. [...] 옛 성현 말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쾌감을 준다고 하더구만...” 


이 대화에 동석했던 크네벨이 루크레티우스 입니다!”라고 끼어든 것은 제3의 입증인이 있는 진실임을 의미한다.

 

니체도 후일 선악의 저편에서 괴테에 대해 그는 평생 미묘한 침묵을 지켜왔다.”고 쓸 정도였으니 이것이 당대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던 대가 반열에 오른 인물의 인식수준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루크레티우스의 은유를 어떻게 수용했을까? 그는 바다와 난파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로서의 항구에 주목했다. 낡고 확고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는 난파자의 행복을 지복의 경지라 부른다. 이제 대지는 구경꾼의 장소가 아니라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의 장소가 된 것이다. 감행한 모험의 보상으로서 신세계를 암시하는 항해의 은유를 확대한 것이다.

 

사실 니체의 철학을 자기극복의 초인성이라 예찬하지만 난파조차 새 세계 발견을 위한 모험의 불가결한 측면으로 이해하였듯이, 후일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비롯된 나치에의 이념적 기여를 니체 또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세계의 모험들, 식민지 건설, 심지어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위대한 헌신에 작은 기여라도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숙고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의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는 이제 자연을 길들이고 의인화해 자연 속에 반영되는 주체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항구가 보였다. 희망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여, 안녕!(즐거운 학문)”

 

이러한 인식은 갑자기 세기를 건너뛰어 니체에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심취했던 과학기술과 우주적 이국취미에 의해 최초로 산출되었는데, 퐁트넬과 볼테르의 소설들에 나타난 호기심이라는 지식욕과 심미적 태도가 루크레티우스의 난파라는 은유의 독창적 변종의 출현을 보여준다. , 어떤 큰 난파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어 그들의 특이한 모습을 편하게 이 두 눈으로 얼마나 보고 싶은지요!(여러개의 세계에 대한 대담,퐁트넬)”라든가, 돛에 불어 닥치는 바람이 때로는 배를 전복시키는 일도 있지만 배가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자디그;Zadig,볼테르)”, 다시말해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위험하며, 모든 것이 불가결하다는 말이다. 난파란 추진력과 파괴의 위험이라는 이율배반의 증상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얼마나 급하게 변한 것인지를 우리는 이를 통해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고대와 중세의 구경꾼의 태도였던 부동의 관조라는 정신은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론 난파자의 대안으로서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인생에서 행복을 얻을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고의 변화인가! 급기야 근대 이성주의는 구경꾼의 위치를 지워버린다. 쇼펜하우어는 난파자와 구경꾼의 위치에서 두 인간 주체의 동일성을 해명하기에 이르는데, 인간 본인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다. 인간은 항상 현실과의 갈등에 휘말리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도달한다면 삶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 할 수 있게 된다.”,

 

해서 이 인식 주체는 모든 욕망과 궁핍을 떠난 채 태연히 이념을 포착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의식은 니체의 그것과 유사한 냄새가 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세계를 저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 이러한 오만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역사철학자 부르크하르트에 이르면 그의 저술 세계사의 고찰, 역사적 위기에서 폭풍이 계속 우리도 앞으로 밀고나가는 것을 깨닫고 있다. 파괴하고 동요시키고 난파를 야기하면서...”라면서, 폭풍우에 의한 파도 자체가 인간과 인간의 행위임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그것의 추진력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미 인간은 구경꾼이 되는 것도, 역사가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이제 19세기 과학의 세기는 기항할 항구(대지)도 구경꾼도 없는 바다에 떠도는,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임을 문득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극단적인 배의 변종이 출현한다. 도달 가능한 육지도 없으니 바다 위를 떠도는 배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선조들은 떠다니는 통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계속 개선해 오늘날 편안한 배가 되어 인간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시금 시작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편안한 배의 은유로의 전환은 인간을 자연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험이 불가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러한 변종 은유는 역설적으로 편한 배에서 뛰어내려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용기를 전파하려는 구경꾼을 자극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할 용기있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 널빤지와 통나무를 어디서 구한다?

 

이 거대한 지성사, -개념의 은유지대를 거닐다보면 바다와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가 실로 엄청난 인간 인식 능력과 그것들에 내재된 윤리의식, 세계관, 삶의 이해방식 등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심미적으로, 때론 윤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구경꾼에 대해서, 난파에 대해서 저마다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유의 풍경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난파자를 바라보는 구경꾼의 시선은 이미 한국사회의 병리적 실상 때문에 익숙한 재료이다. 또한 난파의 위험이라는 상시적 재난에 대한 사회와 제도의 미성숙은 위험사회를 교묘하게 은폐하기에 바쁜 몸짓으로만 이어지고, 난파자라는 타인의 고통을 향해서는 오히려 가학적 발언과 함께 소금을 뿌려대는 반사회적 고질병이 수구청치집단에 의해 난무하는 현실이다. 이 비-개념의 철학에세이를 읽다보면 매 문장마다 현실 생활세계의 현안들이 겹쳐 떠오르며, 무수한 말이 되어 둥둥 떠다닐 지경이다.

 

아마 우리들의 정신적 초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최고의 지성사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에서 난파는 무엇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지, 혹은 나와 이웃이 이미 난바다에 떠 있는 이미 승선한 동료는 아닌지, 그리고 나는 괴테나, 몽테뉴 같은 방관자이거나 자기 보신적 위선자는 아닌지, 나아가 난파자를 보고 루크레티우스의 관조적 즐거움이 아니라 낄낄거리며 남의 고통을 즐기는 반사회적인 정신 파탄자는 아닌지,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은유의 세계, -개념의 이론을 토대로 한 이 해박하고 재치 넘치는 글에 매혹되지 않는 이가 없을 듯하다. 블루멘베르크의 주저인 근대의 정당성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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