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 - 집중력과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두뇌 정비 프로젝트
피터 홀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LXXIII / 한빛비즈 146번째 리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젊었을 때는 단연코 '돈'이 최고였다. 물론 '명예'도 있으면 좋고 말이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고, 돈 되는 일이라면 날밤을 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가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건강'에 비해서 말이다. 돈도 건강해야 쓸 수 있는 것이고, 명예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야 품위 있게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수천억 자산가일지라도 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면 '수천억'을 쏟아부어서라도 건강해지고 싶어진다. 만인지상의 '일인자'가 되는 명예를 얻은들,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 명예를 탐하는 무리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게 뻔하고, 건강을 다 잃은 '일인자'는 품위조차 지키지 못해 망신살만 뻗치고 말 뿐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바로 '건강'이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돈'도 얼마든지 벌 수 있고, '명예'도 언제든 되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몸'과 '정신' 가운데 어떤 건강을 더 챙겨야 할까? 이 또한 젊은 시절에는 '육체적인 몸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정신줄 놓치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아버님이 '치매'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신 모습을 보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정하시고 명석하시던 분이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저 '과거의 기억'만 잃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판단력'까지 떨어지니 점점 '아기'처럼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면 혼자만 아픈 것이 아니라 주위 가족 모두가 아플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정신 건강'은 꼭 챙겨야 한다. 설령 '몸 건강'을 잃는다해도 '정신'만 말짱하다면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은 정신줄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일상생활속 소중한 습관을 마련해주는 '두뇌개발서'다.

  그렇다고 해서 최신 '뇌과학'을 다룬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읽다보면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내용'이라 반갑기 그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뇌건강을 지키기 위한 실천 하나 '땀을 흘릴 정도로 운동을 즐겨라', 둘 '뇌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엔돌핀을 뿜뿜하라', 셋 '뇌를 다시 일깨우는 글림프 시스템을 활성화시켜라', 넷 '뇌건강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지킬 수 있으니, 인지적 상호작용을 일상화하라', 다섯 '뇌건강을 위한 특별한 것은 필요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주의사항은 '과유불급'이다'. 이렇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뇌세포'만 따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적절한 신체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란다. 이를 테면,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뇌세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물론 더 간단한 운동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지만 '춤'을 추면 자연스럽게 온몸을 움직일 수 있고, 다음 동작을 기억함과 동시에 눈은 상대방과 교감하고, 입은 기쁨으로 한껏 치켜올라가며, 호흡은 거칠어지며, 심장은 미친듯이 펌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손과 허리 등으로 '스킨십'을 하며 온몸의 신경세포를 한껏 긴장시켜 '뇌신경전달물질'인 DOSE, 다시 말해, 즐거움의 호르몬인 '도파민',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 자신감 호르몬 '세로토닌', 그리고 천연 진통제이자 면역 호르몬인 '엔돌핀'을 폭포수처럼 쏟아내 뇌를 비롯해서 온몸을 적시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듯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만으로도 충분하단다. 하릴없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억지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쓸 필요도 없단 말이다.

  여기에 '글림프 시스템'을 챙겨주면 금상첨화가 된다. '글림프 시스템'이란 뇌의 대사 폐기물과 함께 뇌척수액을 빼내는 혈관 네트워크를 일컫는데, 쉽게 말해, 적절한 수면을 취하란 말이다. 다시 말해, 잠을 자면 뇌를 청소할 시간을 주는 셈이란 말이다. 얼마의 시간을 잠을 자야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생체리듬'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평균 8시간의 수면시간을 권장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낮잠의 효능'이다. 밤에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 별도의 '낮잠'을 자는 것이 뇌건강에 아주 이롭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도 이를 확연하게 증명할 수 있었단다. 그렇다고 낮잠을 오래 자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단다. 특히 3시간 이상의 낮잠은 본격적인 수면시간인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주원인인 까닭에 30분~1시간 정도의 낮잠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낮잠'을 자려고 하지 말고, 그저 '평온한 휴식의 개념'으로 눈만 붙이고 잡생각을 하지 않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단다. 낮잠 이외에도 효과적인 것은 '초록식물'을 가깝게 두고 자주 바라보기, 두들링이라고 하는 공책에 끄적이며 낙서하기, 껌 씹기 등도 뇌에 불필요하게 쌓여 있는 해로운 물질을 걸러주는 효과를 내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킨십'이 최고다. 사랑하는 이와 애무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 '격렬한 스킨십'이 아니어도 좋단다. 쓰담쓰담만으로도 충분히 설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통(대화)'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일만으로도 뇌건강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요가의 호흡법' 따위로 명상을 하면 더 효율이 좋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요가가 아니어도 '비디오게임'을 통해서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겠다. 한마디로 뇌건강을 지키기 위해 '비싼 강좌'를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뇌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화'를 만들어서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으로 뇌건강을 지키려다 도리어 '스트레스(또는 강박증) 폭발'로 인해 뇌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단다. 일상 습관을 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격렬한 운동과 너무 짜릿한 승부욕을 추구하다 도리어 '뇌건강'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적절함'으로 적당히 뇌건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할 것이냔 말이다. 이를 테면 적절한 비디오게임이 뇌건강에 유익하다면서 '일상생활 습관'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치자, 그런데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의 비디오게임을 즐기다보면 도리어 뇌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게임의 속성상 '밋밋하면' 금새 질리기 마련이다. 기껏 '뇌건강'을 지키고자 만든 습관인데 매일매일 '심플'하고 '덜 자극'적인 게임만 하다보면 식상해서 금새 지루해져서 안 하게 될 거란 말이다. 비단 게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춤도 밋밋하고, 섹스도 '했던 것'만 계속 반복해서 하고 '시간'과 '코스(?)'를 정해서 의무적으로 하고 끝내면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건강을 위해서 일상생활속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음'을 알고, 꾸준히 뇌운동을 하되,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밋밋하지 않게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뇌를 위한 최소한의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일상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단짠단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다시 말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뇌건강'이 최고다. 뇌건강을 위해 돈도 적절하게 벌고, 명예도 주눅들지 않을 정도로 챙겨라. 그래야 '뇌건강'을 지켰을 때 아름다운 인생을 누릴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사 산책 6 - 대공황과 뉴딜혁명 미국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LXXII / 인물과사상사 13번째 리뷰] 1930년 미국을 관통한 사건은 무엇일까? 흔히 알고 있기로 '대공황'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기억되는 주식 대폭락은 수많은 미국 도시인들을 실업자로 내몰았고, 금융계는 부도와 파산으로 쑥대밭이 되었었다. 그렇게 미국 경제는 10여년 간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지 못했고, 미국이 헤롱거리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즘'이 창궐했으며, 소련은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가 약진을 하고 있었다. 이는 대공황을 맞이한 자본주의가 맥을 못추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공산주의가 대공황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었던 탓이다. 흔히 말하는 '뉴딜 정책'은 대공황에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경기부양을 위해 자본을 쏟아붓긴 했지만 그것이 '실업자 구제'로 이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산주의'체제에서는 실업자가 훨씬 적었다. 그렇기에 대공황과 같은 시기에 '똑같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맥을 추지 못한 반면에 공산주의는 궁여지책이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 있던 유럽은 어땠을까? 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겨우 '자력경제'로 회생할 즈음에 대공황을 맞이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말도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파시즘'이 득세하면서 '경제회복'을 맞이한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와 '독일'이었다. '검은 셔츠단'의 무솔리니는 혼란한 정국을 '로마진군'이라는 강행수로 돌파하며 단박에 '두체(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한편 '나치'의 히틀러는 쿠테타를 시도했다 실패한 뒤에 '평화적인 방법(?)'인 선거를 통해 정치계로 화려하게 복귀하고서 경제난으로 허덕이는 독일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총통'의 자리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력으로 공포를 심어주고 총칼로 압제를 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경제난 해소'를 해내고 '국가적 자긍심'을 심어주며,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준 덕분이다. 대공황으로 전세계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어떻게 경제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일치단결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침략전쟁'이었다. 아니,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이니 소규모 침략(?)이긴 했지만, 전쟁을 치룰 수도 있다는 분위기만 띄워도 '군수산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가 되살아나는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파시즘의 독재자'들이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의 파시즘'이 한 몫 단단히 했다는 이야기가 솔솔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30년대 미국의 후버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각각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을 이상적인 통치수단이라며 대단히 호평을 했더란다. 당시 미국은 '경제대공황의 수렁'에 점점 빠져들며 위기에 봉착했었는데, 경기부양을 위해 실업자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복지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왜냐면 자본주의국가에서 '공산주의정책'을 시행할 수는 없다는 반대이유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은 공산주의(막시즘)를 악마에 비유할 정도로 맹렬하게 비난한 탓에, 미국에서도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내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한다. 물론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파시즘)은 공동체를 우선으로 삼고 있으니 엇비슷한 체제인 듯 싶은데도, 히틀러의 사회주의(나치즘)는 공산주의와 판이하게 다르다며 마르크스를 맹비난 했더란다. 훗날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독소 불가침선언'을 무력화하며 소련침공을 했으니 정말 미워하긴 했던 모양이다. 당시 스탈린은 그 선언만 믿고 '독일 침공'을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군부 숙청'을 단행해버렸고, 때마침 침공을 한 독일군대에 모스크바가 포위되고, 스탈린그라드를 빼앗겼으니, 스탈린이 히틀러를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만도 했다. 암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꽤나 다른 듯 싶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자본주의의 폐해가 정점에 다다르면 '사회주의'로 전환하게 되고, '사회주의'가 무르익게 되면 '공산주의'로 귀결된다는 사회진화적인 관점이 있는 것을 보면, '사회주의'는 완벽한 공산주의로 귀결되기 이전의 불완전(?)한 단계로 단순무식하게 볼 수도 있겠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말이다.

  암튼, 미국은 경제대공황을 맞아 '파시즘'적인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나 '파시즘'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미국은 자연스레 새로운 차별 방법을 터득하게 되니 바로 '우생학'이었다. 프랜시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어처구니 없게도 유럽보다 먼저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것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생학'은 미국인의 인식 저변에 파고들어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그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끔찍했다. 소위 '유전학적 질병'의 소지하였다고 판단되며 '불임수술'은 물론이거니와 '안락사'까지 시켰으며, 사사로운 폭력을 저질러도 '무죄판결'을 받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단다. 더 나아가 '골상학'이란 사이비과학에 이르게 되면 '범죄형'으로 생겼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자비한 일을 시행할 지경이었단다.

  미국이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던 시절도 있었다니, 솔직히 잘 몰랐었다. 그리고 미국에 '우생학' 같은 사이비과학이 대유행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심각성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위험성은 오늘날 우리가 '파시즘'을 경계하는 이유이지만, '파시즘'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 이를 테면 '경제위기극복' 같은 것 말이다. 그 효과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굶주림이 일상이던 시절에 배고픔을 해결해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 '맹신'과 '숭배'로 이어지는 현상을 우리도 겪어봤으니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개발독재'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으로 박정희의 과오가 묻혀지고, 심지어 그의 딸까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해주는 일에 아무런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의 국민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파시즘 독재자'를 만드는 과정이 당연한 귀결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미국조차 '대공황'이라는 위기 앞에서 '파시즘'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더냔 말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도 한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면 '이성'을 잃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영혼까지 내던져버리는 '비이성적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밝은 빛을 잃어버리면, 끝내 '전쟁'이라는 파멸을 불러오게 되고,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금 '이성'을 되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이미 겪었다. 그 아픔과 고난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철해져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사 산책 5 - 혁신주의와 '재즈시대' 미국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LXXI / 인물과사상사 12번째 리뷰] 미국은 18세기에 독립을 한 이후로 1800년대를 '팽창주의'로 마감하고, 바야흐로 1900년대에는 '대혁신의 시대'를 맞이한다. '프런티어의 종말'이라고 부를 정도로 엄청난 영토를 차지하고서 마땅히 새로 개척할 곳을 찾지 못하자, 곧이어 '혁신주의'가 찾아온 것이다. 그로 인해 1910년대까지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새로운 것들' 때문에 혼란을 겪지만, 1920년대부터는 미국의 대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재즈시대'다. 그도 그럴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마감한 뒤, 미국은 '유럽의 재건'을 위해 날마다 공장을 새로 짓게 되고, 그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마다 미칠 듯이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거기다 미국은 '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고 온갖 이슈를 몰고 다닐 만큼 전세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유럽은 이제 미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셈이다.

  허나, 미국은 두려워하게 된 것이 하나 생긴다. 바로 '공산주의'다. 1차 세계대전 도중에 벌어진 '러시아혁명'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에 의해 성공하게 되고,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의 탄생은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두려움'의 상징이 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무산자)'가 '부르주아(유산자)'를 때려잡아 모두가 공평한 세상을 만든다는 이데올로기에 전세계의 '노동자들의 단결'이 실현될까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일은 없었다. 공산주의는 이념과는 달리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실현'되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주의국가가 탄생한 초창기에는 얘기가 달랐다. 부르주아를 때려잡아 '공평하게' 부를 나누어 갖는 모양새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자들이 행여나 '공산주의'에 빠져들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그 두려움은 곧 '실체'가 되어 열렬한 반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초기단계의 '노동조합'마저 억압하며 '노동자들의 결집'을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오늘날에도 '노동조합'이 크게 활성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 흔한 '강성노조'를 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는 한편, 이 시기 미국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열광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그닥 환영을 받지 못한 '프로이트'가 미국에서 강연을 하자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성(性)에 관련된 것에 유독 관심을 보이곤 했다. 쉽게 말해, '성욕'에 관련된 일에 미국인들은 깊은 관심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간 미국에서 '성욕'은 억압된 분위기였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관에서 '문란한 성행위'는 금기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욕'은 쉽사리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었다. 그런 차에 '프로이트'가 등장해서 '성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견해를 밝히자 미국인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성욕'에 해방감이라도 느낀 듯이 프로이트를 열렬히 반겼고, '섹스'도 활발하게 진행시켰다. 어찌보면 미국인에게 새로운 '프런티어'를 제공해준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대륙의 거의 모든 땅을 '개척'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개척할 마땅한 것이 없었던 차에 프로이트는 미국인들에게 '미개발지'였던 성욕에 불을 붙여버렸던 것이다.

  마침맞게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젊은 남성'은 유럽의 전쟁터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진 '젊은 여성'은 해방구를 찾지 못한채 쌓여만 가는 '성욕'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가버리고 '섹스'에 열광해버리고 만다.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여성참정권'도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여성들이 '짧은 치마'와 '짧은 머리', 그리고 남성들과 '맞담배'를 피우면서 한층 성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때마침 '낙태금지법'도 폐지가 되며 합법화가 되자 여성들은 '피임법'을 배울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섹스'는 더욱더 자유분방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성적 문란'은 공공연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섹스를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임신과 낙태까지 '양성화'되어 문란한 성풍속이 다반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합법적인 '낙태'는 여성의 인권을 높여주는 효과를 낳았다. 불법이었을 때에는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에도 아기를 낳아야만 했고, 그로 인한 '폭력적인'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고통에서 여성들은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태를 합법화하자 여성들은 '아이만 낳다' 삶을 마감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피임에 관한 정보'까지 여성들끼리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의 몸'은 더는 '남성의 것'이 아닌 '자유'를 얻게 된 셈이다. 이는 '피임약'의 발명과 더불어서 여성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00년대 미국사회에 '섹스 열풍'이 분 까닭은 이렇게 '프로이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 이 와중에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00년대 들어서 신문, 영화, 전화, 백화점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선보였는데도,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 유명한 '퓰리쳐 상'도 이 당시에 만들어졌는데, 그 상을 심사하는 위원들은 3명이었는데 반드시 '백인, 남성'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단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와스프(White, Anglo, Saxon, Protestant)'가 아닌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분위기일 정도로 '백인우월주의'는 팽배했던 시기다. 물론 지금까지도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세계대전에 참전할 병사들이 모자라 '흑인장병'을 징집할 정도였는데, 이들 '흑인 참전군인'들은 전장에서도 최악인 곳에만 보내질 정도였고, 참전하고 돌아온 뒤에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비단 흑인만 차별 받았겠는가. 아시아계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미국경제가 호황을 넘어 흥청망청할 지경인데도 '아시아계 거물'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미국사회는 여전히 '백인우월'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인들 가운데서도 전쟁으로 인해 '독일계'는 빠르게 퇴장할 수밖에 없었고, '아일랜드계'는 가난한 노동자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유대계'도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 '독일계 유대인'들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했다고 한다. 여기에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노동조합'을 주도했던 이들이나, '아나키스트' 같은 사회주의계열의 사상가들도 '공산주의 탄압'과 맞물려서 똑같이 차별 당했다. 미국사회의 '물질주의'가 팽배한 까닭을 짐작케 하는 일면이다. 한마디로 '백인'도 아닌데 '돈'마저 없으면 얻는 것은 '천대'뿐이었던 것이다. 공평하고 동등한 '기회'를 달라는 목소리는 미국에선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한국 기업에 거버넌스의 기본을 묻다 서가명강 시리즈 23
이관휘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LXX / 21세기북스 24번째 리뷰] 기업은 '경제의 주체'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국가경제의 기틀이 되는 '경쟁력'도 기업이 그 척도가 되며, 나라살림의 원천이 되는 '세금'도 기업의 경영이익에 따라 더 많이 낼 수도 있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또한 그 양질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까지 좌우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업은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기업의 목적 또한 '단순한 이윤추구'만이어선 곤란하다.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지구와 국가와 사회와 개인에게 '해악'을 끼치며 벌어들이는 이익이라면, 그런 이윤추구를 하는 기업은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테면, 범죄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기업에 의해 국가운영이 휘둘리고, 그런 범죄집단에서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회에서 어떻게 맘 편하게 살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는 이윤추구를 한답시고 '공해물질'을 제대로 된 정화장치로 거르지도 않고 배출해서 우리 주변환경을 오염시키는 기업에서 아무리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해도 결국 '인간조차'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병들어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좋은 기업'이 많아져야 한다. 지구환경을 걱정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사회전반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직장일을 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개개인의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안정된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기업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기업의 주인'이 명확하지 않은 까닭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의 '창업주'가 위와 같은 좋은 취지로 기업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경영권'을 유지하며 기업을 끌어나가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기업을 '위기'에서 살리는 일이 기업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버리고, 그러기 위해서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살려내고 이윤을 극대화시켜 '좋은 기업'으로 새출발을 하면 된다. 그러나 '경영권'을 지켜내다보면 주주와 채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좋은 기업의 활동으로 이윤추구를 극대화시키는 프로젝트(사업)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주주와 채권자 들이 되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주주나 채권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기업은 '위기' 앞에서 흔들리기 마련이다.

  21세기 들어서 지구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변화, 탄소중립, 원전제로 등등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 정도다. 인류가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오면서 이토록 '급격한 환경변화'에 직면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구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50도가 넘는 폭염에,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은 전세계 곳곳을 홍수와 가뭄, 그리고 야구공보다 더 큰 우박을 떨어뜨리고, 2개 이상의 강력한 태풍과 토네이도가 시도때도 없이 강타하는 등 재앙의 빈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한 '농작물 생산량의 급감'은 단순히 식량난을 불러오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난'까지 동시에 불러와 사회전반을 뒤흔들고 만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류는 어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엉뚱하지만 '좋은 기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경제적 풍요'에 따라 삶의 수준이 결정된다. 바로 대한민국이 '산 증인'이지 않은가 말이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 나라다. 물론 그 경제성장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발생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경제성장으로 인해 '삶의 질'이 개선되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합리한 점'들을 하나둘 고쳐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통해 그 수준에 맞는 품격을 만들어내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높은 도덕성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문화선진국'이었기에 뛰어난 경제력에 걸맞는 아름다운 전통을 되살리며 '불의'와 '불공정'을 참지 않는 정의로운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런 대한민국이 앞으로 해나갈 일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바로 '좋은 기업'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일이다. 기업을 지지하는 일은 당연히 '소비와 투자'를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갖춘 경제력으로 '좋은 기업'을 지지하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환경을 개선하는데 적극적인 기업을 지지하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전 국민의 99%가 노동자인 나라가 '노동환경'에 무심하게 되고, 그저 싼 값의 물건, 유명 브랜드에 치중하는 소비나 투자를 일삼게 된다면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처우개선을 하려 들지 않게 된다. 오히려 노동자를 혹사시키면 시킬수록 매출이 늘어나니 더욱더 혹사시킬뿐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환경을 쾌적하게 만들려 노력한다는 기업의 속사정에 관심을 높이면 '기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기업은 자연스럽게 퇴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내기업 뿐만 아니라 국외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수입해서 소비하고 '해외투자'하는 기업 가운데 '좋은 기업'을 선별한다는 자세만 취해도 기업문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이윤을 추구한다면 억지로라도(?) '좋은 기업, 흉내'라도 낼테니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구환경'을 깨끗하게 만들려 노력하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소비와 투자를 하게 된다면 전세계적으로 '좋은 기업'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기업의 주인은 '창업주', '주주', '채권자' 일 것이다. 누구 하나라고 하기보다는 '모두'가 기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은 그 '주인'이 바라는대로 운영되기 마련이다. 기업의 경영을 통해서 이윤추구의 극대화시키는데 어느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이 운영을 잘해서 해마다 이윤을 빵빵하게 늘려나간다면 누가 주인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윤배분의 불균형, 불공정이 일어나게 되면 '주인 자격'을 갖춘 이들은 서로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려 싸우려 들 것이다. 기업의 경영이 악화되어 '부도'나 '폐업'을 할 지경에 이르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지' 더욱 신랄하게 따지며 서로 더 적은 손해를 보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거의 대부분이 바로 '그 최선'이었다.

  그러나 기업의 진정한 주인은 '소비자'다. 아무리 좋은 상품(또는 서비스)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면 누가 주인인지 따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기업은 '소비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존재할 가치를 부여하는 이가 진정한 주인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좋은 기업일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관리감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기업은 바로바로 솎아내야 한다. 그 역할도 소비자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기업들이 그러한 정보를 순순히 내놓을리 없다. 자신들이 좋은 기업인지 나쁜 기업인지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상, 일반 소비자들이 기업을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좋은 기업'이 스스로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것이 희소식이다. 기업들 스스로 '선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홍보전략을 짜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스스로 기업가치를 높이려 애쓰고 있단 말이다. 이는 과거에 '단순한 이윤추구'만을 하던 기업의 역할에서 한단계 격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일하기 좋은 기업'의 명단을 작성해 언론홍보는 경향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좋은 기업'이 더 빨리 망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면 할수록 '기업활동'하기 힘들어지게 되어 '실적'도 떨어지고, '주가'도 떨어지고, '수익률', '수익성'이 다 떨어저 주주에게 돌아가야할 이득도 현저히 떨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주에게 돌아가야할 이득을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데 써버려서 '배당금'이 줄어들게 된다면, 이를 좋아할 주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업의 진정한 주인인 '소비자'가 깨어나 현명한 투자를 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당장 나에게 돌아올 배당금이 줄어들지라도 '좋은 기업'이 살아나 더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이 펼쳐져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환경이 개선되고, 노동환경이 쾌적해지게 되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둔 '깨어있는 주인'이 되도록 말이다. 그저 꿈같은 기적을 바라는 몽상적인 이야기 같겠지만, 우리 모두가 '실현'시키지 않는다면 인류의 절멸을 우리 세대가 직접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맞딱뜨리고서 얻을 '이윤추구의 극대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살인자의 쇼핑몰 2 새소설 13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LXIX / 자음과모음 40번째 리뷰] 어릴 적 '홍콩영화'에 푹 빠졌더랬다. 그때 들었던 의문은 '홍콩은 범죄도시인가?'였다. 영화마다 범죄를 일으키는 악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연배우는 그런 악당을 천신만고 끝에 철창에 가두는 것으로 엔딩을 장식했다. 이 책 <살인자의 쇼핑몰>을 읽으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킬러들이 활개를 치는 나라인가?'하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나 소설에서 심심찮게 '범죄'가 벌어지고 '킬러'가 등장해서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솔직히 어색하기 때문이다. '홍콩영화'가 대흥행을 하던 시절의 홍콩시민들도 똑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평화롭기 그지 없는데, 영화나 소설에서는 끔찍한 범죄와 살육이 판을 쳤으니 말이다. <살인자의 쇼핑몰 2>에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구리'를 배경으로 킬러들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구리에는 '용석동'이 없으며, '킬러'는 더더군다나 찾아볼 수가 없다. 가끔 폭주족들이 한밤에 질주를 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킬러들의 한 판 대결'이 내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암튼, 이런 어려움에도 책의 내용에 몰입을 시도해보면, 두 킬러집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정지안의 대머리 삼촌인 정진만이 운영하는 '머더헬프'와 알렉스 김이라는 용병출신이 운영하는 글로벌 킬러 '바빌론'이 한 쪽이 전멸할 때까지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 2권의 핵심 줄거리다. 두 집단 사이의 원한이라면 정진만과 알렉스 김(한국명 김진영)이 한때 '같은 용병부대 출신'이었는데, 정진만의 돌출행동으로 용병전체가 위기에 빠질 뻔 했는데 정진만의 활약으로 용병전체에 이득을 가져왔다는 것, 그런데 그 이득이 '알렉스 김'을 비롯한 몇몇 용병들에겐 오히려 불편한 것이었고, 정진만의 활약도 눈꼴 시렵게 보일 정도의 원한을 쌓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억지설정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원한'은 원한이다. 그렇게 악연이 이어져 두 집단은 대한민국에서 '원톱'이 되기 위해 실력을 겨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킬러들이 겨루는 실력이란 바로 서로의 우두머리, 즉 '정진만 vs 알렉스 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빈틈'은 없는 법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러 움직임을 드러내는 서툰 짓은 서로 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만 드러내고 있었다. 정진만은 '쇼핑몰'로, 알렉스 김은 '편의점'으로 말이다.

  쇼핑몰과 편의점의 겉으로 드러난 대결은 '매출경쟁'이었다. 킬러들에게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는 두 집단인데도 공개적으로 오픈하고 있는 상점에선 '일상용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나마 바빌론이 정진만을 암살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마더헬프'는 소소한 판매실적조차 뚝 끊어지고 쫄쫄 굶고 있었다. 반면에 알렉스 김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선 에어팟만 줄기차게 판매되고 있었다. 물론 편의점에서 판매할 법한 물건이 아니긴 하지만 '편의점'임을 감안하면 못 팔 제품도 아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잘 팔릴 법한 것은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유독 '에어팟'만 잘 팔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중에 밝혀지는 내용이지만, 바빌론은 대한민국에 '마약'을 판매하기 위해, 또한, 대한민국을 거점으로 동아시아에 '마약공급'하는 허브를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에 상륙한 것이다. 물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머더헬프'는 바빌론의 계획을 하나씩 무산시키며 계속 방해를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알렉스 김'은 '정진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핑몰'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정진만을 죽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지난 1권에서 '쇼핑몰'이 얼마나 견고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잘 드러냈기 때문에 '쇼핑몰 안'에 있는 정진만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정진만을 자기 발로 '쇼핑몰'을 나서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하나 뿐인 조카, 정지안을 '표적'으로 삼아 죽이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표적'이 제 발로 알렉스 김이 소재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찾아가 알렉스 김을 죽이겠다고 나섰는데, 삼촌인 정진만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빌론은 '쇼핑몰'을 떠난 정진만을 쫓으면서 동시에 '쇼핑몰'을 장악해서 파괴할 작정이었고, 거기에 덤으로 정진만의 조카인 '정지안'도 죽여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소설은 없다. 정지안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킬러 수업'을, 다른 킬러들에게 쫓기면서 '속성'으로 학습하게 되고, 단박에 그 스킬들을 습득하면서 '편의점'에 숨어 있는 알렉스 김을 찾아낸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알렉스 김'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두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는 '배신자의 정체'가 속속 밝혀지면서 사건의 윤곽도 훤히 밝혀지게 된다. 속고 속이는 사이에 주인공은 번번히 목숨이 사라질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그 때마다 '진실'이 밝혀지면서 주인공은 살아남고, 악당은 하나씩 제거되어 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웬만한 '추리소설'과 '스릴러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법이라 크게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은 없다.

  <살인자의 쇼핑몰>은 분명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적어도 내게는 '대한민국 안에 이렇게나 많은 킬러들이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어색할 따름이지만, 홍콩영화나 미국범죄드라마의 화려한 액션장면에 열광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닥 어색해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색함을 한거풀 벗겨내는 순간부터 이 책의 재미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TV드라마로 방영까지 했더랬다. 그러니 드라마 감상을 먼저 했다면 소설의 내용은 '동영상'처럼 살아 움직이는 장면묘사로 인해 더욱더 매료될 것이다. 아직 드라마는 시청하지 못했는데, 어서 시청을 해보아야겠다. 참고로 드라마의 제목은 <킬러들의 쇼핑몰>이다. 주연은 이동욱. 소설에서는 배불뚝이 대머리였는데, 드라마에서는 미남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장담컨대, 소설보다 훨씬 재밌을 것 같다. 아쉽게도 드라마의 내용은 '소설 1권'의 내용을 다루고 있어 2권의 내용은 '시즌 2편'에서나 나올 듯 싶다. 그리고 '시즌 2편'이 나올 때즈음에는 소설도 3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무려 이동욱이 주연으로 나왔는데, 제대로 찍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면 '소설 2권'에서 충격적인 엔딩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정진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답은 '과거'에 있을지 모르지만, 독자들이 원하는 답은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3권을 써야만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