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봄날의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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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미덕을 먼저 말하여야 할 것 같다. 150여 쪽 남짓 간결하고 농축되어 써진 작품으로서 그 내용의 풍성함과 강렬함은 수천 쪽에 이르는 여느 대하소설을 단 번에 넘어서는 엄청난 사유가 집적된 글이라고 말이다. 작가는 정말이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 여인이 나타내려한 방식 그대로를 관찰하며, 하나의 주제로 돌진한다. 그럼으로써 그 어떤 본원적 비가시성을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현재화 시킨다. 가히 압도적인 소설이다.

 

전시기획자, 출판물기록 연구자이자 작가이기도 한 나탈리 레제의 이 독특한 작품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밀한 프랑스 제 2 제정시대(1850년 전후)의 물질문명의 발흥과 새롭게 대두된 소비 시대를 관류하던 한 여인의 초상에 대한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그런가하면 작품의 제목인 전시((L'Exposition; 展示)’의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으로 이 어휘는 물론 작품 구조와 그 내부에서의 작용에까지 두루 둘 이상으로 해석되기를 요청하는 듯하다.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정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를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책장을 열면 스스로를 방기하기,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기.(...) 흐릿하게 만들기.(...) 이동시키기,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1)마티에르를 관찰하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라는 문단을 만나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당혹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게 되지만, 이내 이 문장이 곧 이 작품의 전개 양식을 안내하며, 작가를 덮쳐 혼란을 느끼게 하고 급기야 길을 잃고도 끈질기게 고집부리는 유령들을 천천히 게워내게 하는 주제로 밀어 넣는 글쓰기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야기는 그래서 이리저리 주제가 이끄는 대로 마치 불가항력적 어떤 힘에 끌려가듯 기억과 기록(아카이브), 문학과 사진, 회화, 영화를 망라한 예술 작품들을 종횡하며 당초 박물관 소장품의 한 점을 모티프로 하여 선택된 소장품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테마 폐허와 관련해 의뢰된 기획전에서 시작되었던 화자의 감수성과 시간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의 근저에 있던 것들을 깨워낸다.

 

작품 속 화자는 박물관에서 제안한 전시기획담당 학예원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시(Exposition)의 의미를 프랑스어 보전 Tresor de la langue francaise의 설명을 압축요약하여 정의하고 있는데, 사물명을 주어로 하여 모종의 비밀스러운 유기를 배치하는 일이라고 상기시키려 한다. , 이 전시기획의 한 소품 글을 닮은 듯한 이 소설은 바로 이것, 책의 첫 문단을 실천하는 글쓰기임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미리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마티에르’,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이 이내 확인되는 데, 화자는 우연히 어느 지방도시의 작은 서점 나무 계단 꼭대기에 붙어있는 스스로의 연출에 의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카탈로그 표지 위 시선의 심술궂음에 소름끼치며, 이미지로 떠오른 그 여인의 난폭함에 깜짝 놀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정신 상태에서 올라탄 노선버스에서 들려오는 소위 굴곡진 여성성의 여정에서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돌부리인 딴 여자’“라는 한 인간의 특질을 무효화하는 이름의 불쾌감이 들려온다.

 

아버지로 하여금 엄마 곁을 떠나도록 하였던 여인, 딴 여자로 불렀던 합법적이지 않으며, 기능에만 결부된 여자, 증오의 대상이며 동시에 욕망케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병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가 분리되어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라는 여인의 사나움과 깊이 없는 애수와 실패가 주는 불쾌감의 이미지가 폐허와 관련한 기획의 훌륭한 주제로 불쑥 덮쳐 옴을 느낀다. 형태의 소멸, 비극적 시간의 비수같은 의식에 대해서.

 

<스케르초 디 폴리아Scherzo di Follia>로 명명된 사진, 1899년, 생을 마감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인 피사체의 사진은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금세기 최고의 미녀 La Plus Belle Femme du siecle>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이 사진은 그녀를 상징하는 심볼이 되었다. 책 표지 사진은 이 사진의 일부이다.

 

이제 소설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그녀가 살던 동시대인들 가운데 이 여인보다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인물의 아카이브와 사진과 남겨진 소품들, 그리고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백작(1855~1921)의 주의깊고 면밀하게 수집 정리된 유언, 약력 기사들, 하다못해 재산 경매의 코멘트에 이르는 관계 자료들과 카스틸리오네의 사진을 찍었던 피에르 루이 피에르송과의 작업 방식과 환경, 그리고 장면들, 발자크, 에밀 졸라,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위스망스, 쥘 베른에서 트루먼 커포티, 이자벨 위폐르, 메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영화와 사진 예술에 대한 비유적 인용이 더해져 그야말로 거대한 예술비평이 한 여인의 현전과 비가시성, 몸짓들과 부재의 수수께끼 같은 조합의 광야를 거닐게 한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디 카스틸리오네’, 스스로의 미모에 대한 확신이 불어넣은 상상력 이외의 상상력은 갖고 있지 않은 나폴레옹 3세의 정부였던 귀족 여인, 그녀는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와 얼추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라는 지고의 미로 칭송되던 그녀는 500장이 넘는 당대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상을 비롯한 여러 포즈의 사진을 남겼다. 전시하고자하는 주제를 위해 화자는 모티프를 설정하는데, 처진 눈매, 그토록 지치고 불만에 차 보이는 얇은 입, ()을 치르는 듯한 모습, 이 여자의 슬픔은 소름이 끼친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슬픔이라니, 그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괴멸이고, 내면의 와해이며, 침통이다.”라는 1857년에 찍은 <베일을 걷어 올린 초상>의 감상을 남긴다.

 

화자는 아마 이 초상사진에서 폐허를 읽었을 것이다. 이 폐허는 1995년 몇 겹의 종이막을 찢고 나오는 전위 예술가 무라카미 사부로의 몇 초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부연 설명되는데, 제 빈 구멍위로 천천히 늘어지는 찢긴 종이 자락이 바로 한 인간을 먹었다가 다시 뱉은 그 주제라는 것, , 박물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이같은 폐허, 마모되며 길을 트는 통과로서, 그 터진 구멍이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은 이 수많은 의미를 담은 터진 구멍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 된다. 마모되며 길을 트는이야기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력가문에서 1837322일 출생한다. 그리고 18541916세에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된다. 13세 때 이미 자신만의 의상실과 농장 마차를 소유할 정도의 대귀족의 여식이었다. 이 여인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꾸밈노동에 시달리고 그 사태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자신 앞에선 모든 것이 굴복했으며, 완고하고 변덕스러움과 비탄으로 가득 찬 밉살스러운 인형 그것이었을 테다. 하늘이 주는 지배와 고통, 그 경악과 미친 듯한 고독을 손에 쥔 여인,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은 나폴레옹과 동침으로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사진들은 이러한 여자가 처했던 상황 속에 숨겨진 내면의 연극을 드러낸다. 설혹 온통 거짓일지언정 역할의 정수가 내부로 충분히 침투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공연의 현실성을 스스로 믿을 수 있었던 여인의 실체를.

 

파리 상류층의 사교계는 이렇게 말한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은 완료형의 미인에 속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간대에 속한 것 같지 않았다.”, “비할 데 없이 영롱한 눈, 진주같은 이를 내보이는 입, 용모의 우아함과 세련됨, 얼굴의 광채, 어쩌다 길을 잃어 우리의 세속적인 시대에 있게 된 고대의 대리석상.”, 랭데팡당 벨주 L'Independant belge그녀는 우리 지역 사회의 미인들 사이에 불안을 심었다.(...) 부인들은 심히 당황했다.”고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절망적 곤혹을 전한다. 대중들은 이 고귀한 여인을 보기위해 좌석위에 올라서 완벽 그 자체인 여자를 향유했다,

 

더 멋진 발언도 있다. 모니 백작이라는 인물은 그녀는 마치 구름에서 내려오는 여신처럼 등장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자신의 우월성에 대단히 심취해 남을 업신여기고 거만한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숭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미모와 상상 이상의 우아함을 향한 깊고 아낌없는 경탄 뒤에는 그 무심성에서 발산되는 거만함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여자 나르키소스, 유연함도, 부드러움도 없는 성격, 아무런 자비심 없이 야심차고, 터무니없이 거만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마치 황후처럼 행동하는 데 심사가 뒤틀린 상류사회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바로 딴 여자라는 이름의 19세기식 반응이었을 것이다.

 

사실 화자의 시선 또한 이러한 여성성이란 것의 화신인 이미지에 거의 적대적 불쾌감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만으로 일관된 편협성을 유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진을 찍기위해 일과처럼 찾아가는 촬영소에서의 포즈와 그 연출에서 여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음각으로 새겨진 격동, 다시말해 흐느낌의 각인을 읽어내기도 하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최후의 트릭, 그 사나우면서도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발견한다. 아마도 전시기획자인 화자에게 이 사진이라는 가면 속 여인은 지속적으로 딴 여자로 불리는 그 기능적인 불쾌함의 투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종교, 복식, 입관이라는 온통 각종의 욕망이 담긴 유언의 글에서 냉소적으로 물론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는 욕망이야 관 속에 기꺼이 넣어줄 수 있다. 처치 곤란인데 잘 됐네.”라고 싸늘하게 한 대 갈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욕망 가득한 유언의 글과 달리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남긴 사후 요망 사항 목록 20가지는 더 이상 욕망되지 않는 굴욕에 휩싸여 세상과 등진 여인의 미련없는 세상에 대한 무심한 고통이 보인다. 십자가 없이, 사제 없이, 종교의식 없이, 꽃 없이, 전시 없이, 밤 샘 없이, 의사 없이....대사 없이, 사례금 없이, 상속인 없이, 동반인 없이, 장례식 없이, 부고 없이, 안내 자료 없이, 신문기사 없이

 

높은 지능을 지녔던 이 여인은 자신의 전도를 정치에서 찾기를 욕망했지만 그녀에게 전달된 것은 자기 믿음으로부터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화자가 소개하는 18575, 아르티스트 Aritiste에 발표된 보들레르의 시, 나는 음산한 거울/ 그 속에서 메가이라는 제 모습을 노내!”라는 저 자신의 사형 집행인의 시구들은 묘하게 그녀가 처했던 상황 묘사처럼 보인다. 여인은 하스페치아의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도 화자는 그녀를 아름다움과 권력에 도취된 채 타인에게 바라보인다는 그 마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향락, 즉 자기 반영의 주위를 돌고 도는 인물로 묘사한다. 프루스트의 게르망트 부인의 모델인 몽테스키우 백작의 사촌인 엘리자트 그레푈 백작 부인의 입을 빌어 향락 가운데 자신이 모든 시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여인이 누리는 향락에 견줄 만한 것은 없으리라.”, 자기에 주어지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는 개의치 않게 되는 절대적인 힘, 이 거대한 익명의 애무를 경험하고 맛보다 더는 촉발할 수 없게 된 존재의 삶을 상상해 본다.

 


여기서 엄마가 느껴야 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할머니의 딸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그녀의 교태와 절대적 지배력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어 흐른다. 엄마는 화자에게 비통이나 모욕, 협박, 배신에 얽힌 추억들을 얘기했다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그런 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남자들은 외할머니에 대해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다였음을 말한다. 화자는 색 바랜 엄마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자기 엄마 곁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어린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를 지지하며 사랑하고, 그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웠던 엄마이지만 그건 정말 수치스럽다고. 수치심은 마치 묘비같은 말이라고 머리를 흔드는 것 같다.

 

화자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이 여인을 자신을 찾으러 자신을 붙들고 가두기 위해서 생애 전체를 기꺼이 사진가 작업실에서 촬영으로 축소된 인간으로 묘사한다. 경박함의 외피 아래로 멜랑콜리의 내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사진을 찍고 그것에 붙들린 여인으로서. 인간의 초상을 찍은 인류 최초의 사진은 하나의 얼굴을 고정시킨 <익사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당대 한 컷의 사진촬영을 위해 오랜 시간 고정된 포즈를 취해야 했던 그 고정성, 그 굳음의 예시이다.

 

화자는 한 장의 사진에서 폐위의 채비가 된 여인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굳어버린, 요컨대 죽음의 침상을 위한 대상임을 알아본다. 이제 더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화자는 폐허를 주제로 한 전시 재료를 찾기 위해 한 여인의 사진과 기록과 관련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녀는 그것들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의 소실성 자체를 한데 모아 역으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하는 탐색을 진행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왜 박물관의 소장품을 오브제로 삼지 않느냐는 제안측의 말처럼 폐허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거부된다. 이미 스러진 한 인물의 초상은 현전과 부재라는 폐허의 이미지에 진정 부합하는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은 폐허 위에 솟은 문화유산 한 점을 통한 영광의 재현이라는 실리와 상충하는 것이다. 이제 화자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하며 교묘하게 빠져나가 주제를 따라가는 자기만의 질서를 이어나간다.

 

그것은 사적인 화자만의 전시다. 입센의 연극 브란 Brand에는 죽은 아이의 작은 옷가지를 펼쳐놓고 기억을 추억하는 여인이 있다. 그러나 집에 돌아 온 남편은 그 조그만 물건들을 처분할 것을 강요하고, 마침내 그 강요에 동의하지만 그녀는 죽은 이처럼 되고, 곧 그로 인해 죽는다. 화자가 인용한 이 연극은 결국 그 어떤 것은 생의 한 기억이 아니라 생 그 자체, 생의 감지할 수 없는 박동임을 제시하려는 듯하다.

 

이어서 1843년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메리 러셀 밋포드에게 쓴 글을 인용한다. 초상 사진들은, 비단 그것들이 지닌 유사성 뿐 아니라 이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연상과 근접감 때문에도 신성화된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물의 그림자 자체가 거기에 영원히 고정되고 마니까라는 내용이다. 화자는 어린 엄마를 포함하여 넓적다리까지 물에 잠긴 등 돌린 세 소녀의 사진을 바라본다. 잠수하는 아이, 탐색하는 아이, 몽상하는 아이, 등 돌려 볼 수 없는 소녀의 시선, 미지의 불확정성이 기다리는 머나먼 저곳이 있음을 그 비가시적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소설은 덮치고 사로잡아 더 이상 숨 쉴 수 없게, 거의 살 수 없게 몰아붙이는 주제들을 향해 이끌려갈 절박한 필요성을 소환한다. 이것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생의 전부를 투사했던 초상 사진, 즉 정확히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바를 공연하는 바로 그 사진, 저 자신을 전시하고 제 포즈 속에 지속하며 그럼으로써 제 반영으로 응고되려는 육체의 영속 안에서 포착되는 보이지 않는 시계판에 새겨진 엄숙한 시간을 찾는. 화자가 마침내 발견한 단 하나의 마티에르는 시간이 해부되어 돌출된 교태스럽고 사치스러운 페티코트 위의 음산한 죽음의 생각이고, 이는 화자의 죽은 엄마에 대한 애틋함, 여성성이란 것의 교묘한 역전에 의해 고통받았던 삶에 대한 애도로 향하는 것 같다.


 “구멍 앞에서 그녀는 다만 부재의 덩어리다. 사진들에서는 그 점이 보인다. 그 점만 보인다.”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 그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들은 본다.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사진 예술에 관한 소논문이며, 전시에 관한 에세이이고, 한 귀족 여인의 전기이며, 가족사인 엄마에 대한 애도로서의 사()소설이기도 하다. , 이 작품은 고전적 지위를 분명 확보할 걸작으로 살아남을 것 같다. 문학을 예술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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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티에르: 표현된 대상 고유의 재질 그 자체 또는 재질감, 작품 자체 표면의 평활(平滑)함과 울퉁불퉁한 질감, 용법에 따라 창출한 표면 효과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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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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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했던 도둑 중 가장 많은 예술작품을 훔쳤고, 가장 성공한 도둑임에 틀림없는인물의 일대기라 해야 할까? 예술품 절도 역사상 이 인물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이 훔친 도둑은 없다는 말처럼 예술 역사의 영원한 한 부분을 차지, 가히 기록적 범죄를 둘러싼 예술범죄에 대한 총합적 보고서라 할 만한 저작이다. 한낱 절도범에 대한 추적의 기록이 무어 그리 흥미롭겠는가하지만 그 대상이 고가의 회화와 조각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게다가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고, 그 어떤 금전적 이득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다팔기 위해 훔친 예술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이 예술 도둑의 행위와 심리를 비롯한 행적은 어떤 매혹을 느끼게까지 한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7개국 박물관, 미술관 등지에서 추정가치 20억 달러에 달하는 예술품을 7년 동안 평균 12일 만에 한 번씩 훔친 희대의 예술 절도범인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스테판 브라이트비저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연인 앤 캐시 클레인클라우스가 망을 보는 사이에 알자스의 농촌마을 창고를 개조한 박물관에서 최초의 절도물인 수발총을 훔친다. 그는 소유했다는 승리감에 미친 듯한 행복의 절정에 달하고, 도난당한 박물관의 동향을 주시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에 한 번 더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체포되어 처벌될 위험이 많은 행위로부터 절도범은 어떤 느낌을 향유하고자 했던 것일까? 첫 도둑질로부터 자신감을 얻은 브라이트비저는 19952, 알자스산맥 고성의 중세 박물관에서 두 번째 도둑질을 하는데, 이때 공포가 기쁨으로 바뀌는 시간은 더 짧아진다. 이 책의 묘미는 이렇듯 최초의 절도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또 다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절도범의 심리 변화에서부터 절도가 가능한 박물관의 보안수준, 절도의 수법은 물론, 절도대상이 된 예술품에 대한 미학과 예술사적 가치, 예술품 약탈과 절도의 역사적 기록들,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예술계에 만연한 악의, 그리고 예술품 범죄 전문 경찰기구와 이 희대의 예술품 절도범의 추락하는 삶의 모습이 흐른다.

 

이 예술품 절도범에 대해서 상충하는 이해가 있다. 브라이트비저의 병적 도벽은 절도가 아니라 수집 강박으로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는 것이라며, 단순 도둑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로 흉악범에게 보이는 특성을 가진 미성숙한 소매치기범이 예술계의 대도로 미화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상반된 주장으로 나뉜다. 이 책은 그 어느 측에 편향된 시선을 취하지 않는데, 저널리스트로서의 저자의 훈련된 균형일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일상에 대한 기술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는 진정 심미관을 지닌 선택된 예술 애호가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주말에 도둑질하고 주중에는 지방 도서관과 고고학 도서관을 찾아 예술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142만 페이지로 구성된 베네지트 예술가 사전의 카달로그 레조네를 탐독하며, 자신의 다락방에는 500여권의 미술장서로 작은 도서관을 꾸미고, 장인에 관한 논문, 도상학, 우의학, 상징주의 등을 연구하며, 훔친 예술품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며칠이고 작품에 대해 공부한다. 사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받은 자로 여기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브라이트비저를 단순한 절도범이라 할 수만은 없게 한다. 한 인간의 사회가 예술로 대체되어 있는 것인데, 어쩌면 바로 이 수집 강박이야말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의 근원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만이 예술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기에 불법이든 아니든 원하는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브라이트비저의 논리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주장이지만, 반박을 무력화시키는 인류의 예술품 약탈사의 한 페이지만을 보더라도 예술의 역사는 절도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된 조각상인 산 마르코의 말1세기 네로에게 약탈되어 로마로, 그리고 4세기에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12024차 십자군전쟁에서 약탈되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으로, 1797년 나폴레옹의 약탈로 루브로로, 그리고 다시 18세기 워털루전쟁의 승자인 영국은 베네치아로 돌려놓는다. 어차피 예술계 종사 모든 사람이 도둑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의 맞춤 증거다. 그러나 이처럼 예술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악의 연쇄적 소굴에서도 브라이트비저는 독보적인 악당이다.

 

수백만의 수백만만큼 훔치고 싶다.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겠지.”, 브라이트비저가 연인이자 공범인 앤 캐서린에게 하는 말이다. 그를 감상적이고 날카로우며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진정한 미술품 수집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위의 진술처럼 어쩌면 도벽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 아닐까? 이러한 강박적 수집 욕구는 물론 위대한 미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욕구라는 일화도 있다. 1907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물석상 한 쌍에 매혹되어 절도를 의뢰하여 그것을 입수한다.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된 내용이다. 이 석상이 <아비뇽의 여인들>모델이다. 모나리자도난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자신이 오르자 겁을 먹은 피카소는 슬그머니 제 3자를 시켜 경찰서에 석상을 몰래 갖다 놓는다. 예술의 값어치보다 아름다움 자체가 좋아 공공을 배제하고 자신 혼자만이 그것을 누리기 위해 훔치는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깔끔하고 치밀하게 대낮에 이루어지는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 2인조 절도범은 자신들의 행위가 언젠가는 덜미를 잡힐 것인지 예견하지 못했을까? 앤 캐서린은 자신들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조여 오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던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수술 장갑을 브라이트비저가 반드시 착용하고 작업을 할 것을, 지나치게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음을 전체적으로 감지했을 때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 강박적 수집가는 그의 인생이 영원히 절단 나는 전환적 사건을 맞이한다. 능숙함과 강렬한 소유욕망은 조심성을 망각하게 한다.

 

169쪽 절도품 도록 중 발췌


이 저작의 재미는 예술품 절도와 그 예술사적 의미의 향유에 그치지 않는데,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의 동거와 그네들의 관계에서 추정되는 애정의 본질과 갈등, 브라이트비저라는 인물의 절대적 보호자인 어머니, 후일 그가 수감되었을 때 아들의 성장을 외면했던 아버지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처럼 인간애가 자칫 메마른 르포기사가 될 저술을 풍성한 인간미로 에워싼다. 게다가 마치 추리문학과 같은 긴장감까지 한 몫 해서 그들의 절도 행위에 순간 은밀히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 불합리하고 부당한 행위에 동조했음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7년여에 걸친 절도이후 운명의 날이 다가와 그가 수감되었을 때 그를 면담한 심리학자들을 비롯한 특이하게도 독보적 분야의 전문영역을 연 예술범죄학, 분석심리학자들의 예술품 절도에 대한 진단 등은 자칫 가벼운 일화로 멈출 이야기의 품격을 올려놓기도 한다.

 

수집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기만의 세계로 마법처럼 탈출하는 느낌을 지적하며 충동적 수집 강박을 처음으로 언급한 베르너 뮌스터버거의 수집: 통제할 수 없는 열정, 진정한 수집가라면 모두 포화점이 없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순간 따위는 절대 오지 않는다.”며 예술품을 훔치는 부류가 자신의 행위를 결코 부도덕하다고 느끼지 않음을 지적한 에린 톰슨의 소유 Possession는 예술품 범죄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참조가 되어줄 것 같다. 부모의 이혼, 가정의 파탄으로 고독의 구덩이에 빠졌던 청년은 예술로나마 주변을 채워야 했을 것이라는 한 영혼에 대한 관대함은 이내 구제할 길 없는 나락으로 빠지는 인간에 대한 속수무책의 허탈함을 느끼게도 한다.

 

브라이트비저가 자신의 절도 행위를 예술에 대한 도취로 주장하며 내세운 스탕달증후군 또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기만 혹은 정당화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과 열띤 관능에 압도되어 황홀경을 경험하는 정신적 분열증상을 이른다. 1871년 스탕달이 일기 형식으로 쓴 이탈리아 여행기 로마, 나폴리, 피렌체에서 산타 크로체 성당 구석의 작은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감상에서 느꼈던 정신적 혼란의 묘사에서 나온 용어인 모양이다. 사실 이것은 그럴듯한 말로 꾸며낸 여행에서 겪는 시차로 인한 피로의 어지럼증, 떨림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예술 운운 하는 주장은 도벽의 기만적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과자로 낙인이 찍힌 인간에게 세상은 거듭되는 그의 절도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201920여 년 전에 훔쳤던 상아조각상 아담과 이브가 있는 벨기에 루벤스 박물관의 단돈 4달러 짜리 책자를 훔치다 다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강화된 예술품 절도범에 대한 처벌로 인해 60세가 되어서야 출소하게 될 것으로 예견된단다. 이제는 한낱 파렴치한 소매치기범으로 전락한, 더 이상 심미안의 소유자로서 단순 도둑놈이 아님을 항변할 수 없을만큼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인생을 영원히 뒤바꾼 스위스 루체른에서의 체포와 구속은 아들을 예술에 빼앗긴 어머니의 대대적인 다락방 숙청 작업으로 강변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수많은 유화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인류 문화유산에 대한 무책임한 훼손은 그를 공공의 적임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매년 5만 건의 예술 도난사건이 발생하며 개인 소장물의 경우 그 회수율은 10%, 박물관과 미술관 등 공공기관의 도난회수율은 50%에 그친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현황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예술품 범죄 전담기구에서 2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특수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은 하게 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히 매혹적인 심리스릴러에 비견되며, 강렬한 예술 작품 앞에서 미학과 윤리의 경계에 서 갈등하는 마음에 이입되기도 하고, ‘집착과 그릇된 재능에 의한 범죄행각과 그 심리탐사이며, 배신과 놀라운 반전이 있는 흥미진진한 한 인간의 삶의 전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저술은 놀라운 예술 작품이다. 무언가에 지극한 사랑으로서의 이 미친 예술 이야기는 예술이란 진정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멋진 질문을 던진다. (*수록된 26작품의 절도품 컬러 도록이 책의 완성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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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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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면 고개를 들어 흰 눈을 받아들이면 속눈썹이 초설(初雪)을 가로막았다.” 라는 영상미 그득한 이미지들로 독자의 지각이 깨어날 것을 독촉하는 문장들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잠속 꿈과 회상인가 하면 현실의 삶이 펼쳐지고 그 두 공간 경계의 시차에 적응하느라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 당혹스러운 지각의 놀라움은 이내 영화 속 플래시백 장면처럼 익숙해지고, 세월에 훼손되어 찢어진 기억들이 마치 디지털 고해상도로 복원된 영상처럼 마술적 회복과 더불어 시차의 곤혹은 곧 융해되어 사라져버린다. 영화를 관람하듯 지각은 적응하여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찾으려는 물음, 그 진실의 여정에 무난히 동행하게 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기교가 마음껏 발휘된, 기억과 현재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상황과 장면들의 배치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눈물의 여정은 꿈에서 시작하여 가을의 첫날 아침 파리에 도착했다.”는 독백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타이베이의 여자는 파리의 작은 아파트 매트리스에서 깨어난다. 형식의 구성과 상황 내용의 절묘한 합치는 아마도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잠자지 못하는 여자, 타이베이의 고위 정치인인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그런 남편에게 언제나 차분하고 성실한 아내임을 가장하기 위해 여자는 충분히 자고 난 몸 상태를 연기해야 했다.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영화자료관의 복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낭트 영화제에 여자는 초대된다. 여자는 자지 못한 잠을 자기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찾기 위해 함께 초대된 복원 영화에 출연했던 남자가 있는 파리로 찾아간다. 여자는 남자의 팔꿈치를 매만지며 비로소 오랜만에 잠을 이룬다. 남자의 팔꿈치는 어린 시절 침대 매트리스 광고를 위해 함께 잠들었던 여자에게 평온한 잠을 가져다주는 그런 유일한 위안의 감각 매체이다. 소설은 이렇게 두 사람의 기억을 점진적으로 쫓아나간다.

 

현재로 소환되는 기억들의 점진적 여정에 따라 여자의 불면과 그 불면의 근원인 굴종과 속박을 요구하는 세상의 왜곡된 시선들과 아이의 상실과 미완에 그쳐지도록 강요된 애도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말 되지 못하고 묻혀있던 진실의 기억들은 남자의 기억들과 교호하며 메워지지 못했던 진실의 틈새를 완성해 나간다. 여자는 강간과 임신, 임신중절, 그리고 저열하고 파렴치한 협박과 임신, 불법 약물을 통한 강제유산, 이 과정에서 여자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옆에서 그 어떤 진실도 묻지 않고 나누어 져주었던 친구, 하지만 여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남자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던 그 어느 날의 기억, 그리고 윌슨병으로 쓸쓸히 죽어가야만 했던 딸아이에 대한 엄마로서의 죄의식, 성년이 된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된 어느 날의 장면들이 파리의 작은 공원, 아파트 창 밖 풍경, 그리고 파리 골목의 산책길, 투르의 들판과 루아르 강변에서의 현재의 모습과 융화하며 스크래치 가득한 옛 영화 필름에서 비춰지는 화면처럼 비가 되어 내린다.

 

한편 남자는 사랑하던 연인 J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 그리움에 대한 무기력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곤 여자와 함께 걷는 파리 골목의 산책에서 목적지가 되어야 하는 낭트로 향하는, 그러나 불분명한 여정을 함께한다. 이 동행의 시작에서부터 여자는 남자에게 내 아들을 돌려달라고 악을 써대기 시작한다. 뜬금없이 아들을 찾아내라고? 소설의 치밀한 장치들을 독자는 다시금 세밀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 사라진 존재의 자취와 그 경로를 찾을 수 있도록 흩뿌려진 빵 부스러기가 무엇이었던가? 이것은 남자가 찾고자하는 J의 흔적을 헤매는 경로와 더불어 여자가 찾고자하는 애도와 사랑에 대한 물음과 결합하여 진실, 그 고통과 상처들을 형성했던 주변의 것들, 알지 못했던 배려와 사랑, 알리고 싶지 않거나 알릴 수 없었던 사실들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아버지의 거침없는 외도, 그 외도 현장을 엄마와 함께 목격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그리곤 버리듯 어린 자신과 지금은 정치인의 아내가 된 여배우인 소녀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엄마, 남자의 동성애에 대해 폭언과 폭력, 저주의 욕설을 뱉어내며 홀로 죽어갔던 아버지,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소년과 함께 매트리스에서 잠자는 광고에 대해 부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구역질나는 변태같은 짓거리를 한 여자아이라고 비난을 퍼붓던 세상을 감당해야 했고,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아이를 이용해 돈 벌이와 명예의 대리충족만을 욕망했던 엄마와 남성의 권위에 대한 신앙적 신념을 가진 시어머니와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 그리고 그네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인한 질식과 같은 속박, 자기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어미로서의 죄의식이 쓸쓸히 소환된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장면들마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들이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자에게 여성으로서의 굴종과 속박을 당연시 요구하는 뒤틀린 성의식이 지배하는 타이완, 동성애법이 형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그네들에 대한 변하지 않는 질시의 시선들은 노출되지 않은 폭력과 살육의 의지와 다른 것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세계의 양상 속에서 여자의 고통에 대한 귀 기울임과 발설되지 않는 목소리, 묵묵히 돌봄과 보호로 여자를 지켜주었던 남자의 또 다른 슬픔이 교차한다. 여기서 나는 게이미(Gay)’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심연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고통에 공감하고 보호하는 동성애 남자를 지칭하는 타이완에서 통용되는 신어인 모양이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언어로 여겨진다.

 

소설은 영상미 넘치는 현재와 기억이 수없이 반복되는 플래시백 장면들이 쌓여가며 이 세계에 맴도는 끈질긴 성적 약자의 상처와 고통을 한없이 파내려간다. 그들의 반점으로 얼룩진 기억의 테이프를 현재로 가져와 흐려진 화면에 새로운 색, 생을 지속할 수 있는 묻힌 진실의 복원을 통한 위로를 입혀낸다. 아마 이 소설은 한 편의 곰팡이 핀 두 사람의 낡은 인생을 복원함으로써 시차를 없애는 복원 기술로 그네들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깊은 탐색일 것이다. 읽어 나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세계의 음험한 악의로부터 탈주하려는 두 사람의 현재에 떠오르는 비밀의 이야기들에 끝없이 빠져들게 된다. 우리의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역량은 어디쯤에 도달해 있을까? 소설은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네 사회와의 관계와 비판에 대한 정말 조심스러운 질의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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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01 0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무 매력적인 리뷰네요. 글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필리아 2024-10-01 07:29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초록비님~
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좋은 일 많은 하루 되시기를요. :)
 
장 크리스토프 1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2
로맹 롤랑 지음, 손석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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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글은 로맹 롤랑의 10장 혹은 10권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1~5권에 대한 독서 후기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와 비견되는 프랑스 교양소설의 대표작으로 불리기도 하는, 악전고투하는 인간 영혼의 격동적 인간의 목소리이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을 내세워 그 어떤 허위의 영웅주의를 그려내려는 케케묵은 교훈주의가 발붙이려는 작품이 아니다. 지식인이라는 얼굴 뒤에 숨어 비열함을 배설하는 이 세계의 권위와 질서에 충돌하며 자기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숱한 굴욕과 좌절의 실체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 감정이 들끓는 감동적인 생명의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을 하나의 음악의 시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유아기를 보여주는 새벽을 시작으로 아침’, ‘청춘과 같은 인생의 성장기를 표현하는 장을 거쳐, 성장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이 세계의 온갖 갈등과 증오, 무기력과 절망, 그 속에서 다시 솟구치는 노여움과 분노에서 길어 올린 삶의 강렬한 욕망의 무대들과 마침내 새로운 날에 이르는 총 10개 장(혹은 권)으로 구성된 대하(大河)소설이다. 1890년에 시작된 발상으로부터 10여년에 걸친 집필 끝에 19126월에 탈고한, 한 작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이해가 망라된 필생의 역작이다.

 

10개의 장은 각기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듯하다. 이 동서문화사의 번역판본으로 1,700여 쪽이니, 여타 국내도서 판본으로는 2,50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한 호흡에 내달려 읽을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감상이라는 점에서도 각 장()을 기준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도록 작가는 애초에 권유하려 했던 듯싶다. 각 장()이 한 인간의 특정 시기에 마주해야 하는 체험의 성분이다 보니, 그 고유한 경험의 세계들마다 독자들의 마음에 건네는 현상들이 다를 것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새벽은 초등생이, ‘아침은 중학생이, ‘청춘반항은 고교생이, ‘광장시장이후는 대학생과 성년의 독자가 읽는 것과 같이)

 

소설은 제3의 관찰자 시점으로 씌어져있는데, 다분히 전지적 작가시점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러한 시점이 직접으로 드러나는 5장 혹은 5권인 광장 시장에는 저자와 그림자와의 대화라는 작가와 주인공인 크리스토프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 이 세계에 저항하며 단독적인 세계, 크리스토프가 삶의 목적으로 믿는 선을 위한 투쟁과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의 고려와 선을 위한 싸움에 도사린 악의 지향성에 대한 담화로 작가가 개입한다. 이것은 작가 로맹 롤랑이 작중 인물인 크리스토프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바로 작가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천재 예술가, 이 세계의 부패와 자기 몰이해에 도전하는 혁명가로서의 인물에 대한 존경의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1- 새벽

 

1장 또는 1권에 해당되는 새벽은 아기 장 크리스토프(이하 크리스토프라 표기)’와 그의 가계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는데, 할아버지인 전직 궁중 악장 출신인 장 미셸이 요람에 누워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내뱉는 인상적인 말로 시작된다. 이거 참 밉게도 생긴 놈이로군! (...) 아무 걱정할 것 없다. 얼굴이야 차차 변하는 거니까. 못 생겼으면 어떠냐! 이 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야.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거지.”

 

장 미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의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버지의 후광 덕에 궁중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지만 한미(寒微)한 집안의 여식인 아내 루이자와의 결혼을 후회하며, 이것이 자신의 출세를 막아선 것이라며 가장의 역할은 물론 궁중 음악가로서의 역할마저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루이자는 궁핍을 면하기 위해 마을의 피로연이나 연회 등에 요리사로 품팔이를 나서는 고통을 겪는다. 나태하고 술주정에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대신하여 장 미셸은 며느리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몇 푼에 불과한 연금을 쪼개 가계를 돕고, 크리스토프에 음악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삶에 대한 기개와 가치에 대한 경험들을 들려준다.

 

생 마르탱 수도원의 장중하고 완만한 종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고, 그 영묘한 음악이 어린 크리스토프에게 풍부한 젖처럼 그의 속으로 흘러들어가며, 세상이란 온통 자유롭고 밝은 미래와 안락한 보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던 여섯 살 아이는 어머니 루이자가 품팔이 일을 하는 집을 찾아갔을 때 마주친 사건으로 인해 인간 중에는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기네 집 식구나 자신은 명령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어머니에게 명령하던 한 여인은 어린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끌어다 놓는다.

 

크리스토프의 추레한 옷차림은 곧 가난뱅이 아이로, 무시하고 노리개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아이로 인식되고 놀림과 폭행을 당한다. 크리스토프는 저항 끝에 그 집 아이를 때리게 된다. 이 장면은 내게 아주 익숙한데 우리 주변에서 늘 관찰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잘못한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권력 뒤에 숨어버리고, 약자의 자식은 바로 비굴한 자기 부모에 의해 얻어터지는 상황 말이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격렬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참담하고 미칠듯한 분노가 들끓는 여섯 살 아이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아마 타인의 악의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고 부끄러움과 부정에 대한 반항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유아 성장기인 새벽은 보통의 인간에게는 발생치 않는 하나의 사건이 더해지는데, 크리스토프의 음악, 특히 작곡과 연주 능력의 천재성이다. 주정뱅이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들 크리스토프의 작곡 능력을 폄훼하고 한갓 유치한 아이의 흥얼거림으로 무시하지만, 할아버지 장 미셸이 크리스토프가 흥얼거린 선율을 악보로 표기한 것을 보자 야심으로 돌변하여 크리스토프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이 부당한 강요를 읽어내고 좋아하던 음악에 혐오를 느끼고, 연주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럴수록 학대는 심해지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희망으로 이내 굴복한다. 멜키오르는 대공으로부터 크리스토프가 작곡한 음악 연주회를 승낙받기에 이르고 크리스토프는 공식 궁중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된다. 음악 천재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대공의 보호 하에 있게 됨으로써, 음악가로서 지위가 인정되고, 그 능력 발산의 토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은 멜키오르의 가정에 대한 책무를 더욱 방기하게 하고 어린 아이는 가계의 일정 벌이를 책임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작 여섯 살이다.

 

한 인간의 새벽에 이미 세상의 오욕과 허위, 고난과 역경이 몸에 새겨진 것이다. 어린 크리스토프와 어머니 루이자의 미약하지만 든든한 후원자였던 할아버지 장 미셀마저 죽음으로써 그야말로 가계는 침몰한다. 크리스토프가 궁중 악단원으로서 받는 급여까지 빼앗아 술로 탕진하는 아버지, 어린 아들의 짐을 덜기위해 품팔이를 하는 루이자, 급기야 아버지 멜키오르마저 술에 절어 싸늘한 시신이 되고, 열 네 살의 크리스토프는 두 동생과 어머니의 삶을 꾸려내야 할 가장의 무게를 지게 된다. 이제 어린아이는 아침을 맞는다. 시쳇말로 소년가장인 크리토프가 청년으로 가는 길목이다. 외톨이, 세상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었더라도 아직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토해 낼 대상이 없던 소년에게 다가 온 우정은 지고한 행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몽땅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즐거움,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소년들의 우정을 그 자체로 보아주지 않는다. 그 우정에 파렴치하고 불쾌한 빈정거림이 파고들고, 그들 천박한 호기심은 심연을 열어 보여주게 된다. 천진난만했던 관계는 그렇게 더럽혀지고 변해버린다. 그들은 서로 낙담하고 우정은 어둠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2- 아침

 

그러나 인생의 아침 아닌가. 사랑은 다시금 소년의 마음으로 들어차고, 집 앞 오랫동안 비어있던 저택에 과부가 된 추밀고문관의 아내인 폰 케리히 부인과 그녀의 여식 민나가 돌아와 살게 된다. 여인은 궁중 연주회에서 본 한 마을의 소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를 민나의 피아노 선생으로 고용한다. 그들은 동정과 흥미로 소년을 고용했을 뿐, 결코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한 이 야생의 소년에 대해서 그 어떤 진심도 가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들의 빈정거림을 알 아 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었다. 그네들은 그의 책, 담화, 교양전반에 대한 무지와 조잡한 행동거지에 대한 한탄을 감춘 채 얼마간의 은혜를 베푸는 보호자인 척 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여식인 민나 또한 크리스토프는 보기 흉한 가난뱅이 소년이며, 가축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있었다.

 

고립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소녀와 외톨이 소년의 반복되는 만남은 산골짜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처럼 무턱대고 솟아나는 연정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녀는 여인다운 교태로 소년을 유혹하고 그 풍부한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다. 세상은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능청스럽고 시치미를 뗀 체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는 눈은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버린다. 이윽고 소녀의 부재를 안달하던 소년에게 도착한 편지는 너무 흥분하지 말고, 편지도 보내지 말아달라는 단교의 내용이다. 소년에게는 집에 돌아왔다는 전갈도 전하지 않는다. 뒤늦게 사실을 안 소년은 달려가지만, 우리 딸애를 유혹하다니, 정 말 뜻 밖이라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안 된다. 신분만 해도...”라며 딱 잘라 멸시적 요소를 담아 냉담한 눈초리를 보낸다. 열다섯 살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토록 우아한 영혼이라 생각했던 두 모녀의 무정함을 비로소 감득하고 호되게 따귀를 맞은 느낌으로 수치와 노여움으로 몸을 떤다.

 

소년은 되찾을 수 없이 잃어버린 부질없는 생애의 절망감에 짓눌리며 깨닫는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무자비한 투쟁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적군, 추하고 어두운 욕망, 인간을 타락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하나의 인간, 그가 되어야 할, 성취하여야 할 섭리로서의 인간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청춘이 된다. 3(혹은 3) 청춘은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기성의 인간 세계의 질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라 해도 될 것 같다.

 

3- 청춘

 

크리스토프의 청춘은 이 세계의 냉엄한 시선으로부터의 깨달음인 자기되기로 시작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쓰라린 고뇌를 숨긴 채 세계를 뚫어보는 시선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계의 돌봄과 자신을 위해 착실하게 피아노 교습을 통한 벌이와 작곡을 위한 작업, 궁중 연주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고,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들의 분가로 어머니와 함께 시장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 셋집 생활을 꾸려나간다. 겸허하고 선량한 여인네의 삶밖에 알지 못하는 어머니, 루이자는 참아왔던 현실의 삶에 지쳐 이제 모든 기운을 잃어버리고 의지의 힘을 상실한 채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괴로움에 빠져 어머니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이내 지난날의 유물 속에 좌초한 어머니를 발견하고 아들은 마음 아프게 불쌍한 영혼, 어머니를 동정심으로 안는다.

 

청춘의 도입부는 이러한 두 모자와 더불어 이사집의 집주인 오일러의 가족들을 통한 독일 소시민들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듯 한데, 그네들 교양이란 것의 한계, 기질들, 허영심과 하찮은 명예의 집착, 궁구하지 않은 맹목적 종교관에서 보이는 신앙의 이기주의 등, 독일인에게 자리잡은 이상주의의 허위가 배경이 되어 흐른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프가 경험하는 최초의 이성과의 사랑, 자비네, 아다, 로자 등 여인들과의 사랑과 이별에서 드러나는 허무와 씁쓸한 기쁨들, 닳아빠지고 시든 영혼들, 정열적 환각, 사랑의 전율, 그리고 치명적인 나날의 소모, 상실과 살아감의 이유를 직시하는 위기와 극기로서의 시간이다.

 

삶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의 경험들은 치욕스러움과 비겁함과 자기 맹세의 배신을 요구한다. 그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믿음에 고뇌한다. 떠돌이 행상인 외삼촌 고트프리트는 어디에도 붙들려있지 않은 문자그대로의 유목민적 삶을 실천하는 인물인데, 매년 연례행사처럼 누이 루이자의 가족을 찾아오고, 그때마다 크리스토프는 외삼촌으로부터 어렴풋 현자의 면모를 발견한다. 외삼촌은 청년의 정신적 삶에 대한 유일한 조언자로서 인생의 길을 조언한다. 인간이 희망을 품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별개가 아님을, 인간은 결단코 희망과 살아감에서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따라서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것임을, 해가 뜨는 데 대해서 믿음을 갖, 오늘 일을 생각하고 이치 따위란 버리라고, 생활에서 억지를 버리고, 하루하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읽어나가던 중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문장이 있다. 조카에게서 고트프리트는 불가능한 것을 해내려 몸부림치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욕망을 발견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을 이라고, 너는 오만하다, 너는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것밖엔 못하지...영웅이라? (...)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영웅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다른 이들은 그걸 하지 않는단다.”

 


4- 반항


크리스토프는 이 말의 충일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역량을 초월하려는 시도가 없는 삶이란 보람 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후일 그가 보다 넓은 세계에서 지식과 관계의 경험들이 쌓였을 때 그는 알아차릴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이것만은 깨우쳤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 있다는 자유의 즐거움을 각성한 것이다. 청년은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맹목적 반동의 시기이자 자신이 진실이라 시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그러한 시기에 도달한다. 4반동은 기성의 음악계와 대중의 인식에 도전하는, 자기 확신에 찬 젊은 열정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무수한 장벽 앞에서 부정되고 좌절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독일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게 된 이 청년 음악가는 기성의 위선적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들, 그리고 대중의 무지를 본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 목소리는 위험하고 해괴한 짓거리로 치부되고, 악의적 소문이 되어 소도시를 휩쓴다.

 

그가 작곡한 독일인의 무기력에 대한 반동의 비판에서 출현한 작품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그의 음악을 조롱하기 위한 작당모의에 의해 안전히 추락한다. 시기와 몰이해, 수구적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말하는 음악은 발붙이지 못한다. 대중과 기성의 권력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 청년의 음악은 무례하고 기이한 것이었으며, 그의 성장을 결코 허용하지 못한다.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고 발표할 수 없다면 토대가 없어진 것과 같다. 그는 비평지에 음악비평을 맡게 되고, 독일의 엄격주의와 속물근성을 비웃음 섞인 관찰안으로 날카롭게 벼려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작곡과 음악 연주가들을 넘어 가수를, 나아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연주를 듣고 있는 청중들까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중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그에 대한 비난과 질시는 극에 이른다,

 

여기서 멈추어야 했는데, 젊은 열정은 내친걸음에 동료 비평계에 훈계를 가하기 시작함으로써 비평가들을 연결하는 상호 암묵적 약속을 난폭하게 깨부숴댔다. 그는 곧 공적 질서의 적으로 간주되고,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자기 확신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본디 힘든 존재이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싸움을 할 바에는 머리가 터지는 인간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미친 사람처럼 공격을 계속한다. 앞날을 위한 어떠한 보신처도 마련하지 않은 이 천둥벌거숭이는 급기야 위협을 느낀 비평지로부터 쫓겨나고, 대공의 보호막이었던 궁정연주자의 지위까지 박탈당한다. 크리스토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수많은 적이 나타나 크리스토프를 공격 보복한다. 승자에 아첨하고 패자를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지와 욕망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들은 그의 교향곡은 정신병원에서 태어 난 것이다. 그의 경련적 화성은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과 사상이 없는 것을 기만하려는 수작이라고 까지 살인적 비평을 쏟아낸다.

 

홀로 버림받은 음악가, 모든 출구가 닫혔다. 궁여지책에 자비를 들여 작곡한 것을 출판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자 하지만 6개월 동안 단 한부도 팔리지 않는다.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청년 천재는 그의 처지를 이용하여 값싸게 음악교수를 얻으려는 반종교적 학교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박물학을 가르치는 라인하르트 교수의 부인과 공동의 관심사와 친절을 받게 된다. 선량한 교수 부부의 초대에서 그는 애정과 감사의 기쁨과 배은망덕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깨닫는다. 라인하르트 부인으로 불리는 안젤리카로부터 그녀의 출신지인 알자스지방과 프랑스, 라틴 문명에 대한 매혹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독일의 기만적 이상주의에 똬리를 튼 그 허약함, 그 허위에 올라타 권세를 부리는 기성의 권력과 폭넓게 자리한 대중의 몽매성을 떠나 프랑스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아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작곡과 답답함을 피해 산책하던 중 들른 술집에서 병사들의 마을 처녀에 대한 성적 모욕을 목격한다. 그들의 행패를 참지 못한 크리스토프는 한 병사를 때려눕히고 커다란 부상을 입힌다. 이때 방관하던 마을 청년들이 가세하여 일군의 독일병사들에게 커다란 상흔을 남긴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은 크리스토프를 지적하며 그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그를 군대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협하기 시작한다. 피해 대상이었던 마을 처녀는 그들의 비겁을 지적하며, 크리스토프의 해외도주를 돕는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의 범죄 용의자가 된 크리스토프는 불가피하게 파리로 탈주하게 된다. 아마 작가는 이들 농촌 마을의 술집 사건을 통해 당시 독일 소시민들에 팽배한 방관적 태도와 비겁함, 굴종적 인성을 들추어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크리스토프가 독일을 벗어나 프랑스로의 이주를 정당화하는, 그의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예기치 못한 파리로의 도주는 젊은 비판적 음악가의 지성을 한층 넓고 깊어지게 해주는, 그러나 무수한 모욕과 배신, 좌절과 절망의 번민을 수반하는 그런 인생의 여정이 될 것이다. 5권인 광장 시장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제목으로 여겨진다.

 

5- 광장 시장

 

주머니에 하루 여관비가 될까 말까한 궁박한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몸을 누일 파리의 가장 누추하고 값싼 여관방이 있는 곳으로서 떠들썩한 광장시장이고, 그가 만나고 경험하는 프랑스의 음악과 소설과 시, 연극, 비평, 정치에 이르는 예술과 문화사회 전반에 대한 소란스럽기만한 현상으로서의 광장이자 시장이란 의미로 이해된다. 아마 작가 로맹롤랑의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예술을 위한 예술, 그 탐미적 세력에 올라탄 사회정치 전반에 만연한 위선과 탐욕, 부패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의 산물일 것이다. 작가는 이를 젊은 독일 천재음악가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 비난의 목소리를 실어 직접의 공격화살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입으로만 이상주의를 외치고, 예술과 미의 이름으로 국민의 일반적 풍조인 외설과 퇴폐를 은폐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이 장은 온통 프랑스 예술의 각 분야와 정치사회에 이르는 크리스토프의 편력기라 할 만큼 프랑스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한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소설적 맛스러움은 가장 덜한, 그야말로 한 편의 프랑스 문예비평이라 해도 될 지경이다. 이 편력을 통해 크리스토프는 그들과 확연히 두드러진 자신의 개성을 확신하고, 그 힘을 배증시키는 시간으로 삼는다. 이 소설은 문학작품으로서의 범주를 초월한다. 새로운 행동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한 인간에게 몰아닥치는 무수한 절망들과 그 모멸과 굴종과 실의를 추진력으로 삼기 위해 수없이 고뇌하는 한 인간 내면의 빛을 읽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이미 숭고한 하나의 정신사가 된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인지는 6~10권의 기대가 될 것 같다. 내 인생 여정에서 너무 늦게 이 작품이 도달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만 새로운 삶들은 이 순간에도 새벽을 맞으니 그들에게 이 책은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리라. 결코 시대의 유행과는 무관한 영원한 배움의 산실이 되어 줄 것 같다. 수많은 검증과 비판 속에서 살아남은 명작, 그래서 고전이라 불리는 명예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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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 과자와 맥주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84
서머싯 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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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소설문학이 작가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로서 한 인간의 배설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기에 문()’이라며 지식의 한 체계라는 거룩한 이름의 범주로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내겐 이 작품 과자와 맥주(Cakes & Ale)는 전형적인 작가의 배설물이며, 나아가 그 배설의 쾌락을 즐기려는 교활한 자부심과 비겁함의 산물로 보인다. 당대 영국 문단에 대한 비판이라는 장막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지속하여 간직하고 싶은 한 때의 쾌락을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을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단다. 여든 살 기념작으로 한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호화장식으로 출간한 것으로도 은폐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써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된 이유는 소설 속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당대 영국 사회의 계급신분에 의한 인간관계에 놓인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각종 제약에 의한 인습적 수행에 있어 작가의 분신인 작중 화자인 윌리 어셴든(이하 어셴든이라 함)은 자신의 양육 보호자인 숙부인 교구 목사와 귀족 출신 숙모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그려낸다. 나는 여기서 몸의 비겁함과 교활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읽는다.

 

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주요 대상 인물 중 하나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이하 드리필드라 함)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전기를 쓰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앨로이 키어(이하 로이라 함)의 문학적 성공을 향한 각종의 수법을 열거하며, 목적과 수단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본보기가 바로 로이였다.”,  문학적 재능 없는 자가 문단에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당대 거장으로 칭송되던 드리필드의 출신배경이나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냄으로써 은근히 한 문인의 작품 활동이나 작품 자체를 은근히 비하한다. 몸은 이러한 배설을 통해서 아마도 꽤나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끝으로 하나 더 부가 한다면, 아니 이 소설의 절대 중요 제재로써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로지와의 육체관계를 동반한 열정적 관계에 중층의 의미를 부여해 작가 자신의 의지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이것은 일석 삼조인데, 드리필드라는 문학거인을 추문의 희생자로 삼음으로써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고, 로지를 한 때 자신의 연인으로 삼음으로써 우월감을 성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 작가의 쾌락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극작가 헨리 아서의 딸인 수 존스의 변신으로서 글로 보존된 숨겨진 관음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아주 교활하고 비겁하게 써진 작가 개인을 위한 쾌락의 절대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요소들로 작가가 숨기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욕망들로 인해 비하될 수 만은 없는, 우리네 인간 개인들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성찰들이 있으며, 소위 사로잡는다라는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갖춘 작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대중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재능은 로이라는 드리필드 전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빗대어 한 편으론 폄하의 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작품의 불가피한 요소를 오가며, 바로 대중적 흥미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역설적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어셴든은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인기를 하찮게 여긴다. 인기란 평범함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이 말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고 다양한 반면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 ‘Cakes & Ale'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생의 향락, 삶의 쾌락을 뜻하는 관용구로 사용되었 듯, 인기란 다름아닌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임을 입증하는 당찬 실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몸은 어셴든의 입을 통해  어리석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들도 나한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더욱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진술인 것이며, 실제 작가는 화자의 뒤에 숨어. 소설들 대부분이 전형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불멸의 걸작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지는 일도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라는 인식을 슬며시 내보이는 미끼로 진술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쾌락적 흥미를 주 요소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는 아주 자극적이어서 흥미, 매력, 사로잡는, 향락과 같이 그가 문단의 세태를 빈정거리며 제시한 요소들이 모두 버무려져,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어야 함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애초에 이 소설은 흥미로 가득한 인기를 겨냥한 작품으로 써졌으리라 여겨진다.

 

열여섯 살 쯤으로 추정되는 어셴든은 숙부의 목사관에서 계급적 우월의 태도로 사람들과 세계를 인식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까지 천박하게 낮추어지는 것이라 삼가는 것인 관습인 시절이다. 소년 어셴든은 자전거 구입을 숙부로부터 승인 받아내자 홀로 타는 연습을 하지만 실패만을 거듭한다. 이때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데, 소설을 쓴다는 석공의 아들인 드리필드 부부다. 어셴든은 짐짓 거만하게 두 사람을 대하지만 상냥하고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드리필드 부인의 친절에 그만 드리필드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홀로 타는 데 일거에 성공하게 되고, 이후 어셴든은 숙부내외 몰래 친분을 쌓아나간다. 사실 이것은 드리필드의 죽음 이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동료 작가 로이로 인해 야기된 추억으로 시작된 회고의 기록이다.

 

로이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문호의 이미지에 드리필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때문에 로이가 쓰는 드리필드의 전기는 아마도 부정적 이미지가 제거된 말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문나면 안 될 비밀들을 모두 숨긴 채 번듯한 전기를 엮어 내 놓으려는 것에서 어셴든은 부조리한 당대 문단의 왜곡된 조작적 분위기를 포함한 비판의 시선을 들이댄다. 로이라는 인물은 자메이카 총독을 지낸 영국 고위관료의 아들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소설가가 된 한 때의 인기 작가이다. 그는 비평가에 잘 보이려 애쓰는 작가 유형의 대표자다.

 

로이가 어셴든에게 하는  유명한 비평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나?” 하는 물음은 그의 인물 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물음에 어셴든은  별로, 나도 글을 쓴 지 벌써 35년이나 되네. 그동안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많이 보아왔지, 천재라고 추앙받으면서 짧은 시간동안 영광을 누린 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라며, 문단에 의해 조작된 평판을 얻은 작가와 작품은 결국 쉽사리 잊혀질 뿐이라고 로이의 인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불멸의 걸작과 관련한 인기있는 소설에 대한 어셴든 자신의 인식과 충돌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문단 또는 비평계의 조작은 그 성격이 달라 완전한 비교 가치는 아닐 것이지만, 문학작품의 위선이라는 악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어셴든의 당대 문학계에 대한 신랄하고 준엄한 비판이란 것의 이면에는 질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도사린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은 로이가 쓰려는 드리필드에 대한 매끈한 전기에 대해 어셴든이 숨김없이 쓰는 사실로서의 전기소설이라는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의 분신인 어셴든이 진정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세상이 추앙하는 대상을 격하하려는 거장은 누구였을까? 가 궁금해진다. 석공의 아들이며, 두 번의 결혼, 중산층 등 평민 계층의 인물을 통해 당대 영국사회의 실상을 비판했던 손 위 세대의 거장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이다. 어셴든은 드리필드가 신분이 낮은 자의 자식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의 어투나 그가 자신을 대했던 낮은 자세를 눈에 띄게 반복한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로지가 술집 여급 출신이며,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하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자체와는 무관한 극히 사적 삶을 통해 격하하는 동시에, 문단 내 평판을 좌우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래퍼드 부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종속적 인물로서 문단의 평판을 획득하고 거장으로 불린 것으로 묘사하여 문학적 역량 또한 신뢰할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비춘다. 몸은 이를 통해 자신이 통속작가이거나 단지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 내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배설로서의 쾌락적 글쓰기처럼 여겨지는 이유이다.


나는 소설 속 드리필드의 모델로 추정되는 토마스 하디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간략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 아내는 술집 여급과는 전혀 다른 변호사의 딸로서 오히려 토마스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여성이었기에 그 신분 차로 인한 갈등으로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묘사는 실제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플로렌스 덕데일로 불리던 여인은 소설의 내용과 같이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후일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로이가 쓰려는 전기 역시 드리필드의 두 번째 아내인 에이미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그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몸은 왜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조한 것일까? 여기에 이 소설의 향락적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대중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이 간직한 소중한 사랑의 기억인 여인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위장 수단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몸과 열정적 사랑의 시간을 8년 남짓 했던 여인인 수 존스는  내면의 밝은 빛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은 여인이라는 찬양처럼 그의 인생에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로지의 초상화를 온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화가가 등장하고, 그 초상화에 대한 어셴든의 첫 인상은 여기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나는 그녀와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갑자기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푹 찌른 것 같았다.(...) 묘하게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수사가 책의 몇 쪽에 걸쳐 흐른다.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고, 수 존스는 이렇게 소설 속 로지의 몸()을 입고 작가 서머싯 몸의 영원한 여신으로 박제화된다,  나폴리 박물관의 정교한 프시케의 조각상처럼.  실제 수 존스의 초상화는 몸의 평생 절친이었던 영국 왕립미술원 원장이었던 제럴드 캐리가 그린 초상화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 그림은 아마도 소설 속 로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된 감상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허구의 소설을 작가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이 감상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분히 작가의 전기적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어셴든에 의해 폄하되고 비판되는 문학비평가로 등장하는 로이가 그렇고, 드리필드의 명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나, 드리필드를 문학계의 거장으로서 평판을 만들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비평가의 지위와 영향력을 계속했던 트래퍼드 부부 모두 현실 속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후일 몸은 여든 살 기념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을 모두 긍정했으니 작가의 실제 삶과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오히려 작품에 숨겨진 의도를 방해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신분질서의 비인간적 계층질서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체화된 뿌리깊은 인습에 굴종된 모습을 보이지만,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그녀의 분방한 성적 자유의 행로에 대해 진심을 다해 긍정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와 관습을 이겨낸다는 것의 모순이라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그 나약함과 사랑과 명예의 소유를 향한 갈망들이 때론 거친 격랑처럼 몰려오고,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저녁같은 고요함이 되어 흐른다.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균형이라는 조작된 글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전체 인상을 흩트리려는 작가의 그 교활함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 작품의 진솔함이 바로 이 소설이 시대를 계속하며 명작으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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