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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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II / 열린책들 11번째 리뷰] 뭐랄까. 아멜리 노통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우리말로는 '기괴하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천사의 얼굴을 하고선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은 그녀의 처녀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살인자'에게 건강법 같은 걸 묻다니, 말이나 될 법 한가? 그런데도 묘하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말이 된다. 물론 책을 덮고 나면 찝찌입~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 <머큐리>도 그랬다.

  소설속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평을 하자면 '쓰레기' 같다. 이 책 <머큐리>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바로 두 영화였다. 하나는 정지우 감독, 박범신 원작의 <은교>였고, 다른 하나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였다. 두 영화 모두 '예술성'에서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영화의 소재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탐하는 남자의 추한 본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노통의 <머큐리>도 그런 '추한 본성'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76세의 마도로스 출신의 늙은 선장이 22세의 젊은 여성을 양녀로 삼아 '외딴섬(모르트프롱티에르 섬: '죽음의 경계'라는 뜻)'에 살면서 밤마다 그녀의 침대로 들어가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면서도, 그 행위를 '사랑'이라 표현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영화 <나쁜 남자>에서도 깡패 새끼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을 성폭행하고,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서도, 그 모든 일이 '너무 예뻐서' 그랬고, '사랑했기'에 그랬다는 식으로 풀어냈다. 또 영화 <은교>에서는 칠순이 넘은 늙은 작가가 여고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회춘'하는 듯한 행동을 일삼다가 '그녀'가 젊은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몰래 엿보고서는 시기와 질투심에 살인 충동까지 갖게 된다는 스토리는 살짝 역겹기까지 했다. 심지어 원작 소설을 쓴 박범신 작가는 실제로 '젊은 여자'에게 추근대며 "너는 나의 '은교'야"라는 말을 던지며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는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이 밝혀지자, 그의 소설조차 추악하기 그지 없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이처럼 '늙은 남자'와 '젊은 처녀(18~22세)'의 육체적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며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사랑에 '나이'와 '국경'이 문제될 것은 없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무르익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76세의 남자와 22세의 여자가 서로 '54살 차이'를 극복하고서 찐사랑을 했더라면 오히려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두 남녀가 지내는 곳이 '외딴섬'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젊은 여자는 18살부터 무려 5년간이나 그 섬에서, 아니 늙은 남자가 설계하고 직접 만든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창문'을 그녀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서 '바깥'을 전혀 볼 수도 없다. 집안 어디에도 '거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울 뿐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욕실과 화장실에도 '물'을 받아놓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사물을 비춰볼 수 있는 '매끈한 은붙이(쇠붙이)'조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그런 곳에서 무려 5년 동안 지낸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늙은 선장은 그녀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젊은 육체를 탐했다. 그런데도 늙은 선장은 그녀를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절대 '감금'이나 '강간' 같은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잠그지도 않았고, 그녀가 '거부했다면' 침대로 들어갔다고해도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로 그녀가 '처녀'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18살의 소녀와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녀가 뜻밖에도 '처녀'였기에, 서로 사랑한 증거라니...심지어 늙은 선장은 이 소녀가 '첫사랑'도 아니었다. 그녀 이전에 또 한 명의 소녀를 바로 '이 섬'에서 감금하고, 강간했었더랬다. 그 소녀를 범했을 때도 그는 '사랑'이었다고 당당히 말한다. '강제'는 전혀 없었으며, '그녀들'이 원했기에 사랑을 나누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 첫번째 소녀가 늙은 남자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두번째 소녀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모두 '외딴섬'에서 '거울'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소녀의 공통점은 모든 남성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가 어째서 늙고 못생긴, 뱃사람이라서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이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선사하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남자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섬'을 통째로 살 정도로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이고, 칠순이 넘어서도 발딱발딱 세울 수 있는 '정력' 뿐이었을텐데 말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 '처녀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늙은 선장은 두 소녀 '아델'과 '하젤'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하고서 다른 남자가 채가기 전에 '납치'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우연한 사고'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델의 경우에는 '화재'였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아델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다가 우연히 불이 나자, 그녀와 춤을 췄던 젊은 미남자들은 그녀를 홀로 남겨두고 저들만 살겠다고 화재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늙은 선장이 그 화마속에서 아델을 구해서 탈출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아델을 구해낸 늙은 선장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서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불이 붙은 장소에서 벗어났는데도 아델의 얼굴을 가린 천은 벗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 아델은 안정을 찾았고 화재에 의해 다친 곳이 없는지 '거울'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늙은 선장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몰래 '이상한 거울'을 마련했다. 얼굴이 일그러지게 보이는 거울을 말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를 품고 있던 아델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청을 하자 마지못해 거울을 건내주는 늙은 선장의 '배려심'에 살짝 감동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속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아델은 비명을 지르고 기절해버리고 만다.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델은 늙은 선장과 '외딴섬'에서 살게 되었고, 이렇게나 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을 끔찍하게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늙은 선장과 '첫경험'을 하게 된다.

  하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온가족이 죽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하젤은 '야전병원'에서 얼굴을 천으로 가린채 누워 있었다. 그러다 늙은 선장은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는 하젤을 두 팔에 안아 돛배에 싣고 '외딴섬'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하젤에게 '그 거울'을 보여준다. 거울속에 비친 흉측한 얼굴에 충격을 받은 하젤은 그 뒤로 다시는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모를 잃은 고아소녀를 살뜰하게 보살핀 늙은 선장은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고아소녀에게 욕정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늙은 선장은 '하젤'의 얼굴에서 15년 전 자살을 한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젤이 자신의 품으로 오게 된 것을 '신의 섭리' 또는 '아델의 환생'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끔찍하고 더러운 변태가학적 성행위가 이어지는데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추악한 성범죄 현장'속으로 뛰어든 '간호사의 등장'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호사도 늙은 선장이 살고 있는 '외딴섬'으로 겁없이 들어가 '하젤'을 만나고, '아델의 자살'에 석연치 않은 점을 밝혀내고, 늙은 선장의 추악한 욕정과 요상한 궤변에 맞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고 어여쁜 간호사가 '탐정' 못지 않게 성범죄를 밝혀내고, '탈옥수' 뺨치게 외딴섬을 탈출하는 장면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충격적인 결말'은 아멜리 노통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찝찌~입한 것은 왜일까? 그건 '간호사'가 외딴섬에 감춰진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내면서도 때때로 성범죄자의 궤변에 "그럴 수 있죠"라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대목 때문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성범죄'를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함께 '추악한 변태성욕자들의 유쾌한 변명거리'로 악용될까 두렵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프랑스의 성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참작하더라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불편함은 '노통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존의 관습'에 대해 딴죽을 걸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깊은 생각(사고)을 유도한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냐고 말이다. 과거로부터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해 노통은 딴죽을 건다. 그리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서 '이래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비정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게 과거의 것이 '비정상'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정상'은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큐리>에서도 76세의 남자가 22세의 여자를 사랑이 '정상'이냐고 묻는 시점이 '20세기 초'다. 15년 전에, 61세의 남자가 18세 소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어떠하냐고 묻는 때가 '19세기 말'이었다. 그리고 노통이 <머큐리>를 세상에 발표한 해가 1998년이었다. 무려 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 셈이다. 우리나라도 20세기 초까지 '조혼 풍습'이 있었고, 19세기 이전에는 할아버지가 손녀뻘의 어린 처자와 혼인이 불가능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머큐리>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일들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서구 유럽에서도 18~19세기에는 돈 많은 늙은 남자가 젊고 예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큰 흠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독자들은 과연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난 꽤나 불편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늙은 남자의 추태로 보일 뿐이고, 성숙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젊은 여성을 '가스라이팅' 해서 육체관계를 허락케 하는 추악한 성범죄로밖에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추태와 추악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숭고하게 여기게끔 만든 작가의 궤변이 매우 불쾌했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고전문학'일지라도 시대와 세태가 바뀌면 '달리' 해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 시대에 걸맞게 '올바른 가치관'을 반영시켜 더욱 뜻깊은 철학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철학'이랍시고 꼴랑 허리하학('형이상학'의 반대말)적으로 겨우 꼬추를 세우는 일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물론 '노통의 소설'이 모두 이럴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딴에는 이 소설을 <미녀와 야수>의 '다른 버전'이라고 소개하는 모양인데, 동화속 야수는 적어도 '젊은 미남자(신분은 왕자)'가 마녀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결코 '늙고 못생긴 변태성욕자'는 아니었기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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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의 격 - 일류 카피라이터의 31가지 카피 수업
사카모토 와카 지음, 이미정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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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I / 한빛비즈 145번째 리뷰] 광고의 꽃이라고 불리는 '카피라이터'에 대한 책이다. 딱히 '광고문안(카피)'을 잘쓰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과 카피가 '어떻게' 작성되는지, 그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안내서라는 소개가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좋은 카피는 '어떤' 것일까? 그건 바로 '진심'이 묻어 있어 쉽게 '공감'이 가고 긴 '여운'을 남겨 모두의 '기억'에 오래 남는, 또는 '한번' 보면 딱하고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예로 저자가 직접 작성한 카피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가자, 동북으로]라는 JR 히가시니혼 신칸센철도를 홍보하는 문안이었다. 일본은 사상 유래가 없는 '지진해일 피해'로 동북지방이 큰 화재를 겪었는데, 일본정부는 이곳 동북지역의 신칸센 철도를 빠르게 복구하여 피해지역의 경제를 회생시키려 노력하였다. 허나 동북지역은 화마가 다 쓸고 지나간 탓에 '지역경제'가 더디게 회생하고 있었는데, 저자의 광고문안으로 '피해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줘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동북지역의 경제회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카피라이터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단 6글자만으로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이 책을 '카피라이터 지망생'만 읽으라고 하기엔 아쉽다. 분명 책의 내용은 '카피라이터'가 갖춰야 할 사고법과 표현법, 그리고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자세 등등 유용한 팁이 가득 담겨 있지만, 학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범학문적인 연구가 펼쳐지는, 이른바 '통섭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인데, 어찌 이 책을 '카피라이터가 되는 법'으로만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전문직업인'이 갖춰야 할 사고법과 표현법, 그리고 자세 따위는 서로 통하는 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두루두루 지식을 섭렵해두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인을 비롯해서 서로 연관이 없을 듯한 '직업인'일지라도 유용한 일이 틀림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독서토론논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아마추어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리뷰를 써서 짭짤한 수익을 내지 못하니 분명 '프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리뷰어로 활동하면서 '카피라이터'에 관한 지식을 읽어가다보니 일맥상통한 점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리뷰어로 활동을 하다보면 이른바 '공짜책'을 받아 리뷰를 쓰는 경우가 참 많다. 그 '공짜책'을 받기 위해서 출판사 이벤트에 선정이 되어야 하는데, 보통 '인상적인 짤막한 댓글'로 신청을 받고, 그 '댓글의 참신함'만으로 이벤트 선정을 하는 곳이 상당히 많았었다. 물론 지금에는 그런 이벤트가 드물어졌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블로그의 '조회수(인기도)'를 살펴보고 홍보가 더 잘 될만한 유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암튼 내 경우에는 '댓글신청'으로 선정된 적이 참 많았다. 그리고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인데, '책 살 돈'이 넉넉치 못했던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여 욕구해소를 했었는데, '최신간'을 보고 싶을 땐 어쩔 수 없이 부담이 되어도 사서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맞게 내 빈약한 지갑을 걱정하듯 '리뷰 이벤트' 붐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빠르게 이곳저곳 신청을 하곤 했었다. 다행히 [평범한 리뷰가 아닌 독특한 리뷰를 원한다면 나를 뽑아달라. 안 뽑아주면 두 번 다시 신청하지 않겠다]는 반협박(?)적인 신청댓글이 인상적이었던지 덥석 뽑아주더니 오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선정이 되면서 '연간 200여 권 이상'을 공짜책을 받아 리뷰를 하는 리뷰어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청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밋밋한 신청댓글'로는 선정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해서 나는 '평범하지 않은 신청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신청글'을 짤막한 '이야기'로 바꾸어 썼고, 그 이야기속에 '신청책'에 대한 남다른 사전지식을 뽐내거나 겉표지나 책제목만 보고도 책내용을 미루어 짐작하는 등 좀더 치밀한 전략으로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속에는 '꼭 보고 싶다'는 나만의 열의를 뿜뿜했고 말이다. 그 가운데 '성냥팔이 소녀'를 차용해서 써낸 신청글도 있었는데, 그 신청글을 써서 '책선정'에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용을 살짝 소개하자면 이렇다.

  "책 좀 주세요. 책 좀 주세요. 책이 정말 보고 싶어요. 아이, 추워"
  "소녀야, 넌 이 추운 한겨울에 왜 맨발로 있느냐?"
  "책이 정말 보고 싶은데...책 살 돈이 없어서 그래요. 아이, 시려"
  "너에겐 책보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신발과 장갑을 주는게 더 나을 것 같구나"
  "아니에요. 저는 그래도 책이 더 좋아요. 책 좀 주세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아이구나. 그래 무슨 책이 보고 싶으냐?"
  "네, 제가 보고 싶은 책은 <만화로 보는 웹툰 스토리 작법>이에요"
  "오, 한빛비즈에서 얼마전에 출간한 새책이구나. 그래, 그 책이 왜 보고 싶으냐?"
  "네, 그 책은 [재미란 무엇인지]부터 유용한 지식을 [더 쉽고 더 유쾌하게] 일러주는 웹툰형식의 책이기 때문이에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유용한 지식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그 책만이 아닐텐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한빛비즈>에서 출간한 교양툰이 얼마나 재밌고 유익한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욧!"
  "알았다, 알았어. 그렇담 내 그 책을 선물로 주마"
  "정말 고맙습니다. 꼭 알찬 리뷰로 보답할게요"

  이 책 <카피의 격>에도 '성냥팔이 소녀'에 대한 예시가 적혀 있기에 오랜만에 다시 적어 보았다. '기본 포멧'은 이런 형식이었지만 꽤나 다양한 변주로 써먹었기에 '이벤트 선정'과는 무관하게, 늘 신선하게(?) 써내려가는 내 신청댓글에 관심이 폭발하기까지 했었다. 이밖에도 (") 요로케 생긴 '도둑고양이'를 등장시켜서 이벤트 책을 훔쳐오는 스토리를 전개시켜 이벤트 담당자를 혼란케 했었고,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무작정'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 어쨌든 '책을 보고 싶다'는 내 진심을 담았기에 이벤트 담당자도 '초보'였지만 성실한 리뷰어였던 나에게 기회를 많이 줬던 것 같다.

  어쨌든 훌륭한 카피는 '진심'을 바탕으로 작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럴 듯한 문구'를 쓰거나 '과장이 담긴 문구'로 쓴다면 결코 '탁월한 한마디'가 될 수 없다. 길게 쓸 필요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진짜 전하고 싶은 것'만 남겨 짧게 전달해야 더욱 강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카피에 걸맞는 '뛰어난 제품'이어야 소비자의 신뢰를 잃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제품'이 틀림없다면 그에 걸맞는 '훌륭한 카피'로 제품의 가치를 더해주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카피를 작성하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다. 10글자도 안 되는 짧은 문구를 쓰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직접 작성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창작의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탁월한 한마디'를 만들기 위한 '사고법'과 '표현법'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저자는 '떠오르는 것'을 바로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머릿속에도 남겨두지 못하는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을 리 없기 때문이란다. 이는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지만 이유를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광고의 힘'이 짧지만 오래 기억되는 것이란 점을 단박에 이해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카피라이터들이 저자의 방식대로 하지는 않는단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않게 바로바로 적어 두었다가 마땅한 문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들춰보는 방식을 쓰는 카피라이터들도 많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대로 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저자의 방식으로 리뷰를 작성하고 있기에 정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일방적인 주장'만을 담은 카피를 작성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건을 파는 쪽에서는 '자신의 제품'이 자식처러 느껴져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물건을 사는 쪽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제품을 놓고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카피를 할 때에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공감'을 끌어내야 한단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의 '공통점'을 살펴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으로 카피를 작성해야 더 효율적이란 말이다. 그리고 공감은 더 나아가서 '공명'을 일으키게 된단다. '공명'이란 "여기, 여기 붙어라"라는 것처럼 팬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공명'은 되도록 긍정적 표현으로 나타내면 더 효과적이란다. 이를 테면, 애써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를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게 되면 '공명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그런데 이때 상사는 직원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 하고, 부하직원은 '더 적은 일'을 하려 들 것이다. 이럴 때 상사가 좋아하는 부하직원은 "그러면 제 업무가 늘어나겠네요"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닌 "그럼 제 업무의 폭이 더 넓어지겠네요"라고 긍정적인 표현을 쓰는 쪽일 것이다. 비록 같은 맥락의 대답이지만,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 표현'을 쓰면 상사는 부하직원이 믿음직스러울 것이고 인사고과에도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부하직원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투덜대기보단 '긍정적 표현'을 씀으로써 유능한 직원이란 평가를 받을 테니, 마냥 손해보는 일은 아니게 될 것이란다. 물론 현실적인 상황에서 늘 이렇게 '낭만적인 귀결'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산포(三方)요시'라는 말이 있단다. 일본어로 '요시'는 '좋다'는 뜻이니,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세 방면으로 좋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 때 "파는 사람에게 좋고, 사는 사람에게 좋고, 세상에 좋아야 한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을 모토로 삼은 상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뜻으로 '홍익인간'이란 표현이 있으니 비슷한 뜻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고조선부터 '국가정책'으로 쓰던 표현이고, 일본은 '상도덕' 관점에서 쓰던 표현이니 쓰임새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오늘날 기업문화의 윤리적 차원에서 꼭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피라이터도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만 치중해서 카피를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제품을 쓴다는 자부심까지 헤아려서 카피를 만들게 되면 더 좋을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멋진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파타고니아'의 제품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제품'을 만들고, 그럼에도 제품 자체가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으니 아예 [우리 옷을 사지 마세요]라는 광고를 한 덕분에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끈 브랜드가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파타고니아 이야기> 한빛비즈 참조)

  이밖에도 이 책에는 '카피라이터'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지혜가 담겨 있다. 카피라이터가 꿈인 지망생이라면 '직접적인 지식'을, 그밖의 사람들이라면 '간접적인 지혜'를 얻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그런 진심을 담아 자신의 '카피'를 소개하였고, 그 카피를 만들게 된 '과정'을 낱낱이 밝혀내어 독자들에게 '유용한 팁'을 전수해주었다. 꼭 글을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직장인들이 알아두면 좋을 '마음가짐(자세)'도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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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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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 / 문학세계사 2번째 리뷰] 우리에게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의 원래 제목은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프랭크 바움이 쓴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출간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독자들이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후속작'을 써달라고 요청을 했고, 이에 바움이 첫 책을 출간한 지 1년 뒤에 '후속작'을 쓴 것을 시작으로 무려 14편의 시리즈를 펴냈고, 그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무려 100년도 더 된 1900년에 쓰여졌다. 이렇게나 오래된 동화책이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어린들을 매혹한 까닭은 무엇일까? 안델센이나 라퐁텐의 동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공주와 그런 공주를 찾아다니는 백마 탄 왕자가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온갖 동물과 사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마녀가 등장하는 '환상의 나라' 오즈에서 뜻밖의 모험을 펼치기 때문에 현대의 어린이 독자들도 쉽게 빠져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것이 더 '환상적'일지도 모르겠으나 말이다.

  암튼, 14편이라는 대작의 첫 번째 이야기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캔자스에 살고 있던 도로시라는 소녀가 엄청난 소용돌이(토네이도)에 날려가다 우연히 도착한 '오즈'라는 나라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다. 그렇게 도착한 도로시는 도착하자마자 사고를 치게 된다. 바로 바람에 실려 날아간 집이 '동쪽나라의 마녀'의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즉사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도로시가 원했던 것이 아니지만 '나쁜 마녀'에게 시달리던 뭉크킨(오즈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뭉크킨 사람들은 도로시에게 감사를 표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도로시는 원래 살던 캔자스로 돌아가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슬퍼할 아저씨와 아줌마가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즈에 살고 있는 뭉크킨들은 '캔자스'가 어디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어 도와줄 수가 없게 된다. 이때 마침 '나쁜 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착한 북쪽 마녀'가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오즈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위험과 마주할 수 있으니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키스 마크)'을 도로시의 이마에 찍어준다. 그리고 동쪽 마녀가 죽고서 남겨둔 '은구두'도 챙겨 신고 말이다.

  그렇게 떠난 길에 도로시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그리고 '사자'를 동료로 만난다. 이들도 각각 오즈에게 말할 소원을 갖고 있는데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싶어 했고, 양철 나무꾼은 '마음 따뜻한 심장', 그리고 사자는 겁이 많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였다. 그렇게 도로시와 세 명의 동료는 오즈를 찾아 함께 떠난다. 물론 도로시와 함께 오즈의 나라에 도착한 강아지 토토도 함께 말이다. 그리고서 이들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숱한 모험을 겪게 된다. 그때마다 허수아비는 '반짝이는 생각'으로, 양철 나무꾼은 '따뜻한 마음'으로, 겁쟁이 사자는 '물러서지 않는 용기'로 위기의 순간을 이겨내게 된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에매랄드 성'에서 오즈와 만나게 되지만, 오즈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서쪽 나라의 마녀'를 죽이고 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또다시 모험을 떠나게 된 '도로시 일행'은 나쁜 마녀의 강력한 힘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꼼짝하지 못하게 당하고, 도로시와 사자는 마녀의 노예로 잡혀가게 된다. 서쪽 마녀는 도로시가 신고 있는 '은구두'를 뺏기 위해 도로시와 사자를 당장 죽여버리려 하지만,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이 새겨진 도로시를 어찌하지 못하고, 도로시는 사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죽더라도 마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노예처럼 마녀의 시중을 들던 도로시는 서쪽 마녀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서쪽 마녀에게 물을 끼얹어셔 죽여버리고, 마녀가 갖고 있던 '황금모자'를 이용해서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사자와 함께 오즈가 살고 있는 에매랄드 성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제 오즈가 도로시 일행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오즈는 '위대한 마법사'가 아니라 '위대한 사기꾼'이었다. 오즈라 불리는 아저씨도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서커스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열기구에 올랐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곳, 오즈까지 날아오게 되었고, 하늘에서 날아온 아저씨를 '위대한 마법사'로 착각한 오즈의 사람들은 그를 왕처럼 모시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기꾼의 기술을 이용해서 마녀가 살고 있는 '오즈'를 잘 다스려왔지만, 나쁜 마녀가 살고 있는 동쪽과 서쪽의 마녀를 처치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쁜 마녀들이 에매랄드 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까닭도 역시 '사기꾼의 기질' 덕분이었다. 그러다 동쪽 마녀를 단번에 죽여버린 도로시를 이용해서 서쪽 마녀까지 없앨 수 있었으니, 비록 사기꾼에 불과했지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사자의 소원을 일사천리로 들어주며 해결을 하지만, 도로시의 소원인 캔자스로 되돌아가기는 '속임수'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즈는 거대한 열기구를 만들어서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약속했지만, 약속시간에 토토가 달아나는 바람에 도로시를 태우지 못한 열기구가 훌쩍 날아가버리고 만다. 홀로 남겨진 도로시는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이제 도로시 일행들은 착한 마녀가 살고 있다는 오즈의 남쪽나라로 향한다. 그 사이에 허수아비는 에매랄드 성의 왕이 되지만 남쪽으로 함께 떠난다. 자신들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 도로시의 소원이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남쪽 마녀 글린다가 살고 있는 곳까지 찾아갔지만, 마녀에게는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로시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왜냐면 동쪽 마녀가 신고 있던 '은구두'에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쪽 마녀가 탐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기뻐서 얼른 '은구두'를 이용해 토토와 함께 아저씨와 아줌마가 살고 있는 캔자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위대한 마법사 오즈>에 깔려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뛰어난 자산과 재능을 갖춘 능력자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란 말이다.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갖고 싶어한다.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자신'의 몸뚱이로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뇌'를 가지게 되면 그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나러 모험을 떠났지만, 허수아비의 소원은 이미 모험을 떠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허수아비가 일행이 위기에 겪을 때마다 '뛰어난 판단'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양철 나무꾼도 마찬가지다. 차디찬 양철로 자신의 몸을 바꾸어 버리자 자신에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그건 사실 뭉크킨 처녀와 너무나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었다. 이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도 늘 겪는 아픔이다. 그래도 차가운 마음이 아닌 뜨거운 심장을 갖고 싶었던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 일행과 모험을 떠나면서 '따뜻한 마음'을 되찾게 된다.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단단하고 튼튼한 '몸'을 이용해서 도로시 일행을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다. 이는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겁쟁이 사자는 어떠했는가? '동물의 왕'답지 않게 조그만 몸집의 강아지 토토와 들쥐를 보고도 깜짝 놀라는 겁쟁이처럼 보였지만, 이는 사자가 '착한 마음'을 지녔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왜냐면 사자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무서운 괴물과도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용기가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도로시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 '사자의 용맹함'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떠난 모험은 진즉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로시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힘'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다. 바로 오즈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동쪽나라 나쁜 마녀'의 은구두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부터' 능력을 갖고 있던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와는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하지만, 이는 도로시가 '환상의 나라'에 도착하면서 갖추게 된 힘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즈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그런 힘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애초부터 소원을 이룰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이들은 '모험'을 떠난다. 왜? 그 모험은 바로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깨우치는 과정이자 동시에 계기였던 것이다. 만약 도로시 일행이 '모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써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이루고 싶었던 소원도 영원히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험은 이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읽은 독자들도 '모험'을 망설일 까닭이 없다. 아니 '모험'을 떠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모험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이라고 살짝 바꾸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색다른 곳'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몸으로 직접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 여러분들이 '독서'를 하고, '학업'을 하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직접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체험'말고 '간접체험'으로도 얼마든지 견문을 넓히고, 사고력과 안목을 높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행하는 실천력이다. 도로시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목적'을 정하고 떠나보는 것이다. 오즈에서처럼 '노란 벽돌길'을 따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미 '검증된 방법'이고, '능력자들'이 미리 걸어봤던 길이기에 아주 좋은 가이드(멘토)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떠나는 모험도 좋다. 그렇지만 때로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보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 길은 '당신이 처음 개척하는 길'이 될테니, 그 길을 통과해서 '성공'에 다다른다면 선구자가 될 수도 있고, 뛰어난 리더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애초에' 당신이 가진 능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 가운데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만큼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동화이며,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끄집어낸 실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중요한 것은 '알면, 실천하라'는 단순한 진리다. 그 진리는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으로 찬란히 빛나게 된다. 이런 진리는 '어린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시작'만 한다면 가능케 할 것이다. 진리는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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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2 - 미국의 건국과 '명백한 운명' 미국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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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 / 인물과사상사 9번째 리뷰] 거두절미하고, 이 책의 장점이 리뷰를 쓰는데는 '단점'이 되고 있어 깝깝해하고 있다. 모름지기 주제는 '하나'여야 하고, 글은 '통일'되어야, 리뷰도 뭔가 '정리'할 수 있는 법인데, 이 책은 너무나도 짧은 미국사를 다루면서도 '긍정적'인 일화를 다루다가도 금새 '부정적'인 사건을 꺼내들고, 그러다 난데없이 '이상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난삽하게 다루고 있는 통에, 전체적인 리뷰를 작성하려고 보면 '긍정적'으로 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쓰기엔 아깝고, '이상하게'라도 써볼라치면, 이건 뭐..앞뒤 맥락도 없이 산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종잡을 수 없는 글만 잔뜩 써내려가고 말아 미춰~버리겠다. 암튼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같은 리뷰가 되더라도 양해해주길 바란다.

  1권에선 '미국의 독립'을 달성하는데까지 다뤘었다. 그래서 2권에선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건국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건국의 과정을 살펴보니, 미국은 오직 '백인만을 위한 나라'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헌법'을 재정하고, '연방파와 공화파의 갈등'속에서 미국은 서서히 '팽창정책'을 펼치게 되고,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한 뒤에, 미국과 영국은 또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고,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때 '대중민주주의'가 확립되며 엘리트 지향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허나 이는 오직 '백인 남성'에 한해서 이루어진 민주주의이며, 여전히 '여성'은 배제되었고, 흑인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들은 더욱더 소외될 뿐이었다.

  이러한 '남녀차별', '인종차별'은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더욱더 심각해져만 갔다. 더욱이 미국이 '플로리다'와 '텍사스' 등 영토를 넓히려는 탐욕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들에 대한 핍박은 점점 거세져만 갔다. 미국의 남부는 '면화(목화) 재배'가 성행하였다. 이는 '값싼 노동력'이 절실하다는 것이었고, '흑인노예'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미국의 남부에는 '노예주'가 점점 늘어만 갔다. 한편, 미국인들의 '부동산 투기'는 붐을 넘어 절정에 다달았는데, 남쪽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체로키 인디언 부족을 서부로 '강제이주' 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그야말로 '죽음'을 겪어야 했는데, 강제이동 중에 수천 명이 죽었고, 탈주자는 그자리에서 '사살' 당했으며, 백인들이 마련한 '인디언 보호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했을 때의 1/10의 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인디언들은 이를 '눈물의 행렬'이라고 불렀는데, 백인들의 땅 욕심에 인디언들은 그저 죽어야만 했다는 역사를 현재의 미국인들 가운데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 중에 '멕시코 전쟁'도 포함된다. '알라모를 기억하라'는 말로 미국인들이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원래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에 미국인들이 이주해 가더니 원래 살던 '멕시코인'보다 더 많은 수의 '미국 이주민'이 들어가 살게 되자, 이들은 '멕시코 정부'에 정식으로 '독립'을 요구했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텍사스'를 돈을 주고 매입하겠다고까지 한다. 멕시코 정부는 당연히 이를 거부한다. 남의 나라에 이주해와서 '독립'을 하겠다고 말하고, 원주민보다 더 많이 이주했으니 차라리 '매입'하겠다는 심보는 뭐냔 말이다. 그랬더니 미국은 '멕시코 국경'에서 도발을 시작한다. 여차하면 '전쟁'을 벌여 빼앗겠다는 심보가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이를 눈치 챈 멕시코는 미국의 도발에도 묵묵히 참기만 했는데, 도발에 계속 이어지면서 횡포가 심해지자 드디어 미국병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멕시코 전쟁'을 일으켰고, 텍사스를 비롯해서 지금의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송두리채 빼앗아 버린다. 이런 일련의 '불명예스런 전쟁'의 시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알라모'인데, 이곳에서 멕시코 군대가 미국인들을 공격해서 전멸시켰다는 '전설'을 만들어서 불명예스런 '멕시코 전쟁'을 명예스런 전쟁으로 오도하게 만든 셈이다. 결국은 땅을 빼앗기 위해서 벌인 전쟁인데, 오히려 전쟁의 불씨를 남에게 전가시켜 버린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불법이주'를 한 뒤에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하며 빼앗는 격이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역사를 참조한 것인지? 미국 정부가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용인해주는 것인지? 근래 미국 전역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이스라엘 시위'가 확산되는 것은 미국인들의 양심이 되살아나는 증거로 봐도 되는 것일까?

  이어지는 3권에서는 '남북전쟁'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이미 2권에서 '노예제'에 대한 찬반이 격론을 이뤘는데, 미국 '건국의 시조들' 55인 가운데 흑인이나 인디언, 그리고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오직 백인들, 그것도 '엘리트 지식인'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들이 쌓은 부는 모두 '노예들의 노동력'에서 얻은 것이고, 원래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아서 저들의 잇속을 챙긴 셈이다. 그렇게 물질적인 풍요를 갖췄는데도 '미국인'들은 노예제로 '분단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는 미국의 북부와 남부의 '경제주권' 싸움이면서, 동시에 '자존심 대결'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등장은 미국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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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7 - 사부들의 죽음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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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X / 김영사 29번째 리뷰] 제 7권에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제 단황야(단지흥, 일등대사)'가 본격 등장을 하지만, 그의 등장은 곧이어 벌어진 '강남칠괴(곽정의 사부들)' 가운데 '강남오괴의 죽음'으로 인해 바로 묻혀버리고 만다. <사조영웅전>에서 '강남칠괴'는 별볼일 없는 무공을 지닌 인물로 등장해서 '동사서독 남제북개 중신통'에 비해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줄거리 전체 분량에서 1/4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곽정과 황용'의 분량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할 정도로 비중 높게 다뤄진다. 도대체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사조영웅전>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한족이 세운 나라인 '송나라(960~1279)' 시대다. 송의 시조는 '조광윤'이며 당나라의 멸망으로 '5대10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의 혼란을 정리한 강력한 나라이기도 했다. 조광윤은 후주(後周)의 어질고 뛰어난 임금이었던 세종이 죽자 군 직책인 부장을 맡았던 조광윤이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대륙을 통일한 뒤 송나라를 건국한 뒤에는 문관을 우대하는 '문치주의'를 실시하며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데 공헌을 했다. 쉽게 말하면 '지방군'을 해체시켜 '중앙군'에 집중시켜 반란을 도모할 수 없게 만들어 나라를 안정시켰단 말이다. 그리고 각 지방의 장군이었던 세력들을 '글 공부하는 서생(사대부)'로 만들고,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 관료로 취직시킬 수 있게 만들어 지방반란을 '원천차단'하는 동시에 학문을 권장하고 발달시켜 '인재'를 두루 키워내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변방(국경지대)의 군사력이 취약해지며 '북방세력(거란, 여진, 몽골)'이 차례차례 송나라의 국경을 넘보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거란침략으로 인해 '연운16주(황하 북쪽 지류)'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요나라'로 성장한 거란은 송나라의 반격과 고려침공 실패, 여진족의 성장으로 인해 멸망하였고, 뒤를 이어 여진족이 급팽창을 하며 급기야 송나라를 '남송'으로 밀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사조영웅전>은 이러한 '금나라의 팽창과 몽골의 성장'을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주요등장인물은 주로 '남송시대의 한족'으로 삼아 송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 군사에게 붙잡히며 '북송'을 멸망에 이르게 했던 '정강의 치욕'을 되갚아주겠다는 애국적(?) 거사를 주요 담론으로 삼았다.

  이렇게 탄생한 애국지사가 바로 '곽소천'과 '양철심'이고, 두 사람의 아들은 각각 '정강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곽정'과 '양강'이 되었다. 허나 곽정은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충효를 아는 '우국지사'로 성장하지만, 양강은 충성은 고사하고 애비애미의 죽음도 외면하는 불효자로 등장해서 끝내 나라를 배신하는 '금나라의 왕세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송나라의 충신들이 내린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했다는 점에서 고루하다 하겠다. 애초에 곽소천과 양철심은 망해가는 나라에 충성을 다한 결과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양강은 금나라의 여섯째 왕자인 '완안홍열'에 의해 부귀를 한몸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그래서 양강은 '선택'할 수 있었다. 가난한 친부모를 택할 것인가? 부귀한 양부를 섬길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는 망해가는 '송(한족)'을 선택할 것인가? 천하통일을 앞둔 '금(이민족)'을 섬길 것인가? 하는 고민과 상통한다. 양강의 선택은 '부귀'였으며, 이는 곧 '한족 출신'임에도 '이민족'을 섬기는 배신자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그러나 양강이 배신자로 낙인 찍혀야만 하는 것인가? 송을 건국한 태조 조광윤도 '후주의 장군 출신'이었으나 성공적(?)인 배신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사례가 부지기수일진데, 어째서 '양강'만이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이는 '실패자'에 대한 냉혹한 잣대일 뿐이다.

  한편, <사조영웅전>의 충성스런 주인공인 곽정은 '한족 출신'임에도 몽골사막에서 태어나 테무친(칭기스칸)의 아들과 의형제를 맺고, 딸과 혼인을 약속한 부마(임금의 사위)다. 그런데도 '한족여자(황용)'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 끝내 애초의 약조를 저버리는 '매정한 인물'일 뿐이다. 그런데도 곽정을 욕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것은 '(이민족이 보장하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돈과 벼슬 하나 챙겨주지 않는 무능한 나라에 매달리는) 애국충정'의 길을 걷는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송나라'는 충효를 중시하고 예법에 얽매이는 고리타분한 면모를 뿜뿜한다. 오늘날 MZ세대의 관점에서 딱히 먹히지 않을 '코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등장했던 '20세기 말' 동아시아의 분위기는 대체로 이런 '짜치는 코드'가 대단히 중요했다. 비록 나라가 잘 살지 못해도, 나라가 국민에게 해준 것이 없어도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서 나라발전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헌신하는 인물이 대단히 높히 평가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진 것이라곤 '의협', 하나뿐인 '강남칠괴'가 이를 잘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강남칠괴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는데,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서는 <사조영웅전>의 주제를 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곽정의 사부들 가운데서도 가장 별루인 '강남칠괴'를 곽정이 왜그리 애처로울 정도로 사모하는지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절정의 무공고수들도 별볼일 없는 '강남칠괴의 죽음'에 그토록 애도를 표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강남칠괴는 '곽정'과 마찬가지로 부귀와 공명을 하찮게 여기는 '지사(志士: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아낌없이 다 바치는 사람)'의 품위를 지녔고, 그 품위를 제자인 '곽정'에게 잘 가르쳤기에 양강처럼 '이민족'에게 알랑거리지 않는 애국지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셈이다. 이런 평가가 오늘날의 'MZ세대'에게도 먹힐 수 있을까? 오히려 부귀공명을 택하는 '기회주의자'를 더 높이 쳐주지 않을까?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공부' 따위도 필요없고, 어릴 적부터 '너튜브'와 '주식'에 올인해 '플렉스(돈자랑)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세태에 <사조영웅전>은 그저 고리타분한 옛날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이런 '돈자랑'만 쳐 지랄하는 이들에 이끌려 운영되지 않는다. 망조가 들지 않고서야 이런 벌레만도 못한 이들을 중시하지 않는단 말이다. <사조영웅전>은 바로 '양강'같은 이들을 비참하게 제거해버리고, '곽정'같은 가난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한 인물이 승승장구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물론 '곽정'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캐릭터다. 더구나 '한족 코드'에 매몰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을 대변하는 밥맛이기도 한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우직한 인물이 주는 매력은 끝이 없다. 우리도 '민족정신'을 내세운 위인들이 한결같이 '우국충정'하며, 부귀를 쫓아 '이민족'에 배신하지 않고 우리 겨레와 가난과 고난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에 열광하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이런 위인들이 오늘날의 'MZ세대'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나라 잃은 설움' 앞에서, '고통받는 한 민족' 앞에서 플렉스를 외치며 '나라 팔고, 민족 팔아' 돈 자랑을 끝없이 해대는 꼴통들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못다한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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