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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 - 삼국지 박사 이은봉의 한중일 삼국지 문화사
이은봉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8월
평점 :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 : 삼국지 박사 이은봉의 한중일 삼국지 문화사> 이은봉 / 천년의상상 (2016)
[My Review MMCXXXVII / 천년의상상 12번째 리뷰]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어봤는가? 솔직히 21세기에 <삼국지>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책일뿐, 읽었다고 해서 그렇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라는게 요즘의 중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지>의 내용이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을 틈타서 수많은 군웅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 '러우 전쟁'이 발발하고, '이팔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이 전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환장의 시대를 연 덕분에 다시금 '혼돈, 그 자체'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 책이 출간된 2016년 때만 하더라도 '세계화'가 판을 치고 있던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삼국지> 같은 고리타분한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삼국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앞서 말한 어지러운 세상이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고전읽기'는 시기적으로 아주 딱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긴다. 수많은 <삼국지> 가운데 뭘 읽으면 좋단 말인가? 우리 나라 책으로는 가장 유명한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가 있다. 또 <황석영의 '정역 삼국지'>도 있고, <김홍신의 '쉽게 풀어 쓴 삼국지'>도 읽을 만 하다. 그밖에도 <설민석의 삼국지>,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 등등 수많은 <삼국지>가 있기 때문에 정말 고민이 될 만하다. 모처럼 큰 맘을 먹고 '전10권'을 사서 읽으려고 해도 뭘 사서 읽으면 좋을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독성'과 '가성비'까지 좋은 <삼국지>가 바로 일본작가 요시카와 에이지의 <원전 삼국지>도 있다. 그럼 중국판도 있을까? 잘 찾아보면 '모종강 편역'이라고 적혀 있는 <삼국지>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뒤쳐져(번역되어) 있기에 읽는 대에는 문제가 없는 책들이다. 그럼 이 가운데 뭘 읽으면 좋을지 '삼국지 박사' 이은봉 저자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이 책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에는 '촉한 정통론'에 대한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촉한 정통론'에 입각해서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쓴 것이 어찌하여 '역사소설'로 읽히게 되었고, 이것이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이해하면 <삼국지> 10번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생각 정리가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해서 요점만 딱 짚어 풀어내려 한다. 사실 이 책은 '대학논문'처럼 깊이 있게 파고 들어서 '초심자'가 읽기에는 불편한 책이기에 그렇다.
먼저, <삼국지연의>가 '역사소설'로 가치를 인정받게 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사실 <삼국지연의>는 '역사서'가 아니라 허구적 사실이 가미된 '소설'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정사로 취급 받지 못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읽어도' 안 되는 책이고, '인용해도' 안 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재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역사책이 얼마나 따분한 책이냔 말이다. 읽다가 잠자기 좋은 책이라면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권하기로 유명한 책이지 않은가. 그런데 <삼국지연의>는 재미가 있다. 비록 '허구성'이 담겨 있긴 하지만, <삼국지연의>를 여러 번 독파한 이들이 '역사 지식'을 쌓고 아는 체하기에 너무 유용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식자층에서도 이를 널리 이용하려 한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의도'를 심어두기도 했다. 그게 바로 '촉한 정통론의 탄생'이다.
그럼 '촉한 정통론'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에서는 위촉오 삼국통일의 위업은 '위'가 달성했다. 그 뒤를 이어 '진'으로 이어졌고,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남북조' 시대가 열렸기에, 이를 합쳐서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본다면 <삼국지>의 주인공은 당연히 '조조'가 되어야 한다. 비록 조조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조비가 '위 황제'에 등극했지만, 조조가 기틀을 다잡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삼국지연의>에서는 과감히 '유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왜 그랬을까? 바로 여기에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셈이다.
나관중은 원말명초 시대를 살아간 '명나라 사람'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폭정에 신음하다 다시 세운 '명나라'는 한족이 주축이 되어 되찾은 것이다. 그 한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던가? 바로 '한(漢) 고조' 유방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그 유방의 후손이 바로 '유비'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촉한 정통론'에서는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교묘하게 유비의 행적에서 '한 고조'를 떠올릴 수 있게 짜놓은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유비가 주인공이 되어 온갖 좋은 일은 유비의 몫이 되고 만다. 이렇게 유비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조조'는 온갖 악행의 주역을 도맡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더 신랄하게 비난조로 그렸고, 역사적 사실에 없는 내용이라도 '조조'가 하는 일이라면 나쁜 일이 되도록 써내려간 것이 바로 '촉한 정통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촉한 정통론'의 결정판이 바로 청나라 사람인 '모종강'이 저술한 <삼국지>(모종강편>가 되겠다. 오늘날 대부분의 <삼국지>는 이 '모종강편'을 기본으로 삼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모종강편'은 어려운 한자어휘가 많기 때문에 '직역'에 가깝게 뒤쳐낸 <삼국지>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상당히 불편한 책이다. 물론 중국의 대중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풀어 쓴' <삼국지>도 많고,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은 이미 '뒤쳐진(번역된)' <삼국지>를 읽기 때문에 이미 '읽기 쉽게 풀어 쓴' 경우가 많아서 큰 상관이 없지만, 간혹 <모종강 원본>이라고 적혀 있는 책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촉한 정통론'에 어떤 정치적 의도를 심어 두었는가? 중국에서는 '한족 중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친다면, 한국과 일본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삼국지연의>를 널리 읽히려 했던 것일까? 두 나라에서 강조한 것은 바로 '충'이라는 유학적 이념을 널리 전파하려는 목적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삼국지>의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화염공격을 받고 궤멸되는 장면에서는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고,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만들 때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밖에도 장비가 장판교에서 고함을 치자 조조의 군대를 비롯해서 산천초목이 부들부들 떨었다는 이야기에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고, 관우가 주군인 유비의 두 부인을 구하기 위해서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형님의 소식을 접하고 '오관육참'을 하는 장면에서는 충성과 의리를 다하는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막부 정권'에서는 무사들의 '충' 의식을 저변에 깔기 위해서 <삼국지>를 널리 보급했고, 그로 인해 유학(주자학)이 뒤늦게 전래된 일본에서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무사를 양성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근대에 들어서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달래줄 '영웅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유비를 적극 활용하였고, 일본에서는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삼국지>를 널리 읽혀서 전쟁참전을 유도했고, 실제로 중국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는 일본군은 <삼국지>에 나오는 '지명'의 익숨함을 활용해서 책속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가상현실(?)'을 느낄 정도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실감을 하는 착각을 이용할 의도였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저작물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원전 삼국지>'다. 모종강 원본에 비해서 '없는 내용'을 새로 지어낼 정도로 거의 '창작의 수준'이었지만, 읽기 쉽게 서술된 이야기로 가독성을 높이고, 앞뒤 문맥을 매끄럽게 이어지게 만들 의도로 '없던 내용'도 새로 지어서 이어 붙였다고 한다. 거기에 '일본색(잔인하고 야함)'을 잔뜩 불어넣어서 일본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익숙하게 만들어서 가히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에도 요시카와 에지이의 <삼국지>가 한국독자들에게 가장 널리 읽혔다고 한다. 1988년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가 나오기 전까지 그랬고, 실제로 박태원, 박종화, 김구용, 황석영으로 이어지는 <삼국지> 계보도 나름 유명하지만,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읽힌 <삼국지>는 요시카와 에이지와 이문열, 두 사람의 책이다.
그럼, '요시카와 에이지'와 '이문열'의 <삼국지>가 읽을 만한 책인가?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책이다. 애초에 <삼국지>가 갖고 있는 '촉한 정통론'에도 충실한 소설이고, 나름 '가독성'도 좋아서 술술 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요시카와의 <삼국지>는 '중일전쟁' 당시 신문에 연재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참전시킬 목적으로 쓰여졌다. 이런 의도를 모르고 읽으면, 그저 재미난 소설에 불과할 텐데, 이왕지사 알고 나면 '일본인의 저열한 의도'가 엿보여서 살짝 거부감이 들 것이다. 한편, 이문열은 스스로 커밍아웃한 바대로 '보수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했다. 스스로도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했으니, 그가 평역한 <삼국지>에 어떤 의도를 담았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의 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담겨진 '영웅의 그림자'가 독재정권을 그리워하고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렇기에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는 88년 당시의 보수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이문열이 그린 '영웅 유비'는 그쪽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반대하여 출간한 책이 바로 '황석영의 <삼국지>'다. 박태원, 박종화, 김구용, 황석영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있다고 밝혔는데, 그 가운데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도 꽤 주목 받았다. 물론 최근에는 '황석영의 <삼국지>'도 나름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의식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를 구분해서 읽기는 힘들 것이다. 뭐, <삼국지>의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이니 말이다. 그 차이를 구분하려면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영웅에 대한 묘사'에서 무엇이 연상되는지를 떠올려야 한다. 유심히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그 묘사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점을 극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무사도'를 일깨우기 위해서 저술한 일본판 <삼국지>를 읽다보면 확연히 티가 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책에 이런 '무사도'를 아주 잘 나타냈는데, 일본에서 정말 유명한 '주신구라 이야기'에서 보여준 일본인들의 특색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신구라'의 주요 내용은 '49명의 로닌(방랑무사)이 주군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복수를 자행하고 재판정에 자수를 했는데, 자신들이 저지른 참혹한 살해에 대한 재판 결과가 '할복자살'을 하는 것이었단다. 일본 무사에게 '할복'은 명예로운 죽음이니, 이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판결에 만족하고 '전원 할복'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는 외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상하고 끔찍할 뿐이겠지만, 일본인들은 오늘날에도 '주신구라'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연극(가부키),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왜냐면 이들이 저지른 끔찍한 행동에서 무사들이 꼭 지켜야 할 '충'과 '의'를 끝끝내 지켜냈고, 이 의무를 다 마친 무사들이 명예로운(?) 할복 자살을 하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감동이 터져나온다는 것이다. 이 '주신구라'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주제'라고 한다. 바로 이런 특색이 담긴 묘사가 <삼국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의 <삼국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판 <삼국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매력(?)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삼국지>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런 '욕망'이 담겨 있단다. 각 시대마다, 나라마다, 저마다의 욕망을 담아 '서사'로 표현해냈고, 구체적인 의도를 담아서 과감히 '변용'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삼국지> 좀 읽어봤다는 사람이라면 이런 욕망을 적절히 걸러내며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걸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중일전쟁' 당시에 전쟁터로 끌려가는 꼴을 면치 못한 수많은 젊은이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촉한 정통론'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유비는 착한 놈, 조조는 나쁜 놈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저열하고 옳지 못한 욕망덩어리를 잘 걸러내고 <삼국지>를 읽어야 제 맛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