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Essais 2-1 에서


작금의 권력은 가장 흔하고도 명백한 악덕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시리아 출신 그리스 희극작가인 푸블리우스는 재고(再考)할 수 없는 결심은 가장 나쁜 결심이다.”라고 말했으며, B.C. 4세기의 그리스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라 말했다고 몽테뉴는 그의 생애 저술인 에세에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릇된 결심을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반성과 숙고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권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장인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현실의 권력이 자행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몇 자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솔한 위대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온갖 모순을 발견한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서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단순하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란 온갖 잡다성과 모순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 사이가 자신과 남 사이만큼 차이가 있음을, 즉 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불가능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반성과 숙고라는 깊은 사려를 통해 도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은 숙고를 통한 확고부동의 길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정책에 어떤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 자의적이며 임기웅변의 권모술수만이 행해지고 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범인의 흔해빠진 본성이며 명백한 악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로 국가를 통치하려든다. 어떠한 것도 확고부동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잘못된 정책과 견해는 재고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그 어느 정권보다 무능력한 폐쇄 집단 출신의 인간들이라면 더욱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진하려드는 정책들에는 어떠한 원칙이나 질서도 없다. 때문에 정책 행위들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으며, 모든 일들 사이에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있어 국민적 연대를 통한 추진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 가려는지, 가려는 목적지는 있는지를 어떤 국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는 어떤 확실한 지침이나 명료한 국가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온갖 모순덩어리임을, 결국 인간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조각으로 구성된 미물에 불과함을 말이다. 어찌 재고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권을 지녔다는 듯,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독재는 자신의 불의로 인해 민중의 언로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오류가 오류투성이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지금 권력의 정책들은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길을 헤매고 혼돈으로 우왕좌왕, 좌충우돌로 정쟁으로 왜곡되기 일쑤고, 민생과 국가 발전의 길은 좌초되어 침몰하고 있다는 지표가 도처에서 경고등을 발하고 있다. B.C. 1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주벽(酒癖)으로 취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술의 위력이 스며든 인간의 지력 흐릿해짐과 험상궂은 눈, 그리곤 고함과 싸움질로 치닫는 거칠고 동물적 악덕 행위로 말이다. 한 국가의 리더가 자신의 주벽을 뻔뻔하게 시민들이 오가는 길에서 과시하는 파렴치함을 보일 때 그것을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와 결합시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허황된 자부심이 얼마나 인간을 지각없게 만드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시민들은 반성도 없으며, 숙고도 없고, 그 어떠한 확고부동하고 사려깊은 정책도 없는, 게다가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권력이 불안하며 그곳에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른해진 사지로 건들거리며 다리는 꼬여 비틀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국민적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깊은 사유를 통한 끝에 도달한 명료한 목적이 없으니 구체적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재난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회피, 외교적 무능과 실수의 연발, 왜곡된 언론관에 의한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탄압적 폭력행위는 바로 이러한 자기반성과 숙고 없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간적 자기 인식 없음으로부터 출현하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둘 수 없으니 부분들이 정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각 통치 기구의 상호 네트워크의 유연한 연결을 비롯한 거버넌스(governance)의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난맥상이다. 약간만 돌려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국가의 그 복잡다단한 정책들은 어떠하겠는가?

 

잔인성의 표본인 로마의 네로도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퍼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처럼 변덕스럽고 모순으로 뭉쳐있음이다. 제아무리 지혜롭다한들 인간이다. 지혜란 인간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몽테뉴를 빌어 쓴소리를 끄적이게 됐다. 세네카가 말했다.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라.”고 말이다. 반성하고 숙고하며 그 완성으로 확고부동한 정책을 펼치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쇄신(刷新)하는 인간이기를, 또한 권력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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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책 사랑의 완성에 대한 두 번째 감상으로 무질의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한 것이다. 번역본은 북인더갭 출간 본으로 이 중 단편소설 지빠귀 (Die Amsel)를 별개로 첫 번째 수록하고, 나머지 산문 중 15편을 생전의 유고로 분류하고 있다.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은 앞서 남겼다.

 

 

문학은 삶의 개념을 파악하고자하는 학문과 달리 삶을 무한한 미지의

 현상 자체로서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

 

 

1.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해서

 


유고는 작가의 사후에 미()출간된 글들에 대해 붙이는 개념어다. 그런데 작가 생존에 유고(遺稿)’는 모순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무질은 이런 까닭으로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사후 유고의 출판을 못하게 하기 위해 결심했으며, 이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반의 증언은 특성 없는 남자2권의 집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출판의 공백을 메우기위한 방책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무질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스위스로 도피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도피 중이었던 토마스 만에게 후원금 5달러 지급 연장을 부탁하는 가슴 아픈 편지가 전해져 온다.

 

생전의 유고1934년에 출판한 무질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30편의 짧은 산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5쪽 미만의 글들이고, 단 하나 지빠귀만이 15쪽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무질은 이 작품들을 네 개의 성격으로 분류하여 각기 (), Bilder14,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4, 마지막으로 지빠귀로 배치하고 있다. 국역본 사랑의 완성은 이들 중 지빠귀를 별도로 구분하였으며, 나머지 29편 중 15편이 생전의 유고라는 항목에 편집되어 있다. 수록작 중에서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편 모두가 빠져 있으며, 각 분류 항목에서 1,2편씩이 추가로 빠져있다.

 

2. 지빠귀 (Die Amsel)에 대해서

 


단편 지빠귀는 무질의 작품에 있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쓴 마지막 단편소설이라는 의미보다도 이야기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소설론(小說論)적 성찰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3인칭 화자가 시작하여 1인칭 인물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건네지만 다시 3인칭 화자로 복귀하지 않는, 즉 틀이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끝을 맺는다. 형식이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종료는 독자의 창의적 해석으로 넘겨진다. 소위 무질 문학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표현과 침묵 사이의 허공을 부유하며 확정과 완결을 거부하는 문체라며, 바로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이 곧 무질의 문학 의도라 말하고 있다.

 

소설은 딱히 줄거리랄 것이 없지만 아츠바이(Azwei)라는 인물이 친구 아아인스(Aeins)에게 들려주는 어떤 연관성이나 인과성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전부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창밖의 지빠뀌 노래 소리로 인해 순간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아주 다른 감각의 세계로 옮겨간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전쟁 참전 중 적의 헬기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생사의 갈래에 섰을 때의 신비로운 체험담이다, 마지막은 사업 실패로 어려움 겪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고향 집에서 자신의 옛 시절, 자신이 가장 선하고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마다 독자 나름의 공감이나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뚜렷하게 해석할 테마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첫 일화에서는  수직의 공간 체험을 충분히 이용해 동일성의 공간을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어.” 라는 문장처럼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읽을 수 있으며, 다음 일화에서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야.”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고. 마지막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닌 고정된 상()의 현실과의 불일치, 즉 살아있는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증명의 변()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아아인스는 묻는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 아니었어?”라고. 그러나 아츠바이는 부인하면서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라며 소설은 종료된다. 세계의 모든 질서는 확고한 것보다 확고하지 않은 것 속에 보다 많은 미래가 있다는 무질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넘긴다. 인과법칙도 논리적 연관성도 벗어난 이 소설은 이렇게 읽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는 독자 개별의 몫이 될 터이다.

 

3. 생전의 유고15편의 산문에 대해서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 대부분이 무질이 (), Bilder이라고 분류한 항목에 속한 작품들이고, 성격 없는 사람이란 제목 한 편만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에 속한 작품이다. 무질은 ()’ 정확한 관찰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무심코 표현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다분히 문학의 근본으로서 역사 구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의 신념을 읽을 수 있으며, 사실 수록된 산문들도 이러한 설명에 일치한다.

 

파리잡이 끈끈이는 문자 그대로 한 여름철 동네 뒷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달려 있는 파리 잡는 끈끈이 그것이다. 세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로서의 무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이내 포기하고 죽어가는 파리들을 묘사하는데, 20세기 초 독일 사회 인민들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극도로 애쓰는 이들의 표정에는 라오콘 보다 더한 절절함이 배어있다.” 라든가,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현재의 순간적 욕망이 계속 살고 싶다는 강력한 감정을 모두 누르는, 비장한 무의식의 순간에 대한 관찰은 실로 만만치 않은 생각의 타래를 풀게 한다.

 

원숭이 섬은 다소 신랄하고 비판적인, 무질의 문학에서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묘사되는 대상이 원숭이일 뿐이지, 인간으로 대체해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은유라 할 수 있다. 나무와 대지를 지배하는 계급, 그리고 여기에 오를 수 없어 대지 아래 도랑에 머무는 원숭이들의 배치나 이들 지배 원숭이들, 박해자가 난간을 따라 걸어가자 경악의 파도도 그를 따라 멈춘다.”, 권력 계급이 보이는 폭력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비굴함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박해자 원숭이의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천박한 오늘의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도 웃을 수 있을까?, 재단사의 동화등 몇 몇 작품들이 비교적 시선을 끌지만 단연 특이성 없는 남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격 없는 사람은 무질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이유가 있는 작품일 것 같다.

 

이 녀석아 넌 쓸 만한 성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성격이란 이 인용 문장처럼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성격에는 분명 올바르지 않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부모들에게 이 성격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격이란 형편없는 성적, 장난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것, 야비한 행위...등과 개념상 정 반대 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반대, 즉 쓸 만한 성격은 처벌의 두려움, 들 킬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짓에 대한 후회, 양심의 가책이 되고만다. 사실 이 추론은 아이들에게 비굴함과 복종, 노예근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성격 없는 사람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성격 없음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읽기에 제법 도움을 주는 선행 독서가 되어 줄 것 같다.

 

무질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모든 질서는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다.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 되어진 것, 현상된 것에 대한 유보를 통해 부단한 서술과 서술의 해체를 거듭하며 가능성을 타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불완전성의 틈을 미흡하지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 매혹된 차에 무질의 작품 세계를 당분간 지속하여 거닐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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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3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 담아둡니다~~^^
무질의 <특성없는남자>를 사놨거든요 ^^

필리아 2024-02-08 14:57   좋아요 1 | URL
국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번역판본 중, 원작 1권의 충실한 완역본은 문학동네와 나남출판 두 종류가 있는 것 같구요, 북인더갭의 미완으로 머물렀던 통합본의 나머지 부분이 2권으로 드디어 출간, 완간되었네요.(2014.2.8 댓글 수정)
 



내 오월의 책은 그저 우연의 연속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에 대한 울화 때문이었던 싶다. 이러한 심상이 만연한 진화이론의 남용에 의한 편협과 왜곡, 의도적인 선전물들의 난무를 분별하는 책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센스 앤 넌센스를 읽게 되었다. 그러다 신간 안내 도서에서 와일드 후드라는 세상의 모든 생물체의 청년기와 인간의 행동,심리를 비교하여 성장기의 지난한 진화론적 역사 이야기를 재빨리 구매했다"직관을 거스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경험으로 진입하는 성장기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두 책은 전혀 계획된 독서의 목록이 아니었음에도 삶에 끼어들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영역본 Capital은 순전히 대조 읽기와 참조용으로 구입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이 영역본은 유용하게 활용될 터이다. ‘파울 첼란의 시집은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에 영향을 받은 읽기이다. 독일어를 말하며 성장했지만 독일인들로부터 배제된 유대인의 그 철저한 소외와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의 부당함을 일생 고뇌했던 시인의 글쓰기인 신비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유사한 맥락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은데,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역사에 수록된 생전의 유고를 구성하는 작품들 때문이다.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독자적 논리인 비이성적 영역과 비논리적 대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공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고 1차 대전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음에도 나치에 의해 금서작가로 몰리고 스위스에 도피하여 곤궁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끓는다.

 

한국 문학들은 사실 완전한 임의적 선택이랄 수 있다. 요즘 국내 문학의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만 외면 할 수 없는 몇몇 작품들에 독자의 작은 성원을 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전혜진 작가의 바늘 끝에 사람이는 주류 사회가 은폐하거나 외면한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빼곡한 소설집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다시 자성하는 읽기가 될 것 같다. 박문영 작가의 허니비는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인 미래 사회를 축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일 것 같다. 내 의지가 가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이다. 여행자,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유행과 광고의 현혹으로 내 수중에 들어 온 책들이다. 아마 무더위가 찾아오면 읽게 될 줄 모르겠다.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은 내게 어떤 의도를 남겼는데, 놀이를 사회학으로 연결 짓는 이 위대한 저작은 놀이와 정치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회와 문화 비판의 중요한 논거로서 높은 가치가 느껴진다. 요한 하우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완결 짓는 역사적 걸작일 것이다. 이 두 저술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지식 엘리트라 자처하는 이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까지 한다.

 

기득권의 그 집요한 보전 욕구가 학문에는 순수성이란 애초 없음을 확신케 한다. 무질이 학문을 경멸하고 문학에 천착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사를 구입하게 된 동기는 막연하게 18~19세기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그네들 인식을 조망하기 위한 대강의 또 다른 판본에 대한 기대였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충족되지 못했다. 책의 선택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실패로 인해 읽게 될 일 없는 책들을 읽게 된다. 우연, 즉 인간이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사인 모양이다. 이제 6월의 도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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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5-2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문학을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파울 첼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늘 감탄하며 리뷰 읽고 있습니다. 유월의 우연도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3-05-24 10:3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요즘 파울첼란,카프카,무질에 꽂혀있어요. 이들의 열린결말, 비의적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초원님~
 


내 믿음을 사로잡은 문장을 요즘 빈번하게 떠올리게 되는데, 현시(顯示)적 욕망에만 매달리는 가족주의 근간의 위기를 지적하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그 끔찍한 우라질 계획을 버려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취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란, 즉 계획이란 30,40평형 아파트를 사고, 수입차를 타야하며, 소위 일류대학이란 곳을 나와야하고....- 한글의 이 자는 醫師, 判事, 辯護士와 같이 한자로는 모두 다르다 - 자를 붙인 전문직업 등등의 현시적, 물질적 욕망의 추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의 일부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박탈감에 허우적대고, 이름뿐인 스위트 홈은 이내 박살나고 만다. 이러한 양상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것, 계획이란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극단의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생각이란 개개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물질과 기억2장에서 인간의 기억을 습관기억과 이미지기억으로 구분하고, 주의 깊은 식별(la reconnaissance attentive)'이라는 처음 본 대상이나 분석이 필요한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참조해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 용어 개별을 설명하는 사치는 배제하고 습관기억만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습관기억이라는 것은 살고 있는 동네 골목길을 걷는다든가, 책을 읽다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밑줄을 긋기 위해 연필을 쥐는 것과 같은 어떤 의지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억이다. 개념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이것과 유사한 심리학 표현이라면 직관(直觀) 정도로 말해도 될 것 같다. 이것은 철저하게 평소 사람들의 관심이 준비된 반응행동, 즉 삶의 즉각적 유용성을 위한 기억이다. 습관으로 신체에 체화된, 익숙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신이 잘 알고 있지 못하거나 새로운 것은 이 기억만으로 반응 할 수 없다. 즉 식별하고 파악하며 해석하여야 어떤 반응을 할 수 있다. 그저 침묵 할 것인지, 어떤 선택된 말이나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대중 언어로 말하자면 깊이 있는 사유와 많은 참고 기록들, 문헌을 참고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에 즉각 반응한다면 그것은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그 편협하고 알량한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것이 올바를 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 한다.

 

참고 문헌을 찾아보아야겠다는 결정도 사유이고, 그 결과 이를 실천하는 것도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나서야 새롭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과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요한다. 주의깊은 식별이란 습관기억의 유용성을 포기하고 내면의 심층에 있는 과거의 이미지 기억들을 층층이 소환하여 대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사용하지 않았던 부가적 에너지와 시간의 집중적 소비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부지런해야 하고, 능동적 행위가 요구된다.

 

나는 이 이미지 기억을 소환하여 층층이 대조 분석하는 판별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하지 않고 습관 기억에 의존해 행동하고 말을 뱉어내는 것을 지적 게으름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그것을 무지와 무관심이라고 싸잡아 부르기도 한다.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트(Natasha Mott)’가 대뇌 반구의 활성화 연구를 통해 주장한 좌파와 우파의 뇌가 공명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시하듯, 진보와 보수주의자 행위의 구조적 차이의 근저에 있는 신경적 과정의 결과는 습관기억, 직관에 의해 끌려다니는 불온한 세계의 이유를 보여준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저술도 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저술에서 시종일관 직관이 지닌 수많은 오류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속단과 어림짐작, 편향, 진실호도, 더 쉽게 문제찾기, 의심의 거절 등인지적 압박감을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생각의 게으름이다. 사실 이 입증을 위한 수많은 연구 사례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앙리 베르그손이 100년 전에 발표했던 생각들이다.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습관기억에 의한 행위만이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친일 행위에서부터 제반 경제, 노동 정책, 사회복지 정책 등 전() 부문에 걸쳐 황당한 퇴행을 일삼는 것과, 이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는 대중 행태의 근저를 이루는 인식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일례를 들어보면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한 일본의 배상 문제는 외교적 갈등으로 대두 되었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출연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해자의 반성이나 배상도 없이 피해자가 배상을 결정했다. 이것이 카너먼이 지적한 직관이라는 지적 게으름이 불러온 더 쉽게 문제 찾기의 폐해이다.

 

대중들 또한 이러한 비판과 자기반성을 비켜날 수 없다. 습관기억이 아니라 추가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익숙한, 그 좁아터진 편벽한 앎의 터전으로 이 세계의 무엇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그것은 대개 편향이고, 왜곡이며, 진실을 지니지 못한 거짓이라는 점이다. 이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 생각을 다시 이어가보면, ‘계획을 버리라는 짐짓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히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현시적 욕망을 따르기 위해 세상 모두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욕망의 에너지를 변환해보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에게 제시된 강요된 그 익숙한 시대성의 산물에 노예처럼 따르지 말고 당신의 고귀한 생명의 차원에서 삶을 사유하고 실천하라는 요구의 조언이다.

 

여기서 다시금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노출된 공생이나 연대의 언어를 반복하지 않겠다. 서로 힘차게 응원해 줄 수 있는 관계,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이라는 부정성이 아닌 생명의 플랫폼이 되는 길로의 전환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밑바닥에 사유라는 과정, 즉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더 생명 에너지의 사치를 부려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지 않던 일이어서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직관이라는 그 왜소한 생각의 불완전함, 혐오와 적대를 만들어내는 불온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진영에서만 활성화되는 좌뇌와 우뇌의 그 단절,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함에만 머물려는 게으름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둘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멸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선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이 기회를 다시 나락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적 게으름이 눈앞의 유용성을 해치는 것이 당장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손상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에 매달리는 것, 당장의 편익에 몰두하는 삶, 타자의 의지를 속단하는 즉각적 반응이 몰고 오는 장기적 폐해는 분명 숙고하는 삶의 태도가 바꾸어 줄 것이라 믿는다.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주의깊은 식별,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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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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