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위상학 - 전우치전과 홍길동전, 정치와 통치에 대해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이진경이 쓴 한국 고전 소설들에 자리를 할당한 척도를 깨기 위해,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고자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파격(破格)의 고전을 읽어나가다  변신의 위상학을 설명하는 <전우치전><홍길동전>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소회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 충동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변신술이 목적하는 바의 천박한 욕망,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지 않고 고작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에 얻고자하는 욕망임을 보았기 때문인데, 바로 성공을 추구하는 자의 냉혹한 합목적성,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피와 죽음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결여된 것에 사로잡힌 자의 체제 내적 욕망(173)이 풍기는 악취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고닦은 도술이 합목적적 도구가 되는 순간, 세상사를 자신의 목적 아래 복속시키는 무서운 수단으로 변질 악용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일개 검사가 정치검사가 되어 한 국가의 수반이 되자 검사로써 배운 압수, 수색, 기소라는 술책이 만능의 도구인 듯 휘두르는 모습에서 동일한 종류의 인간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홍길동 같은 인물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읽을수록 멀리하고 싶은 인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 책의 집필시기의 판단은 성급했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조의 소설들에는 한결같이 여러 유형의 변신술 또는 도술이 등장한다. 이 변신술이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인간화된 도술이 있는가하면, 본질적으로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도 있으며, 물질성 그 자체와 결부된 힘을 지닌 <금방울전>의 금방울처럼 물질성의 도술도 있다. 그리고 동물적 기원의 변신에 있어서도 그것들은 또다시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수재의 에피소드인 <왕수재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흐트러뜨리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치안(治安)의 변신이 있는가하면, <전우치전>처럼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의 손안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치안, 통치를 희롱하고 할당된 자리를 벗어나 사용됨으로써 정치(政治)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온전히 인간적 도술을 부리는 <박씨부인전>이나 <홍길동전>은 전자의 경우 경계를 확고히 하여 지배적 가치(統治)를 지키려고 사용되며, 후자의 경우는 서자 자리로부터 이탈의 욕망이라는 표면적 저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홍길동의 경계 이탈은 지배가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단지 자기 결여에 대한 반항이고 경계, 즉 체제 내적 욕망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사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추한 사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같은 변신술이라도 그 안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데, 그들이 서있는 지점과 문제화하려는 의도, 사용 목적에 따라 극히 상반되거나 다른 사회적 영향을 낳는다.

 

<전우치전>의 개략적 이야기로 시작하자. 여우의 호정(여우의 넋)’을 빼앗아 먹음으로써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전우치가 여우의 굴에 가서 천서 세 권을 얻었으나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글이라 구미호를 앉혀 놓고 상권(세 권 중 한 권)을 배워 통달하여 도술을 획득한다, 즉 동물적 기원을 갖는 변신술의 능력으로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새로운 술법을 부려 인간 세계 안에 이러저러한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 시킨다. 즉 그는 권력에 반하는 유희를 행하면서 거만한 관리나 잘난 체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한 인간들을 참지 못하고 엿을 먹인다. 더구나 전우치는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의 변신술을 통해서 소위 속세의 권력이나 재화 등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국가나 통치자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희롱하며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노리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는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구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통치를 비판하는 정치라는 새로움, 민중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대 조선의 양반들은 전우치전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는지 <전우치 한문본>을 새로이 써서 ()-전우치라는 기치 하에 완전히 반대되는, 다시말해 전우치를 윤리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인물로 규정해 버린다. 한문본의 유치찬란함이란!  전우치가 천서(天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대부들은 전우치 혼자 읽고 깨우치는 걸로 씀으로써 자신들의 우매함이 드러난 것을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직 도달 할 수 없는 아득한 깊이와 거리 저편에 있는 자연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한문본은 서화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우치가 제압당하는 걸로 종결하여 기성 권력이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서화담이 전우치를 위협하는 문장은 정말 가관이 아닌데, 앞으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며....만일 내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며 너 같은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사회와 격리된 깊은 산속이어야 하며, ‘자리를 이탈하면 죽여버리겠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통치질서에 저항하지 말고 쭈그리고 없는 듯 살라는 말이다.

 

로버트 단턴이 쓴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인 고양이 대학살에 소개되는 인쇄공들 그들만의 문화 주제를 가지로 유희를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하던 그 정치적 이벤트를 떠오르게 한다. 시공을 달리하면서 동서의 민중들은 불의와 부당함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며, 항시 이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폭력과 마주했다. 2023년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유머와 가벼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상극, 대립에 있는 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우치와 달리 인간의 관념을 벗어난 세계로부터의 기원이 아닌, 지극히 인간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구상된 주역을 읽고 도술을 익힌다. 홍길동은 기존 세계, 즉 체제 내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란 뜻이다. 홍길동의 도술은 전우치의 기성 권력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 임금에게 알리려는 과시적 목적의 사용이다. 신의 이름을 드러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홍길동의 말처럼 그의 변신술은 명확한 목적에 의한 기만과 공격일 뿐이다.

 

성공을 추구하는 냉혹한 합목적성, 국가나 통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변신술이다. 단지 버림받은 처지의 원한을 호소하며 통치 권력이 자신을 포섭해 주길 욕망하는 사술이다.  때문에 홍길동의 반란과 공격은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즉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권력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임금이 병조판서에 제수한다고 하자마자 냉큼 궁궐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은 고작 권력에서 배제된 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난리를 부린 것,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는, 이미 국가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결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할 의지도 없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를 얻으려 했을 뿐인 에고이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지금 날뛰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이며 이의 정체적 상징인 국민이 주권의 소지자라는 헌법 질서를 부인하는 관료가 설처대고 있다. 도구적 도술, 도구적 변신으로 권력만을 탐하려는, 자리를 얻어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만이 득시글댄다. 국가와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말해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가 실종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치는 다름을 통합하는 기술의 장()이다. 다름을 폭력의 대상으로 적대화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 통치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정치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질서의 경계를 확정지어 기성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수구적 태도가 <홍길동전>과 유사한 소설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박씨부인전>이 있다. 인간적 도술에 기초한다는 측면에서도 홍길동의 도술과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술책을 쓰는 별당 아씨 박씨부인은 초월적 예견력을 발휘하여 시댁의 부를 늘리고, 국가의 위난에 대비하는 등 가족과 국가질서의 굳건한 주체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늘 패하고 상상 속에서만 승리한다.

 

철학자 이진경이 지적하듯 일종의 루쉰 식 정신 승리법에 도취한 인물이다. 현실적 패배는 눈앞에 지워버림으로써 패배의 이유를 묻지 않게 되므로 계속해서 패배하게 된다.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영원히 그 패배에 달라붙은 불모의 지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출구는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금의 정권처럼 재난은 반복된다. 책임을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책임은 또다른 재난을 계속 반복할 것이고, 그것은 민중이 고통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승리적 관점만을 취하려는 이 몽매함, 정신승리법! 에 도취된 권력을 지닌 국민은 고달프다. 통치에 대항하는 전우치의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읽기위해 한문본 전우치가 아니라 경판본 37장을 계열로 하는 한글 전우치전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기성의 평가의 척도를 깨부수고 기존의 틀과 대결하는 파격(破格)‘을 알려주는 고전소설을 새로운 절단면을 내서 읽도록 견인하는 이진경(박태호)교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파격의 고전, “확립된 평가의 틀 안에 이질적 기준을 밀어넣어 새로운 감응을 만들어내는 이 책을 마구 선전해도 어떠한 비난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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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 갈등의 번역과 분열주의 생산 관계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의 사회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이 쓴 나와 타자들(Ich und Die Anderen)을 읽어가던 중,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퇴행의 양상들이 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나의 요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카림은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이 정의한 정치, 사회적 갈등으로서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껍데기뿐인 포스트민주주의, 즉 비민주적 사회로 역행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고찰임과 동시에 작금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데 비교적 명쾌한 영감을 주기에 그 소회를 남겨둔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경제적 이익, 분배문제와 같은 정량화 가능한 이익에 관한 갈등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갈등이기에 인정이나 교환, 타협이 가능한 갈등으로서 어떻게든 봉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눌 수 없는 갈등이란 세계관, 정체성, 문화, 가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측정할 수 없어 따라서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정량적 기준을 지니지 못한다. 그저 인정하거나 불인정하거나라는 극단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화해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기 쉬운 갈등이다.

 

이 정치적 갈등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갈등의 정의가 왜 중요한가하면 바로 시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으로 표상되지만 시민적 체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두 갈등의 결과는 점진적으로 시민의 경제적 삶은 물론 각종 사회 안전망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훼손,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퇴행시킨다. 결국 이것이 시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국가라 부르는 시민의 통합적 상징 이미지를 전락시킨다. 아마 왜 현재의 정권이 재난에 무감하고 무책임한지, 그들이 왜 오랫동안 쌓아올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지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정의는 더욱 의미 깊다. 그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은 협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문제를 푸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치, 정체성, 문화를 다루는 일에 관여해야 하며, 이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하여서라도 이를 해결하여야만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중재하고 타협할 수 있다. 그래야 시민 대중은 통합될 수 있으며, 국가는 혼란을 멈출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지만 시민의 피를 댓가로 그나마 작금의 사회안전망이나마 갖추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들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도록 건강보험, 최저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복지 체제를 부여했다. 이 권리를 통해 시민은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존엄!’, 그렇지만 이 깨지기 쉽고 스스로는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확인받는 행위를 요구했다. 나눌 수 없는 사회적 안전, 인간존엄과 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물질적 제도로 확인한 것이다. 이 확인이 곧 복지국가의 형상이며, 민주주의 실현이다. 존엄, 자부심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최저임금이나 의료보호로 나눌 수 있는 확인으로 보증된 것이다.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 나눌 수 없는 것들을 훼손하거나 파괴한다면 무엇이 파손되는 것이겠는가? 사회통합을 위한 요소였던 존엄과 평등의 가치, 정체성 등이 손상을 입음으로써 시민이 분열된다. 즉 가치와 세계관,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배제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축소하는 것, 각종 사회적 약자에 지원되던 예산을 삭감하는 것, 최저임금을 물가 인상률에 현저히 밑도는 수준으로 결박하는 것,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정하며 폭압으로 물아 부치는 것,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어 타협과 통합을 이루었던 근본을 파괴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대한 하나의 축을 찢어발겨 훼손함으로써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국면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를 부인한다. 그리고는 이 갈등에 대한 목소리를 적대화하여 케케묵은 빨갱이, 공산당의 논리라며 파렴치를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을 알고 실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16개월 남짓 보여준 모든 정책과 정치, 행정 행위에는 무책임과 회피가 일관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등의 한 측면에 얼마나 소홀한 지, 혹여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으로 이들이 지극히 면밀하게 사회통합을 해체하여 분리주의적 분열을 획책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대기업 감세와 초부자의 증여세면제 등 최상위 부유층과 그 나머지 99퍼센트의 시민대중과의 두 국민 정책이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시민대중은 이러한 작태에 대해서 분노하고 격노와 아픔, 실망의 감정을 표시하고 이를 대의 기관인 정당과 정권에 관리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권력은 이 감정들을 엉뚱한 곳에 탕진하거나 방치하면서 약화 상실시켜버리고 있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경청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고려받는 느낌조차도 없다. 대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은 대의 기능을 전혀 인지하지 않으며, 권위주의적 권력 놀음에 취해 자신들의 주머니 이익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강력하게 획책하는 분열주의가 이들의 불의와 부패를 방어해 주리라 믿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들은 시민 대중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으며, 분리한 대다수의 시민의 삶에 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구경꾼 코스프레와 쇼의 연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잼버리 대회의 무책임한 운영은 재난에 대한 애초의 관리 의지 없었음을 입증하는 극히 일부 노출된 사례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재난의 발생과 무책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에게는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파손할 의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 즉 가시적이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합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환상인 것 같다. 정치는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합리적 합의가 아니다. 이성적 합의 뿐 아니라 감정적 합의를 생산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사회갈등은 단순한 전략적 이익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협상의 예를 보더라도 여기에는 사회적 관심, 인정, 정의에 대한 생각 등 이성 외의 요인들이 늘 개입한다. 이처럼 실제 나눌 수 있는 갈등에서조차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불일치의 동기가 놓여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의 타협을 중재하고, 각 정파들 사이에서 감정의 타협을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고 시민대중을 갈라치기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파기하고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 획책의 중지와 통합을 위한 민주정치로의 복귀이다. 더 이상의 파괴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무책임과 무관심, 방관, 거짓말은 안 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성실한 번역 작업에 임하는, 일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 어려운 노력을 회피하는 게으른 권력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어있다. 30퍼센트의 우중이 언제까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맞장구를 쳐줄지는 단언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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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Essais 2-1 에서


작금의 권력은 가장 흔하고도 명백한 악덕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시리아 출신 그리스 희극작가인 푸블리우스는 재고(再考)할 수 없는 결심은 가장 나쁜 결심이다.”라고 말했으며, B.C. 4세기의 그리스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라 말했다고 몽테뉴는 그의 생애 저술인 에세에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릇된 결심을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반성과 숙고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권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장인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현실의 권력이 자행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몇 자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솔한 위대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온갖 모순을 발견한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서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단순하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란 온갖 잡다성과 모순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 사이가 자신과 남 사이만큼 차이가 있음을, 즉 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불가능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반성과 숙고라는 깊은 사려를 통해 도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은 숙고를 통한 확고부동의 길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정책에 어떤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 자의적이며 임기웅변의 권모술수만이 행해지고 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범인의 흔해빠진 본성이며 명백한 악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로 국가를 통치하려든다. 어떠한 것도 확고부동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잘못된 정책과 견해는 재고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그 어느 정권보다 무능력한 폐쇄 집단 출신의 인간들이라면 더욱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진하려드는 정책들에는 어떠한 원칙이나 질서도 없다. 때문에 정책 행위들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으며, 모든 일들 사이에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있어 국민적 연대를 통한 추진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 가려는지, 가려는 목적지는 있는지를 어떤 국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는 어떤 확실한 지침이나 명료한 국가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온갖 모순덩어리임을, 결국 인간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조각으로 구성된 미물에 불과함을 말이다. 어찌 재고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권을 지녔다는 듯,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독재는 자신의 불의로 인해 민중의 언로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오류가 오류투성이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지금 권력의 정책들은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길을 헤매고 혼돈으로 우왕좌왕, 좌충우돌로 정쟁으로 왜곡되기 일쑤고, 민생과 국가 발전의 길은 좌초되어 침몰하고 있다는 지표가 도처에서 경고등을 발하고 있다. B.C. 1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주벽(酒癖)으로 취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술의 위력이 스며든 인간의 지력 흐릿해짐과 험상궂은 눈, 그리곤 고함과 싸움질로 치닫는 거칠고 동물적 악덕 행위로 말이다. 한 국가의 리더가 자신의 주벽을 뻔뻔하게 시민들이 오가는 길에서 과시하는 파렴치함을 보일 때 그것을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와 결합시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허황된 자부심이 얼마나 인간을 지각없게 만드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시민들은 반성도 없으며, 숙고도 없고, 그 어떠한 확고부동하고 사려깊은 정책도 없는, 게다가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권력이 불안하며 그곳에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른해진 사지로 건들거리며 다리는 꼬여 비틀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국민적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깊은 사유를 통한 끝에 도달한 명료한 목적이 없으니 구체적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재난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회피, 외교적 무능과 실수의 연발, 왜곡된 언론관에 의한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탄압적 폭력행위는 바로 이러한 자기반성과 숙고 없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간적 자기 인식 없음으로부터 출현하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둘 수 없으니 부분들이 정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각 통치 기구의 상호 네트워크의 유연한 연결을 비롯한 거버넌스(governance)의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난맥상이다. 약간만 돌려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국가의 그 복잡다단한 정책들은 어떠하겠는가?

 

잔인성의 표본인 로마의 네로도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퍼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처럼 변덕스럽고 모순으로 뭉쳐있음이다. 제아무리 지혜롭다한들 인간이다. 지혜란 인간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몽테뉴를 빌어 쓴소리를 끄적이게 됐다. 세네카가 말했다.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라.”고 말이다. 반성하고 숙고하며 그 완성으로 확고부동한 정책을 펼치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쇄신(刷新)하는 인간이기를, 또한 권력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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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책 사랑의 완성에 대한 두 번째 감상으로 무질의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한 것이다. 번역본은 북인더갭 출간 본으로 이 중 단편소설 지빠귀 (Die Amsel)를 별개로 첫 번째 수록하고, 나머지 산문 중 15편을 생전의 유고로 분류하고 있다.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은 앞서 남겼다.

 

 

문학은 삶의 개념을 파악하고자하는 학문과 달리 삶을 무한한 미지의

 현상 자체로서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

 

 

1.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해서

 


유고는 작가의 사후에 미()출간된 글들에 대해 붙이는 개념어다. 그런데 작가 생존에 유고(遺稿)’는 모순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무질은 이런 까닭으로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사후 유고의 출판을 못하게 하기 위해 결심했으며, 이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반의 증언은 특성 없는 남자2권의 집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출판의 공백을 메우기위한 방책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무질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스위스로 도피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도피 중이었던 토마스 만에게 후원금 5달러 지급 연장을 부탁하는 가슴 아픈 편지가 전해져 온다.

 

생전의 유고1934년에 출판한 무질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30편의 짧은 산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5쪽 미만의 글들이고, 단 하나 지빠귀만이 15쪽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무질은 이 작품들을 네 개의 성격으로 분류하여 각기 (), Bilder14,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4, 마지막으로 지빠귀로 배치하고 있다. 국역본 사랑의 완성은 이들 중 지빠귀를 별도로 구분하였으며, 나머지 29편 중 15편이 생전의 유고라는 항목에 편집되어 있다. 수록작 중에서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편 모두가 빠져 있으며, 각 분류 항목에서 1,2편씩이 추가로 빠져있다.

 

2. 지빠귀 (Die Amsel)에 대해서

 


단편 지빠귀는 무질의 작품에 있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쓴 마지막 단편소설이라는 의미보다도 이야기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소설론(小說論)적 성찰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3인칭 화자가 시작하여 1인칭 인물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건네지만 다시 3인칭 화자로 복귀하지 않는, 즉 틀이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끝을 맺는다. 형식이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종료는 독자의 창의적 해석으로 넘겨진다. 소위 무질 문학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표현과 침묵 사이의 허공을 부유하며 확정과 완결을 거부하는 문체라며, 바로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이 곧 무질의 문학 의도라 말하고 있다.

 

소설은 딱히 줄거리랄 것이 없지만 아츠바이(Azwei)라는 인물이 친구 아아인스(Aeins)에게 들려주는 어떤 연관성이나 인과성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전부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창밖의 지빠뀌 노래 소리로 인해 순간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아주 다른 감각의 세계로 옮겨간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전쟁 참전 중 적의 헬기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생사의 갈래에 섰을 때의 신비로운 체험담이다, 마지막은 사업 실패로 어려움 겪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고향 집에서 자신의 옛 시절, 자신이 가장 선하고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마다 독자 나름의 공감이나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뚜렷하게 해석할 테마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첫 일화에서는  수직의 공간 체험을 충분히 이용해 동일성의 공간을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어.” 라는 문장처럼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읽을 수 있으며, 다음 일화에서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야.”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고. 마지막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닌 고정된 상()의 현실과의 불일치, 즉 살아있는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증명의 변()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아아인스는 묻는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 아니었어?”라고. 그러나 아츠바이는 부인하면서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라며 소설은 종료된다. 세계의 모든 질서는 확고한 것보다 확고하지 않은 것 속에 보다 많은 미래가 있다는 무질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넘긴다. 인과법칙도 논리적 연관성도 벗어난 이 소설은 이렇게 읽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는 독자 개별의 몫이 될 터이다.

 

3. 생전의 유고15편의 산문에 대해서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 대부분이 무질이 (), Bilder이라고 분류한 항목에 속한 작품들이고, 성격 없는 사람이란 제목 한 편만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에 속한 작품이다. 무질은 ()’ 정확한 관찰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무심코 표현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다분히 문학의 근본으로서 역사 구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의 신념을 읽을 수 있으며, 사실 수록된 산문들도 이러한 설명에 일치한다.

 

파리잡이 끈끈이는 문자 그대로 한 여름철 동네 뒷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달려 있는 파리 잡는 끈끈이 그것이다. 세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로서의 무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이내 포기하고 죽어가는 파리들을 묘사하는데, 20세기 초 독일 사회 인민들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극도로 애쓰는 이들의 표정에는 라오콘 보다 더한 절절함이 배어있다.” 라든가,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현재의 순간적 욕망이 계속 살고 싶다는 강력한 감정을 모두 누르는, 비장한 무의식의 순간에 대한 관찰은 실로 만만치 않은 생각의 타래를 풀게 한다.

 

원숭이 섬은 다소 신랄하고 비판적인, 무질의 문학에서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묘사되는 대상이 원숭이일 뿐이지, 인간으로 대체해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은유라 할 수 있다. 나무와 대지를 지배하는 계급, 그리고 여기에 오를 수 없어 대지 아래 도랑에 머무는 원숭이들의 배치나 이들 지배 원숭이들, 박해자가 난간을 따라 걸어가자 경악의 파도도 그를 따라 멈춘다.”, 권력 계급이 보이는 폭력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비굴함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박해자 원숭이의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천박한 오늘의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도 웃을 수 있을까?, 재단사의 동화등 몇 몇 작품들이 비교적 시선을 끌지만 단연 특이성 없는 남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격 없는 사람은 무질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이유가 있는 작품일 것 같다.

 

이 녀석아 넌 쓸 만한 성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성격이란 이 인용 문장처럼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성격에는 분명 올바르지 않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부모들에게 이 성격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격이란 형편없는 성적, 장난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것, 야비한 행위...등과 개념상 정 반대 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반대, 즉 쓸 만한 성격은 처벌의 두려움, 들 킬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짓에 대한 후회, 양심의 가책이 되고만다. 사실 이 추론은 아이들에게 비굴함과 복종, 노예근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성격 없는 사람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성격 없음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읽기에 제법 도움을 주는 선행 독서가 되어 줄 것 같다.

 

무질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모든 질서는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다.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 되어진 것, 현상된 것에 대한 유보를 통해 부단한 서술과 서술의 해체를 거듭하며 가능성을 타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불완전성의 틈을 미흡하지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 매혹된 차에 무질의 작품 세계를 당분간 지속하여 거닐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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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3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 담아둡니다~~^^
무질의 <특성없는남자>를 사놨거든요 ^^

필리아 2024-02-08 14:57   좋아요 1 | URL
국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번역판본 중, 원작 1권의 충실한 완역본은 문학동네와 나남출판 두 종류가 있는 것 같구요, 북인더갭의 미완으로 머물렀던 통합본의 나머지 부분이 2권으로 드디어 출간, 완간되었네요.(2014.2.8 댓글 수정)
 



내 오월의 책은 그저 우연의 연속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에 대한 울화 때문이었던 싶다. 이러한 심상이 만연한 진화이론의 남용에 의한 편협과 왜곡, 의도적인 선전물들의 난무를 분별하는 책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센스 앤 넌센스를 읽게 되었다. 그러다 신간 안내 도서에서 와일드 후드라는 세상의 모든 생물체의 청년기와 인간의 행동,심리를 비교하여 성장기의 지난한 진화론적 역사 이야기를 재빨리 구매했다"직관을 거스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경험으로 진입하는 성장기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두 책은 전혀 계획된 독서의 목록이 아니었음에도 삶에 끼어들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영역본 Capital은 순전히 대조 읽기와 참조용으로 구입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이 영역본은 유용하게 활용될 터이다. ‘파울 첼란의 시집은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에 영향을 받은 읽기이다. 독일어를 말하며 성장했지만 독일인들로부터 배제된 유대인의 그 철저한 소외와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의 부당함을 일생 고뇌했던 시인의 글쓰기인 신비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유사한 맥락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은데,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역사에 수록된 생전의 유고를 구성하는 작품들 때문이다.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독자적 논리인 비이성적 영역과 비논리적 대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공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고 1차 대전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음에도 나치에 의해 금서작가로 몰리고 스위스에 도피하여 곤궁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끓는다.

 

한국 문학들은 사실 완전한 임의적 선택이랄 수 있다. 요즘 국내 문학의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만 외면 할 수 없는 몇몇 작품들에 독자의 작은 성원을 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전혜진 작가의 바늘 끝에 사람이는 주류 사회가 은폐하거나 외면한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빼곡한 소설집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다시 자성하는 읽기가 될 것 같다. 박문영 작가의 허니비는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인 미래 사회를 축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일 것 같다. 내 의지가 가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이다. 여행자,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유행과 광고의 현혹으로 내 수중에 들어 온 책들이다. 아마 무더위가 찾아오면 읽게 될 줄 모르겠다.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은 내게 어떤 의도를 남겼는데, 놀이를 사회학으로 연결 짓는 이 위대한 저작은 놀이와 정치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회와 문화 비판의 중요한 논거로서 높은 가치가 느껴진다. 요한 하우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완결 짓는 역사적 걸작일 것이다. 이 두 저술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지식 엘리트라 자처하는 이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까지 한다.

 

기득권의 그 집요한 보전 욕구가 학문에는 순수성이란 애초 없음을 확신케 한다. 무질이 학문을 경멸하고 문학에 천착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사를 구입하게 된 동기는 막연하게 18~19세기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그네들 인식을 조망하기 위한 대강의 또 다른 판본에 대한 기대였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충족되지 못했다. 책의 선택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실패로 인해 읽게 될 일 없는 책들을 읽게 된다. 우연, 즉 인간이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사인 모양이다. 이제 6월의 도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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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5-2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문학을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파울 첼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늘 감탄하며 리뷰 읽고 있습니다. 유월의 우연도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3-05-24 10:3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요즘 파울첼란,카프카,무질에 꽂혀있어요. 이들의 열린결말, 비의적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초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