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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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해야겠다. 편저자(이하 저자라 표기함)존 캐리는 서문에서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으로써 목격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는 글의 선택기준에 따라 엮은 르포르타주 성격의 모음집임을 밝히고 있다. 즉 글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한에서 생생한 현실의 사건으로 독자가 안내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자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장성이 지닌 숨이 빠르고 주관적이고 불완전하기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는 유익이 있기도 하지만, 글의 정교함과 객관적 재현성의 불비라는 한계도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대해 그는 무서운 현실, 뜻밖의 현실과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이라는 르포르타주의 성격이야말로 어떤 의도된 덧칠이 없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규명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후일로 미루기로 한다.(책의 본질을 벗어난 얘기가 될 테니 말이다.)

 

한편 이 책의 한글 번역 제목이 왜 역사의 원전인가의 물음이다. 물론 2500년에 걸친 글들(르포르타주 성격)이다보니 당연히 연대기적 역사서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자칫 저자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기록의 원형들이니 가능한 제목이긴 하지만, 181개 꼭지의 글들 개개의 문체가 지닌 개별성에 주목해서, 닳고 닳은 언어의 추상화를 이겨낸 기록자 개인의 경험으로 읽히기를 의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도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어지러운 다양성을 정돈하기 위해 포괄적 용어들을 이용해 일반화하여 언어의 회색담요 밑으로 사실을 가리지 않은 기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 생명력 없는 객관성의 재현으로서의 역사 서술과 다른 글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 눈으로 봤다!”는 글들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기병대가 적의 우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라는 따위의 기록같지 않은 기록, ()살상의 구체적 표현을 철저히 피하는 이러한 완곡한 서술은 실제를 감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실이 감추어져 있는 글로서 여기 수록된 기록들과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576114일 스페인군의 네덜란드 앤트워프 약탈 기록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기록자인 영국 상인은 시체와 핏덩이로 엉망진창이 된 길거리의 추하고 더러움도 기록하지 않겠다. 매장하지 않는 시체가 썩어가면서 뿜는 독기가 공기에 가득 차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고 쓰고 있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의 기록은 현재성과 구체성을 담고 있다. 열흘 넘게 지속된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앤트워프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무차별적 학살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스페인의 만행을 제3국 이방인의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어떤 황급함으로 인해 예리한 위기감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현장성이 생동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이 대형판형인 이 책의 페이지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끝으로 르포르타주가 지닌 선정성(煽情性)의 문제이다. 사실 선정성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수사인지는 모르겠다. 르포르타주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호기심의 도구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네 뉴스 기사처럼 살인, 학살, 사고, 재해, 전쟁...등등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르포르타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인데, 어쩌면 이조차도 인간 욕망의 본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이나 소외와 고통을 생생히 그려내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봄(듣거나)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겪지 않고 있다는 불멸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곧 이것은 일종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르포르타주는 그래서 종교의 자연적 후계자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르포르타주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심리 저류에는 진정 이러한 종교적 갈망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

 


2500년 인간 역사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기록들이 지닌 생명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마치 살인 선집(殺人選集)”이 될 우려가 있어 이를 완화하려 의도했음에도 인간의 역사적 현장은 피로 얼룩진 것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81개의 기록들 중 3분의 2를 넘는 기록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수많은 전쟁과 약탈, 각종 재난과 또 죽음과 살인, 비열한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 정치적 적에 대한 고문과 처형, 그리고 또 살인, 농민, 노동자 저항과 학살..., 사실 읽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 아예 인간 역사의 기록은 살인과 죽음의 기록이라고 해두자.

 

책을 처음 여는 기록이 BC 430년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아테네를 강타한 역병의 모습이다. 대책없이 죽어가는, 즉은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차 있으며, 이로인해 법질서가 붕괴되고 매장 예법의 대혼란으로 절망에 빠진 아테네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니 이 기록은 오늘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 초기 상황이 아테네에 불리했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BC 401년 그리스 용병 부대원으로 페르시아 정벌에 참전했다 패퇴하여 혈로를 찾아 헤매던 크세노폰(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크세노폰 맞다)의 생생한 글이다.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은 병사들과 동상으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동료들을 버려두고 생존의 도주를 하는 한 인간의 혼돈의 걸음이 눈에 밟히는 것 같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주로에 발견된 마을을 불시에 덮치는 장면들...,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인간의 생존을 향한 의식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의 철학토론의 글들이 친근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읽다보면 역사의 반복되는 동일유사성이 저절로 느껴지는데, 12세기에 국왕 헨리와의 반목으로 처형되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게트의 살해 현장을 기록한 한 사제의 글은 16세기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처형으로 반복되는 수도사의 현장 기록으로 복사된 듯 출현하는데, 죽음에 처하는 두 사람의 대주교 모두 왕에 빌붙어 그 지원으로 대주교가 되자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닮아있다. 야심을 위해 최고 권력의 심복처럼 굴다가, 척을 지는 것이 어찌 그렇게 동일한지 인간 욕망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비참한 죽음임을 후대에 알려주려 했던 것만 같다.(지금 한국 정치권력의 동일 유사함은 구태여 말하지 않으련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과 그 진압에 가해지는 권력의 잔악한 학살의 역사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지역을 망라해서 수없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1851124일 나폴레옹의 파리 진압 현장을 쓴 빅토르 위고의 기록은 인간이란 종의 극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병력 16,400명이 파리에 집결해 눈 깜짝 할 사이에 하나의 도시를 도살장으로 변모시키는 지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총소리 한 방을 신호로 하여 탄환의 소나기가 군중에게 쏟아지지 시작했다.(...) 파리 전체의 4분의 1이 날아다니는 탄환과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 병사들은 아이를 끌어내 죽였다. 웃어대면서 아이의 상처를 칼로 벌려가며 구경했다. (...) 빈둥대다가는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 지하실에도 공기구멍으로 총을 쏘아댔다. 학살일 뿐이었다. 학살은 방사(放射)되어 나갔다. (...) 병사가 행인을 죽인다. 찔러라, 후려쳐라, 베어라! 광란의 살육이었다. (...) 이 범죄, 이 도살, 이 비극을 나는 목격했다.” - 빅토르 위고, <루이 나폴레옹 군대의 파리 진압, 1851.12.4.>

 

190519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기자가 쓴 르포르타주인데,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을 향해 청원을 위해 평화행진을 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궁전 앞 광장에 이르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무차별 사격을 통해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대()유혈 사태의 현장 취재기록이 있는가하면, 191671, 1차 대전의 한 격전장이었던 솜 강() 전투의 부상자 구호소에 참여했던 한 신부의 참담한 기록도 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 광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부상자들은 문자 그대로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못 받아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 , 너무 피곤해서 더 쓰지 못하겠다. (...) 이제 전쟁의 흉측함을 좀 알 것 같다. 하루에 1,000명씩 중상자가 나오는 판에 (...)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아주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대면하고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그 현장성이 주는 생동감이 높은 글이다. 1933227일 독일 의사당이 화재에 휩싸였는데, 이 날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화재 현장에 히틀러가 직접 나온 것이다. 외신기자인 영국인은 히틀러와 그 측근들의 무리를 따라 현장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히틀러가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임을 하느님은 알고 있소, 당신은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있소, 이 불이 그 시작이오.’” , 이 화재 사건은 히틀러 나치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를 탄압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획한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화재현장을 관리하던 내무장관 괴링 대령에게는 하늘이 내린 계시오. (... ) 이 못된 해충들을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는 데 아무 망설일 필요가 없소라고 주위사람들이 들으란 듯 정치적 적대자들을 숙청할 기회임을 시사한다.

 

폴란드 도시 오수비엔침 인근에 1940년 세워진 제1수용소가 아우슈비츠이고, 194110월에 추가로 세워진 제2수용소를 비르케나우라 부른다. 비르케나우에 SS(나치 친위대)가 직접 처형시설을 만들어, 시간당 1천명을 소각할 수 있는 거대한 지옥을 완성했다.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 기록이다. 트럭이 서자 마치 감자나 석탄 짐 내릴 때처럼 짐칸을 기울여 올려 우리를 쏟아냈습니다. 샤워장 같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조그만 창문에서 연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출처폐허가 된 드레스덴 시가 전경첵 755


2차 대전 전쟁 기록과 함께 생체 실험의 역겹고 참혹한 실상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외과의사 면허 소지자였던 기록자는 독일 의사들의 조수로써 해부 외과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을 현대 의학의 선도자로 만들게 했던 사악한 각종 생체 실험들이 즐비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독하게 잔인한 실험의 상세 기술 내용은 옮기지 않겠다. 인간 아닌 인간들, 이 모순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1945214일 영국과 미군 폭격기에 의해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완전히 파괴되고 도시민이 몰살된 현장의 참혹한 기록은 시민들의 잘못된 국가 리더의 선택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돌아 오는지에 대한 냉혹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이 방대한 인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글들을 읽다보면 과연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게 된다. 아마 이러한 자기 성찰적 물음은 눈을 감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일 게다. 한국전쟁도 세 꼭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1970년대의 한 사건으로 맺고 있다. 인류는 자신들의 문명을 으스대고 있지만, 여기 수록된 르포르타주들은 그 문명이란 것의 민낯이란 타인의 죽음을 딛고 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살해와 학살이란 적나라한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그리스 신전의 부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화재의 약탈과 파손, 약소국의 노동력과 자원 약탈을 위한 무자비한 탄압과 광범위한 학살이 동반되는 현장의 기록들이 살해선집으로서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구성된 일견 낭만적이거나 새로운 문화적 이기의 현장 이야기들로도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은 르포르타주, 즉 보도기획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소설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체기술에 대한 참조 도서가 될 수 있으리라. 또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원전(原典)을 참조하는 안내서로서 유용한 도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들은 대체 2,500년간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이 문명이란 것은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지엄한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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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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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정령이 의인화된 존재로서 나는 추상성을 즐긴다.(17)”고 작가 토마스 만은 구체적 현실의 인물로서의 개별성을 지우고 인간 일반이라는 추상에 숨어드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나치가 패망하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1951년 발표된 작가의 후기 말년의 소설이다. 그는 비록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표면적 도피의 외형을 보였으나, 문학은 정치적 소명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회색지대의 인간으로 비난을 면치 못 한 것도 사실이다.

 

들어가는 말 [*소설 내용이 일부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이 소설은 12세기 독일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한, 즉 신화적 소재를 끌어들여 현실적 문제를 형상화 시킨 인간애와 죄와 구원의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닮은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여 이중의 죄악과 신성모독, 그리고 혹독한 참회와 신의 은총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해피엔딩이다. 이 거듭되는 육체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이야기의 정령으로 베네딕트회 사제인 클레멘스의 입을 빌린 것이나, 그가 반복하여 성스러운 띠를 두른 나로서는과 같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작가의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화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심인물로 추정컨대 6세기 말의 기독교 세계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주장처럼 시대의 규명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에 앉아 특별한 교화로서 사제 클레멘스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시대를 알 수 없다는 것과, 이야기 정령의 시간과 장소의 편재성, 20세기 어느 날이기도 하며, 21세기 바로 오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바로 오늘의 현실적 현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으로 가득 찬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도(거센 파도)와 같은 종소리! , , 수많은 종이 진동하고 흔들리고 있다.” 

- 9, 372

 

소설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동일 유사하게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아주 다르게 다가온다. 첫 문장에서는 바빌론 언어의 혼란처럼 뒤엉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전쟁 후 책임 소재와 그 처벌과 용서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같다. 그런데 이 문장이 다시 기술되는 곳에서는 하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에 감동되어(...) 일곱 교구의 종이라는 종이 모두 저절로 힘차게 흔들리며화합과 관용을 담은 은총의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속이 거북해짐을 느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는 이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초월적 관용의 도덕에 기만과 위선의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그래서 나는 이 혼돈의 양가감정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라는 의혹 속에서 토씨까지 면밀히 읽었다.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는 이미 거장의 솜씨로 숙성된 소설가의 재능만큼 매혹적이다. 플랑드르 및 아르투아의 군주 그리말트와 그의 부인 바두헤나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는다. 바두헤나는 아이들의 출산과 함께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함께 태어난 아이들, 빌리기스와 지빌라 남매는 자신들만큼 고귀한 존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민의식과 더불어 서로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깊은 사랑을 공유하며 성장한다. 아버지인 그라말트 군주가 죽은 날, 오빠가 누이동생과 남자로서 여자와 동침한다. 그때 두 사람의 침실 사이에 있던 개 하네기프가 울부짖자 빌리기스는 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야기 정령은 사랑과 살해, 육체의 위기가 뭉쳐진 덩어리였다.”고 절묘한 어둠의 미학을 뽐낸다.

 

죄악은 열매를 빨리 맺어 두 사람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군주가 된 빌리기스는 참회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묘(聖墓) 순례길에 오른다. 지빌라는 충성스런 귀족의 수성(水城)에 은거하여 아들을 출산하지만 황제의 품위를 지닌 아이는 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는 아이다. 아이를 신의 손에 맡기기 위해 출생내력과 함께 상징적인 옷감과 금화를 넣은 통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이에 대해 정령은 빌리기스 남매 이야기는 측정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의 은총에 관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나치의 순혈주의, 자기 동일화라는 복제적 생산 행위가 신의 은총을 입증하는 행위라는 괴변(怪變)을 주절거린다. 역겨움이 올라오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그칠 수 없다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계속 읽어나간다.

 

순례길에 나섰던 남편이자 오빠인 빌리기스의 죽음 소식이 전해오고 지빌라는 분명 죄 많은 여인임을 자인하지만 오빠의 죽음이라는 신의 권고를 영원히 부인하겠다고 다짐한다. 생명이 끊어진 수녀 같은 군주로서 죄를 범했던 벨라페르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만에 있는 브뤼주성에서 은둔하며 참회하는 금욕 생활을 한다. 뛰어난 미색의 여자 군주를 손에 넣으려는 뾰족수염의 로저라는 아레라트 왕위를 계승한 악마같은 놈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플랑두르를 무력 침공한다.

 


일명 연애전쟁으로 불리는 저주스런 전쟁이 계속된다. 바다로 띄워 보냈던 아기는 폭풍우 치는 둘 째 날 어부들에 발견되어, 노르만 군도의 작은 외딴 섬 성둔스탄의 아고니아 데이(신의 고뇌) 수도원 원장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거두어진다. 통 속에 아이와 함께 발견된 아이는 부모의 형제이며 조카가 된다는”  서판의 내용을 읽고는 신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고난으로 삼으셨다.”, 명백하게 계시된 신의 계획에 따라 신중하고 현명하게 아이를 양육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젖형제로 키워진 플란의 코에 집중된 일격을 가한 우연의 사건으로부터 출생의 모호한 비밀과 주변 인간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자기 억압의 의혹으로부터의 해방을 맞는다. 수도원장의 위엄있는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그레고리우스는 통 속의 옷감으로 기사의 옷을 지어입고, 원장이 증식시켜 놓은 금화를 지니고 삼촌이자 고모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알지 못하는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성장한 아이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괴물성이 지닌 죄악을 말할 때 네가 과장해서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아주 고귀한 태생이라는 사실이라며 그의 입을 통해 다시금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개 낀 바다를 표류한지 17일 만에 저항하는 최후의 도시에 도달하게 되고,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 군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청년기사, 자칭 물고기 기사인 그레고리우스는 참회의 일환으로 기꺼이 여 군주를 위해 적과 싸울 것을, 군주의 승인을 청하고, 그것은 수락된다. 남자대 남자로 뾰족수염 로저와 싸우는 것이 단지 여왕을 위해서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여왕을 얻기 위해싸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절대적으로 온힘을 집중해 꼭 쥔 손을 통해 폐허가 된 나라에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여왕은 결사적으로 자기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낀다. 여왕은 통 속에 넣었던 똑 같은 옷감이라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하며, 조롱하듯 타오르는 망상, 사라져버린 이성에 의해 스스로 낳은 죄악의 자식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또 하나 숨겨진 야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순혈주의에 도전한 인접국의 구혼자를 뾰족 수염 로저라고 당대를 휩쓸던 사회생물학의 우생주의가 유대인에게 덧씌운 이질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곤 여지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레고리우스에게 포획되는 것으로 그려, 나치의 유대학살을 미화한다. 지독하고 집요한 독일의 순혈주의, 타자에 대한 극렬한 혐오가 여전히 토마스 만 의식의 저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두 사람은 국가적 결혼을 치루고 거짓으로 세워진 행복 위에서 두 아이를 낳는다. 진실은 다시금 드러나고, 두 사람, 아들이자 조카이며 남편 그레고리우스와 어머니이자 고모이며 아내인 지빌라는 생각의 몰락, 세상의 몰락이 닥쳐왔음을, 첩첩이 쌓인 죄악과 신성모독에 대한 참회의 길만이 자신들의 앞에 드리워졌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이야기 정령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절망할 수 있어도 신과 그의 충만한 은총에 대해서는 절망 할 수 없다.”, 그들의 죄과를 신의 초월적 구원에 맡겨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다. 문학 거장으로서의 미학적 성취와 달리 토마스 만이라는 한 인간의 기울어진 도덕성을 발견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레고리우스는 여왕의 남편, 대공의 자리를 버리고 혹독한 참회의 길에 나서고, 여왕은 나라를 사촌에게 위양하고 노숙자, 병자, 불구자, 나환자들을 위한 보호소에서 그들을 위한 낮은 자리에서 20년의 일생을 바친다. 그레고리우스는 지독한 불신자인 성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어부에 의해 호수 가운데 외따로 높이 솟은 바위에 사슬에 매여 버려지고 그렇게 그는 17년을, 퇴화된 사지를 지닌 고슴도치 같은 작은 몸이 되어 참회의 시간을 보낸다. 이 지독한 참회의 세월을 보내고 신의 계시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역사에 써진 교황 그레고리우스다.

 

마치면서

 

크나큰 지옥의 열매들에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 이야기 정령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행복할지어다.”라고, 17, 20년의 참회는 엄청난 것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며 이 만큼의 시간으로 신에 참회하면 모든 죄과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정의를 잊으라고 말 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던 카뮈의 목소리가 이 파렴치한 목소리에 대항하여 들린다. 나는 이 소설이 노회(老獪)한 작가 토마스 만의 자기기만, 자기 사면의 언어로 읽힌다. 어찌 이 자기 동일성 반복의 폭력, 타자 배제의 참혹한 역사의 당사자들을 위해 환희의 종소리가 울리고 영광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이야기 정령에 은닉된 목소리들에서 인류의 오래된 전체주의적 욕망만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연 오독일까? 인류에 혹독한 과오와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에 면죄부를 주려는 이 세련된 수사에 지옥 불이 내려치기를! 이 작품은 이러한 파렴치의 존재가 언제나 인간의 윤리를 혼돈으로 내몰고 있음의 증거로서 거듭 읽혀야 할 악마의 이야기 일 것이다. 자기 참회의 길을 걷는다면 그 어떤 죄악도 용서되어야 하는, 즉 자연의 절대 진리가 되었건 우주 창조의 유일자가 되었건 그 무엇으로 표현되던 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영예와 은총을 부여하는 관용의 윤리에 나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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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8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회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필리아 2024-01-28 19:16   좋아요 0 | URL
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죠.
용서한다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죄 지은 자의 내면의 문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이는 문제인 죄 지은 자가 타자에 저지른 해악의 당사자로서 ‘응당의 처분‘에 관한 것이 이 구원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을 학살하고 그 응당의 처벌이 사라지는 것이 정당한 윤리일까요?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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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토리노 태생의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인간 조건에 대한 명상록이자 회고록이기도 한 주기율표는 독특한 구성으로 역사와 철학과 윤리의 성찰로 독자를 이끈다. 주기율표상의 원소마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유대인 마을의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어머니의 어머니들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을 엮어 이 세계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경쾌하게 써내고 있는 저술이다.

 

내 학부시절은 군사계엄이 연속되는 시대를 관통했다. 대학 정문은 계엄군이 가로막고 서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대자보에는 파쇼라는 수식어가 붙어 당시 군사독재 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곤 했다. 파시스트라는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대중을 향한 언어는 단순 명쾌해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한 마디로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며, 그 하나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이념이다. 즉 한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키 위해 권력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 이외의 그 어떤 다름도 부정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작금의 검찰 독재권력이 요구하는 것이 이러한 자기 동일성의 강요이다.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국민적 요구는 자기들과 다른 것이기에 부정되고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며, 급기야는 폭력과 살상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권력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전 토리노대학 화학과 최우등 졸업생으로 유망한 미래가 기대되던 청년이었다. 때문에 이 저작이 화학 원소마다에 꼬리를 문 회상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연(Zn)의 장에 있는 글인데, 그의 학부시절 실험수업의 한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회상이다. 실험 조교는 그에게 아연을 주고는 황산아연을 제조하라는 과제를 부과했다. 실험실에는 황산용액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에 쉽사리 주어진 과제를 제조할 수 있다. 즉 황산과 아연을 결합시키면 되는 것이니 단순하게 보인다. 그런데, 순수한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아연은 황산과 반응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으켜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생성하려면 불순물, 즉 다른 물질이 존재하여야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아연이 담긴 묽은 황산용액에 황산구리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불순물이 첨가되자 반응이 시작된다. 하얀 모피처럼 수소기포가 아연을 둘러싸고 황산아연으로 결합 반응을 시작한다. 우리네 삶과 사회의 생명력이란 이처럼 불순물이 필요하다. 사실 땅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키워내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시즘, 검찰 독재권력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금하고 배제하기까지 한다. 이 세계에는 결코 얼룩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게 존재한다면 정말 역겹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생존과 진화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은 이처럼 다름과 차이의 수용과 결합이 중추를 이룬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화학, 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여 단계마다 검증이 가능하고, 방송이나 신문처럼 거짓말과 공허함이 난마처럼 뒤얽힌 것이 아닌 화학이야말로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 윤리적 성찰로 견인하는 사유들이 빼곡한 이 저작이 지금 내 시선에 들어 온 것이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이 세계의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52,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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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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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지식 체계에 뚫린 구멍이다.” - Jaques Lacan

 

책의 제목에 라캉(Jaques Lacan)’이 있다고 겁낼 것 없다. 현학(玄學)의 언어로 지식을 뽐내는 그런 책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그런 지식의 기만과 불완전성을, 그러한 지식들이 이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런 지식체계의 균열과 틈으로 드러난 텅 빈 구멍, 허무의 진리와 마주하여 삶을 갱신토록 안내하고 있는 저작이기에 더욱 그렇다. ‘유령은 이 세계를 매끈하게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지식들이 그 존재를 부인한 것들에 대한 명명이다. 유령의 출몰은 세계를 설명하는 지식체계를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진리로의 초대이다, 어두운 심연, 텅 빈 구멍으로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 지식이란 환영에 불과함을.

 

바로 이 유령을 책의 저자는 미술의 역사를 수놓은 예술작품들의 비유를 통해 세계의 진실로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인류의 노력을 차단하려는 지배질서의 기만과 거짓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없음의 있음을 알려주는 유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리에 대한 욕망을 그칠 수 없음을 말한다. 특히 책의 제목처럼 미술관의 유령들이니 시각 이미지(회화,사진,영상etc.)’를 이러한 지식과 대립항으로 세계의 진실을, 진리를 향한 소재들이 되어 이 세계-현실을 직조하는 지식의 장막, 그 허구성을 감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장막 너머 진리를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삶에 대한 겸허와 갱신의 욕망을 다지고 지속하게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 즉 배우고 경험한 것, 그래서 습관화된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라캉은 이를 시관(視觀)적 장(champ scopique)’이라 하여 눈은 단지 시각적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충동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시관충동의 영향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 지식 내의 관점을 이탈하여 그 바깥을, 지식의 균열점을 보기위해서는 비상한 노력과 고통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불규칙을 지우고 기하학적 원근법과 같은 규칙과 지엄한 유일신 종교의 규범이 세계 이미지를 억압하고 길들이던 세계라면 더욱 진리로의 접근은 어려운 길일 수밖에 없다. 길들여진 세계 내 지식과 진리의 길을 보기위해 유령이 출현하는 두 회화작품의 비교는 이 대립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비유가 되어준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50년경, 본책 53쪽에서


먼저 이미지 통제, 즉 지배질서에 대한 열망이 넘쳐흐르는, 모든 불규칙 요소를 말끔히 제거하고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것을 향하게 하는 원근법의 철저한 반영으로 그려진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파울로 우첼로의 그림 <산로마노 전투,1450년경>는 혼돈의 속성을 박탈하고 죽은 병사와 투구들을 소실점을 향해 인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당대에는 이 그림이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2, 본책 91쪽에서


이와 대비되어 카르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 1602>는 당대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귀족사회의 종교적 담론의 안정된 일관성을 찢고 어두운 심연,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원근법을 파괴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박하고 경박한 당대 부랑인의 모습을 한 이들이 신성에 대한 의심을 보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지식체계의 기만을 고발한다. 두 그림 중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가? 카라바조는 자신을 지배하는 체화된 지식을 벗어나 완전한 백지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을 스냅 사진 찍듯 담아낸 극단적 리얼리티 기술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해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문신을 단 번에 뛰어넘었으며, 그 대상은 범속함, 세계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하는 진리의 사건을 묘사했다. 초라함과 기괴함의 형상으로, 조야함으로 출현해 지식의 장막을 찢는다.

 

길들여진 눈, 닫힌 눈을 이탈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을 쫓으려는 윤리적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지식이란 한결같이 매끈한 아름다움만을 말하려하고, 그래서 낯선 것, 이질적인 것,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억압하고 길들이며, 이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고는 마치 이 세계는 늘 완전하게 매끈한 실재의 세계라고 허구를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렇게 다른 것들을, 출몰하는 유령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계는 필연적인 폐쇄적 세계이고, 자기 동일성만을 인정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전체주의의 잔혹성이 지배하는 파시즘의 무도한 세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듯 진실을 거세하고 자기 체계를 유지하려는 지배 지식이 수행하는 일관된 억압과 방어의 장치들을 만나게 한다. 정상과 비정상(광기)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기 그지없는 악착스러운 분류와 범주화에서부터 오늘날 텔레비전 영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 질서의 패러다임이 지배규범과 닮지 않은 이미지들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은 물론, 자유와 박애, 평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까지 상품 속으로 매몰시켜 본래 의미의 사유 가능성을 파괴 상실시키는 현장을 목도케 하기도 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언제나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이기도한 공백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것이고, 억압함으로써 자기 체계의 완결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 하는 것임을 납득케 한다.

 

아마 이 저술의 하이라이트는 인문학적 전회(轉回)라 할 수 있는 현대 미술이 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계 재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왜 유독 유령들의 출몰이 캔버스와 화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저자는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의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초월적이며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 의한 진리 실체를 그리려는 행위였다면, 20세기 이후 인간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초월적 무언가의 존재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라 말한다.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텅 빈 공허, 검은 심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라는 저술의 <서문>을 쓴 프랑수아 리보네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허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대한 유희이고, 위대한 양식이다. (...), 허무주의? 아니다. 허무주의는 엄밀히 말해 공허의 망각이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시스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돌려버리는 힘으로 인해 허무적이다.”

-출처: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프랑수아 리보네 <서문> 민음사 2012

 

이제 미술은 세계의 진실인 공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진리, 텅 빈 구멍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배 지식의 장막이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쳐진 오늘의 세계에서 그 허방을 상상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리만큼 난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소멸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는 사진 예술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의 유령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통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욕망의 실패를 드러내는 앤디 워홀의 복제 이미지들 속의 우연한 얼룩의 형태처럼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무시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이 두 반복 사이에서도 완전함의 균열을, 이 세계 지식의 불완전성과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유령을 출몰시켜 진리의 허방으로 우리의 인식을 데려다주려는 허무의 형식으로 규범의 해체로 이끄는 소피칼의 사진 이미지에서, 비상식적 시간성을 통해 질서가 부재하는 공간으로 우리들을 내던지게 하는 빌 비올라의 영상 이미지까지 공백을 소환하는 절차를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타자로부터 주어진 이미지와 의미에 속박되어 세계를 오인하는 우리들을 건져낸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공백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둘러쳐진 장막(스크린) 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들 일상의 토대를 채우는 모든 가치 체계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고 갇히는 순간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처럼 처절한 퇴행과 독단의 폭력이 점령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령이란 그 속성처럼 포착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능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창조적이고 사랑과 정의, 진리가 인정되는 세계를 살아 갈 수 있으리라.

 

고작 죽은 문자인 텍스트를 읽는 뉴스 앵커의 이미지는 어떠한 진리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바로 그 이미지가 시대의 보편적 진리 형상과 만나고 있다는 환상임을 입증하고 있다. 대항하는 모든 비판적 견해에 대해 격렬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시즘의 욕망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력사회에 들어선 오늘 한국사회에서 우리들은 실재와 환상을, 진실과 거짓이미지를 분별하기 위해, 지배질서 저 너머를 보기 위해 공백의 자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세계에 안주하여 지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 넘어서 보지 않으려하면 결코 진실의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억압과 공포만이 넘실대는 세계만이 주위를 포획할 것이다.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지식체계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 저술은 그 어떤 지식체계도 그 자체로 완전한 체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유령 이미지로의 초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성을 지니고 다가온다. 미술 작품과 함께 라캉적 사유를 함께하며 닫힌 인식 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새로운 삶의 시선으로 갱신하는 기회가 되어 줄 터이다. 아름다운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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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라이브 이론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윤동민 옮김 / 책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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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저술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저작들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異論)들과 비판으로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방해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 대중적 읽기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기성의 제도들에 대한 일종의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바이러스라고 보는 일체의 현상유지 수호자들의 근거가 취약한 비난들이기도하고, 논설과 담화의 지면 등 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현상학과 프랑스 철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빈대학 철학교수인 저자 제임스 K.A. 스미스는 이처럼 데리다에게 부여된 괴물성의 신화에 깃든 오류를 벗겨낸다.

 

데리다를 비판한 이들은 데리다의 사상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길들이고, 그 괴물성에서 자신들과 다른 것, 즉 두려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동종화하려 하는 익숙한 기득권적 욕망을 본다. 이 책은 이 만연한 데리다에 대한 신화를 탈신화하여 그 괴물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괴물성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원저작과 기획으로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초대이다. 해서 이 저작은 데리다를 읽기위한 대중적 입문서이자 하나의 촉매 역할을 위해 써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의 미덕을 하나 집고 가야겠다. 그간의 라이브 이론(Live theory)>시리즈로 간행되어왔던 저작들과 달리 평이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난해하다고 걱정하던 데리다 독자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교수와 번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책은 서론과 에필로그를 비롯 총 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론>1장인 <말과 사물>은 그야말로 데리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은 데리다에 씌워진 괴물성과 신화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히려 그 매도된 비난의 내용들로부터 데리다의 사상적 지향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명료성과 같은 말은 데리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다. 발화된 언어의 다의성을 일의성이라는 권위적 고착관계로 몰아가는 언어이니 말이다.

 

괴물이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뤄진 혼종적 생명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길함과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함과 낯섦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즉 규정할 수 있는 범주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 모호성에 붙이는 무지의 익숙한 기호이다. 이러한 거북함과 공포와 달리, 데리다의 사상을 야기한 수많은 철학적, -철학적 유령들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마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읽는 이들이 읽는 오류도 있다.

 

특히 데리다의 곡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했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데리다에게 케임브리지가 명예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수여반대자들이 극렬하게 표명한 내용들이다. “그의 작업 모두는 모든 학문분과가 기초하고 있는 증거와 논증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이라고 해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악의적 선전이 그 하나이고, ‘뉴욕 리브 오브 북스 사건으로 명명된 데리다의 사전 승인없이 리처드 월린이란 인물이 자기 논문집에 임의로 데리다의 글을 편집 출간한 일로 발단된 사건이다. 이에 항의하자 텍스트와 저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낸 해석학적 괴물이 갑자기 저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론과 수행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이들이 데리다를 길들이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천박한 공격들이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해체가 단순한 어떤 부정적 파기가 아님을, 파괴의 단순한 동의어거나, 분해하다라는 잘못된 의미로 전유되어 사용되는 오해를 바로잡는다. 해체는 재구축을 위해 분해하는, 즉 재구성적 의미를 가진 비판적 재구성이다. 해체는 무질서나 상대주의적 이해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하여 제도적 틀을 부수고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해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언어 표현이 있다. 해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에 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 소명이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환대와 환영이다. 결국 기성의 권위가 수호하려는 불완전하고 불의한 것들이 은폐한 것들의 수많은 영역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파괴함으로써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그 반대는 치졸하고 악의에 찬 것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추방되고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을 경험해야만 했던 알제리계 유대인 데리다를 읽기위한 예열이 충분히 된 것 같다. 1~3장은 데리다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4장은 데리다와 여타 사상가들의 관계를 개관하고, 5장은 해체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로서 인터뷰의 형식을 취해 주제들을 확장 사유토록 안내한다.

 

1<말과 사물>은 대다수의 학자나 비평가들이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고 넘어갔기에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데리다의 사상적 환경의 토대가 된 현상학, 특히 그의 스승인 후설의 비판을 통해 현상학의 공리들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그가 오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정신, 신체와 물질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려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결국은 신체라는 물질성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 진리라는 것, 즉 순수 정신인 이데아라는 것도 최초 고안자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내 형성물이다.

 

이렇게 내적 근원인 주관적 산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객관적 진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이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공동체가 창조되어야 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때에서 비로소 객관적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에서 헤겔, 후설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전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신체와 물질성이라는 오염을 은폐한 것으로 이데아를, 순수 정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념들의 부패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국 서구 철학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신체화되지 않은 객관성이라는 것에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화와 물질성을 말소하려는 욕망에 깃든 타자성에 대한 반감, 즉 로고스중심주의의 자민족중심주의와 서구형이상학의 강박증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데리다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유는 언어 없이 지속하지 않으며 언어가 공동의 산물인 한 자아는 사유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비밀의 취향P84)”를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데리다는 왜 해체하려 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객관성이란 것은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쓰기는 매개와 해석의 필연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공동체 안에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다.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 얽혀있는 폭력성을 찾아내기 위해 해체해야 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빼앗겼던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해체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 같다. 데리다의 주저(主著)목소리와 현상, 그마라톨로지의 상당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이다라 할 수 있다.

 

2<다른 문학, 문학으로서의 타자>철학의 여백들우편엽서등에 대한 간접적 읽기가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마라톨로지를 비롯한 방대한 데리다의 논문들과 여타 저술들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왜 데리다가 문학을 특권을 가진 철학의 타자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미 소개되었지만 해체는 다른 것의 여지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배제되었던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도의 틈과 균열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해체의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 철학은 일의성의 사유이다. 즉 타자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학은 일의성이라는 단일한 의미들의 이상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의 이상인 철학의 이상을 넘어서 흐르는 언어의 양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문학이 특권을 갖는 이유는 오염으로 여기는 문학을 통해 철학의 욕망을 심문하려는 것이고, 철학 스스로 자기-비판에 참여토록 하는 기획이랄 수 있다.

 

이로서 직접성(일의성)과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열망, 동일자의 공간으로 하고자 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언으로서 문학은 훌륭한 해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철학이 은유의 교통을 거부하면서도 닳아빠져 못쓰게 된 은유를 은근히 이용하는 역사적 행태에서 철학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중심부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문장인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맥락에 대한 통찰의 중요성의 설명도 있다. 아마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오독을 넘어서 비판적 독해로서 저자의 의도를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3<타자를 환영하기-윤리학, 환대, 종교>는 데리다의 사상을 관통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승계하는 해체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해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타자를 위한 자리 내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체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만, 기성의 학문과 비평의 세계에서는 1989년 카르도조 법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해체는 정의(Justice)!”고 말한 데리다가 비로소 공적 정치적 물음으로 전회하였다고 해석하였던 모양이다.

 

데리다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자들의 오류가 이때에야 자기 오류를 인식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해체할 수 없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해체 작업에 착수한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그 간격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의로 법과 제도들을 괴롭히고 잠 못들고 깨어있도록 괴롭히는 작업임을 밝힌다. 수구적인 기득권 집단이 데리다의 해체를 그렇게 폄하하고 조롱하며, 괴물 취급을 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멋진 정의의 역설, 세계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책임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결정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규칙에 괄호치기이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결정이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규제없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을 보존하고 또한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다시 고안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게 사유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윤리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앎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시작된다.(...) 보증이 있는 윤리가 아니다. (...) 윤리는 위험하다.”

- 데리다, <이론을 쫒아서, P31~32>, 본문 173

 

만일 어떤 판사가 규칙을 단순히 적용한다면 그는 계산하는 기계일 뿐이고,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한 정의의 꼬리표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정의로운 법 판결에 내재된 이 역설은 어떤 결정이 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 조건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동시에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중적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책임의 체험이 곧 정의의 윤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는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에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나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4<데리다의 타자들>5<저자, 주권, 인터뷰에서 자명한 것들>, 우선 4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 소수의 특권적 타자들인 몇 명의 철학을 설명한다. ()쓰기의 유한성이라는 신체성과 물질성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으로부터 그라마톨로지영문판 서문을 쓴 가야트리 스피박이 주장한 니체의 영향력이 근거가 취약한 비판임을 증명하고, 오히려 니체의 초인은 데리다의 타자에 굴복했음을,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묻힌 존재임을 설명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해체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심지어 하이데거의 해체였다고 데리다가 말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부모와 자식의 완벽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4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계와 비평계의 데리다 수용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 계의 해체에 대한 반응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예일학파, 즉 미국 문학이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수용사인데, 이들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른 채 데리다를 읽음으로써 매우 비-맥락적으로 읽었기에 무수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반목과 교류로 이루어졌음을, 초기에 하버마스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데라다를 반혁명적, 보수주의자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복권하려는 불순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해체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계몽주의의 지속임을 이해하고 공동의 노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디우, 지젝, 이글턴 등의 인사들에게서는 오해와 오류가 여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비판을 정초하는 데 요구되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론(바디우)”이라던가, 폭력에 대항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보다 전체주의 공간을 열어준다(지젝)”고 주장하기도 하고, 차이의 철학들은 시장주도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데 적응케 하는 전술(이글턴,바디우)”이라는 뚱딴지같은 비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들은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5장은 데리다를 수용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데리다는 이제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장으로, 그리고 심화된 학습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문>과 함께, <에필로그>도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유행이 아니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제도에 대한 비판, 텍스트들에 작동하는 힘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면밀한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인류의 부채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타자는 존재한다. 아무쪼록 학자의 야심을 억제하고, 데리다의 읽기로 이끄는 이 아름다운 저술물을 생산해 낸 제임스 K.A. 스미스교수와 윤동민 번역자에 감사를 전한다.

 

언어적 전희가 언어를 망각하거나 폄하하는 경향, 철학은 단지 담론이라는 매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언어의 2차적 성격,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서구 사상의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방식으로서 해체를 주장했던 20세기 타자의 자리를 주목했던 위대한 사상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게 잠복했던 데리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읽기를 회피하며 정당화했던 편협한 정신을 털어내기에 충분한 읽기가 되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비밀의 취향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를 다시 펼쳐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그 수고가 결코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저술을 읽는 독자는 데리다 읽기에 나처럼 나설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수월함이 있다. <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단연 최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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