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8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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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판단력에서 유리된 지식의 패악(悖惡)>



행동은 비루하고 언변만 학자인 자들이 나는 싫다.”

- 파쿠비우스(Marcus Pacuvius; B.C. 220~B.C.130)

 

몽테뉴의 에세(Esse) 1 25현학에 관하여를 읽던 중 재밌는 구절을 발견하고 몇 자 남겨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고트족이 그리스를 침범했을 때, 그들은 단 하나의 도서관도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고트족이 지식과 문화를 존경하고 숭배해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도서관들을 온전히 남겨두어야 판단과 실천의 장을 멀리하고 들어앉아 글에 코를 빠뜨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리라는 견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문()을 숭상하고 이의 판단과 실천적 현장은 도외시하는 식자들만 우글거리기를, 그래서 칼집에서 칼도 꺼내지 않고 손쉽게 주인이 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몽테뉴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공부할 뿐, 그것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남의 지식만으로 가득 채워진 지식의 무용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16세기 조선 또한 서원에 들어앉아 세치 혀를 훈련시키는 데 열중하다 왜에 손쉽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이와 다른 현상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이 귀족은 급기야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은 재료를 (두뇌)에 채워 넣으면 둔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반지성(反知性)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도서관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있어 기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발걸음들로 분주하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의 식견이 더 깊어졌는지, 혹은 이 사회가 더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가 되었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변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책과 학문에서 우리들은 무얼 배우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 법학, 의학, 경영학, 공학 등등 돈 버는 목표에 소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 공부이기 십상일 것이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서나, 선한 행동을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러한 양상은 학교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더욱 극성맞게 판단력과 덕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다.

 

때문에 고대 로마 시인 파쿠비우스가 말하듯 지식은 가득한데 행동은 비루하고 혀만 재빠른 인간들만 양산되고 있는 듯하다. 지식과 판단력을 비교해보면, 판단력은 지식 없이도 작동하지만 판단력 없는 지식은 파렴치하거나 악덕이 되기 일쑤이며,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 사회에 기억력은 충실하지만 판단력은 텅 빈 인간들로 득실대다보니 사회 정의는 실종되고, 선악이 뒤틀린 세계가 펼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몽테뉴는 법관을 임용할 때 지식만을 검증하는 시험은 그릇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양식(良識) 또한 검증되는 채용제도의 필요를 역설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사법의 정의를 위해서 정말이지 이들 기구에 지식은 물론 이해력과 양심이 함께 갖춰지기를!”이라고 썼다.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다! "

-에세 125, 265, 민음사 2022.8, 13쇄에서

 

지식은 정말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판단력, 즉 선한 의지에 대한 배움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필히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세네카가 지식만을 채운 인간들이 나타나고부터 선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듯,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을 오늘 정치검찰이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현실로 입증되고 있듯이 말이다. 몽테뉴는 오랜 공부 뒤에 얻은 것이라곤 법조문에 불과한데 우쭐하고 오만해져 부어오른 영혼으로 바람만 잔뜩 들어간 인간들의 독성으로 가득 찬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지식과 바른 판단력으로서의 지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지식과 실천적 행동 또한 그 거리는 한참이나 먼 것이다. 우리 사회가 17세기 프랑스인이 생각하기를 권했던 인격과 실제 행동으로부터 격리된 지식 쌓기의 그 혐오스러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더구나 이를 시정하기는커녕 더욱 고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움이 엄습해온다.

 

지식 자체는 정신에 광명을 주는 것도, 눈을 뜨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이러한 지식의 직분을 혹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게 된다. 채워 넣은 지식이 올바른 가치 판단으로 이끌어주고, 판단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지혜로 체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인격형성과 선한 실천력으로부터 유리된 지식만이 난무하는 이 사회는 분명 잘 못된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 게다. 글한테 망치질 당한 '글 멍청이(Lettreferits)'들이 설쳐대는 사회는 고트족의 좋은 침략 대상이 되리라. 양심과 판단력을 지니지 못한 공허한 지식이 휘두르는 칼날이 이 사회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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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젤라스트와 돈키호테(Agelast and Donquixote)

- 신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우리는....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Mann Tracht, Un Gott Lacht.)” - 유대 격언

 

 

이 유대격언에서 신(God)은 왜 웃고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일까? 한 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인간들, 제깟 것들이 생각해봐야 진리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결코 듣지 못할 웃음소리다. 신의 웃음이란 이렇게 초라하고 왜소하며 편벽한 인간의 생각에 대한 반응이다. 진리란 명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하는 멍청이, 획일화되고 고착된 통상적 생각에 매몰된 공허의 인간은 웃을 줄 모른다. 유머감각이란 쥐뿔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짐짓 진지함을 과시하려든다. 우리들은 그때 웃는다. 그 맹목의 무지가 드러나니까 말이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아젤라스트(agelast)’라 부른다고 한다. 아젤라스트들은 자기 믿음이 명확한 진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일치된 동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사와 인간 개체란 것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던가? 사람들을 향해 팔을 쳐들고 삿대질을 하며 굴종을 강요하는 괴성을 질러대는 아젤라스트틀이 모든 다양성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의 획일화된 가치와 질서를 진리라고 종용하는 형국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그 잘난 입으로 방종의 헛소리를 일삼으며 전문가랍네 하던 인간들이 자취를 감추고, 아젤라스틀이 설쳐대는 현실에 찍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니 내지 못하는 것일 테다. 은폐되었던 더러움이 압수수색이란 폭력적 수단에 의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이 남은 보루다. 아젤라스틀은 예술을, 특히 희극과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웃지 못하는 존재들인 까닭이다. 마침 페러디 문학의 결정판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으니 이처럼 맞춤의 대상이 어디 있을까싶다.

 

스페인 문학 연구자인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에 관한 해설서에서 돈키호테가 출현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각과 노동이 죽음의 덫인 나라,

이런 모순투성이의 스페인 현실에 대다수 지식인들은 눈감고 잘나가던 자신들의

펜을 꺾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현실을 미학으로 투영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 돈키호테를 읽다, 75P, 열린책들, 2023.2 초판 3쇄에서

 

400년 전, ‘순수 기독교인의 피라는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순수 피에 의한 인간 구별의 획일화된 잣대가 모든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던, 정치와 종교 권력이 자기 검열을 강요하던 지옥 같은 시기에 출현한 희극적 소설이 역사의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금 그 상식을 뒤엎은 웃음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단 하나 권력의 목소리만을 들으라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상은 결국 사회구성원 개인들의 존재 정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개인을 부정하는 지경으로 치달을 태세다.

 

때문인지 온라인 연결망의 각종 채널들에는 패러디와 유머의 말과 영상들이 증가한 듯하다. 또한 SF, 환상,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문학작품들이 늘고 있다. 현실을 모방하는 리얼리즘의 체험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작품은 아젤라스틀의 쉬운 표적이 되어 블랙리스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을 아는 이유일 것이다. 돈키호테가 활약해야할 비극의 시간이 된 것이다.

 

정교하게 구성된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전혀 그럴듯하지 않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꿈과 현실이 통합된 초현실의 세계가 자꾸 열려야 하는 당위의 시대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다보면 그 유치함과 서투름으로 주인공의 고양된 야망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장면들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표면적 이야기에서는 패배적이지만 웃을 줄 아는 독자는 이것이 패러디임을 안다. 그 잘난 질서 수호자들인 기사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아, 기존 가치와 체계를 전복시키는 최고의 수단인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식(Common sense)이라 따르라는 그것을 뒤엎는 이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역설에서 희극성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희극성, 유희적 세계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이라 했지만, 오늘날에는 훤히 유리창처럼 내부가 보이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권력이기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기가 더 수월해졌다. 신의 웃음은 반박이며, 저항이요, 가소로움에 대한 혐오의 조소이다. , 쿤데라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러니는 비록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그것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주어 확실성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래, 미술, 소설, 시 등 예술은 그 이름값을 하는 한 아무리 명쾌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 웃음과 아이러니, 환상의 세계는 아마 지금 절대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사회집단의 상호 소통이나 영향의 주고받음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존재 사이로부터 시작해 급격한 속도로 파급되어 전체 구성원이 동기화된다고 한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을 포함한 우리 인간은 상호 연결된 진동자처럼 동기화되어 거대한 웃음소리로 아젤라스틀을 질식시킬 수 있다. 돈키호테가 땡기고, *상전이(相轉移)가 유혹하는 시절이어서인지 객쩍은 상념을 적어봤다. 우리들은 찌르레기들의 가을 하늘 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중군무의 변화처럼 순식간에 동기화되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 돈키호테처럼 행동하자. 모두 함께 크게 웃으면서... 

 

) 상전이(phase transition,相轉移)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온도와 압력 등 외부변수에 의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액체인 물이 0도에서 고체인 얼음으로 변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상전이는 모든 물질을 비롯한 인간사회와 같은 복잡한 구조도 얼마든지 다양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창조적인 혼돈상태임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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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진리 있음을 표현하는 ‘~~이다.’ 라는 이 단순한 명제, 이 명제를 누가 의미화 하는가? 어쩌면 이 단칭명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세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식별하고 지각하며 설명하려는 욕망 모두를 번역하고 해석하려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의미화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집단 혹은 무리는 소위 전문가라 자칭하는 인간들(과학자, 철학자 등등)과 권력자다. 이 전문가, 지식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모델 하에서 지식권력을 행사하며, 이 세계의 다양한 기호작용들을 의미화하고 구조화하여 그 모델에 쑤셔넣고 객관적 진리라고 선언한다.

 

그리곤 이 선언된 단칭명제들을 위반하는 ‘A일수도, B일수도 있다라는 명제를 말하는 순간 배제와 폭력의 세례를 받게 되며, 비도덕적 언어가 수반되어 불온하거나 망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매장되어 버린다. 기표의 의미화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차지한 전문가와 권력자 집단은 이렇게 세계 모든 현상을 이분법에 의해 정의하고 단정하여 자신들의 지배기득권을 영속화한다. 이것이 인류의 오랜 역사이다. ‘~~이다.’라는 자신들이 정의내린 준거 기준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비이성으로 식별되어 비정상성의 광기로 분류하여 제거되고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적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실제의 현상 속에서 인간들은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인간 삶 속에서 실현하겠다는 세계를 펼치겠다고 한다. 때문에 각각의 차이 나는 모든 존재에게 세계의 구성능력이 내재해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기반으로하는 민주주의 사상은 끊임없이 충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들 준거집단을 내세우는 전문가 집단의 모순이 발생시키는 도전의 직면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문화, 생활방식, 환경적 배치와 조건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무수하게 다양한 세계상과 지식 형태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임에도 이들 여지를 부인하고 억압하는 의미화라는 권력의 단정적 고정성으로 새로움, 낯섦과 같은 이질성에게 죽음을 명령한다.

 

의미화의 이러한 독재적 권력에 대한 의문은 내 생각을 널뛰게 만들었는데, 기표독점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내가 원하므로 한다.’모든 것이 허용된인간을 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 필타를 학대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며, 어린 소녀를 능욕하며 아무런 죄의식도, 도덕률도 없는, 그저 내가 원하면 한다는 개인적 욕망과 이익의 극단적 추구, 쾌락의 만족을 통한 자기 존재 확인에 몰두하는 인간을 연상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스비드리가일로프들이 기존의 모든 사회적 기준을 파괴하며, 오직 원하면 한다는 식으로 자신들만의 의미화를 강요하고 있다. 특별한 범죄 동기도 없이 단지 내가 원하기에 한다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기만족 지상주의는 현정권의 추한 욕망의 얼굴과 너무도 닮았기에 내 생각의 타래가 연결된 것일 게다.

 

【『죄와 벌』 열린책들刊 ,890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니코프가 현장에서 노파 여동생과 마주치는 장면



인류의 고전이 된 죄와 벌은 가난하지만 도덕적, 지적 이해를 지닌 대학생의 전당포 노파 살인에 대한 양심적 고뇌의 심리적 혼란으로 단순히 해석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도 정욕과 쾌락의 화신인 스비드가일로프라는 괴물과 그리 멀리 떨어진 인물이 아니다. 노파 살해의 배경은 고리대금이라는 사회적 위악에 대한 도덕적 처벌이아니라, 인류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회도덕 기준을 언제든 파괴하고, 폭력과 살인도 저지를 권리와 의무가 자신과 같은 비범한 인간의 특권이라는 생각에서 자행된 것이다. 즉 이 세계는 자신과 같은 소수의 비범인(非凡人)과 대다수인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 복종하며 그저 세계를 보존하고 종족번식에 열중하는 범인(凡人)으로 이분되어 있다는 생각에 토대를 둔 실행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를 자신의 목적을 향해 이끌어 가기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감행할 수 있다는 믿음, 스비드가일로프의 내가 원하면 한다는 의미화의 독점적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도덕 초월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라스콜니코프나 스비드가일로프는 다른 인간이 아니다.

 

죄와 벌은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세계 현상에 대한 정의(定意)에 대한 독점, 즉 의미화의 독재에 대한 이 세계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소위 지식엘리트라는 이 괴이쩍은 언어의 발생부터 전문가라는 자본주의적 언어에 이르기까지 객관적 진리의 독재를 찬양하는 권력 지향적 욕구의 내재를 읽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세계에는 정말 실재라고 부르는 객관적 진리가 어딘가에 있기는 한 것인가? 그 고정되고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실재 말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변화도, 새로운 전환의 시도도 아무런 의미조차 지니지 못하는 극단적 보수의 세계, 고여서 썩은 내 진동하는 세계가 진리라는 말이 된다. 이 수구적 사유를 기초로 한 것이 오늘의 세계를 질서지우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토대이다.

 

비범인으로 자처하는 라스콜니코프의 초월적 도덕 규준화 능력, 내가 원하는 것이 곧 객관적 진리다라는 주장, 그래서 범인이라 일컬어지는 다수인 대중이 발하는 다채로운 욕망과 시선은 비범인이 정의내린 것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관료화된 편집증적 자동화 기계 주위를 맴도는 짓 이외에는 아무것도 시도할 자유가 없어진다. 라스콜니코프와 스비드가일로프 따위의 범죄자들, 또는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에서 조종사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비행조종술과 새로운 항공로 개척을 강행하는 사업지배인 뤼뷔에르와 같은 인물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생명을 인류라는 거대 집단의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괴물이 되는 이유이다.

 

인간의 대지에는 이러한 의미화를 누가 지니고 있는가라는 간접적 물음을 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곡괭이질이 있는 그곳이 반드시 죄인의 일터는 아니다. 행위 속에 추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일터는 의미 없는 곡괭이질을 하는 거기에...”

 

이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종처럼 부려진 사람들이 팠던 유정은 의미 없는 것이고, 우편물을 운송하는 야간비행 사업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의미는 과연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유정 파는 사람이?, 조종사가?, 유정 파는 종을 부리는 인간이?, 야간비행 사업의 지배인이? 다시말해 의미화의 부여는 권력자, 지적 엘리트가 하는 것이라는 권력지향적 욕망이 짙게 배어있는 문장인 것이다. 20세기 초 휩쓸던 영웅주의로 인해 부상했던 생텍쥐베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지독하게 대중의 순응성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집착하고 있는가의 한 반증일 것이다.

 

기표는 권력화된 기호작용이며, 기표는 권력의 논리의 결과물로서 고정관념인 것이다. 기표를 독점하고 다른 기의를 배제하는 폭력사회가 된 작금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끔찍한 참담함이다. 꿈과 욕망, 상상력과 비정형적 체계화되지 못한 무수히 다양한 대중의 지혜, 다수의 시선을, 다수의 의미를 공산전체주의?라는 해괴한 조어로 매도하며, 억압하고 배제하는 진정 미친 권력이 설쳐대는 현실이다. 새로운 세계로 개조하겠다는, 세계사적 역할을 이상으로 내걸고 실행한 살해가 라스콜니코프라는 인간에게 이성의 만족을 주었을까? 라는 점에 이르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허구요, 거짓이며, 기만임이 드러난다. 개인적 욕망의 실현이 사회적 이익의 충족이 되리라는 이 헛소리의 실체는 살인 이후 곧 바로 한 인간의 내적 불안과 고통의 문제로 적나라하게 그 위선의 실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마 현 정권에 기생하는 모리배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저지르고 있는 치밀하게 계산된 범죄 행위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성과 의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의심과 절망과 공포감을 오가는 심리적 곤혹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의미화라는 권력 행위를 통해 대중의 각성, 이를 독점한 독재 권력, 이에 기생하는 전문가라는 인간들의 내재적 한계를 생각하는 상념이었다. 이 세계는 주변부에 있는 다수의 연결로부터 발생하는 종합 지혜일 수밖에 없다. 이를 배제하려는 그 어떤 폭력적 권력도 이 세계의 풍부한 유의미화를 막아 설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작용들을 해석하고 환원하고 의미화하면서 권력 자신의 구성 모델로 쑤셔 넣으려는 전문가주의는 자기파멸의 내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길게는 3년 남짓, 어쩌면 극히 단축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는 결코 초월적 도덕률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필코 거룩한 매춘부 소냐와 같은 구원의 길 같은 것은 이젠 없음을, 오직 엄중한 단죄의 의식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의미화는 라스콜니코프식의 소수 비범인의 것이 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글에 삽입된 책 이미지들은 이 상념의 글과 관련되어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하긴, 비범인이란 것이 존재할 이유가 있긴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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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선자, 21세기 한국에 다시 출현한 타르튀프의 역겨움에 진저리치며

 

17세기 프랑스의 희극작가인 몰리에르(Moliere)가 발견 포착해 낸 타르튀프(La Tartuffe ou L'imposteur)의 그 야비하고 위선적인 인물이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사회에 격세유전(atavism)되어 출몰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 상류층의 자제로 성장했던 이 궁정좌파라 할 수 있는 장 바티스트 뽀끄랭(몰리에르의 본명; Jean Baptiste Poquelin, 1622.1.15.~1673.2.27.)’의 당대 귀족들과 부르주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선취한 리얼리즘 문학(희곡)이 자꾸 내 신경을 자극해 댔기에 몇 글자 남겨 놓기로 했다.


어쨌든 인간 세계에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망령으로 인해 고전의 지위를 지니게 된 문학작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귀족 오르공의 집에 식객으로 대접받고 있는 타르튀프란 인간이 있다. 이 인물에 대해 날카롭게 벼려진 판단력을 보이는 인물은 오르공의 딸 마리안느의 몸종인 도린느다. 도린느는 타르튀프를 이렇게 평가한다. 한 때 승승장구하다 그 매력을 상실한 바람둥이가 버림받음의 어두운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위장된 정숙, 청렴, 용기를 팔 수 밖에 없게 된 인간이라고. 사실 탄핵된 여인에게 팽 당했던 인물이 촛불정부에게 보였던 것이 이러한 순진무구로 가장된 권모술수였다. (제대로 된 사유하는 인간의 역을 하녀에게 부여한 몰리에르의 파격을 보라!)

 


오르공의 부인 엘미르의 오빠인 끌레앙뜨는 마치 21세기 한국사회에 등장한 이 괴물을 보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 눈짓과 꾸민 믿음으로 신용과 위엄을 사려고 하는 자, 일부러 신앙(정의)을 내세우는 꾸민 겉치레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뒤따라야 할 참된 신자는 뭐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고. 천박하고 저열한 인간 하나를 마치 새로운 정의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미디어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철없는 대중들과 세상이 떠들썩하게 했나를 떠올려본다. 그 자와 태극기 부대가 법석을 떨어댈 때, 이미 그 가면을 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 가장된 얼굴 이면의 민낯을 볼 생각들을 하지 못했던 것일 게다.

 

사실 이 비열함과 악덕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 자신의 입신과 재화에 대한 탐욕을 위해 온통 꾸며진 행위로 위장한 인간, 이 위선의 기형적 인간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이 자가 설쳐댈 수 있게 된 근간, 이 자가 활개 칠 수 있는 토대가 된 동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로 위선과 진실(정의)을 구별 할 줄 모르는 맹목의 구정물에 깊숙이 빠져들어 사리분별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바로 이런 사기꾼의 비옥한 토양이다. 오르공이란 인물과 이 자의 어머니인 뻬르넬르 부인이란 인물은 사실을 직접 겪은 자들의 증언조차 부인하며, 편협과 왜곡된 자기 인식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기실 자기 아내인 엘미르의 육체를 탐하고, 자신을 봉 취급함에도, 이를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모든 이들이 자기가 신뢰하는 괴물을 모함하는 것이라 외면한다. 그리곤 전 재산을 증여하는 계약까지 하여 넘겨주기에 이른다. 마치 오늘 자신들이 선출해 놓은 자에게 모두 털려나가는 꼴이 오르공과 뻬르넬르 모자와 지나치게 닮았다. 집달리가 달려와 오르공 일족에게 집을 비우라는 명령이 잇따르고, 급기야 모반죄로 몰려, 끌려 갈 지경에까지 이른다. 17세기 극()이니 수호신처럼 지상대권(地上大權)이란 것이 발동되어 이 사기꾼의 죄를 인식하여 오르공 일가는 재산을 수호하고, 인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만, 21세기 오늘의 한국에는 이 같은 기적이 발생할 여지도 없거니와 잃어버린 것들을 일시에 원상회복하는 길도 없다.

 

도금한 금빛에 눈이 멀어, 집단적 맹목에 휘둘리고, 그 가짜 금에게 자발적 복종으로 달려 간 우중의 시선이란 것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오르공, 뻬르넬르. 진실과 외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 영원한 어리석음들이 여전히 자기 목줄을 쥔 개장수의 손을 핥아대고 있다. 곧 삶이란 것과 이별 할 줄 모르는 이 불구의 무지. 타르튀프에게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맹목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오늘은 이 세계 밖에서 내려 올 신성한 구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혐오스러운 두 유형의 인간을 당대 귀족사회로부터 포착해 낸 한 위대한 연극인이자 문학인의 발견이 동양의 한 지역에서 4세기 후에 다시 회자되는 것을 안다면 대체 무어라 할까? 끈질기게 배우려하지 않는 이 외면의 의지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이 희곡은 1664512일 베르사유 궁정 축제일에 3막으로 초연 되었으나, 파렴치한 작품이라 바로 공연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667년 개작하여 재연했으나 또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오늘 우리네가 읽는 희곡은 5막으로 개작되어 1669년 이후 공연된 것이라 하니, 사실 초연되었던 희곡의 그 신랄했을 풍자와 비판이 상상된다. 사이비 정의, 거짓된 공정의 가면이 판치는 악이 횡행하는 사회를 자처한 그 우민의 세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만의 옹알이다. 타르튀프들이 원하는 빛깔로 물들인다고 이 사회가 이것들의 행동을 용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타프튀프의 헛된 망상을, 깨어난 오르공들이 처단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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