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년 이상 책장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꽂혀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야릇한 제목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는 우연과 함께,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토 기와무라는 작가가 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란 작품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홍보 문장, 그리고 주술 자본주의토대에  칠흑같은 저승에 잠든 욕망들이 벌이는 피의 전쟁이란 표현은 당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의 백과사전 98번 항목, 아스테카 사람들이 상상한 세상의 종말은 아즈텍 신화에서 다섯 번째 태양기인 현세에 앞선 네 번의 종말에 대한 간략한 신화를 담고 있다. 세계의 첫 번째 시기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테스카틀리포카. 연기나는 거울(Smoking Mirror)’이란 의미를 지닌 전능한 신이다. 그의 가슴에 달린 거울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는 신, 그래서 이 신은 주술(呪術)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전능한 신()답게 별칭을 무려 360가지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닌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이며, 인간 창조자이며, 온갖 생명의 기원이다. 아즈텍인 들이 이 신을 경외한 것은 물론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단숨에 모든 것을 빼앗기도 하며, 불화와 적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는 신.

 

사토 기와무의 소설이 마약밀매 조직의 잔혹한 전쟁을 소재로 하며, 이제까지는 없던 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는,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 그 검은 비즈니스의 내막을 상상을 초월하는 디테일로 그려내는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주술의 도형인 마약 자본주의라는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문장이 아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또한 우연인지, 의도된 맞춤인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걸출한 역작,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좌파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경제적 조건을 드러내며,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주술의 신, 거울의 신인 아즈텍의 전쟁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신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이들 자본주의의 마법진을 펼치는 인간들에게 과연 어떤 응징을 내릴까? ‘마약자본주의’, 그야말로 식인자본주의의 그 폭력적 욕망의 전형일 것이다. 아마도 사토 기와무의 소설, 낸시 프레이저를 함께 읽으며, 자본주의, 그 탐욕과 무자비함과 잔혹함의 속성,  그 태생적인 윤리의 결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존재론적 형상을 모두 품고 있는 도시라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두 얼굴을, 그 이중적 내재성을, 인간의 속성이란 그러한 것임을 그 자체로 투영하는 장소에 대한 불가피한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대한 속설은 밀애와 이별이라는 두 상반된 결과를 발설하곤 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게 하는가하면 연인들을 갈라서게 만드는 곳, 도시의 여기저기를 가르는 소()운하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보도, 그 거울 같은 표면위에 불을 밝힌 상점의 간판들, 허영을 부추기는 주위의 장식과 기둥과 벽공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눅눅하고 춥고 좁은 안개 낀 골목길은 인간을 비논리적 동물적 욕망에 침잠하게 한다.



 


프랑스의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상드를 졸라 한없는 밀애를 기대했던 곳, 그에게 베네치아는 자신과 닮은 욕망의 공간, 열정의 대기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의 냉철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정신은 시인에게 한 편의 이야기를 쓰게 한다. 방탕한 정열을 한껏 태우는 쾌락의 게으름이 흐르는 세계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개 낀 운하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밀애의 장소로 다가가는 곤돌라는 그야말로 에로티시즘과 일체가 되어 연인을 기다리는 폭발할 것만 같은 부푼 연심, 그 혼돈의 설렘을 감각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각인할 수 있게 한다. 뮈세는 단편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자신의 반영인 주인공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의 여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을 그려낸다.


 



최고가문의 상속녀이자 미망인인 귀족 여성의 사랑의 헌신은 연인의 잠자는 재능의 회복에 대한 희망찬 기대다. 나는 베네치아를 떠올리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 미궁(迷宮)에서 욕망의 제물을 기다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와, 이성(理性)과 사랑의 끈을 상징하는 아드리아드네의 실이 내 지각에 재생된다. 길을 잃지 않고 목적을 성취토록 돕는 실, 뮈세가 그린 주인공은 이 실을 끝내 놓지 않으면서도 자기 열정의 자유까지 움켜쥔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현실의 삶은 인내 할 수 없을 것이라 내게 말한다. 내 안의 미궁에 웅크린 욕망 덩어리를 인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테세우스는 아드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하지 않았나!

 

이 한 토막의 이야기(뮈세의 소설)는 사랑을 소유하려한 천재 바이올린 장인의 이야기를 읽고 연상 작용이 촉발된 것인데, 장인(匠人)은 첫눈에 순수하고 신적인 목소리의 여인을 향한 사랑에 빠져들고,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흑단의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그것은 예술의 지고한 고뇌와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와 소유 양식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인생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 ‘막상스 페르민검은 바이올린은 이 장인의 주검을 실은 채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San Michele)’ 묘역을 향해 떠 있는 검은 곤돌라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게 기억을 파헤치고 상상을 사방으로 펼치게 했다. 이 글은 이 장면으로 비롯된 소박한 단상이다.

 

상여를 실은 검은 곤돌라 ... 베네치아에 비가 내렸다. ...물방울들이 대운하 위에서 내는 소리. 곤돌라의 허리를 때리며 찰랑이는 물의 소리. 이따금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바람이 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 막상스 페르민 , 검은 바이올린, 난다 2021.7

 

이 장면은 상반된 감응으로 두 문인에 의해 써지고 있는데, 시인 조지아 브로드스키베네치아의 겨울 빛에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그 길에는 유독 에로틱한 면이 있다며, 고르게 옻칠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요소들의 에로티시즘을 발견한다. 이와 달리 소설가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변치 않고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범죄적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같다며,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황금 화살과 납 화살, 사랑과 생명의 거부, 에로스의 폭주는 타나토스로 탈바꿈하며 존재를 뒤바꾸기 일쑤인 것처럼 우리 인간 삶의 실체이다. 이중성, 태생적, 즉 존재론적으로 이 양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끊임없는 투쟁의 존재자이다.

 

베네치아, 황금 빛 햇살이 튀어 오르는 수면과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간의 시원적 모습들이 도처에서 존재를 환기케 하는 곳, 이 존재 반영의 도시는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도취케 하고, 도취된 인간들은 그 열정에 휘말려 가까이 있는 연인을 잊는다. 사랑과 이별의 도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도시, 제어되지 않는 욕망과 이성의 실이 함께하는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과 예술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올 여름 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인간이란 커다란 계통 속에 서로 다른 종(種)이 있다는 듯한 이 분류의 언어는 전혀 생물학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구별하여 차별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어떤 권력에 의한 악의에 찬 근거없는 엉터리 범주화라는 것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국 사회도 국가적 지위의 향상으로 인한 호감, 분쟁 국가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수용, 국제 결혼 등 더욱 개방화 된  인적교류 등에 따라  점진적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뒤에는 해당 당사자는 물론 그네들의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이 케케묵은 인종주의적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며 갈등과 반목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은닉된 인간 심리와 윤리적 문제는 이미 저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나 인류학자  '김현경'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 낙인(烙印 stigma)찍기, 신분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한 상호작용의 비대칭성을 통한 불평등의 심화, 모멸과 굴종을 정상화하는 양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우리네 인식은 여전히 20세기 초, 우생학과 서부 유럽 백인 종의 우월성을 주장한 사회진화론의 그 사이비 과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의 발단은 피부색과 얼굴의 이목구비가 한국의 전형적 외형과 다른 아이들이 겪는 시선의 고통, 자신들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그 이질적인 시선, 바로 타자성이라는 배타적 의식이라 하겠다. 이 시선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는 외지인 뿐 아니라, 타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과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존재한다.  자신의 이해와 주변 사회의 자신에 대한 표상과 기대가 불일치하면서 발생하는 위기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은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그 생각과 역사, 습관이 온 몸에 배어있어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주변 사회의 시선은 그 아이를 혼혈아, 혹은 흑인, 백인 등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바라보며, 전혀 낯선 편견을 씌운다.


이 구별과 분류의 시선은 왜곡된 인종적 범주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엄격하게 작동되고 있는 신분주의는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하고 있다. 때문에 경비원 폭행, 백화점 판매 사원을 향한 욕설과 손찌검이 매양 뉴스를 장식하는 이유이다. 수구정당의 국회의원이 국회사무처 여성 직원을 향해 하대하며 큰 소리로 다그치는 영상은 한국사회의 신분제 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이 감추고 사회가 왜곡 은폐하는 것을 꾸준히 문학작품으로 드러내는 작가 '옌롄커'의 장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에는 중국 최고의 대학 베이징대(大) 대학원생인 '리징'이라는 엘리트 여성과 공사장에서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파는 농민공 '리좡'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아상, 타자상, 사회의 표상들이 서로 얽히면서 사회적으로 각인된 집단적 구성물로서의 개인의 몸', 즉 외부 세계에 독립된 주체로 마주 선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타자들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좡은 단지 허름한 농민공의 복장을 하고 세련된 대도시의 엘리트 여성에게 다가갔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는 것인데, 농민공을 표상하는 리좡의 행색은 곧 그의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그가 사는 공동체 일원에서 즉시 배제된다는 의미이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리좡의 잘못일까? 그는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몸, 그를 주변 사회에 소속시키지 않고 배제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좌절하고 그런 사회에 대해 적대감만이 자라지 않을까?  결국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이러한 21세기 오늘의 물음을 100년 전에 거의 동일하게 한 작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오늘날 체코로 불리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유대인이다. 1000년 이상을 유대인을 격리시킨 '게토'로부터 풀려나 주류 시민사회에 자유롭게 편입될 수 있었지만, 20세기 전후의 유럽사회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이 창궐하며 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렬하게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유대인에게 씌운 이미지의 전형, 1890년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유대인이 주류 시민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인의 태도와 몸짓, 언어 등 문화적 관습을 모방해서 그들처럼 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산업 사회의 발흥과 함께 중산층으로 성장한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시선은 이들 낯선 인간들에 대한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두려움에 혐오와 모멸을 내재한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낯선 이웃에 대한 불안과 불쾌감, 그 거부감은 유대인의 혈통과 몸에 특정한 전형적 이미지를 덧씌운다. 허약한 신체, 교활한 안색, 흉칙하게 휘어진 메부리 코..., 유대인은 이 왜곡된 맹목적이고 완고하며 말없는 증오에 직면하여야 했는데, 제아무리 유럽 시민사회에 동화하려 할수록 내부의 표상인 자아상과 외부가 바라보는 타자성의 불일치, 그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했다.


급기야  "유대인들은 동종교배와 퇴화 때문에...게토에서 천 년을 살면서 몸이 너무 많이 변형된 채로 유전되어 허약하다"는 퇴화론이 주장되고,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져 교활한, 음흉한과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특징이 고착화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각성한 유대인에게는 일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좌절이었으며, 카프카의 소설은 이에 대한 자기직시, 내외부의 불일치에 대한 자기 모멸과 유대인의 정체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죽음에 이르기까지하는 참담한 고통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반복된 실패의 이야기들,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의 실체의 이야기들이며, 주인공들은 '어느 날'  낯선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카프카가 처해있던 당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전통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독일어를 쓰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동부 유럽 유대인을 멀리하라는 압박, 마치 주류 시민 사회의 중산층 계급에 어울리는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갈 것과 문인으로서의 글쓰기 사이의 갈등은 결국 당시 유대인들이 겪는 유럽인으로의 동화(同化)의 실패와 그들로부터의 거부에 도사린 통렬한 물음이며, 꽉막힌 출구를 찾는 고난의 여정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같은 시각은 1900년 전후의 서유럽 유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체험적 이해였기에 오늘날 한국의 독자나 비유대의 서구인의 시선에서 그의 작품들이 낯설고 난해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이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재칼과 아랍인」등등을 읽을 때 당대 서유럽 유대인들은 작품의 함의를 너무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성찰로 수용했다고 한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Samsa)는  Kafka의 K를 S로, f를 m으로 치환하면 Samsa가 되듯이 당시 카프카의 현실과 일치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만은 없다. 다시 말해 유대인을 풍뎅이, 딱정벌레 등 때려잡을 갑충으로 이미지화한 부정적 언어가 횡행하고 있었기에 유대인 자신에게 부여된 그 타자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잠자는 자신이 변했음을 느낀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몸의 변화를 단지 본 것이다. 그리고는 어떠한 불평이나 경악이 아니라 일상화된 삶을 살려는 기계적인 반응만이 보인다. 이것은 유대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함의로서 개인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응축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 잘못된 해석은 아닐 것이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잠자의 행위는 바로 유대인이 겪는 당대 주류사회에서 체감하는 현실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는 성실하고 안정된 외판원으로 주류사회에 편입된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 주류사회의 시선은 그가 생각하는 자신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자아상과 타자상의 현격한 간극, 불일치다.


즉, 주류 유럽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체성의 상실과 자기확신과 자존감의 결여일 뿐이다. 잠자를 찾아온 그의 직장 지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는 최근 판매 실적도 별로 신통치 못하고", "자네의 지위는 절대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네."라며,  5년 간 한 차례의 지각이나 결근도 없이 성실함과 능력을 발휘한 직원을 향해 비유대인 직원들과는 다른 차별의 언어를 쏟아 놓는다.  


그리고 갑충으로 변한 잠자는 그의 방 문지방을 넘어서는 것이 금지되어 갇히게 된다. 이것이 대상화된 타자성의 존재가 겪는 출구없는 고립의 실체이다. 이렇게 변신, 몸의 퇴화라는 상징어에 시대성 - 퇴화론, 인종주의,사회진화론, 상호의례 질서의 비대칭성 등  타자성 - 을 대입하면 카프카가 말하려했던  '변신'의 의미는 자신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소통 주체인 몸에 씌워진 끈질긴 인간들의 왜곡을 볼 수 있게 된다.  소설 변신」의 해석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나는 100퍼센트 한국인인지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은 0퍼센트 한국인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그 혼란과 좌절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일 게다.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져버린 자아상은 곧 비인격화되어 버리고, 모욕받는 존재가 되어 존엄이 무너지고, 자기 이미지를 포기하게 된다. 사회는 굴종을 정상화하고 마치 없는 존재처럼 하나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우리들의 사회는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지만, 정작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린다.  마치 유럽인이 유대인 카프카에게 하듯이. 21세기 오늘 한국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과 왜곡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우리들의 세계가 여전히 100년 전의 그 어리석고 악의적인 차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자를 배제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역겨움과 공포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이 세계에는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하는 것인 양 이미지화시켜 타자를 배격하는 권력화된 만연한 비대칭의 윤리와 불평등이 산재해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모든 인간에게 '절대 환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인종이란 없다. 더구나 신분이란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종(種)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를 안은 계절 탓인가? 어느 샌가 이만큼이나 삶의 시간이 지났구나하는, 마치 관성처럼 살아온 것만 같은 공허감이 제법 묵직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았다. 아마 이러한 심리적 반응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와 함께 생의 근본적 통찰을 담은의 황금시대로 이끌었던 듯싶다.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는 인간 개체 마다 지닌 태어난 해와 월, , 시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이루어진 팔자(八字), 즉 개별 삶의 좌표를 읽고 해독하여 란 누구인지라는 토대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주도적 운영자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의 자기모색의 길을 안내한다. 사주팔자하면 결정론 아닌가라는 의구심 탓에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너그러움이 내 것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앎의 편협성을 떨쳤다는 증거인 듯이 명리학이 지닌 우주론적 고매함이 발설하는 비전과 그 실용성이 비로소 시선에 들어 온 것이다.

 

의 황금시대는 이 같은 이해가 불러온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연스러운 욕구였을 것이다. 중국의 외교관이자 철학교수인 C.H.의 저술을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한 수려한 문체가 더욱 돋보이는 저작이다. 인간 정신의 경지와 선의 역사를 입문하는 데 맞춤이다.

 

이들 저작은 동일성의 반복을 멈추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찰과 이를 통한 비움과 순환, 나아가 새로움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생의 에너지라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세계의 속물적이고 비즈니스 세계의 언어로 삶의 성취를 말하는 판본이 조용인언리시;Unleash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파악하여 새롭게 재정의 하는 방법론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지워 버리고 다시 앎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혹독한 노력 과정의 길잡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읽고 감동의 리뷰를 남긴 룰루 밀러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립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하던 한 여성의 자기 탐색이자 그 구원자로 여겼던 분류학자의 생을 통찰하며, 자기만의 생의 길을 찾아내는 여정으로 여겨진다. 이제 중간쯤에 도달했다.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는 좌우명, 시련과 고난을 뚫고 고집스레 자기 길을 걸었던 낙천적 과학자의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빚어내는 그 모순성에서 자라나는 악의 근원을 목격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매혹을 뿌리칠 수 없다. 읽던 책을 뒤로 미루고 이 책에 꽂힌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했으니까.


 


캐나다 출신의 고전문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은 내심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를 기대했던 작가다. ()이면서 평론 에세이고 소설인 이 독특한 작품 빨강의 자서전, 언어적 앎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 그 분별과 오만한 무지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는 인식 전환의 내밀하지만 힘찬 외침인 것 같다. 조바심이 일게 만드는, 지금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떠남과 회귀, 중견 작가 이승우의 소설 이국에서20185월부터 20193월까지 문예지 AXT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친구가 되세요라는 문구가 써진 작가의 사인본을 받고서는 새로운 관계를, 낯설더라도 그것이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시장의 요구로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낯선 이방의 나라로 떠나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내외부와 떠남이 키워드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 아니 어떤 의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지 책장을 더 넘겨야 할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누락된 작품들이 남아있다. 여름이나 전락은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 대한 성찰 때문에 전집 한 권을 사야했다,  ‘사형이라는 국가 살인 행위에 대한 불합리한 논리, 비도덕성, 비실증성을 동원한 비판적 평론이다. 국가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본보기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비롯한 인간 본성에 대한 냉엄한 성찰이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자기신체권이라는 소유권 박탈의 권리를 국가가 지니는 것, 아마 꽤나 많은 논쟁지점이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와 비결정론적 믿음을 가진 내가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궁금한 저술이다.

 

비트겐슈타인논리 철학 논고는 상당한 시간적 대가를 요구한다. 경험론은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이다. 즉 버리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얘기이다.이 세계의 가치를 모두 밀어내고 그곳에 논리로 채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그야말로 논리 자체다. 이 논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결정짓는 것인지, 이번 만큼은 독하게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한다. 과연 이 난해함의 비밀번호를 찾아낼지가 관건이다.

 

모든 세계는 나의 세계이며, 나의 세계는 언어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이고, 언어의 묘사가 곧 사실의 반영이라고시작하는 이 철학 사유는 명리학이 말하는 나는 곧 우주자연이라는 말과 흡사하다.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팔자가 뜻하는 그 개별적 실체의 총합이지 않을까? 아무튼 상식이라는 보편성의 그 엉터리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될 것 같다. 이 세계의 그 무수한 사유의 세계들로 들어가면 결국은 인간, 나의 의미란 무엇인가로 좁혀지고, 그런 의미 혹은 무의미에서 어떻게 삶의 목적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만 같다. 이것이 아니라면 사실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런데 이 세계에 인간이 복병을 만들어냈다. AI(인공지능)가 그것이다. 이제 블로거,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메타버스의 세계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며, 가상세계는 실체의 공간과 그 현실적 체험을 옮겨놓고 있다. 파르마코-AI라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쓴 이 괴이한 책은 기억과 젠더, 언어와 윤리학을 교대로 대화를 이어가며 써내려가고 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GPT-3가 쓴 글을 한 번 보자.


우리 문화가 보이는 발전 중독증세는 연표를 제작하는 방식이자, 사회의 경제적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예화와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의 학살까지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포스트사이버펑크를 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급진적 변혁을 예상한 뉴에이지 사상에 이은 생각이다. 이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통해 인간 앎의 지평은 조금 깊고 넓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변화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미지 존재론의 철학자 베르그손을 읽는다. 물질과 기억, 인간은 외적 물리적 자극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은 심리생리학적으로 통합된 존재인가? 지금 4차 혁명을 주도하는 정보산업의 주체들은 동물기계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식 물리환원주의를 외치고 있다.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후손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우리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보다 넘치는 듯하다. 아무튼 이 가을, 내 삶의 재설계를 위한 독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과연 내가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담아낼 만큼 용기가 있을까






P.S. -  아, 몇 권의 책을 빠뜨렸다. 문학사(文學史)상 가장 긴 자살 유서로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소설인『막간』은 불순하지만 호기심에서 집어 들었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의 『위대한 강연』도 꼭 무엇을 얻으려는 지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그의 초지일관하는 이분법적 사유, 강고한 서구 엘리트의 전형적 사유를 보려했을 뿐이다. 


미와 추, 절대와 상대. 완전과 불완전, 진실과 거짓, 거인과 난쟁이..., 사실 애초부터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책을 읽으려 했으니 불순한 동기는 막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마 이 삐딱한 동기 때문에 빠뜨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의 짓궂은 방해였을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