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4 - '프런티어'의 재발견 미국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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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II / 인물과사상사 11번째 리뷰] 19세기 미국의 '프런티어(frontier)'는 '변경'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서점운동'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광활한 서부지역을 차지한 미국 사회에서 '프런티어'는 비문명화가 되어 있는 빈땅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비칠 정도로 미국 백인들에겐 '정체성, 그 잡채'였다. 그런데 1890년 연방정부 국세조사국이 '프런티어의 소멸'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왜냐면 '1평방 마일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을 경계하여 잇는 선을 '프런티어'라고 했는데, 미국이 차지한 동부연안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더 이상의 '빈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내에 더는 개척할 빈땅이 없다는 얘기란 말이다. 미국처럼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가 더는 개척할 빈땅이 없어 '프런티어의 소멸'을 공식선언까지 했으니 미국인들 사이에 어떤 생각이 널리 퍼졌겠느냔 말이다. 지난 리뷰에 언급했던, 미국인은 영토야욕이 없어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고종의 칭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 광활한 땅을 그토록 빠르게 '개척'해 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개척정신'은 미국인들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런티어 소멸'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바로 흑인노예의 비참한 삶, 인디언 학살, 그리고 중국노동자 '쿨리'의 끔찍한 노동현실 등이다. 미국 백인들의 만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도, 그런 만행을 '자긍심'으로 탈바꿈시켜 미국의 위대함으로 포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 과연 이런 나라가 '다른 나라의 인권'을 운운하며 간섭을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19세기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르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미국은 아직 본격적인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한 때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미 준비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셈이다. 다른 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도 전에 자국으로 편입한 땅, 그것도 하늘의 은혜라고 할 정도로 광활하고 풍부하고 비옥한 땅을 독립한 지 불과 100여 년 만에 모조리 '개척'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프런티어 소멸'을 공식선언한 미국연방은 '서부개척'을 끝으로 개척을 멈추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다 피해를 본 흑인, 인디언, 중국노동자 등을 위해 보상을 마련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내실을 다졌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일 것이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바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은 드디어 '제국주의'라는 본색을 드러내려 했다. 자국내(?)에 개척지가 마땅하지 않다면 답은 아주 쉽다. 국외로 눈길을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바로 대서양의 진출 관문인 '카리브 해, 쿠바'였다. 마침맞게 쿠바인들이 스페인 본국에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은 '독립전쟁'을 일으킨 쿠바 아바나 항에 전함 '메인호'를 정박시키고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그 '메인호'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고, 266명의 해군의 사망(메인호사건)하니 이를 스페인의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두달 뒤, 미군과 스페인군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격전을 벌였고, 스페인군 380여명, 미군 10여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는 미군의 무력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괌을 무혈입성하는 등 미군의 우세적 행보가 이어지다가 이듬해인 1899년 2월에 미국과 스페인은 '평화조약 비준'을 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 스페인 식민지 대부분에서 '미군정'이 실시 되었고, 한 달 뒤에 쿠바에서 미군정을 종료하고 독립정부를 설립하며 '카리브해'를 미국이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미국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며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진정한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도 '프런티어 정신'은 굳건하게 활약하게 된다.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자긍심인 '프런티어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만 할까? 끝없는 영토야욕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내고야 만다'는 멈추지 않는 에너지로 봐야 할까? 어느 쪽이든 '피해당사국'이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며, 피해를 당하는 쪽은 무조건 '악당'이 되어야 하는 억울함까지 옴팡 뒤집어 써야만 한다. 과연 이런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우방으로서 응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느냔 말이다. 아무리 국제관계가 '힘의 논리'로 결정 지어진다손 치더라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간 미국의 행보에 대한민국이 딴죽을 걸었던 적은 없었다. 베트남전도 함께 했고, 걸프전도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선 콩고물을 받으며 감지덕지 했던 것이 대한민국의 서글픈 처지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형국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미국도 선뜻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못하는 상황이다. 비록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표방하지만, 내심 러시아와 맞짱을 뜨는 상황이 되는 걸 미국도 애써 피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이스라엘 편만 들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판국에 대한민국이 미국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지지 성명을 내세우며 미국도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미국이 지지하는 쪽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맹목적 지지를 해야만 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에 빠지는 일을 자처할 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런티어 정신'을 자긍심으로 여기고 있는 미국이 '전세계 패권국'이란 자존심을 내버리고 '자국의 이익'만 쫓는 결정을 내릴리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한민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내세우면서 '미국의 결정'에 적절한 선을 긋고 냉철하게 대처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그랬을 경우 '미국의 보복'까지 만반의 대비를 해둬야 한다. 적당한 떡고물을 미국에게 던져주면서 '우리의 이익'을 확실히 챙기는 방향으로 말이다. 우리가 하릴없이 '러시아'와 척을 지을 필요가 없다. 푸틴이라는 꼴통이 불편할 따름이지 '러시아'는 확실히 '우리편'으로 활용할 가치가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균형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이팔 갈등'의 결말은 전세계가 이스라엘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행보는 과거 나치의 홀로코스트(민족대학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이 피해자일 때 전세계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저들이 가해자가 된 지금 상황에까지 편을 들어줄 멍청국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마스에 의해 납치를 당한 것은 끔찍한 테러이지만, 그 테러를 빌미로 삼아 '학살'을 저지른다면 정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이스라엘은 '공공의 적'이 될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미국도 전세계와 함께 인식을 하고 있겠지만,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패권국의 지위'를 상실 당한 것일 테다.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의 말한마디에 '무력침공'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제 더는 미국의 입김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전세계가 지켜보았다. 이런 판국에 '프런티어 정신'으로 똘똘 뭉칭 미국인이 함부러 나댔다가는 큰일을 치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중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내뱉어야 할 때다. 이런 와중에 '또라이 트럼프'와 '치매할배 바이든'이 다시 맞붙어 대선을 치루게 된다. 살얼음판을 걷는 미국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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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3 - 남북전쟁과 제국의 탄생 미국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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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I / 인물과사상사 10번째 리뷰] 1882년(고종19년)에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서 서양인들 가운데 예를 안다는 뜻으로 '양대인(洋大人)'이라 존칭했다고 한다. 일본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고 다른 서양국가와도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한 고종은 미국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다. 조선에서 '보빙사(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를 파견할 때만해도 미국의 기업은 큰 관심을 두는 듯 싶었으나 '통역'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사업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지 못한 탓인지 미국의 관심은 금방 시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국 정부도 조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후 1905년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해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맺고 말았으니,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하릴없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잡고서 버둥거렸으나, 미국은 조선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는 '국권피탈 이후'에도, '한국전쟁 이후'에도 오매불망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데, 미국은 우리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3권의 내용은 미국의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주로 다뤘다.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노예해방'을 주장했던 북의 연방군이 승리를 했음에도 흑인노예들의 처지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인기도 당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리둥절할 법도 싶다. 지금도 미국 흑인들의 이름 가운데 '링컨'이란 이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것이 '남북전쟁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아닐지 의심해본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도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인 편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국사에서 '남북전쟁'을 중요하게 다루는 까닭은 바로 '미국 흑인노예해방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기로 미국의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해서 자본주의 시장이 활성화되어 노예보다는 '자유민(노동자)'가 더 필요했고, 남부는 면화, 담배 등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대농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노예'가 더 많이 필요했었기에, 남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를 중재하려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까지 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통해 미국의 통합을 끌어내려 했지만, 남부쪽에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거의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북전쟁의 시작은 남부의 연맹군이 아닌 북부의 연방군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면서 발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도 '노예제'와 하등 상관이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남북전쟁 초기만해도 북군이 아닌 남군이 더 우세했다고 한다. 왜냐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군의 군사장교들이 대부분 '남부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란다. 아무래도 장교들은 일반서민 출신보다는 돈 많은 부자나 배운 것이 많은 엘리트 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라, 당시 미국 경제의 부는 거의 대부분 '남쪽 주'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황이 남부연맹쪽으로 유리해지자 북부연방군의 수장인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을 내세우며 불리한 상황을 타계하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술책이었다고 한다. 이건 또 뭔소리고 하면, 애초에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는 70% 이상 영국으로 수출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면 원활한 면화수입을 통해 자국의 산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국군의 참전'이 있을 거라는 예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남부연맹군이 유리한 상황인데, 영국군까지 연맹군 편을 들게 되면 북부연방군 처지에서 좋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컨은 영국의 참전을 막을 방법으로 '노예해방선언'을 단행한 것이다. 영국이 참전하게 되면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쪽을 편들게 되는 것이라면서, 참전하면 찝찝해지게 만드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만약,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진심이었다면, 연방군의 승리와 동시에 미 전역의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보장하고, 더 이상의 흑인노예에 대한 탄압이나 폭력, 수탈,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법안을 단호하게 시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링컨은 헌법에 '노예해방'에 대한 언급을 넣는데까진 진척시키지만, 실질적으로 흑인노예들이 처한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나몰라라'하며 방조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연맹 주에서는 전쟁 패배에 대한 충격과 좌절 따위를 풀기 위해 '흑인을 향한 폭력'을 자행했다. 그 유명한 KKK단원의 활동의 시작이 바로 이 시절이다. 그러나 흑인노예를 향한 폭력은 '인디언의 처지'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북부연방군들의 주요 표적은 남부연맹군이 아니라 '서부의 인디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영토야욕'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미국 정부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앞세워 '멕시코 전쟁'을 일으켜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을 학살하며 그 땅에 '철도'를 깔아버렸다. 이런 만행은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만연했고,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대륙횡단열차'를 완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까지 사들여 야심차게 '캐나다 영토'까지 차지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자, 영국은 부랴부랴 캐나다를 '영국령'으로부터 '자치독립' 시켜버리고 미국의 야욕을 한풀 꺾어버리게 된다. 이런 미국을 '양대인'이라 추켜세우며, '영토야욕'이 없는 예의를 아는 서양인으로 바라보았으니, 고종의 안목도 형편 없거니와 당시 조선지식인들의 인식수준이 정말로 형편없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정도로 높은 '혜안'을 갖고 있느냔 말이다. 문재인정부 때 다른 것은 차치하고 '외교력'만큼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현 정권인 윤석열정부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못하지만 '외교'를 가장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대통령의 입'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무슨 외교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할 말은 있는지, '한미일 공조'만큼은 탄탄하다고 자랑질인데...글쎄, 고종이 일본에 이어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해놓고서 '한미일 공조, 어쩌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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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살인자의 쇼핑몰 - 강지영 장편소설 새소설 5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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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 / 자음과모음 39번째 리뷰] 범죄와 폭력을 예술적으로 그린 작품을 흔히 '느와르(noir)'라고 부른다. 검다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인데,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가 '암흑가'를 배경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으로 표현한 것을 비꼬는 의미로 쓰던 용어였다. 하지만 20년 뒤에 홍콩영화가 액션을 가미해서 '홍콩 느와르'를 선보이며 '킬러들의 사생활'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영화나 소설을 '느와르'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느와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장군의 아들>를 비롯해서 코믹 영화 <두사부일체>, <조폭마누라> 같은 장르가 극장가를 점령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한국 느와르'는 총칼이 난무하기보다 '맨주먹'으로 승부를 내는 색다른 맛을 선보이기도 했다. 허나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 우리 영화도 액션이 화려해지며 총칼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범죄도시>, <아수라> 같은 영화는 피가 난무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등 점점 잔혹한 장면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는 드라마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여성작가가 쓴 <살인자의 쇼핑몰>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스토리도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만 빼면 그다지 색다른 면모는 없다. 살인자나 킬러가 등장했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이런 '느와르 장르'가 돋보이기 위해선 '살인자'가 저지른 살인에 정당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색다를까?

  이야기는 시작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아빠와 엄마가 죽고 느닷없이 고아가 된 '정지안'이란 소녀가 등장한다. 이 소녀에겐 삼촌이 유일한 혈육으로 남았는데 묘사된 꼬라지가 영락없는 '백수'다. 그렇게 백수 삼촌과 소녀는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이 삼촌이란 사람이 아주 능력이 없지는 않는 모양이다. 소녀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 생활비를 마련해 오고, 대학등록금에 서울 자취방까지 때가 되면 착착 준비해서 부족한 것이 없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넉넉하지도 않게 딱 필요한 만큼 말이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소녀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너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크고 작은 '트러블'은 있기 마련이고,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만나 '맘고생'을 하는 일도 있을 법 한데, 정지안의 주변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그런 사람들이 정지안의 주변에서 말끔하게(?)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었다. 그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삼촌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니 '신원 확인'을 해달라면서 시체안치소까지 방문해달라는 경찰의 연락까지 받았다. 이제 정지안이 믿고 의지할 가족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능력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던 삼촌은 외모도 그저 그랬다. 어릴 적부터 심한 노안으로 중학생때 이미 '30대 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탈모도 일찍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머리'가 될 정도였단다. 노안에, 대머리에, 덩치까지 한 덩어리한 삼촘이 난데없이 '자살'을 했다고 하니 온통 의심스러움 투성이였다. 그래도 시신을 확인하니 분명 자신의 삼촌이 맞았다. 정지안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시신을 화장을 해서 납골함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삼촌이 운영하던 '쇼핑몰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안은 삼촌의 납골함을 들고 삼촌이 자주 다녔던 장소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간만에 고향방문을 해서 오랜만에 동네를 돌아다녀보니, 의외로 삼촌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생전에 삼촌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말이다. 정지안은 이것이 의외였다. 삼촌의 생김새가 영락없는 백수에, 술담배에 쩔어서 어디 도박장에나 들락거리는 한량으로만 보였는데, 삼촌은 '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정지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삼촌이 운영하던 쇼핑몰을 둘러보게 되었다. 삼촌이 자살한 장소이기도 했고, 정지안이 '상속'으로 물려받을 재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정지안은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 남자도 만나게 되고, 수상쩍어 보이는 모습의 30대 여자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삼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백수인 줄로만 알았고, 장사도 드럽게 안 되는 쇼핑몰이라 여겼던 곳이 '킬러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암흑세계의 쇼핑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정지안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살해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하세계의 보스격이던 삼촌이 죽었으니, 삼촌이 무서워서 잠잠하던 뒷골목의 살인자와 킬러들이 정지안을 죽이고, 삼촌의 쇼핑몰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정지안은 졸지에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쇼핑몰은 느닷없이 '벙커'로 돌변하게 되었다. 어차피 '무기'는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평범한 여대생 정지안이 무슨 수로 '벙커'에서 몰려드는 암살자들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의 인물들이 정지안을 '보호'하기 위해 쇼핑몰로 달려왔고, 정지안을 대신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쇼핑몰 안팎에 꼼꼼하게 부착된 '폐쇄회로(CCTV)'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가운데 의문의 인물이 속속 등장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리고 삼촌의 자살에 관한 '감춰진 비밀'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암흑가끼리의 대결 상황이 전개되며, 삼촌이 그 암흑가 보스와 맞서 싸우는 '정의의 보스(?)'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삼촌을 죽인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삼촌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니 '시신'까지 확인했으니 죽었어야 마땅할 삼촌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밝혀지는 거대한 음모로 인해 이야기는 점점 스케일이 커지게 된다.

  이 책의 초반부는 너무나도 지루해서 읽다가 덮을 뻔 했다. 하지만 '삼촌의 죽음'과 함께 전개되는 스토리가 점점 흥미를 돋우기 시작하더니,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닐 정도다. 더구나 킬러의 세계라는 어둠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디테일'해서 마치 대한민국이 킬러들의 천국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거기에 글로벌한 범죄집단이 대한민국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나, 이를 막기 위해 수많은 범죄자들(?)을 적절히 통제해가며 '살인자들'인데도 나쁜 짓은 가급적 삼가고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만든 인물이 '삼촌'이었다는 설정은 얼핏 '말이 안 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라,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범죄는 범죄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어떤 '정당성'을 갖다 붙이더라도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선한 일'을 한다해도 널리 장려할 일도 아닌 것이다. 프랑스엔 '괴도 아르센 루팡'이 있고, 우리에겐 '의적'이라 불리는 홍길동과 '장길산', '임꺽정'이 있으나, 결국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악한 짓으로 배를 불린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이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며 빼앗긴 재산을 돌려받는다해도 '공명정대한 공권력'이 아닌 '사적인 복수'로 일을 해결하게 되면 더 큰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바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지안의 엄마 아빠도 삼촌을 죽이려는 킬러에게 '인질(?)'이 되었다가 애꿎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도 삼촌은 부모를 잃은 조카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또 다시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는 핑계(!)로 조카에게 철저히 비밀로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그 킬러에게 자신조차 당하게 되면서 조카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이런 일은 자꾸 반복된다. 삼촌을 돕던 '배달원'도 죽임을 당하고, 통신두절로 인해 복구를 하러 현장에 도착한 'A/S 기사'와 마침맞게 우연히 쇼핑몰로 택배를 배달하러 온 '우체국 직원'도 죽고 말았다. 정녕 '살인자의 쇼핑몰'은 대한민국에서 필수불가결한 '필요악'이라도 된단 말인가? 작가는 이런 것에 대한 속시원한 답변도 없이 그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오로지 '흥미요소'로 삼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글쎄, 필요악에 대한 '당위성'을 적절하게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을 '설득'할 수도 없게 되고, 결국 독자들에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권에서는 그 '당위성'이 조금이라도 밝혀지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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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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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 / 민음사 17번째 리뷰] 논란의 그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다 읽으니 왜 이 책이 '논란'이 되었는지 공감 되었다. 분명 '대한민국 20대 남성들'을 분노케 만든 까닭이 있긴 있었다. 남성들도 겪었을 법한 어려움은 철저히 '외면'하였고, 때로는 남성들이 겪어야만 할 '역차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과격하게 '도외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능, 그 잡채'였다. 그에 반해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의요, 진리요, 대한민국 부조리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올곧음의 상징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만으로 이 책이 '여성혐오'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성들이 읽기에 '불편'할 수는 있어도 '혐오'하며 '공격'할 이유로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불편하다면 '남성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거울'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부지불식 간에 여성들에게 저지르는 '실례'를 깨닫는 계기로 삼던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의 잘남'이 남성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위협'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은 좀 유치하지 않은가. 여성이 남성과 '공정한 경쟁'을 요구했을 뿐인데, 그것이 남성들에게 '역차별'을 가져올 수도 있다며 소스라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안타까울 지경이다. 왜냐면 여전히 여성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고, '유리 천장'으로 억압을 받는 등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통용되고 있는 사회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말이다. 물론 이런 전제들이 현재 '20대 남성들'에겐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현재 20대들은 MZ세대들이다. 95년생부터 2004년생이니 딱 그 세대다. 대한민국에서도 '양성평등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기이고, 이들의 학창시절에는 '남자선생님'보다 '여자선생님'이 더 많은 시기라서 '여권신장'이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인권'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20대 남성들'은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크게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은 다 누리던 '남자의 특권'을 이들은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성평등'에 민감한 엄마와 여선생님들,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숨죽이며(?) 지냈다는 고백도 간간히 들려올 정도다. 이들의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큰 불만은 학교담임선생님이 '여자'라서 '여학생편'만 들어준다는 억울함(!)이었다. 비록 사교육이지만 논술선생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던지라 '학교에서 못다한 하소연'을 남자선생인 나에게 와서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다 있어요?'라는 투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속사정까지 잘 모르던 나는, '그깟 일'조차 배려하지 못할 거면, '꼬추' 떼서 갔다 버리라고..힘 약한 여학생을 이겨먹어서 뭐가 좋겠냐고..꾸중 아닌 꾸중을 했더랬다. 그럴 때마다 입이 댓발만큼 내밀려 툴툴거리기만 했는데, 그애들이 지금의 '20대 남성'인 것이다.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랬을 수 있겠지만, 92년생 서연아, 02년생 이지안은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이 '현재 20대 남성들'의 불만의 초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저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만큼 '남성'으로서 누리며 살아본 인식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달라진 것이 '아직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그녀들의 어머니, 할머니 세대들이 누릴 수 없었던 것만큼이나 '누릴 것'이 없는 현재를 살면서 무엇이 나아졌는지 '실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은 더욱 험악해져서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점점 더 힘들 뿐이다. MZ세대 여성들이 남성보다 잘났다고 느끼는 시기는 딱 '학창시절'까지다. 다시 말해, 남성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학업성적' 뿐이란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여성들이 겪는 고초는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어진 것이 전혀 없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축하'대신 '퇴직사유'를 들이밀고, 임신과 출산 소식에도 '축복'대신 '왕따'를 선물받는다. 똑같은 사유로 남성들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더욱 신임을 받으며,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감'을 이유로 중용받아 더 많은 승진 기회와 더 많은 연봉을 거머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20대 남성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까닭으로 '군복무 의무'를 꼽는다.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기이며, 취직준비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군복무'를 해야 하는 까닭에 또래의 여성들보다 부당한 일을 받는다면서 말이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남성'보다 '여성'이 겪어야 할 불합리한 일들이 더 많다는 까닭을 들어도 '취업도 못한 마당에' 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을 두고 불합리한 일을 당연히 감수하라는 것은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따지고 든다. 또한, 남자들의 '군복무 의무'의 고달픔을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으로 맞대응이라도 할라치면 그건 '진정한 양성평등'에 걸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여성에게도 똑같이 '군복무'를 할 것을 요구하는 치졸한 모습까지 보인다. 군복무에, 임신과 출산까지 다 하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렇게 서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싸움은 점점 더 유치하게 진행되다가 급기야 '혐오감정'까지 불사르곤 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아예 이해하지 않겠다는 무식의 발로다.

  나는 74년생 남자다. 그리고 내 여동생은 81년생이다. 이 책의 '김지영 씨'가 겪었던 많은 일 가운데 상당 부분 내 여동생도 똑같이 당했더랬다. 학창시절에는 '하나 뿐인 오빠'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포기해야 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상사'에게 결혼요구를 빙자한 스토킹을 당해 '정규직'으로 들어간 직장을 도망가듯 때려치워야만 했다. 그 때문에 동종업계에는 행여라도 그 미친 놈을 만날까봐 지원조차 하지 못하고, 알바보다 못한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개고생을 했더랬다.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이야기만 하던 동생이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착한 며느리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 없다. 그나마 예전과 같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는 말 못한다. 동생 내외가 열심히 맞벌이해서 돈을 벌어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 없다.

  암튼, 이렇게나 많은 '공감'이 가는 소설인데도, 이 책 <82년생 김지영>에서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여성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만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양성평등'으로 대한민국 남성들과 화합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남성들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제시가 없다. 물론 애둘러서 표현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명시가 없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분명 이 책을 읽은 '대한민국 남성들'이 모두 이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맞아맞아'를 외치며 저들의 지난날, 무지했던 그시절을 회상하며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 마음이 앞서는 '남성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런 남성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전무한 듯 싶다.

  양성평등을 위한 '여성운동'은 반쪽짜리가 되어선 안 된다. 진정한 평등을 이루어야 할 남성들과 연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성들의 지지'도 확실하게 얻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란 방향성으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 그리고 대화와 타협을 이룰 수 있는 장을 열어놔야 한단 말이다. 그래야 서로가 느끼는 '불만과 불편',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가 마련한 '불합리한 점'들을 바꾸고 고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기초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여성운동'은 인류공통의 문제점을 인류 모두를 위해 해결해나가는 방향으로 실천해나가야 한다. 누가 누구를 '혐오'하면서 이룰 수 없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니 '혐오'는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적대시'해서도 절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그동안의 여성차별'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내용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여성들이 느꼈던 '사회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여성과 남성이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들도 대한민국 남성들이 겪었고, 느꼈던 '불합리'한 점들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는 방향을 '함께'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가 쌓아온 벽이 높은만큼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역지사지'다. 그리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으로 바꾸고, 수위를 낮춰 귀에 거슬리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며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 노력에 달려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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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8 - 화산논검대회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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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V / 김영사 30번째 리뷰] '김용의 3부작'의 첫 작품인 <사조영웅전>의 대단원이 열렸다. 이 소설의 주제는 '영웅이란 무엇인가?'라고 앞서 밝혔다. 그리고 그 영웅을 가리기 위해서 '화산논검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1차 대회는 왕중양, 황약사, 홍칠공, 구양봉, 단지흥, 구천인이 참석해 우열을 가리려 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철장방의 내부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대회에 불참하였고, 나머지 다섯 명이 몇 날 며칠을 싸운 뒤에 전진교의 왕중양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승자에게 '구음진경'이라는 무공비급을 차지할 권리를 주었다. <사조영웅전>의 이야기는 바로 '구음진경' 때문에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웅의 첫 번째 조건은 '강한 힘'을 소유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호의 영웅들은 호시탐탐 '구음진경'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그로 인해 목숨까지 헤치고, 또는 잃어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비급에 담긴 무공이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랬던 것이다.

  '구음진경'에 담긴 무공을 익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초 작성자인 '황상'이 도가의 경전을 섭렵한 뒤에 불로장생의 비법으로 무술의 내공과 외공을 닦는 비결을 '구음진경' 한 권으로 요약해 놓았던 것인데, 황상이 속세를 떠난 뒤에 오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다시 세상밖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자 '구음진경'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커지면서 '제1차 화산논검대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왕중양'이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구음진경'을 차지했으나, 왕중양은 '도가의 도사' 신분이었기에 '구음진경'을 자신이 차지한 뒤에 홀로 그 비급의 무공을 습득하고, 그의 제자와 그의 후학들에게만 '구음진경'의 무술이 전수되었을 때 벌어질 파란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구음진경'을 연마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도교에서 '소유욕'이 세상 만물을 불행으로 이끄는 원인이라고 보는 사상에 비추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한 쪽이 '강한 힘'을 갖게 되면, 언젠가는 그 힘을 상대할 '더 강한 힘'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서로 '강대강의 대치국면'이 연이어 발생하면, 끝내는 '모두가 파멸을 하고도 남을' 가공할 힘을 갖게 되어 이득보다 해악을 더 많이 끼칠 것을 걱정한 것이다. 오늘날의 '핵무기'를 떠올리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들이 '핵무기 경쟁'을 벌여 지구를 파괴하고 인류를 절명시킬 만큼 핵무기의 파괴력을 높여놓았고, 그렇게 강력한 무기 제조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힘 쎈 나라' 축에 끼려고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기 시작하다, 급기야 핵무기를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나라들도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몰래 핵무기를 보유하여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왕중양의 '선견지명'은 이런 핵무기 경쟁과 위협으로 인한 파멸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왕중양은 절세의 무공을 갖추고도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걸 눈치 챈 구양봉은 왕중양이 죽으면 '구음진경'을 차지할 목적으로 쳐들어갔으나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친다'는 계략으로 구양봉은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왕중양은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고, 자신의 의동생인 주백통에게 '구음진경'을 맡겼으나, 신혼여행 중이던 황약사 부부의 꾀에 속아넘어가 '구음진경'을 통째로 외워버린 황용의 어머니에 의해 '상권/하권'으로 나뉘어 도화도에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다 황약사의 제자였던 진현풍과 매초풍에 의해 '구음진경 하권'이 세상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하권에 수록된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라는 무공만으로도 강호의 영웅들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은 '구음진경'을 갖고 싶어하게 된 것이다.

  허나 '구음진경'을 제대로 익힌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왜냐면 왕중양이 유언으로 '전진교의 사람은 절대로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혀선 안 된다'고 남겼기 때문이고, 황약사 또한 '구음진경'을 얻은 이후에 급작스럽게 아내가 죽고, 어린 딸인 황용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두 명의 제자가 '구음진경 하권'을 가지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황약사는 절대무공을 익히기도 전에 '구음진경'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러다 곽정이 도화도에 도착해서 주백통과 만나 의형제를 맺으면서 부지불식간에 '구음진경'을 배우고 말았다. 창졸지간이라 배움의 기간이 짧았고, 수련기간 또한 짧아 '구음진경'을 제대로 시전할 수 없었지만, 책의 내용을 통째로 암기해버리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백통은 곽정에게 '구음진경'을 가르치다 그만 '무공'을 익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이후 홍칠공이 구양봉의 독수에 휘말려 무공을 모두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하자 '구음진경' 중 내공치료법에 해당하는 '역근단골편'을 연마해 회복하게 되었고, 일등대사가 된 '단지흥'도 황용의 목숨을 구하다가 영고의 독수에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구음진경' 가운데 내공연마 방법이 수록된 구결을 해석하면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구음진경'이 세상에 모습을 차차 드러내게 되면서 '무림의 서열'이 빠르게 변하게 되었다. 이제 곧 '제2차 화산논검대회'가 개최될 당위성이 갖춰지게 된 셈이다.

  그런 가운데 서독 구양봉도 '구음진경'을 곽정에게서 얻게 된다. 허나 곽정은 구양봉에게 온전한 '구음진경'을 전수해준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은 진짜'지만, '하나는 가짜'로 적은 괴상망측한 '구음진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양봉이 익힌 '구음진경'은 독특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원래 '상승의 내공'을 연마할 때는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주화입마(정신착란과 반신불수를 일으키는 내공의 불협화음)를 일으키기 마련이지만, 구양봉은 비록 악한이긴 하지만 '무학의 일대종사'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을 갖춰기에 죽지도 않고 '요상한 무공'을 완성해내는 기염을 토하게 된 셈이다. 그 결과 '제2차 화산논검대회'에서 최종승자를 차지한 것은 바로 '서독 구양봉'이었다. 허나 그는 대회기간이 다가오자 무리하게 '엉터리 구음진경'을 연마하다 그만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제정신을 차리진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영웅이란 누구란 말인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저렇게 미쳐버리고 말았으니, 그를 영웅이라 칭해야 옳단 말인가? 아무리 '강한 힘'을 소유했다하더라도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않으면 '영웅'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나치의 히틀러가 강력한 독일군대를 앞세워 세계정복을 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가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을 무참히 살상한 죄를 물어, 그에게 '영웅' 칭호를 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사조영웅전>에 등장하는 몽골의 최고 수장 '칭기즈칸'도 마찬가지다. 그의 군대는 마주치는 적을 압도하며 '패배'를 몰랐지만, 점령지의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등 그가 저지른 행위는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영웅적인 행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인류의 공영'을 해치는 짓을 한다면 진정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 영웅의 두 번째 조건은 '선한 마음'인 걸까? 착한 마음씨를 가진 등장인물은 '곽정'이다. 그는 머리는 우둔한 편이지만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끈기'를 지녔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인내심'도 대단하며, '강한 힘'을 갖게 되었더도 '함부로' 쓰지 않고, 자기를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해서 '큰 힘'을 쓰는 정정당당한 영웅호걸다운 풍모를 갖췄다. 그렇다면 '곽정'이 진정한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까? <사조영웅전>의 이야기속에서 그가 '사소한 약속'조차 하찮게 여기지 않고 '꼭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언제나 '그의 주변사람들'이었고 말이다. 물론 곽정은 '성장기 소년'에게서 엿볼 수 있는 질풍노도의 모습 보였고, 중요한 시기마다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곽정은 '소년 영웅'이라기보다는 '착하고 우직한 시골소년'의 순수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순수함' 때문에 그는 종종 '야만적'인 모습도 보이곤 한다. 그의 사부인 '강남오괴'가 황약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단단히 오해를 하자, 곽정은 사랑하는 '황용'이라도 무섭도록 야멸차게 내밀어버리고 말았다. 정작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완안홍열'은 번번히 놓치면서도 '다음 기회를' 노리던 여유로운 모습이 돌변해 자신의 사부들이 죽은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지 '황약사와 황용'에게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그리고 그 화난 모습은 평소에 지녔던 '선한 마음'에 비례해서 더욱더 크게 분노하고 만 것이다. 이런 곽정을 두고서 '소년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리겠는가?

  사실 <사조영웅전>에서는 진정한 영웅을 찾을 수 없다. 황상, 왕중양, 칭기즈칸, 곽정 등이 '영웅의 후보'에 들 수 있겠으나 이들 모두에게는 '결격사유'가 나름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바로 '구음진경' 말이다. 오늘날도 치면 '핵무기 제조법'에 빗댈 수 있는 이 막강한 무공비급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사조영웅전>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나 완안홍열 같은 이들은 '무림(강호)의 사람'이 아닌 탓에 '구음진경' 같은 무공비급을 탐하지 않았지만, 군대를 다루어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비급, '무목유서'를 탐했으니, 이 또한 '핵폭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세상에 '구음진경', '무목유서', 그리고 '핵폭탄'과 같은 절대적인 강한 힘을 갖게 될 때 '어떻게' 다뤄야 가장 바람직한 일인가 말이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그 힘'을 제대로, 제 때에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전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위해 그 큰힘을 써야만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사서독 남제북개 중신통'은 모두 진정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무능한 황제와 신하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송나라'도 영웅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무능한 송나라를 대신해서 '천하'를 다스리려던 금나라 또한 영웅 자격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12세기, 새로운 패권 국가로 떠오르는 '몽골'은 어떤가? 소수 부족국가로 송나라와 금나라에 치이며 살아가던 '몽골족'을 통합하여 전세계를 주름잡고서 '몽골제국'으로 거듭난 칭기즈칸은 영웅의 칭호를 받기에 걸맞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세운 '몽골제국'은 강한 힘으로 반항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억누르는데 썼으므로 '자격박탈'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향후 '몽골제국'은 몽골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불과 200여 년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영웅의 나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럼 '진정한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강한 힘으로 약자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강한 힘으로 부당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그 무리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박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참지 않고 '그 큰힘'을 발휘해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하고도 '자기 욕심'을 채우지 않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어야 비로소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실존인물 가운데 '진정한 영웅'이 존재할 수나 있는걸까? 그렇기에 우리는 '완성형 영웅'이 아닌 '성장형 영웅'을 눈여겨 보게 된다. <사조영웅전> 속에서는 '곽정'이 바로 그런 인물일 것이다. 그는 비록 아직 영웅이라 불리기에 많이 부족한 인물이지만, 그 부족한 인물이 '성장'하면서 진정한 영웅적인 면모를 갖춰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믓해 할 것이다. 김용 작가는 이런 영웅적인 '곽정'을 한족 출신의, 한족에 의한, 한족을 위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어 범세계적인 영웅이 아닌 '중화민족'에 한정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어서 많이 아쉽다. 암튼, 이 '성장형 영웅'인 곽정의 모습은 <신조협려>에서 더욱더 빛을 발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영웅'인 양과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더욱 새로워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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