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전집은 카프카의 일기, 편지, 소설을 포함한 산문들에서 시적(詩的)116편을 떼어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자유로운 정신적 흐름의 산물인 드로잉 스케치 작품들이 곁들여져 카프카 문학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세계와의 친밀성을 더해준다. 카프카 전기를 쓴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스케치는 화가로서의 능력과 독창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에 적합했다고 말하면서 그 누구도 스케치 환상과 서사 환상의 유사점을 추적하려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시집의 첫 지면과 마주하게 되는 시(詩)는 열네 살 카프카가 쓴 조금은 통속적 분위기의 시구다.

 

오고

이별이 있다.

그것도 자주 - 재회는 없다. (1897.12.20.)

 

단어 또는 문구 한 구절 마다 행을 달리함으로써 우리 사고의 지연을 요구하여 대립된 이미지의 묘한 통합을 이루게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행에 이르러 어떤 숙명의 작용을 생각하게 한다. 이 어린 시인의 감성에 이미 삶과 죽음의 기묘한 어울림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하다.


이 드로잉에는 청원자와 지체 높은 후원자라는 설명이 붙어있는데, 각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한 모자를 쓴 그들의 작은 얼굴표정과 표면화된 얼굴의 이중성이 대비된 희화성을 읽을 수 있다.


나는 12번째 시를 한동안 응시했는데, 소설 소송요제프 K’변신그레고르 잠자의 마음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며 인간으로서의 막연한 공감을 하게 된 작품이다.

 

침대에서,

무릎을 약간 세우고,

주름진 이불을 덮고 누운 채,

----(중략)----

군중과 멀리 떨어져서,

군중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먼 관계를 맺는다.

 

동화하려 하지만 불가능한, 또한 하나의 고정된 관념처럼 되어버린 유대인으로서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과 이 세계의 끈질긴 억견으로부터 고립된 한 인간의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는 애증의 도시인 프라하의 풍경을 묘사한 2번째에서 4번째에 이르는 시구는 그 처연함과 외로이 걷는 한 청년의 처진 어깨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 서늘하고 칙칙하다,

구름은 굳어 있다.

바람은 잡아당기는 밧줄이다.

사람들은 굳어 있다.

---(후략)--- (1903.11.8.)

 

그런데 카프카의 음울한 사변과 다른 조금은 명랑해보이기까지 해서 감긴 눈을 뜨이게 하는 시가 있다.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굳은 마음을 열어 폴짝폴짝 뛰는 경쾌함이 미소짓게 한다.

 

작은 영혼이여,

그대는

---(중략)---

반짝이는 풀밭에서,

두 발을

쳐드는 구나. (1909. 9)


단편소설 시골 의사가 출처인 듯한 작품인데, 우리들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합창, 인물들이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인식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어 본 독자들은 이 시를 대하고 친밀함에 반갑기도 할 것이다.

 

그의 옷을 벗겨라, 그러면 그가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치료하지 않으면, 그를 죽여라!

그는 단지 의사일 뿐, 단지 의사일 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의 치료를 주저하는 시골의사를 향한 마을 주민들의 은근한 압력의 장면이 떠 오를 것이다. 기이한 관계역설을 일으키는  카프카스럽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하는 대표적 장면일 것 같다.

 

아마 다음의 시구는 단편 돌연한 출발이 그 출처일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그의 정체성을 묶어두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목표인 한 그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렇다네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1922.2)

 

옮긴이의 한 문장이 어쩌면 카프카 시문학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는 것 같다.  슬픈 미래와 전쟁에서  폐허 더미를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자신 안에 이 세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정직하고자 하는 절대적 요구에 의해, 혼돈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카프카의 내면은 가혹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두 권의 카프카 평전을 쓴 마르트 로베르는 세기 전환기인 19세기 말  이상(理想)의 몰락으로 인류의 지성들이 현기증 나는 심연과 마주했을 때 이를 메우고 진실을 열어 보이기 위해 이상의 대치물로 문학에 최고의 지위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있고서부터 신이 떠나고 없는 자리를 대신하게 된 신비와 맺어주는 능력을 시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접근 불가능한 경험 저편의 세계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 카프카 산문의 출현은 이러한 시의 신비와 경이의 교량기능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카프카의 시()전집 번역자인 편영수는 카프카에게는  시와 산문 사이의 과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카프카의 산문이 시에 가깝듯 카프카의 시는 산문에 가깝다.”,  산문에 근접할 때만 독창적이라 카프카의 시를 혹평한 집단을 향해 마르트 로베르의 시대정신을 품은 문학의 의미로서 카프카의 시를 대변한다.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카프카는  세계와 세계질서의 도래하는 파괴를 예감한 횔덜린을 잇는 파편적 글쓰기의 선구자라 이해하며, 이  파편(fragment)이 곧 카프카의 문체가 완성되는 유일한 형식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많은 문학이론가들이 앞서 이 파편의 축조물로서 카프카의 소설을 해독하고 있다, 파편인 실존의 폐허를 재료로 삼아 완성한 성(城)은 축조된 조각들 사이에 메워지지 않은 무수한 틈을 지니게 된다. 아마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미완성인 이 모순적 상황이 카프카의 시와 산문일 수밖에 없는 원인일 것이다.

 

책의 편집에 대한 작은 아쉬움의 변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수록된 시들은 카프카의 산문글 어느 것으로부터 분리된 글들이다. 즉 시들 중 많은 것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161224일자 일기라던가, 단편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그 출처를 밝혀 독자들의 읽기를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작품해설에서 몇 편에 대해서만 이를 표기하고 있기에 감상에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책의 흠결(欠缺)이다. 차후 개정을 하게 될 때 반영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이 시전집은 카프카는 시인일까? 라는 회의적 질문에 대한 당찬 도전 작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듯하다. 아마 카프카의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카프카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 통로가 되어 줄 터이다주목할 만한 시적 재능을 지닌 시인”,  카프카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은 산뜻한 봄기운을 알리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화창한 기운이 스러져가는, 그래서 이 음울한 어둠의 징후를 쓰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가 2024년 3월 최근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을 '민주화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국가'로 발표했듯, 지금의 한국 사회는 모든 민주주의 구성 요소들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다. 바로 정치검찰이 권력을 잡고 1년 6개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두 명의 하버드정치학 교수가 쓴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무너지는 민주주의의 파멸에 대한 경고와 위험 신호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의 패턴 사례를 통해 인지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신호를 우리들은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와 정치적 규범과 관습의 미흡함과 결여를 수정, 개혁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제도이긴 하지만, 입법과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三權分立)의 균형을 기조로 하여 국민의 자유, 평등, 공정, 인권, 국토수호 등의 가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들 삶의 균형을 지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골적인 독재로 민중을 탄압하던 시대는 가버리고, 공고한 민주주의의 뿌리가 이 땅에 깊숙이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환상임을, 결코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없이는 언제든 부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함을 이 저술을 통해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제도의 모델로서 역할을 해왔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토대부터 침몰하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독재와 전제적 정치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저자들은 이제 미국이라고 그동안 손가락질했던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와 동남아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헝가리, 터키, 폴란드 등 유럽 국가들처럼 극우 독재정권과 다른 예외지대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우선 대중 인식의 오만을, 그 착각을 깨우는데,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국민이 아니다.”라는 정의다. 대중은 너무 자주 조작된 여론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이며(대중의 우매성-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자 곤란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정당이 내세운 인물에 국민은 그저 투표할 뿐이고, 선출된 자는 자기 입맛대로 국가행정을 방해 없이 실행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의 각 정당별 대선 후보 지명의 과정을 복기해보라, 정치 야망에 눈이 먼 인간을 필터링 하는 것은 우선은 주류 정당의 역할이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핀란드를 포함한 서북유럽 선진국들의 정당은 경험없고, 권력 욕망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인 대중적 인기인이나 선동가가 주류 정치에 끼어드는 것을, 다시 말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잘 막아내는 정치적 문지기역할을 수행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무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정당의 이익을 초월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도덕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사회는 극단적(대개 극우)인물이 대중 인기에 영합하여 등장하려 할 때 기성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은 연합하여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으로부터 지켜낸다.

 

이는 사전에 독재자를 감별하는 뚜렷한 조짐을 알아차리는 규범과 규준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들은 반민주적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한 예일정치학 교수 후안 린츠의 미완성의 리트머스 테스트를 기반으로 독재자 감별 경고 신호를 적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둘째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셋째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넷째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중 한 항목만 충족하더라도 그 인물은 독재자라 정의하고 있다. 하버드와 예일대 정치학 교수라는 검증된 저술자들의 지적이다.

 

이러한 인물이 국가 정치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주요 정당의 문지기 역할, 즉 극단적 인물의 등장을 억제할 힘이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전제적 독재자로 인해 민주주의가 붕괴된 국가들은 한결같이 바로 이러한 문지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가 붕괴한 것은 정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극우, 친일과 같은 국익을 해치는 극단적 인물과 정당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며, 의회에서 소수 정당이 되기도 하는 것임에도, 한 때의 대중 여론에 편승한 인기인과 손잡아 선거의 우위를 잡으려는 유혹에 빠져, 독재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당은 당의 이익보다 민주주의 수호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대중인기에 영합한 인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당 문지기 역할 사례는 책 본문 참조), 나는 극우로 기운 작금의 여당 내 국회의원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지금도 진심으로 권력자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사실 극단주의적 선동가들은 답답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에게 신선한 자극, 마치 정의로운 인물처럼 비치기 일쑤다. 기성 정치에 대해 저열하고 혹독한 말을 마구 내뱉기에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또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언론기업들의 반복된 조작 선동은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낸다. 작금의 극우 황색지로 전락한 조중동을 비롯한 기득 집단은 자기 이익 말고는 민주주의나 국익에는 관심이 없기에 독재자도 선택한다. 이들은 국민의 오랜 분노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는 데 적극적이다. 대중은 대개 여기에 유혹되고, 종국에는 파괴된 민주주의 체계 속에서 신음과 고통을 껴안게 되는 것이 실상이다. 책은 특히 대통령제에서 문지기 역할에 대해 풍부한 연구사례들을 적시하고 있다.

 

트럼프를 사례로 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독재자 감별 신호 리트머스 테스트를 실행 본 결과, 네 항목 모두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2016년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례 없는 주장을 선거도 하기 전에 내놓음으로써, 부정 사례가 불가능한 미국의 선거 제도와 방식을 부정했다.

 

두 번째는 경쟁자인 상대의 정당성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인데, 트럼프는 힐러리를 범죄자, 파괴분자, 매국노, 국가안보 및 국민 삶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비난했다. 그는 힐러리를 구속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세 번째는 폭력의 조장과 용인인데,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고 은근히 독려했다. 옛 날 같았으면 너 같은 사람은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터졌을 거야.”, 네 번째는 경쟁자와 시민권을 억압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어떠한 이들에게나 권력을 이용하여 고통의 구덩이(지금 한국사회는 무차별 압수수색과 자의적 기소 남용)에 몰아넣는 것이다.

 

리트머스 시험지가 모두 붉게 그가 독재자임을 가리켰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어떤가? 아마 완벽하게 동일한 현상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 실태들의 적시를 위해 내 노고를 사용하는 것은 지양토록 하겠다. 어쨌든 책은 이렇게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신호를 적시하며,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의 침몰을 경고하는 징후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대중의 우매함이라는 민주주의의 약점은 그대로 발휘되어 대통령에 부적합한 인물이 선출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자를 선출한 나라들은 곧 전제주의적 독재국가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허무는 독재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 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붕괴된다고 한다. 책은 이들 독재자들이 한 국가를 끔찍한 지옥으로 몰아가는 단계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시작된다고 한다. 비판자를 적이나 체제 전복자,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며 도발적으로 비난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야당 대표를 범죄자라거나, 자신을 무능하거나 무도하다고 비판하는 언론인을 마구잡이로 압수, 수색, 기소하여 일상적 삶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여 인권을 말살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세력을 옹호하는 언론을 이용하여 이러한 거짓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고 주장하여 대중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여 탄압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곤 말을 넘어 행동으로 옮겨, 대중 간에 상호 공포와 적대감과 함께 불신을 부추기고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 민주주의는 본래 험난한 과정의 연속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사회란 결코 수직적이고 획일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서로 다른 견해와 욕구로 연결된 곳이 인간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운영한다는 것은 협상과 양보, 타협이 무엇보다 중요한 절차이고 규범이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다. 실제 이해관계가 다른 정당의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법제도의 차원을 초월한 민주주의 정치의 윤리 규범인 것이다. 경쟁자인 상대 정치인은 동료이다.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민주주의가 들어설 길은 차단되고 만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노정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윤리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핵심적인 기본 규범을 적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관용과 이해이고, 둘째는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절제의 원칙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연성(軟性) 가드레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작동하는 가의 여부가 파멸을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이 두 규범이 작동하지 않을 때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제아무리 공고하게 설계된 헌법도 허물어진다. 어떤 구기 경기에서 심판이 매수되고, 상대 팀 주전 선수를 뛰지 못하게 막고, 경기 규칙을 상대에게 불리하게 만들면 우리들은 그 시합을 불공정하고, 폭력이라 말하는 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심판의 매수란 검찰, 경찰, 법원, 감사원, 정보기구, 기타 감찰기구, 공정거래위, 국세청, 각종 규제기관 등 중립적 중재 기관들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독재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삼음으로써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며,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 또한 이 공적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 경쟁자를 탄압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의 정치권력은 애초에 이 심판 매수라는 가장 나쁜 위험을 안은 정치검찰에게 대권을 주었다는 점에 있다. 독재권력 자신이 심판인 것인데, 이는 이미 민주주의의 파괴에 대해 용인을 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재자는 이들 손에 넣은 무기를 이용하여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정적을 처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미 민주주의는 괴멸하고 있는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의 자의적이고 선택적 기소행위를 보라, 그리고 그 남용을 보라.)

 

독재 권력은 권력의 유지와 공고를 위해 규칙 바꾸기에 나서는데, 법률(법령 포함)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시행하거나, 입법기관인 의회가 결의한 일반 법률이나 특별법(특검안을 포함)을 거부함으로써 반대세력이나 자기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저항 세력을 약화하는 것이다. 또한 선거시스템이나 각종 국가 계획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기만 전략을 감행한다. 이렇게 획책하여 결정 시행하게 되면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 계획의 절차무시 임의 변경행위, 총선 선거공약으로 그린벨트의 무차별 해제 남발 등등)

 

독재자는 위기의 순간에 음모를 꾸미고, 정적으로부터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쌓는다.” - 4.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 123쪽에서

 

우리들의 눈앞에서 민주주의가 해체, 파괴되고 있는데,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자기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흐름이 자신의 삶의 이해관계에 밀고 들어 올 때 되어서야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다. 또 이들 독재자가 벌이는 한결같은 최악의 행위가 기술되고 있는데. 이들  독재자는 필연적으로 국가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외없이 독재자들은 경제 위기, 폭동, 전쟁의 위기와 같은 안보위협을 구실로 대중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사회적 공포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비난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정적의 힘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이러한 위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실제로 이들을 실행에 옮기다가 패망한 사례가 즐비하게 적시되고 있다. 독재자와 국가 위기가 결합할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 손상을 입으며, 국민은 끝없는 고통에 빠지게 된다.



총선을 앞둔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현 정권의 수장이란 자는 선거 부정 의혹이 있다고 역시 선거부정이 희박한 환경임에도 실시되지도 않은 선거에 문제를 제기한다. 트럼프와 지나치게 닮은꼴의 이 행위는 저자들이 독재행위로 지목한 가장 나쁜 행위의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야당 대표를 임기 시작부터 2년에 이르는 기간 내내 압수와 수색, 기소 등 인신의 압박을 가함으로써 구속 위협을 그치지 않고 있다. 정적 제거 목적임을 모른다는 국민이 있다면 아마 자신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 국회의원, 의사 등 자신의 심사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누구에게나 폭력적 행위를 가하는 것을 버젓이 용인하는 것도 빼닮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니까.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 5,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 131쪽에서

 

민주주의는 잘 설계된 헌법으로 보호할 수 있는가? 란 물음에 두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존경받는 법치국가들이 수없이 독재자에 의해 허물어졌음을 우리는 많은 사례로 접할 수 있다.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며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더구나 제정시기와 달리 현대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는 예측 불가능하다. 때문에 헌법조항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악용될 소지가 무진장하다. 이는 너무도 중요한 지적인데,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란 국민 대중과 정치인의 윤리적 역량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 널리 공유된,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으로서의 규칙인데, 이미 앞서 기술한 것처럼 상호관용과 자기 통제인 절제의 윤리다. 상호관용이란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적 집단 의지라 할 수 있다.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호 정당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파괴될 때, 즉 경쟁자를 압살할 적()으로 간주하게 될 때, 상호관용은 무너지고, 사회의 갈등은 골 깊은 분열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쏜살같이 실종된다.

 

둘째로 자기 통제 대통령제에서 가장 극명하게 절제를 잃게되는 중대한 윤리적 역량인데, 바로 이 때문에 검증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하는 정당의 문지기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상위 법률의 시행이 정치검찰의 입맛에 맞지 않자 하위 법령인 시행령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의회를 우회하는(즉 상위법을 위배하는) 위헌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남용하여 단 하나의 입법도 실행 될 수 없게 하여 다수당인 야당의 입법 기능을 괴멸시켜왔다. 의회가 승인(가결)한 모든 법안을 무효화해버리는 작태는 전형적 독재자의 행위임을 적시하고 있다, 특히 가장 나쁜 독재자의 행위로 사법부가 판결한 범죄자를 자기편이라 하여 바로 사면권을 행사하여 풀어주는 것인데, 이 사면권 남용의 행위는 대통령의 행정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초석인 삼권분립을 노골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반()민주주의적 행위이기 때문이며, 사회정의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파멸적인 비윤리적 행위인 까닭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민주정치의 핵심윤리인 가드레일이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판의 분열이 고착화되어 완전히 배타적인 진영이 되고 있다. 서로 공존이 불가능한 상호 고립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례는 이럴 때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집단이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망하고, 국가와 사회대중은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지면 권력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정당이 대권 후보자를 선정할 때 기성 정치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 정당의 선거 이익을 위해, 즉 수권정당으로 서기 위해 부적합한 후보를 영입하곤 그 자를 자신의 입맛대로 통제,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생각임이 입증되는데, 이렇게 추대된 자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정당은 물론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교훈은 주류 정당이 필터링 기능을 포기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파멸적 징후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수구정당인 공화당이나 한국의 극우화된 여당이나 모두 문지기 기능을 지니지 못함으로써 정당의 이익보다 고차원의 가치인 국가의 민주주의를 버렸다는 것에 있다. 책은 이러한 규범 파괴의 사례들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 민중들이 무엇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분별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불문율을 파괴한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다.”

-트럼프의 민주주의 파괴, 245쪽에서

 

이제 우리 사회의 정치국면에서 전환적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국회의원의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책의 8장에는 트럼프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 나갔는지에 대한 각종 민주주의 파괴 행위로 채워져 있다. 검찰 등 국가규제기관을 통한 비우호적 언론 압박하기에서부터, 자기 이익에 반하는 기업들과 언론사에 대한 막대한 세금의 부과는 물론 인신구속의 압박, 가장 비민주적이고 위헌적 처사였다고 지적되는 공정선거대통령자문위원회 설립을 통한 투표 억제의 시행을 통한 투표권 행사의 위축과 선거 전부터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상대 정당에 대한 윤리적 손상을 공공연히 도모하려 했으며, 전방위적인 중립기관들인 검찰, FBI, CIA, 대법원, 각종 규제기구인 심판을 매수, 협박함으로써 총체적이고 극단적으로 규범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선출된 대통령이 되면 정치 선진국들은 정당의 대권 후보자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국민의 대표가 됨으로써 중립적인 정치 행위자가 된다. 따라서 경쟁자를 정치의 동반자로 대우하고, 그 다른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 윤리의 두 축인 상호관용과 타자에 대한 절제와 인내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권력이 혹여 전제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선진 민주주주의 정치인들의 기초 덕목이고 불문율이다.

 

한편 빈틈이 드러난 권력 견제를 위한 법률 제도를 보완하여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독재자가 될 수 없는 강력한 견제와 감시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 지금 안하무인이며, 법 위의 황제인양 중립유지 의무인 대통령이 일상적 행정기구 의견 청취 행위라고 사전 선거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법 체제를 무시하고 있다. 이 모두 독재의 전형적 표시라고 두 저자는 입을 모은다. 선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는 것이고, 이는 곧 민주주의를 파괴하겠다는 의지의 다름 아닌 지극히 사악한 기만이 된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대중 인식에 있어 중요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독재자가 하는 불문율의 위반(파괴)이 계속되면 사회는 이 일탈의 범위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준을 하향 조정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정상으로 보였던 행위가 정상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기, 규범의 일탈, 반국가적(친일)행위, 경쟁자인 상대에 대한 일상적 모욕과 괴롭힘 등 이들 정치적 규범의 일탈에 대한 기준을 하향조정하게 됨으로써 독재자의 권력남용의 허용 기준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즉 간덩이가 붓는 다는 것이다.

 

간덩이가 부어올라 상대를 모욕하고 멸시하며 괴롭히는 데 더욱 그악스럽고 포악해지며, 자기 이익과 관련없는 국민다수는 언제든 멸시하고 무시해도 되는 종속된 개나 돼지로 취급하게 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민주주의 미래 시나리오 세 가지를 예시하며, 어떻게 손상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가장 가능성 높다는 우울한 시나리오인 뚜렷한 양극화와 규범 붕괴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배제하고 신속하게 회복되는 낙관적 형태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쨌거나 독재 정권의 정치, 경제 외교를 망라한 총체적 무능과 권력 남용, 법치의 파괴 등 실정을 묻고 지지를 철회하여 사임이나 탄핵을 통해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이번에도 주류 정당들이 부적합한 후보를 거르지 못할 경우 해당 정당에 대한 국민적 압박이 가해져야 한다. 국가적 손실이 얼마인가? 수치로 표시되지 않는 국가 위상의 추락과 국민의 도덕적, 지적 수준까지 한없이 낮추어버린 수치심까지 더하면 대체 이들에게 물려야할 죄과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고 말하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라고 한다. 그래, 민주주의란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이를 대체할 만한 체제를 우리 인류는 구상하지 못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이다. 이를 파괴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근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의무일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대상은 미국의 정치 현실이지만, 그들의 민주주의 헌법체계와 정당 정치는 오랜 갈등과 타협 속에서 안정을 만들어 온 유서깊은 체제이다. 그럼에도 유지해왔던 정당의 문지기 기능과 오랜 관습으로 정착되어 온 불문율인 정치의 핵심 윤리를 저버림으로써 부적합한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고, 한 순간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상황을 겪었다,

 

현재 미국의 수권정당인 민주당은 트럼프가 망가뜨린 민주주의 체계들의 복원에 고통을 겪고 있다. 아마 망가뜨리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복원하는 데는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이 모두가 국민의 몫이다. 우리 한국은 더 오랜 시간과 필요 없었을 재정 낭비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곤경의 시간을 어떻게 희망의 시간으로 돌릴 것인가라는 도전의 과제가 남았다. 어쩌면 이것은 비관적 미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기이한 경험을 우리들이 했다는 관점에서 전화위복의 낙관적 시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2018년 국역되어 출간된 이래 20241월, 18쇄에 이르렀다. 아마 시민 독자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이 저술이 어느만큼 해소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몰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요인들을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손상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보다 깊은 뿌리를 내리는데 작은 힘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하고 치밀하며 섬세한 사례들과 분석 내용을 모두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드르와 이폴리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10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치스러움이 내 시선을 동요케 하는구나, (...) 내가 정신을 잃었구나, (...).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내 마음이 내 손처럼 결백하면 좋으련만! (...)

내 손은 순진무결하나, 내 영혼은 오점이 있다!” - 13에서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작품인 장 라신의 비극을 읽게 된 이유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정치, 사회철학서인 수치심에 대한 비평적 저술을 통해서다. 아무튼 이 책은 내게 무진장한 정치적, 윤리적 영감을 주었으며, 그 진술을 위해 이용된 저작들은 마치 읽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어떤 의무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라신서문에서  여주인공(페드르;파이드라)의 충동은 자기 의지의 발로가 아니기에 죄의식의 순교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듯,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우리들은 자신이 했거나 방치한 행동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데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안에서 낯선 기괴함으로 끓어오르는 충동에 휩싸일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 작품은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다.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은폐되어야만 하는 욕망의 이야기다.   페드르(Phaedra*파이드라)는 사랑의 정념에 빠지기 쉬운 동시에 그 정념을 고백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이를 절대적인 도덕적 자질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럼으로써 이 끔찍한 정념을 자신이 지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과 맞바꿀 만큼 침묵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내적 혼란을 겪는 여인이다.

 

때문에 불온한 사랑의 정념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가혹할 만큼 억압하며, 박해한다. 그녀에게 이 엄청난 정념의 고통은  너무 생생한 나의 상처에는 곧 피가 흘렀어.”라고 말할 정도이며, 황폐해지고 약탈당한 자아의 고통으로 죽음의 충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극심한 절망에 붙들려있다. 이러한 수치심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한데, 16세기 데카르트 이후, 수치심을 의례화되고 억압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개인적 비극 속에 자리잡게 한, 즉  개인의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으로서 내면적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축소된 왜소한 감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내면의 법정인 자신을 지켜보는 엄격한 눈의 감시를 두려워한다 나의 죄는 이제 도를 넘었다. 나는 숨 쉴 때마다 근친상간을 뿜어내는구나. (...) 불쌍한 것! 그런데도 살아있어? 그러고도 살아서 나를 낳아준 신성한 태양을 보고 있다고?” 처럼, 지엄한 신의 눈에 포획되어 있다. 물론 페드로의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녀의 수치심이 지나치게 과도한 도덕성에 붙들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대는 그 윤리적 잣대의 불온함은 재()사유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페드르는 타자를 장악하려는 가해자로서 근친상간의 폭력적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내면에 지닌 수치스러운 침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식의 완벽한 내적 판관이 될 수 없다.

 

내 의식과 분리되어 외재적으로 투사된 완벽하게 독립된 법정을 자기 안에 설립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아마 불가능할 것이고, 설혹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엄격한 검열에 메인다는 것은 수치심을 개인의 심리로 위축시킨 까닭이 아닐까?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온전히 개인의 정서적 책임으로 몰아 댄 법과 죄의식의 확장 때문에 말이다. 근대 이후로 수치심을 치유해야 할 상처이고 청산해야 할 독성이자 뿌리 뽑아야 할 것으로 말하는데 익숙해진 오늘의 우리들은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무시하려한다.

 

사실 페드르가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아파하는 것은 발설하는 순간 자신으로부터 세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총체적 재앙의 두려움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 세상을 더럽힌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공포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동을 배척하고 사유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테제가 사망했다는 전언이 전해짐으로써 페드르의 은폐된 정념이 사건화 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은 페드르의 유모이자 심복인 외논의 자극에 의해 그녀의 입을 통해 이폴리트가 발설됨으로써 급격히 전환되고, 급기야 아버지 테제의 죽음 이후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테네로 출항하려는 이폴리트를 붙잡고 오랜 침묵 속에 잠겨있던 수치를 고백한다.

 

그녀의 이폴리트를 향한 사랑의 정념은 그야말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만다. 결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내 수치를 고백했어, 희망이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었다.”며 도주하는 자신의 정숙함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이 말을 당사자에게 발설함으로써 정숙함의 의무를 벗어 던진 것이다. 작가의 치밀함은 총 1654행으로 짜인 희곡의 딱 절반인 827행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테제가 살아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 테제가 페드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잠시 화제를 돌려서 이 욕망의 통제와 관련하여 상극에 있는 루크레티아의 신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이 욕망이 수치심과 죄의 경계를 어떻게 분리하는 가의 하나의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동료 전우인 콜라티누스의 고결하고 완벽한 아내 루크레티아에게 느낀 시기어린 노여움으로 타르퀴니우스는 전장에서 이탈하여 늦은 밤 그녀가 홀로 있는 집에 찾아들어 여자의 정절이란 모두 허튼소리라며 미래의 보상과 편의로 유혹하지만 거절당한다. 루크레티아는 버티고, 함께 쾌락에 빠져들길 완강히 거부한다. 이때 타르퀴니우스는 치명적 협박을 가한다. 계속 거절하면 그대를 죽이고 남자 노예 한 명을 죽여 침대에 발가벗겨 나란히 눕혀 놓고 부정한 여인을 친구를 대신해 복수했음을 알리겠다고 죽음보다 더 최악의 일처럼 보이는 수치심 앞에 굴복하게 하곤 강간한다.

 


사실 욕망이란 언제나 우리 인간 안에서 끓어오르고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타자다. 툭하면 우리를 넘어서고, 벗어나며, 초과하고 규정하는 괴물성이다. 억누를 길 없는, 우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불복종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충동을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억제한다. 그런데 이 욕망을 소유했다는 것이 수치심을 갖게 하지만 단지 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져야하거나 죄가 되지 않는다. 경계는 그 통제의 문턱을 넘는 순간 혼란에 빠뜨려 난폭해지는 욕망이다. 통제에 불복종해 문턱을 넘어 행해질 때 그것은 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답변은 석연치 않다. 수치는 발설됨으로써 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법의 설정이 있음으로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수치심이 법의 지대로 나아감으로써 죄가 된다는 얘기인데, 그럼 수치심이라는 정념의 효용은 무엇인가?

 

페드르는 오직 너를 사랑해라고, 물론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언어이지만 그 발설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것을 돌아온 테제에게 감추는 것은 그녀의 충성스러운 유모 외논의 비열한 계략, 페드르의 언어로  불행한 왕자들의 약점을 살찌우고, 그들의 마음이 이끌리는 비탈길로 몰고 가서, 감히 그들 앞에서 범죄의 길을 평평하게 닦아 놓는 자의 간언으로 인해 비극을 고조시킨다.  외논이 테제에게 이폴리트가 페드르의 침실을 넘봤다고 간음의 죄가 있었다고 거짓 간언하는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드르는 외논에게 분노를 쏟아 놓는다.  가증스러운 아첨꾼, 하늘의 분노가 왕들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 선물을. (...) 귀가 솔깃한 간언들이야말로 잘 다스려진 도시와 인간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외논은 바다의 파도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결한다. 그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자기 죄에 대한 죗값을 지불한 것이다. 사실 아첨꾼들, 간신배들과 관련하여 권력의 나르시시즘 행태 등 할 말이 무진장 있을 수 있지만 후일의 기회로 미룬다. 수치심의 효용은 조심성과 신중성 등 행위에 앞서 도덕성을 검열케 하여 자신과 타인의 세계에 위협의 요소를 제거하는 윤리적 성격이다.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의 정념을 가졌다는 자신의 수치심을 테제에게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논의 거짓된 누명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폴리트는 아버지 테제의 분노에 의해 추방되고, 마차를 달리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수치심으로 시작된 이 비극작품은 자신이 방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인 죄와 그 응분의 댓가로 맺는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에서 페드르는 목을 매고, 세네카의 페드르는 검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한다. 라신의 페드르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끝낸다. 수치심은 죄가 되어 소멸한다. 그런데  그토록 음험한 행동의 기억마저 그녀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없는가!”라는 테제의 마지막 방백은 기묘한 모순의 언어가 되어 소멸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수치심의 성분은 결코 죄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끈질기고 집요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세계를 맴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자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루크레티아는 자신이 강간당했음을 남편과 모든 시민에게 알리고 자신의 수치심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살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당사자의 죽음(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수치를 죽이는 유일 방법이라 말하면서, 이것이 민중적 저항의 불씨가 되었고, 공화국의 수립, 즉 정치의 성적 계보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라신의 페드르 또한 페드르의 죽음으로써 테제는 왕권의 재정립과 후계의 적통성 확립을 이룸을 마지막 문장에 담음으로써 성의 정치적 계보를 잇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이 정념 비극의 최고봉이라는 당대 비평계의 칭송이나, 이보다 더 미덕이 더 많은 조명을 받은 작품을 결코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모든 이들이 필경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라 애착과 자부심을 보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의 성적 계보라는 의미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자리를 틀 지우는 젠더의 고착화이고, 정숙한 여성의 성이 정치적 안정을 담보한다는 논리를 확대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애매한 경계에 서있다. 사랑의 정념의 대상을 근친상간을 전제하는 대상으로 세움으로써 금기를 방어막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페드르의 수치심은 작가의 죄의식과 분리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죄의 개념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는 한계를 느끼게도 한다. 이 작품은 수치심과 죄라는 주제 말고도 악의 이행과 자기 행위의 정당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중요한 주제도 있다.

 

이는 이폴리트의 관점에 스며있는 폭풍우 이는 바다의 해안에서 폭풍 속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는 방관자의 논리가 이해 당사자의 논리로 변화할 때의 인간의 비열한 자기 합리화와 그에 내재된 괴물성이다. 별도의 지면에서 다시 논의할 일이 있을 것 같아 후일의 사유로 미루어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페드르의 유모가 자신의 수치심을 자책하는 페드르를 향해, 사랑에 패한 사람이 어찌 마마 뿐일까요? 인간이라면 약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인간인 이상 마마도 인간의 운명을 따르세요.” 라는 말이 독자이자 관객인 우리 유약한 인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소할 수 없는 정념의 내적 명령에 마주했을 때 과연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내겐 떠오르는 방안이 없다. 아마 페드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참조: 페드르(그리스 신화이름;파이드라,Phaedra)관계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와 화재, 부패의 맛이 나는 이름을 계속 입에 올리려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 91쪽에서

 

그래, 너무 더럽고 추잡하며 역겨운 것들을 입에 계속 올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무례함과 무도함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입을 더럽혀야 하는 것은 고통이요, 인내를 요구한다. 트로이의 예언자, 고대 신화 속 여인을 호출하여 그로부터 오늘의 불쾌한 현실에 은폐된 의미들을 해독하는 일은 결코 헛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카산드라는 예언자이자 진실의 증언자로서의 인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끊임없이 계승되어 온 하나의 개념이 된 존재이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의 딸이자, 사제로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여성이다. 크리스타 볼프는 이 신화 속 인물을 통해 모호하게 감지되지만 그 실체와 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먹고 자라는 모든 차별 의식에 은닉된 강압하는 불의(不義)의 힘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도록 실재를 드러냄으로써 눈멀고 귀먹은 민중의 잠자는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소설은 스스로 자멸, 패망의 길로 내닫는 트로이 정치권력의 인식 부패와 민중의 우매함을, 권력이 저지르는 날조와 기만, 그 징후들에 저항하는 카산드라를 통해 자신들의 죽음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이 올 때까지 진실을 회피하는 인간군상의 어리석음에 슬퍼하며, 그 전환되지 않으려는 인식에 분노케 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트로이 사회는 적을 만들어내고 그 적에 대항하기 위해 언어조작과 역사왜곡, 여론조작 등 다양한 사전 조처를 취한다.”

 

트로이가 한 문명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리기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와 용기들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권력 스스로가 미쳐 날뛰며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 점진적 부패의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작품을 여성주의적 시선을 넘어 정치사회적 삶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네 정치적 현실에서 빈번하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외교의 실패, 그 천박성이 어떻게 감추어지는지를 이제는 민중 대부분이 잘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소설은 패망해 그리스군에 의해 포박되어 미케네 항구에 도달한 죽음을 앞 둔 카산드라의 10여 년간의 트로이에 대한 정치사회적 정황에 대한 회고로 시작된다.

 

아마 트로이 자멸의 징후를 보인 시발점일 것이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오가는 해상 권리의 협상을 위한 그리스로 출항한 첫 번째 배로 상징되는 외교적 실패를 가리기 위해 조잡하게 꾸민 이야기를 통해 실정을 감추려한 행위이다. 극비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왕의 사촌 람포스는 협상에 실패하고 그리스인 사제 판타오스와 함께 귀항한다. 사제 하나를 끌고 오고자 델포스로 간 것이 아님에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폐쇄 집단인 그들이, 절반은 실패한 사업에서 뒤늦게 허풍을 떨며 첫 번째 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왕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실패를 감추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낸다.

 

왕의 누이인 헤시오네가 스파르타인 텔라몬에게 납치당했다는 날조된 명분을 내세워 왕이 누이를 찾지 않는다면 트로이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두 번째 배를 띄운다. 민중들은 깃발을 흔들고 환호한다. 헤시오네가 아니면 죽음을!”, 두 번째 배가 돌아왔다. 헤시오네는 보이지 않았으며, 배에 동승했던 예언가 칼카스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헤시오네의 귀환 문제는 뒷전이 되고, 당장 칼카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국가기밀을 속속들이 아는 트로이의 존경하는 예언가가 돌아오지 않은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리스인들에게 인질로 잡혔을까? 트로이를 배신하고 그리스에 투항했다고 할까?, 민중이 원한다면 그렇게 믿게 하면 된다. 그리스인에게 나쁜 평판을 뒤집어씌우면 된다. 사회에는 거짓과 기만이 점령하고 민중에게는 침묵이 강요된다. 이제 파괴된 정의와 진실, 그리고 거짓과 기만은 반복 될 터이다. 낙관적 예언을 강요한 왕실 권력의 문책이 두려워 칼카스는 그리스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소설은 이 불의한 정치적 결정에 저항할 때마다 카산드라의 통제 불능의 착란과 발작으로 그 부당함의 상징적 기표를 반복한다. 카산드라는 사람들이 너무도 명료한 사건의 적나라하고 무의미한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어떻게 내가 본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는지,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그 천박한 본성을 카산드라는 후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크리스타 볼프가 본 1980년 침몰을 향해 돌진하던 동독사회건, 2024년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 날조하는 한국의 정치권력이건 카산드라가 회고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지나칠 만큼 닮아있다는 것에 있다. 아직 그리스군이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기 전이다.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에 우정의 손님으로 찾아 왔다. 왕실은 성대하게 그를 맞이하지만, 곧 트로이의 왕실 권력은 자기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의 이 사절에게 적대감으로 전환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메넬라오스를 우정의 손님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단어의 사용조차 불가능함을 을러댄다. 사람들은 갑자기 의심의 대상이 되고, 궁정 경비대 배지를 단 인간들은 안하무인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경비대장 에우멜로스와 그에 붙은 무리는 갈수록 소란스럽고 무례해진다.

 

에우멜로스와 결탁한 파리스는 뻔뻔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방자함을 거침없이 행한다. 왕의 누이를 적의 손에서 구할 사람은 바로 나, 파리스라 주장하며, “그들이 누이를 못 내주겠다면 다른 여자, 더 예쁜 여자가 있다, 세 번째 배를 출항시켜야 한다고 패망의 길로 향한다. 부패한 권력의 거짓을 덮기 위한 또 하나의 거짓말이 보태지는 순간이다. 카산드라는 그르렁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배를 보내지 마라!”, 부당함을 직언하지만 감금당하고 만다. 이제 카산드라는 진실의 말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에 무력한 항의를 하는 자신의 가식을 끝내기 위해 광기를 선택한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오직 광기에 매달리는 것뿐이었음을.

 


이제 소설을 예측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그대로 대입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에우멜로스의 부하들이 일했다. 추종자를 만들고 (...) 핵심은 적을 비방하고, 이적 행위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적을 자신들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전쟁을 준비한다.” 그들에게 왜 적이 필요했을까? 조작과 기만, 거듭되는 거짓이 드러나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회피하는 절대적 수단인 까닭이다. 세 번째 배가 출항하고 돌아오지만 역시 헤시오네는 없으며, 유괴했다는 헬레네는 파리스의 방탕한 여정에서 이집트의 왕에게 빼앗겼다. 다시 거짓말이 선전된다. 스파르타 왕의 아내 헬레네를 유괴했으며, 그래서 왕 프리아모스가 누이의 납치로 당한 굴욕을 갚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밀고의 눈초리가 에워싼다. 진실의 목소리는 위협과 억압으로 사라지고 거짓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전쟁은 헬레네를 돌려달라는 스파르타 왕의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러나 헬레네는 트로이에 없다. 멍청한 놈! 파리스가 이집트 왕에 빼앗겼으니. 허깨비 때문에 하는 전쟁은 질 수밖에 없어요. (...) 왕이 심각하게 물었다. 왜지? 우리가 할 일은 병사들이 계속 허깨비를 믿게 만드는 거야.“,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두고 벌여야 하는 전쟁, 누적된 거짓, 그 추악함으로 인해 자신들이 절멸할 때에 이르기까지 십 년간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전쟁 권력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적을 돕는 이적 행위자로 간주되는 것으로 둔갑한다.

 

거짓과 왜곡, 날조로 무능과 부패를 가려야 하는 권력은 바로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수없이 거듭되는 동일한 기만의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을 더 이상 거듭할 거짓 수단이 바닥을 보일 때 그들은 전쟁을 야기하고 그를 통해 되돌아 올 처벌을 회피하려한다. 정말 끔찍한 수순이다. 이때 우매한 민중들은 전쟁에 끌려들어가 바로 그 우매함의 죄 때문에 공멸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후대에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이어가는 소설 속 문장은 이렇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점점 믿는 것을 보았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치켜세웠다. (...) 인간의 본성을 경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산드라는 뒤통수가 비겁한 민족이라고 자기모멸, 수치심에 잠긴다. 보이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명확한 구분 사이에 짓눌린 다른 것은 존재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구함이며, 안다고 믿는 해악이다. 민중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한 구토나는 권력을 토대로 한 삶의 형식은 한 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구함의 반대말은 통찰력이라 했다. 카산드라는 자멸의 길을 걷는 트로이의 실상을 냉철하게 통찰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속하여 진리를 말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육신을 감금하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격리 추방했다.

 

카산드라가 인간을 향해 고통스럽게 외치는 이 문장은 오늘의 우리네 실체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끝이 없으며, 우리는 고통의 최고점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내장을 헤치고 그의 머리통을 깨뜨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우리라고 말한다. 우리를 말할 때가 가장 힘들다. ‘짐승 아킬레우스를 말하는 것이 우리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볼프는 카산드라를 통해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혐오스러운 짐승으로 명명한다. 어떤 숭고한 목적도 없는, 단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전시하기 위해 극악하게 싸우고. 동성애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여성들을 능욕하는 추악한 인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이 또한 아킬레우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역겨운 집단이다. 서로를 닮은 존재들. 카산드라는 사랑하는 사람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동행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거절한다. 그녀는 그 이유를 언어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 하나는 영웅이라는 남성적 조건을 세우기 위한 여성의 희생, 노예화의 세상에 반대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증인이 되리라, 내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을지라도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그녀는 그리스 미케네까지 끌려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트로이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증언하는 증인으로 남기 위함이다. 그녀는 희망한다. 미래에는 승리를 삶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올지 모른다고.

 

2024, 오늘의 세계에도 도처에서 수많은 카산드라(낸시 프레이저, 에바 폰 레데커, 목수정, 정희진, 가야트리 스피박, 도나 해러웨이, 주디스 버틀러...)들의 목소리가 깨어나라고, 삶의 형식을 바꾸라고, 새로운 세계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울려 퍼진다. 그러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거나 사욕에 가득 차 기만적 반박을 가한다. 어쩌면 볼프가 새롭게 재탄생시킨 카산드라는 바로 이러한 각성을 촉구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일 것이다. 문학이 하는 가장 위대한 기능으로서. 민중의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환점에 섰다고 느낄 때, 이 소설은 우리들이 행할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로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우리는 수치심의 위기를 지나가고 있다. 무례함이 부상하고, 천박함이 번성하고, 뻔뻔함이 늘어나며, 조심성, 수줍음, 절제, 거리낌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 이 세계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치심의 위기다.”

- G. Hanus, A.Finkielkraut <레비나시아 학습 노트>에서


책은 수치심에 대한 구체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그러기위해 수치심의 역사 궤적을 통과하고, 그 변화하는 개념 아래에서 사회적 모멸이며 사회적 사실로서 개인과 집단을 감금하는 악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유형을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도치, 전복, 파괴, 정화함으로써 윤리적 힘, 혁명적 힘의 동력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처럼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여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제외교무대에서 이것들의 천박함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 수치심을 이중으로 겪어야하는 고통까지 안긴다. 이것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그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것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수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수치심은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기 이전의 것과 그 성분이나 형식이 다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처입고 훼손되는 명예의 실추에 따르는 전통적 수치심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6세기 데카르트는 수치심은 자기애에 토대를 둔 슬픔으로 비난받으리라는 생각에서 온다.”정념론에 썼다. 자본주의 발흥과 시기를 함께하며 수치심은 이렇게 소심한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그 개념이 축소되어, 죄의 문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수치심에 내재되어있던 정의가 몰수되고, 개인화되었으며, 자본주의 상품화논리에 수치심 본질의 한 축이었던 가족적 윤리를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 곱세크의 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 곱세크 집 문턱을 넘으려면 읽게 되는 문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 들어서는 그대, 모든 수치심을 버려라!”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현대성은 명예없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의 이등항해사 로드 짐이 자신의 이미지와 이름의 손상이라는 수치심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홀로 재판정에 서 죽음을 수용하는 이야기 속 명예있는 존재로서의 수치심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공공법률+상거래+개인적 자유의 역할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이다. 영리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심리적 얼굴로 수치심의 얼굴이 바뀌었다. 명예는 변모하여 체면과 정상성(正常性)’, 표준이라는 미묘한 사회적 행동모델로 변했다. 명예없는 현대세계에 정상성이라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새로운 명예가 된 것이다.

 

정상성이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괴물같은 언어다. 오늘 이 정상성의 기준지표는 지극히 단순화되어 돈과 안락함이 지배한다. 비정상성의 기호는 가난이라는 추상적 판단에 의해 사회적 멸시가 되었다. , 말하고 먹고, 걷는 방식, 이빨 빠진 사람들, 작고 어둡고 계급없는 사람은 정상성을 구분하는 기호이다. 타인들의 말과 눈길 속에 작동하는 비교, 우리를 억압하는 멸시는 이렇게 출현한다. 오염, 얼룩, 불투명성이고 들러붙은 끈끈한 부정성,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 실체, 자신의 좌표에 대한 수치심, 문화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수치심이 상징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으로, 수모와 수치의 반복된 경험으로서 작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회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나로서는 사회적 수치심보다 성적 수치심에 대해 쓴 것이 한결 쉬웠다.”, 세계의 분리와 경계, 문턱과 문을 발견하게 하여 자리의 박탈을 의미하는 사회적 출신이라는 멸시 기호의 끔찍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난은 선험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는 몇 십 년(40여년)에 걸쳐 가난을 패배로, 개인의 실패(의지결핍, 게으름, 비겁함 etc.)라고 윤리적 얼굴이라 내면화시키는 학습화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가난의 수치라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가 인간 행복의 열쇠를 엄청난 소득에 두고 그것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세상은 당연히 이런 것이라고,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고, 사욕의 뿌리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빅토르 위고는  잠에서 깨시오, 수치심은 이제 그만!”라고 1850년에 이미 자본주의 물질성에서 깨어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정치적 분노를 할 줄 모르는 나태한 상상력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유명한 글이 있다. 카뮈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작가의 분신인 어린 자크의 분노하는 수치심이 있다.  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건 어머니가 멸시당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용감하게 쉬지도 않고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그러자 곧 나의 수치심에 대해 수치심이 든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체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불공정한 가치 체계를 그렇게 쉽게 지지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서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멸시와 고결한 분노의 두 가지 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로서 우울의 수치심이 있다. 졸라의 목로주점에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수치심에 잠겨 거리에 자신의 매력을 팔기위해 서있는 제르베즈의 마지막 쇠락 장면이 있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지상 조건의 낙인인 몸 자체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에는 세 가지 큰 영역이 있다. 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몸은 영혼에 수치심을 안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가 감수해야하는 타인의 무심한 눈길로부터의 외면, 무리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질적 두려움의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고통. 비곗덩어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인 소위 사회적 품위를 지녔다는 인간들의 품위가 얼마나 비겁하게 주어지는 지를, 타자의 사회적 멸시를 통한 배척을 토대로 구축되는 그 더러운 품위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원통함과 엄청난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이렇게 수치심에는 혁명의 씨앗이 움튼다.

 

사회적 모멸은 사회적 사실로서 외상성 수치심이라는 깊은 상처를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각인시키기도 하는데, 강간, 근친상간과 같은 윤곽도 분명한 오욕적 장면의 기억이 지닌 치명적 수치심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 권위주의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합의 결과로 생겨난 이 수치심은 수줍음의 도덕적 가설을 여성성의 특징으로 내세움으로써 희생자를 겨냥한 가해자들의 폭력성을 가라앉히는데 주력한다. 더는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업자득이지 않습니까?”와 같은 악의적이고 비뚤어진 희생자 여성을 향한 심문은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원했다는 의미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강간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 중심의 공적 판단 논리는 권위적 국가를 마주한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진다.

 


2009년 용산 재개발을 강행하려는 상가철거에 맞선 상인 6명을 죽음으로 몰고 23명을 중경상에 빠뜨린 당시 폭력사태를 지휘하던 서울시장(오세훈)과 서울경찰청장(김석기)은 시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자업자득의 논리, 저항의 극렬함만을 강조하고 시민 안전, 인권 보호와 같은 자신들의 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간이건 국가폭력이건 다들 가해자는 항시 희생자가 순수한 희생자가 아님을 입증하려 든다. 저항을 진정으로 입증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는 이 구토나는 혐오스러움이 이 사회를 짙게 덮고 있다.

 

저자는 사회적 모멸과 사회적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설명하며 영원한 굴종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불의한 이 세계의 체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내모는 체제는 폭력 자체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타자들의 소유를 점유하면서 커지는 이 부당한 점유가 발가벗은 힘’, 타자들을 장악하고 함부로 하려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발가벗은 힘의 상징적 제도화임을 입증한다. 강간, 학대, 근친상간 폭력에 대한 사법과 공권력의 시선은 이 세계의 추잡한 정치 체계를 요약한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체계, 이 역전된 수치심을 가해자의 진영으로 전환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정의 아닌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가 수치심에서 정의를 제거해버렸지만 우리는 이를 회복시켜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남편 콜라티누스의 동료인 에투루리아의 왕자 타르퀴니우스에게 강간당한 루크레티아의 자결 신화는 정치적 성적 토대를 제시한다. 동침을 거절하는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노예와 동침한 부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협박에 그녀는 자포자기한다. 루크레티아는 이 수치를 남편에게 알리고 자살하는데 그녀의 시신을 마주한 로마인들의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로마 공화국 수립을 초래한다. 이 신화의 정치적 의미는 보완성의 약속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 수치심에는 교묘한 이중의 얼굴이 숨어있다. 여성의 다소곳함, 여성의 정절을 찬양하는 불순한 젠더화가 있으며, 사회적 사실로서의 폭력에 대한 수치심, 윤리적 수치심이라는 두 얼굴이다. 공화국이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고정된 자리와 보완적 의무를 맡김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이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하 라틴식 질문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충실한가? 여성의 성생활이 남편의 정치적 완성을 보장한다.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이 세계를 지탱하는 정치쳬라는 것의 불온성과 불모성을 엿보게 하는, 오늘에도 무심히 읽히는 신화다. 우리들은 무의식중에 이러한 태도를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이 불온성과 불모성의 실체인 파렴치함이란 조심성의 부재로 알아본다고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도덕적 성질에 따라 정지시키고 한계 짓는 능력이다. 다시말해 파렴치는 수치심의 부재라는 의미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는 이처럼 악을, 불의를, 멈출 수 있는 생각으로서 윤리적 수치심을 뜻하는 아이도스(Aidos)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치심을 영혼의 독으로, 중대한 장애물로, 행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적으로 규탄한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윤리의 기둥을 표상하는 정서로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하듯 수치심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허영심, 착각, 말과 행동사이의 괴리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으로 본성을 과장으로 왜곡되지 않게 막는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만약 ...라면 난 너무 수치스러울거야라는 우리네 일상 속 문장처럼 윤리적 수치심은 상상력으로 지지되는 생각의 경험을 먹고 자라는 자가-정서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철학이란 바로 앎에 대한 오만, 사회적 안락에 대한 확신을 모욕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들에게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안겨 영혼을 발가벗기고 관통하며 박탈하고 화나게 노출시킨다. 그럼으로써 억견(臆見) 직전에 어리석음과 영적 저속성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무지보다 훨씬 위험하고 해로운 것은 바로 안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안다고 믿고서 타인들에게 그 알량한 지식을 강요하길 즐기고 뻐기면서 경멸의 이유를 찾는 악의 평범성이기도 하다.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망, 철학은 이러한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소크라테스가 왜 아테네에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상기해보라. 대중 앞에서 영혼이 발가벗겨진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 거만한 법관들, 건방진 예술가들은 드러난 천박성으로 인한 자신들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불의한 힘에 의해 죽어야만 했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상기토록 한다. 지금 벌어지는 70~80년대 이 땅에 민주주의 토대를 만들어낸 민주투사들을 폄훼, 평가절하하려 총공세를 가하는 기득권의 추한 토끼몰이식 저열함을 보라,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에 부하뇌동하는 우매한 대중들을 보라.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혐오논리의 복귀, 폭력의 두려운 반복을 예방해준다. 고통을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기만적 무구(無垢)함이 죄를 구성한다. 무구함의 반대말이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인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와 불공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주의깊게 바라본다. 계통적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류로서 공감할 줄 아는 자의 수치심,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이르는 말이다.

 

계통적 사회 멸시, 계통적 권위주의, 계통적 (인종) 차별주의, 계통적 가부장주의, 큰 행운을 누렸음을 인정하는 진지한 목소리, 객관적 지배자의 수치심이다. 우리는 모두 권리 승계자로서 태어난 마땅히 치러야 할 수치심을 지녀야 한다. 인간이라는 수치심은 밑바닥에 떨어진 인류를 마주하고 보이는 일종의 저항이고 넌덜머리 난 초탈이며, 다른 되기에 휩쓸리려는 욕망이라 한다. M.쿠체는 추락에서 백인으로 고통스러운 상속자의 수치심을 말한다. 아파르헤이트로 유색인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한 모멸과 가학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주인공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계통적 수치심이요, 윤리적 수치심이다.

 

이제 우리는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어내야 한다. 수치심이 피해자, 희생자의 몫이 아니라 바로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함을. 로스탕의 극작품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의 코가 기형적으로 커 조롱의 대상이 된 주인공이나, 장 주네의 소설 도둑 일기에서 감화원의 그 극한의 치욕의 현장에서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고, 치욕의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입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치심은 반전 시킬 수 있으며, 그 속성은 이미 도치와 투사, 전복, 정화를 통해 변화시키는 에너지, 실존의 연료로 삼을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수치심은 윤리의 기둥이며, 연대의 표식기다. 세상의 어리석음, 운 좋은 자들의 잔인한 악의에 대한 분노이자 증오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은밀한 분노이기에, 또한 부당한 멸시에 대한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이며, 정의에 대한 부정을 강요하는 멸시에 대한 분노, 이 구속에 맞서는 생명의 힘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치심은 혁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사회체제와 대중문화가 비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좌절시키도록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자리에 서보거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기도 하다.

 

책은 이처럼 수치심 작동의 메커니즘에서부터 수치심의 다양한 형태들, 야기된 수치심들이 개인과 집단에게 기대하는 불온한 효과들, 그리고 사회적 모멸과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비처럼 쏟아부어 무시의 눈길이 축적되고 딱딱한 껍질이 되어 영혼을 옥죄어 인간을 수동화시키는 광범위한 악의 파렴치가 점령한 세계의 현상을 마주하게도 한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처럼 오늘 우리들은 산다는 수치심을 살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성이나 계층과 인종적 차별이라는 상투성의 항구적 재()할당으로 벗을 수 없는 공식 속에 인간을 가두려는 본질주의가 판을 치고, 작은 차이나 격차를 포착하여 배척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낙인찍기가 이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의 관계의 투명성에 빼내져 힘과 특권을 누리는 타인들의 광기 속에 구속되기 일쑤인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 불온한 세계이다. 아마 이 화려하고 박학한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심과 노고를 절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고 철학과 신화, 문학(소설,희극,)작품들의 이야기를 예시하며 수치심의 잎맥을 재구성하여 그 구체적 메커니즘을 신랄하고 극적이고 섬세하며 진지하게 다루어 내고 있는 명 저술이다. 책을 읽고나면 수치심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주된 정서임을 숙지하게 되고, 한편으론 새로운 삶의 세계를 향한 투쟁의 기표임을 발견하게 된다. 갈수록 무례함과 무람없음이 늘어만 가는 이 세계가 너무 불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세상에 대해 수치심을 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이 모욕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우리들은 함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정치 사회는 급격하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이 장악한 세계에 체념해서는 안 된다.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 프리모 레비가 말했다. 이 책은 이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수치심의 정체를 거의 완벽하다시피 할 정도로 파헤쳐내고 있다. 이제 이것을 가공, 구상, 다듬어서 순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발가벗는 순간을 안간힘을 다하여 모면하려는 마음 속 두려움은 윤리적이고 혁명적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악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후자가 난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전자로 전환할 수 있다. ~, 이 저술은 수치심이라는 정서에 대한 고전적 지위의 명저로 남을 것 같다. 아니 인간 세계에 오랫동안 읽힐 위대한 명저로 손색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