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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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토리노 태생의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인간 조건에 대한 명상록이자 회고록이기도 한 주기율표는 독특한 구성으로 역사와 철학과 윤리의 성찰로 독자를 이끈다. 주기율표상의 원소마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유대인 마을의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어머니의 어머니들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을 엮어 이 세계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경쾌하게 써내고 있는 저술이다.

 

내 학부시절은 군사계엄이 연속되는 시대를 관통했다. 대학 정문은 계엄군이 가로막고 서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대자보에는 파쇼라는 수식어가 붙어 당시 군사독재 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곤 했다. 파시스트라는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대중을 향한 언어는 단순 명쾌해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한 마디로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며, 그 하나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이념이다. 즉 한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키 위해 권력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 이외의 그 어떤 다름도 부정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작금의 검찰 독재권력이 요구하는 것이 이러한 자기 동일성의 강요이다.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국민적 요구는 자기들과 다른 것이기에 부정되고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며, 급기야는 폭력과 살상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권력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전 토리노대학 화학과 최우등 졸업생으로 유망한 미래가 기대되던 청년이었다. 때문에 이 저작이 화학 원소마다에 꼬리를 문 회상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연(Zn)의 장에 있는 글인데, 그의 학부시절 실험수업의 한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회상이다. 실험 조교는 그에게 아연을 주고는 황산아연을 제조하라는 과제를 부과했다. 실험실에는 황산용액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에 쉽사리 주어진 과제를 제조할 수 있다. 즉 황산과 아연을 결합시키면 되는 것이니 단순하게 보인다. 그런데, 순수한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아연은 황산과 반응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으켜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생성하려면 불순물, 즉 다른 물질이 존재하여야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아연이 담긴 묽은 황산용액에 황산구리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불순물이 첨가되자 반응이 시작된다. 하얀 모피처럼 수소기포가 아연을 둘러싸고 황산아연으로 결합 반응을 시작한다. 우리네 삶과 사회의 생명력이란 이처럼 불순물이 필요하다. 사실 땅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키워내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시즘, 검찰 독재권력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금하고 배제하기까지 한다. 이 세계에는 결코 얼룩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게 존재한다면 정말 역겹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생존과 진화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은 이처럼 다름과 차이의 수용과 결합이 중추를 이룬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화학, 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여 단계마다 검증이 가능하고, 방송이나 신문처럼 거짓말과 공허함이 난마처럼 뒤얽힌 것이 아닌 화학이야말로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 윤리적 성찰로 견인하는 사유들이 빼곡한 이 저작이 지금 내 시선에 들어 온 것이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이 세계의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52,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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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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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지식 체계에 뚫린 구멍이다.” - Jaques Lacan

 

책의 제목에 라캉(Jaques Lacan)’이 있다고 겁낼 것 없다. 현학(玄學)의 언어로 지식을 뽐내는 그런 책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그런 지식의 기만과 불완전성을, 그러한 지식들이 이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런 지식체계의 균열과 틈으로 드러난 텅 빈 구멍, 허무의 진리와 마주하여 삶을 갱신토록 안내하고 있는 저작이기에 더욱 그렇다. ‘유령은 이 세계를 매끈하게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지식들이 그 존재를 부인한 것들에 대한 명명이다. 유령의 출몰은 세계를 설명하는 지식체계를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진리로의 초대이다, 어두운 심연, 텅 빈 구멍으로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 지식이란 환영에 불과함을.

 

바로 이 유령을 책의 저자는 미술의 역사를 수놓은 예술작품들의 비유를 통해 세계의 진실로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인류의 노력을 차단하려는 지배질서의 기만과 거짓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없음의 있음을 알려주는 유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리에 대한 욕망을 그칠 수 없음을 말한다. 특히 책의 제목처럼 미술관의 유령들이니 시각 이미지(회화,사진,영상etc.)’를 이러한 지식과 대립항으로 세계의 진실을, 진리를 향한 소재들이 되어 이 세계-현실을 직조하는 지식의 장막, 그 허구성을 감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장막 너머 진리를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삶에 대한 겸허와 갱신의 욕망을 다지고 지속하게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 즉 배우고 경험한 것, 그래서 습관화된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라캉은 이를 시관(視觀)적 장(champ scopique)’이라 하여 눈은 단지 시각적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충동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시관충동의 영향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 지식 내의 관점을 이탈하여 그 바깥을, 지식의 균열점을 보기위해서는 비상한 노력과 고통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불규칙을 지우고 기하학적 원근법과 같은 규칙과 지엄한 유일신 종교의 규범이 세계 이미지를 억압하고 길들이던 세계라면 더욱 진리로의 접근은 어려운 길일 수밖에 없다. 길들여진 세계 내 지식과 진리의 길을 보기위해 유령이 출현하는 두 회화작품의 비교는 이 대립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비유가 되어준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50년경, 본책 53쪽에서


먼저 이미지 통제, 즉 지배질서에 대한 열망이 넘쳐흐르는, 모든 불규칙 요소를 말끔히 제거하고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것을 향하게 하는 원근법의 철저한 반영으로 그려진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파울로 우첼로의 그림 <산로마노 전투,1450년경>는 혼돈의 속성을 박탈하고 죽은 병사와 투구들을 소실점을 향해 인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당대에는 이 그림이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2, 본책 91쪽에서


이와 대비되어 카르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 1602>는 당대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귀족사회의 종교적 담론의 안정된 일관성을 찢고 어두운 심연,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원근법을 파괴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박하고 경박한 당대 부랑인의 모습을 한 이들이 신성에 대한 의심을 보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지식체계의 기만을 고발한다. 두 그림 중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가? 카라바조는 자신을 지배하는 체화된 지식을 벗어나 완전한 백지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을 스냅 사진 찍듯 담아낸 극단적 리얼리티 기술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해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문신을 단 번에 뛰어넘었으며, 그 대상은 범속함, 세계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하는 진리의 사건을 묘사했다. 초라함과 기괴함의 형상으로, 조야함으로 출현해 지식의 장막을 찢는다.

 

길들여진 눈, 닫힌 눈을 이탈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을 쫓으려는 윤리적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지식이란 한결같이 매끈한 아름다움만을 말하려하고, 그래서 낯선 것, 이질적인 것,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억압하고 길들이며, 이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고는 마치 이 세계는 늘 완전하게 매끈한 실재의 세계라고 허구를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렇게 다른 것들을, 출몰하는 유령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계는 필연적인 폐쇄적 세계이고, 자기 동일성만을 인정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전체주의의 잔혹성이 지배하는 파시즘의 무도한 세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듯 진실을 거세하고 자기 체계를 유지하려는 지배 지식이 수행하는 일관된 억압과 방어의 장치들을 만나게 한다. 정상과 비정상(광기)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기 그지없는 악착스러운 분류와 범주화에서부터 오늘날 텔레비전 영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 질서의 패러다임이 지배규범과 닮지 않은 이미지들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은 물론, 자유와 박애, 평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까지 상품 속으로 매몰시켜 본래 의미의 사유 가능성을 파괴 상실시키는 현장을 목도케 하기도 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언제나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이기도한 공백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것이고, 억압함으로써 자기 체계의 완결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 하는 것임을 납득케 한다.

 

아마 이 저술의 하이라이트는 인문학적 전회(轉回)라 할 수 있는 현대 미술이 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계 재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왜 유독 유령들의 출몰이 캔버스와 화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저자는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의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초월적이며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 의한 진리 실체를 그리려는 행위였다면, 20세기 이후 인간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초월적 무언가의 존재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라 말한다.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텅 빈 공허, 검은 심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라는 저술의 <서문>을 쓴 프랑수아 리보네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허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대한 유희이고, 위대한 양식이다. (...), 허무주의? 아니다. 허무주의는 엄밀히 말해 공허의 망각이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시스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돌려버리는 힘으로 인해 허무적이다.”

-출처: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프랑수아 리보네 <서문> 민음사 2012

 

이제 미술은 세계의 진실인 공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진리, 텅 빈 구멍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배 지식의 장막이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쳐진 오늘의 세계에서 그 허방을 상상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리만큼 난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소멸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는 사진 예술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의 유령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통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욕망의 실패를 드러내는 앤디 워홀의 복제 이미지들 속의 우연한 얼룩의 형태처럼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무시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이 두 반복 사이에서도 완전함의 균열을, 이 세계 지식의 불완전성과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유령을 출몰시켜 진리의 허방으로 우리의 인식을 데려다주려는 허무의 형식으로 규범의 해체로 이끄는 소피칼의 사진 이미지에서, 비상식적 시간성을 통해 질서가 부재하는 공간으로 우리들을 내던지게 하는 빌 비올라의 영상 이미지까지 공백을 소환하는 절차를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타자로부터 주어진 이미지와 의미에 속박되어 세계를 오인하는 우리들을 건져낸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공백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둘러쳐진 장막(스크린) 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들 일상의 토대를 채우는 모든 가치 체계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고 갇히는 순간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처럼 처절한 퇴행과 독단의 폭력이 점령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령이란 그 속성처럼 포착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능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창조적이고 사랑과 정의, 진리가 인정되는 세계를 살아 갈 수 있으리라.

 

고작 죽은 문자인 텍스트를 읽는 뉴스 앵커의 이미지는 어떠한 진리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바로 그 이미지가 시대의 보편적 진리 형상과 만나고 있다는 환상임을 입증하고 있다. 대항하는 모든 비판적 견해에 대해 격렬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시즘의 욕망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력사회에 들어선 오늘 한국사회에서 우리들은 실재와 환상을, 진실과 거짓이미지를 분별하기 위해, 지배질서 저 너머를 보기 위해 공백의 자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세계에 안주하여 지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 넘어서 보지 않으려하면 결코 진실의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억압과 공포만이 넘실대는 세계만이 주위를 포획할 것이다.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지식체계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 저술은 그 어떤 지식체계도 그 자체로 완전한 체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유령 이미지로의 초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성을 지니고 다가온다. 미술 작품과 함께 라캉적 사유를 함께하며 닫힌 인식 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새로운 삶의 시선으로 갱신하는 기회가 되어 줄 터이다. 아름다운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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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라이브 이론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윤동민 옮김 / 책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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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저술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저작들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異論)들과 비판으로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방해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 대중적 읽기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기성의 제도들에 대한 일종의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바이러스라고 보는 일체의 현상유지 수호자들의 근거가 취약한 비난들이기도하고, 논설과 담화의 지면 등 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현상학과 프랑스 철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빈대학 철학교수인 저자 제임스 K.A. 스미스는 이처럼 데리다에게 부여된 괴물성의 신화에 깃든 오류를 벗겨낸다.

 

데리다를 비판한 이들은 데리다의 사상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길들이고, 그 괴물성에서 자신들과 다른 것, 즉 두려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동종화하려 하는 익숙한 기득권적 욕망을 본다. 이 책은 이 만연한 데리다에 대한 신화를 탈신화하여 그 괴물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괴물성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원저작과 기획으로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초대이다. 해서 이 저작은 데리다를 읽기위한 대중적 입문서이자 하나의 촉매 역할을 위해 써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의 미덕을 하나 집고 가야겠다. 그간의 라이브 이론(Live theory)>시리즈로 간행되어왔던 저작들과 달리 평이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난해하다고 걱정하던 데리다 독자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교수와 번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책은 서론과 에필로그를 비롯 총 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론>1장인 <말과 사물>은 그야말로 데리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은 데리다에 씌워진 괴물성과 신화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히려 그 매도된 비난의 내용들로부터 데리다의 사상적 지향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명료성과 같은 말은 데리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다. 발화된 언어의 다의성을 일의성이라는 권위적 고착관계로 몰아가는 언어이니 말이다.

 

괴물이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뤄진 혼종적 생명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길함과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함과 낯섦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즉 규정할 수 있는 범주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 모호성에 붙이는 무지의 익숙한 기호이다. 이러한 거북함과 공포와 달리, 데리다의 사상을 야기한 수많은 철학적, -철학적 유령들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마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읽는 이들이 읽는 오류도 있다.

 

특히 데리다의 곡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했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데리다에게 케임브리지가 명예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수여반대자들이 극렬하게 표명한 내용들이다. “그의 작업 모두는 모든 학문분과가 기초하고 있는 증거와 논증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이라고 해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악의적 선전이 그 하나이고, ‘뉴욕 리브 오브 북스 사건으로 명명된 데리다의 사전 승인없이 리처드 월린이란 인물이 자기 논문집에 임의로 데리다의 글을 편집 출간한 일로 발단된 사건이다. 이에 항의하자 텍스트와 저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낸 해석학적 괴물이 갑자기 저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론과 수행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이들이 데리다를 길들이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천박한 공격들이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해체가 단순한 어떤 부정적 파기가 아님을, 파괴의 단순한 동의어거나, 분해하다라는 잘못된 의미로 전유되어 사용되는 오해를 바로잡는다. 해체는 재구축을 위해 분해하는, 즉 재구성적 의미를 가진 비판적 재구성이다. 해체는 무질서나 상대주의적 이해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하여 제도적 틀을 부수고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해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언어 표현이 있다. 해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에 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 소명이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환대와 환영이다. 결국 기성의 권위가 수호하려는 불완전하고 불의한 것들이 은폐한 것들의 수많은 영역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파괴함으로써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그 반대는 치졸하고 악의에 찬 것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추방되고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을 경험해야만 했던 알제리계 유대인 데리다를 읽기위한 예열이 충분히 된 것 같다. 1~3장은 데리다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4장은 데리다와 여타 사상가들의 관계를 개관하고, 5장은 해체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로서 인터뷰의 형식을 취해 주제들을 확장 사유토록 안내한다.

 

1<말과 사물>은 대다수의 학자나 비평가들이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고 넘어갔기에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데리다의 사상적 환경의 토대가 된 현상학, 특히 그의 스승인 후설의 비판을 통해 현상학의 공리들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그가 오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정신, 신체와 물질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려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결국은 신체라는 물질성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 진리라는 것, 즉 순수 정신인 이데아라는 것도 최초 고안자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내 형성물이다.

 

이렇게 내적 근원인 주관적 산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객관적 진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이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공동체가 창조되어야 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때에서 비로소 객관적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에서 헤겔, 후설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전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신체와 물질성이라는 오염을 은폐한 것으로 이데아를, 순수 정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념들의 부패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국 서구 철학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신체화되지 않은 객관성이라는 것에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화와 물질성을 말소하려는 욕망에 깃든 타자성에 대한 반감, 즉 로고스중심주의의 자민족중심주의와 서구형이상학의 강박증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데리다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유는 언어 없이 지속하지 않으며 언어가 공동의 산물인 한 자아는 사유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비밀의 취향P84)”를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데리다는 왜 해체하려 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객관성이란 것은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쓰기는 매개와 해석의 필연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공동체 안에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다.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 얽혀있는 폭력성을 찾아내기 위해 해체해야 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빼앗겼던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해체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 같다. 데리다의 주저(主著)목소리와 현상, 그마라톨로지의 상당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이다라 할 수 있다.

 

2<다른 문학, 문학으로서의 타자>철학의 여백들우편엽서등에 대한 간접적 읽기가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마라톨로지를 비롯한 방대한 데리다의 논문들과 여타 저술들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왜 데리다가 문학을 특권을 가진 철학의 타자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미 소개되었지만 해체는 다른 것의 여지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배제되었던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도의 틈과 균열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해체의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 철학은 일의성의 사유이다. 즉 타자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학은 일의성이라는 단일한 의미들의 이상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의 이상인 철학의 이상을 넘어서 흐르는 언어의 양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문학이 특권을 갖는 이유는 오염으로 여기는 문학을 통해 철학의 욕망을 심문하려는 것이고, 철학 스스로 자기-비판에 참여토록 하는 기획이랄 수 있다.

 

이로서 직접성(일의성)과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열망, 동일자의 공간으로 하고자 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언으로서 문학은 훌륭한 해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철학이 은유의 교통을 거부하면서도 닳아빠져 못쓰게 된 은유를 은근히 이용하는 역사적 행태에서 철학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중심부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문장인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맥락에 대한 통찰의 중요성의 설명도 있다. 아마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오독을 넘어서 비판적 독해로서 저자의 의도를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3<타자를 환영하기-윤리학, 환대, 종교>는 데리다의 사상을 관통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승계하는 해체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해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타자를 위한 자리 내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체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만, 기성의 학문과 비평의 세계에서는 1989년 카르도조 법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해체는 정의(Justice)!”고 말한 데리다가 비로소 공적 정치적 물음으로 전회하였다고 해석하였던 모양이다.

 

데리다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자들의 오류가 이때에야 자기 오류를 인식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해체할 수 없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해체 작업에 착수한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그 간격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의로 법과 제도들을 괴롭히고 잠 못들고 깨어있도록 괴롭히는 작업임을 밝힌다. 수구적인 기득권 집단이 데리다의 해체를 그렇게 폄하하고 조롱하며, 괴물 취급을 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멋진 정의의 역설, 세계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책임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결정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규칙에 괄호치기이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결정이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규제없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을 보존하고 또한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다시 고안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게 사유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윤리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앎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시작된다.(...) 보증이 있는 윤리가 아니다. (...) 윤리는 위험하다.”

- 데리다, <이론을 쫒아서, P31~32>, 본문 173

 

만일 어떤 판사가 규칙을 단순히 적용한다면 그는 계산하는 기계일 뿐이고,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한 정의의 꼬리표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정의로운 법 판결에 내재된 이 역설은 어떤 결정이 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 조건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동시에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중적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책임의 체험이 곧 정의의 윤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는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에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나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4<데리다의 타자들>5<저자, 주권, 인터뷰에서 자명한 것들>, 우선 4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 소수의 특권적 타자들인 몇 명의 철학을 설명한다. ()쓰기의 유한성이라는 신체성과 물질성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으로부터 그라마톨로지영문판 서문을 쓴 가야트리 스피박이 주장한 니체의 영향력이 근거가 취약한 비판임을 증명하고, 오히려 니체의 초인은 데리다의 타자에 굴복했음을,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묻힌 존재임을 설명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해체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심지어 하이데거의 해체였다고 데리다가 말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부모와 자식의 완벽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4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계와 비평계의 데리다 수용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 계의 해체에 대한 반응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예일학파, 즉 미국 문학이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수용사인데, 이들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른 채 데리다를 읽음으로써 매우 비-맥락적으로 읽었기에 무수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반목과 교류로 이루어졌음을, 초기에 하버마스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데라다를 반혁명적, 보수주의자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복권하려는 불순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해체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계몽주의의 지속임을 이해하고 공동의 노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디우, 지젝, 이글턴 등의 인사들에게서는 오해와 오류가 여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비판을 정초하는 데 요구되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론(바디우)”이라던가, 폭력에 대항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보다 전체주의 공간을 열어준다(지젝)”고 주장하기도 하고, 차이의 철학들은 시장주도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데 적응케 하는 전술(이글턴,바디우)”이라는 뚱딴지같은 비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들은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5장은 데리다를 수용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데리다는 이제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장으로, 그리고 심화된 학습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문>과 함께, <에필로그>도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유행이 아니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제도에 대한 비판, 텍스트들에 작동하는 힘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면밀한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인류의 부채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타자는 존재한다. 아무쪼록 학자의 야심을 억제하고, 데리다의 읽기로 이끄는 이 아름다운 저술물을 생산해 낸 제임스 K.A. 스미스교수와 윤동민 번역자에 감사를 전한다.

 

언어적 전희가 언어를 망각하거나 폄하하는 경향, 철학은 단지 담론이라는 매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언어의 2차적 성격,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서구 사상의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방식으로서 해체를 주장했던 20세기 타자의 자리를 주목했던 위대한 사상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게 잠복했던 데리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읽기를 회피하며 정당화했던 편협한 정신을 털어내기에 충분한 읽기가 되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비밀의 취향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를 다시 펼쳐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그 수고가 결코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저술을 읽는 독자는 데리다 읽기에 나처럼 나설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수월함이 있다. <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단연 최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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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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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소설은 물론 일기에 이르는 출간된 대다수의 망라된 작품으로부터 북큐레이터 박예진이 발췌 인용한 212 꼭지의 문장(sentence)과 해당 작품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이끌어내는 섬광같은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소설 작품을 몇 개의 문장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처럼 연대기적 서사라기보다는 의식과 현실과 가상의 혼합된 흐름을 형식으로 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박예진 작가의 말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서, 아마 이 말은 한 인간 생의 단독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감히 전체적 시선으로 조망하는 문학적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의 소설을 비롯한 에세이들은 다채롭게 엮여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되어왔지만, 그 모두를 두루 읽는다는 것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서는 사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읽기는 했지만 작품 속으로 마냥 뛰어 들어가지 못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마 여기에 인용된 문장들과 해설은 해당 작품들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작품으로 다시 달려가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사회적 구조와 규율, 성차별, 타인의 시선에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의 창조력이 그 갇힌 벽에 모두 스며들었다, 그 한계에 이미 이르렀으니, 이제부터 펜과 붓으로 정치와 사업과 사회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웅변인 자기만의 방이나 3기니에 울려 퍼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에세이가 책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도 어쩌면 이 책의 하나의 의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작품들 개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발견과 표현을 통해 독립된 개체의 성숙한 인간으로의 성장과정을 담아낸 초기작 출항에서부터 50년에 걸친 중산층의 연대기로서 생의 유한과 영속성을 말하는 세월에 이르는 10편의 소설에 대한 엮은이 박예진만의 고유한 해석은 독자와 감상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되어준다.

 


일례로 결혼과 배우자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낭만적 열정이나 우아한 감수성의 로맨스인가 아니면 이성과 분별이 담긴 관계인가를 밤과 낮의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더불어 사유할 수 있으며, 삶과 기억의 형성과 변화를 통해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여성성의 정체를 확인코자 하려면 등대로 읽어보아야만 할 것 같은 어떤 강한 촉발, 유혹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읽어본 작품은 물론 알지 못하는 작품에까지 은근한 열망이 독서 애호가의 마음에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

 

너무도 뻔해서 시선을 주지않고 그저 넘겼던 문장이 새롭게 눈에 밟혔는데, 제이콥의 방의 문장이다.

 

“The strange thing about life is that though the nature of it must have been apparent to every one for hundreds of years, no one has left any adequate account of it.”

인생에 대한 이상한 점은 수백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그 본질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지만, 누구도 충분히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인간의 내적 복잡성과 심리적 상태를 경험해보는 훌륭한 독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엮은이의 해설은 이 작품을 새로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시금 읽도록 유인했다. 아마 여러 소설들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형식이 아니어서 읽다 덮어둔 작품이었다는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시 혹은 새로이 손에 들어야 할 작품들을 상기하거나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순종 코커스 스패니얼 혈통의 개인 플러시가 등장하는 소설 플러시의 발견이다.

 

극작가 미트포드가 자신의 개에게 계급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기 위해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에게 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 한다. 비타 색빌웨스트로부터 버지니아가 선물받은 강아지 핑카와 관련있는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인간과 동물이 나누는 섬세하고 충직한 감정의 교류가 표현되었다고 하니 관심이 동한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세 권의 소설을, 두 권은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으면 될 것이고, 한 권은 새로 구매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으니, 이 책은 단지 기억하는 자를 위한 선물을 넘어 강력한 독서의 자극이 되어주었다고 해야겠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버지니아의 세계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는 계기가 아니라 버지니아의 세계로 아예 침몰케 하는 강력한 도취제 같다. 버지니아 울프를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작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책장에 꽂혀 있는 버지니아의 책들 곁에 꽂아둔다. 소설 속 액자극(額子劇)에 들어가 끝없는 상상과 자유로운 감상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 막간의 한 문장으로 감상을 맺어야겠다.

 

거울이 깨지고, 이미지가 사라지고, 숲속 깊이의 녹색을 가진 낭만적인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보이는 그 사람의 껍질만 남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그곳은 얼마나 답답하고 천박하며, 황폐하게 벗겨졌으며, 눈에 띄는 세상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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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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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순우리말은 꽃차례라고 한단다. 무한(無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밖에서 속으로 피는 끝없는 실패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유한과 다른 추상과 거룩함의 방향성을 지시하려는 의도인 듯싶다. 이 시론집은 470개의 응축되고 예리하게 벼려진 생각들의 에피그램 모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성복 시인의 대학원 시 창작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이 개개의 에피그램들이 시()란 어떤 언어로 발설되어야 하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삶과 시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시()란 우리네 삶의 진실한 목소리,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일상의 모든 몸짓과 말 그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시인은 시의 에너지원은 세속이예요.”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있어요.”라는 말처럼, 시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을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엌에 숟가락 몇 개인지 쓰는 것이 곧 시라는 말이다.

 

뭐 좀 있어 보이는 소리는 다 헛소리예요. 절실하지 않으면서 쥐어짜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 치는 거예요.” - [언어-64], 33

 

인간 삶이란 것이 뭐 특별히 대단한 것이겠는가? 그러니 시로 개똥철학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저 사랑하고 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 생각도 좀 해주는 게 전부인 것을, 헛소리란 늘 자기 내면에 가까운 것이고, 뭔가 욕심내어 꽉 잡고 말하면 빨리 지치듯, 손에 힘을 빼는 것, 그것이 곧 시요, 삶의 진실이라 말하는 것일 테다.

 

책은 시론(詩論)’의 정수(精髓)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는 곧 우리네 삶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철학은 저절로 품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어느 쪽을 들춰도 이 말의 의미를 곧 발견할 수 있다.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수록되어있는 신문은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매일 읽는 그녀가 있다. 그저 일상의 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삶의 실 면목 전체를 본 듯한 인상이 남는다. 그러면서 묻는 듯하다. 당신의 삶이란 뭐 다른가 하고.

 

매일 아침 그녀는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읽는다 매일 아침 그녀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그녀가 모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 [中略] ....

그녀의 굵은 허리는 점점 아래로 깔리고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이 헐겁게 떨어질 때,

문간에 내놓은 음식 쟁반처럼 그녀의

얼굴 위로 구겨진 신문지가 내려 덮인다

 -신문,래여애반다라,2013.1 문학과지성사

 

시의 언어, 대상에 대해서, 시와 시 쓰기, 시와 삶의 관계성에 대한 오랜 통찰의 언어들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어 감히 어느 한 구절을 선택하여 말하는 것은 수많은 진실을 누락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선각(先覺)과 같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내 애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 하는 거예요.”라는 시의 대상에 대한 아포리즘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곳에서 모든 사연을 지워버리고 그리고로 시작해보세요 [...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고 이후예요.”라고 시는 일단 모르는 데서 시작할 때 진정한 시가 됨을, 그리고 삶의 관계에 이르러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야 들을 수 있어요. 귀는 평등성이에요. 작가는 듣는 사람이에요. 안 들으면 안보여요. 소통이란 내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거예요.”에 도달함으로써 시는 자기 머릿속에서 꺼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이어야 함을, 그래서 불리하고 불편한 말이 되고 그게 곧 진실의 목소리임을 깨우치게 한다.

 

시 쓰기는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혹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 [-212], 86

 

시가 안락하고 위로를 말하면 그건 분명 거짓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고, 마지막 표정 하나 얻기 위해 인생 전체가 걸려있는 그런 헛소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는 착한 소리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귓속에 들려오는 쌍욕처럼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며, 쓰는 사람 자신을 겨냥한 살기(殺氣)가 서려있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진실은 늘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는 글들이 있다. 아마 헛소리이고 거짓말의 맨 얼굴일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돌아보게 한 구절이 있는데, 남들에게서 내가 비난하는 것은 내 안에 다 있어요.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한테 속는 거예요.”라는, 아마 이 절대적인 진실의 목소리를 수시로 잊어버리는 망각증상의 환기였다. 시는 자기 의심으로 시작하고 그 의심으로 끝나야 하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서 진실은 어슴푸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어떤 말이 자기 대신 남을 베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에요. 하지 마세요.”, 내가 진실이라 내뱉기 시작하면서 그 진실이란 것에는 거짓이 함께 따라 들어오고 있음을 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못된 말을 던지곤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말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결코 시와 우리네 삶의 언어는 남을 향한 것이 아님을.

 

무언가를 볼 때는 항상 그것의 초라함과 속절없음을 보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 [대상-112], 51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언어일 때 시가 됨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가 줄곧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향해 있었듯 시인 고유의 문학관일 것이다. 시는 이처럼 밑바닥에 인생이 있어야 하고, 남과 세상의 사물, 사건을 듣는 것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배운다. 남을 향한 비난과 살벌함을 담은,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그것이 천박한 포르노와 다르지 않음을, 때문에 시는 이것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조차 에로티시즘으로 하여야 하는 까닭을 또한 배운다. 보여준다고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힘이 사라져버림을.

 

시의 대상(對象), 시작(詩作)과 삶의 관계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이 시론의 일례로써 다음에 인용하는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그날의 일부분으로 소회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시론집은 엄숙하거나 난해한 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한, 다시말해 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다. 그래서 시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보다 가까이 시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쓰는 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리라 여겨진다.

 

.......... (前略) .........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그날, 1992.1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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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7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독한 책입니다.^^

필리아 2024-01-17 14:5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성복 시인의 낮은 곳으로 향한 시선을 좋아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