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진리 있음을 표현하는 ‘~은 ~이다.’ 라는 이 단순한 명제, 이 명제를 누가 의미화 하는가? 어쩌면 이 단칭명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세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식별하고 지각하며 설명하려는 욕망 모두를 번역하고 해석하려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의미화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집단 혹은 무리는 소위 전문가라 자칭하는 인간들(과학자, 철학자 등등)과 권력자다. 이 전문가, 지식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모델 하에서 지식권력을 행사하며, 이 세계의 다양한 기호작용들을 의미화하고 구조화하여 그 모델에 쑤셔넣고 객관적 진리라고 선언한다.
그리곤 이 선언된 단칭명제들을 위반하는 ‘A일수도, B일수도 있다’라는 명제를 말하는 순간 배제와 폭력의 세례를 받게 되며, 비도덕적 언어가 수반되어 불온하거나 망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매장되어 버린다. 기표의 의미화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차지한 전문가와 권력자 집단은 이렇게 세계 모든 현상을 이분법에 의해 정의하고 단정하여 자신들의 지배기득권을 영속화한다. 이것이 인류의 오랜 역사이다. 즉 ‘~은 ~이다.’라는 자신들이 정의내린 준거 기준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비이성으로 식별되어 비정상성의 광기로 분류하여 제거되고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적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실제의 현상 속에서 인간들은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인간 삶 속에서 실현하겠다는 세계를 펼치겠다고 한다. 때문에 각각의 차이 나는 모든 존재에게 세계의 구성능력이 내재해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기반으로하는 민주주의 사상은 끊임없이 충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들 준거집단을 내세우는 전문가 집단의 모순이 발생시키는 도전의 직면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문화, 생활방식, 환경적 배치와 조건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무수하게 다양한 세계상과 지식 형태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임에도 이들 여지를 부인하고 억압하는 의미화라는 권력의 단정적 고정성으로 새로움, 낯섦과 같은 이질성에게 죽음을 명령한다.
의미화의 이러한 독재적 권력에 대한 의문은 내 생각을 널뛰게 만들었는데, 기표독점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내가 원하므로 한다.’는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을 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 필타를 학대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며, 어린 소녀를 능욕하며 아무런 죄의식도, 도덕률도 없는, 그저 내가 원하면 한다는 개인적 욕망과 이익의 극단적 추구, 쾌락의 만족을 통한 자기 존재 확인에 몰두하는 인간을 연상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스비드리가일로프들이 기존의 모든 사회적 기준을 파괴하며, 오직 원하면 한다는 식으로 자신들만의 의미화를 강요하고 있다. 특별한 범죄 동기도 없이 단지 내가 원하기에 한다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기만족 지상주의는 현정권의 추한 욕망의 얼굴과 너무도 닮았기에 내 생각의 타래가 연결된 것일 게다.
【『죄와 벌』 열린책들刊 ,890쪽,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니코프가 현장에서 노파 여동생과 마주치는 장면】
인류의 고전이 된 『죄와 벌』은 가난하지만 도덕적, 지적 이해를 지닌 대학생의 전당포 노파 살인에 대한 양심적 고뇌의 심리적 혼란으로 단순히 해석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도 정욕과 쾌락의 화신인 스비드가일로프라는 괴물과 그리 멀리 떨어진 인물이 아니다. 노파 살해의 배경은 고리대금이라는 사회적 위악에 대한 도덕적 처벌이아니라, 인류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회도덕 기준을 언제든 파괴하고, 폭력과 살인도 저지를 권리와 의무가 자신과 같은 비범한 인간의 특권이라는 생각에서 자행된 것이다. 즉 이 세계는 자신과 같은 소수의 비범인(非凡人)과 대다수인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 복종하며 그저 세계를 보존하고 종족번식에 열중하는 범인(凡人)으로 이분되어 있다는 생각에 토대를 둔 실행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를 자신의 목적을 향해 이끌어 가기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감행할 수 있다는 믿음, 스비드가일로프의 내가 원하면 한다는 의미화의 독점적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도덕 초월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라스콜니코프나 스비드가일로프는 다른 인간이 아니다.
『죄와 벌』은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세계 현상에 대한 정의(定意)에 대한 독점, 즉 의미화의 독재에 대한 이 세계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소위 지식엘리트라는 이 괴이쩍은 언어의 발생부터 전문가라는 자본주의적 언어에 이르기까지 객관적 진리의 독재를 찬양하는 권력 지향적 욕구의 내재를 읽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세계에는 정말 ‘실재’라고 부르는 객관적 진리가 어딘가에 있기는 한 것인가? 그 고정되고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실재 말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변화도, 새로운 전환의 시도도 아무런 의미조차 지니지 못하는 극단적 보수의 세계, 고여서 썩은 내 진동하는 세계가 진리라는 말이 된다. 이 수구적 사유를 기초로 한 것이 오늘의 세계를 질서지우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토대이다.
비범인으로 자처하는 라스콜니코프의 초월적 도덕 규준화 능력, 내가 원하는 것이 곧 객관적 진리다라는 주장, 그래서 범인이라 일컬어지는 다수인 대중이 발하는 다채로운 욕망과 시선은 비범인이 정의내린 것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관료화된 편집증적 자동화 기계 주위를 맴도는 짓 이외에는 아무것도 시도할 자유가 없어진다. 라스콜니코프와 스비드가일로프 따위의 범죄자들, 또는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에서 조종사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비행조종술과 새로운 항공로 개척을 강행하는 사업지배인 뤼뷔에르와 같은 인물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생명을 인류라는 거대 집단의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괴물이 되는 이유이다.
『인간의 대지』에는 이러한 의미화를 누가 지니고 있는가라는 간접적 물음을 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곡괭이질이 있는 그곳이 반드시 죄인의 일터는 아니다. 행위 속에 추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일터는 ‘의미 없는 곡괭이질’을 하는 거기에...”
이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종처럼 부려진 사람들이 팠던 유정은 의미 없는 것이고, 우편물을 운송하는 야간비행 사업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의미는 과연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유정 파는 사람이?, 조종사가?, 유정 파는 종을 부리는 인간이?, 야간비행 사업의 지배인이? 다시말해 의미화의 부여는 권력자, 지적 엘리트가 하는 것이라는 권력지향적 욕망이 짙게 배어있는 문장인 것이다. 20세기 초 휩쓸던 영웅주의로 인해 부상했던 생텍쥐베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지독하게 대중의 순응성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집착하고 있는가의 한 반증일 것이다.
기표는 권력화된 기호작용이며, 기표는 권력의 논리의 결과물로서 고정관념인 것이다. 기표를 독점하고 다른 기의를 배제하는 폭력사회가 된 작금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끔찍한 참담함이다. 꿈과 욕망, 상상력과 비정형적 체계화되지 못한 무수히 다양한 대중의 지혜, 다수의 시선을, 다수의 의미를 공산전체주의?라는 해괴한 조어로 매도하며, 억압하고 배제하는 진정 미친 권력이 설쳐대는 현실이다. 새로운 세계로 개조하겠다는, 세계사적 역할을 이상으로 내걸고 실행한 살해가 라스콜니코프라는 인간에게 이성의 만족을 주었을까? 라는 점에 이르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허구요, 거짓이며, 기만임이 드러난다. 개인적 욕망의 실현이 사회적 이익의 충족이 되리라는 이 헛소리의 실체는 살인 이후 곧 바로 한 인간의 내적 불안과 고통의 문제로 적나라하게 그 위선의 실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마 현 정권에 기생하는 모리배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저지르고 있는 치밀하게 계산된 범죄 행위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성과 의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의심과 절망과 공포감을 오가는 심리적 곤혹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의미화라는 권력 행위를 통해 대중의 각성, 이를 독점한 독재 권력, 이에 기생하는 전문가라는 인간들의 내재적 한계를 생각하는 상념이었다. 이 세계는 주변부에 있는 다수의 연결로부터 발생하는 종합 지혜일 수밖에 없다. 이를 배제하려는 그 어떤 폭력적 권력도 이 세계의 풍부한 유의미화를 막아 설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작용들을 해석하고 환원하고 의미화하면서 권력 자신의 구성 모델로 쑤셔 넣으려는 전문가주의는 자기파멸의 내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길게는 3년 남짓, 어쩌면 극히 단축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는 결코 초월적 도덕률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필코 거룩한 매춘부 소냐와 같은 구원의 길 같은 것은 이젠 없음을, 오직 엄중한 단죄의 의식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의미화는 라스콜니코프식의 소수 비범인의 것이 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글에 삽입된 책 이미지들은 이 상념의 글과 관련되어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하긴, 비범인이란 것이 존재할 이유가 있긴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