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를 안은 계절 탓인가? 어느 샌가 이만큼이나 삶의 시간이 지났구나하는, 마치 관성처럼 살아온 것만 같은 공허감이 제법 묵직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았다. 아마 이러한 심리적 반응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와 함께 생의 근본적 통찰을 담은의 황금시대로 이끌었던 듯싶다.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는 인간 개체 마다 지닌 태어난 해와 월, , 시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이루어진 팔자(八字), 즉 개별 삶의 좌표를 읽고 해독하여 란 누구인지라는 토대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주도적 운영자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의 자기모색의 길을 안내한다. 사주팔자하면 결정론 아닌가라는 의구심 탓에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너그러움이 내 것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앎의 편협성을 떨쳤다는 증거인 듯이 명리학이 지닌 우주론적 고매함이 발설하는 비전과 그 실용성이 비로소 시선에 들어 온 것이다.

 

의 황금시대는 이 같은 이해가 불러온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연스러운 욕구였을 것이다. 중국의 외교관이자 철학교수인 C.H.의 저술을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한 수려한 문체가 더욱 돋보이는 저작이다. 인간 정신의 경지와 선의 역사를 입문하는 데 맞춤이다.

 

이들 저작은 동일성의 반복을 멈추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찰과 이를 통한 비움과 순환, 나아가 새로움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생의 에너지라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세계의 속물적이고 비즈니스 세계의 언어로 삶의 성취를 말하는 판본이 조용인언리시;Unleash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파악하여 새롭게 재정의 하는 방법론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지워 버리고 다시 앎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혹독한 노력 과정의 길잡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읽고 감동의 리뷰를 남긴 룰루 밀러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립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하던 한 여성의 자기 탐색이자 그 구원자로 여겼던 분류학자의 생을 통찰하며, 자기만의 생의 길을 찾아내는 여정으로 여겨진다. 이제 중간쯤에 도달했다.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는 좌우명, 시련과 고난을 뚫고 고집스레 자기 길을 걸었던 낙천적 과학자의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빚어내는 그 모순성에서 자라나는 악의 근원을 목격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매혹을 뿌리칠 수 없다. 읽던 책을 뒤로 미루고 이 책에 꽂힌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했으니까.


 


캐나다 출신의 고전문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은 내심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를 기대했던 작가다. ()이면서 평론 에세이고 소설인 이 독특한 작품 빨강의 자서전, 언어적 앎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 그 분별과 오만한 무지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는 인식 전환의 내밀하지만 힘찬 외침인 것 같다. 조바심이 일게 만드는, 지금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떠남과 회귀, 중견 작가 이승우의 소설 이국에서20185월부터 20193월까지 문예지 AXT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친구가 되세요라는 문구가 써진 작가의 사인본을 받고서는 새로운 관계를, 낯설더라도 그것이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시장의 요구로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낯선 이방의 나라로 떠나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내외부와 떠남이 키워드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 아니 어떤 의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지 책장을 더 넘겨야 할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누락된 작품들이 남아있다. 여름이나 전락은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 대한 성찰 때문에 전집 한 권을 사야했다,  ‘사형이라는 국가 살인 행위에 대한 불합리한 논리, 비도덕성, 비실증성을 동원한 비판적 평론이다. 국가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본보기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비롯한 인간 본성에 대한 냉엄한 성찰이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자기신체권이라는 소유권 박탈의 권리를 국가가 지니는 것, 아마 꽤나 많은 논쟁지점이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와 비결정론적 믿음을 가진 내가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궁금한 저술이다.

 

비트겐슈타인논리 철학 논고는 상당한 시간적 대가를 요구한다. 경험론은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이다. 즉 버리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얘기이다.이 세계의 가치를 모두 밀어내고 그곳에 논리로 채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그야말로 논리 자체다. 이 논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결정짓는 것인지, 이번 만큼은 독하게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한다. 과연 이 난해함의 비밀번호를 찾아낼지가 관건이다.

 

모든 세계는 나의 세계이며, 나의 세계는 언어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이고, 언어의 묘사가 곧 사실의 반영이라고시작하는 이 철학 사유는 명리학이 말하는 나는 곧 우주자연이라는 말과 흡사하다.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팔자가 뜻하는 그 개별적 실체의 총합이지 않을까? 아무튼 상식이라는 보편성의 그 엉터리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될 것 같다. 이 세계의 그 무수한 사유의 세계들로 들어가면 결국은 인간, 나의 의미란 무엇인가로 좁혀지고, 그런 의미 혹은 무의미에서 어떻게 삶의 목적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만 같다. 이것이 아니라면 사실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런데 이 세계에 인간이 복병을 만들어냈다. AI(인공지능)가 그것이다. 이제 블로거,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메타버스의 세계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며, 가상세계는 실체의 공간과 그 현실적 체험을 옮겨놓고 있다. 파르마코-AI라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쓴 이 괴이한 책은 기억과 젠더, 언어와 윤리학을 교대로 대화를 이어가며 써내려가고 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GPT-3가 쓴 글을 한 번 보자.


우리 문화가 보이는 발전 중독증세는 연표를 제작하는 방식이자, 사회의 경제적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예화와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의 학살까지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포스트사이버펑크를 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급진적 변혁을 예상한 뉴에이지 사상에 이은 생각이다. 이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통해 인간 앎의 지평은 조금 깊고 넓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변화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미지 존재론의 철학자 베르그손을 읽는다. 물질과 기억, 인간은 외적 물리적 자극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은 심리생리학적으로 통합된 존재인가? 지금 4차 혁명을 주도하는 정보산업의 주체들은 동물기계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식 물리환원주의를 외치고 있다.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후손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우리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보다 넘치는 듯하다. 아무튼 이 가을, 내 삶의 재설계를 위한 독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과연 내가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담아낼 만큼 용기가 있을까






P.S. -  아, 몇 권의 책을 빠뜨렸다. 문학사(文學史)상 가장 긴 자살 유서로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소설인『막간』은 불순하지만 호기심에서 집어 들었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의 『위대한 강연』도 꼭 무엇을 얻으려는 지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그의 초지일관하는 이분법적 사유, 강고한 서구 엘리트의 전형적 사유를 보려했을 뿐이다. 


미와 추, 절대와 상대. 완전과 불완전, 진실과 거짓, 거인과 난쟁이..., 사실 애초부터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책을 읽으려 했으니 불순한 동기는 막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마 이 삐딱한 동기 때문에 빠뜨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의 짓궂은 방해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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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학의 대중적 저술가이자 유튜브 최대 과학채널 쿠르츠게작트의 설립자인

'필리프 데트머'가 저술한 Immune(면역)의 리뷰로서, 도서출판 사이언스북스에서 

제공한 가제본 도서를 기초로 쓰여졌습니다.



참조 : 이미지를 클릭하면 관련 동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책은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어 5억년 이상 시간을 누적하며 진화시켜온 대략 40조 개의 세포가 유기적 상호작용으로 축조된 인간 신체의 생존 유지 장치인 면역계의 정교하고 기발한 시스템을 대중적 언어로 지펴낸, 자기 앎에 대한 탁월한 저술임을 어떤 언어로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작이. 어쩌면 인간 신체에 대한 이 새로운 앎, 무지로부터의 작은 해방이 가져오는 흥분 탓이겠지만 내 의식이 무수한 나래를 펴며 자꾸만 다른 사유의 영역으로 날아가게 한다.

 

면역체란 생명체의 보호와 유지 존속을 위해 진화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시켜온 엄청난 복잡성 시스템이다. 이 문제란 인간 몸을 자기 생존의 생태계로 인식하는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이들을 통틀어 병원체라 한다), 세계에 온통 퍼져있는 외부 적으로부터 인간 신체를 지키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호하고 계속 살 수 있게 해주는 생물학적 원리를 어떻게 표출하는 가의 문제는 자기 생존에 직결되는 것인 까닭이다.

 

병원체에게 인간의 신체는 위험을 줄이면서 영양을 섭취하고 생존과 번식을 위한 멋진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 빌붙으려는 존재들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곧 생존의 중요한 과제라는 점이다. 면역계는 바로 이러한 오랜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진화의 산물이며, 그만큼 정교해지고 치밀해졌다. 그 결과는 신체 속으로 침입하는 적을 특이적으로 인식하고 그 적에게만 효과적인 무기를 신속하게 대량 생산하는 능력과 한 번 침입했던 적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21)이다. 타자가 해를 끼칠지 말지와 무관하게 일단은 타자로 식별되면 무차별 공격을 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타자는 죽음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생명체는 며칠도 못가 죽고 만다.

 

건강의 유지란 바로 이러한 면역계의 안정적 작동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40조 개에 이르는 인간 몸을 한군데도 빠짐없이 방어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면역계는 이 엄청난 세포 구조물의 방어체계로서 한 순간도 그 작동(경계)을 멈출 수가 없다. 멈춤은 곧 죽음이다. 사실 살아있다는 것은 적대 세력이 득실대는 곳에서의 쉴 새 없는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굴복은 멈춤이요 생명 작동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체에 공급되는 에너지 모두를 면역계를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 40조 개에 이르는 세포의 정상적이고 평온한 작동을 위한 영양 공급과 신체를 구성하는 각 조직과 기관의 일관된 작동 시스템을 감시, 운영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되기에, 면역계는 빠듯한 예산으로 방어 전략을 구축했다. 그것은 선천 면역계와 후천 면역계로 기본 방어 전략과 특화된 방어 전략으로 이원화하여 침입자에 따른 각기 다른 방어 전략을 구사하여 낭비 요인을 제거한 것이다.

 

전문적이고 복잡한 용어를 피하고 난이도를 조절하여 독자가 재미와 지적 이해를 함께 쌓아갈 수 있도록 집필된 이 저술은 그 지식의 친밀하고 세밀한 안내로 거의 저절로 체화될 만큼 직관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아마 인간의 지식 습득에 대한 어떤 앎의 경로를 알고 있는 듯, 이해를 위해 동원되는 침입자, , 전쟁, 무기, 생물학적 로봇과 같은 상징을 동원한 비유법은 복잡하고 난해한 생물학적 지식을 그야말로 천재적 서술능력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해준다.

 

인간 신체와 외부세계의 접점인 피부와 점막(기관지와 허파, 눈꺼풀, 입속, 콧속, 위장, 생식기관)을 비롯해 콧구멍, 귓구멍 등등은 침입자가 몸속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장소다. 다시 말해 적대세력과의 경계인 피부와 이들 점막에는 천연 항생물질을 비롯한 염도, 약산성 등 미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뿐 아니라 매순간 100만개의 세포가 통제된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침입 세균의 서식터전을 제거하기까지 한다.

 

아마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상처로 시작되는 예화(例話)를 통해 면역계와 면역 세포들의 활동을 가히 숙련된 솜씨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도록 전달하는 점진적 세밀성을 지닌 강렬한 지식들 때문이다. 우리 신체의 선천 면역계는 외부 침입자(병원체)를 발견하면 즉시 행동에 돌입하는 체계이다. 적과 죽은 세포를 먹어치우며, 방어전략을 지휘하는 큰 포식 세포로부터 상처가 너무 깊을 경우 혈액 속에 떠돌던 중성구가 활성화되어 살인 병기로 둔갑, 자폭까지 마다치 않으며 병원체를 맹공하는 경로는 실감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을 정도로 흥미와 지식을 동시에 흡수케 한다.

 

이 면역 세포들 및 단백질 덩어리들이 활성화되고, 세균과의 전쟁터가 된 상처 부위로 어떻게 중성구가 경로를 찾아 도달하게 되는지, 360도 면역 감지 체계를 갖는 세포막과 일종의 면역계 언어인 아주 작은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을 생성 발산하는 큰 포식세포의 행위 등은 가히 경이로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 몸에 발생하는 염증의 목적은 물론, 사이토카인 폭풍이라 불리는 면역계 통제 상실 증상 등 단백질 사이에 발생하는 일련의 생화학 반응에 이르는 해설은 인간 신체의 면역계를 실체적 이해로 견인한다.

 

나아가 단백질과 물 분자로 구성된 세포의 특징과 3D 퍼즐 조각처럼 존재하는 단백질의 특정화된 형태가 침입하는 세군과의 형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적대자를 멸실(滅失)시키는 작동 시스템은 진화적 신비에 어떤 경외감마저 일으킨다. 단백질 인식기 역할을 하는 선천 면역계의 수용체에서부터 우리 몸의 모든 체액에 가득 차 있는 약 1,500경에 이르는 보체계가 발휘하는 면역 기능들 또한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겹겹이 감시되고 활성화되는 면역계의 경로들을 따라가며 적의 존재 성격(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기생충인지)을 알아내고, 후천적 면역계의 도움을 받을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하면, 전쟁터 상황과 적의 존재를 알리는 전령인 가지세포의 비상한 이동, 면역 세포의 정보센터 역할을 하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약 600개의 림프샘과 면역 슈퍼하이웨이라 할 수 있는 림프계(몸속 배관)’를 떠돌던 ‘T세포의 활성화와 항체 형성 세포의 변이 등은 우리 몸의 구성 기관은 물론 신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면역 세포의 필수 검정기관, 가슴샘 - 130


내겐 뜻밖의 새로운 앎이 된 가슴샘(흉선)’의 역할에 대한 지식은 면역계의 경이성과 함께 생명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후천 면역계인 T세포는 선천 면역 세포들의 활성화 및 전략 지휘자 역할과 특정 침입자인 항원에 맞서는 항체를 만들어 적을 무력화시킨다. 이 세포는 한 가지 특이한 항원만을 인식하는 특이적 수용체를 갖도록 만들어져 적을 섬멸한다. 그런데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경우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 T세포를 검사, 훈련하는 곳이 바로 가슴샘이다. 여기서 졸업하는, 즉 특이적 수용체를 생성할 수 있으며, 다른 수용체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지 여부를 통과한 것은 2,000만개에 달하는 것 중 2%20~40만개에 불과하다. 항체로 변이하는 이 세포의 특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슴샘의 메커니즘은 절로 그 진화적 능력에 머리를 떨구게 한다.

 

가슴샘은 대략 85세 전후에 이르면 기능을 멈춘다고 한다.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장기로서 언제 죽을지 결정하는 장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기능이 멈추면 이미 양성되어 배출된 T세포만으로 병원체에 저항하여야 하기에 감염성 질환이나 암에 지극히 취약해진다. 결국 생존을 위한 방어 체계가 사라지기에 인간의 신체는 죽음의 도래에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이 짧은 리뷰를 쓰는 순간에도 내 몸의 면역 체계는 끊임없이 침입하는 세균을 감시하고, 발견된 병원체들과 전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이고 역동적인 면역계의 활성화 및 작동 기작(機作)을 알아가며 내 호기심은 선천 면역계 역할의 목적인 자기와 타자의 철저한 구별단백질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생화학적 물질로서 세포를 생물학적 로봇기계로 정의하는 곳으로 향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란, 아니 동물이란 본질적으로 타자를 공격, 파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과 동물이란 한낱 생물학적 로봇인 단백질 형태의 끊임없는 변형과 조작에 불과한가라는 수없이 반복되는 논쟁적 물음의 제기이다. 단지 단백질의 생화학적 기작에 의한 흐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존재임에 쉽사리 굴복되지 않는 저항이 머리를 치켜든다. 타자에 대한 연민, 이성과 감성의 융합으로서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나는 이러한 과학적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하는지 지향할 곳 없는 심연에 빠져든다.

 

이러한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어리석은 물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평온과 안정성이라는 건강한 생()의 진작을 위한 자기 앎의 회복을 위해 쓰여진 이 책은 가히 독보적인 역작이라 할 정도의 생명(면역)의학에 대한 대중적 걸작이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욱 과학과 자본이 견고하게 유착된 의학이, 무지해진 인간 위에 더 한층 군림하며 앎의 주권 박탈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신체에 무지해진 대중은 각종 음모론과 당파적 이익을 위해 동원된 뒤틀린 의학 정보에 쉽사리 현혹되어 정작 필요한 삶의 건강을 위한 지혜를 상실하고, 진정한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망각한다. 인간의 신체 내에서 병원체인 COVID19가 행운을 누릴 때, 인간들은 자신들의 면역체계에 대한 앎 대신에 엉뚱하게도 정치적 패거리 놀이에 심취했다. 자신들의 몸을 잃어버린 줄 모르게 되면서 자기 탐구, 그 생리적 활성화를 위한 중요성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얼마나 반()생명성을 가속화시키고 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삶의 질에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 면역계에 대한 앎을 말하는 이 저술은 시의적절하고 또한 중대하다. 면역계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존재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결정적 생명장치이다. 정말 쾌락적 향연을 즐긴 듯한 충족감을 풍성히 안기는 기념비적 과학 저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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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기록은 지난 방법서설 제1부에서 제3부에 이르는 감상글에 이은

4부에서 제6부까지에 대한 정리 및 소회이다.




정신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있다. ...지성에 의해 지각했던 것들까지 똑같이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려 했던 것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오로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어떤 근거들에 의해서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부 까지가 철학 제 1원리를 도출하기까지의 방법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4부는 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최초 사색의 결과와 그로부터 파생된 일반 규칙의 도출에 대한 사유의 진술이며, 5부에서는 인간 신체와 정신의 분리에 따른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의 인간 고유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제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들의 출판에 대해 가해질 교황청 비난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 그 불안 심리 및 방법서설을 포함한 자신의 자연학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한 이유를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방법서설의 철학적 고유성은 정신 작업 전체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전통적인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논리 방법을 고안하고자 하였던 제 1~3부에 걸친 격률과 도덕 규칙이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근대철학 전체의 문제였던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의 방법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4

 

데카르트의 방법은 다름 아닌 반성적 인식, 관념에 대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장 완전한 방법이란 정신에 주어져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에 따라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은 지성의 자기 탐구요, 자기반성이다. 지성은 이로써 인식을 확장해 나아간다. 그는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절대로 그른 것으로 내던져 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무엇을 찾는 것이다.

 

참된 원리는 모든 의심의 위협 밖에 놓여 있으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을 만큼 명백하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버렸을 때 그의 신념 속에 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를 깨닫는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의심하는 무엇이며 따라서 자신은 실존한다는 진리, 1의 철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e je suos/ cogito, ergo sum)” *1 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관념 기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일 관념이 생각의 주체인 사유하는 나(Cogito)'보다 많은 능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왔다면 이것은 코기토의 능력 밖이다. 결국 관념이 코기토의 소관이 되려면 능력이 더 작은 것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념 기원의 문제는 자신 속에서 연역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실존 문제를 통해 사유하는 나의 관념 속에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여 제1원리의 참됨을 의존한다. 이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순환논증인데, 증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그 증명에 전제 되어 있는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논증인 까닭이다.

 

신의 실존은 나의 생각으로부터 증명된 것이고, 나의 생각은 신의 실존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논리는 논증규칙의 위반이고 사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의존해야 할 논리가 이렇게 무너지면 그의 제 1 철학 원리도 의심을 극복한 명증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많은 비판적 사유들로 그의 코기토에 의심이 짙게 드리워지긴 했으나, 모든 의견에 대해 의심의 근거를 요구하는 방법적 회의는 참된 원리를 찾으려는 인간 사유에 귀중한 방향을 제시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제 1원리에 이르는 4가지 논리규칙으로부터 극히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는 일반규칙은 인간 관념의 실재성을 이해하는 귀중한 지표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5~ 6

 

1 원리로부터 연역한 진리의 연쇄를 개괄적으로 제사하고 있는 제 5부는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과 신체에 대한 기계주의적 주장이 특별히 관철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4부에서 이미 나는 하나의 실체로서 그 본질, 혹은 본성은 다만 생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존재하기 위한 어떤 장소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 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나를 존재하도록 하고 있는 바의 정신은 물체(신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확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에 있어 제 1의 근본적 운동인 심장과 동맥의 운동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의 조력을 받지 않는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시계추나 톱니바퀴의 힘, 위치 및 모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기관의 배치와 그 성질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계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신체의 모든 부분에 운동을 주는 동물의 정기(精氣) 또한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훌륭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계적 성능에 불과하다고 확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이러한 기계적인 동물과 다른 것은 말()과 기호의 조립 사용이라는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를 지녔다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이는 동물이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인식 능력, 즉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적 정신은 물질의 힘으로부터 추출할 수 없음의 증거, 정신과 신체는 분리되었음의 명확하고 판명 가능한 참된 진리라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유일신을 신봉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미 무너진 믿음일 것이다.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에 대한 방법론의 진술과 일반적 원리 획득을 위한 온갖 특수문제의 실험을 통한 제 1원리의 발견과 그 연역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더욱 시선을 끄는 것은 갈릴레이에 대한 교황청의 심판이 가져온 불안 심리로 발표 예정이었던 그의 자연학 저술들에 혹여 잠재할지 모를 위험성이 가져올 두려움에 대한 변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학문은 참된 진리이기에 발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들의 구구절절한 정당화 논리들의 술회이다.

 

출간을 미룰수록 그의 저술에 대한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어 자칫 교황청의 도덕적 잣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신의 내용이 있음을 자인하는 모양새를 회피하기 위해 부득이 출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을 떨쳐내는 데는 미흡하였던지, 자신의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하였음을 부연 설명한다. 대중이 사용하는 통속어인 프랑스어가 자연적 이성만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올바르게 이해주리라는 생각과, 이들을 재판관으로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로마 교황청의 특정인들과 일부 극단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피하고 대다수 시민의 지지를 통해 칼날을 피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 어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실존 증명과 코기토가 참임을 증명하는 데 순환논리를 사용함으로써(비록 데카르트 자신은 순환논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존재 증명에 실패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이르러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인간 자신으로부터라는 자기 완결적 관념 형성 모델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즉 참된 관념의 형상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다는 주장으로서, 관념에서 모든 외부적 원인을 배제하고 신의 관념을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지성이 제 능력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관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관념으로서 설명해 내는 초석이 된다.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하는 방법서설속 많은 사유가 오늘에 이르러 그 확신이 부정되거나 흔들리고 있지만, 그가 사유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이성의 윤리 규칙, 진리 추구 방법론은 여전히 인간 사고의 진보를 위해, 앎이라는 지혜의 발견을 위한 필요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류 정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고귀한 인간 사유의 도전을 보는 것은 어떤 충만감과 함께 겸허함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에는 정보가 난무한다. 진정한 앎, 참된 것이란 극한적 회의를 수반하는 사유의 처절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사회에는 사유하는 존재들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는 이같은 처절한 사유 없음에서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 이 제1철학 원리 명제는 프랑스어로 저술되어 발표되었다. 따라서 코기토(Cogito)를 비롯한 라틴어 번역문장은 데카르트의 완전한 진술을 의미하지 못한다. 특히 그가 선언하듯 새로운 논리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삼단논법식의 해석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라는 학계의 비판이 존재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동시적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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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1),  의심과 명증성의 철학,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중,  제 1철학 원리가 등장하기까지 사유방법을 설명하는 제1~3부까지와 4~6부로 나누어 2회에 걸쳐 정리와 다를 바 없는 소회를 남긴다. 이 글은 그 첫 번째인 3부까지에 대한 잡기록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사유하는 나 (Cogito)’라는 인식주관이나 인격주체를 의미하는 명사화된 대중적 언어가 되어 회자되고 있음에도 정작 이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검토는 발견하기 힘든 것 같다. 이 유명한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어; Je Pense, done je suos/라틴어; cogito, ergo sum)’는 총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의 제4부 초반에 등장한다. 즉 최초의 사색으로 도달한 진리인 데카르트 철학 제 1원리 명제에 이르기 까지 그가 인식 방법으로 채택한 사유 방법들을 설명하는 제1부에서 제3부까지의 자기 이성을 이끌었던 노력들의 결과가 4부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그의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의 과실을 위해서 채택한 방법은 뒷전이 되고, 또한 제 5부와 6부에 걸친 자연학 - 굴절 광학, 기상학, 기하학- 과 이성 전반에 대한 논증 방법이나 원리 획득 방식은 마치 존재치도 않는 듯 대중 독자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것만 같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현실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데카르트 특유의 규칙이나 격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의심과 오류를 제거하고 앎의 진실에 이르는 유효한 사유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개체의 형상(forms), 즉 본성 사이에는 이성의 다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1부는 이성(理性)은 인간 개체 모두가 차별없이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인간을 다른 여타 대상물과 구분해주는, 즉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며, 진리 발견의 유일한 도구임을 명시한다. 만일 이성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온갖 우유성(accidents; 비본질적이며 없어도 존재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성질) 사이에서나 발생할 뿐이지 절대적 다소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결국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서 자기의 이성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그리고 책 방법서설을 왜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데카르트는 인식 도구로서 정념이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의지적 주체가 정념을 통제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서 의심과 수학적 추리의 확실성과 명증성(明證性)’을 채택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 이유가 놓여있는데, 자기 자신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우리들은 참으로 잘못되기 쉽다는 것, 또한 타인의 판단이 자신에게 형편이 좋은 것일 경우, 그것은 참으로 의심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음에 기초한다. 즉 기존의 사상과 학문에 많은 의심과 잘못으로 시달렸고, 이들 지식을 얻고자 힘쓰면서 오히려 더욱더 무지(無知)를 발견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정보들의 공허함에서 더욱 용이하게 드러난다. 사실 진실한 앎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많은 세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에 연구되었음에도 논쟁의 여지없는,

의문의 여지없는 사항이 철학에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장에는 동일한 문제에는 진실한 의견이란 단 하나밖에 없다는 당연한 믿음이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기존의 사상들 일체를 견고성 없는 거짓으로 간주하고 폐기하여, 완전히 새롭고 자신 속에서만 발견되는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들은 다양한 의견들 각각에 일부라도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독단론을 경계한다. 그는 선례(先例)와 습관에 의해서 믿어버렸던 사항들에서 믿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는 자기 이성의 정신에만 온 힘을 기울여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에 대한 극도의 열의를 보인다.

 

2

 

많은 사람에 의해 조립된 학문은 단순한 추리만큼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2부는 1부에서 주장했던 독단론적 사유 방식을 부언 정당화하며, 바탕으로 삼은 자기 이성의 논리 규칙 네 가지를 설명한다. 그는 건축과 도시 형성의 비유를 예시하며, 많은 장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보다는 한 명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완성한 건물이 훨씬 질서가 뛰어나며, 계획도시가 우연의 산물인 자연 형성 도시보다 높은 조화와 질서를 가졌듯이 한 사람의 탁월한 이성이 진리 접근을 위한 좋은 방법임을 강조한다. 획일성, 질서정연함, 법칙성, 규준성이라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흡사하기까지 하다. 이는 스파르타 독재군주인 리쿠르고스의 단독 입법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할 수 있었기에 번영했다고 부연하는 데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독단적 진리 접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논리 채택의 규칙은 진실된 앎에 접근하는 사유방식으로 유용한 참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약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의심하는 어떤 이유도 갖지 않을 만큼 명백한 정신에 나타나는 것만 판단에 받아들인다. 즉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만 인정한다.

2. 음미하는 문제는 잘 풀기 위해 필요한 만큼 적은 부분으로 나눈다.

3. 사상의 사유 순서는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

4. 완전한 매거(枚擧: 하나하나 들어서 살핌)와 전체에 걸친 통람(銅藍)을 온갖 경우에 행한다.

 

이 논리 채택 규칙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요소들로 득시글거린다. 세포 하나를 안다고 해서 인간의 총제적 시스템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부분의 합과 전체는 결코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일반화를 벗어나는지 판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특수한 것들을 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며, 더구나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을 아는 것도 자의적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신의 존재 증명을 통해 인간 정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분에 대한 진리성으로 의존한다. 비록 그가 계시를 진리 추구에서 배제하고 있으나 여전히 17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의 인식 논리 방법은 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3

 

데카르트가 의존했던 진리 추구 방법론과 관련해서는 가장 중요한 챕터일 것 같다. 이성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서 미결정 상태에 놓여있을 경우 그는 잠정적으로 세 가지 도덕 격률을 설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1격률은 사고활동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일을 믿을 때와 믿고 있음을 알 때의 사고활동의 차이에 대한 지식, 극단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온건한 것의 선택이 갖는 인식적 유익성을 말한다.

 

2격률은 우유부단과 동요, 후회로부터 탈각(脫却)되기 위해 행동과 태도의 단호함과 방향의 항상성에 대한 규칙이다. 숲 속에 길 잃은 자의 행동처럼 같은 방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적어도 마지막에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예처럼 여러 방향을 갈팡질팡하다 숲 한 가운데 놓이는 것보다 분명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3격률은 세계 질서보다 자기 욕망을 바꾸는 일에 힘쓰는 것이 오성이 제시하는 의지를 벗어나 지배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사상에 절대적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라는 도구로서만 진리의 인식으로 전진한다는 것이며, 오직 단일한 유일성의 진리만을 인정한다. 이들 격률을 데카르트는 진리 추구의 신념으로 삼았음을 설명한다. 결국 알지 못하는 것, 의심스러운 것, 오류에 빠뜨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배제하고 오로지 명석하고 확실한 추리에 의해 확신하는 것만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2부와 3부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다시 말해 진리 발견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절대 그른 것으로 내다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 어떤 회의론자의 상정에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한 진리를 찾아냈다고 자부하는 지식의 접근법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에서 지워버릴 때, 그는 이러한 사유를 하는 의 필연적 존재를 깨닫는다. 이것이 최초의 사색이다. 사실 이것은 순환논리를 닮았다. 존재자인 나의 인식이 바로 그 존재자가 하는 의심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사유하는 나라는 인식주체의 최초 발설로 후대 사상의 주요 논제가 되었지만, 내게는 결코 명증하지도 판명가능하지도 않은 공허한 명제로만 여겨진다. 소박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이 세계에 대해 확고하고 참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신()에서 인간 주체의 사유로 옮겨왔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사상적 개가(凱歌)일 것이다.


 

 

방법서설(2)에서 제4~6부 정리 감상 계속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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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령이란 것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굴종의 정신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행위자는 그 명령의 선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수행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텅 빈 자아, 진정한 사유가 불가능한 이들의 개념 없음과 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뚜렷한 오래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그의 심복인 장세동은 이를테면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수없는 증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결코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한나 아렌트가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유태인 처형 운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태도로부터 발견한 것, 즉 명령 수행자가 지니는 인간 실존성을 결여한 사유의 전적인 부재, 즉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의 지대인 악의 평범성과 동일한 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으며, 단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태인을 저주하는 사악하고 악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명령과 명령 수행자의 관계에서 그 책임에 대한 짧지만 위대한 기술(記述)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대인인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신들이 한 짓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명령 수행자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후회도 마음속에 새김도 없는 이유입니다. 왜 인간의 마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명령의 본질 때문이랍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시를 남깁니다. 이 낯선 이물질인 가시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낯선 것, 가시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죄책감을 떠맡깁니다. 즉 자신이 아니라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불의나 부당함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가시야말로 진짜 범죄 행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네티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명령일수록 죄책감은 자아와 분리, 더욱 독자적인 된 가시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죄의식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기에 악으로서의 명령을 수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행위와 자신을 일체화 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 심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진정 부당하거나 불의한 명령과 대결하고 그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단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령의 무조건적 수행만 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공포와 죽음만이 휩쓰는 독재 권력이 지배하는 지옥 아니겠어요?

 

한국 작가 천운영생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문경관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 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공수사기관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고문기술을 발휘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독보적인 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대통령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충성스런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라며 자신은 정의를 수호한 일꾼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무고한 청년, 시민들을 무심하고 죄의식 없이 고문, 살해하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한 인간인 것이죠.  고문기술자 이라는 인간은 카네티가 말하는 가시에 죄의식을 저당 잡힌 것이죠. 아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인간의 무의식적 처분이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항변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이히만도, 고문기술자 안도, 장세동도, 이들 모두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행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음에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명령의 맹목적 수행자는 천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사유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오히려 두 번째일 만큼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숙명이 아닙니다. 결코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더구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을 결코 지탱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과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죽음이라는 명령의 거부, 저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는 한 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과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추종은 모든 것을 퇴행시키는 전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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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07-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중과 권력이 새단장해서 나왔군요!

필리아 2022-07-06 09:48   좋아요 0 | URL
지금 판매되는 책이 2010.10 개정판이네요. 훌륭한 저작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