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사악함을 못 본 체함으로써 혹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일한 희망은 허무주의를 명명하고, 질병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그것을 목록화하는 데 있다. 요컨대 지금이 희망의 시간임을 인식하자. 비록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일지라도."

Nous sommes dans le nihilisme. Peut-on sortir du nihilisme? C’est la question qu’on nous inflige. Mais nous n’en sortirons pas en faisant mine d’ignorer le mal de l’epoque ou en decidant de le nier. Le seul espoir est de le nommer au contraire et d’en faire l’inventaire pour trouver la guerison au bout de la maladie. Cette collection est justement un inventaire.

 -갈리마르에스푸아르 총서, 책임편집자 알베르 카뮈,

출처: <카뮈, 지상의 인간2> 47, 한길사

 

 

인용한 위 문장은 에스푸아르(Espoir) 총서 모든 책의 뒤 표지에 표기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책임편집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에스푸아르(희망)라는 소설과 비소설을 망라한 총서 발간의 책임자로서,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납득할 수 없는 불의한 세계의 성분을 직시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총서의 초기 목록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저작들이었으며, 표지조차 회색빛을 띤 소프트 커버였다고 한다.

 


설혹 달성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무엇인가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그 문제가 품고 있는 혐오스러움, 더구나 그것이 마주 선 자신의 것일지라도 전부 열거해서 제대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천명이다. 전후 독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로 프랑스 사회는 용서와 처벌로 양분되어 곤혹을 치렀다. 그럼에도 드골 임시정부는 엄중하고 주저 없이 민족 반역자들을 극형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문단에는 친독은 아닐지라도 기회주의적 방관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슬그머니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놓고 있었다. 카뮈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뮈는 시몬 베이유의 유작 <뿌리 내리기>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살인자들의 말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 천박한 영혼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알렉산더를 성심껏 찬미할 수 있겠는가?" , 알렉산더의 동방침략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무법자들의 언어로 써진 기록이다. 카뮈에게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인간들 자신의 어둠의 지대를 죽 나열해서 그것들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욕망들을 들춰내는 것이 당대 문학예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지성의 노력을 갖지 못했을 뿐아니라, 민족을 배신한 파렴치한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겐 이같은 목록화된 문제들의 기록이 없다. 때문에 치료약도 없으며, 희망의 목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70여 년 전의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역사에 늦은 것이란 없다. 이 목록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부질없는 모래성 쌓기가 될 것이다.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한국의 시인들, 문인들은 희망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 단어에 혐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것이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목록을 만들어라! 사악하고 부정했던 것들의 목록을. 이 노력을 회피하면서 희망은 무지하고 분별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과 의무의 방기일 뿐이다. 상처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카뮈의 희곡 작품인 <오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존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갱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전시(戰時)에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 알제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채 이방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어린 성찰이다.

 

"정신이 마침내 칼은 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기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을진대,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잊을 것을 요구하겠는가? " 이 발언의 의미는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기초한 정의 그 자체의 실현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다 하나의 단상을 더해 놓는다.

 


"이상도 고결함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치와 인간의 운명을 빚고 있다.

정치판에서 고결함을 갖춘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알베르 카뮈, 작가 수첩 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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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서를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마음에 어떤 작은 흔들림을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국내 문학(소설과 시, 에세이)은 여러 이유에서 소홀히 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읽긴 했으나, 어떤 의무감에 가까운, 작은 기여의 차원이라는 소박한 심정의 독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수히 발간되는 모든 책을 망라할 사진 기억술을 지닌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취향 또한 편협해서 비평과 철학을 비롯한 역사분야와 해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올 한해는 알베르 카뮈의 글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내게 새로운 이해를 안긴 역사 및 문화 비평과 세계를 진술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관한 저작들이 비교적 인상 깊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문학 분야부터 정리한다면, 단 하나의 작품만이 마음에 남아있다.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해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도어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게 하고, 그 가운데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발견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 문학분야는 이미 등단시점부터 읽어 온 김사과 작가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안윤 작가와 올 한해 새롭게 알게 된 한정현 작가와 성해나 작가의 작품 정도가 여전히 기억에 살아있다. 두 날카로운 시선의 작가와 유머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진지한 사유가 피어오르도록 쓰는 두 작가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분야의 분류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문예비평에 가까운, 그럼에도 문화사에 가까운 한스 블루멘베르크난파선과 구경꾼은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오래된 방법으로서 은유를 재발견을 하도록 해주었다. 진열된 앎이 아니라 표면과 달리 짐짓 진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개념의 이 특별한 언어 도구와 이를 수단으로 한 인간 역사의 통찰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을 확장해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아울러 로버트 단턴의 사회문화 현상의 저변에 자리잡은 개인들에 잠재하고 있는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 즉 광범위하게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을 탐색하는 망탈리테의 역사인 미시사를 알게 해준 고양이 대학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분야라면 단연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로 대표되는 인간 유기체의 의식과 정신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한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과 자기생성과 적응에 대한 것이다. 이젠 고전적 과학 저술이 된 앎의 의지자기 생성과 인지두 저술은 아마도 다윈의 책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할 독서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2024년의 독서도 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내겐 극히 예외적 사태일 것만 같다. 카뮈와 카프카를 비롯한 고전이 된 작품들의 몇몇 작가는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며,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블루멘베르크도 거듭 읽는 저술이 될 것 같다.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듯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앎이 부족 할 뿐이지 그 무엇이 새로울까? 2024년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보다 깊숙이 내게 체화되는 독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거듭 읽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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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8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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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판단력에서 유리된 지식의 패악(悖惡)>



행동은 비루하고 언변만 학자인 자들이 나는 싫다.”

- 파쿠비우스(Marcus Pacuvius; B.C. 220~B.C.130)

 

몽테뉴의 에세(Esse) 1 25현학에 관하여를 읽던 중 재밌는 구절을 발견하고 몇 자 남겨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고트족이 그리스를 침범했을 때, 그들은 단 하나의 도서관도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고트족이 지식과 문화를 존경하고 숭배해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도서관들을 온전히 남겨두어야 판단과 실천의 장을 멀리하고 들어앉아 글에 코를 빠뜨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리라는 견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문()을 숭상하고 이의 판단과 실천적 현장은 도외시하는 식자들만 우글거리기를, 그래서 칼집에서 칼도 꺼내지 않고 손쉽게 주인이 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몽테뉴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공부할 뿐, 그것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남의 지식만으로 가득 채워진 지식의 무용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16세기 조선 또한 서원에 들어앉아 세치 혀를 훈련시키는 데 열중하다 왜에 손쉽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이와 다른 현상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이 귀족은 급기야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은 재료를 (두뇌)에 채워 넣으면 둔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반지성(反知性)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도서관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있어 기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발걸음들로 분주하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의 식견이 더 깊어졌는지, 혹은 이 사회가 더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가 되었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변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책과 학문에서 우리들은 무얼 배우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 법학, 의학, 경영학, 공학 등등 돈 버는 목표에 소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 공부이기 십상일 것이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서나, 선한 행동을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러한 양상은 학교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더욱 극성맞게 판단력과 덕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다.

 

때문에 고대 로마 시인 파쿠비우스가 말하듯 지식은 가득한데 행동은 비루하고 혀만 재빠른 인간들만 양산되고 있는 듯하다. 지식과 판단력을 비교해보면, 판단력은 지식 없이도 작동하지만 판단력 없는 지식은 파렴치하거나 악덕이 되기 일쑤이며,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 사회에 기억력은 충실하지만 판단력은 텅 빈 인간들로 득실대다보니 사회 정의는 실종되고, 선악이 뒤틀린 세계가 펼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몽테뉴는 법관을 임용할 때 지식만을 검증하는 시험은 그릇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양식(良識) 또한 검증되는 채용제도의 필요를 역설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사법의 정의를 위해서 정말이지 이들 기구에 지식은 물론 이해력과 양심이 함께 갖춰지기를!”이라고 썼다.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다! "

-에세 125, 265, 민음사 2022.8, 13쇄에서

 

지식은 정말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판단력, 즉 선한 의지에 대한 배움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필히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세네카가 지식만을 채운 인간들이 나타나고부터 선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듯,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을 오늘 정치검찰이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현실로 입증되고 있듯이 말이다. 몽테뉴는 오랜 공부 뒤에 얻은 것이라곤 법조문에 불과한데 우쭐하고 오만해져 부어오른 영혼으로 바람만 잔뜩 들어간 인간들의 독성으로 가득 찬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지식과 바른 판단력으로서의 지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지식과 실천적 행동 또한 그 거리는 한참이나 먼 것이다. 우리 사회가 17세기 프랑스인이 생각하기를 권했던 인격과 실제 행동으로부터 격리된 지식 쌓기의 그 혐오스러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더구나 이를 시정하기는커녕 더욱 고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움이 엄습해온다.

 

지식 자체는 정신에 광명을 주는 것도, 눈을 뜨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이러한 지식의 직분을 혹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게 된다. 채워 넣은 지식이 올바른 가치 판단으로 이끌어주고, 판단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지혜로 체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인격형성과 선한 실천력으로부터 유리된 지식만이 난무하는 이 사회는 분명 잘 못된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 게다. 글한테 망치질 당한 '글 멍청이(Lettreferits)'들이 설쳐대는 사회는 고트족의 좋은 침략 대상이 되리라. 양심과 판단력을 지니지 못한 공허한 지식이 휘두르는 칼날이 이 사회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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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젤라스트와 돈키호테(Agelast and Donquixote)

- 신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우리는....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Mann Tracht, Un Gott Lacht.)” - 유대 격언

 

 

이 유대격언에서 신(God)은 왜 웃고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일까? 한 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인간들, 제깟 것들이 생각해봐야 진리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결코 듣지 못할 웃음소리다. 신의 웃음이란 이렇게 초라하고 왜소하며 편벽한 인간의 생각에 대한 반응이다. 진리란 명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하는 멍청이, 획일화되고 고착된 통상적 생각에 매몰된 공허의 인간은 웃을 줄 모른다. 유머감각이란 쥐뿔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짐짓 진지함을 과시하려든다. 우리들은 그때 웃는다. 그 맹목의 무지가 드러나니까 말이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아젤라스트(agelast)’라 부른다고 한다. 아젤라스트들은 자기 믿음이 명확한 진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일치된 동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사와 인간 개체란 것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던가? 사람들을 향해 팔을 쳐들고 삿대질을 하며 굴종을 강요하는 괴성을 질러대는 아젤라스트틀이 모든 다양성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의 획일화된 가치와 질서를 진리라고 종용하는 형국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그 잘난 입으로 방종의 헛소리를 일삼으며 전문가랍네 하던 인간들이 자취를 감추고, 아젤라스틀이 설쳐대는 현실에 찍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니 내지 못하는 것일 테다. 은폐되었던 더러움이 압수수색이란 폭력적 수단에 의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이 남은 보루다. 아젤라스틀은 예술을, 특히 희극과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웃지 못하는 존재들인 까닭이다. 마침 페러디 문학의 결정판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으니 이처럼 맞춤의 대상이 어디 있을까싶다.

 

스페인 문학 연구자인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에 관한 해설서에서 돈키호테가 출현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각과 노동이 죽음의 덫인 나라,

이런 모순투성이의 스페인 현실에 대다수 지식인들은 눈감고 잘나가던 자신들의

펜을 꺾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현실을 미학으로 투영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 돈키호테를 읽다, 75P, 열린책들, 2023.2 초판 3쇄에서

 

400년 전, ‘순수 기독교인의 피라는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순수 피에 의한 인간 구별의 획일화된 잣대가 모든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던, 정치와 종교 권력이 자기 검열을 강요하던 지옥 같은 시기에 출현한 희극적 소설이 역사의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금 그 상식을 뒤엎은 웃음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단 하나 권력의 목소리만을 들으라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상은 결국 사회구성원 개인들의 존재 정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개인을 부정하는 지경으로 치달을 태세다.

 

때문인지 온라인 연결망의 각종 채널들에는 패러디와 유머의 말과 영상들이 증가한 듯하다. 또한 SF, 환상,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문학작품들이 늘고 있다. 현실을 모방하는 리얼리즘의 체험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작품은 아젤라스틀의 쉬운 표적이 되어 블랙리스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을 아는 이유일 것이다. 돈키호테가 활약해야할 비극의 시간이 된 것이다.

 

정교하게 구성된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전혀 그럴듯하지 않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꿈과 현실이 통합된 초현실의 세계가 자꾸 열려야 하는 당위의 시대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다보면 그 유치함과 서투름으로 주인공의 고양된 야망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장면들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표면적 이야기에서는 패배적이지만 웃을 줄 아는 독자는 이것이 패러디임을 안다. 그 잘난 질서 수호자들인 기사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아, 기존 가치와 체계를 전복시키는 최고의 수단인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식(Common sense)이라 따르라는 그것을 뒤엎는 이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역설에서 희극성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희극성, 유희적 세계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이라 했지만, 오늘날에는 훤히 유리창처럼 내부가 보이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권력이기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기가 더 수월해졌다. 신의 웃음은 반박이며, 저항이요, 가소로움에 대한 혐오의 조소이다. , 쿤데라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러니는 비록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그것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주어 확실성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래, 미술, 소설, 시 등 예술은 그 이름값을 하는 한 아무리 명쾌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 웃음과 아이러니, 환상의 세계는 아마 지금 절대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사회집단의 상호 소통이나 영향의 주고받음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존재 사이로부터 시작해 급격한 속도로 파급되어 전체 구성원이 동기화된다고 한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을 포함한 우리 인간은 상호 연결된 진동자처럼 동기화되어 거대한 웃음소리로 아젤라스틀을 질식시킬 수 있다. 돈키호테가 땡기고, *상전이(相轉移)가 유혹하는 시절이어서인지 객쩍은 상념을 적어봤다. 우리들은 찌르레기들의 가을 하늘 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중군무의 변화처럼 순식간에 동기화되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 돈키호테처럼 행동하자. 모두 함께 크게 웃으면서... 

 

) 상전이(phase transition,相轉移)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온도와 압력 등 외부변수에 의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액체인 물이 0도에서 고체인 얼음으로 변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상전이는 모든 물질을 비롯한 인간사회와 같은 복잡한 구조도 얼마든지 다양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창조적인 혼돈상태임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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