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선자, 21세기 한국에 다시 출현한 타르튀프의 역겨움에 진저리치며

 

17세기 프랑스의 희극작가인 몰리에르(Moliere)가 발견 포착해 낸 타르튀프(La Tartuffe ou L'imposteur)의 그 야비하고 위선적인 인물이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사회에 격세유전(atavism)되어 출몰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 상류층의 자제로 성장했던 이 궁정좌파라 할 수 있는 장 바티스트 뽀끄랭(몰리에르의 본명; Jean Baptiste Poquelin, 1622.1.15.~1673.2.27.)’의 당대 귀족들과 부르주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선취한 리얼리즘 문학(희곡)이 자꾸 내 신경을 자극해 댔기에 몇 글자 남겨 놓기로 했다.


어쨌든 인간 세계에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망령으로 인해 고전의 지위를 지니게 된 문학작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귀족 오르공의 집에 식객으로 대접받고 있는 타르튀프란 인간이 있다. 이 인물에 대해 날카롭게 벼려진 판단력을 보이는 인물은 오르공의 딸 마리안느의 몸종인 도린느다. 도린느는 타르튀프를 이렇게 평가한다. 한 때 승승장구하다 그 매력을 상실한 바람둥이가 버림받음의 어두운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위장된 정숙, 청렴, 용기를 팔 수 밖에 없게 된 인간이라고. 사실 탄핵된 여인에게 팽 당했던 인물이 촛불정부에게 보였던 것이 이러한 순진무구로 가장된 권모술수였다. (제대로 된 사유하는 인간의 역을 하녀에게 부여한 몰리에르의 파격을 보라!)

 


오르공의 부인 엘미르의 오빠인 끌레앙뜨는 마치 21세기 한국사회에 등장한 이 괴물을 보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 눈짓과 꾸민 믿음으로 신용과 위엄을 사려고 하는 자, 일부러 신앙(정의)을 내세우는 꾸민 겉치레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뒤따라야 할 참된 신자는 뭐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고. 천박하고 저열한 인간 하나를 마치 새로운 정의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미디어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철없는 대중들과 세상이 떠들썩하게 했나를 떠올려본다. 그 자와 태극기 부대가 법석을 떨어댈 때, 이미 그 가면을 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 가장된 얼굴 이면의 민낯을 볼 생각들을 하지 못했던 것일 게다.

 

사실 이 비열함과 악덕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 자신의 입신과 재화에 대한 탐욕을 위해 온통 꾸며진 행위로 위장한 인간, 이 위선의 기형적 인간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이 자가 설쳐댈 수 있게 된 근간, 이 자가 활개 칠 수 있는 토대가 된 동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로 위선과 진실(정의)을 구별 할 줄 모르는 맹목의 구정물에 깊숙이 빠져들어 사리분별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바로 이런 사기꾼의 비옥한 토양이다. 오르공이란 인물과 이 자의 어머니인 뻬르넬르 부인이란 인물은 사실을 직접 겪은 자들의 증언조차 부인하며, 편협과 왜곡된 자기 인식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기실 자기 아내인 엘미르의 육체를 탐하고, 자신을 봉 취급함에도, 이를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모든 이들이 자기가 신뢰하는 괴물을 모함하는 것이라 외면한다. 그리곤 전 재산을 증여하는 계약까지 하여 넘겨주기에 이른다. 마치 오늘 자신들이 선출해 놓은 자에게 모두 털려나가는 꼴이 오르공과 뻬르넬르 모자와 지나치게 닮았다. 집달리가 달려와 오르공 일족에게 집을 비우라는 명령이 잇따르고, 급기야 모반죄로 몰려, 끌려 갈 지경에까지 이른다. 17세기 극()이니 수호신처럼 지상대권(地上大權)이란 것이 발동되어 이 사기꾼의 죄를 인식하여 오르공 일가는 재산을 수호하고, 인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만, 21세기 오늘의 한국에는 이 같은 기적이 발생할 여지도 없거니와 잃어버린 것들을 일시에 원상회복하는 길도 없다.

 

도금한 금빛에 눈이 멀어, 집단적 맹목에 휘둘리고, 그 가짜 금에게 자발적 복종으로 달려 간 우중의 시선이란 것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오르공, 뻬르넬르. 진실과 외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 영원한 어리석음들이 여전히 자기 목줄을 쥔 개장수의 손을 핥아대고 있다. 곧 삶이란 것과 이별 할 줄 모르는 이 불구의 무지. 타르튀프에게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맹목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오늘은 이 세계 밖에서 내려 올 신성한 구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혐오스러운 두 유형의 인간을 당대 귀족사회로부터 포착해 낸 한 위대한 연극인이자 문학인의 발견이 동양의 한 지역에서 4세기 후에 다시 회자되는 것을 안다면 대체 무어라 할까? 끈질기게 배우려하지 않는 이 외면의 의지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이 희곡은 1664512일 베르사유 궁정 축제일에 3막으로 초연 되었으나, 파렴치한 작품이라 바로 공연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667년 개작하여 재연했으나 또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오늘 우리네가 읽는 희곡은 5막으로 개작되어 1669년 이후 공연된 것이라 하니, 사실 초연되었던 희곡의 그 신랄했을 풍자와 비판이 상상된다. 사이비 정의, 거짓된 공정의 가면이 판치는 악이 횡행하는 사회를 자처한 그 우민의 세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만의 옹알이다. 타르튀프들이 원하는 빛깔로 물들인다고 이 사회가 이것들의 행동을 용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타프튀프의 헛된 망상을, 깨어난 오르공들이 처단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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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독서는 소설문학 읽기가 될 것 같다. 한국 문학으로 서윤빈의 날개 절제술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두 권의 소설과 길 위에 찬사를보낸다는 허연 시집 불온한 검은 피, 그리고 해외문학으로 국내 독자들의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감상을 보이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Ⅱ』,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옛 감성이 떠올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푸시킨의 시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에 이은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이렇게 오직 문학에만 잠겨볼 예정이다.

 

 

한 권 예외로 역사서를 사두었는데, 문학만을 읽다 이야기들에 권태가 느껴질 때, 조금씩 펼쳐 읽기 시작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하이켈하임 로마사로마사를 서술한 책 중 그나마 가장 분량이 적은 책이면서, 알차게 저술된 책이어서 선택한 역사서다. 저자인 토론토그리스 로마사 교수였던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이 생전에 출간한 단 2 권의 책 중 하나이다. 고밀도로 응축된 내용들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1,000페이지이니 매일 짬짬이 30페이지씩 읽으면 한 달에 읽어낼 수 있으리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은 도입부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이다. 내처 읽게하는 어떤 의욕이 갑작스레 식었기 때문인데, 아마 다른 책들을 모두 읽고나면 새롭게 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서윤빈의 소설집 날개 절제술은 표제작보다는 단편 리튬에서 내 눈이 밝아졌는데, 주인공의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과학적 논리, 즉 전자제품의 고장 수리에 동원되는 원인추구 접근 방식과 그의 훼손된 인간관계가 대비되어, 또 하나의 현대적 인간상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아무튼 천천히 그리고 세심히 읽어봐야겠다. 허연의 시집은 출판사가 일종의 리바이벌을 노려 재출간한 것 같은데, 작고한 손상기 화백에 대한 몇 몇 시(), 시집을 가득 채우는 비애(悲哀)의 유혹이었다고 해야 할까?

 

다섯 권의 해외문학 중 정작 의욕이 집중된 책은 중국 소설가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이다. 장웨이의 책은 3편의 중편 혹은 경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어신을 찾아서는 순박한 인물들과 자연을 배경으로 동화적 주제를 펼치고 있어 모처럼 긴장을 놓은 채 글 속으로 빠져드는 평온함이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무거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 무엇보다도 이야기 구조와 언어에서 무게를 제거하고 싶었다.(81)”라며, 다가오는 새 천년(21~29세기)의 문학의 특질에 대한 문학론을 여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책의 옹색한 외장편집과는 달리, 문학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시선을 전해준다. 아무래도 내 것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몇 차례 반복 읽기의 과정을 통해야 할 것 같다.

 

철지난 낭만적 서정시인 푸시킨의 시집은 가끔씩 건조해진 마음을 달랠 때 읽으려 구입 한 것인데, 내 감성이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욘포세의 소설은 무려 100여 쪽을 읽어나갔으나, 하나의 진전된 문장을 더하기 위해 그 반복되고 반복되는 동일 문장들의 누적을 읽는 것은 정말 지루한 인내를 요구하는 듯하다. 아무튼 이 정도의 인내 끝에 무엇이 있는지 더 나가 봐야할 터.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은 이미 모두 갖고 있는데, 새로운 장정의 유혹에 못 이겨 인간 생애의 절대 주제인 사랑의 기억을 얘기하는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The Only Story)에서 고통과 매혹을 느끼게 될까?

 

11월은 어쨌든 내겐 문학을 읽는 달이 되었다. 아마 잠시만이라도 퇴행의 멍청한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혼란한 마음이 진정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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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하게 걷는 자는 인간의 품위를 고수하는 자이다.”

- Ernst Bloch

 

 

비굴함은 비열함과 절대적 어리석음이라는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인간 앞에 납작 엎드리거나 허리를 스마트폰의 폴더처럼 구부리며 자신은 결단코 충성하리라는, 절대 굴복하리라는 맹세를 보이는 의례로서의 행위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니고서는 ()-맹세가 은폐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굴종적 몸짓은 배신이 내재된 것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이 가려진 비굴의 울분을 해소할 다른 창구를 필히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비굴함은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시선을 돌려 동일한 비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적 태도로 드러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해코지,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비굴함의 비열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러한 상관관계는 익히 알려진 것이어서 엔간한 지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행위의 위선적인 비윤리성의 의례를 페기하거나 극도로 약화시켜 수직적 인간관계의 부정적 연쇄 고리를 차단합니다. 실제 많은 공적 의례 행사에서 이러한 행태는 사라지거나 대폭 완화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레 이 열등하고 천박한 행태가 공공의 유선망을 타고 뉴스라는 형식을 통해 안방으로 송출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쩍 벌린 다리를 하고 오만하게 한 손으로 임명장을 내미는 자 앞에는 연신 일백 십도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한 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노예 행위이며, 노예는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힙니다.”라고 했습니다.

 

블로흐는 당당하게 서있는 자, 의연하게 걷는 자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저술에서 자연법의 근본적 목표는 인간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품위임을 밝힙니다. 이 경박하고 비윤리적이기 까지 한 몸짓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입니다. 즉 이 천하디 천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굴종의 몸짓은 이 사회의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추한 전경을 수용자가 무감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새겨 넣으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별 신체까지 지배하려는 것이지요.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작품인 간계와 사랑에는 이러한 굴종이 지배할 때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굴종의 의례는 항상 폭력을 수반합니다.

 

자애로우신 우리 영주께서는 모든 연대를 사열식장에 집합시키고, 멍하니 

바라보던 얼간이 녀석을 쏘아 죽이라고 명하셨죠.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고...”


인간이 인간의 품위, 존엄성을 지키는 곧은 자세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행위의 조건을 멸실하려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천박한 의도이지요. 즉 시민 대중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방자하고 교만한 권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방송의 통제, 문화 전반에 대한 획일적 가치 설정 등을 통해 수구적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쪽이라는 동일 영토 내에 사는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동일한 시간대를 사는 것은 아닌 것이죠.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른 여러 세대들이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은 오로지 개인 자신이 겪은 것에 의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적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굴종의 위선적 몸짓이 가진 위선과 교활성, 폭력성이라는 퇴행적 과거의 시간에 머무는 작금의 수구 인간들이 있는가하면 가상의 기술사회가 지배하는 저만치 미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여전히 대도시 노동자들과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세계관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랜 역사의 시간 내내 가부장적 권위시대를 살았던 지역에는 지금에도 가문의 계층을 따지며 인간을 구별하고 권위를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지독히 전근대적인 시간이 그곳에서는 21세기에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질적 구조의 이러한 기이한 공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블로흐가 개념화 한 것입니다.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간의 실천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의 동경으로 시간적 역진을 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몇몇 젊은 시인의 시집에서 의 존재에 대한 저주를 보고 당황하곤 했습니다. 그네들은 존재하는 질서의 무수한 모순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며,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설계하는 꿈이란 역사를 초월, 일탈하는 현실성 없으며 추상적인 피안에 대한 망상이라 폐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내재된 이상을 향한 욕구인 인간적 의지의 지향성을 애초에 싹부터 잘라내 버리려는 것이죠. 즉 유토피아를 한낱 사라져버릴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실재하는 사회의 문제점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순응하고 복종해라,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꿈이란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리고 약한 자에게 동일하게 요구하라! 절대 머리를 치켜들고 의연하게 걷지 마라. 그러면 검찰로부터 끊임없는 압수와 수색, 기소로 고통받고 급기야 감금 너의 인신을 구속하겠노라는 것이죠.

 

터무니없이 천박한 것들, 과거의 시간 속 망령들이 돌아와 설쳐대고 있습니다. 하나의 구역질나는 장면이 이 글을 쓰게 했네요. 꿈과 희망을 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를 막아서는 모든 것들에 맞서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사회에 박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남겨준 프랑스 대혁명 조차도 에드먼드 버크 같은 수구적 인간들은 시민들을 향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이라 했습니다. 바로 동시대를 사는 비동시성의 퇴행하는 역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있어왔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는 사회는 권위와 독재가 활개치는 인간 굴종의 세상입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사라진 사회는 사회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지옥입니다. 품위있는 인간 존엄의 삶을 살 것이냐, 복종하는 노예의 삶을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결코 타인에게 이를 요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의연한 걸음은 만인의 당당한 저항의 자세입니다.”, 이를 저버리면 교활과 위선, 폭력과 굴종이 지배하는 세계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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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1) 에른스트 블로흐 ,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2011, 열린책들

2) 박설호 , 꿈과 저항을 위하여-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2011울력

3) 프리드리히 폰 실러 , 간계와 사랑, 빌헬름 텔201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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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괄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어리석은 기획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관된 지점이나 혹은 통일된 영역으로 집합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변화무쌍한 인간사의 반영이기 때문일 테지요. 1920~30년대 재즈(Jazz)시대를 상징하는 소설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장편과 단편소설 등 대표작들과 몇몇 에세이, 그리고 출판인, 작가들과의 서신, 아내 젤더와 딸 스코티에게 보내는 편지로 엮인 이 우아한 판본 디 에센셜 F.스콧 피츠제럴드은 그러함에도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다 친밀하게 다가가게 함으로써 분명 새로운 읽기, 무수한 지층으로 이루어진 소설 속에서 다른 지층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1896.9.24~1940.12.21]


무엇보다 미국문학의 영원한 고전으로 불리는 위대한 개츠비를 수록된 에세이 명사록과 그 이유, 피츠제럴드씨와 인터뷰를 비롯하여, 이 작품의 퇴고와 출판의 과정을 같이했던 스크리브너스의 수석 편집자인 맥스웰 퍼킨스와 주고받은 편지는 익히 알려진 독해와 다른 새로운 층위를 통한 읽기의 가능성을 시사(示唆)합니다. 퍼킨스는 스콧 제럴드에게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져 좋은작품이라고 작가를 격려하며 시작되는 편지에서 소설에서 개츠비 이상의 비중을 지닌 화자인 닉 캐러웨이 방관자에 가까운서술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한 것을 칭찬합니다. 이 소설에서 인간 조건의 이질성을 강렬하게 느낄 수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설정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실 제 독서의 관점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요, 저는 오히려 개츠비는 화자인 닉의 정신사(精神史)적 성장의 기록으로 읽었다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개츠비와 데이지, 톰 뷰캐넌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세계에 대한 믿음의 변화, 인간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닉의 조연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데이지의 바람둥이 남편 톰의 부도덕한 불륜 관계를 위해 지나다닐 때,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모습의 에클버그 안과의사의 커다란 광고판은 소설이 지향하는 주제와 어울려 기막힌 예술적 장치가 되어 인간들의 행위를 목격합니다.

 

소설 말미에 닉이 개츠비의 삶에 대해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으면서 물질적 흥청거림이 휩쓸던 세계를 멀찍하게 떨어져서 바라봄으로써 알아차리지 못했던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한 발설로 다가옵니다. 아마 이 판본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작품에 새로운 절단면을 통해 읽어본다면 아주 색다른 감상을 맛보는 기회가 되어 주리라 생각됩니다.

 

유리그릇을 두 팔로 안은 채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땅 아래로...”

- 단편 컷글라스 그릇에서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 또한 피츠 제럴드의 인간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주제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컷글라스 그릇의 주인공인 이블린 파이퍼의 삶과 그녀의 결혼 선물로 주방 선반을 장식하는 당시 중산층의 과시적 물질로 유행하던 컷글라스의 운명이 은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 욕망의 퇴락과 끔찍한 파괴로 이어지는 결말은 시시껄렁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꽤나 강렬한 전율을, 깊은 인상이 각인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비롯한 리츠 호텔만한 다아아몬드등 꽤 알려진 단편 작품들이 이 판본을 더욱 알차게 만들어줍니다. 독서 애호가들의 한동안의 즐거움을 담지(擔持)할 구성입니다.

 

수록된 각기 다섯 편의 에세이와 서신들 중에서 재즈 시대의 메아리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식을 제공함과 더불어 에세이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감각을 느끼게 해줍니다. 모든 것이 낭만적 장밋빛으로 보이던 지나가버린 젊은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그 시절만큼 강렬했던 적이 두 번 다시 돌아 올 수 없음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감정,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숙성함의 시큰거림이 느껴집니다. 출판사에서 되돌아 온 122개의 거절 쪽지들이 붙어있는 냉장고, 30달러를 받고 단편 소설 한 편을 팔던 소설가가 드디어 장편 낙원의 이쪽출간 연락 소식을 받고 , 어느덧 이러한 일들이 모두 어떻게 일어났는지 의아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 얄궂은 제목의 에세이 명사록과 그 이유에서 피츠 제럴드는 이렇게 맺습니다.  이게 전부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작가들의 가장 좋은 방법을 간절히 쫓는 문학적 도둑이라고 공언하는 한 작가의 진솔한 세계를 거닐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기 성찰에 철저했던, 그럼에도 저는 사춘기 에고티즘의 다양한 바다에서 수영해왔다.”며 겸허와 경험의 노력에 헌신했음을 자부하는 긍지의 작가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젊음과 사랑, 그리고 광활한 인간사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 피츠제럴드를 꺼내 읽어질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이 다채로운 구성의 판본은 그 유용을 밝힐 것이라 생각됩니다. 뜨거웠던 계절이 전락하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입니다. 피츠제럴드를 읽는 계절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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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위상학 - 전우치전과 홍길동전, 정치와 통치에 대해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이진경이 쓴 한국 고전 소설들에 자리를 할당한 척도를 깨기 위해,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고자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파격(破格)의 고전을 읽어나가다  변신의 위상학을 설명하는 <전우치전><홍길동전>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소회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 충동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변신술이 목적하는 바의 천박한 욕망,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지 않고 고작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에 얻고자하는 욕망임을 보았기 때문인데, 바로 성공을 추구하는 자의 냉혹한 합목적성,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피와 죽음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결여된 것에 사로잡힌 자의 체제 내적 욕망(173)이 풍기는 악취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고닦은 도술이 합목적적 도구가 되는 순간, 세상사를 자신의 목적 아래 복속시키는 무서운 수단으로 변질 악용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일개 검사가 정치검사가 되어 한 국가의 수반이 되자 검사로써 배운 압수, 수색, 기소라는 술책이 만능의 도구인 듯 휘두르는 모습에서 동일한 종류의 인간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홍길동 같은 인물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읽을수록 멀리하고 싶은 인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 책의 집필시기의 판단은 성급했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조의 소설들에는 한결같이 여러 유형의 변신술 또는 도술이 등장한다. 이 변신술이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인간화된 도술이 있는가하면, 본질적으로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도 있으며, 물질성 그 자체와 결부된 힘을 지닌 <금방울전>의 금방울처럼 물질성의 도술도 있다. 그리고 동물적 기원의 변신에 있어서도 그것들은 또다시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수재의 에피소드인 <왕수재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흐트러뜨리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치안(治安)의 변신이 있는가하면, <전우치전>처럼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의 손안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치안, 통치를 희롱하고 할당된 자리를 벗어나 사용됨으로써 정치(政治)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온전히 인간적 도술을 부리는 <박씨부인전>이나 <홍길동전>은 전자의 경우 경계를 확고히 하여 지배적 가치(統治)를 지키려고 사용되며, 후자의 경우는 서자 자리로부터 이탈의 욕망이라는 표면적 저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홍길동의 경계 이탈은 지배가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단지 자기 결여에 대한 반항이고 경계, 즉 체제 내적 욕망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사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추한 사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같은 변신술이라도 그 안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데, 그들이 서있는 지점과 문제화하려는 의도, 사용 목적에 따라 극히 상반되거나 다른 사회적 영향을 낳는다.

 

<전우치전>의 개략적 이야기로 시작하자. 여우의 호정(여우의 넋)’을 빼앗아 먹음으로써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전우치가 여우의 굴에 가서 천서 세 권을 얻었으나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글이라 구미호를 앉혀 놓고 상권(세 권 중 한 권)을 배워 통달하여 도술을 획득한다, 즉 동물적 기원을 갖는 변신술의 능력으로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새로운 술법을 부려 인간 세계 안에 이러저러한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 시킨다. 즉 그는 권력에 반하는 유희를 행하면서 거만한 관리나 잘난 체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한 인간들을 참지 못하고 엿을 먹인다. 더구나 전우치는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의 변신술을 통해서 소위 속세의 권력이나 재화 등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국가나 통치자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희롱하며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노리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는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구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통치를 비판하는 정치라는 새로움, 민중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대 조선의 양반들은 전우치전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는지 <전우치 한문본>을 새로이 써서 ()-전우치라는 기치 하에 완전히 반대되는, 다시말해 전우치를 윤리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인물로 규정해 버린다. 한문본의 유치찬란함이란!  전우치가 천서(天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대부들은 전우치 혼자 읽고 깨우치는 걸로 씀으로써 자신들의 우매함이 드러난 것을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직 도달 할 수 없는 아득한 깊이와 거리 저편에 있는 자연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한문본은 서화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우치가 제압당하는 걸로 종결하여 기성 권력이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서화담이 전우치를 위협하는 문장은 정말 가관이 아닌데, 앞으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며....만일 내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며 너 같은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사회와 격리된 깊은 산속이어야 하며, ‘자리를 이탈하면 죽여버리겠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통치질서에 저항하지 말고 쭈그리고 없는 듯 살라는 말이다.

 

로버트 단턴이 쓴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인 고양이 대학살에 소개되는 인쇄공들 그들만의 문화 주제를 가지로 유희를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하던 그 정치적 이벤트를 떠오르게 한다. 시공을 달리하면서 동서의 민중들은 불의와 부당함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며, 항시 이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폭력과 마주했다. 2023년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유머와 가벼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상극, 대립에 있는 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우치와 달리 인간의 관념을 벗어난 세계로부터의 기원이 아닌, 지극히 인간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구상된 주역을 읽고 도술을 익힌다. 홍길동은 기존 세계, 즉 체제 내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란 뜻이다. 홍길동의 도술은 전우치의 기성 권력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 임금에게 알리려는 과시적 목적의 사용이다. 신의 이름을 드러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홍길동의 말처럼 그의 변신술은 명확한 목적에 의한 기만과 공격일 뿐이다.

 

성공을 추구하는 냉혹한 합목적성, 국가나 통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변신술이다. 단지 버림받은 처지의 원한을 호소하며 통치 권력이 자신을 포섭해 주길 욕망하는 사술이다.  때문에 홍길동의 반란과 공격은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즉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권력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임금이 병조판서에 제수한다고 하자마자 냉큼 궁궐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은 고작 권력에서 배제된 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난리를 부린 것,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는, 이미 국가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결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할 의지도 없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를 얻으려 했을 뿐인 에고이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지금 날뛰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이며 이의 정체적 상징인 국민이 주권의 소지자라는 헌법 질서를 부인하는 관료가 설처대고 있다. 도구적 도술, 도구적 변신으로 권력만을 탐하려는, 자리를 얻어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만이 득시글댄다. 국가와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말해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가 실종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치는 다름을 통합하는 기술의 장()이다. 다름을 폭력의 대상으로 적대화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 통치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정치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질서의 경계를 확정지어 기성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수구적 태도가 <홍길동전>과 유사한 소설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박씨부인전>이 있다. 인간적 도술에 기초한다는 측면에서도 홍길동의 도술과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술책을 쓰는 별당 아씨 박씨부인은 초월적 예견력을 발휘하여 시댁의 부를 늘리고, 국가의 위난에 대비하는 등 가족과 국가질서의 굳건한 주체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늘 패하고 상상 속에서만 승리한다.

 

철학자 이진경이 지적하듯 일종의 루쉰 식 정신 승리법에 도취한 인물이다. 현실적 패배는 눈앞에 지워버림으로써 패배의 이유를 묻지 않게 되므로 계속해서 패배하게 된다.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영원히 그 패배에 달라붙은 불모의 지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출구는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금의 정권처럼 재난은 반복된다. 책임을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책임은 또다른 재난을 계속 반복할 것이고, 그것은 민중이 고통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승리적 관점만을 취하려는 이 몽매함, 정신승리법! 에 도취된 권력을 지닌 국민은 고달프다. 통치에 대항하는 전우치의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읽기위해 한문본 전우치가 아니라 경판본 37장을 계열로 하는 한글 전우치전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기성의 평가의 척도를 깨부수고 기존의 틀과 대결하는 파격(破格)‘을 알려주는 고전소설을 새로운 절단면을 내서 읽도록 견인하는 이진경(박태호)교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파격의 고전, “확립된 평가의 틀 안에 이질적 기준을 밀어넣어 새로운 감응을 만들어내는 이 책을 마구 선전해도 어떠한 비난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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