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군, 내가 죽고 나도 수치는 살아남을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그의 저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장 폴샤르트르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빈틈 많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타자는 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 내부에 있는 수많은 눈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사욕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의 끔찍한 짓, 비열한 짓거리와 그 타락하고 부패한 처신을 보며,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수치심도 안 느끼고, 자기 눈길을 견딜까?”라며 수치심이 부재한 인간에 대한 의아의 탄식과 분노를 쏟아낸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작품에 개의 연구(이하 연구로 표기함)라는 의미심장한 미완성 소설이 있다. 카프카의 생애 말년 소설인데, 주인공인 는 작가를 대변하는 유대인이다. 이 개는 그 유례가 명확히 밝혀진 존재인데, 갈색 노트로 알려진 1922년에 기록된 글을 담은 카프카의 네 번째 노트에 제목도 없이 미완성으로 써진 이야기다. 카프카는  이것은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축소된 요소들에 대한 발견이자 탐구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그의 생애를 장악한 당치 않는 모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해결 불가능한 수치심에 고뇌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집요한 연구임을 의미한다.

 

조금 사유를 건너뛰어, 유대인을 향해 적들이 사용하던 ()’가 왜 프란츠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는가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개는 주변의 부정적 시선이 유발하는 수치스런 단어다. 그런가하면 이 단어를 유대인 내부에서 다른 유대인을 향해서도 뱉어내는 단어이기도 했다. ()들과 함께 누워있으면 벼룩이 옮는다.”. 프란츠와 우정을 나누는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 친구인 뢰비를 향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모욕적 언사로 내뱉기도 한다. 프란츠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고, 즉각 이 말을 기원으로 문법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두 개의 문장을 만든다.

 

그것은  벼룩이 옮은 자는 그 자신이 벼룩이다.”와  개들과 함께 누운 자는 그 자신이 개다.”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잠에서 깬 잠자가 자신이 거대한 갑충임을 발견하는 변신이 바로 변형시킨 첫 문장을 출발점으로 한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여러 작품에 사용되는 데, 그 첫째가 소송의 마지막 부분인  개 같이죽는 자신의 모습이고, 두 번째가 <유형지에서>의 탐험가 행위다.  내가 이 일을 보고도 묵인한다면 난 개다!”라고 말하면서 곧 네 발로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대단원이 바로 연구. 즉 유대인들 자신들이 처한 해결 불능의 수치심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집요한 탐사 이야기다. 제목이 아주 얄궂은 데, 이는 두 번째 문장을 변형한 2차 변형문장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이 모두 카프카의 일기와 노트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이 개라면 개는 유대인이다.”라는 것이다. 즉 소설 연구의 주인공인 개는 바로 유대인인 작가의 분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개를 주인공으로 한 우화가 절대 아니며, 절망한 유대인 남자가 또렷한 정신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세하게 관찰한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만을 밝혀둔다.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있던 나였지만 말이다. 아니 매우 자주 주변의 친밀한 관계에마저 어떤 불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을 그저 보기만 해도, 어떤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편함과 두려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소설의 이 한 단락만을 인용해도 곧바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텍스트에서 절로 떠올라 유령처럼 쫓아 버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애성 수치심을 말하기 위해 에둘러왔다. 수치심은 대중 앞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타자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면, 카프카는 자기의식의 판관이 될 수 있는 완벽하게 분리된, 즉 외재성처럼 투사하는 내면의 법정이 있었다. 압도하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내면의 지엄한 눈에 사로잡힌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내면에 무수한 타자를 지니고 있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자아의 형태에 따라 세 가지 수치심을 설명하는 글이 카프카로 냉큼 건너뛰게 했는데, 이 널뛰기의 욕구는 현실 한국사회의 수치심 부재, 혹은 수치심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모르는 원초적 나르시시스트,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짓거리에 대한 그 불모성의 이론적 확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삼중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지 못했는데, 개인성을 주눅 들게 하는 주변 환경의 시선이 일차적이고, 그 수치심의 근원인 유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류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행위에 내재된 부당함을 지지하고 승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이차적이며, 동화를 희구하는 유대인과 다른 유대인이 서로 경멸하는 유대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꼴사나움, 스스로에게 눈먼 바로 그들과 동족이라는 데서 연원하는 수치심이다. 이처럼 한 인간은 온통 도덕의식에 휩싸여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한 후대를 향한 풍부한 탐구의 초석을 남겼는가하면, 오늘 이 땅의 어떤 인간들은 이 엄중한 실재하는 도덕적 정서가 어떻게 부재할 수 있는가의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치심이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학에 달린 것이기에 카프카를 에워싼 수치의 고뇌는 자신과 가족, 유대 집단에 대한 연민과 유대를 토대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치심이 부재하다는 것은 애초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뿌리를 내리지 않거나 않으려는 인간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즉 공동체의 이익과는 무관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무리는 절대 수치심이란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dl 이 수치심을 야기하는 내면에 대해 좀 거칠게 프로이트의 자아 분류를 사용한다면 초자아,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자아란 나를 제압하는 내면의 판관으로서의 눈이다. 즉 나의 도덕적 의식을 키우는 기준이기에 내면의 법정이 야기하는 수치심은 내 행위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을 부여해 부당하거나 불의한 것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게 해준다. 사실 수치심을 좋은 것 나쁜 것이라 말하는 것이 그리 적절한 표현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윤리적 수치심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심이 마냥 유익한 것만은 아니어서 엄격한 판관일 경우 지나치게 삶을 옥죄게 되어 과잉의 수치심, 즉 굴종이 예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크게 야기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 또는 자기애성 자아란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의 정치권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정신이 전능한 힘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전제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서 이 전능함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자기애성 수치심은 손상을 입게 되고, 패배의 자각을 하게 한다. 이때 이 이상적 자아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바로 손상된 상처를 회피토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참을 수 없는 전제적 자아이기에 이 수치심은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고, 타인을 향해 고함과 욕설을 퍼붓는다. 다시 말해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자기애성 자아를 쓰다듬는 것이다. 이상적 자아에 결박된 이 자아를  원초적 나르시시즘, 또는 광적 자기애, 아기 폐하로 부르는 이유이다. 학교 폭력의 주체인 아이들,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 집단이 수치심이 부재한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것이 바로 이 자기숭배라는 얼빠진 넋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를 억압하던 반사된 수치심이기도 한데, 바로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는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카프카로 대표되는 유대인이면서 반유대주의자인 인간, 프란츠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이 어리석음에 대한 수치심과 초자아로서 법이라는 사회적 주류의 시선이 부여하는 수치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자아-이상이라는 타인들의 눈에 보이고 싶거나 그들 담론 속에 어울리고 싶은 모습으로서 자아인, 사회적-모델로서의 실패로 인한 수치심, 즉 자기 비하 메커니즘의 작동으로 인한 수치심에 더불어 얽혀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적 수치심은 그 메커니즘의 본질로 인해 프란츠 개인이 돌파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능성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연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상적 자아라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일화로 199319일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아내와 두 아이의 살해, 그리고 부모와 개까지 살해한 장클로드 로망이란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는 후일 에마뉘엘 카레르의 실화소설 L'adbersaire으로 알려져 제법 많은 이들이 알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가짜 의사 면허, 국제 보건기구 관리라는 날조된 삶으로 점철된 거짓말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인간의 이야기다. 자기 전능성의 손상이 전부 외부의 탓으로 전가되어 기만적 삶이 축적된,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 된 인간이 종국에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벌인 희대의 파국적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에브라임 라비노비치라는 인물을 호출하게 하는데, 바로 주류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유대인의 표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꾸려하고,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귀화신청까지 하는 사람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눈앞에 다가오고 반유대주의 열풍이 불 때조차 그는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 라며, 붕괴된 자아를 남의 탓으로 싸매려 한다. 이 자기애성 자아인 이상적 자아는 수치심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결국 가족과 자기 파멸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이 이러할 때, 나아가 국가의 리더가 이렇게 자기애성 자아에 매몰되어 있을 때, 가족과 국민은 파멸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연구의 개는 철학자이자 현자이다. 작가의 이 지적 분신은  내가 아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의 모든 근심을 공유하면서 개들 중에서도 개였을 당시를 뒤돌아보며 세밀히 관찰해 본 결과 애초부터 거기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 작은 균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고 시작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아의 성분과 그 작동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설 연구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깃든 끊임없는 억제의 역동성에 작용하는 요소, 힘들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치열한 자기 탐사다.

 

늦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거나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해 볼 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전부가 온통 자신과 공동체 내면의 성찰인 것에 동종의 인간으로서 겸허와 경외를 느끼게 한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수치를 모르는 것들!’이란 외침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참고 문헌 (이 글은 프레데리크 그로와 마르트 로베르의 아래 책에 많은 부분 빚을 졌습니다.)


1)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37

2)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책세상

3) 엠마뉘엘 카레르 , 열린책들

4) 안느 브레스트 우편엽서, 사유와공간

5) 프란츠 카프카 소송, 문학동네

6) 마르트 로베르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동문선

7)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출판사 솔

8) 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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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권() 수를 좀 줄여 조금은 가벼운 한 달을 준비했다. 해서 좀 두꺼운 것으로, 한 권의 책에 긴 호흡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으로 오직 다섯 책만을 선택했다. 우선 옥스퍼드 영문학 교수인 존 캐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The Faber Book of Reportage)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종착지에 이르렀다.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이라는 서문을 하고 있는데, 서구 중심의 2,500년 인간역사의 기록들이 목격자 기록이라는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는 어려울 것이겠지만 나름 근접한 기록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라는 신빙성과 긴박성이 진실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현장성이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기록들을 살인 선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르포르타주라는 인간의 관심사는 죽음의 기록들을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각기 MIT와 프린스턴에서 문학과 독문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 두 교수의 공저인 발터 벤야민 평전(A Critical Life)은 원제목처럼 일생을 비평가의 삶으로 지낸 인간에 대한 전기이다. 다만 이 평전은 개인의 사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저술들을 근저로 한 사상에 중점을 둔 연대기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벤야민을 읽는 이들에게는 개별 저작들의 사유의 기초가 되었던 정황들을 접할 수 있어 독서에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기수였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으로 낭만주의를 탐색하는, 그러면서 기성의 문학에 대한 일견 잔혹한 비평을 담아내고 있는 저작으로 보인다. 지적 자만심에 가득 찬 청년기의 저작으로 현학적 글쓰기가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근간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참고 도서로 읽을 만할 것이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 작품을 선택했는데, 프랑스 작가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와 중국 작가 찬쉐의 격정 세계.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은 단 네 사람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도착함으로써 그 이름들의 역사가 술회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요 제재인 홀로코스트보다는 20세기 유럽사회를 휩쓸던 반유대주의에 어린 인종주의와 그것의 근저를 차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보인다. 욕설을 꽤나 주절거리면서 읽어 나갈 것 같다.

 

찬췌의 소설은 더럽고 악취나는 절망의 양상으로 채워졌음에도 한껏 우아함을 뽐내며 오늘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에 빠진 우리 개별 인간들을 떠올리게 했던 전작(前作) 황니가의 생생한 매혹 때문에 다시 시선이 간 작품이다. 무미건조한 삶, 먹고 사는 게 빠듯한 삶, 대충 건성건성으로 사는 삶, 목표도 의미도 없는 삶....” 이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네 삶을 과연 문학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 삶들에 다시 격정을 불러 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소설 같다. 아마 또 한 번 찬쉐의 세계에 빠져들어야만 할 것 같다. 작품만으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에게 하버드, 코넬등에서 문학교재로 찬쉐의 소설이 활용되고 있다는 선전문구는 사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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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상은 가수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로 촉발되어 박지영의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로 연결된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소박한 상념이다. 소설집의 간략한 감상으로 시작해 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는 쓸모없음과 잉여나 허수와 같은 언어를 통해 쓸모와 효용과 생산성의 언어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를 직시토록 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들 효용이니 생산성이니 하는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집결된다고 할 것인데, 바로 쓸모있음이라는 유용(有用)’또는 소용(所用)이다. 이 단어는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로 사용되어 무용(無用;쓸모없음)’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겠다는 폭력성을 은닉하는 지배의 기호로 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를 앓는 일흔아홉 살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실종되기 일쑤인, 아무 쓸모가 없는, 생산력도, 어떤 효용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치매 아버지와 무생물 밥솥이 나란히 거론될 정도이지만, 쓸모의 가치 측면에서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으론 언제라도 폐기처분해도 될 것만 같지 않은가? 효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모순의 언어를 이 사회는 또한 가지고 있다.

 

의사 소통능력을 상실한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나? 멋대로 움직이거나 아무 곳이나 드러누우려 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협이 되거나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자식들이나 배우자등 가족을 향해 사람들은 무슨 도살장에 개 끌고 가는 개장수도 아니고서야 원~, 노인 학대야라고 섣부른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가?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그 쓸모없는 존재를 돌보는 이에게 쓸모없음을 잘 못 보호한다고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소설은 아마 이 이중의 위선적 잣대가 우리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치매환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자식들이 함께하는 매끈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포장된 거짓과 위선으로 치매 가족의 현실을 미화해서 보여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예가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란 제목을 하고 우아한 치매할머니와 시인인 아들이 등장해서 운치있는 풍경 속에 시와 한 잔의 차가 오가는 예쁜 장면으로 연출된다. 치매가 이렇게 우아한가? 똥칠을 온갖 곳에 하고, 한 순간에 사고가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의 연속이다. 치매의 본질을 싹 걷어내고 효자이고, 지극정성의 배우자 모습만을 과시하는 이것들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은 물론 세상 모든 타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유해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치매 아버지를 형과 누나를 대신해 돌보는 마흔의 아들인 주인공 강선동은 남에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선행을 하는 효자로 보이기 위한 많은 위선과 과장을 행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린 한국사회의 많은 우리들은 자기 안의 착한 아이와 싸워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59

 

쓸모있음이라는 말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음이 드러난다. 인간 삶은 결코 유용이나 효용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는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던 형이 죽자, 그 형의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도 형의 블랙홀에 같이 빠져들까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왔음에 내재한 진실을 향한 동석이란 인물의 자기 성찰적 걸음의 이야기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쌓인 눈을 치우고, 상점들의 짐을 거들어 날라주고, 밤새 토해낸 악취나는 말라붙은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는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미화원이었던 아버지 배철영은 약한 지적장애인 아들 배병식이 자기가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 이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웃비()를 선() 지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웃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그들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쓸모있는 이웃이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이 소용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극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동석의 형은 함께하는 동생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해 집에 머물면서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무한도전>을 보며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체적을 최대한 줄이는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때 체중은 50Kg 남짓이었다고 동석은 말한다. 그는 이를 형과 닮은 보이지 않는 이웃 배병식을 통해 상기하는데, 그것조차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동석 자신이라는 고작과 모자라는 병식이라는 존재의 감히의 관계를 넘지 못한다. 동석은 병식에 대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 ‘선 밖의 이웃우리안의 이웃에 존재하는 매우 엄중한 제도 혹은 잣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 같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인 척이라도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세계에 조금이라도 공평함을 돌려주기 위해필요한 것이리라. 위선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행일지라도 진실한 수고가 뒤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밝음을 위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석의 행위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다는 감정을 갖는 것, 아마 여기가 훈련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의 몇 작품이라도 급하게 읽게 된 이유가 있다. 최근 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행태가 다시금 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노래 제목조차 간섭하기 시작하는 형국을 접하며 촉발된 선 밖의 이웃 갈라치기라는 폭력성의 속살을 보다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수 아이유(IU)의 노래 <Love wins>가 성소수자 구호로 이해되어 사회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정해서 Love wins all이라는 제목으로 변경 발표되는 일이 있었다. 발표된 음악영상의 내용은 육면체 상자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인 두 연인을 추적하며 혐오 가득한 편견으로 감시를 그치지 않는 상황 속에 끝내 서로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유튜브, IU 'Love wins all' MV영상 화면클릭(원 영상)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자(Cube,Box)로 상징되는 것은 서구사회에선 익숙한 은유이다. 사회라는 울타리에는 동일성만 유지되고 자기와 다른 이질성에는 곧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억압과 편견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기호이다. 바로 그 편견의 존재를 사랑으로 이겨내자는 노래에 비난을 가하는 세계가 바로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알아본 세계인들의 높은 반향이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노래는 날 데려가 줄래? /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 떠올릴 수 없는 곳으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곤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이라는 음절로 이어진다. 그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벗어난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버림받은 이 세계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은 그래서 세상 끝 다른 세계가 있는 곳을 향해 도망친다.

 

오늘 한국 사회는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적질병자, 노인, 그 밖의 사회적 약자(경비,미화 노동자등)에게 그 어느 때보다 극렬한 혐오의 감정을 뱉어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24년 치매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21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등록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5.1%2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두 집단의 인구만 하더라도 360만 명에 이르고, 여기에 성소수자와 독거노인등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인구까지 더하면 인구 10명에 1명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말이며, 이는 둘 또는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들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라 가정한다면 전체 인구가 모두 이들과 관련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타자라고, 사회가 배제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 일수도, 자식일수도, 형제자매일수도, 삼촌이고 고모와 이모이고 사촌형제이고 조카이며 손녀손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니 잃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테고, 설혹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외면하는 의도의 행위일 것이다. 모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행위에서 동일한 양상을 낳는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의 무지나, 경비노동자에게 자기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발길질을 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다를 것이 없다.

 

사회 약자를 향해 저질러지는 혐오와 폭력들을 방임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은 세계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짜 마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거짓이라도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표현에도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들의 누군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우리들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왜 세계인들이 하나의 노래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청각장애인으로 분()한 아이유가 노래하는 오직 장애인만이 서로 의지가 되는 세상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들의 우주(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노력, 그래서 그 다름의 불신의 정체를 해소하는 걸음을 걸어보자. 혐오와 편견을 저멀리 날려보내고 설혹 위선이라도 행해보자. 아마 우리 세상은 조금은 더 밝고 환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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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악함을 못 본 체함으로써 혹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일한 희망은 허무주의를 명명하고, 질병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그것을 목록화하는 데 있다. 요컨대 지금이 희망의 시간임을 인식하자. 비록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일지라도."

Nous sommes dans le nihilisme. Peut-on sortir du nihilisme? C’est la question qu’on nous inflige. Mais nous n’en sortirons pas en faisant mine d’ignorer le mal de l’epoque ou en decidant de le nier. Le seul espoir est de le nommer au contraire et d’en faire l’inventaire pour trouver la guerison au bout de la maladie. Cette collection est justement un inventaire.

 -갈리마르에스푸아르 총서, 책임편집자 알베르 카뮈,

출처: <카뮈, 지상의 인간2> 47, 한길사

 

 

인용한 위 문장은 에스푸아르(Espoir) 총서 모든 책의 뒤 표지에 표기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책임편집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에스푸아르(희망)라는 소설과 비소설을 망라한 총서 발간의 책임자로서,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납득할 수 없는 불의한 세계의 성분을 직시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총서의 초기 목록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저작들이었으며, 표지조차 회색빛을 띤 소프트 커버였다고 한다.

 


설혹 달성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무엇인가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그 문제가 품고 있는 혐오스러움, 더구나 그것이 마주 선 자신의 것일지라도 전부 열거해서 제대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천명이다. 전후 독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로 프랑스 사회는 용서와 처벌로 양분되어 곤혹을 치렀다. 그럼에도 드골 임시정부는 엄중하고 주저 없이 민족 반역자들을 극형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문단에는 친독은 아닐지라도 기회주의적 방관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슬그머니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놓고 있었다. 카뮈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뮈는 시몬 베이유의 유작 <뿌리 내리기>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살인자들의 말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 천박한 영혼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알렉산더를 성심껏 찬미할 수 있겠는가?" , 알렉산더의 동방침략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무법자들의 언어로 써진 기록이다. 카뮈에게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인간들 자신의 어둠의 지대를 죽 나열해서 그것들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욕망들을 들춰내는 것이 당대 문학예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지성의 노력을 갖지 못했을 뿐아니라, 민족을 배신한 파렴치한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겐 이같은 목록화된 문제들의 기록이 없다. 때문에 치료약도 없으며, 희망의 목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70여 년 전의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역사에 늦은 것이란 없다. 이 목록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부질없는 모래성 쌓기가 될 것이다.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한국의 시인들, 문인들은 희망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 단어에 혐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것이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목록을 만들어라! 사악하고 부정했던 것들의 목록을. 이 노력을 회피하면서 희망은 무지하고 분별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과 의무의 방기일 뿐이다. 상처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카뮈의 희곡 작품인 <오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존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갱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전시(戰時)에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 알제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채 이방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어린 성찰이다.

 

"정신이 마침내 칼은 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기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을진대,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잊을 것을 요구하겠는가? " 이 발언의 의미는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기초한 정의 그 자체의 실현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다 하나의 단상을 더해 놓는다.

 


"이상도 고결함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치와 인간의 운명을 빚고 있다.

정치판에서 고결함을 갖춘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알베르 카뮈, 작가 수첩 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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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서를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마음에 어떤 작은 흔들림을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국내 문학(소설과 시, 에세이)은 여러 이유에서 소홀히 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읽긴 했으나, 어떤 의무감에 가까운, 작은 기여의 차원이라는 소박한 심정의 독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수히 발간되는 모든 책을 망라할 사진 기억술을 지닌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취향 또한 편협해서 비평과 철학을 비롯한 역사분야와 해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올 한해는 알베르 카뮈의 글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내게 새로운 이해를 안긴 역사 및 문화 비평과 세계를 진술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관한 저작들이 비교적 인상 깊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문학 분야부터 정리한다면, 단 하나의 작품만이 마음에 남아있다.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해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도어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게 하고, 그 가운데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발견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 문학분야는 이미 등단시점부터 읽어 온 김사과 작가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안윤 작가와 올 한해 새롭게 알게 된 한정현 작가와 성해나 작가의 작품 정도가 여전히 기억에 살아있다. 두 날카로운 시선의 작가와 유머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진지한 사유가 피어오르도록 쓰는 두 작가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분야의 분류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문예비평에 가까운, 그럼에도 문화사에 가까운 한스 블루멘베르크난파선과 구경꾼은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오래된 방법으로서 은유를 재발견을 하도록 해주었다. 진열된 앎이 아니라 표면과 달리 짐짓 진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개념의 이 특별한 언어 도구와 이를 수단으로 한 인간 역사의 통찰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을 확장해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아울러 로버트 단턴의 사회문화 현상의 저변에 자리잡은 개인들에 잠재하고 있는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 즉 광범위하게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을 탐색하는 망탈리테의 역사인 미시사를 알게 해준 고양이 대학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분야라면 단연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로 대표되는 인간 유기체의 의식과 정신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한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과 자기생성과 적응에 대한 것이다. 이젠 고전적 과학 저술이 된 앎의 의지자기 생성과 인지두 저술은 아마도 다윈의 책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할 독서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2024년의 독서도 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내겐 극히 예외적 사태일 것만 같다. 카뮈와 카프카를 비롯한 고전이 된 작품들의 몇몇 작가는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며,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블루멘베르크도 거듭 읽는 저술이 될 것 같다.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듯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앎이 부족 할 뿐이지 그 무엇이 새로울까? 2024년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보다 깊숙이 내게 체화되는 독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거듭 읽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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