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하게 걷는 자는 인간의 품위를 고수하는 자이다.”

- Ernst Bloch

 

 

비굴함은 비열함과 절대적 어리석음이라는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인간 앞에 납작 엎드리거나 허리를 스마트폰의 폴더처럼 구부리며 자신은 결단코 충성하리라는, 절대 굴복하리라는 맹세를 보이는 의례로서의 행위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니고서는 ()-맹세가 은폐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굴종적 몸짓은 배신이 내재된 것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이 가려진 비굴의 울분을 해소할 다른 창구를 필히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비굴함은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시선을 돌려 동일한 비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적 태도로 드러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해코지,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비굴함의 비열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러한 상관관계는 익히 알려진 것이어서 엔간한 지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행위의 위선적인 비윤리성의 의례를 페기하거나 극도로 약화시켜 수직적 인간관계의 부정적 연쇄 고리를 차단합니다. 실제 많은 공적 의례 행사에서 이러한 행태는 사라지거나 대폭 완화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레 이 열등하고 천박한 행태가 공공의 유선망을 타고 뉴스라는 형식을 통해 안방으로 송출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쩍 벌린 다리를 하고 오만하게 한 손으로 임명장을 내미는 자 앞에는 연신 일백 십도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한 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노예 행위이며, 노예는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힙니다.”라고 했습니다.

 

블로흐는 당당하게 서있는 자, 의연하게 걷는 자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저술에서 자연법의 근본적 목표는 인간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품위임을 밝힙니다. 이 경박하고 비윤리적이기 까지 한 몸짓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입니다. 즉 이 천하디 천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굴종의 몸짓은 이 사회의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추한 전경을 수용자가 무감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새겨 넣으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별 신체까지 지배하려는 것이지요.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작품인 간계와 사랑에는 이러한 굴종이 지배할 때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굴종의 의례는 항상 폭력을 수반합니다.

 

자애로우신 우리 영주께서는 모든 연대를 사열식장에 집합시키고, 멍하니 

바라보던 얼간이 녀석을 쏘아 죽이라고 명하셨죠.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고...”


인간이 인간의 품위, 존엄성을 지키는 곧은 자세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행위의 조건을 멸실하려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천박한 의도이지요. 즉 시민 대중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방자하고 교만한 권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방송의 통제, 문화 전반에 대한 획일적 가치 설정 등을 통해 수구적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쪽이라는 동일 영토 내에 사는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동일한 시간대를 사는 것은 아닌 것이죠.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른 여러 세대들이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은 오로지 개인 자신이 겪은 것에 의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적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굴종의 위선적 몸짓이 가진 위선과 교활성, 폭력성이라는 퇴행적 과거의 시간에 머무는 작금의 수구 인간들이 있는가하면 가상의 기술사회가 지배하는 저만치 미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여전히 대도시 노동자들과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세계관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랜 역사의 시간 내내 가부장적 권위시대를 살았던 지역에는 지금에도 가문의 계층을 따지며 인간을 구별하고 권위를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지독히 전근대적인 시간이 그곳에서는 21세기에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질적 구조의 이러한 기이한 공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블로흐가 개념화 한 것입니다.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간의 실천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의 동경으로 시간적 역진을 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몇몇 젊은 시인의 시집에서 의 존재에 대한 저주를 보고 당황하곤 했습니다. 그네들은 존재하는 질서의 무수한 모순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며,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설계하는 꿈이란 역사를 초월, 일탈하는 현실성 없으며 추상적인 피안에 대한 망상이라 폐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내재된 이상을 향한 욕구인 인간적 의지의 지향성을 애초에 싹부터 잘라내 버리려는 것이죠. 즉 유토피아를 한낱 사라져버릴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실재하는 사회의 문제점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순응하고 복종해라,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꿈이란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리고 약한 자에게 동일하게 요구하라! 절대 머리를 치켜들고 의연하게 걷지 마라. 그러면 검찰로부터 끊임없는 압수와 수색, 기소로 고통받고 급기야 감금 너의 인신을 구속하겠노라는 것이죠.

 

터무니없이 천박한 것들, 과거의 시간 속 망령들이 돌아와 설쳐대고 있습니다. 하나의 구역질나는 장면이 이 글을 쓰게 했네요. 꿈과 희망을 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를 막아서는 모든 것들에 맞서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사회에 박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남겨준 프랑스 대혁명 조차도 에드먼드 버크 같은 수구적 인간들은 시민들을 향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이라 했습니다. 바로 동시대를 사는 비동시성의 퇴행하는 역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있어왔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는 사회는 권위와 독재가 활개치는 인간 굴종의 세상입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사라진 사회는 사회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지옥입니다. 품위있는 인간 존엄의 삶을 살 것이냐, 복종하는 노예의 삶을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결코 타인에게 이를 요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의연한 걸음은 만인의 당당한 저항의 자세입니다.”, 이를 저버리면 교활과 위선, 폭력과 굴종이 지배하는 세계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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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1) 에른스트 블로흐 ,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2011, 열린책들

2) 박설호 , 꿈과 저항을 위하여-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2011울력

3) 프리드리히 폰 실러 , 간계와 사랑, 빌헬름 텔201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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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괄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어리석은 기획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관된 지점이나 혹은 통일된 영역으로 집합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변화무쌍한 인간사의 반영이기 때문일 테지요. 1920~30년대 재즈(Jazz)시대를 상징하는 소설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장편과 단편소설 등 대표작들과 몇몇 에세이, 그리고 출판인, 작가들과의 서신, 아내 젤더와 딸 스코티에게 보내는 편지로 엮인 이 우아한 판본 디 에센셜 F.스콧 피츠제럴드은 그러함에도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다 친밀하게 다가가게 함으로써 분명 새로운 읽기, 무수한 지층으로 이루어진 소설 속에서 다른 지층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1896.9.24~1940.12.21]


무엇보다 미국문학의 영원한 고전으로 불리는 위대한 개츠비를 수록된 에세이 명사록과 그 이유, 피츠제럴드씨와 인터뷰를 비롯하여, 이 작품의 퇴고와 출판의 과정을 같이했던 스크리브너스의 수석 편집자인 맥스웰 퍼킨스와 주고받은 편지는 익히 알려진 독해와 다른 새로운 층위를 통한 읽기의 가능성을 시사(示唆)합니다. 퍼킨스는 스콧 제럴드에게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져 좋은작품이라고 작가를 격려하며 시작되는 편지에서 소설에서 개츠비 이상의 비중을 지닌 화자인 닉 캐러웨이 방관자에 가까운서술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한 것을 칭찬합니다. 이 소설에서 인간 조건의 이질성을 강렬하게 느낄 수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설정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실 제 독서의 관점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요, 저는 오히려 개츠비는 화자인 닉의 정신사(精神史)적 성장의 기록으로 읽었다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개츠비와 데이지, 톰 뷰캐넌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세계에 대한 믿음의 변화, 인간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닉의 조연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데이지의 바람둥이 남편 톰의 부도덕한 불륜 관계를 위해 지나다닐 때,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모습의 에클버그 안과의사의 커다란 광고판은 소설이 지향하는 주제와 어울려 기막힌 예술적 장치가 되어 인간들의 행위를 목격합니다.

 

소설 말미에 닉이 개츠비의 삶에 대해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으면서 물질적 흥청거림이 휩쓸던 세계를 멀찍하게 떨어져서 바라봄으로써 알아차리지 못했던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한 발설로 다가옵니다. 아마 이 판본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작품에 새로운 절단면을 통해 읽어본다면 아주 색다른 감상을 맛보는 기회가 되어 주리라 생각됩니다.

 

유리그릇을 두 팔로 안은 채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땅 아래로...”

- 단편 컷글라스 그릇에서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 또한 피츠 제럴드의 인간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주제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컷글라스 그릇의 주인공인 이블린 파이퍼의 삶과 그녀의 결혼 선물로 주방 선반을 장식하는 당시 중산층의 과시적 물질로 유행하던 컷글라스의 운명이 은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 욕망의 퇴락과 끔찍한 파괴로 이어지는 결말은 시시껄렁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꽤나 강렬한 전율을, 깊은 인상이 각인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비롯한 리츠 호텔만한 다아아몬드등 꽤 알려진 단편 작품들이 이 판본을 더욱 알차게 만들어줍니다. 독서 애호가들의 한동안의 즐거움을 담지(擔持)할 구성입니다.

 

수록된 각기 다섯 편의 에세이와 서신들 중에서 재즈 시대의 메아리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식을 제공함과 더불어 에세이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감각을 느끼게 해줍니다. 모든 것이 낭만적 장밋빛으로 보이던 지나가버린 젊은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그 시절만큼 강렬했던 적이 두 번 다시 돌아 올 수 없음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감정,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숙성함의 시큰거림이 느껴집니다. 출판사에서 되돌아 온 122개의 거절 쪽지들이 붙어있는 냉장고, 30달러를 받고 단편 소설 한 편을 팔던 소설가가 드디어 장편 낙원의 이쪽출간 연락 소식을 받고 , 어느덧 이러한 일들이 모두 어떻게 일어났는지 의아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 얄궂은 제목의 에세이 명사록과 그 이유에서 피츠 제럴드는 이렇게 맺습니다.  이게 전부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작가들의 가장 좋은 방법을 간절히 쫓는 문학적 도둑이라고 공언하는 한 작가의 진솔한 세계를 거닐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기 성찰에 철저했던, 그럼에도 저는 사춘기 에고티즘의 다양한 바다에서 수영해왔다.”며 겸허와 경험의 노력에 헌신했음을 자부하는 긍지의 작가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젊음과 사랑, 그리고 광활한 인간사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 피츠제럴드를 꺼내 읽어질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이 다채로운 구성의 판본은 그 유용을 밝힐 것이라 생각됩니다. 뜨거웠던 계절이 전락하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입니다. 피츠제럴드를 읽는 계절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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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위상학 - 전우치전과 홍길동전, 정치와 통치에 대해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이진경이 쓴 한국 고전 소설들에 자리를 할당한 척도를 깨기 위해,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고자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파격(破格)의 고전을 읽어나가다  변신의 위상학을 설명하는 <전우치전><홍길동전>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소회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 충동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변신술이 목적하는 바의 천박한 욕망,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지 않고 고작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에 얻고자하는 욕망임을 보았기 때문인데, 바로 성공을 추구하는 자의 냉혹한 합목적성,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피와 죽음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결여된 것에 사로잡힌 자의 체제 내적 욕망(173)이 풍기는 악취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고닦은 도술이 합목적적 도구가 되는 순간, 세상사를 자신의 목적 아래 복속시키는 무서운 수단으로 변질 악용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일개 검사가 정치검사가 되어 한 국가의 수반이 되자 검사로써 배운 압수, 수색, 기소라는 술책이 만능의 도구인 듯 휘두르는 모습에서 동일한 종류의 인간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홍길동 같은 인물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읽을수록 멀리하고 싶은 인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 책의 집필시기의 판단은 성급했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조의 소설들에는 한결같이 여러 유형의 변신술 또는 도술이 등장한다. 이 변신술이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인간화된 도술이 있는가하면, 본질적으로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도 있으며, 물질성 그 자체와 결부된 힘을 지닌 <금방울전>의 금방울처럼 물질성의 도술도 있다. 그리고 동물적 기원의 변신에 있어서도 그것들은 또다시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수재의 에피소드인 <왕수재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흐트러뜨리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치안(治安)의 변신이 있는가하면, <전우치전>처럼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의 손안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치안, 통치를 희롱하고 할당된 자리를 벗어나 사용됨으로써 정치(政治)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온전히 인간적 도술을 부리는 <박씨부인전>이나 <홍길동전>은 전자의 경우 경계를 확고히 하여 지배적 가치(統治)를 지키려고 사용되며, 후자의 경우는 서자 자리로부터 이탈의 욕망이라는 표면적 저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홍길동의 경계 이탈은 지배가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단지 자기 결여에 대한 반항이고 경계, 즉 체제 내적 욕망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사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추한 사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같은 변신술이라도 그 안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데, 그들이 서있는 지점과 문제화하려는 의도, 사용 목적에 따라 극히 상반되거나 다른 사회적 영향을 낳는다.

 

<전우치전>의 개략적 이야기로 시작하자. 여우의 호정(여우의 넋)’을 빼앗아 먹음으로써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전우치가 여우의 굴에 가서 천서 세 권을 얻었으나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글이라 구미호를 앉혀 놓고 상권(세 권 중 한 권)을 배워 통달하여 도술을 획득한다, 즉 동물적 기원을 갖는 변신술의 능력으로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새로운 술법을 부려 인간 세계 안에 이러저러한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 시킨다. 즉 그는 권력에 반하는 유희를 행하면서 거만한 관리나 잘난 체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한 인간들을 참지 못하고 엿을 먹인다. 더구나 전우치는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의 변신술을 통해서 소위 속세의 권력이나 재화 등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국가나 통치자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희롱하며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노리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는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구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통치를 비판하는 정치라는 새로움, 민중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대 조선의 양반들은 전우치전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는지 <전우치 한문본>을 새로이 써서 ()-전우치라는 기치 하에 완전히 반대되는, 다시말해 전우치를 윤리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인물로 규정해 버린다. 한문본의 유치찬란함이란!  전우치가 천서(天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대부들은 전우치 혼자 읽고 깨우치는 걸로 씀으로써 자신들의 우매함이 드러난 것을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직 도달 할 수 없는 아득한 깊이와 거리 저편에 있는 자연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한문본은 서화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우치가 제압당하는 걸로 종결하여 기성 권력이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서화담이 전우치를 위협하는 문장은 정말 가관이 아닌데, 앞으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며....만일 내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며 너 같은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사회와 격리된 깊은 산속이어야 하며, ‘자리를 이탈하면 죽여버리겠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통치질서에 저항하지 말고 쭈그리고 없는 듯 살라는 말이다.

 

로버트 단턴이 쓴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인 고양이 대학살에 소개되는 인쇄공들 그들만의 문화 주제를 가지로 유희를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하던 그 정치적 이벤트를 떠오르게 한다. 시공을 달리하면서 동서의 민중들은 불의와 부당함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며, 항시 이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폭력과 마주했다. 2023년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유머와 가벼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상극, 대립에 있는 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우치와 달리 인간의 관념을 벗어난 세계로부터의 기원이 아닌, 지극히 인간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구상된 주역을 읽고 도술을 익힌다. 홍길동은 기존 세계, 즉 체제 내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란 뜻이다. 홍길동의 도술은 전우치의 기성 권력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 임금에게 알리려는 과시적 목적의 사용이다. 신의 이름을 드러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홍길동의 말처럼 그의 변신술은 명확한 목적에 의한 기만과 공격일 뿐이다.

 

성공을 추구하는 냉혹한 합목적성, 국가나 통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변신술이다. 단지 버림받은 처지의 원한을 호소하며 통치 권력이 자신을 포섭해 주길 욕망하는 사술이다.  때문에 홍길동의 반란과 공격은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즉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권력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임금이 병조판서에 제수한다고 하자마자 냉큼 궁궐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은 고작 권력에서 배제된 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난리를 부린 것,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는, 이미 국가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결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할 의지도 없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를 얻으려 했을 뿐인 에고이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지금 날뛰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이며 이의 정체적 상징인 국민이 주권의 소지자라는 헌법 질서를 부인하는 관료가 설처대고 있다. 도구적 도술, 도구적 변신으로 권력만을 탐하려는, 자리를 얻어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만이 득시글댄다. 국가와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말해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가 실종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치는 다름을 통합하는 기술의 장()이다. 다름을 폭력의 대상으로 적대화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 통치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정치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질서의 경계를 확정지어 기성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수구적 태도가 <홍길동전>과 유사한 소설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박씨부인전>이 있다. 인간적 도술에 기초한다는 측면에서도 홍길동의 도술과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술책을 쓰는 별당 아씨 박씨부인은 초월적 예견력을 발휘하여 시댁의 부를 늘리고, 국가의 위난에 대비하는 등 가족과 국가질서의 굳건한 주체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늘 패하고 상상 속에서만 승리한다.

 

철학자 이진경이 지적하듯 일종의 루쉰 식 정신 승리법에 도취한 인물이다. 현실적 패배는 눈앞에 지워버림으로써 패배의 이유를 묻지 않게 되므로 계속해서 패배하게 된다.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영원히 그 패배에 달라붙은 불모의 지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출구는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금의 정권처럼 재난은 반복된다. 책임을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책임은 또다른 재난을 계속 반복할 것이고, 그것은 민중이 고통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승리적 관점만을 취하려는 이 몽매함, 정신승리법! 에 도취된 권력을 지닌 국민은 고달프다. 통치에 대항하는 전우치의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읽기위해 한문본 전우치가 아니라 경판본 37장을 계열로 하는 한글 전우치전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기성의 평가의 척도를 깨부수고 기존의 틀과 대결하는 파격(破格)‘을 알려주는 고전소설을 새로운 절단면을 내서 읽도록 견인하는 이진경(박태호)교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파격의 고전, “확립된 평가의 틀 안에 이질적 기준을 밀어넣어 새로운 감응을 만들어내는 이 책을 마구 선전해도 어떠한 비난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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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 갈등의 번역과 분열주의 생산 관계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의 사회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이 쓴 나와 타자들(Ich und Die Anderen)을 읽어가던 중,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퇴행의 양상들이 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나의 요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카림은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이 정의한 정치, 사회적 갈등으로서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껍데기뿐인 포스트민주주의, 즉 비민주적 사회로 역행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고찰임과 동시에 작금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데 비교적 명쾌한 영감을 주기에 그 소회를 남겨둔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경제적 이익, 분배문제와 같은 정량화 가능한 이익에 관한 갈등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갈등이기에 인정이나 교환, 타협이 가능한 갈등으로서 어떻게든 봉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눌 수 없는 갈등이란 세계관, 정체성, 문화, 가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측정할 수 없어 따라서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정량적 기준을 지니지 못한다. 그저 인정하거나 불인정하거나라는 극단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화해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기 쉬운 갈등이다.

 

이 정치적 갈등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갈등의 정의가 왜 중요한가하면 바로 시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으로 표상되지만 시민적 체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두 갈등의 결과는 점진적으로 시민의 경제적 삶은 물론 각종 사회 안전망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훼손,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퇴행시킨다. 결국 이것이 시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국가라 부르는 시민의 통합적 상징 이미지를 전락시킨다. 아마 왜 현재의 정권이 재난에 무감하고 무책임한지, 그들이 왜 오랫동안 쌓아올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지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정의는 더욱 의미 깊다. 그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은 협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문제를 푸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치, 정체성, 문화를 다루는 일에 관여해야 하며, 이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하여서라도 이를 해결하여야만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중재하고 타협할 수 있다. 그래야 시민 대중은 통합될 수 있으며, 국가는 혼란을 멈출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지만 시민의 피를 댓가로 그나마 작금의 사회안전망이나마 갖추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들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도록 건강보험, 최저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복지 체제를 부여했다. 이 권리를 통해 시민은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존엄!’, 그렇지만 이 깨지기 쉽고 스스로는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확인받는 행위를 요구했다. 나눌 수 없는 사회적 안전, 인간존엄과 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물질적 제도로 확인한 것이다. 이 확인이 곧 복지국가의 형상이며, 민주주의 실현이다. 존엄, 자부심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최저임금이나 의료보호로 나눌 수 있는 확인으로 보증된 것이다.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 나눌 수 없는 것들을 훼손하거나 파괴한다면 무엇이 파손되는 것이겠는가? 사회통합을 위한 요소였던 존엄과 평등의 가치, 정체성 등이 손상을 입음으로써 시민이 분열된다. 즉 가치와 세계관,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배제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축소하는 것, 각종 사회적 약자에 지원되던 예산을 삭감하는 것, 최저임금을 물가 인상률에 현저히 밑도는 수준으로 결박하는 것,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정하며 폭압으로 물아 부치는 것,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어 타협과 통합을 이루었던 근본을 파괴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대한 하나의 축을 찢어발겨 훼손함으로써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국면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를 부인한다. 그리고는 이 갈등에 대한 목소리를 적대화하여 케케묵은 빨갱이, 공산당의 논리라며 파렴치를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을 알고 실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16개월 남짓 보여준 모든 정책과 정치, 행정 행위에는 무책임과 회피가 일관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등의 한 측면에 얼마나 소홀한 지, 혹여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으로 이들이 지극히 면밀하게 사회통합을 해체하여 분리주의적 분열을 획책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대기업 감세와 초부자의 증여세면제 등 최상위 부유층과 그 나머지 99퍼센트의 시민대중과의 두 국민 정책이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시민대중은 이러한 작태에 대해서 분노하고 격노와 아픔, 실망의 감정을 표시하고 이를 대의 기관인 정당과 정권에 관리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권력은 이 감정들을 엉뚱한 곳에 탕진하거나 방치하면서 약화 상실시켜버리고 있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경청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고려받는 느낌조차도 없다. 대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은 대의 기능을 전혀 인지하지 않으며, 권위주의적 권력 놀음에 취해 자신들의 주머니 이익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강력하게 획책하는 분열주의가 이들의 불의와 부패를 방어해 주리라 믿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들은 시민 대중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으며, 분리한 대다수의 시민의 삶에 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구경꾼 코스프레와 쇼의 연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잼버리 대회의 무책임한 운영은 재난에 대한 애초의 관리 의지 없었음을 입증하는 극히 일부 노출된 사례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재난의 발생과 무책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에게는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파손할 의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 즉 가시적이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합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환상인 것 같다. 정치는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합리적 합의가 아니다. 이성적 합의 뿐 아니라 감정적 합의를 생산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사회갈등은 단순한 전략적 이익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협상의 예를 보더라도 여기에는 사회적 관심, 인정, 정의에 대한 생각 등 이성 외의 요인들이 늘 개입한다. 이처럼 실제 나눌 수 있는 갈등에서조차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불일치의 동기가 놓여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의 타협을 중재하고, 각 정파들 사이에서 감정의 타협을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고 시민대중을 갈라치기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파기하고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 획책의 중지와 통합을 위한 민주정치로의 복귀이다. 더 이상의 파괴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무책임과 무관심, 방관, 거짓말은 안 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성실한 번역 작업에 임하는, 일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 어려운 노력을 회피하는 게으른 권력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어있다. 30퍼센트의 우중이 언제까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맞장구를 쳐줄지는 단언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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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Essais 2-1 에서


작금의 권력은 가장 흔하고도 명백한 악덕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시리아 출신 그리스 희극작가인 푸블리우스는 재고(再考)할 수 없는 결심은 가장 나쁜 결심이다.”라고 말했으며, B.C. 4세기의 그리스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라 말했다고 몽테뉴는 그의 생애 저술인 에세에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릇된 결심을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반성과 숙고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권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장인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현실의 권력이 자행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몇 자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솔한 위대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온갖 모순을 발견한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서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단순하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란 온갖 잡다성과 모순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 사이가 자신과 남 사이만큼 차이가 있음을, 즉 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불가능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반성과 숙고라는 깊은 사려를 통해 도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은 숙고를 통한 확고부동의 길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정책에 어떤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 자의적이며 임기웅변의 권모술수만이 행해지고 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범인의 흔해빠진 본성이며 명백한 악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로 국가를 통치하려든다. 어떠한 것도 확고부동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잘못된 정책과 견해는 재고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그 어느 정권보다 무능력한 폐쇄 집단 출신의 인간들이라면 더욱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진하려드는 정책들에는 어떠한 원칙이나 질서도 없다. 때문에 정책 행위들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으며, 모든 일들 사이에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있어 국민적 연대를 통한 추진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 가려는지, 가려는 목적지는 있는지를 어떤 국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는 어떤 확실한 지침이나 명료한 국가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온갖 모순덩어리임을, 결국 인간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조각으로 구성된 미물에 불과함을 말이다. 어찌 재고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권을 지녔다는 듯,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독재는 자신의 불의로 인해 민중의 언로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오류가 오류투성이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지금 권력의 정책들은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길을 헤매고 혼돈으로 우왕좌왕, 좌충우돌로 정쟁으로 왜곡되기 일쑤고, 민생과 국가 발전의 길은 좌초되어 침몰하고 있다는 지표가 도처에서 경고등을 발하고 있다. B.C. 1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주벽(酒癖)으로 취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술의 위력이 스며든 인간의 지력 흐릿해짐과 험상궂은 눈, 그리곤 고함과 싸움질로 치닫는 거칠고 동물적 악덕 행위로 말이다. 한 국가의 리더가 자신의 주벽을 뻔뻔하게 시민들이 오가는 길에서 과시하는 파렴치함을 보일 때 그것을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와 결합시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허황된 자부심이 얼마나 인간을 지각없게 만드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시민들은 반성도 없으며, 숙고도 없고, 그 어떠한 확고부동하고 사려깊은 정책도 없는, 게다가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권력이 불안하며 그곳에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른해진 사지로 건들거리며 다리는 꼬여 비틀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국민적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깊은 사유를 통한 끝에 도달한 명료한 목적이 없으니 구체적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재난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회피, 외교적 무능과 실수의 연발, 왜곡된 언론관에 의한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탄압적 폭력행위는 바로 이러한 자기반성과 숙고 없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간적 자기 인식 없음으로부터 출현하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둘 수 없으니 부분들이 정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각 통치 기구의 상호 네트워크의 유연한 연결을 비롯한 거버넌스(governance)의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난맥상이다. 약간만 돌려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국가의 그 복잡다단한 정책들은 어떠하겠는가?

 

잔인성의 표본인 로마의 네로도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퍼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처럼 변덕스럽고 모순으로 뭉쳐있음이다. 제아무리 지혜롭다한들 인간이다. 지혜란 인간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몽테뉴를 빌어 쓴소리를 끄적이게 됐다. 세네카가 말했다.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라.”고 말이다. 반성하고 숙고하며 그 완성으로 확고부동한 정책을 펼치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쇄신(刷新)하는 인간이기를, 또한 권력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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