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 지식의 탄생 (Knowing what we know), 사이먼 윈체스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 8월 29일 출간 예정인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에 대한 프리뷰입니다.]



모든 인생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10

 

책은 지식의 생성에서 오늘과 같은 지식(knowledge)의 의미로 쓰이게 된 변화과정, 그리고 지식의 전승과 확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이러한 배경 하에 지식의 획득과 기억이 더 이상 인간의 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컴퓨터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지능의 쓸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유리 화면에 손끝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만으로 어딘가에 있을 방대한 정보와 지식 더미에 접근하여 필요로 하는 지식을 재가공 또는 생성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해 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인공지능(Chat GPT와 같은)에 의해 자신의 지적 노력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문제 제기처럼 지식의 생성, 분류, 조직, 저장, 확산에 있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대신 생각해준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정말 기이하고 염려스러운 상황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탐구하기 위해,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즉 안다는 것의 의미를 플라톤의 테이아테토스에서 정의한 정당화된 믿음이라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일관성 없는 다양한 관습과 의례, 종교로부터의 영향 속에서 믿음에 의지했던 지식이 합리성에 의존한 계몽주의에 의해 비로소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검증할 수 있는 확정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에 이른다. 소위 인식론이라 불리는 지식의 오랜 지배 끝에 이를 제치고 새롭게 대두된 오늘의 지식이론인 DIKW(Data, Information, Knowledge, Wisdom)체계를 토대로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이며, 지식 구조와 선행요소인 데이터와 정보의 역할,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정보로부터 비로소 지식의 생성과 이 지식들을 삶의 유용한 소중한 지식으로 바꿔 놓은 지혜를 설명한다.

 

또한 지식은 어떻게 전달, 전파, 확산되어 사회에 퍼져 나갔는지, 그 수단들과 건강과 생존, 공동체 결속이라는 전승 목적을 살펴본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이로울 가능성이 큰 지식의 전승이 상업자본주의를 비롯한 민족주의와 전쟁들의 잡음에 파묻혀 사장되거나 지식 고유의 목적을 잃는 것은 왜 인지 성찰 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는 교육(가르치고 배움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저널리즘, 백과사전, 사진, 방송에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조사하고, 바빌론의 설형문자부터 금속활자 인쇄술, 인공지능에 이르는 지식 확산의 전반적 범위를 친근한 일화와 일상적 사례를 통해 독자의 사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일례로 인간이 어떻게 정보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전달하는 지에 대한 훌륭하고 포괄적 지식의 설명이 세 살 때 벌에 쏘인 기억의 일화로 충분할 만큼 일견 사변적일 수 있는 지식의 장벽을 철수시켜 주는 것인데, 이 경험은 말벌이라는 곤충의 존재를 알게 하고,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어머니가 얼음과 연고로 통증을 가라앉혀주었으며, 이 상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용감성을 알리는 일종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고, 참을성을 가지고 대처하면 칭찬을 받는 다는 사실과 벌에 쏘인 발이 왼발이라는 오른쪽과 구별이라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일화에는 지식의 생성, 전달, 확산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결국 경험은 지식 습득, 즉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수세기에 걸친 지식의 생성과 전달 확산의 역사와 그것들이 의미하는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책의 중심 주제인 지식의 전달과 그 전달로 인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책의 한국어 표제는 지식의 탄생이라는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원 제목은 우리가 아는 것을 안다는 것(Knowing what we know)이라는 점에서 학습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층 탐구라는 물음의 사유에 가깝게 여겨진다.

 

결국 저자가 도달, 제기하려는 물음은 이 매혹적인 지식의 여행을 통해 오늘의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의 요청이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생각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듯한 현대 정보기술 의존적 태도의 양가성의 문제일 것이다. 세 살 아이가 느꼈던 어떤 새로운 사실의 습득이 가져온 지식 획득과 전달의 즐거움이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안다는 생각에서 수학, 지도읽기, 암기 등의 가치들을 제거하여 사고 능력이 점점 위험에 빠져드는 작금의 세계는 우리를 어떤 인간들로 변하게 할 것인가의 우려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출현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편협성에 길들여지고, Chat GPT가 생성해주는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는 세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선험 또는 경험 지식을 위한 노력이 추구되지 않는, 그래서 소중한 지식으로 만들어낼 지혜가 없는, 현명한 인간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이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은 왠지 두렵기조차 하다. 어쩌면 지혜 없는 정보만이 가득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생각이 없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를 숙고하고 자성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독서와 체험의 삶에 이어 지혜를 잃은 인간 세계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호기심과 지혜의 관계에 대한 지적은 오늘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지도 또 하나의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전달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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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에 대한 이 프리뷰는 프로롤그와 1, 배움의 시작, 2장 최초의 도서관에 대한 사전 읽기에 의해 써진 것입니다. 책은 위 2개 장을 포함하여 지성의 행진, 조작의 연대기, 생각이 필요 없는 시대 등 총 7, 575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적 독서만으로 작성되었기에 저자의 결론이나 주제와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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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상은 박설호 교수의 두 논문 에른스트 블로흐의 깨달은 희망과 종교, 그리고 유토피아「『희망의 원리, 그 특성과 난제에 힘입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의 그 던적스러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패덕(悖德)을 체감할 때는 그것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뻔뻔스레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을 활보할 때이다. 세상이 순화되어 선함이 득세할 때는 대체로 그것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들이 짐짓 선을 가장하고 위선을 떨며, 세상에 섞여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순리란 것이 있다면 패악질이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 모르고 두려움없이 군림하도록 해서 그것이 이 세계에서 전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존하고 있었음을, 그것이 어떻게 온존하고 있었는지 형태와 거소(居所)와 위장되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저 폐쇄된 소수의 무리가 서로서로 썩어 들어가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지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채 있었기에 그 패악의 실상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나, 드러낼 경우 사적 이익에 혹여라도 손실이 발생할까 저어했기 때문에 수면 위로 그 패덕함이 과시되지 않았던 연유도 있을 것이다. 저열성과 탐욕과 비굴함, 무능력과 무감각, 교활함과 폭력성, 이 모든 것들이 표면화 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그것들이 함부로 휘젓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도덕적 선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검찰독재권력 아래 산자부 차관이 된 5년 전 기조실장이었던 자가 당시 내렸던 자기 결정을 근거 없었다고 버젓이 의회에서 발설하는 장면을 보라. 수면아래 자고 있던 무능력과 비열함, 무책임성과 교활함이 이 악의 시대에 수치도 모른 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것들이 세상을 호도하여 권력을 갖게 되자 가면을 벗어던지고 악덕을 보란 듯이 행사하기 시작함으로써 그것들의 부패성과 폭력성, 탐욕과 공격성, 비열함과 무능함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식별하기 어려웠던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과 그들의 행태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불의한 욕망들이 여과되지 않고 시민의 눈앞에서 시전(施展)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시민대중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확인할 수 없어 그것들이 어느 곳에,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처에서 숨어있던 것들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불과 2년 만이다. 이제 시민들은 이것들의 정체를 알았기에 때려잡는 일이 수월해졌다. 발본색원이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절망이 휩쓸고, 시련과 퇴락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환의 토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법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며, 주권자인 시민을 적대시하고, 주권의 대의 기관인 의회를 무력화하려 하며, ()의 경제를 소수 패덕의 무리를 위한 경제화하여 주머니를 채우는 탐욕을 노골화 하는가 하면, 국고의 고갈과 외교적 고립, 교역의 쇠퇴, 시민경제의 몰살, 복지역량의 말살을 향해 공권력의 사적 악용을 일상화하는 압제적이고 폭력적 무리들의 몰골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퇴행의 시간이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한 걸음 진전하기 위한 역사적 시련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1885-1977)가 말한  성취의 우울(Melancholie des Erfüllens)’, 즉 달성된 목표에서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하는 현실 변화의 촉매제 역할로서의 시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시간을 지속적으로 저것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이것들이 활보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사의 선물이겠거니 하겠다는 말이다.

 

유토피아, 이 세계의 바람직한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는 토마스 모어식 국가주의적 모델과 같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국회에서 선서를 거부하는 자가 나오면 거부하는 자에게 엄중한 범죄적 처벌을 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은 진전을 향한 걸음이 곧 유토피아의 목표다. 유토피아란 저 먼 세상에 없는 것을 향한 공상적인 허무의 시도가 아니다. 국가의 선출된 수반이 사적 탐욕을 위해 국고를 바다에 쓸어 넣으려 할 때, 이를 예산 집행의 한계와 조건 등으로 제약, 통제할 수 있는 법안과 이보다 상위의 헌법의 수정도 실행하는 것이 유토피아적 목표라 할 것이다. 희망은 항상 좌절과 실망을 전제로 한다. 만일 이러한 실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신일 뿐이다. 우린 가능성을 내재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성취한 사회가 아니다. 1989년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안주하기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한국사회의 유토피아는 시대착오적으로 진부해지고 부패하여 추락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고착되지 않고 늘 자기의 부패성을 돌아보며 진부화됨을 돌파하려는 의지이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소시민들은 현세의 목욕탕 속에서 아무런 상념없이 잠을 청한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모두 잠들면 그 사회는 비틀거리고 저 나락으로 떨어진 황폐한 거리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자신과 후손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멸을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꿈 꿀 수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의 환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행복한자는 꿈꾸지 않는다고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꿈꾸는 자는 곧잘 길을 잃기 마련이고, 자유를 의식하는 자는 부자유의 질곡을 느끼기 때문이며, 사랑을 의식하는 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핍된, 존재해야 마땅한 무엇에 대한 의식이 인간과 이 세계 속에 내재한 의향에 대한 정서이다. 오늘 우리들은 깨달은 희망’, 새로운 무엇, 우리와 우리네 사회의 잠재성과 지향성을 향해 저 무도하고 무례하며 무능력한 패거리들에 강력한 징벌을 행함으로써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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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및 사회 조건이나 그네들의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화, 민담, 동화라는 유사성의 장르는 당대 사람들은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이해를 위한 효과적인 경로가 된다. 특히 인문학을 비롯해 문학서들은 전해오는 이들의 인용을 통해 인류라는 인간 종()에 대한 어떤 본질적 성격을 헤아리기도 하고 하는데, 아마 오래되었다는 고대 우화에서 토속적 민담이나 17세기부터 공식화되어 집필되기 시작한 고전동화에서 상징화되거나 은유된 양상들이 오늘의 사람들이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우화 또는 동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펴진 것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작품을 통해 일생을 삶과 죽음의 문제와 윤회와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했던 박상륭 소설가의 雜說品속 발견으로부터이다. 이 장편소설은 성배(聖杯)를 안치하고 있다는 문잘베쉐(Munsalvaesche)라는   생기를 잃어 찬바람과 대막(大莫;엄청난 적막함) 휩싸인 악취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곳이 배경인 소설이다. 아마 그이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이해가 대중에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그나마 조금 부연 설명을 곁들여가며 다시금 인간 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풀어 반복하려했던 작품으로 여겨진다.

 

 박상륭 소설 雜說品』 문학과지성사, 80쪽 부분 발췌


낳지 않는 상처를 지닌 왕의 치유를 위해 불새를 찾아 떠난 시동(侍童)의 꿈 속 이야기인지, 현실 속 대화인지 모를 장황한 이야기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작가의 작품 속 칠조(七祖)로 추정되는 순례자로 불리는 노승과 11’로 불리는 문잘베쉐로 유학 온 어느 나라 공주가 주고받는 설법을 가장한 시론에서 고대 인도의 우화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 ‘빤짜딴뜨라로도 읽음와 이와 동일유사 내용을 지닌 이솝 우화중 하나의 이야기가 그 시발(始發)이다.

 

짐작컨대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한 개구리들로 번역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씨앗 불이 되어 내 읽기의 욕망에 불을 싸질러댄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이 근심을 해소하는 것은 그것으로 찾아드는 것인데, 그것이 그저 들불로 확 번져 동화(童話)의 세계로까지 번져 페로와 그림형제, 안데르센으로 대표되는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 질서의 내면화라는 역겨운 고전동화에 반기를 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력 3세기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우화집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다섯(panca) 논설(tantra)'이라는 뜻처럼 다섯 장으로 구성된 작은 이야기 논집이다. 매우 어리석고 아둔한 세 왕자의 아버지인 왕이 이들을 가르칠 선생을 찾고, 마침내 위싀누샤르만(visusarman)’이란 현자가 세 왕자에게 통치학을 깨닫도록 가르친 논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치학의 개념이 이솝우화의 개구리 이야기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개구리들은 인간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못 속 개구리들은 그들 집단의 리더를 찾는다.

 

신은 이들에게 나무토막을 내려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말없는 나무토막의 다스림 없는 다스림에 만족하지만 이내 그 무용함으로 짜증을 낸다. 결국 신은 그 웅덩이에 뱀을 보내는데, 개구리들, 즉 이 노예근성의 피학쟁이들에게 가학적 능동성을 구비케 하려면 독사(毒蛇)로 인한 혼비백산의 허둥거림과 살기위한 극악한 발버둥만한 처방이 없는 것이었을 테다. 노승(老僧)은 말한다.  미온적, 수동적, 또는 노예근성의 피학적, 반 잠에 들어있는 질료를 독사(毒死)시키기 같은 것이 아니겠다구?” 라고. 이는 수많은 동화들에서 공주가 개구리에게 행하는 입맞춤이 바로 이같은 충격요법 이라는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人間의 저 적나라한 재림(再臨)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곧 인간 삶의 고달픔으로 안일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나무토막을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이 이야기가 노승에 의해 발설된 까닭은 황폐해져가는 문잘베쉐의 진짜 현상은 바로 이러한 독()날것-썩히기날것-익히기라는 두 변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설명하며, 어떤 특정 사회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는 그 구성원의 깨우침일 것이라고 미루는 것 같다. 여기서 정치철학을 얘기할 것은 아니고, 이 야기기로부터 작금의 우리네 정치현상이 이 독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자문으로 이어졌다는 말에 그치기로 한다.

 

아무튼 이 기발한 인간세(人間世)에 대한 은유 이야기는 우화와 동화의 의도, 그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는데, 17세기 샤를 페로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 후반 그림 형제크리스티안 안데르센으로 이어진 고전 동화(이후 이들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함)의 그 던적스럽고 위선적이며 체제 옹호적이었던 문학적 보수주의를 띤 것들은 차치하고 20세기 전후하여 이러한 질서 수호와 강화에 이바지했던 사회정치적 조류에 반기를 내걸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작가들의 동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박상륭의 소설 속 화자인 패관(稗官)이 전하는 우화는 17~19세기 보수주의 동화의 지배질서 내면화 동기와는 다른 것이고, 이는 오히려 이들에 비판적이고 전복적 시선을 가했던, 즉 기성의 관습과 관행, 규범 일반적 담론을 변경하고자 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했던 일군의 작가들과 그네들의 동화에 고대 우화의 전통이 연결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라는 편견 때문에 그의 환상소설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던  조지 맥도널드에 대한 재발견은 내겐 앎에 대한 겸허를 다시금 환기토록 했다. 오히려 그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인간 존엄에 대한 근본적 신념의 자양분으로 작동했으며, 종교적 에피파니가 그의 동화 속 상징들과 연결되어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계발의 자극원으로 동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도널드와 함께 위선에 대한 혐오, 상층계급의 위선적 관습과 고전동화의 체제 수호적 문명화 담론에 반대하여 문명화과정의 재()맥락화를 시도한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와일드는 전통적 동화 담론에 개입하여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동화의 사회 미학적 경향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그는 비판 대상의 언어와 행위를 차용하여 그것이 내재한 부정과 불합리, 불명예를 지적함으로써 그것에 반기를 들게 하는 전복의 문학을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들은 고전동화가 현실 세계의 가치를 비판하고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가치에 사후적이고 우의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치고, 결코 현실 사회를 문제 삼거나 그 대안 세계나 관념들에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즉 이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등의 고전동화들은 지배 계급이 도모하는 안전한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그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고통의 내면화에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안데르센의 경우는 마치 하층 계급의 고난에 관심을 보내는 듯 하지만 결국 상층 계급이 원하는 질서에 편입하고자 그네들의 규범과 권위에 타협했다.  이는 안데르센 부류의 동화가  '부르주아의 교양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에 헌신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 속에서 작용, 인간 제반 기억 내지 판단을 왜곡시키도록 작용했다고 지적한 발터 벤야민의 비판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판의 관점에서 맥도널드와 와일드는 지배관계와 지배담론에 대해 강도 높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동화의 세계에서 이를 역전시키고 전복시켰다.

 

두 사람은 전통적 고전동화 담론이 분명 아이들에게 해악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배계급의 관습과 규범,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를 사회와 타자에 책임을 가지는 인간, 창조적 인간상이라는 가치로 문명화과정의 담론을 변형하고자 한 것이다. 여전히 안데르센 부류의 굴종적이고 순응적 인간을 만들어 체제에 길들이고자하는 동화가 출판과 영상 시장에서 활개 치는 세상이지만, 왜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음을 멈출 수 없게 하는지에 대해 자성의 필요를 요구하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맥도널드의 동화 한 편을 읽는다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가벼운 공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푼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반영한 패러디 작품이랄 수 있다.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왕과 왕비에게 늦게나마 공주가 태어나지만 아기를 태어나게 도와준 마녀에게 이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중에 떠다니는 가벼움의 마법에 걸린다. 이 과정에서 맥도널드는 관습적 사회질서와 사회관계를 희화화하는데, 왕실 형이상학자들은 바보로, 전형적 왕자는 푼수 짓으로 조롱당한다. 그럼으로써 상층계급의 어법과 규약의 가면들을 벗겨낸다.

 

떠다니는 공주의 가벼움, 공주는 중력(重力)을 체득하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력은 사회적 책임과 연민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중력은 추상적으로 강요하거나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경험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수영을 통해 이를 알아간다. 이때 왕자는 수영장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물속에서 물마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주는 물속에서 물마개를 하는 왕자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사회적 책임과 연민을 말하고 있지만, 여성과 남성의 역할도 전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의 행동양식 등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인식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아마도 라푼젤을 읽는 아이와 가벼운 공주를 읽은 아이는 자기 성의 행동양식이나 사회관계에서 많은 사유와 행위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맥도널드의 작품으로 황금 열쇠라는 내면세계의 탐색을 떠나는 상징 여행의 이야기가 있다. 남녀 상호존중과 상호의존 관계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구축토록 하는 정말 아름다운 동화다. 인생의 진짜 보화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는 통찰의 실현을 약속해주는 다른 세계가 있는 길로의 안내이며, 유토피아적 성적 탐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도널드는 상상력과 도덕적 위력의 끊임없는 발휘를 재촉하여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적 명성에 연정을 품고 권위와 지배 계급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적이었던 안데르센의 대척점에 오스카 와일드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권위에 머리 조아리기를 거부했으며, 규범을 깨뜨리면서 잔인한 계급의 정의 체계가 보여주는 억압적 관용을 끊임없이 시험한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동화 창작의 근본 목적을 전복이라 공언했으며, 기성사회 옹호론과 결별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문제를 반영하여 변혁하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 그의 동화집 두 편인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이하 행복한 왕자로 표기함 『석류의 집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오스카 와일드의 아홉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조건반사 체계를 주입하는 방식,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자에게 가하는 처벌방식의 부조리함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가 지배계급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동화집 행복한 왕자에는 동명의 동화 행복한 왕자가 있는데, 이는 납으로 제작된 죽은 왕자의 동상이다. 왕자는 비로소 높게 세워진 동상이 됨으로써 백성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 알게 된다. 생전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보상하기 위해 헌신적 제비를 통해 재물을 나눠주고 구휼한다. 결국 제비는 추운 겨울에 왕자 곁을 지키다 세상을 등지고, 시장과 의원들은 왕자의 동상을 녹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기를 갈구한다.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자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행동은 빈곤과 불의와 착취를 끝내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시는 여전히 시장과 시의원들의 지배하에 있다. 우쭐대는 이 광대들이 분명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고 왕자와 제비의 박애적 행동은 곧 잊혀지고 말 것임을 안다. 탐욕과 허세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와 질서의 근본적 변혁 없이는 결코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와일드 동화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 긴장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와일드는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문명화과정이 인간성의 퇴화에 이바지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의 작동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묘사한 동화들이 석류 나무집에 수록된 어린 왕, 별 아이 등 네 작품이다. 어린 왕의 주인공은 염소 치는 소년이 어느 날 왕족 할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 밝혀지면서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년은 사교계의 아름다움이 노동자에 대한 잔인한 착취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대관식에 화려한 복식과 빛나는 왕관을 쓰기를 거부하고 염소 칠 때 입었던 옷과 찔레나무 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다. 구경꾼들은 왕의 허름한 모습에서 더 없는 품위와 찬란함을 본다.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장면이다.

 

그런데도 역시 작가는 사회적 반목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열어둔다. 한 사람의 실천으로 사회의 케케묵은 수구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열어 둠으로써 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사회관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에 대한 반성의 물음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동화는 위선적 사회 관습과 지배질서가 지닌 이중적 척도가 부당하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묘사하여 그 실체를 숙고하게 만드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울림을 전하는 동화인 별 아이는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역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본질주의에 대한 철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오만함과 잔인성과 이기심을 모두 갖춘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만, 그 자신이 추하게 됨으로써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후 시련을 겪고 왕이 되어 백성을 자비로 다스린다는 이야기다.

 

와일드는 주인공 한 사람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나는 고전 동화의 위선을 전복시킨다. 그리고는   그러나 그는 오래 다스리지 못했다. 3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겪은 고통이 극심했고, 그를 시험한 불길이 너무 뜨거웠음이라. 그의 뒤를 이은 자()는 다스림에 악()했도다.”  작가는 아름다움, 선의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지배관계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와일드는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을 역전시켜 새로 쓴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인어 공주를 역전시킨 어부와 그의 영혼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꼬리가 다리가 될 때의 고통이 이 작품에서는 인어를 사랑하게 된 어부의 사회적 관습의 상징인 영혼의 복수로 인한 고통으로 대치된다. 성과 계급의 전복이다. 그리고 어부가 죽는 순간 비로소 인어와 하나가 된다. 안데르센이 고통을 합리화했던 기독교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나? 를 자문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성역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회화 과정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와 지배질서에의 순응을 내면화시키고자 한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부류의 고전동화의 획일적 사회화 과정에 적응시키려하는 순응주의적 동화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고전독서 목록에 자리 잡지 못하게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을 꽤나 오래 한 것만 같다.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프랭크 바움 등의 창조적 사유와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등에 대한 사유로 안내하는 동화들의 세계가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에게 낯설지만 인도를 비롯 페르시아, 그리스 등 고대 우화의 세계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드넓은 삶의 세계를 탐험하는 유익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우리네 인간이 사는 지상의 현실계임을 말하며,  ‘->->마음을 토대로 하는 인간의 진화론적 틀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 小說하기의 스러움!”이라 수없이 반복하여 뇌까려야 했던 한 작가의 잡설이 이렇게 전복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했다. 독서란 어쩌면 이렇게 널뛰는 정신의 방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앎의 세계를 거닐게 되고, 아주 작은 앎의 지평이 조금 축적된다. 아마 지배 질서에 켜켜이 내려앉은 곰팡이를 제거하는 데는 동화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으리라. (, 讀書하기의 스러움이란!)

 

사회적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은 우리를 에워싼 회색빛 세계를 벗어날 출구를 보여주고, 창조적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화의 위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출판과 영상시장에 감시를 게을리 하는 순간 우리의 아이들은 길들여지고 체제에 순응하는 이솝의 왕을 요구한  연못 속 개구리들처럼 우리의 세계는 나락으로 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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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일까? 부쩍 사람의 마음이 그립다. 그러다보니 읽는 책들의 글마다 마음, 손길, 친구, 선한 영향력, 동고와 같은 단어들에 시선이 붙들려 꼼짝하지 않곤 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의 한 문장이 그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예스런 동고(同苦)’라는 단어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사유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의지(wille;意志)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 없는 충동인 이 의지를 인간은 다만 오감으로 직관하여 파악할 뿐인 표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밖에 없다.

 

이 목적 없는 움직임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모든 번민과 고통은 바로 타자인 개체가 바로 의 의지의 표상에 불과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수시로 망각하곤 한다. 타자인 실재와 내 의지의 표상과의 불가피한 간극, 그로부터 출현하는 서로 다른 의지들의 충돌로 갈등하고 적대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한 것을,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뜻하는 '동고(同苦)'야말로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 아무렴 요구되는 즈음이다. 사실 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얼추 나이든 세대에 속하게 되면서 내 삶에서 친구나 신의(信義)의 자리에 고작 메마른 성()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게다가 우정은 동성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까지 변질되어 우정이 발 딛을 공간이 극히 협소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간의 유대를 점점 상실해가는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는 부쩍 약화되어가고, 동고의 연민은 극단적으로 희소해졌음을 체감한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63권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올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지성과 사랑, 아름다움과 윤리가 함께 어우러진 벗과의 이 드문 교류를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팔 만한 물건이라곤 맹자일곱 권이 전부였던 청장관은 이를 팔아 밥을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여 벗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을 찾아가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영재(冷齋, 유득공)또한 굶주리고 있던 터라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이렇게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한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간본아정유고6)"

 

찾아 온 벗을 대접할 길 없는 가난했던 영재의 마음이나, 책을 팔아 밥을 먹었다는 거짓없는 삶의 얘기를 들려주는 청장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들이 아끼는 책의 이야기와 어울려 삶과 우정이라는 그 소소한 일상의 진의를 엿보게 해준다. 이것이 동고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사랑이라 할까?

 

중국 공푸전옌 영화사 부사장이자 신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후이구냥(輝姑孃)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세상은 몰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사방팔방 온통 장벽으로 막힌 듯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해 좌절과 체념으로 포기와 죽음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응원하고 부축하고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내민 손길이나 신경 쓰지도 않던 평범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두들기고 구원의 한줄기 빛이 되어 용기와 희망의 언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온기를 보내고, 고통스런 인생을 바꿀 용기를 주어 그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려 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류, 오판을 저지르는가? 내 외로움은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또 다른 의지의 이해로 위안을 받는다. 고작 표상에 붙들려 갈구하는 이 척박한 외로움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나의 걸음에 용기를 불어넣는다.

 

불현 듯 "추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대로 계속 믿기 위한 논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한없이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마 나는 서로 다른 의지의 소산인 그 분개하는 마음을 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을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 같다. 아마 내 믿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근본 축의 훼손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이를 반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해주어 그의 믿음이 훼손당했다고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일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공감이라는 우호적 존중은 곧 친근감으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추론을 변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 우리 인간의 신념이란 수많은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들은 서로 동류(同類)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마련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랑을 찾기 위한 내 인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우정을 쌓는데 인간의 생래적 취약점을 어루만지는 능력을 갖는 것이 당연히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분명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의 마음이 부둥켜안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동고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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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존재주식회사>의 예술적 존재론

 

폴란드 출신의 Sci-Fi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존재주식회사(Being Ins.)라는 익살맞은 제목을 한 다분히 과장된 상상력의 작품을 읽다가 존재론에 얽혀있는 한 문장이 스치듯 떠올랐다. 존재론의 근본적 특징은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문구다. 우리는 대개 지금 사는 자신의 삶의 여정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에 맡겨두고 논의의 대상으로 할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해 인간조건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찾으려는 필요가 존재론이라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여기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탐색이고, 무언가 성취를 위해 달려가야만 할 것 같은 시대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들이나 어떤 불명확한 모호함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려니 존재론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했기에 기억을 떠올려 봤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소설의 전제이자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렘의 <Being Inc.>는 미국도서관이 발행, ‘앨리스타 웨인라이트가 지은 동명의 소설 Being Inc.에 대한 일종의 비평문의 형식을 한 소설이다. 사실 비평의 대상이 된 웨인라이트의 소설은 이 지어낸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작가와 저작물이고, 하나의 유머로서 비평 임직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렘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영역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존재주식회사란 바로 이러한 개인들의 삶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 여기 없어서 있지만 없다고 간주되는 것을 더듬어 찾는 일을 해주는 비즈니스 회사다.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

 

사람들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그것만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친밀한 감각이나 호의적 관계에 대한 기대가 포함된 비용을 지불한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것은 전문가적 조언 + 안전하다는 감각을 함께 구입하는 것이고, 비행기표 가격에는 목적지 도착을 위한 기체의 이용 + 승무원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정중한 친절’”이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위 프라이빗 터치(Private Touch)’에 비용을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삶 자체는 이러한 접촉만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접촉과 관계는 돈을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참 얄궂은 것이 인간이 삶에 기대하는 태도다. 이제 세상은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없다는 듯, 시장의 도덕적 한계가 붕괴되고 있다. 생명과 죽음까지 거래 대상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어 아마 우리의 민법 103조   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면 무효라는 조항은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다.

 

소설로 돌아가서, 돈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란 우리가 기대하거나 꿈꾸던 대로 행동해주기를 주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호의나 타인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느끼는 호감이나 충직함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감정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람들은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삶의 기대란 어떤 강력한 권력이나 돈으로 강요해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막대한 재력이나 특권을 가지고도 넘을 수 없는 이 벽이 자신들을 갈라놓을 때, 이들은 특권을 내려놓고 진정성이란 것을 찾아 나선다. 우리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곧잘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재벌총수가 뒤늦게 순수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것이나, 대중 속에 은근히 다가서려는 사회관계망 속에 나타나는 행위 등등을 이러한 징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물음으로써 존재주식회사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거래의 대상이 되었지만 친밀하거나 공식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상생활의 본질적 본분이며 그 결과 저 자질구레한 패배, 비웃음, 근심, 반목, 경멸에 우리는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때문에 돈 주고 피할 수도 없으며, 결국 개인의 운명에 달린 문제로 이해될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지점을 거대한 일상생활의 서비스 산업으로 삼은 기업이다. 즉 인간의 모든 삶을 강력한 서비스 산업의 주의 깊은 통제 하에 놓아 그 어떤 우연한 사건들도 존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미리 준비된 사건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삶에서 어떤 우연도 없는 개인 자신이 원하는 삶만이 펼쳐지는 인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전 사회의 불행은, 타고난 성정과 실제 삶의 길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것, 즉 역할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삶을 개인의 타고난 성정에 부합하는 삶으로 완벽하게 일치시켜주는, 즉 개인의 의지가 타인이나 운에 의해 충돌하는 경우를 제거한 완전히 소망이 충족된 삶을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어느 고객이  엄격한 판사가 되어 사형을 언도하고 싶어 한다고 하면, ‘존재주식회사는 그 소원에 따라 사형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범죄자들이 기소되어 그의 앞에 늘어서게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고객은 자기 삶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경우도 일상에서 만나지 못함으로써 그 어떤 조잡한 실패조차도 끼어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연관되는 우연의 덩어리를 조직해서 완벽하게 한 인간의 삶에 펼쳐질 모든 사건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객의 운명을 돌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모든 실패와 좌절, 장벽이 말끔히 제거된 삶을 펼쳐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 삶의 세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연적으로 태어나지도 사망하지도 못하고, 아무도 아무것도, 직접 자기 혼자서 끝까지 경험하지도 못하는데, 모든 사람의 생각 하나하나, 모든 두려움, 고통 또한 존재주식회사의 거대한 컴퓨터의 대수학적 계산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완전한 조정으로 시장 바깥의 가치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죄와 벌이라든가, 선악의 개념도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미리 마련된 삶, 책임감이라는 짐을 영원히 벗어던진 삶을 살 수 있게 된 세계만이 펼쳐진다. 일체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삶, 완벽하게 논리적 조작에 의해 주체의 자발성과 자유라는 감각과도 충돌하지 않는 조작을 만들어내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계가 진정 펼쳐질 수 있다면  누가 알겠는가, 삶은 덜 괴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소설은 비평의 글을 맺는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 우리는 어떤 대상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에 대해 거북함과 불쾌감, 부정적 의식을 느끼며, 이 감정을 느끼게 하는 본질적 요인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마 그중 가장 불쾌한 것은 인간의 생명자체를 상품으로 취급하고 우리의 도덕적 감정을 잠식하는 생명, 인륜, 개인의 자유 등에 대한 파괴의 감정들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시장의 규범이 지배하는 삶의 영역에 부패성을 내재한 시장이라는 것이 침식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미덕이나 도덕적 양식의 파괴이고, 그러함으로써 계층의 구별짓기와 소통의 단절, 적대화 등 인류 사회의 건강성 훼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여정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소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비시장적 규범에 의해 전통적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세계이다. 이렇게까지 시장이 끝까지 밀어부친 세계에 도달하면 존재론이란 것도 무용해지는 데, 인간 조건의 규명이라는 것도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갈등도 충돌도 없이 소망하는 세계만이 펼쳐지는 삶으로, 모든 인간들이 완전히 충족하는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면 렘의 긍정적 비평처럼 제법 쓸만한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의 사기성, 그 실패로서의 예술

 

한편, 이 소설이 사기인 것은 소설의 대상인 소설에도 이야기하듯 존재주식회사는 독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합 금지법에 따라 거대한 경쟁기업인 헤도니틱스(Hedonitics)와 참삶사(True Life co.,)가 있어 어떤 고객에 펼쳐질 미래의 사건이 경쟁사 고객의 미래 사건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경쟁사들의 컴퓨터에 의한 조작이 각자 자기 고객 삶의 전개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에 조작의 격렬화(조격)’라는 대재앙이 발생한다. 소설은 이러한 재앙이 9년에 2회 발생했다고 축소 과장하지만, 이는 경쟁사간의 충돌 문제를 떠나서 인간 삶의 문제란 바로 이러한 무수한 갈등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이란 과장된 허구로, 가능성의 예술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잠깐의 허풍스러운 상상에 취하는 즐거움이면 충분하다고 관대함을 베풀면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괴짜 백만장자인 제사민 체스트 부인이란 여인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모든 조작의 개입에서 벗어난 순수하게 진정한 삶을 갈망하며 이러한 소망을 실현시켜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이미 조작된 세계에서 조작의 부재를 조작하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요청보다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이 조작의 부재 가능성을 탐구한 결과 삶의 자발성이란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임을 밝혀낸다.

 


, 오늘 우리들이 사는 삶이란 이 말처럼 어느 만큼은 이미 조작된, 미리 연출되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젠장, 정치에서의 권력이 하는 작의적인 무수한 조작들, 기업들과 상업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또한 무한한 조작들, 인간들 간의 자질구레한 인위적이고 전략적 조작들 속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이 조작들의 개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삶을 산다는 요구야말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 번에 지금까지의 존재주식회사의 세계는 한 방에 와해되고 만다. 한바탕 꿈속을 거닐다가 추락한 느낌이다.

 

삶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존재론이란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모든 규정이 지워지는 어둠이다.”라는 말이 성큼 마음 깊은 곳을 깨어나게 한다. 존재론은 거절당한 자의 사유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를 읽기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철학자 이진경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 썼다. 이렇게 생각하면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존재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시키려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취약함을 간취하고, 모호한 다의성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 것이라는, 존재의 확실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유없이 말려들게 되는 운명적 사태를 보여주려 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 방에 와해되었다고 느낀 것,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소설 Being Inc.의 드러난 사기성, 그 실패란 뜻하지 않은 것을 보게 함으로써, 세계의 진실은 실패 속에 있음을, 비록 존재주식회사라는 과학의 성공을 향한 걸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실패를 향해 감으로써 진실을 보여준다는 정말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존재는 밝은 빛으로 비추면 달아난다고 한다. 인간 존재의 가변적이며 모호한 존재를 붙잡는 것은 이렇듯 실패의 예술을 통해서만 어렴풋 다가서는 것일 테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들은 하나의 에피소드적 상상력이자 아이디어에 대한 실험 사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을 불가해한 인간 존재를 탐험하는 미래의 철학자라 말하지만 나는 그를 타고난 예술가라 말하고 싶다. 그는 결코 근거의 확실성을 확인하고 진리와 거짓을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이가 아니라 단지 지금 여기없는 것들을 불러내는 예술가인 까닭이다. 뒤늦게 예술작품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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